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해당되는 글 316건

  1. 2023.04.03 일요일 1
  2. 2023.03.30 어느 맑은 날에
  3. 2023.03.29 어지러뜨리다
  4. 2023.03.25 지상에서
  5. 2023.03.15 줄담배
  6. 2023.03.12 사상가들에게 1
  7. 2023.03.09 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8. 2023.03.05 책상 밑 어둠
  9. 2023.02.28 여명
  10. 2023.02.26 초상
  11. 2023.02.25 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12. 2023.02.06 아침의 빛
  13. 2023.01.18 연초
  14. 2023.01.14 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15. 2022.12.22 예술가, 백형 1
  16. 2022.11.29 소문에 의하면 그는
  17. 2022.11.23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1
  18. 2022.11.10 의정부시 평화로
  19. 2022.10.27 시월의 어느 1
  20. 2022.04.14 사월
  21. 2022.03.24 봄의 자취
  22. 2022.03.03 낙타 인간
  23. 2022.02.27 바람의 무늬
  24. 2022.02.19 학력 유감
  25. 2022.02.19 아레시보 메시지
  26. 2022.02.10 여행(초안)
  27. 2022.01.27 녹색 눈물
  28. 2021.12.16 <서울 1964년 겨울> 감상.
  29. 2021.12.16 <싯다르타> 감상.
  30. 2021.11.18 매일 죽는 사람

일요일

글/에세이 2023. 4. 3. 17:47 |

일요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약 5초 전까지 하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이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손에 커피잔을 쥐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봄답게 환했고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 2층에는 다른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내가 수십 초 이상 말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진 대화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던 나는 곧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만 열심히 뭔가―그게 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침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대화가 이어질 만한 소재를 찾아서 카페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런 환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얘기지.
 그렇게 나는 문장을 완성 시켰다. 친구는 더더욱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고 있던 말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하루에 물을 2L씩 마셔야 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결국 친구가 이렇게 묻자 나는 본래의 주제를 기억해냈다. 아, 하고 나는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하루에 물을 2L씩은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러한 건강법에 대해 주워들어서만 알고 있는 수준이었고, 매일 2L의 물을 마시는 행위가 어째서 몸 건강에 좋은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미안, 무슨 말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을 뱉었다. 친구는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술이 덜 깼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술을 마신 건 오늘 새벽 3시까지였고 지금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태를, 숙취 때문이라고 친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머릿속의 뇌수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위들이 서로 격벽을 쳐놓은 것 같은 현재의 기묘한 정신상태를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요새 겉옷 입기 애매하긴 해.
 그렇게 대화주제가 바뀌었다. 나는 친구가 굳이 따져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제에 올라 타준 점에 관해 은근히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맥과 당장 깨져버리기라도 할 듯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친구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언어라는 것이 퍽 귀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두 손 가득히 빛줄기를 잡고, 지상을 향해 무자비하게 던져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너는 오늘 뭐 할 거냐? 친구가 물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면 책 좀 읽고, 글 좀 쓰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뒷집 아주머니가 출판사에서 일하신다던데.
 어느 출판사?
 몰라, 모르겠는데,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볼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리고 또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어쩌면 햇빛 때문에 내가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햇빛에는 눈과 피부로 스며들어 뇌를 깨끗이 소독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불 말릴 때처럼…….
 이불 말릴 때처럼. 나는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되풀이해 말했다.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꺼내서 강한 햇볕 밑에 말려놓는 상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카페 2층에는 벌써 50분 넘게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릿세’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몇 가지 연상을 거쳐 사람이 어느 공간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이었다.
 책은 잘 돼가? 친구가 갑자기 물어왔다.
 모르겠는데, 나는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글쎄.
 넌 요새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 사냐.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낸 건데,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 정말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문호던가, 혹은 사기꾼이지,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사기꾼이 잘 벌지.
 네가 사기꾼이라면 누구에게 사기를 치는 건데?
 주로 나 자신에게지 뭐.
 우리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내가 올바른 단어들을 선정하여 의미를 전달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란 참 성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가자, 역까지 태워줄게. 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찻잔을 손에 쥐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자스민 차는 별로 맛이 없었다.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수분 섭취가 건강과 직결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물을……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코트와 잔을 챙겨 일어났다. 나는 입속말로 젠장, 이라고 중얼댔지만 사실 화가 나거나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이 ‘젠장’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딱 적확한 상황이었던 것뿐이다.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그때 친구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오늘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래’라고만 했다. 미세먼지가 나빴고 날씨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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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날에

글/에세이 2023. 3. 30. 17:10 |

어느 맑은 날에


 2주간 내리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며칠 약을 챙겨 먹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구역감과 위산 역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무언가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끙끙대며 이불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한동안 거실과 방을 오고 가며 이 괴기스러운 이질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용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쌓인 책 세 권이 별 의미도 없이 눈에 들어왔는데, 맨 밑으로부터 페터 한트케, 베르톨트 브레히트, 허먼 멜빌의 순서로 책이 쌓여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허먼 멜빌의 책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페터 한트케를 두었으며 맨 위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 작업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잘못된’ 무언가가 다소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헛헛한 듯이, 더러는 백일몽을 꾸는 듯이 나는 도저히 제 컨디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음!” 나는 괜스레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는데, 아주 기겁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색 피부밑에 튀어나온 관절과 뼈, 그리고 불거진 핏줄 따위가 전에 없던 강렬한 형상으로 내 눈에 박혀버린 것이다. 내 손이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나는 거의 30초가량 손을 앞뒤로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크게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내’ 손에 대해 놀라움을 느낀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오히려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나는 내 미국인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소위 ‘매직머쉬룸’이라는 것을 섭취한 적이 있는데, 환각이 사라지고 나자 몹시 이상한 부작용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작용이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그리고 치명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하고 있어서 도무지 눈을 뜨고서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집안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기엔 그다지 넓은 집도 아니지만, 여하튼 나는 방문과 화장실 문 따위를 전부 열어보며 세계로부터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핸드폰을 일주일 넘게 꺼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위장병을 앓느라 도무지 기력이 없어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오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지금 핸드폰 전원을 켜면 아마 부재중 전화가 열 몇 통은 쌓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핸드폰은 그냥 꺼두기로 했다. 나중에 활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냉장고 문을 5번 정도 열였다가 다시 닫았다. 여전히 식욕이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같은 동 303호에 사는 아저씨가 마침 볕을 쬐러 나온 것인지 인사를 해왔다. 그와 만나는 것은 약 2달 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 뒤, 한 대 피우겠느냐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니오, 이젠 끊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티셔츠의 목덜미를 슬쩍 내리면서 목에 난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젠 평생 끊어야겠죠.
 저런, 큰일이었겠네요.
 뜬금없지만 그제야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길에 행인들이 평소보다 많다 싶었다.
 햇빛이 좋네요. 내가 말했다.
 이젠 봄이죠.
 나는 어쩐지 없던 기력마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담배는 다 탔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동생이 침대 구석에 온몸을 쑤셔 넣은 듯한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오후 4시였다. 나는 동생이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 두고 안방 문을 닫았다.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곧 마감을 맞춰야 할 원고를 위장병 때문에 2주 내내 내팽개쳐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날아간 2주를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책 없이 게으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작업용 책상에 앉아 브레히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다시 덮어놓으며 “흠!” 하고 또 괜한 소리를 냈다. 삼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내게는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에는 날씨가 퍽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6월에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요새는 축의금으로 5만 원만 냈다가는 괜히 나중에 뒷담화 거리나 된다고, 그런 얘기를 TV뉴스에선가 친구로부터였던가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멍한 채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6월이 되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길 테지. 중얼거리면서 나는 이상하게 앉은 자세 때문에 골반이 몹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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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뜨리다

글/시 2023. 3. 29. 20:33 |

어지러뜨리다


한낮은 밤을 기대하는 마음만으로 흘러간다
사내는 낮 동안 과연 어떤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세어보고
결국에는 열 손가락 전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서운 불안이 텅 빈 페이지 위에
약속처럼 사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는 날조된 기억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중얼거리고, 까닭도 근거도 없이
악독한 슬픔이 벼락처럼 혈관을 돈다
침침해진 눈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는
그를 보고, 사내의 동생은
저녁을 먹겠느냐고 간단히 묻는다
뜻밖에도 날씨는 선선하고
나무들이 새잎을 창문에 부딪혀대고 또
바로 어제 형광등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

