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글/에세이 2023. 4. 3. 17:47 |

일요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약 5초 전까지 하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이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손에 커피잔을 쥐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봄답게 환했고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 2층에는 다른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내가 수십 초 이상 말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진 대화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던 나는 곧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만 열심히 뭔가―그게 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침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대화가 이어질 만한 소재를 찾아서 카페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런 환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얘기지.
 그렇게 나는 문장을 완성 시켰다. 친구는 더더욱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고 있던 말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하루에 물을 2L씩 마셔야 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결국 친구가 이렇게 묻자 나는 본래의 주제를 기억해냈다. 아, 하고 나는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하루에 물을 2L씩은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러한 건강법에 대해 주워들어서만 알고 있는 수준이었고, 매일 2L의 물을 마시는 행위가 어째서 몸 건강에 좋은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미안, 무슨 말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을 뱉었다. 친구는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술이 덜 깼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술을 마신 건 오늘 새벽 3시까지였고 지금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태를, 숙취 때문이라고 친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머릿속의 뇌수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위들이 서로 격벽을 쳐놓은 것 같은 현재의 기묘한 정신상태를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요새 겉옷 입기 애매하긴 해.
 그렇게 대화주제가 바뀌었다. 나는 친구가 굳이 따져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제에 올라 타준 점에 관해 은근히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맥과 당장 깨져버리기라도 할 듯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친구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언어라는 것이 퍽 귀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두 손 가득히 빛줄기를 잡고, 지상을 향해 무자비하게 던져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너는 오늘 뭐 할 거냐? 친구가 물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면 책 좀 읽고, 글 좀 쓰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뒷집 아주머니가 출판사에서 일하신다던데.
 어느 출판사?
 몰라, 모르겠는데,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볼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리고 또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어쩌면 햇빛 때문에 내가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햇빛에는 눈과 피부로 스며들어 뇌를 깨끗이 소독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불 말릴 때처럼…….
 이불 말릴 때처럼. 나는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되풀이해 말했다.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꺼내서 강한 햇볕 밑에 말려놓는 상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카페 2층에는 벌써 50분 넘게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릿세’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몇 가지 연상을 거쳐 사람이 어느 공간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이었다.
 책은 잘 돼가? 친구가 갑자기 물어왔다.
 모르겠는데, 나는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글쎄.
 넌 요새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 사냐.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낸 건데,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 정말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문호던가, 혹은 사기꾼이지,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사기꾼이 잘 벌지.
 네가 사기꾼이라면 누구에게 사기를 치는 건데?
 주로 나 자신에게지 뭐.
 우리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내가 올바른 단어들을 선정하여 의미를 전달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란 참 성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가자, 역까지 태워줄게. 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찻잔을 손에 쥐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자스민 차는 별로 맛이 없었다.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수분 섭취가 건강과 직결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물을……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코트와 잔을 챙겨 일어났다. 나는 입속말로 젠장, 이라고 중얼댔지만 사실 화가 나거나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이 ‘젠장’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딱 적확한 상황이었던 것뿐이다.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그때 친구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오늘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래’라고만 했다. 미세먼지가 나빴고 날씨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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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날에

글/에세이 2023. 3. 30. 17:10 |

어느 맑은 날에


 2주간 내리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며칠 약을 챙겨 먹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구역감과 위산 역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무언가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끙끙대며 이불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한동안 거실과 방을 오고 가며 이 괴기스러운 이질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용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쌓인 책 세 권이 별 의미도 없이 눈에 들어왔는데, 맨 밑으로부터 페터 한트케, 베르톨트 브레히트, 허먼 멜빌의 순서로 책이 쌓여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허먼 멜빌의 책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페터 한트케를 두었으며 맨 위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 작업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잘못된’ 무언가가 다소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헛헛한 듯이, 더러는 백일몽을 꾸는 듯이 나는 도저히 제 컨디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음!” 나는 괜스레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는데, 아주 기겁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색 피부밑에 튀어나온 관절과 뼈, 그리고 불거진 핏줄 따위가 전에 없던 강렬한 형상으로 내 눈에 박혀버린 것이다. 내 손이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나는 거의 30초가량 손을 앞뒤로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크게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내’ 손에 대해 놀라움을 느낀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오히려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나는 내 미국인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소위 ‘매직머쉬룸’이라는 것을 섭취한 적이 있는데, 환각이 사라지고 나자 몹시 이상한 부작용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작용이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그리고 치명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하고 있어서 도무지 눈을 뜨고서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집안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기엔 그다지 넓은 집도 아니지만, 여하튼 나는 방문과 화장실 문 따위를 전부 열어보며 세계로부터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핸드폰을 일주일 넘게 꺼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위장병을 앓느라 도무지 기력이 없어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오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지금 핸드폰 전원을 켜면 아마 부재중 전화가 열 몇 통은 쌓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핸드폰은 그냥 꺼두기로 했다. 나중에 활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냉장고 문을 5번 정도 열였다가 다시 닫았다. 여전히 식욕이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같은 동 303호에 사는 아저씨가 마침 볕을 쬐러 나온 것인지 인사를 해왔다. 그와 만나는 것은 약 2달 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 뒤, 한 대 피우겠느냐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니오, 이젠 끊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티셔츠의 목덜미를 슬쩍 내리면서 목에 난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젠 평생 끊어야겠죠.
 저런, 큰일이었겠네요.
 뜬금없지만 그제야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길에 행인들이 평소보다 많다 싶었다.
 햇빛이 좋네요. 내가 말했다.
 이젠 봄이죠.
 나는 어쩐지 없던 기력마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담배는 다 탔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동생이 침대 구석에 온몸을 쑤셔 넣은 듯한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오후 4시였다. 나는 동생이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 두고 안방 문을 닫았다.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곧 마감을 맞춰야 할 원고를 위장병 때문에 2주 내내 내팽개쳐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날아간 2주를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책 없이 게으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작업용 책상에 앉아 브레히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다시 덮어놓으며 “흠!” 하고 또 괜한 소리를 냈다. 삼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내게는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에는 날씨가 퍽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6월에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요새는 축의금으로 5만 원만 냈다가는 괜히 나중에 뒷담화 거리나 된다고, 그런 얘기를 TV뉴스에선가 친구로부터였던가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멍한 채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6월이 되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길 테지. 중얼거리면서 나는 이상하게 앉은 자세 때문에 골반이 몹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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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담배

글/에세이 2023. 3. 15. 07:41 |

줄담배


 역 근처의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생쥐 같은 인상을 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구걸했다. 담뱃갑을 열어보니 마침 세 개비가 남아있기에 두 개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 인사도, 떠나지도 않고 그저 멀뚱히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한 개비가 더 있던데.”였다. 이번에는 내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돗대를 가져가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딱히 화도 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역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돗대를 피워버렸다. 그리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남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현금은 이천 원뿐이었다. 어차피 담배 한 갑도 못 살 돈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캔커피 두 개를 사는 데 모조리 써버렸다. 얼마 뒤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역전에 나타났다. 나는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친구는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시야 저편에서 그 노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맞은편 흡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가슴 속에 흙탕물이 흐르는 기분이라, 한 개비를 더 빼물고 불을 붙였다. 젠장,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는 캔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젠장’이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흡연장에서 어정거리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결정했다. “아.” 내가 돌연 떠올렸다. “그 캔커피가 내 마지막 자산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실없이 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술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 작고 생쥐 같은 노파는 여전히 흡연자들에게 개비담배를 구걸하고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리 위로 기어나오는,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간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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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초안)

글/에세이 2022. 2. 10. 22:49 |

여행


 24살 때, 나는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3주 정도를 머물렀다. 그때까지 내게 여행이란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돈이 생기면 현실에서 도망치듯, 평소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의 여행은 차례차례 나름의 체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데사의 가을 하늘은 눈에 띄게 높고 투명했다. 그 밑에는 색채 없는 건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웅크린 것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유난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친구 율라이아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2년간 월급을 받아 저금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전전해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율라이아가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말을 꺼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몇 번 미국 남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이토록 큰 땅덩어리에 갈 곳도 구경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오데사는 더욱 볼 것이 없는 동네였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에 몰개성한 주택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아침이 되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돌아와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첫 주부터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정오 즈음 되면 잠에서 깨어, 씻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준 예비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줄담배를 피우며 마냥 걸었다. 행인도 없어 한산한 거리를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달렸다. 가끔은 큰 길가의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서는 늘 담배를 물고 다녔던 것 같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주라서 담뱃값이 싼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고, 친구와 잡담을 하다 잠들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니 당연하다는 듯 생활이 불균형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저녁에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굉장히 걱정을 끼쳤다―서(西)오데사의 도심을 한밤중에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벽마다 인적도 없는 시가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층이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거리를 꺾어 들어가는데, 골목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작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인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무슨 말을 외쳤다.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다. 남부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로 그녀는 ‘거기 아시아 사람, 뭘 하고 있어?’ 라고 내게 묻고 있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자리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직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꽃이 일렁이는 드럼통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어놓은 쇼핑카트를 드럼통 옆에 세워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관광객이 밤중에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핫도그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안 것인데 그녀는 드럼통에 피워놓은 불로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무슨 담력이었는지, 좋다고 대답한 나는 그녀와 핫도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내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음절들이었는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는 카를라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담배를 피우며, 미국에서 노숙자로 사는 것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는 곧 닥쳐올 겨울을 대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데사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은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다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잠자리까지 빌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나는 카를라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당장 위험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정신질환이나 중독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20달러 지폐를 하나 건넸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문제에 대해 미국은 유난히 논란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입장과 상황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나은 선택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라는 진심으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마워했다.
 나는 친구의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싸구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친구와 나는 식사를 하러 근처의 팬케이크 식당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친구는 자신이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텍사스를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창 너머에서 카를라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무 옷이나 마구 겹쳐 입은 사람들이 서넛 거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족한 듯 그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떨떠름한 얼굴로 농담인 양 말했다. 자신은 반년을 여기서 살았어도 친구가 없는데 너는 벌써 길에서 친구를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율라이아에게 대단히 폐를 끼쳤구나 싶다. 지금 그는 인디애나에 살고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지 2년 정도 되었다. 카를라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에 성공했는지, 아직 살아있을지, 확인할 방도도 없다. 다만 그날, 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게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가지 주제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 아칸소까지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사정사정하며 몇 달러를 빌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져버린 인도계 소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수염이 새하얀 흑인 노숙자 조나단, 북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떼로 몰려오던 헐벗은 아이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수공예품을 기를 쓰며 팔려고 하지만 그냥 주는 돈은 못 받겠다던 네팔의 잡상인 등.
 이처럼 외국을 갈 때마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공항에 내려도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보다는, 시장 골목과 상업 지역으로 먼저 발걸음이 향한다. 그런 버릇이 시작된 것은 카를라와 만난 뒤부터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의미가 명확해졌다. 나는 박물관이나 고건물을 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낯선 거리에서 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 떠난다.
 사람들은 호텔이나 관광버스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이방인이 되어 스며들면 그 거리는 가끔 고향보다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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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피

