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에 해당되는 글 267건

  1. 2019.02.01 오전 네 시
  2. 2018.12.18 물의 궁전
  3. 2018.11.04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2
  4. 2018.10.17 십자가
  5. 2018.10.10 멀어지는 길
  6. 2018.10.07 가을밤의 기도
  7. 2018.09.24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8. 2018.09.23 영원의 끝
  9. 2018.09.16 걷는 구두
  10. 2018.09.16 탄생의 종말
  11. 2018.08.23 거울을 보네
  12. 2018.08.21 회계원 블루스
  13. 2018.08.21 날것의 영혼
  14. 2018.08.09 전통의 사장
  15. 2018.06.25 프로방스의 흙 1
  16. 2018.06.13 시간의 몽상
  17. 2018.04.23 멈춰진 작품 1
  18. 2018.02.02 너를 위협하는
  19. 2018.01.03 회상
  20. 2017.12.16 무음의 계절
  21. 2017.09.14 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1
  22. 2017.09.09 보름날 2
  23. 2017.08.30 우리는 그에게 그 무엇도 물어서는 안 되리라 1
  24. 2017.08.18 듣는 이 있어선 안 될 호소呼訴
  25. 2017.07.30 밝은 절망
  26. 2017.07.26 우화羽化의 서곡
  27. 2017.07.23 어느 침엽수림 1
  28. 2017.07.23 점멸
  29. 2017.07.18 악덕의 성자聖子
  30. 2017.07.18 폭력의 행성에서 보내는 어떤 휴가

오전 네 시

글/시 2019. 2. 1. 04:39 |

오전 네 시



정적이 차갑게 얼어붙어

밤이 몰아칠 때

나는 갈 곳이 없다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세상도 겨울이라는 꿈이니

그러나 호르몬과 화학물질들 사이에서 허우적

거리다 깨어나도 나는 나라는 꿈을 꾸고 있다

갈 곳 잃은 발은

잠에도 들지 못한다

술을 마셔보아도

꿈의 허술한 틈들이 더 잘 보일뿐

이 거품덩어리 속에서는 눕기는커녕

서있을 일도 없다


허구로, 만약 내가 진실로 향하지 않는다면……

더 짙은 안개

더 열리기 힘든 눈


그런데 시원의 혼돈이 법이었다면

피의 따뜻함, 군화소리의 분명함, 공포의 비명들:

회귀하려는 힘, 골수의 목소리

내가 찾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나를 찾고 있다


겨울에

공허가 더 맑아질 때, 꿈에는 교훈이 없고

나는 헤매고, 헤맬 수밖에, 털이 난 거품 같은 현실

활자는 증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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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궁전

글/시 2018. 12. 18. 05:06 |

물의 궁전



은빛으로 빛나는 얇디얇은 호수 위에 정령 하나가 걷고 있다

발끝으로 파문을 만드는 그 발목의 움직임은 물빛이다

밤에 취한 사원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지붕들

정령은 생명이 없기에 죽음을 몰라라

오, 수면에는 무너진 나룻배! 나는 관조한다.


이곳이 시체들의 묘지라는 것은 모두가 잊었고

정령이 그것을 잊게 한다, 정령은

밤에서 나왔고, 호수에서 나왔고, 달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망각 속에서 농축된 시취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기나긴 날숨……

시간은 쓰러져야만 했다.


흰 나락, 정령은 내려다보고

높이와 깊이가 뒤엉겨버린 호수는 종말의 표정

그것은 아름다운 웃음이다. 관조하던 나는 즉사하고

즉사해야만 했고

대리석의 균열 사이에 핀 암청색 풀잎이

다음 생애를 가리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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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왜인지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내겐 딱히 갈 곳이 없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내 시간은 내일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미래를 믿지 마시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고 누가 말했지?

이 땅에는 해가 뜨지 않는 밤도 있다, 내가 걷는 이 밤도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그런데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정신차려보면 황혼이다, 해나 달을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어딘가 골목구석에 앉아 벽돌색의 세상에 대해 노래

부르고 싶지만 밤이 오기 전에 어서 걸어야한다

밤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리기 전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는데

구름은 항상 나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저편으로 간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공간들은 내게 텅 비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망각은 심연보다 어둡고 괴물적인 아가리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수증기 가득한 숲에서 나무들은 생명을 잃고

내가 밟는 것들은 수억 살 먹은 시체들의 유골, 나는 비문 하나 없는 묘지를

서걱서걱 밟으며 걸어가 버린다


안녕, 금화들의 도시여, 나는 미래를 믿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믿는다. 내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향하는 것은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더 가쁘게 한다, 멈추는 방법은

태어난 이래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이 행성은 왜 자전을 멈추지 못하지? 별들에게 시를 읊을 시간이 그에겐 없다

어떤 것은 끝나야만 한다, 혹은 모든 것은 끝나야만 한다, 하늘은 얼어붙고

눈이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고, 나는 걷는 얼음, 흙, 진창

또 밤, 밤 뒤엔 다시 밤


행성과 같은 속도로 걷는 눈동자에게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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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글/시 2018. 10. 17. 23:56 |

십자가



페이지 위에 빼곡히 찬 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일상

내가 서있는 곳은 긴장과 분노로 다져진 정상

뛰노는 아이들은 순진하고 생활은 행복으로 충만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 지르지 ‘그만’

그게 내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 마

행복은 너희끼리 나눠가지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마

나는 이 정상까지 십자가를 짊어 매고 올라왔어

너희는 그 일상에서 기도하는 손으로 연민 했어


바람은 차가워지는데 등줄기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

그래도 난 폭풍을 쥐고 정상의 정상으로 내쳐 가

아무도 나한테 멈추라고 하지 마, 땅의 끝이 있다고 믿게 하지 마

마지막 내 발자국이 데드마스크가 될 때

난 쓰러지며 웃을 거야, 죽으면서 외칠 거야 ‘어때’


