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거추장스럽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의 정체가, 평등한 죽음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정말 그런 것 같았고, 사뮈엘 베케트의 얼굴표정이 바뀌었다.

 “얼굴 좀 펴. 언제까지 기가 죽어 있으려고.” 아버지는 자러가며 A에게 그렇게 말했다. A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각도에 따라서는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표정을 지었다. A는 아버지의 발언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다만 그 음색에서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감정이 나타났기에, 괜히 울 것 같은 심상이 되었다.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으려나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하고 A는 생각했다. A가 우울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을 때, 누군가 걱정해주며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정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는 왜인지 휘발유 냄새가 났다. 그것은 주유소마다 붙어있는 변변찮고 낡은 편의점의 야간조명을 떠올리게 했다. A는 인적도 차도 없는 거리의 그러한 야간조명을 볼 때마다 자신의 정서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창문 앞에 서서, 초봄의 서늘한 바람이 끌고 온 휘발유 냄새를 맡으며, 오늘 밤에는 죽자고 결심했다.

 널 도와주려는 사람들은, 결국엔 모두 널 증오하게 돼. 응, 네가 더 잘 알지.

 한 2년 전이었을 겁니다. 직장인인 친구가 어떤 여자에게 반했는데, 그 여자가 중증의 기분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저는 몇 번이고 친구를 설득했습니다. 네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아예 접촉도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기분장애나 정서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과 유대관계가 되는 건 손잡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친구는 그 여자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거의 조소하다시피 부정했습니다. 그녀가 의존이라는 이름으로 네 영혼에까지 독을 퍼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3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친구는 정신이 흉터투성이가 되어서 비로소 포기했습니다. 뭐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릅니다. 자신의 고통에 골몰해서 현실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우릴 도와주겠다고 다가오면, 항상 익사하기 직전인 우리는 그들의 등과 어깨를 짓밟고 수면 위로 가쁜 호흡을 하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은, 상처받고 우리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봐, 아카시아 꽃이 피었네, 벌써 봄이야. 어떻게든 또 1년, 살아야겠네.
 꽃들에게 피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을까.

 A는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사실 담배 같은 걸 살 돈은 없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돈을 주기에, 어리석은 곳에 돈을 쓰기 전에 전부 담배로 바꿔버렸다. 그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이 사는 음습한 동네를 둘러보고 있다. 몇 달 전인가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신축 멘션이 지어졌다. A는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어리둥절해하곤 한다. 사방이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되고 지저분한 빌라뿐인 동네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건물이 신기한 것이다. 누군가 들어와서 살긴 살겠지. 보다 돈이 좀 있는 가정이 들어와서, 보다 돈이 좀 있는 다툼과 원망을 건물에다 새겨놓겠지.
 가족들은 전부 자고 있다. A는 새벽마다 담배를 피우면서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다. 다만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은 무섭기 때문에 인적 없는 곳만 골라 다닌다. 술에 취한 젊은이들과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다. 그들의 발랄하고 활기찬 생명을 목도하게 되면, A는 당연한 듯이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A를 향해 이상한 눈길을 보내고, 그제야 A는 도망친다. 그리고 곱씹는 것이다. 고작 그런 걸로 패닉에 빠지다니, 멍청하게, 그 젊은이들은 날 정신병자라고 생각했겠지…….
 모멸감이 극에 달할 때 즈음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면서, 이런 일을 다시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 중얼댄다. 그러나 아까도 휘발유 냄새 덕분에 자살을 결심했었는데, 이런 결심은 계속 쌓이기만 하는구나. 자학의 마음은 하루하루 깊어진다.
 A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을 한 움큼 삼키고 잔다. 다시 밤이 올 때까지, 강제로 정신병동에 입원당하는 등의 악몽을 꾸며 잔다.

 계속 구르는 바퀴 같은 삶이기에, 이걸 멈추거나 탈출할 방법은 없나, 하염없이 주춤거리고, 결국 생각하는 것은 바퀴를 부수는 일. 바퀴를 부수는 걸 꿈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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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킬러

기록/생각 2020. 3. 23. 18:34 |

페인킬러


 글쓰기는 항상 나의 진통제였다. 타인의 삶을 살아본 일은 없지만,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자라면서 느낀 것은 내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나는 남들보다 더 커다란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고통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삶이란 노을을 보면서 행성의 운행을 저주하고 새벽녘에 자살을 바라는 식으로 반복되었다. 한강 다리의 난간에 붙은 자살방지문구들은 내게 더 없는 분노와 절망을 안겨주었다. 내게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만 가득 찬 악의적인 연극무대였다.
 그러니 무언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슨 음식을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숨만 쉬어도 폐부가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삶에,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왜 삶을 지속해야하는 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게 깃든 생명이 내 관리 하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 억지로라도 나의 인생을 지속시키려한다는 사실만은 안다. 어느 끔찍하게 절망스러웠던 15살의 밤에 자리에 누워, 어둠에게 내가 자살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세 시간이나 지껄이던 것이 내 혀가 아니라 생명력의 혀였다는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왜 살아야하는 지는 모른다. 다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니 더욱 진통제는 필요했다. 독서에 미쳐 살던 10대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한 결말을 성취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기계장치에서 내려온 신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고, 인간은 부조리와 비극에 처참하게 압도당한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무작위하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책들이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왜였을까? 아마도 그런 세계관이야말로 이미 나의 세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 따위를 결코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었을 법하다. 아직도 행복한 환경에서 건강한 정서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증오와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내가 아는 세계에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나의 이야기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10년 넘게, 나는 아주 불쾌한 글들을 써왔다. 원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하는 세상의 불행과 비극, 존재의 존재성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 잘못 태어나버린 인간들…… 그런 것들이 주로 나의 소재였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아무도 바라지 않고 배척할 뿐인 괴물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그 생명을 축복받지 못하지만 거의 악의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천부인권이라는 것은 계약조건에 맞는 인간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고 소리 질렀다. 항상 타인에게서 거부당하거나 기괴한 인물로 인식되던 내 경험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진통제로서의 효과가 있었다. 호흡곤란이나 심인성 흉통이 올 때마다 나는 신경안정제보다 먼저 글쓰기를 찾았다. 당장이라도 경동맥을 뜯어내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글을 쓰고 있다 보면 잦아들었다. 그것이 10년 15년, 그러다보니 어쩐지 나는 글을 <잘> 쓰게 되었다. 많은 독서량으로 마구잡이로 쌓아둔 작문 지식들이 십년 넘게 괴팍한 글들을 쓰는 동안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 이젠 다른 문제가 생겼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문제였다. 나 자신의 진통을 위해서 신경계를 마약성 진통제로 융단폭격 하는 것 같은 글은 세련되거나 그럴싸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좋은> 글을 써야한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과 같다. 독자의 정신 상태를 불쾌하게 만드는 글들은 이미 충분히 써버렸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손에 익은 도구는 들었지만 난데없이 사막 한 복판에 버려진 기분이다. 무엇이 좋은 글일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인데, 증오와 절망에서 솟아난 글들은 오로지 증오와 절망을 전달할 뿐이다. 최근 과거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내용에 처절한 결말을 담은 글들이라 해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타당한 인류애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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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기록/생각 2020. 3. 19. 02:58 |

20200319


 삶의 궁극적이고 선험적인 문제들이 언젠가는 해결되리라는 느낌을 받아본 일이 없다. 존재함으로서 시작된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확실히 있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서 기인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인식하고 고통 받게 되면 제일 먼저 존재의 소멸에 눈이 가게 된다. 그러나 생명체로 태어나서 생명을 쉽사리 버릴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더 나아가자면, 존재와 생명이 동일한 것인지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확신할 수 없다. 만일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이 불쾌한 사대육신이 전부 흩어져버린다 하더라도, 혹시라도 어딘가에 <나>라는 존재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죽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소멸하고 싶은 것이다.

 요 몇 주간 자리에만 누우면 하지불안 증후군이 심해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 주치의가 안정제를 늘리거나 대체약물을 처방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지만 효과가 없다. 2년에 걸쳐 약물 용량을 5분의 1까지 줄이는 와중에 몸의 약물에 대한 반응이 어쩐지 꼬인 것 같다. 잠을 잘 수 없게 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밤에 침대 위에서 세 시간 네 시간을 몸부림치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 아무도 모르게 울곤 한다. 낮에는 멍하니 앉아 이 끔찍한 존재의 굴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에 빠져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목의 경동맥을 잘라내면 다음 생에는 향정신성약물이 필요 없는 몸으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는 기대다. 무엇보다 <다음 생> 같은 건 정말이지 가지고 싶지 않다.

 14살 때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신경정신과의 의사는 아주 늙은 여자였습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구덩이처럼 깊이 파여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과 감정을 가지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여자는 굉장히 단순한 질문만을 제게 던졌는데, 당시 고통과 불안이 몸의 용량을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은 상태였던 저는, 미친 듯이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지껄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일도 없었고 얼굴은 마치 실리콘으로 만든 가면 같았습니다. 그 늙은 의사가 준 약들을 먹기 시작하자, 저는 하루에 20여 시간을 자게 되었습니다. 3년 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되돌아보니, 3년간의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차후에 당시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어 기억을 짜 맞출 뿐이었습니다.
 기억나지도 않는 3년은 기행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아스팔트가 회색인 사실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이 슬퍼하는 것이 실마리가 아닌가 싶다.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아스팔트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삶이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긴장과 좌절과 분노만이 자취를 남기고 있는 과거에, 아스팔트는 항상 회색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아스팔트가 파란색이나 청록색이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야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존재의 항상성이라고 생각한다. 맨 처음 어디서 어떻게 조건이 맞춰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의 변화를 겪더라도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아스팔트는 회색이다. 나는 그것이 못 견디게 슬프다.
 아스팔트는 언제나 회색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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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

기록/생각 2020. 2. 29. 01:04 |

3

 

 

죽어도 괜찮아.

