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문
초편
이질감편
빛과소음편
변형과변질편
좌절된본능편
부러진젊음편
폭력과포기편
병원대기실편
왜곡된일상과약물과불균형한뇌내화학물질편
절망과알코올편
광증편
추락편
다시 인간이 되고자 볕으로 나왔으나 이미 뇌손상도 과거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편.
그래도
사람과
만나다
편
집필중.
차후 추가 예정.
'기록'에 해당되는 글 139건
- 2025.04.29 목차
- 2025.02.18 요새
- 2024.12.20 이거 어느 카테고리에 갖다 박아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 2024.10.11 문학상 1
- 2024.07.08 20240708
- 2024.04.21 누가 보든 안 보든
- 2023.03.26 무제
- 2023.02.04 이상한 결과
- 2022.11.03 Beat
- 2022.11.03 一日 1
- 2021.12.16 <서울 1964년 겨울> 감상.
- 2021.12.16 <싯다르타> 감상.
- 2021.10.11 페르소나 (Persona, 1966)
- 2021.08.13 20210813 오전 3시
- 2021.08.06 안나야리기나에게
- 2021.07.18 문화 회의주의
- 2021.05.20 <바벨의 도서관> 감상.
- 2021.04.27 <나에게는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없다.> 1
- 2021.04.04 절필이든 꿈이든 환상이든 수레바퀴든
- 2021.03.26 거짓되거나 헛된 것을 이른다 1
- 2021.03.17 멍청이, 바보 같으니.
- 2021.03.16 본문은 바보가 쓰도록 하고 제목은 언젠가 현인에게 맡기자
- 2021.03.04 쌓이고 쌓인 비공개, 비공개들!
- 2021.02.25 <...나는 그날 그날의 나-나-나의 연속 이외에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채>
- 2021.02.21 20210221
- 2021.02.02 수련회 기억
- 2021.01.10 안팎으로 한파
- 2021.01.03 20210103기록
- 2020.12.11 겨울 아침
- 2020.12.06 56분
스스로 글을 써놓고도 이게 어떤 구조와 맥락으로 구성한 것인지 파악할 기력이 딸려서 결국에는 대충 내놓고만다.
정신적이고 학구적인 보강 이전에 신체적인 강화가 절실하다.
지금 육체와 정신의 연결선을 무언가가 틀어 막고있다.
아주 즉물적이고 자명한 것.
아마 음식이나 건강 같은 거.
명성을 얻은 텍스트가 인류사회는 둘째치고,
독자 개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에 대해 늘 생각만큼은 해두어야한다. 스스로 상기시켜놔야만 한다.
그렇게 감화된, 동질화된, 오해된, 좀먹힌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접촉하며 결국에는 공동체적, 사회적, 집단적, 즉 인류 전반의 정신구조를 변질시키는 것도
당연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예전부터
누군가가 자꾸 그래서
내
가죽에다가
죽죽 그어봤더니만
둘 다
별로 강하지도 않드만.
누가 그런 거야 대체.
누가 보든 안 보든
기록/생각 2024. 4. 21. 22:59 |나는 이것들을 공개하겠다. 내 정신을 하인이자 노예로 굴복시키고 스스로 손가락마다 족쇄를 걸게 했던 어느 끔찍한 시간을, 더 이상 끔찍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박살을 내고 삼켜 소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고뇌와 사유가 아니라 완전한 개방이며, 원래 내 것도 아니었던 자아를 떨어트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돌아가게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개자식에 대한 증오도 증오가 아니게 되고, 개자식이라는 호칭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본래의 낱말이 되어버릴 것을 나는 확신한다.
개자식아.
그는 정오 즈음에야 늦게 일어났다.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 커피를 끓였다. 커피가 다 끓었을 때 그는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의사는 카페인을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몸이 몹시 둔해진 느낌이었다. 걷는 속도도 덩달아 느려지는 바람에 3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 손잡이를 쥐려다가, 곧바로 이것은 자신의 집 현관문이 아니라고 알아차렸다. 한층을 더 올라가 문을 열었다. 싱크대에 올려놓은 커피는 약간 식어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는 굳이 소리내어 말했다. 잠시 서 있다가 그는 잔에 담긴 커피를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자신이 모종의 병에 걸린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딱히 어딘가가 아프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가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났다.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에 북풍이 부는 것처럼 정신이 산만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에서 깬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되는대로 적어서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마음먹었다.
나는 쉽게 내가 쓰는 작품에 동화된다. 문제는 내 작품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가공물이라는 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기억들 중 인위적으로 덮어 씌워지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것은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쓰는 소설과 너무 밀접한 나머지 작품을 쓰는 내내, 계속하여 자기자신을 가공하고 갱신한다. 끔찍하게 우울한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더 많은 항우울제를 삼키게 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바보 같은 보헤미안이 된다. 나에게는 확고한 자기자신이 없다. 그로 인해 상상력은 현실의 껍질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은 제외하고,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이다. 없다. 내게는 명백한 호오가 없다. 쾌락과 고통도 생물적인 반응의 영역에 머무를 뿐, 좋고 싫다는 가치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라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고 글로 쓰는 일을 그만둔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그간 머릿속은 점점 탁해졌다. 과거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미래는 확률과 수치조차도 되지 못한다. 지금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생명력은 힘이 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살고자 하지 않아도 생명은 엄청난 완력으로 살고자 한다.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듯이 살아왔다. 혹은 살고있다. 무언가 전환점이나 원동력이 될만한 것을 찾아야한다고, 다만 염불 읊듯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
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왔다. 담배나 약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알고 있고 버릇처럼 실행해왔다. 결국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십 수년간 방치되어있던 이상하고 참담한 현실이다.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불합리한 방식 덕분에 나는 대단한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야겠다. 거대한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겁이 많은 개는 짖기라도 한다는데, 나는 짖는 것조차 두려워 내 모든 힘을 스스로의 숨통을 눌러놓는데 쓰고 있다. 원한이야 많지만 그것을 위해서 행동할만큼 나는 자신을 존중하거나 살피지 않는다.
계속 밤에 깨어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낮이 두렵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두렵다. 기피하고 싶고, 그들로부터 격리되고 싶다.
글을 쓰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실이 끊어졌다. 이 기묘한 길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Beat
술에 손도 대지 않았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고 오히려 술잔을 들이킬 때 뇌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생활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끔찍하게 화가 난다. 그럴 때면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내가 오늘 태양이 뜨는 것에 대해, 혹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 대해 동의한 적이 없다고 울분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 해는 떴고 나는 잠에서 깬다. 나는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서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지만 그런다고 무언가가 변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죽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난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은 인간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보다 나은 것이다. 그따위 생각을 하다 보면 바보처럼 웃음이 나온다. 나는 심지어 링컨이나 뉴턴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다. 우리는 생명체이고 어쨌든 그들은 모조리 죽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어디에 술병을 감춰뒀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감춘 술병을 집안의 누군가가 다시 감췄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체내에서 다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장난감을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온 집안을 뒤지며 서랍과 찬장 따위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그러나 말해둬야 할 것은,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나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다. 다만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지 않으면 현실에 내버려져있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 견딜 수 없을 뿐이다. 만일 내가 비참하기를 선택한다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술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비참함이라는 단어는 과소평가 되어있다. 나 홀로만 괴롭다는 문제가 아니다. 고통밖에 느낄 수 없다면 사람은 주변에 고통밖에 흩뿌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게 음주는 인도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지 간에, 나는 내 술병을 찾을 수가 없었고 밖에 나가 술을 사올 수도 없었다. 돈도 없을뿐더러 거리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잊어보려고 3시간 정도, 20년 전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어느 정도 목적한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내 방에서, 이 건물에서, 이 도시에서, 이 행성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공허한 감정만 몰려왔다. 약 5년 전만 해도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이프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곤 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출혈이 일어나면 엔돌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안정된다는 의학 정보를 분명히 어딘가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내 몸에 칼자국을 내는 짓은 그만두었다. 아마 정신과 처방 약물이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자해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내 머리통이 정신을 위한 편안하고 안락한 거처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허하고 비참―이 단어를 쓸 때마다 오해받을 가능성에 대해 반사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무슨 상관인가, 저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하며 은연중에 몹시 화가 나 있다.
결국에 나는 리튬과, 클로나제팜, 인데놀,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알약들을 삼킨다. 아무 음악이나 틀어놓는다. 내가 사용하는 스피커는 카시오페아 음향에서 만든 나쁘지 않은 제품이다. 중고품이라 여기저기 뜯겨나간 파트도 있지만, 음향과 관련된 부품은 아니니 별 상관은 없다. 그리고 자리에 눕는다. 책을 좀 읽다가 머릿속이 멍해지면, 혹은 중추신경 기능에 타임 래그가 발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가끔 운이 좋으면 감은 눈꺼풀 안에서 음악이 색깔로 보이는 공감각 현상을 겪기도 한다. 대체로는 그냥 쓰러진 채 사지가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지금 집안에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될까 공상하다가 의식을 잃는다. 눈을 뜬 뒤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고 무슨 일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다.
