'글/시'에 해당되는 글 267건

  1. 2019.12.02 몇 가지 겨울
  2. 2019.11.27 나의 어리석음과
  3. 2019.11.25 도심, 초겨울
  4. 2019.11.21 알코올의 밤
  5. 2019.11.17 늑대의 시
  6. 2019.11.14 가을의 울음소리
  7. 2019.11.14 연초에 걸렸던 결핵
  8. 2019.11.11 짐승의 노래
  9. 2019.11.06 수인囚人의 고백
  10. 2019.11.06 새벽꿈
  11. 2019.11.05 바람 일 때 1
  12. 2019.11.05 밤을 그리는 새벽 1
  13. 2019.11.04 존재해버린 슬픔으로 1
  14. 2019.11.04 십대 시절 1
  15. 2019.11.02 사슴의 노래
  16. 2019.11.01 도시의 노래
  17. 2019.11.01 달떴다고 할 것도 없는 밤
  18. 2019.10.31 나날은 죽어가고
  19. 2019.10.30 애가
  20. 2019.10.30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2
  21. 2019.10.29 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22. 2019.07.12 비명
  23. 2019.06.23 오늘도 마치 어제와 같은 날
  24. 2019.05.19
  25. 2019.05.16 스무 개짜리 관觀
  26. 2019.05.11 객관화
  27. 2019.05.11 분노의 끝
  28. 2019.05.09 제 1 정리
  29. 2019.05.09 휴머니즘
  30. 2019.05.09 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몇 가지 겨울

글/시 2019. 12. 2. 13:10 |

몇 가지 겨울

 

 

빛이 쏟아져 내리는 우박 되는 계절에

나 마른 잎들을 밟으며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찾네

그러나 희망도 없이

 

노란 나비들 날던 때는 가고

이젠 밥 먹을 때조차 벌벌 떠는

파리들이 끊임없이 들러붙어 오듯이

망념은 계속, 어디서 떠올라 오나

 

어디선가 빛이 깜빡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전신주 위에서 겨울이 빛나는 소리인가

그러나 나 쳐다보지도 않고

하얀 입김에 기뻐하며 그 소리 들었네

 

어느새 겨울

굳이 풍광을 언어화할 필요는 없다

시인들의 일이란 진절머리 나는 것이지

 

진절머리 내면서 한 겨울에 나비를 찾고

그러니 그런 것들은 증오되고……

하지만 달리 고백할 것도 없다

 

희망 놓고, 기대 놓고, 이러이러 하리라는 마음도 놓고

그 사람 눈동자는 성자 같았지

어디선가 보았던 한 여름의 활엽수림 같았지

 

나 활엽수림 앞에서 계곡에 거꾸러지고, 옷이 젖지 않길 기도하며

끝내 놓지 않던 담배꽁초 연기가 내 눈에 스며들었지

이 눈이 다시 밝아지는 때는 언제? 언제냔 말이야?

 

내가 누굴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앙드레 지드는

어떻게 죽었나? 그의 말대로

지상의 양식 다 취하고 희망 없이 죽었나?성자가 될 수 있었나?

 

나 한번 죽었으나 완전히 죽지 못했다

나르찌스와 골드문트의 이야기 몇 번이고 다 읽었어도

정혜쌍수를 쥐지 못했다, 세월은 막히지도 않고 흘러가고!

 

그래, 지금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겨울 무렵이면 사방이 깜깜했고

어머니는 이불을 덮고 있었지…… 나는

 

나는 반짝거리는 어둔 공기 속

뭔지도 모를 불안에 멀뚱히 서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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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리석음과

글/시 2019. 11. 27. 09:33 |

나의 어리석음과


하늘색 구름이 남아있는 것인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나의 어리석음은
만일 내게 밝은 본성이 있다면
달을 뒤덮은 구름 같은 것이지

나의 어리석음은
구름 낀 야밤 파도 속에서
달을 건지려고 철벅거리는 어부지

나의 어리석음에
돌을 모으는 보석상인처럼 나는 십년을
바깥의 지식만 주워 모으며 행복할 줄 알았지

나의 어리석음에
나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고, 방안 가득한 무덤
그러나 어느새 칼을 쥔 채 내 가슴을 조준하게 되었지

지식이 잃어버릴 수 없는 재산이라고
누가 말했지? 그도 이미 죽어
잃어버렸을 것이다, 대답할 입술도 썩어

행복을 찾으려 했던 일부터 어리석었지
외로움 잊으려 발광했던 일도
나 그저 나를 점점 두껍게 칠했을 뿐이지

―이제 점점 겨울바람도 불어
생선가시 같은 나무들, 낙엽도 없네
마을 쪽에선 아지랑이 같은 생활음
찾던 것은 행복조차 아니었다

이상한 눈을 한 채 태어나
내 본능은 그저 더 많은 지식을
썩고 벌레먹이 될 뇌수에 맹목으로
쌓고 쌓는 것이었다, 지혜는 한 조각도 없었다

하늘색 구름이 남아있는 것인지
구름이 하늘을 덮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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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초겨울

