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봄

글/에세이 2012. 4. 5. 23:55 |
 봄이 왔는데도 땅 위는 메말랐고 황량하다. 하늘에는 여전히 겨울의 색깔. 나는 사물들의 광야에서 생명의 달콤한 살점을 그린다.
 도서관 창가에서 내다보는 풍경에는 녹색이 없다. 벌써 4월이 되었는데도 거리 위에서 나부끼는 바람은 봄이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철사 조형물처럼 뒤틀린 채 비죽비죽 솟은 나무들에는 새싹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잿빛으로 황폐하다. 나는 그 나무가 뿌리박은 토지를 본다. 일 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을 법한 좁은 땅이다. 그 흙 바깥으로는 전부 보도블록이 땅을 틀어막고 있다. 저렇듯 생명의 숨구멍이 철통처럼 막혀있으니 나무도 싹을 틔울 마음이 들지 않을 듯도 싶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차다. 공기 중에서는 겨울의 냄새도 봄의 냄새도 아닌, 어떤 메마르고 정체된 듯한 냄새가 난다. 가끔 비가 오기 직전에는 습기 탓인지 진한 봄의 냄새가, 숲의 정액 냄새 같은 것이 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공기 중에서는 더 이상 시베리아의 투명하고 영혼을 설레게 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꽉 막힌 냉장고 안에 들어앉아있는 느낌이다.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푸르고 가끔 뜯어진 천 조각 같은, 작고 하얀 구름이 두어 개씩 흐르지만 어딘가 실존하는 풍경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색연필로 빈틈없이 칠해놓은 파란 종잇장 같다. 말하자면 거대한 하늘 그림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서는 높이도 거리감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나는 지나간 겨울을 회상한다. 그 완벽하게 투명했던 하늘과, 살을 엘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행인들의 눈빛을 날카롭게 하고 어쩐지 정신의 꼭짓점을 뿌듯하게 만들던 그 계절을 말이다. 그 냉기에는 어떤 인간미 없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추위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자신의 세계 속에 빠져서 흥분하여 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겨울의 그 초인간적인 냄새는 이미 지나가고 없다. 다시 일 년이 흘러야만 우리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으리라.
 지금 이 덜 된 봄. 나는 이파리 없는 나무들의 숲으로 눈길을 향한다. 지난 가을부터 썩기 시작하여 이제 흙이 된 낙엽들과 나무의 갈색 몸통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가시덩굴 따위로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말없이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이 모호한 추위와,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세계와 나 사이에서 어떤 절망을 발견한다! 왜인지 “저” 세계는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불타 재가 되는 일도, 얼어서 영원히 죽는 일도 없이 언제까지고 이 기묘한 상태를 지속할 것만 같은 것이다. 문뜩 어떤 불안이 뱀처럼 내 심장을 휘감는다. 이렇게나 덜 되어먹은 상태로? 나는 생각한다. 그 수많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들과 퇴폐주의자들을 내버려두고 세계는 이대로 정지한단 말인가? 새삼 “영원”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의 눈동자가 떨린다. 영원보다는 죽음이 훨씬 낫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이 괴상한 계절의 경계선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결론을 향해 돌진하지도 못하며 그저 이대로 멈춰서버린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어떤 관념의 냄새가 공기 중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이 비주얼. 모든 기대가 거세당한 것 같은 모습만이 유리창에 커다랗게 비친다.
 그때 짝을 지은 두 사람의 여학생이 내 뒤를 지나가며 경쾌한 소리로 웃는다. 그녀들은 갈색 체크무늬 교복치마 위에 두터운 재킷을 입고 각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벌써 문 밖으로 향하고 있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학생들이 잘 신는 얇고 흰 신발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을 밟고 지나간다. 젊은 여자들의 밝고 가벼운 웃음소리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계인 것이다. 내가 이해해본 적도 없고 가져본 적도 없는 그 감정을 갖고서 마음껏 바깥으로 표현하는 그녀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인종이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지 못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녀들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순간 나는 내가 나의 공포스러운 망상에서 깨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안경을 벗어 창가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눈을 비빈다. 눈알 속에서 피로가 물웅덩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흩어지더니 서서히 흐려진다. 나는 다시 안경을 쓰고 창밖을 바라본다. 풍경은 여전히 황량하지만 세계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이 불쾌한 계절도 언젠가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나무에는 새싹이 돋고 바람은 날뛰는 봄의 향기를 싣고 사방으로 불어댈 것이다. 이 세계가 영원이라는 절대적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버릴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 나는 봄의 달콤한 살맛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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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글/소설 2012. 3. 28. 13:56 |

