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해당되는 글 305건

  1. 2023.04.03 일요일 1
  2. 2023.03.30 어느 맑은 날에
  3. 2023.03.29 어지러뜨리다
  4. 2023.03.25 지상에서
  5. 2023.03.15 줄담배
  6. 2023.03.12 사상가들에게 1
  7. 2023.03.09 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8. 2023.03.05 책상 밑 어둠
  9. 2023.02.28 여명
  10. 2023.02.26 초상
  11. 2023.02.25 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12. 2023.02.06 아침의 빛
  13. 2023.01.18 연초
  14. 2023.01.14 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15. 2022.12.22 예술가, 백형 1
  16. 2022.11.10 의정부시 평화로
  17. 2022.10.27 시월의 어느 1
  18. 2022.04.14 사월
  19. 2022.03.24 봄의 자취
  20. 2022.03.03 낙타 인간
  21. 2022.02.27 바람의 무늬
  22. 2022.02.19 학력 유감
  23. 2022.02.19 아레시보 메시지
  24. 2022.02.10 여행(초안)
  25. 2022.01.27 녹색 눈물
  26. 2021.11.18 매일 죽는 사람
  27. 2021.11.04 생폴 요양원
  28. 2021.10.22 책과 담배
  29. 2021.10.15 역전에서
  30. 2021.09.17 일몰

일요일

글/에세이 2023. 4. 3. 17:47 |

일요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약 5초 전까지 하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이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손에 커피잔을 쥐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봄답게 환했고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 2층에는 다른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내가 수십 초 이상 말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진 대화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던 나는 곧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만 열심히 뭔가―그게 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침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대화가 이어질 만한 소재를 찾아서 카페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런 환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얘기지.
 그렇게 나는 문장을 완성 시켰다. 친구는 더더욱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고 있던 말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하루에 물을 2L씩 마셔야 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결국 친구가 이렇게 묻자 나는 본래의 주제를 기억해냈다. 아, 하고 나는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하루에 물을 2L씩은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러한 건강법에 대해 주워들어서만 알고 있는 수준이었고, 매일 2L의 물을 마시는 행위가 어째서 몸 건강에 좋은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미안, 무슨 말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을 뱉었다. 친구는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술이 덜 깼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술을 마신 건 오늘 새벽 3시까지였고 지금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태를, 숙취 때문이라고 친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머릿속의 뇌수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위들이 서로 격벽을 쳐놓은 것 같은 현재의 기묘한 정신상태를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요새 겉옷 입기 애매하긴 해.
 그렇게 대화주제가 바뀌었다. 나는 친구가 굳이 따져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제에 올라 타준 점에 관해 은근히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맥과 당장 깨져버리기라도 할 듯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친구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언어라는 것이 퍽 귀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두 손 가득히 빛줄기를 잡고, 지상을 향해 무자비하게 던져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너는 오늘 뭐 할 거냐? 친구가 물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면 책 좀 읽고, 글 좀 쓰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뒷집 아주머니가 출판사에서 일하신다던데.
 어느 출판사?
 몰라, 모르겠는데,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볼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리고 또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햇빛이 너무 강했다. 어쩌면 햇빛 때문에 내가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햇빛에는 눈과 피부로 스며들어 뇌를 깨끗이 소독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불 말릴 때처럼…….
 이불 말릴 때처럼. 나는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되풀이해 말했다.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꺼내서 강한 햇볕 밑에 말려놓는 상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카페 2층에는 벌써 50분 넘게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릿세’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몇 가지 연상을 거쳐 사람이 어느 공간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이었다.
 책은 잘 돼가? 친구가 갑자기 물어왔다.
 모르겠는데, 나는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글쎄.
 넌 요새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 사냐.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낸 건데,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 정말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문호던가, 혹은 사기꾼이지,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사기꾼이 잘 벌지.
 네가 사기꾼이라면 누구에게 사기를 치는 건데?
 주로 나 자신에게지 뭐.
 우리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내가 올바른 단어들을 선정하여 의미를 전달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란 참 성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가자, 역까지 태워줄게. 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찻잔을 손에 쥐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자스민 차는 별로 맛이 없었다.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수분 섭취가 건강과 직결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물을……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코트와 잔을 챙겨 일어났다. 나는 입속말로 젠장, 이라고 중얼댔지만 사실 화가 나거나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이 ‘젠장’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딱 적확한 상황이었던 것뿐이다.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그때 친구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오늘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래’라고만 했다. 미세먼지가 나빴고 날씨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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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날에

