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왜인지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내겐 딱히 갈 곳이 없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내 시간은 내일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미래를 믿지 마시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고 누가 말했지?

이 땅에는 해가 뜨지 않는 밤도 있다, 내가 걷는 이 밤도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그런데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정신차려보면 황혼이다, 해나 달을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어딘가 골목구석에 앉아 벽돌색의 세상에 대해 노래

부르고 싶지만 밤이 오기 전에 어서 걸어야한다

밤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리기 전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는데

구름은 항상 나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저편으로 간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공간들은 내게 텅 비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망각은 심연보다 어둡고 괴물적인 아가리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수증기 가득한 숲에서 나무들은 생명을 잃고

내가 밟는 것들은 수억 살 먹은 시체들의 유골, 나는 비문 하나 없는 묘지를

서걱서걱 밟으며 걸어가 버린다


안녕, 금화들의 도시여, 나는 미래를 믿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믿는다. 내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향하는 것은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더 가쁘게 한다, 멈추는 방법은

태어난 이래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이 행성은 왜 자전을 멈추지 못하지? 별들에게 시를 읊을 시간이 그에겐 없다

어떤 것은 끝나야만 한다, 혹은 모든 것은 끝나야만 한다, 하늘은 얼어붙고

눈이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고, 나는 걷는 얼음, 흙, 진창

또 밤, 밤 뒤엔 다시 밤


행성과 같은 속도로 걷는 눈동자에게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밤

Posted by Lim_
TAG 문학, ,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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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냥" 2018.11.04 12:3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블로그의 랜덤 버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눌러보다가, 이 곳에 오게 되었네요. 글이 좋습니다. 종종 찾아 오겠습니다.

십자가

글/시 2018.10.17 23:56 |

십자가



페이지 위에 빼곡히 찬 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일상

내가 서있는 곳은 긴장과 분노로 다져진 정상

뛰노는 아이들은 순진하고 생활은 행복으로 충만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 지르지 ‘그만’

그게 내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 마

행복은 너희끼리 나눠가지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마

나는 이 정상까지 십자가를 짊어 매고 올라왔어

너희는 그 일상에서 기도하는 손으로 연민 했어


바람은 차가워지는데 등줄기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

그래도 난 폭풍을 쥐고 정상의 정상으로 내쳐 가

아무도 나한테 멈추라고 하지 마, 땅의 끝이 있다고 믿게 하지 마

마지막 내 발자국이 데드마스크가 될 때

난 쓰러지며 웃을 거야, 죽으면서 외칠 거야 ‘어때’


등에 맨 십자가는 온 관절을 짓누르지만, 난 그걸 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어

손에 권총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쏘겠지만, 헛된 상상 속에서도 난 앞으로 걸어

내 맨가슴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여? 이것들이 전부 내 방패야

살면 살수록 몸은 흉터로 덮여, 아무튼 난 그걸 감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삶은 집어치워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

내 옆에서 사라져, 난 행복할 수 없어

그저 내 십자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해


그러니까 날 추하다고 말해

어쨌든 너희를 위해 아름다워지진 못해

Posted by Lim_
TAG 문학, ,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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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길

글/시 2018.10.10 00:49 |

멀어지는 길



한밤에 집으로 가네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난 어깨에 맨 가방을 들쳐 매고

가로등 밑을 조용히 지나

나 집으로 돌아가네

그러나 발자국은 점점

느려져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거짓말 같지

난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나서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생시인지 아직 꿈을 꾸는 건지


그때 창 밖에서 요란하게

동전소리가 났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

내 턱에서는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을 향해 웃어보였다네


옷을 갖춰 입고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은

누가 지적할 일도 없어 보였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소리는

날 가면 쓴 광대로 만들고


너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너무 짧은 밤이 오면

나 한 몸 뉘일 집을 찾아 가네

그런데 왜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내 집에 더 가까워지면 내 발은

고철처럼 무거워지며 점점 더뎌지는데

해는 지평선 밑을 흐르고 있다네


나 또 잠이 들면 거짓 속의 죽음을 찾겠지

결국 깨버릴 짧은 모든 망각의 늪을

그리고 해는 날 두들겨 깨워 눈을 뜨고 말테고

그러면 나 또 거울을 보며 웃는다네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 아무 것도 없는 내일을 향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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