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5 완성
1. 쓸 때는 신나게 썼다.
2. 완성하고 보니 만족할 수도 불만을 가질 수도 없다.
유리감옥
K는 어리다. 하지만 어리다고 하여 아주 어린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에 있을 만큼 어리다. 신체적인 연령에 대한 설명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이 몸에 귀속된 것이니만큼 신체와 정신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도 아니다. 한때 그의 친구였던 이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젊은 피가 활개치고 다니기에 좋고, 상념과 망념이 여학생들의 손목에 한 줄씩 그어지는 계절.
K가 사는 단칸방과 마주한 건물의 일 층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K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처음에는 큰아버지의 심부름이라고만 하면 술과 담배를 아무 말 없이 팔아주는 곳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차한 거짓말도 더는 의미가 없다고 K는 생각함과 동시에, 이미 구멍가게의 그 늙고 병든 주인도 K가 도무지 미성년자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집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요 몇 년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큰아버지는 가끔 K의 집에 찾아오지만, 항상 K는 없거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실상 K는 그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밤새 거리를 헤매거나 담배연기로 가득 찬 단칸방에서 책을 읽는 K는 아침이 오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간다. 그리고 그는 등굣길의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멍하니, 그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가끔 어리둥절해 하며. 이따금 중학생 때 친구였던 이들이 와서 K에게 인사를 건넨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웃는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친구는 갈 길을 간다. K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머니가 다림질해준 교복을 입고 아침햇살 밑을 권태로운 듯이 걷는 그들은 왠지 아름다워 보일 것도 같다. K는 가끔 자신이 너무 빨리 젊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K는 헤르만 헷세가 위대한 작가라고 믿는다. K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가장 미학과 삶을 설득력 있게 접합시킨 작가였다. 그러나 K는 자신이 <미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조소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K는 단칸방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금세 방안을 가득 채우고 만다. 창문이 없는 관계로 담배연기는 방안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낮에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칠흑처럼 어두운 방안에서 K는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가끔씩 몇몇 문학작품들의 제목을 떠올린다. 데미안. 시계태엽오렌지, 호밀밭의 파수꾼, 지와 사랑, 꼬마철학자, 등등. 모두 주인공이 미성년인 작품들이다. 성장소설, 성장소설. K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을수록 현실은 점점 구차하고 패배주의적이 되어간다. K는 어리다. 아무도 그가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K 자신은? 글쎄, 모두가 고난을 겪지. 모두가 고난을 겪고 상황을 타계해나가지.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고들 하지. K는 어리다.
K는 삼 년째 이발을 하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빨래를 하려면 건물 공용 화장실에 가야하는데, K는 나프탈렌 냄새를 싫어한다. 정돈되지 않은 장발과 지저분한 수염에, 더럽고 구겨진 셔츠를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정도는 K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들의 부랑자를 보는듯한 시선이 희열이 된다.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시선이, 차라리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일이다. 얼마 전에도 K는 방안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병을 비웠을 때 눈물을 떨궜다. 탈출구도 없이 사방팔방이 꽉 막힌 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사실은 항상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알코올이라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감상주의자로 만들지 못하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제 K는 자신이 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지도 모른다. 왜 새벽마다 밖으로 나가 달에게 고함을 지르며 도시를 헤매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에는 길에서 잠드는 일이 많았다. 방안에서 혼자 술을 푸다보면 갑자기 바깥공기가 그리워지는 일이 많다.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갔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것이다. 여름에 K는 다섯 번이나 자신을 깨우러 온 경찰과 만났다. 매번 다른 경찰이 매번 K를 그의 단칸방까지 부축해주고,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방에 드러눕는 K를 보며 매번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깨물며 돌아갔다. 빌어먹을 놈의 술. K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말했듯이 그는 아침만 되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도대체 왜 그리로 가는지, K 자신이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학교 맞은편의 벤치에 주저앉아 맥주 따위를 마시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혼란과 몰이해의 눈으로 쳐다본다. 아! 저들의 저 기고만장하고 지루한 표정이란……. K는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는 사고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맥주를 위장에 쏟아 붓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줄담배를 피운다. 시간이 지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드물어질 무렵이면 K는 거의 기듯이 그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의 머릿속에는 젊음이라는 단어와 청춘이라는 단어가 오래된 네온사인처럼 번갈아가며 깜빡인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젊은 피>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팔뚝의 정맥을 그가 오래전부터 소지하고 있는 단도로 끊었다. 거의 새까맣게 보이는 피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피부 위로 흘러나왔다. 방바닥에 피가 점점 샘처럼 고이는 것을 보면서 K는 자리에 누웠다. 그는 한숨을 쉬었고, 누운 채로 담배를 물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아스라이 퍼지면서 빈혈기가 느껴졌다. K는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피 웅덩이에 던졌다. 그리고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출혈은 이미 멈췄고, 방바닥에 고인 작은 피 웅덩이는 말라붙어 끈적거리고 변색되어있었다. 젊은 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알고 있다. K는 영특한 아이다. 너무 영특한 아이라서, 세계가 무작위하고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가 <희망을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K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여러 번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지만 사고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를 굴리지 않고 산 밑에서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시지프스다. 심지어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K의 머릿속에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의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 말 그대로 작동을 멈춰버렸다. 아! 이제 K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아직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에서 구체적인 것들은 항상 서술이 아니라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K가 망가져 작동을 멈춘 장난감과 같다 하더라도, 그 주변의 상황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상황은 움직일 것이다. 변화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K는 독서와 니체에 대해 열광적으로 선교하는 어떤 일본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혁명은 텍스트로부터 비롯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외치고 있었다. K는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일본인들은 유난히 감성적인 열변을 잘 하는 종족이라고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 그 일본인이 말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K에게는 사실이 아니었다. K는 어렸을 때부터 텍스트에 둘러싸여 살아왔지만, 그의 정신에는 혁명 같은 것은 일어난 일이 없다. 