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30)
다리 밑에서


 이미 용훈은 탐색을 포기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강가 벤치에 앉아있다. 벌써 세 시간 동안 마포대교 북단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녀는 쭉 뻗은 두 다리 사이에 양팔을 넣은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칼이 계절 때문에 차가워진 강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용훈은, 터널 같은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갈대밭을 헤치며 찾아낸 한강의 수위조절용 터널을 돌아본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이런 ‘비슷하지만 다른’ 터널을 네 개나 찾아냈다. 그것들은 전부 흡사한 생김새에, 자전거도로나 산책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네모난 구멍은 성인 남성 키보다도 훨씬 천정이 높다. 수위조절용 터널이라지만 강물에 젖는 일은 그다지 없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깊은 통로가 보인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4년 전에도 통로 끝까지 가본 일은 없으니까.
 혜미.
 용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뾰족한 갈댓잎이 목덜미와 손목을 찌른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벌써 지쳐있다. 지금 하고 있는 ‘한강 탐색’이라는 놀이에 질려버렸다. 그녀가 용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눈동자가 가을 햇살을 반사해 약간 갈색으로 빛난다. 용훈은 다시금 생각한다. 지금 와서 14년 전의 터널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호기심을 보이기에 동조했을 뿐, 그에게는 마땅한 이유나 동기도 없었다. 만일 14년 전의 자신이 지금의 그를 본다면, 꿈도 못 꾸던 생활을 손에 넣었으면서 무슨 여흥거리라도 되는 듯이 과거에 집적대냐고 비아냥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찾아내지 못한 그 터널 안에 드러누워서 말이다.
 나는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용훈은 굳이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것 같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 집안에 붙은 빨간딱지가 아버지를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빨간딱지란 참 기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잘만 사용해오던 물건들에 딱지가 붙으면 그것은 곧바로 남의 것이 되어 끝내 사라져버렸다. 집안 살림들이 모조리 어디론가 실려 나가버리자, 빨간딱지는 이제 가족들마저 잡아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집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직도 주공 아파트 2층에 있던 그 집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처음으로 화장실에 욕조가 있는 집이었고, 처음으로 방이 세 개나 되는 집이었으며, 처음으로 침대를 들여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가족끼리 살았던 집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상에 지어진 집이었다. 그러나, 여하간에 그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가구들에는 온통 빨간딱지가 붙고, 아파트는 남의 것이 되었다. 그 뒤에는 제일 먼저 어머니와 동생이 외가로 향했다. 아버지는 용훈에게 얼마간의 돈―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당시의 그에게는 굉장한 액수의 돈―을 주고 큰댁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찾았어?
 혜미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어조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몇 번이나 꼬드긴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쉽게 호기심이 동하다가도 쉽게 질려버리는 것이 지난 2년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녀의 특징이다. 가끔 용훈은 그녀가 무슨 이유로 지금까지 자신과 연인관계로 남아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가 용훈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실은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2년이란 시간이면 호기심과 동경 따위는 사그라들기에 충분하다.
 3년 전,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기회라는 것을 얻었고 자립할 능력을 얻었으며 덧붙여서 여자친구까지 얻었다. 신문에 그의 이름 석 자와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다리 밑에서」’라는 활자가 찍혔다. 평소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심사평을 써주는 믿기 힘든 일도 일어났다. 그는 마침내 손에 넣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다. 큰댁의 식객으로 지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나이였다.
 작품을 쓰기 전 용훈이 했던 일은 십 년도 전에 마구잡이로 썼던 소설들을 다시 읽는 것이었다. 문장도 명확하지 않고 이야기 구조도 엉성한, 소설 같지도 않은 소설에서 유난히 눈에 걸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해내는 능력을 잃었다. 과거를 모조리 글로 써서 기록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보다 확실한 것처럼 보였고 오염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십수 년 전에 쓴 그 글은 어째서인지 돌부리처럼 위험하게 돋아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과 가족에게 온통 빨간딱지가 붙은 뒤부터 자신이 체념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큰댁으로 가라며 돈을 쥐어주고 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혹은 명령을 듣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아버지마저 사라지고, 그는 딱지가 붙어있는 장롱의 안쪽 한구석에서 국방색 침낭을 꺼냈다. 보다 어릴 때 가족과 캠핑을 하며 단 한 번 써본 물건이었다. 베란다에 남아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었다. 돈 봉투는 진즉 배낭 가장 깊은 곳에 숨기듯이 넣어놓았다. 아파트를 나와 우선은 물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신곡동 한쪽에 흐르는 개천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행인이 너무 많았다. 좁은 개천가는 산책객이나 자전거를 타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용훈은 중랑천을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돈 봉투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든 묵직한 배낭 위에 침낭을 묶어놓고, 걷다가 피곤하면 아무 곳에서나 앉아 쉬고, 또 걷다 밤이 되면 개천가의 으슥한 곳에 나동그라져 잠들었다. 이틀하고 한나절 정도를 걸으니 바다처럼 넓은 강이 나타났다.
 한강에 도착할 즈음에 이미 용훈의 몸에서는 부패한 음식물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악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나 피해갈 정도로 심한 악취를 온몸에서 풍기며, 엉망이 된 옷을 입은 채 기름이 엉겨 붙은 머리로 밖을 나다니는 것은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누가 되었든 겪어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찡그린 표정도, 불길한 시선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니 그는 학교를 다니는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공부를 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업이니 가족이니 하는 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동생도 곁에 없었고,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못할 때마다 벼린 칼날처럼 시퍼런 눈으로 용훈을 노려보던 어머니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다리의 이름은 동호대교였다.
 어떡할까? 돌아가?
 용훈이 혜미에게 묻는다. 그녀는 고개만 움직여 주변을 돌아본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아마 혜미는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 자신이다. 지쳤으니 돌아가자고 말하기는 창피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괜히, 찾는 것도 없이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쉽게 대답을 할 것 같지 않다. 얼마쯤 기다리다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용훈이 대신 말한다.
 좀 쉬다가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번거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혜미를 만나게 되었더라, 하고 용훈은 기억을 돌이켜본다. 만나게 된 계기보다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의 가정환경이다. 어머니는 약사,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약대를 나와 어머니의 약국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처음 그녀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었을 때 용훈이 느낀 것은 기묘하게 뒤틀린 우월감이었다. 아니면 우월감으로 가장한 열등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님 데뷔작 읽고 정말 충격이었어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직접 겪으신 일인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뵐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 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충격적이었다는 말만 했지 용훈의 글이 좋았다거나 감명 깊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게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녀는 자주 용훈의 경험담에 비교하듯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늘 자신의 삶이란, 마치 굴곡 없는 평탄면을 달리는 것 같았다고, 더욱 과장하여 말하자면 마치 아무런 희로애락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고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착잡한 감정이 슬쩍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왜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그녀는 용훈의 소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혜미 옆에 앉아, 마포대교 근처는 그나마 조용하다고 생각한다. 동호대교는 도무지 지낼만한 곳이 아니었다. 거의 오 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다리 밑에 침낭을 푼 지 하루 만에 다시 짐을 쌌다. 그리고 강을 정면으로 두고서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도로에는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값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다녔다. 13살짜리 노숙인이었던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걷고자 했다. 그러자 필연적으로 갈대가 높이 자라고 길이 정리되지 않은 강가의 끝자락으로만 걷게 되었다. 가스레인지와 침낭, 그리고 가게에 들러 사들인 참치통조림으로 묵직한 가방을 메고서 그는 계속 걸었다. 딱히 목적지도 없었고 찾는 것도 없었다. 다만 욕심을 부리자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고, 짐을 부려도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이 있었으면 했다. 날씨가 궂을 때 빗방울을 막아줄 지붕이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이미 한번 지나가는 빗줄기에 젖었다가 그대로 마르고 보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가 몸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훈은 몇 개의 커다란 다리 밑을 지나갔다. 몇이나 지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녁은 뭐가 좋을까.