一日
오늘도 폐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침이 멈추질 않아 잠에서 깼다. 오후 1시였다. 한동안 콜록거리며 이불 위에서 온몸을 뭉개다가 일어났다. 세수를 한 뒤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11월이라서 대낮인데도 바람이 쌀쌀했다. 나는 골목 앞에서 담배를 꺼냈는데, 마침 돗대였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일 것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돗대를 피운 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믿는다.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 즈음, 어느 날부터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새 담배를 개봉할 때마다 한 개비를 거꾸로 꽂아놓고, 나머지 담배를 다 피우기 전까지는 손도 대지 않는다. 내 나름의 점(占)과 같은 것인데, 사실은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게다가, 만일 하루에 한 갑 이상씩 담배를 피운다면 매일이 운수 좋은 날이 되리라는 문제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믿기로 했다는데 누가 굳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여하간, 기분 좋게 담배를 빼 물고 있는데 뜬금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마 전날 시집을 읽다가 잠들었기 때문일 것인데, 십몇 년 전에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ㄱ모 씨에 대한 기억이었다. 하필 어제 읽던 어느 여류작가의 시집 옆에 ㄱ모 씨의 유작이 꽂혀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19살이었다. 나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지인의 지인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무슨 여자관계 때문인지 가족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우울증 때문에 죽었다고 들었다. 즉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니, 열차에 치여 죽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명백하게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 ‘행운의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만일 그도 나와 같은 사소한 습관이 있어서, 그날 아침에 돗대를 피웠더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빌렸던 돈을 하루 만에 모조리 갚고 철로 위로 달려가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을까? 적어도 돗대를 피우지 않은 날로 자살을 유예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별다른 맥락도 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나는 그와 실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유작을 한 권 가지고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은 그에 대해 길게 고민을 할 정도로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십몇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타르와 니코틴 따위가 허파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난 다음에야 졸음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야 하루가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ㄱ모 씨의 유작을 꺼내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불을 발로 차 한쪽으로 밀어놓고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도 이렇다 할 계획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깨어나고서부터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베란다로 가서 플라스틱으로 된 커다란 술통을 꺼내왔다. 직접 담근 매실주가 든 통이었다. 통을 들고 기울여 머그컵에 가득 따르고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시자 텅 빈 위장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실상 수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다를 것도 없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아침 약을 술과 함께 삼켜버리고 컴퓨터를 켰다. 작업용으로도 쓰고 오락용으로도 쓰는, 오래된 데다가 얼마 전부터 자꾸만 모니터에 이상한 명령어가 떠오르는 고물이었다. 키보드 옆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문뜩, 재밌는 작품을 쓰기 전에는 어지간하면 죽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19살 청년 같으니, 자살할 날은 언제든지 다시 정할 수 있었을 텐데.
매실주를 다 마신 뒤에 나는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다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이제 정말 뭐라도 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서울 1964년 겨울> 감상.
기록/도서 2021. 12. 16. 02:27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이야기는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익숙하리라는, 어느 흔한 포장마차에서 시작된다. 오뎅과 군참새, 세 종류 정도의 술을 팔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장이 펄럭거리는 그곳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김’과 ‘안’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함께 술을 마신다. ‘김’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었으나 실패하고, 군 제대 후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안’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부잣집 아들로 ‘김’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파리를 사랑하느냐’,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등의 일견 관념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들이 지적 허영에 빠진 것인지 취기에 힘입어 진정 어린 대화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들 특유의, 취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모든 거짓을 배제하려는 이상한 결벽증을 작가는 장면마다 계속해서 묘사한다. ‘안’의 경우에는 손까지 잡아가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하고 재차 확인하곤 한다. ‘김’은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꺼내면 5분도 되지 않아 술자리가 끝나버린다는 ‘안’의 말을 듣고 어쩐지 이해할 것 같은 마음에 대화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자 곧 두 사람은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한 듯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화신 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트롤리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발견과 기억인 듯하다. 사람들로 가득하고 계획생산 된 도시에서, 모든 광경과 사건들은 공유되는 공공의 것이지만 사소한 디테일과 매일 달라지는 세밀한 차이는 그것을 발견한 개인만의 것이 된다. 직후 ‘안’이 늘어놓는 밤거리에 대한 다소 현학적인 설명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안’은 자신이 밤거리로 나오는 이유에 관해, 밝은 낮에는 사물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느낌이지만 밤이면 ‘사물들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밤이 되면 사물들은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생 미셸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관찰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안’은 낮이면 사물들 속에 끼어버리지만 말테는 늘 사물들로부터 타자가 되어 있는 부분인 듯하다.
‘안’의 현학적인 이야기에 ‘김’이 당황하자 그들은 밤에 느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뿌듯함’으로 타협한다. 의기투합한 그들이 제대로 된 가게에서 술자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로 술이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불을 쬐고 싶어 포장마차 안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자신도 돈이 얼마 있으니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술값만 있다면……’하고 승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일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거리로 나선다.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서 그들은 목표한 곳도 없이 걸어 다닌다. 그러던 중 삼십 줄의 사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이미 식사를 했다는 ‘김’과 ‘안’에게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게 음식을 권한다. ‘김’이 ‘그렇다면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켜도 되느냐’고 농담 삼아 물은 말에 사내는 선뜻 그렇게 하라며, ‘돈을 써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식사를 하며 사내는 조심스럽게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날 낮에 사내의 아내는 병으로 죽었다. 처갓집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친척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가난한 서적 월부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4,000원을 받고 병원에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사내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해 미안하다면서,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그는 돈을 오늘이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안’은 얼른 써버리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돈을 다 쓸 때까지 ‘김’과 ‘안’에게 함께 어울려달라고 청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데, 술에 만취한 세 인물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충동적인 구매를 할 때마다 ‘1,000원이 없어졌고’, ‘600원이 없어져 버렸다’, ‘300원이 없어졌다’ 하는 식의 서술이 인물들의 절박하면서도 무책임한 심리상태를 속도감 있게 표현한다. 그 후 지나가는 소방차를 발견한 그들은 택시를 잡아 소방차를 쫓는다. 이때 ‘안’은 불구경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창부를 사러 가자고 하는데, 작품 초반에서부터 보이는 ‘안’의 외설적인 것을 경시하면서도 호색한의 면모를 드러내는 모순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국 세 남자는 화재 현장에서 2층짜리 건물이 불타는 것을 구경한다. 이때 ‘김’은 그저 유심히 간판이 차례차례 타들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며, ‘안’은 화재란 공공연한 사건이기에 화재에 대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현학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만취해 불길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던 사내는 한동안 불구경을 하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돌과 함께 손수건에 싸서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다.
이때부터 아내를 잃은 사내는 더 절박한 모습으로 변한다. ‘김’과 ‘안’에게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여관에 묵을 돈을 충당하기 위해 한밤중임에도 월부 책값을 받겠다고 책을 판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이는 본디 아내였던 것이 4,000원의 돈으로 변하고, 그 때문에 아내의 죽음 역시 4,000원의 돈으로 유보되었던 상태가 끝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제 닥쳐오는 현실에서 돈으로밖에는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내는 돈을 구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부탁해 ‘김’, ‘안’과 같은 여관으로 향한다. 사내는 계속해서 같은 방에서 머물자고 요구한다. ‘김’은 연민을 느껴 사내의 말대로 하려고 하지만 ‘안’은 여지도 주지 않고 각자 방에서 자야 한다고 결정한다. ‘김’은 계속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 듯, 화투라도 치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이때 ‘김’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내의 상태에 대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은 피로를 핑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김’도 이제는 너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안’은 급히 ‘김’을 깨운다, ‘안’은 대뜸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하고 말한다. 사내가 자살한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안’은 사내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노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김’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 여관에서 도망친다. ‘김’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잠시 기묘한 대화를 한다. ‘안’은 ‘김’에게 자신들이 분명히 스물다섯 살이 맞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서로가 스물다섯 살이 분명하다고 확인하는데, ‘안’은 무엇인가가 두렵다고,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김’은 그들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못 박아 말한다. 악수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진다. 버스를 탄 ‘김’이 차창 너머로, ‘안’이 눈을 맞으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히 인물들의 역할인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김’, ‘안’,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 이렇게 셋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김’은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초반에 ‘안’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들 때문에 ‘김’은 일견 순박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에서 단련되고 벼려진 이중적인 면모가 점점 돋보인다. 결말에서 사내가 자살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여러 번이나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러한 면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의 사건 때문에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에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시원스레 말할 수 있다는 점이 ‘김’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듯하다.