빈 페이지는 굼뜨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간다 또한 우습게도
처음 그 변색을 발견한 것은
사내가 더는
스스로의 직업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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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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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담배

글/에세이 2023. 3. 15. 07:41 |

줄담배


 역 근처의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생쥐 같은 인상을 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구걸했다. 담뱃갑을 열어보니 마침 세 개비가 남아있기에 두 개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 인사도, 떠나지도 않고 그저 멀뚱히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한 개비가 더 있던데.”였다. 이번에는 내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돗대를 가져가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딱히 화도 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역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돗대를 피워버렸다. 그리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남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현금은 이천 원뿐이었다. 어차피 담배 한 갑도 못 살 돈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캔커피 두 개를 사는 데 모조리 써버렸다. 얼마 뒤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역전에 나타났다. 나는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친구는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시야 저편에서 그 노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맞은편 흡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가슴 속에 흙탕물이 흐르는 기분이라, 한 개비를 더 빼물고 불을 붙였다. 젠장,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는 캔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젠장’이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흡연장에서 어정거리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결정했다. “아.” 내가 돌연 떠올렸다. “그 캔커피가 내 마지막 자산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실없이 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술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 작고 생쥐 같은 노파는 여전히 흡연자들에게 개비담배를 구걸하고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리 위로 기어나오는,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간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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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에게

글/시 2023. 3. 12. 19:37 |

사상가들에게


장고하지 말라,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다
먹을 것만을 찾아, 팔십억 인간들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 다닌다
그 대단한 숫자보다, 턱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 발밑에 아무 역사 없이 쌓여있다
땅이 교훈을 주리라 믿지 말라, 의미란
비바람에 무너진 묘비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운율에 맞추어 글 쓰는 일일랑 그만두고
우연히 나타난 생애나 듬뿍 들이켜 취해버려라
우리는 회한할 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리라, 그러니
닥쳐오는 모든 것에 장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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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1.
너희들이 털가죽 없는 살덩이로 태어날 때
세상은 벌써 날고기를 먹는 놈들로 가득했다
너희들이 추운 새벽에 힘겹게 깨어날 때
태양은 너희들을 위해 눈떠주지 않았다.

2.
내가 만난 너희들은 모두 종점 출신이었다
너희들의 생이란 그 삶을 쪼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란 몹시 체계적이며 균등하다고 강론했다.

3.
그러나 땅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밑에 묻힌 자들은
혀도 입술도 썩어 흙이 되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기에
너희들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4.
너희들은 3월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끌고
누구도 비웃을 수 없도록 길고 어렵사리 달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느 닫혀가는 순간에
과연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5.
나는 미로 한복판에 수십 년째 퍼질러 앉아
이제는 사망기사란도 사라진 신문 따위를 생각한다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터트릴 웃음에 관해 생각한다.

6.
오만한 나는 아직 젊어,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나 또한 너희들처럼 종점 출신으로
종점이 될 정거장에서 벗어난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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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밑 어둠

글/시 2023. 3. 5. 16:29 |

책상 밑 어둠


그곳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늘진 눈앞에 벽돌처럼
두꺼운, 책 하나 펼쳐놓고서
읽을 수도 없는 수많은 단어
군인들처럼 줄지어 섰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눈은 가만히, 페이지에 떨어트리고
불 밝은 거실에는 소란한 잡음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나는 모조리 듣고 새긴다
밤은 모두가 저주하는 시간
말하지 않고 눈에 담지 않고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그렇게 나는
잠드는 법을 영영 잃어버렸다

지저분해진 책상 한구석
흰색 졸피뎀 푸른 트리아졸람
누군가의, 잠들어 꿈꾸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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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글/시 2023. 2. 28. 09:05 |

여명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창문의 방풍재를 뜯어내며
꺼림칙한 냄새가 난다, 고
사내가 중얼거린다
매일이 겨울인 북쪽 나라에선
하늘도 꽝꽝 얼어, 이런
생선 비린내 따위는 나지도 않겠지

팔은 창틀에 걸치고, 오늘도
기어코 살아있을 예정
적색 태양 붉은 구름
물고기 같은 사내의 눈에
황동빛으로 둔탁하게 비친다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그러고 보면, 아주 예전
수조에 키우던 금붕어
함께 살던 남생이에게, 몸통
반절을 뜯어먹히고
헤엄치고 있었지

반토막으로, 지저분하고 아둔하게
헤엄치고 있었지,
라고
사내는 생각하고
이내 내다보던 창밖은
새빨갛던 구름 하늘 덧없이 푸르러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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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글/시 2023. 2. 26. 14:11 |

초상


1.
 언덕 중턱에는 성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지하실부터 시작해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는 어렸고 뛰어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새엔가 성당 앞마당에는 하얀 성모상이 세워졌다. 가끔 젊은 신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숭고함 따위를, 우리는 언덕을 오르며 가슴 속에 썼다 지우곤 했다.

2.
 술과 담배와 약 따위로 얼룩진 젊음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없었다. 아침인가 하면 밤이었다. 미래를 믿지 않는 용기로 나는 숨 가쁘게 살아있었다. 변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고 불경을 읽었다. 죽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내 육체로 숨을 쉬었다. 내게서 지독하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났다. 방 곳곳에는 늘어진 술병과 끔찍한 시취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플 때는 죽을 만큼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3.
 그 언덕에 오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톨스토이를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자살한 소설가들이 귓속말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해가 뜨면 행인들을 보러 나섰다. 그들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도망쳐 들어왔다. 내 책은 쓰던 중에 고리타분해졌다. 젊은 신부가 얼마나 늙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성모상이 보고 싶었다. 대리석의 불투명한 흰빛을 다시 스치는 시야에 담았다가 잊어버리고 싶었다.
 밖은 새벽 네 시. 길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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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어제는 몹시도 술잔을 비웠습니다
전날도, 그 전날도
새벽에도 등 밝은 어느 맥주집에서
벌써 2월도 끝나가는데, 그 집 창문에는
성탄절 램프들이 깜박거리며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고
나는 코트의 지퍼를 목덜미까지
바짝 여미고, 황금빛
황금빛 잔을 연달아 입으로 옮겨가고
그러나 누구와 마셨는지
어느 누구와 장대한 허풍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술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을
비싸고 덧없는 안주처럼 주워섬겼는지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게에는 어느새 우리밖에
누군지 모를 우리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마시고, 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자비하게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귀청 떨어질 웃음소리를 내다가……
멍한 채로 나는 아직 동트지 않은
어렴풋이 가로등 빛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태웠습니다
늦겨울 추위에 만취한 몸은 떨리고
나는 연기를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없이, 다만 술은 계속 내어와 지고
또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나는 마시고 있는지, 몰래
눈앞의 표정 몰래 세어보며
알코올에 붉어진 얼굴과 눈동자로
도대체가 낯모를 눈앞의 그 얼굴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바라보는 것입니다
해는 곧 뜰 터이고, 인조가죽 지갑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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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빛

글/시 2023. 2. 6. 16:05 |

아침의 빛


태양은 쏜살같이, 잠든 머리 위를 스쳐 갔다
헐떡이는 폐부를 문지르며 커튼 자락 잡아당기자
창틀에는 이미 겨울밤 피어올라 있었다
검은 창문에 비친 얼굴은 희끄무레하였다

주차된 차들 위로 밤빛 무겁게 비춘다
잠옷 차림으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가로등 주광색이 흰 연기에 물먹듯 스민다
메마른 바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읊조리고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며,
까닭 없이 슬픔은 시작되었다 다시
니코틴 따위가 혈관 곳곳으로 퍼지고
건널목 너머 주택에 켜진 형광 불빛만으로도

나는 그만 장초를 버린 심정이다, 한 모금
한 모금 그 형광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 황금빛 태양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지면
이 뿌리 없는 서러움도 재가 되려는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리퍼 끄는 맨발은 아프게 얼고
겨울은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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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글/시 2023. 1. 18. 17:17 |