오히려 고전문학이라는 것은 그의 인간성의 목을 잘라버렸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산산이 부숴버렸다. 분명 어떤 이들은 문학 속에서 감격과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K는 아니었다. K의 독서는 죽음 속에 빠져있었다. K의 독서는 타성이었다. 그가 왜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거의 미치광이 같은 독서로 머릿속에 쌓아놓은 지식들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현학적인 웅변가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햇볕 내리지 않는 단칸방에서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창백한 형광등을 켜놓고, 그 빛마저 몽롱하게 만들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그 무엇도 아닌 이유에 의해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K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 시였다.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가 영혼의 관절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책을 덮고 지갑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집 앞의 구멍가게로 들어가면서 K는 지갑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늙은 주인이 어서 오시라며 인사를 했다. K는 주인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그리고 그는 주류가 늘어선 냉장고 앞에 서서, 초록색 병에 담긴 최악의 술을 꺼냈다. 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을 기만하는 에틴알코올과 물과 아스파탐. 식민지 시대의 문화말살과 박정희 정권이 맥을 끊어놓은, 한국 양조문화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압생트 빛 상징. K는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문화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파괴되는 것이다. 근거나 사색도 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K는 그 최악의 술을 두 병 꺼내 계산대로 가져갔다. 주인은 거의 졸다시피 하며 말했다. “2200원.” K는 만 원짜리 한 장과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고 술을 검은 비닐봉투에 넣어들고 가게를 나왔다.
세상은 황혼의 빛깔로 물들어있었다. 그것은 계절의 색이었다. K는 한동안 그 자리에 말없이 서있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건물 너머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비명 같은 말마디가 흘러나왔다. “K!”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고 K는 생각했다. “K!”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골목 저편에서 어떤 중늙은이 남자가 K를 부르고 있었다. K는 멀리서 그의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랑곳 않고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K!” 그건 도대체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다. 나는 신문기자고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남자다. 나는 안톤 체호프다. 희망 가득한 갈매기에 대해 서사했으며 1904년에 사망했다. 나는 말 없는 화자다. 나의 페이지는 하얀 공백으로 이루어져있다. “K!”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다. 마을 변두리의 커다란 바위 밑에 내가 훔친 지폐다발과 패물들이 숨겨져 있다.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은둔 작가다. 좀머 씨는 나의…… “K!” 어느새 따라붙은 남자가 K의 어깨를 붙잡았다. K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넋이 나간 눈동자로, K는 헐떡거리는 그 중늙은이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반백의 머리, 깊고 익숙한 주름,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아주 옛날부터 보았던 것 같은 눈동자. “당신은 적어도 예순 살은 되었겠군요.” K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냐. 나 네 큰아버지 아니냐.” 아아, 맞다. 큰아버지가 피우던 담배 냄새가 이 사람에게서 난다. 담뱃갑에 대나무가 그려진 얇은 연초……. “큰아버지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K는 대뜸 물었다. 큰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내 남동생이 그의 아들을 내게 맡긴 이후로, 나는 이 조카와 단 한 번도 정상적인 회화를 해본 일이 없다. 애당초 나는 이 아이에게 단 한 마디의 충고나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그의 언어체계는 스스로 빠져든 고독에 말려들어가 엉망으로 뒤틀린 것 같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작은 전셋집에서도 사방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연초냄새와, 모든 것이 보류된 인생의 냄새가요. 나는 나의 혈족을 사랑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바로 저버렸습니다.” K는 떠들었다. K의 혀는 거의 항상 그의 통제 밖에 있었다. 마치 혀에 또 다른 중추신경이 있는 것처럼, 그 중추신경이 뇌와는 별개로 혀를 통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즉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것처럼, K의 시야는 모든 것이, 온통 뿌옇게 흐려있다. “네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아, 그럼! 분명 아버지는 내 걱정을 많이 할 것이다. 그의 걱정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섰을 때 그가 나를 이 마을로 보냈으니까. 매월 통장에 채워지는 30만원의 부성애와 함께 말이다. “모든 것이 똑같다고 전해주십시오. 이 행성에서 개인의 삶이란 단 한 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K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큰아버지와 마주본 채 중얼댔다. “어딜 가는 게야? 게다가 술까지 사들고!” 응당 분노해야할 때 K 주변의 어른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K에게는 그 어떤 질책도 그의 영혼을 슬쩍 비켜 가버린 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어디든 가야 합니다. 술은 내 수전증을 멎게 합니다. 담배는 내 고통을 연기처럼 흩트려 놓습니다. 하지만 정당화도 논리도 필요 없어요. 내 인생에서-아니 도대체, 내 인생이라는 것은 발음하기도 창피한 것이에요. 그러니 제발…… 아아, 아아아!” K는 갑자기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날숨과 비명은 나병환자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와 같았고, 도무지 그의 절망을 덜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절규 같았다. “아아! 내가 생각하게 만들지 마세요. 부디!” 그는 이제 손톱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할퀴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당황했고, 또한 슬펐다. 이 돌연변이 같은 놈. 우리 가계에서 어째 이런 놈이 태어났단 말인가? 이 조카라는 녀석은 도대체가 <인간>이 될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K의 이마에서 조그마한 핏방울이 흘렀다. 그것은 감상주의자의 눈물 대신 흐르는 듯 볼을 따라 턱에 닿아 방울졌다.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형님. 저는 아무것도 요청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목적하는 바도 없습니다. 실상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내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K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허무주의>라는 빈말을 꺼낼까봐 극도로 긴장해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언어라는 것은 오해하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 것을 부디 언어철학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려 털버덕 털버덕 아스팔트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가끔 부는 가을바람에 백발을 나부끼며 K의 뒷모습을 주시할 뿐이었다. 도무지 씻어낼 수 없는 찝찝함과 답이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기분이 뒤섞인 것 같았다. K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가 비닐봉투에서 소주를 하나 꺼내 뚜껑을 까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병나발을 불면서 코너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K의 큰아버지는 한참을 멀뚱히 서있었다. 그의 남동생에게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동생아, 3년 전에 너의 품을 떠난 네 아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다락방이 있는 침울한 골목을, 결국 황급히 떠나고야 말았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에 불과해요.”
