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3.04.03 일요일 1
  2. 2023.03.15 줄담배
  3. 2022.02.10 여행(초안)
  4. 2021.09.09 길 위의 피

일요일

글/에세이 2023. 4. 3. 17:47 |

일요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약 5초 전까지 하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이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손에 커피잔을 쥐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봄답게 환했고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 2층에는 다른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내가 수십 초 이상 말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진 대화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던 나는 곧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만 열심히 뭔가―그게 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침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대화가 이어질 만한 소재를 찾아서 카페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런 환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얘기지.
 그렇게 나는 문장을 완성 시켰다. 친구는 더더욱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고 있던 말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하루에 물을 2L씩 마셔야 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결국 친구가 이렇게 묻자 나는 본래의 주제를 기억해냈다. 아, 하고 나는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하루에 물을 2L씩은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러한 건강법에 대해 주워들어서만 알고 있는 수준이었고, 매일 2L의 물을 마시는 행위가 어째서 몸 건강에 좋은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미안, 무슨 말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을 뱉었다. 친구는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술이 덜 깼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술을 마신 건 오늘 새벽 3시까지였고 지금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태를, 숙취 때문이라고 친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머릿속의 뇌수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위들이 서로 격벽을 쳐놓은 것 같은 현재의 기묘한 정신상태를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요새 겉옷 입기 애매하긴 해.
 그렇게 대화주제가 바뀌었다. 나는 친구가 굳이 따져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제에 올라 타준 점에 관해 은근히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맥과 당장 깨져버리기라도 할 듯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친구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언어라는 것이 퍽 귀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두 손 가득히 빛줄기를 잡고, 지상을 향해 무자비하게 던져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너는 오늘 뭐 할 거냐? 친구가 물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면 책 좀 읽고, 글 좀 쓰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뒷집 아주머니가 출판사에서 일하신다던데.
 어느 출판사?
 몰라, 모르겠는데,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볼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리고 또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어쩌면 햇빛 때문에 내가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햇빛에는 눈과 피부로 스며들어 뇌를 깨끗이 소독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불 말릴 때처럼…….
 이불 말릴 때처럼. 나는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되풀이해 말했다.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꺼내서 강한 햇볕 밑에 말려놓는 상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카페 2층에는 벌써 50분 넘게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릿세’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몇 가지 연상을 거쳐 사람이 어느 공간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이었다.
 책은 잘 돼가? 친구가 갑자기 물어왔다.
 모르겠는데, 나는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글쎄.
 넌 요새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 사냐.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낸 건데,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 정말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문호던가, 혹은 사기꾼이지,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사기꾼이 잘 벌지.
 네가 사기꾼이라면 누구에게 사기를 치는 건데?
 주로 나 자신에게지 뭐.
 우리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내가 올바른 단어들을 선정하여 의미를 전달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란 참 성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가자, 역까지 태워줄게. 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찻잔을 손에 쥐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자스민 차는 별로 맛이 없었다.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수분 섭취가 건강과 직결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물을……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코트와 잔을 챙겨 일어났다. 나는 입속말로 젠장, 이라고 중얼댔지만 사실 화가 나거나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이 ‘젠장’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딱 적확한 상황이었던 것뿐이다.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그때 친구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오늘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래’라고만 했다. 미세먼지가 나빴고 날씨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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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담배

글/에세이 2023. 3. 15. 07:41 |

줄담배


 역 근처의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생쥐 같은 인상을 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구걸했다. 담뱃갑을 열어보니 마침 세 개비가 남아있기에 두 개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 인사도, 떠나지도 않고 그저 멀뚱히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한 개비가 더 있던데.”였다. 이번에는 내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돗대를 가져가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딱히 화도 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역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돗대를 피워버렸다. 그리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남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현금은 이천 원뿐이었다. 어차피 담배 한 갑도 못 살 돈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캔커피 두 개를 사는 데 모조리 써버렸다. 얼마 뒤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역전에 나타났다. 나는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친구는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시야 저편에서 그 노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맞은편 흡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가슴 속에 흙탕물이 흐르는 기분이라, 한 개비를 더 빼물고 불을 붙였다. 젠장,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는 캔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젠장’이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흡연장에서 어정거리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결정했다. “아.” 내가 돌연 떠올렸다. “그 캔커피가 내 마지막 자산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실없이 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술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 작고 생쥐 같은 노파는 여전히 흡연자들에게 개비담배를 구걸하고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리 위로 기어나오는,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간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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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초안)