글/에세이 2023. 3. 30. 17:10 |

어느 맑은 날에


 2주간 내리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며칠 약을 챙겨 먹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구역감과 위산 역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무언가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끙끙대며 이불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한동안 거실과 방을 오고 가며 이 괴기스러운 이질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용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쌓인 책 세 권이 별 의미도 없이 눈에 들어왔는데, 맨 밑으로부터 페터 한트케, 베르톨트 브레히트, 허먼 멜빌의 순서로 책이 쌓여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허먼 멜빌의 책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페터 한트케를 두었으며 맨 위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 작업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잘못된’ 무언가가 다소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헛헛한 듯이, 더러는 백일몽을 꾸는 듯이 나는 도저히 제 컨디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음!” 나는 괜스레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는데, 아주 기겁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색 피부밑에 튀어나온 관절과 뼈, 그리고 불거진 핏줄 따위가 전에 없던 강렬한 형상으로 내 눈에 박혀버린 것이다. 내 손이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나는 거의 30초가량 손을 앞뒤로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크게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내’ 손에 대해 놀라움을 느낀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오히려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나는 내 미국인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소위 ‘매직머쉬룸’이라는 것을 섭취한 적이 있는데, 환각이 사라지고 나자 몹시 이상한 부작용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작용이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그리고 치명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하고 있어서 도무지 눈을 뜨고서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집안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기엔 그다지 넓은 집도 아니지만, 여하튼 나는 방문과 화장실 문 따위를 전부 열어보며 세계로부터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핸드폰을 일주일 넘게 꺼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위장병을 앓느라 도무지 기력이 없어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오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지금 핸드폰 전원을 켜면 아마 부재중 전화가 열 몇 통은 쌓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핸드폰은 그냥 꺼두기로 했다. 나중에 활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냉장고 문을 5번 정도 열였다가 다시 닫았다. 여전히 식욕이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같은 동 303호에 사는 아저씨가 마침 볕을 쬐러 나온 것인지 인사를 해왔다. 그와 만나는 것은 약 2달 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 뒤, 한 대 피우겠느냐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니오, 이젠 끊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티셔츠의 목덜미를 슬쩍 내리면서 목에 난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젠 평생 끊어야겠죠.
 저런, 큰일이었겠네요.
 뜬금없지만 그제야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길에 행인들이 평소보다 많다 싶었다.
 햇빛이 좋네요. 내가 말했다.
 이젠 봄이죠.
 나는 어쩐지 없던 기력마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담배는 다 탔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동생이 침대 구석에 온몸을 쑤셔 넣은 듯한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오후 4시였다. 나는 동생이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 두고 안방 문을 닫았다.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곧 마감을 맞춰야 할 원고를 위장병 때문에 2주 내내 내팽개쳐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날아간 2주를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책 없이 게으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작업용 책상에 앉아 브레히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다시 덮어놓으며 “흠!” 하고 또 괜한 소리를 냈다. 삼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내게는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에는 날씨가 퍽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6월에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요새는 축의금으로 5만 원만 냈다가는 괜히 나중에 뒷담화 거리나 된다고, 그런 얘기를 TV뉴스에선가 친구로부터였던가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멍한 채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6월이 되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길 테지. 중얼거리면서 나는 이상하게 앉은 자세 때문에 골반이 몹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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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뜨리다

글/시 2023. 3. 29. 20:33 |

어지러뜨리다


한낮은 밤을 기대하는 마음만으로 흘러간다
사내는 낮 동안 과연 어떤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세어보고
결국에는 열 손가락 전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서운 불안이 텅 빈 페이지 위에
약속처럼 사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는 날조된 기억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중얼거리고, 까닭도 근거도 없이
악독한 슬픔이 벼락처럼 혈관을 돈다
침침해진 눈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는
그를 보고, 사내의 동생은
저녁을 먹겠느냐고 간단히 묻는다
뜻밖에도 날씨는 선선하고
나무들이 새잎을 창문에 부딪혀대고 또
바로 어제 형광등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

빈 페이지는 굼뜨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간다 또한 우습게도
처음 그 변색을 발견한 것은
사내가 더는
스스로의 직업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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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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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담배

글/에세이 2023. 3. 15. 07:41 |

줄담배


 역 근처의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생쥐 같은 인상을 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구걸했다. 담뱃갑을 열어보니 마침 세 개비가 남아있기에 두 개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 인사도, 떠나지도 않고 그저 멀뚱히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한 개비가 더 있던데.”였다. 이번에는 내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돗대를 가져가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딱히 화도 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역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돗대를 피워버렸다. 그리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남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현금은 이천 원뿐이었다. 어차피 담배 한 갑도 못 살 돈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캔커피 두 개를 사는 데 모조리 써버렸다. 얼마 뒤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역전에 나타났다. 나는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친구는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시야 저편에서 그 노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맞은편 흡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가슴 속에 흙탕물이 흐르는 기분이라, 한 개비를 더 빼물고 불을 붙였다. 젠장,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는 캔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젠장’이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흡연장에서 어정거리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결정했다. “아.” 내가 돌연 떠올렸다. “그 캔커피가 내 마지막 자산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실없이 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술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 작고 생쥐 같은 노파는 여전히 흡연자들에게 개비담배를 구걸하고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리 위로 기어나오는,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간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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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에게

글/시 2023. 3. 12. 19:37 |

사상가들에게


장고하지 말라,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다
먹을 것만을 찾아, 팔십억 인간들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 다닌다
그 대단한 숫자보다, 턱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 발밑에 아무 역사 없이 쌓여있다
땅이 교훈을 주리라 믿지 말라, 의미란
비바람에 무너진 묘비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운율에 맞추어 글 쓰는 일일랑 그만두고
우연히 나타난 생애나 듬뿍 들이켜 취해버려라
우리는 회한할 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리라, 그러니
닥쳐오는 모든 것에 장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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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1.
너희들이 털가죽 없는 살덩이로 태어날 때
세상은 벌써 날고기를 먹는 놈들로 가득했다
너희들이 추운 새벽에 힘겹게 깨어날 때
태양은 너희들을 위해 눈떠주지 않았다.

2.
내가 만난 너희들은 모두 종점 출신이었다
너희들의 생이란 그 삶을 쪼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란 몹시 체계적이며 균등하다고 강론했다.