 그땐 뭘 먹고 살았어?
 그때? 하고 되묻는다. 지금 상황에 ‘그때’라면 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강에 온 목적을 지금껏 혜미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놀라웠다. 그땐 참치통조림을 주로 먹었지, 가끔 둔치 매점에서 컵라면도 사 먹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용훈은 어째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또 하나 심중에 얹힌 기분이다. 당시에 뭘 먹고 지냈으며, 어떻게 음식값을 마련했는지는 소설에 상세하게 써놓았다. 분명 써놓았었다. 동호대교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으며 그는 몇 개의 이상한 굴들을 보았다. 산책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일견 불규칙하게 뚫려있는 콘크리트 터널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강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어떤 것들은 고수부지 바로 밑에 새까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굴은 전부 한강 수위조절용 인공터널이었다. 용훈은 마포대교 북단의 어딘가에서 딱 알맞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한 일이 없는 한 강물에 젖지도 않을 터널을 찾아냈다. 네모진 터널 입구로 들어가자 안으로 쭉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통로 안쪽에 불빛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비가 오더라도 터널은 쉽사리 빗물이 넘칠 것 같지 않았다. 용훈은 곧바로 터널 입구에서 열 발자국 정도 들어간 곳에 침낭을 펼치고 배낭의 짐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는 정말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는 사실을, 이틀 정도가 지나고서야 알아차렸다.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을 때 냄비를 챙기지 않은 스스로가 멍청하게 생각됐다. 게다가 소모품인 가스를 계속 사야 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방금 혜미에게 말한 것처럼, 주로 먹는 음식은 참치통조림이었다. 상하지 않고, 처리해야 할 쓰레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통조림 두 개를 먹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가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면 한강 둔치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아버지가 준 돈을 굳이 꺼내서 쓸 필요도 없었다. 터널 입구에 자리를 잡고 매일 드러누워 있자면 가끔 방문객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터널에 들어와 둘러볼 때, 벽면에 락카로 그린 그림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물론 그 그림들은 누군가가 드나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낙서꾼들은 금세 만날 수 있었다. 터널에 자리 잡고 사흘째였는지 나흘째였는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달그락거리는 락카를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고 그곳을 찾은 것이다.
 넌 여기서 뭘 해?
 남학생들은 누가 봐도 노숙자인, 그러나 누가 봐도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훈에게 그렇게 물었다. 중랑천을 걸어 내려와 터널에 둥지를 틀기까지의 과정 덕분에 용훈은 꽤 대담해져 있었다. 대담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벌써 그의 어린 머리에 뿌리박혀 있었다.
 집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계산속도 있었다. 사실 ‘집’ 자체는 큰댁으로 가기만 하면 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박정한 사람이 아니다. 남동생의 어린 아들이 집도 절도 없는 몸으로 찾아왔는데 내쫓을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집이야 찾아가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용훈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남학생들은 용훈에게 어디서 왔느냐, 몇 살이나 됐느냐,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냐는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용훈은 담담하게 사실대로 답했다. 그다지 숨길 일도 아니었고 그들에게서 동정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었다.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터널에 온다고 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식비의 태반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절한 학생들이 터널 안쪽 벽에서 낙서―그라피티라고 했다―에 열중하는 것을 가끔 재미 삼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분명히 작품에 썼을 터다.
 내가 소설에 쓰지 않았던가?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
 그래.
 달리 할 말이 없다. 독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을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므로 독자의 기억력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용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기억력에 관해 책임을 묻자면 죄인은 그다. 세 시간 넘도록 그놈의 터널 하나를 찾지 못해 벌써 날이 저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왜 찾을 수가 없는 걸까?
 문뜩 혜미가 용훈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새삼스럽게 묻는다. 그는 순간 당황한다. 갑자기 취조당하는 피의자 신분이라도 된 것 같다. 혜미의 속눈썹 사이에서, 그러니까 그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단순한 의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춘 의혹인지, 용훈은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의도를 읽는 것은 독자 나름이다.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풍경이 달라져서인지도 몰라, 가을이 왔을 때는 이미 여기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시선은 다시 반짝거리며 노을을 반사하고 있는 강으로 향한다. 가을에는 이곳에 없었다. 당장 다음 날 급사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그는 터널에서 수 개월을 지냈다. 그러나 본능이, 특히 생명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리 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며, 용훈은 완전히 노숙 생활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강에서 차가운, 피부에 소름이 돋게 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지면 바람은 더욱 싸늘해졌고 터널을 향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아직은 침낭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버틸만한 추위였다. 그러나 강바람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 빨리 차가워졌고, 얼마 안 가 용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면 틀림없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걸. 강바람에는 그의 목숨을 걷어갈 무언가라도 깃들어있는 듯,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것은 평소처럼 오수가 섞인 한강의 질척거리는 냄새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언제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성립되어있는 관념에 불과했다. 직접 죽음의 위협을 느끼자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생각은 멈추고, 본능이 모든 판단을 주도했다. 어느 초가을 밤 유난히 어둡고 차가운 강바람이 불고 난 뒤, 아침이 되자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짐을 정리해 터널을 나왔다. 다리 밑을 지나서 사람들이 사는 도시까지 걸어 올라갔다. 아마 마포역에서 전철을 탔을 것이다. 몸에서 나는 끔찍한 악취 때문에 승객들이 불편했을 테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목동까지 갔다. 돈 봉투 안에는 큰댁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한참을 헤매며 맞는 주소를 찾아다녔다. 연립빌라 1층의 현관문을 두드리자 잠이 덜 깬 큰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당시 큰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아파트 야간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불확실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동생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녁 먹으러 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늘한 바람이 강변의 갈대밭을 스친다.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녀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뒤 용훈을 돌아본다. 용훈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어떤 읽을 수 없는 불신 같은 것이 배어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느낌일 뿐이다.



