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이야기는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익숙하리라는, 어느 흔한 포장마차에서 시작된다. 오뎅과 군참새, 세 종류 정도의 술을 팔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장이 펄럭거리는 그곳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김’과 ‘안’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함께 술을 마신다. ‘김’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었으나 실패하고, 군 제대 후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안’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부잣집 아들로 ‘김’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파리를 사랑하느냐’,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등의 일견 관념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들이 지적 허영에 빠진 것인지 취기에 힘입어 진정 어린 대화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들 특유의, 취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모든 거짓을 배제하려는 이상한 결벽증을 작가는 장면마다 계속해서 묘사한다. ‘안’의 경우에는 손까지 잡아가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하고 재차 확인하곤 한다. ‘김’은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꺼내면 5분도 되지 않아 술자리가 끝나버린다는 ‘안’의 말을 듣고 어쩐지 이해할 것 같은 마음에 대화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자 곧 두 사람은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한 듯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화신 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트롤리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발견과 기억인 듯하다. 사람들로 가득하고 계획생산 된 도시에서, 모든 광경과 사건들은 공유되는 공공의 것이지만 사소한 디테일과 매일 달라지는 세밀한 차이는 그것을 발견한 개인만의 것이 된다. 직후 ‘안’이 늘어놓는 밤거리에 대한 다소 현학적인 설명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안’은 자신이 밤거리로 나오는 이유에 관해, 밝은 낮에는 사물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느낌이지만 밤이면 ‘사물들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밤이 되면 사물들은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생 미셸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관찰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안’은 낮이면 사물들 속에 끼어버리지만 말테는 늘 사물들로부터 타자가 되어 있는 부분인 듯하다.
 ‘안’의 현학적인 이야기에 ‘김’이 당황하자 그들은 밤에 느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뿌듯함’으로 타협한다. 의기투합한 그들이 제대로 된 가게에서 술자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로 술이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불을 쬐고 싶어 포장마차 안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자신도 돈이 얼마 있으니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술값만 있다면……’하고 승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일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거리로 나선다.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서 그들은 목표한 곳도 없이 걸어 다닌다. 그러던 중 삼십 줄의 사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이미 식사를 했다는 ‘김’과 ‘안’에게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게 음식을 권한다. ‘김’이 ‘그렇다면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켜도 되느냐’고 농담 삼아 물은 말에 사내는 선뜻 그렇게 하라며, ‘돈을 써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식사를 하며 사내는 조심스럽게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날 낮에 사내의 아내는 병으로 죽었다. 처갓집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친척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가난한 서적 월부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4,000원을 받고 병원에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사내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해 미안하다면서,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그는 돈을 오늘이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안’은 얼른 써버리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돈을 다 쓸 때까지 ‘김’과 ‘안’에게 함께 어울려달라고 청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데, 술에 만취한 세 인물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충동적인 구매를 할 때마다 ‘1,000원이 없어졌고’, ‘600원이 없어져 버렸다’, ‘300원이 없어졌다’ 하는 식의 서술이 인물들의 절박하면서도 무책임한 심리상태를 속도감 있게 표현한다. 그 후 지나가는 소방차를 발견한 그들은 택시를 잡아 소방차를 쫓는다. 이때 ‘안’은 불구경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창부를 사러 가자고 하는데, 작품 초반에서부터 보이는 ‘안’의 외설적인 것을 경시하면서도 호색한의 면모를 드러내는 모순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국 세 남자는 화재 현장에서 2층짜리 건물이 불타는 것을 구경한다. 이때 ‘김’은 그저 유심히 간판이 차례차례 타들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며, ‘안’은 화재란 공공연한 사건이기에 화재에 대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현학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만취해 불길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던 사내는 한동안 불구경을 하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돌과 함께 손수건에 싸서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다.
 이때부터 아내를 잃은 사내는 더 절박한 모습으로 변한다. ‘김’과 ‘안’에게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여관에 묵을 돈을 충당하기 위해 한밤중임에도 월부 책값을 받겠다고 책을 판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이는 본디 아내였던 것이 4,000원의 돈으로 변하고, 그 때문에 아내의 죽음 역시 4,000원의 돈으로 유보되었던 상태가 끝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제 닥쳐오는 현실에서 돈으로밖에는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내는 돈을 구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부탁해 ‘김’, ‘안’과 같은 여관으로 향한다. 사내는 계속해서 같은 방에서 머물자고 요구한다. ‘김’은 연민을 느껴 사내의 말대로 하려고 하지만 ‘안’은 여지도 주지 않고 각자 방에서 자야 한다고 결정한다. ‘김’은 계속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 듯, 화투라도 치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이때 ‘김’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내의 상태에 대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은 피로를 핑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김’도 이제는 너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안’은 급히 ‘김’을 깨운다, ‘안’은 대뜸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하고 말한다. 사내가 자살한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안’은 사내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노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김’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 여관에서 도망친다. ‘김’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잠시 기묘한 대화를 한다. ‘안’은 ‘김’에게 자신들이 분명히 스물다섯 살이 맞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서로가 스물다섯 살이 분명하다고 확인하는데, ‘안’은 무엇인가가 두렵다고,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김’은 그들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못 박아 말한다. 악수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진다. 버스를 탄 ‘김’이 차창 너머로, ‘안’이 눈을 맞으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히 인물들의 역할인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김’, ‘안’, 서른대여섯 정도의 사내, 이렇게 셋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김’은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초반에 ‘안’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들 때문에 ‘김’은 일견 순박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에서 단련되고 벼려진 이중적인 면모가 점점 돋보인다. 결말에서 사내가 자살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여러 번이나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러한 면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의 사건 때문에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에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시원스레 말할 수 있다는 점이 ‘김’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듯하다.
 반대로 ‘안’은 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이 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김’과 역할이 바뀌는 듯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내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는 대사는 체념 섞인 반성의 어조로 읽히기도 한다. 만약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면 사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안’은 그것을 알고서도 각자 방을 쓰도록 했다. 부유한 지식계층이 쉽게 취할만한 행동으로 보이고, ‘안’에게 어울리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는 자신이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는 아마도 사내의 비극과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강제적으로―겪게 된, 일상 속의 부조리와 그러한 경험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고찰일 듯하다. 이 하룻밤 사이의 사건에서 ‘김’이라는 스물다섯 살 청년은 이미 완벽하게 서울에 적응하여 단련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안’은 앞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변해갈 가능성을 보이는 듯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삼십 줄의 사내는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인다. 이 사내가 없이 ‘김’과 ‘안’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작품은 두 사람의 상념과 관념적이기만 한 대화로 끝나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내의 비극으로 인하여 소설은 기복을 갖게 되고 이야기로서 완결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며 나는 무엇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인지, 실존에 대한 고찰을 다루면서도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사건과 인물들이 역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은 단편소설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소설이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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