2012/3/27 완성.


1. 줄거리는 내 창작물이 아니다. 김영승 시인께서 제공해주신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설화한 것.

2. 짧다. 그다지 분량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쓰려고 했다. 시대적 리얼리티에 대해서는 아직 완성도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쓴 글이다.

3. 다 쓰고나서 알게 된 것인데, 망둥이는 비늘이 없는 생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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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글/소설 2012. 3. 9. 00:05 |
2012/3/8 완성.

1. 약 3~4주만에 완성한 글. <태양 아래서>를 완성한 뒤 약 3개월 가량 소설의 오락성에 대해 재탐구해보고자 SF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로 보류시켜두었다. 그리고 새로 집필하여 완성한 것이 본 작품이다. 
2.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안이한 글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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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서

글/소설 2012. 3. 9. 00:01 |
2011/12월 경 완성.

1. <익사자들>, <홀로 사는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 완성한 지 몇 달이나 지난 뒤라서 글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가 힘들다.
2. 기행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관념과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소설. 까뮈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배경을 깔아놓은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위에 글을 짓는 방식이 다소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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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집

글/소설 2011. 10. 3. 01:52 |
2011/10/01 완성.

1. 적당한 길이의 단편소설.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장면 장면의 뉘앙스에 신경을 쓰느라 스토리텔링의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2. <익사자들>에서부터 연결되는 주제의식을 갖고 쓴 것. 삶의 인간이 죽음을-동시에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삼부작을 쓰려고 했고, 이것은 그 중 두번째 소설이다.
3. 나름대로 만족한다. 최근에는 창작의욕이 높아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퇴고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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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

글/소설 2011. 9. 28. 21:22 |
2011/09/28 완성.
1. 오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던 도중 생각난 것을 그대로 썼다. 과거의 내가 된 기분.
2. 이제까지 써왔던 것들과 소재가 너무 중복된다는 의견이 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3. 어쩐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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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자들

글/소설 2011. 9. 5. 20:08 |
2011/09/04 완성.
1. 최초의 중편소설. 어느정도 만족한다. 그러나 계속 만족하지는 못하리라. 벌써 일종의 후회 같은 것이 뇌리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다. 어서 다음 소설을 구상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로 그것을 이뤄내야하리라는 욕망. 더 완벽한 단순함. 더 풍부한 표현. 더 내밀한 깊이. 더 진중한 주제. 섬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내 손에서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오직 이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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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썼다.
 4개월이 좀 넘는 시간을 들여서 A4용지 51페이지, 200자 원고지 456 매 분량의 초고 완성. 이제 다듬고 깎아내는 작업만 남았다. 제목은 아직 고민중이다. 가제를 붙여놓기는 했는데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다른 단어의 조합들도 마찬가지로 내용에 비하여 조잡하게만 느껴진다. 수정을 마치고 나면 공모전이나 출판사 따위를 좀 돌아다녀 보아야겠다. 이것이 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작품이 될지 아직은 그저 불투명하기만 하다. 약간의 기대만 있을 뿐. 하기사 언제나 그랬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일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블로그에 게재하는 것은 발표 과정이 일단락 된 뒤에 생각해봐야겠다. 우선은 지금의 탈력감과 만족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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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 혹은 죄와 악