 갈매기살 식당 앞의 어수선한 거리에 용훈은 핸드폰을 들고 서 있다. 이미 해가 졌고, 도심의 불빛이 하늘을 어두운 보라색으로 밝히고 있다. 혜미에게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둘러대고서 잠시 가게를 나온 참이었다. 주변에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불콰하게 취한 회사원들이 굴뚝처럼 연기를 내뿜고 있다. 용훈은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이미 노인이 된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지는 확신이 없다. 일흔 살이 넘으면서 큰아버지는 점점 새벽잠이 없어지고, 저녁에 잠드는 시간이 빨라졌다. 다섯 번 정도 송신음이 울린다. 아무래도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라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 큰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어, 잘 지내냐.
 예, 큰아버지, 주무시고 계셨어요.
 매번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듯 똑같은 안부 인사를 반복한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불분명한 음질로 바둑 중계방송 같은 것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잠들어있는 사람을 깨운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용훈은 본론을 꺼낸다. 그가 궁금한 것은 처음 큰댁에서 살기 시작한 가을 무렵, 당시 자신이 무슨 얘기든 큰아버지에게 고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다리 밑에서 살던 봄부터 초가을까지의 일 중 무엇이라도 말하지는 않았는지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글쎄다, 그때 네가 뭐 하고 다녔는지 나도 네 소설 보고야 알았는데.
 아, 네, 그렇죠, 혹시나 싶어서요.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는 왁자지껄한 거리 한구석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문다. 재빨리 피우고 들어가지 않으면 혜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다. 하얀 연기가 폐부에 가득 찼다가 입 밖으로 뿜어지기를 수 차례, 다 타지도 않은 꽁초를 재떨이에 던지고 그는 가게로 돌아간다. 식당 안은 사람으로 가득해 바깥보다 곱절은 붐빈다. 용훈은 서로 등이 마주 닿을 듯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통과해 자리로 돌아온다. 혜미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불판 위의 고기는 용훈이 나가기 전 그대로다. 한 점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손에 집게를 든다.
 금방 왔네.
 기다릴까 봐. 그렇게 말하면서 용훈은 오늘 하루의 계획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고, 벌써 저녁이 늦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한다. 그가 어릴 적에 홀로 살아남았던, 그리고 나중에는 처녀작의 소재가 되어준 터널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종일 강변을 오르락내리락했을 뿐이다. 유난히 오늘 혜미는 말이 없다. 그에 휩쓸리듯이 용훈은 영문 모를 의구심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채로, 시야 또한 부옇게 흐려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병을 바라본다. 맥주 한 병 정도로는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질이 날 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예전처럼 술을 양껏 마시지 않게 되었다. 아니,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그들도 얼마든지 마셨다. 그런데 마치 서로에게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처럼, 어느새인가 함께 식사할 때는 소주도 양주도 마시지 않고 맥주만 조금 홀짝일 뿐이었다.
 용훈은 지금 상황이 바보스럽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다락방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며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만 했던 기나긴 날들을 분명히 기억한다. 매해 여름마다 습기 때문에 방 안의 책들은 누렇게 변색되며 점점 휘어갔다. 그런 책으로 가득 채운 감귤 상자 위에 사촌이 물려준 낡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미래는커녕 내일에 대한 의지도 없이 글을 썼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다락방에 창문이 없다는 것도, 늘 수중에 천 원 한 장조차 없다는 것도, 몇 년째 세탁하지 않은 이불 위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야만 하는 현실도 아니었다. 사실 그 정도 불편은 괴로움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아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친정에 얹혀살며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큰댁은 늘 텅 비어있었고, 큰아버지는 새벽 근무로 바빠 용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하얗게 빈 종이뭉치와 책들 속으로 파묻히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마도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손을 뻗으면, 그것이 습관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손을 마주 잡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용훈은 자신이 하루 종일 무언가에 홀려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강물이 바로 눈앞에서 흐르는 그 풍경 때문에 그는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번거롭다니, 사람은 풍족해지면 출신마저 잊게 되는 모양이다. 그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우리 오랜만에 소주 마실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훈을 본다. 노을빛 아래에서는 짙은 갈색으로 보이던 눈동자가 가게 조명 밑에서는 평범한 검은색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러냐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본다. 곧 그녀는 그러자고 말한다.
 찾고 싶었던 걸 못 찾았으니, 술이라도 마셔야 하루가 결말이 나지.