연초


흐린 창밖에 싸라기눈 내린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벽시계는 수년째 밤
9시 58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 독서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나는
책들이 단단히 물고 있는 총 아홉 개의
빛바랜 책갈피들을 뽑는다 신중히
책상에 모아 담뱃갑과 라이터로 눌러 놓는다

하늘에서 눈 내리듯
바닥에서 안개 솟는다

아득할 만큼 많은 연기를 마셨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안구는
희뿌연 연무로 가득 찼다
그렇게 몇 자의 탈력이며 좌절들을 적어놓고 나는
얼마나 오래 으스러지도록
고독과 껴안고 살았는지
늑대처럼 고고하게 울부짖지도 못하며
움츠러들어 왔는지
시계를 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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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그러니까 전날 소주를 마시고
또 뭔가를 마시고
이유도 없이 흥겨워 그는
또 무척 슬퍼했다

세상의 표면에는 밤빛 산란하는
무지갯빛 유리벽, 당장
깨질 듯이 얇게 덧씌워지고
겨울바람 더는 날카롭지 않았다

아침 한숨은 프레스기의 허덕임처럼
연달아, 주기적으로 솟아 나온다
지퍼가 터진 가방에는 또 한 병의 술
술, 차갑게 식어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중얼거리는
마음을 병 안에 접어 넣고
한 칸 한 칸, 그는 다시
비좁은 방에 유리벽을 세운다

언제고 깨져버릴 휘황찬란한 벽들 안에
황제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죽어있고
오로지 나는 살아있어, 소독약 냄새 나는
조소를 뱉는다 그는 벽들 뒤로 흐려져 간다

태양은 또 제멋대로 떴으나
밤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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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백형

글/시 2022. 12. 22. 10:42 |

예술가, 백형


눈 깔린 길 걷자 태양 떠오른다
하얗게 서리진 풍광 날카롭게 비추는데
나는 망월사역에 술 얻어먹으러 간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야, 백형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니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술 마시러 간다
칼국수집에서 우리는 맥주를 잔뜩 마셨고
점심 먹는 손님들 가끔 흘낏하고
이쪽을 보곤 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붉게 붉게 달아올라
겨울 추위도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싶었다
인문학의 쓰레기통 같은 백형의 집
우리는 더 마시고 더 소리 높여 미래
미래를 떠들어대고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백형은
점점 취기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는 잘 될 거야, 그럼, 잘 될 거야
나는 맥주를 더욱더 위장에 내 안에 쏟아붓고
다른 수가 있겠어, 농담하듯 잔을 부딪치고
또 마시고, 턴테이블에 재즈 음반을 걸고 또
물론 잘 되는 수밖에 없다고 웃어넘기고

잠든 백형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얼음송곳처럼 찔러왔다
전철 승객들은 오후 3시 만취한 남자를 어떻게 보았더라, 내 기억엔 아무도 없다
물론 잘 되고야 말겠지, 중얼중얼 술 냄새 지독한 한숨을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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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의하면 그는

글/소설 2022. 11. 29. 22:06 |

소문에 의하면 그는

 

 

1.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시에 나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라는 인종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심지어는 훈련된 관찰력까지 있다. 그들은 내 거짓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으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 세 번의 시도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집 천장에 두 개의 시꺼먼 구멍이 나버린 일을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한강 공원 한구석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물을 토하고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도대체 누가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매번 마지막이어야 했을 잠에서 깰 때마다, 올가미 안에 머리를 넣으며 스스로에게 미소 지었을 때마다, 공중에서 자신의 몸무게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마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매번 나를 배신했다. 이것은 정말로 저주라도 받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선택할 죽음에 대해 어쩌고저쩌고하며 옹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끝날 것이다. 나라는 세포들을 가득 담고 움찔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단단했던 그릇도 이제는 깨질 것이다. 내 오른손에는 소주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가 있고 주머니에는 손잡이까지 금속으로 된 나이프가 있다. 우선 위장에 소주를 들이부어, 내가 새로 맛볼 고통 때문에 스스로 망설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칼은, 사방에 널린 게 콘센트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시도로 엉망진창이 된 몸이 전기에 한껏 지져지면, 아무리 여태 버텨왔던 몸이라고 해도 생명이 남아날 리가 없다.

 우선은 방으로 돌아가 소주를 따야겠다.


2.

 도시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그 소문은 너무 구체적이라서 사실상 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것 같았다. 내용인즉 여섯 번의 자살시도를 실패한 사람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 번의 음독자살을―첫 번째와 두 번째는 수면제 과용이었으며 세 번째는 메탄올을 들이켰다고 한다― 시도했으나 매번 며칠 뒤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두 번 목을 매달았으나 첫 번째는 실링이 부서져 내렸고 두 번째는 천장 타일이 뜯겨나오며 떨어졌다. 마침내 그는 모두가 그렇게 하듯이, 마포대교에서 난간을 기어올라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곧 살아있는 채로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소문이라기에는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덧붙여 그가 드디어 성공하고 말 일곱 번째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도대체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나돌고 있었다. 애당초 이상한 것은 왜 이런 이야기가 소문이라는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뉴스에까지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신빙성 있는 루트로 이야기가 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크게 신경을 쓸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도시 괴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이 좁고도 넓은 도시에서 내가 소문의 주인공과 만나게 될 가능성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 불쌍하고 안타까운 누군가가 일곱 번째 시도를 성공시키든 그러지 못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한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벌써 직장을 구하지 못한 지 2년이 지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처음 한해는 분명 아무리 시도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뒤부터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저금해두었던 돈만 천천히 까먹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 일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흐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발견하고 만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일 년 사이에, 내게는 더 이상 삶을 헤쳐나갈 그 어떤 의욕도 원동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나에게는 가족도 없고 내 삶에 있어 중요하게 여길 만한 ‘그 무언가’도 없다. 애당초 멀쩡한 모습으로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목표도 목적도 없는, 오로지 관성에만 의지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일 년간의 백수 생활에서 확연하게 깨닫고 만 것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날은 오늘이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 생각 중에 있다. 다만 그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내게 약간의 교훈을 주기는 했다. 정말로 확실하지 못한 방법이란 계획의 나머지 부분을 운에 맡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비닐봉지에 소주를 가득 담은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을 떠올리는 데 알코올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3.

 그들이 서로를 지나치고 있다. 소주를 잔뜩 들고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처음 남자가 졸피뎀 한 병을 입안에 쏟아부었을 때 나는 평소처럼 수거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도 많이 봐온 장면 중 하나였고, 일상처럼 행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남자의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길거리를 거닐다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 마냥, 버릇처럼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졸피뎀뿐만이 아니라 트리아졸람이 가득 담긴 병을 발견했고,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쌓아놓은 복사기 토너들을 발견했고, 서툴게 매듭을 지은 올가미부터 아주 완벽하게 길이를 맞춘 밧줄 매듭까지 온갖 것들을 발견했다. 그 더럽고 엉망인 방 안에서 체계가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물건들뿐이었다.

