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우화羽化의 꿈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렇다면 끝이 안 보이는 어둠과 감금 속에서도 안락을 찾은 채, 그러나 천변만화한 변화를 멈추지도 않은 채 언젠가 고치가 찢어질 것을 굳게 믿을 텐데.” F는 쇠락한 마을광장을 빙글빙글 돌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노을 아래 그 광장은 온통 주황색과 붉은색 투성이였으며 사방에 고철이나 더 이상 쓸 수 없는 목재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있었다. F는 자신이 이 마을광장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를 헤아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셈으로는 구할 수가 없는 숫자였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부터 옅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그 무성한 수염들은 그의 쇄골까지 지저분하게 내려 와있었다. 그는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몰랐고 언제부터 마을광장에서 살았는지도 몰랐으며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죽지도 않고 움직이는 청동상처럼 광장에 붙박여있다는 것이었다. F는 과연 자신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노쇠하여 기억력이 좋지 않아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없어서 뜬금없이 노인으로 생겨나 마을광장에 처박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광장을 돌다가 버려진 유리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것을 햇빛이 반사되도록 비스듬히 들고 자신의 얼굴로 향하자, 쇳물로 만든 것 같은 딱딱하고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 비춰보든 항상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모양이었던 때가 있기나 한가? F는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유리조각을 집어던지고 절망에 빠져 자신의 침낭으로 향했다. 광장 구석의 어느 계단참 밑, 언제나 그늘이 지는 그곳에 F의 침낭과 음식, 몇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었다. F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무너져 내리듯이 침낭 위로 쓰러졌다.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는 눈을 감은 채 또 한 번 같은 문장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상하기 시작한 음식들 위에 날벌레들이 왱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오물과 썩은 야채 따위의 냄새가 지독하게 피어올랐다. F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굶어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고, 이 마을광장에는 여름도 겨울도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꽉 막힌 막다른 골목에 쓰러져있다고 생각해왔고 어느 모로 생각해봐도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오래 전부터 F는 은연중에 자신의 죽음을 희망해왔지만 그의 교묘한 직감은 그가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저주 같이 속삭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F는 침낭 위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 눈을 떴는데, 시선 저 끝에 보이는 벌레 먹은 축축한 널빤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고 F 자신도 그 널빤지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상 그 광장에 놓인 모든 폐기물들이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썩지도 불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심지어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하며 F 자신과 같이 그저 천년만년 그곳에 버려져있기만 했다. 변화의 낌새 같은 것은 이 광장 어디에도 없었다. F는 무의미하게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광장이 늘 노을빛이라는 것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저주도 이미 몇 년을 반복해온 것이었고, 아무리 저주해봤자 해는 지지도 않고 머리 꼭대기에 걸리는 일도 없이 항상 비스듬히 광장과 납덩어리 같은 구름들을 붉게 비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으나 사실은 이 광장의 모든 것이 비수처럼 찔러대는 진실이었다. F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침낭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심지어는 목적도 없이 버려져있는 것 같다고, F는 늘 생각해왔다. 물론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F의 일과라고 해봤자 매일 똑같았던 것이, 잠에서 깨면 노을빛인 광장을 서성거리며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번데기가 되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너무 걸어 다리가 저려오면 침낭에 쓰러지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면서 잠들었다가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은 채 잠에서 깨면 또 이전 그대로인 붉은빛 광장 앞에 황망하게 맞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가끔 분노에 차 도대체 어디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저주를 퍼붓다 주저앉아 다시 울곤 했다. F는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이 신의 저주처럼 생각되었다. 아니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그자의 악의적인 심심풀이 장난이라든가 말이다. 저 널빤지나 깨진 유리조각들, 고철들은 F와 똑같은 처지임에도 절망하고 저주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의식이 없고, 같은 존재라도 F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버려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생각이나 의문조차 버려져있었다! 그러나 F는 그런 널빤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널빤지나 고철 따위가 된다면 꿈도 꾸지 않는 무無와 공空의 세계에서 안락하겠지! 그러나 F는 그 자리에 있는 자체로 침묵하는 사물이 되기보다는 번데기가 되고만 싶다는, 자신도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갈망으로 매일을 울부짖었다. 그는 처절하게 안락을 바랐지만 동시에 절대로 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안주한다는 것이 죄악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러한 선악의 구분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 늙은이는 서성거리고 고함을 지르고 울고 쓰러지며 고통 속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일, 그야말로 매일 매일 반복되었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광장에 나타났다. 그자는 햇빛을 가리려고 밀짚모자를 쓰고, 몹시 닳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팔뚝이나 목덜미가 새까맣게 탄 것이 어떻게 보나 나그네 같았다. 그런데 그는 양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고 맨발에 나무와 끈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털레털레 나타난 것이었다. F는 몹시 놀라 둥그레진 눈동자로 그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그네는 밀짚모자를 추켜올리고 광장을 슥 둘러보더니 F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것이 악마이려나?> F는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장, 말 좀 물읍시다.” 나그네의 목소리는 겉보기보다 훨씬 어리고 카랑카랑한 음색이었다. “나는 이 마을에 들어와 세 시간 가량을 돌아다녔는데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고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건물과 가게들은 멀쩡히 있는데 왜 아무도 이곳에 없는 거요?” F는 그 나그네가 충분히 가까이 왔기 때문에 드디어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나그네의 눈동자는 청회색으로 번쩍거렸고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F는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오래 전에 이웃마을에 돼지농장이 생겼소. 안 그래도 불경기만 지속되던 이 마을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웃마을의 커다란 돼지농장으로 모조리 옮겨가버렸소.” “노인장은 왜 가지 않았소?”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그네가 물었다. “나는 이 광장에서 수 년 간 번데기가 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소.” F의 대답에 나그네는 팔짱을 끼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물었다. “이웃마을에 가면 볼거리가 좀 있소?” “듣기로는 큰 울타리 안에서 다 자란 돼지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갈 때 그것들이 꽥꽥거리는 모습이 볼만하다고 하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위악적이고 높은 목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돼지농장은 이웃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군!” F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주춤거리면서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F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 같이 쉴 곳 모르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언지 아오?” “글쎄, 나는 항상 이 광장에서만 살기 때문에……” “칼과 성냥이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마을에를 가든 사막에를 가든 심지어 눈밭뿐인 설국에를 가든 무서울 게 없지.” “그래서 짐이 없군.” F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 이 마을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성냥뿐이오.” 그렇게 말하더니 나그네는 밑도 끝도 없이 F의 따귀를 있는 힘껏 올려붙이더니 깜짝 놀란 그의 목덜미를 잡아 무시무시한 힘으로 광장 구석에 던져버렸다. 얻어맞고 던져진 F가 얼이 빠진 채 볼을 부여잡고 있는 동안 나그네는 F의 침낭, 잡동사니, 음식, 옷 따위가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거칠게 한 군데로 모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에 불을 긋고 F의 물건더미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면서 침낭과 물건들은 점점 재가 되어갔고 불길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높이 치솟았다. 나그네는 그 꼴을 잠시 보고 있더니, F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밤이 오기 전에 난 떠나야겠소.” 그리고 그는 터벅터벅 광장 밖으로 걷더니 연기라도 된 듯 사라져버렸다. F는 황당하고 겁이 난 채로 불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활기와 함께 공포가 그의 혈관 속을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건들이 다 타버리고 불길이 꺼질 무렵, 갑자기 해가 졌다. 사방이 새까맣고 암청색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떠올랐다. F는 이제 일어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맞는 밤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광장조차도 검은색이었고 어디에도 노을은 남아있지 않았다. F는 광장의 바깥, 멀리 보이는 마을의 현관에 짙은 그림자가 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침엽수와 활엽수들이 마구잡이로 어둠 속에 뭉개져있었고 작은 오솔길이 분명히 그곳에 있을 터였다. <번데기가 되었구나.> 하는 믿음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F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오솔길을 따라 떠나자고, 인생 최초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나타나엘은 몹시 당황해있었다. 지금 그는 어떤 감옥의 철창 안에 있었는데, 몹시 좁고 지저분한 그 감방은 한 사람을 구속시키고 생활하도록 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와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있고 철창이 쳐져있어 보이지도 않는 단 하나 뿐인 창문이나 딱딱한 침대에 들끓는 빈대, 벼룩 따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타나엘이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간수에게 몇 번이나 상황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늘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당신은 구속되었소.> 따위의 대답만, 사실은 대답조차 될 수 없는 말마디만 내뱉는 것이었다. 애당초 사건의 발단부터가 나타나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직장에서 퇴근해 저녁을 먹고 약간의 운동을 한 뒤, 허브티를 마시고 ―지금은 이미 감촉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새벽 즈음엔가 난데없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그의 얼굴에 검은 가죽자루를 씌우고 어디론가 한참을 끌고 가더니 이 감방에 처넣어버린 것이었다. 감옥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제일 먼저 회사의 상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단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근한 일이 없는 나타나엘이 갑자기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면 상사는 분명 불쾌해하면서 전혀 나타나엘에게 이득이 될 리 없는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철창을 붙들고 간수에게 전화기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으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은 구속된 몸이고 전화 따위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소.> 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흥분하여 <나를 납치한 당신들이 도대체 무슨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나는 건실한 직장인이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며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란 말이오. 그리고 도대체 당신들 때문에 내가 직장을 잃게 된다면 그건 누가 보상해줄 거요?> 라고 외치자 간수는 또 한 번 웃으면서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 우리는 바로 그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법기관이오. 당신은 정당한 절차에 의거하여 이곳에 구금되었단 말이오.> 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이었다. 정당한 절차라니? 도대체 언제 그 절차라는 것이 진행되었는지 나타나엘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었다. 나타나엘은 이 답답한 간수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평소에도 그는 매우 이성적인 성격이라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이유와 인과관계를 유추해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빈대가 들끓는 침대에 걸터앉아 혹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구속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저 간수의 말이 완전히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이 감옥은 나타나엘의 정부와는 좁쌀만큼도 상관없는 곳이며 나타나엘을 납치한 그 제복 입은 남자들이나 간수도 나타나엘을 구금시켜놓는 것으로 재물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범법자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 평짜리 감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뒷짐을 지고 감방 안을 빙빙 돌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모략에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타나엘은 살면서 담배꽁초를 길거리 구석에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정도의 범법 밖에는 저지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쳐 체포―그것을 체포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하여 그대로 감방에 던져 넣는 정도라면 그 죄질이 아주 무거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타나엘을 모략중상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나타나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다시 간수에게로 가 말했다. “당신들이 무슨 소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평생을 결백하게 살아온 사람이오. 물론 사람이라면 살아가다 몇 가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저질러온 실수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소. 당연히 이런 감방에 집어 던져질만한 종류의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요. 분명 누군가의 중상모략으로 내가 이 꼴이 된 것이 틀림없으니 당신들이 더 철저히 조사를 한다면 내가 결백하리라는 것이 분명 밝혀질 것이오.” 그러자 간수는 철창 밖에서 나타나엘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고, 게다가 내 소관도 아니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이 감옥에 잡혀 들어왔든 내겐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 직무는 그저 당신이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나타나엘은 놀라서 내뱉었다. “그럼 당신은 내가 무슨 근거로 잡혀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거요?” “물론이오. 보통 나 같은 간수들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어떤 인물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오. 우린 그냥 우리 책임을 다 하고 그에 대한 대가인 월급을 받을 뿐이지.”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로군!” 나타나엘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타나엘이 절망스럽게 웃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자 간수에게는 그 모습이 딱해보였는지 그는 한 마디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가끔 우리도 수감자들이 무슨 죄목으로 잡혀왔는지 아는 방법이 있소. 그런데 그건 당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그 방법이라는 걸 들어나 봅시다.” 나타나엘이 이미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바로 수감자들 자신에게서 듣는 거지.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바로 이 감방에 갇혀있던 자는 자신이 저술하여 배포한 반체제주의 서적 때문에 이곳에 잡혀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소.” “그래서 그는 사상범으로 잡혀온 겁니까?” 나타나엘이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소. 말했다시피 그 양반도 스스로 추측하기에 자신이 잡혀올 만한 이유나 근거가 그 책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그러나 우리 윗사람들이나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실제로 무슨 이유로 그 남자를 구속시켰는지 우리 간수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소.” “그는 어떻게 되었죠?” 그러자 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것 역시 알 도리가 없소. 감옥에서 그 자를 빼내간 요원들은 우리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수감자를 빼가서 어디로, 혹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이 간수들에겐 없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법체계는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하나도 없고 토막 난 기계처럼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로군!” 나타나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마 수감자를 이동시키는 요원들도 자신들이 담당한 수감자가 어디로 이동해야하는지만 알 뿐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모를 거요. 왜냐하면 분명히 그들보다도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테고, 기본적으로 법원에서 오고가는 정보들은 전부 기밀사항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냥 각자 우리의 직무만을 다 할 뿐이오.” “맙소사.” 이제 나타나엘은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이 절망스러운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나타나엘이 무슨 짓을 하든 이 감방에서 더 많은 정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나타나엘은 침대 위에서 한참을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퍼뜩 무언가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절차.” 유레카를 외치듯이 내뱉어진 그 단어에 간수는 나타나엘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말했소.” “그건 사실이오.” “그런데 나는 그 제복 입은 사람들이 내 방에 들이닥칠 때까지 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소송이나 기소가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소.” 그러자 간수는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내가 맞춰보지. 당신은 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한 일이 없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이리라고 주장하려는 거지.” 나타나엘은 동의의 뜻으로 간수의 눈동자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오. 만약 죄인이 자신에 대한 소송절차에 참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죄인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는 짐승이라 피고인이 소송에 참가한다는 것은 법관들이나 혹은 사법체계 자체에 대해서 죄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뜻이오.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수호하고 있는 사법체계란 그야말로 절대 손상시킬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기에, 죄인이 거짓말로서 사법체계를 모독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차단시켜야 하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한 기소가 이루어지고 나면 법은 피고인을 완전히 방치하고, 또 사법체계에 접근할 기회를 온전히 차단시킨 뒤에야 일을 시작하지. 내 생각에 당신이 체포되기 이미 수 달 전부터 법률가와 조사원들이 당신 주변을 온통 뒤지고 다녔을 거요. 단 당신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틀림없이 당신이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확정되면 그때 요원들을 보내 당신을 체포하는 거지.” 나타나엘은 간수가 그렇게 즐거워하며 길게 말을 늘어놓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사법체계라는 것이 그토록 완전무결하며 성스럽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반발심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서 내뱉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변론의 기회 따위는 전혀 없는 거요?” “법은 실수를 하지 않소.” 간수는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타나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입을 다물고 감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철창 안의 짐승 같군!> 나타나엘은 열을 내며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간수의 말대로 법이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타나엘의 삶에서 중대한 범죄행위를 찾아냈다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해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당장 저 간수부터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일이 무얼 위해 행해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고위법관들을 포함하여 법원이라는 기관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실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끔찍한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는데, 만일 사법기관의 일꾼들이 자신들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실수를 해버린다면, 정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변호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감금 당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타나엘이 지금 감방에 있는 것도 사실은 나타나엘과 동명이인인 어떤 자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서류상의 실수로 나타나엘이 그 동명이인의 범죄자와 혼동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동명이인이 뒷골목의 폭력배든 마을 공장의 통장이든 일단 나타나엘의 이름이 적힌 서류에 직인이 찍히고 나면 법관이라는 족속들은 사실을 확인하기는커녕 나타나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다시 조사해볼 의지조차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나타나엘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간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난 더 이상 아는 게 없소. 난 그저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간수일 뿐이오.”