 소주 두 병을 주문한다. 저녁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는 이 식당에서 술은 한 번에 두 병씩 시켜놓는 것이 서로간에 편하다. 차가운 병을 쥐고 흔든다. 초록색 유리병 안에서 기포가 소용돌이친다. 혜미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잔을 부딪치고, 짠, 하는 작은 소리가 울린다.
 같이 소주 마시는 거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한다.
 취할 일이 한동안 없었으니까.
 어쩌다 그렇게 됐지?
 서로 다음 날 컨디션 걱정해야 하잖아.
 한 잔을 더 따른다.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물보다도 더 많이 마셨던 것이 술이다. 마치 드넓은 사막을 건너와 드디어 샘을 찾아낸 사람처럼, 혹은 대양에 표류해 자포자기로 바닷물에 손을 대려는 사람처럼 그들은 술을 마셨다. 오늘 용훈은 그때처럼 마실 작정이다. 가슴속에 비리고 들척지근한 뭔가가 얹힌 느낌을, 알코올로 다 씻어내려고 한다. 그녀 역시 비슷한 마음이다. 어떤 질문으로도 꺼내질 수 없고 형태 지어지지도 않는 답답한 심정에 부어 대듯이, 한 잔 한 잔 소주를 마신다. 어느새 고기는 너무 익어 오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금세 한 병을 해치우고 다음 병을 딴다.
 벌써 옅게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머릿속으로 그는 생각한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열심히 살았다.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청탁이 들어오는 원고마다 성심껏 결과물을 냈다. 뒤늦게나마 사람답게 살게 되어, 큰댁으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생계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는 누렇게 삭은 책들과 곰팡이로 가득 찬 다락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락방에서 그가 했던 것은 오로지 반복되는 글쓰기뿐이었다. 끊임없이 비슷한 작문만을 되풀이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 방에 살게 되기까지의 모든 일을 조금씩 다른 시점으로, 불분명한 기억들은 허구로 보완하며, 낡은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면서 몇 번이고 고쳐 썼다. 그렇게 다시 쓰고, 다시 쓰다 보니 마침내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마포대교 북단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럼 어딘데? 글에서도 마포대교라면서.
 그러게.
 잔을 부딪치고 계속 마신다. 두 사람 모두 점점 혀가 풀리고, 생각의 결 또한 풀려간다. 이제는 숫제 불판 밑의 숯불을 빼고 술만 연신 마시고 있다. 한 잔, 한 잔이 비워질 때마다 흉금의 빗장이 열리는 것처럼 말이 많아진다. 까맣게 탄 고기를 방치해놓고, 테이블 위에는 술병만 늘어간다. 당장 오늘 있었던 일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들은 아무런 맥락도 주제도 없이 떠들며 즐거워한다. 시간은 취기 때문에 느낄 새도 없이 흘러가 버린다.
 요새는 즐거워지는 일에도 투자비용이 들어.
 가게가 너무 더워, 지금 몇 시야?
 테이블 위의 빈 병이 일곱 개가 될 즈음, 서로가 독백만 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취해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었다. 택시를 타면 그만이지만 혜미가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윤곽이 흩어져 있으니 용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짧게 한숨을 쉰다. 알코올 냄새가 내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다.
 집에 갈 기력은 있어?
 못 가, 너무 취했어.
 그럼 별 수 없지.
 정말로 별 도리가 없다. 음식값을 계산하는 중에도 혜미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했다. 용훈은 그녀를 부축하며 찬 바람이 신선한 바깥으로 나온다.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하다. 그러나 사람과 팔짱을 끼고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골목을 걸으며 그는 모텔이든 어디든, 하룻밤 자고 갈 곳을 찾아 눈동자를 굴린다. 소주가 머릿속을 휘저어놓아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어떤 의혹에 대해 더는 고민할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비좁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모텔방에서, 아직도 벨트를 못 풀고 있냐고 혜미는 놀리듯이 말한다. 어지간히도 술에 취한 목소리다. 이렇게 유쾌한 그녀를 보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라고 용훈은 생각한다.
 가만, 나도 많이 취했어, 됐다.
 불 좀 꺼.
 불은 왜?
 우리 둘 다 너무 취해서 꼴이 웃겨.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무엇이 웃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도 따라서 소리 내 웃는다. 불을 끄고 이불 위로 올라간다. 김광균 시인의 <설야>라는 시에서는 여인이 옷 벗는 소리를 눈 쌓이는 소리에 비유했었는데, 전혀 연상되는 바가 없어 그는 오히려 우스개처럼 그 시구를 떠올린다. 술 냄새가 뭉근하게 피어오르고, 그들은 자조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겹친다. 그러나 취기 때문에, 어둠 때문에 세상의 상하좌우가 온통 뒤틀린 것만 같다. 그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젠장, 하며 중얼거린다. 그때 혜미가 혼잣말이라도 하듯, 약간 음정이 나간 목소리로 저기, 하고 묻는다.
 정말 다리 밑에서 살았어?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다. 어둠 속에서 형태도 없는 어떤 공포스러운 것과 돌연 맞닥뜨린 기분이다. 대답할 말은 헐벗은 몸과 담배 냄새가 찌든 어두운 방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머릿속은 알코올 때문에 해무가 잔뜩 낀 새벽 바다처럼 부옇고 불분명하다. 그 안쪽에서 몇 토막의 문장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그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썼던 글이다. 이제는 어떤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기억을 계속 종이 위에 기록하는 바람에 ‘기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성긴 조각들이다. 너무 많이 마셨어, 용훈은 자책하듯 입안에서 말을 되뇐다. 혜미는 아무 말이 없다. 애당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인지, 혹 그새 잠들어버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깨 위에 얹힌 체온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맨몸뚱이로 버티고 앉은 채, 어디로 향해야 길이 나올지 알지 못한다.