 그때 내게 한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낙엽을 치울 때도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단번에 자루에 담는 법이다. 나는 이 남자가 빗자루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이랄까, 계획이 완벽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영감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수면제를 한 병 삼키고 10분도 되지 않아 남자는 휘청거리더니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나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누군가가 그의 방으로 들어와 응급차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그다음에도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고, 다시 그랬고, 다음엔 천장의 실링에 약간 장난을 쳤으며,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에게서 약간의 장난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정확히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계획하고 있던 일이었다. 나는 내가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살중독자는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길에서 자는 이들, 진심으로 웃지 못하는 이들, 손톱을 씹는 이들에게 남자의 이야기를 속삭였다―이 일을 하면서 나는 아주 예전에 만났던 어떤 학자를 떠올렸는데, 그 이야기는 지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뜨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남자가 일곱 번째 헛수고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첫 번째 성과를 찾아냈다. 그는 원래부터 자질이 있었으나 ‘소문’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에 대한 방비를 다 풀어놓은 상태였다. 나는 위에서 낙엽을 치우는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남자의 일곱 번째 시도에도 절망한 실업자의 첫 번째 시도에도, 나는 결과물을 쥐여주지 않을 것이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계속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아무도 수거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 모두가 죽음이란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허상 같은, 그야말로 거짓말이나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끼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낙엽은 모조리 한 군데에 모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벌써 몇몇 동료들이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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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이것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충고나 조언도 없다. 애당초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작가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언과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용서다. 말하자면 단테의 <신곡>이 실용서였고, 밀턴의 <실낙원>이 실용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도착했다. 어쩌면 ‘떨어졌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내가 걸어온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갑자기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때 나는 어둠 속에서 초원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 같은 인영을 발견했다.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금발 머리를 가진 외다리 청년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휘영청 밝은 보름달 덕분에 그의 머리 색깔과,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청년은 눈을 감고 있었고 만취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린 채 풀밭에 누워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 생김이어서 짧게 자란 수염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내가 묻자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있던 화약 더미가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어조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욕설과 저주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정체불명의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채 그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가던 길을 계속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가 내뱉던 괴성과 욕설이 언젠가 들었던 프랑스어와 닮아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건을 뒤로하고, 약간 언덕진 초원 저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건축물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솟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불이 밝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축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과연 건물인지, 사람이 살고는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초원에 난 길을 걷는 와중에 나는 처음에 만난 외다리 청년처럼 풀밭 곳곳에 늘어져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유령처럼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외다리 청년에게서 교훈을 배운바, 그들에게 다가서서 말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 모두가 남자였고, 각각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어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의 다양성 때문에 나는 언덕 저편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과연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낮은 언덕을 넘어가자 그곳은 역시 마을이 맞았다. 나무로 건축한 단층이나 2층짜리 주택이 수도 없이 밀집해있었다. 마을에 딱히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초원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 어느 지점부터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풀밭에 나동그라진 사람의 수가 줄어있었을 뿐이다. 울타리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을의 초입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와 아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검은 머리털이나 동북아시아인 특유의 얼굴 형태가 새삼 내게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어느 건물 벽에 기대선 채 끊임없이 자신의 두 손을 서로 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일본인인 듯했다. 다행히도 나는 조금이나마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여기에는 불이 없습니다.
 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손가락과 겁먹은 듯한 표정은 정신에 안타까운 상처가 있는 사람 특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미 상기했듯 한밤중임에도 온 마을에 달빛 말고는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과거에 읽었던 코맥 매카시의 어떤 작품을 떠올렸다. 인류문명이 멸망해버린 세계를 다루는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잠깐 잡념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새까만 광경과 일본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내 상상력을 부풀린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이 마을로 ‘불’을 운반해올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래된 습관 때문에 생긴, 관념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간 나는 이 마을의 중심으로 가면 광장이 있으려니, 광장이 있다면 더 멀쩡한 사람과 만날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늘을 보니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지를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불쌍한 일본인 사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들은 좁았고 제대로 관리되어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지저분한 길목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통행인이나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불쌍한 일본인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자주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을에 광장 따위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이 마을에는 중심이 되는 구역조차 없었다. 그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밀집해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수도 없는 길목들이 겹쳐졌다가 나뉘어지고, 또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일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정점에 달할 즈음에, 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다.
 어느 건물의 계단참에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도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본 일이 있었는데…… 맙소사, 그는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책에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나는 순간 귀신에 홀린 듯, 계단참에 올라앉은 그에게로 달려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때 나는 마땅히 이 마을에 관해 물어봐야 했을 실제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과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무어라, 높은 목소리로 외쳐대기만 했다. 그러나 그 늙은 사상가는 완전한 몰이해의 표정으로 내내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몇 분 뒤에야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제정 러시아의 문호가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다소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약 이 마을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 맞다면, 그렇기에 이곳에 불이 없는 것이라면. 나는 몇 가지 생각을 거쳐 진실을 확인할 한 가지 방도를 찾아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는 지극히 한정되어있고, 그마저도 복잡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단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뿐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외국인의 귀에 얼마나 부정확하게 들릴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나는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내 곁에 초라하게 쭈그리고 앉은 대문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니콜라이 고골.
 노인은 저 멀리 있는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나는 이미 거의 진실에 가까워졌다. 더 이상 묻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이름’을 나열했다. 19세기로부터 조금씩 멀리,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금씩 멀리 향하는 이름들을 말이다. 키르케고르부터 카뮈까지, 셰익스피어부터 피츠제럴드까지……. 이름을 들은 노인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더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을을 보라는 듯 손바닥을 옆으로 저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절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환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마을에 자의로 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숲을 빠져나온 후부터 요만큼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하늘에 유리구슬처럼 떠 있는 새하얀 보름달을 가리켰다. 그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인본주의자가 마을 입구에 있던 일본인의 말을 부정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써 탁해진 눈동자로 노인은 미간에 주름을 짓고,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었다. 이제 모든 절망이 확실해졌다. 마을 초입의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내 귓속을 향해, 지금까지 듣지 못하고 있었던 무수한 소음이 기어 들어왔다. 애벌레가 나뭇잎 먹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시킨 것 같은 소음이었다. 이 거대한 마을 전체가 실낱같은 숨으로 비명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그것은 내가 처음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소리였고,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사방팔방에서 멈추지 않고 들려온 소리였다. 마을의 모든 목조건물 안에서, 그 건물들의 작고 좁은 방 안에서, 그 작은 소리들은 겹쳐지고 공명하며 그야말로 이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각사각, 사각사각하며.
 나는 공포에 질린 채 구르듯이 계단참을 뛰쳐 내려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그 좁고 더럽고 엉망진창인 길들을 있는 힘껏 역방향으로 달렸다. 가끔 멀거니 서 있던 사내들이 어깨에 치였으나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마을 밖으로, 초원으로, 언덕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그 끔찍한 소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각사각하며, 내 인생 전체에 들러붙어 있던, 마침내는 삶을 모조리 갉아 먹어버린, 그 오래된 소리가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쉬며 내가 나왔던 숲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숲은 빠져나왔을 때보다 더욱 어두컴컴했다. 나는 다시 외다리 청년과 만났다. 그러나 내가 나왔던 그 숲길은 찾을 수 없었다. 아주 빽빽하고 울창한, 새까만 숲이 벽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외다리 청년은 모로 누운 채,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안다. 그는 태양으로 걸어 올라가려던, 나쁜 피를 가진 시인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글에는 조언도 충고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펜을 긁는 소리가 이미 우리의 삶을 먹어치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명성과 존경이, 또한 모든 실패와 무관심이 그 소리와 함께 이곳으로 온다. 살아있는 피부에 열기를 전해줄 불꽃조차 없는 이곳까지 와서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리가 없다. 우리가 멈출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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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평화로

글/시 2022. 11. 10. 17:09 |

의정부시 평화로


그는 자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한다
하얀 석영처럼 해가 빛나고
거리에 비애가 자라나기에는
아직 이른 오후 다섯 시
그는 어디서 술에 취했을까
멀리 기름종이 같은 하늘 올려다보며
내쉬는 한숨에 에탄올 냄새 섞여있다
따개비 무리 같은 재개발 지구를 지나
왁자한 대학생들의 희멀건 윤곽을 피해가며
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왔다
이건 고독을 비껴가는 방법이야, 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탁한 명정
늦가을 바람이 일고 눈꺼풀이 감기고
앞으로 며칠간 그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가는구나
골목 울타리에 기대 손안에서
애먼 담뱃갑만 돌릴 때, 바닥없는
밤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늠름히 걸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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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글/시 2022. 10. 27. 18:00 |

시월의 어느


자꾸만 구역질이 난다
아 하고 성대를 울려본다 나는
어제부터 말한 기억이 없다

거리 위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우듬지 주변엔 창백한 가을 하늘
멀고 낯설고 까마득히 흔들리는데
곧 눈은 시리고 벌겋게 차오른다

흐려진 눈동자와 안경 너머로
찡그리고 바라보아도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그저 종일 앉아있던 방안이 어둑하고
너무 오래 하늘과 마주 보지 못했고
익숙지 않은 미제 담배가 독하고 맵고
찬 바람에 온몸이 팽팽히 굳은 탓이다

방으로 돌아와 전등을 켜니
눈동자는 다시 붉게 떨려오는데
여기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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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글/시 2022. 4. 14. 23:22 |