3.
그러나 땅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밑에 묻힌 자들은
혀도 입술도 썩어 흙이 되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기에
너희들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4.
너희들은 3월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끌고
누구도 비웃을 수 없도록 길고 어렵사리 달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느 닫혀가는 순간에
과연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5.
나는 미로 한복판에 수십 년째 퍼질러 앉아
이제는 사망기사란도 사라진 신문 따위를 생각한다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터트릴 웃음에 관해 생각한다.

6.
오만한 나는 아직 젊어,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나 또한 너희들처럼 종점 출신으로
종점이 될 정거장에서 벗어난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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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밑 어둠

글/시 2023. 3. 5. 16:29 |

책상 밑 어둠


그곳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늘진 눈앞에 벽돌처럼
두꺼운, 책 하나 펼쳐놓고서
읽을 수도 없는 수많은 단어
군인들처럼 줄지어 섰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눈은 가만히, 페이지에 떨어트리고
불 밝은 거실에는 소란한 잡음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나는 모조리 듣고 새긴다
밤은 모두가 저주하는 시간
말하지 않고 눈에 담지 않고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그렇게 나는
잠드는 법을 영영 잃어버렸다

지저분해진 책상 한구석
흰색 졸피뎀 푸른 트리아졸람
누군가의, 잠들어 꿈꾸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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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글/시 2023. 2. 28. 09:05 |

여명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창문의 방풍재를 뜯어내며
꺼림칙한 냄새가 난다, 고
사내가 중얼거린다
매일이 겨울인 북쪽 나라에선
하늘도 꽝꽝 얼어, 이런
생선 비린내 따위는 나지도 않겠지

팔은 창틀에 걸치고, 오늘도
기어코 살아있을 예정
적색 태양 붉은 구름
물고기 같은 사내의 눈에
황동빛으로 둔탁하게 비친다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그러고 보면, 아주 예전
수조에 키우던 금붕어
함께 살던 남생이에게, 몸통
반절을 뜯어먹히고
헤엄치고 있었지

반토막으로, 지저분하고 아둔하게
헤엄치고 있었지,
라고
사내는 생각하고
이내 내다보던 창밖은
새빨갛던 구름 하늘 덧없이 푸르러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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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글/시 2023. 2. 26. 14:11 |

초상


1.
 언덕 중턱에는 성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지하실부터 시작해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는 어렸고 뛰어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새엔가 성당 앞마당에는 하얀 성모상이 세워졌다. 가끔 젊은 신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숭고함 따위를, 우리는 언덕을 오르며 가슴 속에 썼다 지우곤 했다.

2.
 술과 담배와 약 따위로 얼룩진 젊음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없었다. 아침인가 하면 밤이었다. 미래를 믿지 않는 용기로 나는 숨 가쁘게 살아있었다. 변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고 불경을 읽었다. 죽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내 육체로 숨을 쉬었다. 내게서 지독하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났다. 방 곳곳에는 늘어진 술병과 끔찍한 시취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플 때는 죽을 만큼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3.
 그 언덕에 오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톨스토이를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자살한 소설가들이 귓속말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해가 뜨면 행인들을 보러 나섰다. 그들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도망쳐 들어왔다. 내 책은 쓰던 중에 고리타분해졌다. 젊은 신부가 얼마나 늙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성모상이 보고 싶었다. 대리석의 불투명한 흰빛을 다시 스치는 시야에 담았다가 잊어버리고 싶었다.
 밖은 새벽 네 시. 길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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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어제는 몹시도 술잔을 비웠습니다
전날도, 그 전날도
새벽에도 등 밝은 어느 맥주집에서
벌써 2월도 끝나가는데, 그 집 창문에는
성탄절 램프들이 깜박거리며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고
나는 코트의 지퍼를 목덜미까지
바짝 여미고, 황금빛
황금빛 잔을 연달아 입으로 옮겨가고
그러나 누구와 마셨는지
어느 누구와 장대한 허풍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술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을
비싸고 덧없는 안주처럼 주워섬겼는지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게에는 어느새 우리밖에
누군지 모를 우리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마시고, 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자비하게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귀청 떨어질 웃음소리를 내다가……
멍한 채로 나는 아직 동트지 않은
어렴풋이 가로등 빛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태웠습니다
늦겨울 추위에 만취한 몸은 떨리고
나는 연기를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없이, 다만 술은 계속 내어와 지고
또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나는 마시고 있는지, 몰래
눈앞의 표정 몰래 세어보며
알코올에 붉어진 얼굴과 눈동자로
도대체가 낯모를 눈앞의 그 얼굴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바라보는 것입니다
해는 곧 뜰 터이고, 인조가죽 지갑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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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빛

글/시 2023. 2. 6. 16:05 |

아침의 빛


태양은 쏜살같이, 잠든 머리 위를 스쳐 갔다
헐떡이는 폐부를 문지르며 커튼 자락 잡아당기자
창틀에는 이미 겨울밤 피어올라 있었다
검은 창문에 비친 얼굴은 희끄무레하였다

주차된 차들 위로 밤빛 무겁게 비춘다
잠옷 차림으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가로등 주광색이 흰 연기에 물먹듯 스민다
메마른 바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읊조리고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며,
까닭 없이 슬픔은 시작되었다 다시
니코틴 따위가 혈관 곳곳으로 퍼지고
건널목 너머 주택에 켜진 형광 불빛만으로도