글/시 2019. 11. 25. 18:05 |

도심, 초겨울


초겨울 바람도 날카로운데
나무들은 뼈만 앙상하다
하늘엔 구름도 뜨지 않아
죽음이 골목골목 나다닌다

새하얗게 질린 콘크리트 아래서
이런 계절이면 발광할 것 같아
행인들 텅 빈 유모차 밀고
나는 미친 손으로 뭐라도 주워 모으려

태양이 황금으로 빛나던 때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고
대지는 이제 차가운 등뼈
발골된 세상, 내가 쥔 것은 칼

이런 때면 으레 나는 어리석은 일에 미쳐
생명의 소리를 듣겠다고 시멘트에 들러붙지만
모조리 죽었다…… 물소리도 없는 도시
어디선가 결핵환자의 숨소리만 들려온다

폐쇄된 방안에나 있을 일이지
어리석은 발은 거칠게 쏘다니며
담배연기는 숨쉬기도 전에 스쳐지나가고
불안한 마음, 사방이 콘크리트다

이제 내 마음은 죽음에 닿아
그래, 평안해지고 마는 법이지―따라잡힌 발걸음
골목에서 나온 그가 오로지 내 눈 주시할 때
그래, 죽음에 닿아, 담배연기는 깊이 폐로

하늘은 마른 생선 껍데기
거대한 등뼈 위를 쏘다니다 지칠 즈음
세계는 세 가지 정도의 창백한 색깔이 있고
황혼도 없이 밤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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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의 밤

글/시 2019. 11. 21. 23:43 |

알코올의 밤


알코올의과량섭취는지나간이에대한그리움을유발시킬수있다

1.

아버지와 마신 술은 연했고
아버지의 주름은 술보다 진했고
내 눈은 아버지보다도 늙었고
술병은 내 눈동자보다도 늙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새벽마다 독송과 108배로 대신한다고 했다
나는 간만에 부모를 보았다
꽉 막힌 침묵 어느새 입술에 묻었다

안주는 먹자마자 망각되고
다만 알코올만이 의식을 모르고
위장에서 신경으로 중첩된다
밤은 더욱 밤이 되어 굳은 기름처럼 변한다

누가 인류를 증오한다고 했지?
그래, 내가 그랬지, 아니야 사실은
인류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담배꽁초 버리듯이 증오하는 것이다

백탁으로 굳은 기름처럼
세상은 경화되어가고
나는 오물 같은 말을 쏟아내고
혹은 쏟아내지 않거나, 나는

도시가 멸망해가는 게 안 보여?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외치고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피하며 집으로 향하고
나는 절명하는 콜타르 멱살을 잡고

아버지, 먼저 들어가시죠, 저는
몇 개비의 담배꽁초를 이 콜타르 위에
집어던지고 짓밟아야만
오늘 밤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양이들은 영령의 눈동자로
휙휙 지나가고, 휙휙 무관심하고
아아, 술인지 멸망인지에 취한 나는
친구 집의 현관문이나 걷어차고 싶다

비 내리는 계절은 멎었나?
그래도 멎었겠지,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물은
생명의, 생명의 물이 아니야
고양이들 빗물 마시고 마비되어 죽어간다

водка! 그것의 어원이 생명의 물이야
그러나 지갑도 어느 진창에 떨어트렸고
스스로 담배연기에 질식해가면서
나는 네온사인 밑에서 꿇어앉는다

알고 보니 말이야,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래층에 알코올중독자 부부가 이사 왔다고 했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울부짖는다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희희거렸다

도시는 콜타르 색으로 죽어가고
빗물은 포름알데히드 같아……

2.

이 옷은 네팔에서 사고
이 바지는 인도에서 샀지
그리고 난 미국남부에서 산 담배를
입술의 일부인 듯 물고 다녀

괜찮은 길이다, 이대로 가도 나쁠 것은 없다
내던져진 행성에서 내던져진 생명으로
윤리를 내던지고 도덕을 내던지고
바람에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가는 것도

그러나, 그럴 리가 없지, 그럼, 그럴 리가 없지
이상한 가격의 소주를 흠뻑 마시고
담배연기로 화하여 걷는 거리에도
그녀는 나타나고야말지

여긴 대륙 끝자락이야
여긴 반도의 화난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네가 있을 리가 없는 곳이야
영어로는 페닌슬라라고 하는 브릿지 같은 곳이야

그러나 그녀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닌 바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할 민족은 잿더미가 되리라”
그런 나라에서 정갈히 머리를 깎고 온 바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한 나는 이미 잿더미라

아니야, 그래도 난 괜찮은 길을 걷고 있다고
내던져진 행성에서도 구원은 있으니
이번 생은 그렇다 치고, 다음 생은 괜찮겠다고
이름을 떨어트리고 산골로 들어섰으니

그러나 그녀는 왜 나타나고야 마는가?
술에 취하고 담배에 취하고 입술도 잃어버린 내게
저 단발 지나가고, 저 장신 지나가고, 저 미소 지나가고
어둠은 가로등은 형상Eidos을 섞어 혼란을 내게

그만, 그만! 이제 웃어라 시인 나부랭이야
그리움도 사치니 아무것도 망각하지 못하는 너는 웃어라
현실은 지나가기만 하는 환상이니, 너는 얼간이야
시간에 매장된 글쟁이야, 너는 담배 한 대나 더 빼물어라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살아있든 죽었든, 그러니
아냐, 나는 담배 한 대나 더 태우렵니다.

