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밝혀두고 싶은 것은, 법원에서 검사와 판사가 뭐라고 했든 나는 결코 사악한 동기에 의해 행동한 흉악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성자나 현자, 정의 집행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나는 지극히 일반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움직이는 시민이자, 나름대로의 지성을 갖춘 교육된 현대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툼즈 구치소 독방에 갇혀있다. 위에서 굳이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가 변별력과 객관성이 결여된 광인의 일기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에게 이해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작은 독방에서 창살문을 등지고 서, 단 하나뿐인 창―네모나고 작으며 창살이 끼워져 있을 뿐이기에 바람조차 막을 수 없는―을 내다보면 구치소의 안뜰이 보인다. 지난 3년간 나는 안뜰에서 사람의 모습은 고사하고 살아 움직이는 짐승조차 본 일이 없다. 그러나 몇 주 전부터, 나는 안뜰에서 두 명의 인물을 매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깡마르고 키가 큰 남자였다. 아침마다 해가 뜨면 그는 안뜰로 나와, 5분 정도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세운 구치소 담장을 향하더니, 해가 질 때까지 미동도 없이 그저 서 있거나, 앉아있을 뿐이었다. 내 독방의 창을 통해서는 남자의 정면을 관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지는 전혀 추측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이며 터무니없이 정적인 일과를 한동안 지켜본 내 감상은 이러했다. 망할, 이 미치광이 같은 나라의 폭군이자 사형집행자인 사법부가 마침내 정신과 영혼에 병이 난 사람들까지 잡아서 구치소에 처넣기 시작했구나. 뉴욕을 불사르고 북미의 모든 거짓말을 산산조각 낼 행동가는 여기 독방에서 썩고 있는데 말이지. 희망이라는 이름의 출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나려는가. 하지만 내 정당한 분노는 그렇다 치고, 남자는 그 괴이하며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일과를 밤낮으로 반복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마다 안뜰에 모습을 보였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정육점에 걸린 커다란 고깃덩어리에 앞치마를 입히고 사람 얼굴을 붙여놓은 것 같은 거친 인상의 사내였다. 나는 죄수들이 그를 ‘사식업자’라고 부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사 시간마다 그들은 잠시 만났다가, 사식업자 쪽이 안뜰에서 사라지곤 했는데, 여느 때처럼 창문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이던 어느 날 나는 그들이 평소보다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이 준비되었습니다요, 나리. 지금은 식사를 안 하고 싶습니다. 아니, 나리는 도대체 언제쯤 식사를 하고 싶어질 예정이오?
낮은 톤에 점잖지만, 억양이랄 것이 전혀 없어 차라리 유령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 키 크고 깡마른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식업자는 불만스러운 듯 씩씩거리면서 커다란 몸동작으로 안뜰에서 퇴장했다. 유령 같은 남자는 반응도 없이 담장으로 천천히 걸어가, 평소처럼 완벽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의 짧은 대화를 엿들었을 뿐이나, 나는 그 유령 같은 남자를 향해 강렬한 동지애가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동료다, 그는 반항하는 사람이로구나! 그는 부정하는 자다! 그는 거룩한 진실로 거짓을 깨부수는 자다! 그렇지, 그러니 저 자가 음식을 먹을 리가 없지. 특히나 이런 시대의 이런 나라에서라면 말이야.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과 기만에게 패배당하는 것이니 말이야! 감옥살이 때문에 오래간 잊고 지내던 혁명과 진리에의 갈망이, 내면에서 지옥 불처럼 타올랐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흥분한 채로 동료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자 노력했다. 나의 동료는 매일 안뜰에 있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고, 만나지 않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지한 채, 담장 어딘가를 바라본 채, 선 채, 앉은 채, 철저하게 반항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더더욱 전율했다. 그는 결코 먹지 않았다! 점점 더 말라가는 창백한 얼굴은 이제 거의 비인간조차 아닌, 비실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불태우고 부수고 무너트린 것들이, 처음부터 품고 있던 공허를 드러낼 때 마침내 마주할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던가. 나는 스스로의 행운에 감사했다. 이곳에서 실로 나보다 높고 진실한 동료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가 추구해온 모든 것이며, 단 하나의 진리일 수도 있었다. 신도 사람의 형상을 했으며 그 아들도 사람의 형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거짓을 파괴하고 나타나는 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아침 저녁으로 복도를 거니는 간수가 나에게 말을 걸거나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스승인 그는 어느 저녁 차가운 돌 위에 머리를 뉘이고 웅크렸다. 나는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 가고, 안뜰이 보이지 않는 습기로 젖어갔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일도 안 하고 싶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사식업자, 교도관, 그리고 처음 보는 신사 한 명이 나타났다. 태도를 보아하니 신사는 나의 친구와 가까운 사이인 듯싶었다. 그가 누워있던 친구의 눈에 손을 댔다. 아! 나는 아무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 먼 곳에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곧 그들이 나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안뜰에서 걸어나갔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실루엣만 판별할 수 있는, 구치소 담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높다란 담장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으며, 그냥 벽돌 무더기이기도 했고 성상(聖像) 같은 무지막지한 상징이기도 했다. 그것에 새벽빛이 비칠 때 비로소 나는 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파악하기 힘든 어조로 내게 말했다.
당신 괜찮소? 철창 너머에 있는 간수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의도치 않았던 질문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형은 언제쯤 집행됩니까? 나는 그냥 간수요. 그런 것 까지는 모르는데. 더 이상 기다릴 게 단 하나도 없게 되었군.
나는 그들에게 종이와 펜을 요구했다. 그들은 곤란해했으나 이틀 뒤에 종이와 목탄을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이렇게 친구이자 스승에게서 배운 진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도시에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전부 거짓말이다. 저지른 건 ‘의무[need]’라는 이름으로 전미에 출몰하는 유령이다.
이미 용훈은 탐색을 포기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강가 벤치에 앉아있다. 벌써 세 시간 동안 마포대교 북단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녀는 쭉 뻗은 두 다리 사이에 양팔을 넣은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칼이 계절 때문에 차가워진 강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용훈은, 터널 같은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갈대밭을 헤치며 찾아낸 한강의 수위조절용 터널을 돌아본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이런 ‘비슷하지만 다른’ 터널을 네 개나 찾아냈다. 그것들은 전부 흡사한 생김새에, 자전거도로나 산책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네모난 구멍은 성인 남성 키보다도 훨씬 천정이 높다. 수위조절용 터널이라지만 강물에 젖는 일은 그다지 없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깊은 통로가 보인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4년 전에도 통로 끝까지 가본 일은 없으니까. 혜미. 용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뾰족한 갈댓잎이 목덜미와 손목을 찌른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벌써 지쳐있다. 지금 하고 있는 ‘한강 탐색’이라는 놀이에 질려버렸다. 그녀가 용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눈동자가 가을 햇살을 반사해 약간 갈색으로 빛난다. 용훈은 다시금 생각한다. 지금 와서 14년 전의 터널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호기심을 보이기에 동조했을 뿐, 그에게는 마땅한 이유나 동기도 없었다. 만일 14년 전의 자신이 지금의 그를 본다면, 꿈도 못 꾸던 생활을 손에 넣었으면서 무슨 여흥거리라도 되는 듯이 과거에 집적대냐고 비아냥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찾아내지 못한 그 터널 안에 드러누워서 말이다. 나는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용훈은 굳이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것 같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 집안에 붙은 빨간딱지가 아버지를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빨간딱지란 참 기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잘만 사용해오던 물건들에 딱지가 붙으면 그것은 곧바로 남의 것이 되어 끝내 사라져버렸다. 집안 살림들이 모조리 어디론가 실려 나가버리자, 빨간딱지는 이제 가족들마저 잡아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집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직도 주공 아파트 2층에 있던 그 집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처음으로 화장실에 욕조가 있는 집이었고, 처음으로 방이 세 개나 되는 집이었으며, 처음으로 침대를 들여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가족끼리 살았던 집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상에 지어진 집이었다. 그러나, 여하간에 그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가구들에는 온통 빨간딱지가 붙고, 아파트는 남의 것이 되었다. 그 뒤에는 제일 먼저 어머니와 동생이 외가로 향했다. 아버지는 용훈에게 얼마간의 돈―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당시의 그에게는 굉장한 액수의 돈―을 주고 큰댁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찾았어? 혜미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어조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몇 번이나 꼬드긴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쉽게 호기심이 동하다가도 쉽게 질려버리는 것이 지난 2년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녀의 특징이다. 가끔 용훈은 그녀가 무슨 이유로 지금까지 자신과 연인관계로 남아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가 용훈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실은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2년이란 시간이면 호기심과 동경 따위는 사그라들기에 충분하다. 3년 전,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기회라는 것을 얻었고 자립할 능력을 얻었으며 덧붙여서 여자친구까지 얻었다. 신문에 그의 이름 석 자와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다리 밑에서」’라는 활자가 찍혔다. 평소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심사평을 써주는 믿기 힘든 일도 일어났다. 그는 마침내 손에 넣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다. 큰댁의 식객으로 지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나이였다. 작품을 쓰기 전 용훈이 했던 일은 십 년도 전에 마구잡이로 썼던 소설들을 다시 읽는 것이었다. 문장도 명확하지 않고 이야기 구조도 엉성한, 소설 같지도 않은 소설에서 유난히 눈에 걸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해내는 능력을 잃었다. 과거를 모조리 글로 써서 기록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보다 확실한 것처럼 보였고 오염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십수 년 전에 쓴 그 글은 어째서인지 돌부리처럼 위험하게 돋아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과 가족에게 온통 빨간딱지가 붙은 뒤부터 자신이 체념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큰댁으로 가라며 돈을 쥐어주고 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혹은 명령을 듣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아버지마저 사라지고, 그는 딱지가 붙어있는 장롱의 안쪽 한구석에서 국방색 침낭을 꺼냈다. 보다 어릴 때 가족과 캠핑을 하며 단 한 번 써본 물건이었다. 베란다에 남아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었다. 돈 봉투는 진즉 배낭 가장 깊은 곳에 숨기듯이 넣어놓았다. 아파트를 나와 우선은 물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신곡동 한쪽에 흐르는 개천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행인이 너무 많았다. 좁은 개천가는 산책객이나 자전거를 타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용훈은 중랑천을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돈 봉투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든 묵직한 배낭 위에 침낭을 묶어놓고, 걷다가 피곤하면 아무 곳에서나 앉아 쉬고, 또 걷다 밤이 되면 개천가의 으슥한 곳에 나동그라져 잠들었다. 이틀하고 한나절 정도를 걸으니 바다처럼 넓은 강이 나타났다. 한강에 도착할 즈음에 이미 용훈의 몸에서는 부패한 음식물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악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나 피해갈 정도로 심한 악취를 온몸에서 풍기며, 엉망이 된 옷을 입은 채 기름이 엉겨 붙은 머리로 밖을 나다니는 것은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누가 되었든 겪어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찡그린 표정도, 불길한 시선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니 그는 학교를 다니는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공부를 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업이니 가족이니 하는 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동생도 곁에 없었고,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못할 때마다 벼린 칼날처럼 시퍼런 눈으로 용훈을 노려보던 어머니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다리의 이름은 동호대교였다. 어떡할까? 돌아가? 용훈이 혜미에게 묻는다. 그녀는 고개만 움직여 주변을 돌아본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아마 혜미는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 자신이다. 지쳤으니 돌아가자고 말하기는 창피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괜히, 찾는 것도 없이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쉽게 대답을 할 것 같지 않다. 얼마쯤 기다리다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용훈이 대신 말한다. 좀 쉬다가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번거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혜미를 만나게 되었더라, 하고 용훈은 기억을 돌이켜본다. 만나게 된 계기보다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의 가정환경이다. 어머니는 약사,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약대를 나와 어머니의 약국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처음 그녀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었을 때 용훈이 느낀 것은 기묘하게 뒤틀린 우월감이었다. 아니면 우월감으로 가장한 열등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님 데뷔작 읽고 정말 충격이었어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직접 겪으신 일인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뵐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 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충격적이었다는 말만 했지 용훈의 글이 좋았다거나 감명 깊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게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녀는 자주 용훈의 경험담에 비교하듯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늘 자신의 삶이란, 마치 굴곡 없는 평탄면을 달리는 것 같았다고, 더욱 과장하여 말하자면 마치 아무런 희로애락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고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착잡한 감정이 슬쩍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왜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그녀는 용훈의 소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혜미 옆에 앉아, 마포대교 근처는 그나마 조용하다고 생각한다. 동호대교는 도무지 지낼만한 곳이 아니었다. 거의 오 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다리 밑에 침낭을 푼 지 하루 만에 다시 짐을 쌌다. 그리고 강을 정면으로 두고서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도로에는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값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다녔다. 13살짜리 노숙인이었던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걷고자 했다. 그러자 필연적으로 갈대가 높이 자라고 길이 정리되지 않은 강가의 끝자락으로만 걷게 되었다. 가스레인지와 침낭, 그리고 가게에 들러 사들인 참치통조림으로 묵직한 가방을 메고서 그는 계속 걸었다. 딱히 목적지도 없었고 찾는 것도 없었다. 다만 욕심을 부리자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고, 짐을 부려도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이 있었으면 했다. 날씨가 궂을 때 빗방울을 막아줄 지붕이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이미 한번 지나가는 빗줄기에 젖었다가 그대로 마르고 보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가 몸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훈은 몇 개의 커다란 다리 밑을 지나갔다. 몇이나 지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녁은 뭐가 좋을까. 그땐 뭘 먹고 살았어? 그때? 하고 되묻는다. 지금 상황에 ‘그때’라면 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강에 온 목적을 지금껏 혜미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놀라웠다. 그땐 참치통조림을 주로 먹었지, 가끔 둔치 매점에서 컵라면도 사 먹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용훈은 어째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또 하나 심중에 얹힌 기분이다. 당시에 뭘 먹고 지냈으며, 어떻게 음식값을 마련했는지는 소설에 상세하게 써놓았다. 분명 써놓았었다. 동호대교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으며 그는 몇 개의 이상한 굴들을 보았다. 산책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일견 불규칙하게 뚫려있는 콘크리트 터널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강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어떤 것들은 고수부지 바로 밑에 새까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굴은 전부 한강 수위조절용 인공터널이었다. 용훈은 마포대교 북단의 어딘가에서 딱 알맞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한 일이 없는 한 강물에 젖지도 않을 터널을 찾아냈다. 