어차피 576천만년 뒤에 미륵부처님이 다 성불시켜주실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숙취 때문에 몸부림을 치며, 윤회는 싫어, 라고 헛소리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방바닥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그는 울고 있었다. 울고 몸부림치면서 숙취를 가라앉히려고 찬장에 있는 신경안정제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고통의 정체는 알고 보면 정말 하잘 것 없는 거야.

 

존재의 뿌리까지 한방에 지워버리는 약은 없나요?

 

그의 동생이 물을 떠다주었다. 한줌이나 되는 약을 삼키고도 20분 정도 그는 호흡곤란 때문에 괴로워했다. 도중에 약 봉투에 들어있는 부작용 억제제가 오각형인 것이 우습다고 웃었다. 시야를 흐리게 하고 보면 별사탕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러면서 웃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물을 떠준 동생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잘 안 된다.

20분이 지나자 그는 점점 동작이 굼떠지기 시작했다. 호흡이 느려지고 눈은 반만 뜨고 있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어쩐지 그의 왼쪽 다리가 가끔씩 경련했다. 퍼뜩 기억이 난 듯 기어가다시피 하며 침대로 올라가서 쓰러졌다. 이불도 안 덮고 쓰러진 그에게 동생이 이불을 덮어주었다.

 

지옥 아니면 천당이라니, 간단하네요.

가톨릭에는 연옥도 있다던데.

거기는 살기가 좀 어떻답니까.

 

애당초 그가 하는 말은 뭐 하나 믿음직한 것이 없다. 10년 전과 2년 전도 구분 못하는 인간이다. 전에도 스스로 말하기를, 망상과 경험이 구분이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 과거의 망상이 현재의 경험과 뒤섞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내뱉는 말마디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비존재가 되고 싶다, 비존재가 되고 싶다, 지겹게 되뇌던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 뭔가를 시도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항상, 가슴에 자포자기라는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흘렀다.

 

어디서 들었는지, 계속 <I don’t wanna be alone, in the darkness.> 하며, 무슨 팝음악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다닌다.

어둠뿐만이 아니라 대낮에도 혼자라는 것은 까먹었는지.

 

죽어도 괜찮아.

어차피 576천만년 뒤에 미륵부처님이 다 성불시켜주실 거야.

카페인 때문에 동공이 열린 눈으로, 거울 안에서 그가 중얼거린다. 거울 안의 그는 괜찮을 리가 없다. 윤회가 무섭다는 것을 죽지 않는 핑계로 쓰고 있는 그가 괜찮을 리가 없다.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야밤에 끝나지 않는 방청소를 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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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기록/생각 2020. 2. 26. 20:52 |

20200226

 

 

술 마신 다음날은 슬픈 심상입니다. 이미 하늘 꼭대기에 뜬 태양의 빛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고, 눈을 떠보니 어쩐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상하다, 유난히 고요한 것이, 전날 마신 알코올이 고막을 파먹었나. 그러나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분명 영혼이 움츠러들어 있는 것일 터입니다. 기름 먹인 종이에 물방울이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소리가 영혼으로 스며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지간히 일어나기 싫어하는 몸을 발로 걷어차듯이 움직이게 해,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마십니다. 둘러보니 집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 있을 리가 없지요. 세상은 오래전부터 나를 내버려두고도 잘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버려진 나뭇가지처럼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도대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떠들썩했던 어젯밤의 술자리에 대비되는 것인가, 계속 망설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마는 것이지요. 이제 와서는 이 담배라는 물건이 대체 내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코틴이 주는 쾌락은 18살 이후로 느껴본 일이 없고, 이젠 그야말로 숨을 쉬듯이 피우는 것입니다. 딱히 이득을 얻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주머니에 담뱃갑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인가, 아칸소에서 머물 때 친구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날 보며 이런 말을 했었지요. 영어로, 그건 역겨운 습관이지, 나도 영감쟁이가 돼서야 그만둘 수 있었어, 라고요.

 

어쩐지 몸의 끝자락이 따갑고, 따가운 것은 아닌가, 좀 저리는 것도 같다. 숙취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은 늘 그렇지요. 일도 없이 의자에 앉아서 벽지나 쳐다보며, 왜 흰색 벽지로 했었더라,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말입니다. 슬픈 심상이라고 위에서 썼었습니다. 막연히 외로운 것도 같습니다. 그 막연한 외로움에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며 뉴스를 틀어봅니다. 대유행하는 전염병 때문에 모두 긴장하여, 거리에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더욱 외로워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거리에 아무도 없다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겠다. 만일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면, 나는 분명 어떤 표정이 이 도시에 사는 건강한 시민의 표정일지 곤혹스러워하다가 결국 땅을 쳐다보고 말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내내 아무도 맞은편에서 걸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얼굴 없이 산책할 수 있겠지.

 

그러나 결국 외출하는 일은 없습니다. 거의 흡연과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빈 종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요즈음 단편소설을 새로 써보고 있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 오히려 스스로도 대단하지 않게 여길 것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럴듯한 드라마나 기승전결도 필요 없는 단순하게 먹먹한 것을 좀 써보고 싶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자살하고, 대체로 유언장에 의해 진행되는 서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주인공도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요새는 특색 있고 매력적인 인물 같은 것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도 않더군요. 그리고 그런 인물이라면 등장하자마자 느닷없이 자살하진 않겠지요. 아무튼, 이것저것 문장들을 좀 시험해보고 있는데, 결국에는 빈 종이만 계속 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참,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살한 것으로 이미 끝난 게 아닌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밤입니다. 오늘 뭔가 먹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이제 깜깜해졌으니 외출해도 되지 않을까, 밤거리니 누군가와 마주칠 일도 없겠지, 중얼중얼 생각하고. 그리고 슬슬 동생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생과 무슨 시답잖은 대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아주 약간이라도 이 슬픈 심상과 대책 없는 외로움이 가시지 않을까. 스스로도 실소가 나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시지 않는 게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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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정리

기록/생각 2020. 2. 26. 00:16 |

마음정리

 

 

오늘은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애당초 내가 외로움에 취해 중학교 동창들 전부에게 연락을 걸어 간신히 만든 약속이었다. 요즘 시끄러운 전염병 때문에 사람도 없는 길거리를 담배 뻑뻑 피우며 지나가, 역전에서 동창과 만났다. 어느새 동창이 어른의 눈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중학생 때는 눈이 좀 더 맑은 갈색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회사에 자리 잡은 게 몇 년 째지? 3년이 넘었다고. 그래, 이렇게 되는 법이구나. 그러나 유감일 것도 없었다.

 

이봐, 결국엔 시대를 타느냐 마느냐 하는 거야. ? 누가 했던 말이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중학교도 온갖 폭력사건이나 사고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졸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지금도 중학생 시절 동창들을 만나면, 그들이 재미있는 옛날 얘기랍시고 꺼내드는 것이 내가 수업 중에 선생에게 의자를 집어 던졌던 사건이다. 그런데 난 머릿속에 그 기억이 전혀 없다. 동창들이 하나 같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분명 일어났었던 사건인 것 같은데,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이었다. 내 학창시절이라는 것은. 부수고, 때리고, 책상을 뒤엎고, 증오하고……. 그렇기에 당시 내 주치의는 고등학교 진학을 말렸었던 것이겠지. 그때부터 친구들과 전혀 다른 인생의 궤를 돌기 시작했다. 한 여름 마포대교 밑에서의 삶은 끔찍했다.

 

무슨 이렇다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사람이 너무 일찍 실패하는 데에 이유 같은 건 없는 모양인가 봅니다. 딱히 목숨이 아까운 것도 아니지만, 저녁에 한강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이렇게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뜬금없이 캘리포니아에 있었지? 지금도 이유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웨스트우드에서 가장 싼 다인용 숙소를 잡고, 거의 먹지도 않으며,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멍하니 살았다. 식사는 3일에 한 번 했던 것 같다. 가까운 마트에서 파는 냉동 부리토는 맛이 아주 끔찍해서, 거기서 사귄 친구에게 빌린 중국산 고추양념을 퍼붓듯이 해야 겨우 목을 넘어갔다. 낮에는 주로 로비(호텔 등의 로비를 생각하면 로비라고 할 수도 없는 공간이었지만)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발의 브라질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얼굴에는 그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인간이 가져야할 가장 기초적인 악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내민 파이프를 그렇게 쉽게 피웠던 것 같다.

 

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파블리시오.

나는 3분마다 이걸 피우니까. 자유로워지는 데 필요한 건 돈이나 권력이 아니야…….

그럼 우리 다 같이 웃자고. 옆방의 세르비아 친구들도 데려와. 다 같이 연기처럼 웃어보자고.

 

그러나 지나가보니 모두 환상. 시간은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개울물처럼 스쳐갔다. 귀국한지 2개월이 지났을 때에 느닷없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나온 마른 식물 줄기는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이것 때문에 내 온 인생이 감금될 수도 있었어. 고작 3시간의 해방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중학교 동창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방언처럼 터지는 그의 말마디들은 더 이상 옛날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얼마 전 중병에 걸렸다가 회복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얼마 전 아버지가 녹내장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를 회상했다. 아버지에게 안대가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 시간조차 망상인데. 남은 것은 결국 시간도 초월한 괴로움뿐이지 않느냐 말이야.