글/에세이 2022. 2. 10. 22:49 |

여행


 24살 때, 나는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3주 정도를 머물렀다. 그때까지 내게 여행이란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돈이 생기면 현실에서 도망치듯, 평소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의 여행은 차례차례 나름의 체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데사의 가을 하늘은 눈에 띄게 높고 투명했다. 그 밑에는 색채 없는 건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웅크린 것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유난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친구 율라이아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2년간 월급을 받아 저금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전전해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율라이아가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말을 꺼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몇 번 미국 남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이토록 큰 땅덩어리에 갈 곳도 구경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오데사는 더욱 볼 것이 없는 동네였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에 몰개성한 주택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아침이 되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돌아와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첫 주부터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정오 즈음 되면 잠에서 깨어, 씻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준 예비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줄담배를 피우며 마냥 걸었다. 행인도 없어 한산한 거리를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달렸다. 가끔은 큰 길가의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서는 늘 담배를 물고 다녔던 것 같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주라서 담뱃값이 싼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고, 친구와 잡담을 하다 잠들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니 당연하다는 듯 생활이 불균형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저녁에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굉장히 걱정을 끼쳤다―서(西)오데사의 도심을 한밤중에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벽마다 인적도 없는 시가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층이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거리를 꺾어 들어가는데, 골목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작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인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무슨 말을 외쳤다.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다. 남부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로 그녀는 ‘거기 아시아 사람, 뭘 하고 있어?’ 라고 내게 묻고 있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자리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직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꽃이 일렁이는 드럼통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어놓은 쇼핑카트를 드럼통 옆에 세워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관광객이 밤중에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핫도그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안 것인데 그녀는 드럼통에 피워놓은 불로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무슨 담력이었는지, 좋다고 대답한 나는 그녀와 핫도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내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음절들이었는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는 카를라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담배를 피우며, 미국에서 노숙자로 사는 것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는 곧 닥쳐올 겨울을 대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데사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은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다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잠자리까지 빌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나는 카를라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당장 위험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정신질환이나 중독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20달러 지폐를 하나 건넸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문제에 대해 미국은 유난히 논란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입장과 상황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나은 선택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라는 진심으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마워했다.
 나는 친구의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싸구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친구와 나는 식사를 하러 근처의 팬케이크 식당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친구는 자신이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텍사스를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창 너머에서 카를라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무 옷이나 마구 겹쳐 입은 사람들이 서넛 거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족한 듯 그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떨떠름한 얼굴로 농담인 양 말했다. 자신은 반년을 여기서 살았어도 친구가 없는데 너는 벌써 길에서 친구를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율라이아에게 대단히 폐를 끼쳤구나 싶다. 지금 그는 인디애나에 살고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지 2년 정도 되었다. 카를라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에 성공했는지, 아직 살아있을지, 확인할 방도도 없다. 다만 그날, 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게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가지 주제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 아칸소까지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사정사정하며 몇 달러를 빌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져버린 인도계 소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수염이 새하얀 흑인 노숙자 조나단, 북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떼로 몰려오던 헐벗은 아이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수공예품을 기를 쓰며 팔려고 하지만 그냥 주는 돈은 못 받겠다던 네팔의 잡상인 등.
 이처럼 외국을 갈 때마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공항에 내려도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보다는, 시장 골목과 상업 지역으로 먼저 발걸음이 향한다. 그런 버릇이 시작된 것은 카를라와 만난 뒤부터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의미가 명확해졌다. 나는 박물관이나 고건물을 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낯선 거리에서 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 떠난다.
 사람들은 호텔이나 관광버스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이방인이 되어 스며들면 그 거리는 가끔 고향보다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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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피

