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에 해당되는 글 267건

  1. 2022.02.19 학력 유감
  2. 2022.01.27 녹색 눈물
  3. 2021.12.23 남은 해
  4. 2021.11.18 매일 죽는 사람
  5. 2021.11.04 생폴 요양원
  6. 2021.10.15 역전에서
  7. 2021.09.17 일몰
  8. 2021.07.30 부취(腐臭)
  9. 2021.07.15 시인의 피
  10. 2021.02.04 자판기
  11. 2021.02.03 (2020.12.31)주인공을 만드는 방법
  12. 2021.01.14 안개(폐기작)
  13. 2021.01.07 빈 집 1, 2
  14. 2021.01.03 닫힌 문
  15. 2020.12.06 두개골 한 겹 안팎에서
  16. 2020.11.21 그곳에선 하수구 냄새가 났다
  17. 2020.11.12 새벽 2시, 도봉로 130길
  18. 2020.10.25 경계선
  19. 2020.01.29 과거를 생각하며
  20. 2019.12.28 태양이 얼어붙어서 1
  21. 2019.12.25 겨울안개
  22. 2019.12.20 암막 같은 희망
  23. 2019.12.17 꽃봉오리 속의 지혜
  24. 2019.12.14
  25. 2019.12.11 질식의 땅
  26. 2019.12.10 불야성
  27. 2019.12.09 無名 1
  28. 2019.12.07 펜을 문 짐승
  29. 2019.12.06 부정否定의 시 1
  30. 2019.12.03 첫눈 1

학력 유감

글/시 2022. 2. 19. 21:38 |

학력 유감


아버지가 대학에 다닌다
곧 우리 가족은 대졸자가 둘이다
방통대 학생회장 출마
플래카드 펄럭이는 캠퍼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까마득한 후배다

아버지도 어느새 내 학력을 추월하고
나는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은
십오 년째 작가 지망생
글 쓴다고 저녁마다 술이 고픈
나는 술값 좀 벌어보자고
몇 번이나 아버지 과제 대필했다.

무슨 돈으로 내가 막걸리 마시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거리에서
푸른 담배 연기 뿜어 올리는지
어머니는 모른다

대학영어 낙제한 아버지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일어나던 나는
꼬여버린 우리 집안 학번에
문득 웃었다가
대필값 돌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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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눈물

글/시 2022. 1. 27. 22:59 |

녹색 눈물


이 거리에서 슬픔은 초록빛이다

창동 사거리
하나마트 문 닫을 무렵
당장이라도 얼어 부서질 듯한 하늘
사내는 국방색 코트 속에 오그라들어
건널목 보도에 앉아있다
팔뚝만 한 담금소주 1800ml
열린 병 속 내려다보며
잘못 그려진 초상인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몇 대의 순찰차가 귀 따갑게 지나갔다
곧 눈이 내리면 저들은 사거리 구석에
경광등 켜놓고 잠을 잘 것이다

결빙된 밤안개처럼 눈발 흩날린다
사내는 술병 속 무엇을 들여다본다
탁류 같은 흙빛으로 웃기만 할 뿐
낡은 등산화 위로 하얀 기억들 몰아친다

사내가 잃어버린 슬픔의 방법
나뭇잎 푸르게 인쇄된 페트병
아직 일 리터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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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해

글/시 2021. 12. 23. 23:24 |

남은 해


 형광등 불 밝은 방, 방향제들 곰팡이 퍼지듯 슬금슬금 늘어난다, 거의 죽어버린 커다란 시간이 방에, 이 방에만 몸뚱어리를 눌러놓았고, 네 방에서 시취가 나, 오늘 어머니는 눈 덮인 전나무 모양 방향제를 하나 건네주었다, 시간은 왜 그저 지나쳐버리지 않는지, 지나가려다 발목 잘린 그것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썩고 장판에는 시쳇물이 철벅, 거리고, 의자 위로 피신한 나는 작년 연말을 악몽처럼 꿈꾼다, 같은 표정의 거대한 시체가 전부 썩기까지 걸린 일 년, 다시는 그런 것을 방안에 들이지 않으리라고, 창문을 열고 책을 덮고 늠름하게, 나의 방문이 시간의 관뚜껑이 되지 않게 하리라고, 무척 진지하게 결단했었고, 결단했으나, 한 해 동안 썩어갈 그것이 무너져서, 드러누워 있다, 저녁마다 가족은 지친 얼굴로 방향제며 비누 따위를, 상냥하게, 책장에 탁자에, 올려놓고, 아니에요 어머니, 이 송장 더미는 내 숨통에 묶여 다녀요, 미처 못한 말을 중얼대며, 신년이 되면 숨질 놈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것은 참 거울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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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사람