글/에세이 2021. 9. 9. 23:05 |

길 위의 피


 나는 손안에서 담뱃갑을 돌리며 시멘트 위의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방금 내가 보았던 일은 그저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다면 지각쯤은 간단히 용서해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방금까지만 해도 여자 둘의 새된 비명과 울음소리, 경찰과 구경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30분 전, 나는 역을 향해 걷고 있었고 중간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단지를 질러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20미터 정도 앞에 개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사람이 각각 둘 있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한 명, 반대 방향에서 오는 한 명이 막 마주치기 직전이었다. 내 쪽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는 애견용 목줄을 쥐고 있었다. 줄 끝에는 작고 하얀 소형견이 있었다.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은 이제 30대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쥔 줄은 털이 누런빛이고 주둥이가 길쭉한, 커다란 개의 목에 걸려있었다.
 추위가 막 물러가기 시작하는 3월의 쾌적한 오후였다. 하늘은 맑았고 아직 기울지 않은 태양이 얼굴과 외투 위로 따사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곧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술도 한잔 마실 예정으로, 들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앞에 가던 작은 개가 날카롭게 짖기 시작했다. 그 새되고 히스테릭한 짖는 소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형견을 향한 것이었다. 개들의 심리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보아하니 자기보다 몇 배나 큰 동족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깡깡댄다고 해야 할지 깽깽댄다고 해야 할지, 여하간 어지간히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짖었다. 개 주인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개에게 그만두라고, 사람 말로 어르고 있었다. 커다란 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짖는 녀석을 쳐다볼 뿐, 짖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 직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딱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속 성가시게 짖어대는 작은 놈에게 느닷없이 커다란 놈이 덤벼든 것이다. 10살짜리 사내아이만 한 몸집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바람에 개 주인은 목줄을 놓쳐버렸다. 그 커다랗고 누런 개는 순식간에 작은 개의 배를 힘껏 물더니 도리질을 치며 양옆으로 마구 흔들어댔다. 개 주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멈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10초도 되지 않아 벌써 사방에 선혈이 튀고, 하얗고 작던 개는 새빨갛게 물들어버렸으니, 아무리 자신의 개라고 해도 선뜻 손을 대기 힘든 광경이기는 했다. 나는 1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겁을 집어먹은 주인들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도무지 우스운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들은 아파트 경비원이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젠 구경꾼들까지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6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경비원은 어떻게든 개들을 떼어놓으려고―사실 개들끼리 맞붙은 상황도 아니고 일방적인 도살이었지만― 애를 쓰고 있었으나, 이미 피를 본 누런 개는 아주 끝장을 낼 기세였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커다란 녀석이 붉은 덩어리를 한쪽에 뱉어놓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시멘트 위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고 개 주인들의 울음소리, 비명, 넋이 나간듯한 흐느낌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거기다가 구경꾼들까지 한몫하여 집단으로 알아듣기 힘든 고성을 내고 있었다. 커다란 개 쪽의 주인을 책망하는 욕설, 어떡해, 어떡해, 하며 상황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드는 황망한 목소리들…….
 결국 순찰차가 주인 둘과 주둥이가 피투성이가 된 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작은 개를 데리고 현장을 떠났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한동안 서로 의견을 말하고, 대화를 나누며 수런수런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 갈 길을 갔다. 순찰차가 떠나고 5분도 되지 않아 자리에는 피 웅덩이를 치우는 경비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경비원마저 청소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 마침내 나는 일이 벌어졌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태껏 나는 멀찍이서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벌써 스며들어버린 핏자국이 시멘트 바닥에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남의 아파트 단지에서 그럴 수는 없어, 공연히 손으로 담뱃갑만 돌려댔다. 5분 가량, 머릿속의 난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나는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가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온갖 문장들 속에 배치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정말로 호되게 욕을 들을 시간이었다. 나는 친구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겠다고 전하면서 바쁘게 역으로 향했다. 25분 즈음 후에 나는 의정부 시내의 호프집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서로 얼큰히 술이 들어갔을 무렵 나는 오늘 보았던 끔찍하고 흥미로운 광경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일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을 수 있도록 간략하면서도 완급을 주어 설명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미간을 찌푸리거나 이입하여 화를 내는 등 다양했으나, 의견은 전부 비슷했다. 그 여자는 왜 목줄을 놓쳤느냐, 왜 곧바로 달려들어 멈추지 않았느냐, 그러게 큰 개들은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 등등.
 아니, 그게 아니야, 우리 곁의 짐승들 이야기를 한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정정하려 했으나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용훈이는 공무원 시험 벌써 두 번째 아니냐, 승호는 요즘 주식 한다더라, 종인이는 대기업까지 들어가더니 도대체 왜 그만두고 나왔냐, 이러쿵저러쿵……. 이런 대화가 되어버리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나는 이빨을 상대의 배에 깊숙이 박아넣고 양옆으로 흔들어대던, 그 커다랗고 누런 개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 헝겊처럼 되어버린 작은 개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나는 웃는 얼굴로 저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 누런 개는 상대에게 덤벼들기 전까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형견들이 으레 그러하듯 늠름하면서도 온순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에 대해, 집착하듯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그것들은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길들여있더라도 이따금 마구잡이여도 괜찮다. 동물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만 동물이다. 누군가 건배를 외치기에 나도 맥주잔을 들었다.
 술에 취한 친구들의 표정을 돌아보았다. 새삼 술에 취해도 우리는 동물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이곳은 참 안전하구나, 술집마저도 안전하구나, 다행이고 당연하고 조금은 슬프다.
 그날 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술기운 속에서 잡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털 없는 짐승이 아니라 진짜 짐승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송곳니도 있고 발톱도 있으며 마구잡이로 죽을 수도 있는 짐승,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나, 카프카에게 기도하면 되는 일인가. 그러면서 집까지 돌아와 이불 위에 쓰러져 잠들었다.
 한주 뒤 비가 올 때까지 검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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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의 눈

글/에세이 2021. 7. 8. 22:59 |

복도의 눈


 얼마 전, 아래층 복도에 방범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올봄에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자비로 들여놓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303호로 이사 올 때부터, 결국에는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방범 카메라 등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날 것은 그들이 이사 온 봄날부터 확실했다.
 애당초 303호의 전 세입자가 도망치듯 빌라를 나갔을 때도 그랬다. 그에 대해 입주민들이 서로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지만, 나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현관을 마주하고 있는 304호에 거주하는 술주정뱅이인 것이다. 우리 가족이 처음 이 빌라로 이사 왔던 것이 약 6년 전이다. 그때부터 그는 매일매일, 꾸준하게 건물의 모든 세입자를 괴롭혀왔다. 그의 주정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매일 오후 10시가 되면 취해서 소리를 지르며 동거인―어쩌면 아내일지도 모르겠다―에게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1시 30분 즈음 되면 빌라의 1층부터 4층 사이 현관 하나를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는 문을 두들겨대며 ‘도무지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라고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지독한 주정은 새벽 2시경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너무 취해서 기력이 다 떨어진 그가 동거인에게 힘없이 욕설을 하며 곯아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일련의 일들이 이 알코올중독자의 찢어지는 목소리와 방음설비가 전혀 되지 않은 건물 덕분에 끊임없이 빌라 사람들을 괴롭혀왔다.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이 4층이기 때문에 그의 ‘주정 시간’이 되면 나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 못했다. 건물의 계단 사이에 있는 복도는 사실 복도라기보다 계단참이라고 불러야 할만한 넓이라서, 그 시간에 건물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주정뱅이와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사소한 불편은 그렇다 치고, 이런 일이 내가 알기에만도 6년은 지속되었는데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곳이 도봉구의 후미진 주택가이기 때문이다.
 경험에 따르면 인천이든 의정부든 도봉구든, 오래되고 여름이 찾아오기만 하면 온 동네에서 음식물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는 주택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에게 3층의 술주정뱅이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 사실은 그가 건물에 살든 살지 않든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이 동네에서는 계단과 복도를 서너 차례 거쳐 건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더욱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사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자신의 개한테 욕을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도봉구 살라마노 영감이라든가, 길에서 소주를 마시며 보행자들에게 트집을 잡는 연배를 분간하기 힘든 꼽추, 주말 새벽마다 큰 소리로 발라드 가요를 열창하는 건너편 건물의 남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관문을 열고 나서기만 하면, 동네가 하나로 연결된 정신병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무엇하러 성가신 일을 감수하며 경찰을 부르거나―우리는 경찰이 이런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민원을 제출하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올해 초에 이사 온 젊은 부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다. 초봄, 그들이 타고 왔던 원색의 빨간 오픈카를 보았을 때부터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약 3주에 걸쳐 303호를 개조하고, 새하얀 벽지와 페인트를 바르고, 인테리어 업자에게 연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부동산 업자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 이 마을의 현관은 각각이 병실 문이고, 마을 전체가 병동의 홀Hall이거나 통로라는 것을 젊은 부부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부부는 304호 주정뱅이와 부딪쳤다. 사실 부딪쳤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경찰서에 전화한 모양이었다. 차를 타고서 경찰 둘이 왔고, 한밤중에 304호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주정뱅이는 1시간이 넘게 서로 버티고 서서 언쟁했다. 다음 날 밤에도 경찰이 왔다. 그다음 날에는 머리끝까지 취기가 오른 주정뱅이가 303호 문을 쾅쾅 두들기며 조롱 섞인 사죄와 차마 말하기 힘든 상욕을 목청 높여 반복했다. 이제 밤 10시가 지나면 빌라의 3층 복도는 도무지 지나갈 수도 없는 공간이 되어있었다.
 나는 정말로 피로에 찌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런 바보 같은 짓거리가 두세 달 넘게 반복되자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밤이 되면 담배는 아주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쯤 나는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폐를 끼치는 저 알코올중독자인지, 괜히 말벌집을 들쑤셔놓은 젊은 부부인지,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며 상황을 깨끗이 해결하지도 못하는 경찰인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혼탁하게 흐르다 보니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 정치인에게까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로 2주 전, 303호의 젊은 부부가 3층 복도에 방범 카메라를 설치했다. 첫날에는 고정을 잘못시켜 놓았는지, 벽에서 떨어져 전선에 매달린 채로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발견한 304호의 주정뱅이가 주먹으로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다음 날에는 콘크리트 나사로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약간 다른 일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 10시가 지나자 혀가 꼬인 주정뱅이가 아래층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하는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30분 넘게 혼자서 욕하고 고함을 쳐대기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 계단참까지 내려가 보았다. 주정뱅이는 앞집의 문을 두들기며 욕을 하는 대신 방범 카메라의 렌즈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거리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마치 카메라 앞에 선 배우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연극적인 태도로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뭐지, 무슨 상황이지. 이전과는 다른 뜻에서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 사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진행될지 전혀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수면제를 삼키고, 소음 속에서 어렵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그날부터 이틀 정도, 304호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낮에 작게 나곤 하던 생활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예 사람이 없는 듯했다. 알고 보니 3층의 부부는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경찰에게 제출한 모양이었다. 이 이야기는 1층의 철도공무원에게 전해 들었는데, 철도공무원 아저씨와 나는 평소 건물 앞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친해진 사이였다.
 사흘이 지나고 문제의 술주정뱅이는 돌아왔다. 이전에 비하면 훨씬 조용해진 것이 몹시 놀라웠다. 아직도 밤 10시가 되면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가 있긴 하지만, 현관 밖까지 나와 엄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며 조용히 해달라는 이상한 요구를 하지는 않게 되었다. 젊은 부부가 달아놓은 그 기계의 효과가 감탄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한 것은 왜일까. 일이 해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3층 복도 벽에 붙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잠시 멈춰선다.
 그 까만 렌즈가 비추고 있는, 계단참처럼 비좁은 복도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해결방안이라거나 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도봉구가 모조리 방범 카메라로 뒤덮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안전해진 3층 복도를 지나가면서 나는 매번 머리가 복잡하고, 어서 건물을 빠져나가 담배나 태우게 되는데, 거리는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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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귀향