사월


삼거리에 벚꽃잎 마구잡이로 흩날린다 친구는
군시절 생각난다고 욕설을 뱉는다
그제야 나는 가게 앞 비질하던 돼지갈비집
사장님을 생각한다 보도블록 위에 짓밟혀
갈색이 된 목련을 생각한다 매일
건물 앞에 쌓이는, 명함 같은 찌라시들을
생각한다 가을마다 바빠지는
환경미화원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월의 둘째 주
친구 모두 정장하고 걷던 청명한 식장 앞
꽃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과 연인들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날만은
진 꽃잎이 썩어 짓무르리라는 생각 따윈 하지 말자고
아무도 몰래 다짐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벚꽃도 낙엽도 치울 일 없이 살아오던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무엇이던
끝에는 하수도로 쓸려가리라고
음울한 상념만 중얼거리던
내 굴곡 없는 손마디가 보이고
벚나무 심어진 부대에서 봄을 보낸 친구에게
할 말 없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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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자취

글/시 2022. 3. 24. 23:10 |

봄의 자취


봄이 당신을 데리고 갔다
그곳은 아주 먼 데에 있다
당신과 함께 가버린 봄에는
시간에 새겨지는 풍경 소리
적송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편 하늘에 스러지는 노을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당신과 손을 겹친
안경을 쓴 젊은 청년이 있다

당신이 간 머나먼 곳에
어떤 풀벌레가 방울처럼 우는지
어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지
어떤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는지
나는 알래야 알지 못한다
그곳은 삼천대계가 당신의 회색 눈동자고
새벽처럼 미소 짓던 당신의 침묵이리라고
외투를 여미며 쓸쓸히 공상해볼 뿐이다

당신이 봄과 함께 멀리 가버리고
이 땅에는 십 년 동안 마른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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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인간

글/시 2022. 3. 3. 22:50 |

낙타 인간


암석과 모래 위로 한 남자가 걸어간다
야윈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드러난 정강이는 비척비척 걸어간다
아무도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모른다
머리 위로 녹은 황금이 쏟아져 내리고
발자국마다 암염조각이 바스러진다
모래바람은 속눈썹만을 더욱 자라게 한다
아무도 그의 눈동자를 본 적 없다
모래 위에 자국도 남지 않도록
발바닥은 굳은살로 넓고 평평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 나섰으나
모래바람은 흔적도 이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주황색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가
용광로인 듯 끓는 태양에게서 몸을 피한다
까뮈의 배교자처럼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스스로 다가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 그는 다시 떠나야 한다
이제 땀도 흘리지 않는 피부 밑
끈끈한 피는 바깥세상의 폭염처럼 고함친다
무언가 분명한 것, 아마 사막의 끝에
틀림없이 거기 있을 무엇을 울부짖는다
점점 그는 걷는 현상이 되어가고
눈물로 허비할 수분은 허락되지 않고
아무도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막과 하나 될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그 남자 역시
자신이 울고 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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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늬

글/시 2022. 2. 27. 00:05 |

바람의 무늬


바람이 강의 표면에 새겨진다
난간 높은 마포대교
청년은 수면에 그려지는 언어를 읽는다
갈기 휘날리며 날뛰는 겨울바람
너무 오래 사납기만 했다
저 밑에 오리들 헤엄친다
그것들은 늠름하다
바람을 타고 날 뿐만 아니라
물결 위에 자신의 무늬를 덧씌울 만큼
그러나 청년은 계절마다 바람에 쓸리고
투명한 상처에 어리둥절했고
영혼에는 풍이 들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려는지
날씨는 조금 따듯하고
내일부터 청년은 일정이 없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난간에 손을 뻗어본다

검은 머리카락
읽을 수 없는 무늬로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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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유감

글/시 2022. 2. 19. 21:38 |

학력 유감


아버지가 대학에 다닌다
곧 우리 가족은 대졸자가 둘이다
방통대 학생회장 출마
플래카드 펄럭이는 캠퍼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까마득한 후배다

아버지도 어느새 내 학력을 추월하고
나는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은
십오 년째 작가 지망생
글 쓴다고 저녁마다 술이 고픈
나는 술값 좀 벌어보자고
몇 번이나 아버지 과제 대필했다.

무슨 돈으로 내가 막걸리 마시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거리에서
푸른 담배 연기 뿜어 올리는지
어머니는 모른다

대학영어 낙제한 아버지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일어나던 나는
꼬여버린 우리 집안 학번에
문득 웃었다가
대필값 돌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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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시보 메시지

글/소설 2022. 2. 19. 21:33 |

아레시보 메시지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20분이 넘도록 구토를 하고 있을 동안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도 도착한 문자메시지는 한 건도 없다.
 ‘들어오세요. 저 종민이예요.’ 3년 동안 저장만 되어있던 번호로 다시 한번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답장을 바라고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사실, 진즉에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더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번호는 분명 바뀌었으리라. 3년 전에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더니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엉뚱한 사람의 전화에 도착했거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전파 상태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그는 기억한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시댁에 전화를 하지도 실종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간 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그것만으로 상황이 매듭지어졌다는 듯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도 하고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콩나물국 따위를 끓여 찬밥을 말아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당황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생계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또한 눈앞에 놓인,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돗물로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았다. 눈이 온통 충혈되고 얼굴에 그늘이 진, 퀭한 인상의 그 젊은이는 평판 높은 K 공과 대학의 장학생이었다. 참 성실도 하지,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거울 위에 달린, 누렇게 물때가 낀 방수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술집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제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방 이불에 누워있었다. 평일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날 퇴근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보다도 유난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부엌과 안방의 경계에 마냥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 어둡고 퀴퀴한 방 한구석에 돌무더기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를, 마찬가지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버린 이후로, 이제 이상한 일이라고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지갑에는 팔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사흘 전 어머니가 용돈으로 쥐여준 이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밖으로 나가, 가로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며 주차되어있는 승용차들을 지나쳐, 주택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늘 왁자한 소리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노가리 1000원’. 가게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간판이 붙어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천 원짜리 노가리와 삼천 원짜리 소주를 시켰다. 한 잔,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더욱 느린 속도로만 마셨다. 눌어붙은 기름과 사람 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팔만 원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는가. 어느새 새벽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이 오면 경사로가 많은 이 동네에서 한두 사람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추위에 눈과 코가 빨갛게 얼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어두컴컴한, 10평짜리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맡아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국이 상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냄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그는 삼만 원어치 술을 전부 게워냈다. 산책간 아버지가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술기운 속에서 생각했다. 슬슬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휴대전화 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한 집안에선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비강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비누라도 먹으면 냄새가 지워지겠지, 알코올 때문에 회로가 엉켜버린 머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로즈메리 향밖에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는 화장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어머니는 그가 술집으로 도망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산책 중인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술에 취한 손가락이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세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피로하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직도 비누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이제 그만 잠들어버려야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일이야 오든 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눈동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불분명한 잔무늬를 보고 있다. 지난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그의 술 취한 머리가 천천히 정리하려 한다. 그는 작년 교양과목에서 배웠던 어느 서글픈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린다. 그것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돌며 사지를 천천히 굳게 하고 있다.
 1974년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서 쏘아 올린 메시지는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수신하기를 기대하고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왕복 5만 년이 걸리는 메시지에 과학자들이 기대한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전파를 송출한 천문대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행위로 벌인 프로젝트였다. 전파를 받을 누군가가 있든 없든, 답신이 오든 오지 않든 처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취기와 구역질의 산란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의식이 떨어졌을 때, 그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휴대전화의 메시지 착신음을 듣는다. 그러나 굳이 깨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와 침묵이 방안의 낡은 가구며 두 사람을 검은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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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초안)