등에 맨 십자가는 온 관절을 짓누르지만, 난 그걸 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어

손에 권총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쏘겠지만, 헛된 상상 속에서도 난 앞으로 걸어

내 맨가슴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여? 이것들이 전부 내 방패야

살면 살수록 몸은 흉터로 덮여, 아무튼 난 그걸 감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삶은 집어치워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

내 옆에서 사라져, 난 행복할 수 없어

그저 내 십자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해


그러니까 날 추하다고 말해

어쨌든 너희를 위해 아름다워지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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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는 길

글/시 2018. 10. 10. 00:49 |

멀어지는 길



한밤에 집으로 가네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난 어깨에 맨 가방을 들쳐 매고

가로등 밑을 조용히 지나

나 집으로 돌아가네

그러나 발자국은 점점

느려져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거짓말 같지

난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나서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생시인지 아직 꿈을 꾸는 건지


그때 창 밖에서 요란하게

동전소리가 났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

내 턱에서는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을 향해 웃어보였다네


옷을 갖춰 입고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은

누가 지적할 일도 없어 보였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소리는

날 가면 쓴 광대로 만들고


너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너무 짧은 밤이 오면

나 한 몸 뉘일 집을 찾아 가네

그런데 왜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내 집에 더 가까워지면 내 발은

고철처럼 무거워지며 점점 더뎌지는데

해는 지평선 밑을 흐르고 있다네


나 또 잠이 들면 거짓 속의 죽음을 찾겠지

결국 깨버릴 짧은 모든 망각의 늪을

그리고 해는 날 두들겨 깨워 눈을 뜨고 말테고

그러면 나 또 거울을 보며 웃는다네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 아무 것도 없는 내일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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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의 기도

글/시 2018. 10. 7. 01:41 |

가을밤의 기도



나는 습기 찬 밤거리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내 눈은 밤으로 가득찼다

희망은 없었고, 거부했다, 보이는 것은 죄와 오물

신의 아이들이 흘리고 간 후회 가득한 시간의 흔적들

혼돈의 구렁텅이에 잠겨 은하수처럼 천천히 회전하는

어둡고 소음 가득한 도시에 내가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면서도 나는 그를 믿지 않고

다만 한 번 물었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 있었느냐고

딱히 그에게 내기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나는 사람의 자식이니

그저 나는 계속, 당신이 현현할 리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육지가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심정으로 처참히 살아갈 터이니

어쩌면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어쩌면 당신이 구원할 수도 있었느냐고


어느 날 세계가 빛에 감싸여 거짓과 절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신성모독적인 신음을 뱉으며 다친 개처럼

기어 다닐 것이다

이마에 낙인찍힌 분노를 가릴 생각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질병과 고통으로 삶을 있는 힘껏 칠할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아니게 될 그 날까지

당신 없이 마지막 한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단 한 번도 웃음 짓는 일 없이 기도했다

하늘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도 되니

평안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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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글/시 2018. 9. 24. 01:45 |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어렸을 적엔 걷고 싶으면 강으로 갔다


맥주를 따르는 소리

잔에 소주가 차오르는 소리

지금 나는 내륙의 한복판

강까지 걷기에 내 몸은

이미 회색으로 썩어 무너졌다


상체만으로 술을 기울이고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달은 침묵한다

물이 가진 근육의 결들

덮쳐지며 겹쳐지는 투명한 운동들

칼을 집어삼키는 기분


어느 샌가 나는 밤에만 비명을 지른다

해가 뜬 시간에는 두 번째 눈꺼풀이

눈동자의 모양으로 활짝 열려, 인사한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록색 지폐를 받으며 심장은 극약을 토한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는 어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세계는 어디

늑골을 하나하나 떼어, 심장을 꺼내들고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고

텅 빈 폐 속에 또 한 번 독약을 삼키며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네가 가진 잠깐의 시간, 종이와 펜, 잉크

위하여, 웃어라, 희생은 아니야, 이것은 희생이 아니야

값을 내라, 자기 자신을 사라, 칼을 삼켜

안녕, 내 이빨은 여전히 미소 짓는다


독에 젖어 이슬에 젖어 젖은 거리를 헤매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나는 바닥을 긴다

집으로, 그런데 집이라니? 이빨은 또 한 번 웃는다

달빛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는 불꽃이 꺼지는 순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라핀은 녹는다, 심지는 탄다

눈동자만이 썩지 않는다.

Posted by Lim_
:

영원의 끝

글/시 2018. 9. 23. 01:05 |

영원의 끝



알코올에 젖어서 본 한밤의 나뭇잎은

대낮에 본 그것보다 선명한 푸른빛이었고

밤의 이슬을 머금어 알코올을

뚝뚝 듣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은 제 본모습을 빤히

내보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눈은

소주에 젖어 명백히 흰 달빛을

천사를 만나듯 영접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모래들 쓸리는 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 스르륵 스르륵

내게 영원한 안식을 암시하며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차들의 엔진 소리는

<이제 곧 끝날 거야>라고 읊조리며

한껏 엑셀을 밟은 채 멸망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밤의 거리에서 벌어온 흰색의 금화들은

뚝뚝 떨어지며 빗방울 소리를 냈고

내 팔뚝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웃는 채로 새겨졌다


언젠가 편히 쉬시길, 나는 웃으며 외쳤고

밤은 무게도 없이 가라앉아 오고

알코올이 떨어지는 푸른빛의 나뭇잎들은

궤변가처럼 생명의 영속을 말한다


검은 구름, 달은 보이지 않고, 해는 얼어붙었고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나는 취해 몸부림치고

까만 시멘트 바닥에서 뒹굴며 묻는다

<내 꿈들은 어디로 갔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한 달에 한 번, 자본주의에게 얻어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안녕, 내 은화로 살 수 있는 위안들아

