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해당되는 글 253건

  1. 2023.03.29 어지러뜨리다
  2. 2023.03.25 지상에서
  3. 2023.03.12 사상가들에게 1
  4. 2023.03.09 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5. 2023.03.05 책상 밑 어둠
  6. 2023.02.28 여명
  7. 2023.02.26 초상
  8. 2023.02.25 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9. 2023.02.06 아침의 빛
  10. 2023.01.18 연초
  11. 2023.01.14 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12. 2022.12.22 예술가, 백형 1
  13. 2022.11.10 의정부시 평화로
  14. 2022.10.27 시월의 어느 1
  15. 2022.04.14 사월
  16. 2022.03.24 봄의 자취
  17. 2022.03.03 낙타 인간
  18. 2022.02.27 바람의 무늬
  19. 2022.02.19 학력 유감
  20. 2022.01.27 녹색 눈물
  21. 2021.11.18 매일 죽는 사람
  22. 2021.11.04 생폴 요양원
  23. 2021.10.15 역전에서
  24. 2021.09.17 일몰
  25. 2021.07.30 부취(腐臭)
  26. 2021.07.15 시인의 피
  27. 2021.02.04 자판기
  28. 2021.02.03 (2020.12.31)주인공을 만드는 방법
  29. 2021.01.07 빈 집 1, 2
  30. 2021.01.03 닫힌 문

어지러뜨리다

글/시 2023. 3. 29. 20:33 |

어지러뜨리다


한낮은 밤을 기대하는 마음만으로 흘러간다
사내는 낮 동안 과연 어떤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세어보고
결국에는 열 손가락 전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서운 불안이 텅 빈 페이지 위에
약속처럼 사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는 날조된 기억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중얼거리고, 까닭도 근거도 없이
악독한 슬픔이 벼락처럼 혈관을 돈다
침침해진 눈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는
그를 보고, 사내의 동생은
저녁을 먹겠느냐고 간단히 묻는다
뜻밖에도 날씨는 선선하고
나무들이 새잎을 창문에 부딪혀대고 또
바로 어제 형광등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

빈 페이지는 굼뜨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간다 또한 우습게도
처음 그 변색을 발견한 것은
사내가 더는
스스로의 직업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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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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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에게

글/시 2023. 3. 12. 19:37 |

사상가들에게


장고하지 말라,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다
먹을 것만을 찾아, 팔십억 인간들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 다닌다
그 대단한 숫자보다, 턱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 발밑에 아무 역사 없이 쌓여있다
땅이 교훈을 주리라 믿지 말라, 의미란
비바람에 무너진 묘비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운율에 맞추어 글 쓰는 일일랑 그만두고
우연히 나타난 생애나 듬뿍 들이켜 취해버려라
우리는 회한할 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리라, 그러니
닥쳐오는 모든 것에 장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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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1.
너희들이 털가죽 없는 살덩이로 태어날 때
세상은 벌써 날고기를 먹는 놈들로 가득했다
너희들이 추운 새벽에 힘겹게 깨어날 때
태양은 너희들을 위해 눈떠주지 않았다.

2.
내가 만난 너희들은 모두 종점 출신이었다
너희들의 생이란 그 삶을 쪼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란 몹시 체계적이며 균등하다고 강론했다.

3.
그러나 땅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밑에 묻힌 자들은
혀도 입술도 썩어 흙이 되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기에
너희들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4.
너희들은 3월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끌고
누구도 비웃을 수 없도록 길고 어렵사리 달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느 닫혀가는 순간에
과연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5.
나는 미로 한복판에 수십 년째 퍼질러 앉아
이제는 사망기사란도 사라진 신문 따위를 생각한다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터트릴 웃음에 관해 생각한다.

