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감상.

기록/도서 2021. 12. 16. 02:25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활동했던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본래 이름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작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부처 고타마’로 불리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작중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고유하게 쓰인다.
 사제 계급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출중하고, 어린 나이에 다른 사제들과 신학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등 뛰어난 지적능력의 두각을 드러낸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강한 학구열을 가졌고,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표현되는 ‘아트만’에 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갈증을 끊임없이 느끼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친구이자, 그의 지적인 고상함을 숭상하는 숭배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청년이 된 싯다르타는 바라문이 전통적으로 해왔고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 신학을 논하고 제사에서 주문을 외우며 계급제도의 최상위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다. 그런 생활로는 결코 ‘아트만’에 이를 수 없으며, 진리를 깨닫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숲속에서 생활하며 ‘아트만’에 이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문에 고빈다와 함께 귀의한다. 그들은 사문에서 정신으로 육체의 활동을 통제하는 일, 이를테면 호흡하지 않거나 심장의 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방법 등을 수련하고, 단식과 인내로 인체의 욕구를 제어하거나 정신 자체를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로 옮겨 자아를 해체하는 훈련에 매진한다. 그러나 온갖 요기와 같은 기술과 신통력을 얻게 되어도 싯다르타는 그것이 자아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길일 뿐이며, 결국 아상(我想)을 깨트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문의 가르침에 환멸을 느낀다.
 그 즈음하여 인도 전역에는 ‘고타마’라는 자가 정각에 이르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많은 구도자가 부처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떠나고, 소문에는 고타마가 진정한 부처라는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속세에 타락한 거짓된 구도자라는 반대되는 이야기도 섞여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사문을 나와 부처 고타마가 기거하고 있다는 기원정사로 향한다.
 기원정사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 그들은 부처 고타마야말로 정각에 이른 분이고, 자유자재한 분이며, 현세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 분이라고 확신한다. 고빈다는 곧바로 불가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우연히 부처 고타마와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부처 고타마와 독대하며 싯다르타는 자신의 의구심을 털어놓는다. 그가 생각한 것은 가르침이란 말을 통해 전해지는 이상 관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닌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부처의 거동이나 말투, 표정 등을 보고 확신으로 굳어진다. 즉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은 자, 가장 존귀한 세존이라는 점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부처의―말을 거친― 가르침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부처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대는 똑똑하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라고 경고한다. 그날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와 고빈다를 떠나며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한다.
 이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는 사물들의 저편, 피안의 너머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으나 이제 싯다르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와 존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이 흐르는 소리, 풀과 꽃의 빛깔,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 태양의 따스함 등이 전부 그 자체의 것으로 느껴지며 싯다르타는 자신이 지금까지 찾던 ‘아트만’이 사물의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있음을 감각한다. 그는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좋은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겪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느 마을로 들어서기 전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이 뱃사공과 그의 오두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을 건넌 뒤 뱃사공에게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싯다르타 역시 이 만남이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 뒤 모든 것을 겪어보겠다는 싯다르타는 한 마을에 도착해 사문의 입장을 버린다. 그는 카말라라는 유명한 기생과 연인이 되며,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번다.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할 줄 아는 일, 즉 단식하고 기다리며 사색할 줄 아는 일이 커다란 지혜로서 도움이 된다. 그의 사업은 번창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일에도 막히거나 부자유한 점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싯다르타에게는 속세의 때가 묻고, 재물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그 증오는 결국 술과 도박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재물에 집착하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사위 놀음에 엄청난 재산을 쏟아붓고, 그 다음 날은 잃은 것을 돌이키려고 흉폭할 정도로 사업을 강행한다. 어느새 머리가 반백이 될 때까지 그런 삶을 살던 싯다르타는 술기운에서 깨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구토하고 싶다는 강한 절망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속에 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구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주 오래전,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 건넜던 강까지 꼬박 하룻밤을 들여 걸어간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 작정을 한다. 어린애 유희 같은 인간들의 삶에서 빨아 마실 수 있는 것을 모두 빨아 마시고, 이제는 부패하여 온전히 절망하기만 하는 그는 강가에서 투신할 작정이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야자나무 아래서 바라문 시절부터 기억의 깊은 곳에 심어져있던, ‘옴’이라는 한 음절의 완전무결성이 울려 퍼진다. 그 음절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하며 싯다르타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 안에서 자라났던 것들이 전부 시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깊은 잠에 빠진다.
