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간과 세상에게 목소리를 던질 때, 그로 인하여 울려퍼지는 반향이야말로 나 자신의 사상을 똑바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와 스트레스, 자극과 감정간의 충돌, 갈등과 비합리에 대한 직시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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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8 통증과 정신요법과 불안. 1
- 2010.09.29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 2010.0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 2010.09.10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 나는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혼자 있을 때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
- 2010.08.30 Love can be seen as the answer. 1
- 2010.08.16 Anorexia Nervosa - God Bless The Hustler 2
- 2010.08.09 분열과 창조.
- 2010.08.07 니코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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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27 몽롱한 강간범과 피해자.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리라.
- 2010.07.23 H. 노바크 - 태양병 1
- 2010.07.22 Hate - H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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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0 불균형한 신체와 불균형한 정신과 오류적 존재. 집착과 맹목성.
통증과 정신요법과 불안.
기록/생각 2010. 10. 28. 22:50 | 나는 욕망하는 사람이고 욕구로 말미암아 행동한다. 내가 만나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욕망은 투명하고 상쾌한 색깔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낯 모르는 이의 욕망은 어찌되었든간에 내 욕망은 거무죽죽하고 부정적이다. 나는 글을 쓴다. 과거에도 글을 썼다. 꽤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기만 하면서 살아왔다. 내 글은 사랑할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저주나 다름없다. 저주. 도대체 누가 저주를 당하고 기뻐한단 말인가? 내 글은 욕구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양가감정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상승하고자 하지만 단 한 번도 권위와 가치를 가진 나 자신을 상상해본 일이 없다. 그런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것들은 마치 나락 밑에서 뻗어나온 손과 같아서 내 바짓자락을 붙들고 나를 더 낮고 절망적인 좌절 속으로 끌어당긴다.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미학과 철학!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생명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필요성에 근거하여 움직인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 나는 부정한다. 부정하기만 한다. 나는 통증과 섹스한다. 그 추잡한 짓거리를 아주 잠깐이라도 쉬어본 일이 없다. 그리고 나는 아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내 의사와 내 약물과 내 잠자는 시간들에게 뻔뻔한 거짓말을 한다. 나는 통증 때문에 당신을 찾아 왔습니다. 거짓말! 나는 이미 통증과의 연결을 끊을 수도 없다. 내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은 통증이고 고통이며 나머지는 오만과 자멸감 따위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지저분한 것들로만 뭉쳐진 지저분한 인격으로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기만 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내가 아프지 않은 채로 글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런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나는 괴롭지만, 사실 괴롭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괴로운 것이야말로 내 원래 상태라고 믿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미래! 미래! 미래가 항상 대책없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덮쳐온다! 변화는 언제나 불안과 함께 온다. 그러나 현재조차 마찬가지다. 현재 또한 불안과 부조리와 절망으로 두텁게 칠해져있다. 나에게 단 한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은 항상 부차적인 문제들 뿐이다. 모든 본질들은 그냥 그곳에 있다.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틀림없고 분명한 무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지는 희망이란, 희망이란 이름의 기만적인, 인간의 복잡한 뇌가 만들어내는 기만의 관념을 뒤집어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을 깎아내고 진흙탕 속에 눈알을 처박으면 삶이라는 것도 어느정도는 견딜만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내 자랑이다. 그러나 내 자랑 또한 나를 위선자로 만드는 데에 한 몫하고 있다. 나는 자랑거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그 유일한 자랑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하잘것 없는 인성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 불행해지고 있다. 사실은 정말이지 내가 낫는다는 것이 두렵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 이미 내 감정과 정신은 어느정도 약에 길들여져 둔마되어있다. 처음의 변명은 무엇이었나. 내가 약물 복용을 거부한 첫번째 변명은 내 글쓰는 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복용량을 적당히 조절하기만 하면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러운 채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그 하얗고 노란 정제들의 가루가 내 혈관을 따라 돌아다니며 나의 신경계를 조작하고 있다는 불쾌한 망상을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나는 내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나는 비참하고 불행하게, 인상을 찡그린 채 미치광이로 죽어도 좋으니 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이란! 내가 통증과 섹스하고 고통으로 만들어진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통증 앞에 무력한 법이다. 통증에 발작하고 날뛰다보면 자연히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어느새 의사 앞에 앉아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이 조절되면! 약으로 통증을 가라앉히고 그와 동시에 날뛰는 감정과 적개심까지 심장의 그늘 뒤로 숨어버리면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안, 불안이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이라는 것은 영원히 성립되지 않는 가상의 관념이기 때문에, 나는 불안해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자연히 만들어진 아이덴티티가 없다. 나는 자아가 없을지도 모른다. 과장되어가기만 하는 감정과 사고도 그 증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나에게는 증거가 필요하다. 위선자가 되지 않고 내 무죄를 나에게 입증하기 위하여.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기록/생각 2010. 9. 29. 14:11 | 의사가 내게, 어쩌면 나에게 있는 절대 선에 부합하려는 열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평균적인 것보다 훨씬 강했었을 것이며 혹은 지금도 여전히 강하리라고 말했다. 나는 울 것 같았다. 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눈물샘에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웃었다. 새빨간 눈을 하고는 누군가를 조롱하듯 웃었다.