6.
오만한 나는 아직 젊어,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나 또한 너희들처럼 종점 출신으로
종점이 될 정거장에서 벗어난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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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밑 어둠

글/시 2023. 3. 5. 16:29 |

책상 밑 어둠


그곳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늘진 눈앞에 벽돌처럼
두꺼운, 책 하나 펼쳐놓고서
읽을 수도 없는 수많은 단어
군인들처럼 줄지어 섰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눈은 가만히, 페이지에 떨어트리고
불 밝은 거실에는 소란한 잡음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나는 모조리 듣고 새긴다
밤은 모두가 저주하는 시간
말하지 않고 눈에 담지 않고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그렇게 나는
잠드는 법을 영영 잃어버렸다

지저분해진 책상 한구석
흰색 졸피뎀 푸른 트리아졸람
누군가의, 잠들어 꿈꾸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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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글/시 2023. 2. 28. 09:05 |

여명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창문의 방풍재를 뜯어내며
꺼림칙한 냄새가 난다, 고
사내가 중얼거린다
매일이 겨울인 북쪽 나라에선
하늘도 꽝꽝 얼어, 이런
생선 비린내 따위는 나지도 않겠지

팔은 창틀에 걸치고, 오늘도
기어코 살아있을 예정
적색 태양 붉은 구름
물고기 같은 사내의 눈에
황동빛으로 둔탁하게 비친다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그러고 보면, 아주 예전
수조에 키우던 금붕어
함께 살던 남생이에게, 몸통
반절을 뜯어먹히고
헤엄치고 있었지

반토막으로, 지저분하고 아둔하게
헤엄치고 있었지,
라고
사내는 생각하고
이내 내다보던 창밖은
새빨갛던 구름 하늘 덧없이 푸르러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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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글/시 2023. 2. 26. 14:11 |

초상


1.
 언덕 중턱에는 성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지하실부터 시작해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는 어렸고 뛰어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새엔가 성당 앞마당에는 하얀 성모상이 세워졌다. 가끔 젊은 신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숭고함 따위를, 우리는 언덕을 오르며 가슴 속에 썼다 지우곤 했다.

2.
 술과 담배와 약 따위로 얼룩진 젊음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없었다. 아침인가 하면 밤이었다. 미래를 믿지 않는 용기로 나는 숨 가쁘게 살아있었다. 변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고 불경을 읽었다. 죽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내 육체로 숨을 쉬었다. 내게서 지독하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났다. 방 곳곳에는 늘어진 술병과 끔찍한 시취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플 때는 죽을 만큼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3.
 그 언덕에 오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톨스토이를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자살한 소설가들이 귓속말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해가 뜨면 행인들을 보러 나섰다. 그들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도망쳐 들어왔다. 내 책은 쓰던 중에 고리타분해졌다. 젊은 신부가 얼마나 늙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성모상이 보고 싶었다. 대리석의 불투명한 흰빛을 다시 스치는 시야에 담았다가 잊어버리고 싶었다.
 밖은 새벽 네 시. 길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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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어제는 몹시도 술잔을 비웠습니다
전날도, 그 전날도
새벽에도 등 밝은 어느 맥주집에서
벌써 2월도 끝나가는데, 그 집 창문에는
성탄절 램프들이 깜박거리며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고
나는 코트의 지퍼를 목덜미까지
바짝 여미고, 황금빛
황금빛 잔을 연달아 입으로 옮겨가고
그러나 누구와 마셨는지
어느 누구와 장대한 허풍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술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을
비싸고 덧없는 안주처럼 주워섬겼는지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게에는 어느새 우리밖에
누군지 모를 우리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마시고, 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자비하게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귀청 떨어질 웃음소리를 내다가……
멍한 채로 나는 아직 동트지 않은
어렴풋이 가로등 빛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태웠습니다
늦겨울 추위에 만취한 몸은 떨리고
나는 연기를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없이, 다만 술은 계속 내어와 지고
또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나는 마시고 있는지, 몰래
눈앞의 표정 몰래 세어보며
알코올에 붉어진 얼굴과 눈동자로
도대체가 낯모를 눈앞의 그 얼굴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바라보는 것입니다
해는 곧 뜰 터이고, 인조가죽 지갑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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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빛

글/시 2023. 2. 6. 16:05 |

아침의 빛


태양은 쏜살같이, 잠든 머리 위를 스쳐 갔다
헐떡이는 폐부를 문지르며 커튼 자락 잡아당기자
창틀에는 이미 겨울밤 피어올라 있었다
검은 창문에 비친 얼굴은 희끄무레하였다