글/에세이 2021. 9. 9. 23:05 |

길 위의 피


 나는 손안에서 담뱃갑을 돌리며 시멘트 위의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방금 내가 보았던 일은 그저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다면 지각쯤은 간단히 용서해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방금까지만 해도 여자 둘의 새된 비명과 울음소리, 경찰과 구경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30분 전, 나는 역을 향해 걷고 있었고 중간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단지를 질러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20미터 정도 앞에 개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사람이 각각 둘 있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한 명, 반대 방향에서 오는 한 명이 막 마주치기 직전이었다. 내 쪽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는 애견용 목줄을 쥐고 있었다. 줄 끝에는 작고 하얀 소형견이 있었다.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은 이제 30대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쥔 줄은 털이 누런빛이고 주둥이가 길쭉한, 커다란 개의 목에 걸려있었다.
 추위가 막 물러가기 시작하는 3월의 쾌적한 오후였다. 하늘은 맑았고 아직 기울지 않은 태양이 얼굴과 외투 위로 따사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곧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술도 한잔 마실 예정으로, 들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앞에 가던 작은 개가 날카롭게 짖기 시작했다. 그 새되고 히스테릭한 짖는 소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형견을 향한 것이었다. 개들의 심리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보아하니 자기보다 몇 배나 큰 동족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깡깡댄다고 해야 할지 깽깽댄다고 해야 할지, 여하간 어지간히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짖었다. 개 주인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개에게 그만두라고, 사람 말로 어르고 있었다. 커다란 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짖는 녀석을 쳐다볼 뿐, 짖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 직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딱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속 성가시게 짖어대는 작은 놈에게 느닷없이 커다란 놈이 덤벼든 것이다. 10살짜리 사내아이만 한 몸집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바람에 개 주인은 목줄을 놓쳐버렸다. 그 커다랗고 누런 개는 순식간에 작은 개의 배를 힘껏 물더니 도리질을 치며 양옆으로 마구 흔들어댔다. 개 주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멈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10초도 되지 않아 벌써 사방에 선혈이 튀고, 하얗고 작던 개는 새빨갛게 물들어버렸으니, 아무리 자신의 개라고 해도 선뜻 손을 대기 힘든 광경이기는 했다. 나는 1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겁을 집어먹은 주인들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도무지 우스운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들은 아파트 경비원이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젠 구경꾼들까지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6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경비원은 어떻게든 개들을 떼어놓으려고―사실 개들끼리 맞붙은 상황도 아니고 일방적인 도살이었지만― 애를 쓰고 있었으나, 이미 피를 본 누런 개는 아주 끝장을 낼 기세였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커다란 녀석이 붉은 덩어리를 한쪽에 뱉어놓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시멘트 위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고 개 주인들의 울음소리, 비명, 넋이 나간듯한 흐느낌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거기다가 구경꾼들까지 한몫하여 집단으로 알아듣기 힘든 고성을 내고 있었다. 커다란 개 쪽의 주인을 책망하는 욕설, 어떡해, 어떡해, 하며 상황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드는 황망한 목소리들…….
 결국 순찰차가 주인 둘과 주둥이가 피투성이가 된 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작은 개를 데리고 현장을 떠났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한동안 서로 의견을 말하고, 대화를 나누며 수런수런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 갈 길을 갔다. 순찰차가 떠나고 5분도 되지 않아 자리에는 피 웅덩이를 치우는 경비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경비원마저 청소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 마침내 나는 일이 벌어졌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태껏 나는 멀찍이서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벌써 스며들어버린 핏자국이 시멘트 바닥에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남의 아파트 단지에서 그럴 수는 없어, 공연히 손으로 담뱃갑만 돌려댔다. 5분 가량, 머릿속의 난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나는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가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온갖 문장들 속에 배치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정말로 호되게 욕을 들을 시간이었다. 나는 친구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겠다고 전하면서 바쁘게 역으로 향했다. 25분 즈음 후에 나는 의정부 시내의 호프집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서로 얼큰히 술이 들어갔을 무렵 나는 오늘 보았던 끔찍하고 흥미로운 광경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일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을 수 있도록 간략하면서도 완급을 주어 설명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미간을 찌푸리거나 이입하여 화를 내는 등 다양했으나, 의견은 전부 비슷했다. 그 여자는 왜 목줄을 놓쳤느냐, 왜 곧바로 달려들어 멈추지 않았느냐, 그러게 큰 개들은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 등등.
 아니, 그게 아니야, 우리 곁의 짐승들 이야기를 한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정정하려 했으나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용훈이는 공무원 시험 벌써 두 번째 아니냐, 승호는 요즘 주식 한다더라, 종인이는 대기업까지 들어가더니 도대체 왜 그만두고 나왔냐, 이러쿵저러쿵……. 이런 대화가 되어버리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나는 이빨을 상대의 배에 깊숙이 박아넣고 양옆으로 흔들어대던, 그 커다랗고 누런 개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 헝겊처럼 되어버린 작은 개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나는 웃는 얼굴로 저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 누런 개는 상대에게 덤벼들기 전까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형견들이 으레 그러하듯 늠름하면서도 온순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에 대해, 집착하듯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그것들은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길들여있더라도 이따금 마구잡이여도 괜찮다. 동물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만 동물이다. 누군가 건배를 외치기에 나도 맥주잔을 들었다.
 술에 취한 친구들의 표정을 돌아보았다. 새삼 술에 취해도 우리는 동물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이곳은 참 안전하구나, 술집마저도 안전하구나, 다행이고 당연하고 조금은 슬프다.
 그날 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술기운 속에서 잡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털 없는 짐승이 아니라 진짜 짐승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송곳니도 있고 발톱도 있으며 마구잡이로 죽을 수도 있는 짐승,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나, 카프카에게 기도하면 되는 일인가. 그러면서 집까지 돌아와 이불 위에 쓰러져 잠들었다.
 한주 뒤 비가 올 때까지 검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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