슬픈 사람들은 내 혀를 찾아 지친 발을 더듬거리고

당신은 마땅해요, 반복되는 거짓말들, 숨겨진 조소


섬에서 봤던 야밤의 파도를 기억한다

지구의 생살을 송두리째 기억하는 몸짓들아

꺼진 등대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취한 배여, 뭍은 어디에도 없어라


흔들흔들, 나는 눈 밑에 눈물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

떠난 사람들을 추억하려 했지만 눈물샘은 망가졌다

비척비척, 내 머리는 줄곧 한숨을 토한다

가야할 곳을 잃은 다리는 길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누구에게 빚을 졌지? 모두가 묻는 질문

아니야, 갚아야 될 것은, 숨 쉬면서, 울면서 청산했다

멈출 줄 모르는 발 앞에 펼쳐진 사막, 어디에도 없는 문

애초에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이여! 아니면 자연이여! 혹은 운명이여!

언젠가 내가 쓰러져 태양의 빛살에 녹아

백골만 남았을 때 바람으로 그것도 녹여주오

나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하지 않으니


걷는 존재, 걷는 현상, 나는 꺼지는 불꽃

빛이 있으니 밤은 오고, 나는 평생 하얀 밤을 본 적이 없으나

사무치게 그것이 보고 싶었다, 환희하는 죽음

나 꺼질 때, 사그라들 때, 저 끝에


공허가 어떤 색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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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구두

글/시 2018. 9. 16. 22:06 |

걷는 구두



나는 걷는 구두

밑창은 해지고 코는 닳았다네

갈대들이 내 목을 간질이고

뚫린 코에 들어오는 진한 돌, 흙 내음

나는 걷는 구두라네


하늘은 가끔 비를 내리기도 하고 해를 띄우기도 하지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그것을 보네

내 가죽은 젖었다가 마르고, 더욱 뻣뻣해지고

그러나 오랜 걸음은 또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무와 풀들은 말이 없어


사막도 걸었고 해변도 걸었지

내 코엔 온 세상의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고

심지어 태양의 냄새까지 나는 맡아보았다

어둠의 냄새도, 달의 냄새도 날 짓눌렀다 가고

바람은 나의 온 가죽을 부드럽게 애무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네, 아니, 기억하지는 않아 사실은

바로 바람에 흘려보내버렸지, 내 뒷굽 너머로

태양에 달궈진 돌들은 뜨거워

밤의 얼어붙은 모래는 송곳 같아

나뭇잎 사이로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나의 작은 그림자를 오래도록 따라오는 죽음

나는 걷는 구두

보고, 맡고, 듣고, 담았다가

내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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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종말

글/시 2018. 9. 16. 02:18 |

탄생의 종말



이 도시에서 보는 하늘은 밤에도 회색이다


완전한 어둠과 별빛의 청량함을 기억하는 건

산중턱의 밭두렁에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던 기억이 있다

촛불의 일렁임에 정신이 팔려 찻물을 발에 쏟은 기억이 있다

가을 달의 청명함에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던 기억이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산

새들은 죽고 나무들은 말이 없다

새벽 세 시가 되면 저 높은 곳에서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까지는 만물이 자는 산


술에 취한 새벽 두 시

도시를 거닐면 사방이 찬란하고 적색이고 회색이다

내 폐는

문명을 통과한 타르와 니코틴

매연가스에 거멓게 쿨럭이며 음악을 갈구한다

그러나 절대 노래 부르지 못 한다


온전한 달빛을 본 지 얼마나 되었지?

밤의 구름은 이미 구름이 아니다

저 옛날, 그러나 너무 옛날은 아닌

산 속에서 죽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입을 다물고 기다릴 때

나는 묶인 입으로 달을 노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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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을 보네

글/시 2018. 8. 23. 21:28 |
거울을 보네


거울을 보네, 내 삼촌이 보여
그는 오랫동안 직업이 없었지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모습이 보여
난 도망치려고 일을 배웠지

아무도 수염이 무성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어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사람답게 살아야 해, 어머니가 말했어
나는 이제 밤거리에서 일을 하지

거울을 보네, 아버지가 보여
평생 빚을 갚느라 일을 했지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슬픔으로 보여
수십 년간 그는 단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지

내가 아플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어
그래도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난 세치 혀로 밤에 금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어
동생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건 왜지

거울을 보네, 너무 깊어서 보이지 않네
언제가 되서야 땅 밑에 누워 쉬게 될 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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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원 블루스

글/시 2018. 8. 21. 23:20 |
회계원 블루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그의 머리가 댐에서 발견됐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
그저 술이나 몇 번 같이 마셨을 뿐이니

옆집 김씨가 이렇게 말했었지
젊었을땐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네
김씨는 작은 회사의 회계사였지
나는 술을 한 잔 더 따라줬다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경찰이 그의 몸을 찾지 못했다고
나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장 있었지
생각했어, 볼품없지만 솔직하다고

나는 럼 한병을 가져와 마시다가
김씨의 작품들에 그것을 부었다가
그 위에 담뱃불을 던졌다네
나는 말했네, 이제 회계일은 안 해도 되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마침내 그가 죽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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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것의 영혼

글/시 2018. 8. 21. 00:19 |

날것의 영혼



우리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고 싶다

밤거리의 낙엽은 환상을 피워낸다

불 꺼진 아파트들은 영원히 꺼져있고 싶다

겨울만 있는 행성에는 음악이 없을 것이라고


준비,

면도를 하고

알약을 삼키고

머리칼을 자르고

손톱을 다듬고

옷을 갖춰 입어야해

널 사랑하도록 해야 해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필요 없고 싶다


칠십억 인구가 매일 밤 지하실에서 사제폭탄을 만드는 꿈을 꾼다

생명도 그림자도 사라진 고속도로 한복판을 걷는 꿈을 꾼다

<내가 태아일 때 원했던 것은, 분명 태양은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밤이 없는 행성. 악은 분명히 존재한다, 인류와는 상관없이