나타나엘은 계속 의미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대화에 지쳐버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높이 난 창을 바라보았는데, 회색의 거무죽죽한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그것이 하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구름은 납빛으로 낮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뜩 나타나엘은 일상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생각이 미쳤는데, 아마 지금쯤 그들은 나타나엘의 행방에 대해 알 수가 없어 당황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법원에서 그들에게 통보를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간수의 말을 들어도 이 사법체계의 형태를 대충 상상해보아도 법원이 나타나엘의 지인들에게 상황을 통보했을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도도하고 자신들은 신성한 법을 모신다는 자만에 부풀어 사소하지만 사실은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도 전연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 일인가. 모르긴 몰라도 직장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지금 나타나엘은 이미 사직처리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호운이 와 나타나엘이 감방에서 벗어나 다시 사회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직위와 재물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타나엘은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 감방을 벗어나는 것이나 자신이 왜 구속되었는지, 법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생각하였듯 나타나엘은 이미 갇힌 짐승처럼 잉여의 존재가 되어 무슨 처벌이 내려지든, 설령 갑자기 나타나엘 자신이 사라져버리든 아무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언제나 닥쳐올 수 있는 것이었어. 게다가 모든 이들에게!” 간수는 나타나엘의 말소리를 듣고 곁눈으로 그를 보더니 다시 정자세로 뒤돌아섰다.
며칠 밤인가가 지났다. 이제 나타나엘은 자신이 지내는 감방에 대해서도 별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감방에 있으나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며칠간 나타나엘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것이었다. 침대에 사는 빈대와 벼룩 때문에 나타나엘의 몸은 온통 울긋불긋해졌지만 나타나엘은 그런 사실에도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타나엘은 더 이상 간수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고, 매일 매일이 날짜나 밤낮의 경계도 없이 혼탁하게 되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타나엘이 실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분명 무언가에 골몰하여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을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사색 따위와 닮은 것이기나 한지도 애매한 일이었다. 그는 그냥 가끔 감방의 시멘트벽을 만져보거나 철창의 금속성 냉기를 느끼며 한없이 무언가에 골몰해있었다. 나타나엘은 분명 창밖을 자주 내다볼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고의로 그런 짓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갈색 제복을 입고 낮은 모자를 쓴 남자가 나타나엘의 감방 앞에 나타났다. 그는 무관심한 눈으로 나타나엘을 슥 쳐다보더니 간수에게로 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간수는 직립한 자세로 남자의 말을 들으며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고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제복의 남자는 금세 떠났고, 나타나엘이 의문의 눈빛으로 간수를 쳐다보자 간수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니오. 그저 당신에 대한 절차가 더 진행됐을 뿐이오.” 나타나엘은 대답을 듣고도 초점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간수 쪽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패배조차도 그다지 패배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밤 나타나엘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돌연 내뱉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의 일들을 쭉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 말하자면 나타나엘이 간수에게 토로했듯이 건실한 직장인에 사회의 구성인물이고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라고 스스로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고 뒤집어보며 사고해보았다. 그런데 뭐가 어찌 되었든 나타나엘은 지금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감방에 갇힌 채 어느 누구도 모를 결과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운명이라는 것이 잔혹한가에 대해서 자문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다소 이상한 것이었다. 운명은 잔혹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운명은 그저 운명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본성대로 별 다른 법칙성도 없이 굴러다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그것을 반항의 묵시하는 눈동자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몇 가지 참담한 이유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참담한 이유라는 것도 자신이 수인이라는 입장에서 보자 애당초 참담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곤 하지.” 나타나엘은 침대에 누운 채 중얼댔다.
어느 새벽 나타나엘이 깊은 잠에 들어있을 때, 간수가 나타나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때문에 나타나엘은 눈을 뜨고 일어났는데, 워낙 감옥의 조명이 어둡고 게다가 막 일어난 참이라 흐린 시야 안에 간수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새로 나타난 두 남자는 얼마 전 찾아왔던 갈색 제복의 남자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타나엘을 쳐다보고 있었고, 간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보시오. 이 분들이 왔다는 건 당신의 법무절차가 거의 끝나간다는 증거요.” “그것은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군.” 나타나엘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간수는 허리춤에 찬 열쇠꾸러미를 꺼내더니 감방의 문을 열었다. 나타나엘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었는데, 제복차림의 남자 둘이 감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타나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한 남자가 나타나엘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당신은 신성한 법의 일부가 되었으니 당신에게 참 잘 된 일이요.” 나타나엘은 그 말을 듣고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은 나타나엘의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처음 나타나엘이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을 때처럼 가죽부대를 머리에 씌웠다. “걸으시오.” 누군가가 말했고, 나타나엘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남자가 나타나엘의 양팔을 잡아주며 방향을 제시했다. “좀 걸어야 할 거요.” 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걸었다. 나타나엘은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고, 무얼 위해 가는 지도 몰랐고, 지금 나타나엘이 밖에 있는지 감옥 안에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타나엘은 그저 자기 발걸음에 집중하며 한 발짝 한 발짝을 떼는 그 구두밑창의 감촉을 신선한 샘물을 마시듯이 즐기고 있었다. 또 한참을 걷자, 나타나엘은 자신이 눈동자를 최대한 아래로 하면 가죽부대의 뚫린 방향으로 자신의 구두와 길바닥을 한정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초록색 일직선 위를 걷고 있었다. 나타나엘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근거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걷고 나자 세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제복의 남자가 나타나엘의 머리에서 가죽부대를 벗겼는데, 나타나엘은 자신이 아주 어둡고 동시에 이상한 흰빛의 조명으로 비춰지는 방 안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 방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두운 흰빛 속에서 교수대 하나가 고고하게, 마치 오래 전에 죽어 뼈만 남은 태곳적 신神의 시체처럼 경건하게 서 있었다.
K는 대지의 끝에 산다. 직각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운 흙집이 그의 집이다. K는 집을 지을 때부터 언젠가 풍랑이 이 절벽을 더 가파르게 깎는다면 그 집이 절벽 채로 바다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인지가 사실 그가 절벽 위에 집을 세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집은 이 세상 그 어느 건물보다도 세계의 끝에 가까운 집이 되었다. 창문을 열면 아래로는 자잘한 암초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오로지 바람에 쓸리는 물결과 한도 끝도 없이 뻗은 수평선만이 보인다. K는 지난겨울을 그 집에서 보냈다. 지형의 극단성 때문인지 그 바닷가의 기후 역시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았다. K는 지난겨울을 마당에서 장작을 들여올 때를 빼면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보냈다. 절벽 위의 겨울은 단 십 분이라도 밖에 나가있는 다면 그대로 얼어붙어 인간 모양의 동상銅像이 될 정도로 혹독하게 추웠다. 지난여름과 가을 쉬지 않고 장작을 패놓은 것이 그를 살린 것이다. 여하간 집안에 비축해두었던 식량이 바닥날 무렵 겨울은 끝났고 수평선 저쪽에서부터 봄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얼음과 눈은 녹아가기 시작했고 절벽 밑에 부딪히는 파도의 소리도 어째서인지 다소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겨울에는 파도가 마치 톱이 되어 절벽을 썰어내려는 듯한 소리만이 들려왔던 것이다. 봄이 시작되자 K는 집의 현관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젖혔다. 새로 돋기 시작하는 새싹의 냄새와 바다의 소금냄새가 뒤섞여 그의 흙집 안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활기찬 생명의 냄새가 가득했다. 그러나 K는 그러한 생명을 받아들이고자 모든 창문을 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알기 위해서 집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었다.
이제 모든 이들의, 영혼의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랑의 계절이 온 것을 K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K에게는 이제 별 의미가 없는 계절이었다. 그도 한때는 겨울이 저물고 생명의 환희가 너울거리는 철이 오면 가죽구두의 끈을 단단히 매고 봇짐도 없이 무작정 어딘가로 발걸음을 향하는 인간이었으나, 어느 땐가 K는 자신이 더 이상 방랑자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고, 그래서 긴 여행 끝에 절벽 위에 흙집을 지었다. 실제로도 그는 꽤나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안락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나무의자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편안한 것이어서는 안 됐고, 100년이고 200년이고 우뚝 서있을 기둥 위에 얹어진 기와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30년이면 풍랑에 쓸려나갈 절벽 위에 따개비 같은 흙집을 지었던 것이다. 아무튼 K의 피가 더는 방랑자일 수 없든 어쩌든 바람 부는 계절은 왔고, 그는 이제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사방에 나타나 이 대지의 끝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K는 바다 쪽으로 열린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년 여름보다 절벽이 훨씬 가팔라져 있었다. 그는 벽난로 위에서 겨울 내내 잠들어있던 목이 긴 부츠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집안에 남은 식량의 개수를 세어보고, 지난겨울동안 얼어붙어 쓸모가 없었던 우물을 퍼 올려보았다. K는 창고 구석에서 배낭을 꺼내 메고 부엌의 커피테이블 위에 있는, 동전과 지폐들이 마구잡이로 담겨있는 물결 모양의 사기그릇에서 돈을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현관 문턱을 넘기 전 그는 잠깐 멈춰서 자신의 수염을 더듬어보았다. 한 철 내내 건드리지 않아 분명 엉망으로 자라있을 것이지만, 면도칼은 가지고 있어도 K의 흙집 그 어디에도 거울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수염 다듬는 것을 포기하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해안과 정대면 하는 곳에 우거진 녹음이 보였고 그 사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K가 수년 간 밟고 다녀 생긴 길이 있었다. K는 마구잡이로 자란 풀잎들과 흙, 자갈 따위를 밟으며 저벅저벅 그 길을 걸었다. K가 가려하는 시장이 있는 작은 마을까지는 약 하루를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배낭에는 대충 두 끼에 해당하는 삶은 콩과 물, 그리고 약간의 꿀이 들어있었다.
아직 선선한 봄 공기 속을 세 시간인가 걷고 있자 풀숲 한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K가 멈춰 서서 그쪽을 돌아보자 무슨 사람 목소리인가가 들리는 것이었다. 잠깐 기다리자 높게 자란 풀숲 속에서 낡은 외투를 입고 밝은 색의 머리칼을 짧게 깎은, 꼬챙이처럼 마른 젊은이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군.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다짜고짜 실례입니다만 저는 이 땅의 끝에 은거하고 있는 현자가 있다는 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혹시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소문으로 그는 짜라투스트라의 제자이며 120년이 넘게 살았다고 하더군요!” K는 입을 다문 채 그 젊은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동자는 생기발랄하여 거의 거만함까지 담고 있는 듯 했으며 큰 키와 마른 체구 덕에 안 그래도 너절한 옷차림이 더욱 낡아보였다. 그가 신고 있는 붉은색 가죽구두는 이슬에 젖고 끊어진 잡초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으며 K 쪽으로 내밀어진 손은 낡은 옷차림과는 달리 하얗고 고와 험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모르겠소. 나는 이곳에 꽤 오래 살았는데 현자 같은 것은 본 일이 없습니다.” K가 말했다. “하지만 땅의 끝이라면 그다지 멀지 않지. 세 시간만 내 반대편으로 걷는다면 바다가 나올 겁니다.” 젊은이는 다소 좌절한 표정을 짓더니 K가 걸어온 오솔길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기야 모두가 그가 사는 곳을 안다면 그건 은거라고 할 수 없겠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어서 가서 해변을 전부 뒤져봐야겠군요.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요.” 젊은이의 말에 K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기 시작했다. 등 뒤편으로 거의 뛰다시피 하는 조급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계속 길을 걷던 K는 우연히 길 한쪽에 난 자두나무를 발견했다. 아직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딱 한 알의 자두가 농익은 채 가지에 매달려있었다. K는 신기하게 생각하며 까치발을 하고 그것을 따 한참을 관찰했다. 썩지도 덜 익지도 않은 먹기 아주 좋게 익은 튼튼한 자두열매였다. K는 그것을 옷자락으로 닦아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산미가 입안에 가득 퍼졌고 과육을 삼키자 지금까지 걸어오느라 쌓인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K는 입안에 남은 씨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자두나무의 건너편 길가에 주머니칼로 구멍을 파, 쥐고 있던 씨를 넣고 흙으로 묻었다. <이렇게 해서 이곳에 두 그루의 자두나무가 생기게 된다면 좋겠군.> K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 걸었으나 아직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K는 오늘은 노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배낭에서 램프와 먹을 것을 꺼내고 길가의 나무에 기대앉았다. 기름램프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채 삶은 콩을 먹고 있는데 마을로 가는 방향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불빛은 점점 다가오면서 두 개로 나뉘고 더 밝아졌는데, 충분히 가까워지자 K는 그것이 각각 램프를 든 두 명의 신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색에 남색이 섞인 제복 차림이었고 키가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둘 다 허리춤에 권총집에 넣어놓은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건장했으나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했다. 그들은 K에게 다가와서 한참 삶은 콩을 먹고 있는 그를 보더니 서로 무슨 말인가를 눈짓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건장한 쪽의 신사가 K에게 말했다. “노인장, 어디서 오는 길이오?” “바다 쪽에서 왔습니다만.” K는 여전히 콩을 우물거리며 앉은 채로 대답했다. “혹시 당신 이름이 프리드리히 K요?” “아니요, 그게 누굽니까?” 이제 K는 한 끼 분량의 콩을 다 먹고 배낭에서 꿀을 담은 병을 꺼내고 있었다. “반체제분자요. 그가 잠적하기 전에 발표한 출판물로 인해 선동된 대학생들이 몇 년째 전국에서 총통각하에 대한 반정부운동을 벌이고 있소.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그 자를 체포해 수도까지 압송하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내려졌소.” “그거 큰일이군요.” K는 병의 뚜껑을 열어 꿀을 딱 한 숟갈 떠먹은 뒤에 병을 다시 잠그며 말했다. “그럼 큰일이지. 우리는 반년 간의 조사 끝에 그 사상범이 당신이 온 바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어.” 뚱뚱한 남자가 키들거리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지만 난 프리드리히 K라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꽤나 오래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그런 유별난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군요.” K는 꿀통을 다시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신사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몹시 피곤합니다. 식사를 끝내고 이 나무 옆에서 자려던 참이었어요. 바다라면 이 오솔길로 내일 아침까지 걷는다면 나올 겁니다.” “피곤하다는데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물읍시다. 당신이 사는 바닷가에는 얼마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소?” “내 경험에 따르면 나밖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K는 이미 나무에 기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군.” 건장한 남자가 뚱뚱한 쪽에게 얼굴을 향하며 중얼거렸다. “정보 자체가 잘못 됐는지도 모르지. 여하간 여기까지 왔으니 우린 그 해변지역을 수색할 의무가 있어.” 뚱뚱한 남자가 재빠른 어투로 단정했다. “휴식 중에 실례했소, 노인장. 마을은 그리 멀지 않으니 내일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을 거요.” 건장한 남자가 이미 램프를 흔들고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K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은 채 그들에게 한 손을 들어보였다. 두 개의 발소리가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멀어지는 가운데 뚱뚱한 남자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길이 너무 좁아 사람조차 다니기 힘드니!”