주차된 차들 위로 밤빛 무겁게 비춘다
잠옷 차림으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가로등 주광색이 흰 연기에 물먹듯 스민다
메마른 바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읊조리고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며,
까닭 없이 슬픔은 시작되었다 다시
니코틴 따위가 혈관 곳곳으로 퍼지고
건널목 너머 주택에 켜진 형광 불빛만으로도

나는 그만 장초를 버린 심정이다, 한 모금
한 모금 그 형광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 황금빛 태양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지면
이 뿌리 없는 서러움도 재가 되려는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리퍼 끄는 맨발은 아프게 얼고
겨울은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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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글/시 2023. 1. 18. 17:17 |

연초


흐린 창밖에 싸라기눈 내린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벽시계는 수년째 밤
9시 58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 독서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나는
책들이 단단히 물고 있는 총 아홉 개의
빛바랜 책갈피들을 뽑는다 신중히
책상에 모아 담뱃갑과 라이터로 눌러 놓는다

하늘에서 눈 내리듯
바닥에서 안개 솟는다

아득할 만큼 많은 연기를 마셨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안구는
희뿌연 연무로 가득 찼다
그렇게 몇 자의 탈력이며 좌절들을 적어놓고 나는
얼마나 오래 으스러지도록
고독과 껴안고 살았는지
늑대처럼 고고하게 울부짖지도 못하며
움츠러들어 왔는지
시계를 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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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그러니까 전날 소주를 마시고
또 뭔가를 마시고
이유도 없이 흥겨워 그는
또 무척 슬퍼했다

세상의 표면에는 밤빛 산란하는
무지갯빛 유리벽, 당장
깨질 듯이 얇게 덧씌워지고
겨울바람 더는 날카롭지 않았다

아침 한숨은 프레스기의 허덕임처럼
연달아, 주기적으로 솟아 나온다
지퍼가 터진 가방에는 또 한 병의 술
술, 차갑게 식어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중얼거리는
마음을 병 안에 접어 넣고
한 칸 한 칸, 그는 다시
비좁은 방에 유리벽을 세운다

언제고 깨져버릴 휘황찬란한 벽들 안에
황제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죽어있고
오로지 나는 살아있어, 소독약 냄새 나는
조소를 뱉는다 그는 벽들 뒤로 흐려져 간다

태양은 또 제멋대로 떴으나
밤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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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백형

글/시 2022. 12. 22. 10:42 |

예술가, 백형


눈 깔린 길 걷자 태양 떠오른다
하얗게 서리진 풍광 날카롭게 비추는데
나는 망월사역에 술 얻어먹으러 간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야, 백형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니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술 마시러 간다
칼국수집에서 우리는 맥주를 잔뜩 마셨고
점심 먹는 손님들 가끔 흘낏하고
이쪽을 보곤 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붉게 붉게 달아올라
겨울 추위도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싶었다
인문학의 쓰레기통 같은 백형의 집
우리는 더 마시고 더 소리 높여 미래
미래를 떠들어대고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백형은
점점 취기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는 잘 될 거야, 그럼, 잘 될 거야
나는 맥주를 더욱더 위장에 내 안에 쏟아붓고
다른 수가 있겠어, 농담하듯 잔을 부딪치고
또 마시고, 턴테이블에 재즈 음반을 걸고 또
물론 잘 되는 수밖에 없다고 웃어넘기고

잠든 백형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얼음송곳처럼 찔러왔다
전철 승객들은 오후 3시 만취한 남자를 어떻게 보았더라, 내 기억엔 아무도 없다
물론 잘 되고야 말겠지, 중얼중얼 술 냄새 지독한 한숨을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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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평화로

글/시 2022. 11. 10. 17:09 |

의정부시 평화로


그는 자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한다
하얀 석영처럼 해가 빛나고
거리에 비애가 자라나기에는
아직 이른 오후 다섯 시
그는 어디서 술에 취했을까
멀리 기름종이 같은 하늘 올려다보며
내쉬는 한숨에 에탄올 냄새 섞여있다
따개비 무리 같은 재개발 지구를 지나
왁자한 대학생들의 희멀건 윤곽을 피해가며
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왔다
이건 고독을 비껴가는 방법이야, 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탁한 명정
늦가을 바람이 일고 눈꺼풀이 감기고
앞으로 며칠간 그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가는구나
골목 울타리에 기대 손안에서
애먼 담뱃갑만 돌릴 때, 바닥없는
밤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늠름히 걸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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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글/시 2022. 10. 27. 18:00 |