네모진 터널 입구로 들어가자 안으로 쭉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통로 안쪽에 불빛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비가 오더라도 터널은 쉽사리 빗물이 넘칠 것 같지 않았다. 용훈은 곧바로 터널 입구에서 열 발자국 정도 들어간 곳에 침낭을 펼치고 배낭의 짐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는 정말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는 사실을, 이틀 정도가 지나고서야 알아차렸다.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을 때 냄비를 챙기지 않은 스스로가 멍청하게 생각됐다. 게다가 소모품인 가스를 계속 사야 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방금 혜미에게 말한 것처럼, 주로 먹는 음식은 참치통조림이었다. 상하지 않고, 처리해야 할 쓰레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통조림 두 개를 먹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가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면 한강 둔치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아버지가 준 돈을 굳이 꺼내서 쓸 필요도 없었다. 터널 입구에 자리를 잡고 매일 드러누워 있자면 가끔 방문객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터널에 들어와 둘러볼 때, 벽면에 락카로 그린 그림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물론 그 그림들은 누군가가 드나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낙서꾼들은 금세 만날 수 있었다. 터널에 자리 잡고 사흘째였는지 나흘째였는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달그락거리는 락카를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고 그곳을 찾은 것이다. 넌 여기서 뭘 해? 남학생들은 누가 봐도 노숙자인, 그러나 누가 봐도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훈에게 그렇게 물었다. 중랑천을 걸어 내려와 터널에 둥지를 틀기까지의 과정 덕분에 용훈은 꽤 대담해져 있었다. 대담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벌써 그의 어린 머리에 뿌리박혀 있었다. 집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계산속도 있었다. 사실 ‘집’ 자체는 큰댁으로 가기만 하면 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박정한 사람이 아니다. 남동생의 어린 아들이 집도 절도 없는 몸으로 찾아왔는데 내쫓을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집이야 찾아가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용훈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남학생들은 용훈에게 어디서 왔느냐, 몇 살이나 됐느냐,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냐는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용훈은 담담하게 사실대로 답했다. 그다지 숨길 일도 아니었고 그들에게서 동정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었다.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터널에 온다고 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식비의 태반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절한 학생들이 터널 안쪽 벽에서 낙서―그라피티라고 했다―에 열중하는 것을 가끔 재미 삼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분명히 작품에 썼을 터다. 내가 소설에 쓰지 않았던가?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 그래. 달리 할 말이 없다. 독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을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므로 독자의 기억력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용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기억력에 관해 책임을 묻자면 죄인은 그다. 세 시간 넘도록 그놈의 터널 하나를 찾지 못해 벌써 날이 저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왜 찾을 수가 없는 걸까? 문뜩 혜미가 용훈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새삼스럽게 묻는다. 그는 순간 당황한다. 갑자기 취조당하는 피의자 신분이라도 된 것 같다. 혜미의 속눈썹 사이에서, 그러니까 그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단순한 의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춘 의혹인지, 용훈은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의도를 읽는 것은 독자 나름이다.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풍경이 달라져서인지도 몰라, 가을이 왔을 때는 이미 여기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시선은 다시 반짝거리며 노을을 반사하고 있는 강으로 향한다. 가을에는 이곳에 없었다. 당장 다음 날 급사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그는 터널에서 수 개월을 지냈다. 그러나 본능이, 특히 생명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리 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며, 용훈은 완전히 노숙 생활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강에서 차가운, 피부에 소름이 돋게 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지면 바람은 더욱 싸늘해졌고 터널을 향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아직은 침낭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버틸만한 추위였다. 그러나 강바람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 빨리 차가워졌고, 얼마 안 가 용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면 틀림없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걸. 강바람에는 그의 목숨을 걷어갈 무언가라도 깃들어있는 듯,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것은 평소처럼 오수가 섞인 한강의 질척거리는 냄새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언제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성립되어있는 관념에 불과했다. 직접 죽음의 위협을 느끼자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생각은 멈추고, 본능이 모든 판단을 주도했다. 어느 초가을 밤 유난히 어둡고 차가운 강바람이 불고 난 뒤, 아침이 되자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짐을 정리해 터널을 나왔다. 다리 밑을 지나서 사람들이 사는 도시까지 걸어 올라갔다. 아마 마포역에서 전철을 탔을 것이다. 몸에서 나는 끔찍한 악취 때문에 승객들이 불편했을 테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목동까지 갔다. 돈 봉투 안에는 큰댁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한참을 헤매며 맞는 주소를 찾아다녔다. 연립빌라 1층의 현관문을 두드리자 잠이 덜 깬 큰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당시 큰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아파트 야간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불확실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동생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녁 먹으러 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늘한 바람이 강변의 갈대밭을 스친다.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녀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뒤 용훈을 돌아본다. 용훈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어떤 읽을 수 없는 불신 같은 것이 배어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느낌일 뿐이다.
*
갈매기살 식당 앞의 어수선한 거리에 용훈은 핸드폰을 들고 서 있다. 이미 해가 졌고, 도심의 불빛이 하늘을 어두운 보라색으로 밝히고 있다. 혜미에게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둘러대고서 잠시 가게를 나온 참이었다. 주변에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불콰하게 취한 회사원들이 굴뚝처럼 연기를 내뿜고 있다. 용훈은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이미 노인이 된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지는 확신이 없다. 일흔 살이 넘으면서 큰아버지는 점점 새벽잠이 없어지고, 저녁에 잠드는 시간이 빨라졌다. 다섯 번 정도 송신음이 울린다. 아무래도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라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 큰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어, 잘 지내냐. 예, 큰아버지, 주무시고 계셨어요. 매번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듯 똑같은 안부 인사를 반복한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불분명한 음질로 바둑 중계방송 같은 것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잠들어있는 사람을 깨운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용훈은 본론을 꺼낸다. 그가 궁금한 것은 처음 큰댁에서 살기 시작한 가을 무렵, 당시 자신이 무슨 얘기든 큰아버지에게 고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다리 밑에서 살던 봄부터 초가을까지의 일 중 무엇이라도 말하지는 않았는지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글쎄다, 그때 네가 뭐 하고 다녔는지 나도 네 소설 보고야 알았는데. 아, 네, 그렇죠, 혹시나 싶어서요.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는 왁자지껄한 거리 한구석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문다. 재빨리 피우고 들어가지 않으면 혜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다. 하얀 연기가 폐부에 가득 찼다가 입 밖으로 뿜어지기를 수 차례, 다 타지도 않은 꽁초를 재떨이에 던지고 그는 가게로 돌아간다. 식당 안은 사람으로 가득해 바깥보다 곱절은 붐빈다. 용훈은 서로 등이 마주 닿을 듯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통과해 자리로 돌아온다. 혜미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불판 위의 고기는 용훈이 나가기 전 그대로다. 한 점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손에 집게를 든다. 금방 왔네. 기다릴까 봐. 그렇게 말하면서 용훈은 오늘 하루의 계획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고, 벌써 저녁이 늦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한다. 그가 어릴 적에 홀로 살아남았던, 그리고 나중에는 처녀작의 소재가 되어준 터널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종일 강변을 오르락내리락했을 뿐이다. 유난히 오늘 혜미는 말이 없다. 그에 휩쓸리듯이 용훈은 영문 모를 의구심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채로, 시야 또한 부옇게 흐려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병을 바라본다. 맥주 한 병 정도로는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질이 날 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예전처럼 술을 양껏 마시지 않게 되었다. 아니,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그들도 얼마든지 마셨다. 그런데 마치 서로에게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처럼, 어느새인가 함께 식사할 때는 소주도 양주도 마시지 않고 맥주만 조금 홀짝일 뿐이었다. 용훈은 지금 상황이 바보스럽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다락방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며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만 했던 기나긴 날들을 분명히 기억한다. 매해 여름마다 습기 때문에 방 안의 책들은 누렇게 변색되며 점점 휘어갔다. 그런 책으로 가득 채운 감귤 상자 위에 사촌이 물려준 낡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미래는커녕 내일에 대한 의지도 없이 글을 썼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다락방에 창문이 없다는 것도, 늘 수중에 천 원 한 장조차 없다는 것도, 몇 년째 세탁하지 않은 이불 위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야만 하는 현실도 아니었다. 사실 그 정도 불편은 괴로움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아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친정에 얹혀살며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큰댁은 늘 텅 비어있었고, 큰아버지는 새벽 근무로 바빠 용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하얗게 빈 종이뭉치와 책들 속으로 파묻히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마도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손을 뻗으면, 그것이 습관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손을 마주 잡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용훈은 자신이 하루 종일 무언가에 홀려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강물이 바로 눈앞에서 흐르는 그 풍경 때문에 그는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번거롭다니, 사람은 풍족해지면 출신마저 잊게 되는 모양이다. 그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우리 오랜만에 소주 마실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훈을 본다. 노을빛 아래에서는 짙은 갈색으로 보이던 눈동자가 가게 조명 밑에서는 평범한 검은색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러냐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본다. 곧 그녀는 그러자고 말한다. 찾고 싶었던 걸 못 찾았으니, 술이라도 마셔야 하루가 결말이 나지. 소주 두 병을 주문한다. 저녁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는 이 식당에서 술은 한 번에 두 병씩 시켜놓는 것이 서로간에 편하다. 차가운 병을 쥐고 흔든다. 초록색 유리병 안에서 기포가 소용돌이친다. 혜미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잔을 부딪치고, 짠, 하는 작은 소리가 울린다. 같이 소주 마시는 거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한다. 취할 일이 한동안 없었으니까. 어쩌다 그렇게 됐지? 서로 다음 날 컨디션 걱정해야 하잖아. 한 잔을 더 따른다.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물보다도 더 많이 마셨던 것이 술이다. 마치 드넓은 사막을 건너와 드디어 샘을 찾아낸 사람처럼, 혹은 대양에 표류해 자포자기로 바닷물에 손을 대려는 사람처럼 그들은 술을 마셨다. 오늘 용훈은 그때처럼 마실 작정이다. 가슴속에 비리고 들척지근한 뭔가가 얹힌 느낌을, 알코올로 다 씻어내려고 한다. 그녀 역시 비슷한 마음이다. 어떤 질문으로도 꺼내질 수 없고 형태 지어지지도 않는 답답한 심정에 부어 대듯이, 한 잔 한 잔 소주를 마신다. 어느새 고기는 너무 익어 오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금세 한 병을 해치우고 다음 병을 딴다. 벌써 옅게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머릿속으로 그는 생각한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열심히 살았다.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청탁이 들어오는 원고마다 성심껏 결과물을 냈다. 뒤늦게나마 사람답게 살게 되어, 큰댁으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생계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는 누렇게 삭은 책들과 곰팡이로 가득 찬 다락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락방에서 그가 했던 것은 오로지 반복되는 글쓰기뿐이었다. 끊임없이 비슷한 작문만을 되풀이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 방에 살게 되기까지의 모든 일을 조금씩 다른 시점으로, 불분명한 기억들은 허구로 보완하며, 낡은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면서 몇 번이고 고쳐 썼다. 그렇게 다시 쓰고, 다시 쓰다 보니 마침내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마포대교 북단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럼 어딘데? 글에서도 마포대교라면서. 그러게. 잔을 부딪치고 계속 마신다. 두 사람 모두 점점 혀가 풀리고, 생각의 결 또한 풀려간다. 이제는 숫제 불판 밑의 숯불을 빼고 술만 연신 마시고 있다. 한 잔, 한 잔이 비워질 때마다 흉금의 빗장이 열리는 것처럼 말이 많아진다. 까맣게 탄 고기를 방치해놓고, 테이블 위에는 술병만 늘어간다. 당장 오늘 있었던 일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들은 아무런 맥락도 주제도 없이 떠들며 즐거워한다. 시간은 취기 때문에 느낄 새도 없이 흘러가 버린다. 요새는 즐거워지는 일에도 투자비용이 들어. 가게가 너무 더워, 지금 몇 시야? 테이블 위의 빈 병이 일곱 개가 될 즈음, 서로가 독백만 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취해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었다. 택시를 타면 그만이지만 혜미가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윤곽이 흩어져 있으니 용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짧게 한숨을 쉰다. 알코올 냄새가 내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다. 집에 갈 기력은 있어? 못 가, 너무 취했어. 그럼 별 수 없지. 정말로 별 도리가 없다. 음식값을 계산하는 중에도 혜미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했다. 용훈은 그녀를 부축하며 찬 바람이 신선한 바깥으로 나온다.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하다. 그러나 사람과 팔짱을 끼고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골목을 걸으며 그는 모텔이든 어디든, 하룻밤 자고 갈 곳을 찾아 눈동자를 굴린다. 소주가 머릿속을 휘저어놓아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어떤 의혹에 대해 더는 고민할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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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모텔방에서, 아직도 벨트를 못 풀고 있냐고 혜미는 놀리듯이 말한다. 어지간히도 술에 취한 목소리다. 이렇게 유쾌한 그녀를 보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라고 용훈은 생각한다. 가만, 나도 많이 취했어, 됐다. 불 좀 꺼. 불은 왜? 우리 둘 다 너무 취해서 꼴이 웃겨.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무엇이 웃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도 따라서 소리 내 웃는다. 불을 끄고 이불 위로 올라간다. 김광균 시인의 <설야>라는 시에서는 여인이 옷 벗는 소리를 눈 쌓이는 소리에 비유했었는데, 전혀 연상되는 바가 없어 그는 오히려 우스개처럼 그 시구를 떠올린다. 술 냄새가 뭉근하게 피어오르고, 그들은 자조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겹친다. 그러나 취기 때문에, 어둠 때문에 세상의 상하좌우가 온통 뒤틀린 것만 같다. 그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젠장, 하며 중얼거린다. 그때 혜미가 혼잣말이라도 하듯, 약간 음정이 나간 목소리로 저기, 하고 묻는다. 정말 다리 밑에서 살았어?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다. 어둠 속에서 형태도 없는 어떤 공포스러운 것과 돌연 맞닥뜨린 기분이다. 대답할 말은 헐벗은 몸과 담배 냄새가 찌든 어두운 방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머릿속은 알코올 때문에 해무가 잔뜩 낀 새벽 바다처럼 부옇고 불분명하다. 그 안쪽에서 몇 토막의 문장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그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썼던 글이다. 이제는 어떤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기억을 계속 종이 위에 기록하는 바람에 ‘기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성긴 조각들이다. 너무 많이 마셨어, 용훈은 자책하듯 입안에서 말을 되뇐다. 혜미는 아무 말이 없다. 애당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인지, 혹 그새 잠들어버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깨 위에 얹힌 체온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맨몸뚱이로 버티고 앉은 채, 어디로 향해야 길이 나올지 알지 못한다.