새벽 빛살에 눈을 뜨자 K가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뱀 한 마리였다. 녀석은 누워있는 K의 배 위에 똬리를 틀고 목을 바짝 세운 채 K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K가 아직 덜 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뱀은 두 가닥으로 갈린 혀를 날름거리며 대답이라도 하는 듯 쉭쉭거리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자 녀석은 머리가 각진 것이 독사였다.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푸른 빛깔이 도는 독니가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내려가 주겠니? 난 이제 일어나야 한다.” 독사는 여전히 혀를 날름거리며 머리를 앞뒤로 흔드는가 싶더니 재빨리 K의 몸에서 내려와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K는 뱀이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느린 몸동작으로 배낭에서 삶은 콩 한 줌을 꺼냈다. 어젯밤과 똑같이 한 줌의 콩과 한 스푼의 꿀을 먹은 뒤 K는 수통에 챙겨온 물로 식도를 씻어냈다. 그리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을 누르듯이 닦고 밤새 이슬이 묻은 옷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지개를 켠 뒤 K는 바닥에서 젖고 있던 배낭을 들어 메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 거의 다 와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와 풀들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고 공기 중에서는 은근히 사람의 살 냄새와 연기 냄새, 오물 냄새 따위가 섞여왔다. 너무 오랜만에 맡는 마을 냄새라 조금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쩐지 몸에 활기가 돌아 K는 배낭을 다시 한 번 들쳐 멨다. 그때 마을 방향에서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린, 이제 막 성년이 됐을까 말까할 앳된 얼굴의 청년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K 영감님! 빌렘 K 영감님!” K는 멈춰 서서 그 청년이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달려오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지난 늦가을에 본 기억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마을에 사는 목수의 도제로, 스승의 명령으로 K의 집 주변에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베어갔었다. 그러나 하필 그 단풍나무가 심어져있던 곳이 K가 집을 짓기 위해 매입한 정말 얼마 되지도 않는 면적의 땅이었기 때문에 목수가 나무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 목수가 찾아왔을 때 K는 애당초 그 나무는 내 것이 아니고 돈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라고 했지만, 목수는 값도 치루지 않고 목재를 가져갈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돌이켜보자면 <빌렘 K씨. 내가 만든 목제 가구 따위를 팔아먹고 산다는 점에서 본다면 나도 한낱 장사치요. 그런데 장사치한테도 상도商道라는 게 있거든. 게다가 나는 장사치일 뿐만 아니라 장인이기도 하오. 물론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럭저럭 알고 있소. 우리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이 집을 지을 때도 우리 가게에서 몇몇 상품들을 사갔지 않소? 그래서 나는 빌렘 K라는 양반이 돈이나 물질 따위에 별 관심이 없고 다소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 인간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바요. 하지만 나도 좋은 목재를 가져가면서 주인이 그저 준다고 입 싹 닦고 좋아라고 가져가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는 말이지. 물건이란 뭐든지 다 자기 고유한 값어치를 갖고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저 단풍나무는 둥치가 꽉 찬 것이 아주 질이 좋은 물건이 될 수 있소. 그러니 나는 저것을 돈을 주고 사가겠다는 말이오.> 하며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았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되자 K는 사실 그 장황한 이야기와 복잡해진 상황 때문에 진이 빠져 차라리 돈을 받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뒤 목수가 K에게 얼마를 원하느냐며 K가 가격을 정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이었다. K가 자신은 나무의 질이나 정당한 가격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며 그다지 관심도 없기에 그저 동화 한 닢을 줘도 상관없으니 제발 알아서 하라고 지친 목소리로 얘기하자 목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선 저 단풍나무를 베어가 확인한 뒤 정확히 정당한 액수를 내 제자 편에 보내겠소. 빌렘 K씨! 당신은 정말 욕심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사람이로군요!>
그러고서 한 철이 지나버린 것이다. 물론 K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아마도 이번 겨울이 너무 혹독해 도무지 말도 타지 않고서는 K의 해안절벽까지 걸어서 올 수 없는 탓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 어귀에서 목수의 도제를 보자 그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K는 청년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K 영감님! 마침 마을에 오시는 길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솔직히 그 해안절벽까지 하루를 꼬박 걸어야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요.” 청년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자네 수고를 덜어주게 됐다니 기쁘군.” K가 수염 때문에 잘 파악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웃으면서 두꺼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지난겨울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어서요! 스승님께서 좋은 나무를 팔아주어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K는 오른손으로 배낭끈을 잡은 채 그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풍나무 값입니다.” 청년은 받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제야 K는 그 두터운 봉투를 집어 아무렇게나 배낭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었다. “고맙네.” 실상 별로 고마운 말투는 아니었다. K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그 단풍나무의 값을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감님께서 마을로 오신 덕분에 제 임무가 예상 외로 이렇게 빨리 끝나버렸군요. 공방에 들르시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청년은 이미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다 마쳤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좋겠군. 자네가 타준 커피가 맛이 좋았던 것을 기억하네. 그런데 나는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들러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어. 내가 저녁에 공방에 들러도 되겠나?” K가 벌써 마을을 향해 걸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저녁이라면 손님도 없어 더 한산할 겁니다. 제가 스승님께 말씀드려두죠.” 그리고 별 의미 없는 잡담을 하는 사이―사실상 주로 떠드는 것은 청년이었고 K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였다― 그들은 앙상한 포도나무 밭을 지나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사실 입구라고 할 만한 현판이나 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냄새가 점점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 K는 자신이 온전히 마을 안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래도 마을은 마을인지라 인간의 군집이 만들어내는 느릿느릿한 혼탁이 마을 전체를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도대체 누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마을광장 중앙의 낡고 초라한 청동상 앞에 도착하자 청년은 K에게 인사를 하고 목수의 공방 쪽으로 달려갔다. K는 청년이 떠난 뒤에도 몇 바퀴인가를 청동상 주변을 돌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풀 한 포기 피어있지 않은 광장에서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흙먼지 섞인 소용돌이를 바라보곤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가난했다. 당장 길가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더라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그을린 얼굴과 거푸집에 넣은 쇳물로 만든 것 같이 단단한 주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을 전체가 가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K는 그런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절벽 위 흙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이러한 마을이라는 것에 K는 다소 만족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난한 만큼 속되지만 그 속됨 역시 가난한 것이었다. 너무 큰 상상력이나 야망을 가진 인간들은 이곳에 살지 않았다. 우연히 이 마을에 태어나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결국엔 떠나버리곤 했다. K는 광장 한구석에 흙빛으로 망가진 채 버려져있는 나무술통을 쳐다보다가 배낭을 다시 들쳐 메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식료품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나무로 벽을 지은 낡은 식료품점 앞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분명 너무 이른 아침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K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에 달아놓은 종이 딸랑거리며 울리자, 계산대 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점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K를 보고 눈이 둥그레지더니 일어서는 것이었다. “에르윈 K씨! 건강하셨군요!” “오랜만일세, 오토.” K가 인사하자 오토라는 사내는 환영한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며 거창하게 웃는 것이었다. “겨울 내내 보이시질 않아 어디로 떠나셨거나 아니면 얼어 죽으신 게 아닌가했습니다!” “지난겨울이 어지간히 추웠어야지. 가을에 모아놓은 음식과 장작으로 벽난로 앞에만 붙어있었네.” 오토는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만족이라는 듯 또 한 번 거하게 웃었다. “식료품을 좀 주문하러 왔네. 내일 아침까지 쥐엄나무 콩 한 말과 꿀 큰 병 하나를 준비해줄 수 있겠나?” “매번 같은 것만 찾으시는군요. 에르윈 씨는 일 년 내내 사순절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오토는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다는 듯 다시 웃었고 K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지는 않아. 집에 약용으로 둔 슈닙스Schnaps가 다 떨어져서 술가게에도 가봐야 한다네.” 오토는 웃음이 많은 사람답게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쥐엄나무 콩과 꿀은 내일 아침까지 포장해놓겠습니다. 그런데 매번 여쭙는 겁니다만, 연세도 있으신데 어떻게 콩 한 말을 지고 집까지 하루를 걸려 걸으십니까? 돈이 좀 들어도 짐꾼을 고용하시죠.” 이번에는 K가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웃었다. “됐네. 기왕 쓰라고 있는 몸 죽기 전까지 다 써야지.” 그러고서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오토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에르윈 씨, 요새 신문은 좀 보셨습니까?” “아니, 내 집까지는 집배원이 오지 않네.” “아무래도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아주 호전적이 됐어요. 좀 배웠다는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하고 있다지만 별로 의미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이 깡촌까지 정부요원 둘이 말을 타고 왔었습니다.” “그런가?” K가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배낭에서 돈 봉투를 꺼내며 물었다. “그들이 에르윈 씨가 사는 해안절벽에 대해 묻더군요. 혹시 거기에 프리드리히 K라는 사람이 산다는 얘기를 들었느냐고요. 그래서 나는 그쪽 땅에는 에르윈 K라는 영감 한 분만 살지 프리드리히라는 사람이 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습죠.” “아마도 그 정부요원이라는 사람들은 나도 만나본 것 같네.” K는 돈 봉투에서 지폐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얼마인가?” “아이고, 돈은 아침에 가져가실 때 내셔도 됩니다.” “돈 들고 다니기 싫어서 그러니까 그냥 받으시게.” 그러자 오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콩과 꿀 값을 받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에르윈 씨.” K는 인사를 하며 가게를 나왔다.
그는 이제 시장가에 있는 술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광장주변보다 더욱 오물과 썩은 양배추 냄새가 심하고 사람들이 많았다. K는 도망치듯이 발걸음을 빨리하며 몇 번인가 슈닙스를 사러 간 적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프리츠 어르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에 서있던 여주인이 인사를 걸어왔다. 여주인은 키가 작았으나 몸집이 다소 크고 늘 웃는 낯인 중년 여자였다. “안녕하시오, 오랜만에 뵙는구려.” “네, 겨울 내내 못 뵀던 것 같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슈닙스 한 병 주시오. 약 먹는 겸 하며 마시던 게 다 떨어졌소.” K는 호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그러자 여주인은 진열장에서 검은 술병을 하나 꺼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화주로 건강관리하시는 모양이죠.” “사람이 건강하려면 생각을 좀 쉬어야할 때도 있고…… 아, 그러고 보니 광장 주변 사는 크라우스 목수가 즐겨 마시는 게 무언지 혹시 아시오?” “크라우스 씨는 매일 저녁마다 도제 분을 보내 아펠바인Apfelwein을 한 병씩 사세요.” “그 양반도 일이 힘드니 술에 기대는 모양이군. 아펠바인도 한 병 주시오. 저녁 때 공방에 들리기로 했으니.” K의 말에 여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주 병을 꺼냈다. K는 술 두 병의 값을 치루고 남은 돈을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남편 분은 잘 지내시오?” “말도 마세요. 요새 그 양반 신문에서 뭘 읽었는지 장사는 집어치우고 매일 맥주홀에서 무슨 노동당 연설에만 빠져있어요.” “나는 신문을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나라가 꽤 소란한 것 같더군.” “소란하기야 소란하지요. 그러나 저 같은 시골 아줌마가 뭘 알겠어요?” 그러면서 여주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K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K는 여주인에게 잘 있으라며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 뒤로도 K는 잡화상과 철물점, 커피원두가게 따위를 돌아다니며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 배낭에 구겨 넣었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점원이나 점주들이 K를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다른 이름으로 K를 불렀다. 그들이 공통되게 알고 있는 것은 K의 성이 K이며 꽤 멀리 떨어진 해안절벽에 홀로 사는 늙은이라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K를 알고 있다 한들 모두가 이름을 다르게 알고 있다면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절대 K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스벤 K 영감님을 만났는데……> <스벤 K가 누군데?> <왜 그 알지 않나. 해안절벽에 혼자 사는 영감님 말이야.> <그 노인 이름은 하인리히 K 아니던가?> <아니, 스벤 K 영감님 말일세. 하인리히 K는 또 누군가?> <나는 스벤 K라는 사람은 몰라. 아무래도 자네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군.> <그 해안가에 스벤 영감님 말고 다른 사람도 살고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는 하인리히 K라는 사람도 분명히 살고 있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K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애당초 그는 아주 가끔만 마을에 들르는 은거하는 늙은이였고, 마을에서 오래 지내거나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갖는 일은 절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K는 크라우스 목수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에게 유달리 잡담을 즐기는 취미 따위는 없었지만 단풍나무에 대한 돈을 받은 것을 포함해서 몇 가지 감정들이 목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미 도제에게 저녁에 들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대로 돌아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K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공방의 현관 위에 달린 전구는 벌써부터 불이 켜져 있었다. K가 세 번 문을 두드리자 도제인 청년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K가 물었다. “물론이죠, 스승님께서도 마침 일을 마치셨습니다.” K는 청년과 함께 공방 안으로 들어가, 가게를 겸하고 있는 공간을 지나 목수의 집에 해당하는 건물의 거실로 들어갔다. 마침 크라우스 목수는 소파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잔 근육이 두드러진 피부는 검게 탔고, 새까만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년남자였다. K가 들어오자 목수는 벌떡 일어나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빌렘 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건강해보이시는군요.” “잘 지내셨소, 크라우스 씨.” “여기 소파에 앉으시지요. 저는 맞은편 의자에 앉겠습니다.” “그런 것보다, 내가 챙겨온 게 좀 있소.” 그러면서 K는 배낭을 뒤져 아펠바인을 한 병 꺼냈다. 그러자 목수는 큰 목청으로 껄껄 웃는 것이었다. “내가 그걸 좋아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슈닙스를 사러 술가게에 들른 참에 여주인께 물었소.” “아무튼 감사합니다. 내 찬장에도 아펠바인이 한 병 더 있는데, 두 병이면 서로 충분하겠죠?” 그 말에 K는 옆에 서있던 청년을 잠깐 보았는데, 청년은 자신은 안 마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웃는 것이었다. “나는 몇 잔이면 족하오. 술을 마시는 건 즐기지만 취하는 건 즐기지 않으니.” K는 그렇게 말하며 아펠바인을 탁자에 놓고 소파에 앉았다. “요한! 유리잔을 두 개 가져와라.” 목수가 도제에게 명령하자 그는 부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목수는 소파 맞은편의 나무의자에 앉더니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보내드린 단풍나무 값이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봉투는 감사히 잘 받았소. 그러나 난 목재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전에도 얘기했듯 동화 한 전이라도 충분했을 거요.” “아니요, 그 나무는 속이 꽉 찬데다가 단단한 것이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한 철 동안 수분을 말리고 가공하여 아주 대단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마음 같아서는 값을 더……” “돈 얘기는 그만 둡시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주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K가 말을 끊자 마침 요한이 유리로 된 커다란 잔을 두 개 갖고 들어왔다.