글/시 2021. 11. 18. 23:09 |

매일 죽는 사람*


 야간버스가 달리고 창밖의 풍경은 계속해서 뒤로만 밀려난다, 종일 서울이 뿜어낸 땀이며 연기며 습기 찬 한숨 따위에 하늘은 새까맣게 흐렸고 그 뒤에 별들은 도사렸고, 오늘은 무너져 내려오지 않으려나 보다, 뒷좌석 사내는 옆구리를 감싸 안고 송장처럼 뻣뻣하게 앉아, 죽어있고, 죽어있는가보다, 성기게 포장된 도로 위에서 버스는 가끔 몸을 벌떡인다, 그때마다 승객들은 덜컥 이를 부딪으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 곧바로 눈을 감는다 아직 종점이 아니고 종점은, 검은 구름 위의 별들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에서 엄습해오겠지, 승객들은 모두 그렇게 믿는다 가로등 불빛으로 점멸하는 얼굴에 웃음인 듯 체념을 띄워놓았다, 뒷좌석 사내는 줄곧 죽어있고, 길은 갈수록 좁고 버스는 더욱 몸을 뒤틀어대는데, 사내는 경직되어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미 종착지가 찾아온 덕인지, 이제 너부러질 일만 남았으니 무너질 밤하늘에 대해서도 내일이면 기점이 될 종점에 대해서도, 땅거미 떼처럼 각자 굴속으로 돌아가 어둠이 걷히지 않기만을 바라는 시민들에 대하여도 걱정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단단히 믿어도 야간버스는 종점에 도착하고 뒷자리 사내는 풀려난 용수철처럼, 느닷없이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한쪽 발은 잃어버렸는지 기우뚱, 기우뚱 버스에서 내리고 계속하여 그렇게, 외로만 구두를 신고 컴컴한 개미굴 같은 골목으로, 남의 다리를 빌려 쓰는 듯 걸어간다 걸어가서, 어딘가 서울이 등진 구석으로 삐거덕삐거덕 사라진다.

 

*조해일, <매일 죽는 사람>,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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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 요양원

글/시 2021. 11. 4. 23:22 |

생폴 요양원


 어쩌다 세상은 온통 화재로 미쳐버렸는지, 새벽에도 안개는 끼지 않고, 밀밭은 녹은 황금으로 끓어오른다, 접은 종이에 불이 붙듯 지평선마저 재가 된다, 사내는 캔버스에 고함을 친다, 밭은 유황빛, 하늘에는 용광로가 엎질러져 있었다, 쏟아진다, 자국만 남은 정오의 정신, 사이프러스 나무에 광기처럼 붙는 불길, 성난 신의 눈동자, 쏟아졌고, 무겁게 일렁이는 밀이삭들, 농부는 낫처럼 허리가 굽었다, 불꽃 속 가을걷이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지러진다, 요양원의 가장 무방비한 들판 위, 사내는 메모로 가득 찬 자신을 뒤진다, 거듭 피고 지는 생활, 평생 밭을 가는 고통을 받으리라는 저주, 그는 기억하고, 태양 아래에 그림자조차 없다, 열과 어지럼증의 틈바구니, 사내는 볕이 갉아먹은 자리를 새긴다, 태양과 사람과, 불길이 날름거리는 풍광, 송두리째, 모조리. 인적이 모두 사라진 복도, 권총을 든 사내가 미술관 벽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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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서

글/시 2021. 10. 15. 22:28 |

역전에서



창동역 1번 출구의 겨울은 줄곧 붉은색이었다

사내가 소주병을 기울이고
포차 천막은 꺾인 날개처럼 퍼덕이는데
석유 히터는 가끔씩
쓸쓸하게 자갈 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불콰한 얼굴들은 표정 없이 번들거렸다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엎어지려는 소주잔을 쥐자
느닷없는 경광봉에 휩쓸려 포차 지붕들은
모조리 도시의 먼 곳으로 밀려났다

창동역 1번 출구 포장마차가 전부 사라진
가로등 불 밝은 멀끔한 광장

미처 취하지 못한 사람들 전철 구르는 소리 아래
공원이 된 폐허를 헤맨다

역사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워 나는
한 잔, 한 잔, 더 어두운 길로만 걸어나가고

테이블 끝의 소주잔
젊은 술꾼의 깡마른 손가락에 붙잡히는데

술로 가득 채운 내 몸뚱어리
다시는 역전할 수 없는 가장자리
무채색의 추위
끝에 서서
붙잡아줄 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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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글/시 2021. 9. 17. 02:06 |

일몰


반투명한 창문 너머
가을날의 태양은
천천히
깊은 한숨 쉬며 멀어져가고
겹겹이 그늘진 건물 안
나는 우두커니 살아있다

깡통처럼 발끝에 채이는 생활
긁히고, 점점 구겨지고
주워갈 사람도, 신도 없어
믿음도 알미늄처럼 색이 바랬다

생활, 생활, 하며 되뇌는
머리는 진흙 뻘 같아
담배나 빼어물며 나
어제 떠난 누군가의 자리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살고

오늘 저녁에도

제 주인 잃은 그림자들
술렁술렁 어두운 골목으로 떠날 테고……

나는 어리둥절, 백치처럼 남아
어디 이정표는 없을까
우뚝 서 있는 철인은
없을까,
그러나 없겠지

천쪼가리 버리듯 하루는 또 하늘하늘 날아가고
나는 전날 눈 뜨고 죽었을 누군가의 묘석
영정에 남은 적막한 그리움
따위를 생각하고 
또 생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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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취(腐臭)