글/에세이 2022. 2. 10. 22:49 |

여행


 24살 때, 나는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3주 정도를 머물렀다. 그때까지 내게 여행이란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돈이 생기면 현실에서 도망치듯, 평소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의 여행은 차례차례 나름의 체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데사의 가을 하늘은 눈에 띄게 높고 투명했다. 그 밑에는 색채 없는 건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웅크린 것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유난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친구 율라이아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2년간 월급을 받아 저금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전전해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율라이아가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말을 꺼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몇 번 미국 남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이토록 큰 땅덩어리에 갈 곳도 구경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오데사는 더욱 볼 것이 없는 동네였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에 몰개성한 주택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아침이 되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돌아와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첫 주부터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정오 즈음 되면 잠에서 깨어, 씻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준 예비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줄담배를 피우며 마냥 걸었다. 행인도 없어 한산한 거리를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달렸다. 가끔은 큰 길가의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서는 늘 담배를 물고 다녔던 것 같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주라서 담뱃값이 싼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고, 친구와 잡담을 하다 잠들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니 당연하다는 듯 생활이 불균형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저녁에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굉장히 걱정을 끼쳤다―서(西)오데사의 도심을 한밤중에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벽마다 인적도 없는 시가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층이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거리를 꺾어 들어가는데, 골목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작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인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무슨 말을 외쳤다.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다. 남부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로 그녀는 ‘거기 아시아 사람, 뭘 하고 있어?’ 라고 내게 묻고 있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자리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직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꽃이 일렁이는 드럼통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어놓은 쇼핑카트를 드럼통 옆에 세워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관광객이 밤중에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핫도그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안 것인데 그녀는 드럼통에 피워놓은 불로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무슨 담력이었는지, 좋다고 대답한 나는 그녀와 핫도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내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음절들이었는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는 카를라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담배를 피우며, 미국에서 노숙자로 사는 것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는 곧 닥쳐올 겨울을 대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데사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은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다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잠자리까지 빌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나는 카를라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당장 위험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정신질환이나 중독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20달러 지폐를 하나 건넸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문제에 대해 미국은 유난히 논란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입장과 상황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나은 선택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라는 진심으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마워했다.
 나는 친구의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싸구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친구와 나는 식사를 하러 근처의 팬케이크 식당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친구는 자신이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텍사스를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창 너머에서 카를라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무 옷이나 마구 겹쳐 입은 사람들이 서넛 거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족한 듯 그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떨떠름한 얼굴로 농담인 양 말했다. 자신은 반년을 여기서 살았어도 친구가 없는데 너는 벌써 길에서 친구를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율라이아에게 대단히 폐를 끼쳤구나 싶다. 지금 그는 인디애나에 살고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지 2년 정도 되었다. 카를라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에 성공했는지, 아직 살아있을지, 확인할 방도도 없다. 다만 그날, 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게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가지 주제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 아칸소까지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사정사정하며 몇 달러를 빌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져버린 인도계 소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수염이 새하얀 흑인 노숙자 조나단, 북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떼로 몰려오던 헐벗은 아이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수공예품을 기를 쓰며 팔려고 하지만 그냥 주는 돈은 못 받겠다던 네팔의 잡상인 등.
 이처럼 외국을 갈 때마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공항에 내려도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보다는, 시장 골목과 상업 지역으로 먼저 발걸음이 향한다. 그런 버릇이 시작된 것은 카를라와 만난 뒤부터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의미가 명확해졌다. 나는 박물관이나 고건물을 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낯선 거리에서 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 떠난다.
 사람들은 호텔이나 관광버스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이방인이 되어 스며들면 그 거리는 가끔 고향보다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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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눈물

글/시 2022. 1. 27. 22:59 |

녹색 눈물


이 거리에서 슬픔은 초록빛이다

창동 사거리
하나마트 문 닫을 무렵
당장이라도 얼어 부서질 듯한 하늘
사내는 국방색 코트 속에 오그라들어
건널목 보도에 앉아있다
팔뚝만 한 담금소주 1800ml
열린 병 속 내려다보며
잘못 그려진 초상인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몇 대의 순찰차가 귀 따갑게 지나갔다
곧 눈이 내리면 저들은 사거리 구석에
경광등 켜놓고 잠을 잘 것이다

결빙된 밤안개처럼 눈발 흩날린다
사내는 술병 속 무엇을 들여다본다
탁류 같은 흙빛으로 웃기만 할 뿐
낡은 등산화 위로 하얀 기억들 몰아친다

사내가 잃어버린 슬픔의 방법
나뭇잎 푸르게 인쇄된 페트병
아직 일 리터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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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이야기는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익숙하리라는, 어느 흔한 포장마차에서 시작된다. 오뎅과 군참새, 세 종류 정도의 술을 팔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장이 펄럭거리는 그곳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김’과 ‘안’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함께 술을 마신다. ‘김’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었으나 실패하고, 군 제대 후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안’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부잣집 아들로 ‘김’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파리를 사랑하느냐’,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등의 일견 관념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들이 지적 허영에 빠진 것인지 취기에 힘입어 진정 어린 대화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들 특유의, 취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모든 거짓을 배제하려는 이상한 결벽증을 작가는 장면마다 계속해서 묘사한다. ‘안’의 경우에는 손까지 잡아가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하고 재차 확인하곤 한다. ‘김’은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꺼내면 5분도 되지 않아 술자리가 끝나버린다는 ‘안’의 말을 듣고 어쩐지 이해할 것 같은 마음에 대화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자 곧 두 사람은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한 듯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화신 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트롤리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발견과 기억인 듯하다. 사람들로 가득하고 계획생산 된 도시에서, 모든 광경과 사건들은 공유되는 공공의 것이지만 사소한 디테일과 매일 달라지는 세밀한 차이는 그것을 발견한 개인만의 것이 된다. 직후 ‘안’이 늘어놓는 밤거리에 대한 다소 현학적인 설명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안’은 자신이 밤거리로 나오는 이유에 관해, 밝은 낮에는 사물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느낌이지만 밤이면 ‘사물들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밤이 되면 사물들은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생 미셸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관찰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안’은 낮이면 사물들 속에 끼어버리지만 말테는 늘 사물들로부터 타자가 되어 있는 부분인 듯하다.
 ‘안’의 현학적인 이야기에 ‘김’이 당황하자 그들은 밤에 느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뿌듯함’으로 타협한다. 의기투합한 그들이 제대로 된 가게에서 술자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로 술이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불을 쬐고 싶어 포장마차 안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자신도 돈이 얼마 있으니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술값만 있다면……’하고 승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일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거리로 나선다.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서 그들은 목표한 곳도 없이 걸어 다닌다. 그러던 중 삼십 줄의 사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이미 식사를 했다는 ‘김’과 ‘안’에게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게 음식을 권한다. ‘김’이 ‘그렇다면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켜도 되느냐’고 농담 삼아 물은 말에 사내는 선뜻 그렇게 하라며, ‘돈을 써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식사를 하며 사내는 조심스럽게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날 낮에 사내의 아내는 병으로 죽었다. 처갓집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친척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가난한 서적 월부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4,000원을 받고 병원에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사내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해 미안하다면서,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그는 돈을 오늘이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안’은 얼른 써버리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돈을 다 쓸 때까지 ‘김’과 ‘안’에게 함께 어울려달라고 청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데, 술에 만취한 세 인물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충동적인 구매를 할 때마다 ‘1,000원이 없어졌고’, ‘600원이 없어져 버렸다’, ‘300원이 없어졌다’ 하는 식의 서술이 인물들의 절박하면서도 무책임한 심리상태를 속도감 있게 표현한다. 그 후 지나가는 소방차를 발견한 그들은 택시를 잡아 소방차를 쫓는다. 이때 ‘안’은 불구경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창부를 사러 가자고 하는데, 작품 초반에서부터 보이는 ‘안’의 외설적인 것을 경시하면서도 호색한의 면모를 드러내는 모순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국 세 남자는 화재 현장에서 2층짜리 건물이 불타는 것을 구경한다. 이때 ‘김’은 그저 유심히 간판이 차례차례 타들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며, ‘안’은 화재란 공공연한 사건이기에 화재에 대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현학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만취해 불길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던 사내는 한동안 불구경을 하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돌과 함께 손수건에 싸서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다.
 이때부터 아내를 잃은 사내는 더 절박한 모습으로 변한다. ‘김’과 ‘안’에게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여관에 묵을 돈을 충당하기 위해 한밤중임에도 월부 책값을 받겠다고 책을 판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이는 본디 아내였던 것이 4,000원의 돈으로 변하고, 그 때문에 아내의 죽음 역시 4,000원의 돈으로 유보되었던 상태가 끝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제 닥쳐오는 현실에서 돈으로밖에는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내는 돈을 구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부탁해 ‘김’, ‘안’과 같은 여관으로 향한다. 사내는 계속해서 같은 방에서 머물자고 요구한다. ‘김’은 연민을 느껴 사내의 말대로 하려고 하지만 ‘안’은 여지도 주지 않고 각자 방에서 자야 한다고 결정한다. ‘김’은 계속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 듯, 화투라도 치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이때 ‘김’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내의 상태에 대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은 피로를 핑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김’도 이제는 너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안’은 급히 ‘김’을 깨운다, ‘안’은 대뜸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하고 말한다. 사내가 자살한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안’은 사내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노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김’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 여관에서 도망친다. ‘김’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잠시 기묘한 대화를 한다. ‘안’은 ‘김’에게 자신들이 분명히 스물다섯 살이 맞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서로가 스물다섯 살이 분명하다고 확인하는데, ‘안’은 무엇인가가 두렵다고,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김’은 그들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못 박아 말한다. 악수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진다. 버스를 탄 ‘김’이 차창 너머로, ‘안’이 눈을 맞으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히 인물들의 역할인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김’, ‘안’,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 이렇게 셋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김’은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초반에 ‘안’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들 때문에 ‘김’은 일견 순박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에서 단련되고 벼려진 이중적인 면모가 점점 돋보인다. 결말에서 사내가 자살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여러 번이나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러한 면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의 사건 때문에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에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시원스레 말할 수 있다는 점이 ‘김’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듯하다.
 반대로 ‘안’은 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이 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김’과 역할이 바뀌는 듯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내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는 대사는 체념 섞인 반성의 어조로 읽히기도 한다. 만약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면 사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안’은 그것을 알고서도 각자 방을 쓰도록 했다. 부유한 지식계층이 쉽게 취할만한 행동으로 보이고, ‘안’에게 어울리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는 자신이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는 아마도 사내의 비극과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강제적으로―겪게 된, 일상 속의 부조리와 그러한 경험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고찰일 듯하다. 이 하룻밤 사이의 사건에서 ‘김’이라는 스물다섯 살 청년은 이미 완벽하게 서울에 적응하여 단련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안’은 앞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변해갈 가능성을 보이는 듯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삼십 줄의 사내는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인다. 이 사내가 없이 ‘김’과 ‘안’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작품은 두 사람의 상념과 관념적이기만 한 대화로 끝나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내의 비극으로 인하여 소설은 기복을 갖게 되고 이야기로서 완결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며 나는 무엇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인지, 실존에 대한 고찰을 다루면서도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사건과 인물들이 역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은 단편소설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소설이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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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감상.