목수는 K가 사온 아펠바인의 마개를 따서 K와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웠다. “건배하시겠습니까?” “당신과 당신의 충실한 제자 요한 군을 위하여.” K가 읊조리듯 말하자 목수는 크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K는 가볍게 한 모금을 마셨는데 목수를 보자 그는 그 커다란 잔을 단번에 반이나 비우고 탕 하는 소리를 내며 탁자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저녁에 한 잔 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요.” 목수는 변명하듯이 말하며 웃었다. “썩 좋지는 않은 습관이오. 목수 일이 여간 힘들리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몇 가지 나눴고 가끔 구석자리에 앉은 요한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K가 한 잔을 비우는 동안 목수는 두 잔을 비웠고, 술병이 비어갈수록 크라우스 목수는 점점 흥이 나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결국 K가 네 잔을 마실 동안 목수는 찬장에 있던 다른 한 병의 아펠바인까지 꺼내 두 병을 다 비워버렸다. “마을에 살지는 않으시지만 빌렘 씨 같이 현명한 분이 같은 땅에 산다는 것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목수가 얼큰히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K는 딱히 무어라 하지 않고 친절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요새 정세가 영 이상합니다. 저 같이 무식한 목수 놈이 뭘 알겠느냐만 이 구석진 시골 동네에 있는 맥주홀에서까지 허튼 소리를 하는 작자들이 점점 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허튼 소리를 하던가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처럼 까만 머리에 까만 수염을 가진 사람들은 국민도 아니며 고로 국외로 추방해야한다는 미친 소리 따위가 오고간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며 크라우스 목수는 분노와 당혹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하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다가 신문에는 온통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기사 일색입니다.” “듣자하니 술가게 여주인의 남편이 매일 맥주홀에 가서 무슨 노동당의 연설에 빠져있다고 하던데.” “그 친구도 멀쩡하던 인간이 사람을 버려버렸어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총통각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싫어하거나 좋아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죠.” “과연 그렇습니다.” 목수는 K의 말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얼추 끝나갈 무렵 바깥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이만 일어나야겠소. 시간이 꽤 늦었구려.” “가시려고요? 제 집에 빈방이 있습니다. 침대도 마련되어있으니 주무시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소. 게다가 안락한 잠자리와는 영 친하지 않은 몸이라서 말이오. 잘 곳은 이미 정해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빌렘 씨가 어떤 분인지는 저도 대강 아니 강요는 않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퍽 즐거운 술자리였어요.” K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목수와 악수를 나눈 뒤 도제 요한에게도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네는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걸세.” 그러자 요한은 싱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주 건실한 청년이오.” 목수의 마중을 받으며 K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은 저런 청년들이야말로 나라에 이로운 이들임을 크라우스 씨도 알고 계실 거요.” 목수는 술기운에 힘입어 크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리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눈 뒤 K는 배낭을 멘 채 마을 외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K는 마을 외곽에서 마구간이 딸린 어떤 가옥으로 가 현관을 두드렸다. 마구간에는 비싸 보이는 품종의 말이 두 필 묶여있었고 자세히 보니 당나귀도 한 마리가 있었다. 노크 소리에 현관을 연 사람은 마구간 주인이었다. “안녕했는가, 한스.” 한스라고 불린 호리호리하게 생긴 삼십대 남자는 K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K의 손을 잡고 기쁜 듯이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콘라드 K 선생님 아니십니까! 마을에 오셨었군요.” “장을 좀 보고 왔지. 날씨도 풀렸으니 말이야.” “안으로 들어오시죠. 마침 벽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가능하다면 전처럼 마구간을 좀 빌리고 싶네만.” “또 마구간에서 주무시려고요? 안에 묵으실 수 있는 빈방이 있습니다. 침구도 있고요. 따뜻한 곳에서 주무시고 가시죠.” 한스는 호의가 가득 담긴 얼굴로 권했다. 그러나 K는 크라우스 목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자신은 마구간의 짚더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한스는 어떻게든 존경하는 콘라드 K 선생님을 편안한 침대에서 머물게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별 수 없이 좋으실 대로 마구간을 쓰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K는 감사를 표하며 한스에게 저녁인사를 건넨 뒤 현관을 닫고 마구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배낭을 풀고 짚더미 위에 눕자 두 필의 말과 한 필의 당나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K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너희들도 피곤하겠구나.” K는 혼잣말인지 말들에게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짚더미에 눕자마자 마치 기절하듯이 단박에 잠이 드는 것이었다. 네 잔의 아펠바인 덕분에 K의 영혼은 약간 들뜬 상태로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자 말들이 목을 쭉 빼고 기지개를 켜는 소리에 K는 눈을 떴다. 말 한 마리가 짚더미에 누운 K를 말 특유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맑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K는 인사를 하듯이 한참 그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리고 배낭에서 슈닙스를 꺼내 마개를 따고 반 모금을 마셨다. 열기가 뱃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더니 온몸에 퍼졌다. K는 아침이 온 것을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점의 졸음도 남지 않은 정신으로 K는 배낭을 메고 마구간 밖으로 나와 옷자락에 묻은 짚들을 털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해가 어디쯤 떴는지 확인하더니 한스네 집의 현관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얼마 뒤 아직 졸린 눈을 한 한스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아,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마구간 잘 썼네. 말들이 딱 좋은 시간에 깨워주었어.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지만 받아두게.” 그러면서 K는 쥐고 있던 지폐 몇 장을 한스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콘라드 선생님. 집에 방이 있는데도 마구간에서 주무신 걸 생각하면 제가 죄송할 정도인데요.” “어제 시장을 걷다보니 물가가 많이 올랐더군. 많이 정도가 아니지. 빵 한 덩이 가격만 해도 지폐다발이 필요한 상황이던걸. 내가 가진 게 별로 없어 많이는 못 도와주지만 이거라도 받게.” 그러자 한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지폐들을 내려다보더니 마지못해 받는 것이었다. “사실 요새 모두가 힘들기는 합니다. 게다가 마구간에 있는 것이라곤 당나귀 한 마리뿐이니 돈이 되지도 않고요…… 얼마 전 두 신사분이 마구간 임대료를 내고 말을 두 마리 묶어두고 가서 오랜만에 돈을 좀 만져보기는 했습니다. 아무튼 콘라드 선생님 뜻이 그러시다면 부끄럽지만 받아두도록 하겠습니다.” K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스와 악수를 하고 마구간을 떠났다.
K는 그대로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가게는 일찍부터 열려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잘 잤나, 오토.” 계산대 뒤에서 앉은 채 졸고 있던 오토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 에르윈 씨, 좋은 아침입니다.” “쥐엄나무 콩 한 말과 꿀을 가지러 왔네.”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일찍 오셨군요.” 오토는 창고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K는 오토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기다리며 배낭을 벗어 바닥에 두고 활짝 열었다. 안에는 커피원두와 슈닙스 한 병, 수통과 꿀이 든 병 등 그 외 잡다한 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K는 그것들을 배낭 한쪽으로 몰아 꽤 큰 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정말 혼자서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토가 어깨에 콩 한 말을 지고 나오며 물었다. “매번 그랬는걸.” K는 짧게 대답하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이 안에 좀 넣어주게.” K가 배낭의 입구를 벌리면서 말했다. 오토는 어깨를 숙이면서 콩을 내려 배낭의 공간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배낭 안의 공간이 꽉 찼다. “이걸 메고 꼬박 하루를 걸으시면 등이 휘실까 걱정입니다.” “걱정 말게. 이 몸도 언젠가 못 쓰게 되면 그땐 버리면 되니.” 그 말에 오토는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꿀 말인데요, 좀 특별한 걸 준비해봤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 에르윈 씨는 늘 쥐엄나무 콩과 꿀 밖에 안 드시니 영양소가 부족하실 것 같아서요. 꽤나 고생했지만 석청을 한 병 구해놨습니다.” “그거 고맙군. 그런데 비싸지는 않던가? 어제 주었던 값이 모자랐을 것 같은데.” 그러자 오토는 목청 좋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래 뵈도 장사꾼입니다. 손해 보는 일은 안 합니다.” 그 말에 K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K는 석청이 든 병도 배낭에 넣고 입구를 잠근 뒤 메며 일어섰다. 역시 무겁기는 무거워 발목에 힘을 주어야했다.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오토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K는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콩 한 말과 술병 따위의 무게에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일어나서 마셨던 슈닙스 덕분인지 이상하게 몸이 가볍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미 노인이 된 K의 나이를 생각하면 신기로운 일이었다. 그는 이런 발걸음 속도라면 귀로는 해가 지기 전에 끝나겠노라고 생각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태양은 아직 대각선으로 빛을 비추며 나뭇잎과 풀잎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짙은 이슬과 녹음의 냄새가 나고 K의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를 제외하면 새들 지저귀는 소리뿐이었다. 몇 시간인가를 계속 걷자 오솔길 한복판에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생김세가 익숙한 놈이었다. “안녕, 또 보는구나.” K가 말했다. 독사는 K를 바라보며 쉿쉿거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두 번이나 보게 된 것도 인연이니,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 언젠가 내가 콩 한 말도 짊어지지 못할 정도로 몸이 낡아버리면, 네가 와서 내 발목을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K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독사 녀석은 8자를 그리며 머리를 흔들더니 혀를 날름거린 뒤 길섶으로 사라져버렸다.
걷는 동안 정오가 지나고 날씨가 초봄 치고는 무척 따듯해졌다. K는 스스로도 이렇게 성큼성큼 잘 걸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화주가 제대로 몸에 돌았나?> 그는 자문하며 계속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걷던 와중 K는 자신이 올 때 신기한 자두를 따먹었던 자두나무와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역시 계절에 맞게 단 한 알의 열매도 달려있지 않았다. K는 자신이 헛것을 먹었었나 하고 의아해했다. 그러고서는 자두나무의 맞은편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아주 작게 자두나무의 싹이 돋아있었다. <내가 헛것을 먹은 건 아니었군.> K는 싹을 잠시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이 될 무렵 K는 숲을 벗어나 어둠 속의 절벽과 자신의 집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이제 소금냄새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아득히 깊은 곳에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파도소리가 났다. K의 집은 그가 집을 나올 때와 다름없이 현관과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으며, 그것을 보자 하루 간의 피로가 순식간에 K의 양 어깨와 다리에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K는 빛도 없는 길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눈에 띈 것이 있었는데, 현관 바로 앞에 놓인 두 개의 봉투였다. K는 그것을 집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현관을 닫고, 우선 배낭을 바닥에 내렸다. 어깨가 갑자기 중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가벼웠다. 그리고 그는 두 개의 봉투를 안락의자 옆에 있는 다탁에 던져놓고, 집안을 한 바퀴 돌며 창문을 모두 닫았다. 집안에서도 소금과 바다 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물건 정리는 다음 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배낭에서 이미 거의 바닥이 난 꿀 병만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기름램프에 불을 붙여 안락의자 옆 탁자에 놓았으며 장작과 마른가지들을 들고 와 벽난로에 불을 켰다. 그 뒤 창고에서 쥐엄나무 콩 한 컵을 가져와 부엌에 두면서 냄비에 물을 담아 벽난로 안에 설치된 철제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서야 K는 무너지듯이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양 눈을 지그시 누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방이 적막하고 어두웠다.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동안을 가만히 벽난로만 쳐다보다가,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탁자 위에 있는 봉투들을 뜯었다. 그는 먼저 화려하게 정부각인이 박힌 봉투를 뜯었는데, 그 봉투에는 잉크로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거나 프리드리히 K일 경우에만 열어볼 것>이라고 급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한 장의 종이와 여백에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접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먼저 아무 무늬도 없는 종이에는 <당신이 프리드리히 K일 경우에만 명령서를 열 것. 만약 아니라면 프리드리히 K에게 전할 것. 부득이하게 당신의 집을 조사했으며 당신이 프리드리히 K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에르윈 K라는 증거도 없었기에 이 노트를 남김.>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한 장의 명령서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법원 출두 명령서. 당신은 정당한 법률에 의거하여 체포된 신분이며 최대한 빨리 가까운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으로 출두하여 자신이 프리드리히 K라는 것을 증명할 것. 총통 직인. 이 명령서는 총통각하의 명령으로 제작되었음을 증명함.>
K는 그것을 다시 탁자에 놓고 다른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문양이나 직인 따위는 전혀 없는, 값싼 종이에 적힌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 흙집에 사는 당신께서 분명 소문의 현자이시리라 생각하여 편지를 남깁니다. 저는 베를린에서 반전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지금 정부는 한 사람의 악마적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호전적이고 배타적으로 변질되어버렸으며, 국민들을 선동하여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키고 민족주의적 인종청소를 벌일 분위기입니다. 우연히 풍문을 들으니 우리 젊은 대학생들이 정신적 지침서로 삼고 있는 명저名著의 저자 프리드리히 K의 스승님이 바로 당신이라는 이야기에 여기까지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였지만 분명 당신께서는 우리 국민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타락한 정부를 분쇄할 수 있는 분이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베를린으로 오셔서 우리들을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국민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분명 이번 세기 최악의 비극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하 저희들이 활동하고 있는 베를린의 맥주홀 주소를 남깁니다.> 그리고 편지의 여백에는 어느 맥주홀의 주소가 남겨져있었다.