나는 그만 장초를 버린 심정이다, 한 모금
한 모금 그 형광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 황금빛 태양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지면
이 뿌리 없는 서러움도 재가 되려는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리퍼 끄는 맨발은 아프게 얼고
겨울은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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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글/시 2023. 1. 18. 17:17 |

연초


흐린 창밖에 싸라기눈 내린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벽시계는 수년째 밤
9시 58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 독서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나는
책들이 단단히 물고 있는 총 아홉 개의
빛바랜 책갈피들을 뽑는다 신중히
책상에 모아 담뱃갑과 라이터로 눌러 놓는다

하늘에서 눈 내리듯
바닥에서 안개 솟는다

아득할 만큼 많은 연기를 마셨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안구는
희뿌연 연무로 가득 찼다
그렇게 몇 자의 탈력이며 좌절들을 적어놓고 나는
얼마나 오래 으스러지도록
고독과 껴안고 살았는지
늑대처럼 고고하게 울부짖지도 못하며
움츠러들어 왔는지
시계를 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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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그러니까 전날 소주를 마시고
또 뭔가를 마시고
이유도 없이 흥겨워 그는
또 무척 슬퍼했다

세상의 표면에는 밤빛 산란하는
무지갯빛 유리벽, 당장
깨질 듯이 얇게 덧씌워지고
겨울바람 더는 날카롭지 않았다

아침 한숨은 프레스기의 허덕임처럼
연달아, 주기적으로 솟아 나온다
지퍼가 터진 가방에는 또 한 병의 술
술, 차갑게 식어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중얼거리는
마음을 병 안에 접어 넣고
한 칸 한 칸, 그는 다시
비좁은 방에 유리벽을 세운다

언제고 깨져버릴 휘황찬란한 벽들 안에
황제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죽어있고
오로지 나는 살아있어, 소독약 냄새 나는
조소를 뱉는다 그는 벽들 뒤로 흐려져 간다

태양은 또 제멋대로 떴으나
밤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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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백형

글/시 2022. 12. 22. 10:42 |

예술가, 백형


눈 깔린 길 걷자 태양 떠오른다
하얗게 서리진 풍광 날카롭게 비추는데
나는 망월사역에 술 얻어먹으러 간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야, 백형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니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술 마시러 간다
칼국수집에서 우리는 맥주를 잔뜩 마셨고
점심 먹는 손님들 가끔 흘낏하고
이쪽을 보곤 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붉게 붉게 달아올라
겨울 추위도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싶었다
인문학의 쓰레기통 같은 백형의 집
우리는 더 마시고 더 소리 높여 미래
미래를 떠들어대고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백형은
점점 취기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는 잘 될 거야, 그럼, 잘 될 거야
나는 맥주를 더욱더 위장에 내 안에 쏟아붓고
다른 수가 있겠어, 농담하듯 잔을 부딪치고
또 마시고, 턴테이블에 재즈 음반을 걸고 또
물론 잘 되는 수밖에 없다고 웃어넘기고

잠든 백형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얼음송곳처럼 찔러왔다
전철 승객들은 오후 3시 만취한 남자를 어떻게 보았더라, 내 기억엔 아무도 없다
물론 잘 되고야 말겠지, 중얼중얼 술 냄새 지독한 한숨을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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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평화로

글/시 2022. 11. 10. 17:09 |

의정부시 평화로


그는 자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한다
하얀 석영처럼 해가 빛나고
거리에 비애가 자라나기에는
아직 이른 오후 다섯 시
그는 어디서 술에 취했을까
멀리 기름종이 같은 하늘 올려다보며
내쉬는 한숨에 에탄올 냄새 섞여있다
따개비 무리 같은 재개발 지구를 지나
왁자한 대학생들의 희멀건 윤곽을 피해가며
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왔다
이건 고독을 비껴가는 방법이야, 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탁한 명정
늦가을 바람이 일고 눈꺼풀이 감기고
앞으로 며칠간 그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가는구나
골목 울타리에 기대 손안에서
애먼 담뱃갑만 돌릴 때, 바닥없는
밤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늠름히 걸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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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글/시 2022. 10. 27. 18:00 |

시월의 어느


자꾸만 구역질이 난다
아 하고 성대를 울려본다 나는
어제부터 말한 기억이 없다

거리 위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우듬지 주변엔 창백한 가을 하늘
멀고 낯설고 까마득히 흔들리는데
곧 눈은 시리고 벌겋게 차오른다

흐려진 눈동자와 안경 너머로
찡그리고 바라보아도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그저 종일 앉아있던 방안이 어둑하고
너무 오래 하늘과 마주 보지 못했고
익숙지 않은 미제 담배가 독하고 맵고
찬 바람에 온몸이 팽팽히 굳은 탓이다

방으로 돌아와 전등을 켜니
눈동자는 다시 붉게 떨려오는데
여기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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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글/시 2022. 4. 14. 23:22 |

사월


삼거리에 벚꽃잎 마구잡이로 흩날린다 친구는
군시절 생각난다고 욕설을 뱉는다
그제야 나는 가게 앞 비질하던 돼지갈비집
사장님을 생각한다 보도블록 위에 짓밟혀
갈색이 된 목련을 생각한다 매일
건물 앞에 쌓이는, 명함 같은 찌라시들을
생각한다 가을마다 바빠지는
환경미화원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월의 둘째 주
친구 모두 정장하고 걷던 청명한 식장 앞
꽃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과 연인들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날만은
진 꽃잎이 썩어 짓무르리라는 생각 따윈 하지 말자고
아무도 몰래 다짐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벚꽃도 낙엽도 치울 일 없이 살아오던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무엇이던
끝에는 하수도로 쓸려가리라고
음울한 상념만 중얼거리던
내 굴곡 없는 손마디가 보이고
벚나무 심어진 부대에서 봄을 보낸 친구에게
할 말 없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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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자취

