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이야기는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익숙하리라는, 어느 흔한 포장마차에서 시작된다. 오뎅과 군참새, 세 종류 정도의 술을 팔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장이 펄럭거리는 그곳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김’과 ‘안’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함께 술을 마신다. ‘김’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었으나 실패하고, 군 제대 후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안’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부잣집 아들로 ‘김’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파리를 사랑하느냐’,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등의 일견 관념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들이 지적 허영에 빠진 것인지 취기에 힘입어 진정 어린 대화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들 특유의, 취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모든 거짓을 배제하려는 이상한 결벽증을 작가는 장면마다 계속해서 묘사한다. ‘안’의 경우에는 손까지 잡아가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하고 재차 확인하곤 한다. ‘김’은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꺼내면 5분도 되지 않아 술자리가 끝나버린다는 ‘안’의 말을 듣고 어쩐지 이해할 것 같은 마음에 대화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자 곧 두 사람은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한 듯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화신 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트롤리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발견과 기억인 듯하다. 사람들로 가득하고 계획생산 된 도시에서, 모든 광경과 사건들은 공유되는 공공의 것이지만 사소한 디테일과 매일 달라지는 세밀한 차이는 그것을 발견한 개인만의 것이 된다. 직후 ‘안’이 늘어놓는 밤거리에 대한 다소 현학적인 설명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안’은 자신이 밤거리로 나오는 이유에 관해, 밝은 낮에는 사물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느낌이지만 밤이면 ‘사물들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밤이 되면 사물들은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생 미셸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관찰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안’은 낮이면 사물들 속에 끼어버리지만 말테는 늘 사물들로부터 타자가 되어 있는 부분인 듯하다.
 ‘안’의 현학적인 이야기에 ‘김’이 당황하자 그들은 밤에 느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뿌듯함’으로 타협한다. 의기투합한 그들이 제대로 된 가게에서 술자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로 술이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불을 쬐고 싶어 포장마차 안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자신도 돈이 얼마 있으니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술값만 있다면……’하고 승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일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거리로 나선다.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서 그들은 목표한 곳도 없이 걸어 다닌다. 그러던 중 삼십 줄의 사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이미 식사를 했다는 ‘김’과 ‘안’에게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게 음식을 권한다. ‘김’이 ‘그렇다면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켜도 되느냐’고 농담 삼아 물은 말에 사내는 선뜻 그렇게 하라며, ‘돈을 써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식사를 하며 사내는 조심스럽게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날 낮에 사내의 아내는 병으로 죽었다. 처갓집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친척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가난한 서적 월부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4,000원을 받고 병원에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사내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해 미안하다면서,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그는 돈을 오늘이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안’은 얼른 써버리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돈을 다 쓸 때까지 ‘김’과 ‘안’에게 함께 어울려달라고 청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데, 술에 만취한 세 인물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충동적인 구매를 할 때마다 ‘1,000원이 없어졌고’, ‘600원이 없어져 버렸다’, ‘300원이 없어졌다’ 하는 식의 서술이 인물들의 절박하면서도 무책임한 심리상태를 속도감 있게 표현한다. 그 후 지나가는 소방차를 발견한 그들은 택시를 잡아 소방차를 쫓는다. 이때 ‘안’은 불구경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창부를 사러 가자고 하는데, 작품 초반에서부터 보이는 ‘안’의 외설적인 것을 경시하면서도 호색한의 면모를 드러내는 모순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국 세 남자는 화재 현장에서 2층짜리 건물이 불타는 것을 구경한다. 이때 ‘김’은 그저 유심히 간판이 차례차례 타들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며, ‘안’은 화재란 공공연한 사건이기에 화재에 대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현학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만취해 불길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던 사내는 한동안 불구경을 하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돌과 함께 손수건에 싸서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다.