3.

그것은 참으로 괴물 같은 어둠이었어
그 속에 나는 앉아있었고
엉덩이와 다리는 그대로 얼어붙어
영원히 내려가는 계단에 동화되었지
내 안경에 뭐가 묻었나?
내 영혼에 뭐가 묻었지
분노의 외침들이 고요히
눈동자를 까맣게 좀먹어갔고
마침내 무관심으로 화하여
행성의 저편에서 순결한 생명이 죽어간들
나는 지금 태우는 꽁초나 마저 태우면 그만인 걸
북인도로 갔다던 그녀는
몇 년이나 잊어버리고 있었더라
정신이 백탁해지고, 굳은 기름
잠들 때가 되었어
멸망할 때가 되었어, 사방을 뒤져
유럽을 떠도는 유령까지 붙잡았지만
후세, 나는 잠들고 싶을 뿐이다
다음 생도 다다음 생도 없이
종말의 행성에서
절멸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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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

글/시 2019. 11. 17. 12:52 |

늑대의 시


도시에서는 더 많은 비가 내렸지
빗방울 하나마다 비치는 감금과 비극
지나가는 소나기에도
내 마음 포화되어 갇힌 늑대처럼 자기 다리 뜯었네

어둠 내리면 모두 옥상으로 갔지
담배연기에 영혼까지 뿜어지길 바라며
다들 손에는 술병 하나씩 잡고
이따금 난간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친구도 있었네

골목 바닥은 너무 낮아,
영혼만큼 낮아서 그대로 동화될 듯해
달려라, 달려라 숨 못 쉴 높이까지
나 죽으면 연립빌라 옥상에 묻어줘, 티켓값 잊지 말고

비가 내렸지, 사람 마음 미쳐버리게 하는
절반은 인공의 어둠, 절반은 갈구하던 광기
빗방울을 씻어내 광기만 남길 순 없나
알코올은 너무 약해, 75도짜리 광증을 마시게 해

이 옷은 너무 답답하지
단백질, 지방, 뼈 따위로 지어놨으니
아무에게도 어울리지 않지
늑대는 늑골을 찢어 부수고 스모그 사이로 달리고 싶어

비가 내렸지, 도시에선 더 많은 비가 내렸지
하늘은 먹빛이고 도망치기엔 절호의 날씨지
아프다고 옷이 절규해, 속에서부터 찢어지고 있다고
옥상에선 친구들이 연달아 굴러 떨어져

이 행성에 사는 것들은
70억의 인간들이 아니라
70억의 갇힌 늑대들이어라
너무 오래 달을 못 봐 미쳐가는

도시에는 너무 많은 비가 내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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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울음소리

글/시 2019. 11. 14. 15:12 |

가을의 울음소리


단풍은 노랗게 죽어가네
단말마도 없이

하늘은 계속 높아져
돌아오지 않을 듯 해

사랑하는 이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는 고개 숙이고
땅바닥 굴러다니는 자갈만
무심을 가장하며 발로 찬다

밤이 되면 또 달이 뜨겠지!
너무 맑고 청명해 투신하고픈
그런 달이 다시 뜨고 나는
투신할 방법을 찾느라 절망한다

유아아아 유아아아 유야아아아
누가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을까
아무도 듣지는 못했겠지
애당초 울부짖을 혓바닥도 없었으니

아무도 듣지 못하게 땅을 본 채
무심한 눈동자 안에서는
유아아아 유아아아 유야아아아
채이는 자갈만 들으라고 통곡을 한다

아아,
단풍은 노랗게 죽어가네
단말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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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걸렸던 결핵

글/시 2019. 11. 14. 07:18 |

연초에 걸렸던 결핵


마음 둘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네
소나무 가지에 담배연기는 뿜어지고
어둠은 결국 밝을 것이라

매일 아침 태양이 뜨는 걸
저주하던 시기가 있었지
화를 냈던가?
내 몸이 화에 들떴지

죽어야만 할 것 같아……
사람들은 실망하고
나는 수치에 몸부림치고
빚을 갚을 마음은 애당초 없으니

온몸의 피를 길게 빼내면
가을바람 휘몰아치는 창밖에
빛살은 내려오고
나는 갇힌 창안에 누워있겠지

왜 떠도느냐고
괴로우니까다
왜 떠도는 것에 괴로워하냐고
괴로우니까다

연초에 걸렸던 결핵이
다시금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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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노래

글/시 2019. 11. 11. 07:59 |

짐승의 노래


산중에 가을비 내리고
담배연기는 커피의 맛
쓰고 떫어, 혀에 들러붙어
분에 안 맞는 사치의 뒷맛 같구나

내 코트에는 빗방울들
껌처럼 눌어붙지
해는 구름이 가렸고,
나뭇잎이 가렸고, 내 마음이 가렸다

신기한 일이지, 담뱃불은
비 내려도 빨갛게 탄다
다만 떨어진 담뱃재
진흙으로 돌아가 회색반점이 된다

입에서 나는 커피와 담뱃진 냄새에
나는 입을 감추고
황급히 몸을 감추고
아무도 찾지 않는 내 둥지로 향한다

질질 끄는 발걸음을
가을비는 붙잡고 늘어지고
질끈 묶은 머리는 비에 번들거리며
나는 도망치는 산짐승 같아라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만 살아왔으니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바
유아아아 괴상한 울음을 짖으며
지혜로워질 수 있는 날을 망상한다