5월 9일, 월요일, 오후 6시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깨어났다.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 뚫린 것 같은 굶주림에 잠에서 깼다. 위장에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허기와 목마름 때문에 역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속을 게워내자,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위액을 뱉어냈다. 구토가 멈출 즈음이면 또 식도의 통증과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벽의 경계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딱 보기에 다 자란 생쥐 한 마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의식이 물에 잠긴 것처럼 혼탁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구멍이 맥락도 없이 머리를 꽉 채웠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을 쥐어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깎여나간 듯 까슬까슬한 구멍의 벽면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벽에 뚫린 쥐구멍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탁상 위의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나는 사흘 동안 잠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뱃속에서 맹렬한 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들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은 사지를 억지로 움직여 냉장고까지 기어갔다. 우유, 햄 통조림, 식빵, 달걀부터 냉동 밥까지 닥치는 대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참을 아귀처럼 먹어댄 뒤에야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두 번 정도 게워내고 또 먹어치우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서 드디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좀 누워야겠다.
같은 5월 9일, 월요일, 밤 11시 한참을 매트리스 위에 누워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머릿속의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실 탁상으로 가 수첩을 뒤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은 5월 6일의 기록이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주된 내용은 내가 어떤 약을 몇 그램이나 삼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수첩에 적힌 수 많은 화학성분들의 이름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그날 내가 삼킨 약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정과 수십 알이나 되는 리튬,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 등이었다. 그밖에, 문장에서 나타나는 산만한 정신상태와 사후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가 삶을 긍정하기 위해 썼던 글까지 인용하며, 난삽한 문장으로 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릴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날 저녁 내가 약물의 성분과 용량에 대해 수첩에 써놓았던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은 부분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할 때 쓴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특별히 유감스럽지도 않다. 며칠이나 잠들어있다가 깨어났기 때문인지, 심한 피로감과 두통 때문에 마냥 눕고만 싶다.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다. 좀 더 쉬고 나면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게워놓은 오물을 치워야겠으나 도무지 몸에 힘이 없다. 한숨 자고 난 뒤에 치운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벽의 구멍은 난데없이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잠들어있던 사흘 사이에 쥐라도 들락거리게 된 것일까.
5월 10일, 화요일, 밤 두통과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밤에 잠을 자기는 했지만, 내내 혼란스러운 꿈만 꿔서 전혀 개운하지 않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거실을 청소했다. 청소라고는 해도 휴지로 바닥을 닦아냈을 뿐이다. 오물을 닦은 휴지를 처리하기가 귀찮아 벽에 난 쥐구멍에 전부 쑤셔 넣어버렸다. 집안의 쓰레기통들은 진즉에 가득 찼다. 지난 삼 개월간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 내게 거리로, 아니, 현관 앞의 쓰레기장까지만이라도 나갈 용기가 있었더라면 굳이 남아있던 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에는 보다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열해보자면, 건물 밑을 지날 때는 옥상에서 벽돌이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리를 건널 때는 느닷없이 자동차가 돌진해올 것 같다. 그리고 길에서 지나치는 행인이 갑자기 칼을 쥐고 덤벼들 것 같다. 그런 공포가 늘 나의 발을 묶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전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생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포에 시달려온 것은 아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중소 IT기업에서 2년을 일했다. 아니, 어엿한 직장인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시쳇말로 나는 고문관이었다. PC용 웹사이트를 모바일 사양으로 변환하는 일을 2년이나 계속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늘 기한에 늦거나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를 냈다. 직장에서 나의 주 업무는 시말서를 쓰고 사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땅이 꺼져버리지는 않으려나 하고 습관적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사실 이것이 나의 가장 한심한 성질이었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각오를 하기보다는 세상이 끝장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니 5월 6일에도, 아니, 그만두자, 이제는 삼킬 약도 남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몽상만 하며 살다 보니 상상은 어느새 망상이자 병이 되어버렸다.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박자 이번에는 그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기가 싸늘하고 하늘이 화창하던 11월 초순, 나는 출근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었다. 그런데 그 주택가의 골목 한가운데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지독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총칼로 무장한 적군들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기력이 없으니 기분까지 우울해진 모양이다. 회사 대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당시의 일은 어지간해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같이 수첩에 온갖 일을 적고 있자면, 생각이 제멋대로 이어진다. 실상 오늘 한 일이라고는 거실을 닦은 휴지를 쥐구멍에 욱여넣은 뒤 해가 질 때까지 넋 놓고 앉아있던 것뿐이다. 모아뒀던 약을 전부 삼켜버렸으니, 이제는 자려고 해도 쉬이 잠들 수가 없다. 트리아졸람 없이 잠드는 방법을 몸이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약은 치사량도 아니었던 모양이고,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5월 11일, 수요일 쓰레기통 하나를 비웠다. 밖에 나간 것은 아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거실 탁상 옆에 널브러진 듯 누워있었다. 집안은 어스름했고 곳곳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림자 안쪽에 새까맣게 뚫려있는 쥐구멍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 동안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날 욱여넣은 휴지 생각이 났다. 만약 구멍 안에 쥐가 살고 있다면, 내가 한 일 때문에 입구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쥐구멍까지 기어가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런데 구멍은 막혀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쥐들이―정말 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지저분한 휴지를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묘한 흥미를 느꼈다.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끌어와 안에 든 것들을 조금씩 꺼내, 쥐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걸리는 듯 잘 들어가지 않더니, 약간 힘을 주자 쓰레기는 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로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쥐구멍에 집어넣는 일을 반복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입구 안쪽에 상당한 크기의 공간이라도 있지 않은 한, 쓰레기통의 내용물이 전부 들어갈 리가 없다. 그제야 나는 자살시도 이후 처음으로, 내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약을 삼킨 뒤 나는 생명을 잃었고, 영혼만이 이 거실에 붙잡힌 채 정체불명의 쥐구멍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구멍은 현실감이 없었다. 텅 빈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생각도 해보았다. 5월 6일에 삼켰던 약이 치사량은 아니었으나 뇌와 신경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에는 충분한 용량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죽었든 정신이 망가졌든, 증명할 방도가 없다. 손에 오물이 묻어 끈적거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손을 닦고, 다시 쥐구멍 앞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휴지며 약봉지며 달걀 껍데기 따위를 잔뜩 집어삼킨 구멍은, 전보다 입구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지금 겪고 있는 사태가 너무 이상스러웠다.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일어나는 일을 수첩에 적어놓기로만 했다.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다. 그리고 거실의 쓰레기통은 분명히 텅 비었다. 쥐구멍은 전보다 넓어진 것 같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품었던 것과 비슷한 불안을 느낀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가까운 친지 중 알코올중독자와 조현병 환자가 넷이나 된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 속에 불발탄처럼 묻혀있다.
5월 12일, 목요일 깜빡 잠들었나 보다. 깨어나니 집안이 환했다. 나는 거실 탁자 밑에 나동그라져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보니, 거실은 전날 생각했던 것만큼 기괴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새벽이라는 시간이 가진 특유의 불길함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을 유난스럽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보다 맑게 만들어야겠다. 걸레를 빨아 아직도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거실을 청소했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끓여 먹었다. 5월 9일에 깨어나 냉장고에 든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치운 이후 처음으로 하는 식사였다.
5월 13일, 금요일 쥐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쥐구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넓이다. A4용지로 겨우 입구가 가려질 정도다. 이 정도 크기라면 건물 외벽까지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지하로 쑥 꺼진 울퉁불퉁한 통로가 보일 뿐이다. 건물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회사에 다닐 때 입던 와이셔츠를 구멍에 구겨 넣고 달력을 뜯어내 입구를 막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 때나 읽던 공포소설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러브크래프트나 스티븐 킹의 작품 따위 말이다. 그들의 소설은 대부분이 어딘가 왜곡된 현실에서 솟구쳐나오는,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주인공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이 쥐구멍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현실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고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햇살이 밝았던 것이 거짓말 같다.
