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체코인이 심어두고 간



긴 고독 속에 침묵을 지키며 살다보면

카프카의 오드라덱이 쳐다보는 듯하다

그 서걱서걱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나는 허상으로 가득 찬 공허 속에 오로지 혼자다.


닫힌 방에 가만히 앉아

어떤 본 일 없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거나―혹은

제신諸神들이 뛰노는 숲을

영원히 오지 않을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꿈꾸고 있으면


오드라덱인지 망가진 실패인지 여하간에 그것이

소름끼치게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꿈을 끊고 버리고 떠나야 하리라

이 육신도 마음도 피었다 꺼지는 불꽃이니


고독은 옳지만 고독에 몸부림치는 마음은 옳지 않다.


실상 이것은 축복의 기회다! 내가

허구에 현혹되지 않고 공허의 한복판에 꼿꼿이

앉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은 분명한 기회다

그러나 나는 헛된 열병에 부푼 몸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늙은이의 일이고

나는 항상 찬란한 파국을 꿈꿔왔으니 삶에 공포는 없다

그러나 언뜻 무거워 보이는 이 육신의 마음이

자꾸만 한 세계 바깥으로 손을 뻗으려는 것이 내게는 큰 고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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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가 예정된 환희

글/시 2017. 7. 7. 15:18 |

익사가 예정된 환희



한 모금의 물을 위해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별조차 찾아오지 않는 어두운 대양에서

나는 뭍도 찾지 않고 헤엄쳐왔다

허파로 흘러들어간 바닷물들은 불길이 되어

내장을 태웠다


파도에 닳아 뼈가 튀어나온 내 팔다리는

그럼에도 수영을 멈출 줄 몰랐고

나는 기침을 뱉으며 새까만 바다를

직선으로 헤매고 또 헤맸다


너무 어두워 수평선은커녕

내가 잠긴 바다도 보이지를 않았다

검은 하늘과 검은 대양은 하나 되어

나는 공포의 공허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파도는 집요하게 내 뼈를 깎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바닷고기들이

나의 살점들을 뜯었다 점점 나는

헤엄치는 백골이 되어갔다


어디에도 눈동자 같은 것은 없었다

달과 별은 뜨지 않고 물고기들은

너무 오래 심해에서 살아 눈이 없었다

나는 감겨진 세상에 있었다


태어난 이래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뻤다

자신이 왜 수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근육과 뼈가 파도의 이빨에 뜯겨져나감이 기뻤다

뭍이 없어 기뻤고 빛이 없어 기뻤다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없이 헤엄치다 죽어 닳아가는 것이

기뻤다 어디에서 와서 이 폭풍우치는 지옥을 건너는 것인가

알 수 없어 기뻤다


불길에 허파가 화끈거려 용암 같은 기침이 터져 나오고

순간순간 힘이 빠져 가라앉다가 비참한 소생의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고 다시 팔다리를 휘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이

기뻐 환희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세계의 맨 얼굴을 보지 못하고 두 다리로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환희를 모를 것이라고

나는 익사의 고통에 눈물 흘리며 소리쳤다

세계라는 저주와 맞대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썩어갈 것이라고


우리들의 실존은 해류의 한 조각 정도다.


나는 단 한 번도 살려달라고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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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가 울기를 멈춘 시간



새벽 다섯 시

태양보다 빨리 하늘은 밝아오는데

새는 운다.

나는 울지 못한다.


골목에선 흙과 물방울의 냄새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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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아이

글/시 2017. 6. 15. 05:38 |

세계의 아이



그것은 한 줌의 화약이었고 불어오는 폭풍이었고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지진이었고 터져 흐르는 용암이었다가

마침내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새벽 네 시의 흰색과 검은색의 구둣발들 사이에서

군청색으로 휩쓰는 어둠이었고 침묵하고 있는 재앙이었다

더러는 재앙이기를 갈망하는 움찔거리는 심장이었다


심연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물들 같은 세상에서

그는 거대한 조소를 믿었고 그것을 경멸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선지자였다


짐승들은 무의식의 기쁨을 포효했고 마천루들은

굽어 내려다보는 콘크리트의 눈동자였고 그러나 다만

인간만이 직선과 기하학을 찾아 말라가고 있었다


총탄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홀로 도끼만을 들었고

죽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비껴갔다 그는

살과 뼈와 피와 새끼손가락을 걸었고 그래서 절대 총을 들지 않았다


마침내 한 줌의 화약으로 돌아가 부스러지며

철모 밑에 깊게 묻힌 그것은 가끔씩 천공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잔악하게 폭발할 것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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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나름의

글/시 2017. 5. 30. 20:57 |

초발심 나름의



어드메냐 이름 없는 사람들 있거나 아니 있거나 했던 기억도 못할 언덕빼기

허리 숙여 신발끈 단단히 매고 나는 간다 하고 옷깃 털었던 곳이 어드메냐

여하간에 발길 가벼운 절름발이마냥 봇짐도 없이 나는 가기로 했다

동행자는 몇 명의 존귀한 유령들이었으나 나는 산 사람이라 대화할 생각이 없다

가기로 했으니 가야지, 그러니 이제 천만 리를 넘어 내 난 마을에 다시 온다손 하여도

이 마을은 모르는 마을인 것이다 이 마을사람들도 낯모르는 이들인 것이다

가다 가다 지치고 배가 곯아 풀섶에 푹 앉아도 동행 영가들 고수레만 던지고 나는 또 간다

신발끈 묶은 뒤로 그 언덕빼기 뒤로 한 이후 가기만 하는 것이다

만나 악수한 사람도 곧 작별인사 할 사람이고 작별인사 한 사람도 곧 만나 악수할

그런 사람들일 길로 나는 간다 그 외 할 일이라고는 내 양식 송두리째 고수레 던져

발걸음 점점 높아지고 가벼워지다 외롭고 쓸쓸허이 웃으면서 휘적휘적 공중을 걷는 일이다

그릴 사람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떠날 사람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러니 더욱 가고 또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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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글/시 2017. 5. 21. 21:16 |

반성



햇살이 산사를 몹시 빛나며 흐르게 하는가 싶었더니

순식간에 밤이 내렸다

초여름의 개구리 우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새까만 산사에 울리는데

나는 높고 외롭다 더러는

곧 높고 외로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으로 털레털레 오기 전 손수 도끼를 들어

내 발목과 손에 난 두꺼운 줄기들과 잔가지들

전부 쩔꺽쩔꺽 끊어버렸다고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침 날개미들의 번식철, 산사 곳곳에

커다란 검은 반점 같은 수개미들 시체가 산처럼 쌓인 걸 보니

심장에서 뻗은 잔가지들은 그대로였는가


슬픔은 이미 걷어내었는데도 향 연기처럼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절망에 나는 뒤척거린다

뒤척거리면 이때다 하고 수마睡魔가 내게 이빨자국을

깊고 흉한 이빨자국을 내니 이것이 가장 큰 불편이다

잠에서 깨어야 눈을 뜬다는 사실은

세 살배기도 아는 일일지언데!