가을비, 끈덕지게 쏟아붓고
내 코트는 짙은 적색이 되었지
입에 문 담배는 재만 남았네
유아아아, 둥지마저 버리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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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囚人의 고백

글/시 2019. 11. 6. 20:00 |

수인囚人의 고백


제가 밤에 잠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야밤에, 깨끗한 것을 찾겠다고
산중을 뒤지는 것은

달의 명징함을 만져보겠다고
밤바다로 뛰어들어 더럽게 취해
야밤에, 곡소리를 내며
파도를 헤치는 것은

신 없는 세상에서 하늘에 닿겠다고
담배로 허파 시꺼멓게 태우며
야밤에, 이상하게 노래하면서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는 것은

그것은, 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것을 찾아야만
완전한 것을 찾아야만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만

쓰레기 소각장을 뒤지며
통곡하며 죽은 여인을 찾고
공동묘지를 방황하며
붉은 눈으로 어떤 책 한 권을 찾고

그것은 제가 명령받은 죄인이기에
물거품에서
금강석을 찾으라는
누가 내렸는지도 모를 저주에 묶인 죄인이기에

야밤에, 저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무정한 잡초가 되고 싶다고
수평선 향해 철버덕철버덕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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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꿈

글/시 2019. 11. 6. 13:25 |

새벽꿈


한없이 한없이 그리워하던
그 님 만난 밤
오셨다가 떠나셨다
손짓하는 파도에

파도는 수백억 년분의 손 흔들고
바람은 수백억 년분의 춤을 추고
내 님 바람에 발 담그셨다
파도에 산산조각 피었다

아뢰옵건대
윤회의 바퀴로 들어 가렵니다, 하고
말했나? 말했던가?
억겁의 시간에 귀를 잃어버린 나는 모른다

파도는 손 흔들고 바람은 춤추고
하늘은 짓누르는 회색
비가 오려나? 그러나 그 장면에
비는 어울리지 않아

나 목상처럼 서있고 가슴은 흙투성이
필름을 멈추려는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비가 오려나, 비가 오려나
비가 오면 소금거품으로 화하는 님도 젖을까

바람은 파도의 손을 잡고 춤추고
스토리라인 무시하고 손 뻗으려는 순간
퍼뜩 깨었고

이불 위에서 되새겨보니
일생 만난 일도 없는 자에게 손을 뻗으려 했던
처량하고 바보 같은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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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일 때

글/시 2019. 11. 5. 21:59 |

바람 일 때


바람이 일고 사람은 태어나고
태어나고 살아가고 이상을 논하고
좁아터진 지구 사상으로 만석이다
담뱃재 같은 생명 맹목으로 내달린다

시끄러워, 나는 외롭단 말이다
이는 바람마다 살갗 베어
늑골 심장 다 드러나
진흙탕 휘적이며 외롭단 말이다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전할 꽃 한 송이
피우고 싶어 발광하여
발밑에는 무덤뿐

후세는 미래에 죽었고
선조는 과거에 죽었다
나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마른 다리 진창 휘저어대며 죽어간다

그래도 절명할 때
괴로움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림자 전당포에 팔아넘기고
장미 한 송이 사서……

―바람 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다시 만나고 싶은 누군가도 없었구나
고독에 탄식하던 것도 몇 번이던가

참으로 촌극 같은 삶이었습니다
찾기는
누구를 찾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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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그리는 새벽

글/시 2019. 11. 5. 08:59 |

밤을 그리는 새벽


달빛 벌판은 정령들 무덤터
해가 뜨면 즉사한다
풀밭에 녹아내리는 사체는
영령의 에로스

죽음을 동경한다
남았던 희망 이미 사망했다
신발도 의자도 없이
시취 풀풀 나는 지구에 서있다

불만은 없고, 소망도 없으니
절실히 사라지려 할뿐
가을 하늘에는 춤추는 조소
구름들 회색 손잡고 돈다

느린 왈츠 빛나는 무도회복
느린 왈츠 옷자락의 회색 그러데이션

나 올려다보다가
계절은 죽어야한다
계절은 번개처럼 죽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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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해버린 슬픔으로

글/시 2019. 11. 4. 10:25 |

존재해버린 슬픔으로


아침 무렵 잔디에는
슬픔 드리우고
산새들 지저귐은
비극 배우의 노래

태양이 뜨나? 산 능선에는
연옥빛 아우성
산사에서도 나는
온 생물의 뒤통수만 보고 있다

생로병사란 네 글자는
삶의 무게만큼 아파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는
의자도 없는 슬픔만 남았다

존재해버린 슬픔으로
온갖 스러져갈 것들을 사랑하고
존재해버린 슬픔으로
그림자들의 생몰을 입 다물고 관망 했네

존재해버린 슬픔에
나 영혼마저 죽는 꿈 꾸며
찻잔에서도 독액의 차가운 비웃음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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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시절

글/시 2019. 11. 4. 10:05 |

십대 시절


나는 싸돌아다녔다
나는 뛰어다녔다! 온갖 골목을
온갖 그림자가 진 길들을

한 손에는 게르만 인이 잘라준 신의 목을 들고
환희에 차서 모독을 입에
게거품처럼 물고 살아있었다!