하지만 나는 도덕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도덕을 믿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만 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을 믿든 믿지 않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체취가 섞인 숨을 사방에 토해놓고 있었다. 그 냄새가 내 코를 타고 기어올라와 기도에 눌어붙었다. 기도 표면에서 따끔거리는 아픔을 느꼈다. 내 옆에는 지독하게 가난할 것이 틀림없어보이는 어떤 중늙은이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에게서는 달큰한 소주 냄새가 났다. 겨우 오후 한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의 황달끼가 보이는 피부와 주름이 진 채 늘어진 눈살을 보았다. 그가 나에게 적의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고 '나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가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병든 머리를 남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마음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경련하는 영혼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그의 팔뚝을 향하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나는 슬펐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올 때 나는 굉장히 음산한 기분에 젖어있었다. 의사가 나를 정신병자로 생각하리라는 생각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정신병원이었고, 이미 수개월도 전부터 나는 그 병원을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의사에게 한가지 고백을 했다. 십수년도 더 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죄책감에 대한 이론을 늘어놓다가 그 '고백'을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말해버린 것이다. 의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러나 통찰력과 정신병리학적 공식이 빛나는 눈으로 내 고백을 듣고 그것을 분석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병들어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나는 병들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쩌면 건강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지극히 건강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처방받은 약을 집어들고 나왔다. 심장을 면도칼로 썰어내는 것 같았다. 간호사는 나를 보고 친절하게 웃었다. 나는 가능한한 가장 점잖고 정상인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병원에 발을 들여놓은 그날부터 계속 그 간호사는 내가 병든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녀의 웃음에 부아가 치밀어올랐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중금속처럼 무거운 우울이 내가 활발하고 공격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기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거리로 나와보니 오만한 젊음과 비참한 늙음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생각 2010. 9. 20. 05:10 | 이 모든 일들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망한다. 원한과 울분과 복수심이 있다. 무엇이든 그리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생존은, 생존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누가 말하기나 했던가. 생명의 기준에서? 이미 오래전에 그런 기준은 부정 당했다. 폭력에 의하여. 폭력에 의하여. 우리는 궁극적인 폭력의 자손이다. 가장 알기 쉬운 예로는 히틀러가 있다. 그의 역겨운 전체주의 뒤편에서 처절한 인간성의 비극을 발견하고 어떠한 종류의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폭력에 대한 감동. 개인주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도 없이 정당화시킨다. 그것이 가상의 것이든 주관이든 간에, 왜냐하면 개인의 의식이기 때문에. 히틀러란 일종의 심볼이다. 본질은 우리 자신이 그것이 되지 않는 이상 단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아무튼 간에 연료란 불타 소진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앞바퀴를 향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한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 나는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혼자 있을 때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록/생각 2010. 9. 10. 00:26 |오래 전부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럴 의지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노력하기 위한 활동성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내일은 의사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대화의 무용성에 대해 대화하기 위하여 그와 대화할 것이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열망한다. 나는 긍정한다. 나는 그들에게 화를 내고 증오당한다. 너무 오래된 사실들이다. 너무 오래된 사실들이 너무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어왔다. 나는 약을 먹으면 사람들의 눈에서 악의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약을 먹지 않으면 그들의 발걸음에서도 불타는 악의를 발견한다. 나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의사에게 전화를 걸고 내가 약에 의해 조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약에 의해 조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사실은 전부 정직해야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도 정직할 필요가 없다. '모두'이전에 내가 정직해야할 필요가 없다. 필요성이 없다. 필요성. 필요성. 필요성. 내가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우선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노력해야한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자는 고통스럽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단 하나의 모범적인 답이고 태도이고 삶의 방법이다. 삶이 아닌 것의 방법이기도 하다. 구토할 만큼의 행동력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구역질에서 멈춘다. 산업폐기물.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관심없고 싶다. 예술가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의 무용한 고뇌와 고통이 무용하지 않다고 인정받은 이들을 사람들은 얼마나 정다운 눈길로 쳐다보는가? 정다운 눈길. 프라이즈. 말. 말. 말. 언어와 언어가 되지 않는 언어들. 강제된 심리학. 소설가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 그들은 어떻게 죽었나? 과격하던가? 과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진을 찍고 죽었다. 그렇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살인자이거나 하인.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덜 불안하여, 덜 불안하여, 더욱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더욱, 정도의 문제이다. 체온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체온이 있고 또 소통과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나도 관심이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야만 한다'라는 말은 경멸당한다. 경멸당한다.. 그들은 경멸했다. 그녀도 경멸했다. 그녀도 나를 경멸했다. 그 안경 렌즈 너머로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사실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불쌍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로 불쌍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약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불쌍하기도 하고 불쌍하지 않기도 하다. 아무것도 확실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약에 의해 좌우되지 않더라도, 그렇다면 나에게는 좌우의 기준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열망한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만은 아마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통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에 좀 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면... 내가 만약에 좀 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좀 더 완벽한 것을, 좀 더, 나와 닮지 않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나와 닮아야만 한다. 나와 닮을 수밖에 없지만 나와 닮지 않아야 한다. 훨씬 더 아름다워야하고 완벽하게 완벽해야한다. 나는 그쪽 길로 가면 갈수록 간질환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에 대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들과 세상들은 내가 비단과 장막으로 본질을 포장하지 않더라도 이해해줄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포장해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장이란 의미가 없다. 포장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포장에 의미가 없다면 포장을 위한 천과 리본들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것은 혼란을 가중한다. 혼란을 조장한다. 그렇다면 모든 죄는 그것들에게 있다.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길을 걷고 있으면 차들이 달려와서 나를 짓뭉개버릴 것만 같다.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적의의 산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까뮈가 죽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죽음은 까뮈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명명백백하다. 나는 어떤 위대한 작가의 영혼의 귀퉁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신경증 환자들의 유전자뿐이다. 비극. 비극은 내가 비극이라고 말할때만 비극이다. 그리고 나는 사건을 비극이라고 말한다. 끈질기게 비관에 들러붙어 있다. 해결책을 찾아야한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나는 좋은 대화상대도 아니고 좋은 환자조차도 아니다. 내 유서에는 사죄만이 쓰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야말로 정직하지만, 아무튼 간에 정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유서를 쓰고 나서 죽는 순간, 내가 쓴 모든 것들을 격렬하게 부정할 것이다. 좌우. 이것들이 전부 무슨 의미가 있나? 바닥에서 기어올라오는 광증은, 오래된 사람들에게는 지속되지 않는다. 거대하고, 거대하고, 거대하고 인간에 의하여 인간에게 잔혹하다.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나는 내가 좋은 작가이기를 바란다. 나는 자꾸만 헛것을 본다. 그것은 아마도 내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어떤 정답을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내가 도움 없이도 다른 이들처럼 지상에 두 다리를 딛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내 노력이 가치가 있다면 좋겠다.
Love can be seen as the answer.
