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들을 공개하겠다. 내 정신을 하인이자 노예로 굴복시키고 스스로 손가락마다 족쇄를 걸게 했던 어느 끔찍한 시간을, 더 이상 끔찍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박살을 내고 삼켜 소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고뇌와 사유가 아니라 완전한 개방이며, 원래 내 것도 아니었던 자아를 떨어트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돌아가게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개자식에 대한 증오도 증오가 아니게 되고, 개자식이라는 호칭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본래의 낱말이 되어버릴 것을 나는 확신한다.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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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기록/생각 2023. 3. 26. 07:18 |

 그는 정오 즈음에야 늦게 일어났다.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 커피를 끓였다. 커피가 다 끓었을 때 그는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의사는 카페인을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몸이 몹시 둔해진 느낌이었다. 걷는 속도도 덩달아 느려지는 바람에 3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 손잡이를 쥐려다가, 곧바로 이것은 자신의 집 현관문이 아니라고 알아차렸다. 한층을 더 올라가 문을 열었다. 싱크대에 올려놓은 커피는 약간 식어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는 굳이 소리내어 말했다. 잠시 서 있다가 그는 잔에 담긴 커피를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자신이 모종의 병에 걸린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딱히 어딘가가 아프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가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났다.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에 북풍이 부는 것처럼 정신이 산만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에서 깬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되는대로 적어서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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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결과

기록/생각 2023. 2. 4. 03:38 |

 나는 쉽게 내가 쓰는 작품에 동화된다. 문제는 내 작품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가공물이라는 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기억들 중 인위적으로 덮어 씌워지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것은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쓰는 소설과 너무 밀접한 나머지 작품을 쓰는 내내, 계속하여 자기자신을 가공하고 갱신한다. 끔찍하게 우울한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더 많은 항우울제를 삼키게 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바보 같은 보헤미안이 된다. 나에게는 확고한 자기자신이 없다. 그로 인해 상상력은 현실의 껍질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은 제외하고,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이다. 없다. 내게는 명백한 호오가 없다. 쾌락과 고통도 생물적인 반응의 영역에 머무를 뿐, 좋고 싫다는 가치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라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고 글로 쓰는 일을 그만둔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그간 머릿속은 점점 탁해졌다. 과거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미래는 확률과 수치조차도 되지 못한다. 지금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생명력은 힘이 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살고자 하지 않아도 생명은 엄청난 완력으로 살고자 한다.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듯이 살아왔다. 혹은 살고있다. 무언가 전환점이나 원동력이 될만한 것을 찾아야한다고, 다만 염불 읊듯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

 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왔다. 담배나 약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알고 있고 버릇처럼 실행해왔다. 결국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십 수년간 방치되어있던 이상하고 참담한 현실이다.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불합리한 방식 덕분에 나는 대단한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야겠다. 거대한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겁이 많은 개는 짖기라도 한다는데, 나는 짖는 것조차 두려워 내 모든 힘을 스스로의 숨통을 눌러놓는데 쓰고 있다. 원한이야 많지만 그것을 위해서 행동할만큼 나는 자신을 존중하거나 살피지 않는다.

 계속 밤에 깨어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낮이 두렵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두렵다. 기피하고 싶고, 그들로부터 격리되고 싶다.

 글을 쓰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실이 끊어졌다. 이 기묘한 길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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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

기록/생각 2022. 11. 3. 19:08 |

Beat


 술에 손도 대지 않았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고 오히려 술잔을 들이킬 때 뇌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생활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끔찍하게 화가 난다. 그럴 때면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내가 오늘 태양이 뜨는 것에 대해, 혹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 대해 동의한 적이 없다고 울분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 해는 떴고 나는 잠에서 깬다. 나는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서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지만 그런다고 무언가가 변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죽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난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은 인간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보다 나은 것이다. 그따위 생각을 하다 보면 바보처럼 웃음이 나온다. 나는 심지어 링컨이나 뉴턴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다. 우리는 생명체이고 어쨌든 그들은 모조리 죽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어디에 술병을 감춰뒀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감춘 술병을 집안의 누군가가 다시 감췄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체내에서 다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장난감을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온 집안을 뒤지며 서랍과 찬장 따위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그러나 말해둬야 할 것은,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나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다. 다만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지 않으면 현실에 내버려져있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 견딜 수 없을 뿐이다. 만일 내가 비참하기를 선택한다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술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비참함이라는 단어는 과소평가 되어있다. 나 홀로만 괴롭다는 문제가 아니다. 고통밖에 느낄 수 없다면 사람은 주변에 고통밖에 흩뿌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게 음주는 인도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지 간에, 나는 내 술병을 찾을 수가 없었고 밖에 나가 술을 사올 수도 없었다. 돈도 없을뿐더러 거리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잊어보려고 3시간 정도, 20년 전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어느 정도 목적한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내 방에서, 이 건물에서, 이 도시에서, 이 행성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공허한 감정만 몰려왔다. 약 5년 전만 해도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이프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곤 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출혈이 일어나면 엔돌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안정된다는 의학 정보를 분명히 어딘가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내 몸에 칼자국을 내는 짓은 그만두었다. 아마 정신과 처방 약물이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자해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내 머리통이 정신을 위한 편안하고 안락한 거처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허하고 비참―이 단어를 쓸 때마다 오해받을 가능성에 대해 반사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무슨 상관인가, 저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하며 은연중에 몹시 화가 나 있다.
 결국에 나는 리튬과, 클로나제팜, 인데놀,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알약들을 삼킨다. 아무 음악이나 틀어놓는다. 내가 사용하는 스피커는 카시오페아 음향에서 만든 나쁘지 않은 제품이다. 중고품이라 여기저기 뜯겨나간 파트도 있지만, 음향과 관련된 부품은 아니니 별 상관은 없다. 그리고 자리에 눕는다. 책을 좀 읽다가 머릿속이 멍해지면, 혹은 중추신경 기능에 타임 래그가 발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가끔 운이 좋으면 감은 눈꺼풀 안에서 음악이 색깔로 보이는 공감각 현상을 겪기도 한다. 대체로는 그냥 쓰러진 채 사지가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지금 집안에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될까 공상하다가 의식을 잃는다. 눈을 뜬 뒤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고 무슨 일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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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기록/생각 2022. 11. 3. 01:40 |

一日


 오늘도 폐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침이 멈추질 않아 잠에서 깼다. 오후 1시였다. 한동안 콜록거리며 이불 위에서 온몸을 뭉개다가 일어났다. 세수를 한 뒤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11월이라서 대낮인데도 바람이 쌀쌀했다. 나는 골목 앞에서 담배를 꺼냈는데, 마침 돗대였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일 것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돗대를 피운 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믿는다.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 즈음, 어느 날부터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새 담배를 개봉할 때마다 한 개비를 거꾸로 꽂아놓고, 나머지 담배를 다 피우기 전까지는 손도 대지 않는다. 내 나름의 점(占)과 같은 것인데, 사실은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게다가, 만일 하루에 한 갑 이상씩 담배를 피운다면 매일이 운수 좋은 날이 되리라는 문제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믿기로 했다는데 누가 굳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여하간, 기분 좋게 담배를 빼 물고 있는데 뜬금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마 전날 시집을 읽다가 잠들었기 때문일 것인데, 십몇 년 전에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ㄱ모 씨에 대한 기억이었다. 하필 어제 읽던 어느 여류작가의 시집 옆에 ㄱ모 씨의 유작이 꽂혀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19살이었다. 나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지인의 지인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무슨 여자관계 때문인지 가족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우울증 때문에 죽었다고 들었다. 즉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니, 열차에 치여 죽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명백하게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 ‘행운의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만일 그도 나와 같은 사소한 습관이 있어서, 그날 아침에 돗대를 피웠더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빌렸던 돈을 하루 만에 모조리 갚고 철로 위로 달려가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을까? 적어도 돗대를 피우지 않은 날로 자살을 유예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별다른 맥락도 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나는 그와 실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유작을 한 권 가지고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은 그에 대해 길게 고민을 할 정도로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십몇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타르와 니코틴 따위가 허파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난 다음에야 졸음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야 하루가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ㄱ모 씨의 유작을 꺼내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불을 발로 차 한쪽으로 밀어놓고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도 이렇다 할 계획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깨어나고서부터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베란다로 가서 플라스틱으로 된 커다란 술통을 꺼내왔다. 직접 담근 매실주가 든 통이었다. 통을 들고 기울여 머그컵에 가득 따르고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시자 텅 빈 위장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실상 수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다를 것도 없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아침 약을 술과 함께 삼켜버리고 컴퓨터를 켰다. 작업용으로도 쓰고 오락용으로도 쓰는, 오래된 데다가 얼마 전부터 자꾸만 모니터에 이상한 명령어가 떠오르는 고물이었다. 키보드 옆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문뜩, 재밌는 작품을 쓰기 전에는 어지간하면 죽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19살 청년 같으니, 자살할 날은 언제든지 다시 정할 수 있었을 텐데.
 매실주를 다 마신 뒤에 나는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다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이제 정말 뭐라도 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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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오전 3시