5월 14일, 토요일 이틀째 비가 멎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탁상의자에 앉아 달력 낱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과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다. 밖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마치 구멍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달력을 툭, 툭, 하고 건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삶이 끝나고 자유로워지리라는 기대로 일을 저질렀는데, 성공하지 못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편집증 환자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막힌 쥐구멍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구멍에서 빗물이라도 차올랐는지 달력의 아랫부분이 젖은 듯하다. 정체를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달력을 찢고 거실로 기어 나오리라는 생각이 잦아들지를 않는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마다 어깨가 들썩 솟을 만큼 놀라곤 한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제때 밥을 챙겨 먹지도 않고, 아무래도 신경과민이 있는 것 같다. 종일 의자 위에 쭈그려 앉은 자세로 있으려니 온몸의 관절이며 근육이 아프다. 내내 긴장한 채로 쥐구멍을 향해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있으니, 머리통이 떨어질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막내 삼촌은 아버지보다 열 살 어렸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삼 형제 가운데 혼자만 성격이 유별난 편이었다. 사실 유별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직업도 없이 놀고 있었다. 큰아버지 댁에 있는 자신의 좁은 방에서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놈은 글러먹었어. 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추석이었는지 설날이었는지, 큰댁에 명절을 쇠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척들로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삼촌은 외출하고 없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은 한참 화투를 치다가 판을 접은 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루했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거실에서 나와 삼촌의 방인 뒷방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있기는커녕 살짝 열려있었다. 그대로 밀자 습기 차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어둡고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이불이 흩어져있고, 장롱 하나와 오래된 TV가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일제 담배 세 갑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삼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매트리스의 반대쪽 벽면에야말로 삼촌의 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있었다. 그곳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청록색 등 온갖 색깔의 마커로 쓴 단어들이 벽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없었고, 각기 다른 색깔로 된 단어들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단어들은 검은색 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색 ‘사랑’과 노란색 ‘증오’가 연결되어 있었고, 청색 ‘보다’와 보라색 ‘기다리다’가 선으로 이어져 있는 식이었다. 아마 삼촌은 하루 종일 그 좁은 방안에서, 매트리스에 앉아 자신이 만든 계산식―나는 그것이 계산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선하다. 가끔 단어들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면 같은 개념끼리 선으로 묶곤 했겠지. 나는 그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삼촌이 나의 육친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솔직히, 나는 친인척 중 그다지 대화도 해본 적 없는 삼촌에게서 가장 큰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자신이 삼촌처럼 미쳐버렸다는 것을 긍정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건강한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고, 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씩 도는 동안 벽에 발라놓은 달력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스스로의 행위와 기억들을 수첩에 옮겨적을 정도의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펜을 놀릴 때만은 빗소리인지 구멍에서 나는 소리인지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제정신을 유지한다고 해서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5월 16일, 월요일 내 방에 사람이 있다. ‘있는 것 같다’가 아니다. 그는 하나뿐인 방을 차지하고서 지금 잠들어있다.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하루 전이다. 나는 탁상의자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오뚝이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습하고 어두웠다. 마음속의 불길한 감정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짐승 같은 것들이 거실 벽 속에서 내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환청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어 오히려 침착해졌다. 의자 위에서 나는 달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달력은 이미 반쯤 젖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곧 안쪽에서 무언가가 젖은 달력을 찢고 나왔다. 쥐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지저분하게 얼룩이 지고 곰팡이까지 슬기 시작한 흰색 와이셔츠였다. 내가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와이셔츠는 슬며시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깃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와이셔츠는 깡마르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쥐구멍에서 뼈와 가죽밖에 없는 나체의 남자가 달력을 찢으며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비쩍 마른 남자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온몸을 뒤틀며 어깨너비도 되지 않는 구멍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다. 몸이 전부 거실로 나오자 그는 탈진한 듯이 바닥에 풀썩 엎어져 버렸는데, 오른손은 여전히 지저분한 와이셔츠를 백기라도 되는 듯 흔들고 있었다. 의자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실 위에 나체로 늘어져 있는 그의 몸은 비참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등은 갈비뼈와 척추가 전부 드러나 보였고, 하체 또한 둔부 없이 골반이 그대로 대퇴부에서 정강이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도저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와이셔츠를 좌우로, 곧 실이 끊겨 무너져내릴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고 있었다. 말이 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에곤. 마지막 숨을 쥐어 짜내는 듯한 한마디와 함께 마침내 그의 오른팔마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면서 와이셔츠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펼쳐졌는데, 그 손아귀에서 흰색 알약 이십여 정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여전히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경찰이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상황을 설명하든 결국에 나는 집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 것이다. 끝내 내가 한 일은 에곤이라는 남자를 거실에서 방까지 끌어다가 매트리스 위에 눕혀놓는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기는 할지 의문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마른 몸뚱이에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에곤이 손에서 놓친 알약들을 들여다보았다. 본 적이 없는 약이었다. 쓸어모아서 비닐로 된 약봉지에 담아놓았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나도록 에곤은 깨어나지 않고, 나는 찢어진 달력이 너덜거리며 붙어있는 구멍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미 사람 하나가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월 18일, 수요일 에곤은 죽지 않았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어두운 천장을 보며 누워있던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 위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 같은 나체의 남자가 비척거리며 거실에 나타나는 장면은 마치 산송장이 억지로 사지를 뒤틀어가며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기괴했다. 나는 그에게, 옷장에 남는 옷이 있으니 꺼내 입으라고 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되돌아갔다. 에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너무나도 퀭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동자 색과 생김새 따위로 보아 에곤은 외국인이 분명했다. 아마도 유럽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도 실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곤이 가져온 약을 담아둔 봉투를 서랍에서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마른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은 그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내가 남의 걱정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심하게 마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사양도 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에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에곤이요. 어디서 왔습니까? 툴른에서 왔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그야 구멍 밑이지요. 내 말은… 알겠어요, 가족은 있으세요? 모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저런.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그게, 나도 잘 모르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내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그는 빵과 우유를 아주 느리게, 그러나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나도 비구름이 걷히고 다시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곤은 나에게 종이와 연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A4용지 다발과 볼펜을 내주었다. 연필은 없었다. 에곤은 군말 없이 물건을 받더니 창문으로 다가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 때문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은 많았지만 고민할 기력이 없었다. 창문 앞에 달라붙어 종이와 펜으로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에곤은 그리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방으로 가서 잠을 자야겠다.
같은 5월 18일, 수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보니 탁자 위에는 펜화가 그려진 종이 수십 장이 쌓여있었다. 그림은 모두 똑같은 구도였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 그린 것들뿐이었다. 에곤은 아직도 창문 앞에서 새 종이에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지만, 어쩐지 새벽에 보았던 것보다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자살시도 이후로 보름 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두 팔을 보니 새삼 그것은 말라붙은 나무막대기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실에 휑하니 뚫려있는 쥐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찢겨 너덜너덜한 달력을 전부 뜯어냈다. 구멍은 명백하게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럴 마음만 든다면 별 무리 없이 구멍을 향해 투신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에곤을 불렀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당신이 들고 온 약은 뭡니까? 무슨 약이요? 당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 말이에요. 그건 바르비탈입니다. 바르비탈? 그러니까 일종의 백기 같은 거죠, 항복의 표시라든가…. 와이셔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여하간 말하자면 쥐구멍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겁니다. 왜 그걸 갖고 있었습니까? 그 질문에 에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러나 중요한 것을 설명하는 듯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삶이든 가족이든, 강제로 주어진 것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가 없어요, 도망을 꿈꾸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곤은 펜화를 그리러 돌아갔다. 나는 작은 동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생각을 기록해두려 한다. 스스로 쥐구멍에 들어갔다던 에곤은 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그는 왜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을까.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불우한 화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금지된 것만 바라다가 손에 있던 것마저 전부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왜 하필이면 이 쥐구멍이 내 거실에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5월 9일에 깨어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혼란스러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영화 <엔터 더 보이드>에서 주인공이 사망한 뒤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혼탁하고 음울한 환각을 직접 겪고 있는 기분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대롱 같은 통로’를 통과해 다시 태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알아챈 것인데, 근 일주일 정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5월 24일, 화요일 달력은 오늘이 화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곤 덕분에 집에 쟁여두었던 A4용지가 동이 났다. 이제 그는 이미 그린 그림들의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창밖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을 계속해서 그릴 뿐이다. 냉장고 안의 음식과 찬장의 라면까지 꺼내먹으면서 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나는 거실에 송장처럼 늘어져서 벽에 난 커다란 구멍을 마냥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입던 옷들은 에곤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
5월 30일, 에곤이 내게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이를 사러 밖에 나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지갑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 지갑은 너무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에곤은 이미 내가 회사에 다닐 적에 입던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다. 전보다 살집이 붙은 얼굴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점점 몸의 기력이 쇠하고 팔다리가 얇아지는 것을 느낀다. 가슴에 손을 대면 내 갈비뼈들의 모양을 손끝으로 짚어볼 수 있다. 아마 밥을 먹지 않아서 그렇겠지.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깨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거나 사건이 벌어질 때 사람은 깨어나는 것이다.
5월 33일 집안이 에곤의 그림들로 가득 찼다. 요새 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새 이젤과 캔버스까지 구해 들고서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거실과 방에는 이미 완성되었거나 작업 중인 캔버스가 잔뜩 쌓여있다. 오늘 나는 커다란 구멍을 쳐다보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면에 걸린 채로 죽은 발드마르는 죽어있는 동안, 그러니까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두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있는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있던 것일까? 그러나 최면에 걸린 그의 몸은 썩지 않았었고… 아니, 여하간 중요한 점은 최면에서 깨어난 순간 발드마르의 몸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비명인지 환성인지 모를 “dead! dead!”라는 절규가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다. 에곤은 최근 혈색이 좋다. 그가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38일 나는 오늘 에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새 그림을 그리느라 너무 바빠서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는 듯하다. 나는 쥐구멍 안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구멍 안에 ‘무엇’ 따위는 없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자 번역이 잘못된 외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이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에곤은 웃었다. 그야 출구가 있었으니까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지리멸렬해서 더는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곤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았습니다, 삼키기에는 원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에곤이 처음 쥐구멍에서 나왔을 때 흰색 와이셔츠를 흔들던 것은 백기를 흔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화가 날 때 남의 옷깃을 쥐고 흔들어대기도 하니 말이다.
4?일 요즘 에곤은 나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이제 에곤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구멍의 새까만 입구를 쳐다보며 삼촌에 대한 생각, 병원에 대한 생각, 바깥세상의 위협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부터 내 인생의 절반은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5월 6일 자살을 결심했을 때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예전에 <랜트>라는 아주 기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낳는 위험천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것이 생각났느냐면, 그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드는 유일한 생각은 주인공의 저주 같은 순환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서 꺼낸 바르비탈은 세어보니 스물한 알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이제 이상한 환각을 끝내고 그 ‘무엇’도 없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5월 6일, 금요일 이것이 내 마지막 기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탁자에는 초봄에 모아 놓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알과 물 한 컵이 준비되어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삼 개월이 넘도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트리아졸람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리튬과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놓았다. 단번에 삼키면 이 중 무엇이라도 효과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약품의 성분과 효능에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증상 중 하나라고 의사가 말했었는데, 아니다, 이야기가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나는 곧 모아놓은 약을 전부 삼키고 바닥에 누울 것이다. 억울하거나 미련이 남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만 사후세계 같은 것이 느닷없이 내 눈앞에 튀어나오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는 육체에서 떼어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백번 옳은 말이고, 만약 영혼이나 내세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또 사설이 길어지고 있다. 이 글이 더 이상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이만 끝을 내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위에 이불을 갠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3년 전 나는 한가지 목표를 정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갠다는 목표 말이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기만 했을 뿐, 2년이 넘어가도록 나는 단 한 번도 이불을 갠 일이 없었다. 이불은 항상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겹겹이 파도치는 그 곡선 주변으로 소주병과 맥주병 따위가 조화롭게 굴러다녔다. 곳곳에 책과 음반 따위가 무질서하게 쌓여있었고 무언가를 무너트리지 않고 걸으려면 몹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방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그런 꼴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더라? 나는 책을 쓰기도 했고 대학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고 가끔은 조각을 깎기도 했다. 돈이 필요하면 아무런 경력도 되지 못할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그마저도 싫증이 나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그들이 다시는 내 전화를 받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길을 걸을 때 마주치는 통행인의 눈동자를 살인마의 눈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 은행에 들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접수원 앞에서 굳어버리지 않기 위해, 전철에 탔을 때 한 정거장마다 뛰어내려 숨을 몰아쉬지 않기 위해 말이다. 굳이 술일 필요는 없었다. 대마든 LSD든 버섯이든 상관없었고, 실제로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이 교도소에 들어가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술은 합법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아무튼 나는 술을 마셨다. 책을 쓸 때도 악기를 연주할 때도 조각을 깎을 때도, 심지어는 일을 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는 와중에도 술을 마셨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이미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불조차 갤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사실을 자각할 때면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또 술을 마시고 나면 절망은 거짓말처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느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절망이 쌓여있을지, 나는 짐작하려고 시도해본 일도 없다.
그리고 세상일은 이치에 맞도록 돌아간다. 나는 매일 술에 취해서 집안을 돌아다녔고 내 발걸음 소리가 너무 크다는 아래층 세입자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을 벌였다. 결국에는 그들이 어딘가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무슨 복지 센터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들여 보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안될 것도 없었다.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이 내 집에 들어왔고 그들이 분명히 무슨 긴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당시에 난 이미 소주를 네 병이나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들이 내게 재활원에 입원하는 것을 추천했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나에게 얼마 정도의 돈이 있는지 헤아려보았다. 당장 다음 달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그런 식의 삶이 벌써 수년간 이어져 온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게 입원씩이나 할 돈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기금’이라는 것에 대해 운운했다. 어쨌거나 내가 얼마간 무료로―그들이 지원사업이라느니 뭐가 어떻다느니 하고 말을 했는데― 재활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 그것이 대강 1년 전인 것 같다. 아마도 그렇다.
그렇게 하여 나는 지금 침대 위에 이불을 갠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세안을 하고, 이를 닦고, 환자들이 모이는 식당으로 간다. 나는 배식을 받은 후 평소처럼 최 씨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미라처럼 삐쩍 마르고 볼이 움푹 팬 이 영감님은 한쪽 발을 관 안에 들여놓은 정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쓰러져 이승을 떠날 것 같이 생겼으나, 67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마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다들 밥 먹듯이 술만 마셔왔을 뿐, 안주나 음식에는 제대로 손댄 적도 없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 얼굴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스스로 판단할 만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남들에게 내가 어떤 얼굴로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최 씨 할아버지는 배식판을 응시한 채 젓가락으로 애먼 미역국만 계속 찔러대고 있었다. 탁, 탁, 하는 금속성의 소음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주변에 앉은 환자들이 눈치를 주고 있었으나 영감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안 드세요? 내가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영감님은 나를 힐끗 보더니,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젓가락으로 배식판을 찔러댈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요.
손주 생일이야, 다섯 번째 생일.
갇혀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의사한테 물어보지 그래요.
아들내미가 오지 말라더라.
