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자면 이제 경찰과 검사들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정신병원 진료기록을 체크할 것이다 그리고 유전형질에서부터 스스로 고통스럽다 못해 증오를 품게 될 이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개방병동에서 격리병동으로 격리병동에서 독방으로 독방에서 형무소로 형무소에서 교수대로 교수대에서 이 세상 밖으로 그들을 이동시켜 마침내 완전무결한 사회를 만들었노라고 청결한 가위로 테이프를 끊고 서로 악수하며 웃고 카메라 앞에 설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 뒤 우리는? 내가 품고 있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철저하게. 철저하게 미래지향적인 감정이다.
떨어지는 목들, 뭉개진 눈알, 크게 찢은 복부에 삽입되는 남근,
손톱 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잘게 썰린 고기와 뼈들, 정소를 절개해 꺼낸 정액들,
난소를 절개해 꺼낸 난자, 슬럿지 해머로 다져진 날고기, 혀가 제거된 남자들,
유방이 제거된 여자들, 창으로 벽에 꽂아놓은 고기인형들,
나이프로 벗겨 무두질도 하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 놓은 가죽 컬렉션들,
뇌수가 있던 자리에 맴도는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와 부화되는 알들,
자본주의가 들어찬 옆구리 살을 불에 굽는 냄새, 사회주의가 들어찬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었던 가죽주머니들이
좍좍 찢어져 안에 담고 있던 잡고기와 내장들을 쏟아내는 소리, 그 냄새,
드디어 나는 생살을 씹을 것이다. 내 치아들은 웃을 것이다.
마침내 나는 아침에도 웃을 것이다. 낮에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술에 취해 울지도 않고 담배도 끊을 것이다.
더는 어머니를 미워하지도 아버지를 애닳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날 이해하고 창고에 여기저기 흩어져있겠지.
내 유일한 피붙이 동생도, 내게 친절했던 사촌도, 내가 사랑했던 친가 가족들도,
내가 혐오했던 외가 가족들도, 내 몇 안 되는 사랑스런 친구들도,
매일 저녁 출근할 때마다 나에게 웃으며 인사했던 버스기사님도,
매일 술을 사러 가면 먼저 인사를 걸어왔던 마트 점장님도,
길가에서 스쳐지나갔던 모던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도,
멋지게 몸을 키워 자신만만하게 걷던 청년들도, 구청의 공무원들도,
길거리에 누운 노숙자와 거렁뱅이들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던 아주머니들도,
내게 한 없이 자상했던 스님들도, 어렸을 때 만났던 신부님들도,
예수님도,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도, 무함마드도, 성경도, 불경도, 쿠란도,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도, 죽음이 눈앞에 놓인 노인들도,
잘 생긴 이들도, 못 생긴 이들도, 젊은이들도, 중늙은이들도,
성자도 탕아도 부자도 빈민도 호모섹슈얼도 헤테로섹슈얼도 권력자도 피지배층도
전부 철저하게 분해되어 나의 세계에 피와 면도날을 증명할 것이다.
나는 손을 뻗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다 나는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처럼, 손가락이 나이프로 되어있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죄라고 말할 사람들은 널려있지만, 곧 그렇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스피린을 한통씩 삼키지도 않을 것이다. 쿠에티아핀푸마르, 바이코딘, 바르비투르산, 발리움, 디펜히드라민, 알프라졸람, 클로미프라민, 그 외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 많은 이름의 약들. 그것들을 나는 내다버리고도 멀쩡할 것이다.
부조리 철학에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것은 인간, 세계, 그리고 부조리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리란 군대에서 이등병이 자살하는 등의, 사회인들이 텔레비전 너머에서 욕설을 내뱉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설명컨대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개인이 되는 순간 세계는 인지되어 탄생한다. 그 세계는 개인의 밑이나 그림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적군이나 원수처럼 개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거대한 크기로 위협한다. 그러한 시선의 마찰에 불똥이 튀는 순간에 부조리라는 것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부조리-세계의 관계는 철저하게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것이고 약간의 조정이나 타협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사멸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존재한다.
서술을 약간 이르게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들은 근대에 출판된 철학논고들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부조리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불과하기에, 굳이 기다란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이 <개인>이 된다는 것은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개체로서 인지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이덴티티라고도 자아정체성이라고도 어떤 특정인의 페르소나의 집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태어난 뒤 막 눈을 뜬 갓난애의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그러나 자신과는 <다른> 오브젝트를, 즉 세계를 관찰하는 순간 인간은 세계라는 무지막지한 혼돈의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차별화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도 쉬우면서 동시에 엄청난 것이다. 인간의 오감 중 하나만 있다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계를 <감지>하고 그것이 <내가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은 개인의 발생이며 동시에 개인-세계라는 통렬한 마주봄의 시작이다. 사실상 인간이 자신의 영혼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굳이 발 벗고 나서 자아라는 것을 찾을 일조차도 없는 것이다. 당장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일 하나 하나가 전부 세계에 대한 마찰행위인 것이다. 그 세계에 만족 하는가 불만족 하는가 하는 사고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이미 세계를 <적>으로 삼도록 설계되어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 앞으로 평생 인간의 영혼을 떨리게 만들 부조리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개인이 될 때 세계는 인지되어 개인의 적이 되고 그 끝없는 마찰로 말미암아 부조리가 탄생한다.
사실은 이 처절한 삼자관계가 이미 인간개인의 정체성의 기본이다. 특질이나 개성 같은 것들은 그 위에 건축되는 것이다. <나는 나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이것만으로 개인은 이미 존재(인지)한다. 그리고 인간이 사고를 시작했을 때, 마찰은 거의 극적으로 속도가 빨라진다. 인간의 기본정신은 논리와 로고스(이것을 신이라고도 부른다)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청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는 전혀 논리정연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는 전혀 논리정연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아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농장에서는 생물들이 경제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고 세상 곳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전쟁과 학살들이 터진다. 태양은 식어가고 인류의 정신은 열화 되어가고 근거를 알 수 없는 범죄들이 사회를 잠식해간다. 아, 이 시점에서 당신은 <그래도 이 우주는 논리와 수학을 기반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물리학적인 시점에서 보면 세계는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다. 그리고 그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이 말하기를,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우주는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말미암아 결국 엔트로피 수치가 최대치가 되어 굳어버릴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결말도 인간의 논리에게 수긍할만한가? 바꿔 말하자면,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극단적으로 철저하고 논리적으로 무자비하고 무의미하고 무작위한 것이다. 불행과 불안은 비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하게 쏟아져 내린다. 모든 일들은 잠입자가 설치한 폭탄처럼 아무렇게나 터져대고 막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보통, 이 사회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와 마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질로 말미암아 그들의 세계와 그들 자신 사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부조리가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비극이나 죽음에 몇 번 탄식하고 말 뿐, 일반적으로 그들의 영혼은 부조리와 분노와 고통으로 난도질당해 울부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예시들을 갖고 있다. 굳이 내가 근대 예술가들이나 철학가들의 이름을 논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근대 최고의 지성이었음에도 미쳐 격리병동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먹던 프리드리히 니체. 100년의 시간을 앞서간 초현실주의 시인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정신분열병자였던 로트레아몽 백작. 스스로를 인류사회와 격리시키고 미학추구에만 일생을 바치다 정신병동으로 걸어 들어간 빈센트 반 고흐. 프랑스 문단을 뒤집어엎은 작품을 쓰고 고작 21살에 절필을 선언, 아프리카에서 외다리로 죽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 신동이라 불렸지만 탄생 십구 년 만에 사망한 소설가 레몽 라디게.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이 세상과 마찰한다는 것은 단순 문장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큰 영혼의 소모가 필요하다. 병사(病死)로 죽은 것마저 정신의 극적인 피로로 해석하는 것을 비약으로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만큼, 그리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세상과 삶의 불똥 튀는 마찰은 영혼에 기괴한 흉터를 남긴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광기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만일 인간에게 충분한 시야만 있다면 개인은 내가 말한 세상의 무자비, 무의미, 무가치, 무작위, 그리고 잔혹함을 눈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수긍할 것인가 반항할 것인가를 말이다. 사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 타고난 선험적 기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알베르 카뮈의 평생의 작품 주제이자 동시에 그의 저작 제목이기도한 ‘반항하는 인간’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태어난다. 긴말이 필요 없이 수긍할 자는 수긍하고 반항할 자는 반항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자가 창조적 특성을 갖고 있다면, 그는 이미 세계에 대항할 한 자루의 짧지만 예리한 검을 쥐고 있는 것이다. 긴 서술에 들어가기 전에, 수긍하는 자들이 어떤 인생을 사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눈을 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건강한 일이다! 자신이 부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그의 정신건강에는 옳은 일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것이다. 한 때 보았던 혼돈과 광기의 아가리를 기억 밑바닥에 묻어버리려 애를 쓰며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편안히 잠들 것이다. 사람을 믿고 신을 믿고 법칙을 믿으며, 세계의 부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날 때부터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지성은 세계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창조성은 새로운 세계로의 추구를 위한 것이며 그들의 육체는 오로지 익사하기 직전까지 절망적인 헤엄을 계속하기 위한 향일성의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앞에 뚜렷이 보이는 세계라는 사랑스러운 적(敵)에게 예리한 단도를 조준할 수밖에 없다. 마찰은 깊고 빨라지고 튀는 불꽃이 반항인의 심장을 지진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부조리라는 현상을 그는 촉각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도 그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져들 수 없다.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단도에는 녹이 슬지 않는다. 이제 죽음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삶만이 그의 존재의 주제다. 그리고 삶이란 곧 전쟁이 된다. 오로지 나와 세계라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방불케 하는 불리하고 패배가 확실한 전쟁이 말이다. 옳아, 승리란 없다. 인간은 죽는다. 세계는 남는다. 이 전투의 끝에는 그저 패배밖에 없다. 그것을 쭈뼛거리며 털이 일어서는 피부로 알고 있음에도 반항인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필멸자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안정도 안심도 사랑도 희망도 다 목을 그어버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위버멘쉬(Uebermensch).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는 죽음 외에도 한계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광기의 아가리는 너무도 크고 흉폭하다. 그에 비해 인간의 영혼은 한정적이고 쉽게 상처 입는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일지라도, 들끓는 적개심과 혼돈의 한복판에서 평생을 싸우다보면 영혼은 흉터투성이가 되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다. 자기의문과 회의,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 이제껏 손에 묻히고 마셔왔던 나와 너의 피.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기만하듯이 내려다보는 거대한 세계. 피폐해진 몸과 마음. 문뜩 손을 보니,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굳은 피와 한 자루의 단도밖에 없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둔감한 인간들은 도대체 그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괴물. 세계, 세상, 부조리, 게다가 인류집단, 그들의 문화. 구원도 도움도 없이 이어져온 이 싸움은 도저히 영웅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평생을 건 자기파괴다……. 아, 그가 잠깐 떨더니 무릎을 꿇는다. 마침내 그는 패배하고야 말았나? 아니야!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그가 다시 일어섰으니까.
긍정.
이 세계 그 무엇보다도 궤멸적이고 기괴한 긍정. 사람들의 수긍과는 180도 다른 곳에 떨어진 긍정. 다시 일어선 그 반항인의 얼굴은 더 이상 진지한 분노도 고통도 새겨져있지 않다. 그는 웃고 있다! 우주만물이 그저 질 나쁜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염세주의도 아니고, 실존주의도 아니야. 이건 ~ism조차 아니야. 더 이상 그의 정신 속에는 비극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이란 잘 설계된 블랙 코미디다.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건물 속에서 불타 죽어도, 독재자와 군벌이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고 약소부족을 학살해도, 유조선이 폭발해 태평양이 시꺼멓게 변해도. 이것은 죄다 배꼽을 쥐게 하는 농담거리다. 지금까지 고통과 절망으로 흉이 져있던 그의 영혼이, 이제는 고통과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의 선(Line)이 방향을 바꾸고 뒤틀려버렸다. 모든 일들이 너무 명증하게 와 닿은 결과, 모든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도 않고 절망스럽지도 않다. 광기가 치유제가 되었다. 이제 절대로, 그 무엇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없다. 세상만사가 음담패설 같은 웃기는 일이고, 중요하거나 특별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그더러 왜 모든 일에 조소만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건 조소조차 아니다. 당신은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존재조차 아닙니다. 당신은 잠깐 부풀었다 터져버리는 거품방울이고, 파라핀 속에서 연소되는 불꽃같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거대한 쓰레기통에 버려진, 금세 썩어 부패하고 불이 잘 붙는 가연성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10년간 단 한 번의 공모전 수상도, 신춘문예 당선도, 심지어는 약소문예지에서의 데뷔조차 없었습니다.(이 점은 다소 이상한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네의 문예지 공모전에 제 시가 당선되었다면서 출판비와 문단 등단비 60만원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사회와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19,20세기의 유럽문학과 소련문학에만 빠져 살았으며
현시대의 대한민국이라는 인간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말살 행위를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몰이해적 괴물에 잡아먹혀 미술관에 배설물을 전시하는 상황에 처했으며, 문학은 <순수>나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들은 모조리 목이 잘리고 국제경제의 위험과 더불어 텍스트가 혁명을 일으키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텍스트에 기반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제 텍스트는 오락행위를 위한 도구이고, 소위 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연한 자위물에 불과합니다.