“이름이 뭐냐니까요.” 경찰은 재차 물었다. 그 젊은 경찰의 얼굴에는 피로와 무관심이 벌써부터 새겨져있었다.
“아버지-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당신의 아들은-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정말로 아무것도……” K는 완전히 취해있었다. 그의 상태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굳이 비어로 말하자면 그는 술에 <꼴아>있었다. 그는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얼굴을 그러쥐고 있었고, 손톱에 찔린 피부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사십니까? 연락할 가족은 있으세요?” 경찰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담배를 한 대……” K는 말하면서 자신의 뒷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어요. 내-내 담배가 어디에 있죠?” 그는 이제 바지와 재킷의 호주머니를 전부 뒤지고 있었다. “사바세계의……”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날숨처럼 K가 중얼거렸다.
“좋아요. 담배 한 대 피우시면 정신이 좀 드실지도 모르니까, 자 여기, 밖에 나가서 피웁시다.” 경찰이 포기한 듯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하나 꺼내고 K의 어깨를 잡아 올리며 부축했다. 그들은 경찰서 바깥으로 주춤거리며 걸어 나왔다. 분명 경찰은 이 지저분한 수염과 엉클어진 장발의 주인공이 미성년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경찰은 K의 입에 값싼 국산담배 한 개비를 물려주었고, K가 고개를 끄떡거리자 성냥을 긁어 불을 붙여주었다. K는 경찰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깊게 연기를 빨아마셨다. 하늘에는 해가 중천이었고 가을인데도 더위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태양광선의 힘 때문인지 위장 속에서 들끓는 알코올의 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K는 코로 연기를 뿜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울 수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그러니까 이것은 메타포가 아니라, 내가 왜 경찰서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과거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현실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죠?” K가 물었다.
“당신은 중학교 앞의 벤치에 쓰러져있었어요. 주변에는 소주병이 몇 개 깨져있었고, 정신을 잃은 채로 계속 오물을 토해내는 걸 학교 수위가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세 번째예요.”
K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연기를 뿜었다. 그래, 과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아. 이 경찰도 내 주장을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담뱃재가 K의 셔츠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내 담-담배는 어디에 있죠?” K의 목소리는 의미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잃어버리신 모양이죠.” 경찰이 한숨을 쉬었다. “보세요, 술을 드시는 건 자유지만 애들 다니는 학교 앞에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에요.” “하하!” K는 반사적으로 건조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누가 어른이라는 거야? 이 사람은 내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미래를 봤어. “그림자” 같은 죽음“의 환영이” 내 “머리맡”을 싸돌아다닐 “때” 나는 “내 미”래를 봤“어.”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과 똑같은 색깔의 담배연기. 위로. 위로. 위로. 더 높게. 모든 것은 불에 태우면 위로 올라간다. “난 돌아가야겠어요.” K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꽁초를 쥐며 말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주소를 불러주세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분 뒤에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갈지도 모르니까. “난 주소에 살지 않아요…….” 그러면서 K는 경찰을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주차된 경찰차들 사이로 걸어갔다. 태양이 너무 심하게 번쩍였고 가을 공기는 세상에다 불에 달군 유리를 부어넣고 굳인 것처럼 이질적으로 청명하고 초현실적이었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진탕이 된 K의 뇌는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더러운 다락, 그 춥고 어두운 다락이 그의 집이라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장판에 누워 담배를 피우면, 이 짧은 과거도 허상으로 변해 날아가고 잊힐 것이다. 그리고 술이 깨면, 그때는 K는 그 다락으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차라리 면도날 같은 세상으로 몸을 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둠도 습기 찬 공기도 담뱃진 냄새도 매일매일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으니까.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현실이라는 밧줄들이 목을 졸라대 결국 질식사하게 만들고 말테니까. “빌어……먹……” K는 휘청휘청 한낮의 대로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욕설마저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예요…….” 분명 그에게는 영혼도 없을 것이다.
흔들리는 시야 바깥으로 행인들이 보였다. 너무 취해 그들의 얼굴을 인지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K는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K에게는 정신에 내리꽂히는 핵폭탄 같은 것이다. 특히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보고 있는 세계가, K가 보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되게 만드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이다. 여름용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들과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퍼져 나오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K는 눈물을 흘리거나 발광하거나 분노한다. 아, 저기 한 주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군. “나는 도망쳐야 해.” K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애당초 이런 밝은 시간에 경찰서까지 끌려간 것이 잘못이었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오로지 다락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K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어댔다. “아무도.”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고 또 아무도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은 기만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지다. 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해야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참하고 고통스러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 잔의 끔찍한 독주나 폐를 찢어대는 담배연기, 혹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혈액으로 도망치며 가라앉아 너무나 당연하게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K는 보도블록에 눈길을 처박고 걸으며 갑자기 외쳤다. 어딘가에서 아기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싫다. 밝은 것은 싫다. K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둠과 금속으로 된 벽들 속에 있을 때, 빛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형상마저 흐릿한 비현실이었다……. K의 눈물샘에서는 잘 벼려진 단도가 자라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K는 그 단도들을 식도로 삼켜 보낸다. 어서 햇빛 들지 않는 골목으로, 그리고 나의 집으로.