기록/생각 2021. 8. 13. 03:27 |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사람이나, 세상에는 슬프고 괴로운 일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은 전혀 불행하지 않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신이 불행해야만 한다는 환상과 강박에 잡아먹힌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행한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상처나고 뒤틀린 세계관에 남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부단히 노력한다. 어찌보면 그들 자신이 불행의 늪에 잠겨있다고 믿으면서도 삶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란 그것 뿐이다. 그들에게는 수동공격적인 악의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이해도, 치유도, 자기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도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불행해야만 한다고 광신하며, 그들의 신인 비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오로지 증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려는 병든 의지로 가득하다. 홀로 종교심판관이 된 그들은 추악하고 혐오스럽다. 불행과 비극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선도 치료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악성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희극 무대에서 외로이, 꿋꿋하게 비수와 이를 동시에 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불쾌하면서도 더 없이 우스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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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냐, 나는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북인도에서 수행에 힘쓰고 있는지, 행자 생활을 마치고 비구니계를 받았는지, 혹은 어떤 이유 때문에 러시아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도 말입니다.
 사실 당신에게 연락을 하는 일 자체는 쉬운 것이었습니다. 내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직도 당신이 적어준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으니까요. 그러나 알다시피 나는 단 한 번도 이메일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칠불암의 주지 스님께 전화를 건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정확히 무언가를 바라고 전화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내가 맨정신일 때 절대로 하지 않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여하간에 나는 두 번 전화를 걸었고 주지 스님께 똑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수행에 힘쓰고 있는 중이며, 그렇기에 징월 거사가 자꾸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7년 넘게, 나는 당신에게 연락할 생각을 완전히 접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출가할 의지를 품었을 때 당신은 내게 의견을 물었지요. 자주 그 생각을 합니다. 칠불암의 본당에서 조금 내려가 얕은 계곡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대화했습니다. 네댓 개월 동안 우리는 함께 전국의 산사를 모두 보러 다녔었지요. 마침내 칠불암에서 당신이 출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나는 사실 그리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처음 당신을 만난 곳이 경북 봉화의 산사 아니었습니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나는 혼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 투명해서 그 안에 자리 잡은 영혼까지 전부 보이는 것 같았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눈동자의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내 오랜 친구 앤드류의 눈동자도 당신과 비슷한 색깔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누가 보아도 사바세계에서 고통과 체념에 발버둥 치며 사는 인간의 눈입니다. 그러니 내가 놀라고 심지어 공포까지 느꼈던 것은 당신의 눈동자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어떤 낯선 것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그때 나는 가능하면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났던 산사에서는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 주지 스님과 나밖에 없었던 탓에, 스님은 내게 ‘아냐의 절 생활을 가까이서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대화하고, 항상 둘이서 울력을 하고, 산길을 산책하고, 공양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어느샌가 나는 당신의 눈에서 비쳐 보이는 낯선 그 무엇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늘 고요하며 침착했고, 얼굴에서는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조용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7년 전 그 시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면서 처음 맛보는 행복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신과 전국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곁에 당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망이 잊혀지는 듯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다 당시에 썼던 수첩을 찾아냈습니다. 감상적이며 과장된 표현들이 가득 써 있는 것이 낯부끄럽기도 하지만, 수첩의 페이지 중 일부를 이 편지에 붙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리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갑자기 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에게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이런 것이 내게 허용되는 것인지 의심했다. 나는 내가 망가진 인간일 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발리움과 벤조디아제핀 따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고통이 예전만큼 저주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가 반대의 것, 이를테면 숭고한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느 의사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그녀가 알려주었다. 나는 지금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예전에 나는 태양 아래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물들의 형태가 명백히 드러나는 대낮에도, 나의 눈은 그림자에 가려져 절망과 캄캄한 어둠 속만을 떠돌아다녔다. 나는 내가 괴물이라고 믿었다. 아는 것은 고통뿐이고, 주변 사람들마저 고통스럽게 만드는, 역병 같은 존재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우나 위협도 공포도 느낄 수 없는 빛을 발견했다. 나의 영혼의 살에는 불현듯 피가 돌고, 내 병든 심장에는 열정이 방망이질 친다. 나는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꿈이고 내가 깨어나 버린다면, 나는 더이상 그 어떤 할 말도 없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도 나도 몰랐겠지만, 아냐, 당신은 내게 우상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출가한 후 나는 7년 동안 그 어떤 여자와도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의무나 금욕적 생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런 의욕이 없었습니다. 다시 칠불암의 계곡에서 했던 얘기로 돌아가죠.
 당신은 내게 출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계곡에서는 투명하고 빛나는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가끔 물거품을 튀기곤 했습니다.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나는 더 이상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외로, 충격적인 것들이 가장 먼저 잊혀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나는 그때 머릿속에서 떠올라 입으로 튀어나온 몇 가지 말들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해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을 걷겠다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남녀와는 달리 육체관계를 맺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빚지고 있지 않고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요. 우리가 서로의 육체로 한 일이라고는, 석양이 질 때 대청마루에서 손을 포개고 하늘이 완전히 밤으로 뒤덮이기를 기다렸던 것이나, 매일 몇 시간씩 산길을 돌아다니며 아이처럼 장난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당신이 나의 연인이었다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친구나 도반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적 관계를―당신도 나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가진 상태였다면, 나의 이기심을 위해 당신이 출가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요.
 아무튼 당신은 칠불암에서 출가하기로 했습니다. 삭발이 예정된 바로 전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짐을 싸 들고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의정부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모조리 신문지로 막고 2개월 동안 거의 먹지도 밖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궁상을 떨며 안 그래도 적은 체중이 5~6kg이 더 빠지고 피부에는 곰팡이 냄새가 배었습니다.
 벌써 7년이 넘게 지났네요. 당시에 쓰던 수첩의 마지막에는 마치 스스로에게 선언하기라도 하듯 ‘꿈은 끝났다.’라는 문장이 볼펜으로 꾹꾹 찍어눌러서 쓰여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꿈이었는지조차 모호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었던 반년이 꿈 같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편지는 어디로 발송될까요. 당신에게 이 편지가 닿든 그렇지 않든, 나는 단 한 가지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기나 할지, 찾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하더라는 사실을 당신이 가르쳐준 것 말입니다.
 다만 아직도 안타까운 것은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안나야리기나’라는 첫 부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중간 이름도, 성도 전부 기억 속에서 흩어져버렸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마지막 남은 당신의 이름마저 앗아가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그 망각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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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회의주의

기록/생각 2021. 7. 18. 21:47 |

 내가 처음 글을 써야만 한다고 느꼈을 때, 그 이유는 내게 어떤 불세출의 재능 따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히려 반대였다. 문학사에는 이미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걸작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게 가장 큰 문학적 영감을 준 천재들은 벌써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유산을 남긴 채 죽어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나의 피라미드를 짓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피라미드를 기어 올라가는 것 말이다.
 문젯거리가 될 수 있는 사고방식이지만,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현대문학은 단 한 번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현대를 근대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당연히 내가 쓰는 글들도, 쓰게 될 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어떤 철학적 화두에도 진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천 명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그런 화두에 대해 수천 개의 시각으로 접근한 후에 비로소 나는 딸려나온 탯줄처럼 세상에 엎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직업이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고, 나는 거만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옛날 책을 즐겨 읽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가들은 단 하나의 소재,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몇백 년이나 자가복제로 생존해왔다. 단 하나의 소재란 인간뿐이다. 인간의 동의어는 세계도 될 수 있고 우주도 될 수 있다. 단지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는 시대와 공간을 비틀어가며 끊임없는 말놀음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언어란 인간이 멸종할 때까지 함께 변화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분히 회의주의적이지만 허무에 대해 공허하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종말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시대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절대 종말을 맞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계속 자가복제를 반복하며 언어와 인간이 사라지는 날까지 '오래된 글귀들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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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인간애 뿐인 것이다. 세상이 진흙탕인 것은 단 한 번도 변한 일 없고 사람들은 똑같은 고뇌만 반복하다 돌아갔다. 그러니까 인간애인 것이다. 일본의 키가 작은 시인은 역전에서 헤매다 남고생 한 명을 붙잡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냈다고 한다. 나는 외로운 사람이오. 아마 그 거동수상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극 같은 것을 말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변하는 것도 없고, 이미 각자의 비극 속에서 나름대로 살고 있다. 나불나불 떠들지 않아도 어차피 다들 살아가고 있다. 항복하는 이들은 항복하면 그만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그렇지 않은대로 패배하면 그만이다. 결과가 전부라고 나름 멋을 내며 말들을 하지만 따져보면 모든 생명의 결과는, 결말은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 결과라는 것은 단 하나의, 모든 것을 수렴하는 평등뿐이다. 그렇기에 결과가 전부라면 모든 이들은 지저분한 허무주의자밖에 될 것이 없다. 살아있으면 그만이다. 한 평짜리 감옥에 있든 초원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든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뫼르소는 감방 안에서 벽돌들의 모양을 더듬고 짚단 밑의 신문조각을 찾아내 '드넓은 세상'이라는 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알아차렸다. 살아있으면 패배할 때까지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이미 인간이라는 뜻이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도 되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 살면 그것으로 할일은 다 하는 것이다. 조르바도 영웅이고 지하생활자도 영웅이다. 그러나 딱히 영웅이 될 이유도 없다. 캉디드가 비극으로 끝났다고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사람은 사람이고, 어차피 쓰러진다. 뭘 하든 좋다. 아나키즘이나 도덕적 불구 같은 용어랑 연관시키고 싶지는 않은데, 어찌 될 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이다. 삶을 사랑할 수 있으면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단어의 범위를 무자비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뭐든지 허용되는 자유는 치명적이지만 사실 보편적이고 선험적이다. 어떻게 할지야 각각 사랑의 의의에 달려있고 금지되는 개념도 없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인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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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오른 어깨를 뽑아 가방에 넣는다
지퍼에 낀 연골을 구겨 넣을 때
어디선가 설렁탕 냄새가 났다
한쪽 소매를 펄럭이며 나서는 비장한 외출
자신의 처절한 절연과
오른팔의 가격에 대해 따져볼 때
사람들의 생각은 아, 저기
외팔이가 가는군, 그 정도로 끝나며
그것으로 충분하기도 하다
전철의 노약자석에 그는 앉지 못한다
노약자의 의미에 대해 바쁘게 생각하는
짧은 공황이 마침표를 찍을 때
벌써 그는 출판단지에 어설프게 발을 디딘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결심하며
빌딩의 4층으로 올라가
어느새 편집부장이 된 박씨를 부른다
가방을 내밀고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스스로 다짐하는 말을 내뱉으면
부장은 지퍼를 열고 뼈 냄새가 나는 팔을 살펴본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확인하는 즉시
외팔이의 어깨는 연체동물처럼 돋기 시작한다
그야 그렇지, 이것으로
끝일 리가 없지
두 팔을 휘두르며 걷는 출판단지
새들이 조롱하듯 노래하고
하늘은 징그럽게 파랗고
무너질 기색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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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말이에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니, 미학에의 갈구니 하는 것은 모조리 거짓말입니다. 그럼 왜 평생을 이토록 치열하게 해왔느냐고 물으시겠죠. 우선은 제 저주받은 성질 중 하나에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실망을 사는 일에 병적인 공포를 갖고서 살아왔습니다. 예술을 하겠다고 했으니 이제 정해진 길은 하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나 이것은 영원하고 추악한 동기입니다. 제 안에서 날뛰는 광폭함이 펜이든 페이지로든 대신 날뛰게 하겠다는, 비겁하고 비열한 동기였던 것입니다. 이 나이나 되어서 아직도, 저는 중학생 때의 일기 한 부분을 뇌에 칼로 새긴 것처럼 기억합니다. 예술가와 이상범죄자의 차이가 얼마나 애매모호한가라는, 돼먹잖은 주제를 가지고서 하루 새벽을 꼬박 종이 위에서 날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광증을 왜 아직까지 기억하겠습니까. 예술가라는 것은 찬란하고 빛나는 이름인데, 저는 결코 그것이 저에게 오거나, 혹은 제가 잡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동기부터가 불순하고 비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누군가에게도 실망을 사고 싶지 않아서, 저는 계속해서 소위 치열하다는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가 지금까지 존경해왔던 모든 선생님,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 등의 고고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가 허가되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광기를 병증으로 바꿔 써도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요? 특히 이러한 의학과 과학의 시대라면, 광기보다는 병증 쪽이 치료나 구속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저 자신에게 중요하기나 한 문제인가요? 그런데 고골의 광인일기가 어떻게 끝났죠? 누구의 코에 사마귀가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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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의 밤
나는 너를 생각하며 웃고 있다
너는 분명히 불행의 한가운데에 있으리라
내 하나뿐인 사랑
너는 증오로 내게 칼을 휘둘렀고
나는 시뻘건 흉터 자국을 되갚아 주었다
분명 이곳에서 가장 먼 곳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너는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왕으로 추대받아 살고 있다
내 입술 자국이 차갑게 얼어붙으리라
내 입꼬리에 고드름이 맺히리라
단 한 번이라도 용암처럼 고함질러봤으면
나의 추태뿐인 축제에서
사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를 만나러 하루하루 파란 알약을 모으는 나를
너는 비웃을 리 없다, 고통에 비명 지르고 있을 테니
웃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내가 불행하다고는
아무도 추측하지 못했다
거짓말의 혀와 미로의 뇌간 사이로
나는 전부, 훌륭하게 속여넘긴 것이다
나 자신마저도! 내가 뱉는 모든 말은
쓰는 모든 글은
짓는 모든 표정은
거짓말이요 허구요 픽션이요 주르륵 앉은 관객들과
연기자인 나 자신을 속여 벗겨 먹는 사기에 불과하니
나는 너를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말했다
내 축제에 사랑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이다.

