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분

기록/생각 2020. 12. 6. 21:44 |

56분


 몇 주간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어쩌면 몇 개월을 그랬는지도 모른다. 심장도 피도 전부 잃어버린 채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들이 극적인 형태로 겨우 떠올랐다. 잃어버린 심장과 피를 다시 짓는 방법이 기억난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3일 전 나는 오랜만에 음반들을 뒤지고 있었다. 근 며칠 머릿속에서 온갖 불쾌한 활자들이 바스락거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좀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왜 하필 음악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려고 한다.
 활자들이 뇌에 들러붙어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는 그 끔찍한 느낌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나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나쁜 책은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는 얘기를, 릴케가 했는지 헷세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격언은 옳은 말이었다. 처음엔 그저 오락소설이란 어떤 형태일까 하고 변덕스러운 호기심이 일어난 정도였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연락이 끊긴 친구가 주었던 일본 오락소설이 몇 권인가 내 책장에 있었다.
 오락소설의 구조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가 끝나고, 결과는 이미 말했듯, 뇌수에 타르를 쏟아부은 꼴이 되었다. 나는 그 엄청난 부작용에 감탄했다. 시야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언어기능이 손상된 것처럼 가족들과 대화하는 일도 힘들었다. 이런 치명적인 게 오락소설이라고 불린단 말인가. 아니면 나 같은 놈만 소위 ‘오락소설’ 때문에 머리가 들쑤셔진 상태가 되는 것인가. 호기심 때문에 인생 망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이것이 그런 예로구나 싶었다. 여하간, 그래서 머리를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좋은 책을 읽을 여유도 없었다. 텍스트라는 것이 아예 머리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음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음반들은 천장에 붙어있는 서랍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다. 내가 찾는 것은 14살 때 나의 음악적 취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밴드 ‘Death’의 앨범이었다. 사실 10년도 전에 음원을 전부 파일로 만들어 저장해놨지만, 그날은 어쩐지 무의미한 행위더라도 앨범으로 듣고 싶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밴드 리더인 척 슐디너의 요절로 인해 마지막 앨범이 된 7집 『The Sound Of Perseverance』였다. 번역하면 ‘인내의 소리’다. 나는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누웠다. 첫 곡의 제목은 ‘Scavenger Of Human Sorrow’, 즉 ‘인간 비애의 청소동물’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 트랙이 끝나기까지 56분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몸이 쭈뼛쭈뼛 솟았다. 내가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은 20살 즈음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독주를 들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의한 이야기지만, 천재들의 작품은 감상하는 이의 자아를 없애버릴 것 같은 기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일종의 정화 같은 작업을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도전정신을 일으키게 한다. 자신의 작품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켜 현실과 환영의 구분이 무의미하도록 만들다가, 작품에서 해방되고 나면 오히려 현실이 가진 선명한 색깔과 그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책을 읽든 음악을 듣든 미술품을 감상하든, 내가 왜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인지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왜 글을 써야 했는지를 나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정신의 병과 점점 약해지는 몸 때문에 아무래도 자꾸만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다. 얻을 것은 없고 상실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않고 죽는 방법만을 찾게 된다. 그런 밤이 되풀이되면, 멈추려고는 하지만 앙드레 지드의 ‘나는 흡족한 얼굴로 완전히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곡해해버릴 것 같다. 끝 간 데 없이 게을러지다가 자신의 존재에도 게을러지고 있다.
 하지만 점점 앙상해지다가 관념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내가 처음에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본명이 혼돈이고 무질서가 차올라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과정만이 질서라고 한들, 나는 그것에 잠수해버리고 싶지 않다. 혼돈의 정체만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 분석하고 적용해서 만사에 조소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떳떳하게 목을 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와 증오로 눈을 돌리는 것은 내 본업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죽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미美를 갈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맨 처음부터 핵심이었다.
 56분 동안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처럼 벌떡거리다가 겨우 기억이 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가슴에 담았던 소설이 『이방인』이었다면, 처음으로 내 가슴에 불을 지른 시는 H. 노바크(헬가 M. 노바크로 생각된다)의 『태양병』이었다.
 분명히 그 시의 시구들은 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우리들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이런 시구들이 내 혈액에 불을 지피지 않았던가. 자신을 향해 증오의 함성만을 외쳐주었으면 한다던 뫼르소의 독백도 그렇다. 만일 그것들 없이 차가운 물리학과 기계론만 있었더라면 나의 자살은 일찌감치 성공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기억나서 다행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혹여 숙명과 같은 대단한 단어와 연결되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써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동기도 있기는 있었다. 최소한 내가 하루에 한 끼만 먹고서 토해버리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행인 것이다. 56분만으로 내 해골을 거꾸로 들어 쓸데없는 것들을 탈탈 털어줄 천재들이 미리 살다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럼 이제 다시 피와 살로 되어 지상에 발 디딘 인간이 되는 것인가, 하면 솔직히 아무 대답도 못 하겠다. 떠오른 것은 내가 글을 쓰려고 한 동기뿐이다. 그리고 굉장히 애매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도 아마 있기는 할 것이다. 정말로 그런 욕망이 있는지는 확언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안의 반송장이 전처럼 펜을 잡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등룸펜. 고등룸펜. 자조밖에 남지 않은 역겨움에.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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