글/에세이 2021. 1. 28. 21:21 |

문명과 귀향


 노르웨이의 바르그 비케르네스(Varg Vikernes)라는 음악가는 교회를 세 채 불사르고 사람을 죽였다. 그를 소개할 때 음악가라고 해야 할지 범죄자라고 해야 할지 조금 망설였으나, 결국 음악으로 생계를 해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음악가라고 했다.
 바르그의 본명은 크리스티안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기독교식 이름을 가진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전통적인 북유럽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첫 음반을 낸 1992년 전후에 바르그는 적어도 세 채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중 하나는 노르웨이의 문화유산이었다.
 음악가로서 여러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모든 밴드가 북유럽의 악마주의 서클에 관련되어있었다. 바르그는 이미 이너서클(Inner-circle)의 간부였다. 그때 그는 같은 간부였던, 유로니무스라는 기타리스트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심문 때 바르그는 자신의 범행동기를 "유로니무스가 악마의 일을 하지 않고 명령만 내리는 가짜 악마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방화나 살인 등 자신의 범죄에 대해 단 한 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야성을 말하기 위해 문명에게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래서 '문명'이 주는 공포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주변 환경에 공포와 경계를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야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길이 난 듯이 곧장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생각이 있었다. 그르니에의 『섬』 서평에서 언급된,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이지 않고, 대지가 뜨거운 사막과 파도로 넘쳐흐르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서평의 문장대로라면 <태양과 바다와 밤들이 바로 우리의 신>인 지중해 기슭에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내가 모르는 태초의 야성이 깃들어있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쓸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생각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계속하여 그들에게 배워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배우기만 해야 한다. 그런 입장에 놓여있다. 내가 온전히 알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더라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을 그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하기 위해 흥분한 진리들>이나 문명 따위는 기피하며 냉소하는, 그런 황금빛 태양의 자손들에 대해 나는 쓸 줄 아는 것이 없다.
 벌써 문장이 현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이 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내가 '그들'에 대해 쓸 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들의 영혼에 대해 공감하지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신기루와 같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문장도 환영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써야 할 것은 좀 더 간단한 것이다. 지중해의 빛나는 야성은 모르겠다. 그러나 문명에 대한 공포가 어느새 깊은 증오와 하나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그럭저럭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먹구름과 높은 빌딩들이 툭하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도시에서 자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진리가 '살인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지성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는 쓸 수 있다.
 맨 앞에서 설명한 바르그 비케르네스라는 남자를 나는 단순한 악마숭배자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하면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기독교라는 것이 사회의 근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근엄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심판자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다. 기독교기반 사회에서 크리스티안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사람이, 선조들처럼 이름을 바꾸고 ‘악마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그저 선과 악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귀향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오래된 야성―이라고 믿어지는 것―으로 귀향하고 싶었다. 개들의 이야기지만, 개들은 마음이 공포에 사로잡히면 짖는다. 그래서 작은 개일수록 더 잘 짖는 것이다. 늑대처럼 커다란 개들은 웬만해서는 짖지 않는다. 싫어할 만한 짓을 해도 표정근육조차 없는 그 얼굴로 불쾌한 눈매를 하더니 발을 쑥 빼고 저쪽으로 터벅터벅 가버린다. 자신만만한 것이다. 온몸이 근육으로 단단하고 자신의 이빨이 얼마든지 상대를 물어뜯어 죽일 만큼 날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란 놈들은 인간을 닮아서인지 강할수록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라는 말을 써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작은 개다. 그것도 인간이 애완용으로 쓰기 위해 교접작업을 반복해 만들어낸 기형 소형견이다. 사방팔방이 자신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괴물과 위협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하늘의 법칙조차 치명적인 학대로만 느껴진다. 미친 듯이 짖어대며 자신을 속이고 적을 위협하려 하지만 우리의 이빨과 근육은 너무 나약하다.
 이 작고 연약한 마음으로는 세상이 온통 폭력과 무차별의 구렁텅이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이 세계가 바르그에게는, 덩치가 산이나 구릉 같은 거대한 늑대들이 수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가운데 자신만이 새끼손가락 크기의 살덩어리인 공포의 세계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세계라고 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시련이나 원죄라는 단어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보복, 오로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보복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운 가장 모독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는 악마이고 사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를 위한 변명 같은 말을 하면서 나는 궁금한 것이 있다. 길을 가다 보면 갑자기 건물 위에서 누가 벽돌을 던질 것 같은 공포.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낯모르는 사람이 날붙이를 들고 덤벼들 것 같은 공포. 골목에서 담배를 피울 때 술꾼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공포.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더니 느닷없이 경찰이 넘어트려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는 법의 집행을 당하리라는 공포. 길가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명백한 증오와 경멸…….
 철저한 아스팔트와 규범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문명화되었다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내가 알기로 야만과 야성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더 교묘하게 숨겨져 우리 작은 의식들을 위협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귀향하고 싶은 것이다. 차라리 태초의 야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바르그는 늑대가 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개종 당해 나약한 개가 되기 이전의, 산 같이 크고 농장의 암소를 물어 죽이는 늑대 말이다. 틀림없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Varg는 스칸디나비아어 시절부터 ‘늑대’라는 뜻이었다니까 말이다.

 

 

 어떤가, 자네. 세상에 있었던 적도 없는 사람의 범행은 예술이지만, 이렇게 되면 자네도 나도 위험하지 않겠나. 응, 담배라도 피우고 가게. 혼자 있으면 무섭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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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의견

글/에세이 2016. 11. 17. 02:22 |

폭력의 의견



 폭력의 역사는 생물의 역사다. 폭력, 전쟁, 투쟁, 다툼, 그리고 비교적 근대적 개념인 테러리즘까지, 인간언어는 상황과 그 사이즈에 따라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냈지만, 이 논고에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또한 그 행위의 중추에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이 논고 전체를 통과할 하나의 메타포를 우선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에 인간A와 인간B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A와 개인B, 혹은 개체A와 개체B라고 할 수 있다. A에게는 한 정의 단단하고 묵직한 금속성의 총기가 있다. 그 멋들어진 무기에는 한 발의 총탄이 장전되어있다. B의 무장상태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 본 메타포에서 B가 무장을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A는 B의 머리를 향해 한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 이 상황에서, A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 분노, 증오, 체념, 연민과 광기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발사된 한 발의 총탄이다. 이 총탄은 완벽한 직선궤도를 그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B의 두개골을 파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폭력에 대한 정의를 재수립하고자 할 때, 그 발사된 총알은 단순한 살인무기나 살인방편이 아닌, A의 의견Opinion의 상징Symbol이다. 애초에 A가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A의 행위는 일종의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언어화 될 수 있는, 즉 사회적으로 분석되고 파악될 수 있는 소통행위의 단면이다. A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나는 당신이 죽어야한다는 의견을 이 금속성 수단을 통해 피력한다.> 발사된 총탄은 살해의 심벌이 아니라 의견피력의 수단이다. 그것이 실체와 질량을 가졌고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다는 일차원적인 껍질을 깨고 보면, 사실상 그것은 <언어>의 일종이다. 총탄이 언어의 일종이라는 것은 곧바로 그 총탄이 정보의 덩어리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그것은 질량을 가진 정보다. 그 정보들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사실 모든 의견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이 경우 욕망은 B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당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부디 죽어주시겠습니까? 아, 물음표는 제외하도록 하자. 일방통행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질문이 내재된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그 이후에는 외부로부터 질문이 파생되기는 하겠지만, 우리들이 폭력이라고 이름 지은 언어에는 질문이 내재되기가 쉽지 않다. 애당초 폭력이라는 의견피력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의문을 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A의 <의견피력>은 B에게 강제적 동일성을 심어놓는다. 간단히 하자면 A가 B에 대한 존재말소의 의견을 피력하며 금속성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에 B 또한 결과적으로 A의 의견과 동질화 되는 <존재말소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나는 폭력이라는 것을 상대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과 동질화시키는 가장 능동적 행위라고 구두점을 찍는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폭력을 단순히 인간행위의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언어와 의견으로서 이해하는 것. 행위 자체가 가지는 정보를 보다 원론적으로 파헤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재정의가 지금 필요한 이유는, 폭력이 단순히 폭력이기만 한 인식구조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에선 이미 모든 개념들의 정의가 요동치고 있다. 어쩌면 50년 쯤 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전들을 전부 소각하고 완전히 새로운 언어지침을 창조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집중하자.

 내가 폭력행위를 정보와 일방통행의 의견피력으로 생각한 이후, 나는 곧바로 <테러리즘>이라는 기묘한 단어에게 접근했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 그러나 내 입장에서 이러한 정의는 이미 페인트칠이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한 오두막과 같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테러리즘이 가지는 포괄적 스펙트럼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만들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렇게 정의를 수립하고 나면 테러리즘과 일반 폭력 사이의 차이점은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상황적 사이즈Size의 차이. 테러리즘이 사회구성원들의 일부 혹은 다수에 대한 사고의 병렬화를 꾀한다는 점. 국립국어원의 기존의 정의에서 보여 지는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는 역시 위에서 서술한 A의 B에 대한 의견피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사로운 것이든, 폭력을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는 공격적 <언어>의 일종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이미 시사한 바 있다. 그런데 나의 논고 안에서 개인의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을 구별 짓는 것은 테러리즘의 그 목적이라는 것이, <행위 이후에 올 파급력에 대한 기대=그 폭력행위로 인하여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의 사고가 병렬화 될 것이라는 기대>라는 점이다. 이러한 파급력은 피해자 집단이나 가해자 집단 중 한 곳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 다른 성질의 의지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의식<들>에 동일인자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집단들이 각각 다른 형태의 집단의식을 소유, 말하자면 집단구성원들의 (소규모나 혹은 대규모의)동일화를 유발시키고, 즉 사고의 병렬화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주는> 행위를 실행했을 때, 실상 테러리스트로 명명될 수 있는 실행자들조차 그 특정행위와 관련된 인간그룹에 어떠한 사고 병렬화가 발생할지 거의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특정 영향력을 기대한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행동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위에서 기술한 바 있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라는 조건을 말이다. 이와 같은 조건은 국제사회와 인간 집단의식의 움직임을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지나치게 다각화된 내부인자들과 외부인자들로 인하여 인간의식의 움직임은 집단의식과 더불어 해석이 불가능한 완전한 아노미Anomie 상태에 가깝다.