땅을 보는 건 짜증이 나. 맨정신일 때는 무섭지. 나의 작은 방에서 벗어나 인생을 모조리 겪으려고 태평양도 건너가 나는 작은 방을 빌렸지. 차라리 술에 있는 대로 취해 황색 인종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거리에 엎어졌어. 그러나 하늘에라고 돌아갈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지. 어디에 있건 나는 헤매며 쫓기고 쫓아다닐 뿐이었는데, 누군가가 쓴 글은 이렇게 시작하지. <나는 태생적으로 방랑자이다.> 방랑자라면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할 것을. 공허에도 날 부르는 자리는 없고 내 의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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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에게 별 다른 고민도 없이, 지금 당장 죽을 이유까지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다. 전부 거짓이었다고는 말하지 못 해도, 7할 정도는 거짓이리라.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이 시간에 깬 채로 스스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는 방금 삼킨, 촌극 요소가 너무 짙은 알약이라는 것들이, 언제나 내일을 확신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요

나머지는 가장 쉬운 답을 찾고자 하면 사실 죽음 말고는 그 어떠한 답도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조하는 중추신경계란, 굳이 비유를 들자면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저주 같은 악덕한 짓을 했기 때문에 저주에 걸리는 일이다. 아무도 웃는 사람 없는 광대놀음이다.

 

가면이야, 자네, 페르소나야.

 

<일어나! 사건이야! 요조의 대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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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직 목소리가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으려고 했다.
그것은 쓰고 더러웠지만 나무둥치를 물어뜯으며 나는 희열에 울부짖었다.
썩는 나뭇잎 같은 담배연기와, 막 태어난 마귀처럼 나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수치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몰랐다. 고통과 망각의 저녁, 기쁨, 새벽녘의 무궁무진함.
회한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단어였다, 모든 것을 안다고 나는 크게, 하늘을 모독할 만큼 소리쳤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대양의 눈으로 보았다. 나는 끝도 없이 웃었다! 수년 동안, 십여 년 동안.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저주할 자신마저 넘쳤다.
풀처럼 수액을 마시고 들판에 술병을 깨트리고, 어떤 때는 가장 가난하고 가엾은 자들에게도 던졌다. 그 병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서 돌아올 것을 확신하면서!
나는 돈 많고 자신감 없는 자들 대신 더 큰 죄악을 저지르기 위해 낮은 것을 학대했다, 내게는 단 한 병의 소주를 살 돈이라면 있었으니까.
나는 죄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낙원의 인간처럼.
그러나 병이 내 가장 안쪽에 있는 것들을 썩히기 시작했다.
돌과 소금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나의 목소리는 멈췄고 천상의 악랄한 손톱이 내 피부를 찢은 듯 눈이 수없이 열려버렸다.
대지의 찬란하고 넘치는 피폐함이 가시처럼, 창처럼 나의 눈들을 찔렀으며
내가 그리도 사랑하던 흥청망청한 세상은 노린 듯이 나의 썩은 내부로 넘쳐흘러 들어와
부패한 정신은 마침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해하라! 고해하라! 죄를! 오로지 죄를!
아니, 그래, 고백하되, 나는 절대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내 몸에는 더 큰 상처들이 남기 시작했지.
열린 피와, 넘치는 고름과, 깊고 흉한, 세상의 농담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흉터들.
자조와 자살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이를 악물었지, 이제는 이빨마저 흔들리는구나!
축제 같던 악덕과 위악을 돌아보면 나는 즐거운가?
이제 즐거워할 정신조차 남지 않았나?
문학이라니, 그런 것을 도대체 누가 원했는지,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입술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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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나더러 냉소적이라고들 하지만
냉소보다는 오히려 익은 게딱지처럼 시뻘건 사람입니다, 라고
텅 빈 방에서 나는 손을 내밀며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대사가 바닷가 사금파리처럼 보잘 것 없어
미간을 구기며 몇 번이나 문장을 손봤더랬다
냉소적이라고들, 그러나 게딱지처럼 시뻘건……
내민 손을 늘어뜨리고 4시를 가리키는 시계와 눈 마주치고
너무 이른 시간에 내 방에서 길을 잃었다
이불 위에 무너질 수도 의자에 파묻힐 수도 없는
뭔가 할 말이 있어 우물거리는 나의 몸뚱이

창문엔 외풍 들지 말라고 거울처럼 은박지를 발라 놓았고
벽지 곳곳에는 내 발작의 파편들이 적혀있고, 이것은 분명
이사 갈 때 돈 문제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게딱지는 참 소름 돋게 시퍼런 것이지

내 안의 뜨겁던 것들은 어느 겨울로 숨었는가
몸이 푸른 갑각류들은 무슨 색의 심장을 가졌나
4시의 시곗바늘에 나는 입이 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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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1

기록/생각 2021. 2. 21. 21:37 |

무슨 이야기를 쓰든 불쾌한 글을 쓰고 마는

불쾌한 자신이 불쾌한

불쾌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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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기억