반대로 ‘안’은 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이 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김’과 역할이 바뀌는 듯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내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는 대사는 체념 섞인 반성의 어조로 읽히기도 한다. 만약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면 사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안’은 그것을 알고서도 각자 방을 쓰도록 했다. 부유한 지식계층이 쉽게 취할만한 행동으로 보이고, ‘안’에게 어울리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는 자신이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는 아마도 사내의 비극과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강제적으로―겪게 된, 일상 속의 부조리와 그러한 경험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고찰일 듯하다. 이 하룻밤 사이의 사건에서 ‘김’이라는 스물다섯 살 청년은 이미 완벽하게 서울에 적응하여 단련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안’은 앞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변해갈 가능성을 보이는 듯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삼십 줄의 사내는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인다. 이 사내가 없이 ‘김’과 ‘안’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작품은 두 사람의 상념과 관념적이기만 한 대화로 끝나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내의 비극으로 인하여 소설은 기복을 갖게 되고 이야기로서 완결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며 나는 무엇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인지, 실존에 대한 고찰을 다루면서도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사건과 인물들이 역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은 단편소설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소설이었다.
<싯다르타> 감상.
기록/도서 2021. 12. 16. 02:25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활동했던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본래 이름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작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부처 고타마’로 불리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작중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고유하게 쓰인다.
사제 계급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출중하고, 어린 나이에 다른 사제들과 신학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등 뛰어난 지적능력의 두각을 드러낸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강한 학구열을 가졌고,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표현되는 ‘아트만’에 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갈증을 끊임없이 느끼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친구이자, 그의 지적인 고상함을 숭상하는 숭배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청년이 된 싯다르타는 바라문이 전통적으로 해왔고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 신학을 논하고 제사에서 주문을 외우며 계급제도의 최상위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다. 그런 생활로는 결코 ‘아트만’에 이를 수 없으며, 진리를 깨닫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숲속에서 생활하며 ‘아트만’에 이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문에 고빈다와 함께 귀의한다. 그들은 사문에서 정신으로 육체의 활동을 통제하는 일, 이를테면 호흡하지 않거나 심장의 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방법 등을 수련하고, 단식과 인내로 인체의 욕구를 제어하거나 정신 자체를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로 옮겨 자아를 해체하는 훈련에 매진한다. 그러나 온갖 요기와 같은 기술과 신통력을 얻게 되어도 싯다르타는 그것이 자아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길일 뿐이며, 결국 아상(我想)을 깨트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문의 가르침에 환멸을 느낀다.
그 즈음하여 인도 전역에는 ‘고타마’라는 자가 정각에 이르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많은 구도자가 부처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떠나고, 소문에는 고타마가 진정한 부처라는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속세에 타락한 거짓된 구도자라는 반대되는 이야기도 섞여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사문을 나와 부처 고타마가 기거하고 있다는 기원정사로 향한다.
기원정사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 그들은 부처 고타마야말로 정각에 이른 분이고, 자유자재한 분이며, 현세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 분이라고 확신한다. 고빈다는 곧바로 불가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우연히 부처 고타마와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부처 고타마와 독대하며 싯다르타는 자신의 의구심을 털어놓는다. 그가 생각한 것은 가르침이란 말을 통해 전해지는 이상 관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닌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부처의 거동이나 말투, 표정 등을 보고 확신으로 굳어진다. 즉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은 자, 가장 존귀한 세존이라는 점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부처의―말을 거친― 가르침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부처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대는 똑똑하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라고 경고한다. 그날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와 고빈다를 떠나며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한다.
이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는 사물들의 저편, 피안의 너머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으나 이제 싯다르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와 존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이 흐르는 소리, 풀과 꽃의 빛깔,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 태양의 따스함 등이 전부 그 자체의 것으로 느껴지며 싯다르타는 자신이 지금까지 찾던 ‘아트만’이 사물의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있음을 감각한다. 그는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좋은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겪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느 마을로 들어서기 전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이 뱃사공과 그의 오두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을 건넌 뒤 뱃사공에게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싯다르타 역시 이 만남이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 뒤 모든 것을 겪어보겠다는 싯다르타는 한 마을에 도착해 사문의 입장을 버린다. 그는 카말라라는 유명한 기생과 연인이 되며,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번다.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할 줄 아는 일, 즉 단식하고 기다리며 사색할 줄 아는 일이 커다란 지혜로서 도움이 된다. 그의 사업은 번창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일에도 막히거나 부자유한 점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싯다르타에게는 속세의 때가 묻고, 재물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그 증오는 결국 술과 도박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재물에 집착하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사위 놀음에 엄청난 재산을 쏟아붓고, 그 다음 날은 잃은 것을 돌이키려고 흉폭할 정도로 사업을 강행한다. 어느새 머리가 반백이 될 때까지 그런 삶을 살던 싯다르타는 술기운에서 깨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구토하고 싶다는 강한 절망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속에 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구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주 오래전,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 건넜던 강까지 꼬박 하룻밤을 들여 걸어간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 작정을 한다. 어린애 유희 같은 인간들의 삶에서 빨아 마실 수 있는 것을 모두 빨아 마시고, 이제는 부패하여 온전히 절망하기만 하는 그는 강가에서 투신할 작정이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야자나무 아래서 바라문 시절부터 기억의 깊은 곳에 심어져있던, ‘옴’이라는 한 음절의 완전무결성이 울려 퍼진다. 그 음절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하며 싯다르타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 안에서 자라났던 것들이 전부 시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깊은 잠에 빠진다.
잠을 자는 동안 내면의 모든 자아가 죽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뒤 깨어난 싯다르타는 자신이 한 번의 ‘윤회’를 겪었다고 직감한다. 지금까지 전부 ‘구토’해버리고 싶던 싯다르타는 모조리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때 싯다르타가 잠에서 깰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던 고빈다와 만나게 된다. 고빈다는 불가의 승려로서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강가에 누워 자고 있던 사내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잠자는 사내가 싯다르타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싯다르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고빈다는 몹시 놀라며 싯다르타의 변한 모습, 값비싼 의상과 부유한 상인 같은 외견을 지적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형상의 수레바퀴는 빨리 도는 법”이라며 자신이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을 암시한다.
고빈다와 헤어진 뒤 싯다르타는 오래전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 주었던 뱃사공을 찾아간다. 싯다르타는 강물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결이 흘러 가버려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느껴 뱃사공의 조수가 된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러 해를 함께 산다. 현명하고 친절한, 늙은 뱃사공과 함께 살며 싯다르타는 점점 강이 알려주는 진실들에 따라 지혜롭고 겸손해진다. 오랫동안 뱃사공 일을 하며, 뱃사공 바주데바와 싯다르타는 생각하는 방법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심지어 외견조차도 닮아간다. 그들은 강에서 흘러가는 물살이 바다로 가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과 들에 비로 내리는 일들을 강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양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과 가치들은 사실 거대한 원형구조 속에서 단일성으로 통합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두 번째 깨달음이다.
이후 부처 고타마가 입멸한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진다. 싯다르타가 떠난 뒤 기생을 그만두고 불교에 귀의하여 살고 있던 카말라는 아들을 데리고 세존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그 아들은 싯다르타가 줄곧 모르고 있던 싯다르타의 자식이다. 그런데 강을 건너기 전 카말라가 독사에게 물리는 일이 벌어지고, 바주데바가 급히 오두막으로 옮겨와 카말라는 죽기 직전 다시 싯다르타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다’고 하며 아들의 존재를 알리고 숨을 거둔다. 그 뒤부터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아들을 키우게 되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통이자 번뇌이다. 아들은 천방지축에 무례하고 응석받이인데,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싯다르타에게 욕을 하고, 그릇을 던지고, 싯다르타의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태도가 오히려 자신을 경박한 존재로 만든다며 반항한다. 이럴 때마다 싯다르타는 고통스러워하고 어떻게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 번민한다. 바주데바는 자주 싯다르타에게 충고한다. “그대가 아들을 위해 열 번을 대신 죽어준다 하더라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때 싯다르타는 청년 시절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문이 되었던 일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가 윤회의 바퀴 속에서 방황과 절망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들에게만은 그것이 면제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싯다르타는 계속 아들을 주변에 두고자 한다.