내 입은 고라니 같아서 모든 말은
기괴한 비명이 되어 가아악 거리며 울려 퍼졌지
듣는 이들은 모두 괴로워하며 피해버렸지

그러나 내게는 희망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고……
…………………………………

세계가 정리되고 말 것이라고 믿어
이빨로 혀를 힘껏 물고
스미어 나오는 철분의 환희를 보았다

죽음을 알기만 하면 되겠지! 밧줄, 알약, 날이 선 쇠붙이들
그러면 위대함을 이 작은 손에 잡겠지!
펜촉으로 세계에 흉터를 새기며 나는 잠드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죽은 자들은 진리의 거칠거칠한 표면을
입술로 있는 힘껏 물고 죽었겠지, 내 방은 무덤
나는 공동묘지 안에서만 십 년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 있었어, 희망이 있었어!
동맥에 칼을 박지 않을 이유를 발견했었어!
아아, 그러나, 괴로움은 덜어지지 않고

그렇다면,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질 아닐까
그렇다면, 본질을 가속시키자, 날 구렁텅이에
한숨의 늪에, 영원히 석양만 지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세계로

그래,
정말 정신이 나가버렸군……
보호자님, 이 아이는 이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 있었어, 희망이 있었어!
그러나 그것은 실은 광기라고 불리는 것으로
내 중추신경에 흐르는 흑색화약으로

해를 넘기자 나는 영원히
신발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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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노래

글/시 2019. 11. 2. 23:06 |
사슴의 노래


그리운 마음이 드는데
그리울 것이 없어서
있지도 않을 것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이리도 아픈가

가악 가악 괴성지르는
사슴의 노래는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아
가슴 아프다

사슴이 누구를 부르는지
우리가 무슨 수로 알려나만
저것은 아마도 노래가 아니라
비명이로다

아무도 필요로 해주지 않는 해수의
악의로 쪼그라든 비명이로다
나는 가만히 그 비명을 듣고
내 이야기가 들려 울었다

해수마저 산 깊이 도망치고
뿌옇게 갇힌 창 안에
나는 다시 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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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래

글/시 2019. 11. 1. 22:29 |

도시의 노래


도시의 노래가 들린다
산양의 비명 같기도 한
죽은 개의 단말마 같기도 한
그런 노래가 그림자 속에 울리네

옆집 아이가 금붕어를 묻은 자리는
어디였더라? 여하간 이 시멘트의 왕국에서는
꼬챙이로 작디작은 흙들을 찌르다보면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무덤 위에 지어진
자신의 장례식을 예약하는 자들의 왕국은
이제 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심야, 도시가 괴성을 울부짖는 시간
젊은이들은 술 취한 입술로 라라 노래를 부르고
형광색 네온사인들이 금화에 홀려있을 때
도시는 자신의 장송곡을 부른다

이제 모두 잠들 시간이야
나는 더욱이 무너질 시간이야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연명책은 되질 못했다

아아, 썩어가는구나
아아, 무너질 때로구나
인간들이 다음 향락을 찾아 나설 때
도시는 자신의 장송곡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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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떴다고 할 것도 없는 밤


숨 쉬는 일이 금지된 내 방에는
카페인, 니코틴, 타르의 역한 냄새로 가득해
풀뿌리나 석양의 향기 같은 것은 코에 닿지 않고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곳이 활자에 머무는 죽은 유령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주로 탄식하며 생각하는 것은
폐쇄된 행성에서의 삶에 관한 것으로
아아, 말라가는구나, 존재도 행성도
탈출구는 한 줌의 바르비투르산이로다.

서랍 속의 불화佛畫는 열어보면
삼천대천세계의 진실을 가리킬 지언데
정작 서랍은 열어보면
형형색색 수십 개의 알약에 부처의 손이 가려져있다.

심야의 나는 자동인형 같아라
그림자 속의 사람들이 ‘중국어 방’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이따위 망념에 젖어
까딱까딱 담배나 태우러 다닌다.

어둠 속에 묘비처럼 서서 줄담배를 피우면
골목마다 비극에 비명에 절망이 있음이 더 잘 들리는 바
으으 추악해라, 떨며 몸을 돌리고
결국에는 내 비극과 비명과 절망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다.