 쉬운 예로 현재 이 행성에서 어느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속한 테러리스트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국 대사관에 자폭테러를 시행한다고 상정했을 때, 분명 그 테러리스트의 심리는 너무도 단순해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는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유발하고, 그 피해로써 자본주의 국제사회의 중추국가인 미국을 위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자들이 갖게 될 불안과 공포를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자폭테러에 대한 정보를 접한 사람들의 의식은 테러범의 기대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선 자신들의 대사관이 파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의 미국국민들은 테러를 자행한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공유할 것이다. 게다가 이 증오는 명백히 적敵이 지정된 증오다. 단순한 분노의 공유를 넘어서서, 구체화 가능한 적이 명시된 증오는 그 분노를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당시 관련자들에게 주었던 영향력을 살펴보면, 하나의 적을 목표로 한 집단은 마치 집단 자체가 의지가 있는 것처럼, 다수의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행동한다. 구시대에도 이러한 개인의 집단화가 빈번했던 것에 더해, 현대처럼 온갖 출처가 분명하거나 혹은 분명하지 않은 정보들이 사방에 떨어져있는 상황에서 집단 내의 세포Cell처럼 움직이는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가 동시에 정보수집과 정보에 대한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필터링 되거나 생물 그대로인 정보들은 가능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편에 의해 집단 자체로 융화되고, 즉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의 사고가 병렬화되어 결과적으로 서버Server가 부재하는 허브Hub들만이 상호연결 된 하나의 의지Will가 출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집단의식의 출현은 피해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를 저지른 조직 내에서는 자폭테러 실행범에 대한 우상화나 영웅화가 발생하기 충분한 조건이 이미 갖춰져 있을 것이고, 곧이어 실행범은 테러조직의 집단의식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투쟁의 순교자라는 데이터로서 각인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은 미국국민이 증오하게 된 <적>과 거의 동일한 정보작용을 한다. 테러조직의 영웅은 그 테러조직 내에서 자동적으로 정보가 가감되거나 수정되어, 조직의 각 인자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직시해야할 것은 그 구심점이라는 것이, 실체나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정보덩어리인데다가 그 <정보덩어리>의 오리지널인 자폭테러 실행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정보적-가상적 초상肖像>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폭테러범의 존재는 행위를 실행하는 순간부터 그 어느 개인의 의도와도 관계없이 집단사상을 위해 날조된다. 딱히 어떤 집단적 카리스마나 사상가에 의해 이 날조가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가 자켓 안에 플라스틱 폭탄을 차고 대사관으로 침입하기 이전부터 그와, 그의 조직과, 그의 조직원들과, 그 모든 개별인자를 통괄하는 <집단>이라는 존재방식에는 실행범의 사망과 동시에 이미 오리지널이 없어진 인격의 잔재Data를 집단의 통치지침을 위하여 날조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도 그 죽은 실행범에 대한 정보조작을 가하지 않지만 정보조작은 이미 집단에 내재되어있던 조건에 의하여 조직통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시행된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테러조직을 구성하는 모든 조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동일인자다.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될 때 뿌리를 박은 사상적 동일성은 그들 모두를 기초적인 차원에서 연결시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고의 병렬화>라는 유별난 개념이 사용될 필요성은 없지만, 그것은 잠재적 연결회로로서 항상 은밀히 작동한다. 포텐셜을 실체화시킬 이벤트만 발생한다면 그것은 집단 전체에 대하여 대규모로 활성화된다. 영웅의 등장-죽음. 그렇다, 이러한 집단에서 영웅이라는 개념은 영웅화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다. 그가 죽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고 그의 사망 자체(오리지널의 말소)가 영웅화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즉 집단의 영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로서 비실재하는 우상-즉 영웅이 집단의 구심점으로서 현상화되고 모든 집단구성원들은 강제로 그 영웅이라는 능동적 정보에 접속된다. 이때 벌어지는 일이, 위에서 서술한 미국국민들의 상황과 동일한 <사고의 병렬화>이고, 집단 자체의 의지가 발현하며 조직구성원들은 그 의지Will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집단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반 하드웨어 혹은 그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로 인하여 이런 형식의 집단의식의 구체화, 집단 내 구성원들의 사고 병렬화는 이미 정보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미국 대사관의 피습이라는 정치적 단어들의 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정보의 전달이 평등화된 현대사회에서 각기 의지적 집단을 형성하고 개인들의 <상위 소프트웨어>라고 할 만한 것의 부속품화가 가속화된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유족들대로 증오와 슬픔을 공유할 것이고 도덕가들은 국제적 통치체계를 재구성할 윤리관에 대한 논설을 공유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격한 정치적 집단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행동력에 경계를 공유할 것이고 아나키스트들이나 도덕의 비실재를 주장하는 일종의 니체이스트들은 그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던 세계관에 사회적 샘플을 하나 더 올려놓음으로서 서로간의 물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전보다 더 강하게 동일화될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파급력에 대한 추측이 내가 현시대에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이 재정의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주장의 골자다. 실상 내가 위에서 늘어놓은 몇 개의 예들은 정말로 <몇 개의 예> 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행동들이 모든 허브Hub들에게 동시에 정보로서 <발사>된다는 것이다. 이 행성 자체가 이미 네트워크의 끈으로 각각 모든 개인Individual들이 연결되어있는, 보이지 않는 리좀Rhyzome 구조의 망으로 덮여있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모든 예를 말할 수는 없다. 애당초 하나의 행위에서 파급되는 모든 집단의식의 변화를 전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의 예 뒤에 나는 처음에 말했던 테러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다시 가져올 수 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미 여러분의 사고 속에서는 하나의 유령 같은 개념이 생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위와 같은 식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사회에서 이미 Individual이라는 것은 더 이상 구시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이미 모든 개체성을 잃었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는다. 말하고자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모든 정치, 사상, 정보, 행위의 과도기에 우리 인간사회는―<인간>들의 사회와 <인간사회>라는 개체적 뜻을 동시에 가진다― 모든 개인들이 개체성을 잃기 위한 조건을 자동적으로 수집하며 정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논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연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을 굳이 분리시켜 놓아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최초의 메타포인 A의 B에 대한 살해행위도 규모가 소규모일 뿐이지 의견을 강제하여 특정된 상황에 속한 이들(최소 2명 이상의)의 사고현상Think Phenomenon을 동일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기존의 테러리즘을 정의하던 <정치적 목적>, <사상>, <주의> 따위의 단어들도 원론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이것은 실상 인간의 사고능력에 기반하여 개인이 가지는 신념이나 사고방식 따위를 광역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특정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에서도 몇 번이고 말한 <현대사회의 정보적, 국제적 과도기>라는 조건 때문이다. 인류역사의 시초에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들이 더 큰 집단인 사회를 이루고, 계속 집단들의 집단화가 가속되어 국가, 연방, 국가사상의 공유, 세계 따위의 개념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반개인이라는 것이 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워졌을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하나의 꽉 쥔 주먹이 누군가의 턱을 치는 것과 완전히 사고가 병렬화된 국가집단이 새로운 종류의 의지, 혹은 생물처럼 활동하며 중추신경이 없는 능동성을 가지는, 말하자면 정보-의식생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논고는 최초에 가장 극단적인 의견피력 수단인 폭력에서 시작하여 인간이라는 생물이 본성적으로 소속된 집단 내에서 사고를 공유하도록 설계되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개인의 Individualism까지 위협하는 사고 병렬화와 그의 산물인 <새로운 의지New Will 혹은 새로운 생물New Organism>의 탄생까지 유도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는 점점 가속화하여 발전한다. 그리고 내가 이 논고에서 논한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자면, 언젠가 세계는 <세계>라는 Organism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그 Organism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정보가 정보에 의하여 가감되고 수정되며, 각각의 Cell은 정보 수집과 상위 소프트웨어를 보조하는 역할밖에 못하게 될 때, <인류>라는 개념은 인간집단을 포괄하여 말하는 종류의 개념이 아닌, <인류> 자체가 하나의 Individual로서 인지되게 될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사고 병렬화>는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진화의 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집단이 되고, 집단이 국가가 되고, 국가가 세계가 되고, 마침내 세계 자체가 하나의 개별성을 얻게 되는, 그리하여 인간의식이란 것이 집단의식이라는 새로운 생물로서 승화되는 그러한 종류의 진화 말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독재자도 파시스트도 없지만 인간육신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뇌와 중추신경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의지>에 의한 독재가 이 정보생명 안에서 발생하리라는 것을 나는 추측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추측을 디스토피아적이라고 말해야할지 아닐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인간의 집단화, 병렬화, 개인의 세포화는 이미 인간본성의 뿌리에 조건을 형성해두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더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될지, 다른 시대도 아닌 이 <모든 것의 과도기>에 우리는 사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관망해보자. 지금 현재에, 이 전 인류가 통괄되어있는 네트워크가 어떤 양상으로 행동하는지, 우리는 사색적으로 관망할 필요도 있다.



끝.

Posted by Lim_
:

음악하는 후배가 부탁한 글.

제목조차 내가 정한 게 아니다. 그가 제시한 네 개의 낱말을 순서만 맞췄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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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정체성, 비극, 긍정, 광기



 부조리 철학에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것은 인간, 세계, 그리고 부조리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리란 군대에서 이등병이 자살하는 등의, 사회인들이 텔레비전 너머에서 욕설을 내뱉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설명컨대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개인이 되는 순간 세계는 인지되어 탄생한다. 그 세계는 개인의 밑이나 그림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적군이나 원수처럼 개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거대한 크기로 위협한다. 그러한 시선의 마찰에 불똥이 튀는 순간에 부조리라는 것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부조리-세계의 관계는 철저하게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것이고 약간의 조정이나 타협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사멸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존재한다.

 서술을 약간 이르게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들은 근대에 출판된 철학논고들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부조리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불과하기에, 굳이 기다란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이 <개인>이 된다는 것은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개체로서 인지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이덴티티라고도 자아정체성이라고도 어떤 특정인의 페르소나의 집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태어난 뒤 막 눈을 뜬 갓난애의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그러나 자신과는 <다른> 오브젝트를, 즉 세계를 관찰하는 순간 인간은 세계라는 무지막지한 혼돈의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차별화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도 쉬우면서 동시에 엄청난 것이다. 인간의 오감 중 하나만 있다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계를 <감지>하고 그것이 <내가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은 개인의 발생이며 동시에 개인-세계라는 통렬한 마주봄의 시작이다. 사실상 인간이 자신의 영혼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굳이 발 벗고 나서 자아라는 것을 찾을 일조차도 없는 것이다. 당장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일 하나 하나가 전부 세계에 대한 마찰행위인 것이다. 그 세계에 만족 하는가 불만족 하는가 하는 사고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이미 세계를 <적>으로 삼도록 설계되어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 앞으로 평생 인간의 영혼을 떨리게 만들 부조리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개인이 될 때 세계는 인지되어 개인의 적이 되고 그 끝없는 마찰로 말미암아 부조리가 탄생한다.

 사실은 이 처절한 삼자관계가 이미 인간개인의 정체성의 기본이다. 특질이나 개성 같은 것들은 그 위에 건축되는 것이다. <나는 나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이것만으로 개인은 이미 존재(인지)한다. 그리고 인간이 사고를 시작했을 때, 마찰은 거의 극적으로 속도가 빨라진다. 인간의 기본정신은 논리와 로고스(이것을 신이라고도 부른다)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청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는 전혀 논리정연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는 전혀 논리정연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아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농장에서는 생물들이 경제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고 세상 곳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전쟁과 학살들이 터진다. 태양은 식어가고 인류의 정신은 열화 되어가고 근거를 알 수 없는 범죄들이 사회를 잠식해간다. 아, 이 시점에서 당신은 <그래도 이 우주는 논리와 수학을 기반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물리학적인 시점에서 보면 세계는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다. 그리고 그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이 말하기를,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우주는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말미암아 결국 엔트로피 수치가 최대치가 되어 굳어버릴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결말도 인간의 논리에게 수긍할만한가? 바꿔 말하자면,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극단적으로 철저하고 논리적으로 무자비하고 무의미하고 무작위한 것이다. 불행과 불안은 비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하게 쏟아져 내린다. 모든 일들은 잠입자가 설치한 폭탄처럼 아무렇게나 터져대고 막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보통, 이 사회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와 마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질로 말미암아 그들의 세계와 그들 자신 사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부조리가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비극이나 죽음에 몇 번 탄식하고 말 뿐, 일반적으로 그들의 영혼은 부조리와 분노와 고통으로 난도질당해 울부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예시들을 갖고 있다. 굳이 내가 근대 예술가들이나 철학가들의 이름을 논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근대 최고의 지성이었음에도 미쳐 격리병동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먹던 프리드리히 니체. 100년의 시간을 앞서간 초현실주의 시인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정신분열병자였던 로트레아몽 백작. 스스로를 인류사회와 격리시키고 미학추구에만 일생을 바치다 정신병동으로 걸어 들어간 빈센트 반 고흐. 프랑스 문단을 뒤집어엎은 작품을 쓰고 고작 21살에 절필을 선언, 아프리카에서 외다리로 죽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 신동이라 불렸지만 탄생 십구 년 만에 사망한 소설가 레몽 라디게.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이 세상과 마찰한다는 것은 단순 문장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큰 영혼의 소모가 필요하다. 병사(病死)로 죽은 것마저 정신의 극적인 피로로 해석하는 것을 비약으로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만큼, 그리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세상과 삶의 불똥 튀는 마찰은 영혼에 기괴한 흉터를 남긴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광기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만일 인간에게 충분한 시야만 있다면 개인은 내가 말한 세상의 무자비, 무의미, 무가치, 무작위, 그리고 잔혹함을 눈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수긍할 것인가 반항할 것인가를 말이다. 사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 타고난 선험적 기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알베르 카뮈의 평생의 작품 주제이자 동시에 그의 저작 제목이기도한 ‘반항하는 인간’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태어난다. 긴말이 필요 없이 수긍할 자는 수긍하고 반항할 자는 반항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자가 창조적 특성을 갖고 있다면, 그는 이미 세계에 대항할 한 자루의 짧지만 예리한 검을 쥐고 있는 것이다. 긴 서술에 들어가기 전에, 수긍하는 자들이 어떤 인생을 사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눈을 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건강한 일이다! 자신이 부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그의 정신건강에는 옳은 일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것이다. 한 때 보았던 혼돈과 광기의 아가리를 기억 밑바닥에 묻어버리려 애를 쓰며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편안히 잠들 것이다. 사람을 믿고 신을 믿고 법칙을 믿으며, 세계의 부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날 때부터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지성은 세계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창조성은 새로운 세계로의 추구를 위한 것이며 그들의 육체는 오로지 익사하기 직전까지 절망적인 헤엄을 계속하기 위한 향일성의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앞에 뚜렷이 보이는 세계라는 사랑스러운 적(敵)에게 예리한 단도를 조준할 수밖에 없다. 마찰은 깊고 빨라지고 튀는 불꽃이 반항인의 심장을 지진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부조리라는 현상을 그는 촉각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도 그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져들 수 없다.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단도에는 녹이 슬지 않는다. 이제 죽음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삶만이 그의 존재의 주제다. 그리고 삶이란 곧 전쟁이 된다. 오로지 나와 세계라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방불케 하는 불리하고 패배가 확실한 전쟁이 말이다. 옳아, 승리란 없다. 인간은 죽는다. 세계는 남는다. 이 전투의 끝에는 그저 패배밖에 없다. 그것을 쭈뼛거리며 털이 일어서는 피부로 알고 있음에도 반항인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필멸자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안정도 안심도 사랑도 희망도 다 목을 그어버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위버멘쉬(Uebermensch).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는 죽음 외에도 한계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광기의 아가리는 너무도 크고 흉폭하다. 그에 비해 인간의 영혼은 한정적이고 쉽게 상처 입는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일지라도, 들끓는 적개심과 혼돈의 한복판에서 평생을 싸우다보면 영혼은 흉터투성이가 되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다. 자기의문과 회의,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 이제껏 손에 묻히고 마셔왔던 나와 너의 피.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기만하듯이 내려다보는 거대한 세계. 피폐해진 몸과 마음. 문뜩 손을 보니,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굳은 피와 한 자루의 단도밖에 없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둔감한 인간들은 도대체 그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괴물. 세계, 세상, 부조리, 게다가 인류집단, 그들의 문화. 구원도 도움도 없이 이어져온 이 싸움은 도저히 영웅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평생을 건 자기파괴다……. 아, 그가 잠깐 떨더니 무릎을 꿇는다. 마침내 그는 패배하고야 말았나? 아니야!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그가 다시 일어섰으니까.