곧 아들은 바주데바와 싯다르타의 돈을 훔쳐 마을로 달아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을 가로질러 마을까지 쫓아간다. 그 와중에 싯다르타는 사람이 자식의 운명을 소유하거나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마을 입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명상에 빠진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세 번째 깨달음이다. 이미 현자 혹은 성자라 불릴 만큼 현명한 싯다르타였으나 혈육에 대해서만은 번뇌와 미망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 싯다르타라는 한 성인의 마지막 방황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곧 그를 따라온 바주데바와 함께 싯다르타는 강가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바주데바의 손에 이끌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의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 아직 아들을 품에서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싯다르타에게 강의 소리는 온갖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비웃고, 비명지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것을 말하자 바주데바는 ‘더 잘 들어보라’고 채근한다. 계속해서 강의 소리를 듣고 있자 싯다르타는 곧 강이 내는 모든 소리를 듣게 된다. 기뻐하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 악한 소리와 좋은 소리가 모두 뒤섞여 목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되었으며, 웃음소리도 슬퍼하는 소리도, 선한 소리도 사악한 소리도 강 그 자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가고 그 뒤에 원형구조를 이루며 강물의 원천까지 되돌아가 다시 모든 소리를 내는 강이 되었다. 이때 싯다르타는 범(凡)의 의미를 깨닫는데,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이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가르쳐준 바주데바는 빛이 나듯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처음 부처 고타마를 떠날 때 싯다르타는 ‘말로 된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주데바는 겸손하고 친절한 행동과 경청하는 방법으로 싯다르타를 해탈로 이끈 것이다.
늙고 지혜로운 뱃사공으로 싯다르타가 계속 살아가던 중, 불가의 승려로 살고 있던 고빈다가 나룻배를 이용하게 된다. 고빈다는 이 강가에 사는 뱃사공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대화를 하던 중에 싯다르타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고서야 고빈다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위해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고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가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 등으로 개념을 양립시켰던 것은 ‘말로써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은 자인 세존은 그것들이 하나의 단일성 속에 있음을 경험과 인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빈다는 마지막까지 싯다르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아주 괴상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빈다가 보기에 싯다르타는 세존만큼 표정이 빛나고 몸짓이 자유자재하며 무엇 하나 거추장스러운 점이 없다. 고빈다는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고빈다가 부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싯다르타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지켜보더니 대뜸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보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그 순간 고빈다는 불분명하게 연결된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데, 그 얼굴들은 성자였다가 살인자이기도 하고, 사람이었다가 짐승이기도 하고, 기뻐하는 표정이었다가 고통에 빠진 표정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미물이었다가 신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환상이 없는 채로 모든 얼굴이 그 자리에서 동시에 뒤섞여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완성된 것, 즉 범(凡)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이 반투명한 가면과 같은 것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면은 바로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똑같았고 싯다르타의 늙은 미소와 똑같았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빈다는 눈물을 흘리고, 여전히 수백 개의 주름으로 미소짓고 있는 싯다르타에게 깊이 절하며 작품은 끝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데미안> 이후에 쓰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쓰인 <데미안>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인의 의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젊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고 문학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데미안>에서 헤세가 현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답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데미안> 이후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모든 경험은 다 겪어보아도 좋은 것’이라는 사상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두고 있는 듯하다. 처음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지적으로 대성하였고, 이후 사문에서 정신주의의 극단까지 가보았으며, 사문을 그만둔 뒤로는 세속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성공과 타락까지 경험한다. 나중에 싯다르타는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싯다르타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모든 가르침을 오로지 경험에서만 체득했다는 점인 듯하다. 마지막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말은 진리에 싸놓은 겉껍질 같은 것”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말이나 지식으로 해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선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불교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좌선이나 선문답, 불제자로서의 행위, 수련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완전한 해탈인 ‘불가사의해탈’은 지식적인 깨달음인 ‘지해탈’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체득한 인식과 지혜로 이루어진 ‘혜해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불가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헤세가 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싯다르타>라는 소설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매우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으로도 역사에 남을만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싯다르타>를 단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 분량의 선문답으로 이해해도 잘못된 시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아들로 인한 싯다르타의 번뇌는 석가모니불의 아들 ‘라훌라’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오마주인 듯하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라는 뜻으로, 구도의 길을 걷던 석가모니에게도 혈연이 만드는 고뇌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장 큰 장애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바주데바와 강(江)의 가르침으로 이미 성자의 반열에 오른 싯다르타가 마지막으로 겪는 장애 또한 자신의 혈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불제자인 고빈다가 불가의 가르침을 오로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다소 아쉽기도 하다.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인물이 불도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점은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다.
다소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이기도 한 작품이지만 삶의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했던 헤세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경험과 체득을 중요시하며 ‘말’의 표피성을 지적하는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물과 인간이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해줄 듯하다. 그리고 ‘감각과 사유 모두’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작품이 주장하는 바는 인생에서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를, 소설만이 가지는 ‘간접경험’이라는 무기를 통해 여실하게 전해줄 것이다.
페르소나 (Persona, 1966)
기록/영화 2021. 10. 11. 21:42 |
당신은 자살하지는 않겠죠. 그것은 추잡하니까.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얼굴들이 분열되어 있고 각각의 조각이 타인, 그리고 다른 조각들을 위한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존재라는 상태는 참을 수 없이 모순되어 있고 그 어떤 정당성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진실이 민낯을 드러내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편중독자가 되기 전에는 금단증상이 보여주는 세계를 직시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지드가 나타나엘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쓸모없는 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이미 현상들만으로 충만해있고 내재된 실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인간의 영혼이 무너질 때 느닷없이 생겨난 장막이 걷어지고,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공허와 부조리, 무질서, 황폐함을 몰고 오는 것이다. 현상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강박이야말로 이미 완성되어있던 인간의 정신을 부수고 썩게하는 독약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저주처럼 독약을 마시며 성장해야만 하기도 했다.
20210813 오전 3시
기록/생각 2021. 8. 13. 03:27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사람이나, 세상에는 슬프고 괴로운 일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은 전혀 불행하지 않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신이 불행해야만 한다는 환상과 강박에 잡아먹힌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행한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상처나고 뒤틀린 세계관에 남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부단히 노력한다. 어찌보면 그들 자신이 불행의 늪에 잠겨있다고 믿으면서도 삶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란 그것 뿐이다. 그들에게는 수동공격적인 악의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이해도, 치유도, 자기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도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불행해야만 한다고 광신하며, 그들의 신인 비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오로지 증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려는 병든 의지로 가득하다. 홀로 종교심판관이 된 그들은 추악하고 혐오스럽다. 불행과 비극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선도 치료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악성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희극 무대에서 외로이, 꿋꿋하게 비수와 이를 동시에 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불쾌하면서도 더 없이 우스꽝스럽다.
아냐, 나는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북인도에서 수행에 힘쓰고 있는지, 행자 생활을 마치고 비구니계를 받았는지, 혹은 어떤 이유 때문에 러시아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도 말입니다.
사실 당신에게 연락을 하는 일 자체는 쉬운 것이었습니다. 내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직도 당신이 적어준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으니까요. 그러나 알다시피 나는 단 한 번도 이메일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칠불암의 주지 스님께 전화를 건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정확히 무언가를 바라고 전화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내가 맨정신일 때 절대로 하지 않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여하간에 나는 두 번 전화를 걸었고 주지 스님께 똑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수행에 힘쓰고 있는 중이며, 그렇기에 징월 거사가 자꾸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7년 넘게, 나는 당신에게 연락할 생각을 완전히 접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출가할 의지를 품었을 때 당신은 내게 의견을 물었지요. 자주 그 생각을 합니다. 칠불암의 본당에서 조금 내려가 얕은 계곡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대화했습니다. 네댓 개월 동안 우리는 함께 전국의 산사를 모두 보러 다녔었지요. 마침내 칠불암에서 당신이 출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나는 사실 그리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처음 당신을 만난 곳이 경북 봉화의 산사 아니었습니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나는 혼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 투명해서 그 안에 자리 잡은 영혼까지 전부 보이는 것 같았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눈동자의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내 오랜 친구 앤드류의 눈동자도 당신과 비슷한 색깔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누가 보아도 사바세계에서 고통과 체념에 발버둥 치며 사는 인간의 눈입니다. 그러니 내가 놀라고 심지어 공포까지 느꼈던 것은 당신의 눈동자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어떤 낯선 것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그때 나는 가능하면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났던 산사에서는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 주지 스님과 나밖에 없었던 탓에, 스님은 내게 ‘아냐의 절 생활을 가까이서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대화하고, 항상 둘이서 울력을 하고, 산길을 산책하고, 공양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어느샌가 나는 당신의 눈에서 비쳐 보이는 낯선 그 무엇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늘 고요하며 침착했고, 얼굴에서는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조용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7년 전 그 시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면서 처음 맛보는 행복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신과 전국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곁에 당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망이 잊혀지는 듯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다 당시에 썼던 수첩을 찾아냈습니다. 감상적이며 과장된 표현들이 가득 써 있는 것이 낯부끄럽기도 하지만, 수첩의 페이지 중 일부를 이 편지에 붙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리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갑자기 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에게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이런 것이 내게 허용되는 것인지 의심했다. 나는 내가 망가진 인간일 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발리움과 벤조디아제핀 따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고통이 예전만큼 저주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가 반대의 것, 이를테면 숭고한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느 의사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그녀가 알려주었다. 나는 지금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예전에 나는 태양 아래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물들의 형태가 명백히 드러나는 대낮에도, 나의 눈은 그림자에 가려져 절망과 캄캄한 어둠 속만을 떠돌아다녔다. 나는 내가 괴물이라고 믿었다. 아는 것은 고통뿐이고, 주변 사람들마저 고통스럽게 만드는, 역병 같은 존재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우나 위협도 공포도 느낄 수 없는 빛을 발견했다. 나의 영혼의 살에는 불현듯 피가 돌고, 내 병든 심장에는 열정이 방망이질 친다. 나는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꿈이고 내가 깨어나 버린다면, 나는 더이상 그 어떤 할 말도 없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도 나도 몰랐겠지만, 아냐, 당신은 내게 우상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출가한 후 나는 7년 동안 그 어떤 여자와도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의무나 금욕적 생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런 의욕이 없었습니다. 다시 칠불암의 계곡에서 했던 얘기로 돌아가죠.