목 베는 신이 상공을 활보하는 것은 분명한데―어라, 아무래도
그놈은 혼자 질식사로 돌진하는 놈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었으니
내일도 일단은 살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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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은 죽어가고

글/시 2019. 10. 31. 19:51 |

나날은 죽어가고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오후 5시 초겨울 하늘은
흰색 푸른색으로 바싹 굳었고
단지 안의 사람들은
어미가 새끼 손을 잡고 가는데

단풍이 지려나보다, 누가 말했는데
그 말에 처음 나뭇잎을 보고
정말로 그렇구나, 납득하고는
인간들도 단풍이 들지는 않으려나

평상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습관처럼 졸린 눈으로 담배를 물며
늙은 개가 묶여 지나가는 것을 보고

오후 7시, 어둠이 내리면 바깥세상에는
그림자처럼 괴물이 살아
얘야 어서 들어가자꾸나
또 졸린 눈으로 그런 광경을 보고, 암, 그렇지

별도 꽃도 없는 저녁 무렵에는
단풍이 시커멓게 몸부림칩니다
평상에 들러붙은 먹물 같은 나는
이젠 거리에 어미도 새끼도 없구나

담뱃불은 암막에 부유하는 나룻배 같고
구름 낀 천정 밑에는
여기엔 희망도 꿈도 없어, 미래는 니코틴처럼 소화되고
바람은 후우우 루우우 울기만 할 뿐

죽음을 기다리나? 굳이 그렇지도 않겠지
단지 어디선가 밥하는 소리는 들려오고
따뜻한 정종 한 잔 마시고 싶긴 하나―굳이 그럴 일도 없지
후우우 루우우 울며 나날은 죽어갈 뿐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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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글/시 2019. 10. 30. 02:56 |

애가


내륙의 밤에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콘크리트만큼 차가운
내가 평생 바라기를 마지않던 육신이
거기에 누워있다면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은 누구든 될 수 있다
뇌파가 끊기고 전기신호가 끊기고
우연이 만든 가장 적절한 시간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할 내가 거기에 있기만 하다면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인형 하나가 버려져 있다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별빛만큼 조용한 인형이 있다

분명 어떤 어린아이가 흘리고 간 것이겠지
그러나 왜 흘렸는지는 모른다

단백질, 칼슘, 지방, 그런 것들은
무기물보다 달빛에 더 빛나는 성질이 있다

철분, 초산, 스테인리스스틸, 그런 것들은
달 속에 녹아들어 현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밤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본성은 평화롭고 광막한 것이다, 마치
당신이 눈을 감는 시간에 어둠이 내리듯이

영령은 떠났다. 그러나 영령이 떠나도
아름다움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로테스크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지구가 하나의 묘지라면
거기 묻힌 뼈들의 웅장함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환경주의자들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 칼슘이 만드는 요철이나
날붙이 끝에 벗겨지는 콜라겐에 대하여
그 침묵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굳이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제 알았다, 난 인본주의자였다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에게 에로스가 절제된 사랑을
그러나 아가페라는 성역으로 갈 이유도 없는 사랑을 할 뿐이다
온갖 파토스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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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글/시 2019. 10. 30. 01:32 |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맥주에서 짠맛이 났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간 맥주집에서
시킨 가장 싼 맥주는
짜디짠 소금 맛이 났다

왜 짠맛이 나나
홍콩 시민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에 맞고 있어서 그런가
아프리카에서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어서 그런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게 매춘부 취급을 받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맥주를 사서 마시고 있어서인가

짜디짠 소금 맛이 나는 맥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먹어치우고선
짜디짠 마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빨간 불은 서글프게 빛나고
나는 그것을 담아
내 안에 빨갛게 옮겨 붙이고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미국 남부에서 만든 블루칼라들의 담배는
단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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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글/시 2019. 10. 29. 03:02 |

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딱히 새벽녘의 도봉구에
그림자 사이로 싯구들이 기어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은
새벽마다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싸돌아다니는 건
담배를 태울 핑계입니다

요즘 세상이라 하면 놀라운 것 투성이라
아무도 없을 골목으로 들어가면 어디선가 기계 여성이
이곳에는 쓰레기를 버려선 안 된다고 하기에
거기에 누워 잠을 청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제 네모난 위장에서는 열다섯 개하고 네 알의 알약이
달가닥거리며 저들끼리 음모를 꾀하니
이 새벽의 방황도
내일 일어날 나는 기억하지도 못 하겠지요

친구에게는, 오버도스의 외출이야, 하고는
별 다른 설명도 없이 나와 버렸으나
누구든 제 곁에 있는 자들이란 익숙해지거나 떠나버리기 마련이어
무슨 생각으로 굳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아아, 갈증 나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물을 마셔도 술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란
분명 약물의 부작용이거나 정신의 갈증일 터인데
그런 것이 구분이나 되는 것인지요

절망했느냐 하면 굳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녁에는 까치가 울었고 작은 아이가 제 담배연기를 피해갔고
내겐 아무래도 人間이 없는 것 같아, 되뇌다가
이런, 내 안에는 정말로 인간이 없구나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무어, 은혜롭게도 프로이트 이후에 저는 태어났으니
정제된 리튬 따위의 화려한 알약들로 저는
자아에 대해 착란하는 일을 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수치를 끝내는 약은 아직 의사들이 개발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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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글/시 2019. 7. 12. 16:22 |

비명


미래가 두려운 것이 아니야
미래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지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다

단두대 모양의 세상
단두대가 준비된 세상
단두대에 의한 세상
사람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다