게다가 외로움이 달겨들라치면 앞도 안 보고 눈을 감던

내 도시에서의 오랜 나쁜 습관이 또한 방해다

외로움이 난장을 까는 일은 주로 대낮의 지하실에서 있으니

나는 십 수년간을 밤에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나쁜 습관도 내 쓸쓸함에 몹시 불편하다


그래도 오늘은 눈을 떠야겠지―하며 몇몇

내게 치명적인 싯구와 영혼의 강령들을 피부 위에 새기니

북으로 간 시인에게 내가 배운 것처럼

필시 높고 외롭고 쓸쓸해져야 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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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현실주의자의 마네킹



나는생각하는방법을잃어버린것같다내머릿속에선모든일들이자동기술법으로쓰여진문장처럼활자로연속하여떠올랐다가아무런논의도이루지못하고흩어져버린다


그는 총 18알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알약들을 삼키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진 수천 권의 책들과 그 문장들의 혼합된 덩어리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계시를 받듯이 단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보았다. 구겨진 이불 사이에서 유기된 시체처럼 썩어가던 그의 정신은 갑자기 경련하듯이 꿈틀댔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었으리라는 믿음이 전류처럼 흘렀다. 그러나 천둥번개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노자와 니체 등 어줍지 않은 지식들을 자와 컴퍼스처럼 이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도 노화된 그의 정신은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동물이란!」 그것은 일종의 동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원히 녹슬지 않는 무의식으로 가득 찬 기계들의 삶이여! 그는 넘어진 컵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벌컥거리며 움직였고 핏발 선 눈은 사납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는 <인간>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말미암아 너무 녹슬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에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야할 판이었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것을 정리하는 일은 오죽했으랴! 이미 활자조차 이루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관념적인 이미지만으로 고장 난 신호등처럼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정신의 사업들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실재로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고 그의 친구였던 자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책을 읽었던 것은 언제이며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성립할 수 있었던 건 언제인가? 그는 스스로 망각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흡사 영원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도 늘어져버린 녹음테이프처럼 분열된 음절들을 기괴한 소음으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비참……비참……비참하……비……비참……> 구두점을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의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멸자이면서 영원과 닮아 비참했다. 아니면 슬플 수도 있었나? 글쎄, 그가 비참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서술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스스로 문장을 끝맺을 수 없다. 그는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그의 젊음과 청춘은 어디에 낭비되어버렸는지? 영화필름 사이에서 한 컷만을 칼로 잘라낸 것 같은 이 장면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축축한 퇴폐와 절망의 색깔을 한껏 담은 채 완벽하게 정지되어있었다. 이 장면에는 스토리도 결말도 없었다. 저 썩은 나뭇가지 같은 남자를 보라! 저것은 도무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발탄처럼 잘못 날려진,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줄 수 없는 잉여의 장면, 곧 누군가가 주워 쓰레기통에 던질 뿐,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잘못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그가 계시처럼 느낀 강렬한 이미지도―그러니까 그 혼돈이라고 칭해진 것 말이다― 사실은 시간도 측정할 수 없는 어지러운 일생동안 계속해서 느끼고 잊어버리고, 느끼고 잊어버린 저주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신음소리는 나올 리가 없다. 약 20분 전 삼킨 18알 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약 때문에, 그는 이제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고 건드리면 마치 바늘로 찌른 물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또 다시> 구겨진 이불 사이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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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글/시 2017. 5. 14. 21:42 |

참을 수 없는



도시가 밤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갑에 지폐 한 장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껴안을 어깨가 없는 것이 허전한 게 아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 슬픈 게 아니다


오늘 교수직을 은퇴한 늙은이를 한 명 만났다

그는 자신의 군장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한 학교의 교장이었던 것, 어느 대학의

교수였던 것, 당당히 쌓아올린 자신의 지식들을

수집한 우표를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늙어가는 얼굴이 고목의 껍질 같다는

그런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의 장황한 자부심과 친절한 대접이 끝난 뒤

거리로 나오니 밤이었다 별도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를 점쳐보려 했으나 별도 없었고

별이 있다 한들 별 도리도 없었다

끔찍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니코틴이 주는 위안을 물리칠 만큼 나는

어쩌면 절망해있었다


더욱 깊숙이 담배를 끊어야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나는 중얼거리고, 이제는 알코올 등 온갖

신경물질들이 주는 퇴폐적 위안도

나의 고독을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은밀하게 등을 꼿꼿이 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는 마시라

나는 더 낮은 곳으로 걸어가기 위한 준비를

단단하게 시작한 것이다

더 단순하고―발 디딜 뭍도 없는

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존재가 시작되는

공허의 밑바닥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단 내릴 것도 없는

숙명 같은 전락이다: 늙을 줄 모르는 영혼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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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늘 짧았다

글/시 2017. 5. 9. 02:48 |

젊음은 늘 짧았다



정오의 용암 같은 태양빛 아래 술통 위에 앉아있을 때, 나는 <천재>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가 나의 눈꺼풀을 찢어 결코 눈 감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노련한 통장이가 불길로 굽힌 판자들로 단단히 형태 지어진 술통을 나는 거칠게 걷어찼다. 주황빛 광장에 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밤이 내렸다.

나는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젊었던 내 피들은 부글부글 끓더니 정수리를 통해 증발해버렸다. 이제 늙고 거뭇거뭇한 심장으로 나는 야밤의 빛살들을 보았다.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있었으나 그림자와 거짓이, 그리고 혐오가 그것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광부처럼 나는 곡괭이를 쳐들었다. 「이 마을엔 나밖에 없는 모양이야. 아니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깨져가는 흙벽 사이에서는 선혈이 꿀럭거리며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 달빛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지. 내 곡괭이는 달빛에 세게 맞아 부러졌다. 나는 떨어진 보석들을 주워 모았으나 그것들은 이내 꿈틀거리는 역겨운 벌레가 되어 나의 손바닥 가죽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열嗚咽을 위한 계절만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내 곡괭이는 처참히 부러졌다.


벚꽃이 피면 쌍뜨뻬테르부르크로 걸어서 가자. 그곳에는 꽃잎이 날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눈감을 도리를 잃어버린 내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광견병에 걸린 개의 눈 같았다. 나도 분명 공수병에 걸린 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물 흐르는 소리가 이렇게 두려울 리 없다. 그 소리는 내 뇌수에 이 행성의 나이를 삽입한다.

절망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는 나의 오랜 친구였고, 내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다. 곡괭이도 부러진 마당에 나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손도끼로 나의 양손을 끊으려 했으나, 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언젠가는 이 손으로 묻어야 해…… 그러고 나면 대지는 더 이상 나의 편이 아니게 되겠지.

길이 아닌 곳만을 찾아 걸어온 다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너무 오래 비명을 참아 입가에서는 피로 된 거품이 들끓었다.

<천재>라는 말을 불신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다시금 펜을 찾고자 했다.


열광! 열망! 갈구! 그러나 그것은 너의 말이다. 내 영혼은 침체의 바닥을 핥아보았다. 그리도 찬란한 너의 머리를 언젠가 금강반야의 도끼가 부숴버리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리도 아름다워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야만 하기에.