당신은 내게 출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계곡에서는 투명하고 빛나는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가끔 물거품을 튀기곤 했습니다.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나는 더 이상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외로, 충격적인 것들이 가장 먼저 잊혀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나는 그때 머릿속에서 떠올라 입으로 튀어나온 몇 가지 말들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해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을 걷겠다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남녀와는 달리 육체관계를 맺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빚지고 있지 않고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요. 우리가 서로의 육체로 한 일이라고는, 석양이 질 때 대청마루에서 손을 포개고 하늘이 완전히 밤으로 뒤덮이기를 기다렸던 것이나, 매일 몇 시간씩 산길을 돌아다니며 아이처럼 장난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당신이 나의 연인이었다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친구나 도반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적 관계를―당신도 나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가진 상태였다면, 나의 이기심을 위해 당신이 출가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요.
아무튼 당신은 칠불암에서 출가하기로 했습니다. 삭발이 예정된 바로 전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짐을 싸 들고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의정부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모조리 신문지로 막고 2개월 동안 거의 먹지도 밖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궁상을 떨며 안 그래도 적은 체중이 5~6kg이 더 빠지고 피부에는 곰팡이 냄새가 배었습니다.
벌써 7년이 넘게 지났네요. 당시에 쓰던 수첩의 마지막에는 마치 스스로에게 선언하기라도 하듯 ‘꿈은 끝났다.’라는 문장이 볼펜으로 꾹꾹 찍어눌러서 쓰여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꿈이었는지조차 모호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었던 반년이 꿈 같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편지는 어디로 발송될까요. 당신에게 이 편지가 닿든 그렇지 않든, 나는 단 한 가지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기나 할지, 찾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하더라는 사실을 당신이 가르쳐준 것 말입니다.
다만 아직도 안타까운 것은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안나야리기나’라는 첫 부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중간 이름도, 성도 전부 기억 속에서 흩어져버렸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마지막 남은 당신의 이름마저 앗아가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그 망각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내가 처음 글을 써야만 한다고 느꼈을 때, 그 이유는 내게 어떤 불세출의 재능 따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히려 반대였다. 문학사에는 이미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걸작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게 가장 큰 문학적 영감을 준 천재들은 벌써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유산을 남긴 채 죽어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나의 피라미드를 짓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피라미드를 기어 올라가는 것 말이다.
문젯거리가 될 수 있는 사고방식이지만,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현대문학은 단 한 번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현대를 근대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당연히 내가 쓰는 글들도, 쓰게 될 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어떤 철학적 화두에도 진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천 명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그런 화두에 대해 수천 개의 시각으로 접근한 후에 비로소 나는 딸려나온 탯줄처럼 세상에 엎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직업이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고, 나는 거만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옛날 책을 즐겨 읽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가들은 단 하나의 소재,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몇백 년이나 자가복제로 생존해왔다. 단 하나의 소재란 인간뿐이다. 인간의 동의어는 세계도 될 수 있고 우주도 될 수 있다. 단지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는 시대와 공간을 비틀어가며 끊임없는 말놀음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언어란 인간이 멸종할 때까지 함께 변화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분히 회의주의적이지만 허무에 대해 공허하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종말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시대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절대 종말을 맞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계속 자가복제를 반복하며 언어와 인간이 사라지는 날까지 '오래된 글귀들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존할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 감상.
기록/도서 2021. 5. 20. 00:48 |도서관, 진실과 회의
보르헤스의 <픽션들> 가운데 한 편인 <바벨의 도서관>은 저자가 관찰하고 상상하는 세계가 그대로 글이 된 것 같은 단편이다. 시작부터 ‘도서관’과 ‘우주’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화자를 이용하여 보르헤스는 작중에 그려지는 ‘도서관’이야말로 우주, 혹은 세계의 비유적 형태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육각형의 진열실에 다섯 개의 책장이 있고 각각의 책장마다 서른두 권의 책이 꽂혀있는 공간이 위와 아래, 그리고 복도로 연결된 평면으로 무한하게 펼쳐진 것이 이 ‘우주’의 모습이다. 이 도서관은 어느 모로 생각해봐도 무한하지만, 25개의 철자 기호(22개의 철자와 여백, 쉼표, 마침표)가 410페이지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합은 유한하기에, 단순히 무한하다 유한하다 단정하기가 힘들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마지막에 작중 화자가 나름의 가설을 희망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공간에서 모든 인간은 사서로 태어난다. 그들은 ‘도서관에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시행착오 덕분에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지식은 물론이고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진리까지도 도서관의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시절 으레 ‘어떤 책’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화자 또한 ‘목록 중의 목록’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인물이다. 여행으로 그치지 않고 ‘사서들’은 수 세기에 걸쳐 도서관에 대한 온갖 관념적, 철학적, 신학적 이론을 세우고 교파를 만들며 행동하기까지 한다. 나에겐 이것이 인간본성과 인류에 대한 보르헤스의 날카로운 비평이자 풍자로 보인다.
‘도서관’에는 몇 가지 조건(철자의 수, 페이지 등)을 갖추기만 하면 가능한 모든 책이 존재한다. 이는 우주가 무한하다면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영’이 아니기만 하면 모든 가능성이 실재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나에게는 이 도서관이 혼돈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과 ‘영이 아닌 것’으로만 실재가 나뉠 뿐, ‘영이 아닌 것’들은 모조리 존재하거나 벌어질 수 있으며 그런 일에는 허가도 도덕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주의나 이념을 내세우며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작중에서도 화자는 ‘유일한 종족인 인간’이라는 문장을 쓴다.
작중의 온갖 교파들이 각기 다르게 주장하는 진실이나, 어딘가에 있을 진리가 적힌 책을 찾아다니는 것이 도서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화자는 ‘도서관의 모든 책은 유일무이하다’고 쓴다. 그리고 모든 유일무이한 책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변형되거나 번역, 해석되어 무궁무진하게 도서관에 꽂혀있다고도 쓴다. 그 책들 또한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서가 찾는 진리의 책이라는 것이 과연 다른 책들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도서관의 모든 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설령 어떤 사서들의 집단이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책이다’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고 한들, 도서관의 구조와 원칙을 생각해보면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동일한 가치밖에는 가질 수 없다. 그 ‘진리의 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서들뿐이다.
다시 말해 ‘가능성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만물과 만사가 평등하게 무가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일한 종족’인 인간만이 거기에 각기 다른 값어치를 매긴다. 인간은 질서를 찾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생각해보면 우주는, 혹은 우주의 대전제가 되는 것은 늘 혼돈과 우연이다. 우주(또는 도서관)가 질서정연한 형태로 보이는 것은 그것의 본질이 규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질서를 찾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늘에 아무렇게나 떠 있는 구름만 보아도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를 연상하는 본능이 인간에게는 있다. 즉 언제나 규칙성을 찾고 있는 종족이다. 인간이 말하는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욕망에 따른 환영 같은 것이며 혼돈 내부에 존재한다. 이런 생각은 보르헤스의 또 다른 단편인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읽으며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인간이면서 인간본성을 차갑게 부정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러한 사고방식 또한 ‘질서’를 찾는 본능의 표현이기도 하다. 화자는 곧 자신이 죽게 되면 어느 친절한 사서들이 자신의 시체를 육각형 진열실의 가운데 뚫려있는 영원한 허공에 내던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그는 인간이 멸망해도 도서관은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무질서가 반복되면 질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질서”가.’라고 희망하며 수기를 마친다.