차라리 죽어도 괜찮다면…….

 

동창은 지하철로 걸어 들어가는 마당에, 내가 전과 다름없이 여전해서 기쁘다고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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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살이

기록/생각 2020. 2. 3. 17:57 |

겨울살이


 아무래도 슬퍼하는 것이 내 평생의 과업인가 싶다. 돌이켜보자면 쓸쓸하면서 약간은 가슴이 아픈 이러한 심상에서 나는 일생 벗어나본 일이 없는 것이다.
 오늘은 카페에 가는 길에 아파트 창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사설 어린이집의 현수막이었는데, 그 어린이집 이름은 꿈쟁이 어린이집이었다. 물론 작명가는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 그러나 과연 어린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인가. 그 꿈은 언제까지 날개가 돋아 있다가 수억 차례의 절망과 싸우거나 뜯어 먹히거나 하는 것인가. 아이들이 무구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싫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미 꿈도 미래를 기대하는 기력도 과거에 놓고 온 산송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2월의 겨울바람은 코트 안으로 마구 침입해 들어왔기에, 나는 진흙을 입에 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카페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캔커피나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슬픔과 우울은 항상 이런 식으로 기척도 예고도 없이 잠입해 들어온다. 뱀이 되고 싶구나.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뱀처럼 살아가고 싶다. 게다가 그 냉혈동물이라면 세상만사에 괴로워하며 마른 침을 삼키는 이상한 존재가 되지도 않겠지. 생각해보면 어떻게 슬퍼하든 광란하든 살아간다는 것은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슬픈 것일 터다. 분명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고 불쾌한 흔적을 남겨놨기 때문에.

 망각을 죄로 아는 종족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발밑의 행성이 거대한 무덤이라는 것을 기억해서, 죽지 못한다.

 담배꽁초를 버릴 때, 필터가 썩지 않는다는 것이 슬퍼. 내가 죽고 나서 몇 백 년이 흐르더라도, 누군가가 필터를 보고 생각할 거란 말이야. 담배 같은 것에게 의지하던 놈이 있었구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술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술에 취했을 때만 아름다운 꽃봉오리 같은 인간애가 가슴에서 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는 그리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는 원래부터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밤의 길거리에 노란색 가로등이 켜지는 것만 봐도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는 나는, 이것이 마치 꽃잎에도 가시가 돋은 괴기스러운 장미 같습니다. 혼자 술잔을 몇 차례 비우면 비틀거리며 불 꺼진 안방으로 가, 그림자 밑에서 자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내 안에 피어나는 것에 당황하여 스스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죽어버릴까, 사랑 같은 건 모르겠으나 저들의 사랑에 기생하여 살고 있는 나 같은 놈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게 앞에 앉아있는데 아이가 하나 지나갔다. 겨울이라서 두꺼운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혼자 거리를 나다닐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왜 혼자 뛰어다니지, 했는데 뒤쪽을 보니 마찬가지로 두꺼운 옷을 입은 젊은 어머니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가 마구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하늘로 휙 증발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진 것은 세 사람 중 나밖에 없었다.
 나는 안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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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 앞에서

기록/생각 2020. 1. 30. 22:29 |

교차로 앞에서


 과거에, 삶을 살아가려면 목적은 없더라도 동기 정도는 있어야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글을 썼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감각으로 그때는 동기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삶의 발현이란 참 어이없이, 의지도 없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나의 어떤 것이 세상과 육신을 원해서 벌어진 일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떨어지고 헤매고 헤매기만 하다가, 어라, 발자국을 지울 새도 없이 스러져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동기를 찾을 시간도 빡빡한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자면, 동기는 사실 무엇이 되었든 주변에서 가치판단도 해주지 않습니다. 만약 해주더라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의 동기이니까요. 남이 뭐라고 하건 귓가에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한 발짝 한 발짝 수미산과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 나가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인데, 누가 그것은 올바르지가 않다 합당하지가 않다 하는 소리를 들을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살면서 수집해온 불행과 고통을 아름답게 꾸며 여기저기 집어던지는 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유쾌한 얼굴을 하고서는, 길가는 사람 면전에 고통을 집어던지는 취미 고약한 짓이 삶의 동기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참으로 만년에나 돌이켜볼 수치스러운 삶을 일찍도 알아차리게 되었군요. 사람들과 유대를 갖거나 혹은 불행의 굴레를 해결할 방법도 낯선 일이라, 내가 해결하지 못한 존재의 공허함을 그럴듯한 언어로 묶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나처럼 바닥도 없는 나락에 추락하게 되어라, 저주 같은 말이나 백지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저번 달이었나요. 살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러나 죽어버릴 이유도 못 찾겠는, 제철을 넘겨버린 벌레 같은 마음으로 산사에서 기거할 때, 남동생이 찾아왔었지요. 열 살 가까이 나는 나이차 때문인지 평생 참 예뻐한 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아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군요. 아무튼 배추밭 옆에서 평생 변한 일 없는 미소를 지으며 터벅터벅, 형, 하며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지. 아무래도 웃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야말로 이제 심장도 혈액도 죄다 어디다 빠트리고 온 증거로구나. 나는 그냥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술을 일그러트렸습니다.
 이 아이의 형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응, 너무 혼란스러워 기억이라고도 못 할 기억만 있는 어린 시절은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가끔가다 단어로도 정의하지 못할 유령 같은 것들이 대낮에 지나다녔고, 태양은 소리가 나지 않았고, 중이염을 앓는 귀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세상의 혼돈이라는 파도가 피부 안쪽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이었다. 외롭지 않았다.

 밤엔 자고 낮엔 일을 한다는 것이 참 성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단단하게 두들기는 대장장이 같은 일입니다. 뜨겁게 달궈 망치로 두들기는 정신에는 우울이라는 잡균들이 들러붙지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규칙성 있고 사소한 일상들이 강인한 삶의 연속성이 됩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침엽수를 보다가 어처구니없는 순정으로 절망에 무릎 꿇는, 그런 이상한 인간이 동경하고 마는 연속성입니다. 애당초 동기도 목적도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는 일에 필요한 것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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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

기록/생각 2020. 1. 4. 17:58 |

불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가해한 세상이다. 아니, 세상까지도 아니다. 나 자신도 불가해한 것이다. 불가해한 내가 세상을 관측하니 세상도 물론 불가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가해를 불가해하게 만드는 중심에는 자아인지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안경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보도록 만드는 안경.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다섯 잔째에 나온 발상이다. 카페인이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니 무엇이든 간에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바보 같은 경향성이 생긴다. 정리를 좀 해보자. 내가 세상을 난해하게 이해하든 아예 관심을 갖지 않든, 별 관계도 없이 이 겨울날에도 광화문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라를 만들자’, ‘저렇게 정책을 바꾸자’하며 숭고한 의지로 플랜카드를 들고 서로를 패죽이고 있다.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난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패망했고 자본주의는 한계점이고,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미로 한복판이다. 그 깃발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생각은 가지각색이어 깃발보다 먼저 돌진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곡괭이로 미로 벽을 부수고 있다. 아예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마냥 죽음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예인데, 나의 빈약한 통찰로는 이 미묘한 그룹 하나조차 다 어우르지 못한다. 애당초 어우르려고 하는 사고 자체가 하나의 편집증이다. 내가 그들을 각개 이해하여 마치 커다란 카오스이론 같이 된 것을 파악한다 한들 뭘 하겠느냔 말이다. 나의 생활은 그 광화문 거리 근처에 있지도 않다. 그저 오후 한 시쯤 느릿느릿 일어나서 커피를 다섯 잔이나 들이붓다가, 나의 묵직한 책장 앞에서 넋이 나가있는 것이 나의 생활이다. 그러다가 발광하는 뇌세포가 갈 곳을 잃으면 참으로 쓰잘데기 없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피츠제럴드 중 누가 더 삶 같은 삶을 살았나 결론도 없는 문제를 망상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생각하고 판별하려고 하는 것인가 말이다.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다. 진심으로 생각하자면 매사에 관심이 없는 내가, 무슨 습관이나 된 것처럼 이것저것 괜히 사고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문기사를 보면서 거기서 나를 중상모략하려는 어느 종교단체의 암호를 알아내려는 노력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아까 자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自我라는 한자구성이 무색할 정도로 이놈은 내게 연결된 주제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악하고 요동치는 성질이 있다. 무언가를 파악하고 규정지으려는 성격이 있는 이놈은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내게 별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자고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고요하고 파도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만 살아온 바, 고통이란 즉 마음이 별의별 문제에 좌충우돌하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자아란 것이 아무래도 뇌에 있는 것 같으니,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뇌를 통과한 것들은 무엇이건 불가해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개념이란 것은 회의하고 회의하다보면 도대체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분명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는데, 말했다시피 자아가 난제를 새겨 넣는다. 그리하여 그 어지러움에 분노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복잡한 사람들이 복잡한 단체를 만들어 복잡한 행위를 하고 복잡한 결과를 내는 것을 보고 있는 복잡한 나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젠장, 사실 나만 복잡하지 않으면 전부 소멸하는 일들이다.
 쓰레기통을 보면서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이것이 태초부터 쓰레기통이라고 규정지어져 있던 것은 아니니까 정말로 쓰레기통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하는 쓰레기통보다 잘날 것도 없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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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