끝.

Posted by Lim_
:

 나는 이것들을 공개하겠다. 내 정신을 하인이자 노예로 굴복시키고 스스로 손가락마다 족쇄를 걸게 했던 어느 끔찍한 시간을, 더 이상 끔찍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박살을 내고 삼켜 소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고뇌와 사유가 아니라 완전한 개방이며, 원래 내 것도 아니었던 자아를 떨어트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돌아가게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개자식에 대한 증오도 증오가 아니게 되고, 개자식이라는 호칭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본래의 낱말이 되어버릴 것을 나는 확신한다.

 개자식아.

Posted by Lim_
:

(2023/01/28)쥐구멍

글/소설 2024. 4. 21. 22:54 |

(2023/01/28)
쥐구멍


 5월 9일, 월요일, 오후 6시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깨어났다.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 뚫린 것 같은 굶주림에 잠에서 깼다. 위장에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허기와 목마름 때문에 역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속을 게워내자,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위액을 뱉어냈다. 구토가 멈출 즈음이면 또 식도의 통증과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벽의 경계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딱 보기에 다 자란 생쥐 한 마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의식이 물에 잠긴 것처럼 혼탁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구멍이 맥락도 없이 머리를 꽉 채웠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을 쥐어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깎여나간 듯 까슬까슬한 구멍의 벽면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벽에 뚫린 쥐구멍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탁상 위의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나는 사흘 동안 잠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뱃속에서 맹렬한 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들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은 사지를 억지로 움직여 냉장고까지 기어갔다. 우유, 햄 통조림, 식빵, 달걀부터 냉동 밥까지 닥치는 대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참을 아귀처럼 먹어댄 뒤에야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두 번 정도 게워내고 또 먹어치우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서 드디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좀 누워야겠다.

 같은 5월 9일, 월요일, 밤 11시
 한참을 매트리스 위에 누워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머릿속의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실 탁상으로 가 수첩을 뒤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은 5월 6일의 기록이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주된 내용은 내가 어떤 약을 몇 그램이나 삼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수첩에 적힌 수 많은 화학성분들의 이름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그날 내가 삼킨 약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정과 수십 알이나 되는 리튬,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 등이었다. 그밖에, 문장에서 나타나는 산만한 정신상태와 사후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가 삶을 긍정하기 위해 썼던 글까지 인용하며, 난삽한 문장으로 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릴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날 저녁 내가 약물의 성분과 용량에 대해 수첩에 써놓았던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은 부분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할 때 쓴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특별히 유감스럽지도 않다. 며칠이나 잠들어있다가 깨어났기 때문인지, 심한 피로감과 두통 때문에 마냥 눕고만 싶다.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다. 좀 더 쉬고 나면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게워놓은 오물을 치워야겠으나 도무지 몸에 힘이 없다. 한숨 자고 난 뒤에 치운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벽의 구멍은 난데없이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잠들어있던 사흘 사이에 쥐라도 들락거리게 된 것일까.