기록/생각 2021. 2. 2. 19:28 |

 저주스러운 놈들, 저주받을 놈들! 중학교 3학년 여름에 선생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수련회 참석에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종이쪼가리들은 우리 학생들이 서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부모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3학년 모두가 그곳에 갔을 것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늘 어설프게 웃는 얼굴인 불쌍한 성배 같은 아이들만 빼고 말이다.
 모두가 서명을 했다. 모두의 부모가 서명을 했겠지. 좋은 곳에 다녀오라고! 다른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학교가 그런 행사를 했다. 더 굳건한 정신과 육체와 감사하는 마음을 육성하려고 말이다. 그런 거라면 무어 어쩔 수도 없다. 교육 정신이란 매 세대 바뀌는 것이니까.
 우리는 수련회 캠프에 나흘쯤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나흘 내내 아주 죽상이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마다 산능선을 뛰고 지치고 엎어질 것 같으면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조교들에게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어설픈 해병대 캠프 같은 짓거리를 강요당했으며 낙오자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혹사당했다. 음식은 거지 같았으며 특히 김치가 전에 먹어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중국 공장에서 대량으로 수입해오는, 여름철 음식물쓰레기 냄새가 나는 그 김치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라는 대로 따르며 모든 일을 비웃고 있었다. 나는 이미 중학교 1학년 초에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혹사시킬 수 있는지 적당히 겪어보았던 것이다. 매일 산길을 60km씩 걸어야 하는데 따라가지 못한다고 초등학교 2학년짜리 꼬맹이를 걷어차는, 그런 모습을 나는 이미 익숙해지다 못해 재미를 느낄 정도로 자주 보았었고, 인간이 공포와 폭력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흥미로운 마음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은 전혀 유감인 것도 저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나의 몸은 오랜 운동과 훈련으로 강철 같았다. 나는 전부 비웃으면서 나흘을 보냈다. 불평할 이유도 욕설을 내뱉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저녁, 그 망할 놈들! 온몸을 육시할 것들!
 그것들은 학생들을 모조리 강당에 모아놓았다. 조교들을 빼면 모두가 지치고 엉망진창이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고 빈틈투성이가 된다. 그놈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었겠지! 그놈들은 그게 직업이니까! 팔을 뜯어내서 그 팔로 뒈질 때까지 두들겨 팰 놈들!
 그 쓰레기들은 우리가 강당에 무너지듯 앉자마자 쓰레기 같은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 거지 같은 새끼들! 그리고 조교들의 대장 격인 놈이 되먹잖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아버지의 뼈 빠지는 노동! 어머니의 희생! 너희처럼 제멋대로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아들딸을 위해서! 눈을 감고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라! 그분들이 얼마나 조건 없이 너희를 위해주었는지 돌이켜봐라!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약하고 정신에 약점밖에 없는 불쌍한 놈들, 너희보다 차라리 소아마비에 정신장애까지 있는 성배가 더 강건한 인간이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려고 들다니, 사이비종교 교주도 너희보단 교묘하겠다. 쓰레기들! 그러는 네 부모는 어느 똥둣간에서 조건 없는 사랑으로 키웠길래 이런 병신을 만들어놨냐고, 대장에게 난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을 놈들!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거짓만 토하는 그 가사가 계속 내 뇌를 뒤범벅에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다. 염병, 난 어느새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이제 발작하듯이 웃기 시작해 그 작년 영어시간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생들 한복판에서 폐렴 환자가 기침하는 것 같이 멈출 줄 모르고 웃으면서,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충혈된 눈으로 그 자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만 쏘아보는 그 상황 말이다.
 조교들이 날 일으켜 강당에서 데리고 나갔다. 차라리 목을 조르고 패지 그랬어, 우상숭배자들, 이단자들, 최면가들, 광신도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저주받을 놈들.
 이미 전교에서 내 별명은 ‘3학년 1반의 정신병자’였는데 너희 때문에 인상이 더 나빠졌어. 많은 친구, 혹은 친구가 될 법한 놈들이 떠나갔고. 아아, 요즘 학교도 그런 행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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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한파

기록/생각 2021. 1. 10. 17:40 |

 날씨가 추울수록 이런저런 모퉁이에 몸을 박고 다니는 것 같다.

 쓰레빠 끌고 담배 태우러 나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날씨가 미쳤나 싶은 전날은 골목으로 돌아오다 왼발 오른발 골고루 벽돌에 처박았다. 한기로 둔해진 발끝을 벽돌 모서리에 찧으니 감각이 참 묘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눈물이 나오도록 아파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다.

 돌이켜보면, 매해 겨울만 되면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다. 어디서 갖다 박았는지도 모르겠고, 샤워할 때야 알아차리는 것이다. , 여름, 가을은 나름 두 다리 짱짱하게 펴고 걸으면서 날만 추워지면 이 꼴이다. 그러고 보니 술 마시고 넘어져서 아스팔트에 얼굴 반쪽 갈아버렸던 것도 겨울 아니었나?

 대체 왜 이럴까. 춥기가 싫어서 몸이 그냥 죽으려고 하나.

 몸만 부딪고 다니면 다행인데 정신에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 추운 날일수록 외롭고 술고파서 사람 만나러 싸돌아다니다가 괜히 누군가의 한마디에 머리부터 깡 소리 나게 부딪치는 것이다.

 주차하느라 늦었습니다. 벌써 많이 취하셨나 봐요.

 이런 소리만 듣고도 기가 팍 죽어서 또 벽돌에 발 찧은 기분이다. 차 가져오셨는데 저만 취해서 죄송합니다. 오시는 시간 못 기다리고 그새 많이 취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사죄할 용기도 없어서 혼자 연거푸 마셔대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의사 말로는 겨울이 되면 신경계도 안정된다고 하더니, 신경계가 안정됐는지는 모르겠고, 몸이고 마음이고 여기저기 나도 모르게 찧고서 아파하느라 추워 죽겠다.

 계절은 겨울이고, 몸은 곳곳이 얼어붙은 듯 푸르고, 마음은 저 혼자서 엄동설한이다.

 요새는 술 마셔도 춥다. 취할수록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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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

기록/생각 2020. 12. 11. 16:04 |

(시라기보단 산문을 행만 나눠놓은 것 같아서 생각 카테고리에 넣는다)

 

겨울 아침


1.
오늘은 월요일이었습니다
화요일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날짜를 세어봤지만
달력은 결국 월요일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잘못 걸린 전화로 잠에서 깨어
몽롱하니 주변을 둘러보자
꽝꽝 얼어붙은 아침 햇살이 커튼 너머로
고체뿐인 좁은 방을 비추고 있었네요

매일 눈을 뜨면 검은 허파가
헐떡이며 그르렁거리는 까닭에
집에 가고 싶어, 하고
잘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맙니다
하지만 갈 곳은 몰라요
하지만 돌아갈 곳은 몰라요

2.
간만에 보는, 아침 햇살 밑의 창동은
사방에 높이 높이 솟은 묘석들 사이
화려한 유령들이 철퍼덕철퍼덕 걸어 다니는
참으로 기묘한 프레스코화 같아
저는 신발을 잘못 신지는 않았나
바지를 두 벌 입지는 않았나……
화가에게 보이지 않도록 슬금슬금
그림자 밑에서 연기를 머금는 것입니다

저녁이 오면 묘석들이 잿빛이 되겠지요
밤이 오면 유령들은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저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성가신 일이야, 그렇지, 중얼중얼 되새기면서요

담뱃불을 끄고 있노라면
발밑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창피해
아아, 눈이라도
내려주지 않으려나
손가락은 공연히 코트 주머니 속을 헤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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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분

기록/생각 2020. 12. 6. 21:44 |

56분


 몇 주간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어쩌면 몇 개월을 그랬는지도 모른다. 심장도 피도 전부 잃어버린 채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들이 극적인 형태로 겨우 떠올랐다. 잃어버린 심장과 피를 다시 짓는 방법이 기억난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3일 전 나는 오랜만에 음반들을 뒤지고 있었다. 근 며칠 머릿속에서 온갖 불쾌한 활자들이 바스락거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좀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왜 하필 음악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려고 한다.
 활자들이 뇌에 들러붙어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는 그 끔찍한 느낌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나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나쁜 책은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는 얘기를, 릴케가 했는지 헷세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격언은 옳은 말이었다. 처음엔 그저 오락소설이란 어떤 형태일까 하고 변덕스러운 호기심이 일어난 정도였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연락이 끊긴 친구가 주었던 일본 오락소설이 몇 권인가 내 책장에 있었다.
 오락소설의 구조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가 끝나고, 결과는 이미 말했듯, 뇌수에 타르를 쏟아부은 꼴이 되었다. 나는 그 엄청난 부작용에 감탄했다. 시야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언어기능이 손상된 것처럼 가족들과 대화하는 일도 힘들었다. 이런 치명적인 게 오락소설이라고 불린단 말인가. 아니면 나 같은 놈만 소위 ‘오락소설’ 때문에 머리가 들쑤셔진 상태가 되는 것인가. 호기심 때문에 인생 망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이것이 그런 예로구나 싶었다. 여하간, 그래서 머리를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좋은 책을 읽을 여유도 없었다. 텍스트라는 것이 아예 머리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음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음반들은 천장에 붙어있는 서랍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다. 내가 찾는 것은 14살 때 나의 음악적 취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밴드 ‘Death’의 앨범이었다. 사실 10년도 전에 음원을 전부 파일로 만들어 저장해놨지만, 그날은 어쩐지 무의미한 행위더라도 앨범으로 듣고 싶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밴드 리더인 척 슐디너의 요절로 인해 마지막 앨범이 된 7집 『The Sound Of Perseverance』였다. 번역하면 ‘인내의 소리’다. 나는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누웠다. 첫 곡의 제목은 ‘Scavenger Of Human Sorrow’, 즉 ‘인간 비애의 청소동물’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 트랙이 끝나기까지 56분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몸이 쭈뼛쭈뼛 솟았다. 내가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은 20살 즈음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독주를 들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의한 이야기지만, 천재들의 작품은 감상하는 이의 자아를 없애버릴 것 같은 기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일종의 정화 같은 작업을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도전정신을 일으키게 한다. 자신의 작품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켜 현실과 환영의 구분이 무의미하도록 만들다가, 작품에서 해방되고 나면 오히려 현실이 가진 선명한 색깔과 그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책을 읽든 음악을 듣든 미술품을 감상하든, 내가 왜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인지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왜 글을 써야 했는지를 나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정신의 병과 점점 약해지는 몸 때문에 아무래도 자꾸만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다. 얻을 것은 없고 상실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않고 죽는 방법만을 찾게 된다. 그런 밤이 되풀이되면, 멈추려고는 하지만 앙드레 지드의 ‘나는 흡족한 얼굴로 완전히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곡해해버릴 것 같다. 끝 간 데 없이 게을러지다가 자신의 존재에도 게을러지고 있다.
 하지만 점점 앙상해지다가 관념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내가 처음에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본명이 혼돈이고 무질서가 차올라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과정만이 질서라고 한들, 나는 그것에 잠수해버리고 싶지 않다. 혼돈의 정체만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 분석하고 적용해서 만사에 조소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떳떳하게 목을 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와 증오로 눈을 돌리는 것은 내 본업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죽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미美를 갈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맨 처음부터 핵심이었다.
 56분 동안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처럼 벌떡거리다가 겨우 기억이 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가슴에 담았던 소설이 『이방인』이었다면, 처음으로 내 가슴에 불을 지른 시는 H. 노바크(헬가 M. 노바크로 생각된다)의 『태양병』이었다.
 분명히 그 시의 시구들은 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우리들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이런 시구들이 내 혈액에 불을 지피지 않았던가. 자신을 향해 증오의 함성만을 외쳐주었으면 한다던 뫼르소의 독백도 그렇다. 만일 그것들 없이 차가운 물리학과 기계론만 있었더라면 나의 자살은 일찌감치 성공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기억나서 다행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혹여 숙명과 같은 대단한 단어와 연결되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써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동기도 있기는 있었다. 최소한 내가 하루에 한 끼만 먹고서 토해버리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행인 것이다. 56분만으로 내 해골을 거꾸로 들어 쓸데없는 것들을 탈탈 털어줄 천재들이 미리 살다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럼 이제 다시 피와 살로 되어 지상에 발 디딘 인간이 되는 것인가, 하면 솔직히 아무 대답도 못 하겠다. 떠오른 것은 내가 글을 쓰려고 한 동기뿐이다. 그리고 굉장히 애매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도 아마 있기는 할 것이다. 정말로 그런 욕망이 있는지는 확언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안의 반송장이 전처럼 펜을 잡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등룸펜. 고등룸펜. 자조밖에 남지 않은 역겨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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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