기록/도서 2021. 12. 16. 02:25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활동했던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본래 이름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작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부처 고타마’로 불리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작중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고유하게 쓰인다.
 사제 계급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출중하고, 어린 나이에 다른 사제들과 신학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등 뛰어난 지적능력의 두각을 드러낸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강한 학구열을 가졌고,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표현되는 ‘아트만’에 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갈증을 끊임없이 느끼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친구이자, 그의 지적인 고상함을 숭상하는 숭배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청년이 된 싯다르타는 바라문이 전통적으로 해왔고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 신학을 논하고 제사에서 주문을 외우며 계급제도의 최상위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다. 그런 생활로는 결코 ‘아트만’에 이를 수 없으며, 진리를 깨닫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숲속에서 생활하며 ‘아트만’에 이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문에 고빈다와 함께 귀의한다. 그들은 사문에서 정신으로 육체의 활동을 통제하는 일, 이를테면 호흡하지 않거나 심장의 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방법 등을 수련하고, 단식과 인내로 인체의 욕구를 제어하거나 정신 자체를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로 옮겨 자아를 해체하는 훈련에 매진한다. 그러나 온갖 요기와 같은 기술과 신통력을 얻게 되어도 싯다르타는 그것이 자아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길일 뿐이며, 결국 아상(我想)을 깨트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문의 가르침에 환멸을 느낀다.
 그 즈음하여 인도 전역에는 ‘고타마’라는 자가 정각에 이르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많은 구도자가 부처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떠나고, 소문에는 고타마가 진정한 부처라는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속세에 타락한 거짓된 구도자라는 반대되는 이야기도 섞여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사문을 나와 부처 고타마가 기거하고 있다는 기원정사로 향한다.
 기원정사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 그들은 부처 고타마야말로 정각에 이른 분이고, 자유자재한 분이며, 현세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 분이라고 확신한다. 고빈다는 곧바로 불가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우연히 부처 고타마와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부처 고타마와 독대하며 싯다르타는 자신의 의구심을 털어놓는다. 그가 생각한 것은 가르침이란 말을 통해 전해지는 이상 관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닌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부처의 거동이나 말투, 표정 등을 보고 확신으로 굳어진다. 즉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은 자, 가장 존귀한 세존이라는 점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부처의―말을 거친― 가르침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부처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대는 똑똑하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라고 경고한다. 그날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와 고빈다를 떠나며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한다.
 이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는 사물들의 저편, 피안의 너머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으나 이제 싯다르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와 존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이 흐르는 소리, 풀과 꽃의 빛깔,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 태양의 따스함 등이 전부 그 자체의 것으로 느껴지며 싯다르타는 자신이 지금까지 찾던 ‘아트만’이 사물의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있음을 감각한다. 그는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좋은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겪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느 마을로 들어서기 전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이 뱃사공과 그의 오두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을 건넌 뒤 뱃사공에게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싯다르타 역시 이 만남이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 뒤 모든 것을 겪어보겠다는 싯다르타는 한 마을에 도착해 사문의 입장을 버린다. 그는 카말라라는 유명한 기생과 연인이 되며,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번다.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할 줄 아는 일, 즉 단식하고 기다리며 사색할 줄 아는 일이 커다란 지혜로서 도움이 된다. 그의 사업은 번창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일에도 막히거나 부자유한 점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싯다르타에게는 속세의 때가 묻고, 재물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그 증오는 결국 술과 도박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재물에 집착하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사위 놀음에 엄청난 재산을 쏟아붓고, 그 다음 날은 잃은 것을 돌이키려고 흉폭할 정도로 사업을 강행한다. 어느새 머리가 반백이 될 때까지 그런 삶을 살던 싯다르타는 술기운에서 깨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구토하고 싶다는 강한 절망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속에 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구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주 오래전,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 건넜던 강까지 꼬박 하룻밤을 들여 걸어간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 작정을 한다. 어린애 유희 같은 인간들의 삶에서 빨아 마실 수 있는 것을 모두 빨아 마시고, 이제는 부패하여 온전히 절망하기만 하는 그는 강가에서 투신할 작정이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야자나무 아래서 바라문 시절부터 기억의 깊은 곳에 심어져있던, ‘옴’이라는 한 음절의 완전무결성이 울려 퍼진다. 그 음절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하며 싯다르타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 안에서 자라났던 것들이 전부 시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깊은 잠에 빠진다.
  잠을 자는 동안 내면의 모든 자아가 죽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뒤 깨어난 싯다르타는 자신이 한 번의 ‘윤회’를 겪었다고 직감한다. 지금까지 전부 ‘구토’해버리고 싶던 싯다르타는 모조리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때 싯다르타가 잠에서 깰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던 고빈다와 만나게 된다. 고빈다는 불가의 승려로서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강가에 누워 자고 있던 사내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잠자는 사내가 싯다르타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싯다르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고빈다는 몹시 놀라며 싯다르타의 변한 모습, 값비싼 의상과 부유한 상인 같은 외견을 지적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형상의 수레바퀴는 빨리 도는 법”이라며 자신이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을 암시한다.
 고빈다와 헤어진 뒤 싯다르타는 오래전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 주었던 뱃사공을 찾아간다. 싯다르타는 강물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결이 흘러 가버려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느껴 뱃사공의 조수가 된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러 해를 함께 산다. 현명하고 친절한, 늙은 뱃사공과 함께 살며 싯다르타는 점점 강이 알려주는 진실들에 따라 지혜롭고 겸손해진다. 오랫동안 뱃사공 일을 하며, 뱃사공 바주데바와 싯다르타는 생각하는 방법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심지어 외견조차도 닮아간다. 그들은 강에서 흘러가는 물살이 바다로 가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과 들에 비로 내리는 일들을 강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양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과 가치들은 사실 거대한 원형구조 속에서 단일성으로 통합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두 번째 깨달음이다.
 이후 부처 고타마가 입멸한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진다. 싯다르타가 떠난 뒤 기생을 그만두고 불교에 귀의하여 살고 있던 카말라는 아들을 데리고 세존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그 아들은 싯다르타가 줄곧 모르고 있던 싯다르타의 자식이다. 그런데 강을 건너기 전 카말라가 독사에게 물리는 일이 벌어지고, 바주데바가 급히 오두막으로 옮겨와 카말라는 죽기 직전 다시 싯다르타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다’고 하며 아들의 존재를 알리고 숨을 거둔다. 그 뒤부터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아들을 키우게 되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통이자 번뇌이다. 아들은 천방지축에 무례하고 응석받이인데,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싯다르타에게 욕을 하고, 그릇을 던지고, 싯다르타의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태도가 오히려 자신을 경박한 존재로 만든다며 반항한다. 이럴 때마다 싯다르타는 고통스러워하고 어떻게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 번민한다. 바주데바는 자주 싯다르타에게 충고한다. “그대가 아들을 위해 열 번을 대신 죽어준다 하더라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때 싯다르타는 청년 시절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문이 되었던 일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가 윤회의 바퀴 속에서 방황과 절망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들에게만은 그것이 면제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싯다르타는 계속 아들을 주변에 두고자 한다.
 곧 아들은 바주데바와 싯다르타의 돈을 훔쳐 마을로 달아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을 가로질러 마을까지 쫓아간다. 그 와중에 싯다르타는 사람이 자식의 운명을 소유하거나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마을 입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명상에 빠진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세 번째 깨달음이다. 이미 현자 혹은 성자라 불릴 만큼 현명한 싯다르타였으나 혈육에 대해서만은 번뇌와 미망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 싯다르타라는 한 성인의 마지막 방황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곧 그를 따라온 바주데바와 함께 싯다르타는 강가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바주데바의 손에 이끌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의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 아직 아들을 품에서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싯다르타에게 강의 소리는 온갖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비웃고, 비명지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것을 말하자 바주데바는 ‘더 잘 들어보라’고 채근한다. 계속해서 강의 소리를 듣고 있자 싯다르타는 곧 강이 내는 모든 소리를 듣게 된다. 기뻐하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 악한 소리와 좋은 소리가 모두 뒤섞여 목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되었으며, 웃음소리도 슬퍼하는 소리도, 선한 소리도 사악한 소리도 강 그 자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가고 그 뒤에 원형구조를 이루며 강물의 원천까지 되돌아가 다시 모든 소리를 내는 강이 되었다. 이때 싯다르타는 범(凡)의 의미를 깨닫는데,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이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가르쳐준 바주데바는 빛이 나듯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처음 부처 고타마를 떠날 때 싯다르타는 ‘말로 된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주데바는 겸손하고 친절한 행동과 경청하는 방법으로 싯다르타를 해탈로 이끈 것이다.
 늙고 지혜로운 뱃사공으로 싯다르타가 계속 살아가던 중, 불가의 승려로 살고 있던 고빈다가 나룻배를 이용하게 된다. 고빈다는 이 강가에 사는 뱃사공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대화를 하던 중에 싯다르타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고서야 고빈다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위해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고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가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 등으로 개념을 양립시켰던 것은 ‘말로써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은 자인 세존은 그것들이 하나의 단일성 속에 있음을 경험과 인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빈다는 마지막까지 싯다르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아주 괴상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빈다가 보기에 싯다르타는 세존만큼 표정이 빛나고 몸짓이 자유자재하며 무엇 하나 거추장스러운 점이 없다. 고빈다는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고빈다가 부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싯다르타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지켜보더니 대뜸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보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그 순간 고빈다는 불분명하게 연결된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데, 그 얼굴들은 성자였다가 살인자이기도 하고, 사람이었다가 짐승이기도 하고, 기뻐하는 표정이었다가 고통에 빠진 표정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미물이었다가 신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환상이 없는 채로 모든 얼굴이 그 자리에서 동시에 뒤섞여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완성된 것, 즉 범(凡)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이 반투명한 가면과 같은 것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면은 바로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똑같았고 싯다르타의 늙은 미소와 똑같았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빈다는 눈물을 흘리고, 여전히 수백 개의 주름으로 미소짓고 있는 싯다르타에게 깊이 절하며 작품은 끝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데미안> 이후에 쓰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쓰인 <데미안>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인의 의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젊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고 문학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데미안>에서 헤세가 현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답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데미안> 이후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모든 경험은 다 겪어보아도 좋은 것’이라는 사상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두고 있는 듯하다. 처음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지적으로 대성하였고, 이후 사문에서 정신주의의 극단까지 가보았으며, 사문을 그만둔 뒤로는 세속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성공과 타락까지 경험한다. 나중에 싯다르타는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싯다르타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모든 가르침을 오로지 경험에서만 체득했다는 점인 듯하다. 마지막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말은 진리에 싸놓은 겉껍질 같은 것”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말이나 지식으로 해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선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불교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좌선이나 선문답, 불제자로서의 행위, 수련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완전한 해탈인 ‘불가사의해탈’은 지식적인 깨달음인 ‘지해탈’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체득한 인식과 지혜로 이루어진 ‘혜해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불가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헤세가 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싯다르타>라는 소설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매우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으로도 역사에 남을만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싯다르타>를 단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 분량의 선문답으로 이해해도 잘못된 시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아들로 인한 싯다르타의 번뇌는 석가모니불의 아들 ‘라훌라’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오마주인 듯하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라는 뜻으로, 구도의 길을 걷던 석가모니에게도 혈연이 만드는 고뇌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장 큰 장애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바주데바와 강(江)의 가르침으로 이미 성자의 반열에 오른 싯다르타가 마지막으로 겪는 장애 또한 자신의 혈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불제자인 고빈다가 불가의 가르침을 오로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다소 아쉽기도 하다.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인물이 불도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점은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다.
 다소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이기도 한 작품이지만 삶의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했던 헤세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경험과 체득을 중요시하며 ‘말’의 표피성을 지적하는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물과 인간이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해줄 듯하다. 그리고 ‘감각과 사유 모두’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작품이 주장하는 바는 인생에서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를, 소설만이 가지는 ‘간접경험’이라는 무기를 통해 여실하게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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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사람