글/시 2022. 3. 24. 23:10 |

봄의 자취


봄이 당신을 데리고 갔다
그곳은 아주 먼 데에 있다
당신과 함께 가버린 봄에는
시간에 새겨지는 풍경 소리
적송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편 하늘에 스러지는 노을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당신과 손을 겹친
안경을 쓴 젊은 청년이 있다

당신이 간 머나먼 곳에
어떤 풀벌레가 방울처럼 우는지
어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지
어떤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는지
나는 알래야 알지 못한다
그곳은 삼천대계가 당신의 회색 눈동자고
새벽처럼 미소 짓던 당신의 침묵이리라고
외투를 여미며 쓸쓸히 공상해볼 뿐이다

당신이 봄과 함께 멀리 가버리고
이 땅에는 십 년 동안 마른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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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인간

글/시 2022. 3. 3. 22:50 |

낙타 인간


암석과 모래 위로 한 남자가 걸어간다
야윈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드러난 정강이는 비척비척 걸어간다
아무도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모른다
머리 위로 녹은 황금이 쏟아져 내리고
발자국마다 암염조각이 바스러진다
모래바람은 속눈썹만을 더욱 자라게 한다
아무도 그의 눈동자를 본 적 없다
모래 위에 자국도 남지 않도록
발바닥은 굳은살로 넓고 평평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 나섰으나
모래바람은 흔적도 이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주황색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가
용광로인 듯 끓는 태양에게서 몸을 피한다
까뮈의 배교자처럼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스스로 다가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 그는 다시 떠나야 한다
이제 땀도 흘리지 않는 피부 밑
끈끈한 피는 바깥세상의 폭염처럼 고함친다
무언가 분명한 것, 아마 사막의 끝에
틀림없이 거기 있을 무엇을 울부짖는다
점점 그는 걷는 현상이 되어가고
눈물로 허비할 수분은 허락되지 않고
아무도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막과 하나 될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그 남자 역시
자신이 울고 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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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늬

글/시 2022. 2. 27. 00:05 |

바람의 무늬


바람이 강의 표면에 새겨진다
난간 높은 마포대교
청년은 수면에 그려지는 언어를 읽는다
갈기 휘날리며 날뛰는 겨울바람
너무 오래 사납기만 했다
저 밑에 오리들 헤엄친다
그것들은 늠름하다
바람을 타고 날 뿐만 아니라
물결 위에 자신의 무늬를 덧씌울 만큼
그러나 청년은 계절마다 바람에 쓸리고
투명한 상처에 어리둥절했고
영혼에는 풍이 들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려는지
날씨는 조금 따듯하고
내일부터 청년은 일정이 없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난간에 손을 뻗어본다

검은 머리카락
읽을 수 없는 무늬로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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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유감

글/시 2022. 2. 19. 21:38 |

학력 유감


아버지가 대학에 다닌다
곧 우리 가족은 대졸자가 둘이다
방통대 학생회장 출마
플래카드 펄럭이는 캠퍼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까마득한 후배다

아버지도 어느새 내 학력을 추월하고
나는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은
십오 년째 작가 지망생
글 쓴다고 저녁마다 술이 고픈
나는 술값 좀 벌어보자고
몇 번이나 아버지 과제 대필했다.

무슨 돈으로 내가 막걸리 마시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거리에서
푸른 담배 연기 뿜어 올리는지
어머니는 모른다

대학영어 낙제한 아버지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일어나던 나는
꼬여버린 우리 집안 학번에
문득 웃었다가
대필값 돌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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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시보 메시지