이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은 너무 뻔했다. 아니, 그보다도 이 좁은 건물 안에서 부대끼며 사는 환자들은 서로의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다. 영감님은 의사 동의를 구해 손주 생일잔치에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틀림없이 술에 손을 댈 것이다. 처음에는 맥주나 막걸리 한 잔으로 시작하겠지. 잔칫날이니 딱 한 잔만 하고 그만두자고 말이다. 그리고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두 잔까지는 괜찮겠지. 그러면 이제 6개월간의 치료와 상담이 전부 뒤집어 엎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의사도, 영감님의 아들내미도 아니다. 영감님 본인이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그것이 나에게는 사실 축복 같은 일이었다. 이 건물 안에서는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할지 예측불허한 공포스러운 타인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에서 술을 안 마시고도 다소간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난동을 피우거나 금단증상 때문에 여기저기 구토를 해대는 신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상정한 범위 내에 있다. 그렇다면 무어 두려울 일이, 두려울 사람이 있겠는가.
식사를 하고 나서 약을 받아 삼키고 나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세상에서 온갖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바깥세상은 늘 그렇지. 너무 넓기 때문이야. 더러는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있기 때문이고. 온 세상에 격리병동을 만들어 사람들이 생활하게 하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 몽상에 빠졌다. 어차피 모두가 미치광이라면……. 그러고 있을 때에 남자 간호사가 내게 다가왔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면회입니다.
그래요, 요새 자주 오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누가 면회를 왔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 간호사를 따라 면회실로 향했다. 이곳은 바깥세상과 ‘안’쪽 세상의 완충지 같은 곳이다. 흔히 상상하는 방탄 유리벽이나 감시인 같은 것은 없다. 교도소도 아니고. 그저 테이블이 대여섯 개 놓여있고, 테이블마다 서너 개씩 의자가 있는 공간이다. 창문가에 있는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내 동생이었다. 10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 덕분에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내가 술에 절어있는 모습만 보아왔다. 열 살짜리 꼬맹이가 스무 살이나 되는 친형이 매일 술에 꼴아 가구를 부수거나 가족들과 몸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생각해보라. 동생은 자기 인생에서 나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나를 형으로 대했다. 내게 동생은 내가 술 때문에 망쳐버리지 않은 유일한 인간관계였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망칠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잘 지냈어? 내가 물었다.
나는 잘 지냈지, 형은 어때.
술 안 마신 지 벌써 일 년쯤 된 것 같은데.
잘됐네, 잘됐어.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이때 동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순간 아침 식사 때 보았던 최 씨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년 말에 결혼해 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 남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얘가 지금 몇 살이더라. 하기야 벌써 삼십이 넘었지. 그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아직도 젖살이 덜 빠진 꼬맹이 모습부터 생각이 나지만 이미 한참도 전부터 어엿한 성인인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무슨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면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축하한다고 하나?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 아닌가. 그보다도 이 녀석은 왜 말하기 전에 뜸을 들였지?
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것도 뻔한 일이다. 바깥세상에서 멀쩡히 살아가는 동생에게 나는 억지로 짊어지게 된 짐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결혼을 한다지 않는가. 배우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처가도 생기기 마련일 것이고, 내 존재는 무엇 하나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면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는 수밖에.
잘됐네. 나는 웃었다.
동생도 웃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 밤 약을 먹고 잠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또 이불을 개야지. 침대 위에 칼같이 이불을 개어놓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해야지. 내가 이 정도 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성취감을 느껴야지.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말이다. 우리 형제는 마주 보면서 웃었고, 내 입안에서 아주 오랜만에 소주의 씁쓸하고 불쾌한 단맛이 감돌았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라는 인종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심지어는 훈련된 관찰력까지 있다. 그들은 내 거짓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으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 세 번의 시도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집 천장에 두 개의 시꺼먼 구멍이 나버린 일을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한강 공원 한구석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물을 토하고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도대체 누가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매번 마지막이어야 했을 잠에서 깰 때마다, 올가미 안에 머리를 넣으며 스스로에게 미소 지었을 때마다, 공중에서 자신의 몸무게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마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매번 나를 배신했다. 이것은 정말로 저주라도 받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선택할 죽음에 대해 어쩌고저쩌고하며 옹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끝날 것이다. 나라는 세포들을 가득 담고 움찔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단단했던 그릇도 이제는 깨질 것이다. 내 오른손에는 소주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가 있고 주머니에는 손잡이까지 금속으로 된 나이프가 있다. 우선 위장에 소주를 들이부어, 내가 새로 맛볼 고통 때문에 스스로 망설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칼은, 사방에 널린 게 콘센트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시도로 엉망진창이 된 몸이 전기에 한껏 지져지면, 아무리 여태 버텨왔던 몸이라고 해도 생명이 남아날 리가 없다.
우선은 방으로 돌아가 소주를 따야겠다.
2.
도시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그 소문은 너무 구체적이라서 사실상 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것 같았다. 내용인즉 여섯 번의 자살시도를 실패한 사람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 번의 음독자살을―첫 번째와 두 번째는 수면제 과용이었으며 세 번째는 메탄올을 들이켰다고 한다― 시도했으나 매번 며칠 뒤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두 번 목을 매달았으나 첫 번째는 실링이 부서져 내렸고 두 번째는 천장 타일이 뜯겨나오며 떨어졌다. 마침내 그는 모두가 그렇게 하듯이, 마포대교에서 난간을 기어올라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곧 살아있는 채로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소문이라기에는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덧붙여 그가 드디어 성공하고 말 일곱 번째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도대체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나돌고 있었다. 애당초 이상한 것은 왜 이런 이야기가 소문이라는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뉴스에까지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신빙성 있는 루트로 이야기가 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크게 신경을 쓸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도시 괴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이 좁고도 넓은 도시에서 내가 소문의 주인공과 만나게 될 가능성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 불쌍하고 안타까운 누군가가 일곱 번째 시도를 성공시키든 그러지 못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한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벌써 직장을 구하지 못한 지 2년이 지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처음 한해는 분명 아무리 시도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뒤부터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저금해두었던 돈만 천천히 까먹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 일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흐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발견하고 만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일 년 사이에, 내게는 더 이상 삶을 헤쳐나갈 그 어떤 의욕도 원동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나에게는 가족도 없고 내 삶에 있어 중요하게 여길 만한 ‘그 무언가’도 없다. 애당초 멀쩡한 모습으로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목표도 목적도 없는, 오로지 관성에만 의지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일 년간의 백수 생활에서 확연하게 깨닫고 만 것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날은 오늘이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 생각 중에 있다. 다만 그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내게 약간의 교훈을 주기는 했다. 정말로 확실하지 못한 방법이란 계획의 나머지 부분을 운에 맡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비닐봉지에 소주를 가득 담은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을 떠올리는 데 알코올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3.
그들이 서로를 지나치고 있다. 소주를 잔뜩 들고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처음 남자가 졸피뎀 한 병을 입안에 쏟아부었을 때 나는 평소처럼 수거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도 많이 봐온 장면 중 하나였고, 일상처럼 행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남자의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길거리를 거닐다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 마냥, 버릇처럼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졸피뎀뿐만이 아니라 트리아졸람이 가득 담긴 병을 발견했고,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쌓아놓은 복사기 토너들을 발견했고, 서툴게 매듭을 지은 올가미부터 아주 완벽하게 길이를 맞춘 밧줄 매듭까지 온갖 것들을 발견했다. 그 더럽고 엉망인 방 안에서 체계가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물건들뿐이었다.
그때 내게 한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낙엽을 치울 때도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단번에 자루에 담는 법이다. 나는 이 남자가 빗자루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이랄까, 계획이 완벽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영감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수면제를 한 병 삼키고 10분도 되지 않아 남자는 휘청거리더니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나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누군가가 그의 방으로 들어와 응급차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그다음에도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고, 다시 그랬고, 다음엔 천장의 실링에 약간 장난을 쳤으며,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에게서 약간의 장난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정확히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계획하고 있던 일이었다. 나는 내가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살중독자는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길에서 자는 이들, 진심으로 웃지 못하는 이들, 손톱을 씹는 이들에게 남자의 이야기를 속삭였다―이 일을 하면서 나는 아주 예전에 만났던 어떤 학자를 떠올렸는데, 그 이야기는 지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뜨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남자가 일곱 번째 헛수고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첫 번째 성과를 찾아냈다. 그는 원래부터 자질이 있었으나 ‘소문’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에 대한 방비를 다 풀어놓은 상태였다. 나는 위에서 낙엽을 치우는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남자의 일곱 번째 시도에도 절망한 실업자의 첫 번째 시도에도, 나는 결과물을 쥐여주지 않을 것이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계속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아무도 수거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 모두가 죽음이란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허상 같은, 그야말로 거짓말이나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끼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낙엽은 모조리 한 군데에 모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벌써 몇몇 동료들이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충고나 조언도 없다. 애당초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작가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언과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용서다. 말하자면 단테의 <신곡>이 실용서였고, 밀턴의 <실낙원>이 실용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도착했다. 어쩌면 ‘떨어졌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내가 걸어온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갑자기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때 나는 어둠 속에서 초원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 같은 인영을 발견했다.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금발 머리를 가진 외다리 청년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휘영청 밝은 보름달 덕분에 그의 머리 색깔과,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청년은 눈을 감고 있었고 만취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린 채 풀밭에 누워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 생김이어서 짧게 자란 수염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내가 묻자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있던 화약 더미가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어조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욕설과 저주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정체불명의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채 그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가던 길을 계속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가 내뱉던 괴성과 욕설이 언젠가 들었던 프랑스어와 닮아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건을 뒤로하고, 약간 언덕진 초원 저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건축물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솟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불이 밝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축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과연 건물인지, 사람이 살고는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초원에 난 길을 걷는 와중에 나는 처음에 만난 외다리 청년처럼 풀밭 곳곳에 늘어져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유령처럼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외다리 청년에게서 교훈을 배운바, 그들에게 다가서서 말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 모두가 남자였고, 각각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어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의 다양성 때문에 나는 언덕 저편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과연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낮은 언덕을 넘어가자 그곳은 역시 마을이 맞았다. 나무로 건축한 단층이나 2층짜리 주택이 수도 없이 밀집해있었다. 마을에 딱히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초원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 어느 지점부터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풀밭에 나동그라진 사람의 수가 줄어있었을 뿐이다. 울타리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을의 초입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와 아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검은 머리털이나 동북아시아인 특유의 얼굴 형태가 새삼 내게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어느 건물 벽에 기대선 채 끊임없이 자신의 두 손을 서로 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일본인인 듯했다. 다행히도 나는 조금이나마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여기에는 불이 없습니다. 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손가락과 겁먹은 듯한 표정은 정신에 안타까운 상처가 있는 사람 특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미 상기했듯 한밤중임에도 온 마을에 달빛 말고는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과거에 읽었던 코맥 매카시의 어떤 작품을 떠올렸다. 인류문명이 멸망해버린 세계를 다루는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잠깐 잡념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새까만 광경과 일본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내 상상력을 부풀린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이 마을로 ‘불’을 운반해올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래된 습관 때문에 생긴, 관념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간 나는 이 마을의 중심으로 가면 광장이 있으려니, 광장이 있다면 더 멀쩡한 사람과 만날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늘을 보니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지를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불쌍한 일본인 사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들은 좁았고 제대로 관리되어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지저분한 길목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통행인이나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불쌍한 일본인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자주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을에 광장 따위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이 마을에는 중심이 되는 구역조차 없었다. 그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밀집해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수도 없는 길목들이 겹쳐졌다가 나뉘어지고, 또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일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정점에 달할 즈음에, 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다. 어느 건물의 계단참에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도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본 일이 있었는데…… 맙소사, 그는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책에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나는 순간 귀신에 홀린 듯, 계단참에 올라앉은 그에게로 달려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때 나는 마땅히 이 마을에 관해 물어봐야 했을 실제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과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무어라, 높은 목소리로 외쳐대기만 했다. 그러나 그 늙은 사상가는 완전한 몰이해의 표정으로 내내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몇 분 뒤에야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제정 러시아의 문호가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다소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약 이 마을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 맞다면, 그렇기에 이곳에 불이 없는 것이라면. 나는 몇 가지 생각을 거쳐 진실을 확인할 한 가지 방도를 찾아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는 지극히 한정되어있고, 그마저도 복잡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단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뿐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외국인의 귀에 얼마나 부정확하게 들릴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나는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내 곁에 초라하게 쭈그리고 앉은 대문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니콜라이 고골. 노인은 저 멀리 있는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나는 이미 거의 진실에 가까워졌다. 더 이상 묻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이름’을 나열했다. 19세기로부터 조금씩 멀리,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금씩 멀리 향하는 이름들을 말이다. 키르케고르부터 카뮈까지, 셰익스피어부터 피츠제럴드까지……. 이름을 들은 노인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더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을을 보라는 듯 손바닥을 옆으로 저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절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환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마을에 자의로 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숲을 빠져나온 후부터 요만큼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하늘에 유리구슬처럼 떠 있는 새하얀 보름달을 가리켰다. 그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인본주의자가 마을 입구에 있던 일본인의 말을 부정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써 탁해진 눈동자로 노인은 미간에 주름을 짓고,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었다. 이제 모든 절망이 확실해졌다. 마을 초입의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내 귓속을 향해, 지금까지 듣지 못하고 있었던 무수한 소음이 기어 들어왔다. 애벌레가 나뭇잎 먹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시킨 것 같은 소음이었다. 