기록/생각 2020. 11. 18. 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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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


 이렇게 인상만 찌푸린 채, 눈앞의 다이아몬드도 탄소결정체일 뿐이라고 발로 차듯이 계속 살아가는 것인가. 그런 절망이 스스로의 살과 피에게 부끄러워 술을 마시고 울었다. 차라리 무슨 재앙이나 끔찍한 전쟁이라도 벌어져서 내 본성이, 그러니까 평소의 멋 부리는 행태는 내버리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든 살인자들에게 빌붙어 구차하게 살아가든, 그런 본성이라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울었으나 결국에는 내 방 의자 위였다. 뒤늦게 울면서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조롱하듯이 지껄이기만 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 때는 말이야, 그냥 무작정 화가 났지. 무시하고 모욕하고 부수는 짓만 했단 말이야.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느 날인가 영어 시간에 교사가 수업이랑은 상관없는 말을 했는데, 그게 내게는 교사의 수준 낮은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렸나 봐. 내가 발작하듯이 비웃으니까 그 젊은 여교사가 왜 웃냐고 물었어. 그때 뭐라고 했더라. 정말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도대체 학교는 어떻게 졸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저 매일 매일, 보건실로 등교해서 자다가 일어나고, 몇 시간이고 보건교사와 대화하다 마음이 내키면 교실로 가고, 수업을 망쳐놓거나 교무실까지 가서 뭔가를 부수고 다시 보건실로 돌아오고.
 그런데 차라리, 그렇게 무분별하고 그렇게 화가 나있는 놈이라면, 그러면 홀로 취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벽에 낙서를 하지도, 하루종일 음침한 머릿속을 하고서 담배를 물고 있지도 않겠지.
 지금은 그냥 그때의 여교사에게 사죄가 하고 싶어.

 어떻게든 될 리가 없다.

 도봉로 130길보다 불쾌한 동네가 또 있을까요. 담배를 피우러 나가니 연립주택 어딘가에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래도 늙은 남자의 우는 소리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입니다. 골목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흐느끼는 소리는 끊이질 않습니다. 그 와중에 골목 저편에서 젊은 커플이 싸우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여자가 아주 화가 났습니다. 내가 친구야, 연인이 아니라 친구냐고. 키가 큰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멀거니 섰습니다.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저쪽 캄캄한 놀이터에서 또 비명인지 뭔지가 들려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살았던 인천의 어느 골목도, 신정동의 늙은 길바닥도, 신곡동 성당 근처의 언덕동네도 전부 똑같지 않았습니까.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이 이목구비와 눈동자가 익숙했던 일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며 살아간다.

 인생이 숙취와 같구나.

 “그러니까 내가 약을 먹는 것은……”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K의 말을 승훈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생소한 외국어나 화학성분명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 친구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2년 전 만났을 적에 비해 유난히 골격이 돋보이는 K의 얼굴만 초점 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또 죽냐?”
 느닷없이 승훈이 내뱉었다. 그러자 K는 흠칫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웃기 시작했다.
 “멍청아, 자살소동은 중학생 때 끝났어.”
 “안주 좀 먹어. 닭에는 손도 안 대고 몇 잔째냐.”
 K는 무기력하게 아아아, 하는 소릴 냈다. 딱히 긍정도 대답도 아무것도 아닌 소리였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다는 듯 기본안주로 나온 땅콩을 좀 집어먹더니 빈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채웠다. 숟가락으로 잔 바닥을 쳐 섞었다.
 “여하간 공무원시험 합격한 거 축하한다.”
 친구가 내미는 잔에 승훈은 자기 맥주잔을 부딪쳤다. 합격한 것은 1년 반 전이지만, 그때 이후로 K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는 또 원샷을 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빈 잔을 내려놓으며 K가 물었다.
 “아니. 난 3학년 1학기 때 전학 갔잖아.”
 “나는 알아. 전부 연락해서 만나고 다녔으니까. 영운이는 벌써 딸도 하나 낳았다.”
 승훈은 감탄했고 K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제수씨가 아주 예쁘고 친절해, 난 결혼식 때 초대도 못 받았지만, 하고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못 들은 체 했다. 그리고 그는 중학교 동창들의 소식을 한 명씩, 느릿느릿 설명했다. 잔에 또 소주와 맥주를 섞고 있었다.
 모두가 잘살고 있었다. 혹은 그렇게 퉁치는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는 살고 있었다. K는 그 사실이 어쩐지 황당무계하지만 잘된 일이라고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네 일은 어때.”
 승훈의 질문에 K는 또 얼굴을 일그러트리듯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맥주 너무 마셨다.”
 질문에게서 도망가듯 일어나며 그는 조금 비틀거렸다. 그리고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살아있으면 잘 사는 거지, 하고 웅얼댔다.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승훈은 오늘 이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북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13년 동안 생각했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외국을 헤매다녔는데 어째서 북아프리카에만 가지 않았던 것인지 요즈음에야 알아차렸다.
 북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죽고 싶었던 것이다.

 바보 같기는.

 겨울이 무슨 색인지 아십니까? 나는 그 색깔을 칭하는 단어를 알지 못합니다.
 작문이 문학으로 변하는 경계선을 아십니까.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정말이지 그것만 안다면.

 새벽에 길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사방에서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런 공포에 제대로 된 이유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바닥에 나뒹구는 저 시체들의 목소리 사이로 느닷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발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은 위협이다. 그것은 분명히 공포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보면 반드시 악역에게 몰입했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어느 영화를 보아도 그들은 부정당하고 부정당하기만 하다가 패배하고 망각된다는 사실이, 얼굴이 빨개지도록 억울했습니다.

 인디 뮤지션인 가까운 형이 청춘(靑春)이라는 단어는 울림도 한자도 아름답다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별 의미있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것이 사어라고 생각했다.
 가끔 일본이나 유럽의 청춘 소설을 보면 타인의 불길한 꿈을 엿보는 기분이다.
 혀를 차면서 깨어날 법한, 그저 그뿐인 꿈.

 만개한 꽃 위에 서리가 내린다.

 괜한 허세나 거짓말도 없이, 그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 당신이 어둠 속의 빛인지 빛 속의 어둠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짧은 생의 태반을 계속 당신에게로 걸어 내려가며, 아니 걸어 올라갔던가? 여하간 당신이 숨기고 있는 굉장한 것을 찾아갔습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무엇이겠지, 하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또 다른 확신은 그것이 눈앞에 보이더라도 구원이나 충만 같은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그 ‘엄청난 것’을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애당초 그의 어리석은 성질의 증명이었습니다.
 어라, 아무래도 여기가 바닥인 것 같은데. 아니면 꼭대기든지……. 중유(重油) 속에서 잠수하는 감각으로 그는 얼떨떨해 있었습니다. 한참을 헤엄쳐보니 여기는 바닥도 꼭대기도 아니고, 애초에 당신은 그곳에 살지도, 살았던 적도 없습니다.
 그곳은 수 많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당신의 존재를 한사코 맹신하며 쌓은 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꺼먼 기름을 뚝뚝 흘리며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 하고 싶으면 나처럼 하라고. 약을 삼키고 3일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어. 다락방에서 나와보니 마침 퇴근한 친척은 저녁 먹었냐는 질문만 했어.
 안드레아스 탕겐은 몹시 짜증이 난다는 듯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을 하는 듯이 전화기에 대고 외쳤다. 상대가 이미 10분 이상 목멘 목소리로 자신의 비극에 대해 한탄하며 자살계획을 떠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한 한 마디를 믿지 않으니, 백 페이지의 말장난으로 당신을 믿게 만들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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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기록/생각 2020. 11. 5. 23:17 |

언젠가부터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이 생겼다.

그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애당초 난 사고가 폭주하는 것을 피하려고 모든 정책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임산부 배려석의 설치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불만도 없다.

하지만 그 문구 때문이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배려' 였던가.

내가 미친놈인 것이 잘못이다. 내가 정신병질자인 것이 문제일뿐이다.