한때는 고전문학의 부활을 바랐습니다. 가죽자켓을 입은 록커들이 클래시컬 뮤직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아 현대적 멜로디로 재해석하고, 미술은 더 이상 몰이해를 자극해 돈을 버는 것을 그만두고 인상파의 근원으로 재탐구해가고, 문학은 그저 오래된 책장에서 잠들어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를 비롯한 온갖 문학사상들이 현대에 재해석되어 인간정신의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권력(니체적 의미의)을 갖는 텍스트가 탄생하기를 바랐습니다.
아! 제가 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하실 겁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문학에 쏟아부은 결과, 저는 말그대로 사회적 쓰레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글 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도 없는, 돈도 없고 노동력도 없고 시답지않은 정신질환에 휘둘리는 야간활동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도대체 이 시대에 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고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아르튀르 랭보가 어떤 모습으로 펜을 꺾었는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의 습관처럼 강박적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찍어내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대-한국-독자들의 <Needs>를 충족시키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섹스와 바이올런스와 드러그와 알코올과 카페인과 온갖 말초적 쾌락으로 이루어져 꿈틀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저는 제 목을 겨냥하고 떨어질 단두대의 칼날만 기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제가 그 칼날을 희망했기에! 시인 로트레아몽 백작을 아십니까? 천박한 신분 주제에 파리로 올라와 자신을 <로뜨레아몽 백작>이라고 자칭하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산문시들을 뱉어내다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비로 출판한 <말도로르의 노래> 한 권만을 남기고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그것은 썩어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100년 뒤 어떤 초현실주의자가 파리 대도서관에서 그 낡아빠진 책을 발견하고 세상의 등불을 비췄습니다. 죽은지 100년이 넘어 로트레아몽 백작은 불현듯 천재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의 문학계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장황한 산문시를 분석하고 공부하고 찬탄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비록 이 시대가 쾌락만을 바라는 시대이기에 스스로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 저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죽은 뒤에라도 각광 받기를 바라서?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라는 이름의 책까지 낸 니체가 정신병원에 들어갈때까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유럽문단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 정작 프리드리히 니체는 격리병동에서 이식증에 걸려 자신의 배설물을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요. 천재라는 것은 실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양자역학적인 시각에서의 입자의 존재와 비슷합니다. 관측자가 입자를 관측했기 때문에 입자가 입자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것처럼, 천재 역시 독자가 작품을 읽고 영감을 느꼈을 때 그 작가는 천재가 될 가능성을 얻는 것입니다. 작가는 독자에 선행한다는 틀림없는 물리학적 진실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독자에 의해 재창조됩니다. 독자가 없어도 작가는 존재할 수 있지만, 독자가 없으면 작가는 관측자를 잃어버린 입자처럼 파동으로 변해 실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작품을, 아아! 더이상 작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할 것도 없이, 컨텐츠라고, 엔터테이먼트라고, 상품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1세기에 와서 구두제작공과 소설가는 똑같은 위치에 서고 말았습니다. 좋은 구두는 신었을 때 발이 편하고 걷기 좋듯이, 좋은 소설은 읽기 편하고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집단도 다수도 공권력도 국가도 사회도 인류도 아닙니다. 그냥 개인입니다. 개인의 필터로 개인의 사실을 개인의 진실로 만들어서 개인의 작품을 펴내는, 약하디 약한 개인입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문화적 종말은 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극단에 달해있고 말초적이 되고 만개한 꽃처럼 위태위태합니다. 다음 수순은, 분명히도 종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저는 돈을 벌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남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저의 멋있는 한 순간의 필치로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으면 합니다. 고전문학의 부활? 아, 이미 손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것도 모두의 손에서요! 너무 장황한 글이 되었군요.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느꼈던 빛의 덩어리 같은 충격,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미완유작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서 흐느껴 울었던 것. 그 과거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산산조각. 인류문화의 멸망이 가깝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처참하게 찢겨 죽었고, 다자이 오사무는 <중2병>이라는 손가락질에 지쳐 미치고 돌아버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입니다.
구역질이 나. 내 아빠, 엄마는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는 섹스를 했지.
사실 난 차라리 교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그 단어에는
이유 모를 역겨움이 묻어있거든. 나는 잘못 착상되었어.
어린 시절 과학 시간에, 사마귀 암컷은 교미 직후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배우고
많이 울었지. 수컷은 왜 반격조차 안 했을까? 왜 자신의 정자로 들어찬
암컷의 배를 찢어버리지 않았을까?
아, 그냥 신경 꺼! 네 혈관에 헤로인이라도 주사하도록 해.
정말로 눈을 뜨고 세계를 본다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니까,
그냥 네 현금카드로 코카인 가루나 곱게 다지도록 해. 그것도 일종의 수음행위지.
혼돈 속에서 혼자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니까 괴로운 거야. 하늘을 봐, 하늘을 봐,
운명이라는 카오스가 아무렇게나 광기를 던져대고 있어.
<네 뇌를 설득시켜. 세상만사가 켜졌다 꺼지는 불꽃이라는 걸 알고 나면, 비극도 비극으로 보이지 않을 거야. 살인마들은 살인을 하는 게 일이고, 강간마들은 강간을 하는 게 일이고, 지금도 바깥사람들이 울고 외치고 지랄하며 바닥에 뒹구는 이유가, 애들 소꿉장난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점화! 그런데 내 양심은 어딜 간 거야?
―처음부터 없었어. 바보 같으니!
아! 노래를 하니 기분이 좀 낫군. 음악이라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오물투성이가 되었지.
빌어먹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우리는 모두 혼자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어.
만일 네가 누군가와 연결된다면, 그건 네가 누군가에게 침입하거나, 혹은 침입 당했다는 얘기야. 무슨 소린고 하니, 즉 죽음에 이른다는 말이지.
세계는 그냥 세계야. 아무 의미도 없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단어는 세 가지 뿐이야.
무작위.
무자비.
무의미.
그거 세 가지면 너도 세계를 만들 수 있어. 개미굴에 물을 붓듯이.
저 소리가 들려? 대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소리야. 이천 년 전부터 계속 말야. 웃어! 웃어!
나는 공공연한 마약밀매상과 같았다. 나와 조금이라도 손끝이 닿았던 이들은 모두 내게서 값도 치루지 않고 비참을 사갔다. 그러나 나는 잃을 것이 없었노라. 그들이 사간 비참은 모두 나의 커다란 광기와 비참이 교미하여 만들어낸 복제품들이었으니. 내가 뱃속에서 키우는 벌레들이 남의 입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비참은 나의 길고 음탕한 혀를 타고 돌아다녔다.
꿈과 현실이 겹쳐 보이고 밤마다 내 눈앞에 목이 잘린 나체의 여자가 나타날 때부터, 나는 나의 선조들에 대해 추측해보았다. 그들도 밤에 활개치고 다니는 끔찍한 환각을 보았을까? 아, 나는 일그러지고 무너진다. 도시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온 도시가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과 같다. 짤랑이는 죄악의 은화들과 온 거리를 핥고 다니는 네온의 빛들, 나는 저주한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저주한다. 그러나 저주한다고 해서 무얼? 나는 결국 걸쭉한 액체로 변해 하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정말로 어머니가 갖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였지? 아 그래,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숲의 마녀였어. 아직도 애니미즘의 입김으로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늙은 숲의 마녀. 내 지네 같은 혈액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데 나의 선조들은 모두 두개골 속에 딱딱한 벌레들을 키우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내가 고뇌에 빠지게 놔둬라! 내 삶은 이미 고뇌로 인해 구겨진 쓰레기 뭉치와 같다. 내 오만을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를!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나는 끝에서 끝으로 끊임없이 오고 갔다. 물론 깨달은 것도 있었다. 이성이 사람의 목을 벤다는 것을 비롯한 독약 같은 진실들을. 나는 아무것도 그러쥐지 않았다-나는 내 손을 부정했다. 비대한 정신은 사회에게 부정당했다. 백석 시인은 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리. 그냥 내버려 두어라! 내가 스스로 만든 고통에 왜곡되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미치광이가 되어, 익사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나는 결단코 구원을 바라지 않으리라. 차라리 고통이 내게 편안한 것을. 세상에 산재하는 적들은 내가 나의 손으로 만든 적들보다 훨씬 약하며 머릿수도 적다. 그런데 왜 나의 부정당한 손은 바깥으로 뻗고야 마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동정으로 나의 손을 움켜쥐었다가 재가 되어 내 아가리 안으로 떨어지고야 마는지?
날붙이들이 내 귀 안으로 쑤시고 들어올 때 나는 식인종이 되었다. 그것은 증오 없이도 사람을 잡아먹는다. 분노 같은 것은 내 몸과 함께 늙어버렸고, 나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의 살을 주워 먹었다. 이제 나는 그대들을 증오하고 싶어도 증오하지 못한다. 반복컨대,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분노의 함성과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는 거리를 보아도 내 눈동자는 피로의 핏발이 선 채로 공허만을 본다. 아아! 나는 당신들을 용서한 것도 아닌데……. 사회라는 이상한 개념은 내 속에서 범주를 잃어버렸다. 소리치지 말라!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아니, 아직이라니? 절대로 아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물지 않은 것들밖에는 없다.
나, 나, 나! 제발 그만! 부디 철두철미한 정신을!
그렇다. 내가 경외한 것들은 그런 강철 같은 우상들이 아니었던가? 우습지도 않은 일! 나는 피가 줄줄 쏟아지는 가죽부대가 되고 말았다. 전염병이 되고 말았다. 독벌레가 되고 말았다. 대양의 무게에 무너져가는 심해어가 되고 말았다. 자기연민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은 더욱 연민스러운 꼴을 보인다! 젠장, 아무도 없는 전방을 향하여 건배! 건배! 또 한 잔의 술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독주를!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나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고, 저주 받은 몸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머로 내 머리를 갈겨도 나는 또렷하게 사고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왜곡과 분열에 대한 사고를, 그 끔찍한, 답이 없는 수식을 나는 이성으로 풀고 있을 것이다. 어라, 그렇다면 나는 미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의 광기는 왜 이리도 명증한가? 모든 것에 그림자가 질 때 사물의 본질은 더욱 분명해진다. 내 시선은 분명하다. 나는 나의 광기 속에서 필사적인 이성으로 광기를 계산한다. 내 육신에는 이미 경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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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가워진 바람이 내 옷깃을 스칠 때마다 나는 경련한다. 나는 갈대밭에 쓰러지는 환각을 느낀다. 태양을 품어 냉랭한 갈댓잎들은 내 손과 얼굴에 온화한 상처를 새긴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 뜨고, 손을 짚어 일어나보면 시멘트와 콘크리트, 도시 사람들이 털어낸 담뱃재뿐. 나는 너무도 저주하다보니 이제 명확히 무엇을 저주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죽은 나무 옆에 앉아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싶을 뿐인데, 이곳에서는 풀 냄새는커녕 피 냄새도 나지 않는다. 분명 이 도시 사람들은 벽돌과 철을 먹으며 살겠지.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단 한 번도 이해해본 역사가 없다. 나는 눈의 자유를 뺏겼다. 태양이 보고 싶어 죽겠다. 이 땅의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기계장치로 된 발광패널이다. 나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왜 더 이상 교미할 수 없는가에 대한 훌륭한 근거이다. 리비도는 인간에게나 있는 것이다.
에로스를 잃으면 죽음의 환영이 펼쳐진다. 피부 위로 드러난 뼈, 연기 색깔 가죽, 벌린 입 속의 잘린 혀…… 기타 등등.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없다. 나에겐 아침조차 없다. 쾌락은 색깔을 잃어버리고 퇴폐 속에 침잠한다. 모든 것이 흑백사진으로 보이는 방 안에서 나는 춤을 출 기력도 잃었다. 내 혈관 속에 진짜 피가 돌았던 시절을 기억하는데, 그 기억에도 희뿌옇게 안개가 끼고 말았다. 젊음이여. 젊음이여. 젊음이여.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여인들을 볼 때 내 손에는 항상 나이프가 쥐여있다. 나는 약리학의 법칙에 따라 가죽과 고기로 된 남근을 잃어버리고 강철 날붙이와 가죽이 둘러진 손잡이로 된 남근을 쥐고 있다.
진리는 병자들에게 있다!
오, 나는 진리를 이야기했다. 혼돈! 무목적의 아나키즘, 분열된 사고, 왜곡된 감각, 무슨 수를 써도 부정할 수 없는 궤변, ism을 철저히 짓밟아 죽이는 Anti-ism! 세계는 전진한다! 앞으로 갓! 아무런 근거도 없이-앞으로, 갓! 모든 모럴은 절멸하리라.