K는 두 개의 봉투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전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깍지를 끼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만 멍하니 벽난로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십 분인가 이십 분이 지나자 K는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편지와 명령서, 봉투 따위를 전부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 그것들을 전부 불길 속으로 집어넣어버렸다.
K는 부엌으로 가서 작은 사기잔과 슈닙스를 꺼내 안락의자로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잔 가득히 슈닙스를 따랐고, 코밑으로 잔을 가져가 냄새를 맡더니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K는 팔걸이에 양 팔을 올려놓고 더욱 깊숙이 안락의자 속에 파묻힌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창문에는 바닷바람이 부딪치고 있었다.
벽난로 쪽에서 냄비의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K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끝.
여름이 왔다. 봄이 지나가는 동안 K의 집에는 누구도 방문한 일이 없었다. 아직 쥐엄나무 콩도 바닥나지 않았고, 석청 역시 삼분의 일 병 가량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K는 봄에 자신이 불살라버린 두 통의 편지에 대해서는 일치감치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었고, 유일하게 먹는 음식인 삶은 콩과 꿀은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끼만을 먹었다. 한 가지 다소 신경 쓰이는 것은 집에 남아있던 것과 초봄에 새로 사온 것을 합쳐 1.5병 정도가 있던 슈닙스가 벌써부터 거의 다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술을 마시는 일이 늘었나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마셔버린 것은 마셔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삼 일에 한 번씩 그는 집 전체를 청소하고 매일 같이 장작을 패며, 남는 시간에는 창문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거나 점점 가팔라지고 있는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된 뒤로 시간이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속도에 대해서도 둔감해지고 있다고 K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날들은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마당을 쓸던 K는 처음 들어보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보았다. 전투기들로 보이는 편대가 일직선의 구름을 남기며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질을 멈추고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위를 보자, 더 높은 곳에서는 폭격기 편대가 똑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날고 있었다. 그것들은 굉장히 높은 곳에 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천둥처럼 긴 굉음을 땅과 바다를 향해 무작위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문득 K는 자신이 초봄에 태워버렸던 편지들 중 한 통에 대해 떠올렸다. 맥주홀에서 모여 반전시위를 한다던 그 대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노동당 연설에 심취했다던 술가게 여주인의 남편은? 검은 턱수염을 가진 크라우스 목수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K는 자신에게 그런 것을 궁금해 할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두 편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K는 하늘을 보며 멀거니 서있었다. 천둥 같은 굉음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K는 잠시간을 목상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비질을 끝낸 뒤, 더워지는 날씨에 피로를 느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K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많은 독자들을 나로부터 떠나게 할 것이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때부터 12월의 눈보라까지 K는 늘 악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일은 내가 K를 그다지 악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천성은 헤엄을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처절하고 잔인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하는 내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피 냄새를 맡으면 피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희미한 별이 내려준 잔인성이 아닌가 싶다. 대양은 난폭할 때도 고요할 때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대양에 사는 것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난폭하기만 하다. K는 신이 자신에게 악인의 낙인을 찍기라도 한 듯 송곳니를 드러내고 불경한 주먹을 쥔 채 평생을 살았으며 인간의 자비를 믿는 독자들은 몹시도 그를 증오하리라.
2.
내 삶은 독물과 지네 따위의 해충들이 무릎까지 넘쳐흐르는 끔찍하고 흥청거리는 사육제였다. 가끔 그 독충들은 내 늑골을 열고 나의 심장 속에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누가 삶을 마음대로 갈아치운단 말인가?
내 삶을 독충들의 둥지라고 단언하는 것을 오만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혀는 이미 독두꺼비의 혀처럼 늘어나버렸고 내 타고난 혐오로 인하여 당신들을 소름끼치게 싫어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처음 그 독물과 해충들의 즙을 흠뻑 마셨을 때, 내 살은 아직 여리고 내 눈동자는 회색으로 영롱했었다. 그러나 곧 불거진 뼈들이 살과 근육을 뚫고 위협적으로 튀어나왔으며, 내 어렸던 눈동자는 독을 가진 파충류의 눈동자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슬픔을 배출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내 피부를 째어 검은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어머니는 나의 입맞춤에 숨을 거뒀다. 끔찍한 독이 그녀의 피부 속으로, 혈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환희하며 적도의 샤먼 같은 춤을 추었다.
그 뒤로 모든 아름다움들이 일제히 눈꺼풀을 열었다. 그녀들은 품에 안으면 하나같이 안구가 없는 눈구멍과 힘없이 열린 입으로 새까만 독을 뚝뚝 흘리며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들을 독차지한 기쁨으로 나의 삶은 한 점의 두려움도 없게 되었도다! 나는 죽음이 내 육신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 같은 마음으로 나는 온 마을의 그늘에서 살았다. 밤이 오면 희멀건 빛이 비추는 창문으로 다가가 병에 걸린 아이들을 구경하고 건강한 아이들에게는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독과 해충의 즙이 내 가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걸어 다니는 소라껍질이었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였으며 그 안에 있는 것은 형태 없는 저주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도 치명적인 자유였고 터져 흐르는 기쁨이었다.
나는 햇볕이 비추는 낮에는 그늘 밑에서 망가진 수레바퀴처럼 홀로 산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밤이 내리면 나는 내 나라가 도래했다고 사방팔방으로 굴러나간다. 나는 주로 밤에 길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먹고 산다. 아이들은 연하고 부드러워 그 무엇보다도 악덕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아이들이 곧 날카로운 비수를 쥐고 부모살해를 저지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부족함이 없이 산다.
가끔 어두운 십자로에는 나의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나는 굳이 그것을 주워 모으지는 않는다. 내게는 이미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흩어진 그림자들도 나름의 나이기에 그들이 하는 일 역시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매번 불경한 노래를 중얼대며 방랑자가 오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둠 속 공허에 앉아있을 때 이따금 나의 아버지가 내게 속삭인다. 오랫동안 그가 누구인가를 고민했고 나는 마침내 그 답을 찾은 것이다. 그는 저 하늘에 있는 영령들의 유일한 주인이었고, 틀림없이 그가 나를 이러하게 낳은 것이다.
나는 뿌리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더는 빗물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나는 뿌리인지라 계속 마셔야만 한다. 이대로 가면 내 위에 뻗은 나의 몸체와 머리가 썩어버릴 것이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뿌리라서 물을 마시도록만 설계되었고 입을 다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절망적인 마음에 내 몸체나 머리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나는 계속 물을 마시기만 하는 것이다. 내 모두가 썩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방법이 없다. 가끔 내가 있는 곳까지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그러나 우리는 뿌리일 뿐이지 않은가」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전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익사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계속 물만 마시는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이건만 사실 우리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도대체 며칠 째 계속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다보면 불어터져 썩기 전에 흙 째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난 죽기 전에 한 번은 바깥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난 뿌리로 태어난 뒤 단 한 번도 흙 속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다. 게다가 사실은 바깥세상이라는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뿌리이기 때문에 땅 속에만 있는 것이 숙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또 다른 운명이 숙명을 밀어내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운명들이 혼돈의 모습을 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 단순히 무질서한 우연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지 우연이라고 부를지, 나로서는 판단할 도리가 없다. 나는 그저 물을 마시고 줄기로 올려 보내는 뿌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나 철학은 나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도대체 며칠간인지 몇 주 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익사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을 위해 설계된 나의 존재조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런저런 고민이 떠오르는 것이다. 애당초 비란 왜 오는 것인가? 우리 식물들이 살기 위해서 비가 내리는 것은 축복과 같은 일이지만 이렇게 몸체가 썩어버릴 정도로 비가 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가 오고 오지 않고 하는 것은 이치랑은 별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은 그냥 무작위하게 퍼붓거나 퍼붓지 않거나, 아무 당위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오로지 물을 마시게만 설계된 것도 아무런 정당성이나 계획도 없는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본능적으로 계속 살기를 원하지만 이 세계의 환경이나 심지어는 나의 존재형태조차도 내가 살고 말고 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참으로 우연하고 무자비한 것이다. 원론적으로 파고들자면 애당초 내가 태어난 것에조차 이유가 있기나 하느냔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퍼붓는 빗물로 인하여 이미 나의 몇 가닥의 뿌리는 썩어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내 위로 솟은 줄기와 잎들이 죽음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고 나는 몹시 심란하다. 나는 내 유일한 동료인 내 가까이로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에게 짧고 툭툭 끊어지는 한탄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상의 생명들이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 사는 것들이 전부 홍수 속에서 휩쓸려 죽어버린다고 한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점점 썩어가면서 과연 내가 지은 죄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기억에 있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차별하게 일어나버린 나의 탄생뿐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어쩌면 얼마 전에. 한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 나는 그가 시집의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며 읽었다고 명확히 기억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잉잉거리는 날벌레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연못 위에 꽤나 오랫동안 떠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당초 과거라는 것은 잘려진 반죽처럼 토막토막 나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건의 시간대를 특정시키는 것이 내겐 커다란 골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는 것인데―그런데 어쩌면 보들레르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그 낭송하는 목소리인지 날벌레의 날갯소리인지가 불어의 어휘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낭송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연못가에 핀 홍련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시 대여섯 편을 읽더니 떠났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온 일이 없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이해하지도 못하는 불어 어휘의 조각조각을 흥얼거리면서 연못 위에 떠있다. 그리고 철이 바뀔 때마다 홍련은 피는 위치가 달라진다. 가끔은 내 시선 밖에서 피어있는 듯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우울하거나 화가 나서 몸을 뒤틀어 물결을 만들곤 하는데 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 그러나 또 철이 지나면 홍련은 무작위하게 아무 곳에나, 딱 한 송이만 피는 것이므로 기다림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다림이 미덕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몸도 한 때는 단단하고 연못 위에 똑바로 서있었다. 그러나 홍련이라거나 어떤 시를 읽는 소년이라거나 불어어휘 따위를 기다리는 사이 몸은 물에 불어 물렁물렁해졌고 나는 이미 몸의 반 정도를 연못 속에 처박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과거란 혼란스러운 것이라서 얼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랭보를 읽던 소년 이후로 어느 누구도 내 위에 올라탄 일이 없다. 내 나무 몸체에 물이 스며들어 천천히 침수하는 내내 연꽃들은 피었다가 순식간에 죽었고 그 뒤 죽음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다시 피어났다. 그러나 나는 뻣뻣한 정자亭子라서 그러한 죽음과 부활의 기적을 기대할 수도 없는 몸이다. 나는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불어의 어휘들을 중얼대고 있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의 기척 따위는 없다. 과연 내 삶도 한때는 꿀과 술이 넘치는 축제였다거나 갑판에 끌어내려진 알바트로스처럼 비극적인 것일 수도 있을까 싶지만 그것은 허황된 망상일 뿐이고 내 기억은 여전히 시집을 읽던 단 한 명의 소년에게만 못박혀있고 몸은 점점 침수되는 중이다. 언젠가 내가 완전히 물에 잠겨버린다면 이 연못이 그리 깊지 않은 관계로 지붕만이 우스꽝스럽게 수면 위로 솟아있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물속의 녹색 이끼나 올챙이들만을 쳐다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련은 여기저기서 필 테지만, 나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반쯤 침수된 내 위에서, 앞으로도 누군가가 시를 읽는 일은 없을 것이고, 단 한 가지 기다림에 대한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연못 속에서 나뭇결이 완전히 녹아 흩어져버리는 것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일지는 나로서는 전연 알 수가 없다.
1.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 어떤 살아있는 자를 위함도 아니다.