기록/생각 2010. 8. 30. 13:11 | 내 정신을 조금씩 침잠시키는 약물은 동시에 기억 밑바닥에 말없이 가라앉아있던 수치와 좌절까지 끄집어내버렸다. 나는 내가 추악한 인간인 것을 알고 있다. 참으로 그렇다. 손톱만한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나는 추악하며 또한 죄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추악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의 기준은 바로 내게 있다. 추악한 죄인인 내가 추악한 죄인인 나를 추악한 죄인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내 얼굴을 없애버리리라고 결심했다. 내 이름과 기억도 마치 타인의 것인 양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쌓아올려진 결과물이며,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오한다. 그런데 어째서 살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리 내가 나를 증오한다 한들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증오하는 내가 고통과 수치를 당해도 괴로워하는 것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복수란 도무지 완성될 수가 없다. 자기파멸로 향하는 가장 극단적인 길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배려와 이기가 은밀하게 숨어있는 것이다. 아아, 자살이란. 그것은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도피다. 자신을 위한 일이다. 자애심의 극단이다.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현상 그 자체인 인간의 마지막 긍정적 선택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불행은 중력과도 같아서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오래 살면 살수록 수치는 늘어나고 후회해야할 일도 많아진다. 좌절과 지독하게 왜곡된 분노를 자신의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넣으며 늙어가는 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한 고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것. 그런데 나는 어째서 살아가는가. 병적인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향정신성 약물이 담긴 캡슐들을 집어삼키면서. 끈질기고 수치스럽게. 매일같이 자기파괴와 자기살해의 환상을 보면서. 무엇이 나를 살게 하나. 타성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타성이야말로 죽음 이외의 모든 것에게서 승리한다. 타성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생명의 본능인 것이다. 그것에 순응하면 그 어떤 삶도 못견딜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타성이 싫다. 취향의 문제다. 취향의 문제. 내 개인의 전쟁은 내 살을 도려내고 내 뼈를 깎아내는 것으로 무언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승리하려하는 모순 가득한 정신병적 순환이다. 정신병.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 그러나 건강이란? 우리에게는, 아니, 나에게는 신이 없다. 나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율법조차 없다. 내게 있는 율법이란 당황하고 불신하면서 자신의 피부에 새겨넣은 의문형으로만 가득한 지향점들 뿐이다. 건강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명사다. 무엇이나 그렇다. 한가지 확실한 감정-취향은 내가 나 자신을 추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죽고 싶어하면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하나의 분명한 의견이 없다. 어쩌면 나는 자아조차 없다. 여러 권의 책들을 묶어놓고 그것들에게 하나의 공통된 입을 부여하면 나와 똑같은 모습의 가짜 인격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사죄하고 싶다. 그저 사죄하고 사죄받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사죄할 대상이란 이 세상, 아니 상상속에서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나를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증오당한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삶을 구성해온 모든 것들을 한계없는 감정으로 증오합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 삶을 구성할 모든 것들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증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어쩌면 사실 내 마음 속은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마를 길 없는 호의로 불어 넘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Anorexia Nervosa - God Bless The Hustler
기록/음악 2010. 8. 16. 09:33 |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 Anorexia Nervosa의 2000년 앨범 Drudenhaus의 3번 트랙.
본 블로그에서는 처음 소개하는 블랙메탈계 곡이다. 블랙메탈계 음악이라고는 해도 심포닉 블랙메탈은 데쓰메탈과 멜로딕 데쓰메탈의 관계만큼은 아니더라도 거의 별개의 장르나 다름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데쓰메탈과 스래쉬메탈이 주요 취향인 내게 있어 블랙메탈이라는 것은 사실 ─블랙메탈 팬들께는 죄송스런 이야기지만─ Mayhem은 코미디나 다름 없고 초기 Dimmu Borgir나 Burzum은 가끔 별스러운 기분으로나 듣게 되며 초기 Behemoth 등은 아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외의 음악인데다가 그나마 Gorgoroth나 후기 Keep of Kalessin 정도나 기분전환을 위해 듣는, 그런 위치의 장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올드스쿨 블랙메탈에 대해서는 굳이 소개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다지 많은 밴드를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심포닉 블랙메탈이라고 하면 나는 Anorexia Nervosa를 접하기 전까지는 '익스트림 메탈 치고는 꽤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멜로딕하고 키보드 사용이 유난히 많은 다소 대중적인 장르'로, 나쁘게 말하자면 핵심이 없는 음악으만 생각해왔었고, 또 대다수의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들이 그런 생각을 확신으로 만들어 줬었다. 마치 멜로딕 데쓰메탈 밴드들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 수록 이것들이 도대체 왜 '데쓰메탈'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있는지 점점 이해할 수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Anorexia Nervosa는 어떤 장르구분도 음악을 한정지을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새삼 내게 각인시켜준 것이다.
극도의 긴장감. 날카로운 사운드들이 일견 난잡하게 뒤엉켜 만들어내는 하나의 신경질적인 선율. '신경성 거식증'이라는 밴드명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어울리는 병적인 감각으로 가득한 보컬. 메탈음악에서의 키보드 사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적재적소에 쓰여졌다고만 느껴지는 치밀한 키보드 운용. 오히려 슬픔마저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분노의 감정. 이것들은 확실히 매력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본 앨범을 채우고 있는 9개의 곡들은 전부 굉장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과격함'을 지향하는 밴드들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천편일률성과 지루함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은 채 각각의 곡이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의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훌륭한 구성을 하고 있다. 덕분에 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도 청자에게는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생각할 것, 생각할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해 언어나 표정 따위를 품어둔 채 타인을 찾아 헤맨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표정에 대해 과도한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틀림없이 이 땅 위에서 수천 수만번은 더 반복되었을 그 언어와 표정들을 끄집어 내놓을 때에는 자신들의 오만에 취해 황홀해하는 것마저 엿보인다. 낡고 닳아 없어지기도 전에 강한 휘발성으로 흩날려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그들을(그것들을) 증오하고 있다. 하나의 문장으로 형태화 시켜 놓고 구두점을 찍어야만 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나는 그들과 대화할 줄을 모른다. 그들이 내 앞에 와서 웃는 낯으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의 언어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내가 끈질기게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피학적인 목, 그리고 물어뜯으면 쉽게 찢어질 것 같은 그들의 살거죽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신이 나간, 양민들의 안심을 위하여 살과 철근으로 쌓아올린 벽 속에 가둬버려야할 그런 성질의 인간인 것은 아니다. 나는 살가죽이 얇아 안에 들어있는 내장과 혈관들이 전부 드러난 인간이다. 귀를 막고 자신의 광증에 설득당해 똑같은 사고를 돌고 도는 행복한 미치광이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갈비뼈조차 갖지 못한 심장이고 두개골을 잃어버린 뇌수다.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광인들이 모두 겹겹이 둘러쌓인 자기합리의 벽속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담아놓을 뼈대조차 손에 넣지 못하고 길바닥에 쏟아져 고통받는 내장 같은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변할 것이란 말인가. 인간은 인간의 세상밖에 알지 못하고 개인은 개인의 세상밖에 알지 못한다. 구별당하고 분류당하는 것은 타인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절대적인 일이다. 필연적인 일이다. 한탄할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지만 변하는 것은 없으리라. 매일 아침 태양빛에 절망하는 사람은 해뜨기 직전의 새벽에도 절망한다. 주관은 연결되지 않고 폐쇄된 채 완전하며 아무런 감각기관도 가지지 못한다.