시월의 어느


자꾸만 구역질이 난다
아 하고 성대를 울려본다 나는
어제부터 말한 기억이 없다

거리 위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우듬지 주변엔 창백한 가을 하늘
멀고 낯설고 까마득히 흔들리는데
곧 눈은 시리고 벌겋게 차오른다

흐려진 눈동자와 안경 너머로
찡그리고 바라보아도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그저 종일 앉아있던 방안이 어둑하고
너무 오래 하늘과 마주 보지 못했고
익숙지 않은 미제 담배가 독하고 맵고
찬 바람에 온몸이 팽팽히 굳은 탓이다

방으로 돌아와 전등을 켜니
눈동자는 다시 붉게 떨려오는데
여기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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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

글/시 2022. 4. 14. 23:22 |

사월


삼거리에 벚꽃잎 마구잡이로 흩날린다 친구는
군시절 생각난다고 욕설을 뱉는다
그제야 나는 가게 앞 비질하던 돼지갈비집
사장님을 생각한다 보도블록 위에 짓밟혀
갈색이 된 목련을 생각한다 매일
건물 앞에 쌓이는, 명함 같은 찌라시들을
생각한다 가을마다 바빠지는
환경미화원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월의 둘째 주
친구 모두 정장하고 걷던 청명한 식장 앞
꽃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과 연인들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날만은
진 꽃잎이 썩어 짓무르리라는 생각 따윈 하지 말자고
아무도 몰래 다짐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벚꽃도 낙엽도 치울 일 없이 살아오던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무엇이던
끝에는 하수도로 쓸려가리라고
음울한 상념만 중얼거리던
내 굴곡 없는 손마디가 보이고
벚나무 심어진 부대에서 봄을 보낸 친구에게
할 말 없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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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자취

글/시 2022. 3. 24. 23:10 |

봄의 자취


봄이 당신을 데리고 갔다
그곳은 아주 먼 데에 있다
당신과 함께 가버린 봄에는
시간에 새겨지는 풍경 소리
적송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편 하늘에 스러지는 노을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당신과 손을 겹친
안경을 쓴 젊은 청년이 있다

당신이 간 머나먼 곳에
어떤 풀벌레가 방울처럼 우는지
어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지
어떤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는지
나는 알래야 알지 못한다
그곳은 삼천대계가 당신의 회색 눈동자고
새벽처럼 미소 짓던 당신의 침묵이리라고
외투를 여미며 쓸쓸히 공상해볼 뿐이다

당신이 봄과 함께 멀리 가버리고
이 땅에는 십 년 동안 마른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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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인간

글/시 2022. 3. 3. 22:50 |

낙타 인간


암석과 모래 위로 한 남자가 걸어간다
야윈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드러난 정강이는 비척비척 걸어간다
아무도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모른다
머리 위로 녹은 황금이 쏟아져 내리고
발자국마다 암염조각이 바스러진다
모래바람은 속눈썹만을 더욱 자라게 한다
아무도 그의 눈동자를 본 적 없다
모래 위에 자국도 남지 않도록
발바닥은 굳은살로 넓고 평평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 나섰으나
모래바람은 흔적도 이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주황색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가
용광로인 듯 끓는 태양에게서 몸을 피한다
까뮈의 배교자처럼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스스로 다가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 그는 다시 떠나야 한다
이제 땀도 흘리지 않는 피부 밑
끈끈한 피는 바깥세상의 폭염처럼 고함친다
무언가 분명한 것, 아마 사막의 끝에
틀림없이 거기 있을 무엇을 울부짖는다
점점 그는 걷는 현상이 되어가고
눈물로 허비할 수분은 허락되지 않고
아무도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막과 하나 될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그 남자 역시
자신이 울고 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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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늬