 5월 10일, 화요일, 밤
 두통과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밤에 잠을 자기는 했지만, 내내 혼란스러운 꿈만 꿔서 전혀 개운하지 않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거실을 청소했다. 청소라고는 해도 휴지로 바닥을 닦아냈을 뿐이다. 오물을 닦은 휴지를 처리하기가 귀찮아 벽에 난 쥐구멍에 전부 쑤셔 넣어버렸다. 집안의 쓰레기통들은 진즉에 가득 찼다. 지난 삼 개월간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 내게 거리로, 아니, 현관 앞의 쓰레기장까지만이라도 나갈 용기가 있었더라면 굳이 남아있던 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에는 보다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열해보자면, 건물 밑을 지날 때는 옥상에서 벽돌이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리를 건널 때는 느닷없이 자동차가 돌진해올 것 같다. 그리고 길에서 지나치는 행인이 갑자기 칼을 쥐고 덤벼들 것 같다. 그런 공포가 늘 나의 발을 묶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전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생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포에 시달려온 것은 아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중소 IT기업에서 2년을 일했다. 아니, 어엿한 직장인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시쳇말로 나는 고문관이었다. PC용 웹사이트를 모바일 사양으로 변환하는 일을 2년이나 계속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늘 기한에 늦거나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를 냈다. 직장에서 나의 주 업무는 시말서를 쓰고 사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땅이 꺼져버리지는 않으려나 하고 습관적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사실 이것이 나의 가장 한심한 성질이었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각오를 하기보다는 세상이 끝장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니 5월 6일에도, 아니, 그만두자, 이제는 삼킬 약도 남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몽상만 하며 살다 보니 상상은 어느새 망상이자 병이 되어버렸다.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박자 이번에는 그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기가 싸늘하고 하늘이 화창하던 11월 초순, 나는 출근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었다. 그런데 그 주택가의 골목 한가운데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지독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총칼로 무장한 적군들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기력이 없으니 기분까지 우울해진 모양이다. 회사 대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당시의 일은 어지간해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같이 수첩에 온갖 일을 적고 있자면, 생각이 제멋대로 이어진다. 실상 오늘 한 일이라고는 거실을 닦은 휴지를 쥐구멍에 욱여넣은 뒤 해가 질 때까지 넋 놓고 앉아있던 것뿐이다. 모아뒀던 약을 전부 삼켜버렸으니, 이제는 자려고 해도 쉬이 잠들 수가 없다. 트리아졸람 없이 잠드는 방법을 몸이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약은 치사량도 아니었던 모양이고,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5월 11일, 수요일
 쓰레기통 하나를 비웠다. 밖에 나간 것은 아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거실 탁상 옆에 널브러진 듯 누워있었다. 집안은 어스름했고 곳곳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림자 안쪽에 새까맣게 뚫려있는 쥐구멍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 동안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날 욱여넣은 휴지 생각이 났다. 만약 구멍 안에 쥐가 살고 있다면, 내가 한 일 때문에 입구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쥐구멍까지 기어가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런데 구멍은 막혀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쥐들이―정말 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지저분한 휴지를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묘한 흥미를 느꼈다.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끌어와 안에 든 것들을 조금씩 꺼내, 쥐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걸리는 듯 잘 들어가지 않더니, 약간 힘을 주자 쓰레기는 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로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쥐구멍에 집어넣는 일을 반복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입구 안쪽에 상당한 크기의 공간이라도 있지 않은 한, 쓰레기통의 내용물이 전부 들어갈 리가 없다. 그제야 나는 자살시도 이후 처음으로, 내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약을 삼킨 뒤 나는 생명을 잃었고, 영혼만이 이 거실에 붙잡힌 채 정체불명의 쥐구멍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구멍은 현실감이 없었다.
 텅 빈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생각도 해보았다. 5월 6일에 삼켰던 약이 치사량은 아니었으나 뇌와 신경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에는 충분한 용량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죽었든 정신이 망가졌든, 증명할 방도가 없다. 손에 오물이 묻어 끈적거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손을 닦고, 다시 쥐구멍 앞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휴지며 약봉지며 달걀 껍데기 따위를 잔뜩 집어삼킨 구멍은, 전보다 입구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지금 겪고 있는 사태가 너무 이상스러웠다.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일어나는 일을 수첩에 적어놓기로만 했다.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다. 그리고 거실의 쓰레기통은 분명히 텅 비었다. 쥐구멍은 전보다 넓어진 것 같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품었던 것과 비슷한 불안을 느낀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가까운 친지 중 알코올중독자와 조현병 환자가 넷이나 된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 속에 불발탄처럼 묻혀있다.

 5월 12일, 목요일
 깜빡 잠들었나 보다. 깨어나니 집안이 환했다. 나는 거실 탁자 밑에 나동그라져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보니, 거실은 전날 생각했던 것만큼 기괴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새벽이라는 시간이 가진 특유의 불길함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을 유난스럽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보다 맑게 만들어야겠다. 걸레를 빨아 아직도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거실을 청소했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끓여 먹었다. 5월 9일에 깨어나 냉장고에 든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치운 이후 처음으로 하는 식사였다.

 5월 13일, 금요일
 쥐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쥐구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넓이다. A4용지로 겨우 입구가 가려질 정도다. 이 정도 크기라면 건물 외벽까지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지하로 쑥 꺼진 울퉁불퉁한 통로가 보일 뿐이다. 건물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회사에 다닐 때 입던 와이셔츠를 구멍에 구겨 넣고 달력을 뜯어내 입구를 막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 때나 읽던 공포소설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러브크래프트나 스티븐 킹의 작품 따위 말이다. 그들의 소설은 대부분이 어딘가 왜곡된 현실에서 솟구쳐나오는,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주인공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이 쥐구멍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현실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고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햇살이 밝았던 것이 거짓말 같다.