거꾸로 도는 피, 분명 어딘가에는

장면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우리가 살고 있어

사막에는 눈이 내리고, 잡초도 없는

거기에서 우리는 만나는 일도 없이 살지도 않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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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사장

글/시 2018. 8. 9. 20:59 |
전통의 사장


검은 아스팔트에 샴페인을 터트렸네
꿈에는 오랜 독재자들이 나왔지
나는 사기꾼, 혀로 술과 약을 만드는 사람
아버지는 정직한 가톨릭 노동자였지만
난 물려받은 전통이 없어

시궁창에 황금빛 샴페인을 터트렸네
내 손에는 구멍이 났고
나는 떠돌아다니는 사기꾼
도시의 불켜진 빌딩들 뒷골목을
짐도 없이 굴러다닌다네
가격표가 없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
나는 가질 것이 없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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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의 흙

글/시 2018. 6. 25. 17:59 |

프로방스의 흙

 


사람은 흙으로 빚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바람부는 쪽으로
강대한 적인 바람의 칼질을 맞아가며 이 길로 간다
우리는 방패가 필요 없으니, 왜냐하면
이 돌로 된 몸이 이미 목신牧神의 방패이기에
그러나 누구도 영속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진흙구렁에서 몸을 치켜세웠을 때부터
그런 약속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나타났다
태양은 길다랗고 날카로운 손가락을 뻗으며
쪼아오고 우리의 발은 진흙이 묻어
곧 다시 흙이 되려는 충동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야한다
분명 이 싱그러운 나무들과 부서지는 초록빛 햇살과
돌의 손을 활짝 펴고 있을 누군가가
<시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에 의하여, <죽음>이 축복한
모든 것들의 왕국에서
흙과 암석의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이곳>에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오, 나이 없는 물은 짐승의 뱃구렁을 파고
그 거대한 짐승의 신선한
선혈의 냄새가 사방에서 바싹 타올라
엄청난 등뼈와 해골 위를 걷는 우리는
웃음을 멈출 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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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몽상

글/시 2018. 6. 13. 14:30 |

시간의 몽상

 


내 피부가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피는 끓어오르며 가장 원시의 고기를 달라고 굶주림의 외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진흙 속에서 구르며, 벌거벗고, 광적인 태양이 빛의 창들을 무자비하게 대지로 던져대는 것을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땅에 있었다.
간음이 간음이 아니고 퇴폐가 퇴폐가 아니며 나태가 나태가 아닌 시대를 나는 종횡무진했다. 나의 심장은 점점 어려져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으로 돌아갔다.
문뜩 손을 보자 먼 미래 내 가슴에 새겨져있던 수십 개의 흉터는 주먹으로 옮겨졌고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이 배겨 촉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나는 승리했다고 춤을 추었다!
강한 턱과 무자비한 송곳니로 나는 낯선 혈거인간들을 내 식도로 꿀꺽 삼켰다
하늘에는 분명히 신이 없다! 거기에는 저주처럼 타오르는 붉은 구球만이 고고히 있다.

 

아니야! 내 입이 터져버렸다! 이젠 밤이 내리지 않는다!
선혈 대신 독주를 마시고 죽은 인간 대신 구운 고기를 먹으며 천둥번개 대신 음악이 들린다
나는 오히려 태아처럼 웅크렸다, 단 한 번도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높은 수정의 궁들은 날 덮칠 듯이 쏘아본다

내 혈관이 텅 비어버렸다
공포로, 그런데 그 공포도 대지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달라.
언어는 바보이다. 그것에 젓갈처럼 절여진 나는 머저리이다.
「너는 열망을 열망한다.」 커다란 조롱처럼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로 가야 아무 의도 없이 피어나는 장미를 볼 수 있지? 이제는 모든 장미가 씨앗 때부터 <나는 장미가 되고 말 테다>라며 피어난다.

 

쏜살 같은 악덕들…… 나는 몽상가일까?

 

수정궁들은 점점 높아진다. 언젠가 달과 화성에 닿을 때까지.
나는 괴기한 악몽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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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진 작품

글/시 2018. 4. 23. 21:50 |

멈춰진 작품



형태 없는 멈춰진 작품. 그는 지난 2년 간 살아오지 않았다

문짝 없는 집에서 안락한 부랑자처럼 지내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의 이름표도 붙어

있지 않은 서랍들. 무언가는 비었고 무언가는 너무 무겁고

무언가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타자기는 어디에 숨겨놨더라, 아니, 굳이 숨겨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속였지, 드라마를 만들기 싫다는 치기에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버렸다

그래도 드라마는 너의 두개골에 천공을 만들고 뇌수로 스며든다

깨뜨리려면 너의 눈동자를 깨뜨려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멈춰진 작품을 다시 한 번 멈추는 것만큼 허황된 일이다.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시를 쓰지 않으면 물에 부푼 익사체처럼 평화로이 부유한답니다. 그러면 그것은 둥둥 떠다니며 어쩌면 행복이라는 기괴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뭉글뭉글 생각하죠. 그런데도 언젠가 그것은 자신의 비대해진 몸뚱이를 사시미로 도려내고 비계 속에 파묻혀있던 팔과 손가락의 뼈들을 발굴해요.”