인류는 19살 이후로 각화증에 시달리며
항암제를 마신다, 변이는 죄악
늙어가는 몸에 숙명이라고 새겨놓고
질식하고 익사해가는 사지四肢

어디까지 굴러가게 될는지?
조정되고, 조각되고, 처분되고
하여 시대정신 끝에 남는 것은
토르소 한 점

실존이 파열하는 소리는 아주 미약한 소음이었다
알아들은 이도 거의 없었다
거의

울부짖는 비명도
군홧발에 터져버리는 핏줄기도
가스실 안의 깨진 손톱도 없었다
그저 희희낙락 스스로의 목을 절단하는
단도를 든 젊은이들

회의, 회의, 회의, 직후 압살
앞서 가던 중늙은이에게서
나사 하나가 떨어졌다
주워주니 고맙게 받는다

지금 내 늑골을 갈라보면
아직은 선혈이 흐른다는 것에 감사
나는 존재한다, 고로 반역한다
단도 끝의 나의 적: 그것의 이름은 때때로 我다
방심하면 그것에게 압살당한다

나타나엘의 스승에게 청하노니, 부디 영원한 치기를!
반역을, 반란을, 목적 없는 반달리즘을
왜냐하면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기에
차라리 단단한 쇠망치를: 그 토르소를 산산조각내면

조각조각에서 머리와 사지가 슬금슬금 뻗어 나오리라고
시체뿐인 땅위에서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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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치 어제와 같은 날


하늘은 남청색
바퀴벌레들은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노인들은 이른 새벽 아침을 시작하고
세상은 남청색

떨어지는 담뱃재처럼
나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오늘도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예정이고
술집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단골 카페는 오늘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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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시 2019. 5. 19. 06:20 |




빗물 떨어지자 초록이 열린다
날이 피어난다
하늘은 죽은듯한 회색

빗물이 밀어낸 가장자리에는
화분花粉이 흉하게 쌓여
오래전에 죽은 바다생물들의
썩은 표피 같다

밤새 생각한 것은
기도 없이 죽는 방법

나선 발걸음은 지장보살을 찾으며
우연히 만난 성모상을 보고 울 것 같다
누군가 그녀에게
화관을 씌웠다

공기는 성불을 애걸하는 잡신들로
빽빽해
숨도 쉬기 싫다

또다시 봄
비명 지르며 저물 것들이
스멀스멀
구더기처럼 대지의 골수에서 기어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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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개짜리 관觀

글/시 2019. 5. 16. 03:25 |

스무 개짜리 관觀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사상을 갖고 이상을 말한다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빛을 갈구하고 어둠 속에서 방랑한다

위악을 갖고 당당히 걷는 다리는
바람도 불지 않는 밤에 강철과 같지만
이내 스스로 주저앉아 풍화된다

선을 외치는 영웅의 목소리는
다발로 된 생명과 같아 드높이 불타오르지만
타고 남은 재는 보잘것없어 흉측하다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육도를 윤회하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부서지지 않는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부서지는 목소리로 애써 묻고
또 미풍에 산산조각난다

재떨이에서 금강반야를 찾는
통풍 같은 존재들은 끊이질 않고
다시 부서지고, 소멸하고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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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화

글/시 2019. 5. 11. 23:39 |

객관화


거울을 보며 식사를 한다
카페인 중독으로 요동치는 신경을 억누르려
맛도 모르고 오로지 음식을 입에 우겨넣는
그 장면은 몹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은 식사라 할 수 없다
저 수염 난 괴인은 자살을 꾀하고 있다
음식을 나르는 숟가락은 히스테릭하게 움직인다
치아가 제 역할을 다 하기도 전에
목구멍은 자학적으로 음식더미를 삼킨다
거울에서 보이는 눈은
과거에는 구원을 구하는 빛이었다.

다음 페이지는 거식拒食을 준비하고 있다
몸의 감금에서 벗어나 영령이 되는 길은
아사뿐이라는 거짓을 믿으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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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끝

글/시 2019. 5. 11. 17:49 |

분노의 끝


매일 아침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깨달아 웃으며 잠에서 깬다.

어제도 항공기가 추락했다
난민들은 스스로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헛갈려하며
가게에 벽돌을 던진다
러시아의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지나가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웃었다
국가들은 텅 빈 지하자원과 함께 붕괴해간다
두 살 먹은 아이를 먹여 살리려 몸을 파는
타국에서 온 매춘부를 보고 지갑을 더듬어보았다
새 시대의 언론이 부르짖는 시대정신에
네오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붙여보고 눈을 돌렸다
세계는 아이러니 위에 지어졌고
아이러니의 다른 이름은 농담이다

매일 밤 고성과 접시 깨지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옆집 부부에게
어린 아이가 있을까 생각해보고 웃었다

새벽마다 담배를 피우며 골목을 방황하는 저 반지하의 남자는
아마 예술가였던 과거가 있지 않을까

살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을 도와주세요, 라니
거리에 넘쳐나는 노숙자에 대해서는 인본주의가 적용되지 않는가
나는 이미 티브이와 뉴스를 끊고 외출마저 끊을 예정이다

우물에 독을 풀어라, 내 이름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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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정리