기록/생각 2019. 12. 26. 23:23 |

인류애


 세상이 겨울안개 가득 먹어서 도무지 눈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안개는 구름과 같으나 저의 온몸을 덮고 감각기관조차 성하지 않게 만듭니다.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릴 때면 늘 하늘을 보곤 합니다. 하늘이라는 것도 도대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름철 대낮의 하늘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푸르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러나 겨울이 되면 푸름조차 잿빛으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이 잿빛이어서,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담배를 하나 태우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다 연기가 잘못된 관으로 스며들어가면 구역질을 하다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눈이 내리든 내리지 않든 그것을 머리 위에 가득 쌓으며 그래도 할 일을 하러 갑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사람들은 행복을 찾고 즐거움을 찾으며 저 멀고먼 도시에서 쾌락을 계산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잿빛 눈이 내리는 이 자리에서 멀고먼 도시를 한 번 생각해보고 나면, 그들은 밑바닥에 닿을 리 없는 절벽으로 희희낙락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산에서 그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인류애가 없다는 이유로 눈물도 없는 울음을 지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요. 그러나 75억 인류가 단숨에 사라지든 서울 사람들이 단박에 절명하든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도 아이러니와 고통이지요.
 그래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온갖 부조리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만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자면 저는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마구 뛰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잿빛이면 잿빛인대로 침잠하고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잿빛 하늘 아래 순진무구한 자가 죽음을 맞는 것을 반개한 눈동자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아, 사랑이라니, 왜 그것이 제게 없었을까요. 서정이라느니, 고백이라느니……. 그런 것을 진심으로 내어 사람들에게, ‘아, 그렇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저는 그 오랜 시간을 텍스트의 미궁 속에서 헤매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당신들이 존재할 정당성이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몸을 하고 인간의 영혼으로 혼자서 중얼중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의 희망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온 세상 인류가 모두 절멸해도 저는 저의 어린 남동생만은 살아있기를 바라기에,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활발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저는 당신들을 사랑할지도 모를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는 하는 것입니다.
 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당신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들을 사랑함으로서 위대한 작품을 써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희망조차 아닙니다. 경험주의적으로 생각해볼 법도 합니다. 지금까지 생을 살며 단 한 번도 당신들, 인류를 사랑해본 일이 없었기에, 제가 써왔던 작품들은 모독과 증오의 결정이었지요. 그러나 만약 하나의 힌트로 말미암아 당신들 인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위대한 작품을 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것을 전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아직까지도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과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도 저는 도무지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다 쓰러진 노인을 보고도 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동정이요, 공감이요, 물론 말하자면, 저는 몇 번이고 걸인들에게 밥을 사주었으나, 이미 죽음이 확정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결정했으니, 내가 상관할 바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합리해도, 부조리해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더라도, 인간의 보편성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길가에서 쓰러진 노인은 심장이 마비되어 죽어가고, 하늘은 잿빛이었기에, 그렇기에. 그래서 한참을 잿빛 하늘을 보곤 했습니다. 잿빛 눈이 떨어져 내리는, 잿빛 하늘을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인간을 모두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원을 가지고, 지금은 이렇게 어둠 속에서 잿빛 담배연기를 피워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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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거대했던 착각


 심장이 멈출 만큼 커피를 마셔댔습니다. 카페인에 깊게 잠기면 어둠은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보이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눈이 돌아가 쓰러질 것 같지만 도무지 쓰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아, 그러네요. 이것이 제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터져 넘어질 것 같지만 악으로 오기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언제일까요? 어쩐지 태어날 적부터 저의 후뇌에 죽음이 머슴처럼 빗자루를 쓸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하게 죽고자 했던 것은 13살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저는 거리에 있었지요.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마냥 걷고만 있었습니다. 한강의 어느 철교 밑 굴다리에 앉았을 때, 그때 저는 생각하고만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때는 지옥 같은 여름이었지요. 한강의 물결조차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죽어 아무 소리도 빛깔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납덩어리 같은 배낭을 잠시 내려놓으며, 아하, 이와 같이 순식간에 편해질 것이로구나, 그랬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음이 사라지고, 걷거나 뛰는 시민들의 모습은 유령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왜 단박에 죽지 못했는지 그 이유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14살이 되어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역자의 실력이 엉망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심지어 중역이었던 것인지, 그런 카뮈의 <이방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로서 저는 13살의 어린 제가 단숨에 죽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 받은 것입니다. 죽음은 혼돈에 의해 움직이는 운명이 자애롭게―그러나 가득한 악의로!― 부여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아무것도 없더라도 살아가고야 마는구나. 그러면서 제 책장은 20세기 유럽이 되어갔습니다. 그것을 제가 자살하지 않는 방편으로 삼으면서 말입니다. 살아가야한다, 살아가야한다, 비록 고통과 악의뿐일지라도, 신도 법칙도 없는 세상에서 저는 피를 토할 듯이 세상에 몸뚱어리를 던졌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그런 삶은 인간이 취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영혼에서 도덕이니 규칙이니 하는 것이 도시 위에 쬐는 햇살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갔습니다. 건물과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산산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인간도 무엇도 아니고, 감각의 덩어리가 되어 부조리와 혼란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악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가오는 미풍에도 온몸이 박살날 만큼 유약해져서는, 그러나 결코 손톱과 송곳니를 감추지 않는 증오의 현신처럼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10년이고 15년이고 계속 되었습니다. 믿을 것은 참으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은 채 10년이고 15년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지도 않고. 그러나 ‘억’하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 ‘억’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직전에, 15년 간 눈치 채지 못했던 삶의 허점을 발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운명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없다면, 미학도 감각도 결코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런 전제를 가지고서는, 도무지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살아간다니, 도대체 죽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15년을 지탱해준 것은 사실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악의와 증오, 그리고 스스로 의미 없는 혼돈이 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산중이었습니다. 이 모든 죽음과의 뒤엉긴 춤사위 끝에도 어딘가에 영혼은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쉬이 절대성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는 없을 일입니다. 그런 것은 언어로 하기에는 너무도 불가사의하고 미묘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세상도 자아도 너무도 거대한 착각이었고,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 절규하며 죽으려하는 파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그치면 파도는 어차피 가라앉을 텐데요. 정말로, 그럴 터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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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의 추억

