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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장과 문장들의 호흡이 매우 짧고 읽기에 편리하다. 내용 자체는 이렇다할 특이성이 없지만 사건들을 엮고 적절한 대목에 등장시켜 역겨운 불행과 끔찍한 고통들을 한낱 우스개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 기술은 몹시 교묘하고 참고할만 하다. 본문이 진행되는 내내 활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그것이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미니멀리즘한 문장에 의하여 희화화 되어버린다. 그것이 다소 과도한 경향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과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아이러니한 코미디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삶에 대한 순진한 긍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노골적인 경험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에 빠져버리는─그 회의마저도 마지막에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대한 회의'로 내버려지고 말지만 말이다─ 내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책 자체가 이야기의 진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체념을 학습한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의문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짐작 했듯이,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의 불행들을 일주한 캉디드와 그의 일행들은 더 이상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지독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대가로 권태를 얻었고, 권태를 잊기 위해 노동을 하며 존재의 목을 가까스로 축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캉디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치명적인 믿음과 기대의 이름인 '낙관주의'가 가끔씩 발작하는 의문처럼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는 설탕에 절인 레몬을 입에 넣고 밭을 갈러 나가야 한다.

<마르틴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캉디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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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첫날과 이튿날 쉴 새 없이 400쪽 가량을 읽어냈는데 잠시 덮어놓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아차 싶어서 일주일만에 나머지 100쪽 가량을 읽고 보니 독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몸통이 썩뚝 잘려나간 느낌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고 야옹야옹 울어대던 고양이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물독에 빠져 몇 번 헛발질을 해보다가 체념하여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운운하다 담담하게 죽는다. 이것은 근대의 인간에게서 죽음을 의식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짐승마저도 인간에게 물이 배면 자살을 본다. 책 맨 뒷장의 작가연보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퍽이나 아픈 인생을 살았다. 비록 병으로 죽었으나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는 개인의 죽음이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자살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학자나 지식인, 혹은 작가나 예술가라는 족속들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생물 실격.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 짐승이 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닮은 짐승이란 보고 있으면 너나 나나 처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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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 Anorexia Nervosa의 2000년 앨범 Drudenhaus의 3번 트랙.

 본 블로그에서는 처음 소개하는 블랙메탈계 곡이다. 블랙메탈계 음악이라고는 해도 심포닉 블랙메탈은 데쓰메탈과 멜로딕 데쓰메탈의 관계만큼은 아니더라도 거의 별개의 장르나 다름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데쓰메탈과 스래쉬메탈이 주요 취향인 내게 있어 블랙메탈이라는 것은 사실 ─블랙메탈 팬들께는 죄송스런 이야기지만─ Mayhem은 코미디나 다름 없고 초기 Dimmu Borgir나 Burzum은 가끔 별스러운 기분으로나 듣게 되며 초기 Behemoth 등은 아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외의 음악인데다가 그나마 Gorgoroth나 후기 Keep of Kalessin 정도나 기분전환을 위해 듣는, 그런 위치의 장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올드스쿨 블랙메탈에 대해서는 굳이 소개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다지 많은 밴드를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심포닉 블랙메탈이라고 하면 나는 Anorexia Nervosa를 접하기 전까지는 '익스트림 메탈 치고는 꽤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멜로딕하고 키보드 사용이 유난히 많은 다소 대중적인 장르'로, 나쁘게 말하자면 핵심이 없는 음악으만 생각해왔었고, 또 대다수의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들이 그런 생각을 확신으로 만들어 줬었다. 마치 멜로딕 데쓰메탈 밴드들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 수록 이것들이 도대체 왜 '데쓰메탈'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있는지 점점 이해할 수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Anorexia Nervosa는 어떤 장르구분도 음악을 한정지을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새삼 내게 각인시켜준 것이다.
 극도의 긴장감. 날카로운 사운드들이 일견 난잡하게 뒤엉켜 만들어내는 하나의 신경질적인 선율. '신경성 거식증'이라는 밴드명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어울리는 병적인 감각으로 가득한 보컬. 메탈음악에서의 키보드 사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적재적소에 쓰여졌다고만 느껴지는 치밀한 키보드 운용. 오히려 슬픔마저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분노의 감정. 이것들은 확실히 매력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본 앨범을 채우고 있는 9개의 곡들은 전부 굉장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과격함'을 지향하는 밴드들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천편일률성과 지루함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은 채 각각의 곡이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의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훌륭한 구성을 하고 있다. 덕분에 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도 청자에게는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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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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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 Zombie Ritual