 이때부터 아내를 잃은 사내는 더 절박한 모습으로 변한다. ‘김’과 ‘안’에게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여관에 묵을 돈을 충당하기 위해 한밤중임에도 월부 책값을 받겠다고 책을 판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이는 본디 아내였던 것이 4,000원의 돈으로 변하고, 그 때문에 아내의 죽음 역시 4,000원의 돈으로 유보되었던 상태가 끝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제 닥쳐오는 현실에서 돈으로밖에는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내는 돈을 구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부탁해 ‘김’, ‘안’과 같은 여관으로 향한다. 사내는 계속해서 같은 방에서 머물자고 요구한다. ‘김’은 연민을 느껴 사내의 말대로 하려고 하지만 ‘안’은 여지도 주지 않고 각자 방에서 자야 한다고 결정한다. ‘김’은 계속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 듯, 화투라도 치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이때 ‘김’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내의 상태에 대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은 피로를 핑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김’도 이제는 너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안’은 급히 ‘김’을 깨운다, ‘안’은 대뜸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하고 말한다. 사내가 자살한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안’은 사내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노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김’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 여관에서 도망친다. ‘김’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잠시 기묘한 대화를 한다. ‘안’은 ‘김’에게 자신들이 분명히 스물다섯 살이 맞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서로가 스물다섯 살이 분명하다고 확인하는데, ‘안’은 무엇인가가 두렵다고,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김’은 그들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못 박아 말한다. 악수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진다. 버스를 탄 ‘김’이 차창 너머로, ‘안’이 눈을 맞으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히 인물들의 역할인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김’, ‘안’,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 이렇게 셋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김’은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초반에 ‘안’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들 때문에 ‘김’은 일견 순박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에서 단련되고 벼려진 이중적인 면모가 점점 돋보인다. 결말에서 사내가 자살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여러 번이나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러한 면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의 사건 때문에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에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시원스레 말할 수 있다는 점이 ‘김’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듯하다.
 반대로 ‘안’은 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이 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김’과 역할이 바뀌는 듯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내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는 대사는 체념 섞인 반성의 어조로 읽히기도 한다. 만약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면 사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안’은 그것을 알고서도 각자 방을 쓰도록 했다. 부유한 지식계층이 쉽게 취할만한 행동으로 보이고, ‘안’에게 어울리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는 자신이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는 아마도 사내의 비극과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강제적으로―겪게 된, 일상 속의 부조리와 그러한 경험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고찰일 듯하다. 이 하룻밤 사이의 사건에서 ‘김’이라는 스물다섯 살 청년은 이미 완벽하게 서울에 적응하여 단련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안’은 앞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변해갈 가능성을 보이는 듯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삼십 줄의 사내는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인다. 이 사내가 없이 ‘김’과 ‘안’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작품은 두 사람의 상념과 관념적이기만 한 대화로 끝나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내의 비극으로 인하여 소설은 기복을 갖게 되고 이야기로서 완결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며 나는 무엇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인지, 실존에 대한 고찰을 다루면서도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사건과 인물들이 역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은 단편소설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소설이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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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감상.

기록/도서 2021. 12. 16. 02:25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활동했던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본래 이름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작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부처 고타마’로 불리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작중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고유하게 쓰인다.
 사제 계급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출중하고, 어린 나이에 다른 사제들과 신학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등 뛰어난 지적능력의 두각을 드러낸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강한 학구열을 가졌고,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표현되는 ‘아트만’에 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갈증을 끊임없이 느끼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친구이자, 그의 지적인 고상함을 숭상하는 숭배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청년이 된 싯다르타는 바라문이 전통적으로 해왔고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 신학을 논하고 제사에서 주문을 외우며 계급제도의 최상위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다. 그런 생활로는 결코 ‘아트만’에 이를 수 없으며, 진리를 깨닫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숲속에서 생활하며 ‘아트만’에 이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문에 고빈다와 함께 귀의한다. 그들은 사문에서 정신으로 육체의 활동을 통제하는 일, 이를테면 호흡하지 않거나 심장의 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방법 등을 수련하고, 단식과 인내로 인체의 욕구를 제어하거나 정신 자체를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로 옮겨 자아를 해체하는 훈련에 매진한다. 그러나 온갖 요기와 같은 기술과 신통력을 얻게 되어도 싯다르타는 그것이 자아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길일 뿐이며, 결국 아상(我想)을 깨트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문의 가르침에 환멸을 느낀다.
 그 즈음하여 인도 전역에는 ‘고타마’라는 자가 정각에 이르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많은 구도자가 부처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떠나고, 소문에는 고타마가 진정한 부처라는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속세에 타락한 거짓된 구도자라는 반대되는 이야기도 섞여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사문을 나와 부처 고타마가 기거하고 있다는 기원정사로 향한다.
 기원정사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 그들은 부처 고타마야말로 정각에 이른 분이고, 자유자재한 분이며, 현세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 분이라고 확신한다. 고빈다는 곧바로 불가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우연히 부처 고타마와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부처 고타마와 독대하며 싯다르타는 자신의 의구심을 털어놓는다. 그가 생각한 것은 가르침이란 말을 통해 전해지는 이상 관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닌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부처의 거동이나 말투, 표정 등을 보고 확신으로 굳어진다. 즉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은 자, 가장 존귀한 세존이라는 점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부처의―말을 거친― 가르침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부처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대는 똑똑하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라고 경고한다. 그날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와 고빈다를 떠나며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한다.
