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

기록/생각 2020. 11. 18. 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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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


 이렇게 인상만 찌푸린 채, 눈앞의 다이아몬드도 탄소결정체일 뿐이라고 발로 차듯이 계속 살아가는 것인가. 그런 절망이 스스로의 살과 피에게 부끄러워 술을 마시고 울었다. 차라리 무슨 재앙이나 끔찍한 전쟁이라도 벌어져서 내 본성이, 그러니까 평소의 멋 부리는 행태는 내버리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든 살인자들에게 빌붙어 구차하게 살아가든, 그런 본성이라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울었으나 결국에는 내 방 의자 위였다. 뒤늦게 울면서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조롱하듯이 지껄이기만 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 때는 말이야, 그냥 무작정 화가 났지. 무시하고 모욕하고 부수는 짓만 했단 말이야.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느 날인가 영어 시간에 교사가 수업이랑은 상관없는 말을 했는데, 그게 내게는 교사의 수준 낮은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렸나 봐. 내가 발작하듯이 비웃으니까 그 젊은 여교사가 왜 웃냐고 물었어. 그때 뭐라고 했더라. 정말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도대체 학교는 어떻게 졸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저 매일 매일, 보건실로 등교해서 자다가 일어나고, 몇 시간이고 보건교사와 대화하다 마음이 내키면 교실로 가고, 수업을 망쳐놓거나 교무실까지 가서 뭔가를 부수고 다시 보건실로 돌아오고.
 그런데 차라리, 그렇게 무분별하고 그렇게 화가 나있는 놈이라면, 그러면 홀로 취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벽에 낙서를 하지도, 하루종일 음침한 머릿속을 하고서 담배를 물고 있지도 않겠지.
 지금은 그냥 그때의 여교사에게 사죄가 하고 싶어.

 어떻게든 될 리가 없다.

 도봉로 130길보다 불쾌한 동네가 또 있을까요. 담배를 피우러 나가니 연립주택 어딘가에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래도 늙은 남자의 우는 소리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입니다. 골목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흐느끼는 소리는 끊이질 않습니다. 그 와중에 골목 저편에서 젊은 커플이 싸우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여자가 아주 화가 났습니다. 내가 친구야, 연인이 아니라 친구냐고. 키가 큰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멀거니 섰습니다.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저쪽 캄캄한 놀이터에서 또 비명인지 뭔지가 들려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살았던 인천의 어느 골목도, 신정동의 늙은 길바닥도, 신곡동 성당 근처의 언덕동네도 전부 똑같지 않았습니까.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이 이목구비와 눈동자가 익숙했던 일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며 살아간다.

 인생이 숙취와 같구나.

 “그러니까 내가 약을 먹는 것은……”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K의 말을 승훈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생소한 외국어나 화학성분명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 친구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2년 전 만났을 적에 비해 유난히 골격이 돋보이는 K의 얼굴만 초점 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또 죽냐?”
 느닷없이 승훈이 내뱉었다. 그러자 K는 흠칫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웃기 시작했다.
 “멍청아, 자살소동은 중학생 때 끝났어.”
 “안주 좀 먹어. 닭에는 손도 안 대고 몇 잔째냐.”
 K는 무기력하게 아아아, 하는 소릴 냈다. 딱히 긍정도 대답도 아무것도 아닌 소리였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다는 듯 기본안주로 나온 땅콩을 좀 집어먹더니 빈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채웠다. 숟가락으로 잔 바닥을 쳐 섞었다.
 “여하간 공무원시험 합격한 거 축하한다.”
 친구가 내미는 잔에 승훈은 자기 맥주잔을 부딪쳤다. 합격한 것은 1년 반 전이지만, 그때 이후로 K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는 또 원샷을 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빈 잔을 내려놓으며 K가 물었다.
 “아니. 난 3학년 1학기 때 전학 갔잖아.”
 “나는 알아. 전부 연락해서 만나고 다녔으니까. 영운이는 벌써 딸도 하나 낳았다.”
 승훈은 감탄했고 K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제수씨가 아주 예쁘고 친절해, 난 결혼식 때 초대도 못 받았지만, 하고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못 들은 체 했다. 그리고 그는 중학교 동창들의 소식을 한 명씩, 느릿느릿 설명했다. 잔에 또 소주와 맥주를 섞고 있었다.
 모두가 잘살고 있었다. 혹은 그렇게 퉁치는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는 살고 있었다. K는 그 사실이 어쩐지 황당무계하지만 잘된 일이라고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네 일은 어때.”
 승훈의 질문에 K는 또 얼굴을 일그러트리듯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맥주 너무 마셨다.”
 질문에게서 도망가듯 일어나며 그는 조금 비틀거렸다. 그리고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살아있으면 잘 사는 거지, 하고 웅얼댔다.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승훈은 오늘 이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북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13년 동안 생각했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외국을 헤매다녔는데 어째서 북아프리카에만 가지 않았던 것인지 요즈음에야 알아차렸다.
 북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죽고 싶었던 것이다.

 바보 같기는.

 겨울이 무슨 색인지 아십니까? 나는 그 색깔을 칭하는 단어를 알지 못합니다.
 작문이 문학으로 변하는 경계선을 아십니까.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정말이지 그것만 안다면.

 새벽에 길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사방에서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런 공포에 제대로 된 이유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바닥에 나뒹구는 저 시체들의 목소리 사이로 느닷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발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은 위협이다. 그것은 분명히 공포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보면 반드시 악역에게 몰입했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어느 영화를 보아도 그들은 부정당하고 부정당하기만 하다가 패배하고 망각된다는 사실이, 얼굴이 빨개지도록 억울했습니다.

 인디 뮤지션인 가까운 형이 청춘(靑春)이라는 단어는 울림도 한자도 아름답다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별 의미있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것이 사어라고 생각했다.
 가끔 일본이나 유럽의 청춘 소설을 보면 타인의 불길한 꿈을 엿보는 기분이다.
 혀를 차면서 깨어날 법한, 그저 그뿐인 꿈.

 만개한 꽃 위에 서리가 내린다.

 괜한 허세나 거짓말도 없이, 그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 당신이 어둠 속의 빛인지 빛 속의 어둠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짧은 생의 태반을 계속 당신에게로 걸어 내려가며, 아니 걸어 올라갔던가? 여하간 당신이 숨기고 있는 굉장한 것을 찾아갔습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무엇이겠지, 하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또 다른 확신은 그것이 눈앞에 보이더라도 구원이나 충만 같은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그 ‘엄청난 것’을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애당초 그의 어리석은 성질의 증명이었습니다.
 어라, 아무래도 여기가 바닥인 것 같은데. 아니면 꼭대기든지……. 중유(重油) 속에서 잠수하는 감각으로 그는 얼떨떨해 있었습니다. 한참을 헤엄쳐보니 여기는 바닥도 꼭대기도 아니고, 애초에 당신은 그곳에 살지도, 살았던 적도 없습니다.
 그곳은 수 많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당신의 존재를 한사코 맹신하며 쌓은 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꺼먼 기름을 뚝뚝 흘리며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 하고 싶으면 나처럼 하라고. 약을 삼키고 3일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어. 다락방에서 나와보니 마침 퇴근한 친척은 저녁 먹었냐는 질문만 했어.
 안드레아스 탕겐은 몹시 짜증이 난다는 듯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을 하는 듯이 전화기에 대고 외쳤다. 상대가 이미 10분 이상 목멘 목소리로 자신의 비극에 대해 한탄하며 자살계획을 떠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한 한 마디를 믿지 않으니, 백 페이지의 말장난으로 당신을 믿게 만들련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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