기록/음악 2010. 8. 1. 06:59 |
 밴드 Death의 1987년도 데뷔 앨범, <Scream Bloody Gore>의 2번 트랙.

 이번에 소개하려는 곡 Zombie Ritual은 내게 있어 굉장히 의미가 깊은 곡이다. 무엇보다도 Zombie Ritual은 내가 데스메탈에 빠지게 된 원인이자 내 음악감상 취미 그 자체를 결정지은 곡인 것이다. 사실 <Scream Bloody Gore>를 접하기 전까지의 내 음악취향이라는 것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나 스타일도 없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면 그 영화의 OST 앨범을 듣고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의 감상'을 다시 곱씹으며 만족스러워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음악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미학을 갖추고 있는 예술이 아니라 영상 따위의 분위기를 보조하는 부수적인 장르로 받아들여졌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본 앨범은 내게 장르적 충격 그 자체였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앨범을 채우고 있는 총 12개의 트랙들은 단 한 곡도 빠지지 않고 청자의 정신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대면한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완전한 작품이 되고, 작곡가, 연주가들의 의식은 과격하면서도 절묘한 방법으로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음악이라는 것에서 이 정도로 처절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짙은 감명을, 아니 지독히도 공격적인 '음악적 오르가즘'을 느꼈던 것이다.
 오르가즘! 그만큼 내가 받은 감동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대담한 곡구성 속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지며 화려한 기타 테크닉으로 완성되는 완급조절과, 익스트림 메탈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공격적이기만 한 보컬과는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울부짖는 듯한 실존주의적 감성으로 가득찬 보컬, 그리고 전면에 내세워진 채 미치광이처럼 터져대는 드럼 등은 그저 잘 만들어진 음악이나 감동적인 곡을 뛰어넘어, 그 매혹적인 손아귀로 들끓는 생명력과 인간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펼쳐져있는 녹슨 납덩이처럼 무겁고 검붉은 감정들을 예민하게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심장을 꿰뚫은 쇠말뚝처럼 금속적이면서도 더없이 섹슈얼하다. 피보다 붉고 의식보다 아프며 쇳덩이보다 밀도높고 철저하다.
 그리고 그런 걸출한 앨범 속에서도 Zombie Ritual은 주머니를 뚫고 나온 못처럼 뛰어난 완성도를 드러내는 곡이다. 그 광휘란! 본 곡의 무거운 필링 속에서 날카롭게 번득이는 천재성은 도무지 스무살 청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 스무살. <Scream Bloody Gore>가 발매된 1987년 척 슐디너는 고작 스무살의 나이였다. 이 사실이 놀라운 이유는 데스메탈의 근원격인 이 기념비적 앨범의 제작자(Death라는 밴드 자체가 실상 '척 슐디너와 초호화 세션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제작자'라는 표현도 극단적인 것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한다)가 그런 어린 나이였다는 점보다는, 차라리 그 음악성의 본질적인 부분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절규하는 듯한 열광의 정신이, 이미 그 나이부터 그토록이나 진지한 형태로 나타나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보다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본 앨범을 데스메탈보다는 오히려 쓰래쉬 메탈 쪽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Scream Bloody Gore>를 감성적인 부분에서 보다 깊이 감상하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본 앨범에서 쓰래쉬 메탈의 주된 요소들 중 하나인 '통쾌함'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데스메탈의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Scream Bloody Gore>가 발매된 해인 1987년에 처음 나타난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 4년 전에, 즉 1983년에 발매된 척 슐디너를 주축으로 한 밴드 Mantas의 데모앨범 <Death by Metal>에서부터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음악을 들은 감상이 '아픔'일 정도로 진중하고 처절한 그의 음악적 방향성은 <Death by Metal>에서부터 정해져있었고, 그것은 <Scream Bloody Gore>와 <Leprosy>에서 '완성'된다. 밴드 Death의 1, 2집은 올드스쿨 데스메탈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음악적인 기량에서도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앨범인 것이다.
 마치 고전문학처럼 진지한 주제의식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길 데 없이 절묘한 형식 속에서, 이 예술작품의 노골적인 미학과 오르가즘과도 같은 맹렬한 감동을 느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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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은 세계에 대항하고자 채식주의를 바라지만
내 무의식은 한 조각의 맛좋은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네
어떻게하란 말인가.>