글/시 2021. 11. 18. 23:09 |

매일 죽는 사람*


 야간버스가 달리고 창밖의 풍경은 계속해서 뒤로만 밀려난다, 종일 서울이 뿜어낸 땀이며 연기며 습기 찬 한숨 따위에 하늘은 새까맣게 흐렸고 그 뒤에 별들은 도사렸고, 오늘은 무너져 내려오지 않으려나 보다, 뒷좌석 사내는 옆구리를 감싸 안고 송장처럼 뻣뻣하게 앉아, 죽어있고, 죽어있는가보다, 성기게 포장된 도로 위에서 버스는 가끔 몸을 벌떡인다, 그때마다 승객들은 덜컥 이를 부딪으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 곧바로 눈을 감는다 아직 종점이 아니고 종점은, 검은 구름 위의 별들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에서 엄습해오겠지, 승객들은 모두 그렇게 믿는다 가로등 불빛으로 점멸하는 얼굴에 웃음인 듯 체념을 띄워놓았다, 뒷좌석 사내는 줄곧 죽어있고, 길은 갈수록 좁고 버스는 더욱 몸을 뒤틀어대는데, 사내는 경직되어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미 종착지가 찾아온 덕인지, 이제 너부러질 일만 남았으니 무너질 밤하늘에 대해서도 내일이면 기점이 될 종점에 대해서도, 땅거미 떼처럼 각자 굴속으로 돌아가 어둠이 걷히지 않기만을 바라는 시민들에 대하여도 걱정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단단히 믿어도 야간버스는 종점에 도착하고 뒷자리 사내는 풀려난 용수철처럼, 느닷없이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한쪽 발은 잃어버렸는지 기우뚱, 기우뚱 버스에서 내리고 계속하여 그렇게, 외로만 구두를 신고 컴컴한 개미굴 같은 골목으로, 남의 다리를 빌려 쓰는 듯 걸어간다 걸어가서, 어딘가 서울이 등진 구석으로 삐거덕삐거덕 사라진다.

 

*조해일, <매일 죽는 사람>,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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