기록/생각 2019. 11. 8. 13:33 |

전학의 추억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10살 때였을까요. 저는 가족들을 따라 의정부로 이사가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아파트 단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혼돈으로,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수도 없이 서있는 미로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문제가 된 것은 전학수속을 마친 뒤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처음 등교하는 학교로 가, 수업을 마치고 보니 이것이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단지 안의 어떤 건물이 나의 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별 도리가 없어 하교하기 전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니, 그녀는 아무래도 제 신상기록을 뒤져본 모양입니다만, 아무튼 간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반 친구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 아이는 10살치고도 유난히 키가 작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땋아준 것으로 보이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 참 그녀는 그 작은 체구에 놀라운 성질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말투며 주변 일에 흔들리지 않는 무관심한 성정하며, 저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나와 같은 나이의 어린애가 그런 성격이라는 점에 놀라워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간 선생님이 알려준 동과 호의 숫자를 되뇌며 제 앞에서 따박따박 걷기 시작하는 작은 여자애를 따라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선생님과 그녀가 나를 자기 집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로 안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때는 아마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리 덥지도 않은 황금빛 광선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기억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시각에 집중되어있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를 잘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도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엔진이 울리는 것 같은 아련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니까요. 하여 도로의 회색이 되어가는 콜타르라든가, 거의 칠이 벗겨진 횡단보도의 흰 줄이라든가, 그 위에서 아른거리는 태양의 흔적들 따위만 저의 어린 시절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당시 저는 귓속에 점액이 차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요. 그저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을 뿐입니다. 여하간 제 앞에는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정수리에서 뒤통수를 지나는 직선의 선으로 두피가 보이는 작은 아이가 놀라울 만치 곧은 자세로 거리를 걷고, 저는 그것에 감탄하면서 마르고 흰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그때도 저는 몹시 시력이 나빴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나이부터 독서에 열중해 밤에도 성치 않은 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돌이켜보면 우스운 장면인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도 뭣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몸짓이 똑바르고 당당한, 저보다 한참 키가 작은 여자아이를, 나이에 비해 뇌수만 비대해져 창백하고 비쩍 마른 키 큰 남자아이가 주춤주춤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코미디의 한 장면 같습니다만, 어린아이의 의식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발달하지 않아 희극이나 비극을 구분할 필요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가, 삼백 몇 동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 건물 안에서 소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더니, 감탄스럽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해. 넌 2층이야.>하고 말입니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상냥했지만 마치 군인의 강령처럼 완벽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단지까지 오는 동안 그녀가 뭔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니, 말했을 리가 없겠지요. 그런 소녀가 길을 가는 와중에 사사로운 잡담을 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하여 처음으로 소녀의 목소리를 똑바로 듣고, 이 작은 아이에 대해 놀라워하면서, 사마귀처럼 긴 사지를 가진 저는 털벅털벅 2층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 모험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왔니>하며 무관심하게 반겨주고, 저는 여전히 그 소녀의 놀라운 성질에 대해 감탄하며 벙 찐 표정으로 멍하니 현관에 서있었더랬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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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가능했던 일들 중 하나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게 독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는지라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밤에는 겨울비가 살짝 내렸습니다. 빗방울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할 무렵 마음이 들떠 밖에 나가, 혹시 내가 중랑천에 닿을 때쯤이면 폭우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내쳐 걸었습니다. 폭우에 사납게 변해 사람이고 자동차고 전부 집어삼킬 듯 발광하는 강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것입니다. 보고 있으면 스스로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뛰어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랑천에 도착했을 무렵 겨울비는 이미 그쳐있었고, 그 시답잖은 내천은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실개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뜀박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기는커녕 그런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 치졸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입니다만, 실개천이 광천狂川이 된다한들 도무지 혼자서는 못 뛰어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별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수치와 민폐로만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정말로 우연히 한반도에 내동댕이쳐진 내 목숨은 누구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사랑도 받아봤고 사랑도 해봤습니다만, 그런 것은 지나고 나면 별달리 중요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냥 지나가버리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람이야 맞부딪힐 때는 시원하기도 하고 광풍 같아 두렵기도 한 것입니다만, 실제로 바람에 맞아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든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것은 결국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의 의미니 가치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을 찾겠다고 광란하여 흔히 문학이라고 하는 활자의 지옥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로 지옥에는 고통과 절규만 있을 뿐 구원 같은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스스로 지옥에 빠져 광란하는 동안 현세의 저는 주변인들에게 민폐와 상처만 주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미 이마에는 생활무능력자라는 빛나는 이름이 박혀있고 사람들은 벌레 쫓듯이 저를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유감이라면 유감일 일이지만, 저는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해 버렸던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절벽이나 능선 간의 흔들다리나 비에 불어 요동치는 강을 찾아다니게 된 것은 당연한 일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스스로에게도 수치스러운 바,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비가 내리거나 뉴스의 기상정보에서 폭풍이라도 온다고 하면 마음이 들뜨고 마는 것입니다. 굳이 죽을 자리를 찾고 있다는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렵니다. 정확히는, 죽을 자리를 찾는다기보다는 죽음이 들쥐를 채가는 매처럼 저를 채 가주지 않을까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제도 겨울비에 이끌려 중랑천에 갔습니다만, 반복하건데 도무지 혼자는 죽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욕해주십시오. 매도하고 발로 걷어차 주십시오. 아직까지 고독이라는 이기심을 품고 있다는 점을, 부디 영원만세 십자가 위에 매달고 비웃어주십시오. 사랑도 받아봤고 사랑도 해봤다고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소견으로 그것들은 아무래도 사랑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뭔지는 사실 모릅니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가 좁은 문에서 피워놓았던 그런 사랑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찾기만 하면 제 저주받은 영혼도 충만감을 갖고 고독에서 벗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나 또 제가 알고 있는 진실은, 제행무상 성자필쇠라고, 현세에 영원한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을 찾기만 하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곧장 울부짖는 강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호운을 빌어주시되, 제 이기심과 뒤틀린 정신을 욕하는 것도 잊지 말아주십시오. 단 한 번도 독자를 가져본 일이 없는 이 작가 나부랭이는 마침내 방랑하는 인생의 답을 찾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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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도대체 왜 그 많은 전업작가들을 제치고 저에게 오신 건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듣자하니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시라고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18살이라, 학생이시군요. 참 좋을 때입니다. 틀림없이 온갖 감성과 영감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머릿속에서 번쩍거릴 테지요. 영감과 직관에 이끌려 투박하게 쓴 글조차 젊음의 수액을 머금어 빛나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천재의 조각들을 품고 있지요. 서론이 길었군요. 당신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을 제 별것 아닌 소견으로 해소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영어도 불어도 노어도 아닌 한글로 글을 쓰고 계시지요? 예, 아마도 그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타국어에 능통해 현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과 타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결국 아가씨께서는 한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게 되실 것입니다. 무어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놓인 조건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뿐이죠. 소설가가 꿈이 아가씨, 분명 온갖 서점을 매일처럼 드나들다보면, 입구에서부터 화려하게 쌓여있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될 목적으로 출판된 책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보게 되실 겁니다. 눈과 귀를 잘 이용하세요, 문학소녀 아가씨.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가씨를 문학의 세계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어린 시절, 압도적인 문장과 울부짖는 존재와 때때로 달이나 혹은 태양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당신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버린 것은 어떤 한 권의 책이었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였습니까? 알베르 카뮈였나요? 뇌수를 뒤틀리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였습니까? 현인 헤르만 헷세였습니까?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의 차갑고 축축한 손길이었습니까? 분명 무엇이든 있었겠지요. 문학소녀 아가씨. 그런데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아니 뭐라고! 절대 죽지 않는, 세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활자 속에서 영생을 얻은 그들이 죽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반복하여 말하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죽었습니다. 굳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지엽적으로 죽었습니다. 이야기를 잠깐 되돌려보죠 18세의 빛나는 아가씨. 그 대형서점들의 프런트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던 책들이, 방금 말한 사망한 작가들과 같은 절대성을 갖고 있던가요? 그 책들이 시대를 초월해 영생하던가요? 사상과 서술만으로 나라 하나를 뒤엎던가요?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책들은 현시대를 위해 공급된 소비물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가치가 없는 것이 어디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아가씨, 시대정신은 개인을 위대하게도 만들고 혹은 파멸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나라를 잘 살펴보세요. 극단화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실험대로서 쓰이고 있는 이 땅의 21세기를 잘 살펴보세요. 사람들은 지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으며, 연속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자본을 취득하지 않으면 그런 의문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사고를 취소합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인간실존으로서의 존재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기업―비단 국어사전에서의 기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의 부품이 되어갑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대함을 좇을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턱없이 가난한 존재의 조건 속에서 짧은 안도나 쾌락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게 됩니다. 소확행, 워라밸, 이런 신조어들은 사실 인간을 치유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게 된 부품들을 타협시키는 말입니다.

 실존을 상실하고, 개인이 파괴된, 과거 인간이었던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부품들은 이제 두 가지 선택밖에 하지 못합니다. 공급하거나 소비하거나, 그것뿐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가씨,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아가씨, 작가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입니다. 그 단어는 이제 <콘텐츠 공급자>로 전환됩니다. 공급과 소비의 상관관계는 학교에서 배우셨겠지요. 콘텐츠 공급자는 말 그대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자인만큼, 수요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와 행동을 겸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콘텐츠는 소비됩니다. 근대에 예술이라는 개념이 가졌던 특권은 소멸하였고, 안 그래도 이미 끔찍하게 지쳐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처절한 마주봄이 아니라 결말 없는 위안입니다.

 제 20대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전 이런 것들을 이해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제 난도질당한 <문학>에 가격표를 붙여달라고 오기 속으로 부르짖었으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런 실패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자 오셨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그러나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은 알려 드렸습니다. 저는 가끔 스스로를 <아직도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한 시대착오자>라고 천천히 읊어보기도 합니다! 하여간 명백한 객관에 의하면 저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 글쟁이입니다. 당신과 나의 이 만남이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군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그저 제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빛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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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울지 않는 매미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매미는 없지요. 빗물이 뚝뚝 듣는 한여름의 새벽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비非생존자라고. 생존자들의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살입니다. 생존하는 것들만이 자살할 수 있지요. 그들에게는 사고와, 비관과, 회의와, 합리적인 절망이 허락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빠르고 간단하게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특권이죠.


 세 시간 전부터 여기에 앉아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하늘이 붕 뜬 가래 같은 색깔에서 남청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태양이 뜨기 시작하면 제 피부 색깔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이 황인종의 마른 피부는 아무리 봐도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직관되는 거예요. 만약 뾰족한 바늘의 개념을 가져다대면 육신 전체가 미약한 소음과 함께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환각과도 같은 믿음이 날 지배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고대의 사망자이기 때문에 바늘의 개념idea 같은 것은 가져올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황야 위에 떠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타르거품입니다.


 거품에게 즉각적인 자살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고하는 것도 비관하는 것도 회의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순차적이지 않고, 논리가 없으며, 한 덩어리로 사악하게 뒤섞인 혼란 그 자체입니다. 생존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드렸던가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믿음이든, 단 하나의 믿음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예를 들어 신념 같은, 삶의 조건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단 하나의 끄트머리라도 있다면, 인간은 충분히 생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녹슨 톱니바퀴라고 할지언정 계속 작동합니다.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자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연결된 다른 톱니바퀴, 나사, 볼트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 톱니바퀴의 극단적인 자기파괴 또한 찬란한 절망과 함께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절망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첫 발걸음이고, 생명에의 믿음이 없으면 의미 따위는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 시간 째 여기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는 바, 비非생존자들에게도 자살의 방편 정도는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재떨이에 떨어진 담뱃재들이 자신을 흐트러트리고 파괴할 바람을 기다리는 것과 동일한 방편입니다. 아주 길고 느리며, 끔찍이도 수동적이고, 죽음에 대한 기대조차 하지 않는 자살, 그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일찍이 <흡족한 마음으로 더 바랄 것 없이 완전하게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고 나타나엘에게 말했습니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 문장인지요.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에 우리는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고 썼던 H. 노바크 시절에는 이렇게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태양에 반항하여 리볼버를 발사할 수 있었던 때라면, 아아, 그러나 지금은.