주인공 중 한명인 '작가'의 독백.
작품 내내 이어지는 작가의 대사들은 대화상대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잣말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자신만의 고뇌와 갈등에 갇혀 세계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완전한 '작가적 인물'.
가장 대사가 많은 그의 말들은 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내뱉어진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다고 쳐
천재가 되어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의혹과 번뇌 때문이야
늘 자신과 세상에게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거지
그 자신이 가치롭다는 것을 말야
만약 내가 천재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면?
글을 뭐하러 쓰겠어?
이유가 도대체 없잖아.>

그곳에 들어간 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역'에 자신이 들어가 영감을 얻고 천재가 되는 상황을 상정하며 자신의 패러독스를 고백하는 작가.
고백. 그는 계속해서 고백한다. 말상대인 '교수'가 그의 혼잣말 같은 고백들에 질려 짜증을 부려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애당초 그에게 말상대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그의 고백과 그의 작품들은 무척이나 닮아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 독자란 실존하는 인간(귀와 입)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supposition)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작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화상대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독백을 읊는 것일지도 모른다.
까뮈의 <전락>의 화자인 클라망스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여름은 갔다/기념비 하나 남기지 않고서
태양은 따사롭지만/여전히 충분치는 않도다
모든 진실이 이루어졌도다
마치 손바닥에 오므려 접은/다섯 손가락의 솜털인양
충분하지 않을 뿐
그루갈이 끝에도/악마는 물러가지 않았다
세상은 축제처럼 흥청거리나/그것도 충분치는 않다
영원한 삶이 나를 먹이고/보살피고 웃게 하고 있었다
나는 행운아였다/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잎사귀들은 하나도 마르지 않고/사지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고
유리처럼 마알간 한낮/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행이 전부 멀쩡히 '구역'에 도착하자 기쁘다며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잠입자'.
죽은 '멧돼지'의 동생이 지었다는 시를 암송한다.
'잠입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운율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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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병균 - 비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
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말레이 여자 마라를 만났다
토오는 나를 미워한다
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
갈색 피부의 마라 -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를 하나
나......'토오를 내쫓아', 마라......'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와요'
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 일부를 빼앗고 있다
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파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춥다
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갈색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나는 마라를 사랑한다
마라는 일어선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 
나는 태양병이 무섭다
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를 향하여 소리질렀다. '마라!'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엄습해 온다. 
죽음이 구제를 갖다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숲의 화제는 광기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나는 고통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나는 한계 위에 서있다

 
- "태양병" / H. 노바크

이 쪄죽을 듯하고 열광적인 냄새를 사랑한다.
갈증. 종말적인 이미지지만 동시에 영원할 것만 같은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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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e - Hex

기록/음악 2010. 7. 22. 19:55 |
 밴드 Hate의 2005년 앨범, <Anaclasis, A Haunting Gospel of Malice and Hatred>의 3번 수록곡 Hex.