독자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보여줄 것들은 그대들의 삶에 하등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나는 주로 죽음과 무의 안식을 노래하며, 증오로 바싹 날이 선 혀로 저주를 뿌리고, 그대들의 존재와 정신이 얼마나 경멸 받을만한 것인지를 논증한다. 나의 천성적으로 광폭한 성질에 말미암아 말 하건데 나는 이 노래를 쓰지 않았다면 구름조차 달을 가린 새까만 밤, 잘 벼린 단도를 하나 들고 직접 그대들의 침실로 숨어들어갔을 것이다. 예술과 중범죄가 한끝 차이라는 사실을 내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질겁한다! 오! 그러나 독자들이여, 세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무슨 이유로 새로운 세계를 종이 위에 만들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넘길 것인가?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갈증이 풀어진 일이 없다. 그것은 그대들이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으며 인간의 처절한 본성을 나타낼 때에만 풀어질 것이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참아왔다. 독충들이 드글거리는 것 같은 그대들의 세상에서 나는 양심이라는 한 올의 거미줄만도 못한 끈을 잡고 지금까지 참아왔다. 여러 번 나는 나의 눈물에 대해 논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슬픔에 의한 눈물을 흘린 역사가 단 한 번도 없음이라. 나의 눈물은 항상 분노, 증오와 함께 삐그덕삐그덕하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그대들은 모두 나의 원수여라! 삽으로 흉부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을 수반하는 나의 지병도, 그대들의 훌륭한 작품이다. 나는 그대들의 얼굴만 보아도 안구의 실핏줄이 터져버린다. 그 경멸, 조소, 비겁함, 악의, 기회주의,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그 떳떳함, 무지, 에고이즘이라니! 만일 내가 왕이었다면 내가 가장 먼저 내릴 명령은 전 국민에게 가스실로 모이라는 것이었을 터, 그러나 나는 왕이 아니다. 나는 이 사회라는 집단에서 가장 약하고 무가치한 글쟁이다. 보름의 금주로 나는 새로이 깨달았다. 나는 그대들을 한 없이 증오하지만, 그대들의 손가락질 한 번으로도 나는 죽어버린다. 껍질을, 더 단단한 등껍질을! 내가 숨은 채로 펜만 놀릴 수 있는 좁고 어두운 껍질을! 사실은 끝까지 숨어있어야 한다. 몇 번의 자살시도로도 이루지 못했던 죽음을 그대들에 의해 맞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지껄이고 있다. 내가 얼마나 그대들을, 그리고 그대들의 세상을 경멸하는지를 지껄이고 있다. 왜 그대들이 밤의 대양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지, 숲속을 활보하는 오래된 신에게 잡아먹혀야 하는지, 곡식과 석유가 떨어질 때 서로의 넓적다리 살을 찢어 먹어야 하는지! 선포하건데 나는 지쳤노라! 아름다운 문장과 시적인 메타포로 나의 증오를 가리는 일에 지쳤노라! 나는 증오한다. 나는 분노하고 저주하고 고통스럽다! 독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정말로 싫다. 내 글을 읽어줄, 그리고 읽어주지 않을 인간들이 너무나도 저주스럽다. 부디 오늘 밤에는 눈물로 담뱃불을 꺼트리지 않기를. 나는 아직도 온 세상이 불타는 광경이 보고 싶다.
K는 어리다. 하지만 어리다고 하여 아주 어린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에 있을 만큼 어리다. 신체적인 연령에 대한 설명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이 몸에 귀속된 것이니만큼 신체와 정신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도 아니다. 한때 그의 친구였던 이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젊은 피가 활개치고 다니기에 좋고, 상념과 망념이 여학생들의 손목에 한 줄씩 그어지는 계절.
K가 사는 단칸방과 마주한 건물의 일 층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K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처음에는 큰아버지의 심부름이라고만 하면 술과 담배를 아무 말 없이 팔아주는 곳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차한 거짓말도 더는 의미가 없다고 K는 생각함과 동시에, 이미 구멍가게의 그 늙고 병든 주인도 K가 도무지 미성년자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집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요 몇 년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큰아버지는 가끔 K의 집에 찾아오지만, 항상 K는 없거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실상 K는 그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밤새 거리를 헤매거나 담배연기로 가득 찬 단칸방에서 책을 읽는 K는 아침이 오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간다. 그리고 그는 등굣길의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멍하니, 그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가끔 어리둥절해 하며. 이따금 중학생 때 친구였던 이들이 와서 K에게 인사를 건넨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웃는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친구는 갈 길을 간다. K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머니가 다림질해준 교복을 입고 아침햇살 밑을 권태로운 듯이 걷는 그들은 왠지 아름다워 보일 것도 같다. K는 가끔 자신이 너무 빨리 젊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K는 헤르만 헷세가 위대한 작가라고 믿는다. K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가장 미학과 삶을 설득력 있게 접합시킨 작가였다. 그러나 K는 자신이 <미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조소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K는 단칸방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금세 방안을 가득 채우고 만다. 창문이 없는 관계로 담배연기는 방안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낮에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칠흑처럼 어두운 방안에서 K는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가끔씩 몇몇 문학작품들의 제목을 떠올린다. 데미안. 시계태엽오렌지, 호밀밭의 파수꾼, 지와 사랑, 꼬마철학자, 등등. 모두 주인공이 미성년인 작품들이다. 성장소설, 성장소설. K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을수록 현실은 점점 구차하고 패배주의적이 되어간다. K는 어리다. 아무도 그가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K 자신은? 글쎄, 모두가 고난을 겪지. 모두가 고난을 겪고 상황을 타계해나가지.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고들 하지. K는 어리다.
K는 삼 년째 이발을 하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빨래를 하려면 건물 공용 화장실에 가야하는데, K는 나프탈렌 냄새를 싫어한다. 정돈되지 않은 장발과 지저분한 수염에, 더럽고 구겨진 셔츠를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정도는 K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들의 부랑자를 보는듯한 시선이 희열이 된다.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시선이, 차라리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일이다. 얼마 전에도 K는 방안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병을 비웠을 때 눈물을 떨궜다. 탈출구도 없이 사방팔방이 꽉 막힌 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사실은 항상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알코올이라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감상주의자로 만들지 못하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제 K는 자신이 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지도 모른다. 왜 새벽마다 밖으로 나가 달에게 고함을 지르며 도시를 헤매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에는 길에서 잠드는 일이 많았다. 방안에서 혼자 술을 푸다보면 갑자기 바깥공기가 그리워지는 일이 많다.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갔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것이다. 여름에 K는 다섯 번이나 자신을 깨우러 온 경찰과 만났다. 매번 다른 경찰이 매번 K를 그의 단칸방까지 부축해주고,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방에 드러눕는 K를 보며 매번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깨물며 돌아갔다. 빌어먹을 놈의 술. K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말했듯이 그는 아침만 되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도대체 왜 그리로 가는지, K 자신이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학교 맞은편의 벤치에 주저앉아 맥주 따위를 마시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혼란과 몰이해의 눈으로 쳐다본다. 아! 저들의 저 기고만장하고 지루한 표정이란……. K는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는 사고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맥주를 위장에 쏟아 붓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줄담배를 피운다. 시간이 지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드물어질 무렵이면 K는 거의 기듯이 그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의 머릿속에는 젊음이라는 단어와 청춘이라는 단어가 오래된 네온사인처럼 번갈아가며 깜빡인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젊은 피>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팔뚝의 정맥을 그가 오래전부터 소지하고 있는 단도로 끊었다. 거의 새까맣게 보이는 피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피부 위로 흘러나왔다. 방바닥에 피가 점점 샘처럼 고이는 것을 보면서 K는 자리에 누웠다. 그는 한숨을 쉬었고, 누운 채로 담배를 물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아스라이 퍼지면서 빈혈기가 느껴졌다. K는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피 웅덩이에 던졌다. 그리고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출혈은 이미 멈췄고, 방바닥에 고인 작은 피 웅덩이는 말라붙어 끈적거리고 변색되어있었다. 젊은 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알고 있다. K는 영특한 아이다. 너무 영특한 아이라서, 세계가 무작위하고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가 <희망을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K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여러 번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지만 사고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를 굴리지 않고 산 밑에서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시지프스다. 심지어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K의 머릿속에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의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 말 그대로 작동을 멈춰버렸다. 아! 이제 K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아직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에서 구체적인 것들은 항상 서술이 아니라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K가 망가져 작동을 멈춘 장난감과 같다 하더라도, 그 주변의 상황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상황은 움직일 것이다. 변화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K는 독서와 니체에 대해 열광적으로 선교하는 어떤 일본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혁명은 텍스트로부터 비롯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외치고 있었다. K는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일본인들은 유난히 감성적인 열변을 잘 하는 종족이라고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 그 일본인이 말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K에게는 사실이 아니었다. K는 어렸을 때부터 텍스트에 둘러싸여 살아왔지만, 그의 정신에는 혁명 같은 것은 일어난 일이 없다. 오히려 고전문학이라는 것은 그의 인간성의 목을 잘라버렸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산산이 부숴버렸다. 분명 어떤 이들은 문학 속에서 감격과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K는 아니었다. K의 독서는 죽음 속에 빠져있었다. K의 독서는 타성이었다. 그가 왜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거의 미치광이 같은 독서로 머릿속에 쌓아놓은 지식들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현학적인 웅변가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햇볕 내리지 않는 단칸방에서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창백한 형광등을 켜놓고, 그 빛마저 몽롱하게 만들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그 무엇도 아닌 이유에 의해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K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 시였다.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가 영혼의 관절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책을 덮고 지갑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집 앞의 구멍가게로 들어가면서 K는 지갑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늙은 주인이 어서 오시라며 인사를 했다. K는 주인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그리고 그는 주류가 늘어선 냉장고 앞에 서서, 초록색 병에 담긴 최악의 술을 꺼냈다. 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을 기만하는 에틴알코올과 물과 아스파탐. 식민지 시대의 문화말살과 박정희 정권이 맥을 끊어놓은, 한국 양조문화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압생트 빛 상징. K는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문화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파괴되는 것이다. 근거나 사색도 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K는 그 최악의 술을 두 병 꺼내 계산대로 가져갔다. 주인은 거의 졸다시피 하며 말했다. “2200원.” K는 만 원짜리 한 장과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고 술을 검은 비닐봉투에 넣어들고 가게를 나왔다.
세상은 황혼의 빛깔로 물들어있었다. 그것은 계절의 색이었다. K는 한동안 그 자리에 말없이 서있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건물 너머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비명 같은 말마디가 흘러나왔다. “K!”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고 K는 생각했다. “K!”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골목 저편에서 어떤 중늙은이 남자가 K를 부르고 있었다. K는 멀리서 그의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랑곳 않고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K!” 그건 도대체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다. 나는 신문기자고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남자다. 나는 안톤 체호프다. 희망 가득한 갈매기에 대해 서사했으며 1904년에 사망했다. 나는 말 없는 화자다. 나의 페이지는 하얀 공백으로 이루어져있다. “K!”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다. 마을 변두리의 커다란 바위 밑에 내가 훔친 지폐다발과 패물들이 숨겨져 있다.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은둔 작가다. 좀머 씨는 나의…… “K!” 어느새 따라붙은 남자가 K의 어깨를 붙잡았다. K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넋이 나간 눈동자로, K는 헐떡거리는 그 중늙은이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반백의 머리, 깊고 익숙한 주름,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아주 옛날부터 보았던 것 같은 눈동자. “당신은 적어도 예순 살은 되었겠군요.” K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냐. 나 네 큰아버지 아니냐.” 아아, 맞다. 큰아버지가 피우던 담배 냄새가 이 사람에게서 난다. 담뱃갑에 대나무가 그려진 얇은 연초……. “큰아버지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K는 대뜸 물었다. 큰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내 남동생이 그의 아들을 내게 맡긴 이후로, 나는 이 조카와 단 한 번도 정상적인 회화를 해본 일이 없다. 애당초 나는 이 아이에게 단 한 마디의 충고나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그의 언어체계는 스스로 빠져든 고독에 말려들어가 엉망으로 뒤틀린 것 같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작은 전셋집에서도 사방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연초냄새와, 모든 것이 보류된 인생의 냄새가요. 나는 나의 혈족을 사랑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바로 저버렸습니다.” K는 떠들었다. K의 혀는 거의 항상 그의 통제 밖에 있었다. 마치 혀에 또 다른 중추신경이 있는 것처럼, 그 중추신경이 뇌와는 별개로 혀를 통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즉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것처럼, K의 시야는 모든 것이, 온통 뿌옇게 흐려있다. “네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아, 그럼! 분명 아버지는 내 걱정을 많이 할 것이다. 그의 걱정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섰을 때 그가 나를 이 마을로 보냈으니까. 매월 통장에 채워지는 30만원의 부성애와 함께 말이다. “모든 것이 똑같다고 전해주십시오. 이 행성에서 개인의 삶이란 단 한 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K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큰아버지와 마주본 채 중얼댔다. “어딜 가는 게야? 게다가 술까지 사들고!” 응당 분노해야할 때 K 주변의 어른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K에게는 그 어떤 질책도 그의 영혼을 슬쩍 비켜 가버린 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어디든 가야 합니다. 술은 내 수전증을 멎게 합니다. 담배는 내 고통을 연기처럼 흩트려 놓습니다. 하지만 정당화도 논리도 필요 없어요. 내 인생에서-아니 도대체, 내 인생이라는 것은 발음하기도 창피한 것이에요. 그러니 제발…… 아아, 아아아!” K는 갑자기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날숨과 비명은 나병환자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와 같았고, 도무지 그의 절망을 덜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절규 같았다. “아아! 내가 생각하게 만들지 마세요. 부디!” 그는 이제 손톱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할퀴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당황했고, 또한 슬펐다. 이 돌연변이 같은 놈. 우리 가계에서 어째 이런 놈이 태어났단 말인가? 이 조카라는 녀석은 도대체가 <인간>이 될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K의 이마에서 조그마한 핏방울이 흘렀다. 그것은 감상주의자의 눈물 대신 흐르는 듯 볼을 따라 턱에 닿아 방울졌다.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형님. 저는 아무것도 요청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목적하는 바도 없습니다. 실상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내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K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허무주의>라는 빈말을 꺼낼까봐 극도로 긴장해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언어라는 것은 오해하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 것을 부디 언어철학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려 털버덕 털버덕 아스팔트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가끔 부는 가을바람에 백발을 나부끼며 K의 뒷모습을 주시할 뿐이었다. 도무지 씻어낼 수 없는 찝찝함과 답이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기분이 뒤섞인 것 같았다. K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가 비닐봉투에서 소주를 하나 꺼내 뚜껑을 까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병나발을 불면서 코너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K의 큰아버지는 한참을 멀뚱히 서있었다. 그의 남동생에게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동생아, 3년 전에 너의 품을 떠난 네 아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다락방이 있는 침울한 골목을, 결국 황급히 떠나고야 말았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에 불과해요.”
