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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1.23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1
  2. 2022.02.19 아레시보 메시지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이것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충고나 조언도 없다. 애당초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작가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언과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용서다. 말하자면 단테의 <신곡>이 실용서였고, 밀턴의 <실낙원>이 실용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도착했다. 어쩌면 ‘떨어졌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내가 걸어온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갑자기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때 나는 어둠 속에서 초원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 같은 인영을 발견했다.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금발 머리를 가진 외다리 청년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휘영청 밝은 보름달 덕분에 그의 머리 색깔과,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청년은 눈을 감고 있었고 만취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린 채 풀밭에 누워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 생김이어서 짧게 자란 수염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내가 묻자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있던 화약 더미가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어조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욕설과 저주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정체불명의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채 그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가던 길을 계속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가 내뱉던 괴성과 욕설이 언젠가 들었던 프랑스어와 닮아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건을 뒤로하고, 약간 언덕진 초원 저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건축물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솟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불이 밝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축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과연 건물인지, 사람이 살고는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초원에 난 길을 걷는 와중에 나는 처음에 만난 외다리 청년처럼 풀밭 곳곳에 늘어져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유령처럼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외다리 청년에게서 교훈을 배운바, 그들에게 다가서서 말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 모두가 남자였고, 각각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어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의 다양성 때문에 나는 언덕 저편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과연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낮은 언덕을 넘어가자 그곳은 역시 마을이 맞았다. 나무로 건축한 단층이나 2층짜리 주택이 수도 없이 밀집해있었다. 마을에 딱히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초원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 어느 지점부터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풀밭에 나동그라진 사람의 수가 줄어있었을 뿐이다. 울타리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을의 초입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와 아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검은 머리털이나 동북아시아인 특유의 얼굴 형태가 새삼 내게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어느 건물 벽에 기대선 채 끊임없이 자신의 두 손을 서로 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일본인인 듯했다. 다행히도 나는 조금이나마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여기에는 불이 없습니다.
 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손가락과 겁먹은 듯한 표정은 정신에 안타까운 상처가 있는 사람 특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미 상기했듯 한밤중임에도 온 마을에 달빛 말고는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과거에 읽었던 코맥 매카시의 어떤 작품을 떠올렸다. 인류문명이 멸망해버린 세계를 다루는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잠깐 잡념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새까만 광경과 일본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내 상상력을 부풀린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이 마을로 ‘불’을 운반해올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래된 습관 때문에 생긴, 관념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간 나는 이 마을의 중심으로 가면 광장이 있으려니, 광장이 있다면 더 멀쩡한 사람과 만날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늘을 보니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지를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불쌍한 일본인 사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들은 좁았고 제대로 관리되어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지저분한 길목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통행인이나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불쌍한 일본인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자주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을에 광장 따위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이 마을에는 중심이 되는 구역조차 없었다. 그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밀집해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수도 없는 길목들이 겹쳐졌다가 나뉘어지고, 또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일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정점에 달할 즈음에, 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다.
 어느 건물의 계단참에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도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본 일이 있었는데…… 맙소사, 그는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책에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나는 순간 귀신에 홀린 듯, 계단참에 올라앉은 그에게로 달려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때 나는 마땅히 이 마을에 관해 물어봐야 했을 실제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과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무어라, 높은 목소리로 외쳐대기만 했다. 그러나 그 늙은 사상가는 완전한 몰이해의 표정으로 내내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몇 분 뒤에야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제정 러시아의 문호가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다소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약 이 마을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 맞다면, 그렇기에 이곳에 불이 없는 것이라면. 나는 몇 가지 생각을 거쳐 진실을 확인할 한 가지 방도를 찾아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는 지극히 한정되어있고, 그마저도 복잡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단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뿐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외국인의 귀에 얼마나 부정확하게 들릴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나는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내 곁에 초라하게 쭈그리고 앉은 대문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니콜라이 고골.
 노인은 저 멀리 있는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나는 이미 거의 진실에 가까워졌다. 더 이상 묻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이름’을 나열했다. 19세기로부터 조금씩 멀리,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금씩 멀리 향하는 이름들을 말이다. 키르케고르부터 카뮈까지, 셰익스피어부터 피츠제럴드까지……. 이름을 들은 노인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더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을을 보라는 듯 손바닥을 옆으로 저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절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환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마을에 자의로 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숲을 빠져나온 후부터 요만큼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하늘에 유리구슬처럼 떠 있는 새하얀 보름달을 가리켰다. 그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인본주의자가 마을 입구에 있던 일본인의 말을 부정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써 탁해진 눈동자로 노인은 미간에 주름을 짓고,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었다. 이제 모든 절망이 확실해졌다. 마을 초입의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내 귓속을 향해, 지금까지 듣지 못하고 있었던 무수한 소음이 기어 들어왔다. 애벌레가 나뭇잎 먹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시킨 것 같은 소음이었다. 이 거대한 마을 전체가 실낱같은 숨으로 비명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그것은 내가 처음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소리였고,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사방팔방에서 멈추지 않고 들려온 소리였다. 마을의 모든 목조건물 안에서, 그 건물들의 작고 좁은 방 안에서, 그 작은 소리들은 겹쳐지고 공명하며 그야말로 이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각사각, 사각사각하며.
 나는 공포에 질린 채 구르듯이 계단참을 뛰쳐 내려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그 좁고 더럽고 엉망진창인 길들을 있는 힘껏 역방향으로 달렸다. 가끔 멀거니 서 있던 사내들이 어깨에 치였으나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마을 밖으로, 초원으로, 언덕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그 끔찍한 소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각사각하며, 내 인생 전체에 들러붙어 있던, 마침내는 삶을 모조리 갉아 먹어버린, 그 오래된 소리가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쉬며 내가 나왔던 숲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숲은 빠져나왔을 때보다 더욱 어두컴컴했다. 나는 다시 외다리 청년과 만났다. 그러나 내가 나왔던 그 숲길은 찾을 수 없었다. 아주 빽빽하고 울창한, 새까만 숲이 벽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외다리 청년은 모로 누운 채,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안다. 그는 태양으로 걸어 올라가려던, 나쁜 피를 가진 시인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글에는 조언도 충고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펜을 긁는 소리가 이미 우리의 삶을 먹어치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명성과 존경이, 또한 모든 실패와 무관심이 그 소리와 함께 이곳으로 온다. 살아있는 피부에 열기를 전해줄 불꽃조차 없는 이곳까지 와서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리가 없다. 우리가 멈출 리가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Lim_
:

아레시보 메시지

글/소설 2022. 2. 19. 21:33 |

아레시보 메시지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20분이 넘도록 구토를 하고 있을 동안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도 도착한 문자메시지는 한 건도 없다.
 ‘들어오세요. 저 종민이예요.’ 3년 동안 저장만 되어있던 번호로 다시 한번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답장을 바라고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사실, 진즉에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더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번호는 분명 바뀌었으리라. 3년 전에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더니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엉뚱한 사람의 전화에 도착했거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전파 상태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그는 기억한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시댁에 전화를 하지도 실종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간 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그것만으로 상황이 매듭지어졌다는 듯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도 하고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콩나물국 따위를 끓여 찬밥을 말아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당황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생계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또한 눈앞에 놓인,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돗물로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았다. 눈이 온통 충혈되고 얼굴에 그늘이 진, 퀭한 인상의 그 젊은이는 평판 높은 K 공과 대학의 장학생이었다. 참 성실도 하지,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거울 위에 달린, 누렇게 물때가 낀 방수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술집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제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방 이불에 누워있었다. 평일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날 퇴근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보다도 유난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부엌과 안방의 경계에 마냥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 어둡고 퀴퀴한 방 한구석에 돌무더기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를, 마찬가지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버린 이후로, 이제 이상한 일이라고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지갑에는 팔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사흘 전 어머니가 용돈으로 쥐여준 이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밖으로 나가, 가로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며 주차되어있는 승용차들을 지나쳐, 주택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늘 왁자한 소리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노가리 1000원’. 가게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간판이 붙어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천 원짜리 노가리와 삼천 원짜리 소주를 시켰다. 한 잔,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더욱 느린 속도로만 마셨다. 눌어붙은 기름과 사람 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팔만 원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는가. 어느새 새벽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이 오면 경사로가 많은 이 동네에서 한두 사람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추위에 눈과 코가 빨갛게 얼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어두컴컴한, 10평짜리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맡아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국이 상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냄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그는 삼만 원어치 술을 전부 게워냈다. 산책간 아버지가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술기운 속에서 생각했다. 슬슬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휴대전화 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한 집안에선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비강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비누라도 먹으면 냄새가 지워지겠지, 알코올 때문에 회로가 엉켜버린 머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로즈메리 향밖에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는 화장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어머니는 그가 술집으로 도망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산책 중인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술에 취한 손가락이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세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피로하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직도 비누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이제 그만 잠들어버려야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일이야 오든 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눈동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불분명한 잔무늬를 보고 있다. 지난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그의 술 취한 머리가 천천히 정리하려 한다. 그는 작년 교양과목에서 배웠던 어느 서글픈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린다. 그것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돌며 사지를 천천히 굳게 하고 있다.
 1974년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서 쏘아 올린 메시지는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수신하기를 기대하고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왕복 5만 년이 걸리는 메시지에 과학자들이 기대한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전파를 송출한 천문대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행위로 벌인 프로젝트였다. 전파를 받을 누군가가 있든 없든, 답신이 오든 오지 않든 처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취기와 구역질의 산란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의식이 떨어졌을 때, 그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휴대전화의 메시지 착신음을 듣는다. 그러나 굳이 깨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와 침묵이 방안의 낡은 가구며 두 사람을 검은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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