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얼굴들이 분열되어 있고 각각의 조각이 타인, 그리고 다른 조각들을 위한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존재라는 상태는 참을 수 없이 모순되어 있고 그 어떤 정당성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진실이 민낯을 드러내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편중독자가 되기 전에는 금단증상이 보여주는 세계를 직시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지드가 나타나엘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쓸모없는 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이미 현상들만으로 충만해있고 내재된 실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인간의 영혼이 무너질 때 느닷없이 생겨난 장막이 걷어지고,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공허와 부조리, 무질서, 황폐함을 몰고 오는 것이다. 현상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강박이야말로 이미 완성되어있던 인간의 정신을 부수고 썩게하는 독약이다.
<전세계적으로 5억 5천만정 이상의 화기가 유통되고 있다. 12명 당 한명 꼴이다.
문제는,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키냐는 것이다.>
영화는 작품의 주인공인 무기밀매상 '유리'의 한마디로 시작한다.
이것은 얼핏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영화는 어느 누구의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이미 자신이 논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 비밀스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했지만
실은 폭력에 다가갔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리하여 '유리'는 본성에 거스르지 않는 방향을 선택한다.
우리의 DNA에 내재되어있는 폭력에 대한 욕구와, 그것을 바탕으로하여 발전한 폭력을 이용하려하는 욕구.
본성에 거스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본성은 인간에게 가장 신선한 고기만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개를 조심하려고.
움직이는건 전부 망쳐버리고 약한 개는 싸워서 죽여버리는 개 말야.
좀 더 사람다워지려는 거지.>
유리의 동생 '비탈리'.
지금보면 이 영화는 시작부부터 모든 대사에 복선과 암시를 깔아두었다.
요리를 하고 화주를 마시며 등장하는 비탈리는 자신의 '개'를 억압하고 더 사람다워지겠다고 말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유리에 비해 훨씬 퇴폐주의적이고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비탈리가,
실은 빈민가에서 코카인을 흡입하면서도 양복을 입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무기들을 팔아치우는 유리보다 인간에 가깝다는 것이다.
혹은 인간에 가까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을 억압하려는 한줄기의 의식이 그의 결말이 어떠한 형태일지를 말없이 가리킨다.
<우리 싸움이 아니야 비탈리. 어서, 가자.>
<심지어 내 동족 소비에트와 싸우는 아프가니스탄에도 납품했다.
오사마 빈 라덴에겐 팔지 않았다.
도덕적인 기준 때문이 아니라, 그때는 놈이 늘 수표를 부도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없이 '신선한 고기'만을 쫓는 것만큼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 또 있을까.
유리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누구보다 강렬하게 짐승의 영역으로 돌진-혹은 추락한다.
그리고 자신이 팔아치운 무기들로 벌어지는 전쟁과 살인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라고 일축한다.
이것은 그의 양심을 위한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고의 종말과 같다.
자신의 일과 개인의 죽음이 가지는 인과관계에 대하여 완전히 관심을 끊음으로써 그는 상황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고,
그것은 장사를 성공적으로 가속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짐승은 고기를 향해 달린다. 멈춤없이.
코카인 1Kg과 함께 비탈리가 사라졌을때, 유리는 비탈리가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쳤다고 표현한다.
첫 등장때부터 짐승보다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였기에, 어쩌면 그는 약기운에 힘입어 그의 양심'으로' 도망친 것은 아니었을까?
고뇌할 것이 너무 많을때, 퇴폐는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도주로다.
나는 비탈리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그는 약한 인간이다. 약한 정신을 가졌고 또 동시에 희미하지만 양심도 가졌다.
약한 인간이 자신의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양심과 마주쳤을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는 도망친다. 필사적으로. 알코올, 약물, 섹스, 기타등등.
세상의 온갖 상황과, 그 상황들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고 서있는 일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나는 비탈리라는 약한 인간이 마음에 든다.
그의 수동성과 양심과 도주와 감정과 전락이 마음에 든다.
<I love you. I love you all.>
<왜 항상 망가져 있는거야?>
<망가졌으니까.>
전쟁의 제왕이 저지르는 첫번째 '직접' 살인.
사실 이것마저도 그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양심 때문에? 글쎄, 그는 그저 두려웠던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두려워서 짐승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돌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는 여전히 신선한 고기의 맛을 알고 있다. 그리고 탐한다.
<기억하게 유리.
편을 붙어.>
신념도 사상도 없는 전쟁의 제왕. 돈만 낸다면 어디든 무기를 팔아치우는 짐승.
유리는 무엇에도 거리낄 것이 없기 위해 짐승이 되기를 바랐지만,
사실 인간이 짐승이 된다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도덕적 난제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느 무엇에도 기댈 수 없고 눈을 가릴수도 없다.
모든 문제와 자기 자신의 비합리성, 그리고 모순이 가장 노골적이고 선명한 형태로 달려드는 것이다.
<저주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투명해지는 저주.>
자기모순과 기댈 곳 없는 양심.
저주,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의 간청과 설득.
그러나, 그래도 그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기 이전에, 무기를 판다는 행위 자체가 '유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말로.
그들은 마침내 눈에 빤히 보이는 '인과관계' 앞에 놓여지게 된다.
총을 팔고 돈을 받으면, 사람이 죽는다. 눈 앞에 놓여진 수백명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양복과 돈, 코카인과 '대표자'들에 의해 가려져있던 무기거래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을 비탈리는 견디지 못한다. 그가 '개'를 억제하기로 결심했던 그때부터 결말은 정해져있었다.