 5월 14일, 토요일
 이틀째 비가 멎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탁상의자에 앉아 달력 낱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과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다. 밖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마치 구멍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달력을 툭, 툭, 하고 건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삶이 끝나고 자유로워지리라는 기대로 일을 저질렀는데, 성공하지 못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편집증 환자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막힌 쥐구멍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구멍에서 빗물이라도 차올랐는지 달력의 아랫부분이 젖은 듯하다. 정체를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달력을 찢고 거실로 기어 나오리라는 생각이 잦아들지를 않는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마다 어깨가 들썩 솟을 만큼 놀라곤 한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제때 밥을 챙겨 먹지도 않고, 아무래도 신경과민이 있는 것 같다. 종일 의자 위에 쭈그려 앉은 자세로 있으려니 온몸의 관절이며 근육이 아프다. 내내 긴장한 채로 쥐구멍을 향해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있으니, 머리통이 떨어질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막내 삼촌은 아버지보다 열 살 어렸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삼 형제 가운데 혼자만 성격이 유별난 편이었다. 사실 유별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직업도 없이 놀고 있었다. 큰아버지 댁에 있는 자신의 좁은 방에서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놈은 글러먹었어. 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추석이었는지 설날이었는지, 큰댁에 명절을 쇠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척들로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삼촌은 외출하고 없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은 한참 화투를 치다가 판을 접은 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루했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거실에서 나와 삼촌의 방인 뒷방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있기는커녕 살짝 열려있었다. 그대로 밀자 습기 차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어둡고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이불이 흩어져있고, 장롱 하나와 오래된 TV가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일제 담배 세 갑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삼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매트리스의 반대쪽 벽면에야말로 삼촌의 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있었다. 그곳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청록색 등 온갖 색깔의 마커로 쓴 단어들이 벽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없었고, 각기 다른 색깔로 된 단어들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단어들은 검은색 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색 ‘사랑’과 노란색 ‘증오’가 연결되어 있었고, 청색 ‘보다’와 보라색 ‘기다리다’가 선으로 이어져 있는 식이었다.
 아마 삼촌은 하루 종일 그 좁은 방안에서, 매트리스에 앉아 자신이 만든 계산식―나는 그것이 계산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선하다. 가끔 단어들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면 같은 개념끼리 선으로 묶곤 했겠지.
 나는 그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삼촌이 나의 육친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솔직히, 나는 친인척 중 그다지 대화도 해본 적 없는 삼촌에게서 가장 큰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자신이 삼촌처럼 미쳐버렸다는 것을 긍정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건강한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고, 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씩 도는 동안 벽에 발라놓은 달력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스스로의 행위와 기억들을 수첩에 옮겨적을 정도의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펜을 놀릴 때만은 빗소리인지 구멍에서 나는 소리인지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제정신을 유지한다고 해서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5월 16일, 월요일
 내 방에 사람이 있다. ‘있는 것 같다’가 아니다. 그는 하나뿐인 방을 차지하고서 지금 잠들어있다.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하루 전이다. 나는 탁상의자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오뚝이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습하고 어두웠다. 마음속의 불길한 감정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짐승 같은 것들이 거실 벽 속에서 내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환청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어 오히려 침착해졌다. 의자 위에서 나는 달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달력은 이미 반쯤 젖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곧 안쪽에서 무언가가 젖은 달력을 찢고 나왔다. 쥐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지저분하게 얼룩이 지고 곰팡이까지 슬기 시작한 흰색 와이셔츠였다.
 내가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와이셔츠는 슬며시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깃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와이셔츠는 깡마르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쥐구멍에서 뼈와 가죽밖에 없는 나체의 남자가 달력을 찢으며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비쩍 마른 남자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온몸을 뒤틀며 어깨너비도 되지 않는 구멍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다. 몸이 전부 거실로 나오자 그는 탈진한 듯이 바닥에 풀썩 엎어져 버렸는데, 오른손은 여전히 지저분한 와이셔츠를 백기라도 되는 듯 흔들고 있었다.
 의자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실 위에 나체로 늘어져 있는 그의 몸은 비참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등은 갈비뼈와 척추가 전부 드러나 보였고, 하체 또한 둔부 없이 골반이 그대로 대퇴부에서 정강이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도저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와이셔츠를 좌우로, 곧 실이 끊겨 무너져내릴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고 있었다. 말이 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에곤.
 마지막 숨을 쥐어 짜내는 듯한 한마디와 함께 마침내 그의 오른팔마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면서 와이셔츠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펼쳐졌는데, 그 손아귀에서 흰색 알약 이십여 정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여전히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경찰이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상황을 설명하든 결국에 나는 집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 것이다. 끝내 내가 한 일은 에곤이라는 남자를 거실에서 방까지 끌어다가 매트리스 위에 눕혀놓는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기는 할지 의문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마른 몸뚱이에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에곤이 손에서 놓친 알약들을 들여다보았다. 본 적이 없는 약이었다. 쓸어모아서 비닐로 된 약봉지에 담아놓았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나도록 에곤은 깨어나지 않고, 나는 찢어진 달력이 너덜거리며 붙어있는 구멍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미 사람 하나가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월 18일, 수요일
 에곤은 죽지 않았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어두운 천장을 보며 누워있던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 위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 같은 나체의 남자가 비척거리며 거실에 나타나는 장면은 마치 산송장이 억지로 사지를 뒤틀어가며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기괴했다. 나는 그에게, 옷장에 남는 옷이 있으니 꺼내 입으라고 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되돌아갔다. 에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너무나도 퀭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동자 색과 생김새 따위로 보아 에곤은 외국인이 분명했다. 아마도 유럽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도 실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곤이 가져온 약을 담아둔 봉투를 서랍에서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마른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은 그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내가 남의 걱정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심하게 마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사양도 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에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에곤이요.
 어디서 왔습니까?
 툴른에서 왔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그야 구멍 밑이지요.
 내 말은… 알겠어요, 가족은 있으세요?
 모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저런.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그게, 나도 잘 모르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내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그는 빵과 우유를 아주 느리게, 그러나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나도 비구름이 걷히고 다시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곤은 나에게 종이와 연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A4용지 다발과 볼펜을 내주었다. 연필은 없었다. 에곤은 군말 없이 물건을 받더니 창문으로 다가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 때문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은 많았지만 고민할 기력이 없었다. 창문 앞에 달라붙어 종이와 펜으로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에곤은 그리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방으로 가서 잠을 자야겠다.