 껍질 안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껍질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니체의 말은 철학자의 고상하고 멋 부린 한 구절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언이고 저주였습니다. 심연은 다름 아닌 이 꿈같은 현실에 수도 없이 깔려있고, 인간본성은 그것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합니다. 그야 알고 싶지 않습니까? 심연이라는 것의 진실을 말입니다. 짐승들은 피할 것입니다. 짐승들은 공포의 본질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도망쳐버리지요. 인간은 이상해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마치 자멸로의 행로가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 같습니다. 감히 말하건데 인간은 생물실격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연의 진실은 굉장히 입체적입니다만, 제 본성에 맞는 면을 발견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아마 지금쯤 당신은 저를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 정도로 착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심연 속의 진실의 한 면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허무나 개개인의 실존조차 압도하는 엄청난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고 공격하는 악의들이 혼재된 괴상망측한 의미들의 덩어리였고, 집합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지평이었으며, 또한 영원히 서로를 반사하는 마주본 거울이었습니다. 그것은 꿈도 아니었고 현실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꿈이나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실재하는 허구였습니다. 우주만물의 평등한 무가치를 가리키는 그것은, 혼돈이었습니다.


 이로써 저의 두서없고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당신께서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제가 자신을 비非생존자라는 생소한 단어로 설명했는지, 왜 입을 떼자마자 자살 운운하더니 능동적으로 자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질투했는지 따위를 말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앞뒤가 맞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저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저는 이것을 계속 피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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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6일부터 3월 18일까지

시 전시회 [존재비애: 인간존재의 선험적 공허에 대한 몰두와 노스탤지어]가 개최됩니다.


약도에 표시된 '아트갤러리 카페 어스피셔스'와 같은 건물 1층의 '하나빈 팩토리'에서 동시 진행하며, 12:00부터 20:00까지 오픈합니다.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된 시들과 영상작품으로 만들어진 산문시등이 전시되며, 2017년 발표한 장편소설 [광기와 사랑]과 1층 하나빈 팩토리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기념하여 발매한 프리미엄 더치커피도 한정 판매하고 있습니다.


첫 전시회라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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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Tumblbug에서 장편소설 <광기와 사랑> 출간을 위한 펀딩을 진행중입니다.


https://www.tumblbug.com/madnessand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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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기록/생각 2016. 5. 28. 05:33 |

 옳아 나는 모든 이들을 내 삶에서 쫓아낼 작정인 것이다. 이제야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내가 이타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것은 더러운 자기합리화다. 그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녀를 나로부터 떠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다. 내가 모든 이들이 나로부터 떠나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아주 진부하면서도 새로운 것이다. 내가 얼마나 좆되있는지, 가닥을 잡았다.

 분명 나도 태어날 때부터 망가져 있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온갖 정신의학 학파들과 가설과 치료방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녕 나는 그것들을 전부 내 영혼에 맞춰볼 셈인가? 이제와서 이성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내 입으로 말할 수나 있는가? 물론 의사들의 말도 맞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내 치졸한 자아가 너무 소중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든, 내 어린시절이 지랄 같은 비명과 흉터들로 가득해서 이렇게 됐든,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적어도 스스로의 존재를 양심에 호소할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부터 내가 걸어다니는, 나이프와 전기톱을 조합해 만든 괴상하고 끔찍스러운 오브제가 됐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나는 고독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비극이다. 나는 사람들이 가엾다. 그래서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다. 아! 방금 모든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의식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독하게도 우습다. 내 일생이 나의 무의식에 의하여 스스로를 파괴하고 격리해왔던 것이다! 그것도 인간애를 위하여! 나는 스스로를 가장 혐오스러운 어떤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날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 안의 벌레들을 보여주어 쫓아냈다. 그간 외로움에 허덕이면서 왜 내가 외로운지 자문해 왔는데, 이 고독은 나라는 놈이 만들어 놓은 나의 격리병동이었다. 나는 너무 일찍 피냄새에 구토했다.

 오 아냐. 드디어 알겠다. <나>는 실체가 아니었다. <나>는 가장 끔찍한 입체영상이었다. 금연홍보영상에 나오는 모자이크도 가해지지 않은 폐암 수술장면처럼, <나>는 무언가에 의해 의도된 교훈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리둥절한 채,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망쳐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명확한, 그리고 올바른 것이었다.

 역겨운 자기연민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야한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서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되고 싶지만 인간이 될 수 없다면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 치료될 수 없는 병마는 희생자만 만들 뿐이지, 그 병마라는 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미친 놈은 어디에도 없다. 하하! 내가 받을 것은 바로 노벨평화상이다. 나는 기특하게도 스스로 물러나는 역병이다.

 당신의 손이 바늘과 송곳과 단도로 만들어져있고 거기에 수은이 흐른다면 외롭더라도 그 누구의 손도 잡아서는 안 된다. 잡을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아 제기랄.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감상주의자들이었는데.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오해하는 것조차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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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되지 않음.

기록/생각 2016. 4. 24. 09:26 |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자판을 두드리면서 뭔가를 써내려가고 있는데

내가 뭘 하는지는 정말로 모르겠어.

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만드는데 통달했지

시(詩)라는 이름으로 내 자질을 과시해댔어.

그런데 문장이 아름답다는 게 도대체 무슨 대수람.

단순히 예쁜 문장과 추한 문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학의 잣대에 대해서 말이야.

나 자신에 대한 몰이해가 점점 깊은 구덩이처럼 되어가.

흘러내리는 물줄기 때문에 계속 깊어지기만 하는.

모든 미학이라고 하니까 말인데,

사실은 모든 것을 다 미학으로 덮어씌울 수 있어.

예를 들어 지나가는 노숙자를 넘어트리고

망치로 그의 머리를 계속 내리쳐 두개골을 깨트려도

그리고 깨진 두개골을 꺼내 계속 빻아 가루로 만들어도

경찰들에게 행위예술일 뿐이었다고 주장해도 돼.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널 정신병원에 처넣겠지만.

중요한건 행위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내면에 있는 미학적 감각에 의하여

그건 행위예술이 되는 거지. 경찰도 그걸 바꿀 순 없어.

정신병동 남자 간호사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미안, 방금 전에 신경안정제랑 항우울제를 잔뜩 먹었거든.

정신이 좀 몽롱해.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나는 글만 쓰는 인간쓰레기야.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내게서 글 쓰는 능력만 제한다면

다른 내 모든 부분들은 그저 쓸모없는 똥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거지.

난 인성도 더럽고 도덕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어.

심지어는 생산적인 삶을 이어갈 원동력도 없어.

자기비하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니까…….

차라리 글 쓰는 것보다 노숙자 머리통을 망치로 깨는 전문가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딱히 노숙자 머리통만 깨진 않을 거야. 세상과

자본주의와 계급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분노로

일단 보이는 대로 망치를 휘두르다가 사형당하겠지.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게 언제더라.

아무튼 나도 노력을 하기는 했어. 성경도 공부하고 쿠란도 읽고

불교경전도 잔뜩 읽었어. 읽고 연구하고 공부했어.

왜, 종교란 인간정신과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화잖아.

그래서 나도 그 인간정신이라는 걸 좀 공부해보려고 했는데

많은 객관적 사실들은 알게 되었지만

나한테는 별 도움이 안됐어.

예수님도 석가세존도 심지어 모하메드조차도.

어쩌면 절반정도는 내 잘못이지

애당초 기대도 안했거든.

그들의 인생은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없었어.

그러니까…… 염병할,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요새 지구 곳곳에서 대형 지진이 일어나던데

어쩌면 내가 나 자신에게 어리둥절해있을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안 남았을 지도.

아, 그래도 글은 계속 쓸 거야.

그게 의미가 있든 없든, 사실은 글을 쓰는 게

항분열제를 한 움큼 집어삼키는 것보다 효과가 좋거든.

세 시간 정도 열 내면서 작문에 집중한 뒤에는

한 30분 정도 평온한 기분이 들어. 약도 필요 없지.

내가 말하면서도 요점이 뭔지 모르겠다.

만약에 63빌딩이나 그에 준할만한 사회적 상징물을

온통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발라놓고 성냥불을 던진다면

글을 안 써도 될 텐데. 더 이상 창조가 필요 없는 시대잖아.

차라리 뭔가 부수는 게 더 생산적일지도 몰라.

파괴가 생산적인 것이라니,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되네.

근데 실제로 그래. 이미 모든 게 다 말이 안 돼.

모르겠다. 약용 모르핀 성분이 내 혈관을 여기저기

걸어다니는 게 느껴져서 더는 못 깨있겠어.

한 천 년 쯤 잠들었다가 황무지 한복판에서 깨어나면 좋을텐데.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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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사족입니다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문학계에 몸을 담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10년간 단 한 번의 공모전 수상도, 신춘문예 당선도, 심지어는 약소문예지에서의 데뷔조차 없었습니다.(이 점은 다소 이상한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네의 문예지 공모전에 제 시가 당선되었다면서 출판비와 문단 등단비 60만원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사회와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19,20세기의 유럽문학과 소련문학에만 빠져 살았으며

현시대의 대한민국이라는 인간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말살 행위를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몰이해적 괴물에 잡아먹혀 미술관에 배설물을 전시하는 상황에 처했으며, 문학은 <순수>나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들은 모조리 목이 잘리고 국제경제의 위험과 더불어 텍스트가 혁명을 일으키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텍스트에 기반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제 텍스트는 오락행위를 위한 도구이고, 소위 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연한 자위물에 불과합니다.

한때는 고전문학의 부활을 바랐습니다. 가죽자켓을 입은 록커들이 클래시컬 뮤직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아 현대적 멜로디로 재해석하고, 미술은 더 이상 몰이해를 자극해 돈을 버는 것을 그만두고 인상파의 근원으로 재탐구해가고, 문학은 그저 오래된 책장에서 잠들어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를 비롯한 온갖 문학사상들이 현대에 재해석되어 인간정신의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권력(니체적 의미의)을 갖는 텍스트가 탄생하기를 바랐습니다.