글/시 2021. 7. 30. 01:37 |

부취(腐臭)


매미가 울면 마을은 가난해서
들척지근하게 썩는다

담쟁이넝쿨 까맣게 붙은 벽
도둑고양이는 다 삼키지 못한 계절을
왁왁 뱉어놓고

계단참에 엎질러진 거실
생활의 내장에서 왱왱거리는
아스파탐, 소주 냄새

매미가 울면 온갖 산 것들이
대기에 포자며 정충을 풀어놓아
허파는 차라리 익사를 꿈꾸며 헐떡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새날이 밝으면
먼 데서 날짐승들이
부취를 모조리 쪼아먹으러 올 것이다

그러니 매미가 울어도 가난해도
나는 이끼 짙은 그림자 밑에 자욱한 연기로 서서
백 번의 새벽만 날갯짓으로 오고 갈 것을
생명이 송두리째 썩어 다시 하얗게 탈취될 것을

밤마다 기도하며 하늘로 분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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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피

글/시 2021. 7. 15. 23:03 |

시인의 피


꽃나무가 어떤 꽃을 피우는가는
주로 육신에 도는 수액에 달려있다

개나리는 저대로 개나리꽃을 피우고
장미나무는 싫어도 장미꽃을 피우고
양귀비는 저가 양귀비인 줄 몰라도
눈 따가운 빨간 꽃봉오리를 피운다

제복들이 곳곳의 둔덕을 드나들었다
정원사처럼 무장하고 제초제를 들었다
개천은 제 갈 길만 몇 번이나 겹쳐 흘렀고
하늘은 파랗게 무심하여 가끔 흰구름이나 지어주었다

어찌 되었건 유월에는 각혈만큼 새빨간 꽃잎에
햇빛이 방울져 떨어졌다

북인도의 고속도로 위에서 사흘을 지내고
흙먼지뿐인 휴게소에는 멀대 같은 양귀비
찢어지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 입술 하나를 씹었다

덜컹대며 뼈마디 부딪는 버스 의자에서
아픔도 권태도 죄도 없이
나는 어린 날의 시인들에 대해
내가 삼켜온 핏빛 위안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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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글/시 2021. 2. 4. 22:35 |

자판기


무심하게 흘러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자판기가 서 있다

종로 막걸리집 뒷문과 늙은 보쌈가게 사이 골목
버스가 서지 않는 흙투성이 정류장
대관령 산자락, 염소농장 철책 앞
낡고 정체 모를 자판기들

그들은 사람의 발걸음이 딛지 않는 곳에만
자연스레 피어나는 버섯인 양
먼지와 빛살을 뒤집어쓰고
동전을 먹여도 아무것도 뱉지 않으면서
가끔 하얀 불빛을 깜빡거리기도 한다

상품을 채우던 손들은 어디로 갔는지
매상을 담아가던 장지갑들은 어떻게 됐는지
우뚝 솟아 빈혈에 걸린 그들의 옆통수에는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날카롭게 긁혀 지워져 있다

그러면 나는 꿈같은 열에 들떠 생각한다
숲속에서 자라나는 고고한 자판기를,
그들에게 엉기듯 둘러싼 담쟁이덩굴을
곧 그것들이 피워낼 황록색 사사로운 꽃을,

숲속마다 산맥마다 황량한 언덕마다
솟아나 수액이 도는 자판기들이 매일 밤
그 꽃들을 위해 달무리 같은 파란 빛을 비출 것을,

그렇게 되면 마침내 나는
그들에게로 걸어갈 다리도 동전을 쥘 손도 없어진
활자가 되어버린 인류를
흐뭇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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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주인공을 만드는 방법

 

 

먹물을 쏟아버린 과거는
수백만, 혹은 하나도 없어
잠들지 못하는 낮과 밤에
나는 숟가락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열 살 때
앞자리에 앉은 소녀의 땋은 머리는
어린애의 솜씨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소녀의
본 적 없는 가족에 대해 한 명 한 명 슬퍼했지

예를 들면, 열일곱 살 때
전셋집 옮기기 전 박살 난 문짝들 바꿔 달며
이렇게 화가 날 일이었나, 기억이 선명치 않아
머릿속에 그럴싸한 극본이나 새겨두었지

예를 들면, 스무 살 때
이태원 술집에서 두들겨 맞고, 출구에 내던져져
럼주와 흙의 냄새 풍기며 야간버스 타고 돌아올 때
나는 쇳내 나는 혀로 웃었고, 그날의 일을 짜 맞추었지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난주는 사흘간 잠들지 못하고
날씨는 더럽게 추워 가로수는 빈사의 모습
쓰레빠 고무마저 얼어붙어 맨발을 할퀴고

공기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바람은
담배 끄고 들어가서 자빠져 자라고 한다
그러나 잠드는 방법도 까먹었고, 눈만 감아도
수 없는 예시들이 얼굴 가죽 벗기러 찾아오는데