어느 동물원이라는 오브제
우리 동물원을 찾아주신 단 한 명의 숙녀 분! 이 동물원을 책임지는 원장으로서 우리 모든 직원들을 대표해 크나 큰 환영의 인사를 표합니다! 보아하니 대단히 어리둥절하신 모양이군요. 그럴 법도 합니다, 우리 동물원의 이 세계적인 크기와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전혀 유명하지도―사실은 <유명>이라는 단어조차 쓰기가 부끄럽죠!―, 심지어 그 누군가에게 알려진 일도 단 한 번도 없어 실상 숙녀 분이 우리 동물원의 첫 번째 관람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아마 숙녀 분께서는 산에서 길을 잃으셨던 모양이죠! 그 등산복과 등산지팡이, 그리고 산들로부터 둘러싸여진 이 드넓은 평지에 뜬금없이 세워진 거대한! 그야말로 거대한 건축물을 앞에 두고 지으시고 있는 그 어리벙벙한 표정을 보니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우리 동물원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답니다.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저와 수십 명의 직원들―전문 관리인과 청소부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무슨 비밀스런 연구소나 존재를 숨기고 있는 정부시설일 것이라는 생각은 말아주세요.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동물원의 존재를 숨긴 일이 없답니다. 다만, 그 누구도 우리의 동물원에 대해 알지 못해 언급하지 않으니 굳이 저나 직원들이 밖에서도 이 동물원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뿐이죠. 사실 우리는 이곳에서 일하면서도 <이 장소>와 <이 건물>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답니다.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우리 동물원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우리들 직원 일동과 과거 이 동물원에서 일했던, 지금 동물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뿐이랍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죠, 슬픈 일입니다만. 여하간! 이곳은 그저 동물원일 뿐이랍니다. 그것도 아주 크고 대단한 동물원이죠! 오로지 관람객의 유희만을 위해 만들어진 평범한 오락시설이에요. 아하, 지금 숙녀 분께서는 「이 불가사의한 원장이라는 작자는 계속해서 동물원, 동물원 하며 언급하고 있는데 왜 어디에도 동물이나 철창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의문입니다! 동물원이라면 물론 시각적 향락을 위한 동물들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동물들을 보시기 전에, 제가 이 동물원의 유구한 역사에 대하여 짧게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아! 감사합니다! 시작은 200년 하고도 50년 전으로 돌아 가야합니다. 250년 전 이 동물원의 창립자이자 첫 번째 원장이었던 Mr. F는 전 세계의 돈을 모조리 쓸어 담은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비열한 비즈니스맨이었답니다. 돈다발로 콜로세움을 서너 개 세워도 지폐가 한참 남을 만큼 돈이란 돈은 모조리 벌어들인 그는, 말년에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이제 세상의 온갖 희열과 쾌락과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맛보았다! 그리고 이제 내가 말년에 달했으니,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남은 돈을 써야하지 않겠는가? 라고요.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의 모범이 아닙니까? 그렇고말고요. 그리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돈을 써야 사람들에게 가장 중대한 이익을 줄 수 있을까? 몇 달의 고민과 철학자, 법학자, 교수, 과학자, 시인, 인문학자 등 수 많은 인텔리전스들과의 논의 끝에 그는 동물원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을 엄청난 동물원을요! 그는 즉시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를 매입하고 건축가들과 수천 명의 인부들을 즉시 고용했지요. 지금 눈앞에 보고 계시는 이 거대하고 알록달록한, 고딕풍의 드높은 성과 그 성벽에 그려진 현대미술풍의 그림들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이 건물이 우리 동물원의 중심이자 가장 자랑스러운 볼거리죠! 아무튼 그 후에 Mr. F는 저명한 생물학자들을 위시한 몇 명의 과학자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앞서 말씀드렸듯 시각적 향락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이익>을 이 동물원의 테마로 삼기 위해서 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아, 미리 말씀드려버리면 재미가 없지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눈앞에서 그것을 맞이할 수 있답니다!
예? 관람료요? 아하, 무용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아무래도 제가 Mr. F의 그 무시무시한 재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드리지 않은 탓일지도 모릅니다. 관람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가 죽고서도 약 230년간 은행에 넣어놓은 그의 전 재산은 계속해서 불어나는 중입니다. 몇몇의 훌륭한 펀드 회사와 브로커들, 회계사들에게 그 금액이 연결되어있긴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를 제외해버려도 단순 은행 이자만으로도 Mr. F의 재산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고, 실상 저를 포함한 우리 동물원 직원들의 급여도 그 이자액만으로 넘쳐 충분할 정도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굳이 고귀하신 관람객 분께 관람료를 받을 필요가 있나요! 돈에 대해서라면 이 동물원은 유토피아나 다름없습니다. 자, 따라오시죠. 해자 위에 걸쳐진 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성城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성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성 뒤편에는 항상 뷔페와 요리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식당이 있답니다. 물론 음식도 모두 무료입니다! 보아하니 산을 헤매시느라 배를 곪으신 모양인데, 우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무엇을 하든 일단 사람은 먹고 봐야지요. 성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걷게 될 것입니다만,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여전히 이 성의 크기에 놀라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정말 엄청난 금액과 인력이 동원됐지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Mr. F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장 중대한 이익>을 위한 것이랍니다. 식사 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면 제 말뜻을 이해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자, 이곳이 식당입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양식, 일식, 중식, 한식, 게다가 피자와 파스타 등의 갖가지 지중해 요리까지! 저희는 곧 어쩌면 방문하실 지도 모르는 아프리카계 관람객들을 위하여 아프리카 식 요리도 추가할 예정입니다. 저 부엌 쪽에서 울리는 요리사들의 열띠고 즐거운 소음이 들리시지요? 저희는 모두 모든 일을 관람객 여러분의 유희를 위해 행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접시를 들고 뷔페 쪽으로 가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 저기 건물유지관리인인 K군이 마침 늦은 점심식사를 들고 있군요. 그의 아버지인 K시니어 씨도 15년 전에 같은 일을 하셨지요. 만일 폐가 되지 않는다면 숙녀 분께서 식사를 끝마치신 뒤 K군에게 이 성과 건축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절대 지루할 일은 없을 것이리라고 제가 보증하지요! 하지만 우선은 마음껏 식사를 즐겨주십시오. 아, 사실 저는 이미 두 시간 전에 점심식사를 마쳤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식사를 즐겨주세요.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그거 참 다행이로군요! 저는 잠시 K군과 몇 가지 대화를 나누고 왔습니다. 한 시간 뒤에 해자 밖의 헬기 착륙장에 헬기가 도착할거라고 하더군요. 네? 아, 그야 물론 새로운 식자재들과 동물원 내의 기숙사에서 거주 중인 직원들의 생필품을 싣고 오는 것이지요. 사실은 어제 도착했어야하는 헬기입니다만, 동물원 내 생태계조율사인 A양이 주문한 담배가 워낙 희귀한 것이다 보니 재고를 찾느라 하루가 더 걸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의 흡연취향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생태계조율사라는 일자리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우리 동물원 직원일동은 차라리 그녀가 희귀담배만으로 만족하는 것에 감사를 표해야할 정도입니다. 잠시 실례―K군! 이쪽으로 좀 와주겠나? 고맙네. 괜찮다면 우리 동물원 창립 이래 첫 번째 관람객이신 이 숙녀 분께 자네가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드릴 수 있겠는가? 좋아, 나는 자네의 그러한 태도를 아주 좋아하네.
「안녕하십니까, 손님! 저희 동물원을 찾아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 동물원의 중심인 성곽을 유지-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K라고 합니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아, 그것은 퍽 다행인 일입니다. 이 식당의 요리사들은 바로 그러한 손님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하여 항상 열성을 다하고 있지요. 또한 동물원에서 거주하는 모든 직원들을 위해서도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드리자면, 사실 <건물유지관리인>이라는 제 직함이 주는 뉘앙스에 비해 제 업무는 굉장히 유기적으로 모든 직원들과 관련되어있답니다. 이 건물, 즉 이 성곽과 해자와 다리와 울타리와 헬기착륙장에 식당과 기숙사까지 모든 건물들을 각각의 기능과 역할에 맞게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저의 일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곽에 대해서는, 내부의 상황이 하루도 빠짐없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생태계조율사인 A양을 비롯하여 원내의 모든 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청소부들과도 항상 긴밀한 연락태세를 취해야만 한답니다! 그래도 사실 저의 아버지 때에 비하면 일이 쉬워진 편이죠. 대표적인 예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성내의 낮과 밤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수동으로 자외선발광장치를 조작해야했지만, 10년 전 대대적인 지붕공사가 있은 뒤로는 현실세계의 낮과 밤에 맞춰 각각의 모든 기와들의 투명도가 자동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놀라운 기술의 발전이죠! 말씀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성이 바로 동물원이며, 동물원이 바로 성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Mr. F의 위대한 의지가 담긴 이 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는 셈입니다. 고로 모든 최첨단 기술과 인력이 성의 건전한 상태를 위하여 동원되어야하며 곧 저의 업무는 이 위대한 정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과 그 내부를 완벽하게, 그리고 언제나 최고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동물원 그 자체와 유기적 연결을 갖는 것이랍니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 정도로 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그만 너무 열성적으로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손님을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디 용서하십시오, 저는 정말 너무도 큰 자부심을 제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기에 이런 실수를 해버렸다고 말입니다!」
훌륭한 설명이었네 K군!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이 숙녀 분께서는 자네의 설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군. 차라리 자네의 총기 넘치는 눈빛에 감명까지 받으셨다고 하시는걸! 예, 그렇습니다. K군의 업무는 대단히 다각적이고 유기적으로 동물원 전체와 연결되어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광범위한 업무체계를 담당하는 것은 K군 뿐만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A양이라던가, 사실은 말단의 계단 청소부마저도, 우리 동물원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의 업무는 <동물원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상은 모두가 모두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전원이 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단 1초라도 모두가 모두에 대한 연결 상태를 차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원이라는 곳은 생물을 다루는 곳입니다! 게다가 특히 우리 동물원의 경우는 그 시시각각 변하는 <생물들>의 존재여건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둥근 산맥으로 고립된 이 동물원은 그야말로 독립된 하나의 완전한 세계인 것입니다. 원시우주를 구성하던 질료들 중 단 하나의 질료의 수치가 지금과 티클 만큼이라도 달랐다면 우주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느니 하는 천문학자들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동물원의 중심인 성으로 가보실까요? 아 접시는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대기하고 있는 식당직원이 전부 정리할 것이니까요. K군, 자네는 업무로 복귀해주게나. 그럼 가실까요. 저 알록달록하고 웅장한 성 안에 세계의 그 어떤 동물원보다도 중대하고 소름끼치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자연의 궁극적 도달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그것을 알아채고 우주를 향해 로켓을 쏘아대고 있지요. 그러나 아직 달에조차 식민지를 건설하지 못한 우리는, 실상 이 닫힌 행성 안에 갇혀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랍니다. Mr. F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엄청난 재력과 첨단기술을 다 가져도,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행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절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는 대단한 비즈니스맨이면서 동시에 철학가적 기질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달에, 화성에, 그리고 은하계 넘어서 까지 식민지를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실존적으로 항상 감옥에 갇힌 존재랍니다. 감옥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걸 깨닫고 나면 설령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한 평짜리 감옥에 갇히든, 자신이 자유인인 것처럼 드넓은 사막을 방황하든 별 차이가 없는 것이었어요. 문제는 그것이었습니다. 자유란 어디서 오는가? 그런데 자유는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습니다. 온몸을 흐르는 혈액의 값을 전부 치러야만 스스로로부터 자유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이고 위험하며 고통스러운 자유가 말입니다. 그렇게 치고 보면 <자유>라는 단어는 그 단어의 본질에 비해 너무 값싸고 가볍게, 소시민적으로 치부당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요.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인지 의문이실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보러 가시는 우리 동물원의 중심은, 바로 그러한 사고를 궁극까지 밀어붙인 결정체 같은 것이랍니다. Mr. F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어요. 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자유를, 그리고 수인囚人의 것과 같은 존재의 조건을 모조리 뒤섞어 하나의 상징으로서 알 수 있도록 관람객 앞에 암시하는 것! 성벽에 그려진 이 기괴한 평면 현대미술 작품들도 말입니다, 저는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 그 의미를 전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Mr. F가 고르고 고른 실존주의적 미술가들과 인간의 존재조건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혹은 이해하려고 피땀을 흘리며 발버둥치고 있는― 화가들의, 성의 내용물에 대한 암시라고 합니다. 어쩌면 현대미술에 대한 신통한 이해력과 직관을 가진 관람객 분들이 오신다면, 그들은 굳이 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조차 못 느낄지도 모르지요. 말하는 사이에 입구에 도착했군요. 이 커다란 청동제 대문 역시 Mr. F가 고심 끝에 주문한 것인데, 낯이 익으실 겁니다. 예, 이것 참 인상적이군요! 숙녀 분이 보신 대로 이 문은 로뎅의 지옥의 문과 굉장히 닮아있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문은 로뎅의 지옥의 문의 레플리카인 동시에, 다만 오리지널에 조각되어있는 수 십 명의 절망한 사람들을 전부 없애버린 것이랍니다. 육체가 무너지고 고통의 함성을 지르며 절망에 어깨가 굽어진 사람들의 조각을 전부 없애버린, 인간이 없는 지옥의 문이에요. 우리는 20년 전에 이 지옥의 문에 열 감지 센서를 달아 문 앞에 사람이 서면 스스로 열리도록 공사를 치렀지요. 스스로 열리는 지옥의 문이라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아, 그럼 입장하시도록 할까요.
어서 오십시오! 건물 바닥과 벽돌의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고, 이 웅장한 건물 안의 높고 방대한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이제 이 거대한 홀Hall의 중심에 세워진 드높은 유리감옥을 보세요!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을 가로 150m, 세로 150m에 높이가 250m나 되는 엄청난 물건이죠. 모두 강화유리로 되어있으며, 각 면이 전부 통유리로 제작되었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물건은 못 만든답니다. 250년 전 Mr. F가 공장과 거푸집을 아예 새로 만들어 내놓은 물건이죠. K군이 말 한대로 저 드높은 천장을 이루는 기와들이 지금―시계를 잠깐 확인하겠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맞춰 적절한 불투명을 만들어내고 있군요. 유리감옥의 각 면마다 근접한 곳에 나선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손님께서는 저것들을 이용하여 스프링클러가 달려있는 유리감옥의 천장 위까지 올라가실 수 있답니다. 물론 엘리베이터는 나선계단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예전에는 유리감옥의 천장으로 가려면 250m나 되는 높이를 계단으로 올라야하는 수고를 겪어야 했답니다. 가까이 가보시죠. 흙과 나무와 풀밖에 보이지 않으신다고요? 물론 그럴 겁니다. 그럼 이제 이 감옥이 상징하는 바를 알기 위해, 감옥 내 생태관리 및 큐레이터 일을 맡고 있는 S군을 부르겠습니다. S군, 이리로 좀 와주게나. 손님일세!
