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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귀향

글/에세이 2021. 1. 28. 21:21 |

문명과 귀향


 노르웨이의 바르그 비케르네스(Varg Vikernes)라는 음악가는 교회를 세 채 불사르고 사람을 죽였다. 그를 소개할 때 음악가라고 해야 할지 범죄자라고 해야 할지 조금 망설였으나, 결국 음악으로 생계를 해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음악가라고 했다.
 바르그의 본명은 크리스티안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기독교식 이름을 가진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전통적인 북유럽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첫 음반을 낸 1992년 전후에 바르그는 적어도 세 채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중 하나는 노르웨이의 문화유산이었다.
 음악가로서 여러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모든 밴드가 북유럽의 악마주의 서클에 관련되어있었다. 바르그는 이미 이너서클(Inner-circle)의 간부였다. 그때 그는 같은 간부였던, 유로니무스라는 기타리스트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심문 때 바르그는 자신의 범행동기를 "유로니무스가 악마의 일을 하지 않고 명령만 내리는 가짜 악마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방화나 살인 등 자신의 범죄에 대해 단 한 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야성을 말하기 위해 문명에게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래서 '문명'이 주는 공포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주변 환경에 공포와 경계를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야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길이 난 듯이 곧장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생각이 있었다. 그르니에의 『섬』 서평에서 언급된,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이지 않고, 대지가 뜨거운 사막과 파도로 넘쳐흐르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서평의 문장대로라면 <태양과 바다와 밤들이 바로 우리의 신>인 지중해 기슭에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내가 모르는 태초의 야성이 깃들어있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쓸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생각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계속하여 그들에게 배워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배우기만 해야 한다. 그런 입장에 놓여있다. 내가 온전히 알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더라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을 그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하기 위해 흥분한 진리들>이나 문명 따위는 기피하며 냉소하는, 그런 황금빛 태양의 자손들에 대해 나는 쓸 줄 아는 것이 없다.
 벌써 문장이 현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이 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내가 '그들'에 대해 쓸 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들의 영혼에 대해 공감하지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신기루와 같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문장도 환영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써야 할 것은 좀 더 간단한 것이다. 지중해의 빛나는 야성은 모르겠다. 그러나 문명에 대한 공포가 어느새 깊은 증오와 하나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그럭저럭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먹구름과 높은 빌딩들이 툭하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도시에서 자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진리가 '살인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지성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는 쓸 수 있다.
 맨 앞에서 설명한 바르그 비케르네스라는 남자를 나는 단순한 악마숭배자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하면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기독교라는 것이 사회의 근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근엄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심판자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다. 기독교기반 사회에서 크리스티안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사람이, 선조들처럼 이름을 바꾸고 ‘악마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그저 선과 악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귀향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오래된 야성―이라고 믿어지는 것―으로 귀향하고 싶었다. 개들의 이야기지만, 개들은 마음이 공포에 사로잡히면 짖는다. 그래서 작은 개일수록 더 잘 짖는 것이다. 늑대처럼 커다란 개들은 웬만해서는 짖지 않는다. 싫어할 만한 짓을 해도 표정근육조차 없는 그 얼굴로 불쾌한 눈매를 하더니 발을 쑥 빼고 저쪽으로 터벅터벅 가버린다. 자신만만한 것이다. 온몸이 근육으로 단단하고 자신의 이빨이 얼마든지 상대를 물어뜯어 죽일 만큼 날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란 놈들은 인간을 닮아서인지 강할수록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라는 말을 써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작은 개다. 그것도 인간이 애완용으로 쓰기 위해 교접작업을 반복해 만들어낸 기형 소형견이다. 사방팔방이 자신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괴물과 위협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하늘의 법칙조차 치명적인 학대로만 느껴진다. 미친 듯이 짖어대며 자신을 속이고 적을 위협하려 하지만 우리의 이빨과 근육은 너무 나약하다.
 이 작고 연약한 마음으로는 세상이 온통 폭력과 무차별의 구렁텅이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이 세계가 바르그에게는, 덩치가 산이나 구릉 같은 거대한 늑대들이 수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가운데 자신만이 새끼손가락 크기의 살덩어리인 공포의 세계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세계라고 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시련이나 원죄라는 단어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보복, 오로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보복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운 가장 모독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는 악마이고 사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를 위한 변명 같은 말을 하면서 나는 궁금한 것이 있다. 길을 가다 보면 갑자기 건물 위에서 누가 벽돌을 던질 것 같은 공포.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낯모르는 사람이 날붙이를 들고 덤벼들 것 같은 공포. 골목에서 담배를 피울 때 술꾼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공포.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더니 느닷없이 경찰이 넘어트려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는 법의 집행을 당하리라는 공포. 길가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명백한 증오와 경멸…….
 철저한 아스팔트와 규범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문명화되었다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내가 알기로 야만과 야성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더 교묘하게 숨겨져 우리 작은 의식들을 위협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귀향하고 싶은 것이다. 차라리 태초의 야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바르그는 늑대가 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개종 당해 나약한 개가 되기 이전의, 산 같이 크고 농장의 암소를 물어 죽이는 늑대 말이다. 틀림없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Varg는 스칸디나비아어 시절부터 ‘늑대’라는 뜻이었다니까 말이다.

 

 

 어떤가, 자네. 세상에 있었던 적도 없는 사람의 범행은 예술이지만, 이렇게 되면 자네도 나도 위험하지 않겠나. 응, 담배라도 피우고 가게. 혼자 있으면 무섭거든.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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