먹칠 된 과거들은
먹칠 되기 전엔 어떤 색깔이었나
아니, 그런 건 생각지도 말아야지

숟가락, 젓가락, 포크, 버터나이프 따위가
얼마나 날카로울 수 있는지
나는 그런 안전한 생각이나 하며 창문이 또 파랗게 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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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폐기작)

글/시 2021. 1. 14. 22:13 |

안개(폐기작)

 

 

그의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그 신비한 안개는 길이나 풍경을 가리는 일 없이

오로지 살아있는 것에게만 들러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했다 덕분에

길을 잃거나 하천에 던져지는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대로를 걸어도 종말이 내린 마을인 양 인기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안개의 덩어리들이

곳곳에서 움찔움찔 돌아다닐 뿐이었으니까

 

안개들이 그에게 말을 걸거나 반대의 경우도 많았으나

모든 목소리는 수증기가 얼굴 피부에 스쳐 지나가는

그런 일에 지나지 않았고 너무 오래 습기 어린 호흡이 반복되면

폐와 내장까지 안개로 가득 차 실체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몇십 번의 겨울이 하천을 얼렸고

어느 계절 안개는 캅셀처럼 녹아버렸다

그는 어지간히 당황했으리라, 친구들과

이 이상기후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으나

금세 더 심각한 문제를 알아차렸다

안개의 덩어리 속에 있던 것들은 그저 그의 말을

엿듣고 있는 수상쩍은 그림자들이었으며

그의 친구나 지인이라는 것은 실제 안개였던 것이다

 

안개가 걷히자 그는 마을에서

단 한 명의 낯익은 누군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주민들의 얼굴이 안개에 막히지 않으면

죽이고 겁탈하는 날붙이들임을 알았다

그들은 안개 뒤에서 모략을 짜며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가진 모든 애정과 욕망은 안개와의 것이었으리라

 

어느새 마을에는 빌딩 몇 개가 더 박혔으나

여전히 안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외투 위에 외투를, 모자 위에 모자를 쓴다

매일 집에 견고한 나이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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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1, 2

글/시 2021. 1. 7. 22:11 |

빈 집 1

 

 

눈 오면 밤이 밝아지듯

빈 방은 춥고 고독한 만큼 선명하다

 

아버지의 붉은 얼굴이 소주잔에

체온을 남기는 것이 그리워

14평 광야 헤맬 때는

언제나 모두가 잠든 시간

 

신이 없으면 모독도 못하듯

법이 없으면 흉악해지지 못하듯

 

나의 집은 항상 빈 집.

 

-

 

빈 집 2

 

 

여름 내내 계속되던 배기가스 같은 기침이 멈추고

의사는 마침내 그것이 폐결핵이었다고 설명했다

펜으로 차트를 두들기는 안개 같은 눈은

결핵에 걸리실 나이가 아닌데요, 사소한 의문을 표하며

내게 가족들의 건강을 물었다

아니요, 누구도 재채기 한 번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 계절 동안 피웠던 담배의 숫자를 셌다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하지 말라는 걸 텐데

 

가을 초입이면 이 거리는 나를 뱉어낸다

사방에 켜켜이 쌓이는 먼지와 재 같은 햇살

병원 앞을 달리던 자동차들은 언덕길 너머

상체가 끊어지고 머플러 소리만 남는다

병원 뒷골목에서 또 한 개비의

담배꽁초와 결별할 때

환자복의 노인들은 휠체어에 실려

빈 통조림 캔에 높은 체념을 쌓고 있다

행인들의 걸음은 병자를 피하고…… 아아,

생물학이여! 나는 들떠 뛰다가

다리가 풀려 세 번 거꾸러질 뻔한다

 

동네 곳곳이 이상하고 무뚝뚝한 모습이라고

지난달, 가족들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젖은 솜이 폐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기침에

혀가 치어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병에게 감사할 일이었다고, 대로 건너의

상가지구를 보며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걷는다

 

등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오후 4

필터를 씹는 습관은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기에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버릇을 고쳤다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나는

이 건물이 올라가는 계단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날개가 찢어진 새들과 광병 걸린 눈동자의

쥐들만 한없이 뛰어 올라가는 꼭대기에

담배 연기에 눌은 노란 벽지도 아버지의 코롱 냄새도 없다

 

그 집에 곰팡이라도 만발해있으면

이토록 내 가슴뼈 속의 무엇이 거치적거리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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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힌 문

글/시 2021. 1. 3. 18:33 |

닫힌 문


빈 방에서 너는 울고 있고
닫힌 문은 이쪽을 보는 일 없고
내 마음에선 알코올 냄새
함께 눈물 흘릴 방법을 찾고 있다

진눈깨비라도 내려라, 술기운이나 돋게, 했더니
더러운 눈이 내려 거리가 꽝꽝 잠겼다

안주머니에 넣은 손에
영수증 다발 잡혀 나오고, 지폐는 한 장
문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나는
괴물을 만나러 가련다
네 문 앞에서 문을 닫으며, 웃으러 간다