생각에 집착하라. 개인의 증명은 무의식의 표면에 쌓인 사유의 침전물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항상 정신의 구심점에 병증과 함께 붙잡아 놓은 화두가 있어야만 한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과 언어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념들을 한 마디의 문장으로 해명할 수 있는 독재의 사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개인을 하나의 완성된 여과기로 만든다. 그러면 비로소 개인은 수많은 사유의 침전물로 다져진 단단한 발판 위에서 정신의 주안점에 시각을 두고 세상을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동시에 창조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
기록/도서 2010. 8. 7. 00:58 |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Death - Zombie Ritual
기록/음악 2010. 8. 1. 06:59 |
밴드 Death의 1987년도 데뷔 앨범, <Scream Bloody Gore>의 2번 트랙.
이번에 소개하려는 곡 Zombie Ritual은 내게 있어 굉장히 의미가 깊은 곡이다. 무엇보다도 Zombie Ritual은 내가 데스메탈에 빠지게 된 원인이자 내 음악감상 취미 그 자체를 결정지은 곡인 것이다. 사실 <Scream Bloody Gore>를 접하기 전까지의 내 음악취향이라는 것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나 스타일도 없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면 그 영화의 OST 앨범을 듣고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의 감상'을 다시 곱씹으며 만족스러워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음악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미학을 갖추고 있는 예술이 아니라 영상 따위의 분위기를 보조하는 부수적인 장르로 받아들여졌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본 앨범은 내게 장르적 충격 그 자체였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앨범을 채우고 있는 총 12개의 트랙들은 단 한 곡도 빠지지 않고 청자의 정신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대면한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완전한 작품이 되고, 작곡가, 연주가들의 의식은 과격하면서도 절묘한 방법으로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음악이라는 것에서 이 정도로 처절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짙은 감명을, 아니 지독히도 공격적인 '음악적 오르가즘'을 느꼈던 것이다.
오르가즘! 그만큼 내가 받은 감동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대담한 곡구성 속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지며 화려한 기타 테크닉으로 완성되는 완급조절과, 익스트림 메탈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공격적이기만 한 보컬과는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울부짖는 듯한 실존주의적 감성으로 가득찬 보컬, 그리고 전면에 내세워진 채 미치광이처럼 터져대는 드럼 등은 그저 잘 만들어진 음악이나 감동적인 곡을 뛰어넘어, 그 매혹적인 손아귀로 들끓는 생명력과 인간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펼쳐져있는 녹슨 납덩이처럼 무겁고 검붉은 감정들을 예민하게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심장을 꿰뚫은 쇠말뚝처럼 금속적이면서도 더없이 섹슈얼하다. 피보다 붉고 의식보다 아프며 쇳덩이보다 밀도높고 철저하다.
그리고 그런 걸출한 앨범 속에서도 Zombie Ritual은 주머니를 뚫고 나온 못처럼 뛰어난 완성도를 드러내는 곡이다. 그 광휘란! 본 곡의 무거운 필링 속에서 날카롭게 번득이는 천재성은 도무지 스무살 청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 스무살. <Scream Bloody Gore>가 발매된 1987년 척 슐디너는 고작 스무살의 나이였다. 이 사실이 놀라운 이유는 데스메탈의 근원격인 이 기념비적 앨범의 제작자(Death라는 밴드 자체가 실상 '척 슐디너와 초호화 세션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제작자'라는 표현도 극단적인 것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한다)가 그런 어린 나이였다는 점보다는, 차라리 그 음악성의 본질적인 부분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절규하는 듯한 열광의 정신이, 이미 그 나이부터 그토록이나 진지한 형태로 나타나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보다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본 앨범을 데스메탈보다는 오히려 쓰래쉬 메탈 쪽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Scream Bloody Gore>를 감성적인 부분에서 보다 깊이 감상하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본 앨범에서 쓰래쉬 메탈의 주된 요소들 중 하나인 '통쾌함'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데스메탈의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Scream Bloody Gore>가 발매된 해인 1987년에 처음 나타난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 4년 전에, 즉 1983년에 발매된 척 슐디너를 주축으로 한 밴드 Mantas의 데모앨범 <Death by Metal>에서부터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음악을 들은 감상이 '아픔'일 정도로 진중하고 처절한 그의 음악적 방향성은 <Death by Metal>에서부터 정해져있었고, 그것은 <Scream Bloody Gore>와 <Leprosy>에서 '완성'된다. 밴드 Death의 1, 2집은 올드스쿨 데스메탈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음악적인 기량에서도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앨범인 것이다.
마치 고전문학처럼 진지한 주제의식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길 데 없이 절묘한 형식 속에서, 이 예술작품의 노골적인 미학과 오르가즘과도 같은 맹렬한 감동을 느껴보도록 하자.