  잠을 자는 동안 내면의 모든 자아가 죽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뒤 깨어난 싯다르타는 자신이 한 번의 ‘윤회’를 겪었다고 직감한다. 지금까지 전부 ‘구토’해버리고 싶던 싯다르타는 모조리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때 싯다르타가 잠에서 깰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던 고빈다와 만나게 된다. 고빈다는 불가의 승려로서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강가에 누워 자고 있던 사내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잠자는 사내가 싯다르타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싯다르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고빈다는 몹시 놀라며 싯다르타의 변한 모습, 값비싼 의상과 부유한 상인 같은 외견을 지적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형상의 수레바퀴는 빨리 도는 법”이라며 자신이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을 암시한다.
 고빈다와 헤어진 뒤 싯다르타는 오래전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 주었던 뱃사공을 찾아간다. 싯다르타는 강물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결이 흘러 가버려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느껴 뱃사공의 조수가 된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러 해를 함께 산다. 현명하고 친절한, 늙은 뱃사공과 함께 살며 싯다르타는 점점 강이 알려주는 진실들에 따라 지혜롭고 겸손해진다. 오랫동안 뱃사공 일을 하며, 뱃사공 바주데바와 싯다르타는 생각하는 방법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심지어 외견조차도 닮아간다. 그들은 강에서 흘러가는 물살이 바다로 가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과 들에 비로 내리는 일들을 강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양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과 가치들은 사실 거대한 원형구조 속에서 단일성으로 통합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두 번째 깨달음이다.
 이후 부처 고타마가 입멸한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진다. 싯다르타가 떠난 뒤 기생을 그만두고 불교에 귀의하여 살고 있던 카말라는 아들을 데리고 세존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그 아들은 싯다르타가 줄곧 모르고 있던 싯다르타의 자식이다. 그런데 강을 건너기 전 카말라가 독사에게 물리는 일이 벌어지고, 바주데바가 급히 오두막으로 옮겨와 카말라는 죽기 직전 다시 싯다르타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다’고 하며 아들의 존재를 알리고 숨을 거둔다. 그 뒤부터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아들을 키우게 되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통이자 번뇌이다. 아들은 천방지축에 무례하고 응석받이인데,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싯다르타에게 욕을 하고, 그릇을 던지고, 싯다르타의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태도가 오히려 자신을 경박한 존재로 만든다며 반항한다. 이럴 때마다 싯다르타는 고통스러워하고 어떻게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 번민한다. 바주데바는 자주 싯다르타에게 충고한다. “그대가 아들을 위해 열 번을 대신 죽어준다 하더라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때 싯다르타는 청년 시절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문이 되었던 일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가 윤회의 바퀴 속에서 방황과 절망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들에게만은 그것이 면제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싯다르타는 계속 아들을 주변에 두고자 한다.
 곧 아들은 바주데바와 싯다르타의 돈을 훔쳐 마을로 달아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을 가로질러 마을까지 쫓아간다. 그 와중에 싯다르타는 사람이 자식의 운명을 소유하거나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마을 입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명상에 빠진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세 번째 깨달음이다. 이미 현자 혹은 성자라 불릴 만큼 현명한 싯다르타였으나 혈육에 대해서만은 번뇌와 미망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 싯다르타라는 한 성인의 마지막 방황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곧 그를 따라온 바주데바와 함께 싯다르타는 강가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바주데바의 손에 이끌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의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 아직 아들을 품에서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싯다르타에게 강의 소리는 온갖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비웃고, 비명지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것을 말하자 바주데바는 ‘더 잘 들어보라’고 채근한다. 계속해서 강의 소리를 듣고 있자 싯다르타는 곧 강이 내는 모든 소리를 듣게 된다. 기뻐하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 악한 소리와 좋은 소리가 모두 뒤섞여 목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되었으며, 웃음소리도 슬퍼하는 소리도, 선한 소리도 사악한 소리도 강 그 자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가고 그 뒤에 원형구조를 이루며 강물의 원천까지 되돌아가 다시 모든 소리를 내는 강이 되었다. 이때 싯다르타는 범(凡)의 의미를 깨닫는데,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이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가르쳐준 바주데바는 빛이 나듯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처음 부처 고타마를 떠날 때 싯다르타는 ‘말로 된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주데바는 겸손하고 친절한 행동과 경청하는 방법으로 싯다르타를 해탈로 이끈 것이다.