뼈다귀들은 달그락거리며 펜이 들어있던 서랍

과 담배가 들어있던 서랍들을 뒤진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는 것처럼 덜커덩

거리다가 그 뼈들은 집안의 술병을 전부 창밖으로 내던진다: 알코올중독자의 자기파괴 과정은 술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멈춰진 작품은 그간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때,

그것은 부피는 변하지 않은 채 질량만 폭발적으로 상승해왔다 그래서

아 그래, 멈춰진 작품이 있었지, 하는 순간, 너는 그 무지막지한 질량으로 얻어맞는 거야,

네 두개골은 박살나고, 눈동자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턱뼈는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지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앓지 않는 동안

나는 문이라는 문은 전부 두드리고 다녔다. 흔들림이 멈추지를 않는 전철을 타고

서울이라는 좁아터진 숲의 빌딩이란 빌딩은 전부 옥상까지 올라가보았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천둥번개를 기다린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익사체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도 사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즉, 너는 너의 운명이니 천분이니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그런데

물에 부푼 시체 같은 모습으로 너는 참 잘 해왔어 물론 몇 십 년에서 더러는 몇 백 년 간 계속 해왔던 퇴폐와 패배의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겠지 그러나 아무튼 너는 시체답게…… 물렁물렁한 시체답게 잘도 두 발로 땅 위에 서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운명이니 천분이니 천명이니, 의사가 준 알록달록한 약물들과 다시 대화를 하지, 그러니까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쪽에서 말이야, 네가 자주 들락거렸던 단출한 조명의 흰색 꿈나라의 관리자들이, 매번 말하는 것이잖아, 영혼 속에 지네가 들끓는 병은 한 번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가 않는다고, 그 지네들은 계속해서 알을 깐다고……

너무 많은 말들이 있기 전에 나는 언어의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뜯어야만 했다.


멈춰진 작품을 다시 펼쳐보자 남한에도 있었고 소련에도 있었고 독일에도 있었던 K씨는 돌연 야수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싶어졌다. 분명 서랍 어딘가에는 나이프가 있고, 노끈도 있고, 심지어는 펜까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옥상에서 사흘 나흘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도 천둥번개는 이쪽으로 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K씨의 덜그럭거리는 팔은 냉장고에서 소주병과 맥주병을 찾아 그것이 확실하게 가득 차있는지 흔들어 본 뒤에 그것으로 길가는 소시민들의 대가리를 깨부술 계획을 짜고 있다.


거울을 깨지 말 걸 그랬지. 너무 어린 치기였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깨버리고 말 걸. 심지어는 눈동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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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협하는

글/시 2018. 2. 2. 20:23 |

너를 위협하는



유리잔을 본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있다

그 물체는 언제나 깨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저기에 서있다


유리잔을 쥔다

수전증은 의학의 이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뼈와 힘줄은 폭력성을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생각

은 비열하다 나는 비열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명이 심장에서 새어나올 것 같다


나는 유리잔을 공포스럽게 내려놓는다

유리잔의 존재로부터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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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글/시 2018. 1. 3. 19:22 |

회상



열다섯의 다락방, 시린 겨울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기뻤다

창문은 하얘

밖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린 나이에 그는 너무 거대한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십 년 뒤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미 죽은 시인들은 널 구해주지 못해

두들기는 문마다 부재중이었다.


망령처럼 스스로를 홀리며 살아온 십 년이 십일 년이 될 때

너무 늙은 소년은 너무 어린 성년이 되고 있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고 바랐고

그러나 어딜 가도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골목, 막다른 길

당장 필요한 것이 한 줌의 지폐인지

또 한 장의 텅 빈 종이, 그러니까 즉

또 한 장의 공포인지

하릴없이 서있자 증오를 받는다.


술과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현실.

너를 마구 할퀴고 쥐어뜯으며 갈기갈기 찢는

아, 너구나. 울증 속에서 너는 너와 마주하고

손에는 술,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내뱉어지지 않는 「굳바이」 한 마디


꿈속에서 열차를 오래 탔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동차건 버스건 열차건

바퀴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질색이었다.

마침내 내려 플랫폼에 토악질을 하고 뿌예진 눈동자를 치켜세웠다.

어딜 가든 낯선 고장이다. 「Home」 이라는 단어는

너무 장황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내 손으로 집필한

길고 장황한, 이해되지 않는

한 문장뿐인 나의 검은 책.


열다섯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혼돈을 해소하려고 쓴 글귀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기 서서, 증오를 받는다.


낫과 망치를 들고 싶었던 앙상한 손에, 술과 자낙스.


“성자聖子가 되는 방법은 분명히 알고 있어. 명상과 수련 속에서 어렵사리 알아냈어.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항상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술집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우리도 괜찮다. 약병이 바닥을 치기 전에는 우리도 바닥을 치지 않는다. 하늘에선 별들이 밤 위를 기어간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것이 십일 년 간 반복됐다. 별들은 흩어지며 형태가 불분명한 여럿의 빛이 되고,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우리 자신을 원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이 살았던 소련은 우리가 알았던 소련과 다른 소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차 타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으로, 듣자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항상 진눈깨비가 하얗게 쏟아지고 거꾸로 치솟는다지만

플랫폼을 여행의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깜깜한 겨울. 봄이 와도 죽을 수 없으므로 여름까지 살고, 그러나 너무 덥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는 죽을 수 없으므로 가을까지 살고, 그러나 낙엽들 사이에 시체 한 구를 더하는 짓도 도무지 못할 짓이고, 또 깜깜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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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음의 계절

글/시 2017. 12. 16. 11:37 |

무음의 계절



날던 새들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

농장에는 검은 나무들

파편처럼 서있다

추위에 잠이 든 길고 축축한 짐승들은

깊고 깊은 땅 속으로 도망쳤다.


머리 위에는 천구天球가 아니라

곧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릴

살얼음이 얼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땅

내 발밑에서는

서걱대는 발자국 소리만 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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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그간 잡고 있던 유령들의 소매를 놓을 때가 되었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살게 해달라고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내 육신과 영혼이

너무도 당연한 듯 흙더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십여 년간을 매달려왔다.