「우리 성곽에 어서 오십시오! 250년 역사 속의 첫 번째 손님이신 숙녀 분을 모실 수 있어 더 없는 영광입니다. 저는 이 유리감옥의 생태관리와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S라고 합니다. 사실 제가 두 가지 직무를 동시에 가지게 된 이유는, 생태관리라고 해봤자 무슨 대단한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그다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죠. 평소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유리감옥 내에 설치된 감지기와 원격 현미경을 이용해 샘플들을 관찰하고, 별 이상이 없다면 보고서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는 일과 만일 바깥세계에 비가 온다면 유리감옥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 물을 트는 일 뿐이랍니다. 물론 비가 그치면 스프링클러를 꺼야지요. 그런데 저는 이 직무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뒤 20년 간 보고서에 <이상 없음> 이외의 다른 문장을 적어본 일이 없답니다. 250년 전 맨 처음 생태설계부터 완벽하게 이루어지다보니, 대지진이라도 일어나 이 기다란 유리감옥이 통째로 엎어지지 않는 한 별다른 이상이 발생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이 건물 안의, 약간 차게 느껴지는 온도는 강화유리를 통과한 기온이 유리감옥 내의 생물들이 항시 활동하고 번식할 수 있는 온도랍니다. 250년 전 Mr. F가 고용한 위대한 건축설계사는 통풍구나 성곽 벽의 두께, 실내의 광원과 자외선발광장치의―지금은 지붕기와의 자동적 투명도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쓰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위치나 출력 등을 고려하여 그 어떤 냉각기나 온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도록 이 성을 지었습니다. 정말 천재적인 기술이지요! 손님께서는 지금 유리감옥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실 겁니다. 사실상 보이는 것은 바닥으로부터 두텁게 쌓인 흙과 그 위에 자라난 나무와 풀들 밖에 없지요. 진실을 보려면 나선계단 옆에 설치된, 10m 간격으로 정지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한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조금 춥지는 않으신가요? 괜찮으시다고요. 그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약 추우시다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성곽 벽 한쪽 창고에 500개가량 되는 기다란 망토를 항상 쌓아두고 있으며, 언제라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100벌 씩 5일에 걸쳐 순차세탁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존경할만한 성내 세탁사 다섯 분이 완벽하게 해내고 있죠. 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50m 지점으로 가보실까요. 저쪽 나선계단에선 동물원의 청결부 직원 두 명이 오후 2차 청소를 하고 있군요…….
이곳이 50m 지점입니다. 보시다시피 계단참으로 바로 이어져있지요. 이렇게 유리감옥의 외벽을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설비를 해놓았습니다. 난간 위에 확대경 등이 설치되어있는데, Mr. F의 친절한 성질 덕분에 고소공포증을 가지신 분들도 강화유리 안쪽을 관찰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도 고배율 망원경이 설치되어있습니다. 높은 곳은 괜찮으신가요? 퍽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저보다 원장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에, 이만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고맙네, S군. 저 친구는 참 훌륭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하간 이제는 제가 설명을 드리지요. 우선 저 흙, 유리감옥 바닥에 수 미터 정도 쌓여있는 흙 말입니다. 저 흙은 250년 전 이 유리감옥이 완성되었을 때 넣어둔 흙입니다. 유리감옥 내에 쌓기 전에 아주 정밀한 검사를 하여, 통상적인 흙에 있는 미생물 외의 어떠한 벌레나 벌레의 알도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한 조치를 취했지요. 그때 흙을 검사한 수백 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정밀하고도 세심한 조사 덕분에 S군이 계속해서 보고서에 <이상 없음>이라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똑같이 철저한 검사를 거친 과실나무, 침엽수, 활엽수들과 유리감옥 내의 작은 생태계를 이룰 키가 낮은 풀들의 숲과, 천연자원성분 이외의 그 어떠한 생명체도 들어가지 않은 물로 채워진 작은 연못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상 유지되기가 굉장히 힘든, 여러 결핍요소들이 있는 생태계입니다만, 천만다행으로도 우리에게는 괴팍한 흡연취향을 가졌지만 세상의 그 어떤 생태학자보다 우수한 생태계조율사 A양이 있지요! 저는 이 동물원의 모든 것을 총괄책임하는 원장이지만, 제가 갑자기 사라져도 동물원은 유지될 겁니다. 그러나 A양이 사라져버리면 그것은 그야말로 종말이지요! 물론 우리는 A양 밑에 보조 생태계조율사를 세 명 붙여두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A양의 직무는 우리 동물원에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유리감옥 안을 보시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요? 아하, 그렇다면 숙녀 분의 시선 조금 위쪽의, 유리감옥 정중앙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회색의 소용돌이는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것입니다! 저것이 우리 동물원의 중심이고, 자랑이고, 저것이야말로 우리 동물원입니다! 저것이 Mr. F가 그의 죽음 이후에까지 숭고한 사명으로 지속되게 만든 세계의 궁극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70m 지점으로 올라가실까요.
이제 소용돌이를 정면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자, 잘 보시죠. 맞습니다. 이것은 수백 마리의 날벌레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날벌레들이 아니지요! 마침 유리감옥 내벽에 몇 마리가 붙어있군요. 난간에 있는 확대경으로 이들을 관찰해보도록 할까요. 우선 이 녀석―보이십니까?―은 두 눈이 없군요. 왼쪽에 있는 녀석은…… 다리가 세 개밖에 없고요. 균형을 잡으려고 계속 한쪽의 연약한 다리로 몸체를 밀어 올리는 게 보이십니까? 저 녀석은 계속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애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손님! 이 유리감옥 안에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이 초파리들은, 이 수백 마리의 초파리들은, 멀쩡한 녀석이 하나도 없답니다! 눈알이 없거나, 날개가 한쪽 밖에 없거나, 아예 다리가 없거나, 심지어는 중추신경이 반 토막 난 놈도 있습니다. 생식기능이나 신경구조가 마비된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수 있는 녀석들은―저 소용돌이 말입니다. 저렇게 비행을 하면서 계속해서 번식을 하는 거지요. 이곳은 이제 불구인 초파리들의 광란의 교미장이나 마찬가지랍니다. 만일 인간이 이렇게까지 불구가 되었다면 교미고 생식이고 집어치운 채 우울증에 걸려 은둔생활이나 할 테지만, 이들 축복받은 곤충들은 사고思考 자체를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들은 한쪽 날개로 어설프게 날아오르고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교미를 합니다! 설령 정소와 난소가 마비되어서 기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늘 같은 생식기를 미친 듯이 상대의 배에 찔러 넣기만 합니다! 설명을 드리지요. 250년 전 이 유리감옥이 완성되었을 때, Mr. F는 곤충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건강하고 단 한 번의 교미도 한 일이 없는 갓 탈피한 100쌍의 초파리를 감옥 안에 넣었습니다. 수컷 100마리와 암컷 100마리를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리감옥 내의 작은 생태계에 적응하여 미친 듯이 번식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첫 번식 이후 2년 만에 초파리의 개체 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유리감옥 안이 초파리로 들끓어서 감옥 자체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요! 그야 그렇겠지요. 이 작은 생태계에서는 그들의 천적도 포식자도 없고, 먹이는 늘 풍족하며, 연못의 물은 마를 날이 없고 나무와 풀들은 천수를 다 하고 죽어 썩어버린 초파리들을 양분 삼아 쑥쑥 컸으니까요. 그러나 20년가량 지났을 때 초파리의 개체 수는 점점 줄기 시작하고, 눈에 띠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네! 아주 훌륭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유전자풀genepool이 너무 좁았던 겁니다. 현재 이 성곽 내의 온도에서 초파리 한 세대의 생존기간은 평균 20일이니, 어디 계산을 해보죠. 이레귤러나 성충이 되는 속도 등을 제외한 간단한 계산으로 1년의 365일간 18.25번 세대가 바뀌고, 첫 100쌍이 넣어진지 약 250년이 지났으니 지금까지 대강 4562.5번의 세대교체가 있었던 셈입니다. 겨우 100쌍의 유전자풀에서 4562번의 세대교체라니! 말 그대로 이런 병신집단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수학적으로 단순한 근친교배의 결과물을 Mr. F가 굳이 현실화, 가시화하여 관람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과 암시를 주려했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튼 간에, 우리 동물원에 고용된 수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들은 최소 50년 안에 완전히 절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드렸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지요. 뭐어, 여하간. 우리 동물원의 핵심인 이 병든 초파리들이 절멸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리감옥 내부를 싹 걷어내고 새로운 100쌍을 넣을까요, 혹은 동물원이 300년이나 걸린 사명을 마쳤으니 문을 닫아야 할까요. 글쎄요,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Mr. F가 살아있었더라면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당연히 그는 230년 전에 죽어서 지금은 박테리아들의 먹이 정도가 아니라 이미 풀이나 나무의 일부가 되어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답니다. 어차피 50년 뒤라면 제가 아니라 도시에 살고 있는 제 아들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원장직을 맡고 있을 테니까요.
자아, 이 장황하고도 짧고도 단순하고도 기묘했던 동물원 관람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볼거리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기이한 볼거리였다는 점을 부인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숙녀 분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걸어서 돌아가시는 것은 분명 무리일겁니다. 원하신다면 몇 시간 뒤에 이륙 예정인 헬기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헬기 조종사들 역시 우리 직원이니 <우리의 손님>을 기쁘게 집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얼마 전 우리 동물원의 여성용 기숙사 관리감독인께서 60세가 되시며 은퇴하셨답니다. 그동안 받으시고 그다지 쓸 일이 없어―의식주가 전부 동물원 내에서 무료로 제공되니 말입니다― 모아두셨던 급여와 은퇴 이후에도 사망할 때까지 지급되는 Mr. F 재단의 <평생근로감사료>로 도시에서든 타국에서든 어느 섬에서든 편안히 노년을 보내시겠지요. 문제는 그 분이 평생 어느 누구와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성용 기숙사 관리감독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는 Mr. F나 그의 재단이나 이 동물원과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을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다소 꺼리고 있거든요. 사실은…… 숙녀 분 정도의 나이와 현명함을 갖고 계신 분이 그 자리에 아주 적합하지요. 아, 말씀드렸다시피 그냥 지나가는 얘기입니다. 헬기는 두 시간 뒤에 출발합니다. 헬기이착륙장은 기억하시겠지만 성곽 뒤쪽 식당이 있는 방면의 해자를 건너는 다리 바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저는 이만 원장실로 복귀하겠습니다. 관람은 즐거우셨나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직원 일동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헬기가 출발할 때까지 2시간 사이에 용무가 있으시다면 언제든 원장실에 들러주세요.
1.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세속의 진지함을 고통스럽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존재의 진중함과 부조리를 다시 찾아내게 되었다.
구도求道
우선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으로 삼아야할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독한 럼주를 마시고 궐련을 피우는 것을 즐겼으며, 친구들과의 모임을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마음으로 스스로 모임자리를 계획하고 주관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중간규모의 사무기기 제작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게 맡겨진 일은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들의 사용설명서를 쓰는 일이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제품을 관찰하고 움직여보거나 한 뒤에 고객의 입장이 되어 문장과 도면을 창작하는 일이었으므로 다소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운 제품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나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른 부서의 동료들에 비해 회사에 나가야할 횟수가 대단히 적었으며 심지어는 일 자체를 집안에서 끝내버리고 결과만을 나의 상사에게 우편으로 부치는 것으로 일을 마칠 수도 있었다. 고로 내게는 회사원치고는 자유시간이 상당히 많이 주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경제는 몹시 호황이었고 사용설명서를 쓴다는 일이 그 일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의 길이보다도 훨씬 정교하며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의 수고로움에 비하여 나는 회사로부터 매달 대단한 급여를 지급받았다. 나는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언제나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히 넘긴 채 굳이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나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세련된 정장을 입고 다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사교적이고 인기가 많은 멋쟁이 젊은이로 통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 입 한쪽에는 궐련을 물고 연기를 뿜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그렇게 듣기만 하는 것으로도 이야기나 친구들의 움직임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무척 즐거웠다. 그야말로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했다. 이미 말했듯 한 달 중 서너 번 정도만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회사는 충분한 금액을 내게 지불했고 그 돈들을 생활비로 쓰고 난 뒤에도 항상 많은 액수가 남았기에, 나는 늘 친구들을 대동하고 멋들어진 바Bar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럼주를 사기도 했고 가끔씩은 쿠바에서 건너온 시가를 태우는 둥 사치도 즐겼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입으로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생긴 청년이었다. 흰색 피부에 짙은 눈썹, 윤곽이 확실한 오똑한 코와 약간 조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려한 눈매, 남자치고는 색이 붉은 얇은 입술 등이 나를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젊은이로 보이게 했다. 당시 내가 메르세데츠를 몰고 맞이하러 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키스를 하곤 하던 여자친구 L은 그토록 내 얼굴을 좋아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도 나는 그녀가 나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얼굴과 잠자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하다가 웃음을 터트린 일도 있는 것이다. 보아하니 당당하고 잘 생긴 어느 멋쟁이 젊은이의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황금기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내겐 항상 어떤 병病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부가 썩거나 눈동자가 노랗게 변하는 그런 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신에 감염되어 마치 한 마리의 관념적인 벌레가 정신을 느릿느릿 염치 좋게 갉아먹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병이었다. 당시에 난 그것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왜 이런 병에 걸린 것인지조차도 말이다! 설명하자면 그것은, 아침에 침대에서 발코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빛에 맞아 깨어났을 때 느껴지는 들척지근하면서도 어쩌면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그런 영문 모를 갑갑함이었고, 어느 휴일 저녁 친구들과 한바탕 마시고 놀아제낀 뒤 홀로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다가 궐련갑에서 궐련 한 개비를 뽑을 때 손가락 끝에서부터 이어진 온몸의 신경이 화들짝 놀라 그만 궐련을 떨어트린 채 멍하니 굳어있는 순간이었으며, L과의 흠뻑 만족스런 잠자리를 가진 뒤 침대 곁에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띨 때 갑자기 ―그리도 건강한 육체를 가진 내가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끔찍이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오른쪽 눈에서 흘러나오는 한 방울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증상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 가벼운 신경증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렇지 아니했다. 그 병은 실제로 나의 생활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저녁에 원목 테이블에 앉아 궐련을 피우다가 갑작스레 이유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절망감이 나를 덮쳐서, 나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를 것 같아 찬장에 있던 술을 꺼내 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퍼마시다 쓰러지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과의 모임 때는 언제나 즐겁던 그 유쾌한 대화들이 내 뇌수를 찌르는 송곳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벌컥 화가 나 내 사랑하는 친구들의 멱살을 잡을 뻔도 했다!―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나의 초인적인 인내심에 지금도 감사하는 바다― 여느 때처럼 내 어깨에 감겨오는 L의 가녀린 팔이 뜬금없이 무슨 지네나 바퀴벌레 따위의 흉악한 벌레들의 덩어리처럼 보여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친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나는 도무지 그런 증상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내 아버지의 친구 중 의학박사가 한 명 있었기에 찾아가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사라는 족속들에게 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았고, 가령 3에서 4할 정도라도 분명하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고작 발륨이나 한 병 쥐어주는 것으로 일을 끝낼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내 결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도대체가 완벽한 인생이라는 게 어디에 있기나 하겠는가? 내가 충분히 젊고 아름답고 돈도 부족하지 않으며 즐거운 친구들과 아름다운 연인이 있으니 그만큼 또 내가 짊어져야하는 십자가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인생이란 평등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어린 머리로 대충 계산을 끝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치명적이지만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 문제들을 껴안고서도 어떻게 즐겁고 당당한 젊은이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진짜 문제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정확히 일 년 하고도 반 년 뒤에 벌어졌다.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를 나는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찾아가곤 했다. 무어 내가 어머니에 대한 대단한 사랑이나 효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이 으레 아들들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나는 내 월급의 3할 정도를 매달 어머니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정부를 한 명 두지 그러세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더니 어머니는 「아니야. 늙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 이대로 나무조각처럼 굳어버릴 것 같거든」 하고 대답했었다. 애당초 대수롭지 않게 던진 제의였으니 무슨 대답이 나오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이미 내가 어릴 적에 지내던 2층의 방으로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본가를 방문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내가 썼던 방으로 들어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문을 열자 내가 어릴 적에 쓰던 그대로 책상이니 침대 따위가 남아있었는데, 다른 점은 이미 오랫동안 청소는커녕 문도 열지 않아 먼지가 모든 곳에 회색으로 두텁게 쌓여있다는 점뿐이었다. 내가 그 안을 구두를 신은 채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돌자 방바닥에는 레일처럼 둥글게 내 구두자국이 생겼다. 그 정도로 먼지가 두터웠던 것이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는 구석구석을 구두창으로 밟고 있었는데, 바닥을 통해 어머니의 얕은 외침이 들려왔다. 「네 애인은 요새 어떠니?」 「L은 여전히 발랄하고 아름다워요」 나는 어머니에게 들릴지 어떨지도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높이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물론 어머니보다 훨씬 젊죠, 그야 젊으니까. 이렇게 들리지 않을 혼잣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계속 먼지들을 밟고 있던 나는 책상 앞에서, 내가 어렸을 때 썼던 책장에 그 시절 읽던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책장 속이라고 해서 먼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책들의 윗면과 제목이 적혀진 등에 뽀얗게 먼지가 묻어있었다. 나는 제목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책을 아무 것이나 하나 뽑아서 펼쳤다. 먼지가 진눈깨비처럼 대단히 날리더니 내 옷소매와 구두 등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책은 소설책이었다. 내가 학생 때 읽은, 그러나 정확히 언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어떤 유명하지도 않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나는 별 의미도 없이 그 책을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먼지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는데…… 그렇다, 그때 나의 젊음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책을 떨어트렸다. 병이다! 그 병이 도졌다! 덧났다! 아니 차라리 발광하고 있다! 나는 갑자기 사납게 바뀐 눈동자로 들어온 문을 찾아 도망쳤다. 거의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갔고, 깜짝 놀란 어머니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메르세데츠의 시동을 걸면서 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젠장,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단 말이다. 그건 병이 아니었다. 그건 진실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말하자면, 파묻어둔 진실이 이따금 흔들흔들 진동하는 것을 나는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메르세데츠는 아직도 쌩쌩 달리는 신차나 다름없었지만 손이 떨리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에야 시동이 걸렸다. 나는 미친놈처럼 엑셀을 밟았다.