언젠가부터 해가 뜨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일이다. 지금 나의 육신은 햇빛을 받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굉음을 단말마로 삼고 말테니.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하라. 차라리 날 수류탄처럼 터지게 하라.

북쪽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지. 그러나 그곳에선 영원한 먹구름 아래 진눈깨비만이 시간도 잊은 듯 나릴 것이다. 만약에 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가난한 이와 푹푹 나리는 눈과 아름다운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재들이 거기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도 따위를 올리러 가는 것이 아닌걸. 죽음이 하는 일들에 침을 뱉었으니 나는 차라리 신도 여신도 없어서 살고 또 사는 것인걸.


땅 밑은 온통 피바다와 잿가루. 오늘도 쌍뜨뻬떼르부르크에서는 잿가루가 푹푹 나리리라. 거기선 내 영혼도 얼어붙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무거워지겠지. 손에 든 펜으로 나는 내 몸에 시구를 새긴다. 종이에 쓴 것들은 불타고 만다. 그러나 이 몸도 불타고 말 것인데, 아니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고되서 앉았다. 풀섶에 털퍽 앉았다. 밤벌레들 산만하고 하늘엔 달만 고고히 떴다. 나는 이제 <천재>가 무슨 말인지에 대해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 가뿐한 일이었다.

진눈깨비와 재가 흩날리는 공백의 도시까지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남았을까. 목적지가 정해진 방랑에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구라도 나타나 입을 열라치면 나는 그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셈이었건만, 아무도 없었다. 하하. 여기가 어디로 가는 골목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씨는 점점 춥다.


바다에서 도망치려면 뭍으로 가야지.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내륙의 내륙으로 가야지. 북녘의 땅에 무엇이 있든

나는 점점 여위어간다.

나는 굳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소연할 필요도 없음에,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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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피안의 숲으로 가자



어딘가에 풀과 나무가 사는 모양이다

이 회색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새벽

시멘트 바닥 위에 서있으면 그들의 냄새가 난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의


그들은 밤에만 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깊은 동심원 속에서는 해가 뜨면

무자비한 구둣발들이 사방을 짓밟고

활보하니까


코로 들어오는 농밀한 새벽냄새에

난 떨며 오열할 것 같다, 숨어 지내던 그들이

다시 한 번 온 세상에서 인류를 대신하는 것을

나는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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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죽음

글/시 2017. 4. 26. 02:55 |

완전한 죽음



나 눈을 감으면 화톳불로 태워주오

남은 재들 부디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에 뿌려주오

일생 가슴에 담아왔던 눈물들

열파 속에서 사라지도록


사막의 모래가 된 나를 위해 울지마오

용암처럼 퍼붓는 태양과

소금기둥으로 만든 우상들 사이에서 나는 영겁을

이 행성의 유구한 나이와 함께 휘날릴 테니


그대 내 죽음을 열광의 땅에 뿌리고 왔다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다부진 갈색 피부의 사람들 사이로

나는 모래바람 되어 피부마다 흠집을 내고

영원한 열기 속에 신도 인간도 아니게 되리다


불꽃이 들끓는 태양이 내 영혼이 되고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모래언덕이 내 육신이 되어

나 말 그대로 땅 끝의 황금빛 용광로에서

극한을 찾아 몸부림치며 걸어온 처절한 여행객들에게

가장 활기 넘치는 화끈거리는 죽음을 선사하리니


나 눈을 감으면 화톳불로 태워

재가 된 내 몸 가장 말라붙은 대지 위에

가장 뜨거운 태양 아래 뿌려주오

소금과 모래가 된 나를 위해 울지마오

나 안식 따위는 없는 땅에서 영구히 기뻐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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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그림자는 말이 없다



어디로 가려는가 하고 그들은

물었다

「나는 시냇물 한 모금이면 되오.」 사내는

침묵을 지키고자하는 절망적인 노력 끝에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들은

언어가 아닌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무엇이 되려는가 하고 그들은 물었다

수척한 얼굴의 사내는

눈동자를 길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걸친 낡은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실밥이 터지고 헤진 그 옷들은

분명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황혼이 벽돌담 위에 깔리고

시계의 시침은 조용한 광란을 가리켰다

「나는 무척이나 피곤해,

담배를 피우게 해주시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의 불꽃을 그는 성령聖靈 보듯이 보았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을 보니

곧 저 거대한 돔도 무너질 모양이야, 사내가

연기와 함께 중얼거리고, 거의 개의 눈처럼

동의를 구걸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비참한 고독이 그의 심장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구나!

염소의 눈을 가진, 대중들과 마주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처절한 고독이 그를 무너뜨리는구나

오래전에 그의 영혼이 떨어졌듯이

담뱃재가 나긋이 떨어졌다


한 소절의 노래가 듣고 싶다, 종달새의

인간이 만든 화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저귐이 듣고 싶다

풀잎이 피어나는 소리가 듣고 싶다, 구름의

쇳빛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싶다. 사내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지고 하얗게 말라

마침내는 사라질 것 같다.


「저 친구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동시에 꽤나 이상한 친구지.」 연기를 뿜어내며 골목

사이로 괴물처럼 발걸음을 내딛는

사내의 등을 보고 그들은 서로 속삭였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죽장정이 된 손안의 책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오늘 밤에야말로 시계가 멈추지는 않으려나?

이상한 사내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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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비극

글/시 2017. 4. 20. 23:55 |

봄의 비극



증오도 눈물에 젖어 희멀겋게 변한

초봄, 밤 벚꽃의 암담한 신비 아래에서

보름달이 떨어트린 술로 들어찬 술잔

단숨에 마셔버리려 했지만 목이 메어

벚나무 밑에 웅크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인간, 인간.


그는 잠자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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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글/시 2017. 4. 4. 01:01 |

여러분에게



여러분, 나는 갈색의 여인들과 그 육신의 향취에 대해 쓰고 있었다

나의 타자기는 소음을 멈출 기색이 없는 것 같았고 나의

중추신경에서는 천둥과 지진이 영원히 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무시무시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달도 별도 가로등의 노란

불빛조차도 보이지 않는 내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타자기에 대하여

활자들이 찍히는 순백색 종이에 대하여 사마귀의 손처럼 까딱거리는

내 손가락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지는 1평도 되지 않는

내 광증의 둥지에 대하여 나는 공포 때문에 숨을 멈췄고

이 둥지의 모든 공기가 점액질처럼 변해 내 전신을 짓눌러댔다


여러분, 나는 나의 모든 살과 근육이 실종되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딱딱하고 덜그럭거리는 뼈들만이 남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니 갈색의 여인이니 그 유방의 내음이니 육신의 쾌락

과 살결에 묻은 태양의 조각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곧 완전히 마를 것이 분명했다 이 속세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나는 그저 스러지거나 속세가 아닌 곳으로 구두도 신지 않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도 한낱 꿈이어라! 나는 두려움에 떨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장이라도 손톱이 길게 자라날 것 같았다