글/소설 2022. 2. 19. 21:33 |

아레시보 메시지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20분이 넘도록 구토를 하고 있을 동안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도 도착한 문자메시지는 한 건도 없다.
 ‘들어오세요. 저 종민이예요.’ 3년 동안 저장만 되어있던 번호로 다시 한번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답장을 바라고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사실, 진즉에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더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번호는 분명 바뀌었으리라. 3년 전에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더니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엉뚱한 사람의 전화에 도착했거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전파 상태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그는 기억한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시댁에 전화를 하지도 실종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간 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그것만으로 상황이 매듭지어졌다는 듯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도 하고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콩나물국 따위를 끓여 찬밥을 말아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당황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생계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또한 눈앞에 놓인,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돗물로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았다. 눈이 온통 충혈되고 얼굴에 그늘이 진, 퀭한 인상의 그 젊은이는 평판 높은 K 공과 대학의 장학생이었다. 참 성실도 하지,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거울 위에 달린, 누렇게 물때가 낀 방수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술집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제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방 이불에 누워있었다. 평일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날 퇴근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보다도 유난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부엌과 안방의 경계에 마냥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 어둡고 퀴퀴한 방 한구석에 돌무더기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를, 마찬가지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버린 이후로, 이제 이상한 일이라고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지갑에는 팔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사흘 전 어머니가 용돈으로 쥐여준 이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밖으로 나가, 가로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며 주차되어있는 승용차들을 지나쳐, 주택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늘 왁자한 소리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노가리 1000원’. 가게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간판이 붙어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천 원짜리 노가리와 삼천 원짜리 소주를 시켰다. 한 잔,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더욱 느린 속도로만 마셨다. 눌어붙은 기름과 사람 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팔만 원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는가. 어느새 새벽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이 오면 경사로가 많은 이 동네에서 한두 사람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추위에 눈과 코가 빨갛게 얼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어두컴컴한, 10평짜리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맡아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국이 상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냄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그는 삼만 원어치 술을 전부 게워냈다. 산책간 아버지가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술기운 속에서 생각했다. 슬슬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휴대전화 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한 집안에선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비강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비누라도 먹으면 냄새가 지워지겠지, 알코올 때문에 회로가 엉켜버린 머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로즈메리 향밖에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는 화장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어머니는 그가 술집으로 도망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산책 중인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술에 취한 손가락이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세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피로하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직도 비누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이제 그만 잠들어버려야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일이야 오든 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눈동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불분명한 잔무늬를 보고 있다. 지난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그의 술 취한 머리가 천천히 정리하려 한다. 그는 작년 교양과목에서 배웠던 어느 서글픈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린다. 그것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돌며 사지를 천천히 굳게 하고 있다.
 1974년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서 쏘아 올린 메시지는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수신하기를 기대하고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왕복 5만 년이 걸리는 메시지에 과학자들이 기대한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전파를 송출한 천문대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행위로 벌인 프로젝트였다. 전파를 받을 누군가가 있든 없든, 답신이 오든 오지 않든 처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취기와 구역질의 산란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의식이 떨어졌을 때, 그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휴대전화의 메시지 착신음을 듣는다. 그러나 굳이 깨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와 침묵이 방안의 낡은 가구며 두 사람을 검은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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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초안)

글/에세이 2022. 2. 10. 22:49 |

여행


 24살 때, 나는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3주 정도를 머물렀다. 그때까지 내게 여행이란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돈이 생기면 현실에서 도망치듯, 평소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의 여행은 차례차례 나름의 체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데사의 가을 하늘은 눈에 띄게 높고 투명했다. 그 밑에는 색채 없는 건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웅크린 것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유난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친구 율라이아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2년간 월급을 받아 저금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전전해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율라이아가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말을 꺼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몇 번 미국 남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이토록 큰 땅덩어리에 갈 곳도 구경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오데사는 더욱 볼 것이 없는 동네였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에 몰개성한 주택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아침이 되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돌아와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첫 주부터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정오 즈음 되면 잠에서 깨어, 씻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준 예비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줄담배를 피우며 마냥 걸었다. 행인도 없어 한산한 거리를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달렸다. 가끔은 큰 길가의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서는 늘 담배를 물고 다녔던 것 같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주라서 담뱃값이 싼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고, 친구와 잡담을 하다 잠들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니 당연하다는 듯 생활이 불균형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저녁에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굉장히 걱정을 끼쳤다―서(西)오데사의 도심을 한밤중에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벽마다 인적도 없는 시가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층이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거리를 꺾어 들어가는데, 골목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작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인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무슨 말을 외쳤다.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다. 남부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로 그녀는 ‘거기 아시아 사람, 뭘 하고 있어?’ 라고 내게 묻고 있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자리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직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꽃이 일렁이는 드럼통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어놓은 쇼핑카트를 드럼통 옆에 세워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관광객이 밤중에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핫도그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안 것인데 그녀는 드럼통에 피워놓은 불로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무슨 담력이었는지, 좋다고 대답한 나는 그녀와 핫도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내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음절들이었는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는 카를라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담배를 피우며, 미국에서 노숙자로 사는 것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는 곧 닥쳐올 겨울을 대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데사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은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다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잠자리까지 빌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나는 카를라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당장 위험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정신질환이나 중독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20달러 지폐를 하나 건넸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문제에 대해 미국은 유난히 논란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입장과 상황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나은 선택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라는 진심으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마워했다.
 나는 친구의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싸구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친구와 나는 식사를 하러 근처의 팬케이크 식당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친구는 자신이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텍사스를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창 너머에서 카를라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무 옷이나 마구 겹쳐 입은 사람들이 서넛 거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족한 듯 그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떨떠름한 얼굴로 농담인 양 말했다. 자신은 반년을 여기서 살았어도 친구가 없는데 너는 벌써 길에서 친구를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율라이아에게 대단히 폐를 끼쳤구나 싶다. 지금 그는 인디애나에 살고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지 2년 정도 되었다. 카를라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에 성공했는지, 아직 살아있을지, 확인할 방도도 없다. 다만 그날, 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게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가지 주제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 아칸소까지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사정사정하며 몇 달러를 빌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져버린 인도계 소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수염이 새하얀 흑인 노숙자 조나단, 북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떼로 몰려오던 헐벗은 아이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수공예품을 기를 쓰며 팔려고 하지만 그냥 주는 돈은 못 받겠다던 네팔의 잡상인 등.
 이처럼 외국을 갈 때마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공항에 내려도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보다는, 시장 골목과 상업 지역으로 먼저 발걸음이 향한다. 그런 버릇이 시작된 것은 카를라와 만난 뒤부터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의미가 명확해졌다. 나는 박물관이나 고건물을 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낯선 거리에서 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 떠난다.
 사람들은 호텔이나 관광버스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이방인이 되어 스며들면 그 거리는 가끔 고향보다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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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눈물