잠입자 (Stalker, 1979)
기록/영화 2010. 7. 29. 20:22 |
<내 의식은 세계에 대항하고자 채식주의를 바라지만
내 무의식은 한 조각의 맛좋은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네
어떻게하란 말인가.>
주인공 중 한명인 '작가'의 독백.
작품 내내 이어지는 작가의 대사들은 대화상대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잣말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자신만의 고뇌와 갈등에 갇혀 세계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완전한 '작가적 인물'.
가장 대사가 많은 그의 말들은 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내뱉어진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다고 쳐
천재가 되어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의혹과 번뇌 때문이야
늘 자신과 세상에게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거지
그 자신이 가치롭다는 것을 말야
만약 내가 천재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면?
글을 뭐하러 쓰겠어?
이유가 도대체 없잖아.>
그곳에 들어간 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역'에 자신이 들어가 영감을 얻고 천재가 되는 상황을 상정하며 자신의 패러독스를 고백하는 작가.
고백. 그는 계속해서 고백한다. 말상대인 '교수'가 그의 혼잣말 같은 고백들에 질려 짜증을 부려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애당초 그에게 말상대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그의 고백과 그의 작품들은 무척이나 닮아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 독자란 실존하는 인간(귀와 입)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supposition)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작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화상대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독백을 읊는 것일지도 모른다.
까뮈의 <전락>의 화자인 클라망스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여름은 갔다/기념비 하나 남기지 않고서
태양은 따사롭지만/여전히 충분치는 않도다
모든 진실이 이루어졌도다
마치 손바닥에 오므려 접은/다섯 손가락의 솜털인양
충분하지 않을 뿐
그루갈이 끝에도/악마는 물러가지 않았다
세상은 축제처럼 흥청거리나/그것도 충분치는 않다
영원한 삶이 나를 먹이고/보살피고 웃게 하고 있었다
나는 행운아였다/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잎사귀들은 하나도 마르지 않고/사지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고
유리처럼 마알간 한낮/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행이 전부 멀쩡히 '구역'에 도착하자 기쁘다며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잠입자'.
죽은 '멧돼지'의 동생이 지었다는 시를 암송한다.
'잠입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운율이 인상 깊다.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전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몽롱한 강간범과 피해자.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리라.
기록/생각 2010. 7. 27. 23:50 | 끊임없이 잠이 온다. 나는 거의 세시간 간격으로 잠이 들며 꿈을 꾸고 꿈을 꾸고 또 꿈을 꾼다. 괴상한 꿈들이다. 꿈 속에서 나는 지고한 존재로 변신하기도 하고 삶을 긍정하며 느긋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존재에 대한 충실감으로 가득한 채 행복의 표피 안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순간을 영원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꾸어본 적 없는 꿈들이며 내 유아적인 욕망이 허위없이 여실히 드러나는 꿈들이다. 항상 해왔던 말들이지만 나는 가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마침내 끝에 가서는 먼지처럼 아스러져 손에 쥐었던 것도 집어삼켰던 것도 전부 사라지게 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치를 갈망한다. 살아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혹은 가치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구분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은 복합적인 사실일 것이다. 그것도 결국에는 인간의식인만큼 모순되고 왜곡되었으며 동시에 그 모순과 왜곡으로 논리를 보완하고 있는 하나의 지저분하고 동물적인 사이클일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고 정신병자의 논리체계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하는 동물의 전부이자 본질인 것이다. 애당초 의식과 동물은 손을 잡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꿈. 꿈에 대해서 마저 이야기해야한다. 꿈은 의식과 추상만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동물의 냄새는 남을지언정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지는 않는다. 게다가 나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를 죽이려드는 음모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나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를 죽이려드는 음모임에 틀림이 없다. 계속해서 꿈을 꾸니 이제는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사물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한여름밤의 밀폐된 공기 안에 갇혀 울고 있다. 원망하는 눈길을 받으며. 원망하는 눈길을 받으며. 꿈 속에서 나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막을 헤맬 필요가 없다. 내 정신은 낙타의 혹처럼 기름지고 갈증을 내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몇 번이고 자살을 상상한다. 울면서 잠들어 울면서 깬다. 절망과 불안은 그런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욕망덩어리 세계를 거쳐 가차 없이 무겁고 치명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냥 내버려둬도 얼마든지 화려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의도들이 있다.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몸부림치며 경계조차 불분명한 현상 위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하나? 내 인생마저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의 어림짐작으로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추한 눈을 기억하라. 친절과 기대는 즉 나를 모델화하려는 추잡한 욕망의 증명이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엉망진창으로 터트려버리고 싶다. 속에 있는 내용물이 거짓 없이 전부 흘러나오도록. 병증과 병원과 약물과 치료와 상담과 불신과 관계와 정신. 정신병리학적이지 않은 정상적인 관계들. 정상적인 관계야말로 가장 비정상적이고 불안하다. 차갑고 축축하며 여지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정상적인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관계는 말그대로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절망스럽고 혼란하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이미 모든 것의 결말까지 추측하고 나태하게 늘어져있는, 좌절한 정신이 있다. 그것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좌절해있다. 그리고 믿을 것이라고는 그 지독히도 현실적인 회의밖에 없다. 꿈. 꿈! 욕망의 발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인가? 내가 병든 정신이라는 것이 도대체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폐쇄를 바란다. 어떤 논리나 관념이나 실재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정신병자의 믿음이, 아니다. 모른다. 무엇을 욕망해야하는지도 모른다. 보다 살고 싶지만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H. 노바크 - 태양병
기록/생각 2010. 7. 23. 18:49 |태양병균 - 비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말레이 여자 마라를 만났다토오는 나를 미워한다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갈색 피부의 마라 -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를 하나나......'토오를 내쫓아', 마라......'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와요'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 일부를 빼앗고 있다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파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춥다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갈색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나는 마라를 사랑한다마라는 일어선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나는 태양병이 무섭다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를 향하여 소리질렀다. '마라!'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죽어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엄습해 온다.죽음이 구제를 갖다줄지도 모른다는,그러나 숲의 화제는 광기다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너는 죽어야 한다나는 고통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나는 한계 위에 서있다- "태양병" / H. 노바크
이 쪄죽을 듯하고 열광적인 냄새를 사랑한다.