겨울 밤거리
눈 내리는 하늘은 밝게 비웃고
더 많이 취하려고 내 입에선
이빨이 돋고

네 어깨가 슬픔에 무너지던 순간을
이해하고, 비통해하고 싶어
발밑에선 유리 깨지는 소리
단골 술집은 불이 꺼져 있다

그야 세종대왕 한 장으로는
그놈이 내 앞에 앉아주지도 않았겠지만

아아, 사랑하는 네가 여기 있다면
이빨은 소리 내며 웃고
깜깜한 유리문에 이마를 박으며
널 두고 나온 거리는 지옥보다 시려라
심장이 농담한다

술김에 쳐들어갈 친구네 현관도 없고
사랑스러운 네게 마음이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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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 한 겹 안팎에서


너는 고함을 지르고 있다
너는 그와 드잡이질을 한다
그리고 너는 앉아서
천공에 모독의 함성을 지른다
저쪽의 너는
얼굴을 부여잡고 공포에 웅크린다
구석에서 너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읊조린다
너는 드러누워
자신의 심장을 겨냥 중이다
그리고 장님인 너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 찾아 헤맨다

너희들의 땅에서는
만개한 꽃에 서리가 내리고
담뱃잎과 버섯을 태운 연기가 앞을 가리니

나는 하얀 알약
너희들의 영혼을 빼앗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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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선 하수구 냄새가 났다


피 대신 치기가 혈관에 흐를 때는
네온사인만 켜지면 달려나갔지
빨간 십자가 지상에 우글대면 달려나갔지
중랑천이 빛나는 걸 보려고 뛰었지

징검다리에 말뚝처럼 서서
물의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가로등 빛이 반짝이는 수면에 홀려있노라면
세상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

바보 같아…… 하천은
함성을 지르는 일도 없고
대답해줄 것 같은 반투명한 입술은
조롱하고 비웃는 짓뿐

핏줄에선 치기와 함께
혈액도 빠져나간 듯
하천 한복판 물빛이 비추는 얼굴은
분명 빈혈 환자 같을 터다

사람들은 세련된 스포츠웨어에
이어폰을 꽂고 기계로 심박수를 세고
물이야 흐르든지 말든지

얼굴 찾는 일도 이제는 그저
이끼를 씹는 맛이라
시내 쪽이 빛으로 불타는 도시의 야경에

흐르는 물에 쓴 침을 뱉고,
지갑에 든 돈으로는 담배 아니면 막걸리구나
기적은 없다,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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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도봉로 130길

글/시 2020. 11. 12. 22:51 |

새벽 2시, 도봉로 130길


불 꺼진 간판 아래
나는 장대처럼 서 있는 거다
목욕탕 굴뚝처럼 연기 뿜으며
네가 있을 자리를 더듬어보는 거다
그러면 구름에 가린 달처럼
머리 위 불 켜진 창문에서
너는 늙은 목소리로 흐느끼는 거다
그리고 너는 캄캄한 연립주택 사이
놀이터 저편에서 비명 지르는 거다
아직도 흐느끼는 너는
골목 너머 다투고 있는 젊은 연인인 거다
맹렬하게 타오르며
네 남자친구에게 따지고 있는 거다
내가 네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구로 보이냐고
가스버너 불꽃같이 쏘아붙이는 거다
그러면 나는 몰래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거다

머리 위에서 너는 왜 울지, 하고
희희낙락 연기에 잠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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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글/시 2020. 10. 25. 05:02 |

경계선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몰래 옥좌에 광기의 여왕이라고
당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당신이 자리에 앉을 무렵
나는 어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꿈의 꿈은 현실이어서
땅끝의 작은 섬에 섰을 때도
나에게 수평선은 보이지 않고
증오로 타오르는 얼굴들만이
천공에 가득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인형을 만드는 일에 열중해
가장 말 없는 것에게 이름을 붙이고
딸이나 아들로 삼아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했으나
그것들은 타는 쓰레기였다

니코틴의 연기로 보여지는 현실은
잠들기도 전의 꿈이어서
아무것도 멸종하지 않은 잿빛의 악몽이라
나는 끊임없이 신음하고
정소를 떼어내고 이불에 눕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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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생각하며

글/시 2020. 1. 29. 02:49 |

과거를 생각하며


밤거리 그림자로 웅성거리고
생명의 기척은 없다, 나는
앙상한 몸을 비척대며
위악스럽게 걷고

그러니까 종말을 망상하는 것이다
가로수의 그림자에도 놀라며
내가 인간에게 저질렀던, 저지를 수
있었던 수치들에 놀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죄스럽기만 했던
패악뿐인 삶이었던
그런 것들을 너무 일찍 알아차린 것이다

연신 줄담배를 물어도 풀릴 리 없는
죄악의 실타래는 내 숨까지 옭아매
앞으로 한 발짝 떼는 일조차
더 깊은 죄악일 듯 싶어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멸망한 밤에
종말이 오지는 않으려나, 어린아이 같은
죄를 뒤집어쓴 어린아이 같은
꿈꿀 수도 없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해가 뜨고
그때까지는, 그림자들에게 사죄하고
또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갇힌 나는 창문을 두려워하며