여러분, 눈물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를 저주하라 저주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공허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밤이 지나고 수면제의 독이 혈관을 흘러 몸은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다음 날 햇살 속에서 일어나 오늘의 이러한 고뇌와 공포를 모조리 보류

시켜버린다고 해도…… 비명 같은 밤은 또 올 것이고 또 올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아아, 내가 멀뚱히 서있는 이 벼랑은

나는 달릴 수 있다, 벼랑을 따라 달릴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이라는 개념조차 기독교도들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닌지 나는 의문하면서도, 여러분, 나는

이런 것들 때문에 온갖 패악을 벌여왔다


여러분, 나는 죄악을 찬미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인류애로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대양에게 노래했다 아노미, 아노미, 모든 사물들의 윤곽과

질량이 녹아버리는 붉은 광장에서 땅바닥을 기었다 내 심장의 문을 열고

그곳에서 양심을 꺼내 태웠다 진눈깨비가 내리면 일 년간 해가 지지도 뜨지도

않는 환각을 보았다 아, <그렇다면당신에게는인간의천칭이필요하다> 씨, 나는

꿈속에서 네 목을 졸랐다 그것은 사탕수수 줄기마냥 뚝뚝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으련다, 그러나, 여러분, 나를 도와주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의무와 사명으로 밧줄을 만들고 관념으로 올가미를 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안 돼, 안 돼…… 빛도 어둠도 광명도 퇴폐도 아닌 것을

나는 아직 완성하지 않았고 여러분께…… 그렇다, 여러분께,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절망과 너무 오래 미친 듯이 무언가를 보느라 터지고 갈라진

눈동자도,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고, 아, 그러나 염병할!


여러분, 내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나의 비극이다

부디 나를 저주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드시길, 나는

비명 속에서 또 영겁을 외치다 모래성처럼 우수수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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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의 반군

글/시 2017. 3. 25. 23:28 |

디스토피아의 반군



당신 들고 있는 수정의 벽돌을 내려놓아라

눈이 먼 지성인들은 허공에 채찍소리를 내고

온 행성이 마치 피라미드를 세우는 듯

탐욕스런 노예들은 제 발로 피땀 흘린다


당신들 승리를 탐하고 승리를 믿는 이들이여

그 정신은 절망보다도 값어치가 떨어진다

그 수정의 벽을 세우지 마라, 내 눈에

셸리의 종달새가 떨어트린 조소가 흐른다


멋들어진 모자와 코안경을 쓴 노예들은

수정의 벽돌을 옮기며 서방에서, 북방에서 온

노래들을 군가처럼 합창한다

이곳엔 이미 풀도 나무도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지?


나 강철로 손잡이가 붙은 지팡이를 들고

휘둘러 그 수정의 벽과 기둥들을 깨리라

이 번쩍거리는 광휘들이 거짓과 기만의 비극이라는 것을

그 코안경 너머로도 보지 못하는가?


나는 그저 전후戰後의 광야에서 목청 높여

울부짖는 고독한 짐승이고 싶었다! 그 함성이고 싶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비참한 고함소리이고 싶었다


당신들이 짓는 그 거대한 궁궐 꼭대기에서

얼굴 없는 한 남자 춤추듯이 햇빛을 쬐고 있다―아니!

그는 빛의 천공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옳아, 지금 보니 당신들, 모두 흡혈귀의 피부를 가졌지만

피 대신 다른 것을,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대양의 심연과 같은 거대한 것을 폭식하는구나


여기서도 나는 절망을 새긴 얼굴로

부서진 천칭 위에 화끈한 적도의 냄새와 진눈깨비 내리는

밤의 운하를 올려놓고서, 분노라고 써 갈겨진 지팡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망치인들 못 들것 있으랴


철마는 증기를 뿜어내며 레일 위를 폭주한다

나는 레일 위에 선 눈이 붉은 들개여라

빛이 꺼지면 내 그림자에 대한 공포도 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나는 무의식의 짐승이었다


두려움에서마저 선혈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게 되자

나는 인간이 아닌 눈으로 당신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당신들 그 수정궁을 무너뜨려라

나는 지팡이의 강철 손잡이에

분노와 진실, 불꽃의 소리 터져 흐르는 원시의 진실을 담고

너에게 간다, 너

결국에는 스스로 수정의 조각상이 되려하는

활자와 의사들에게서 태어난

얼굴 없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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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화재

글/시 2017. 3. 16. 21:56 |

숲의 화재



나무들이 거대한 기둥을 세운

태초의 사원과 그 깊은 정령들의 냄새에

우리는 불을 놓았노라


늙은 사원은 광기처럼 불타고

정령의 눈, 코, 길쭉한 웃음

따위를 가진 짐승들은

자유롭게 타 죽어갔다


오! 내 옆, 보이지 않는 동행의

싱싱한 어깨를 나는 껴안으며

그의 공포에 기름을 발랐다


사람이여, 부디 내가 누구인지 묻지를 말라

나는 매듭지어진 고리와 같아

언젠가 풀릴 매듭이며, 어쩌면

이미 풀렸을 지도 모르이


불길은 새로 지어지는 사원처럼 드높이 쌓인다

재와 신록의 냄새가 난다! 나는

동행에게 묻는다: 무슨 냄새가 나느냐고

<불꽃>! 윤기가 도는 입술을 그는 떨었다


아하, 나는 웃었다. 정령들의 탄 재가

소용돌이치며 불꽃의 저편―천상으로

거인의 날개를 편다

파아란 노목들 관념이 되어

이제 내 심장에 잎사귀 핀다


동행이여! 불꽃에, 광란의 화재를 끌어안고 큰 숨을 쉬라

콸콸 쏟아지는 성화의 열기와

새하얀 죽음이

영령처럼 네 폐를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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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이라는 개념을 질투하다

 

 

굶어죽으려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이었다

나는 돼지처럼 먹었다

 

길거리를 걸어보았다

혁명의 잔재마저도

온데 간데 없었고

모조리 황금의 배설물이었다

 

붓다도 예수도

마르크스도 레닌도 그 어떤 사상가도

존재의 은거에 들어갔다

나는 한낱 풀이다

 

그림자 밑에 서자

눈물샘에서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세계는 작동하고

활개친다

 

노동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것은 사어死語

누구도 노동할 수 없다

삶의 반대는 정직이다

 

의사는 내게

생각을 멈추는 약을 주었다

그것은 잘 들었다. 너무도.

그러나 해가 뜨면 약효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매달 내 손에 들어오는 지폐에

시뻘겋게 핏자국이 묻었다

보인다. 나는 미쳐가고 있거나

이미 미쳐버렸다

 

내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랜차이즈 기업

말단, 무산계급인 나는 노동력을 팔며

나의 노동력을 사가는 사람들의 손가방을 본다.

 

지금도 누군가가 아사했다…… 혹은

살 수 있었는데도, 내 손으로 병사시켰다

피 묻은 지폐 때문에

내 돼지 같은 탐식 때문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굶어죽으려 했다. 불가능했다.