우리는 왜 그냥 죽어버릴 수 없는가.
우리는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은 정말로, 정말로 무의미하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K는 웬일로 방에 불을 켜고 벽과 마주앉아 있었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벽에는 잉크로 그런 글귀가 써갈겨져있었다. 글씨체는 분명 K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낙서를 한 기억이 없었다. 아! 사실 K의 머릿속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알코올이 기억을 파먹고 죽음 같은 잠과 도주로 말미암아 그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그 문장은 이상했다. 우선 무엇이 이상한가하면 지금이 2015년이라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에서 <미쳐간다> 따위의 현재진행형을 붙여놓은 것도 이상했다. K는 장판바닥에 앉아 멍하니 그 글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계획일까? 내년 1월에는 미치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계획인 것일까. 그는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지.” K가 바싹 마른 안구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암, 내가 미쳤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나의 이성은 아직도 멀쩡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차라리 내가 미쳤더라면, 완전한 광기에 잡아먹혀 오로지 상념을 배설하기만 하는 통제되지 않는 재해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장에 술을 쏟아 붓고 기억을 잃고 정신을 잃고 나 자신도 달가워하지 않는 담배의 역한 연기를 숨 쉬며 새벽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 이성을 망가트리고 전선을 뽑는 것만이 진통의 효과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K는 방을 뒤져 담뱃갑을 찾아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 K는 생각했다. 내가 도망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입증해봐야 무엇이 자랑스럽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현실세계에서 도무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한 편의 끔찍한 소설과 같이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로 아랍인에게 권총을 연사하고 사형집행을 당한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그러나 대체로 세상은 드라마가 아니고 통상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도라는 사내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며 토의를 하지만,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일어나 소년병들이 마약에 취한 채로 포로들에게 총을 쏴재껴도, 여객선이 침몰하고 비행기가 빌딩에 처박혀도, 해일이 나라 하나를 뒤집어엎어 수만 명이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되어 길거리를 굴러다녀도, 강간범과 살인마들이 도시를 활보하며 일을 치루고 다녀도,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를 명석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그저 당연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영원히 작용하는 관성으로 비추어 보인다. 도덕 같은 것은 관찰에 방해나 될 뿐이지…… 젠장! 나는 아직도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어디선가 미친 살인마가 달려와 나이프로 내 목을 몇 번이고 쑤시는 환상을 본다. 그러한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환영받을만한 것이고 내가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것인데, 사실은 유치한 망상이다. 오, 그러나 내가 죽음에게 매료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그러한 것에 매료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저 진통제가 필요할 뿐이다. 영원히 약효가 진행되는 진통제가! 프로테스탄트들 말로는 자살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가 영원히 불탄다고 하는데, ―육체도 없는 것을 불태워서 무어에 쓰냐는 의문은 접어두더라도―차라리 나는 그런 단순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이 더 낫겠다. 삶에서 주어지는 권태롭고 모순투성이인, 영혼의 숨통을 옭아매는 끔찍한 고통보다, 차라리 유황불에 불타는 것처럼 간단명료한 아픔이 더 낫겠다. 제기랄! 그러나 자살만은 안 돼. 명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자살만은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이 항상 내 주변에 있다……. 나에겐 벌써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K가 씨부렁대는 것을 주의 깊게 들을 이유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다. 그는 오늘도 그저 숙취 때문에 둔해진 머리로 헛구역질을 하듯이 잡념에 빠져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K는 번뇌의 덩어리다. 새해에 보신각종을 치듯이 그의 머리통을 108번―어쩌면 그 이상― 두들겨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K가 뇌진탕으로 숨지는 것 외의 아무런 결과도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피를 좀 흘리고 나면 속이 상쾌해진다는 것을 K는 알고 있다. 그는 여전히 벽의 낙서 앞에 주저앉아 상체를 앞뒤로 끄떡끄떡 흔들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방안 가득 차고,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세어보다가 갑자기 토했다. “우웨엑.” 토사물은 시큼하고 멀건 액체뿐이었다. K는 자신이 3일 정도 술 외에는 먹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번 더 벽을 향해 토했다. 가래 같은 것이 섞인 오물은 벽의 글귀 위에 지저분하게 쏟아졌다. 아, 시바. 내 인생은 인생이라고 부를 것도 없구나. K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위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았고 토사물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났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잡념이나 상념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K는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K는 꿈을 꾸었다.
그는 어둡고 좁은 곳에 있었다. 다리도 펼 수 없을 만큼 좁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바닥과 벽은 딱딱했고 만지면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다. 무언가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현실에서 느끼는 실체도 없는 막연한 노스탤지어와는 다른, 보다 인간다운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슬펐다. 슬펐고, 동시에 공포가 입과 코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분노가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K는 분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 금속으로 된 상자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너무 오래 비명을 질러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머리맡에 죽음이라는 것이 어슬렁거렸다. 그것은 어쩐지 오히려 친숙했다. 굶주림과 추위와 고독 속에서 그것만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런 꿈을 꾸었다. 깨어나자 K의 머릿속에서 꿈의 기억은 사라졌고, 그저 끔찍한 적막만 머리통 안에서 웅웅 울리는 것이었다. “씨발!” K는 몸부림치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도 그는 몰랐다. 굳이 알아낼 이유도 없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고 세상이라는 게 그런 거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오로지 악의로만 설계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K는 자신의 혀를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혈액이 타액과 뒤섞여 볼을 타고 흘렀다. 아하! 하하하. K는 웃었다.
