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회의주의

기록/생각 2021. 7. 18. 21:47 |

 내가 처음 글을 써야만 한다고 느꼈을 때, 그 이유는 내게 어떤 불세출의 재능 따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히려 반대였다. 문학사에는 이미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걸작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게 가장 큰 문학적 영감을 준 천재들은 벌써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유산을 남긴 채 죽어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나의 피라미드를 짓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피라미드를 기어 올라가는 것 말이다.
 문젯거리가 될 수 있는 사고방식이지만,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현대문학은 단 한 번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현대를 근대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당연히 내가 쓰는 글들도, 쓰게 될 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어떤 철학적 화두에도 진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천 명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그런 화두에 대해 수천 개의 시각으로 접근한 후에 비로소 나는 딸려나온 탯줄처럼 세상에 엎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직업이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고, 나는 거만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옛날 책을 즐겨 읽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가들은 단 하나의 소재,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몇백 년이나 자가복제로 생존해왔다. 단 하나의 소재란 인간뿐이다. 인간의 동의어는 세계도 될 수 있고 우주도 될 수 있다. 단지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는 시대와 공간을 비틀어가며 끊임없는 말놀음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언어란 인간이 멸종할 때까지 함께 변화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분히 회의주의적이지만 허무에 대해 공허하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종말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시대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절대 종말을 맞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계속 자가복제를 반복하며 언어와 인간이 사라지는 날까지 '오래된 글귀들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존할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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