내 의무는 타인의 의무를 등진다

혹은 이 황금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한다

 

스승께서는

사변하는 자의 정체를 의문하라 하셨다

그는 지혜로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신을 열렬히 증오한다

그는 정신병질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열렬히 연민한다

 

나는 세계를

인생을 인류를 중력을 증오한다

나에게는 분명 커다란 인류애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과만 벗이 된다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비트겐슈타인의 얇은 금언을 기억하며

보다 빛나는 것을 찾아다녔다

잿더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황금에 무고한 자들의 피가 덮여

나는, 그런데 나는

나는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심장은 까맣게 타버렸다

 

철컥, 철컥, 세계는 작동하며 활개치고

사람들은 먹을 음식을 지폐를 내고 사간다

어디에서든…… 모든 사상은 실패했고

사상 자체도 실패였다. 금대今代.

 

눈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자에 발광하여

나는

이뤄지지 않을 이상과 결별하지도 결별하지 못하지도 않은

나는 도대체

나는

 

곧 다시 동이 튼다

저쪽 동쪽, 어쩌면 따뜻해 보이는 저 동쪽에서

영겁의 절망이 뜬다.

 

랭보는 분명히, 자신의 두 손목을 잘랐다고 선언했지

10대의 후미에서.

 

나는 내 뇌수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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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마저 부정당하여



암담한 것은

이 밤이 끝나기 때문이다

눈물방울 같은 달이

천문학에 힘입어 가라앉고

동이 트면

사람들은 눈을 뜨기 때문이다


별들이 만들어 둔 깊은 동굴은

증발하고야 만다

꺼져있던 신호등들

지구와 함께 달릴 것이다

Dawn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Done과 닮았다


마음 속 슬픔이 어디로 갔는지

과연 누가 알기나 하련가

나는 꿈을 꾸러 간다

나의 꿈이 아닌

이미 죽은 이들의 꿈을 꾸러간다


촛불 꺼지듯 꺼지는

내 영혼이 가장 충실했던 시간


자로 잴 수 없는 유구한 미래가

나를 압살하고 말리라. 내 육신

그림자로 꽉 차

이미 모노크롬이 되어가네.


멈추지 않는 기침 끝자락 즈음에

타나토스가 바늘처럼 쏟아져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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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견자見者

글/시 2017. 2. 20. 23:04 |

거울과 견자見者



수천 번 원을 그려도 원은 그려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선을 그어도 선은 그어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나는 보이지 아니한다


플라톤은 너무 쉽게 말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욕설을

입안에서 잘근잘근 씹는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그곳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더러는 나

자신이 알 수 없으니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털끝이 거꾸로 선다. 하얀 벽지가 발려 병실의 소독약

냄새가 당장이라도 스며들 듯한 방에서

이미 형체가 불분명해져 망령처럼 되어버린 나의

하얀 손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수천 번 물어뜯어도

나의 손일 리가 없음이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은 한 줄의 선이다

그러나 그런 선이 존재할 도리가 없다

벼랑 끝에서 발밑을 조심하기는커녕 하늘이 천구天球라는 것에

어리둥절하여 머리 꼭대기를 수천 번 쳐다보는

아무리 영혼의 커튼을 걷어도 존재할 리가 없는 눈알이다.


물컹거리면서 딱딱한, 차갑지만 뜨거운 피를 흘리는

그러나 그 현실감 없는 윤곽에 나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몸뚱이 수천 번 난자해도 비명 지르는 건 내

가 아니라 수천 번 보았던 거울 속의 타인, 혹은 망령

아니면 수천 번 그려졌던 아무것도 아닌 것


직방형의 하얀 공간에서 내 물컹거리는 말초신경으로 우연히 발견한 물컹거리는 어떤 나비의 혹은 나방의 유충을 눌러서 죽이면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비현실적인 내장들과 체액 그것들은 비현실적이라는 단어조차 무용할만큼 비현실적이어서 동시에 그 체액이 묻은 내 물컹거리는 <손가락>이라는 이해될 수 없는 어떤 단말은 분명히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터진 애벌레와 구별되지 않고 그러한 일련의 광경들을 쳐다보는 나의 창窓도……, 그 창을 내다보는 누군가가 누군가인지를 알기위해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기에 수천 번 거울을 보았지만 거울은 사실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모호성을 더욱 확장시켜놓기만 하는 공포의 도구였다


수천 번 눈을 뜨자 나는 108개로 분산되어 마치 미지근한 설탕물을 타놓은 압생트처럼 희뿌옇게……


아아, 그렇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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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수기

글/시 2017. 1. 4. 10:11 |

파충류의 수기



어느 날 내 눈을 장막처럼 가리고 있던 안대가 풀렸을 때, 나는 나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끈적거리는 윤기와 함께 빛나고 있었으며,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심지어 나는 내 뇌수조차 도마뱀의 그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해가 질 때를 노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의 작은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며칠간을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술 취한 사람처럼 벽에 몸을 부딪치고 다녔다. 자결하려고 했지만 편지봉투를 뜯을 때나 쓰는 작은 나이프로는 내 비늘을 자를 수 없었다. 절망의 새벽이 몇 번이나 지나간 뒤 나는 더 이상 고함지르지 않고, 방바닥에 웅크린 채 내 차가운 심장에서 증오와 공포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냉혈동물이 되어버리자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아, 보일러조차 들어오지 않는 싸늘한 다락방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방바닥을 하염없이 긁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마그마 같은 증오에 사로잡혀 다락방을 마구 뒤지다가 나의 작은 노트와 펜을 찾아냈다. 세 시간이나 걸려 물갈퀴가 있는 손으로 펜을 놀리는 데에 익숙해졌다. 나는 노트에 아무 말이나 갈겨대면서 내가 이젠 분노와 공포밖에 남지 않은 쭉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안대를 벗기 전에도 파충류였다는 광적인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적들은 항상 내 도처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파충류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로써 그들은 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드디어 그들 모두를 마귀처럼 불꽃처럼 증오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산산조각 내 피가 흠뻑 젖은 살점들을 씹어 삼키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 좁은 다락을 나간다면,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인간들이-그러니까 나의 적들이 나의 심장에 창을 꽂을 것이다. 나는 살해당할 수 없었다.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다. 고로 내가 그들을 살해하거나 무한히 증오해야만 했다. 나는 사태를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한참을 다락 안에서 돌아다녔다. 나는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권총도 그럴싸한 나이프 한 자루도 없었다. 만일 무기를 조달할 필요성이 있다면 나는 인간의 거죽을 구해 뒤집어쓰고 인간의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흉내를 내려면 우선 그들을 연구해야했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명철한 직관과 지성이 있었다. 나는 불 꺼진 다락에서 파충류의 눈동자로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기록해야한다는 강한 소명을 느꼈다. 나의 이 무구한 증오를 축복으로 여기면서 공포라는 잉크로 지금 몇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는 곧 나의 본성대로, <그들>이 나를 만든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누구의 것이든, 길바닥에 쓰러지게 될 시체를, 혹은 시체들을 위하여: 파충류 만세.

증오 만세.