 긍정.

 이 세계 그 무엇보다도 궤멸적이고 기괴한 긍정. 사람들의 수긍과는 180도 다른 곳에 떨어진 긍정. 다시 일어선 그 반항인의 얼굴은 더 이상 진지한 분노도 고통도 새겨져있지 않다. 그는 웃고 있다! 우주만물이 그저 질 나쁜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염세주의도 아니고, 실존주의도 아니야. 이건 ~ism조차 아니야. 더 이상 그의 정신 속에는 비극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이란 잘 설계된 블랙 코미디다.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건물 속에서 불타 죽어도, 독재자와 군벌이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고 약소부족을 학살해도, 유조선이 폭발해 태평양이 시꺼멓게 변해도. 이것은 죄다 배꼽을 쥐게 하는 농담거리다. 지금까지 고통과 절망으로 흉이 져있던 그의 영혼이, 이제는 고통과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의 선(Line)이 방향을 바꾸고 뒤틀려버렸다. 모든 일들이 너무 명증하게 와 닿은 결과, 모든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도 않고 절망스럽지도 않다. 광기가 치유제가 되었다. 이제 절대로, 그 무엇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없다. 세상만사가 음담패설 같은 웃기는 일이고, 중요하거나 특별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그더러 왜 모든 일에 조소만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건 조소조차 아니다. 당신은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존재조차 아닙니다. 당신은 잠깐 부풀었다 터져버리는 거품방울이고, 파라핀 속에서 연소되는 불꽃같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거대한 쓰레기통에 버려진, 금세 썩어 부패하고 불이 잘 붙는 가연성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세상만사 심각할 일이 있나.

 이리하여 언젠가 태어나 투사가 되었던 개인이라는 <존재>는 광인이라는 <현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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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노예를 구분하는 개념들


 많은 사람들이 영원을 믿고 싶어 한다. 어떤 영원보다도, 특히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영속성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바랬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들은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정해준 모럴과 계율을 따르기만 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그들은 두꺼운 한 권의 책이라는 형태로 손가락을 건 것이다. 그리고 <그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속적 신앙들은 하나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영원을 가리키고 있다. 문제는 신앙의 종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이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자신이 사멸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그들의 소시민적인 삶에서 자유와 환희를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끼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 글쎄, 천만의 말씀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이것은 다소 나 자신만의 미학론에 대한 서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자신 말고 누구의 미학을 이야기하겠는가. 말하건대 미(美)라는 것은 일종의 빛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미학관이 있지만, 그들이 보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항상 빛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빛이라는 것은 항상 형태를 달리하고, 종류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어떤 아름다움은 초봄에 새싹 위에 내려앉는 황금빛 비단 같은 온유한 빛이고, 어떤 아름다움은 하늘이 쪼개지는 순간 번쩍여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섬광이다. 그런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신에서의 무한을 추구하던 이들이 보았던 아름다움은 항상 눈 깜빡 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폭력적인 섬광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그들은 언젠가 태양이 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권위를 위하여 손을 뻗고 기도하던 이들보다도, 더욱 전신전령으로 무한을 추구하던 이들은 차라리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은 이들이었다. 그것이 진실에의 추구에 영혼을 쏟아부어버린 대가였다. 그리고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얻은 것이 절망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이 빛에 눈이 타들어가 미쳐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수만 번도 더 반복된 파괴와 창조 끝에서 인간―사회적 동물이기를 포기한 그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절대적인 죽음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적 정신도, 존재자로서 품고 있는 절망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아름다움이다.
 태양이 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보라. 당신이 밤거리를 걷고 있을 때 돌연 보이는, 노란 가로등 빛이 쓰고 있는 치명적인 마스크를, 저 담장 위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들 고양이의 불신으로 된 눈을, 한순간 들렸다가 멀어지는, 보이지도 않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그렇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아름다움은 유한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은 그 유한성을 포착하려고 한 발버둥이다. 한순간에 지나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또 언젠가는 세계와 함께 허무 속으로 잠겨버릴, 어찌 보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순간. 그것만이 그들이 목숨을 걸어야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탐닉했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대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행위는 탐닉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탐닉하는 인간에게는 회의주의로 돌아설 여유조차 없었기에! 그리하여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절망으로 느끼지도 않게 되었기에. 사람들이 그를 광인이라고 부르는 와중에도, 그는 자유와 휘황찬란한 빛 속에 있었기에 말이다.
 만일 무언가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확신컨대 그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 속에서 퇴색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비켜가는 시간으로 인하여 <본질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영속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소멸일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돌리겠다. 영원을 바라는 사람들. 영생을 바라는 사람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로 인해 당신들이 나를 오만하다고 불러도 나는 개의치 않고 말할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기쁨이라고 믿는 자들, 그들의 정신은 천박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무슨 개념인지를 모른다. 그저 소시민적 쾌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안일함의 색깔을 미(美)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 존재의 본질이 어떤 빛살을 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은 눈이 먼 장님들이다. <Memento mori>. 죽음을 상기하라. 그것은 오직 위협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약자들이 받드는 권위나 약속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죽음을 상기할수록 당신의 인생은 순간의 미학(美學)에 가까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생명을 더욱 찬란한 생명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문제는 바로 아름다움에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휘광은 영원을 부정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자질을 갖고 태어난다. 인간은 미(美)의 빛을 만난다.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다 갈> 수 있을지 갈망한다. 아름다움은 당신의 인생을 스쳐지나간다. <허무주의자들의 무덤을 짓밟고 나아가야한다.>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분명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동반되겠지. 그러나 당신의 영혼이 파괴될 때마다 그 파괴된 부위에서 더 강하고 명징한 새살이 돋는다. 그리고 모든 생(生)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오래 전에 받아들인 진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고통의 손을 움켜잡는 것이다. 나는 수도(修道)의 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광기라고 부르는 길에서, 그 수도의 길이 가장 가까워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고통들이 어느새 퍼레이드 중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금화처럼 보이게 될 때, 환희와 절망이 뒤섞여 당신의 눈동자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바닥을 알 수 없는 영혼의 구렁만이 보이게 될 때, 미(美)에 대한 탐닉이 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통찰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사방팔방에서 터져대는 폭죽처럼 터지게 될 때 말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에 침을 뱉을 때 생명은 비로소 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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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예법과 합리주의, 그리고 보리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양의 진정제와 신경 안정제를 위 속에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글의 주제에 대하여 나는 이십 년도 넘는 기간 동안 괴물 같은 분노와 증오만을 씹어대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만으로는 당신의 심장 속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증오로 물든 인간의 주장이란 논설이 아닌 차라리 폭력, 그것도 독자의 영혼에 칼을 들이대면서 외쳐대는 폭력인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기도 있었다. 당신의 정수리 한복판에 날붙이를 박아 넣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정신의 진액이 내 갈증을 해갈해주었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나 사회참여문학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접어두더라도, 나는 이제 나의 분노들을 문 안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버린 것이다. 항상 증오 때문에 핏발 선 눈동자로 사물을 볼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기로 길을 정한 이상, 나는 당신들의 얼굴에서 역겨움과 조소, 구역질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가끔 잠가둔 문이 열리고 이미 내 인격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연식이 생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예(禮)>라는 것을 말이다. 예절 중에서도 특히 유교적 예법은 우리 사회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사람들의 정신, 그 뿌리 부근에 박혀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유교적 예법이라는 것은 단 한 시도 당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제는 차라리 초자아(Super-ego)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은 그 예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반대편에서 노인이 걸어오면 지래 겁을 먹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여야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잔을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긴장하고 있어야한다. 겁도 없이 어른보다 잔을 위로 들고 건배를 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퍽도 이상한 일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교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조선시대와 함께 시작된 유교적 문명은 당신들의 민족이 과거에 선택했던 다른 사상적 문명의 유구함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짧고, 또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라는 것은 끝없는 전쟁으로 피폐하던 당시의 중국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위정자들이 우민들을 보다 손쉽게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낸 <식(式)>이다. 애당초부터 그들에게 진리나, 사물 혹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ism>은 사실 사상조차 아닌 것이다. 사상이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존재에 대한 고찰과 성찰, 그리고 세계를 향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직>이다. 존재로서의 정직. 인간으로서의 정직. 인식하고 관찰하는 자로서의 정직. 그리고 표현하는 자로서의 정직 말이다. 설령 그 누군가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사상을 부르짖더라도, 그것이 정직하다면 그 부르짖음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왕조, 그리고 조선 왕조,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사회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그 유교라는 것에서는 도무지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이나 정직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한 것은 오직 하나다. 그들-즉 더욱 위에 서고 싶은 자들이 인가를 내린 가면만을 뒤집어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절이라는 것도 굉장한 우스갯소리다. 그 예절의 이름으로 존중받아야할 사람이 된 이들은, 스스로가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피>와 <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왕을 받들어 모셔야하는 이유는 그가 왕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어른 앞에서 엎드려야하는 이유는 그가 당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교교리의 얄팍함은, 마치 파시스트처럼 꽉 막힌 사고의 폐쇄성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발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라나기도 전에 목을 잘라버린다. 그들은 의문이나 반발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그들은 역사 속에서 공중분해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분쇄되어도 그간 민생들에게 주입되어온 통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식민지시대와 근대를 거쳐, 그럭저럭 숨통이 트인 현대에 와서도 유교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당신들의 미간 한복판에 독을 품은 화살촉처럼 박혀있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방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한반도를 뒤덮었고, 젊은이들은 몇 번이나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그에 힘입어 우리가 사는 국가는 서양에서 온 <합리주의>라는 것을 사회에 적용했다. 몇 계몽주의자들은 더 이상의 허례허식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글을 쓰기도 했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굳게 닫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쉽게 열릴 수가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들의 사회는, 늙은 유교적 예법이라는 기반 위에 서양적 합리주의로 페인트칠을 한 것일 뿐인 괴상망측한 모양새가 되었다. 법정 안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두꺼운 법전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합리주의와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윤리인데, 그 사회윤리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조선왕조 시대의 유교적 교리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 법봉을 내리치는 판사가 내린 판결의 근거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초자아가 되어버린 유교적 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저 범죄자는 얼마나 싹수가 없는가>에 기반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패륜범죄라도 접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볼만하다. 검사나 판사들은 이미 오래된 분노로 가득하고, 언론은 <극악무도한 패륜아>라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며, 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이미 <처벌>이 아니라 <복수>나 다름없다. 도대체 패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 범죄자는 다른 범죄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그냥 범죄자>란 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뫼르소처럼, 그 범죄자가 식사시간에 어른들보다 먼저 밥숟갈을 떴다는 죄목도 추가하란 말이다.
 이쯤에서 잠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분명히 분노로 이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글을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혈관 속에서 피가 끓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을 다잡고 계속하도록 하자.
 예절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유교적 교리에 있지도 인간들 사이의 거리에 있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예절이란 식이나 법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자비심, 보리심에 진정한 예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스승들의 행위에는 분명히 모든 인간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다. 통치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사유에서 나온 규정들보다 더 확실하고 자연스러우며 유연한 것이 거기에는 있다. 모든 인간들을 자비로 바라보고,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한 몸처럼 되고 나면 인간이 자신의 몸을 존중하듯이 타인도 자연스럽게 존중하게 된다. 상대가 불편하면 자신이 불편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를 편하게 해주고, 상대가 고통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자신이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들을 해소해주려고 노력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먼저 규제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신체일부처럼 여긴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매달려있는 예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나는 부디 당신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존재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부디 다시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발목에 족쇄를 달아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그 누구의,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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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약함을 정의내릴 수 있는가