이 거대한 마을 전체가 실낱같은 숨으로 비명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그것은 내가 처음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소리였고,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사방팔방에서 멈추지 않고 들려온 소리였다. 마을의 모든 목조건물 안에서, 그 건물들의 작고 좁은 방 안에서, 그 작은 소리들은 겹쳐지고 공명하며 그야말로 이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각사각, 사각사각하며. 나는 공포에 질린 채 구르듯이 계단참을 뛰쳐 내려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그 좁고 더럽고 엉망진창인 길들을 있는 힘껏 역방향으로 달렸다. 가끔 멀거니 서 있던 사내들이 어깨에 치였으나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마을 밖으로, 초원으로, 언덕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그 끔찍한 소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각사각하며, 내 인생 전체에 들러붙어 있던, 마침내는 삶을 모조리 갉아 먹어버린, 그 오래된 소리가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쉬며 내가 나왔던 숲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숲은 빠져나왔을 때보다 더욱 어두컴컴했다. 나는 다시 외다리 청년과 만났다. 그러나 내가 나왔던 그 숲길은 찾을 수 없었다. 아주 빽빽하고 울창한, 새까만 숲이 벽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외다리 청년은 모로 누운 채,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안다. 그는 태양으로 걸어 올라가려던, 나쁜 피를 가진 시인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글에는 조언도 충고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펜을 긁는 소리가 이미 우리의 삶을 먹어치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명성과 존경이, 또한 모든 실패와 무관심이 그 소리와 함께 이곳으로 온다. 살아있는 피부에 열기를 전해줄 불꽃조차 없는 이곳까지 와서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리가 없다. 우리가 멈출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20분이 넘도록 구토를 하고 있을 동안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도 도착한 문자메시지는 한 건도 없다. ‘들어오세요. 저 종민이예요.’ 3년 동안 저장만 되어있던 번호로 다시 한번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답장을 바라고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사실, 진즉에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더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번호는 분명 바뀌었으리라. 3년 전에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더니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엉뚱한 사람의 전화에 도착했거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전파 상태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그는 기억한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시댁에 전화를 하지도 실종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간 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그것만으로 상황이 매듭지어졌다는 듯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도 하고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콩나물국 따위를 끓여 찬밥을 말아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당황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생계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또한 눈앞에 놓인,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돗물로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았다. 눈이 온통 충혈되고 얼굴에 그늘이 진, 퀭한 인상의 그 젊은이는 평판 높은 K 공과 대학의 장학생이었다. 참 성실도 하지,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거울 위에 달린, 누렇게 물때가 낀 방수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술집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제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방 이불에 누워있었다. 평일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날 퇴근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보다도 유난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부엌과 안방의 경계에 마냥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 어둡고 퀴퀴한 방 한구석에 돌무더기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를, 마찬가지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버린 이후로, 이제 이상한 일이라고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지갑에는 팔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사흘 전 어머니가 용돈으로 쥐여준 이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밖으로 나가, 가로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며 주차되어있는 승용차들을 지나쳐, 주택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늘 왁자한 소리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노가리 1000원’. 가게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간판이 붙어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천 원짜리 노가리와 삼천 원짜리 소주를 시켰다. 한 잔,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더욱 느린 속도로만 마셨다. 눌어붙은 기름과 사람 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팔만 원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는가. 어느새 새벽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이 오면 경사로가 많은 이 동네에서 한두 사람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추위에 눈과 코가 빨갛게 얼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어두컴컴한, 10평짜리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맡아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국이 상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냄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그는 삼만 원어치 술을 전부 게워냈다. 산책간 아버지가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술기운 속에서 생각했다. 슬슬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휴대전화 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한 집안에선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비강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비누라도 먹으면 냄새가 지워지겠지, 알코올 때문에 회로가 엉켜버린 머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로즈메리 향밖에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는 화장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어머니는 그가 술집으로 도망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산책 중인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술에 취한 손가락이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세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피로하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직도 비누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이제 그만 잠들어버려야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일이야 오든 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눈동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불분명한 잔무늬를 보고 있다. 지난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그의 술 취한 머리가 천천히 정리하려 한다. 그는 작년 교양과목에서 배웠던 어느 서글픈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린다. 그것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돌며 사지를 천천히 굳게 하고 있다. 1974년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서 쏘아 올린 메시지는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수신하기를 기대하고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왕복 5만 년이 걸리는 메시지에 과학자들이 기대한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전파를 송출한 천문대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행위로 벌인 프로젝트였다. 전파를 받을 누군가가 있든 없든, 답신이 오든 오지 않든 처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취기와 구역질의 산란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의식이 떨어졌을 때, 그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휴대전화의 메시지 착신음을 듣는다. 그러나 굳이 깨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와 침묵이 방안의 낡은 가구며 두 사람을 검은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내 친구 이철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한창 서랍장이며 장롱 따위를 필사적으로 뒤지는 중이었다. 그날은 14일이었는데, 수중에 남은 돈과 날짜를 계산해보니 보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어떻게든 담뱃값을 충당하기 위해 여권과 통장이 있는, 가장 안쪽에 있던 서랍까지 전부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딘가에 천 원짜리 몇 장이나, 동전, 그도 아니라면 환전할 수 있는 적은 액수의 외화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찾지 못해, 돼먹지 않은 분노로 가슴속이 끓다시피 할 때였다. 거칠게 전화를 받자 철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 내가 되묻자 그는 용건을 이야기했다. 철우는 자신의 막내 여동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은 지금 대학생이고 내년이면 철학과를 졸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수화기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미 뒤졌던 서랍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 있었다. 아무튼, 철우의 말에 의하면 여동생은 3년간 대학을 다니며 처음 입학했을 때 갖고 있던 열정을 전부 잃어버렸다고 한다. 매주 반복되는 장황한 토론과 현학적인 전문용어들 사이에서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왜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내심 어떻게 하면 약간의 돈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우는 막내 여동생에게 추천해줄 만한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책을 좋아하던 것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책을 사서 읽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동생의 학구열에 다시 불을 붙일만한 책을 내가 추천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지금의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집안이 온통 책장으로 가득했으나 전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쉬는 날에는 책을 읽기보다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가 중요했다. 집안에 가득한 갖가지 종류의 책들은 벌써 몇 년째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푼돈 찾는 일을 포기하고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장롱 옆에 주저앉았다. 전공과목인 철학에 흥미를 잃었다고 하니 사상서보다는 인문교양서 등을 읽으며 다른 학문에도 흥미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복수전공도 생각해볼 것 아니냐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어떤 책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전화를 든 채 난장판이 된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개를 향하는 곳마다 과거에 읽었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먼저 윌러드 게일린의 증오와 범죄심리에 대한 인문서를 이야기하고, 고명섭 교수의 인간 내면의 문제적 열정에 관한 책, 카잔차키스의 자서전, 볼테르의 철학소설, 이런 식으로 한참 책 제목들을 나열했다.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내뱉는 식이었다.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대학생의 진로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화 저편에서는 컴퓨터로 받아 적고 있는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직후 철우가 한 말 때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가 열거한 책 중 절반이 이미 절판되었다고 말했다. 절판, 나는 계시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했다. 철우가 절판되었다고 얘기한 책들은 중고서점에서 최소 만오천 원, 비싼 경우에는 육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들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는 책장에 있는 오래되고 제본이 호화로운 책들을 검색해보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은박이 입혀진 특수양장본은 새로 나온 보급판보다 두 배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중고로 팔 만한 책들을 정리해보니,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총 합쳐 내 두 달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불과 십수 분 전까지 아사 직전의 쥐처럼 집안을 뒤져대던 스스로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희희낙락하여 마치 금괴라도 쌓듯 서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동생한테 얘기해, 내가 저녁 살 테니까 너랑 같이 한번 보자고, 진로같이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눠야지. 친구는 내 느닷없는 감정변화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으나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시 연락하겠다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값비싼 책들을 방 한쪽에 몰아두고, 외투를 걸친 뒤 집을 나섰다. 이제는 남은 담배가 두 개비뿐이라는 사실에 초조해할 이유도 없었다. 집 앞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달을 사는데 40만 원이면 충분한 이 동네에서 나는 누구보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맞은편 건물에서 온종일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마저 유쾌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하늘은 높고 화창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는 담배 맛을 더욱 좋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책 덕분이었다. 폐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나는 만족스럽게 눈으로 좇았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했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몇 권을 판 뒤 월급날이 되면 다시 책을 읽어볼까. 언젠가 이런 날이 또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꽁초를 버리고,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물며 생각했다. 마시면 사라지는 술에 생활이며 돈을 탕진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이다. 문득, 몇 달 뒤에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고 버릇처럼 불길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일을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진로상담 문제를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줘야 할 것이다. 대학까지 들어갔으면 나보다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지막 꽁초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분명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탁자 위에 앉아 검은 파도가 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재앙은 모두 내가 불러온 것이다. 현실을 캄캄한 구멍 속에 집어넣으려 했던 결과, 이제 곧 내가 그 어둠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주어 말하건데,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처음에는 부엌에 놔두었던 음식이 몇 개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정도였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먹어치운 뒤에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 터다. 나는 혼자 살고 있었고 내 기억력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내 건망증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부엌에 올려놓았던 사과나 식빵들, 장을 보고 탁자 위에 던져둔 채소들이 갉아 먹혔다. 다용도실에 있는 쌀자루의 귀퉁이가 터진 것까지 발견하자 나는 마침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에서는 커다란 카트를 끌고 다니는 행상인이 해충구제 약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카트에 달린 파라솔 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집에 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어가 인쇄된 상자를 하나 내밀며, 음식에 섞어 집안에 뿌려두라고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독한 약이니 엄한 데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설명을 들은 대로 빵조각에 약을 섞어 부엌과 다용도실 구석에 뿌려두었다. 쥐약을 집어 먹은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고 싶었지만 이미 외출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서기 전 집안 곳곳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거실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는 놈들의 소굴을 발견했다. 거실 벽이 나무 몰딩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 확실했다. 그곳에는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어서 뚫어놓은 듯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은 성인 남성의 주먹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안쪽은 아주 깜깜해서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돌아오면 전부 정리되어 있으려니 하며, 나는 집을 나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약을 뿌려두었던 곳을 확인했다. 검고 지저분한 쥐의 시체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음습한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축 늘어진 채 다용도실 한복판에서 죽어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쌀 포대를 갉아먹고 있었는지 주변에 쌀알이 흩어져있었다.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시체를 집어 들었다. 죽은 생물을 만질 때의 촉감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쥐를 들고 선 채로 잠시 고민했는데, 이것을 도대체 어디에 버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일반 쓰레기는 아니고, 음식물쓰레기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물도감에 따르면 쥐들은 잡식이라고 했다. 놈들은 무엇이든 먹으며, 단 한시라도 먹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분에서 10분만 굶어도 죽어버리는 것이 쥐라고, 분명히 읽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는 쥐의 몸뚱어리를 거실로 들고 가, 어둡고 캄캄한 놈들의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것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뒤로 사흘 정도 아무 일도 없었다. 쥐들은 더 이상 내 음식을 훔쳐가지 않았고, 나도 구멍을 내버려 뒀다. 시멘트를 발라 막아버릴까 생각해봤지만, 놈들이 음식을 훔쳐가지 않는다면 그럴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 구멍은 의외로 내게 편리한 것이기도 했다. 독신생활을 하며 생기는, 음식물 찌꺼기가 잔뜩 들러붙은 비닐이라든가, 종이와 플라스틱이 단단히 붙어있는 포장지 등, 배출이 난감한 쓰레기는 그 구멍에 넣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밖으로 밀려 나오거나 안에서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 사실로 보아 구멍 안에 사는 것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것 같았다. 쓰레기를 구겨 넣을 때마다 모서리끼리 마찰하기 때문인지 구멍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는 특이한 취미가 생겼다. 신문을 읽다가 불쾌한 기사가 있으면 오려서 구멍에 넣었다. 주로 정치, 사회와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전기, 가스비 따위의 청구서는 요금을 지불한 뒤에 누군가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으로 구멍에 욱여넣었다. 구멍은 정말 끝도 없이 깊은 것인지 아니면 그 안의 짐승들이 내가 넣는 불쾌한 것들을 전부 먹어치우고 있는 것인지, 절대 막히는 일이 없었다. 어느새 나는 이 구멍이 집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구멍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온갖 불쾌하고 어딘가 멀리 집어던지고 싶은 물건들―혹은 생각들―을 구멍이 훌륭하게 처리해주지 않는가. 성가시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이 구멍 안에서 해충들에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그 새까맣고 커다란 구멍이 있으니 그러한 상상은 노력 없이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온갖 것들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의 부고(訃告), 5년 넘게 만나지 않은 옛 친구가 보내온 청첩장, 구청에서 보낸 선거홍보지, 죽어버린 화초, 심지어 사회생활에 진절머리가 났을 때는 지갑에 있던 30여 장의 명함을 전부 구겨 넣기도 했다. 내 손길을 타면서 구멍은 계속해서 커졌고, 나는 내가 ‘그것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표현을 일차원적이고 피상적인 의미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구멍’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었다. 생활의 일부이자 나의 특별한 쓰레기통이 된, 새카만 입구까지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구멍의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한 무리의 쥐들이 계속해서 내가 주는 먹이를 갉아먹으며 생존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거실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우연이었다. 젓가락으로 집은 반찬이 기름이나 조청 때문에 미끄러워서 떨어지는 일은 아무 때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콩은 바닥에 떨어져 2cm 정도를 굴러갔다. 나는 그것이 굴러간 방향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무심히 생각하며, 그리로 시선을 향했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구멍이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세배 이상 넓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고 잔악한―틀림없이 내가 먹여온 것들 때문에― 검은 파도가 핏빛으로 점멸하는 눈동자들과 함께 해일처럼 쏟아져나왔다. 나에게는 경악할 시간도, 도망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식기들을 전부 밀어내며 탁자 위로 뛰듯이 올라갔다. 놈들은 순식간에 온 집안을 뒤덮었다. 곧이어 집 전체가 비명 지르는 것처럼 할퀴고 뜯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내가 올라앉은 탁자 다리를 그 흉측한 앞니로 갉아 먹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바보 같긴, 바로 그 아름다운 음악을 못 견뎌서 방금 전 카페에서 일행을 놔두고 도망 나왔잖아. 사내는 방 안에서 장롱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로라제팜이 30알이 넘게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다.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쓴 일이 없다. 더욱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사내의 얼굴이 유리로 만든 가면처럼 굳었다. 갈비뼈가 온통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장미꽃마냥 활짝 필 것 같은 흉통을 느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지. 실패한 원고만 가득한 삶이라도 끝나는 것이 삶이다. 시체라도 꽃처럼 핀다면,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겠지.