아! 제가 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하실 겁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문학에 쏟아부은 결과, 저는 말그대로 사회적 쓰레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글 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도 없는, 돈도 없고 노동력도 없고 시답지않은 정신질환에 휘둘리는 야간활동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도대체 이 시대에 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고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아르튀르 랭보가 어떤 모습으로 펜을 꺾었는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의 습관처럼 강박적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찍어내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대-한국-독자들의 <Needs>를 충족시키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섹스와 바이올런스와 드러그와 알코올과 카페인과 온갖 말초적 쾌락으로 이루어져 꿈틀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저는 제 목을 겨냥하고 떨어질 단두대의 칼날만 기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제가 그 칼날을 희망했기에! 시인 로트레아몽 백작을 아십니까? 천박한 신분 주제에 파리로 올라와 자신을 <로뜨레아몽 백작>이라고 자칭하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산문시들을 뱉어내다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비로 출판한 <말도로르의 노래> 한 권만을 남기고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그것은 썩어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100년 뒤 어떤 초현실주의자가 파리 대도서관에서 그 낡아빠진 책을 발견하고 세상의 등불을 비췄습니다. 죽은지 100년이 넘어 로트레아몽 백작은 불현듯 천재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의 문학계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장황한 산문시를 분석하고 공부하고 찬탄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비록 이 시대가 쾌락만을 바라는 시대이기에 스스로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 저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죽은 뒤에라도 각광 받기를 바라서?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라는 이름의 책까지 낸 니체가 정신병원에 들어갈때까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유럽문단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 정작 프리드리히 니체는 격리병동에서 이식증에 걸려 자신의 배설물을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요. 천재라는 것은 실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양자역학적인 시각에서의 입자의 존재와 비슷합니다. 관측자가 입자를 관측했기 때문에 입자가 입자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것처럼, 천재 역시 독자가 작품을 읽고 영감을 느꼈을 때 그 작가는 천재가 될 가능성을 얻는 것입니다. 작가는 독자에 선행한다는 틀림없는 물리학적 진실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독자에 의해 재창조됩니다. 독자가 없어도 작가는 존재할 수 있지만, 독자가 없으면 작가는 관측자를 잃어버린 입자처럼 파동으로 변해 실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작품을, 아아! 더이상 작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할 것도 없이, 컨텐츠라고, 엔터테이먼트라고, 상품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1세기에 와서 구두제작공과 소설가는 똑같은 위치에 서고 말았습니다. 좋은 구두는 신었을 때 발이 편하고 걷기 좋듯이, 좋은 소설은 읽기 편하고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집단도 다수도 공권력도 국가도 사회도 인류도 아닙니다. 그냥 개인입니다. 개인의 필터로 개인의 사실을 개인의 진실로 만들어서 개인의 작품을 펴내는, 약하디 약한 개인입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문화적 종말은 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극단에 달해있고 말초적이 되고 만개한 꽃처럼 위태위태합니다. 다음 수순은, 분명히도 종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저는 돈을 벌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남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저의 멋있는 한 순간의 필치로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으면 합니다. 고전문학의 부활? 아, 이미 손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것도 모두의 손에서요! 너무 장황한 글이 되었군요.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느꼈던 빛의 덩어리 같은 충격,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미완유작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서 흐느껴 울었던 것. 그 과거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산산조각. 인류문화의 멸망이 가깝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처참하게 찢겨 죽었고, 다자이 오사무는 <중2병>이라는 손가락질에 지쳐 미치고 돌아버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입니다.

제 난도질 된 영혼의 값을 매겨주십시오.



항상 귀사의 번영과 성공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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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e - Bad Night

기록/음악 2014. 11. 29. 22:08 |



Somebody please stop these shitty, shitty 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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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기.

기록/생각 2014. 9. 4. 18:54 |

어제 뭉크전 보러 서초동까지 갔다가 비를 피해 찻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갈때부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엇이 좋지 않았냐 하면 입구부터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빈공간에 여유롭게 채워넣은 조각들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난 친구와 함께 어정어정 들어가서 의자에 앉으려는데 유니폼 입은 점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에 앉으시지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 좆됐어.' 그리고 어정어정 점원이 소개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차분한 공기는 사람들 차나 마시라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쪽팔림 무릅쓰고 점원에게 다가가 메뉴판이나 한번 보자고 하였다. 커피 한 잔에 육천오백 원이었다. 시바. 나는 친구 셔츠 잡아당기며 찻집 밖으로 도망쳤다. 시바. 자본주의가 날 울게 만든다. 누나 나는 맑스나 배우러 가야할까봐요. 사람들이 육천오백 원짜리 커피 때문에 날 빨갱이라고 부르더라도 별 도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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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길로 가야하는 지를 모르겠는 것이 아니라, 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목적지는 눈에 보이나, 그것은 도달점이 아닌 황량하고 고독한 드넓은 영역이기에, 나는 방위를 헤매고 마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인지 잃어버린 뒤로, 나는 대단원 없는 비극의 위를 계속해서 걷고 있다.
 나는 부서지고 깎이며 고독과 고통에 비명지르고 있지만, 한 모금의 물을 갈구하는 지독한 갈증 때문에 더 이상 제동장치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한 모금의 물>이라는 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나를 더욱 옥죄어온다.
 때로는 목표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괴롭다. 나는 포기하거나 그만 둘 수도 없는 탓이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는 것 외에는 아무 방도도 없다.
 내 영혼은 항상 금단증상에 허덕인다. 그것의 욕구를 채워줄 약물이 어디에도 없는 까닭이다.
 오로지 깊디 깊은 고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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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일. 장편소설 <광기와 사랑> 초고 완성.
A4용지 102페이지. 200자 원고지 948장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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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마음 같은 것은 바란 일도 없다. 잠깐의 짐승으로도 좋았다. 잠깐의 짐승이라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마치 태풍이나 지진처럼. 나에게 무슨 이름이 붙여지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의지도 없는 천재지변이었더라면 불만도 모르고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철창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이 너무 멀다. 내 정수리에 영혼의 눈을 달아둔 덕분에 이 짓도 그만 둘수가 없다. 뼈와 살점과 함께 웃으면서 터지는 폭발물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죽음이 어머니라는 것을 발견할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기라는 개념이 부여되지 않는 현상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거추장스럽고 무겁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또 내일이 온다. 또 생명이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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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분명 그녀가 마지막이었으리라. 내가 고독이라는 독액을 내 팔뚝의 굵은 동맥에 주사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이어질 일이다. 나는 어제 갑작스럽게-니코틴이 나의 정신을 맑게 했기 때문이리라- 신의 이름을 알아냈다. 나는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그 비밀스럽고 끔찍한 이름은 나의 노트에 아무도 모르게 적혀있다. 지난 반년간 단 한 번도 자해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의 가슴에 난 수도 없는 흉측한 흉터들은 아직도 가끔 피와 진물을 흘린다. 내 서랍에 잠들어있는 단도는 언제나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나는 그것을 쥐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손에 쥐지 않아도 그 날붙이는 밤새 서랍에서 기어나와 나의 심장에 흠집을 낸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쉬웠었지.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믿지 않아도 되었었지. 나는 어둠 속에서 난동을 부린다. 내가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파멸적인 믿음에 빠져서. 그때 나는 태초의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간 쌓여온 벽이 Pink의 결말처럼 가차없이 부서졌었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비극이다. 나는 비명지르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것만으로 부서졌던 드높은 벽은, 내가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칠때마다 보다 높고, 보다 두껍고, 보다 단단한 형태로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이제 나는 수십 겹의 장갑을 낀 손으로만 인간을 만진다. 감히 말하건데, 그녀 앞에서 나는 어린애였노라. 수십 년의 절망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앞에서 그러한 상처들은 차라리 축복으로 보였었다! 그래, 모든 운명은 파멸을 종용한다. 그녀와의 만남조차도 내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위한 무대장치였던 것이다. 이제 태양의 빛은 더욱 작게 보인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가슴에 나는 나의 길다랗고 신성모독적인 손톱을 박아넣고 싶다. 그리고 온갖 환상들이 외쳐대는 환희에 대하여-나는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나는 저주, 저주, 저주한다. 아주 조금 어른이 되었을 뿐인데도 세계는 전보다 더 두터운 갑옷을 차려입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밤하늘에서 어둠을 뜯어내어 내 옷을 해입었다. 내 마음 속에서 날뛰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열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불꽃처럼 일렁이는 증오와, 자신의 손목에 박아넣기 전에 망설임과 공포 때문에 떨리는 단도 뿐이다. 나의 야망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모든 이들의 파멸이다. 나는 빌딩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불타 죽는 것을 보고 싶다. 더 이상 신이 재앙을 내리지 않는 세계에서 망치와 칼을 들어야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일지어다. 어쩌면 나는 계시를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길고 끈질기게 나의 영혼을 점령해온 계시를 말이다. 그들이 믿는 규율의 붕괴 속에서 나는 최고의 환희를 맛볼 것이다. 어떠한 윤리도 도덕도 없는 세계에서 나는 인간이 절대로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새로운 법칙에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내 손톱이 갈퀴였고 내 송곳니가 나이프와 같았던 그 과거를-그 무구한 과거를 기억해내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고독이라는 고통에 몸을 떨지만 그것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고통받는 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나는 고통을 나눠주는 것으로 존재한다. 언젠가 내 어깨에는 날개가 솟겠지. 해골로 된 왕이여, 그대는 틀림없이 웃고 있을 것이다.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올랐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순간에야말로 인생이 정신 속에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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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쳤다.