 ■ 항상 사회에 남아 그들이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관망하고 있는 나로서는, 군대에서 그들이 배워온 것,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규격화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수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친구들은 내게 <피터 팬>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온몸, 온정신을 다하여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유별난 청년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 그들의 통찰을 너무 안일한 것이라고 비난할 자신감이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군대라는 2년간의 사회인이 되기 위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에게, 내가 다소 가엾은 인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반박할 의지조차 없다. 그렇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온갖 것들에 반항하며 소모적 투쟁을 치르고 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유교적 예법, 조직사회의 규율, 부조리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는 삶, 과잉된 합리성과 실존적 인간조건에 대한 회피. 내가 어머니의 살점과 분리되었을 적부터 나의 심장 속에 살고 있는 그 피투성이의 야수는, 분노와 증오라는 이빨로 아직까지 나의 가슴을 물어뜯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친구들은 나의 흉터를 이해하지 못하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찐득찐득한 피를 객기라고마저 칭한다. 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반박의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전쟁 중에 입으로 내뱉는 말들은, 언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굉장히 피상적인 것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진실에 힘입어,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순순히 털어놓겠다. 내가 발견한 어른이 되지 않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나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심지어 내 절친한 친구들과도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만일 나의 오래된 고독이 머리를 내밀거나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종류의 매력을 느껴, 내가 그어놓은 선이 침범 당하려하는 기색만 보여도 나는 불안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눈동자로 멀리 도망친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조차도 내게는 그저 목의 갈증을 교우관계에서 해갈하기 위한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한 마네킹이고, 내일 그가 차에 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장례식조차 가지 않을 것이다. 말하건대 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공포를 느낀다. 내 심장을 시꺼멓게 물들인 것들은 분노와 증오, 불신과 비밀스러운 조소다. 누군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한다는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정말로 <피터 팬>, 팅커벨이 없어 날지 못하는 피터 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산문은 이미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을 향한 고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내게 있어 문학이란-예술이란 어떤 위대함이나 고결함도 없는 단순히 비겁한 도주로인 것일지도 모른다. 추악함과 퇴폐 속에서 자유와 미학을 찾겠다고 제 발로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은, 밝은 세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문학과 미학에 온 생애를 바치겠다고 다른 그 무엇도 짊어지거나 손을 마주잡지 않은 이유는,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사랑하기를 그만두겠다고 내 고독의 목에 쇠사슬을 감아놓은 것은, 내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취약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독자여, 도대체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이 불량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읽고 있는가? 이것은 패배주의와 퇴폐주의에 빠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법한 인간의 고백록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내가 사실은 그 어떤 종류의 도움도 거절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어른이 되어 짊어져야할 책임들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의 긍정할 수 없는 수만 가지 부조리들과 짐승 같은 싸움을 벌여야하는 것 때문인지 분간할 수도 없다. 어쩌면 둘 중 하나일 것이고, 어쩌면 두 가지가 혼재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 그런데 심지어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방법까지 발견해버렸다! 그것은 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당신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광기의 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흉측스러운 문을 열고, 당신의 고민, 고통, 슬픔, 기쁨, 절망과 희열까지 모조리 다 그 문 안에 처넣어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광기의 문 속에서 온갖 감정과 현상들은 진흙탕처럼 뒤섞이고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 내놓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이 세상 전부가 수준 낮은 농담이라는 결론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그 무엇도 당신을 상처주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의 오만가지 괴로운 과거들도 더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어떤 분명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가스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라이터 불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어버린다.
 이것은 조언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다. 나는 스스로 절벽 밑바닥에 떨어져서, 기어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그 밑바닥에서 오히려 더 깊은 구멍을 파고 있는 인간이다. 심지어 나는 가끔 나의 늙은 분노가 이끄는 대로 들고 있던 삽을 휘둘러 사람들의 목을 벤다. 나는 아직 내 본성 어딘가에 자비심과 찬란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희망, 그 희망의 입에마저 재갈을 물려버렸다. 이제 내게 절망과 비참은 나의 인격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 선량한 독자들이여. 지금 하늘에는 너무나도 밝고 고요한 달이 떠있다. 담배연기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 속에서 그 달빛과 마주하자 내 눈에서는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나도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임에도, 이런 밤이면 나의 나약함과 스스로 만들어낸 비참이 눈동자 앞에서 흔들거린다. 완전히 미쳐버린 광인들이여, 부디 그 광증 밖으로 나오지 말라. 광기와 이성의 경계선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심장이 수천 조각으로 썰리는 것 같은 고통을 당신에게 선사할 것이다. 부디 괴물로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그것이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그리고 그들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는 어른들, 선량한 사회의 소시민들이여. 고흐가 말했듯이 철학과 사색은 당신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부디 그대들의 사랑스러운 가정과 안전한 직장에 몸을 담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 존재에 대한 고민은 다른 불쌍한 사람들에게 맡겨버려라. 철학자들의 논문을 불태우고 그대들의 일상을 지키는 일에만 골몰하라.
 스님께서는 내게, 모든 이들의 자성 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셨다. 그의 말씀대로라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나조차도 본성 속에서 자비와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너무 오래전부터 나는 희망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나는 그 성직자의 자비심 넘치는 말에도 심장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만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른다. 언젠가 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 나는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한없이 증오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내가 있는 이 끔찍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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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앞에서