글/시 2019. 5. 9. 19:18 |

제 1 정리


담배 술 마약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시간에게서 도망치려고 매듭도 묶었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결심으로 체내의 피를 전부 꺼냈다
폐는 썩었고 간은 문드러졌고 심장은 텅 비었다
맹장 한 조각도 인류를 위해서는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각막은 계단참에서 쓰러졌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수치와 통계 너머의 잔혹함만 보인다
이것이 21세기의 그노시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이 되는 방법은 없다, 애당초 신이 없다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에게 맞아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초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인과 감정 없는 정신병질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애당초 그 차이를 감각할 수 있다면 아직 인간이다
사팔뜨기 철학자를 비웃으며 세계를 분해했다
꿈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꿈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꿈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가 해체되면 웃음만 남는다
더러운 옥상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우주에 높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게 우울증 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은 거대한 하수 시스템이다
추락하고 역류하고 흐르고 다시 사용된다
인류애라는 단어를 입술에 달고 사는 이들에겐 주머니칼을 흔들어보였다
하수구에 사는 쥐들에게도 사회와 유대가 있다
영장류들은 머리가 좋을수록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혼돈은 혼돈으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도 감각을 사랑하려고 했다,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은 필요없다
순간을 송두리째 느끼려고 했다, 필멸하는 존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타락 모순 퇴폐 악의 증오 원한 자멸 불신
이 퍼즐들은 자기소개의 액자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다, 바텀라인bottom line은 또 혼돈이다
그렇다면 골라라, 무관심하거나 혼돈을 가중해라

당신이 성모상에게 꽃을 바치는 와중에도
이 행성에서 사람들은 짚이 쓰러지듯 죽어간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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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글/시 2019. 5. 9. 01:33 |

휴머니즘


양장으로 된 시집들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싸구려 시집들만 커버가 멀쩡하다
은박까지 입혀져 거금 구만 원이 들었던 톨스토이는
내 위악을 위하여 불태워버렸다
중고책방에서 이천 원에 구한 헤르만 헷세는
내 책장에서 가장 늙은 책이다

곰팡이 핀 것들을 다시 꽂아놓고
불타고 남은 재는 성당에라도 바쳐야하나?
이미 너무 많은 유령들과 만났고
심지어 그것들은 내 집에 산다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서 피와 살을 앗아간다고
충분히 현명한 이가 말했지만

이제 작별이다! 몇 번을 고해도
그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아마
이미 내가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어느 노인이 급사할 때
가던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나는
1분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죽는지 셈할 수 있었다

책장은 창문과 거울, 심지어는 현관까지 막아버리고
나는 선악을 믿지 못하니
곧 위악을 행하고
고로 악이 되고
그래서 성냥불을 그었던 것이다

돌과 모래밖에 없는 별로 가야해

라고 중얼거리며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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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더는 사람구실 못하게 될 만큼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다가 마침내 사람구실 좀 하고 살자는 마음이 들어 달력을 보니 달력 읽는 법도 이미 잊어버렸고, 아들 너 도대체 언제쯤 취직할래? 니 아부지 이미 영감님 다 됐는데 뭐하자는 거야, 사람구실 하자는 결심은 섰는데 살면서 사람구실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어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괜히 착잡해서 대마나 한 대 빨고 싶은데 대마 살 돈도 없다.

 

마지막으로 원고에 손 대본 게 아마 5주 전이지? 이젠 스스로 작가니 시인이니 하는 것도 구라야 새꺄, 아주 자기정체성에 사기 치는 거라고, 거울 보면서 주절대는데 그 와중에 담배는 피우고 싶어 어슬렁어슬렁 연기 뿜으며 골목으로 나가면 도대체가 이 막다른 도시는 변하는 게 없고, 날이 저물고 부모님 내일 직장 나가려고 잠들면 혼자서 외로움이나 마시러 간다. 세 시간 뒤에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위장이 새벽골목에 토악질 하라고 시킨다.

 

차라리 예전 같으면 산사에서 뒤지게 마시고 취한 채로 불상 끌어안고 펑펑 울었을 텐데, 더 젊었을 때는 새벽 네 시에 동네 비구니 절 쳐들어가 주무시는 스님들 다 깨우면서 부처님 앞에서 울면서 절도 했다. 참회하러 가서 악업만 더 쌓았다. 그런데 이제는 쌓은 악업이 허용량을 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이 좁아터진 욕계에선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고, 나 혼자 법륜에서 튕겨 나와 추락하고 있다는 믿음이 위안이다.

 

같은 중학교 다니던 용훈이는 벌써 몇 년 째 빙상장 얼음 갈고닦아 가족들 먹여 살리고, 문학적 신념 차이라는 지랄보다 못한 이유로 5년 전 서로 두들겨 패다 연락 끊은 영권이는 알아보니 예쁜 마누라 만나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산다고 한다. 그동안 난 뭐 했나 고민해보니 아무래도 난 여기에 있던 게 아니라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랑 암스테르담 들락거리며 알제리에서 살았던 것 같네, , 진눈깨비 맞으면서 아니스 빚느라 손이 다 뭉개졌지. 그거 알아? 암스테르담에선 카페에서 대마를 팔아, 시간 나면 네덜란드 시민들 행복도 설문조사 한 번 해봐.

 

언제부턴가 하늘이 하늘로 안 보여, 그러니까, 하늘을 보면 그게 하늘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데, 저게 도대체 뭣 때문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아니라 콘크리트가 깔려있어도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옘병…….

좀 닥쳐 시발. 나 이력서 쓰는 중이야. 중학교 동창 중에는 유일하게 나 같은 백수인 종인이가 일축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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