벌써 4월인데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잔뜩 움켜쥐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낙엽을 떨어트리기도 전에 죽었나, 하고 생각했다. 죽기 전에 낙엽을 놔줄 생각은 있었는지 궁금했다. 궁금증이 다른 생각으로 연계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래서 도대체 어쩔 것이냐, 라고 친구가 대뜸 물었다. 그런 난폭하게 걱정하는 말투는 생각지도 않던 중이라 사내는 흠칫 놀랐다. 뭐가 말이야, 하고 사내는 평정을 가장하면서 되물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의 전집이었다. 친구가 막걸리와 안주를 샀다. “널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야. 다만 K도 너에게 돈을 빌려줬다던데.” 친구는 막걸리가 담긴 사발을 들고 마치 교무실의 선생님처럼 말했다. 사내는 친구의 눈을 바로 보면서도 손톱으로 숟가락 손잡이를 마구 긁더니, 그 돈은 A에게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썼어, 라고 말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않더니 사발에 든 것을 마셨다. 친구의 눈은 질책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놈의 혀를 잘라버릴까, 사내는 생각했다. 진실은 말을 하든 안 하든 변하는 것이 없다. 언제나 추하고 가학적이다. “네 빚, 얼마 안 되면 그냥 내가 갚아줄까.” 사발을 비우더니 친구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 뒤에 <나중에 편집부가 네 글을 사면>이라던가 <예전에 네가 냈던 책이 재판되기라도 하면> 같은 문장들이 따라왔지만, 사내한테는 들리지도 않았다. 손 좀 씻고 오겠다고 갑자기 일어나고선, 사내는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봄이었고 어두웠고 어디선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죽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책무.
유서를 쓰려고 종이를 꺼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을 백지만 쳐다보았다. 결국 사내는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일평생이 수치였는데, 수치스럽지 않게 죽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도를 모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서랍에 넣어버렸다.
무가치한 원고작업에 시달리다가 밤을 새버린 어느 날, 흔치 않게 아침에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할 요량이었다. 걷다보니 동네 중학교 앞까지 왔다. 적지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사내는 선 채로 그들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그 뒤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신경안정제를 꺼내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둑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렀다.
밥은 잘 먹고 있냐고 어머니가 전화로 물어왔다. 거짓말을 했다. 사실 삼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 음식은 있지만 요새는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난다. 어머니가 약은 잘 챙겨먹고 있냐고 물어왔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차에 기름을 넣듯이 철저하게 먹고 있다. 병원비가 모자라지는 않냐고 물어왔다. 또 거짓말을 했다. 이젠 도대체 어디서 병원비를 충당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내는 자신이 왜 가족에게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어머니가 잘 지내라며 인사를 했다. 전화를 끊고 사내는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운건지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지, 아무튼 그러고 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봄이다. 겨울옷 중 멀쩡해 보이는 것은 전부 전당포에 넘겨버리자. 사내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던 전당포 간판을 기억해냈다. 그는 장롱에서 그나마 깨끗하고, 값이 나갔던 코트 같은 것들을 꺼냈다. 대부분 오래 전에 가족이 사준 것이었다. 일주일치 약값은 벌 수 있겠지. 혹은 빚의 일부라도 좀 갚을 수 있겠지. 그러면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일도 좀 덜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더미를 짊어 매고 전당포로 걸었다. 전당포에서는 브랜드도 없는 코트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대체.” 사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대학교 동창으로 그나마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여자다. 실의에 빠진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왼쪽 손목에 부자연스러운 붕대를 감고 있다. 사실 무슨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자살시도가 도중에 발각된 정도의 사건인 것이다. “이상하지. 아픈 곳도 없는데 병원침대에 눕혀놓다니.” 여자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있다. 이 갈라진 목소리가 함의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사내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상황은 유희인 거야.” 건조하게 말했다. “유희였던 것 같은데. 하다 보니 진심이 됐어.” 여자가 웃는다. 대답을 듣고 보니 지루하다. 낱낱이 듣지 않아도 낱낱이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로 쉬운 일이구나, 하고 사내는 생각했다. 어쩐지 저 붕대에서 인텔리 냄새가 난다. “왼손은 쓸 수 있대?” 이미 살아난 이상 질문은 한정되어있다. “아직 몰라. 인대가 다시 붙는다면.” 유서에 써놨듯이 수치스럽지 않게 죽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양하는 것이다. 처음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을 때부터, 대기실에는 항상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은 젊고 바싹 마른 여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어렸던 그는 그녀들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모양 얼음세공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게서 살아있는 인간의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굳이 자살하거나 하지 않아도 곧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사내는 그 얼음세공들에 대한 모든 가치판단을 영원히 보류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불유쾌했다. 버스에서 자신의 경동맥이 어디 있는지 목과 손목을 더듬어보았다.
김밥을 한 줄 사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뱃속이 들끓고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러다가 정말 아사하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빌라 앞에서 늙은이 셋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주차를 이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사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금 주춤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오후 세 시에 사지 멀쩡한 청년이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걱정을 했다. 집에서 김밥을 이빨로 씹는데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달리지도 않을 열차에 석탄을 채우는 건 낭비고, 또한 슬픈 일이다. 삼킨 김밥은 전부 토했다.
근처 공원에 가니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저 개들은 주인과 함께여서 기뻐 보이는구나.
결국 죽게 된다. 봄 햇살이 따사로웠고, 이것이 사내의 책이 아무도 모르게 출간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잊혀 진 뒤 몇 번째 봄이던가. 봄 햇살처럼 아름다운 것을 쓰고 싶다. 태양 같은 것은 싫다. 배경에 비춰지는 옅고 반투명한 햇살 같은 것이 쓰고 싶다. 반짝이고 따스하지만 정말로 그 어떤 질량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슴을 열어 읽고 난 뒤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책. 나중에서야, 어라, 그런 책이 있었던가, 하고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도 않을 책. 유산도 묘비도, 그런 것을 남기기에는 평생을 철지난 날벌레의 심정으로 살아왔다. 날씨가 추워진 것을 느끼고 하수구에서 잠들며, 이제 죽는가, 하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힘없이 날아다니고 행인들의 방해를 하다가 저녁에 다시 하수구에서,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그런데 또 눈을 뜨고, 그것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겨울이 되어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죽은 동료들을 시기하며 혼자 비척비척 날아다닌다. 그래도 결국에는 죽겠지. 그러니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은 것이다. 통속 소설이라도 괜찮아. 오히려 사내는 통속 소설가들을 존경하고 싶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어.
자주 지나가는 골목에 어느 목수의 사무실이 있다.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체구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몸집 때문에 강인하게 보이는 목수다. 서로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몇 개월이나 비슷한 시간에 사내는 그 앞을 지나가고, 목수는 그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 그러다보니 왠지는 모르겠으나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목례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목수가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 동네 사시는 모양이죠. 처음으로 인사를 받고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으나 즉시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은 아닐까, 후회했다. “매일 이 시간에 지나가시더라고요.”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담뱃갑 뚜껑을 열어 내밀면서 말했다. “피우세요?” 사내는 담배를 한 개비 뽑으면서 대답했다. “피우지만,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러자 목수는 끄덕거리면서 입술과 이빨로 뭐라 형언하기 힘든 소리를 냈다. 공감인지, 동정인지, 아무튼 그런 것이었다. 목수에게 라이터를 빌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없다. “좋네요.” 혼잣말인지 목수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예술 하는 분이시죠?” 목수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놀랐다. “마주칠 때마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사내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만 보였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을 어렵게 꺼냈다. “아니, 아니요. 예술 같은 것은, 그다지…….” 말꼬리를 흐리며 땅을 본 채, 자신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쩐지 창피스럽고, 아니, 예술가라니,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구실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한테 기생할 명분을 만드는, 그런 것이 예술가라고, 아,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다. 사내는 갑자기 목이 잠기는 것을 느꼈다. “담배, 고맙습니다.” 꽁초를 쥔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은 목수의 눈동자를 쳐다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내는 일방적으로 목례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작은 삼거리를 돌아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으며, 온갖 처참이라고 부를만한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고, 그저 담배를 피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모금의 연기를 삼킬 때마다 심장이 딱딱하게 닫혀가는 기분이 들어서, 용케 주저앉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 선생은 흰 당나귀도 나타샤도 있었잖아. 그러면 됐지. 나타샤가 그 선생을 사랑했잖아. 그러면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름다운 나타샤가 널 사랑하면, 그러면 넌 펜이고 원고지고, 그런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버릴 수도 있겠지.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이 지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매형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내는 음색도 없이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저분한 방안에서, 완성한들 동전 한 푼도 되지 않을 원고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여느 날, 그저 한없이 고독하고 서러웠던 것이다. 누가 인간의 체온을 갖고 있을까, 누가 나에 대해 보편적인 애정을 갖고 있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내는 결국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서히 멀어졌던 가족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부모님은 안 된다. 그들에게 가서 당신들의 아들이 이렇게나 망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레 내보일 수는 없다. 누이와의 사이는 어땠더라. 우리가 좋은 남매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내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카가 태어나던 날, 매형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감동스러운 호의를 보인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사내는 병원에서 나는 소독제 냄새가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인지 혼자 혼란스러워하고만 있었는데, 매형은 와줘서 고맙다면서 크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탕탕 두드려주었다. 아마 5년 전이다. 그 뒤로 누이도 매형도 만난 일이 없다. 그러나 사내는 고장 난 기계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처럼 누이가 아니라 매형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얼굴 좀 보러가도 될까요, 라고. 그런데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라니, 사내가 집안의 문젯거리라는 사실은 진즉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로 반갑다고 웃으며 말하는 매형의 이 친절어린 태도에 스스로의 존재가 진절머리 난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이제.” “5살이지. 말도 잘 해.” 그렇군요, 하며 중얼거린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조카가,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매형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하자. 다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자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가고, 어린아이가 아빠, 하며 달려 나오고, 그 어린아이가 생면부지의 친척을 보고 경계하고, 아버지가 딸에게 네 외삼촌이야, 하고 소개하고, 외삼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서 입꼬리가 뒤틀려있고. 그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서 외삼촌은 대체로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간신히 소파에 둘러앉아, 사내는 매형이 건넨 캔맥주를 들고 있다. 병든 위장이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조카는 지금 외삼촌에게 굉장히 흥미가 있다. 약간 경계를 하면서도 옆에 앉아 사내를 구석구석 관찰한다. “정말 우리 외삼촌이에요?” “그렇지. 그럴 거야.” 얼버무리듯이 대답하면서 매형에게 누이는 집에 없는지 묻는다. 곧 올 거라고 한다. 이제야 조카를 쳐다보니 과연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다. 성장하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인이 될 것이다. 사내는 이 아이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아니 물론, 추녀인 것보다야 편한 삶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머리 예쁘게 묶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만 이런 말을 던지면 아이들이 알아서 떠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요, 엄마가요, 아빠가 별님 머리끈을 사왔는데요, 기타 등등. 사내는 이미 듣지도 않고 절망적인 문장들을 곱씹고 있다. 5년을 살았고, 광야처럼 끝이 안 보이고 난폭한 미래가 있다. 아하, 광야처럼, 이라니. 어리면 급사하지 않는다는 법칙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대처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상정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모두 죽는다. 모두들 하나같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는다. 이런 젠장. 사내는 자신이 신이 나서 떠드는 5살짜리 조카를 눈앞에 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 영혼에 독액이 퍼진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았다. 진작 죽어야했을 인간이 억지로 살고 있으니 모든 것에서 죽음이 보이는 것이다. 발정난 개가 아무것에나 허리를 흔들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기가 죽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사내는 괜히 맥주 캔을 땄다. 기포가 좁은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났다. “아빠도 이거 좋아하는데, 너무 마시면 엄마한테 혼나요.” 아이가 동그란 눈을 하고 말했다. 매형이 소리 내 웃었다. 사내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얼마 뒤 집에 들어온 누이는 남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너, 더 안 좋아졌네.” 사내는 과연 가족뿐이다, 생각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뭘, 언제나 비슷해.” 호화로운 외식. 거의 먹지 못했다. 매형이 걱정했다. 누이는 남편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조카가 먹성이 좋았다. 위장이 안 좋은 탓인지 몇 잔 만에 술에 취했다. 마음이 우수수 무너질 것 같은 죄책감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아무도 깨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심야 버스 안에는 온통 검은색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다.