 이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는 사물들의 저편, 피안의 너머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으나 이제 싯다르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와 존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이 흐르는 소리, 풀과 꽃의 빛깔,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 태양의 따스함 등이 전부 그 자체의 것으로 느껴지며 싯다르타는 자신이 지금까지 찾던 ‘아트만’이 사물의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있음을 감각한다. 그는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좋은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겪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느 마을로 들어서기 전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이 뱃사공과 그의 오두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을 건넌 뒤 뱃사공에게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싯다르타 역시 이 만남이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 뒤 모든 것을 겪어보겠다는 싯다르타는 한 마을에 도착해 사문의 입장을 버린다. 그는 카말라라는 유명한 기생과 연인이 되며,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번다.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할 줄 아는 일, 즉 단식하고 기다리며 사색할 줄 아는 일이 커다란 지혜로서 도움이 된다. 그의 사업은 번창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일에도 막히거나 부자유한 점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싯다르타에게는 속세의 때가 묻고, 재물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그 증오는 결국 술과 도박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재물에 집착하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사위 놀음에 엄청난 재산을 쏟아붓고, 그 다음 날은 잃은 것을 돌이키려고 흉폭할 정도로 사업을 강행한다. 어느새 머리가 반백이 될 때까지 그런 삶을 살던 싯다르타는 술기운에서 깨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구토하고 싶다는 강한 절망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속에 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구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주 오래전,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 건넜던 강까지 꼬박 하룻밤을 들여 걸어간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 작정을 한다. 어린애 유희 같은 인간들의 삶에서 빨아 마실 수 있는 것을 모두 빨아 마시고, 이제는 부패하여 온전히 절망하기만 하는 그는 강가에서 투신할 작정이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야자나무 아래서 바라문 시절부터 기억의 깊은 곳에 심어져있던, ‘옴’이라는 한 음절의 완전무결성이 울려 퍼진다. 그 음절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하며 싯다르타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 안에서 자라났던 것들이 전부 시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깊은 잠에 빠진다.
  잠을 자는 동안 내면의 모든 자아가 죽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뒤 깨어난 싯다르타는 자신이 한 번의 ‘윤회’를 겪었다고 직감한다. 지금까지 전부 ‘구토’해버리고 싶던 싯다르타는 모조리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때 싯다르타가 잠에서 깰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던 고빈다와 만나게 된다. 고빈다는 불가의 승려로서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강가에 누워 자고 있던 사내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잠자는 사내가 싯다르타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싯다르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고빈다는 몹시 놀라며 싯다르타의 변한 모습, 값비싼 의상과 부유한 상인 같은 외견을 지적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형상의 수레바퀴는 빨리 도는 법”이라며 자신이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을 암시한다.
 고빈다와 헤어진 뒤 싯다르타는 오래전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 주었던 뱃사공을 찾아간다. 싯다르타는 강물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결이 흘러 가버려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느껴 뱃사공의 조수가 된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러 해를 함께 산다. 현명하고 친절한, 늙은 뱃사공과 함께 살며 싯다르타는 점점 강이 알려주는 진실들에 따라 지혜롭고 겸손해진다. 오랫동안 뱃사공 일을 하며, 뱃사공 바주데바와 싯다르타는 생각하는 방법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심지어 외견조차도 닮아간다. 그들은 강에서 흘러가는 물살이 바다로 가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과 들에 비로 내리는 일들을 강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양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과 가치들은 사실 거대한 원형구조 속에서 단일성으로 통합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두 번째 깨달음이다.
 이후 부처 고타마가 입멸한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진다. 싯다르타가 떠난 뒤 기생을 그만두고 불교에 귀의하여 살고 있던 카말라는 아들을 데리고 세존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그 아들은 싯다르타가 줄곧 모르고 있던 싯다르타의 자식이다. 그런데 강을 건너기 전 카말라가 독사에게 물리는 일이 벌어지고, 바주데바가 급히 오두막으로 옮겨와 카말라는 죽기 직전 다시 싯다르타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다’고 하며 아들의 존재를 알리고 숨을 거둔다. 그 뒤부터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아들을 키우게 되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통이자 번뇌이다. 아들은 천방지축에 무례하고 응석받이인데,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싯다르타에게 욕을 하고, 그릇을 던지고, 싯다르타의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태도가 오히려 자신을 경박한 존재로 만든다며 반항한다. 이럴 때마다 싯다르타는 고통스러워하고 어떻게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 번민한다. 바주데바는 자주 싯다르타에게 충고한다. “그대가 아들을 위해 열 번을 대신 죽어준다 하더라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때 싯다르타는 청년 시절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문이 되었던 일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가 윤회의 바퀴 속에서 방황과 절망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들에게만은 그것이 면제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싯다르타는 계속 아들을 주변에 두고자 한다.