너무 오래 유령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자

내 손도 반투명한 비물질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러자 그 손으로 잡는 나의 펜 또한

유령처럼 비어가는 것을

나는 뒤늦게 보았다.


슬픔과 비참으로 쌓았던 벽은

살짝 건드리자,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

이제는 내 발밑에 온갖 슬픔과 비참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닌다. 나는 그 땅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아, 그것들을

한때 나의 벽돌이었던 비명들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잡고 있던 것들이 유령이었나? 아니면

오히려 내가 유령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의 육신의 무게를 느끼려고 한 발짝을 뗄 때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자

붉은 피들이 흘렀는데


아아, 그래! 적어도 나의 심장은

아직도 살아서 피를 품고 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피를 긁어모아,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나의 왼쪽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세계를 담고 떨어진다.


안녕, 나의 망령들이여, 안녕.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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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글/시 2017. 9. 9. 10:55 |

보름날



오래된 패배의 습관들이

절망을 부르짖으며 늑골 안에서 헤엄치던 날

나는 너무 지쳐 주머니칼을 꺼낼 기력도 없었고

그리하여 참으로 몇 년 만에

눈물을 흘려보고자 결심했다


노을이 뒤덮은 산등성이에서

담뱃불은 그 노을처럼 새빨갛고

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물샘에서

그 투명하지만 맑지 못할 수액들을

끄집어낼 준비를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리며 살아왔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오는 와중

눈물을 흘리는 방법도 홀연히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 슬퍼하는데

해가 떨어지고 말았다


산속의 밤은 어둡고

담뱃불은 힘없이 꺼졌다

시간은 나를 스쳐지나가기만 하였구나


원망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하늘로 향하자

아, 보름달이다. 어떤 밤보다도 청명한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 맑은 만월이

나를 대신 울어준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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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에게 그 무엇도 물어서는 안 되리라



金은 자신이 언제부터 늪 속에 살았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기억은 너무 오랜 시간 때문에 흐려져 있었고

분명한 것은 아주 오래 전 김에게도 폐가 있어 지상에서 숨을 쉬었지만

이제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것이 너무도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늪 속으로 가라앉아 살게 되었는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金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지느러미와 갈퀴가 생기어

늪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피막이 생겼고

김의 턱 아래에는 두 개의 아가미가 있다, 이제 김의

흉부 안에는 폐라는 기관이 없다 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늪 속의 삶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이 질척거리는 웅덩이 속에도 세속의 모든 고통과 절망이

아주 느린 속도로 유영한다, 그러나 삶이란 어디서든 그런 것 아니던가?


다만 金은 아주 오랫동안 늪 속에서 살았을 뿐이다

개구리나 도롱뇽 따위를 잡아먹으며, 아주 오랫동안 살았을 뿐이다.


그러니 늪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그 막연하고 당혹스러운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金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 늪의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었을 때

영겁의 시간 동안 쓸 일이 없던 두 눈이 태양에 의해 지져졌고

아가미는 숨을 쉬지 못해 金은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워 그야말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김은 입으로 울컥거리며 진흙을 토했고

너무 밝은 암흑 속에서 지느러미가 돋은 팔과 손으로 늪의 수면을 긁었다

질식하여 죽을 것 같은 중에 김은 점액으로 미끈거리는 나신을

전부 늪 위로 끄집어냈다.


이제 金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다, 차라리 죽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싶으면 다시 폐를 가슴 속에 지어야한다 아가미는 닫아야한다

거의 도마뱀의 꼬리처럼 변한 다리도 더 다부지게 만들어야한다

지져진 눈일지언정 다시 눈으로 무언가를 보게 되어야한다

김은 정말이지 다시 늪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그러나 金은 발을 흙에 디디고 천천히, 위태롭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휘청거리며 땅 위에 일어서려 한다,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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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이 있어선 안 될 호소呼訴



달밤에달밤에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로 쓸 수 없는 것을 시로 쓰고자 하니 아프고 아파

울 수도 없으니 약병은 바닥을 쳤다

달밤에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달밤에달밤에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별이 되고프다

왔다 가는 선객先客들의 홀가분함이 불고

아직 울 수 있는 사람들이 떨어트린 눈물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것이니

나는 바람이 별이 되고픈데


아프게 궁금해 했다

펜은 언제 부러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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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절망

글/시 2017. 7. 30. 20:34 |

밝은 절망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구형으로 이 행성을 둘러싼 우주의 별빛은 내가 나로부터 얼마나 먼지 알게 한다.

불이 빛나는 시간은 밤뿐이다.


이 땅의 적막이 사실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

한 가지 행운이라면

매일 어둠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 없는 저주들 중 하나는

매일 어둠이 물러간다는 사실이다

사색에 잠겨 단도를 놓은 철학자도

태양의 폭력 아래에서는 다시

칼을 잡는다, 흐르지 않는 눈물로.


한 마리의 뱀이 되었으면! 그것도

한겨울의 땅 위를 방황하는 뱀이.

그 냉혈동물들은 알고 있다

눈에 비치는 것들은 송두리째 허상이며

벼린 칼끝 같은 냉기 속에

<느껴지는 것>들만이 질료를 가지고

텅 빈 우주 안에 묵묵히 실존한다는 것을.


사람이 영원한 태양을 갈구해 불을 지필 때부터

우리는 수천 년의 절망 속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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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의 서곡

글/시 2017. 7. 26. 20:09 |

우화羽化의 서곡



증오의 눈을 부릅뜬 채 신과 맞대면하던 삶은 그 어찌도 편했는가!


만일 하늘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려오는 것이라면

나는 향일성의 저주가 되어 산산조각나리라고

내 젊은 피는 열망했었네, 그리고 정말 그러했으니!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 역시

하나의 인물이 아니었다, 한때 악마 들린 손으로

펜을 쥔 채 종이 위를 종횡무진 하던 젊은이는 어디서 죽었는가?