글/소설 2011. 3. 22. 19:20 |
2011/3/22 완성.
1. 내가 뭘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뭘 써놓은 건지도 파악이 안 된다. 만약 자신의 글이 쓰던 와중에 제멋대로 살아움직이며 깽판을 놓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같은 글에 6개월 이상 붙어있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2. 언제쯤에야 스스로 만족할만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감정을 좀 더 미니멀리즘하게 깎아내야한다. 나는 아직도 너무 과도한 충동의 덩어리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만족할 수 있을 글을 쓴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
3. 수정할 곳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도무지 손을 못 대겠다. 수정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면서 곤란해하고 있느니 차라리 어서 이후에 쓸 소설의 구상에 들어가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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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장과 문장들의 호흡이 매우 짧고 읽기에 편리하다. 내용 자체는 이렇다할 특이성이 없지만 사건들을 엮고 적절한 대목에 등장시켜 역겨운 불행과 끔찍한 고통들을 한낱 우스개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 기술은 몹시 교묘하고 참고할만 하다. 본문이 진행되는 내내 활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그것이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미니멀리즘한 문장에 의하여 희화화 되어버린다. 그것이 다소 과도한 경향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과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아이러니한 코미디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삶에 대한 순진한 긍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노골적인 경험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에 빠져버리는─그 회의마저도 마지막에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대한 회의'로 내버려지고 말지만 말이다─ 내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책 자체가 이야기의 진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체념을 학습한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의문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짐작 했듯이,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의 불행들을 일주한 캉디드와 그의 일행들은 더 이상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지독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대가로 권태를 얻었고, 권태를 잊기 위해 노동을 하며 존재의 목을 가까스로 축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캉디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치명적인 믿음과 기대의 이름인 '낙관주의'가 가끔씩 발작하는 의문처럼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는 설탕에 절인 레몬을 입에 넣고 밭을 갈러 나가야 한다.