 같은 5월 18일, 수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보니 탁자 위에는 펜화가 그려진 종이 수십 장이 쌓여있었다. 그림은 모두 똑같은 구도였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 그린 것들뿐이었다. 에곤은 아직도 창문 앞에서 새 종이에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지만, 어쩐지 새벽에 보았던 것보다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자살시도 이후로 보름 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두 팔을 보니 새삼 그것은 말라붙은 나무막대기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실에 휑하니 뚫려있는 쥐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찢겨 너덜너덜한 달력을 전부 뜯어냈다. 구멍은 명백하게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럴 마음만 든다면 별 무리 없이 구멍을 향해 투신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에곤을 불렀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당신이 들고 온 약은 뭡니까?
 무슨 약이요?
 당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 말이에요.
 그건 바르비탈입니다.
 바르비탈?
 그러니까 일종의 백기 같은 거죠, 항복의 표시라든가….
 와이셔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여하간 말하자면 쥐구멍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겁니다.
 왜 그걸 갖고 있었습니까?
 그 질문에 에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러나 중요한 것을 설명하는 듯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삶이든 가족이든, 강제로 주어진 것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가 없어요, 도망을 꿈꾸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곤은 펜화를 그리러 돌아갔다. 나는 작은 동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생각을 기록해두려 한다. 스스로 쥐구멍에 들어갔다던 에곤은 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그는 왜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을까.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불우한 화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금지된 것만 바라다가 손에 있던 것마저 전부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왜 하필이면 이 쥐구멍이 내 거실에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5월 9일에 깨어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혼란스러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영화 <엔터 더 보이드>에서 주인공이 사망한 뒤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혼탁하고 음울한 환각을 직접 겪고 있는 기분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대롱 같은 통로’를 통과해 다시 태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알아챈 것인데, 근 일주일 정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5월 24일, 화요일
 달력은 오늘이 화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곤 덕분에 집에 쟁여두었던 A4용지가 동이 났다. 이제 그는 이미 그린 그림들의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창밖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을 계속해서 그릴 뿐이다. 냉장고 안의 음식과 찬장의 라면까지 꺼내먹으면서 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나는 거실에 송장처럼 늘어져서 벽에 난 커다란 구멍을 마냥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입던 옷들은 에곤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

 5월 30일,
 에곤이 내게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이를 사러 밖에 나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지갑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 지갑은 너무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에곤은 이미 내가 회사에 다닐 적에 입던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다. 전보다 살집이 붙은 얼굴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점점 몸의 기력이 쇠하고 팔다리가 얇아지는 것을 느낀다. 가슴에 손을 대면 내 갈비뼈들의 모양을 손끝으로 짚어볼 수 있다. 아마 밥을 먹지 않아서 그렇겠지.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깨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거나 사건이 벌어질 때 사람은 깨어나는 것이다.

 5월 33일
 집안이 에곤의 그림들로 가득 찼다. 요새 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새 이젤과 캔버스까지 구해 들고서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거실과 방에는 이미 완성되었거나 작업 중인 캔버스가 잔뜩 쌓여있다. 오늘 나는 커다란 구멍을 쳐다보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면에 걸린 채로 죽은 발드마르는 죽어있는 동안, 그러니까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두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있는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있던 것일까? 그러나 최면에 걸린 그의 몸은 썩지 않았었고… 아니, 여하간 중요한 점은 최면에서 깨어난 순간 발드마르의 몸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비명인지 환성인지 모를 “dead! dead!”라는 절규가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다.
 에곤은 최근 혈색이 좋다. 그가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38일
 나는 오늘 에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새 그림을 그리느라 너무 바빠서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는 듯하다. 나는 쥐구멍 안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구멍 안에 ‘무엇’ 따위는 없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자 번역이 잘못된 외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이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에곤은 웃었다. 그야 출구가 있었으니까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지리멸렬해서 더는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곤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았습니다, 삼키기에는 원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에곤이 처음 쥐구멍에서 나왔을 때 흰색 와이셔츠를 흔들던 것은 백기를 흔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화가 날 때 남의 옷깃을 쥐고 흔들어대기도 하니 말이다.

 4?일
 요즘 에곤은 나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이제 에곤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구멍의 새까만 입구를 쳐다보며 삼촌에 대한 생각, 병원에 대한 생각, 바깥세상의 위협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부터 내 인생의 절반은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5월 6일 자살을 결심했을 때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예전에 <랜트>라는 아주 기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낳는 위험천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것이 생각났느냐면, 그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드는 유일한 생각은 주인공의 저주 같은 순환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서 꺼낸 바르비탈은 세어보니 스물한 알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이제 이상한 환각을 끝내고 그 ‘무엇’도 없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5월 6일, 금요일
 이것이 내 마지막 기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탁자에는 초봄에 모아 놓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알과 물 한 컵이 준비되어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삼 개월이 넘도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트리아졸람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리튬과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놓았다. 단번에 삼키면 이 중 무엇이라도 효과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약품의 성분과 효능에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증상 중 하나라고 의사가 말했었는데, 아니다, 이야기가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나는 곧 모아놓은 약을 전부 삼키고 바닥에 누울 것이다. 억울하거나 미련이 남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만 사후세계 같은 것이 느닷없이 내 눈앞에 튀어나오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는 육체에서 떼어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백번 옳은 말이고, 만약 영혼이나 내세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또 사설이 길어지고 있다. 이 글이 더 이상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이만 끝을 내야겠다.


끝.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