살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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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입상立像

글/시 2016. 12. 24. 05:53 |

검은 입상立像



밤 같지도 않은 밤이 밤이라고 속삭거린다.


새벽거리 북풍에 휘날리며 신문지들

인간들 마구 뒹굴고 날아간다 네온이 발하는 광선은

신문지의 윤곽, 불 꺼진 아스팔트의 검은 윤곽,

술 취한 대학생들 이상한 색깔의 머리칼 윤곽을 만든다.

나는 어두운 지하철역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가짜 프롤레타리아,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빈궁한……」 나는 네온사인의 바깥에 있다.

바람은 엉망진창으로 분다. 이 도시에서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바람은 이쪽에서도 불었다가 저쪽에서도 불며

이 찬 바람에 나는 지금이 겨울밤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이상한 보라색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참을 서있었다.

혀가 바싹 마르는 것이 지독하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취객들이 지나가는 거리의 변방에서

내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술을 마셔버리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나의 영혼은 알코올이 주사되면 집을 잃어버린다

집? 아니, 내가 돌아갈 수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언제 발걸음을 떼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순간 나는 하늘이 칠흑 같지 않다는 것에 화가 났고 또한

별들이 내려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차들은 소음을 뿌리고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검은 포도를 달렸다

「너는 이미 서명을……그러니까, 네 피로 사인을 했어

언제였는가 하면, 탯줄이 끊어지던 순간에.」 피로 된 무산계급

무산계급의 피

나는 돌연했고 이질적이었고 전혀 계측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모두와 같은 것이었고 다소 녹이 슬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번개도 치지 않는 겨울의 새벽은 더럽게 춥다

밤 같지도 않은 더럽고 대기에 쩍쩍 금이 가는 것 같은 새벽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가 없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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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非人間의 신화神話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헛된 삶에

오로지 이것만이 헛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비극이다. 그 가정이 말하는 바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려는 노력에서만

빛깔 없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강단의 강사처럼 집게손가락을 들며, 예를 들어,

로마 황제가 그노시즘 교리를 이단으로 잘라낸 뒤 이천년

행성의 절반을 뒤덮은 십자가는

정통 교리로 인정받은 적그리스도들의 표식이 되었다.


저 춥고 딱딱한 독방에서 쇠구슬이 달린 말꼬리 채찍으로

자기 등을 내려치는 가톨릭 수도자들은

감히 입을 벌리지도 못하면서 직관하고 있다: 신성神性은

반인성反人性이야

붓다가 매에게 자기 팔뚝 살을 잘라줄 때나

모하메드가 아무리 봐도 광증으로 보이는 가브리엘에게서

도망치는 짓을 멈추었을 때나……

잘들 보시오. 타의로 살해당하거나 사형당하는 이들은

모두 세인트-상트-샌-산타-산이 되어버리지,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그러니 내가 살아온 시린 삶에

유일하게 의미가 있었다면


나의 이 길고 비참한 비명은 처음부터 파멸이 설계되어있었다.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을 언어화시키려는

펜Pen으로서의 자해

마지막 살점을 도려내면 이제 이 해골은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우수수 무너져버리겠지.

그러나 나는 인간이었던 활자가 되는 것이다.

천상으로도 지하로도 가지 않는

잉크로 만들어진 영혼


곧 이 추운 방에서 나는 의자위에 웅크리고 앉아

수라 같은 머릿속으로 동사凍死를 상상하고 있다

부서지는 언어들의 조각조각 사이에서

내가 찾을 마지막 방점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 아니야 여러분

내 생각엔 아직 다 안 끝났어.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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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앙

글/시 2016. 12. 6. 04:01 |

태양신앙



남쪽 섬에서 심야의 바다를 볼 때 나는 딱히

내 고향의 해변을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던 항구도시는 이제 더 이상 배를 띄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갔었을 때 들렸던 것은

파도소리가 아닌 구름 너머의 수도 없는 제트엔진 소리뿐이었다.


내륙지방의 사막에서는 온 사방이 석유냄새 뿐이어서

거기서는 선인장에 꽃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는 마르고 갈라졌었다

나는 내 동료의 어깨를 잡고 울었다

침조차 말라버린 목 안에서 쇳소리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느 땅에서든, 어느 해변에서든

심지어는 대양의 한복판에도……

언젠가는 태양이 내려오겠지

내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해님>이라고도 부르지만

아니야, 그 항구성의 불꽃에는 분명히 인격도 신격도 없다.

그 흰색 불의 구球는 생명과 멸망을 동시에 담고

언젠가 이 행성을 통째로 불태워 구원하러 내려오리라.


그 전까지는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라도 가자

진눈깨비와 미로 같은 운하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안개와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백야白夜에…… 내 영혼을

적시고 찢어발기고 고문하는, 비생명非生命의 대명사 같은

그런 땅으로 가자.


그만, 나는 더 이상 당신들에게 거짓만을 말하며 살고 싶지 않아

나의 양심이 있어야 할 장소에 버티고 서있는

그 동공洞空의 축축한 허공에는 온통 흉터가 새겨졌다.

「이미 모조리 죽었지만, 차라리 목신牧神들이 여호와보다 오래 살았어.」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 이제 곧 태양이 내려오겠지.

난 분명히 본 적이 있어. 빽빽한 침엽수의 밀림에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서있는 그림자 같은 짐승을 본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내 의식이 산산이 해체되기 전의 일이었지, 이런 망할…….


나는 부서져가고 있다. 내가 나를 부숴가고 있다.

내 방 바닥에는 온통 나의 부품들이 떨어져있다.

나사와 못들이 굴러다니고 땜질된 납판들이 여기저기

쌓인 채 새벽부터 다음 새벽까지 찰그랑찰그랑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방을 나가면

나는 잠은커녕 눈을 감을 수도 없어

찰그랑찰그랑……. 난 저주 받았다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저 기다려야지, 태양이 내려올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지, 전후의 황야에 고도는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표정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쇳빛 입술로 먹먹히 기다리고 있지만, 태양은

태양은 내려올 것이다.

모든 저주의 끈들과 절망의 대양을 불태워버리러

태양은 필히 내려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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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혐오하게 된

글/시 2016. 12. 2. 04:38 |

마침내 혐오하게 된



어느 날 저녁에 내가 해질녘의 노을빛으로 꽉 찬

붉은색의 광장에서 하릴없이 앉아만 있을 때

내 인생이 저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맴돌았다

그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불렀는데, 그녀는

눈동자가 한쪽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양 뺨을 때리고 꽉 쥔 주먹으로

그녀의 여린 턱을 후려쳤는데

그녀는 튀어나온 이빨을 주워 모으며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저리 꺼지지 못해, 이 갈보 년아!>라고 외치며

그녀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피와 멍으로 뭉개진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몸서리치며 붉은 광장에서 도망쳤다.

내 입안에서는 계속해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고

그녀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구석진 골목으로만

밤이 대지에 어둠을 깔 때까지 도망쳐 다녔는데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반골의 방랑이 끝나고

시리고 외로운 내 방으로 돌아가면 그곳에 그녀가

있을 것임을,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당연한 듯이 방구석에

목각처럼 서있을 것임을 이미 알았다.