나의 광기는 비명으로 짠 고치였네! 그것을 찢고 나오자

그간 안락하게 날 감싸던 수천 줄의 비명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 황망한 세계에 주인 없는 눈동자처럼 굴러 나왔네


수만 겹의 사막과 수억 단의 대양 위에서 토혈하고

그 울컥이며 나온 새까만 피들이 화들짝 놀란 벌레 떼처럼

모든 세계들로 바삐 도망가는 것을 보니, 이미 내 몸엔 피가 없어라


절뚝이는 걸음으로 찾은 못에서 온 혈관을 잉크로 채우고

깃발도 없이 돌진하려 했건만, 알고 보니 벽은 세계가 아니어라!

열 손가락 끝에서 방울방울 잉크가 흘렀다. 나침판은 계속 회전한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갈 곳이 없네, 나는 주저앉아

깔고 앉은 모래알 하나를 집어 들자

악마를 잃은 천재들이 그 안에서 수도 없이 몰락해가는구나!


너무 무수한 세계에서, 미학을 위하여! 아니! 전쟁을 위하여!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슴을 열자 튀어나오는 것들은

지네들, 바퀴벌레들, 피처럼 붉은 루비, 그리고 멈춰진 작품들 등등……


구제를 원하는가? 그럼 부디 나의 반대편으로 가라!

나는 이곳에 세워진 저주받은 이정표다. 그것은 도망친다!

저쪽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힌 화살표처럼.


아! 아름다움이라는 눈동자가 감겼다. 나는 이제 거기에 못을 박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노래를 부르네, 사랑과 멸망의 노래, 가사가 하나 뿐인 노래

끝나지 않는 영혼의 백색 어둠, 그리고 잃어버린 열광, 그리고


불멸의 피.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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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침엽수림

글/시 2017. 7. 23. 16:10 |

어느 침엽수림



1.

나는 침엽수림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햇빛이 비추지 않는다.


2.

이곳에서는 너무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모든 빛을 가려

굳이 굴을 파고 살 필요가 없다. 그저 풀밭에

누우면 항시 밤인 이 숲은 전체가 나의 집이 된다.

그러나 나의 집이라고 해서 나만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이 살기에는 나무와 나무들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 이 숲에는 벌레들과,

방랑하는 제신들과 나만이 살고 있다. 다행이 나는

몸집이 작아 숲속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내가 밤눈이 발달한 것도 분명 이 숲에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양빛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나무들은 빛을

봐야만 하기 때문에 끝없이 키가 커진다.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닥다닥 붙은

이 나무들은 서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키가 큰다

나는 이 숲의 정상이 어디인지, 또 이 숲이 어디까지

펼쳐져있는지는 모르나 경험에 따르면 나는 절대

숲의 바깥이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사방에 길이 나 있지만

어느 각도로 보든 시야는 결국 또 다른 나무에 가려진다

그래서 이 숲에선 적의 공격에 방비해야한다는

의식조차 가려진다. 가끔 시야를 지나가는 영령들이나

희미한 빛을 내는 제신들은 그저 돌아다닐 뿐

내 삶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들로 인하여

이 숲이 침엽수로 만들어진 성소라는 것만을

어렴풋이 생각해볼 뿐이다. 나는 주로 벌레들을 잡아

먹으며 사는데 그들은 눈이 없다. 장님인 벌레들을

이빨 사이로 자근자근 씹는 일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 내가 무슨 양심이라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가끔 비가 오면 나는

잎들의 향기를 한껏 머금은 채 떨어지는 그 물방울들을

성수 맞이하듯이 마신다. 빛이 비추지 않아 오늘과 내일의 경계조차

없는 숲이어 나는 도대체 내가 얼마간 여기에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분명 나는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불멸에 대한 알 수 없는 확신이 내 머릿속에 있다.


3.

그 숲은 너무 크고 울창해 보고 있노라면

녹색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것은 분명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땅일 터이지만

보이는 바로 완전히 어둠뿐인 그 수해樹海는

차라리 거대하고 봉인된 죽음으로만 보여서

나는 그 숲에 무언가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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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

글/시 2017. 7. 23. 16:09 |

점멸



공허의 수레바퀴 아래 서면

만물이 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하다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면 영혼이 니코틴에 젖은 듯

명백히 사물은 치명적인 빛깔을 내는데

또 한 바퀴를 돌면 세계는 가라앉고 소멸되어간다

마루에 앉은 나는 사라지는 세계에 겁을 먹어

덜컥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지만

뒤집어진 동공은 이미 나의 썩은 뼈를 보고 있다

공포에 숨이 막혀 목청을 틔우려 하면

이미 수레바퀴는 한 번 더 돌아, 세계는

거짓의 색으로 찬연히 빛난다. 그런데 그 거짓이야말로

진실의 그림자라서, 나는 늘상 보아오던 그

진실에, 너는 역시 그곳에서 수천만 년 모독의 시를

읊어왔구나 하고 은전 같은 세계에 슬퍼하는 것이다.