글/시 2022. 2. 27. 00:05 |

바람의 무늬


바람이 강의 표면에 새겨진다
난간 높은 마포대교
청년은 수면에 그려지는 언어를 읽는다
갈기 휘날리며 날뛰는 겨울바람
너무 오래 사납기만 했다
저 밑에 오리들 헤엄친다
그것들은 늠름하다
바람을 타고 날 뿐만 아니라
물결 위에 자신의 무늬를 덧씌울 만큼
그러나 청년은 계절마다 바람에 쓸리고
투명한 상처에 어리둥절했고
영혼에는 풍이 들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려는지
날씨는 조금 따듯하고
내일부터 청년은 일정이 없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난간에 손을 뻗어본다

검은 머리카락
읽을 수 없는 무늬로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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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유감

글/시 2022. 2. 19. 21:38 |

학력 유감


아버지가 대학에 다닌다
곧 우리 가족은 대졸자가 둘이다
방통대 학생회장 출마
플래카드 펄럭이는 캠퍼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까마득한 후배다

아버지도 어느새 내 학력을 추월하고
나는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은
십오 년째 작가 지망생
글 쓴다고 저녁마다 술이 고픈
나는 술값 좀 벌어보자고
몇 번이나 아버지 과제 대필했다.

무슨 돈으로 내가 막걸리 마시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거리에서
푸른 담배 연기 뿜어 올리는지
어머니는 모른다

대학영어 낙제한 아버지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일어나던 나는
꼬여버린 우리 집안 학번에
문득 웃었다가
대필값 돌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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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눈물

글/시 2022. 1. 27. 22:59 |

녹색 눈물


이 거리에서 슬픔은 초록빛이다

창동 사거리
하나마트 문 닫을 무렵
당장이라도 얼어 부서질 듯한 하늘
사내는 국방색 코트 속에 오그라들어
건널목 보도에 앉아있다
팔뚝만 한 담금소주 1800ml
열린 병 속 내려다보며
잘못 그려진 초상인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몇 대의 순찰차가 귀 따갑게 지나갔다
곧 눈이 내리면 저들은 사거리 구석에
경광등 켜놓고 잠을 잘 것이다

결빙된 밤안개처럼 눈발 흩날린다
사내는 술병 속 무엇을 들여다본다
탁류 같은 흙빛으로 웃기만 할 뿐
낡은 등산화 위로 하얀 기억들 몰아친다

사내가 잃어버린 슬픔의 방법
나뭇잎 푸르게 인쇄된 페트병
아직 일 리터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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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사람

글/시 2021. 11. 18. 23:09 |

매일 죽는 사람*


 야간버스가 달리고 창밖의 풍경은 계속해서 뒤로만 밀려난다, 종일 서울이 뿜어낸 땀이며 연기며 습기 찬 한숨 따위에 하늘은 새까맣게 흐렸고 그 뒤에 별들은 도사렸고, 오늘은 무너져 내려오지 않으려나 보다, 뒷좌석 사내는 옆구리를 감싸 안고 송장처럼 뻣뻣하게 앉아, 죽어있고, 죽어있는가보다, 성기게 포장된 도로 위에서 버스는 가끔 몸을 벌떡인다, 그때마다 승객들은 덜컥 이를 부딪으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 곧바로 눈을 감는다 아직 종점이 아니고 종점은, 검은 구름 위의 별들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에서 엄습해오겠지, 승객들은 모두 그렇게 믿는다 가로등 불빛으로 점멸하는 얼굴에 웃음인 듯 체념을 띄워놓았다, 뒷좌석 사내는 줄곧 죽어있고, 길은 갈수록 좁고 버스는 더욱 몸을 뒤틀어대는데, 사내는 경직되어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미 종착지가 찾아온 덕인지, 이제 너부러질 일만 남았으니 무너질 밤하늘에 대해서도 내일이면 기점이 될 종점에 대해서도, 땅거미 떼처럼 각자 굴속으로 돌아가 어둠이 걷히지 않기만을 바라는 시민들에 대하여도 걱정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단단히 믿어도 야간버스는 종점에 도착하고 뒷자리 사내는 풀려난 용수철처럼, 느닷없이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한쪽 발은 잃어버렸는지 기우뚱, 기우뚱 버스에서 내리고 계속하여 그렇게, 외로만 구두를 신고 컴컴한 개미굴 같은 골목으로, 남의 다리를 빌려 쓰는 듯 걸어간다 걸어가서, 어딘가 서울이 등진 구석으로 삐거덕삐거덕 사라진다.