기록/생각 2013. 8. 7. 05:04 |
그만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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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잔상을 남기며 굴러다니는 눈알이 보인다. 하늘에는 천둥소리: 분명 밤에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한. 내 방의 벽들은 두껍지만 나는 그 너머에 있는 사물들의 유령을 볼 수 있다. 약 여섯 시간 전부터 누군가가 내 귓가에 계속 속삭이고 있다. 그녀는 여자다. 그리고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나는 수 년 전의 지옥으로 돌아간다. 여기에는 웃음이 남았다. 그러니까 끔찍한 침묵과 자학 끝에 남는 것은 오직 합선된 정신과 웃음 뿐이다. 모든 것이 다 쉬워졌다. 번쩍거리는 사람들과 고양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그들이 외치는 것을 듣는다. <내 몸을 잘게 썰어줘.> 그렇다, 그대들의 욕망, 그리고 나의 욕망. 아니, 나는 욕망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욕망한다. 거울에 비친 내 마음을 보면 이천오백 년 전에 죽은 성인의 말마디들이 송곳으로 새긴 흉터처럼 드러나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의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는데, 모든 것들이 엉망으로 뒤섞이고 각자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몇 번 정도 웃었다. 내 감정이 분열되는 것을 느낀다. 조각조각, 몇 가지 색깔들로 반짝이면서, 그리고 저쪽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친구였던 광기가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덟 살 때였던가? 나는 어둠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새벽 두 시 쯤에 바깥으로 나가 가로등도 켜지지 않은 시골의 밤길에 앉아 몇 시간을 기다렸다. 뭘 기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나는 태양이 지독히도 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그 뿌리는 공허와 허무를 먹으며 새싹과 꽃을 피우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살기도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허무의 뒷면이 바로 자유라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손에 칼과 총이 쥐여졌다. 마침내 단 하나의 명확한 진실이 보였다. 광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고 동시에 모든 것의 목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내 심장을 갈비뼈 바깥으로 꺼내려고 몇 번인가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자살시도자들을 증오했고 내 가슴에 남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 몇 개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운아가 되려고 했다. 행운아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기보다 타인을 죽일 수 있을 만큼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을 칭한다. 나는 텔레비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욕하고 짓밟는 범죄자들과 눈을 마주친다. 그들의 이기심과 폭력성과 반사회성은 시원한 샘물이 되어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땅 속에 구멍을 파고 잠들어있는 매미 유충과 닮았다. 그러나 우화, 우화, 우화, 우화, 그리고 마침내 노래. 노래. 노래는 중요한 것이다. 누구나 노래를 하다가 죽어야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노래하지 않고 죽어간다. 노래하지 않는 매미는 의미가 없다. 니체가 말했던 것을 떠올려라. 우리 모두의 손톱과 송곳니가 충분히 날카롭고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복수란, 복수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복수 또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행한 악행에 대한 복수가 돌아오고 돌아오고 대물림 되어 나에게까지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의를 버려야한다. 그리고 내 손을 충동과 혼돈에게 맡겨버려야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나의 가슴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광기가 세계를 축복할 것이다. 곳곳에 잘려나간 살점들이 반짝이고, 그 반짝임 속에서 새로운 우상이 걸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상이 신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들의 피와 뼈로 새로운 아이돌을 조각해내겠지. 그러면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윤리에 걸맞는 행복 같은 것은 소위 성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입을 열었던 그 순간에 모두 목이 졸려 죽었으니까. 그러므로 행복이란 바로 붕괴에 있다. 모두가 더는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을 때, 불행과 고통과 혼돈의 구렁텅이 속으로 스스로 걸어내려가, 나락 밑바닥에서 전 인류와 만나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의 손에는 날카롭고 오래된 흉기가 들려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본성을 되찾고 죽음 속에서 희희낙락하면서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광기가 언제나 웃음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더욱 즐겁게 만들 것이다. 더욱 즐겁게. 더욱 즐겁게. 마침내 우리의 영혼이 죄악과 피로 물든 시궁창을 초월하여 불경하게=위대하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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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꿈은 아름답다는 이유에서 잔혹하다. 그리고 누가 날 배신하든, 배신하지 않든,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노력할 것이다. 최소한 내가 산업폐기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증명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저 끝에서 꿈과 초월적인 절망이, 아니 그것은 사실 초월적이지 않다... 아무튼 그것들이 번쩍거리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 보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란 다분히 폭력적이고 교만하며 위선과 허식으로 가득하다. 나는 단순히 분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내게 향하고 있는 그 칼날들,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잊어버리는 일이지만 내 손에도 칼이 한 자루 쥐여져있다. 나는 증오하고, 또 증오한다. 이 모든 조건과 상황들 말이다. 빌어먹을 현실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꿈을, 꿈을 꾸었던 것인데, 그것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다분히 현실도피적이고 환각적이었다. 구원이라는 허상을 위해서 나는 한 인간을 이용해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기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의 기만이다. 만약에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경악할 범죄행위가 저질러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겠지. 다음에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나는 이제 지쳤다. 인간성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매달려있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 그러니까 죽거나 죽이거나, 포기하거나 미치거나... 선택 가능한 폭은 별로 넓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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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명백한.

기록/생각 2013. 6. 22. 00:06 |
자, 꿈은 끝났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잠시 나에게 얼굴을 보였다가 그대로 질식해서 죽어버렸다. 나의 오랜 친구들이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고 속삭였다. 나는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이 환한 곳에서는 고통이 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관념의 흉기로 다시 내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방식이라고, 이전에도 나는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영감이 나를 지배했다. 인간적 정신과 괴물적 정신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자주 발견되는 그것이, 잡아먹을 듯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 결국 나를 살게 할 셈이란 말이지?> 나는 몹시 웃으면서 지껄였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우스워졌다. 내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어떤 불행도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내 가슴에 광증이라는 이름의 못을 하나 더 박아넣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다 편안해졌다...... 이 분열된 시야도, 심장을 찢는 고통도,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은 고독도, 수십 개로 나뉘어 서로 논쟁을 벌이는 정신도, 내 주변에서 뛰노는 환각들도 다시 나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나약한 놈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가치관마저 붕괴되고 나면 나약하고 나약하지 않고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죄악감과 수치도 광기의 문 안에서 유린당하고 소멸할 것이다. 나는 다시 선량한 이들이 사는 집의 창문가에서 비열한 유혹을 던지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기 마련이다. 죽음이라는 시커먼 구덩이는 모든 개념과 형상들을 집어삼켜버린다. 삶과 자유는 손에 들린 흉기와 같다. 저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 나는 기꺼히 받아들이리라. 모든 죄는 벌을 끌어들인다.

*

(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세계가 꽃과 나무와 번쩍이는 빛살과 이슬이 맺힌 풀들로 찬란하게 빛났었습니다. 나는 인간의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고 최초로 인간의 눈동자와 마주했으며 나의 광증은 피안의 저편에서 내밀어져온 손길에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운명의 무자비한 의도를 알겠습니까? 나의 희망은 내가 막 가지게 된 신성한 세계를 집어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산 꼭데기에 올라갔고 이제 뛰어내린다고 중얼거리면서 온 몸의 뼈가 부서진 시체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의 오랜 친구인 광기가 나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헤로인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좋아, 안 될 것 없지. 나는 이미 여러번 죽었어. 삶 같은 것은 믿지 않았어. 내게는 여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두 손이 있고, 법칙의 진짜 이름은 태초부터 혼돈이었어.
나는 환희에 차서 낄낄 웃었습니다! 그 환희는 예전에도 몇 번이나 맛본 적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차라리 내 생명의 원동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봐, 그래서 너는 고통의 어깨를 감싸안았군! 너는 우리 모두를 친구로 삼고 사랑할 작정이야! 불행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나는 잠깐이나마 인간이 되었었지만, 그것은 꿈의 거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울을 보니 온몸에 흉터가 새겨진 정신불구자가 서있었습니다. 나는 자지러지게 웃었습니다. 그것은 환각이었어. 망가진 자는 영원히 고독할지니!
한때 찬란하고 붉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하늘을 보았습니다. 정다운 어머니인 죽음이 상냥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내가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살갑게 알렸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하는 일을 도와줄 것입니다. 당신이 부지런히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심장을 빼어갈 때, 나는 열광적으로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비참! 비참! 그러나 그것이 무슨 대수람? 그것은 당신의 부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은 고통과 고독과 비참과 허무와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않는 소름끼치는 욕지거리들입니다! 모두 함께 웃읍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가 아닙니까?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인 자유가 우리의 심장을 중독시켜버리지 않았습니까? 나의 허파에는 끔찍한 술이 가득 차서 내 머리는 취해버렸고 온갖 즐거운 환상들이 잔치를 벌이며 서로에게 칼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아! 잡설은 그만 둡시다. 요는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자비로운 손길을 보십시오. 쾌락과 관능과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무자비한 손길을 보십시오. 우리는 무상 아래서 춤을 춥니다! 그것이 본질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는 수십 년간 지옥에서 살다가, 잠시 인간도로 끌어올려졌다가, 이제는 가슴에 수라의 얼굴을 품은 괴기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환영의 박수로 나를 맞아주십시오. 너무 깊은 꿈이었고 너무 짧은 꿈이었습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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