글/시 2022. 1. 27. 22:59 |

녹색 눈물


이 거리에서 슬픔은 초록빛이다

창동 사거리
하나마트 문 닫을 무렵
당장이라도 얼어 부서질 듯한 하늘
사내는 국방색 코트 속에 오그라들어
건널목 보도에 앉아있다
팔뚝만 한 담금소주 1800ml
열린 병 속 내려다보며
잘못 그려진 초상인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몇 대의 순찰차가 귀 따갑게 지나갔다
곧 눈이 내리면 저들은 사거리 구석에
경광등 켜놓고 잠을 잘 것이다

결빙된 밤안개처럼 눈발 흩날린다
사내는 술병 속 무엇을 들여다본다
탁류 같은 흙빛으로 웃기만 할 뿐
낡은 등산화 위로 하얀 기억들 몰아친다

사내가 잃어버린 슬픔의 방법
나뭇잎 푸르게 인쇄된 페트병
아직 일 리터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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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사람

글/시 2021. 11. 18. 23:09 |

매일 죽는 사람*


 야간버스가 달리고 창밖의 풍경은 계속해서 뒤로만 밀려난다, 종일 서울이 뿜어낸 땀이며 연기며 습기 찬 한숨 따위에 하늘은 새까맣게 흐렸고 그 뒤에 별들은 도사렸고, 오늘은 무너져 내려오지 않으려나 보다, 뒷좌석 사내는 옆구리를 감싸 안고 송장처럼 뻣뻣하게 앉아, 죽어있고, 죽어있는가보다, 성기게 포장된 도로 위에서 버스는 가끔 몸을 벌떡인다, 그때마다 승객들은 덜컥 이를 부딪으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 곧바로 눈을 감는다 아직 종점이 아니고 종점은, 검은 구름 위의 별들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에서 엄습해오겠지, 승객들은 모두 그렇게 믿는다 가로등 불빛으로 점멸하는 얼굴에 웃음인 듯 체념을 띄워놓았다, 뒷좌석 사내는 줄곧 죽어있고, 길은 갈수록 좁고 버스는 더욱 몸을 뒤틀어대는데, 사내는 경직되어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미 종착지가 찾아온 덕인지, 이제 너부러질 일만 남았으니 무너질 밤하늘에 대해서도 내일이면 기점이 될 종점에 대해서도, 땅거미 떼처럼 각자 굴속으로 돌아가 어둠이 걷히지 않기만을 바라는 시민들에 대하여도 걱정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단단히 믿어도 야간버스는 종점에 도착하고 뒷자리 사내는 풀려난 용수철처럼, 느닷없이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한쪽 발은 잃어버렸는지 기우뚱, 기우뚱 버스에서 내리고 계속하여 그렇게, 외로만 구두를 신고 컴컴한 개미굴 같은 골목으로, 남의 다리를 빌려 쓰는 듯 걸어간다 걸어가서, 어딘가 서울이 등진 구석으로 삐거덕삐거덕 사라진다.

 

*조해일, <매일 죽는 사람>,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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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 요양원

글/시 2021. 11. 4. 23:22 |

생폴 요양원


 어쩌다 세상은 온통 화재로 미쳐버렸는지, 새벽에도 안개는 끼지 않고, 밀밭은 녹은 황금으로 끓어오른다, 접은 종이에 불이 붙듯 지평선마저 재가 된다, 사내는 캔버스에 고함을 친다, 밭은 유황빛, 하늘에는 용광로가 엎질러져 있었다, 쏟아진다, 자국만 남은 정오의 정신, 사이프러스 나무에 광기처럼 붙는 불길, 성난 신의 눈동자, 쏟아졌고, 무겁게 일렁이는 밀이삭들, 농부는 낫처럼 허리가 굽었다, 불꽃 속 가을걷이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지러진다, 요양원의 가장 무방비한 들판 위, 사내는 메모로 가득 찬 자신을 뒤진다, 거듭 피고 지는 생활, 평생 밭을 가는 고통을 받으리라는 저주, 그는 기억하고, 태양 아래에 그림자조차 없다, 열과 어지럼증의 틈바구니, 사내는 볕이 갉아먹은 자리를 새긴다, 태양과 사람과, 불길이 날름거리는 풍광, 송두리째, 모조리. 인적이 모두 사라진 복도, 권총을 든 사내가 미술관 벽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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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담배

글/소설 2021. 10. 22. 01:23 |

(스토리텔링 습작)