“이름이 뭐냐니까요.” 경찰은 재차 물었다. 그 젊은 경찰의 얼굴에는 피로와 무관심이 벌써부터 새겨져있었다.
“아버지-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당신의 아들은-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정말로 아무것도……” K는 완전히 취해있었다. 그의 상태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굳이 비어로 말하자면 그는 술에 <꼴아>있었다. 그는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얼굴을 그러쥐고 있었고, 손톱에 찔린 피부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사십니까? 연락할 가족은 있으세요?” 경찰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담배를 한 대……” K는 말하면서 자신의 뒷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어요. 내-내 담배가 어디에 있죠?” 그는 이제 바지와 재킷의 호주머니를 전부 뒤지고 있었다. “사바세계의……”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날숨처럼 K가 중얼거렸다.
“좋아요. 담배 한 대 피우시면 정신이 좀 드실지도 모르니까, 자 여기, 밖에 나가서 피웁시다.” 경찰이 포기한 듯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하나 꺼내고 K의 어깨를 잡아 올리며 부축했다. 그들은 경찰서 바깥으로 주춤거리며 걸어 나왔다. 분명 경찰은 이 지저분한 수염과 엉클어진 장발의 주인공이 미성년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경찰은 K의 입에 값싼 국산담배 한 개비를 물려주었고, K가 고개를 끄떡거리자 성냥을 긁어 불을 붙여주었다. K는 경찰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깊게 연기를 빨아마셨다. 하늘에는 해가 중천이었고 가을인데도 더위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태양광선의 힘 때문인지 위장 속에서 들끓는 알코올의 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K는 코로 연기를 뿜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울 수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그러니까 이것은 메타포가 아니라, 내가 왜 경찰서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과거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현실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죠?” K가 물었다.
“당신은 중학교 앞의 벤치에 쓰러져있었어요. 주변에는 소주병이 몇 개 깨져있었고, 정신을 잃은 채로 계속 오물을 토해내는 걸 학교 수위가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세 번째예요.”
K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연기를 뿜었다. 그래, 과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아. 이 경찰도 내 주장을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담뱃재가 K의 셔츠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내 담-담배는 어디에 있죠?” K의 목소리는 의미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잃어버리신 모양이죠.” 경찰이 한숨을 쉬었다. “보세요, 술을 드시는 건 자유지만 애들 다니는 학교 앞에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에요.” “하하!” K는 반사적으로 건조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누가 어른이라는 거야? 이 사람은 내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미래를 봤어. “그림자” 같은 죽음“의 환영이” 내 “머리맡”을 싸돌아다닐 “때” 나는 “내 미”래를 봤“어.”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과 똑같은 색깔의 담배연기. 위로. 위로. 위로. 더 높게. 모든 것은 불에 태우면 위로 올라간다. “난 돌아가야겠어요.” K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꽁초를 쥐며 말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주소를 불러주세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분 뒤에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갈지도 모르니까. “난 주소에 살지 않아요…….” 그러면서 K는 경찰을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주차된 경찰차들 사이로 걸어갔다. 태양이 너무 심하게 번쩍였고 가을 공기는 세상에다 불에 달군 유리를 부어넣고 굳인 것처럼 이질적으로 청명하고 초현실적이었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진탕이 된 K의 뇌는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더러운 다락, 그 춥고 어두운 다락이 그의 집이라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장판에 누워 담배를 피우면, 이 짧은 과거도 허상으로 변해 날아가고 잊힐 것이다. 그리고 술이 깨면, 그때는 K는 그 다락으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차라리 면도날 같은 세상으로 몸을 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둠도 습기 찬 공기도 담뱃진 냄새도 매일매일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으니까.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현실이라는 밧줄들이 목을 졸라대 결국 질식사하게 만들고 말테니까. “빌어……먹……” K는 휘청휘청 한낮의 대로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욕설마저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예요…….” 분명 그에게는 영혼도 없을 것이다.
흔들리는 시야 바깥으로 행인들이 보였다. 너무 취해 그들의 얼굴을 인지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K는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K에게는 정신에 내리꽂히는 핵폭탄 같은 것이다. 특히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보고 있는 세계가, K가 보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되게 만드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이다. 여름용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들과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퍼져 나오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K는 눈물을 흘리거나 발광하거나 분노한다. 아, 저기 한 주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군. “나는 도망쳐야 해.” K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애당초 이런 밝은 시간에 경찰서까지 끌려간 것이 잘못이었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오로지 다락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K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어댔다. “아무도.”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고 또 아무도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은 기만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지다. 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해야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참하고 고통스러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 잔의 끔찍한 독주나 폐를 찢어대는 담배연기, 혹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혈액으로 도망치며 가라앉아 너무나 당연하게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K는 보도블록에 눈길을 처박고 걸으며 갑자기 외쳤다. 어딘가에서 아기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싫다. 밝은 것은 싫다. K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둠과 금속으로 된 벽들 속에 있을 때, 빛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형상마저 흐릿한 비현실이었다……. K의 눈물샘에서는 잘 벼려진 단도가 자라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K는 그 단도들을 식도로 삼켜 보낸다. 어서 햇빛 들지 않는 골목으로, 그리고 나의 집으로.
우리는 왜 그냥 죽어버릴 수 없는가.
우리는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은 정말로, 정말로 무의미하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K는 웬일로 방에 불을 켜고 벽과 마주앉아 있었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벽에는 잉크로 그런 글귀가 써갈겨져있었다. 글씨체는 분명 K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낙서를 한 기억이 없었다. 아! 사실 K의 머릿속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알코올이 기억을 파먹고 죽음 같은 잠과 도주로 말미암아 그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그 문장은 이상했다. 우선 무엇이 이상한가하면 지금이 2015년이라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에서 <미쳐간다> 따위의 현재진행형을 붙여놓은 것도 이상했다. K는 장판바닥에 앉아 멍하니 그 글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계획일까? 내년 1월에는 미치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계획인 것일까. 그는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지.” K가 바싹 마른 안구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암, 내가 미쳤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나의 이성은 아직도 멀쩡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차라리 내가 미쳤더라면, 완전한 광기에 잡아먹혀 오로지 상념을 배설하기만 하는 통제되지 않는 재해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장에 술을 쏟아 붓고 기억을 잃고 정신을 잃고 나 자신도 달가워하지 않는 담배의 역한 연기를 숨 쉬며 새벽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 이성을 망가트리고 전선을 뽑는 것만이 진통의 효과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K는 방을 뒤져 담뱃갑을 찾아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 K는 생각했다. 내가 도망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입증해봐야 무엇이 자랑스럽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현실세계에서 도무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한 편의 끔찍한 소설과 같이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로 아랍인에게 권총을 연사하고 사형집행을 당한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그러나 대체로 세상은 드라마가 아니고 통상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도라는 사내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며 토의를 하지만,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일어나 소년병들이 마약에 취한 채로 포로들에게 총을 쏴재껴도, 여객선이 침몰하고 비행기가 빌딩에 처박혀도, 해일이 나라 하나를 뒤집어엎어 수만 명이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되어 길거리를 굴러다녀도, 강간범과 살인마들이 도시를 활보하며 일을 치루고 다녀도,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를 명석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그저 당연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영원히 작용하는 관성으로 비추어 보인다. 도덕 같은 것은 관찰에 방해나 될 뿐이지…… 젠장! 나는 아직도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어디선가 미친 살인마가 달려와 나이프로 내 목을 몇 번이고 쑤시는 환상을 본다. 그러한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환영받을만한 것이고 내가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것인데, 사실은 유치한 망상이다. 오, 그러나 내가 죽음에게 매료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그러한 것에 매료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저 진통제가 필요할 뿐이다. 영원히 약효가 진행되는 진통제가! 프로테스탄트들 말로는 자살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가 영원히 불탄다고 하는데, ―육체도 없는 것을 불태워서 무어에 쓰냐는 의문은 접어두더라도―차라리 나는 그런 단순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이 더 낫겠다. 삶에서 주어지는 권태롭고 모순투성이인, 영혼의 숨통을 옭아매는 끔찍한 고통보다, 차라리 유황불에 불타는 것처럼 간단명료한 아픔이 더 낫겠다. 제기랄! 그러나 자살만은 안 돼. 명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자살만은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이 항상 내 주변에 있다……. 나에겐 벌써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K가 씨부렁대는 것을 주의 깊게 들을 이유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다. 그는 오늘도 그저 숙취 때문에 둔해진 머리로 헛구역질을 하듯이 잡념에 빠져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K는 번뇌의 덩어리다. 새해에 보신각종을 치듯이 그의 머리통을 108번―어쩌면 그 이상― 두들겨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K가 뇌진탕으로 숨지는 것 외의 아무런 결과도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피를 좀 흘리고 나면 속이 상쾌해진다는 것을 K는 알고 있다. 그는 여전히 벽의 낙서 앞에 주저앉아 상체를 앞뒤로 끄떡끄떡 흔들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방안 가득 차고,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세어보다가 갑자기 토했다. “우웨엑.” 토사물은 시큼하고 멀건 액체뿐이었다. K는 자신이 3일 정도 술 외에는 먹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번 더 벽을 향해 토했다. 가래 같은 것이 섞인 오물은 벽의 글귀 위에 지저분하게 쏟아졌다. 아, 시바. 내 인생은 인생이라고 부를 것도 없구나. K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위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았고 토사물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났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잡념이나 상념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K는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K는 꿈을 꾸었다.
그는 어둡고 좁은 곳에 있었다. 다리도 펼 수 없을 만큼 좁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바닥과 벽은 딱딱했고 만지면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다. 무언가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현실에서 느끼는 실체도 없는 막연한 노스탤지어와는 다른, 보다 인간다운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슬펐다. 슬펐고, 동시에 공포가 입과 코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분노가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K는 분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 금속으로 된 상자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너무 오래 비명을 질러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머리맡에 죽음이라는 것이 어슬렁거렸다. 그것은 어쩐지 오히려 친숙했다. 굶주림과 추위와 고독 속에서 그것만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런 꿈을 꾸었다. 깨어나자 K의 머릿속에서 꿈의 기억은 사라졌고, 그저 끔찍한 적막만 머리통 안에서 웅웅 울리는 것이었다. “씨발!” K는 몸부림치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도 그는 몰랐다. 굳이 알아낼 이유도 없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고 세상이라는 게 그런 거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오로지 악의로만 설계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K는 자신의 혀를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혈액이 타액과 뒤섞여 볼을 타고 흘렀다. 아하! 하하하. K는 웃었다.
어느 아침 K는 맥주병을 두 손으로 쥐고 고등학교 앞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등교하는 학생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K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있었다. 딱히 눈물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써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도 없었다. 애당초 K에게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들이 없으니까.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도움이 될 테지! 주로 고통스러운 감정과 사고의 비약을 만드는 것은 시각적 자극이기 때문이다. K는 맥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아, 그러나 책을 볼 때 불편한 것은 어떻게 하지…….
“선배.”
K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을 보니 앳되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곁에 앉아있었다. “선배 입에서 피 나요.” 그녀가 맥락 없이 지적했다. K가 입 주변을 손으로 더듬자 맥주와 섞인 혈액이 손가락 끝에 묻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 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마도 혼자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리라.
“너 누구야.” K는 손끝에 묻은 피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H중학교. 선배 1년 아래였던 민지. 이민지.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 등굣길에 선배 자주 봤어요. 아침마다 이 벤치에 앉아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민지라는 학생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K는 그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중학생 때 교류가 있었던 여자 후배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너, 거짓말을 하고 있군.” K가 내뱉었다.
“아니에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복도 청소를 하다가 그만 유리창을 깼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안절부절 못하는 절 보고 그랬잖아요. 선배가 깬 걸로 할 테니까 신경 끄고 집에 가라고.” 말투가 통통 튀는 듯이 발랄한 학생이었다. 말도 많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선생들은 나랑 엮이는 게 싫어서 혼조차 안냈으니까.” K가 맥주병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나 담배 피울 거니까 저리가.”
“괜찮아요. 이 시간에 등교하면 학생부 선생님들도 교문에 없어요.” 여자아이는 웃었다. K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선배 아직 미성년자 아니에요?” 궁금한 것도 많고 말도 많고, K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담배연기를 한껏 빨아마셨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런 걸 누가 신경 써. 그리고 너 나한테 왜 말 걸었어.” 민지는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선배는 자유로워 보여요.”
“하!” K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자유! 자유라! 이 아이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자유, 그래, 난 자유롭지. 그리고 넌 그걸 동경하려고 하고 있고.” K는 바닥을 향해 담배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넌 내 모습이 보이기나 하는 거냐?” 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코올 때문에 반쯤 감긴 눈동자로 민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본능적인 경계태세에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는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어.” K의 눈동자는 불그스름하고 권태로운 빛을 냈고, 여자아이는 이유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사람은 자유의 본모습과 만나게 되면 비참해져.” K는 문장의 한 음절 한 음절을 딱딱 끊어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반드시. 비참해져.”