 밴드 Death의 중심인물 척 슐디너가 병으로 죽은 2001년.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데스메탈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그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 생겨난 데스메탈 밴드들을 제 1세대라고 말한다면 90년대 중후반에 생겨난 데스메탈 밴드들을 제 2세대라고 말해야한다. 문제는 그 '제 2세대'들이 태어나질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긴 태어났으나 그 밴드들이 대부분 '데스메탈 밴드'가 아니었다. 제 1세대 데스메탈 밴드들의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그들이 만들어놓은 엄밀하고 과격한 사운드는 대중성과 손을 잡고 '멜로딕 데스메탈' 밴드가 되거나 자기 장르의 태생적 한계를 느낀 블랙메탈, 그라인드코어 밴드들과 융합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브루털 데스메탈'이라는 더 강한 과격성을 지향하는 장르도 만들어졌으나, 끊임없이 지저분한(?) 리프 한두가지만 반복해대는 안이한 곡구성 때문에 완급조절에 실패하여 오히려 '덜' 과격해지고 만 경우들이 대부분이니 브루털 데스메탈을 데스메탈의 진화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멜로딕 데스메탈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주관이지만)데스메탈에서 파생된 장르라기보다는 차라리 파워메탈에 데스메탈적인 보컬만 붙여놓은 장르로밖에 보이지 않는지라 장르조차 같은 궤에 있지 않은 두 음악을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예 언급을 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블랙메탈과 데스메탈이 융합한 경우에는 즐기기에는 충분하나 어쩐지 깊이가 없는 밴드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그라인드코어와의 융합이 Carcass처럼 성공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이것들은 분명 변형이거나 합병이고 제 1세대 데스메탈 사운드를 충실히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있는 밴드들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의 수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Bloodbath나 Hate등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Bloodbath는 그렇다 치고 Hate가 장르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데스/블랙메탈 + 인더스트리얼 메탈'이라는 정체불명의 장르로 평가되고 있는 모양이다. 블랙메탈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무래도 쉴새없이 두드려대는 드럼의 박자 쪼개기가 블랙메탈의 형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 것 같고, 인더스트리얼은 효과음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짬뽕장르로 이름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작 곡을 들어보면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는 그저 잘 만들어진 '현대적 데스메탈'일 뿐이고 블랙메탈이나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낌새는 거의 보이지도 않으므로 나는 Hate를 그저 '현대적 데스메탈 밴드'라고 칭하고 싶다.
 서문이 너무 길었는데, 곡 자체에 대한 얘기로 들어가자면 우선 Hate는 사운드부터가 무척 단단하고 꽉 찬 느낌이 든다. 뭐 하나 빠지거나 과도하지 않게 밸런스를 잘 잡아놓고 고음량으로 감각을 살려놓으니 벌써부터 그들의 음악에 호감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관적인 주제 밑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칙적 구성이나 트윈기타의 치고 빠지는 절묘한 호흡이 더욱 곡에 정신을 빠트리게 만든다. 보컬 또한 낮게 긁어대는 브루털적 그로울링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으나 브루털의 그것처럼 지독하게 저음으로만 꿀꿀거리는 바람에 오히려 청자를 황당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고, 보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명확하며 고저의 변화가 자유로운 방식으로 박력있게 내질러준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이들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척 슐디너의 죽음과 함께 데스메탈도 죽었다고 할 수 있느니 하며 극단적인 말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통 데스메탈 밴드'라는 타이틀을 얻기가 어려운 것 뿐이지 장르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90년대 초반이라고 해서 실력있는 데스메탈 밴드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워낙에 마이너하면서도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까지 엿보이는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데스메탈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항상 소수이거나 심지어는 '개인'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현대 데스메탈계에서 Hate는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그 '소수'들 중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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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이 곡은 데스메탈 밴드 Death의 일곱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인 The Sound Of Perseverance의 7번 수록곡이다. The Sound Of Perseverance는 5집인 Individual Thought Patterns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던 변칙적이고 진보적인, 즉 프로그레시브한 곡구성이 이미 장르의 한계조차 뛰어넘은 6집 Symbolic에서 깔끔하게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른 채 발전에 발전을 더해서 만들어진 밴드 Death의, 그리고 인간 척 슐디너(Chuck Schuldiner)의 완성품이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걸작이고,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으며 모든 트랙이 베스트 트랙인 완전한 작품이다. Symbolic에서도 보여졌듯이 척 슐디너는 스스로가 '데스메탈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장르라는 형식적인 틀에 구속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항상 다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음악을 했고, 그것이 그의 손에서 태어난 곡들에서 느껴지는 유일성과 개인주의적 향취의 정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곡을 들어보라. 광포한 감성이 사운드의 입자 하나하나에 핵처럼 박혀있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절대로 이성의 절제를 넘어가는 일이 없다. 강철 같은 이성이 만든 곡의 구성 한가운데에서 공격적인 감성들이 새빨간 생명력과 함께 절규하고 있다. 절규. 이것은 황폐한 세상 속에 근거도 없이 떨어져내린 인간정신이 부르짖는 비참한 절규이자 처절한 의문이다. 거대하고 절대적인 부조리 밑에서 고통받고 있던 자의 인내의 소리(The Sound Of Perseverance)다. 아름다움과 기괴함, 증오와 애정, 고통과 쾌락, 실존에 대한 의문과 자기파괴적인 충동을 뒤섞어 만들어낸 슬픔의 미학이다.
 척 슐디너의 음악은 아프고도 아름답다. 노골적이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진취성 앞에서 향일적 예술가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척 슐디너의 음악은 그대로 그라는 인간의 정수가 된다. 그는 불행한 인간조건 아래서 자기표현을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알아낸 이이고 섬광 같은 정신이었다.
 나는 그의 음악에서 쾌락과 고통과 전율의 극단을 모두 맛봤고 번뜩이는 천재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심장을 꿰뚫고 나온 쇠못처럼 강하고 날카로웠으며 단단하고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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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카스의 1994년 앨범 HEARTWORK의 마지막 트랙인 Death Certificate다.
 카르카스는 그라인드코어 밴드로 시작해서 후기에 훌륭한 데스메탈 밴드로 탈피한 밴드의 좋은 예인데, 그라인드코어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이들의 변모가 퍽 기쁜 일이었다. HEARTWORK를 처음 듣고 '하면 되잖아'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
 데스메탈로의 방향성 전환은 사실 후기라고 하기도 부적절한 1991년의 앨범 Necroticism Descanting The Insalubrious(이후 Necroticism..) 에서부터 보여졌는데, 이때부터 그라인드코어라고 하기엔 비교적 분명한 사운드와 멜로디, 그리고 곡당 평균 5분을 상회하는 긴 런타임이 곡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사실 곡이 긴 건 그라인드코어 밴드답지 않게 1집때부터 4~5분씩 되는 곡들을 써왔던데다가 오히려 HEARTWORK에 와서 그 길이가 전보다 짧아졌으니 방향성 전환의 주요요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그러나 Necroticism..은 사운드로 보나 곡의 형태로 보나 데스메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가벼운, 오히려 광대의 몸짓처럼 우습고 발랄하기까지한 펑크적인-그라인드코어의 기원격인 장르가 펑크록이라는 것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뉘앙스가 있었던 것에 비하여 HEARTWORK는 그 사운드의 육중함이나 기타의 진지하고도 공격적인 플레이, 그리고 변칙적인 곡구성에서 드러나는 청자를 거머쥐는 듯한 감각이 어떤 면에서는 <밴드 Death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또다른 가능성을 개화시킨 밴드>라는 찬사까지도 받을만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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