염병할, 나는 밤거리에서 천공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고

별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내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눈물이 되어주었다.


어디로 가야 이 더러워 버리고 싶은 세상과 인생의 반대길 인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었으니…… 술이

영혼의 독이 되는 비겁한 계절에 나는 추위에 온몸을 끌어안고

눈물샘에서 별들을, 별들을 흘렸다. 그러나

분명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추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슬픔이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말한다,

내가 광란의 고독하고 고단한 야밤을 보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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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내륙

글/시 2016. 11. 30. 23:19 |

슬픔의 내륙



나는 슬픔을 마신다.

아침-아침임에도 어두운 방 한구석

에서 눈을 뜰 때 나는 방안에 연기처럼 퍼져있는

슬픔을 마신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슬픔에 너무 바빠

다른 일에는 눈길도 주지 못한다.


점심 때, 사람들이 실컷 일을 하고 식사를 하러 갈 때에

나는 여전히 내 방 안, 그곳에서

이불에 둘러싸여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마른 슬픔에 뒤척거린다

아, 난 게으르지 않아. 이건 그저

내가 게으르지 않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게으름의 방편일 뿐이야. 나는 내 살을 물어뜯고


저녁이 되어 네온사인들에 불이 들어오고

술집들이 문을 열 때, 나는 가벼운 지갑을 움켜쥐고

해가 진 거리의 처량한 냄새를 맡으러 나간다.

「여봐, 삶을 직시하고 살아. 제발…….」 이런 젠장……

난 이미 삶을 직시하고 있어, 그 꼴이 이렇다고.

「그렇다면 남들처럼이라도 살아봐, 네 손을 펴고.」

오래 전에 손도끼와 실톱으로 잘라낸 내 손 말이야?


자본주의가 책정한 술값을 꼬나쥐고, 그 지폐들을

꼬깃꼬깃 오른손에 쥐고, 그 종이들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꽉 쥐고…… 나는 계단을 올라

저기 길가에는 이미 술에 취한 노인네들이―그러나 충분히 젊은 노인네들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뭔가를 숙덕거리고 있다. 그들의

마스크에서 번질거리는 미광은 내게

도시적 비극의 비밀을 넌지시 전한다. 그러나, 엿 먹어, 난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분수에 맞지 않는 눈물을 마시고 내 피를 마시고

이미 알코올의 냄새로 독하게 삭아버린 내 피를, 피를,

한 발자국만 더,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이 슬픔도 전부 지워지겠지

그러나 망할,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실 돈이 없어

어설프게 취한 내 슬픔에는 중력가속도가 붙어

그러나 여전히 눈물은 나올 기색도 없고, 염병, 나는 신음을

사망의 기괴한 골짜기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신음을

신성모독적으로 으르렁거리며…… 그래, 이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지

머리를 흔들고 눈동자를 흔들고 그러나 충분치는 않고

오늘은 달이 안 떴어. 요 며칠간 달을 못 봤어.


도시의 거리를 가로질러 흙탕물을 튀기며 걷는다.

빈 방에 도착하면 나는 바싹 마른 내 얼굴을 부여잡고

우는 사람의 흉내를 내며―그러나 울지는 못하며

적당하지 못한 알코올 때문에 한숨을 쉬며 나는 생각을 하겠지

생각, 생각, 그 빌어먹을……인간의 권능.

거리에는 시베리아에서 온 북풍의 냄새 속에

슬픔으로 빚은 보드카 냄새가 나.


오늘도 슬픔을 마시느라 너무도 바빴다.

이불로 도망쳐

수마(睡魔)와 껴안고 눈에서 흰 연기를 뿜을 시간이다.

안녕, 안녕, 굳바이, 나의

나의 어떠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열정의 시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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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타인이 아무도 없다



내가 괴로운 건 수마(睡魔)의 탓이 아니야

내가 게으른 건 약학(藥學)에서 시작된 게 아니야

내 한쪽 눈이 떠지지 않는 건

뜨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야

이제 난 원망할 사람도 없는데


모두가 잠든 새벽마다 식은땀을 쏟아내며

거친 숨과 벌떡 일어나는 건

엄마, 그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죠

엄마, 누구에게도 죄는 없었어요.

그래, 그러니 난 도시의 시궁창에 흐르는 하숫물을

전부 긁어모아 내 늑골 속에 담아두고 살겠어


왜냐하면, 엄마, 누구에게도 죄는 없었으니까요.

자기 손으로 장난감을 내던진 아이가

망가진 장난감을 붙들고 울어도 되는 권리는

아이가 아이일 때만 있지. 가슴의 서랍을 열 때마다

맡을 수 있는 원망의 냄새, 증오의 냄새, 불완전한,

결함품의, 그러니 난 서랍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버릴 거야


이건 박애주의가 아니야

이건 박음질한 상자 속의 사람들 이야기도 아니야

아무도 증오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내 육신에 백팔 개의 대못을 박고

나머지 한쪽 눈도 감겨줘

이런, 증오할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전 세계가 다 내 적이고 증오스럽네……


지옥에서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누더기가 된

내 영혼을 보고 당신이 고결한 동정의 마음으로

칼질과 채찍질에도 굴하지 않고 내 손을 잡으러 온다면

사랑스러운 당신의 손을 잡아서

무간지옥의 밑바닥에, 피연못의 밑바닥에

무한히 처넣어줄게. 이제 내가 죄악의 상자로 쓰는 건

내 마음 뿐이니까.


내 영혼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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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가

글/시 2016. 11. 23. 18:20 |

사망가死亡歌



해바라기가 죽었다.

연꽃들도 모두 죽었다.

죽어 쓰러진 갈잎들

발밑에서 부석거린다.


겨울이 온다, 아니 더러는

언제나 와 있었다.

온돌에 불 때지 마라.

모든 것이 숨죽이는 추운 계절에는

방패도 흙벽도 지붕도

없어야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북쪽 고원의 냄새가

청록빛 햇살 받으며 소용돌이 그린다.

나는 구두끈 단단히 매고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매년 한 번씩 얼어 죽으러 간다.


그러니 이번 겨울에는

소주 한 잔도 입에 대지 말아야지.

눈빛 하늘 밑에서, 그저 아름다운

얼음 한 조각 되어 산산이 조각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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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노래

글/시 2016. 11. 19. 01:53 |

괴물의 노래



방금 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세 살배기 아들도 함께 죽었다는군

철창 밖으로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네온의 불빛들을 보니

그 어떤 고통도 내게 닿지 못하리라.


소등시간이 지난 지가 오래임에도

나는 잠들지 않았어, 누구처럼 무시무시한 고함을

천공에 쳐대지도, 가슴이 찢어짐에 입을 틀어막고

조각조각난 피부 사이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

난 차가운 벽에 기대앉아 어둠을 보았네.


실상 그것이 나의 거울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초를 서는 간수는 알기나 할까.

내가 이 좁은 감방으로 들어오기를 마음먹은

그날부터 이미 내 몸과 마음

허공의 어둠을 담는 빈 껍데기였지.