어느 아침 K는 맥주병을 두 손으로 쥐고 고등학교 앞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등교하는 학생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K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있었다. 딱히 눈물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써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도 없었다. 애당초 K에게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들이 없으니까.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도움이 될 테지! 주로 고통스러운 감정과 사고의 비약을 만드는 것은 시각적 자극이기 때문이다. K는 맥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아, 그러나 책을 볼 때 불편한 것은 어떻게 하지…….
“선배.”
K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을 보니 앳되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곁에 앉아있었다. “선배 입에서 피 나요.” 그녀가 맥락 없이 지적했다. K가 입 주변을 손으로 더듬자 맥주와 섞인 혈액이 손가락 끝에 묻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 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마도 혼자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리라.
“너 누구야.” K는 손끝에 묻은 피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H중학교. 선배 1년 아래였던 민지. 이민지.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 등굣길에 선배 자주 봤어요. 아침마다 이 벤치에 앉아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민지라는 학생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K는 그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중학생 때 교류가 있었던 여자 후배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너, 거짓말을 하고 있군.” K가 내뱉었다.
“아니에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복도 청소를 하다가 그만 유리창을 깼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안절부절 못하는 절 보고 그랬잖아요. 선배가 깬 걸로 할 테니까 신경 끄고 집에 가라고.” 말투가 통통 튀는 듯이 발랄한 학생이었다. 말도 많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선생들은 나랑 엮이는 게 싫어서 혼조차 안냈으니까.” K가 맥주병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나 담배 피울 거니까 저리가.”
“괜찮아요. 이 시간에 등교하면 학생부 선생님들도 교문에 없어요.” 여자아이는 웃었다. K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선배 아직 미성년자 아니에요?” 궁금한 것도 많고 말도 많고, K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담배연기를 한껏 빨아마셨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런 걸 누가 신경 써. 그리고 너 나한테 왜 말 걸었어.” 민지는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선배는 자유로워 보여요.”
“하!” K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자유! 자유라! 이 아이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자유, 그래, 난 자유롭지. 그리고 넌 그걸 동경하려고 하고 있고.” K는 바닥을 향해 담배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넌 내 모습이 보이기나 하는 거냐?” 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코올 때문에 반쯤 감긴 눈동자로 민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본능적인 경계태세에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는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어.” K의 눈동자는 불그스름하고 권태로운 빛을 냈고, 여자아이는 이유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사람은 자유의 본모습과 만나게 되면 비참해져.” K는 문장의 한 음절 한 음절을 딱딱 끊어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반드시. 비참해져.”
민지는 K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으려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상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적이지 않은,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 말이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더니, K를 향해 입술을 떼었다. “내일 아침에도 올 게요.” 전과 달리 긴장된 목소리였다. K는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그가 담배연기 때문에 컬컬해진 목을 축이려 맥주를 들이부을 때, 민지는 이미 교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K는 피와 맥주가 묻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면서 새삼 자신의 길고 지저분한 수염을 느꼈다. 도대체가 동경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K는 조소했다. 저 민지라는 아이는 내가 자신의 갈증을 풀기 위해서 그녀의 경동맥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인간은 모두 투견으로 태어났고, “누구나 살인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맥주병을 벽에 대고 던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 등교하던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순간 K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K의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K는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새 담배에 불을 댕겼다. 빌어먹을 놈의 과거라니……. 그는 이미 중학생 때의 일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몇 개의 폭력사건들과 기물파손, 그리고 그가 그의 <보호자들>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제외하면, 과거는 희뿌연 안개가 낀 80년대 호러영화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과거라는 것은 항상 치명적이고 비참한 것이어서, 그저 문 안에 넣고 닫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K에게는 그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K에게는 현재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그는 과거라는 개념을, 현재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매일 저질러지는 과음과 폐가 썩어나갈 만큼의 흡연과 경범죄, 그리고 가끔 흐르는 피들이 그의 <일>이었다. 존재하기 위한 일,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게 되기 위한 일. 양극성과 이율배반과 모순과 양가감정, 그런 것들도 혼돈 속에서는 훌륭한 방정식이 된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올바른 논리라는 것은 존재한 일이 없으니까!” 망할! K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초조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난 철학자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겠어. 난 빌어먹을 놈의 정당성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 때문에 미치는 건 싫어. 그의 걸음걸이는 빠르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신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어댄 탓에 꽁초가 끊어져 떨어졌다. 그 여자아이……. K는 변화를 싫어한다. 혐오한다. 그저 죽음이 자신을 잡아갈 때까지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구렁텅이이기를 바랄 뿐이다.
K는 오래도록 방 안에 있었다. 크누트 함순을 읽고 키르케고르를 읽고 톨스토이에는 담뱃불로 불을 붙여 태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 며칠 동안이나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세계에 반발하여 파고든 도피처는 시간감각으로부터도 유배되는 것이다. 세계에? 너무 거창한 단어다. 세계라고 해봤자 기껏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세계인 것이다. K는 이미 담배연기로 가득 차 숨조차 쉬기 어려운 방 안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맥주병을 찾아다녔다. 다른 한 손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들려있었다. 방 한 쪽 구석에는 책 더미들 사이에 처참하게 구겨진 다자이 오사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퇴폐 속에서 퇴폐주의 작품을 읽는 것은 손목의 인대를 스스로 끊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마침내 K의 손은 맥주병 하나를 발견해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맥주에 섞인 담배꽁초와 담뱃재들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K는 몽롱한 눈으로 그것들을 꿀꺽 삼켰다.