햇빛 찬란한 겨울에 죽음을 그려보고
거기에 꽃이나 피지는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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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얼어붙어서

글/시 2019. 12. 28. 14:13 |

태양이 얼어붙어서

 

 

사람이 불행에 잡아먹혀서

     존재는 슬픔밖에 피우지 못하고

겨울하늘이 연탄재 색깔이어서

     폐부는 잿빛으로 썩어가고

 

믿었던 사랑이 기만이어서

     절벽 끝에서 다리를 내밀기도 하고

여지도 없이 희망이 죽어가서

     실링 째 떨어지는 올가미를 바라보고

 

그러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다

생각하자면, 얼마나 많은 불행인지

행성 구석구석 들어찬 불행인지

담배를 뻐끔대며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혈액이 분노로 들끓던 시기도 가고

단도로 자기 심장 파내던 시기도 가는 것이다

단지 조용히 앉아 생각하노라면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존재의 무서운 굴레인 것이다

 

아무 정도 없이 피었다 말라가는

그런 나무처럼 되고 싶다고 되뇌일 때

나 혼자 나무가 되어 피었다 말라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슬픔은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 사람들……

고통의 바다에서 솟아올라 허우적대다

결국엔 익사해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스스로 사랑도 없었던 일에 자책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앉아 있다가

구원은 어디서 오나, 그러나 결코 밖에서 오진

않는 것이다, 밖에서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그런 것이다

 

태양이 얼어붙어서

     빙하기에 불을 때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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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안개

글/시 2019. 12. 25. 14:31 |

겨울안개


밤이 겨울안개로 가득 차면
나는 희희낙락하여 오로지
해가 결코 뜨지 않을 줄로만 안다

시각은 쓸모가 없고, 더욱이
내딛는 발도 절벽 끄트머리를 걷는 듯
내 오감은 불확실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왜 이리도 기쁜 것인지
어디선가 위협적으로 산짐승 울고
이런 밤에, 나는 밟혀 죽은 독사를 기억한다

어둠과 안개가 먹어치운 다리를
쭉쭉 내뻗고, 한 발짝만 잘못 딛었다간
그래, 그 독사처럼 길을 잃고
단숨에 죽어버릴 것이다

보이는 것은 없고, 안개 위엔 먹구름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희희낙락한다
소리도 모조리 죽었어, 나는 이제
혼돈과 비실재 속에서 방황한다

내가 볼 수 없을 때 세계가 어떻게
요동치고 진동하며 천변만화하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코 알 도리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멍청한 다리를 쭉 뻗고!

땅 밑으로의 추락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차라리 내 영혼이 추락사할 것인가?
아니야,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세계가 형체 없어지는 일에 기쁜 것이다

고로 나도 형체 따위는 없고
겨울안개 속에서 내 몸뚱어리는
안의비설신의도 안개에 두들겨 맞아 죽었다
그러므로, 그런 고로

축축한 어둠 속에서 비실재하는 다리만 쭉쭉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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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 같은 희망

글/시 2019. 12. 20. 22:02 |

암막 같은 희망


새까만 하늘의 별들은
빛나는지 빛나지 않는지
고라니들은 모습 숨긴 채 뛰어다니고
인간의 힘은 언제나 불행이었다

자신의 불행이든 타인의 불행이든
사람은 비극에서야 어지러이
빛을 품는데
그러나 도대체 어째서?

저 멀리 도시에서는 분명
오늘밤도 그 비극에 취한 걸음들이
길가에 떨어진 동전을 줍듯
삶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몹시도 슬프고
나 역시 그 속에 있었고
어둠은 물러날 줄을 모르고
모두가 그 안에서 맴돌고

그러다가도 너의 창백한 팔을 보고
나는 산길을 올랐던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온화한 웃음을 보이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그러나 동전 줍듯이 모아 만든 빛들도
시간에 따라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절벽 위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마음도
한낱 망념으로 화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산에 있지 않고
여전히 수풀 속에서 연기를 뿜지만
너와 함께 있지는 않은 것이다
너의 창백한 팔도 어디론가, 가버렸고

불행을 곱씹다가 홀연히
빛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먹먹한 마음으로, 인간마저 떨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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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봉오리 속의 지혜

글/시 2019. 12. 17. 22:37 |

꽃봉오리 속의 지혜


꽃봉오리 안에 쓰러지듯이
이 꽃의 색깔을 나는 모르는구나
이곳은 너무 어둡고 답답한 동시에
사실은 평생을 여기서 살아왔다

꽃봉오리 안에도 꽃들은 있어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욕망들
그것의 본질도 모르고
하나씩 따 내 입안에 넣는다

이런 것들은 모조리 후회로 밖에는
남지 않아……

한때 상습 자살미수자가
<부끄러운 생을 살아왔습니다>라고, 그렇게
그렇게 말했지, 그 자는 분명
자신이 수치에 발버둥 칠 것을 알고도 꽃을 먹었으리

필요한 것은 분명히 지혜다
꽃을 먹든, 먹지 않든……중요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 지혜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지금, 꽃을 먹기를 멈춘 나에게도