민지는 K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으려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상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적이지 않은,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 말이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더니, K를 향해 입술을 떼었다. “내일 아침에도 올 게요.” 전과 달리 긴장된 목소리였다. K는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그가 담배연기 때문에 컬컬해진 목을 축이려 맥주를 들이부을 때, 민지는 이미 교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K는 피와 맥주가 묻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면서 새삼 자신의 길고 지저분한 수염을 느꼈다. 도대체가 동경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K는 조소했다. 저 민지라는 아이는 내가 자신의 갈증을 풀기 위해서 그녀의 경동맥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인간은 모두 투견으로 태어났고, “누구나 살인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맥주병을 벽에 대고 던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 등교하던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순간 K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K의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K는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새 담배에 불을 댕겼다. 빌어먹을 놈의 과거라니……. 그는 이미 중학생 때의 일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몇 개의 폭력사건들과 기물파손, 그리고 그가 그의 <보호자들>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제외하면, 과거는 희뿌연 안개가 낀 80년대 호러영화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과거라는 것은 항상 치명적이고 비참한 것이어서, 그저 문 안에 넣고 닫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K에게는 그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K에게는 현재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그는 과거라는 개념을, 현재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매일 저질러지는 과음과 폐가 썩어나갈 만큼의 흡연과 경범죄, 그리고 가끔 흐르는 피들이 그의 <일>이었다. 존재하기 위한 일,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게 되기 위한 일. 양극성과 이율배반과 모순과 양가감정, 그런 것들도 혼돈 속에서는 훌륭한 방정식이 된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올바른 논리라는 것은 존재한 일이 없으니까!” 망할! K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초조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난 철학자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겠어. 난 빌어먹을 놈의 정당성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 때문에 미치는 건 싫어. 그의 걸음걸이는 빠르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신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어댄 탓에 꽁초가 끊어져 떨어졌다. 그 여자아이……. K는 변화를 싫어한다. 혐오한다. 그저 죽음이 자신을 잡아갈 때까지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구렁텅이이기를 바랄 뿐이다.
K는 오래도록 방 안에 있었다. 크누트 함순을 읽고 키르케고르를 읽고 톨스토이에는 담뱃불로 불을 붙여 태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 며칠 동안이나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세계에 반발하여 파고든 도피처는 시간감각으로부터도 유배되는 것이다. 세계에? 너무 거창한 단어다. 세계라고 해봤자 기껏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세계인 것이다. K는 이미 담배연기로 가득 차 숨조차 쉬기 어려운 방 안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맥주병을 찾아다녔다. 다른 한 손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들려있었다. 방 한 쪽 구석에는 책 더미들 사이에 처참하게 구겨진 다자이 오사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퇴폐 속에서 퇴폐주의 작품을 읽는 것은 손목의 인대를 스스로 끊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마침내 K의 손은 맥주병 하나를 발견해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맥주에 섞인 담배꽁초와 담뱃재들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K는 몽롱한 눈으로 그것들을 꿀꺽 삼켰다.
갈증이 났다.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의 연기가 사람을 만난 바퀴벌레처럼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가 흩어졌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오히려 구역질이 났다. K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방문 밖으로 신물을 뱉어냈다. 술, 술이 필요했다. 얼마나 방 안에서 안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오래도록 한숨도 자질 못했다. 하지만 K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아무리 피곤하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어도 맨 정신으로는 절대 잠에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념 때문에, 비약되는 사고 때문에, 심장 한 복판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그러하였다. K는 방 밖으로 침을 한 번 뱉고 문가에 놓인 지갑을 집었다. 열어보니 한 푼도 없었다. K가 인상을 찌푸리며 방 안을 휘 둘러보자 온통 빈 술병과 빈 담뱃갑들, 그리고 타거나 무너져있는 책들뿐이었다. 그는 지갑을 책 더미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비틀거리며 밖에 섰다. “자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지독한 아이러니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하늘은 주황빛이었다. 그러나 K의 눈에는 누렇게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온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자 수염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아아, 아아아, 시발……. 그는 낮게 신음하며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금각사가 불에 탄다.” 헛소리였다. “피아니스트도…….”
무의식중에 걷다보니 K는 어느새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K보다 어린, 혹은 동갑의 아이들이 K를 피하며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K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왜 밖으로 나와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에 없었다. 지구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K는 어쩐지 자신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비틀비틀. 비척비척. 휘청휘청. 목표하는 지점도 없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감각에 붙들려, 그 현상을 숭배도 저주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영겁 속에서 그저 걸을 뿐인 현상이다. 불은 타고 물은 흐른다. 나는 걷는다. 중력은 잡아당기고 빛은 빛난다. 나는 존재자로서의 조건이 결핍되어있다. 나는-존재하지-않는-다-영원-히.
“선배?”
땅이 한 바퀴 돌았다. K의 눈동자도 돌았다. 눈앞에 이민지라는 18살의 여고생이 서있었다. 앳되고 당찬 얼굴의 생김생김. K보다 작은 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K가 다니게 되었을지도 몰랐던 학교의 교복. 황인종의 살굿빛 피부. 그리고 K를 쳐다보는 맑은 눈망울. K의 왼쪽 눈물샘에서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솟아나와 흘렀다. 그 눈물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영혼의 복부에서부터 울렁거리며 뻗어 나오는 증오를, 억지로 내리누를 때의 반작용으로 흘러나온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눈물이었다.
“선배 울어요?” 민지가 다소 당황하며 물었다.
“너 돈 있냐.” K도 물었다.
“왜요? 삥 뜯으려구?” 민지가 실쭉 웃었다.
“이천이백 원만 빌려줘.” K가 대뜸 요구했다.
“왜 그렇게 구체적인 금액이에요?”
“소주. 두 병.”
민지는 K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니, 한참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K도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만지면 부서진다. 죽이면 죽고, 꺾으면 부러진다. K의 허파 한쪽이 뻐근하니 아파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때처럼 무서운 얼굴이 아니네요.” 민지가 말했다. 그때처럼? K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돈.” K는 짧게 내뱉었다.
“좋아요.” 민지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대신에 저랑 10분만 얘기해요.”
K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씹었다. “이자 붙여서 갚는 걸로는 안 되냐?”
“이자 필요 없어요. 소주 살 거예요 안 살 거예요?”
“알았다. 제기랄…….” K는 욕설을 씹으며 근처의 벤치로 가서 털썩 앉았다. 민지는 신난 듯이 따라와 옆 자리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돈부터 내놔.”
“안 돼요. 대화 끝나면 드릴 거예요.”
“알았다. 니 마음대로 해.” K가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선배는 철학자예요?” 민지가 대뜸 물어왔다.
“아니.” K는 피식 웃었다.
“수염이랑 머리는 왜 안 깎아요?”
“필요를 못 느껴서.” 따분하다.
“고등학교는 왜 안 갔어요?”
“너 중학생 때 나 알았다며.” K는 내내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자세였다.
“자세히는 몰랐어요. 전교에 선배 얘기가 소문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알아챈 거죠.” 민지의 목소리 톤은 항상 발랄하다.
“내가 고등학교에 갔었다면 지금쯤 여기가 아니라 소년원에 있었을 거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K 자신의 의견도 아닌, 정신상담 치료사의 의견이었다.
“중학생 때 국사선생님 때려눕혔다는 게 진짜예요?”
“어.”
“어떻게 징계 안 받았어요?”
“합의금. 아버지 돈으로.” K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선생님 한 동안 팔에 깁스 하고 다녔는데.” 민지는 이 대화가 흥미롭기만 한 모양이다.
“내가 부러트렸으니까.”
“왜 그랬어요?”
“몰라.” K가 어조 없이 대답했다.
“대화에 비협조적이면 돈 안 빌려줄 거예요.”
K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저 민지라는 녀석은 흥미본위로 나한테 접근한 것이 분명하다. 마치 동물원에서 야생동물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지금 그녀는 그저 K라는 미치광이를 관찰하며 재미있어하는 것뿐이다. “진짜 몰라. 애당초 중학생 때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아.”
“흠.” 민지는 수긍한 듯 했다. “왜 나한테 돈을 빌리려고 해요?”
“뭔 소리야. 돈이 없으니까 빌리는 거지.”
“왜 돈이 없는데요?”
이 망할 녀석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대화를 끌고 나가려는 걸까. “월말이라…… 통장잔금도 바닥났을 거고. 바로 몇 시간 전에 내 방에서 제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을 불살라버렸어.”
“뭐였는데요?”
“총 삼천 페이지짜리 특수가공 하드커버에 은도금 되고 북 커버까지 쓰인 양장본 세 권.” 중고책방에 팔았다면 못해도 삼만 원은 족히 받았을 것이다. 삼만 원의 진리, 사랑, 행복.
“왜 그런 비싼 책을 태워버렸대요.”
“태워야 했으니까.” K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보다 나 지금 진짜 미칠 것 같거든. 돈 안 빌려줄 거면 그만 두자. 까짓거 마트 영감님 목 분질러버리고 소주 몇 병 꺼내오면 그만이지.” K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지금 피로와 환각 때문에 정신이 어지럽고 편두통까지 오려하는 판국이었다.
“아, 아니에요. 돈 빌려드릴게요.” 민지는 당황한 듯이 가방 속을 뒤지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삼천 원을 꺼내 K의 손을 잡고 그 손 안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K는 건조한 눈동자로 그 종잇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것들을 구겨 쥐며 주머니 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는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서있었다. 세계가 비틀린 듯이 보였다. 영양실조, 빈혈, 금단증상, 뭐 그런 것들 때문이겠지. 그는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러다가 민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뭐랬지.”
“민지요. 이민지.” 그녀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K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K는 뚜벅뚜벅 걸어 가버렸다. 가을에도 음식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는 자신의 음침한 골목을 향해서.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현재 체중이……> <산후 우울증이라는 게 있는데……>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형사입건을……> <적용되는 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신감정 후에 송치될 것이고……> <이런 경우에는 아드님께서도 차후에 어떻게 될지……>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어렸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왜 나는 엄마가 없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빌어먹을. 싸구려. 신파극. 같은. 인생.
하늘에는 어린아이들의 비명소리만 천둥 치듯이 울려 퍼진다.
K는 어느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웬일로 그는 면도를 했고, 흐트러진 장발은 고무줄로 올려 묶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나락에 떨어진 사람의 그것과 같았고 얼굴은 창백하게 말라붙었으며, 온몸에서는 담뱃진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훨씬 보기에 좋았다. 적어도 K의 눈동자를 직시하지만 않는다면, 그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는 굳은살이 박히고 흉터투성이인 주먹으로 철제 현관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사람이 나왔다. K의 큰아버지였다.
“K."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적잖이 놀란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전화 좀 쓰러 왔습니다.” K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조가 없었다.
“어…… 그래, 들어와라. 면도 하니까 보기 좋구나.” 큰아버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문을 열어 K를 집 안에 들였다.
방향제 대신 사방에 놔둔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 홀아비 냄새를 없애겠다고 놔둔 것이겠지만, K에게는 이 냄새가 더 독하게만 느껴졌다. 고독과 망가진 인생과 결핍을 가리려는 가식의 냄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냄새. 그 냄새들 사이에는 남자의 손으로 어설프게 정리된 좁은 방들이 있었고, 이미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큰아버지의 자식들이 보낸 인스턴트식품이 박스 채로 쌓여있었다. K는 그런 방안을 휘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인호 형은 요즘 어떻다고 합니까?”
“그 녀석이야 잘 있지. 명절마다 내려오기도 하고.” 큰아버지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K는 대뜸 내뱉었다. “전화를 좀 써야겠습니다.”
“그래, 전화. 누구한테 하려고?” 큰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큰아버지 남동생이요. 전화번호도 좀 찍어서 주세요. 전 모르니까.” 요컨대 아버지.
큰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동생의 번호를 누르면서 생각했다. 왜 이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지. 벌써부터 망가지고 알코올 중독에 걸려 쓰레기처럼 살고 있기에 기품 따위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 청년에게서, 왜 항상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어쩌면 그것이 심지어 어른마저도 손을 못 댈 광기의 끄트머리는 아닐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일이다. K는 절대로, 절대로 이해되지 않으니까.
큰아버지는 동생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러 K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K는 그것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아버지, 나예요. K."
10초 정도의 정적. 아마도 아버지는 놀란 가운데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어……아들. 이게 얼마만이야……. 전에 아버지가 몇 번 너 사는 방에 갔었는데―>
“아버지.” 그것만으로도 말이 끊겼다. “잡담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예정이 좀 당겨졌습니다. 어른이 되면 대답해준다고 약속 했던 것, 지금 들어야겠어요.”
<……> 또 한 번의 침묵.
왜냐하면 나는 절대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니까. “내가 악몽을 꾸고 울 때마다 아버지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적어도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되겠니?> 그의 목소리는 거의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시간 없습니다.” K는 자르듯이 말했다.
큰아버지는 그 광경을 그저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참하게 망가지려는 동생을 붙잡아준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번 새겨진 흉터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죄는 영원히 죄로서 남는다는 것을, 설령 그 죄에 대한 벌이 내려지지 않고 내려질 상대조차 없더라도, 죄라는 것은 개념을 초월해 인간들의 사이사이를 불쾌한 공기처럼 떠돈다는 것을 말이다. 망가진 장난감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장식장에 장식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K는 수화기로 뭔가를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항상 술에 취해 반개해있던 눈동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말이 끝났을 때, K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이제 더 이상 생활비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쓸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핸드폰의 종료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K는 큰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큰아버지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K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원망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운이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로커에 갇혀있던 한 살 배기 어린애보다는 머리가 좋으니까요.” 큰아버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입을 닫아버렸다. “혼돈이 왜 공평한 것인지 아십니까?” K가 큰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큰아버지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며, 스스로 답을 말했다. “그것은 무작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K는 열려있는 현관문으로 뱀처럼 나가버렸다.