갈증이 났다.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의 연기가 사람을 만난 바퀴벌레처럼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가 흩어졌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오히려 구역질이 났다. K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방문 밖으로 신물을 뱉어냈다. 술, 술이 필요했다. 얼마나 방 안에서 안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오래도록 한숨도 자질 못했다. 하지만 K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아무리 피곤하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어도 맨 정신으로는 절대 잠에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념 때문에, 비약되는 사고 때문에, 심장 한 복판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그러하였다. K는 방 밖으로 침을 한 번 뱉고 문가에 놓인 지갑을 집었다. 열어보니 한 푼도 없었다. K가 인상을 찌푸리며 방 안을 휘 둘러보자 온통 빈 술병과 빈 담뱃갑들, 그리고 타거나 무너져있는 책들뿐이었다. 그는 지갑을 책 더미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비틀거리며 밖에 섰다. “자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지독한 아이러니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하늘은 주황빛이었다. 그러나 K의 눈에는 누렇게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온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자 수염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아아, 아아아, 시발……. 그는 낮게 신음하며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금각사가 불에 탄다.” 헛소리였다. “피아니스트도…….”
무의식중에 걷다보니 K는 어느새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K보다 어린, 혹은 동갑의 아이들이 K를 피하며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K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왜 밖으로 나와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에 없었다. 지구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K는 어쩐지 자신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비틀비틀. 비척비척. 휘청휘청. 목표하는 지점도 없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감각에 붙들려, 그 현상을 숭배도 저주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영겁 속에서 그저 걸을 뿐인 현상이다. 불은 타고 물은 흐른다. 나는 걷는다. 중력은 잡아당기고 빛은 빛난다. 나는 존재자로서의 조건이 결핍되어있다. 나는-존재하지-않는-다-영원-히.
“선배?”
땅이 한 바퀴 돌았다. K의 눈동자도 돌았다. 눈앞에 이민지라는 18살의 여고생이 서있었다. 앳되고 당찬 얼굴의 생김생김. K보다 작은 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K가 다니게 되었을지도 몰랐던 학교의 교복. 황인종의 살굿빛 피부. 그리고 K를 쳐다보는 맑은 눈망울. K의 왼쪽 눈물샘에서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솟아나와 흘렀다. 그 눈물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영혼의 복부에서부터 울렁거리며 뻗어 나오는 증오를, 억지로 내리누를 때의 반작용으로 흘러나온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눈물이었다.
“선배 울어요?” 민지가 다소 당황하며 물었다.
“너 돈 있냐.” K도 물었다.
“왜요? 삥 뜯으려구?” 민지가 실쭉 웃었다.
“이천이백 원만 빌려줘.” K가 대뜸 요구했다.
“왜 그렇게 구체적인 금액이에요?”
“소주. 두 병.”
민지는 K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니, 한참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K도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만지면 부서진다. 죽이면 죽고, 꺾으면 부러진다. K의 허파 한쪽이 뻐근하니 아파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때처럼 무서운 얼굴이 아니네요.” 민지가 말했다. 그때처럼? K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돈.” K는 짧게 내뱉었다.
“좋아요.” 민지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대신에 저랑 10분만 얘기해요.”
K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씹었다. “이자 붙여서 갚는 걸로는 안 되냐?”
“이자 필요 없어요. 소주 살 거예요 안 살 거예요?”
“알았다. 제기랄…….” K는 욕설을 씹으며 근처의 벤치로 가서 털썩 앉았다. 민지는 신난 듯이 따라와 옆 자리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돈부터 내놔.”
“안 돼요. 대화 끝나면 드릴 거예요.”
“알았다. 니 마음대로 해.” K가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선배는 철학자예요?” 민지가 대뜸 물어왔다.
“아니.” K는 피식 웃었다.
“수염이랑 머리는 왜 안 깎아요?”
“필요를 못 느껴서.” 따분하다.
“고등학교는 왜 안 갔어요?”
“너 중학생 때 나 알았다며.” K는 내내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자세였다.
“자세히는 몰랐어요. 전교에 선배 얘기가 소문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알아챈 거죠.” 민지의 목소리 톤은 항상 발랄하다.
“내가 고등학교에 갔었다면 지금쯤 여기가 아니라 소년원에 있었을 거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K 자신의 의견도 아닌, 정신상담 치료사의 의견이었다.
“중학생 때 국사선생님 때려눕혔다는 게 진짜예요?”
“어.”
“어떻게 징계 안 받았어요?”
“합의금. 아버지 돈으로.” K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선생님 한 동안 팔에 깁스 하고 다녔는데.” 민지는 이 대화가 흥미롭기만 한 모양이다.
“내가 부러트렸으니까.”
“왜 그랬어요?”
“몰라.” K가 어조 없이 대답했다.
“대화에 비협조적이면 돈 안 빌려줄 거예요.”
K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저 민지라는 녀석은 흥미본위로 나한테 접근한 것이 분명하다. 마치 동물원에서 야생동물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지금 그녀는 그저 K라는 미치광이를 관찰하며 재미있어하는 것뿐이다. “진짜 몰라. 애당초 중학생 때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아.”
“흠.” 민지는 수긍한 듯 했다. “왜 나한테 돈을 빌리려고 해요?”
“뭔 소리야. 돈이 없으니까 빌리는 거지.”
“왜 돈이 없는데요?”