<마르틴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캉디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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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해도 실패해도 인생은 계속되며 내일은 또 온다. 시간은 오직 미래만을 향하여 향일성 식물처럼 뻗어나가고, 그 절대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죽음으로 투신하는 것 하나 뿐이다. 나는 어떤가? 세계의 온갖 우중충하고 날카로운 색깔들 사이에서 나는 늘 죽음을, 즉 해방을, 마음 편한 포기를 꿈꿔왔다. 포기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것이다. 퇴폐주의자가 태양을 향해 눈을 향하지 않는 것처럼, 포기는 늪처럼 끈적끈적하고 깊은 안심을 사람에게 선물해준다. 고뇌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생각되는 독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 정신은 너무도 쉽게 상처입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나는 포기와 부정의 경계선에 서서 양극점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떤 때에 내 영혼은 모든 의식들을 내버린 채 삶을 포기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때에는 누구보다 명철하게 눈을 뜨고 가시나무 사이에 궁극적인 질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원했다. 나는 경계선 상에서 유난히도 모순의 감정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인간적인 희망들이 부정당하고 내가 안락하게 눈감을 수 있는 자리마저도 세상의 적의 넘치는 손아귀에 빼앗겨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경계선 위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퍽이나 잔혹하게도, 실패는 내게서 포기의 가능성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그것은 내 선천적인 반항아적 기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는 발을 빼앗겨도 앞으로 기어갈 의지─어쩌면 아집에 지나지 않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내 정신의 밑동이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언제고간에 무엇인가가 나를 밀친다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져 절망의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내게는 다리와 발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를 밀친 무심한 의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두개골과 가슴 속은 반항의 감정으로 하얗게 되었다. 그것은 병든 증오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반항은 참으로 상쾌하고 선명했다. 마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걸작을 구상하며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화가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순백의 광기처럼, 그것은 온통 메마른 고통으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병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나는 미래에 관여하지 않는 생명을 본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워버렸지만, 오히려 다른 여지들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되자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발적 죽음은─적어도 내 상황에선─ 관념의 부르주아적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온갖 요란한 불꽃과 눈가림과 혼란을 위한 장막들이 걷어내진, 극도로 가난한 세계에서는 삶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오직 삶 뿐만으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삶.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홀로 돋아난 인간존재.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부수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은 자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열망하는 것. 태양을 향해 천공으로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을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향해 기는 것밖에 없다. 여전히 나의 세계에는 고통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흘러넘치고 나는 손톱만한 희망마저 거부할 정도로 헐벗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차라리 그 필연성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나는 산다. 살 것이다.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살 것이고, 시선 저 끝에서 태양처럼 번쩍이며 섬광을 발하는 그것을 향해 뼈와 근육으로 된 가지를 뻗을 것이다. 이것은 긍정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며 희망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부정이자 반항인 동시에 실존에 구속당한 인간조건이 만들어낸 유일한 결과이며,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목이 잘렸다는 점에서는 절망과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아무튼지 분명한 것은, 또 한 번의 내일이 오면 나는 기염을 토하며 그것을 깨물어 삼키듯이 살아 내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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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첫날과 이튿날 쉴 새 없이 400쪽 가량을 읽어냈는데 잠시 덮어놓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아차 싶어서 일주일만에 나머지 100쪽 가량을 읽고 보니 독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몸통이 썩뚝 잘려나간 느낌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고 야옹야옹 울어대던 고양이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물독에 빠져 몇 번 헛발질을 해보다가 체념하여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운운하다 담담하게 죽는다. 이것은 근대의 인간에게서 죽음을 의식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짐승마저도 인간에게 물이 배면 자살을 본다. 책 맨 뒷장의 작가연보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퍽이나 아픈 인생을 살았다. 비록 병으로 죽었으나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는 개인의 죽음이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자살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학자나 지식인, 혹은 작가나 예술가라는 족속들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생물 실격.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 짐승이 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닮은 짐승이란 보고 있으면 너나 나나 처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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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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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병균 - 비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
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말레이 여자 마라를 만났다
토오는 나를 미워한다
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
갈색 피부의 마라 -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를 하나
나......'토오를 내쫓아', 마라......'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와요'
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 일부를 빼앗고 있다
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파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춥다
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갈색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나는 마라를 사랑한다
마라는 일어선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 
나는 태양병이 무섭다
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를 향하여 소리질렀다. '마라!'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엄습해 온다. 
죽음이 구제를 갖다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숲의 화제는 광기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나는 고통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나는 한계 위에 서있다