큰아버지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석상처럼 서있었다. 얼마 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나다. 그래. K는 갔어. 그냥 가버렸어.” 그러면서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지는 그날도 평소처럼 교복을 차려입고 등교하고 있었다. K의 모습을 못 본 것이 며칠 째더라. 어쩌면 그 삼천 원은 평생 못 돌려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등굣길 저편에서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흘낏 보였다. 다른 여학생들은 코를 막고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씨부렁거렸다. 매너가 없다느니, 멀쩡하게 생겨서 길빵이라느니. 남자에게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데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흰색 셔츠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청바지 밑에 갈색 구두를 신은 훤칠한 남자였다. 민지는 무관심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민지.” 민지는 멈춰 서서 그 남자를 보았다. 나를 아시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얼굴 생김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그것이 K라는 것을, 민지는 깨달았다. “선배?”
그것은 K였다. 마르고 창백한 피부에 유난히 붉은 입술, 나락 같은 눈동자. 예전에는 늘 구부정한 자세였는데, 등을 펴니 키 또한 컸다. “선배 머리 잘랐어요? 면도도 했네?” 민지가 놀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K가 다 타버린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가 그런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이게 뭐야? 선배 왜 이렇게 말쑥해요?” 그러나 K는 대답도 하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만 원을 민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웬 돈이에요?” K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돈 빌렸던 거.” 민지는 당황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K의 모습이나, 이 돈이나. “열 배잖아요!” 그러자 K는 민지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안에 삼만 원을 올려놓고 주먹을 쥐게 했다. “그냥 받아. 주고 싶어서 그래.” 민지는 멍한 상태였고, K의 얼굴은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민지가 물었다.
“글쎄.” K가 흰 손으로 민지의 손을 쥔 채로 웃었다. “새로 하는 작업에 이런 모습이 필요했거든.”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요새는 기분이 꽤 좋아. 가슴 속에 틀어박혀있던 대못 하나가 빠진 기분이야.” 민지는 여전히 당황한 채로 K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이 사람 수염 밀고 머리 다듬으면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그 망나니짓을 다 하고 다녀도 학생들한테는 알게 모르게 인기가 있었지……. “그리고 조만간 떠나야 되거든. 가기 전에 돈도 갚고, 네 얼굴도 보고 가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의 불친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는 다 사라지고,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는 남자가 서있었다. 새삼 손이 잡힌 것이 부끄러웠다. “떠, 떠나다뇨?” K는 슬며시 민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좀 멀리. 이 도시에서 볼 일은 다 봤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아쉬워라…….” 어쩐지 K와 눈을 못 마주치며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봐야겠다.” K가 말했다. 그는 민지의 어깨를 톡톡 치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고하며 거리 저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고마웠어. 그래도 앞으로는 나 같은 이상한 사람한테 말 걸지 마. 위험하니까.” 그리고 그는 갔다.
민지는 만 원짜리 세 장을 손에 들고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도대체 저 선배는 뭐였던 걸까.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으며, 내가 본 모습 중 진짜 모습이 있기는 했던 걸까. 그러나 고민할 새도 없이 K는 사라졌으며, 동시에 민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 왜 엄마?”
<딸.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우리 동네에서 밤에만 벌써 세 번이나 여자 죽은 거 알지?>
“알았다니까. 그래서 요새 학원도 안 가잖아.”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다니? 어떤 미친놈인지 죽이고 머리통까지 잘라 갔다잖아. 아이고, 끔찍해라…….>
“알았어. 학교 끝나면 바로 갈게. 나 학교 가야 돼. 끊어요.”
민지는 전화를 끊고 K가 사라진 거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선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학교에 가야했다. 모든 학생들처럼.
K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을 때마다 나는 구두소리에 스스로 흥겨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이다. 그는 경찰서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가장 얼굴이 익숙한 젊은 순경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경찰은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K를 보았다. “아,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별 건 아니고, 이걸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K는 순경의 테이블 위에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반쯤 부패한 여자 머리 세 개가 굴러 나왔다.
헉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와 함께 순경은 의자 째로 뒤로 물러났다. 다른 경찰들의 시선이 전부 모였다. 경찰서 안에 있던 다른 민간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K는 순경이 도망치기도 전에 목덜미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K는 웃는 얼굴이었다. 경찰들은 권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황급히 손을 가져갔고, 그보다 빨리 K가 뒷주머니에 있던 단도를 꺼내 순경의 목덜미에 겨눴다. 민간인들은 도망치고, 비명이 울려 퍼지던 곳에 바짝 긴장한 공기가 흘렀다. K는 여전히 단도를 순경의 목에 들이민 채로, 이제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칼 내려놔!” 경찰들 중 하나가 외쳤다. 그러나 K는 조롱하듯이 단도를 든 손에 힘을 넣어 순경의 목덜미 피부 안으로 집어넣었다.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쏴.” K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칼 내려놔! 원하는 게 뭐야?” 경찰이 더욱 긴장해서 외쳤다.
“쏴.”
K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단도의 칼끝이 여전히 순경의 목을 찌를 수 있도록 하면서 다른 경찰들이 자신을 쏘기 좋도록 몸통을 드러냈다.
“안 쏘면 이 순경나리 죽어. 쏴.” K의 목소리는 얼음 같았다. 경찰들은 혼란스러웠고, K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K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쏘라고.”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명령했다.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찰이 하나 있었고, 순경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사색이 되어있었다. K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외쳤다. “쏴!”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바 나는 죽음을 맞이하지 아니할 것이다. 내 자멸의 순간들에 부디 비극의 색깔을 칠하지 말라. 희망을 짓밟은 토양에서 자라는 깨달음처럼 내 몸에는 끓는 듯한 피가 혈관의 벽들을 태우며 흐르고 있다. 감상이 사멸한 불행의 인생에서 나는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노골적인 암시를 보았다. 사형수들이 목 매달리고 소녀들이 손목을 절개하는 유쾌한 시대에 길게 빼 물린 혀와 교복의 스커트를 결합하여 혈액이 방울져 뚝뚝 흐르는 에로스를 모두에게 선고하라. 이것은 너무나도 진지한 농담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선포한 농담이다. 그 이후로 모두가 뇌수를 달구며 매달려왔던 농담이다. 자기(그는 분열되었고) 자신의(그는 왜곡되었고) 판단력도(그는 이성理性의 범위를 측정할 수 없게 되었고) 신뢰할 수(그는 가상이 뜻하는 바를 잊어버렸고) 없게(그는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잃어버렸고) 되었나니(그는 다원주의 속에서 영원히 방황하게 되었다.) 내 묘비는 어디에도 세워지지 않을 것이고 내가 보는 여름의 환영들은 감히 환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아, 아아! 나는 노래 부르고 싶다. 나는 비명 지르고 싶다. 더 깊은 땅굴 속으로. 신과 악마는 필요성을 상실했다. 그것들은 이제 신비주의자들의 노스탤지어에만 존재한다―사실은 신비주의자들이야말로 노스탤지어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샹그릴라도 유토피아도 지상낙원도 무릉도원도 천국도 결국은 생물학의 위장 속에 있었고 우리는 이제 물리학의 이름으로 공허를 관측한다. 곧, 나는 죽지 아니하니 나의 묘비를 깎지 말라. 실상은 그 누구도 죽지 아니하고―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죽지 아니한다. 그 미스터리, 모든 지독한 농담의 수원지로 말미암아 최선은 항상 광기의 지팡이를 들고 휘두르며 불행을 불행이 아닌 불행으로 절망을 절망이 아닌 절망으로 오로지 삶에 들러붙어 노래를-노래를-노래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으로 인해 인류는 모조리 미치광이가 되게 생겼다. 지구가 칠십억의 분열증 환자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말에 반론하지 말라. 이것은 가장 낙관적인 예측이다. 언어철학이라니……. 여인이여, 그대가 낳은 것들은 생도 사도 아닌 광기의 부품이라오. 그러니 부디 내가 살아있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
보헤미안의 모습으로 도시 뒷골목을 거닐 때 하늘에는 태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쪽짜리 달이 뭔가를 외쳤고 나는 알아듣지 못하여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건물들의 잔해를 헤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헤맸다.
자유를 추구하거나 자유밖에 알지 못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은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굳은 피로 만든 두꺼운 사슬이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사형수의 피로 채워진 늪에 빠져버려 그들의 완전한 사회를 노래했다.
달이 또 한 번 무언가를 외쳤고 내륙의 도시에서 자란 나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가 마시고 싶어 가본 적도 없는 고향의 노스텔지어를 울부짖었으나 아, 눈물은 다 말라있었다. 내 심장의 피조차 말라있었다.
이 건조한 도시에서 도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담? 나는 의문하면서도, 커다란 캔버스에 불타는 숲을 그렸고 뛰쳐나오는 짐승들과 가죽이 타버린 갈색 여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옳아, 그때서야 나는 울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낡은 술병에 담긴 독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평화가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아니야! 그렇지 않다. 결코 평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더 독한 광기를 향해 혀를 뻗었다! 의사들의 알약과 불이 붙는 술잔들 그리고 감금 되어 등이 굽은 자들의 희열, 그런 것들이 나를 썩히고 있었고, 나를 썩히는 것은 희망과 평화였다. <네가 앙드레 지드의 단말마를 잊을 리가 없다.> 존경해 마지않는 사탄이여.
달이 또 한 번 소리 질렀다. 그때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달은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계시였다. 또 한 번의 엑소더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로지 한 명 만을 위한, 하나의 영혼만을 위한 바다로, 바다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나의 항해는 끝이 없어야할 것이다. 바다가 뒤집어지는 파도와 해일을 마주할 때 불타는 물과 익사자들의 시체가 나의 작은 나룻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나는 나의 죽은 형제들을 위해 환희의 비명을 지를 것이고 적그리스도라는 거창한 이름을 기뻐하며 내 몸에 낙인을 찍겠노라.