 곧 아들은 바주데바와 싯다르타의 돈을 훔쳐 마을로 달아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을 가로질러 마을까지 쫓아간다. 그 와중에 싯다르타는 사람이 자식의 운명을 소유하거나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마을 입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명상에 빠진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세 번째 깨달음이다. 이미 현자 혹은 성자라 불릴 만큼 현명한 싯다르타였으나 혈육에 대해서만은 번뇌와 미망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 싯다르타라는 한 성인의 마지막 방황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곧 그를 따라온 바주데바와 함께 싯다르타는 강가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바주데바의 손에 이끌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의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 아직 아들을 품에서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싯다르타에게 강의 소리는 온갖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비웃고, 비명지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것을 말하자 바주데바는 ‘더 잘 들어보라’고 채근한다. 계속해서 강의 소리를 듣고 있자 싯다르타는 곧 강이 내는 모든 소리를 듣게 된다. 기뻐하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 악한 소리와 좋은 소리가 모두 뒤섞여 목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되었으며, 웃음소리도 슬퍼하는 소리도, 선한 소리도 사악한 소리도 강 그 자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가고 그 뒤에 원형구조를 이루며 강물의 원천까지 되돌아가 다시 모든 소리를 내는 강이 되었다. 이때 싯다르타는 범(凡)의 의미를 깨닫는데,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이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가르쳐준 바주데바는 빛이 나듯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처음 부처 고타마를 떠날 때 싯다르타는 ‘말로 된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주데바는 겸손하고 친절한 행동과 경청하는 방법으로 싯다르타를 해탈로 이끈 것이다.
 늙고 지혜로운 뱃사공으로 싯다르타가 계속 살아가던 중, 불가의 승려로 살고 있던 고빈다가 나룻배를 이용하게 된다. 고빈다는 이 강가에 사는 뱃사공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대화를 하던 중에 싯다르타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고서야 고빈다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위해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고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가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 등으로 개념을 양립시켰던 것은 ‘말로써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은 자인 세존은 그것들이 하나의 단일성 속에 있음을 경험과 인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빈다는 마지막까지 싯다르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아주 괴상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빈다가 보기에 싯다르타는 세존만큼 표정이 빛나고 몸짓이 자유자재하며 무엇 하나 거추장스러운 점이 없다. 고빈다는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고빈다가 부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싯다르타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지켜보더니 대뜸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보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그 순간 고빈다는 불분명하게 연결된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데, 그 얼굴들은 성자였다가 살인자이기도 하고, 사람이었다가 짐승이기도 하고, 기뻐하는 표정이었다가 고통에 빠진 표정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미물이었다가 신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환상이 없는 채로 모든 얼굴이 그 자리에서 동시에 뒤섞여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완성된 것, 즉 범(凡)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이 반투명한 가면과 같은 것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면은 바로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똑같았고 싯다르타의 늙은 미소와 똑같았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빈다는 눈물을 흘리고, 여전히 수백 개의 주름으로 미소짓고 있는 싯다르타에게 깊이 절하며 작품은 끝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데미안> 이후에 쓰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쓰인 <데미안>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인의 의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젊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고 문학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데미안>에서 헤세가 현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답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데미안> 이후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모든 경험은 다 겪어보아도 좋은 것’이라는 사상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두고 있는 듯하다. 처음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지적으로 대성하였고, 이후 사문에서 정신주의의 극단까지 가보았으며, 사문을 그만둔 뒤로는 세속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성공과 타락까지 경험한다. 나중에 싯다르타는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싯다르타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모든 가르침을 오로지 경험에서만 체득했다는 점인 듯하다. 마지막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말은 진리에 싸놓은 겉껍질 같은 것”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말이나 지식으로 해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선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불교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좌선이나 선문답, 불제자로서의 행위, 수련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완전한 해탈인 ‘불가사의해탈’은 지식적인 깨달음인 ‘지해탈’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체득한 인식과 지혜로 이루어진 ‘혜해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불가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헤세가 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싯다르타>라는 소설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매우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으로도 역사에 남을만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싯다르타>를 단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 분량의 선문답으로 이해해도 잘못된 시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아들로 인한 싯다르타의 번뇌는 석가모니불의 아들 ‘라훌라’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오마주인 듯하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라는 뜻으로, 구도의 길을 걷던 석가모니에게도 혈연이 만드는 고뇌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장 큰 장애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바주데바와 강(江)의 가르침으로 이미 성자의 반열에 오른 싯다르타가 마지막으로 겪는 장애 또한 자신의 혈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불제자인 고빈다가 불가의 가르침을 오로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다소 아쉽기도 하다.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인물이 불도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점은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다.