언젠가 빙하기가 오리라고 도시에 사는 나는 자신만만 주장해왔다

빙하기가 오면 공허의 수레바퀴에도 눈이 쌓여

그 운동의 소음이 끼익거리며 들릴 터이고

하늘도 땅도 지평선도 수평선도 눈빛으로 뭉쳐져

앞뒤로 뒤집히는 은전 같던 세계도 한 덩어리가 되리라고


그는 계속 외치고 있다: 빙하기가 오리라고

그러나 나는 산중에 앉아 어제만 해도 향일성의 열광으로 태양을 보던

해바라기가 오늘은 죽어 땅으로 고개 숙인 것을 관찰하고 있으니

도시의 그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는 도무지 말로 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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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의 성자聖子

글/시 2017. 7. 18. 23:40 |

악덕의 성자聖子



1.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K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많은 독자들을 나로부터 떠나게 할 것이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때부터 12월의 눈보라까지 K는 늘 악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일은 내가 K를 그다지 악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천성은 헤엄을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처절하고 잔인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하는 내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피 냄새를 맡으면 피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희미한 별이 내려준 잔인성이 아닌가 싶다. 대양은 난폭할 때도 고요할 때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대양에 사는 것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난폭하기만 하다. K는 신이 자신에게 악인의 낙인을 찍기라도 한 듯 송곳니를 드러내고 불경한 주먹을 쥔 채 평생을 살았으며 인간의 자비를 믿는 독자들은 몹시도 그를 증오하리라.


2.

내 삶은 독물과 지네 따위의 해충들이 무릎까지 넘쳐흐르는 끔찍하고 흥청거리는 사육제였다. 가끔 그 독충들은 내 늑골을 열고 나의 심장 속에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누가 삶을 마음대로 갈아치운단 말인가?

내 삶을 독충들의 둥지라고 단언하는 것을 오만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혀는 이미 독두꺼비의 혀처럼 늘어나버렸고 내 타고난 혐오로 인하여 당신들을 소름끼치게 싫어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처음 그 독물과 해충들의 즙을 흠뻑 마셨을 때, 내 살은 아직 여리고 내 눈동자는 회색으로 영롱했었다. 그러나 곧 불거진 뼈들이 살과 근육을 뚫고 위협적으로 튀어나왔으며, 내 어렸던 눈동자는 독을 가진 파충류의 눈동자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슬픔을 배출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내 피부를 째어 검은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어머니는 나의 입맞춤에 숨을 거뒀다. 끔찍한 독이 그녀의 피부 속으로, 혈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환희하며 적도의 샤먼 같은 춤을 추었다.

그 뒤로 모든 아름다움들이 일제히 눈꺼풀을 열었다. 그녀들은 품에 안으면 하나같이 안구가 없는 눈구멍과 힘없이 열린 입으로 새까만 독을 뚝뚝 흘리며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들을 독차지한 기쁨으로 나의 삶은 한 점의 두려움도 없게 되었도다! 나는 죽음이 내 육신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 같은 마음으로 나는 온 마을의 그늘에서 살았다. 밤이 오면 희멀건 빛이 비추는 창문으로 다가가 병에 걸린 아이들을 구경하고 건강한 아이들에게는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독과 해충의 즙이 내 가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걸어 다니는 소라껍질이었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였으며 그 안에 있는 것은 형태 없는 저주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도 치명적인 자유였고 터져 흐르는 기쁨이었다.

나는 햇볕이 비추는 낮에는 그늘 밑에서 망가진 수레바퀴처럼 홀로 산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밤이 내리면 나는 내 나라가 도래했다고 사방팔방으로 굴러나간다. 나는 주로 밤에 길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먹고 산다. 아이들은 연하고 부드러워 그 무엇보다도 악덕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아이들이 곧 날카로운 비수를 쥐고 부모살해를 저지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부족함이 없이 산다.

가끔 어두운 십자로에는 나의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나는 굳이 그것을 주워 모으지는 않는다. 내게는 이미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흩어진 그림자들도 나름의 나이기에 그들이 하는 일 역시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매번 불경한 노래를 중얼대며 방랑자가 오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둠 속 공허에 앉아있을 때 이따금 나의 아버지가 내게 속삭인다. 오랫동안 그가 누구인가를 고민했고 나는 마침내 그 답을 찾은 것이다. 그는 저 하늘에 있는 영령들의 유일한 주인이었고, 틀림없이 그가 나를 이러하게 낳은 것이다.


3.

고해실의 문이 굳게 잠겼는데 그것은 분명 주님의 짓이다, 라고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로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물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손에 불을 쥐고 있다. 그러나 그 불은 그의 형제가 쥐었던 불

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하고 있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과연 죽기나 하는 것인가 하고 다시금 고뇌에 빠진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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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행성에서 보내는 어떤 휴가



방랑과 방탕의 때여 안녕, 그러나 그들은

내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무언가가 타는 냄새뿐이다.


인간들은 많은 피를 흘렸고 또 더 많은 피를 갈구했다

삐걱거리는 육신으로 삽을 들고 땅을 파면

샘솟는 지하수인 듯 선혈이 쿨럭거리며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진짜 태양을 찾아 헤맸다

수채화 같은 산중에서 독처럼 센 술을 마시고

담배를 입에서 뗄 줄 모르며 널브러져 잠들었다.


오, 전란의, 뒤집어진 군홧발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악신惡神을 만들어 섬길 것이다

쥐들은 도망치고 산짐승들은 더 깊은 굴로 몸을 숨겼다.


내 가엾은 선조들의 피에 섞인 원한은

오직 나만을 나병환자 피하듯이 피해갔다

나는 돌연변이였으며 영원히 돌연변이이리라.


버석거리는 땅 위에서 다시 총성이 울린다면―과연 그것은 울리고야 말겠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는 태양 밑의 어디에도 없는 해변으로 갈 것이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가 역마살 들린 자의 평화인 것을 어찌 설명하랴?


그러나 내가 전연 친애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나는 질책하는 것도

환멸에 떨다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이 보기에 내가 이방인인 만큼

나도 이 모든 문명과 민족들에 대해 이방인이다.


인간들의 몸속에서 숨어있던 악령들이 늑골을 열어젖히고 빠져나와

그들의 발자국을 대지에 찍는 것이 훤히 보인다.


나는 언제까지나 방랑에 대해서조차 방랑자이리라.


나는 오늘 밤에도 산중에 앉아 불길에 휩싸인 행성을 꿈꾼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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