내가 알기로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평생 진리나 통일성을 찾아다닌다. 방법의 차이 때문에 눈에 띄거나 그렇지 않을 뿐, 모두가 도서관에서 태어난 사서와 같다. 그러나 수없이 많고 판이한 진리들이 동등한 가치로 존재하거나,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신들이 ‘유일무이한 책들’을 써놨을 가능성도 절망처럼 존재한다. 작중에 언급된, 410페이지 동안 M, C, V만이 반복되는 이상한 책이 만약 우주의 진실이라면, 인간에게 우주의 진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위와 같은 생각들을 끌어내며 보르헤스의 소설은 언제나 날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을 강요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때문에 오랫동안, 내게 보르헤스는 늙고 괴팍하며 비웃음을 띈 노인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다. 그는 인류를 모조리 비웃으며 지식과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의구심은 늘 머릿속에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악의적인 이미지―나의 개인적인 이미지지만―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맹렬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기발한 상상력과 문학에 대한 그 불같은 열정이 읽는 사람을 놔주지 않는다. 설령 그 안에서 가학적이며 얼음같이 차가운 조소가 이쪽을 향하는 것 같아도, 훌륭한 문학작품에서는 그것이 불쾌할 수 없다.
아니, 보르헤스뿐만이 아니라 거장들의 작품에서는 어떤 끔찍한 눈동자가 페이지 안에 담겨 있어도 책을 덮어버릴 수 없다. 오히려 그 끔찍한 것을 밑바닥까지 마주 보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에 담는 진실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는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없다.>
기록/생각 2021. 4. 27. 10:40 |오로지 인간애 뿐인 것이다. 세상이 진흙탕인 것은 단 한 번도 변한 일 없고 사람들은 똑같은 고뇌만 반복하다 돌아갔다. 그러니까 인간애인 것이다. 일본의 키가 작은 시인은 역전에서 헤매다 남고생 한 명을 붙잡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냈다고 한다. 나는 외로운 사람이오. 아마 그 거동수상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극 같은 것을 말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변하는 것도 없고, 이미 각자의 비극 속에서 나름대로 살고 있다. 나불나불 떠들지 않아도 어차피 다들 살아가고 있다. 항복하는 이들은 항복하면 그만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그렇지 않은대로 패배하면 그만이다. 결과가 전부라고 나름 멋을 내며 말들을 하지만 따져보면 모든 생명의 결과는, 결말은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 결과라는 것은 단 하나의, 모든 것을 수렴하는 평등뿐이다. 그렇기에 결과가 전부라면 모든 이들은 지저분한 허무주의자밖에 될 것이 없다. 살아있으면 그만이다. 한 평짜리 감옥에 있든 초원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든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뫼르소는 감방 안에서 벽돌들의 모양을 더듬고 짚단 밑의 신문조각을 찾아내 '드넓은 세상'이라는 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알아차렸다. 살아있으면 패배할 때까지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이미 인간이라는 뜻이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도 되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 살면 그것으로 할일은 다 하는 것이다. 조르바도 영웅이고 지하생활자도 영웅이다. 그러나 딱히 영웅이 될 이유도 없다. 캉디드가 비극으로 끝났다고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사람은 사람이고, 어차피 쓰러진다. 뭘 하든 좋다. 아나키즘이나 도덕적 불구 같은 용어랑 연관시키고 싶지는 않은데, 어찌 될 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이다. 삶을 사랑할 수 있으면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단어의 범위를 무자비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뭐든지 허용되는 자유는 치명적이지만 사실 보편적이고 선험적이다. 어떻게 할지야 각각 사랑의 의의에 달려있고 금지되는 개념도 없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인간 아닌가.
절필이든 꿈이든 환상이든 수레바퀴든
기록/생각 2021. 4. 4. 19:35 |그는 자신의 오른 어깨를 뽑아 가방에 넣는다
지퍼에 낀 연골을 구겨 넣을 때
어디선가 설렁탕 냄새가 났다
한쪽 소매를 펄럭이며 나서는 비장한 외출
자신의 처절한 절연과
오른팔의 가격에 대해 따져볼 때
사람들의 생각은 아, 저기
외팔이가 가는군, 그 정도로 끝나며
그것으로 충분하기도 하다
전철의 노약자석에 그는 앉지 못한다
노약자의 의미에 대해 바쁘게 생각하는
짧은 공황이 마침표를 찍을 때
벌써 그는 출판단지에 어설프게 발을 디딘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결심하며
빌딩의 4층으로 올라가
어느새 편집부장이 된 박씨를 부른다
가방을 내밀고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스스로 다짐하는 말을 내뱉으면
부장은 지퍼를 열고 뼈 냄새가 나는 팔을 살펴본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확인하는 즉시
외팔이의 어깨는 연체동물처럼 돋기 시작한다
그야 그렇지, 이것으로
끝일 리가 없지
두 팔을 휘두르며 걷는 출판단지
새들이 조롱하듯 노래하고
하늘은 징그럽게 파랗고
무너질 기색도 없다.
거짓되거나 헛된 것을 이른다
기록/생각 2021. 3. 26. 01:38 |선생님,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말이에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니, 미학에의 갈구니 하는 것은 모조리 거짓말입니다. 그럼 왜 평생을 이토록 치열하게 해왔느냐고 물으시겠죠. 우선은 제 저주받은 성질 중 하나에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실망을 사는 일에 병적인 공포를 갖고서 살아왔습니다. 예술을 하겠다고 했으니 이제 정해진 길은 하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나 이것은 영원하고 추악한 동기입니다. 제 안에서 날뛰는 광폭함이 펜이든 페이지로든 대신 날뛰게 하겠다는, 비겁하고 비열한 동기였던 것입니다. 이 나이나 되어서 아직도, 저는 중학생 때의 일기 한 부분을 뇌에 칼로 새긴 것처럼 기억합니다. 예술가와 이상범죄자의 차이가 얼마나 애매모호한가라는, 돼먹잖은 주제를 가지고서 하루 새벽을 꼬박 종이 위에서 날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광증을 왜 아직까지 기억하겠습니까. 예술가라는 것은 찬란하고 빛나는 이름인데, 저는 결코 그것이 저에게 오거나, 혹은 제가 잡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동기부터가 불순하고 비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누군가에게도 실망을 사고 싶지 않아서, 저는 계속해서 소위 치열하다는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가 지금까지 존경해왔던 모든 선생님,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 등의 고고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가 허가되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광기를 병증으로 바꿔 써도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요? 특히 이러한 의학과 과학의 시대라면, 광기보다는 병증 쪽이 치료나 구속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저 자신에게 중요하기나 한 문제인가요? 그런데 고골의 광인일기가 어떻게 끝났죠? 누구의 코에 사마귀가 있었습니까?
멍청이, 바보 같으니.
기록/생각 2021. 3. 17. 02:57 |취중의 밤
나는 너를 생각하며 웃고 있다
너는 분명히 불행의 한가운데에 있으리라
내 하나뿐인 사랑
너는 증오로 내게 칼을 휘둘렀고
나는 시뻘건 흉터 자국을 되갚아 주었다
분명 이곳에서 가장 먼 곳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너는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왕으로 추대받아 살고 있다
내 입술 자국이 차갑게 얼어붙으리라
내 입꼬리에 고드름이 맺히리라
단 한 번이라도 용암처럼 고함질러봤으면
나의 추태뿐인 축제에서
사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를 만나러 하루하루 파란 알약을 모으는 나를
너는 비웃을 리 없다, 고통에 비명 지르고 있을 테니
웃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내가 불행하다고는
아무도 추측하지 못했다
거짓말의 혀와 미로의 뇌간 사이로
나는 전부, 훌륭하게 속여넘긴 것이다
나 자신마저도! 내가 뱉는 모든 말은
쓰는 모든 글은
짓는 모든 표정은
거짓말이요 허구요 픽션이요 주르륵 앉은 관객들과
연기자인 나 자신을 속여 벗겨 먹는 사기에 불과하니
나는 너를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말했다
내 축제에 사랑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이다.
땅을 보는 건 짜증이 나. 맨정신일 때는 무섭지. 나의 작은 방에서 벗어나 인생을 모조리 겪으려고 태평양도 건너가 나는 작은 방을 빌렸지. 차라리 술에 있는 대로 취해 황색 인종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거리에 엎어졌어. 그러나 하늘에라고 돌아갈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지. 어디에 있건 나는 헤매며 쫓기고 쫓아다닐 뿐이었는데, 누군가가 쓴 글은 이렇게 시작하지. <나는 태생적으로 방랑자이다.> 방랑자라면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할 것을. 공허에도 날 부르는 자리는 없고 내 의자도 없다.