그 '주인공'이라는 단어 하나가 뇌로 침투하여

맥박이 미친듯이 뛰고, 심장이 구겨지는 것 같고, 머릿속이 온통 헝크러져 생각에 생각에 생각이 날 시꺼멓게 만들고

거기서 눈을 돌려도 하얗게 프린트 된 '주인공'이라는 단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걸음을 빠르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손은 끊임없이 주머니 속 담뱃갑을 돌려대고

길가의 그림자 어딘가에 권총 한 정 떨어져있는 환각까지 어른거리고

뇌수를 저주하고 변연계를 저주하고 대뇌피질을 저주하고

그러나 약을 먹고 눕기만 하면 모든 것이 리셋되고 하루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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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세상의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을 한다면.

당신은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그저 가치없는 삶과 사변의 조각을 떼어내 가치있는 것처럼 호소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호소할 의미조차 없다면, 세상의 진실들이라는 것이 무표정하고 '아름답게' 모든 것을

겪어본 적도 없는 미래의 끝에서 가벼운 한숨으로

증오도 사랑도 불행도 행복도 고통도 쾌락도 똑같은 것으로 만드는 한숨을 뿜어내고 있다면.

나는 웃으면서 출혈할 것인가 인간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떨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날 염세주의자 따위로 생각한다면 칼날의 방향이 반대로 돌아갈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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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4

기록/생각 2020. 10. 4. 18:23 |

 죽음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논리나 이유를 갖고서 그러는 것도 아닌지라, 의학계에서 쓰는 '자살사고'라는 단어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글쎄요,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번 때가 되면 제가 자살할 수 없다는, 즉 항복할 수 없다는 철학적이고 현학적이고 장황한 글을 쓰곤 합니다. 얼마나 지저분하고 끔찍스러운 삶을 살든 오로지 생명유지만이 생물체의 유일한 의무라고, 자기 자신의 뇌수에 박아넣듯이 말입니다. 쓰면서도 늘 어딘가에 논리를 연결하는 고리 하나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받긴 합니다만,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건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짜증스러운 의무를 논리나 신념의 형태로 만들어서 자신에게 들이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존주의의 끝에서 보이는, 변증법이 아니라 차라리 본능이랑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은 반항하는 존재와, 과연 진화생물학이 설명하는 유기생명체의 목적이 통합,기능주의적 의식을 가진 개개인의 정신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싶은 의문 같은 것들은, 그런 것들은 실질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새벽의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도대체 이유도 근거도 없이 머릿속에서 강철의 실타래처럼 사고가 꼬여 도저히 풀어낼 수도 해석할 수도 없고, 나의 나약한 이성은 그것이 과연 무엇에 대한 생각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순간순간 의식이 명멸하고, 마침내 뇌수의 무게가 급증해 두개골과 척추뼈를 부수면서 추락할 것이라는 정신병적인 믿음이 저를 지배할 때, 그런 때에 사실 순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면 자의든 타의 같은 자의에 의해서든 죽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일이 그냥 진행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매번 부엌으로 가 약 15년 전 재래시장에서 샀던 칼을 집어 몸통의 어딘가를 찢습니다.

 아주 불쾌하고 10분 뒤 돌이켜보면 몸에 칼질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이번엔 그냥 경동맥을 찌르고서 끝내버리고 싶습니다만, 매번 이러는 것도 사실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살가죽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피가 조금 배어나오면 마법처럼 머릿속이 싹 정리됩니다. 벤조디아제핀제도 이정도로 효과가 빠르고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자기 살 찢는 미치광이 짓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효과만은 정말 경탄할만합니다.

 도대체 무슨 광기어린 사고에 짓눌렸던 건지 기억조차 희미하고, 갑자기 머리가 가벼워져 직립보행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스럽고 화가나는 상황들조차 어쩐지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뭐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이르면 매주, 늦으면 매달 반복되는 그 머리통의 질량이 붕괴하는 것 같은 경험 말입니다만, 결국 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절하게 죽고 싶지만 처절하게 죽고 싶지 않고, 처절하게 살고 싶지만 처절하게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고 근본적이고 해답따위는 나올리가 없는 문제입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니 아니마와 아니무스니 그런 건 의사들에게나 필요한 용어입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모든 이들이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이건 딜레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스스로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인간을 만난다면 전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요. 반대의 경우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테니 만날 수도 없을 것이고요.

 얘기가 점점 이상한 곳으로 새는 것 같은데, 몇번 반복한 말입니다만 저는 자신의 자기파괴적 행위들을 정당화할 생각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매번 온갖 정보와 지식을 끌어다가 정당화를 하긴 하지만, 그것이 제가 저한테 사기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혼자서 그 사기꾼을 비웃거나 증오하기도 하고... 이런, 이건 분명히 병적인 연쇄네요.

 현실로 돌아오자면 찢어진 피부와 출혈과 깨끗해진 머릿속 그 이후에, 또 한 번 참담한 심정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제가 지난 십 수년간 항상 상의로 가릴 수 있는 곳에만 환자짓을 했다고하더도 결국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는 실수를 하고, 그들은 흉터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것은 죄책감, 분노, 슬픔, 불쾌함, 의무감, 어쩌고 저쩌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저는 또 한 번 제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적출하는 수술 따위의 환상을 보고, 그들로부터 도망칠 준비나 하고. 에이, 씹.....

 그러니까 계속 본능처럼 죽고 싶어하면서 본능처럼 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그나마 스스로 비극적 무드라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자위라도 될텐데, 그런 것도 없이 고통만 생음악처럼 휘휘 돌아다니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시를 하고 싶기도 하네요.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족쇄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감추지 않고 꺼내놓고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것 자체가 고통에 대한 자랑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요.

 그거 아십니까. 이 블로그는 몇 년인가 전부터 매일 3명에서 15명 사이의 도무지 무슨 맥락으로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 방문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문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저의가 수상하네요. 누군지도 모르는 여러분에게가 아니라, 여전히 이 블로그가 자신의 불쾌한 일기장이라고 믿으면서 글을 올리는 제가 수상스럽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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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의 남자

기록/생각 2020. 9. 29. 00:14 |

304호의 남자


 낮이든 밤이든 3층 계단에선 늘 비슷한 목소리가 울린다. 바보처럼 명랑하게, 동시에 비꼬듯이 주절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거나, 슬픔인지 절망인지에 가득 차서 울부짖는 남자의 목소리다.
 같은 빌라에 사는 처지라 그 남자를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고 머리를 삭발했으며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처럼 바싹 말랐다. 빌라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마주치면 그는 항상 어딘가에서 소주 3병을 봉투에 담아 집으로 가고 있거나 소주를 사기 위해 나가고 있다. 가을이 다 됐는데도 늘 런닝에 츄리닝 바지 차림이다. 밖에서 그가 울부짖거나 희희낙락 지껄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이 4층에 있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3층 계단에서 언제나 그런 소리가 들릴 뿐이다.
 누군가한테 그가 아내와 함께 산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알고 있다. 낮에는 3층 계단에서 늘 남자의 정신 나간 괴성만 들리지만 밤이 되면 분노로 가득 찬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그 남자에게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없겠지. 그러니 낮에도 술에 취해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약간의 거식증 때문에 살이 잔뜩 빠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의 체구를 보면, 그러니까 관용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뼈 위에 가죽밖에 없어서 과연 기능을 하기나 하는 것인가 싶은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아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소주에 들어있는 칼로리만으로 생존하고 있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불행한 집은 어디에나 있다. 게다가 난 인생의 대부분을 거지 같은 동네에서만 살아왔다. 불행한 집은 수도 없이 보았고 우리 집도 불행한 집 중 하나였다. 그런데 3층의, 304호에서 들리는 목소리―혹은 목소리들―를 무시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면 그것은 불쾌하게도 흔한 ‘불행한 집’과는 달리 이상한 메아리를 내 가슴 속에 남긴다.
 나는 폭음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술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친가 사람들 모두가 술을 좋아하지만 유전인지 뭔지 그들 중 누구도 술에 취했을 때 슬퍼하거나 날뛰기는커녕 점점 즐거워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난 알코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술을 마시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나 역시 친가 쪽 피를 물려받았는지 행태야 비슷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괴롭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굳이 날 비극적 인물로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신체·정신적 고통과 끝없는 고립감은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평생 날 따라다닌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외가 쪽에 알코올 문제로 인생을 말아먹거나 정신병동에 수감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때 기억났는지, 그때쯤 알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끈질기게 날 술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술을 마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폭음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한 시간에 500ml씩, 몇 시간에 걸쳐 계속 맥주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3층을 지나가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그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완전히 술에 꼴아버린, 도대체 누구랑 대화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발랄하게 누군가를 큰 소리로 비꼬고 있거나 심하게 절망한 소리로 언어조차 되지 않는 외침을 커다란 폭의 높낮이로 반복한다. 내가 불쾌한 건 소음공해 때문이 아니다. 그 목소리가 거울처럼 느껴지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남자가 지금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불행한 알코올 중독자가 만취해 헛소리나 절규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24시간 취해있는 저 남자는 불행하지 않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곡을 할 때도, 열 받고 처참한 심정인 아내가 저주를 쏟아부을 때도 불행하지 않다. 그냥 취해있는 거다. 비참한 자아 따위는 이미 술에 익사했고, 절규하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저 남자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냥 취해있는 거다.
 오늘도 난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그걸 만회하려고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아니, 순서가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별 상관은 없다. 아무튼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고 죄악감과 자기혐오가 물질이 되어 날 찔러댔다. 맥주를 더 사야겠다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갔다. 3층을 지나 내려갈 때 그 남자의 혼잣말 같은 것이 304호 철제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뭐가 걱정되기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다. 내 미래에 재활센터가 보였나? 그런데 내가 정말 그런 걸 걱정하기는 하나? 아마 그리 머지않아 304호에 경찰차나 앰뷸런스가 도착하면서 계단 속의 목소리는 끝나버리겠지. 나는 스스로 내가 고통스럽지 않고 비참하지 않고 고독하지 않기만 하다면 미래에 재활센터가 있든 정신병동이 있든, 심지어 영안실이 있든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려 했다. 또 자신에게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수단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상한 죄악감 속에서 맥주는 사러 가지 않았다.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터질 것처럼 쿵쾅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돌아와서 목요일에 지하철을 타게 될 일이나―바보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요새 하는 일 중 가장 힘든 일이다― 언제 집안에서 싸움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나 의사가 한 충고 같은 건 전부 고의로 무시하고 박하사탕처럼 알프라졸람제를 집어먹었다.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건 다음과 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신을 관측할 자신을 영구히 잃어버리는 것, 그러니까 이성을, 그러니까 지성을, 그러니까……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도 내 통제하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끔찍하게 집착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 말이다. 어쩌면 너무 간단하게 술에 쓸려나갈지도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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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200916