이 망할 녀석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대화를 끌고 나가려는 걸까. “월말이라…… 통장잔금도 바닥났을 거고. 바로 몇 시간 전에 내 방에서 제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을 불살라버렸어.”
“뭐였는데요?”
“총 삼천 페이지짜리 특수가공 하드커버에 은도금 되고 북 커버까지 쓰인 양장본 세 권.” 중고책방에 팔았다면 못해도 삼만 원은 족히 받았을 것이다. 삼만 원의 진리, 사랑, 행복.
“왜 그런 비싼 책을 태워버렸대요.”
“태워야 했으니까.” K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보다 나 지금 진짜 미칠 것 같거든. 돈 안 빌려줄 거면 그만 두자. 까짓거 마트 영감님 목 분질러버리고 소주 몇 병 꺼내오면 그만이지.” K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지금 피로와 환각 때문에 정신이 어지럽고 편두통까지 오려하는 판국이었다.
“아, 아니에요. 돈 빌려드릴게요.” 민지는 당황한 듯이 가방 속을 뒤지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삼천 원을 꺼내 K의 손을 잡고 그 손 안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K는 건조한 눈동자로 그 종잇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것들을 구겨 쥐며 주머니 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는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서있었다. 세계가 비틀린 듯이 보였다. 영양실조, 빈혈, 금단증상, 뭐 그런 것들 때문이겠지. 그는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러다가 민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뭐랬지.”
“민지요. 이민지.” 그녀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K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K는 뚜벅뚜벅 걸어 가버렸다. 가을에도 음식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는 자신의 음침한 골목을 향해서.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현재 체중이……> <산후 우울증이라는 게 있는데……>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형사입건을……> <적용되는 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신감정 후에 송치될 것이고……> <이런 경우에는 아드님께서도 차후에 어떻게 될지……>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어렸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왜 나는 엄마가 없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빌어먹을. 싸구려. 신파극. 같은. 인생.
하늘에는 어린아이들의 비명소리만 천둥 치듯이 울려 퍼진다.
K는 어느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웬일로 그는 면도를 했고, 흐트러진 장발은 고무줄로 올려 묶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나락에 떨어진 사람의 그것과 같았고 얼굴은 창백하게 말라붙었으며, 온몸에서는 담뱃진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훨씬 보기에 좋았다. 적어도 K의 눈동자를 직시하지만 않는다면, 그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는 굳은살이 박히고 흉터투성이인 주먹으로 철제 현관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사람이 나왔다. K의 큰아버지였다.
“K."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적잖이 놀란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전화 좀 쓰러 왔습니다.” K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조가 없었다.
“어…… 그래, 들어와라. 면도 하니까 보기 좋구나.” 큰아버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문을 열어 K를 집 안에 들였다.
방향제 대신 사방에 놔둔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 홀아비 냄새를 없애겠다고 놔둔 것이겠지만, K에게는 이 냄새가 더 독하게만 느껴졌다. 고독과 망가진 인생과 결핍을 가리려는 가식의 냄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냄새. 그 냄새들 사이에는 남자의 손으로 어설프게 정리된 좁은 방들이 있었고, 이미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큰아버지의 자식들이 보낸 인스턴트식품이 박스 채로 쌓여있었다. K는 그런 방안을 휘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인호 형은 요즘 어떻다고 합니까?”
“그 녀석이야 잘 있지. 명절마다 내려오기도 하고.” 큰아버지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K는 대뜸 내뱉었다. “전화를 좀 써야겠습니다.”
“그래, 전화. 누구한테 하려고?” 큰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큰아버지 남동생이요. 전화번호도 좀 찍어서 주세요. 전 모르니까.” 요컨대 아버지.
큰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동생의 번호를 누르면서 생각했다. 왜 이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지. 벌써부터 망가지고 알코올 중독에 걸려 쓰레기처럼 살고 있기에 기품 따위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 청년에게서, 왜 항상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어쩌면 그것이 심지어 어른마저도 손을 못 댈 광기의 끄트머리는 아닐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일이다. K는 절대로, 절대로 이해되지 않으니까.
큰아버지는 동생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러 K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K는 그것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아버지, 나예요. K."
10초 정도의 정적. 아마도 아버지는 놀란 가운데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어……아들. 이게 얼마만이야……. 전에 아버지가 몇 번 너 사는 방에 갔었는데―>
“아버지.” 그것만으로도 말이 끊겼다. “잡담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예정이 좀 당겨졌습니다. 어른이 되면 대답해준다고 약속 했던 것, 지금 들어야겠어요.”
<……> 또 한 번의 침묵.
왜냐하면 나는 절대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니까. “내가 악몽을 꾸고 울 때마다 아버지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적어도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되겠니?> 그의 목소리는 거의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시간 없습니다.” K는 자르듯이 말했다.
큰아버지는 그 광경을 그저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참하게 망가지려는 동생을 붙잡아준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번 새겨진 흉터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죄는 영원히 죄로서 남는다는 것을, 설령 그 죄에 대한 벌이 내려지지 않고 내려질 상대조차 없더라도, 죄라는 것은 개념을 초월해 인간들의 사이사이를 불쾌한 공기처럼 떠돈다는 것을 말이다. 망가진 장난감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장식장에 장식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K는 수화기로 뭔가를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항상 술에 취해 반개해있던 눈동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말이 끝났을 때, K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이제 더 이상 생활비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쓸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핸드폰의 종료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K는 큰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큰아버지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K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원망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운이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로커에 갇혀있던 한 살 배기 어린애보다는 머리가 좋으니까요.” 큰아버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입을 닫아버렸다. “혼돈이 왜 공평한 것인지 아십니까?” K가 큰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큰아버지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며, 스스로 답을 말했다. “그것은 무작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K는 열려있는 현관문으로 뱀처럼 나가버렸다.