 

*조해일, <매일 죽는 사람>,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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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 요양원

글/시 2021. 11. 4. 23:22 |

생폴 요양원


 어쩌다 세상은 온통 화재로 미쳐버렸는지, 새벽에도 안개는 끼지 않고, 밀밭은 녹은 황금으로 끓어오른다, 접은 종이에 불이 붙듯 지평선마저 재가 된다, 사내는 캔버스에 고함을 친다, 밭은 유황빛, 하늘에는 용광로가 엎질러져 있었다, 쏟아진다, 자국만 남은 정오의 정신, 사이프러스 나무에 광기처럼 붙는 불길, 성난 신의 눈동자, 쏟아졌고, 무겁게 일렁이는 밀이삭들, 농부는 낫처럼 허리가 굽었다, 불꽃 속 가을걷이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지러진다, 요양원의 가장 무방비한 들판 위, 사내는 메모로 가득 찬 자신을 뒤진다, 거듭 피고 지는 생활, 평생 밭을 가는 고통을 받으리라는 저주, 그는 기억하고, 태양 아래에 그림자조차 없다, 열과 어지럼증의 틈바구니, 사내는 볕이 갉아먹은 자리를 새긴다, 태양과 사람과, 불길이 날름거리는 풍광, 송두리째, 모조리. 인적이 모두 사라진 복도, 권총을 든 사내가 미술관 벽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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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서

글/시 2021. 10. 15. 22:28 |

역전에서



창동역 1번 출구의 겨울은 줄곧 붉은색이었다

사내가 소주병을 기울이고
포차 천막은 꺾인 날개처럼 퍼덕이는데
석유 히터는 가끔씩
쓸쓸하게 자갈 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불콰한 얼굴들은 표정 없이 번들거렸다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엎어지려는 소주잔을 쥐자
느닷없는 경광봉에 휩쓸려 포차 지붕들은
모조리 도시의 먼 곳으로 밀려났다

창동역 1번 출구 포장마차가 전부 사라진
가로등 불 밝은 멀끔한 광장

미처 취하지 못한 사람들 전철 구르는 소리 아래
공원이 된 폐허를 헤맨다

역사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워 나는
한 잔, 한 잔, 더 어두운 길로만 걸어나가고

테이블 끝의 소주잔
젊은 술꾼의 깡마른 손가락에 붙잡히는데

술로 가득 채운 내 몸뚱어리
다시는 역전할 수 없는 가장자리
무채색의 추위
끝에 서서
붙잡아줄 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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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글/시 2021. 9. 17. 02:06 |

일몰


반투명한 창문 너머
가을날의 태양은
천천히
깊은 한숨 쉬며 멀어져가고
겹겹이 그늘진 건물 안
나는 우두커니 살아있다

깡통처럼 발끝에 채이는 생활
긁히고, 점점 구겨지고
주워갈 사람도, 신도 없어
믿음도 알미늄처럼 색이 바랬다

생활, 생활, 하며 되뇌는
머리는 진흙 뻘 같아
담배나 빼어물며 나
어제 떠난 누군가의 자리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살고

오늘 저녁에도

제 주인 잃은 그림자들
술렁술렁 어두운 골목으로 떠날 테고……

나는 어리둥절, 백치처럼 남아
어디 이정표는 없을까
우뚝 서 있는 철인은
없을까,
그러나 없겠지

천쪼가리 버리듯 하루는 또 하늘하늘 날아가고
나는 전날 눈 뜨고 죽었을 누군가의 묘석
영정에 남은 적막한 그리움
따위를 생각하고 
또 생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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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취(腐臭)

글/시 2021. 7. 30. 01:37 |

부취(腐臭)


매미가 울면 마을은 가난해서
들척지근하게 썩는다

담쟁이넝쿨 까맣게 붙은 벽
도둑고양이는 다 삼키지 못한 계절을
왁왁 뱉어놓고

계단참에 엎질러진 거실
생활의 내장에서 왱왱거리는
아스파탐, 소주 냄새

매미가 울면 온갖 산 것들이
대기에 포자며 정충을 풀어놓아
허파는 차라리 익사를 꿈꾸며 헐떡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새날이 밝으면
먼 데서 날짐승들이
부취를 모조리 쪼아먹으러 올 것이다