이상이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설명이다. 지금 나는 그때에 비해 몹시 나이를 먹었다. 사십이 넘은 뒤로는 해와 날짜를 세지 않았고 내 방에는 달력조차 들여놓지 않았다. 나는 어떤 빌딩의 지하실에 살림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밖에 나갔던 것이 아마 3주 전으로, 내가 유일하게 먹는 음식인 참치 통조림과 인스턴트커피를 사재기하러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도대체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 하고, 설명을 한들 그것이 설명이 되기나 하련지 모르겠다. 여하간 젊은 시절의 나를 가끔 불편하게 했던 그 병이, 병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확실하게 안다. 그야 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지금 나이기 때문이다. 그 먼지투성이 책의 종이냄새를 맡은 뒤부터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단절시켜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었으니까. 우선은 술을 끊었던 것 같다. 그 뒤엔 담배였다. 시가든 궐련이든, 럼주든 소주든 그것들은 틀림없이 내 진실을―고독을 방해하는 위안물이었다. 고독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위안을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깨달았던 것이다. 아, 이렇게 단어를 선택하는 것도 질색이다. 고독과 진실이 사실 같은 단어라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킨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다만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그만 두었다. 그들에게 몹시 전화가 걸려오고 몇몇은 집까지 찾아와 걱정스럽다는 듯이 안부를 묻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집도 옮긴 것이다. 햇빛도 진실을 방해했다. 햇살이 닿지 않는 지하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모든 변화들을 결정지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슬픔이나 광란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을 좇아 진실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슬픔이고 광란일까? L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그녀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엑셀레이터를 미친 듯이 밟은 그 날부터 왜인지 내게는 도무지 욕정이라는 것도 생기질 않았다. 마치 거세된 말처럼.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그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전화선을 뽑고 방안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다가 몇 가지 깨달음과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갖고 있던 집을 팔고 지하실을 하나 산 것이다. 나는 점점 철저하게 고립되어가면서 자부심까지도 느꼈다! 사실은 마이크를 들고 모두에게 외치고 싶었다, 나는 진정으로 고립되리라고. 그러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은 물론 누군가에게 말을 던지는 것도 ―내가 이런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 숙고해주시기 바란다―불경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입을 닫고, 닫고, 지하로, 아래로 내려왔다. 이젠 럼주도 궐련도 맛있는 음식과 차[茶]도 따뜻한 침대도 다 필요 없었다. 나는 지하실 안에서 밖에 있을 적敵들에 대하여 단단히 철제 현관을 잠그고, 오로지 하루 한 캔의 참치 통조림을 먹고 대신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신다. 진실에 따르면 잠시라도 졸릴 수는 없고 정신이 멍해져서도 안 되는 법, 그리고 포만감 역시 내 안의 적이다.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물은 수돗물을 마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 자신을 벌주고 있다거나,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제발 그만둬주시길! 차라리 그 반대이다! 아아, 이것을 어찌 설명하면 좋을지? 나는 혼잣말조차 하지 않는다. 혼잣말이라는 것도 약간의 위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의 삶을 살아내는 중인 것이다! 물론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해 뼈밖에 안 남은 몸에 이미 반백이 된 긴 머리와 북슬북슬한 수염이 날 이질적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상식인의 입장으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단 하나도! 약간이라도 정신이 멍해질라치면 나는 커피를 끓이면서, 아 그래! 솔직해지고자 한다면 나는 늘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진실은 고통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젊고 잘 생겼던 내 얼굴은 이미 수염 난 해골처럼 되어버렸지만 나는 이 고립과 고독과 고통 속에서 지고의…… 지고의…… ―도대체가 언어란!―기쁨, 그래,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극한의 삶 속에서, 나는 분명 진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제 현관문이 제대로 잠겨있나? 그래, 제대로 잠겨있군. 적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내게 상냥한 어투로 접근하며 나의 고립을 깨트려, 가짜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몇 주 뒤 커피든 참치 통조림이든 바닥이 난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쇠사슬과 자물쇠로 된 잠금장치를 사다가 현관에 달아야겠다. 나의 이 기쁨은, 즉 고독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철저하게 말이다.
그는 총 18알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알약들을 삼키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진 수천 권의 책들과 그 문장들의 혼합된 덩어리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계시를 받듯이 단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보았다. 구겨진 이불 사이에서 유기된 시체처럼 썩어가던 그의 정신은 갑자기 경련하듯이 꿈틀댔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었으리라는 믿음이 전류처럼 흘렀다. 그러나 천둥번개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노자와 니체 등 어줍지 않은 지식들을 자와 컴퍼스처럼 이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도 노화된 그의 정신은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동물이란!」 그것은 일종의 동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원히 녹슬지 않는 무의식으로 가득 찬 기계들의 삶이여! 그는 넘어진 컵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벌컥거리며 움직였고 핏발 선 눈은 사납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는 <인간>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말미암아 너무 녹슬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에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야할 판이었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것을 정리하는 일은 오죽했으랴! 이미 활자조차 이루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관념적인 이미지만으로 고장 난 신호등처럼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정신의 사업들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실재로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고 그의 친구였던 자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책을 읽었던 것은 언제이며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성립할 수 있었던 건 언제인가? 그는 스스로 망각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흡사 영원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도 늘어져버린 녹음테이프처럼 분열된 음절들을 기괴한 소음으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비참……비참……비참하……비……비참……> 구두점을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의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멸자이면서 영원과 닮아 비참했다. 아니면 슬플 수도 있었나? 글쎄, 그가 비참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서술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스스로 문장을 끝맺을 수 없다. 그는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그의 젊음과 청춘은 어디에 낭비되어버렸는지? 영화필름 사이에서 한 컷만을 칼로 잘라낸 것 같은 이 장면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축축한 퇴폐와 절망의 색깔을 한껏 담은 채 완벽하게 정지되어있었다. 이 장면에는 스토리도 결말도 없었다. 저 썩은 나뭇가지 같은 남자를 보라! 저것은 도무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발탄처럼 잘못 날려진,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줄 수 없는 잉여의 장면, 곧 누군가가 주워 쓰레기통에 던질 뿐,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잘못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그가 계시처럼 느낀 강렬한 이미지도―그러니까 그 혼돈이라고 칭해진 것 말이다― 사실은 시간도 측정할 수 없는 어지러운 일생동안 계속해서 느끼고 잊어버리고, 느끼고 잊어버린 저주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신음소리는 나올 리가 없다. 약 20분 전 삼킨 18알 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약 때문에, 그는 이제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고 건드리면 마치 바늘로 찌른 물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정오의 용암 같은 태양빛 아래 술통 위에 앉아있을 때, 나는 <천재>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가 나의 눈꺼풀을 찢어 결코 눈 감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노련한 통장이가 불길로 굽힌 판자들로 단단히 형태 지어진 술통을 나는 거칠게 걷어찼다. 주황빛 광장에 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밤이 내렸다.
나는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젊었던 내 피들은 부글부글 끓더니 정수리를 통해 증발해버렸다. 이제 늙고 거뭇거뭇한 심장으로 나는 야밤의 빛살들을 보았다.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있었으나 그림자와 거짓이, 그리고 혐오가 그것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광부처럼 나는 곡괭이를 쳐들었다. 「이 마을엔 나밖에 없는 모양이야. 아니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깨져가는 흙벽 사이에서는 선혈이 꿀럭거리며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 달빛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지. 내 곡괭이는 달빛에 세게 맞아 부러졌다. 나는 떨어진 보석들을 주워 모았으나 그것들은 이내 꿈틀거리는 역겨운 벌레가 되어 나의 손바닥 가죽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열嗚咽을 위한 계절만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내 곡괭이는 처참히 부러졌다.
벚꽃이 피면 쌍뜨뻬테르부르크로 걸어서 가자. 그곳에는 꽃잎이 날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눈감을 도리를 잃어버린 내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광견병에 걸린 개의 눈 같았다. 나도 분명 공수병에 걸린 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물 흐르는 소리가 이렇게 두려울 리 없다. 그 소리는 내 뇌수에 이 행성의 나이를 삽입한다.
절망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는 나의 오랜 친구였고, 내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다. 곡괭이도 부러진 마당에 나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손도끼로 나의 양손을 끊으려 했으나, 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언젠가는 이 손으로 묻어야 해…… 그러고 나면 대지는 더 이상 나의 편이 아니게 되겠지.
길이 아닌 곳만을 찾아 걸어온 다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너무 오래 비명을 참아 입가에서는 피로 된 거품이 들끓었다.
<천재>라는 말을 불신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다시금 펜을 찾고자 했다.
열광! 열망! 갈구! 그러나 그것은 너의 말이다. 내 영혼은 침체의 바닥을 핥아보았다. 그리도 찬란한 너의 머리를 언젠가 금강반야의 도끼가 부숴버리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리도 아름다워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야만 하기에.
언젠가부터 해가 뜨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일이다. 지금 나의 육신은 햇빛을 받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굉음을 단말마로 삼고 말테니.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하라. 차라리 날 수류탄처럼 터지게 하라.
북쪽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지. 그러나 그곳에선 영원한 먹구름 아래 진눈깨비만이 시간도 잊은 듯 나릴 것이다. 만약에 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가난한 이와 푹푹 나리는 눈과 아름다운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재들이 거기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도 따위를 올리러 가는 것이 아닌걸. 죽음이 하는 일들에 침을 뱉었으니 나는 차라리 신도 여신도 없어서 살고 또 사는 것인걸.
땅 밑은 온통 피바다와 잿가루. 오늘도 쌍뜨뻬떼르부르크에서는 잿가루가 푹푹 나리리라. 거기선 내 영혼도 얼어붙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무거워지겠지. 손에 든 펜으로 나는 내 몸에 시구를 새긴다. 종이에 쓴 것들은 불타고 만다. 그러나 이 몸도 불타고 말 것인데, 아니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고되서 앉았다. 풀섶에 털퍽 앉았다. 밤벌레들 산만하고 하늘엔 달만 고고히 떴다. 나는 이제 <천재>가 무슨 말인지에 대해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 가뿐한 일이었다.
진눈깨비와 재가 흩날리는 공백의 도시까지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남았을까. 목적지가 정해진 방랑에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구라도 나타나 입을 열라치면 나는 그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셈이었건만, 아무도 없었다. 하하. 여기가 어디로 가는 골목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씨는 점점 춥다.
바다에서 도망치려면 뭍으로 가야지.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내륙의 내륙으로 가야지. 북녘의 땅에 무엇이 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