어제는 골목 구석에서 죽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들어 올려보니 눈알은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내장은 몹시 딱딱했다. 필경 겨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장을 상상하며 그것을 꺼내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의 은행 화장실로 가 비누로 손을 씻었다. 도시에서 죽는 들짐승들은 무슨 병이든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병사(病死)는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작년 한 해는 정말로 지랄 같았다. 어제, 즉 신년 1월 1일에는 죽은 고양이와 만났다. 오늘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일에 대한 걱정 없이 걷는 거리는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신년회를 마친 바로 다음날 사직서를 받은 팀장의 놀란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내게 몇 가지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타당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여간 나는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그것을 사용한 것이다. 코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이런 날 아파트 지하 배관실이나 공영주차장 구석에 가보면 박스를 몇 겹이나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노숙자들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띠지 않는 곳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들의 그러한 점은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하에 산다. 그러나 보다 좋은 곳이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고 몇 개 되지 않는 창문으로는 사람들의 구두가 보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하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익숙해져버렸다.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높은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산 정상이라든가 빌딩의 옥상 같은 곳은 사람이 살기 위해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한 장소들은 떨어져 죽기 위한 장소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자 추락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놀이기구와 같다. 사실 추락하는 자의 감각은 우리네 인생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놀이기구라는 것이 으레 그런 것 아니던가.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다 집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들. 남들보다 낮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가장 좋은 점은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밑에 아무도 없고 내 위로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가장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가장 추악한 죄인이 되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이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고결해지려고 자신을 묶고 조이며 마치 중세시대 중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철로 된 마스크를 쓰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의 사상과 감정들은 빅브라더의 감시 밖에 있다. 왜냐하면 그 빅브라더조차 내가 사는 땅의 인간들을 감시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팔을 흔들며 눈보라가 흩날리는 바깥세상을 가끔씩 걸어 다닌다. 최근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담배로 인한 것이었다. 정부가 금연정책으로 모든 담배에 부가되는 세금을 두 배로 올려버린 것이다. 나는 며칠 간 금연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고 담뱃값이 두 배로 올라버린 이상 그것은 내게 걸맞은 사치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담배를 끊는 2주 동안은 가끔 벽에 머리를 처박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몇 번의 미세한 근육경련도 일어났다. 그러나 곧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문 배달이 오지 않기 시작하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결국에는, 무관심해져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이불에서 일어났다. 기억나지 않는 꿈의 파편 때문에 아직도 펄떡거리는 관자놀이 위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머리를 찔러댔는데 그것이 거실의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인지 창문 밖의 낮고 낮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고양이 내장의 촉감이 아직까지 손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입사하고 나서부터의 그 어느 날보다 옷을 잘 차려입었다. 심지어 처음 출근하던 날보다도 바지의 줄이 잘 잡혀있었다. 넥타이를 매면서 간밤에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미세한 공포, 아니 그것이 공포였을까? 아무튼 이질적이기만 하면서도 어쩐지 이미 내 혈관 속에 돌고 있을 것만 같이 친근한 감각의 조각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했다. 어제는 1월 1일이었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뭔가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아마 고도보다도 늦게 오리라는, 근거도 설명할 수 없는 절망을 나는 나 자신에게 선고한다. 서류가방에는 사직서를 집어넣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니 담배 생각이 났다. 나는 별 이유 없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흩날리는 싸락눈 때문에 사방이 하얗게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분은 저조하지 않았다. 쌀알만 한 눈송이들이 내 깨끗한 정장 위에 들러붙었다. 천국은 공기 중에 모르핀이 눈처럼 날릴지도 모른다. 마침 가게를 열고 있던 구멍가게의 늙은 주인이 내게 꾸벅하고 인사를 해왔다. 나도 그에게 목례를 했다. 노인이 기르는 황색 털의 늙은 개가 가게 앞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개에게도 웃음을 지어보였다. 개들이 인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단순한 사실은 내가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회사에 도착해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팀장이 있는 자리까지 찾아갔다. 사직서를 내고 그가 그것을 읽을 동안 잠시 기다렸다. 팀장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출근길에 노인의 개에게 했던 것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몇 마디의 말이 오갔지만 별 의미가 없는 문답뿐이었다. 나는 팀장에게 얼어 죽은 고양이의 감촉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아무튼지 간에 사표는 수리되었고 나는 내 책상으로 가 챙겨 가야할 것들과 폐기해야할 것들을 분류했다. 대부분 폐기해야할 것들이었고 몇 종류의 서류는 담당자에게 인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지고 돌아가야 할 것들은 서류가방의 빈자리에 넣으니 전부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에 입력된 개인적인 정보들을 전부 삭제하고 나는 한때 동료였던 이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를 나왔다. 겨울에는 왜 이렇게 공기가 맑은지 호기심이 생긴다. 시베리아에 가면 항상 이렇게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일까. 옛날, 주점에서 만났던 러시아에서 온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겨울하늘처럼 청정했었다. 그녀의 피부는 눈 같은 순백색이었다. 또 담배 생각이 났다. 정부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가난한 이들로부터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 건물의 정문 앞에 서서 한참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내 세련된 정장차림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술을 마시러 갈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직장을 얻기 전에는 낮에도 자주 술을 마셨었다. 이제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 몇 년 간 무엇이 변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물으면, 나는 딱히 대답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겨울하늘 아래의 화사한 거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목적도 없이 대로를 방황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서점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학교도 가기 전인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책을 읽어주시던 것이 기억났다. 그 책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골라진 것이었다. 삼국지를 시작으로 한 수많은 역사소설들 말이다. 하여튼 어렸을 때는 그것이 좋았다. 아버지가 책을 읽어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내가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변해가면서, 나의 독서취향이라는 것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계>의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는 책만 읽어댔다. 레이몽 라디게와 랭보 같은 젊은 사망자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보들레르나 니체 같은 경우에는 ―이상한 표현이지만―그들의 철없는 근엄함이 나를 매료시켰다. 뒤늦게야 하는 말이지만 내 현실적 기반은 그때부터 무너졌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테오에게 근대유럽철학을 멀리 하라는 편지를 보내준 고흐 같은 사람이 내 곁에는 없었다. 그러나 진행될 만큼 진행되어버린 인생에서 회의는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글은 거의 읽지 않았다. 나의 독서취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네크로필리아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Nirvana의 음악도 커트 코베인이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뒤에야 듣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바흐고 베토벤이고 모차르트고 라흐마니노프고 이미 모조리 죽어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애도하기보다는 마르틴 루터 같은 이들에게 몇 번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서점에는 책이 많았다. 왜냐하면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런트에 진열된 책들은 거의 모두가 비슷한 것들이었고, 순수예술과 관련된 책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구석진 코너에 박혀있었다. 그러나 유감일 것도 없었다. 이미 나부터가 마지막으로 소설이나 시, 희곡 따위를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싸구려에 저질 포장지로 포장한 텍스트들은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은 문장 하나하나가 내 뇌수에 칼을 꽂고 심지어는 나의 현실을 파괴하려고 했다. 어렸을 때는 몇 번이고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도 지금에 와서는 책 한 권 한 권이 거의 융단폭격 수준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고, 왜였는지는 모른다. 관심을 줄 여유도 없었다. 그들에게 내 정신을 파괴당하면 취업이니 생활이니 하는 경제적 활동들이 전부 셔터가 내려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오래된 책장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서점에서 일기장을 파는 것을 발견했다. 꽤 두꺼운, 성인들을 위한 일기장이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죽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시골로 여행을 가다가 덤프트럭이 그들을 뭉개버린 것이다. 내가 성공적으로 취직한지 삼 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첫 월급의 일부를 어머니에게 보냈을 때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당장 취직하든지 아니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라고 매일 같이 히스테리를 부려댔던 사람이 바로 나의 어머니다.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나에게서 삼 개월 간 세 번의 생활비를 받고나서,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돈을 보낼 수가 없다. 물론 그들의 무덤에 만 원짜리 지폐 수백 장을 같이 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짓은 미치광이나 하는 짓이다. 뱃사공 카론은 그렇게 많은 돈을 바라지도 않는데다가 그가 한화(韓貨)를 취급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내 부모님은 그리스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그리스인도 아니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결혼한 이래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일이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고 교활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버지는 때로는 내 비참한 믿음을 부정하는 안티테제였고 때로는 인간의 본성을 죽을 때까지 드러내지 않은 불쌍한 자였다. 일기장은 한 권에 만 원이었다. 아무런 텍스트도 들어있지 않은 공책이 왜 만 원이나 하는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커버가 가죽으로 되어있었다. 몇 달 뒤면 어차피 벗겨질 금박이나 장식 없이 오로지 박음질만을 단단하게 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계산대로 그것을 들고 가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서점을 나왔는데, 한 손에 가죽공책을 들고 거리로 나와 보니 난 이 일기장을 구매하는 모든 과정 동안 단 한 번도 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이 너무도 투명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내 영혼에 눈이 달려서 정수리로 빠져나와 이십사 시간 하늘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겨울의 투명한 하늘은 인간의 영혼에 치명적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이제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치명적이다. 내게 기독교적 믿음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늘이라는 개념에 어떤 신성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겨울의 하늘은 사람의 정신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광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흰색 계절에 거리를 나돌아 다니다보면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거나 할퀴어 죽이고자 하는 원시적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주변의 환경을 평화롭게 조율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나는 나 자신이 귀머거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잘 알아듣지 못해,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색은 태양과 구름과 밤의 어둠이 내는 일률적이고 지속적인 노이즈뿐이기 때문이다. 집의 나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머그잔에 가득 담긴 드립커피나 보드카 따위를 마시고 있다 보면 죽음이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지 상상할 수도 있다. 나는 땅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지구의 소리도 듣는다. 새벽이 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내 집 창문가를 걸어 다니지 않으면, 이제 잠에서 깨어나 노래하는 시멘트와 벽돌로 된 골목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보일러실에 들어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녀석은 몹시 꽁꽁 숨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지만, 밤새 어딘가에서 울어댔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나는 매일 이상한 꿈을 꾼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젯밤 오늘 제출한 사직서를 쓰면서 나 자신도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린 이래로, 계속 공중 어딘가를 부유하는 느낌이다. 여동생은 울었었다……. 그녀는 시체를 덮고 있던 시트를 걷을 때부터 계속 울면서 사죄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안실에서 나와 일치감치 식장의 준비를 도왔다. 작년에 여동생이 무역회사에 취직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낼 필요도 없어졌다. 참고로 덤프트럭에 받힌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 그대로 뭉개져있었다. 전에는 내 피붙이였었는데, 그냥 엉망으로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였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망치로 박살 낸 다음 시체와 바꿔치기 해도 아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요는 무엇인가 하면, 나는 옷을 입은 다진 고기를 내 부모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구멍가게의 늙은 개를 만났다. 나는 녀석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주머니를 뒤져봐도 개가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녀석이 천천히 꼬리를 흔들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쭈그려 앉아서 녀석의 털을 쓰다듬었다. 가게 안쪽에서 주인이 우리를 보며 늙은이 특유의 웃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주름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시오. 선생. 오늘은 일찍 오시는구랴.” “예에. 그런데 혹시 일기를 써본 일이 있으십니까?”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기억난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말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장례식과 화장을 마치고 유골을 모시기 위해 이동할 때 나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때 나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사실 지금이라고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는 그때 난 어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일정이 끝난 뒤에 나는 아버지가 친척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구석진 것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따라갔다. 왜 따라갔는지는 모르겠다. 건물 뒤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왼쪽 눈에서 눈물 두 방울을 흘렸다. 딱 두 방울이었다. 어느새 따라온 내가 아버지의 옷소매를 잡자 그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황급히 눈물을 닦고, 나에게 웃어보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기요? 허어. 갑작스런 질문이군요.” “예. 사실 제가 오늘 일기장을 샀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신이 죽게 되면 화장해서 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시신도 화장시켜서 뼛가루를 아버지와 같은 곳에 묻었다. 여동생은 내가 나무 앞에서 삽질을 하는 동안 계속 울더니 마침내 졸도까지 하고야말았다. 다소 짜증이 치솟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온통 나무뿌리와 균사로 얽혀있는 땅에 삽질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 일기장을 산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가게 주인이 프로이트를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슷합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던 일률성이 끝났으니까요. 사실은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전에도 일기를 썼나요, 선생?” “전혀요.” 그 노란색 늙은 개는 계속 우리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개를 좋아했다. 그들은 백치에 순진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백치에 순진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간이 내 주변에 있었다면 난 그를 증오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유를 달 필요도 없이 내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인간보다는 나은 면이, 개들에게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장님은 일기를 써보셨습니까?” “예순 번째 생일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아.” 대화를 하면서 난 계속 주인의 뒤편을 힐끗거렸다. 온갖 색깔의 포장지로 싸인 담뱃갑들이 나란히 줄지어져 진열되어 있었다. 담배의 종류가 많고 제품마다 포장한 색깔이 다르다는 점부터가 심리적 마케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세계의 모든 초콜릿이 같은 공장에서 같은 모양에 같은 포장지로 포장되어 나온다면 아이들은 지금보다 초콜릿에 집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 생각해내려고 했다. 감옥에 갇혔을 때의 뫼르소의 생각대로라면 정부는 우리를 벌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굉장히 수동공격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남들 하듯이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서 일기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내키는 대로 쓰고 있어요. 굳이 오늘 일어난 것에 대해서만 쓰는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얘기군요.” 난 개를 쳐다보았다. 쳐진 눈꼬리와 얼굴이 넓적하게 보이도록 자란 털들이 녀석의 가장 활발하고 경쾌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늙은 개들의 얼굴을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안심감이 든다. 