기록/생각 2020. 9. 16. 13:33 |

 도무지 뭐 쓸만한 것이 떠오르질 않네요. 나름 심각한 상황입니다. 요새 하는 일이라고는 6시간도 채 못 자고 호흡곤란을 느끼며 일어나거나, 힘겹게 잠든 지 몇 시간 만에 괴몽을 꾸고 벌떡 일어나 다시 잠들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이불 위에 卍자로 엎어져서 음악이나 듣는 것뿐입니다. 음악이라는 것도 원래 10년 이상 지속된 확고한 취향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저 인터넷 음악 서비스 사이트에서 자동재생을 눌러놓고, 스피커에서 뭐가 흘러나오든 듣는 둥 마는 둥 이불 위에서 까딱도 하지 않는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써야하는 것입니다. 딱히 무슨 생활에 가치를 만들겠다느니 의미를 부여하겠다느니 그런 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흉곽이 점점 조여와서 허파고 심장이고 다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아니, 의미니 가치니 하는 게 맞는 얘기일 수도 있겠네요. 흉통이나 절망감으로 상징되는 실존적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면 착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컴오피스에 별 시답잖은 얘기나 적어놓고서라도 그게 A4용지 1페이지, 2페이지가 되면 스스로, 아, 내 존재가 뭔가를 기록했다, 하는 착각이라도 느껴야 늑골의 밀도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느낌을 잊을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제 삶이 여전히 폐(廢)하고 패(敗)한 상태 그대로라고 해도 말입니다.
 지금은 오전 11시입니다만, 오늘은 오전 3시에 느닷없이 깨버렸습니다. 아마 가을모기 때문인 것 같은데, 신경질적으로 일어나서 모기향을 켜고 보니 더 이상 잠이 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계절의 구분도 애매해서 9월 모기를 가을모기라고 불러도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중에 가을모기에 대한 구슬픈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소재조차 못되겠네요.
 아무튼 가을모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깨버렸으니 별수 없이 음악을 틀어놓고 또 산송장처럼 컴컴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인가를 그러고 있다가 어쩐지 갑갑한 마음이 들어서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최근까지 병행해서 읽고 있던 책 세 권이 이불 주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한 권은 80년대 한국 시집이고, 한 권은 80년대 영국 신학자의 성경 복음서 비교분석 서적이고, 한 권은 80년대 이론물리학자가 쓴 일반 대중의 신, 생명, 의식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현대물리학에 의해 설명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교양서적이고……. 80년대. 80년대. 80년대. 십8…… 지금 2020년 아니었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 비슷한 것이 치밀어오르려고 하기에 순간적으로 생각을 멈췄습니다. 부엌으로 나가 냉장고에서 커피 하나를 꺼내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물리학자가 쓴 책을 집어 들고 벽에 기대앉았습니다. 물질계와 의식계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분리될 수 있다면 시공간 기하학이 어쩌고 양자물리학 이론의 시공간이 형성되지 않는 하부 단위 차원이 어쩌고, 한참을 읽고 있다가 덮었습니다. 책이 재미없었던 것이 아니라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88년에 인쇄된 책을 보고 있으려니 눈알이 터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몸의 각 부위는 피곤하다고 난리를 쳐대는데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일단 한 번 깨버리면 17시간 이상 활동(?)하고 저녁 약을 먹어야만 잠에 들 수 있습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든지 서너 시간밖에 못 잤다든지 그런 건 제 뇌가 접수해주는 탄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할 수 있는 게 이불에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머릿속으로 욕설이나 반복하고, 어느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고딕 클래식과 데스메탈을 접합한 심란해야 하는 건지 머리를 흔들어대야 하는 건지 잘 알 수 없는 음악이었습니다.
 아아, 숫제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분명히 ‘인간실격’에서 읽은 문장이고. 다자이 오사무 대단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 정신 깊숙한 곳에 끼어들었는지. 여하간 당장 목매달고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할 정도로 행동력 있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절망스럽고, 절망한 것보다 더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며칠 몇 주를 이렇게 보냈는지. 부처님의 수많은 금언 중에 유일하게 제가 온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말씀이 아니라 삶이 고해라는 것입니다. 그걸 초월하고 집착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한 말씀은 별로 공감을 못 하는 걸 생각하면 제가 그다지 현명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여하간.
 고립감, 염세, 절망, 비애, 고통, 무기력. 그렇습니다. 무기력. 이 모든 상황과 저 자신을 해결하려는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 무기력. 마냥 이불에 투신한 채 이러다 갑자기 대동맥이라도 막히지 않으려나, 하는 멍청한 생각이나 하면서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대로 공기도 안 좋은 퀴퀴한 방에 처박혀 있으면 조금씩 무의미와 동화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나 갖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뜩 이불 옆에 세워놓은 책장에 눈이 갔습니다. 맨날 보는 책장이지만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세 권 있었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사이즈가 거대하고 은박이 입혀진 양장에다가 심지어 세 권 모두 먼지로부터 보호하는 커버까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진리, 사랑, 행복편이었습니다. 내가 저걸 언제 샀지? 분명 언젠가 읽은 것 같긴 한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네. 게다가 저렇게 비싸 보이는 소장본을 말이야.
 사실 어려서부터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들 책은 닥치는 대로 다 읽어서 유럽 작가들의 저작보다 더 많이 읽은 것 같습니다만, 이상하게 톨스토이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 구둣가게 앞에서 눈맞고 쓰러져있던 젊은 거지가 사실 천사였다는 소설이 톨스토이 작품이었던가요? 종교색 강한 게 그 양반 맞는 것 같긴 합니다만, 정말 그 정도밖에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온 집안의 책장을 다 뒤져보니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읽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데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애당초 이런 책 사놓을 사람이 집안에 저밖에 없는데요.
 찾다 보니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중복되게 산 작품도 꽤 되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나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도 20대 초중반 이후로는 읽은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 작품은 내용이 거의 온전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네요. 이건 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겁니다.
 여하간 그 은빛으로 반짝이는 커버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사실 평소 같으면 톨스토이의 음성이든 니체의 음성이든 성격적으로 침을 뱉어버릴 문장에 순간 홀려버렸습니다. 이젠 에미넴이 랩을 하고 있는 음악을 배경으로 천천히 책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각 권의 주제로 명기된 진리, 사랑, 행복을 쳐다보다가, 기름칠 안 된 기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진리편을 뽑았습니다. 그때 순간 뇌에서 욕설이 쏟아져나왔던 것 같은데, 익숙한 일이네요.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만 단테가 신곡의 시작을 지옥편으로 한 건 참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읽고 생각한 겁니다만, 전 이 책이 명언록이라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계속 읽었고, 또 각막이 폭발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즈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뭐라도 쓰자. 언제나 자해보다도 알프라졸람보다도 알코올보다도 효과적으로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주었던 건, 불법적인 일을 빼면 글쓰기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데 요즘 이렇게 개판으로 생활을 하는데 뭘 쓰지? 쓸 게 있기나 한가? 소재도 주제도 떠오르는 게 없고, 요즘은 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조차 없는데.
 그래서 결국 이렇게 정했습니다.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하기로. ‘도무지 뭐 쓸만한 것이 떠오르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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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비 괴몽