꽃의 본질을 알고, 먹거나 먹지 않고
그렇다면 그것은 위대함으로 이어지겠지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실상 다 무지의 결과이니

그렇다면 그때, 어느 때가 됐든, 어떤 색깔로 피든
내가 쓰러져있는 꽃봉오리도 산산조각으로 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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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시 2019. 12. 14. 23:09 |




어리석단 말이다, 인간은, 나는……

평생을 희론으로 살아온 나는
어디로 가려고 했나, 어디로?
한 주먹의 이 알약들은
어디로 가느냔 말이다, 어디로

해가 뜨지도 않는 땅이다
그러나 태양도 달도 물리치고
패배하는 일 없이, 오로지 나는
영혼의 수액만을 찾아 마시려고 했다

오로지 온화하게 웃으며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내 가죽을 전부 벗기는 일이 있어도
결코 즐거워하는 일도 없이, 그러나

어리석단 말이다, 인간은, 나는

뇌수에 갇힌 내 무언가
나침반도 없이 절규하고, 통곡하고
무언가 날 마주하고 있어, 무언가
아주 새까만 장막 같은 것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모든
내 환영들을 송두리째 파괴할
그런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죽음조차 기만이 되었다

가지고, 탐하고, 사랑하고
그런 것은 이제 됐다, 이 겨울
아름다움조차 무언가를 방해하고
나는 비존재에의 열망에 허덕이고

空으로, 空으로, 무조건
마치 돌진하는 창병처럼, 단숨에!
그러나 무언가가 날카롭게 조소하고 있어
두개골 속에서, 감옥의 간수처럼

왜 감각하지?……

어리석단 말이다, 나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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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의 땅

글/시 2019. 12. 11. 12:43 |

질식의 땅


대기에 스모그 끼어서
창밖은 하얗게 어둡습니다
어디선가 중기의 고함소리 들려오고
뻐끔뻐끔 담배연기만 두개골에 들어찹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로 창 닫힌 건물
여기는 어디인가 의문할 것도 없이
담뱃재 떨어지는 자리에 나 있습니다

세상이 스모그 먹어서
낮인지 밤인지, 아니 그런 것이
중요하기나 한 땅인가
달 대신 가로등 뜨는 골목에

눈도 내리지 않는 이상한 겨울
갈퀴 같은 바람은 하얀 먼지 긁어내고
나는 그것을 높이서 내려다보다가
창백한 하늘에 어찔하고, 난간에 스러집니다

―알제리, 알제리!……―
그만 둬, 나는,
가본 적도 없는 땅에 환상을 심지는 않을 터다

녹은 황금 같은 햇살도
드넓은 사막 파랗게 얼려버리는 달도
이미 내 머릿속에서 한 번의 생각으로 떴다가 졌다

난간을 기어오르며 입에는 담배 물고
뭐어야, 이미 죽은 생선과 같다
기름때 낀 창문 너머는 지독히 말세로다

그러나 그러나 멈출 수도 없지요
타는 담배는 끝까지 다 타야하고, 삶도
담뱃잎 싸놓은 육신처럼 다 타버려야 하고
세상이 어떤 꼴이든……

하하! 나는 위악으로 웃고는
해도 달도 없는 땅에서 깡통 찾으러 가는데

세상이 스모그 듬뿍 먹어서
행성이 도는 일조차 잊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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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글/시 2019. 12. 10. 20:09 |

불야성


산에서 내려온 도시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 밤이 찾아오질 않는구나

명성이니 자본이니 그런 것은
뒤집히는 낙엽 같아 논할 것도 없으나
명성에 대해서니 자본에 대해서니
더욱이 모습만 바꾸는 꿈이어 나는 슬픈 마음이다

전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취중에 토하는 얘기는 불법에 대한 희론이다

세상이라는 착각에서 떠받들 것
가지게 될 것 버리게 될 것
모두 한번 생각하고 잊히게 되는 것이니
거품 덩어리 속에서 금강석을 찾는가

―나는 취하여 세상을 보았다
기쁨을 찾느라 발광하는 사람들은
어둠 내리지 않는 밤에서 바삐 달린다

그만, 그만! 그런 괴로움은
어리석음은 무지는 치워둬
불붙은 눈으로 뛰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감정도 없는 슬픔에 젖는다

이 도시는 도대체 누가 지었는지
빛은 사방에서, 그러나 깨끗할 것도 없는 빛
산에서 보았던 맑은 달은 파괴적이었다
사방팔방의 허상을 온통 부수었다

불야성의 도시에서,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그러나 꿈꾸는 자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그들은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르고
냅다 내달리며 어딘가로 추락한다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 그들은 귀가 없어
절벽에서 팔을 뻗는 내 얘기도 듣지 못하는 구나
도대체 얼마나 내달리게 될지
57억 6천만년이나 허상을 달릴 셈이냐

그만, 그만! 세상을 바꾸려는 일은 그만두고
이 착각 벗어나는 일이나 하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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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名