갈증. 종말적인 이미지지만 동시에 영원할 것만 같은 열기.
Hate - Hex
기록/음악 2010. 7. 22. 19:55 |
밴드 Hate의 2005년 앨범, <Anaclasis, A Haunting Gospel of Malice and Hatred>의 3번 수록곡 Hex.
밴드 Death의 중심인물 척 슐디너가 병으로 죽은 2001년.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데스메탈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그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 생겨난 데스메탈 밴드들을 제 1세대라고 말한다면 90년대 중후반에 생겨난 데스메탈 밴드들을 제 2세대라고 말해야한다. 문제는 그 '제 2세대'들이 태어나질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긴 태어났으나 그 밴드들이 대부분 '데스메탈 밴드'가 아니었다. 제 1세대 데스메탈 밴드들의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그들이 만들어놓은 엄밀하고 과격한 사운드는 대중성과 손을 잡고 '멜로딕 데스메탈' 밴드가 되거나 자기 장르의 태생적 한계를 느낀 블랙메탈, 그라인드코어 밴드들과 융합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브루털 데스메탈'이라는 더 강한 과격성을 지향하는 장르도 만들어졌으나, 끊임없이 지저분한(?) 리프 한두가지만 반복해대는 안이한 곡구성 때문에 완급조절에 실패하여 오히려 '덜' 과격해지고 만 경우들이 대부분이니 브루털 데스메탈을 데스메탈의 진화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멜로딕 데스메탈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주관이지만)데스메탈에서 파생된 장르라기보다는 차라리 파워메탈에 데스메탈적인 보컬만 붙여놓은 장르로밖에 보이지 않는지라 장르조차 같은 궤에 있지 않은 두 음악을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예 언급을 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블랙메탈과 데스메탈이 융합한 경우에는 즐기기에는 충분하나 어쩐지 깊이가 없는 밴드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그라인드코어와의 융합이 Carcass처럼 성공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이것들은 분명 변형이거나 합병이고 제 1세대 데스메탈 사운드를 충실히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있는 밴드들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의 수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Bloodbath나 Hate등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Bloodbath는 그렇다 치고 Hate가 장르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데스/블랙메탈 + 인더스트리얼 메탈'이라는 정체불명의 장르로 평가되고 있는 모양이다. 블랙메탈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무래도 쉴새없이 두드려대는 드럼의 박자 쪼개기가 블랙메탈의 형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 것 같고, 인더스트리얼은 효과음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짬뽕장르로 이름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작 곡을 들어보면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는 그저 잘 만들어진 '현대적 데스메탈'일 뿐이고 블랙메탈이나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낌새는 거의 보이지도 않으므로 나는 Hate를 그저 '현대적 데스메탈 밴드'라고 칭하고 싶다.
서문이 너무 길었는데, 곡 자체에 대한 얘기로 들어가자면 우선 Hate는 사운드부터가 무척 단단하고 꽉 찬 느낌이 든다. 뭐 하나 빠지거나 과도하지 않게 밸런스를 잘 잡아놓고 고음량으로 감각을 살려놓으니 벌써부터 그들의 음악에 호감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관적인 주제 밑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칙적 구성이나 트윈기타의 치고 빠지는 절묘한 호흡이 더욱 곡에 정신을 빠트리게 만든다. 보컬 또한 낮게 긁어대는 브루털적 그로울링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으나 브루털의 그것처럼 지독하게 저음으로만 꿀꿀거리는 바람에 오히려 청자를 황당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고, 보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명확하며 고저의 변화가 자유로운 방식으로 박력있게 내질러준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이들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척 슐디너의 죽음과 함께 데스메탈도 죽었다고 할 수 있느니 하며 극단적인 말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통 데스메탈 밴드'라는 타이틀을 얻기가 어려운 것 뿐이지 장르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90년대 초반이라고 해서 실력있는 데스메탈 밴드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워낙에 마이너하면서도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까지 엿보이는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데스메탈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항상 소수이거나 심지어는 '개인'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현대 데스메탈계에서 Hate는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그 '소수'들 중 하나인 것이다.
정신나간 행렬 사이로.
기록/생각 2010. 7. 21. 12:08 | 확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열기가 도로 위를 미친듯이 내달린다. 저 열기도 언젠가는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서는 떨어지는 낙엽들도 곧 사그라들 것이며, 녹아 없어지는 눈이 내린 뒤에는 말라 시들어버릴 꽃들이 필 것이다. 이렇듯 확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확신은 있다. 사실 확신은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도 썩고 부스러질 것이다. 썩고 부스러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야하는가? 아직 죽어본 일은 없지만 죽음은 보편적 진실이기는 하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산산히 흩어질 것이니 나는 만족하고 살아가야하는가. 과정은? 과정은 어떻게 되나. 내가 목적론자라면 아마도 과정은 모두 끝나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쳐도 상관 없는 현상의 표면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적론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긍정하지 못한다. 나는 목적마저도 부정한다. 그래,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별다른 지침도 없이 무작정 손에 쥐게 된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광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하기 위한 약들도 있다. 과정. 과정이라니! 도대체 과정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미 확신을 가졌다. 나는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선험적 성질로 말미암아 퇴폐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궁극적으로 회의하기만 할 뿐인 나는 결코 쾌락주의자는 되지 못하리라. 나는 쾌락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거세당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야 무엇이든간에, 나는 우울과 공허에 빠져 인중까지 허무에 잠겨버렸고 무엇을 하든 불신과 무기력으로만 대응한다. 다소는 열정적이거나 열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은 그것조차도 허무에 대한 열광과 열정인 것이다. 최근에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모든 부조리한 위협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작게 웅크리고 있다. 나는 자주 웃는다. 나는 나의 웃음을 증오한다. 그것은 역겹고 기만적이다. 보편에게 반항하기 위해 내 육체적 진실들과 화해하기를 거부했지만 나의 근육과 뼈들은 피조차 나지 않는 작은 흠집에도 고함을 질러대고 끊임없이 먹을 것을 탐한다. 여름이다. 여름이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무자비한 여름이다. 더위와 습기가 모든 쓰라린 상처들을 곪아 터지게 한다. 골목골목마다 악취가 나는 고름덩어리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희희낙락한 살갗을 보는 것이 공포스럽다. 우리는 병들었나. 우리는 병들었는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치열하면서도 무력하게 생존을 갈망하는 그들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소름끼친다. 오늘은 여름이다. 열기가 도로 위를 미친듯이 내달린다. 나는 내 이상성을 증명하러 나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간다. 삶이여. 삶이여. 삶이여.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다. 파열하고 싶다. 산산조각으로. 공포스럽다. 종말과 마주치고 싶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 고독하다. 당연한 사실이다. 사실 곧 무언가를 다시 쓰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불안은 이성과 악수하지 못한다. 밖으로. 자살자들이 뛰어다니는 밖으로. 나도 쏟아지는 폭염 속에서 무언가와 맞닥뜨려야한다.