책과 담배


 내 친구 이철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한창 서랍장이며 장롱 따위를 필사적으로 뒤지는 중이었다. 그날은 14일이었는데, 수중에 남은 돈과 날짜를 계산해보니 보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어떻게든 담뱃값을 충당하기 위해 여권과 통장이 있는, 가장 안쪽에 있던 서랍까지 전부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딘가에 천 원짜리 몇 장이나, 동전, 그도 아니라면 환전할 수 있는 적은 액수의 외화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찾지 못해, 돼먹지 않은 분노로 가슴속이 끓다시피 할 때였다.
 거칠게 전화를 받자 철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 내가 되묻자 그는 용건을 이야기했다. 철우는 자신의 막내 여동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은 지금 대학생이고 내년이면 철학과를 졸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수화기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미 뒤졌던 서랍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 있었다. 아무튼, 철우의 말에 의하면 여동생은 3년간 대학을 다니며 처음 입학했을 때 갖고 있던 열정을 전부 잃어버렸다고 한다. 매주 반복되는 장황한 토론과 현학적인 전문용어들 사이에서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왜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내심 어떻게 하면 약간의 돈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우는 막내 여동생에게 추천해줄 만한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책을 좋아하던 것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책을 사서 읽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동생의 학구열에 다시 불을 붙일만한 책을 내가 추천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지금의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집안이 온통 책장으로 가득했으나 전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쉬는 날에는 책을 읽기보다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가 중요했다. 집안에 가득한 갖가지 종류의 책들은 벌써 몇 년째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푼돈 찾는 일을 포기하고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장롱 옆에 주저앉았다. 전공과목인 철학에 흥미를 잃었다고 하니 사상서보다는 인문교양서 등을 읽으며 다른 학문에도 흥미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복수전공도 생각해볼 것 아니냐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어떤 책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전화를 든 채 난장판이 된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개를 향하는 곳마다 과거에 읽었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먼저 윌러드 게일린의 증오와 범죄심리에 대한 인문서를 이야기하고, 고명섭 교수의 인간 내면의 문제적 열정에 관한 책, 카잔차키스의 자서전, 볼테르의 철학소설, 이런 식으로 한참 책 제목들을 나열했다.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내뱉는 식이었다.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대학생의 진로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화 저편에서는 컴퓨터로 받아 적고 있는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직후 철우가 한 말 때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가 열거한 책 중 절반이 이미 절판되었다고 말했다. 절판, 나는 계시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했다. 철우가 절판되었다고 얘기한 책들은 중고서점에서 최소 만오천 원, 비싼 경우에는 육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들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는 책장에 있는 오래되고 제본이 호화로운 책들을 검색해보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은박이 입혀진 특수양장본은 새로 나온 보급판보다 두 배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중고로 팔 만한 책들을 정리해보니,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총 합쳐 내 두 달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불과 십수 분 전까지 아사 직전의 쥐처럼 집안을 뒤져대던 스스로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희희낙락하여 마치 금괴라도 쌓듯 서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동생한테 얘기해, 내가 저녁 살 테니까 너랑 같이 한번 보자고, 진로같이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눠야지. 친구는 내 느닷없는 감정변화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으나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시 연락하겠다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값비싼 책들을 방 한쪽에 몰아두고, 외투를 걸친 뒤 집을 나섰다. 이제는 남은 담배가 두 개비뿐이라는 사실에 초조해할 이유도 없었다.
 집 앞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달을 사는데 40만 원이면 충분한 이 동네에서 나는 누구보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맞은편 건물에서 온종일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마저 유쾌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하늘은 높고 화창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는 담배 맛을 더욱 좋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책 덕분이었다. 폐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나는 만족스럽게 눈으로 좇았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했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몇 권을 판 뒤 월급날이 되면 다시 책을 읽어볼까. 언젠가 이런 날이 또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꽁초를 버리고,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물며 생각했다. 마시면 사라지는 술에 생활이며 돈을 탕진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이다. 문득, 몇 달 뒤에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고 버릇처럼 불길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일을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진로상담 문제를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줘야 할 것이다. 대학까지 들어갔으면 나보다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지막 꽁초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분명 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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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서

글/시 2021. 10. 15. 22:28 |

역전에서



창동역 1번 출구의 겨울은 줄곧 붉은색이었다

사내가 소주병을 기울이고
포차 천막은 꺾인 날개처럼 퍼덕이는데
석유 히터는 가끔씩
쓸쓸하게 자갈 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불콰한 얼굴들은 표정 없이 번들거렸다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엎어지려는 소주잔을 쥐자
느닷없는 경광봉에 휩쓸려 포차 지붕들은
모조리 도시의 먼 곳으로 밀려났다

창동역 1번 출구 포장마차가 전부 사라진
가로등 불 밝은 멀끔한 광장

미처 취하지 못한 사람들 전철 구르는 소리 아래
공원이 된 폐허를 헤맨다

역사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워 나는
한 잔, 한 잔, 더 어두운 길로만 걸어나가고

테이블 끝의 소주잔
젊은 술꾼의 깡마른 손가락에 붙잡히는데

술로 가득 채운 내 몸뚱어리
다시는 역전할 수 없는 가장자리
무채색의 추위
끝에 서서
붙잡아줄 손도 없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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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글/시 2021. 9. 17. 02:06 |

일몰


반투명한 창문 너머
가을날의 태양은
천천히
깊은 한숨 쉬며 멀어져가고
겹겹이 그늘진 건물 안
나는 우두커니 살아있다

깡통처럼 발끝에 채이는 생활
긁히고, 점점 구겨지고
주워갈 사람도, 신도 없어
믿음도 알미늄처럼 색이 바랬다

생활, 생활, 하며 되뇌는
머리는 진흙 뻘 같아
담배나 빼어물며 나
어제 떠난 누군가의 자리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살고

오늘 저녁에도

제 주인 잃은 그림자들
술렁술렁 어두운 골목으로 떠날 테고……

나는 어리둥절, 백치처럼 남아
어디 이정표는 없을까
우뚝 서 있는 철인은
없을까,
그러나 없겠지

천쪼가리 버리듯 하루는 또 하늘하늘 날아가고
나는 전날 눈 뜨고 죽었을 누군가의 묘석
영정에 남은 적막한 그리움
따위를 생각하고 
또 생활
하고.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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