글/에세이 2014. 5. 1. 19:18 |
교수대 앞에서

 한국에서 사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우선 검사가 피고가 죽어 마땅한 이유를 목청 높여 부르짖는다. 그는 이러한 말들을 한다. 우리 사회의 규율과 양심, 국민이 지켜야할 절대적 질서, 법의 고결함, 그리고 검사 앞에 선 불쌍한 불량인자가 이 공동체에서 제거 당해야할 정당성.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실 이 검사라는 인간은 퍽도 호감이 가는 생김을 하고 있다. 그가 가진 인간적 매력이라는 것은, 그에게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사회 안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갖고 다니듯이 그 검사는 법전을 들고 다니며, 그 법전의 성스러움을 믿고, 심지어 자신의 영혼을 책갈피처럼 그 두꺼운 책의 책장 사이에 끼워두기까지 한다. 아무튼 그는 범죄자에 대하여 사회적 인간이 가져야할 건전한 분노를 사정없이 발산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그러한 분노에 자부심마저 느끼는 것이다. 왜인가 하면, 사회라는, 더 나아가 국가와 집단의식이라는 우상(Idol)께서 그의 분노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검사라는 인간은 도무지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매력적이고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국가>께서 이 더러운 범죄자에게 내리라고 말씀하신 처벌은 바로 죽음이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피고의 변호사는 손짓발짓을 다 써가며 형량을 낮춰보려고 노력하지만, 공동체의 세례를 받은―마치 신부(神父)와 같은 검사의 지엄한, 살인에 대한 명령을 어떻게 흔들어볼 여지가 없다. 사실은 이 변호사조차도 자신이 변호해야할 범죄자에게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공방이 오간 뒤에, 판사는 몇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의 사고는 <살인의 본질>에 대해서는 완전히 빗겨 가있다. 그는 그저 법전과 사회적 윤리에 비추어보아 검사와 변호사 중 누구의 말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망치가 세 번 내려쳐진다. 옳거니, 그들 생각에 저 범죄자는 이 사회에서 하등 쓸모가 없으므로, 목을 매달아 죽인들 누구 하나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을 것 같은 것이다.
 판결이 내려진 후 검사는 오늘도 사회의 일부로서 열심히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돌아선다. 검사는 저 범죄자를 죽이라고 말했고, 판사가 그 주장을 입증해주었으니, 이제 저 범죄자는 대롱대롱 목이 매달려 죽을 것이다. 검사와 판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껴안고 먹음직스런 식사를 한 뒤에 기분 좋은 피로를 느끼며 잠에 들 것이다. 아하, 그것 참 신통한 방법이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란 말인가. 식탁에 돼지고기를 올리기 위해 돼지의 멱을 따고 온몸의 피를 묻히며 찢어지는 돼지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퍽도 마음 가뿐한 일이다.
 여하간 변호사는 그 흉악한 범죄자에게 찝찝한 목소리로 사과 한 마디쯤은 했을 것이다. 이제 피고는 교도소로 옮겨지고, 화장실만한 감옥에 갇혀 거의 모든 행위가 제한된다. 그 비좁은 감방에서 제한된 자유만을 가지고서 이제 그가 기다려야하는 것은 한 번의 사인이다.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훌륭한 정치가가 사형집행을 위한 서류에 사인을 하기만을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주, 혹은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서류에 인가가 내려진다. 우리는 도대체 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이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왜 자신이 굳이 이런 서류에 사인을 해야 되는 가에 대해서 그 누군가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튼 일은 일이다. 그는 사인을 한 뒤에 도장을 찍고 만다.
 날이 정해지면 이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간수들이 사형수를 감옥에서 꺼내더니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씌우고 어딘가로 끌고 간다. 사형수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도무지 반항할 틈새도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이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간수들은 교수대 앞으로 그를 데려가 목에 밧줄을 건 뒤에 사라진다. 그들이 할 일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세 명의 공무원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서 그 사형수를 죽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명령이 내려진다면 아마 당신은 방편을 찾기 위해 꽤나 고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다. 우리들은 수 천 년 전부터 그 방법을 찾아내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는 일은, 목에 밧줄이 걸린 사형수를 내버려두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세 개의 버튼 앞에 각자 서는 것이다. 그리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 숫자를 세고, 동시에 버튼 세 개를 누른다. 그 세 개의 버튼 중 하나가 무작위하게 작동하여 사형수 밑의 발판이 덜컹하고 떨어진다. 그 사람은 이제 목뼈가 분질러져 죽었다.
 이것 좀 보시라. 기가 막히지 않는가?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사형이라는 절차에 가담한 사람들 중 아무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아무도 죄책감이나 살생을 저질렀다는 지저분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형수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도 참 대단하지 아니한가? 과거에는 사람을 죽이려면 주먹이든 칼이든 도끼든, 무엇이든 쥐고서 직접 손을 휘둘러야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이유가 명확하다고 해도 기분이 더러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사회의 편의를 위해서 책임이라는 것을 국가나 집단 같은 기묘한 추상성에 전가하고 마지막에는 빨간색의 작은 버튼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누가 그 사형수를 죽인 건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다. 옳거니, 그래서 당신들의 사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로군…….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혹에 빠질 것 같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뭔가가 분명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 사형수의 죽음을 멋진 논리로 부르짖던 검사는 지금 어딜 갔지? 사형 집행 서류에 사인을 한 그 신사는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느냔 말이야? 글쎄, 만약 당신이 그런 의혹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손을 유심히 보기 바란다. 그리고 당신의 지갑에 들어있는 반짝거리는 지폐들도 말이다. 당신들이 작당하여 거울로 된 미로에 파묻어버린 것, 그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당신들의 손과 지폐에 묻어있는 신선하고 끈적거리는 피가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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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해서 변해가고,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어제 왔던 봄이 어느새 여름과 가을을 거쳐, 북풍과 함께 몰아치는 겨울로 나타난다. 새로운 한 해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신년이라는 것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이고, 과거에도 수도 없이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얼음송곳 같은 겨울의 빛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고요한 죽음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잠에 들고 죽는 계절, 이 추위 속에서는 인간들마저도 말이 없어지고 돌과 불꽃으로 쌓은 자신의 방패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사방에 죽음이 만연해있고 여름에는 그렇게도 수다스러웠던 태양이 이제 대지를 주시하는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 같은 모습으로 절망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런 계절에야말로 사람은 삶을 사유한다. 황금색 비단 같은 햇살의 물결이 나체의 싱그러운 피부를 감싸 안고 파도 속에서 생명의 호흡을 느끼며 수영하던 여름에는 사유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모든 이들이 생명을 소진하느라 바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추운 계절에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죽음의 그러데이션을 마주하고 생각에 빠질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콘크리트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시멘트 조각마저도 잠에 빠져있는 것 같은 시간에,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변화무쌍하면서도 한결 같은 세상 어딘가에 영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영원의 흔적, 그것은 수천 년이나 젊은이들의 영혼을 괴롭혀온 것이었다. 우리는 만물의 한계성을 알고 있다. 태어난 것은 죽고, 만들어진 것은 망가진다. 그런데도 젊은 예술가들의 영혼은 이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피와 흙으로 다져진 땅의 역사와 하늘의 광활함 때문에 혼란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에 대한 갈구이다. 이 위대하고도 위험한 갈구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본성처럼 모두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류는 종교를 만들었고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며 절대자의 허무한 발자국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충분히 지혜로운 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무한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어도 인간에게는, 적어도 인간의 세계에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처음으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끔찍한 고함을 쳤을까? 누가 정령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피를 흘렸을까? 그리하여 니체가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하여 랭보가 불타는 아프리카 땅에서 외다리로 죽음을 맞이했다. 무한에 대한 갈구는 이 일시적인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위험한 것이라서 결국은 인간을 광기 속으로 떨어트리고야 만다.
 어떤 이들은 아주 교활하다. 그들은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정신에 대한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혼돈 속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아우성치는 갈망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봄 아니면 가을이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만, 그것을 잊어버린 채로 그냥 둔다. 바쁜 일상과 반복되는 타협, 그리고 타성으로 영혼의 뜨거운 피를 굳혀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인간>이 되고야 만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선한 사람들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영혼의 유치한 외침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는 영광의 열매를 찾아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막으로 휘청거리며 나아가지도 않는다. 그래, 선한 이들아! 이것은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젊은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누가 미치광이 같은 영혼의 갈망에 붙들려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디에 정답이 있다고? 타성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위협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앞으로 올 12월 31일의 마지막 순간에도 앞으로 다가올 일분을 이미 지나간 일분처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른>들 조차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이 미치광이였던 그 필연적인 시절을 말이다. 원인 모를 정신의 목마름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어쩌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정체불명의 추상 때문에 새하얗게 질린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혼돈과 드높은 절망의 나날들을. 누구에게나 그러한 본성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모두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에 대한 불타는 듯한 열망이 있었다.
 그것은 광인의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자의 길이기도 하다. 그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계율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우주 전체에 수북이 쌓여 점멸하는 아나키즘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특질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젠가 필멸할 아름다움을 좇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먹구름이 자욱이 낀 하늘에서 번쩍하고 굴러 떨어지는 빛의 물방울에 감동하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은 시절이 지나가버린 것에 대해서 회상해보라. 수많은 위대한 문명들이 무너져 흙과 모래먼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우리에게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정답을 알고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채로 선택하기만 한다. 아하, 모든 것이 결국에는 허무의 절대적인 구덩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마는데, 선택 따위가 무슨 중요성을 갖느냐고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보라, 느껴보라, 우리는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
 로트레아몽과 반 고흐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누군가 그들의 인생이 공허하다고 말했는가? 혹은 누군가가 그들을 위대하다고 말했는가? 만약 로트레아몽 백작의 시집이 끝내 발견되지 못하고 프랑스의 한 도서관 구석에서 썩어버리고 말았다면? 만약 반 고흐의 그림이 단 한 점도 팔리지 않고 그의 이름이 역사의 뒤틀림 속에서 묻혀버렸다면? 그런데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중요성을 가진단 말인가? 감히 추측하건데, 우리는 아마도 위대함을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위대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무한의 끝자락을, 영원의 흔적을 장님처럼 더듬어 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절망 때문에 좌절할 필요까지는 없다. 절망과 좌절은 동의어가 아니다. 세계는 절망적이지만, 인간은 좌절하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내일이 온다.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쏟아져 내리며 도무지 가늠할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해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모든 것이 사멸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 아래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선택해야한다. 왜냐하면 미래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유일한 의무는 오직 살아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슴 속에서 미치광이처럼 아우성치는 어떤 열망을 품고, 그것에 휘둘려 손을 피에 적시기도 하고, 혹은 그 열망의 입에 재갈을 물려 타성 속에 묻어버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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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금의 물

글/에세이 2013. 9. 28. 22:49 |
한 모금의 물


 누구에게나 평생 짊어지고 가는 고민이 있듯이 내게도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온 것이 있었다. 그 고민의 해방구를 찾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스크를 관찰하며 살아온 것 같다. 말인즉슨,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과연 나의 동족인지를 의심하며 샅샅이 수색하고 다녔던 것이다. 문제의 시발점은 굉장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감상주의적으로 그것을 평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냉철하게, 혹은 ―날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힘을 빌려―정신분석학적으로, 아니면 마치 타인의 삶인 것처럼 무관심하게, 반대로 원망과 증오를 가득 담아서……. 그러나 내가 무슨 입장을 선택하든 사실 자체는 그다지 변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나의 유전적 특성 때문이든 내 피에 함유된 감상주의자의 소질 때문이든 나의 위대하시고도 절망적인 어머니 때문이든, 나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어린 시절에 고독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우선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고독의 자손들이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둘째로 진심으로 인간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것, 셋째로 끝없는 갈증에 아직까지도 시달리게 되는 것. 사실 첫 번째 예와 세 번째 예는 거의 비슷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의 자손>들 중 하나가 바로 갈증이고, 또 동시에 선천적으로 지고 태어나는 그 정신의 갈증이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갈증. 감히 말 하건데, 나는 태양의 빛살과 인간들의 따스한 피를 얻어 마시며 살고 있는 <갈증>이다. 어떤 실존주의 철학자가 모든 인간이 다 갈증의 현상이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말을 한 철학자는 없었다. 아무래도 앙드레 지드나 알베르 까뮈, 장 폴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한 말이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뒤섞이고 압축되어 만들어진 문장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내 주변의 인물들은 그다지 그렇지 않았다. 너무도 추상적이고 정체모를 갈증에 시달리며, 사막을 기어 다니는 개의 눈동자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이러한 발상은 어린아이 특유의 고립된 세계관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다른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처절한, 그 죽어가는 새된 비명을 듣지 못하고 유유자적 세계를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 혀를 대든 바싹 마른 모래의 절망적인 맛밖에 보지 못했고, 무엇인지도 모를, 허공을 떠다니는 <절대>를 갈구하며 나 자신의 생명을 물어뜯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나는 왜 남들과 다른가? 나는 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맛으로 입안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가. 내 안에는 의심이 생겼다. 저들이 과연 나의 동족인가에 대한…….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었다. 굳이 선을 긋자면 <저들>과 <나>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거대한, 60억이라는 숫자로 무장한 집단 속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저들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인 것일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증오가 나의 뿌리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물론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많은 이질적 무리 속에 외톨박이로 내버려진 존재가 자기혐오와 의구심 끝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증오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이 <우리>와 <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서 전쟁은 <나>와 <그들 모두> 사이에서 24시간 발생하고 있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었다. 곧 나는 증오의 아들이 되었고 사람들이 소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의 감각을 잠식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실낱같은 기대에 매달린 나의 탐구는 지속되었다. 나의 동족을 찾는 것! 처음에 나는 죽은 사람들부터 시작했다. 그렇다, 죽은 사람들. 인류에게는 문자라는 훌륭한 발명품이 있었다. 나에게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릿수보다 몇 억 배는 되는 죽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단이 있었다. 나는 걸신들린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수도 없이 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철학가가 있었고, 성자라 불리는 사람들, 혹은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또 무자비하게 죽어간 도저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년에 걸친 독서 끝에 과거에 죽었던 누군가는 나와 흡사한―아! 나는 도저히 <같은>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이 너무도 오만한 단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철학자, 예술가들과 내가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는가?― 갈증을 가지고 평생을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그 <무언가>를 구했는지 구하지 못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위안이자 동시에 공포였다. 내가 속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이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 끝에는 거의 열이면 아홉 광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들은 펜과 붓으로 무장하고 눈을 가린 채, 거의 자살적인 달음박질로 광기의 아가리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죽었다(정말이다). 나도 그런 운명에 묶여있단 말인가? 정말로 나는 이 갈증을 평생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튼 간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검토를 마친 뒤에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갔다. 이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나는 그 갈증을 짊어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러한 사람들을 열 명도 만나지 못했다. 아무튼 존재하기는 존재했다.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 나의 서투른 사교기술로 그들의 지인, 혹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술가였고, 몇 명은 성직자이거나 혹은 아무 곳에도 쓸 일 없는 백수―백수라는 표현은 너무 과격한가? 그렇다면 내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을 이용해 그들을 <골방철학자>라고 부르도록 하자―였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단 한 모금의 시원한 물을 찾아 살아가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내 방식은 문학이었다. 수십 번 정도 절망 끝에 몰린 뒤에는 갈증을 해소하려고 발악하지 않는 방법을 문학 위에 차용하게 되었지만……. 여하간 그들도 답을 모르는 것은 확실했다. 나도, 그들도, 그저 무작위성에 한쪽 발을 걸친 채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내게 <인간>이라는 타이틀이 부여된 것만으로도 다소 만족했다. 그 뒤의 삶은 활자와 더불어 파도와 폭풍우에 휩쓸리는 반복적인 절망과 희열의 길이었다. 어느 날은 나의 심장을 산산이 깨뜨리는 미(美)의 노래를 듣고 마침내 살길을 찾았다며 희희거리다가, 어느 날은 결국 이 잔인한 갈증이 나의 목을 물어뜯고야마는구나 하고 눈물샘에서 알코올을 방울방울 흘리며 더러운 길바닥에 나뒹구는, 그러한 날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갈증을 해소해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위대함인가? 아름다움인가? 성스러움인가? 명예인가? 사랑인가? 여전히 내 이빨 사이에는 유아기의 욕구불만을 상징하는 담배꽁초가 물려있고, 술을 먹기 위해 돈을 벌며, 나는 사회적으로 불구인 절름발이다. 그러나 여하 간에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한 모금의 시원한 물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서는, 죽고자 해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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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봄