기록/생각 2020. 9. 13. 09:45 |

와사비 괴몽


 며칠 전 오후 3시에 기괴하고 강렬하고 슬픈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왜 해가 중천을 넘어가는 오후 3시에 눈을 뜨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 말해두자면 난 그날 아침 9시에 약 먹고 잠들었다. 평소대로라면 오후 6시에 눈을 떴어야 한다. 아무튼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악몽을 꾸다가 벌떡 깨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 기괴하고 강렬하고 슬픈 느낌은 악몽의 잔재가 아니었다. 무언가 아주 억울하고 유감스럽고 절망이 가득해서 더는 이런 현실은 못 견디겠다고 꺽꺽댔더니 정말로 그 세계로부터 퍼뜩 깨어나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뭔 놈의 꿈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심장이 뱀마냥 허물 벗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60초인가 눈뜬 채 이불 덮고 누워있다가, 니미 견딜 수가 없어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으악-흐악-하며 울었다. 한 15분 그랬나, 친척들 죽을 때도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서도 항상 뭐 잘못 먹은 비둘기마냥 어리바리 돌아다니기만 하던 게 나였는데.
 이유도 뭔지 모르고 목이 막히게 억울하고 유감이어서 이젠 눈으로 곡을 하다가 마침내 밥 지어도 될 만큼 눈물을 쏟고 진정을 했다. 얼굴을 파묻은 이불이 축축해진 게 기분이 더러워서 반대로 누웠다. 그리고 이성이 좀 돌아오자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유명한 사람이 인간의 이성은 기억과 경험으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기억나지도 않는 꿈에 꺽꺽 우는 것은 틀림없이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그러면 감정은 정말로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이 날뛰는 놈이구나.
 또 그런 사변이나 왱알앵알하는 평소의 임명준으로 돌아와 있는데 뜬금없이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났다. 전부 다 기억난 건 아니지만 울었던 이유는 기억이 났다. 꿈에서 현자인지 오즈의 마법사인지 선지자인지 아무튼 그런 놈이랑 대화를 했는데, 나더러 “사실 당신 가슴 속에 들어있는 건 심장이 아니라 고추냉이라오.”하며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발끈해서 증거를 대라고 하자 놈은 어느 연못에 가면 내 심장이 가라앉아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까 진짜로 내 심장이 있더라. 전 세계 75억 개가 전부 똑같이 생긴 근육펌프기인데 어떻게 바로 내 것인 줄 알아봤는지는, 꿈이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아무튼 한 손에 심장을 들고 늑골을 벌컥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고추냉이인지 와사비인지가 떡하니 있었다. 아, 이런 썅……,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깬 것 같다.
 왜 하필 와사비지. 내 무의식이 초밥이라도 먹고 싶은가. 그런데 와사비는 그렇다 치고 이건 사실 프로이트니 융이니 하는 사람들 부를 필요도 없이 간단한 괴몽이다. 인간짓 좀 그만두고 싶다, 평생을 노력해도 이미 내가 오함마로 박살 낸 장독대 파편 위에 물 붓는 격인데 차라리 메디컬 닥터 사인 들어간 부품결손 증명서라도 있으면 좋겠다, 감정이고 죄책감이고 양심이고 다 엿 바꿔먹었으면 좋겠다, 아아. 니미.
 그런데 이미 그 감정과 죄책감과 양심을 작동시키는 주요부품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광어회에나 발라먹는 초록색 일제 양념이 들어있었다면, 정말로 억울해 미칠 노릇인 것이다. 그 현자인지 오즈의 마법사인지 선지자인지에게로 돌아가 다음엔 뇌를 할라페뇨랑 바꿔야 하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감정과 죄책감과 양심을 뚝 떼어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역으로 멀리멀리 던져버리려면 중추신경계의 몇십 퍼센트를 외산 스파이스로 갈아치워야 하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것이다.
 여하간, 어쩐지 그 꿈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부정맥 비슷한 게 일어나는데 나는 일주일 전 이미 의사에게 기존 대비 절반의 알프라졸람으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아아. 아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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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분쟁이 어쩌고저쩌고


 사람들은 멍청하다. 아니, 오해가 없도록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멍청하다. 그들은 항상 모든 인간집단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만일 누군가가, 설령 아무리 보아도 자신들과 동떨어진 성질의 누군가라도,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 정체성’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는 실마리만 던져주는 즉시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어버린다. 일상적인 의구심이나 관찰, 혹은 통찰 능력이 그들에게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믿음의 근원이 되는 부분에 있는 정체성의 동일성만 보여주면 순식간에 그런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멍청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세계를 간단하게 이분화하려는 욕망 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피해자 집단과 가해자 집단. 그것으로만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믿으면 자신이 겪는 인생의 격렬함(고통보다는 차라리 이 단어가 낫겠다)에 대해 굳이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건 인류 역사에 항상 있었던 무지함이지만 마르크스가 거대한 사상 덩어리로 만들어 내놓은 이후로 누구든(심지어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것이 전제조건인 집단이더라도) 써먹을 수 있는 이념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라고 부르든 독일인과 유대인이라고 부르든 여성과 남성이라고 부르든 항상 형태는 똑같다. 부조리한 피해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이 부조리하게 가해한다고 여겨지는 집단을 공격하고 부수고 전복시키고 마침내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한 구조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책을 읽다 보면 아무리 뒤져도 도무지 명시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투쟁과 혁명이 완수된 뒤 도대체 그들의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점이다. 당장 공산당 선언만 읽더라도 그의 이론대로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가 설계한 사회를 만들어낸 뒤, 마르크스는 그 사회가 이미 완벽한, 낙원이나 다름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뉘앙스만을 풍기고 있다. 역사적으로 공산국가들이 결국에는 독재자의 경찰국가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패망하거나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그것이 결코 ‘영구히 유지되는 낙원’이 아니라는 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공산주의가 낙원을 잘못 설계했다는 점이 아니다. 사회가 ‘피해자’와 ‘가해자’만으로 분열되고 그걸 극복하는 방법이 오로지 ‘피해자’ 측의 열광적 혁명활동이라는 점이 제일 큰 문제다. 정말로 ‘피해자 집단’이 혁명을 완수해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사회구조를 만들면, 아니 정말로, ‘완벽한’ 사회구조라는 게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원은 변하지 않는다. 낙원은 발달할 이유가 없다. 낙원은 고통과 죽음을 겪으며 진화할 이유도 없다.
 무동성(無動性)의 사회에 남은 가능성은 쇠락과 패망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 영원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옛날 구약성경의 저자들조차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결말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영원한 추방밖에 없다. 설령 그러한 신화적 파라다이스가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인간은 자신들이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하여 ‘완전무결한 사회’라는 개념으로부터 본질적으로 괴리되어있다.

 그리고 사실은 그들보다 자신의 정신상태가 훨씬 엉망진창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초조해지고, 인생에서 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나는, 완전한 사상 같은 것이 아니라 THC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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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대화

기록/생각 2020. 8. 26. 16:00 |

(이 친구 한국어가 내 영어보다 못 해서 영어로 진행됐다)

우리 부모님 집에 고양이 두 마리 있던 거 기억해?

그래, 까만 거 두 개 있었지.

그 중에 암컷이 너무 늙어서 미쳐버렸었나봐. 다른 놈을 이유도 없이 공격하고, 사방팔방에 오줌을 갈기고,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고.

뭐야, 고양이 알츠하이머 같은 거라도 걸렸나.

아마도.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 지 알아?

말해 봐, 재밌을 것 같은데.

뒷마당에 삽으로 구멍을 파고, 거기다 간식을 던져두고 고양이가 들어가게 한 뒤에 두 방을 쏴버렸어.

아저씨답네. 그래서 내가 너희 남부사람들을 좋아해.

왜?

블루스테이트 사람들은 너희더러 무식한 레드넥이니 전쟁광 공화당 지지자니 하지만, 가식없고 실용주의적으로 무식한게 온갖 감성이나 권리 지랄에 시달리는 자칭 지식인보다 훨씬 나아.

헤, 아무튼 아버지가 전화로 그러더라고. 그 짜증나는 거 안락사 시키려면 적어도 2백 달러 들어가는데, 총알 두 방은 50센트도 안 한다고.

하! 50센트? 진짜? 그거 아저씨가 늘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손바닥만한 핸드건에 들어가는 거야?

아니, 구경 약간 더 큰 소음기 달린 자동권총. 정확히 몇 mm인지는 모르겠는데 건샵가서 계산해보면 한 발에 25센트도 안 해.

망할, 이 얘기 뉴욕 같은 데 사는 놈들이 들으면 난리 나겠네. 분명히 게거품 물고 동물권리에 총기문제까지 울부짖으면서 전국적 이슈로 몰고가려고 하겠지.

하, 동물권리.

그러게. 그 단어 처음 만든 놈이 대체 누구야. 젠장, 아저씨 죽기 전에 한번 뵈러 가야되는데. 니 얘기 들으니까 더 보고 싶네.

이 코로나 난리부터 어떻게 되야지.

내 생각엔 일루미나티 애들이 원래 하려던 짓 대신 끝내주고서야 해결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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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6

기록/생각 2020. 8. 26. 00:20 |

 어제 아침에 일어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 때문에 고생했다. 하복부에서 불알까지 연결된 뭔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한 시간 넘게 지속됐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담배를 태워대고 매일 술을 마시니 어딘가는 망가지겠지. 여하간 그 통증을 겪으면서 담배를 피우러 계단을 내려가는 내가 미련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뭘 했더라. 그렇지, 오후 2시에 은행일을 보러 바람도 불지 않고 찌는 듯한 날씨에 40분을 걸어갔는데, 머리고 셔츠고 땀범벅이 되서 창구의 은행직원과 얘기해보니 굳이 신한은행까지 오지 않더라도 집앞에 있는 지역농협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멍청한 새끼. 직원이 ATM에서 처리하면 수수료가 더 싸다고 했지만 거기까지 간 게 아까워서 그냥 수수료 2천원을 내고 송금한 뒤 돌아왔다. 분명 나중에 통장에 2천원만 남아서 4천원짜리 담배를 못 사 손가락을 물어뜯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온종일 방바닥에 늘어져서 아무것도 안 했다. 스피커에서는 병신 같은 라디오헤드 음악만 계속 흘러나왔다. 점점 우울해지고, 점점 끔찍한 기분이 되고, 어딘가에 권총 한 정이라도 떨어져있으면 신을 믿게 될 텐데. 그게 야훼일지 알라일지 심지어는 제우스일지 나도 모르지만.

 어느새 밤이 되서 동생이 사다 놓은 맥주를 마시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뒷편 빌라에서 어떤 미친새끼가 뜬금없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목소리는 전날에도 들었다. 비가 왔는데, 천둥이 칠 때마다 박자라도 맞추는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또 한 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 동네에 사는 인간들은 죄다 이 모양이다. 고함, 괴성, 욕설, 파괴음.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미 약도 먹어버려서 자려고 건물을 올라오는데, 3층 즈음에서 2주 전부터 이상한 냄새가 난다. 집안에서 된장이라도 띄우는 건지 시체가 썩고 있는지, 하여간에 끔찍한 냄새가 계속 나는데 관리인도 없는 이 건물에서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 한들 말해서 뭐하겠는가.

 이걸 쓰다보니 어느새 26일이 되었다. 알코올과 약기운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왜 또 내일이 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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