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장과 문장들의 호흡이 매우 짧고 읽기에 편리하다. 내용 자체는 이렇다할 특이성이 없지만 사건들을 엮고 적절한 대목에 등장시켜 역겨운 불행과 끔찍한 고통들을 한낱 우스개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 기술은 몹시 교묘하고 참고할만 하다. 본문이 진행되는 내내 활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그것이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미니멀리즘한 문장에 의하여 희화화 되어버린다. 그것이 다소 과도한 경향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과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아이러니한 코미디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삶에 대한 순진한 긍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노골적인 경험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에 빠져버리는─그 회의마저도 마지막에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대한 회의'로 내버려지고 말지만 말이다─ 내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책 자체가 이야기의 진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체념을 학습한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의문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짐작 했듯이,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의 불행들을 일주한 캉디드와 그의 일행들은 더 이상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지독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대가로 권태를 얻었고, 권태를 잊기 위해 노동을 하며 존재의 목을 가까스로 축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캉디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치명적인 믿음과 기대의 이름인 '낙관주의'가 가끔씩 발작하는 의문처럼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는 설탕에 절인 레몬을 입에 넣고 밭을 갈러 나가야 한다.

<마르틴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캉디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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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첫날과 이튿날 쉴 새 없이 400쪽 가량을 읽어냈는데 잠시 덮어놓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아차 싶어서 일주일만에 나머지 100쪽 가량을 읽고 보니 독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몸통이 썩뚝 잘려나간 느낌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고 야옹야옹 울어대던 고양이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물독에 빠져 몇 번 헛발질을 해보다가 체념하여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운운하다 담담하게 죽는다. 이것은 근대의 인간에게서 죽음을 의식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짐승마저도 인간에게 물이 배면 자살을 본다. 책 맨 뒷장의 작가연보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퍽이나 아픈 인생을 살았다. 비록 병으로 죽었으나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는 개인의 죽음이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자살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학자나 지식인, 혹은 작가나 예술가라는 족속들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생물 실격.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 짐승이 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닮은 짐승이란 보고 있으면 너나 나나 처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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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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