글/에세이 2012. 4. 5. 23:55 |
 봄이 왔는데도 땅 위는 메말랐고 황량하다. 하늘에는 여전히 겨울의 색깔. 나는 사물들의 광야에서 생명의 달콤한 살점을 그린다.
 도서관 창가에서 내다보는 풍경에는 녹색이 없다. 벌써 4월이 되었는데도 거리 위에서 나부끼는 바람은 봄이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철사 조형물처럼 뒤틀린 채 비죽비죽 솟은 나무들에는 새싹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잿빛으로 황폐하다. 나는 그 나무가 뿌리박은 토지를 본다. 일 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을 법한 좁은 땅이다. 그 흙 바깥으로는 전부 보도블록이 땅을 틀어막고 있다. 저렇듯 생명의 숨구멍이 철통처럼 막혀있으니 나무도 싹을 틔울 마음이 들지 않을 듯도 싶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차다. 공기 중에서는 겨울의 냄새도 봄의 냄새도 아닌, 어떤 메마르고 정체된 듯한 냄새가 난다. 가끔 비가 오기 직전에는 습기 탓인지 진한 봄의 냄새가, 숲의 정액 냄새 같은 것이 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공기 중에서는 더 이상 시베리아의 투명하고 영혼을 설레게 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꽉 막힌 냉장고 안에 들어앉아있는 느낌이다.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푸르고 가끔 뜯어진 천 조각 같은, 작고 하얀 구름이 두어 개씩 흐르지만 어딘가 실존하는 풍경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색연필로 빈틈없이 칠해놓은 파란 종잇장 같다. 말하자면 거대한 하늘 그림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서는 높이도 거리감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나는 지나간 겨울을 회상한다. 그 완벽하게 투명했던 하늘과, 살을 엘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행인들의 눈빛을 날카롭게 하고 어쩐지 정신의 꼭짓점을 뿌듯하게 만들던 그 계절을 말이다. 그 냉기에는 어떤 인간미 없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추위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자신의 세계 속에 빠져서 흥분하여 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겨울의 그 초인간적인 냄새는 이미 지나가고 없다. 다시 일 년이 흘러야만 우리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으리라.
 지금 이 덜 된 봄. 나는 이파리 없는 나무들의 숲으로 눈길을 향한다. 지난 가을부터 썩기 시작하여 이제 흙이 된 낙엽들과 나무의 갈색 몸통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가시덩굴 따위로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말없이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이 모호한 추위와,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세계와 나 사이에서 어떤 절망을 발견한다! 왜인지 “저” 세계는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불타 재가 되는 일도, 얼어서 영원히 죽는 일도 없이 언제까지고 이 기묘한 상태를 지속할 것만 같은 것이다. 문뜩 어떤 불안이 뱀처럼 내 심장을 휘감는다. 이렇게나 덜 되어먹은 상태로? 나는 생각한다. 그 수많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들과 퇴폐주의자들을 내버려두고 세계는 이대로 정지한단 말인가? 새삼 “영원”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의 눈동자가 떨린다. 영원보다는 죽음이 훨씬 낫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이 괴상한 계절의 경계선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결론을 향해 돌진하지도 못하며 그저 이대로 멈춰서버린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어떤 관념의 냄새가 공기 중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이 비주얼. 모든 기대가 거세당한 것 같은 모습만이 유리창에 커다랗게 비친다.
 그때 짝을 지은 두 사람의 여학생이 내 뒤를 지나가며 경쾌한 소리로 웃는다. 그녀들은 갈색 체크무늬 교복치마 위에 두터운 재킷을 입고 각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벌써 문 밖으로 향하고 있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학생들이 잘 신는 얇고 흰 신발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을 밟고 지나간다. 젊은 여자들의 밝고 가벼운 웃음소리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계인 것이다. 내가 이해해본 적도 없고 가져본 적도 없는 그 감정을 갖고서 마음껏 바깥으로 표현하는 그녀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인종이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지 못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녀들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순간 나는 내가 나의 공포스러운 망상에서 깨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안경을 벗어 창가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눈을 비빈다. 눈알 속에서 피로가 물웅덩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흩어지더니 서서히 흐려진다. 나는 다시 안경을 쓰고 창밖을 바라본다. 풍경은 여전히 황량하지만 세계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이 불쾌한 계절도 언젠가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나무에는 새싹이 돋고 바람은 날뛰는 봄의 향기를 싣고 사방으로 불어댈 것이다. 이 세계가 영원이라는 절대적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버릴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 나는 봄의 달콤한 살맛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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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해도 실패해도 인생은 계속되며 내일은 또 온다. 시간은 오직 미래만을 향하여 향일성 식물처럼 뻗어나가고, 그 절대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죽음으로 투신하는 것 하나 뿐이다. 나는 어떤가? 세계의 온갖 우중충하고 날카로운 색깔들 사이에서 나는 늘 죽음을, 즉 해방을, 마음 편한 포기를 꿈꿔왔다. 포기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것이다. 퇴폐주의자가 태양을 향해 눈을 향하지 않는 것처럼, 포기는 늪처럼 끈적끈적하고 깊은 안심을 사람에게 선물해준다. 고뇌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생각되는 독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 정신은 너무도 쉽게 상처입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나는 포기와 부정의 경계선에 서서 양극점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떤 때에 내 영혼은 모든 의식들을 내버린 채 삶을 포기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때에는 누구보다 명철하게 눈을 뜨고 가시나무 사이에 궁극적인 질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원했다. 나는 경계선 상에서 유난히도 모순의 감정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인간적인 희망들이 부정당하고 내가 안락하게 눈감을 수 있는 자리마저도 세상의 적의 넘치는 손아귀에 빼앗겨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경계선 위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퍽이나 잔혹하게도, 실패는 내게서 포기의 가능성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그것은 내 선천적인 반항아적 기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는 발을 빼앗겨도 앞으로 기어갈 의지─어쩌면 아집에 지나지 않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내 정신의 밑동이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언제고간에 무엇인가가 나를 밀친다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져 절망의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내게는 다리와 발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를 밀친 무심한 의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두개골과 가슴 속은 반항의 감정으로 하얗게 되었다. 그것은 병든 증오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반항은 참으로 상쾌하고 선명했다. 마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걸작을 구상하며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화가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순백의 광기처럼, 그것은 온통 메마른 고통으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병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나는 미래에 관여하지 않는 생명을 본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워버렸지만, 오히려 다른 여지들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되자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발적 죽음은─적어도 내 상황에선─ 관념의 부르주아적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온갖 요란한 불꽃과 눈가림과 혼란을 위한 장막들이 걷어내진, 극도로 가난한 세계에서는 삶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오직 삶 뿐만으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삶.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홀로 돋아난 인간존재.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부수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은 자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열망하는 것. 태양을 향해 천공으로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을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향해 기는 것밖에 없다. 여전히 나의 세계에는 고통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흘러넘치고 나는 손톱만한 희망마저 거부할 정도로 헐벗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차라리 그 필연성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나는 산다. 살 것이다.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살 것이고, 시선 저 끝에서 태양처럼 번쩍이며 섬광을 발하는 그것을 향해 뼈와 근육으로 된 가지를 뻗을 것이다. 이것은 긍정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며 희망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부정이자 반항인 동시에 실존에 구속당한 인간조건이 만들어낸 유일한 결과이며,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목이 잘렸다는 점에서는 절망과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아무튼지 분명한 것은, 또 한 번의 내일이 오면 나는 기염을 토하며 그것을 깨물어 삼키듯이 살아 내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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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신념과 미덕과 믿음과 소명으로 이루어진 황금으로 된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들의 발이 향해야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우선 우리 자신이 어떤 땅에서, 어느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는지를 알아야한다. 우리의 정신을 뿌옇게 가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오, 희망은 실재할지도 모른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가 되지 않는 미래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머리위에 걸어놓은 당나귀의 당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반복하건데 우선 우리가 태어난 세계를 명철한 눈으로 주시해야한다. 관찰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생명이자 떠오르는 시간들이다. 어느 굉장한 허무주의자가 지어놓은 거대한 관념의 체제가 아니다. 현상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계도 아니다. 태양의 하얀 빛살과 대지를 뒤덮은 콘크리트빛 인공 구조물, 인간의 누리끼리한 가죽과 나뭇잎의 초록빛깔에 눈을 두어야한다. 우리와 함께 태어난 형제의 눈 안쪽에 담겨 있는 새까만 맹목성과 필멸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맛봐야한다. 매일 같이 자라는 손톱을 보라. 그것은 손가락의 관절 안쪽에서부터 밀려나와 점점 길어지고, 우리는 하얗게 밀려난 부분들을 깎아내어 버린다. 세포는 늙고 죽어 피부위에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세계는 생명과 죽음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의 소관을 벗어난 영역과 희망사항이나 다름없는 은총에 대해 말할 셈이라면 당장 입을 다물도록 하라. 당신은 인간이며 우리들도 인간이다. 그것은 정신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촉각밖에 알지 못하며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논하는 인간의 철학을 한다. 상정된 초현상은 흥미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실에 대한 인간의 탐구에 답을 내주지는 못한다. 진실!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우리에게 휘둘러진 단 하나의 실마리이자 화살표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죽음이고 필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죽음이다.
 내가 허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린다! 「하-하! 당신은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자로군! 사물에는 현상보다 깊은 본질적 의미가 있으며 삶과 죽음 또한 표상적인 것일 뿐, 그 속에는 마땅히 영원이라는 축복이 있다네!」 뭐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현상보다 깊은 본질, 의미, 심지어 영원과 축복이라니! 그들이 내게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삶> 이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거나 이 <세상>이 아닌 세상과 만난 적이 있거나 <영원>한 존재였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죽음 너머를 내다보거나 논리초월적 논리를 증명하거나 영원의 무게를 재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던가? 세상은 곧 세상이며 삶은 곧 삶이고 죽음은 곧 죽음이다. 존재란 <고작> 그만큼의 존재다. 물론 죽음 뒤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영혼이 영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느 절대성이 우리에게 존재의 소명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단언할 만큼 오만할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몇 번이나 말했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모순과 오류로 살아가는 정신이며 죽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삶의 인간>인 우리에게는―적어도 우리가 살아있고, 또 인간인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삶>에 한정된다. 죽음은 존재의 종언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들이 절멸하는 장소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뇌와 척수와 호르몬과 정신과 영혼과 그 외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혹은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온갖 화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영적인 요소들이다. 죽음은 그것들을 전부 종말로 밀어 넣거나, 최소한 그 중 일부라도 <나>에게서 떼어내 썩어 없어지게 만든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나>의 끝인 것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나>의 끝은 동시에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심판받지 못하며, 그 무엇도 취향 이외의 것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관념들을 부정해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긍정한다. 이 황폐한 대지에는 애초부터 신념도 미덕도 믿음도 소명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 어떠한 길도 없고 우리는 광막한 사막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부정당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물들에게 의미를 내려주는 절대적인 가치의 척도가 부정당했다는 뜻이다. 신은 필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절대성은 이미 허구의 단어가 된지 오래다.
 고로 이 땅에는 법이 없다. 규칙도 질서도 도덕도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란 삶의 인간에게는 나약한 존재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공갈협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들을 옭아매는 것은 왜곡된 합리주의에서 태어난 암묵적 협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합리주의가 근거라고 말하기도 낯 뜨거울 만큼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것의 뿌리는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심지어 그 <암묵적 협의>라는 것은 어떤 돌발적인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억압이 되기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 형법에 대한 그들의 숭배를 비난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자. 우리는 결론으로 넘어가야한다.

3.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없다.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음을 보증으로 두고 완전한 정신의 자유에 눈이 뜨였다. 자유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철한 것이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순간 모든 <희망의 노예>들이 우리를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 토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맹목성과 허무와 그리고 사멸을 인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는다면 그 어떤 행위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언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찾아올지 모르는 사형집행자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개인이며 눈을 뜬 의식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희망의 노예들이 말하는, 소위 <범죄자의 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단지 실존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독안개와 역겨운 기만들을 걷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사막 위에는 법률도 표지판도 없다.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외롭고 공허하며, 치명적으로 자유롭고 열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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