 
- "태양병" / H. 노바크

이 쪄죽을 듯하고 열광적인 냄새를 사랑한다.
갈증. 종말적인 이미지지만 동시에 영원할 것만 같은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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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신념과 미덕과 믿음과 소명으로 이루어진 황금으로 된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들의 발이 향해야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우선 우리 자신이 어떤 땅에서, 어느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는지를 알아야한다. 우리의 정신을 뿌옇게 가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오, 희망은 실재할지도 모른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가 되지 않는 미래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머리위에 걸어놓은 당나귀의 당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반복하건데 우선 우리가 태어난 세계를 명철한 눈으로 주시해야한다. 관찰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생명이자 떠오르는 시간들이다. 어느 굉장한 허무주의자가 지어놓은 거대한 관념의 체제가 아니다. 현상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계도 아니다. 태양의 하얀 빛살과 대지를 뒤덮은 콘크리트빛 인공 구조물, 인간의 누리끼리한 가죽과 나뭇잎의 초록빛깔에 눈을 두어야한다. 우리와 함께 태어난 형제의 눈 안쪽에 담겨 있는 새까만 맹목성과 필멸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맛봐야한다. 매일 같이 자라는 손톱을 보라. 그것은 손가락의 관절 안쪽에서부터 밀려나와 점점 길어지고, 우리는 하얗게 밀려난 부분들을 깎아내어 버린다. 세포는 늙고 죽어 피부위에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세계는 생명과 죽음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의 소관을 벗어난 영역과 희망사항이나 다름없는 은총에 대해 말할 셈이라면 당장 입을 다물도록 하라. 당신은 인간이며 우리들도 인간이다. 그것은 정신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촉각밖에 알지 못하며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논하는 인간의 철학을 한다. 상정된 초현상은 흥미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실에 대한 인간의 탐구에 답을 내주지는 못한다. 진실!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우리에게 휘둘러진 단 하나의 실마리이자 화살표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죽음이고 필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죽음이다.
 내가 허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린다! 「하-하! 당신은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자로군! 사물에는 현상보다 깊은 본질적 의미가 있으며 삶과 죽음 또한 표상적인 것일 뿐, 그 속에는 마땅히 영원이라는 축복이 있다네!」 뭐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현상보다 깊은 본질, 의미, 심지어 영원과 축복이라니! 그들이 내게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삶> 이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거나 이 <세상>이 아닌 세상과 만난 적이 있거나 <영원>한 존재였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죽음 너머를 내다보거나 논리초월적 논리를 증명하거나 영원의 무게를 재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던가? 세상은 곧 세상이며 삶은 곧 삶이고 죽음은 곧 죽음이다. 존재란 <고작> 그만큼의 존재다. 물론 죽음 뒤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영혼이 영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느 절대성이 우리에게 존재의 소명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단언할 만큼 오만할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몇 번이나 말했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모순과 오류로 살아가는 정신이며 죽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삶의 인간>인 우리에게는―적어도 우리가 살아있고, 또 인간인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삶>에 한정된다. 죽음은 존재의 종언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들이 절멸하는 장소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뇌와 척수와 호르몬과 정신과 영혼과 그 외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혹은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온갖 화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영적인 요소들이다. 죽음은 그것들을 전부 종말로 밀어 넣거나, 최소한 그 중 일부라도 <나>에게서 떼어내 썩어 없어지게 만든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나>의 끝인 것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나>의 끝은 동시에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심판받지 못하며, 그 무엇도 취향 이외의 것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관념들을 부정해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긍정한다. 이 황폐한 대지에는 애초부터 신념도 미덕도 믿음도 소명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 어떠한 길도 없고 우리는 광막한 사막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부정당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물들에게 의미를 내려주는 절대적인 가치의 척도가 부정당했다는 뜻이다. 신은 필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절대성은 이미 허구의 단어가 된지 오래다.
 고로 이 땅에는 법이 없다. 규칙도 질서도 도덕도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란 삶의 인간에게는 나약한 존재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공갈협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들을 옭아매는 것은 왜곡된 합리주의에서 태어난 암묵적 협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합리주의가 근거라고 말하기도 낯 뜨거울 만큼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것의 뿌리는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심지어 그 <암묵적 협의>라는 것은 어떤 돌발적인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억압이 되기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 형법에 대한 그들의 숭배를 비난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자. 우리는 결론으로 넘어가야한다.

3.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없다.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음을 보증으로 두고 완전한 정신의 자유에 눈이 뜨였다. 자유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철한 것이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순간 모든 <희망의 노예>들이 우리를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 토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맹목성과 허무와 그리고 사멸을 인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는다면 그 어떤 행위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언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찾아올지 모르는 사형집행자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개인이며 눈을 뜬 의식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희망의 노예들이 말하는, 소위 <범죄자의 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단지 실존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독안개와 역겨운 기만들을 걷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사막 위에는 법률도 표지판도 없다.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외롭고 공허하며, 치명적으로 자유롭고 열광적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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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병자의 하루

글/소설 2010. 7. 9. 21:59 |
2010/06/28 완성.
1. 수정의 여지가 많다. 특히 전~중반부. 그러나 한동안은 건드릴 의욕이 나지 않을 것 같다.
2. 오래전부터 내 소설은 조작된 고백록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가 잦다.
이런 경향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3. 어쩌면 <전락>의 패러디 수준밖에 되지 않는 글인 것은 아닐까? 이미 작품 내에서도 그 점을 고백하고 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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