그러니 매미가 울어도 가난해도
나는 이끼 짙은 그림자 밑에 자욱한 연기로 서서
백 번의 새벽만 날갯짓으로 오고 갈 것을
생명이 송두리째 썩어 다시 하얗게 탈취될 것을

밤마다 기도하며 하늘로 분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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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피

글/시 2021. 7. 15. 23:03 |

시인의 피


꽃나무가 어떤 꽃을 피우는가는
주로 육신에 도는 수액에 달려있다

개나리는 저대로 개나리꽃을 피우고
장미나무는 싫어도 장미꽃을 피우고
양귀비는 저가 양귀비인 줄 몰라도
눈 따가운 빨간 꽃봉오리를 피운다

제복들이 곳곳의 둔덕을 드나들었다
정원사처럼 무장하고 제초제를 들었다
개천은 제 갈 길만 몇 번이나 겹쳐 흘렀고
하늘은 파랗게 무심하여 가끔 흰구름이나 지어주었다

어찌 되었건 유월에는 각혈만큼 새빨간 꽃잎에
햇빛이 방울져 떨어졌다

북인도의 고속도로 위에서 사흘을 지내고
흙먼지뿐인 휴게소에는 멀대 같은 양귀비
찢어지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 입술 하나를 씹었다

덜컹대며 뼈마디 부딪는 버스 의자에서
아픔도 권태도 죄도 없이
나는 어린 날의 시인들에 대해
내가 삼켜온 핏빛 위안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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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글/시 2021. 2. 4. 22:35 |

자판기


무심하게 흘러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자판기가 서 있다

종로 막걸리집 뒷문과 늙은 보쌈가게 사이 골목
버스가 서지 않는 흙투성이 정류장
대관령 산자락, 염소농장 철책 앞
낡고 정체 모를 자판기들

그들은 사람의 발걸음이 딛지 않는 곳에만
자연스레 피어나는 버섯인 양
먼지와 빛살을 뒤집어쓰고
동전을 먹여도 아무것도 뱉지 않으면서
가끔 하얀 불빛을 깜빡거리기도 한다

상품을 채우던 손들은 어디로 갔는지
매상을 담아가던 장지갑들은 어떻게 됐는지
우뚝 솟아 빈혈에 걸린 그들의 옆통수에는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날카롭게 긁혀 지워져 있다

그러면 나는 꿈같은 열에 들떠 생각한다
숲속에서 자라나는 고고한 자판기를,
그들에게 엉기듯 둘러싼 담쟁이덩굴을
곧 그것들이 피워낼 황록색 사사로운 꽃을,

숲속마다 산맥마다 황량한 언덕마다
솟아나 수액이 도는 자판기들이 매일 밤
그 꽃들을 위해 달무리 같은 파란 빛을 비출 것을,

그렇게 되면 마침내 나는
그들에게로 걸어갈 다리도 동전을 쥘 손도 없어진
활자가 되어버린 인류를
흐뭇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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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주인공을 만드는 방법

 

 

먹물을 쏟아버린 과거는
수백만, 혹은 하나도 없어
잠들지 못하는 낮과 밤에
나는 숟가락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열 살 때
앞자리에 앉은 소녀의 땋은 머리는
어린애의 솜씨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소녀의
본 적 없는 가족에 대해 한 명 한 명 슬퍼했지

예를 들면, 열일곱 살 때
전셋집 옮기기 전 박살 난 문짝들 바꿔 달며
이렇게 화가 날 일이었나, 기억이 선명치 않아
머릿속에 그럴싸한 극본이나 새겨두었지

예를 들면, 스무 살 때
이태원 술집에서 두들겨 맞고, 출구에 내던져져
럼주와 흙의 냄새 풍기며 야간버스 타고 돌아올 때
나는 쇳내 나는 혀로 웃었고, 그날의 일을 짜 맞추었지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난주는 사흘간 잠들지 못하고
날씨는 더럽게 추워 가로수는 빈사의 모습
쓰레빠 고무마저 얼어붙어 맨발을 할퀴고