글/시 2019. 12. 9. 12:17 |

無名


초겨울의 냉기가 산을 뒤덮고 하늘을 뒤덮어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와 같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시내에서 사람들은
몸을 싸매고 바삐 어딘가로 걸어간다

한 몸 편할 곳을 찾아, 추위를 피해 달려
어딘가로 어딘가로 바삐 가려고 한다

세상은 거대한 착각이니, 여기서
세상에게 이름을 붙인 채 살면
괴로움이 끊어질 일이나 있을까요

몇 번이나 죽고자 하여, 나
실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무결한 비존재가 되려했습니다

바람 불면 일어나는 파도가
아아, 나는 파도로구나, 하는 순간
천둥치는 하늘과 고해에서 영겁을 뒤엉깁니다

그러니 나, 무한한 바다로 다시
파도에게서 이름을 지우고, 스러지는
심해의 밑바닥으로 형상도 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뇌 속에 갇힌 누군가를 꺼내려고
권총 한 정 꺼내 구멍을 낸다 하더라도
내가 空으로 돌아가지도 않겠지요, 죽음도 미신인걸!……

알고 보니, 흙탕물 튀기며 살려고 했던 발버둥도
죽고자 하여 약병과 밧줄 쥐던 발버둥과
별로 다를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내가 이름도 없는 곳으로
저 멀리,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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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문 짐승

글/시 2019. 12. 7. 09:26 |

펜을 문 짐승


딱히 겨울하늘이 파랗게 얼어붙었다 한들
그것에 대해 무어 감상이 있지도 않지

마른 숲속에서 도망치는 고라니와 마주쳤다 한들
내게 무어 놀란 가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세상은 얼어가고 나도 얼어가고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에 쥔
담배도 이제는 무슨 맛인지
녹슨 울타리 같은 마음으로 궁금해 하지

감성, 감성! 그렇게도 부르짖는
그것이 내게 있기나 했던가
지난여름 비 오는 철교 위에서
나 강물이 얼마나 차가울지 궁금했었지

―이제 그만 쉬어
문학도 예술도 인생의 끝에
그리 중요한 것은 되지 못할 거야
그런 말들에 나는 심장을 난도질당하고

옳은 말이야, 옳은 말이겠지만! 그러나
차가운 바람에 손가락 저릴 때마다
나는 비참한 심상으로
한 가지 싯구를 떠올리고야 말아

저 능선 위의 절벽은 어떤 죽음을
내 정신과 영혼에게 드러내줄까?
수세미를 씹듯이 담배를 물고
나는 이상하고 추운 탐미에 홀려있네

……이제 그만 쉬어
그 말에도, 고통만 읊조리며
펜을 찾아 돌아가는 슬픈 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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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否定의 시

글/시 2019. 12. 6. 15:20 |

부정否定의 시


내 삶은 사유가 폭풍우치는
끝나지 않는 밤 같았으나
누군가 내 껍질의 가느다란 실마리를
강하게 잡아당기고야 말았습니다

시인들의 노래가 어디로 가는지
나의 정신이 미치광이처럼 따라갔으나
끝에는 공동묘지, 더하여
도무지 죽을 줄을 모르는 시체들

그리하여 저의 껍질을 더듬어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회의를 계속하고
죽어버릴까? 이런 육신으로는
영혼에서 퍼 올린 자아조차 가려지는데

그러나 누군가가 분명히
내 실타래 끝의 실마리를 잡아당겼고……
육신은 헐거워지기도 하는 법이지요
뇌수조차 묵직한 고기였던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햇빛은 더욱 선명하기에
겨울에 골몰하여―아, 그러나
광풍 같던 사유와 사고는 이미 가라앉고
나는 적적히 뭔가를 회의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면 그만한 것도 없지요
옛날부터 깜깜했던 나의 시각은
떠올려진 망념들이 미친 말馬들처럼 지나가는 일로
그리도 깜깜했던 것입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팔짱을 끼고
증오와 광란만 허용하던 나의 삶은
죽음에 이를 때는 미풍도 그치려나요
밤에도 햇빛은 지평선 너머서 빛나니

그래요, 그런 아이가 있었습니다
폭풍우와 지진을 집으로 삼고
살갗이 전부 찢겨나가는 것을 기대하던, 어린아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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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글/시 2019. 12. 3. 19:44 |

첫눈


눈 내리면 소리가 사라진다고들 하지
사실 그저 하늘과 대지가
눈 내리는 소리에 뒤덮일 뿐이야

자세히 들어보면 참도 소란스럽지
부스럭 차르륵 사방을 치며
눈이란 놈은 그렇게도 주장을 해

눈 내린다고 소리들이 어디로 가지도 않지
그저 푸르고 거뭇거뭇하던 색깔들이
하얀 소음으로 마구 칠해질 뿐이야

모두가 잠을 잔다는 계절에
소란스럽기도 하지, 마치
세상이 곧 자신 되기라도 하듯
이름도 없는 색깔들 떨어지지

눈이 그치면 밤이 내리고
그러나 구름들은 물러나지도 않아
달은 있다가 없다가 한다
비행기 소리에 올려다본 하늘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달을 보다가
담뱃갑에 손을 베였구나.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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