본문은 바보가 쓰도록 하고 제목은 언젠가 현인에게 맡기자
기록/생각 2021. 3. 16. 04:06 |치료사에게 별 다른 고민도 없이, 지금 당장 죽을 이유까지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다. 전부 거짓이었다고는 말하지 못 해도, 7할 정도는 거짓이리라.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이 시간에 깬 채로 스스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는 방금 삼킨, 촌극 요소가 너무 짙은 알약이라는 것들이, 언제나 내일을 확신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요
나머지는 가장 쉬운 답을 찾고자 하면 사실 죽음 말고는 그 어떠한 답도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조하는 중추신경계란, 굳이 비유를 들자면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저주 같은 악덕한 짓을 했기 때문에 저주에 걸리는 일이다. 아무도 웃는 사람 없는 광대놀음이다.
가면이야, 자네, 페르소나야.
<일어나! 사건이야! 요조의 대포즈.>
쌓이고 쌓인 비공개, 비공개들!
기록/생각 2021. 3. 4. 02:34 |내게 아직 목소리가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으려고 했다.
그것은 쓰고 더러웠지만 나무둥치를 물어뜯으며 나는 희열에 울부짖었다.
썩는 나뭇잎 같은 담배연기와, 막 태어난 마귀처럼 나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수치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몰랐다. 고통과 망각의 저녁, 기쁨, 새벽녘의 무궁무진함.
회한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단어였다, 모든 것을 안다고 나는 크게, 하늘을 모독할 만큼 소리쳤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대양의 눈으로 보았다. 나는 끝도 없이 웃었다! 수년 동안, 십여 년 동안.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저주할 자신마저 넘쳤다.
풀처럼 수액을 마시고 들판에 술병을 깨트리고, 어떤 때는 가장 가난하고 가엾은 자들에게도 던졌다. 그 병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서 돌아올 것을 확신하면서!
나는 돈 많고 자신감 없는 자들 대신 더 큰 죄악을 저지르기 위해 낮은 것을 학대했다, 내게는 단 한 병의 소주를 살 돈이라면 있었으니까.
나는 죄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낙원의 인간처럼.
그러나 병이 내 가장 안쪽에 있는 것들을 썩히기 시작했다.
돌과 소금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나의 목소리는 멈췄고 천상의 악랄한 손톱이 내 피부를 찢은 듯 눈이 수없이 열려버렸다.
대지의 찬란하고 넘치는 피폐함이 가시처럼, 창처럼 나의 눈들을 찔렀으며
내가 그리도 사랑하던 흥청망청한 세상은 노린 듯이 나의 썩은 내부로 넘쳐흘러 들어와
부패한 정신은 마침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해하라! 고해하라! 죄를! 오로지 죄를!
아니, 그래, 고백하되, 나는 절대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내 몸에는 더 큰 상처들이 남기 시작했지.
열린 피와, 넘치는 고름과, 깊고 흉한, 세상의 농담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흉터들.
자조와 자살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이를 악물었지, 이제는 이빨마저 흔들리는구나!
축제 같던 악덕과 위악을 돌아보면 나는 즐거운가?
이제 즐거워할 정신조차 남지 않았나?
문학이라니, 그런 것을 도대체 누가 원했는지,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입술로 웃는다.
<...나는 그날 그날의 나-나-나의 연속 이외에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채>
기록/생각 2021. 2. 25. 22:44 |남들은 나더러 냉소적이라고들 하지만
냉소보다는 오히려 익은 게딱지처럼 시뻘건 사람입니다, 라고
텅 빈 방에서 나는 손을 내밀며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대사가 바닷가 사금파리처럼 보잘 것 없어
미간을 구기며 몇 번이나 문장을 손봤더랬다
냉소적이라고들, 그러나 게딱지처럼 시뻘건……
내민 손을 늘어뜨리고 4시를 가리키는 시계와 눈 마주치고
너무 이른 시간에 내 방에서 길을 잃었다
이불 위에 무너질 수도 의자에 파묻힐 수도 없는
뭔가 할 말이 있어 우물거리는 나의 몸뚱이
창문엔 외풍 들지 말라고 거울처럼 은박지를 발라 놓았고
벽지 곳곳에는 내 발작의 파편들이 적혀있고, 이것은 분명
이사 갈 때 돈 문제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게딱지는 참 소름 돋게 시퍼런 것이지
내 안의 뜨겁던 것들은 어느 겨울로 숨었는가
몸이 푸른 갑각류들은 무슨 색의 심장을 가졌나
4시의 시곗바늘에 나는 입이 꿰였다.
저주스러운 놈들, 저주받을 놈들! 중학교 3학년 여름에 선생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수련회 참석에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종이쪼가리들은 우리 학생들이 서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부모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3학년 모두가 그곳에 갔을 것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늘 어설프게 웃는 얼굴인 불쌍한 성배 같은 아이들만 빼고 말이다.
모두가 서명을 했다. 모두의 부모가 서명을 했겠지. 좋은 곳에 다녀오라고! 다른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학교가 그런 행사를 했다. 더 굳건한 정신과 육체와 감사하는 마음을 육성하려고 말이다. 그런 거라면 무어 어쩔 수도 없다. 교육 정신이란 매 세대 바뀌는 것이니까.
우리는 수련회 캠프에 나흘쯤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나흘 내내 아주 죽상이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마다 산능선을 뛰고 지치고 엎어질 것 같으면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조교들에게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어설픈 해병대 캠프 같은 짓거리를 강요당했으며 낙오자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혹사당했다. 음식은 거지 같았으며 특히 김치가 전에 먹어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중국 공장에서 대량으로 수입해오는, 여름철 음식물쓰레기 냄새가 나는 그 김치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라는 대로 따르며 모든 일을 비웃고 있었다. 나는 이미 중학교 1학년 초에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혹사시킬 수 있는지 적당히 겪어보았던 것이다. 매일 산길을 60km씩 걸어야 하는데 따라가지 못한다고 초등학교 2학년짜리 꼬맹이를 걷어차는, 그런 모습을 나는 이미 익숙해지다 못해 재미를 느낄 정도로 자주 보았었고, 인간이 공포와 폭력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흥미로운 마음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은 전혀 유감인 것도 저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나의 몸은 오랜 운동과 훈련으로 강철 같았다. 나는 전부 비웃으면서 나흘을 보냈다. 불평할 이유도 욕설을 내뱉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저녁, 그 망할 놈들! 온몸을 육시할 것들!
그것들은 학생들을 모조리 강당에 모아놓았다. 조교들을 빼면 모두가 지치고 엉망진창이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고 빈틈투성이가 된다. 그놈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었겠지! 그놈들은 그게 직업이니까! 팔을 뜯어내서 그 팔로 뒈질 때까지 두들겨 팰 놈들!
그 쓰레기들은 우리가 강당에 무너지듯 앉자마자 쓰레기 같은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 거지 같은 새끼들! 그리고 조교들의 대장 격인 놈이 되먹잖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아버지의 뼈 빠지는 노동! 어머니의 희생! 너희처럼 제멋대로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아들딸을 위해서! 눈을 감고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라! 그분들이 얼마나 조건 없이 너희를 위해주었는지 돌이켜봐라!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약하고 정신에 약점밖에 없는 불쌍한 놈들, 너희보다 차라리 소아마비에 정신장애까지 있는 성배가 더 강건한 인간이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려고 들다니, 사이비종교 교주도 너희보단 교묘하겠다. 쓰레기들! 그러는 네 부모는 어느 똥둣간에서 조건 없는 사랑으로 키웠길래 이런 병신을 만들어놨냐고, 대장에게 난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을 놈들!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거짓만 토하는 그 가사가 계속 내 뇌를 뒤범벅에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다. 염병, 난 어느새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이제 발작하듯이 웃기 시작해 그 작년 영어시간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생들 한복판에서 폐렴 환자가 기침하는 것 같이 멈출 줄 모르고 웃으면서,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충혈된 눈으로 그 자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만 쏘아보는 그 상황 말이다.
조교들이 날 일으켜 강당에서 데리고 나갔다. 차라리 목을 조르고 패지 그랬어, 우상숭배자들, 이단자들, 최면가들, 광신도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저주받을 놈들.
이미 전교에서 내 별명은 ‘3학년 1반의 정신병자’였는데 너희 때문에 인상이 더 나빠졌어. 많은 친구, 혹은 친구가 될 법한 놈들이 떠나갔고. 아아, 요즘 학교도 그런 행사 하나?