 늙고 지혜로운 뱃사공으로 싯다르타가 계속 살아가던 중, 불가의 승려로 살고 있던 고빈다가 나룻배를 이용하게 된다. 고빈다는 이 강가에 사는 뱃사공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대화를 하던 중에 싯다르타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고서야 고빈다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위해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고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가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 등으로 개념을 양립시켰던 것은 ‘말로써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은 자인 세존은 그것들이 하나의 단일성 속에 있음을 경험과 인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빈다는 마지막까지 싯다르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아주 괴상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빈다가 보기에 싯다르타는 세존만큼 표정이 빛나고 몸짓이 자유자재하며 무엇 하나 거추장스러운 점이 없다. 고빈다는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고빈다가 부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싯다르타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지켜보더니 대뜸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보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그 순간 고빈다는 불분명하게 연결된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데, 그 얼굴들은 성자였다가 살인자이기도 하고, 사람이었다가 짐승이기도 하고, 기뻐하는 표정이었다가 고통에 빠진 표정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미물이었다가 신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환상이 없는 채로 모든 얼굴이 그 자리에서 동시에 뒤섞여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완성된 것, 즉 범(凡)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이 반투명한 가면과 같은 것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면은 바로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똑같았고 싯다르타의 늙은 미소와 똑같았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빈다는 눈물을 흘리고, 여전히 수백 개의 주름으로 미소짓고 있는 싯다르타에게 깊이 절하며 작품은 끝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데미안> 이후에 쓰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쓰인 <데미안>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인의 의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젊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고 문학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데미안>에서 헤세가 현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답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데미안> 이후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모든 경험은 다 겪어보아도 좋은 것’이라는 사상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두고 있는 듯하다. 처음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지적으로 대성하였고, 이후 사문에서 정신주의의 극단까지 가보았으며, 사문을 그만둔 뒤로는 세속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성공과 타락까지 경험한다. 나중에 싯다르타는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싯다르타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모든 가르침을 오로지 경험에서만 체득했다는 점인 듯하다. 마지막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말은 진리에 싸놓은 겉껍질 같은 것”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말이나 지식으로 해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선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불교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좌선이나 선문답, 불제자로서의 행위, 수련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완전한 해탈인 ‘불가사의해탈’은 지식적인 깨달음인 ‘지해탈’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체득한 인식과 지혜로 이루어진 ‘혜해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불가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헤세가 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싯다르타>라는 소설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매우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으로도 역사에 남을만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싯다르타>를 단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 분량의 선문답으로 이해해도 잘못된 시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아들로 인한 싯다르타의 번뇌는 석가모니불의 아들 ‘라훌라’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오마주인 듯하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라는 뜻으로, 구도의 길을 걷던 석가모니에게도 혈연이 만드는 고뇌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장 큰 장애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바주데바와 강(江)의 가르침으로 이미 성자의 반열에 오른 싯다르타가 마지막으로 겪는 장애 또한 자신의 혈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불제자인 고빈다가 불가의 가르침을 오로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다소 아쉽기도 하다.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인물이 불도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는 점은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다.
 다소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이기도 한 작품이지만 삶의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했던 헤세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경험과 체득을 중요시하며 ‘말’의 표피성을 지적하는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물과 인간이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해줄 듯하다. 그리고 ‘감각과 사유 모두’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작품이 주장하는 바는 인생에서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를, 소설만이 가지는 ‘간접경험’이라는 무기를 통해 여실하게 전해줄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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