Death - To Forgive Is To Suffer
기록/음악 2010. 7. 15. 21:42 |
이것은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이 곡은 데스메탈 밴드 Death의 일곱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인 The Sound Of Perseverance의 7번 수록곡이다. The Sound Of Perseverance는 5집인 Individual Thought Patterns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던 변칙적이고 진보적인, 즉 프로그레시브한 곡구성이 이미 장르의 한계조차 뛰어넘은 6집 Symbolic에서 깔끔하게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른 채 발전에 발전을 더해서 만들어진 밴드 Death의, 그리고 인간 척 슐디너(Chuck Schuldiner)의 완성품이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걸작이고,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으며 모든 트랙이 베스트 트랙인 완전한 작품이다. Symbolic에서도 보여졌듯이 척 슐디너는 스스로가 '데스메탈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장르라는 형식적인 틀에 구속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항상 다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음악을 했고, 그것이 그의 손에서 태어난 곡들에서 느껴지는 유일성과 개인주의적 향취의 정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곡을 들어보라. 광포한 감성이 사운드의 입자 하나하나에 핵처럼 박혀있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절대로 이성의 절제를 넘어가는 일이 없다. 강철 같은 이성이 만든 곡의 구성 한가운데에서 공격적인 감성들이 새빨간 생명력과 함께 절규하고 있다. 절규. 이것은 황폐한 세상 속에 근거도 없이 떨어져내린 인간정신이 부르짖는 비참한 절규이자 처절한 의문이다. 거대하고 절대적인 부조리 밑에서 고통받고 있던 자의 인내의 소리(The Sound Of Perseverance)다. 아름다움과 기괴함, 증오와 애정, 고통과 쾌락, 실존에 대한 의문과 자기파괴적인 충동을 뒤섞어 만들어낸 슬픔의 미학이다.
척 슐디너의 음악은 아프고도 아름답다. 노골적이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진취성 앞에서 향일적 예술가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척 슐디너의 음악은 그대로 그라는 인간의 정수가 된다. 그는 불행한 인간조건 아래서 자기표현을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알아낸 이이고 섬광 같은 정신이었다.
나는 그의 음악에서 쾌락과 고통과 전율의 극단을 모두 맛봤고 번뜩이는 천재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심장을 꿰뚫고 나온 쇠못처럼 강하고 날카로웠으며 단단하고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알 수 없다. 세상은 태어나자마자 폐허가 되었고 탄생일은 내게 저주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눈에 들어오는 온갖 가치들에 손을 뻗고 그것을 잡아당겨 뿌리째 집어삼킨 후 또다른 가치에게 손을 뻗는다. 가치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내 정신의 근본 구성성분들을 갈아치운다. 그래서 나는 가치의 본질까지 보았다. 나는 내가 절멸해 없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더이상 먹어치울 가치조차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치의 본질이 곧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기는 커녕 실제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미덕 같은 것이며 인간을 위한 믿음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절멸해 없어진다는 것밖에 믿지 않는다. 존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해야할 것이 많지 않다. 해야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고, 나는 온갖 것들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나는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을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으로써 망가졌고, 신념과 법과 신성을 모조리 위와 장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오물통에 내버리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취향과 감정밖에는 없었다. 세상은 태어난 이후에도 재차 폐허가 되었다. 나는 억압당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과거의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약물의 기만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미 난 내 정신과 영혼조차 타인의 학문에게 맡겨버린 구제불능의 좀비 같은 것이 되었다. 내장을 쏟아내고 죽어버리고 싶다. 정직을, 정직을, 정직을. 모든 사상과 이념이 정신질환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문명이 탄생한 순간 죽었다. 산산조각으로 찢어발겨져 죽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조차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종에 햇빛조차 반사되지 않는 깨끗한 유리창은 포함되지 않는다.
글을 써야한다. 글을 써야만한다. 글을 써야만하고 써야 할 글을 생각해내야한다. 모든 것에 정통한 오만한 나는 뻔한 피해망상 속에서 내 정신과 미학에 대한 음모를 느끼지만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백수천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지독한 악순환이다. 내 정신과 사고는 악순환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나는 악순환이다. 나는 회전하는 재앙덩어리다. 나는 글을 써야한다. 나는 글을 써야하는데 그들(혹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내 문학은 덫에 걸렸다. 발목이 물렸다. 호르몬제와 화학물질의 이름을 단 쇠로된 이빨에게 사정없이 물렸다. 선생님, 당신이 내 예술에 대한 박해의 주모자라고 말해주십시오. 선생님, 당신이 내 예술에 대한 박해의 주모자라고 말해주십시오. 선생님. 선생님, 모든 것은 당신과 당신들의 탓입니다. 나는 궁지에 몰렸다. 나는 기만을 위한 기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기가 괴롭기 때문에 기만을 위한 기만에게서 도피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내 어디에 잃어버린 것이 있고 내 어디에 채워진 것이 있단 말입니까. 자살. 잃어버리면 자살해야한다. 충족되어도 자살해야한다. 나도 자살하고 내게 안락을 주려는 것들도 전부 자살해야한다. 거짓으로 도움을 청한다. 도와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독이다. 육체의 독과 정신의 독과 영혼의 독이다. 언어는 이미 모조리 뒤집어져있기 때문에 나는 실상을 말할 수 없다. 울 것 같다. 울며 죽을 것 같다. 글을 써야만한다.