공기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바람은
담배 끄고 들어가서 자빠져 자라고 한다
그러나 잠드는 방법도 까먹었고, 눈만 감아도
수 없는 예시들이 얼굴 가죽 벗기러 찾아오는데

먹칠 된 과거들은
먹칠 되기 전엔 어떤 색깔이었나
아니, 그런 건 생각지도 말아야지

숟가락, 젓가락, 포크, 버터나이프 따위가
얼마나 날카로울 수 있는지
나는 그런 안전한 생각이나 하며 창문이 또 파랗게 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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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1, 2

글/시 2021. 1. 7. 22:11 |

빈 집 1

 

 

눈 오면 밤이 밝아지듯

빈 방은 춥고 고독한 만큼 선명하다

 

아버지의 붉은 얼굴이 소주잔에

체온을 남기는 것이 그리워

14평 광야 헤맬 때는

언제나 모두가 잠든 시간

 

신이 없으면 모독도 못하듯

법이 없으면 흉악해지지 못하듯

 

나의 집은 항상 빈 집.

 

-

 

빈 집 2

 

 

여름 내내 계속되던 배기가스 같은 기침이 멈추고

의사는 마침내 그것이 폐결핵이었다고 설명했다

펜으로 차트를 두들기는 안개 같은 눈은

결핵에 걸리실 나이가 아닌데요, 사소한 의문을 표하며

내게 가족들의 건강을 물었다

아니요, 누구도 재채기 한 번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 계절 동안 피웠던 담배의 숫자를 셌다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하지 말라는 걸 텐데

 

가을 초입이면 이 거리는 나를 뱉어낸다

사방에 켜켜이 쌓이는 먼지와 재 같은 햇살

병원 앞을 달리던 자동차들은 언덕길 너머

상체가 끊어지고 머플러 소리만 남는다

병원 뒷골목에서 또 한 개비의

담배꽁초와 결별할 때

환자복의 노인들은 휠체어에 실려

빈 통조림 캔에 높은 체념을 쌓고 있다

행인들의 걸음은 병자를 피하고…… 아아,

생물학이여! 나는 들떠 뛰다가

다리가 풀려 세 번 거꾸러질 뻔한다

 

동네 곳곳이 이상하고 무뚝뚝한 모습이라고

지난달, 가족들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젖은 솜이 폐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기침에

혀가 치어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병에게 감사할 일이었다고, 대로 건너의

상가지구를 보며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걷는다

 

등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오후 4

필터를 씹는 습관은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기에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버릇을 고쳤다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나는

이 건물이 올라가는 계단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날개가 찢어진 새들과 광병 걸린 눈동자의

쥐들만 한없이 뛰어 올라가는 꼭대기에

담배 연기에 눌은 노란 벽지도 아버지의 코롱 냄새도 없다

 

그 집에 곰팡이라도 만발해있으면

이토록 내 가슴뼈 속의 무엇이 거치적거리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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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글/시 2021. 1. 3. 18:33 |

닫힌 문


빈 방에서 너는 울고 있고
닫힌 문은 이쪽을 보는 일 없고
내 마음에선 알코올 냄새
함께 눈물 흘릴 방법을 찾고 있다

진눈깨비라도 내려라, 술기운이나 돋게, 했더니
더러운 눈이 내려 거리가 꽝꽝 잠겼다

안주머니에 넣은 손에
영수증 다발 잡혀 나오고, 지폐는 한 장
문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나는
괴물을 만나러 가련다
네 문 앞에서 문을 닫으며, 웃으러 간다

겨울 밤거리
눈 내리는 하늘은 밝게 비웃고
더 많이 취하려고 내 입에선
이빨이 돋고

네 어깨가 슬픔에 무너지던 순간을
이해하고, 비통해하고 싶어
발밑에선 유리 깨지는 소리
단골 술집은 불이 꺼져 있다

그야 세종대왕 한 장으로는
그놈이 내 앞에 앉아주지도 않았겠지만

아아, 사랑하는 네가 여기 있다면
이빨은 소리 내며 웃고
깜깜한 유리문에 이마를 박으며
널 두고 나온 거리는 지옥보다 시려라
심장이 농담한다

술김에 쳐들어갈 친구네 현관도 없고
사랑스러운 네게 마음이 없었더라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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