저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둔해져가는 팔다리와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리 늙은 편도 아니었는데. 여동생이 결혼하는 것을 기다릴 수 있었다면 손주가 새빨간 신생아의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루고 싶다고 해서 오늘 덮칠 쓰나미가 내일 덮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동생은 아직도 미혼이다. 동생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나보다 어리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소시지를 하나 사서 포장을 벗겨 개에게 주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내가 지불했던 금액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 버렸다. 개가 쩝쩝거리며 소시지를 먹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난 집으로 향해야했다. 오늘은 더 이상 바깥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보드카와 럼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아까 산 가죽커버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난 이것이 일기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년이나 월도 표기되어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에 메모장처럼 줄만 그어진 가죽공책이었다. 서점에서 이것을 펼쳐봤을 때 난 왜 일기장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예전 같으면 내 심리상담사에게 이 얘기를 하고 정신분석학적인 토의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나 자신의 영혼을 분석하는 일은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아마 독서를 그만두면서 그 짓도 그만둬버린 것 같다. 독서광들이여, 문맹이었던 마호메트가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받은 ‘책의 어머니’를 당신이 읽지 못한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책들이 마찬가지다. 모든 책들이 다 절대 읽을 수 없는 책들이다. 어떤 책이 자신의 성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읽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신이 죽기 전에 니체라는 이름이 먼저 죽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이름 없이 종이에 펜으로 흉터자국을 새겨 넣는 광인이었다. 아,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나는 길을 걸으면서 입속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가죽공책을 펼치고 유리잔에는 럼을 온더락으로 만들어놓은 뒤 첫 페이지에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페이지에 눈을 붙박은 채 럼을 홀짝거리며 계속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 집에 이사 올 때 피아노를 하나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방음 문제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이웃들이 분노하며 현관문을 두들겨댄다면, 차라리 피아노가 없는 것이 낫다. 생각해보면 아파트와 빌라들의 숲인 이 도시는 암묵적으로 모든 악기를 금지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탄압, 이게 누가 처음 쓴 말이었을까? 여하간 거창한 것은 아니다. 모든 거창한 것들은 인생을 고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을 오만하게 만든다. 개인은 개인의 영역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논해봤자 득 될 것이 없다고 본다. 내 불만은 그저 사적인 공간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것뿐이다. 사실 나는 이사 올 때, 단독주택을 빌릴만한 돈은 충분히 있었다. 거실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모멘트 뮤지컬 4번을 쳐대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집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하의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소파 위에서나 안락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락하게-혹은 시체처럼. 나는 창문이 많은 집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빛은 일종의 수압처럼 나를 짓누른다. 왜냐하면 빛은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빛은 인간의 영혼에도 좋지 않다. 특히 이런 겨울에는, 그리고 봄에는, 그리고 여름에는, 그리고 가을에는 태양광이 모든 이들의 머리를 무차별하게 박살내버린다. 겨울의 빛은 얼음송곳처럼 뇌를 파고 들어와 영혼에 경련을 일으키고, 봄의 빛은 과거의 비참을 흔들어 깨워 오로지 그를 도주하게 만들고, 여름의 빛은 녹인 쇳물처럼 어깨 위로 쏟아져 호흡을 불가하게 만들고, 가을의 빛은 온 도시에 광인들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나는 지하로 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지하에 있었고 지하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자랐다. 우리 가족이 빈곤했던 것에 감사한다! 만일 저 미친 듯이 드높게 솟은 빌딩에서 내가 살아야 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밧줄이 내 목을 졸랐을 것이다. 빛이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어버리니까 말이다! 온 사물이 너무 환하게 드러나 버리면 양심이 비명 지르며 깨어난다. 그래서 안전한 그늘로 숨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손전등을 비추지 않는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써놓고 보니 너무 강박적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고골을 읽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펜을 놀리면서 어느새 럼을 세 잔째 비우는 중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이건 문학이 아니야.” 내가 서점에서 이 가죽공책을 살 때 이것은 분명 일기장이었다. 그러니 내가 쓰는 것은 형식이 어찌되건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굉장히 개인적인, 그래서 명확할 필요조차 없는 일기 말이다. 내가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잔을 다 비웠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그 러시아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녀와 만났을 때도 나는 럼을 주문해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너무 오랫동안 타국생활을 하다 보니 러시아어를 잊어버렸다고 영어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프랑스어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자신의 일기장이라고,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왜이냐고 독어로 물었다. <아직 한 장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독어로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악센트가 가관이었다. 참고로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지상의 경계에 걸친 창문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항상 창문을 통해 들리는 뚜벅뚜벅 걷는 구두 소리가 피로한 리듬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탁자의자에서 일어나 이미 다 녹아버린 얼음을 싱크대에 버리고 새로운 얼음조각을 네다섯 개 잔에 채워 넣었다. 이미 뇌수에 불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럼주 병을 기울여 잔을 절반 정도 채웠다. 오늘은 보드카를 마시지 못하리라. 보드카. 보드카. 만일 내가 시베리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잔에 입을 대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황금색 불길이 단전으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술을 가까이해야한다. 의식을 잃는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세계에게조차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름철에 길거리를 나다니다보면 초록색 술병을 늘어놓고 거리에서 잠든 사람들을 자주 본다. 차에 치어 죽은 비둘기만큼이나 그들은 모순이 없다. 나는 창문을 통해, 길을 걷는 사람들의 구두를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은 귀가하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오늘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오늘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내가 여동생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동생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어제는 고양이를, 아, 잊어버렸다. 부패가 유보된 그 고양이의 시체가 어떤 색깔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차가운 촉감을 제외하고는 이미 그 기억 자체가 흑백사진처럼 변해버렸다. 오늘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샤워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샤워를 하기로 했다. 나는 그다지 늦지도 않은 이 초저녁에 술에 만취해 샤워를 할 수 있다. 내일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팀장에게 그 고양이 시체를 가져가야만 했었다. 우리 아버지의 곤죽이 된 시체를 만지도록 해야만 했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왔었다. 그들은 육개장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들이 내게 위로의 몇 마디를 건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작은아버지와 그 딸들이 왔었고, 작은아버지의 장녀가 낳은 어린 조카들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장례식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이 개츠비가 매일같이 열었다는 놀이공원처럼 화려한 파티가 겹쳐보였다. “아, 그야말로 만국박람회 같습니다 그려.” 샤워하는데 애를 좀 먹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나는 샤워기를 변기 쪽으로 돌려 이곳저곳에 튄 토사물을 청소하고 나 자신도 마저 씻었다. 물기를 닦고 거실로 나오니 온몸이 열로 가득 차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옷을 주워 입고 비틀거리며 소파로 가 누웠다. 나는 침대를 사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매일 밤 알코올에 절어 쓰러지듯이 잠드는 이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나는 소파에 걸쳐져있던 이불로 몸을 말고 태아 같은 포즈로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도 소용돌이치는 곡선과 잃어버린 방향감각이 보였다. 보일러를 켜지 않아 거실은 추웠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만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가 잠깐 보인 것 같았고, 직후 나는 정신을 잃었다. 황혼에 깨어났다. 보라와 황금의 미광이 자주 감기는 내 눈꺼풀 안에서 굴러다녔다.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와 당장이라도 술이 흘러내릴 것처럼 고동치는 눈동자로, 나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황혼의 은은한 빛살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어떤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 일률적이면서도 모든 것들에 병렬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었다. 아 그래! 애초부터 문학이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병(病)들의 무리였다. 굳이 실증주의의 오만하고 면도칼 같은 혓바닥을 거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어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가 알았던 위대함도 아름다움도 모두 병의 권속이었다. 완벽하게 보이도록 설계된 이 도시의 건물과 직선의 도로들은 병을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뱃속에서 위벽을 갉아먹고 있는 벌레의 존재를 느끼고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뇌의 무게중심이 온통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뭐라도 먹어야만 했다. 정확히는 탄수화물로 된 음식을 위 속에 구겨 넣어야 했다. 예전에는 숙취를 해소할 때 신경안정제가 가장 효과가 좋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런 신경계 약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머리에 찬물을 뿌려대면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계집들과 신경계 약물을 쌓아놓고 살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공포. 인지하지 못하는 공포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폭력과 섹스. 악몽과 풀잎 색깔 밤의 잠. 유치한 무관심, 마치 버려진 세상에 혼자 남은 쾌락주의자처럼. 그것도 독서의 종말과 함께 끝났다. 냉장고에 있던 식빵을 꺼내 물도 없이 꾸역꾸역 위장에 채워 넣었다. 위에서는 계속 되 뱉으려는 압력이 올라왔지만 나는 계속 구겨 넣었다. 그리고 물 한 잔과 아스피린 두 알을 삼켰다. 소파에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젠장.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구멍가게 사장이었다. 노란 털 뭉치를 안고 있었다. “무슨……” “선생. 내 개가…….” 나는 곧바로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상실의 눈동자가 불타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있었다. 그래, 이게 삶을 증명당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노란 털 뭉치에 손을 가져댔다. 오늘 날씨와 같은 온도였다. “일단 들어오시죠.” 노인은 주저하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보시다시피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소파에라도 앉아계시죠.” 그리고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나는 내 표정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그 눈동자 속에 있는 것만이라도. 그러나 덜 깬 술기운과 무력감, 그리고 권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진저리를 쳤다. <작년 한 해는 정말로 지랄 같았다…….> 나는 중얼거렸고 땅 밑에 떨어진 시선에는 아까 흘린 몇 방울의 눈물이 오팔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셔츠를 고쳐 입고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건조한 눈으로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살았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얼마나 됐지요?” “십칠 년은 됐을 겁니다. 나보다도 늙은 셈이죠.” “아.” 나는 사실 당황하지도 못했다. 분명 노인과는 매일 마주치는 사이고 언젠가는 의기투합하여 술 한 잔 하고서는 내 집에서 더 마신 적도 있기는 하지만, 글쎄 나로서는 그가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또 하나의 차가운 짐승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제가 잘 한 것이겠지요, 선생?” 그가 돌연 물어왔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 녀석을 제가 잘 키우고 보내준 것이리라고…….” 그는 말을 잇기가 힘든 듯 보였다. 그러나 값싼 감상주의도 황혼에 비치는 빌어먹을 눈물도 없었다. 오로지 단단하게 박혀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는 노인의 주름만이, 그 갈색얼굴에 감정조차 깎아낸 화강암처럼 만들어버리는 그 주름만이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존경해야 했으리라. 노년의 안정이란 재물도 환경도 아닌 가부좌를 튼 영혼의 부동자세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끄덕이는가 싶더니 노란 털 뭉치를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아 펼쳐보니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엎드린 채 눈으로 내 발길을 쫓던 늙은 개의 온전한 몸체가 내 무릎 위에 놓여졌다. 눈곱이 낀 눈꺼풀은 닫혀있었고, 입꼬리에는 사람과 같은 경멸이나 조소가 없는 것이 어쩐지 가련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평화롭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죽음이 만들어놓고 갔다. 죽음. 죽음. 죽음. 생명의 가을걷이를 위해 항상 우리들의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이. 나는 개를 노인에게 돌려준 뒤 창고 쪽으로 향했다. 나는 창고에서 삽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노인은 나를 쳐다보더니 묵묵히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현관에서 등산용 신발을 신고 삽을 쥔 채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거리는 한적했다. 거리는 항상 한적할 것이다. 이 내륙에서 도시를 비추는 태양은 사람을 도망치고 싶게 만들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대화 없이 뒷산으로 향했고 노인은 여전히 품에 그것을 안고 있었다. 뒷산 중턱에서 나는 땅을 팠다. 등산로와는 꽤 떨어진 곳이었다. 내가 땅을 파는 모습을 보며 노인은 개를 안은 채 옆에서 오직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 왠지 모를 안도가 애수의 뒷면에서 보이고 있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다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먹지 말 것을. 나는 30분 정도 땅을 팠고, 충분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노인을 쳐다보자 그는 개를 얼굴로 가져가 품더니 노란 털의 냄새를 맡았다. 더 이상 그 개의 냄새가 나지 않을 털의 냄새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판 구덩이 안에 가만히 개를 내려놓았다. 우리는 흙을 덮었고, 태양은 이미 다 져버린 뒤였다. 산속은 까맣고 가끔씩 청록빛이었으며 벌레와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우리는 흙을 덮은 자리 앞에서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멀리서 자동차들이 굴러가는 엔진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도시라는 단어가 유별나게도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시베리아로 가자고 나는 다짐했다. 어떤 시체도 썩지 않을 만큼 추운 곳으로.
내 애절함은 닳고 닳아 불경한 집착이 되었다. 애당초 사랑이란 없었노라. 모든 성애(性愛)가 성욕(性慾)으로 변모하면서 나는 태어났다. 피를 가득 담은 가죽주머니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 나라에서 네온사인이 가장 밝게 빛나는 곳에는, 자신의 등에 일종의 날개가 달려있다고 상상하는―누구의 깃털이든 밟기 위해 혈안이 된 소년들이 담배연기로 자신의 메마른 몸을 감추며 걸어 다닌다. 나는 그늘에 숨어 술병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마셔버렸다. 바다 건너의 일 따위 나는 모르오! 나는 외쳤다. 변명거리가 필요했고 입안에 머금은 것은 온통 핑계뿐이었으므로. 정직을 추구하기 위해 흰 것들에게는 모조리 잉크를 부어주었다. 비단 바다 건너뿐만이 아니라 오만 지평선들의 너머에 있는 것들은 송두리째 모른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돌아오라. 부디 돌아오라. 그대의 죄악이 모두, 죄악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들은 모두 죄악이 되어 끈적거리는 선혈로 웅덩이 진 곳에. 여인들은 잉태하고, 여인들은 손톱을 세우고 잉태한다. 나는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의 아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값싼 단어들은 새로이 만들어져야한다. 그러나 우선은 내리쳐 산산이 박살내어야한다. 나의 잔혹한 욕망들을 말로 만들어내기만 해도 너무 많은 눈물들이 쏟아져 내린다. 오, 부디 나를 동정해주시기를! 너무 많은, 너무 많은 언어들에 잠겨 나의 언어는 목이 졸렸다. 봄 햇살 밑에서 가볍고 얇은 옷을 입고 활보하는 여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혀를 깨문다. 흉기를 품고 사는 것이 나 자신인지 당신들인지, 광기는 투명해질수록 그 밑으로는 혼돈과 모순을 뚝뚝 흘려댄다. 마침내 모순이 더 이상 모순이 아니게 될 때까지 광기는 깨끗해진다. 발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간질 환자처럼 잉크를 퍼부어주었다. 내 병에는 다시 잉크가 차올랐고 나는 마셔버렸다. 나는 시학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학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수첩 페이지를 먹은 염소는 죽어버렸다. 그래서 나도 남은 조각을 집어삼켰다.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술집으로 도망쳤다. 생각해보니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지상의 인간의 손을 붙잡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는 눈부시지 않은 황혼과 같아 위대했고 그 황혼에서는 가끔 날벼락이 쳤다. 그러나 매일 찾아오는 침묵의 새벽이여. 너는 광란이었고 미치광이들의 어머니―차라리 어머니의 치맛자락이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그 이글거리는 것을 경외하는 추한 범죄자였다. 시꺼멓게 중독된 내 심장을 나는 꺼내 바친다. 그 독의 이름은 시(詩)다. 그 중독은 타인의 영혼을 머리 째 집어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 나는 불유쾌하게 부유하거나 늪 위를 걷듯 천천히 침수되거나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왕이 되었다……. 짐이 선포하노니 이 땅에 더 이상의 자비나, 혹은 자비라고 착각되는 것은 없을 지어다! 가신들이여, 짐은 왕정을 부정하노라. 왕정뿐만이 아니라 신정을, 공화제를, 민주제를, 모든 정부를 부정하노라! 오로지 야만만을 행하라고 짐은 명령할 것이다. 폭력과 테러와 반달리즘이 법이며, 또한 아무것도 법이 아닐 지어다! 유일한 지침인 아름다움은 피와 살점과 뼛조각 속에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 내게 바치는 자는 칭송받을 것이다.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 죽이는 어미에게는 짐이 눈물로 키스할 것이다. 약자를 구타해 죽이고 그 살점을 모닥불로 구워먹는 잡배들이 더 많은 식인을 행하도록 보조하라. 아버지를 죽이고 선생을 죽이고 짐에게마저 송곳니를 드러내는 소년에게, 짐은 기꺼이 목을 내어줄 것이다. 부디 모든 것을 원시의 혼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하라……. 그것은 그리도 아름다웠노라. 심지어 내가 왕이 아닐 때에도 그랬노라. 내가 거지에게 주머니를 털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었을 때, 나는 미치도록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왜인지는 몰랐다.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영원히 부랑하는 왕일 것이다.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무언가에게 패배했으나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