Carcass - Death Certificate
기록/음악 2010. 7. 13. 21:03 |
카르카스의 1994년 앨범 HEARTWORK의 마지막 트랙인 Death Certificate다.
카르카스는 그라인드코어 밴드로 시작해서 후기에 훌륭한 데스메탈 밴드로 탈피한 밴드의 좋은 예인데, 그라인드코어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이들의 변모가 퍽 기쁜 일이었다. HEARTWORK를 처음 듣고 '하면 되잖아'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
데스메탈로의 방향성 전환은 사실 후기라고 하기도 부적절한 1991년의 앨범 Necroticism Descanting The Insalubrious(이후 Necroticism..) 에서부터 보여졌는데, 이때부터 그라인드코어라고 하기엔 비교적 분명한 사운드와 멜로디, 그리고 곡당 평균 5분을 상회하는 긴 런타임이 곡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사실 곡이 긴 건 그라인드코어 밴드답지 않게 1집때부터 4~5분씩 되는 곡들을 써왔던데다가 오히려 HEARTWORK에 와서 그 길이가 전보다 짧아졌으니 방향성 전환의 주요요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그러나 Necroticism..은 사운드로 보나 곡의 형태로 보나 데스메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가벼운, 오히려 광대의 몸짓처럼 우습고 발랄하기까지한 펑크적인-그라인드코어의 기원격인 장르가 펑크록이라는 것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뉘앙스가 있었던 것에 비하여 HEARTWORK는 그 사운드의 육중함이나 기타의 진지하고도 공격적인 플레이, 그리고 변칙적인 곡구성에서 드러나는 청자를 거머쥐는 듯한 감각이 어떤 면에서는 <밴드 Death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또다른 가능성을 개화시킨 밴드>라는 찬사까지도 받을만하다.
불균형한 신체와 불균형한 정신과 오류적 존재. 집착과 맹목성.
기록/생각 2010. 7. 10. 08:34 | 자신의 호르몬만은 믿어야한다. 설령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한다. 오늘도 아침이 왔다. 밤이 지나간 기억도 없는데 아침은 온다. 정당성과 자연주의적인 욕망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눈을 감아야 할 순간을 알지 못한다. 온갖 알약들 덕분에 졸음에 대한 내 감각은 엉망이 되버렸다. 나는 졸음과 피곤을 구분할 줄 모른다. 피로를 못견뎌 몸이 무너지기 전에 새까맣고 깊은 약기운이 나를 무너트린다. 행복한 상념이 있었다. 외롭지 않은 이미지도 있었다. 갈증이 있고 욕망이 있으며 목적한 것을 향해 가차없이 손을 뻗어대는 유아적인 탐욕이 있었다. 내 뇌를 통과하는 신경들을 붙잡아 나락 밑바닥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병리학적 메커니즘들이 있다. 내가 토해낸 것을 다시 긁어모아 집어삼킨 두통도 있다. 절대를 부정했고 잣대를 부정했으며 도덕을 부정했고 진리를 부정했고 소위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에 존재를 맡겼다. 나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산산조각난 인격들이. 이천십년 칠월 십일. 시간은 무자비하게 흐른다. 혐오하는 것들을 주워삼켰다. 공포스러운 것들을 씹어삼켰다.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나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나는 틀림없이 근거가 필요합니다. 내 병증도 광증도 행위를 위해서 정당함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은 내 몸무게만큼 균형이 잡혔을 것이다. 59kg의 돌발상황. 59kg의 불규칙성. 59kg의 명백한 오류. 그러나 자기비하가 아니다. 나는 당당하게 자기비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결말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59kg. 터무니없이 가벼운 수치고, 영향력이 없다. 내가 책을 출판한다고 생각해보자. 책 한권의 무게는 어림잡아 500g이다. 500g에 판매부수를 곱한다. 많을 수록 좋을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권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원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단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을 믿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사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히틀러. 히틀러는 무엇을 원했던가. 히틀러는 <조국>의 국민들이 열화와 같이 자신에게 동의해주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아마도 그 불행한 인간은 행복했을 것이다. 불행한 인간은 행복했을 것이다. 불행한 인간은 행복했을 것이다. 모든 열정들은 동등하다. 도덕을 부정했으니까. 모든 열정들은 동등하고 어딘가에서는 찬미받으며 어딘가에서는 증오받는다.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지구 밖으로 나가보라. 그들은 당신의 열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규정짓는 타인. 하지만 그것도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도피적인 뉴에이지 사상에 미쳐있지만 않다면, 당신은 지구 위에 땅을 밟고 서있는 비참하고 초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는 절대적으로 사멸한다. 어쩌면 나는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어떤 가치도 영구하지 않다고 단언하면서도 어떤 무거운 가치를, 내 존재성을 인정해줄, 증명해줄, 뒷받침 해줄 그런 강력한 가치를 만들어내려고 발버둥치는 중인지도 모른다. 발버둥. 발버둥. 어떨까, 사실 난 그런 단어에 어울릴정도로 열성적인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 무기력도 8할 정도는 약물의 탓이다. 그들이 날 안정시켜주겠다고 말하며 건낸 약. 위대한 정신병리학이여.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사방이 캄캄해지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세상에는 배경음악도 없고 정해진 계획표도 없다. 그저 유치하게 강간을 한다. 강간을. 생명력. 충실한 생명력. 범법. 집단사회. 최소한의 예의. 도덕. 전통. 탈피하다. 위버맨시. 야수. 개인. "혁명가는 증오하기 위해 증오하고 파괴하기 위해 파괴한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던 것들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혁명주의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가지 정당할 수 있는 전체주의(집단)가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이상이나 사상도 가지지 않고 오직 모든 체제의 붕괴를 위해서만 원한을 불태우는 전체주의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으로 심장을 재울 수 있다. 내 혈관 속을 흘러다니는 호르몬과 화학물질들로 나의 병증이라는 것들을 다소나마 제한할 수 있다. 공격성은 억압당하고 증오는 가라앉아 결정화 되며 슬픔은 천박한 유쾌함에 가려져버린다. 졸음 속에서. 졸음을 위한 메커니즘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