<뭘 하는거지?>
<유리를 위한 일.>
초자아에 대하여. 그것이 선험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것인지를 확언할 방도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본성만큼이나 끈질기고, 또 감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각은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리의 담담한 이야기.
<학살은 비탈리가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주에 시에라리온에서는 여섯번의 또다른 학살이 발생했다.
그들을 다 막을 순 없다.
경험상 한 명도 막을 수 없다.>
<"선한자가 행하지 않을때 악이 활개친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말해야한다:
"악은 활개친다.">
분명 이 사회에 있는 어떤 정치적이고 또 결백함을 믿는 누군가는 '비겁'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중요성을 가진단 말인가?
사건과 상황은 항상 일어난다.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옥에나 가라고 하고 싶지만
이미 거기에 계시는군.>
처음에, 나는 이 영화가 누구의 입장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우리는 개인의 시각에서 벗어날때 비로소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개인들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씁쓸한 회의주의와 함께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지구를 상속받게 될 자가 누구일지 알고 있는가?
바로 무기상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느라 너무 바쁘다.
살아남는 비결은 뭘까?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자기자신과는 절대로.>
세계는 넓어진 만큼 난해해졌고, 복잡해진 만큼 누구도 손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상황은 그저 내버려진다. 우리의 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손은? 산수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손이다.
그러나 안심하지 말아야한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들' 속에는 '나'도 '우리'도 없기 때문이다.
유리는 목적 없는 짐승이 되어 계속해서 무기를 판다.
설령 그가 하지 않더라도, 상황은 우리의 손을 벗어난 채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스크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파악도 하기 전에 영화는 '이곳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트로 이후부터 결말까지, 영화가 진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영화는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의 눈앞에 들이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고 자극적인 표현을 절제하면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반복되는 살인행위를 고의적으로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돌려놓는다.
<적기를 격추시킬 때는 어떤가요?
승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들, 어디의 누구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글쎄요,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서로 죽이고 있는데도?
직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비지니스든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를 잃게하고 이익을 내는 쪽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그는 에이스 파일럿이다. 즉 누구보다도 적을 많이 죽이는 캐릭터다.)과 어느 때고 간에 무표정하고 타성적인 얼굴만을 내보이는 동료 파일럿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에게 '과연 이 영화에서는 전쟁이라는 살인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만든다.
오락영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쟁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제인 '국가가 허용한 살인행위'에 대한 고뇌를 이들은 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대해 고뇌할 감정조차 갖지 않는다.
<티쳐를 격추하면 무엇인가가 바뀝니까?
운명이나, 한계 같은 것이...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격추시킬 수 없어.>
티쳐. 절대로 격추되지 않는 '어른 남자' 파일럿.
티쳐의 존재는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규칙을 연상시킨다.
동료 파일럿인 유다가와의 죽음.
그 후 그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배속된, 생김세도 버릇도 유다가와와 흡사한, 아니 오히려 그와 똑닮은 파일럿.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있어 유다가와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재생산되었고, 주인공에게 있어서의 유다가와라는 타인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강제된 영원성.
그들의 내면처럼, 그들의 생활 역시 무감각하고 타성적인 일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식사, 음주, 흡연, 창녀와의 정사, 수면.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얼굴들.
언제나 같은 식당에서 같은 식사를 반복하다가 그들은 언제나와 같은 전쟁을 치루러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바로 그 '언제나와 같은 전쟁'이 벌어지는 하늘이야말로 이 무덤덤한 개인들에게는 '일상'을 분기시킬 기회의 장소다.
<죽여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죽여줄래?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영원히 이대로야.>
그 기회란 바로 죽음의 기회다.
끊임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일상을 부숴버릴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는 절망적인 세계.
그리고 이 단단하게 닫힌 세계는 그들이 가진 '영원히 늙지 않는 아이(킬드레)'라는 속성과 그들이 창공에서 죽음을 맞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들을 재생산하는 회사의 존재로 말미암아 더욱 절망적이고 완전무결한 순환고리로 완성된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이들은 전쟁행위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여유가 많지 않다. 죽지 않는 이들로만 구성된 타인의 그룹은 개인의 실존을 가차없이 막다른 길로 내몬다. 왜냐하면 자아란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가질 수 있는 타인이란 변화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한, 즉 비인간적이고 절대적인 타성의 결정체 같은 것들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영원한 타인들 사이에서 자신도 영원하리라는 막연한 직관을 가질 것이고, 그것은 타성에 대한 그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 것이다.
오직 타성.
그리고 그들이 변화를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인 죽음과 타의적인 죽음 두가지 뿐이다.
쿠사나기. 계속해서 자살을 말하는 인물.
그녀는 과거에 진로우라는 인물을 자살'시켜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든 킬드레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생산'되지 않은 듯 하다.
캐릭터들의 대사와 문맥을 짜맞추어보면 그녀는 적어도 8년 이상을 자살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분명 자신의 자살 이후에도 계속되는, 강제적인 스스로의 영원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너는 살아라.
무언가를 바꾸게 될 때까지.>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쿠사나기에게 주인공은 희망을 말한다.
영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누구보다 강렬하게 존재의 헛됨을 느끼고 있을 킬드레에게,
'무엇인가를 바꾸게 될 때까지 살라'고 막연한 희망을 말한다.
사실 이 막연한 희망이야말로 거의 모든 의식하는 존재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실낱 같은 삶의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