날씨가 추울수록 이런저런 모퉁이에 몸을 박고 다니는 것 같다.
쓰레빠 끌고 담배 태우러 나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날씨가 미쳤나 싶은 전날은 골목으로 돌아오다 왼발 오른발 골고루 벽돌에 처박았다. 한기로 둔해진 발끝을 벽돌 모서리에 찧으니 감각이 참 묘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눈물이 나오도록 아파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다.
돌이켜보면, 매해 겨울만 되면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다. 어디서 갖다 박았는지도 모르겠고, 샤워할 때야 알아차리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은 나름 두 다리 짱짱하게 펴고 걸으면서 날만 추워지면 이 꼴이다. 그러고 보니 술 마시고 넘어져서 아스팔트에 얼굴 반쪽 갈아버렸던 것도 겨울 아니었나?
대체 왜 이럴까. 춥기가 싫어서 몸이 그냥 죽으려고 하나.
몸만 부딪고 다니면 다행인데 정신에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 추운 날일수록 외롭고 술고파서 사람 만나러 싸돌아다니다가 괜히 누군가의 한마디에 머리부터 깡 소리 나게 부딪치는 것이다.
주차하느라 늦었습니다. 벌써 많이 취하셨나 봐요.
이런 소리만 듣고도 기가 팍 죽어서 또 벽돌에 발 찧은 기분이다. 차 가져오셨는데 저만 취해서 죄송합니다. 오시는 시간 못 기다리고 그새 많이 취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사죄할 용기도 없어서 혼자 연거푸 마셔대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의사 말로는 겨울이 되면 신경계도 안정된다고 하더니, 신경계가 안정됐는지는 모르겠고, 몸이고 마음이고 여기저기 나도 모르게 찧고서 아파하느라 추워 죽겠다.
계절은 겨울이고, 몸은 곳곳이 얼어붙은 듯 푸르고, 마음은 저 혼자서 엄동설한이다.
요새는 술 마셔도 춥다. 취할수록 더 춥다.
(시라기보단 산문을 행만 나눠놓은 것 같아서 생각 카테고리에 넣는다)
겨울 아침
1.
오늘은 월요일이었습니다
화요일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날짜를 세어봤지만
달력은 결국 월요일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잘못 걸린 전화로 잠에서 깨어
몽롱하니 주변을 둘러보자
꽝꽝 얼어붙은 아침 햇살이 커튼 너머로
고체뿐인 좁은 방을 비추고 있었네요
매일 눈을 뜨면 검은 허파가
헐떡이며 그르렁거리는 까닭에
집에 가고 싶어, 하고
잘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맙니다
하지만 갈 곳은 몰라요
하지만 돌아갈 곳은 몰라요
2.
간만에 보는, 아침 햇살 밑의 창동은
사방에 높이 높이 솟은 묘석들 사이
화려한 유령들이 철퍼덕철퍼덕 걸어 다니는
참으로 기묘한 프레스코화 같아
저는 신발을 잘못 신지는 않았나
바지를 두 벌 입지는 않았나……
화가에게 보이지 않도록 슬금슬금
그림자 밑에서 연기를 머금는 것입니다
저녁이 오면 묘석들이 잿빛이 되겠지요
밤이 오면 유령들은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저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성가신 일이야, 그렇지, 중얼중얼 되새기면서요
담뱃불을 끄고 있노라면
발밑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창피해
아아, 눈이라도
내려주지 않으려나
손가락은 공연히 코트 주머니 속을 헤맵니다.
56분
몇 주간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어쩌면 몇 개월을 그랬는지도 모른다. 심장도 피도 전부 잃어버린 채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들이 극적인 형태로 겨우 떠올랐다. 잃어버린 심장과 피를 다시 짓는 방법이 기억난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3일 전 나는 오랜만에 음반들을 뒤지고 있었다. 근 며칠 머릿속에서 온갖 불쾌한 활자들이 바스락거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좀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왜 하필 음악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려고 한다.
활자들이 뇌에 들러붙어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는 그 끔찍한 느낌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나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나쁜 책은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는 얘기를, 릴케가 했는지 헷세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격언은 옳은 말이었다. 처음엔 그저 오락소설이란 어떤 형태일까 하고 변덕스러운 호기심이 일어난 정도였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연락이 끊긴 친구가 주었던 일본 오락소설이 몇 권인가 내 책장에 있었다.
오락소설의 구조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가 끝나고, 결과는 이미 말했듯, 뇌수에 타르를 쏟아부은 꼴이 되었다. 나는 그 엄청난 부작용에 감탄했다. 시야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언어기능이 손상된 것처럼 가족들과 대화하는 일도 힘들었다. 이런 치명적인 게 오락소설이라고 불린단 말인가. 아니면 나 같은 놈만 소위 ‘오락소설’ 때문에 머리가 들쑤셔진 상태가 되는 것인가. 호기심 때문에 인생 망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이것이 그런 예로구나 싶었다. 여하간, 그래서 머리를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좋은 책을 읽을 여유도 없었다. 텍스트라는 것이 아예 머리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음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음반들은 천장에 붙어있는 서랍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다. 내가 찾는 것은 14살 때 나의 음악적 취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밴드 ‘Death’의 앨범이었다. 사실 10년도 전에 음원을 전부 파일로 만들어 저장해놨지만, 그날은 어쩐지 무의미한 행위더라도 앨범으로 듣고 싶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밴드 리더인 척 슐디너의 요절로 인해 마지막 앨범이 된 7집 『The Sound Of Perseverance』였다. 번역하면 ‘인내의 소리’다. 나는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누웠다. 첫 곡의 제목은 ‘Scavenger Of Human Sorrow’, 즉 ‘인간 비애의 청소동물’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 트랙이 끝나기까지 56분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몸이 쭈뼛쭈뼛 솟았다. 내가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은 20살 즈음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독주를 들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의한 이야기지만, 천재들의 작품은 감상하는 이의 자아를 없애버릴 것 같은 기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일종의 정화 같은 작업을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도전정신을 일으키게 한다. 자신의 작품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켜 현실과 환영의 구분이 무의미하도록 만들다가, 작품에서 해방되고 나면 오히려 현실이 가진 선명한 색깔과 그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책을 읽든 음악을 듣든 미술품을 감상하든, 내가 왜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인지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왜 글을 써야 했는지를 나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정신의 병과 점점 약해지는 몸 때문에 아무래도 자꾸만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다. 얻을 것은 없고 상실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않고 죽는 방법만을 찾게 된다. 그런 밤이 되풀이되면, 멈추려고는 하지만 앙드레 지드의 ‘나는 흡족한 얼굴로 완전히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곡해해버릴 것 같다. 끝 간 데 없이 게을러지다가 자신의 존재에도 게을러지고 있다.
하지만 점점 앙상해지다가 관념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내가 처음에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본명이 혼돈이고 무질서가 차올라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과정만이 질서라고 한들, 나는 그것에 잠수해버리고 싶지 않다. 혼돈의 정체만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 분석하고 적용해서 만사에 조소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떳떳하게 목을 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와 증오로 눈을 돌리는 것은 내 본업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죽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미美를 갈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맨 처음부터 핵심이었다.
56분 동안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처럼 벌떡거리다가 겨우 기억이 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가슴에 담았던 소설이 『이방인』이었다면, 처음으로 내 가슴에 불을 지른 시는 H. 노바크(헬가 M. 노바크로 생각된다)의 『태양병』이었다.
분명히 그 시의 시구들은 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우리들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이런 시구들이 내 혈액에 불을 지피지 않았던가. 자신을 향해 증오의 함성만을 외쳐주었으면 한다던 뫼르소의 독백도 그렇다. 만일 그것들 없이 차가운 물리학과 기계론만 있었더라면 나의 자살은 일찌감치 성공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기억나서 다행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혹여 숙명과 같은 대단한 단어와 연결되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써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동기도 있기는 있었다. 최소한 내가 하루에 한 끼만 먹고서 토해버리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행인 것이다. 56분만으로 내 해골을 거꾸로 들어 쓸데없는 것들을 탈탈 털어줄 천재들이 미리 살다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럼 이제 다시 피와 살로 되어 지상에 발 디딘 인간이 되는 것인가, 하면 솔직히 아무 대답도 못 하겠다. 떠오른 것은 내가 글을 쓰려고 한 동기뿐이다. 그리고 굉장히 애매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도 아마 있기는 할 것이다. 정말로 그런 욕망이 있는지는 확언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안의 반송장이 전처럼 펜을 잡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등룸펜. 고등룸펜. 자조밖에 남지 않은 역겨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