 다소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이기도 한 작품이지만 삶의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했던 헤세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경험과 체득을 중요시하며 ‘말’의 표피성을 지적하는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물과 인간이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해줄 듯하다. 그리고 ‘감각과 사유 모두’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작품이 주장하는 바는 인생에서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를, 소설만이 가지는 ‘간접경험’이라는 무기를 통해 여실하게 전해줄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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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진실과 회의


  보르헤스의 <픽션들> 가운데 한 편인 <바벨의 도서관>은 저자가 관찰하고 상상하는 세계가 그대로 글이 된 것 같은 단편이다. 시작부터 ‘도서관’과 ‘우주’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화자를 이용하여 보르헤스는 작중에 그려지는 ‘도서관’이야말로 우주, 혹은 세계의 비유적 형태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육각형의 진열실에 다섯 개의 책장이 있고 각각의 책장마다 서른두 권의 책이 꽂혀있는 공간이 위와 아래, 그리고 복도로 연결된 평면으로 무한하게 펼쳐진 것이 이 ‘우주’의 모습이다. 이 도서관은 어느 모로 생각해봐도 무한하지만, 25개의 철자 기호(22개의 철자와 여백, 쉼표, 마침표)가 410페이지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합은 유한하기에, 단순히 무한하다 유한하다 단정하기가 힘들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마지막에 작중 화자가 나름의 가설을 희망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공간에서 모든 인간은 사서로 태어난다. 그들은 ‘도서관에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시행착오 덕분에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지식은 물론이고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진리까지도 도서관의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시절 으레 ‘어떤 책’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화자 또한 ‘목록 중의 목록’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인물이다. 여행으로 그치지 않고 ‘사서들’은 수 세기에 걸쳐 도서관에 대한 온갖 관념적, 철학적, 신학적 이론을 세우고 교파를 만들며 행동하기까지 한다. 나에겐 이것이 인간본성과 인류에 대한 보르헤스의 날카로운 비평이자 풍자로 보인다.
 ‘도서관’에는 몇 가지 조건(철자의 수, 페이지 등)을 갖추기만 하면 가능한 모든 책이 존재한다. 이는 우주가 무한하다면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영’이 아니기만 하면 모든 가능성이 실재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나에게는 이 도서관이 혼돈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과 ‘영이 아닌 것’으로만 실재가 나뉠 뿐, ‘영이 아닌 것’들은 모조리 존재하거나 벌어질 수 있으며 그런 일에는 허가도 도덕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주의나 이념을 내세우며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작중에서도 화자는 ‘유일한 종족인 인간’이라는 문장을 쓴다.
 작중의 온갖 교파들이 각기 다르게 주장하는 진실이나, 어딘가에 있을 진리가 적힌 책을 찾아다니는 것이 도서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화자는 ‘도서관의 모든 책은 유일무이하다’고 쓴다. 그리고 모든 유일무이한 책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변형되거나 번역, 해석되어 무궁무진하게 도서관에 꽂혀있다고도 쓴다. 그 책들 또한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서가 찾는 진리의 책이라는 것이 과연 다른 책들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도서관의 모든 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설령 어떤 사서들의 집단이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책이다’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고 한들, 도서관의 구조와 원칙을 생각해보면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동일한 가치밖에는 가질 수 없다. 그 ‘진리의 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서들뿐이다.