나는 재해가 되었었어…… 사람들은

내게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추측조차 두려워했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걸까? 글쎄,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하는군.


나의 아내였던 여자는 결혼 전

고결한 마음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처녀였었지

그녀는 벌집처럼 구멍이 난 내 마음을

채워주겠노라고 내 손을 잡았지, 하! 하!

그때도 나는 이렇게 웃었던 것 같아.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 붉은 원숭이 같은

핏덩이의 생명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어

지나치게 울어대는 바람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아내가 보고 있었기에 난 그녀에게 웃음을 지었지

난 무엇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날 하니 죽은 부모의 얼굴도 그리게 되는군

그런데 도무지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아

달걀귀신 같은 한 쌍의 노인 둘만

유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도는군. 그들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아하, 도끼를 휘둘렀을 때를 떠올렸어. 그때의

그들의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지.


간수의 말로는 과적차량이 아내의 경차를

코끼리가 짓밟은 것마냥 무참히 뭉개버렸다더군

무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 특히 인간들이

바퀴에 엔진을 달고 나서부터는 말이야.

죽음을 저울질하려는 사람의 본성이

내게는 기괴하게만 느껴져.


오늘도 분명 어딘가에서 내 가족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불합리하게 죽었겠지, 생각해보면

모든 죽음이 불합리하다면 불합리한 죽음 따위도 없는 거야

나는 감방 한 쪽에 붙은 철제 변기를 쳐다보며

나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셈해보고 있네.


나는 목적 없는 재앙이었다네. 왜 그랬냐고?

천둥이 왜 치고, 태풍이 왜 마을을 휩쓸겠어?

아들의 돌잔치 때 녀석을 안고

그 녀석이 나를 보며 웃고, 내 얼굴에 손을 댈 때

이미 모든 실험이 끝났었던 거야.


난 첫애에게 아빠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모든 무의미를 끝낼 작정을 하고 있었지.

젠장, 어머니와 아버지가 썰어놓은 고기가 됐을 때 말이야

그때 난 정말로 홀가분해, 쾌재를 불렀지…….

미안해요. 내가 미안함을 못 느낀다는 것에 대해서―미안해요.


철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로 까맣고 멀어서

사람들이 날 쳐다보던 그 눈동자 같군

속죄할 것이 없어서 죄스러운 느낌이야, 그러니까

모조리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농담이지.

참으로 이상한 세계에 이상한 삶이었어.


이러나저러나 난 곧 초록색 길을 걷게 되겠지

그러나 여러분, 부디 들어주시길,

사실은 우리 모두 그 길을 걷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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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희망

글/시 2016. 11. 11. 00:38 |

죽음희망



누군가 나에게 말해 달라.

너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

다고, 덜덜 떠는 신경쇠약에 걸린 너의 손은 아직도 흰

종이 위에 펜을 쥐고 날고 싶지만, 그렇지만 너의

동기도 근거도 의무도 이제는 없다고.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몇 번을 외쳐도 혼잣말이다

저 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하고 사람들의 입

에서 터져 나오는 경멸의 어투도 내 안에서 나의 혼잣

말이 되어버린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붙잡고 있던 내 논문에는

악필로 갈긴 수정사항이 본문보다 많아졌다. 그 뒤

내 온전치 않은 정신이 멈췄다.


작가들이 도대체 어떻게 절필을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 절필이란 대체 뭐지? 그것은 자살과 동의어다! 아아

기자회견을 열어놓고 수

십 개의 카메라 앞에서 목을 매다는 이상스러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아사하겠어, 나의 <체면> 때문에!

전부 지독한 농담이다. 스스로 살을 파먹는 농담.


그러니 제발 누군가 말해줬으면. 신성이 담긴 강력한 목소리로

너는 더 이상 없다, 라고! 부디 내 목에 도끼를

단 한 번의 힘찬 휘두름으로 내리쳐달라고. 그러나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실상은

아무도 그러한 권한도 의지도 갖지 않는다.

절필도 자살도 공상적 낭만주의의 배설물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살라는 말이야? 치욕과 수치와 절망을 그러쥐고, 더는 두뇌가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이미 바닥난 재능에 좌절하면서, 그러면서도 계속 허망한 펜을 놀리고, 노트 위에 진실성 없는 말들을 뿌리고, 자조하며, 혐오하며, 눈물 흘리고 소리치면서 몸부림치라고? 더는 위대함도 무엇도 없음에도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내 목을 그을 때까지?>

그렇다. 애당초 넌 행복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 넌 고통 받고 점점 무의미해지기 위해서 존재를 인정받았다.

<염병할……. 그래도 언젠가 내 머리가 당나귀대가리가 된다면, 그때는 나도 죽겠지.>

그 정도는 바라도 좋아.


그런데 어떠한 희망이 있다. 점점 굽어가는 나의 어깨의 윤곽에서,

이것은 단순히 조금 오래 가는 슬럼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곧 돋을 듯한

날개가 중얼중얼. 거짓말인지 기만인지 혹은 정말로 그러

한지 내가 알 게 뭐람. 결국에는 자살도 꿈인 것을, 끝이라는 것도

결코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차가운 바람이 불면

길바닥에서 급사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글을 쓰면서 희열하다가

글을 쓰면서 고통 받고, 글을 못 써 광란하다가

글을 못 써 울부짖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가난이 내게

걸쳐준 거적때기를 걸치고, 그것을 방패삼아, 삶이라는 저주에 침을 뱉고

악마가 내게 오면 나는 담배 한 까치에 전 세계를 팔아버리겠지.


그러나 어찌 되건 나는 죽지 못할 것이다

계속 성냥을 긁으며

불타는 세상의 환각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습기 찬 지하실에서

혼란스러운 머리로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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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K의 초상

글/시 2016. 10. 27. 15:13 |

인간 K의 초상



테이블 뒤에 석상처럼 앉아있던 K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일주일동안 잠을 못 잤어. 일주일동안 말이야.

아니 정확히는, 잠을 안 잔거지. 커피와 카페인 알약

으로 일주일동안 나를 깨워놓았어

나는 잠을 잘 자격이 없어. 휴식은 내게 너무 큰 사치야

K는 듣는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

계속 그저 중얼거렸다. <나라고 심리학에

완전한 문외한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게 그는 중얼댔다.

중요한 건 말이야, 거의 강박적인 동작으로, 검지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그가 말했다. 결백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책감만 커진다는 거야. 말하자면

모든 것에 대한 죄책감이 말이야. 나는 곧

물 말고는 그 어떤 음식도 위장에 넣지 않게 될 거야

내 의지랑은 상관없는 <내 의지>가 날 그렇게 만들 거야 결국

난 실패한 금욕주의자로 자살하게 되겠지, 아니 자살은……

K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는 언어철학의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어디로 가든 그는 실패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나왔다. K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희열로 색이 칠해진 고통을 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밝았다. 바람은 따뜻했고

하늘에는 아무것도 날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는 건 조금 미뤄두자

K를 위해서. 어찌 됐든 그는 곧 무너지고 말테니.


그리고 K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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