큰아버지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석상처럼 서있었다. 얼마 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나다. 그래. K는 갔어. 그냥 가버렸어.” 그러면서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지는 그날도 평소처럼 교복을 차려입고 등교하고 있었다. K의 모습을 못 본 것이 며칠 째더라. 어쩌면 그 삼천 원은 평생 못 돌려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등굣길 저편에서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흘낏 보였다. 다른 여학생들은 코를 막고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씨부렁거렸다. 매너가 없다느니, 멀쩡하게 생겨서 길빵이라느니. 남자에게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데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흰색 셔츠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청바지 밑에 갈색 구두를 신은 훤칠한 남자였다. 민지는 무관심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민지.” 민지는 멈춰 서서 그 남자를 보았다. 나를 아시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얼굴 생김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그것이 K라는 것을, 민지는 깨달았다. “선배?”
그것은 K였다. 마르고 창백한 피부에 유난히 붉은 입술, 나락 같은 눈동자. 예전에는 늘 구부정한 자세였는데, 등을 펴니 키 또한 컸다. “선배 머리 잘랐어요? 면도도 했네?” 민지가 놀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K가 다 타버린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가 그런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이게 뭐야? 선배 왜 이렇게 말쑥해요?” 그러나 K는 대답도 하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만 원을 민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웬 돈이에요?” K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돈 빌렸던 거.” 민지는 당황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K의 모습이나, 이 돈이나. “열 배잖아요!” 그러자 K는 민지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안에 삼만 원을 올려놓고 주먹을 쥐게 했다. “그냥 받아. 주고 싶어서 그래.” 민지는 멍한 상태였고, K의 얼굴은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민지가 물었다.
“글쎄.” K가 흰 손으로 민지의 손을 쥔 채로 웃었다. “새로 하는 작업에 이런 모습이 필요했거든.”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요새는 기분이 꽤 좋아. 가슴 속에 틀어박혀있던 대못 하나가 빠진 기분이야.” 민지는 여전히 당황한 채로 K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이 사람 수염 밀고 머리 다듬으면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그 망나니짓을 다 하고 다녀도 학생들한테는 알게 모르게 인기가 있었지……. “그리고 조만간 떠나야 되거든. 가기 전에 돈도 갚고, 네 얼굴도 보고 가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의 불친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는 다 사라지고,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는 남자가 서있었다. 새삼 손이 잡힌 것이 부끄러웠다. “떠, 떠나다뇨?” K는 슬며시 민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좀 멀리. 이 도시에서 볼 일은 다 봤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아쉬워라…….” 어쩐지 K와 눈을 못 마주치며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봐야겠다.” K가 말했다. 그는 민지의 어깨를 톡톡 치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고하며 거리 저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고마웠어. 그래도 앞으로는 나 같은 이상한 사람한테 말 걸지 마. 위험하니까.” 그리고 그는 갔다.
민지는 만 원짜리 세 장을 손에 들고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도대체 저 선배는 뭐였던 걸까.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으며, 내가 본 모습 중 진짜 모습이 있기는 했던 걸까. 그러나 고민할 새도 없이 K는 사라졌으며, 동시에 민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 왜 엄마?”
<딸.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우리 동네에서 밤에만 벌써 세 번이나 여자 죽은 거 알지?>
“알았다니까. 그래서 요새 학원도 안 가잖아.”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다니? 어떤 미친놈인지 죽이고 머리통까지 잘라 갔다잖아. 아이고, 끔찍해라…….>
“알았어. 학교 끝나면 바로 갈게. 나 학교 가야 돼. 끊어요.”
민지는 전화를 끊고 K가 사라진 거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선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학교에 가야했다. 모든 학생들처럼.
K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을 때마다 나는 구두소리에 스스로 흥겨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이다. 그는 경찰서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가장 얼굴이 익숙한 젊은 순경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경찰은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K를 보았다. “아,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별 건 아니고, 이걸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K는 순경의 테이블 위에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반쯤 부패한 여자 머리 세 개가 굴러 나왔다.
헉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와 함께 순경은 의자 째로 뒤로 물러났다. 다른 경찰들의 시선이 전부 모였다. 경찰서 안에 있던 다른 민간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K는 순경이 도망치기도 전에 목덜미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K는 웃는 얼굴이었다. 경찰들은 권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황급히 손을 가져갔고, 그보다 빨리 K가 뒷주머니에 있던 단도를 꺼내 순경의 목덜미에 겨눴다. 민간인들은 도망치고, 비명이 울려 퍼지던 곳에 바짝 긴장한 공기가 흘렀다. K는 여전히 단도를 순경의 목에 들이민 채로, 이제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칼 내려놔!” 경찰들 중 하나가 외쳤다. 그러나 K는 조롱하듯이 단도를 든 손에 힘을 넣어 순경의 목덜미 피부 안으로 집어넣었다.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쏴.” K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칼 내려놔! 원하는 게 뭐야?” 경찰이 더욱 긴장해서 외쳤다.
“쏴.”
K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단도의 칼끝이 여전히 순경의 목을 찌를 수 있도록 하면서 다른 경찰들이 자신을 쏘기 좋도록 몸통을 드러냈다.
“안 쏘면 이 순경나리 죽어. 쏴.” K의 목소리는 얼음 같았다. 경찰들은 혼란스러웠고, K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K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쏘라고.”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명령했다.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찰이 하나 있었고, 순경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사색이 되어있었다. K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외쳤다. “쏴!”
“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