 다시 말해 ‘가능성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만물과 만사가 평등하게 무가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일한 종족’인 인간만이 거기에 각기 다른 값어치를 매긴다. 인간은 질서를 찾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생각해보면 우주는, 혹은 우주의 대전제가 되는 것은 늘 혼돈과 우연이다. 우주(또는 도서관)가 질서정연한 형태로 보이는 것은 그것의 본질이 규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질서를 찾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늘에 아무렇게나 떠 있는 구름만 보아도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를 연상하는 본능이 인간에게는 있다. 즉 언제나 규칙성을 찾고 있는 종족이다. 인간이 말하는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욕망에 따른 환영 같은 것이며 혼돈 내부에 존재한다. 이런 생각은 보르헤스의 또 다른 단편인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읽으며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인간이면서 인간본성을 차갑게 부정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러한 사고방식 또한 ‘질서’를 찾는 본능의 표현이기도 하다. 화자는 곧 자신이 죽게 되면 어느 친절한 사서들이 자신의 시체를 육각형 진열실의 가운데 뚫려있는 영원한 허공에 내던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그는 인간이 멸망해도 도서관은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무질서가 반복되면 질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질서”가.’라고 희망하며 수기를 마친다.
 내가 알기로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평생 진리나 통일성을 찾아다닌다. 방법의 차이 때문에 눈에 띄거나 그렇지 않을 뿐, 모두가 도서관에서 태어난 사서와 같다. 그러나 수없이 많고 판이한 진리들이 동등한 가치로 존재하거나,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신들이 ‘유일무이한 책들’을 써놨을 가능성도 절망처럼 존재한다. 작중에 언급된, 410페이지 동안 M, C, V만이 반복되는 이상한 책이 만약 우주의 진실이라면, 인간에게 우주의 진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위와 같은 생각들을 끌어내며 보르헤스의 소설은 언제나 날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을 강요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때문에 오랫동안, 내게 보르헤스는 늙고 괴팍하며 비웃음을 띈 노인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다. 그는 인류를 모조리 비웃으며 지식과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의구심은 늘 머릿속에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악의적인 이미지―나의 개인적인 이미지지만―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맹렬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기발한 상상력과 문학에 대한 그 불같은 열정이 읽는 사람을 놔주지 않는다. 설령 그 안에서 가학적이며 얼음같이 차가운 조소가 이쪽을 향하는 것 같아도, 훌륭한 문학작품에서는 그것이 불쾌할 수 없다.
 아니, 보르헤스뿐만이 아니라 거장들의 작품에서는 어떤 끔찍한 눈동자가 페이지 안에 담겨 있어도 책을 덮어버릴 수 없다. 오히려 그 끔찍한 것을 밑바닥까지 마주 보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에 담는 진실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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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장과 문장들의 호흡이 매우 짧고 읽기에 편리하다. 내용 자체는 이렇다할 특이성이 없지만 사건들을 엮고 적절한 대목에 등장시켜 역겨운 불행과 끔찍한 고통들을 한낱 우스개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 기술은 몹시 교묘하고 참고할만 하다. 본문이 진행되는 내내 활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그것이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미니멀리즘한 문장에 의하여 희화화 되어버린다. 그것이 다소 과도한 경향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과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아이러니한 코미디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삶에 대한 순진한 긍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노골적인 경험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에 빠져버리는─그 회의마저도 마지막에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대한 회의'로 내버려지고 말지만 말이다─ 내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책 자체가 이야기의 진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체념을 학습한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의문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짐작 했듯이,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의 불행들을 일주한 캉디드와 그의 일행들은 더 이상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지독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대가로 권태를 얻었고, 권태를 잊기 위해 노동을 하며 존재의 목을 가까스로 축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캉디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치명적인 믿음과 기대의 이름인 '낙관주의'가 가끔씩 발작하는 의문처럼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는 설탕에 절인 레몬을 입에 넣고 밭을 갈러 나가야 한다.

<마르틴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캉디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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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첫날과 이튿날 쉴 새 없이 400쪽 가량을 읽어냈는데 잠시 덮어놓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아차 싶어서 일주일만에 나머지 100쪽 가량을 읽고 보니 독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몸통이 썩뚝 잘려나간 느낌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고 야옹야옹 울어대던 고양이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물독에 빠져 몇 번 헛발질을 해보다가 체념하여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운운하다 담담하게 죽는다. 이것은 근대의 인간에게서 죽음을 의식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짐승마저도 인간에게 물이 배면 자살을 본다. 책 맨 뒷장의 작가연보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퍽이나 아픈 인생을 살았다. 비록 병으로 죽었으나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는 개인의 죽음이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자살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학자나 지식인, 혹은 작가나 예술가라는 족속들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생물 실격.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 짐승이 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닮은 짐승이란 보고 있으면 너나 나나 처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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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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