왜 죽지 않는 거지? 왜?
영화에서, 어느 백인 배우가 상대 배우에게 데미지드 굿즈(Damaged goods)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대 배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아가씨가 알고 보니 아주 무섭더라고, 까맣고 세련된 가죽 핸드백에 항상 마르크스를 넣고 다니고, 내가 능청스럽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면 그 하얗고 예쁜 얼굴이 순식간에 살인범을 추궁하는 고결한 검사나리 같아지는 거야, 아무 말도 않지만, 칼날처럼 시퍼런 눈동자가 마치, 당신은 그 술 마시면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위해 무어라도 했나? 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다니까.” 친구가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낄낄거리면서 떠들고 있다. 사내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묻는다. “잠깐, 그 여자, 전에 말했던 그 여대생이야?” “그래, 아주 인텔리한 아가씨야, 그렇지?” 지금 저급하게 웃으며 자기 엽색 얘기나 하고 있는 이 친구는 놀랍게도 전에 사내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한 그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자기가 마시고 싶으니 술을 사주곤 하는데, 매번 컨디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는 것이 감탄스럽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우리들, 곧 30대 후반이 되는 거 아니었나.” 사내가 중얼중얼 말한다. 사실 말하면서도 별로 지탄할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이 친구는 일주일 뒤면 다른 여자 얘기를 할 것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세상에 마르크스주의 여대생이라고. 신기해서라도 손을 댈 수밖에 없지.” “그렇기도 하겠지.” 맥주를 홀짝이면서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이미 뒹굴었지?” 역전에서 만났을 때 친구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수집취미라도 있는 거야.” 신기한 것을 보면 자기 위장 속에 집어넣어야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네가 즐거워 보여 다행이다. 30대가 남자의 전성기라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사내의 전성기도 오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전성기냔 말이다. 방안에서 원고 파지나 구겨 발로 차고, 밤에 삼킬 약이나 한줌 달그락거리는 그런 전성기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체중이 성인이 된 뒤 최저점을 찍긴 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이것 봐, 시체가 웃고 있군, 하며 실실거리기도 했다. 여러모로 절정에 다다르긴 했구나, 사내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아아, 최소한 40대가 되기 전엔 꼭, 꼭 죽고 말테다. 기도하듯이 읊조렸다. “로맨스는 말이야, 역시 한쪽이 죽어야 해. 함께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 사내가 맥주잔을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죽기는. 이 몸으로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셰익스피어 때부터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어.” “그 몸이 썩어버리고 만단 말이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면, 반드시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울 때 끝이 나버려야 하는 거라고…….” 취했나? 위장병을 앓고서부터 주량에 대중이 없어져버렸다. 그러면서도 위악적으로 들이킨다. 어찌됐건 친구는 사내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멸망할 것 같은 어조로 가끔씩 입을 열어 헛소리를 하는 사람, 그렇게 역할이 정해져 있다. 사내의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은, 기껏해야 병원 의사 정도겠지. 봄이 가기 전에 끝을 낼까. 청산가리는 어쩐지 야생화의 이름 같다.
술이다, 술. 취하면 중요한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게 되니 좋다. 취중에는 진담이 아니라 허담만 오가는 것이다. 그편이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A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다. 얼마 전 사내는 K에게 돈을 빌려 그에게 빌렸던 돈을 갚았다. 아무튼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죽었어.” 사내는 조용히 있다가 퍼뜩 되물었다. “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죽었다고. 간호사가 옮기던 카트를 덮쳐서 주사기를 닥치는 대로 자기 몸에 찔렀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고 막힌 창문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그런 행동력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갈 거냐?” A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어딜?” 사내는 계속 되묻기만 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장례식 말이야. 듣자하니 부모는 슬프기보다 열이 머리에 뻗쳐서, 그런 불효자식은 딸도 아니라고 장례를 안 연다는 얘기도 있었다는 모양이다만.” “아, 모르겠는데, 몰라.” 이상한 대화에 계속 침묵이 낀다. “……나중에 정해지면 장례식 일정이랑 주소는 보내 놓을게.” 혹시 A는 사내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냥 두어도 별 상관은 없다. 전화가 끊겼다.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도무지 그 녀석이 인생에 엄청난 비애가 있어, 마지막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질 않는 것이다. 이것도 그저 대학시절부터 계속 반복되어왔던 퍼포먼스의 일환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사내는 전화를 끊고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A는 사내가 대학재학 당시 함께 몰려다니던 무리의 중심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학과였지만 동아리인지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어느새 무슨 술자리라도 생기면 가장 많이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래서 이번에도 제일 먼저 정보를 접했고 무슨 의무감으로 전화를 돌려대는 것이겠지. 여하간 사내는 무표정으로 전화기 겉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간호사가 끌고 다니는 카트에 약물이 든 주사기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혈관에 공기라도 주사했나. 괴상한 일이다. 그런데 괴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죽으려고 하면 무슨 방법으로든 죽겠지. 시간만 있다면 카테터로도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꽃이라도 사둘까.” 사내가 마치 자기가 들어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즉시 부정한다. “아니야, 바보 같은 짓이다.” 결국 흉측하게 시들고 말 것을 왜 돈 주고 산단 말인가. 받는 입장에서도 처치곤란이다. 이로써 사내의 생활에서 잡담이나마 나눌 수 있는 여자의 수는 제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A는 재작년엔가 결혼을 했지.
완성이다. 내 평생의 역작이다. 한 30번째 평생의 역작인 것 같다. 가슴이 기쁘고 들떠서 지금이라면 옥상에서 소리 내 웃으며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언제 쓸 수 있게 될까. 그걸 쓰지 못하고 죽으면 영 멋이 없는데. 아니, 어찌되든 멋은 없겠지. 멋은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만 쓰는 말이다.
“재미가 없어요.” 편집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처음 사내가 소설책을 낼 때 일반 편집자로 담당되었었는데, 어느새 부서 편집장이 되었다. “재미가 없고, 너무 난해하고 음습해요. 아무도 이런 건 돈 내고 보지 않아요.” 사내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편집장을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이전에, 사실 아무 생각도 없다. “애당초 이거 소설입니까, 아니면 수필입니까, 그도 아니면 무슨 언어유희 같은 겁니까.” 분명히 악의가 담겨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그런데 사내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할 말도 없고, 하도록 된 말도 없다. “저기.” 사내가 가까스로 입을 뗀다. “오천 원만 빌려주시겠습니까. 돌아갈 차비가 없습니다.”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그러나 더 외로워할 기력도 없다.
사내가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쓴다. 가끔씩 만취한 사람처럼 혀를 내밀며 헛구역질을 한다. 난폭하게 잉크를 새기고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예전에 썼던 유서의 뒷면이다. 책상과 마주보고 있는 면에는 여전히 수치가 어쩌고, 방도를 모색해보겠다는 문장이 변명처럼 적혀있다. 깨끗한 면에 뭔가를 마구 쓰고 있다. 옛 시절에는 여인들이 낙태를 하기 위해 간장을 통째로 퍼마시곤 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짠맛에 몸부림치며 태아는 차라리 게으른 노인처럼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품에서 나오게 되면 자, 이것이 네 이름이고, 이것은 네 책임이고, 이것은 네 운명이다, 하며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니까, 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니까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었다는 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동경이었을까요. 극본이 될 만큼 아름다운 연인은 필시 손을 마주잡고 죽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다른 결말이더라도 그 극본의 위대함에 손상이 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연인을 죽이든, 연인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세상 자체를 페이드아웃 하든, 그다지 다를 것도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나중에 반드시 시들어 추악하게 되리라는 운명을 가위로 잘라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역시 온 세상이 황금이 된 것 같은 아름다운 순간만을 고정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셰익스피어 이후로 늘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다는 친구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구구절절……. 이건 유서인가? 도대체가 유서인지, 수기인지, 그냥 언어유희인지. 사내는 새로운 종이를 세 장이나 더 꺼내어 정체불명의 희론 같은 것을 완성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읽지 말기를, 기도하며 그 종이뭉치를 원래 있던 서랍에 넣었다.
만일 늑대였다면 초원을 달리는 게 억울했을 것이고, 만일 새였다면 하늘을 나는 것이 서러웠을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생명을 얻었다.
4월. 아직 봄이다. 창문을 막고 있는 신문지를 다 뜯어내고 활짝 열었다. 이제 차갑지는 않지만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내는 장롱을 기어 올라가 높은 곳에 있는 벽장을 열었다. 곰팡이냄새가 자욱한 안쪽에서 설탕이 담긴 병 같은 것을 꺼냈다. 다시 장롱을 기어 내려가 부엌으로 갔다. 유리컵에 수돗물을 담았다. 그리고 설탕 같은 것을 병에서 듬뿍 퍼내어 물에 넣고, 숟가락으로 계속 저으며 녹였다. 잘 녹지 않았다. 아무리 저어도 알갱이가 남아서 사내는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시간은 밤이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담배가 있다면 좋을 텐데.
형 주변에 항상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늘 악기 케이스를 등에 매고 다니는 사람무리라든가, 볼 때 마다 줄담배를 물고 있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들이라든가 말이다. 형과 나는 십년을 훌쩍 넘기는 나이차가 있어서, 형은 동생이라기보다 조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형이 나를 같은 핏줄로서 아낀다는 것은 당시의 어렸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형의 직업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량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으레 대낮에 집 앞의 평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당시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폐 몇 장을 내밀면서, 담배 하나랑 너 먹을 과자 사와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의 군것질 값은 전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형이 내주었다. 이따금, 주로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산보하기 좋은 저녁이면 형은 나를 데리고 신정동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노을 때문에 벽돌담들의 그림자가 길어진 골목에서 왼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언제나처럼 담배를 피우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그 얼굴로 느릿느릿 걸었다. 너무 느려서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골목을 걷다보면 꼭 어느 집의 지하실로 들어가는데, 지하실에는 조악한 드럼세트나 낡은 앰프 같은 것들 주변에 때가 탄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형의 친구들 중 몇몇은 저녁마다 그곳에 둘러앉아, 도대체 연주하는 걸 본 적도 없는 통기타들을 벽에 세워두고 막사발에 소주를 마시며 늘 뭔가에 대한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나와 형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다들 반기곤 했다. 그들은 내 친척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예뻐했는데, 내가 그 아저씨뻘의 형들과 장난을 치는 사이 형은 술자리에 끼어 꼭 두어 잔씩만 마시면서 친구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그저 어린 마음에 우리 형이니까 뭐든 간에 중요한 얘기겠지, 했을 뿐이다. 그 뒤에는 지하실을 나와 또 걷고, 공원이나 공터에서 다른 친구무리들과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형은 신정동 어딜 가도 항상 친구가 있었다. 어딜 가나 친구들이 형을 반기고, 나는 그런 형의 어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샀다. 산보는 언제나 집근처의 대포집에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그 대포집에는 형의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고, 얼큰히 취한 아버지가, 막내가 왔구나, 이제 집으로 갈까,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가 마신 것을 계산하는 형을 뒤돌아봤다.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평상 위에서 담배만 피우며 앉아있던 형이 도대체 무슨 수로 항상 푼돈이나마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러나 직장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 무얼 하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도 여기저기 떨어져있던 힌트들을, 이제 어른이 되어서야 짜맞춰보는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날, 헌병이 들이닥쳐 형을 데려갔고, 그 뒤로 동네에서 형뿐만이 아니라 형의 친구 몇 명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전날 밤에는 드물게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의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잠결에 열린 문틈으로 나는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상전파라고, 편집 담당이 가장 죄가 크니까, 나만 도망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 뒤로 형을 본 일은 없다. 형을 잡아간 헌병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죄목으로 잡아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수년 뒤에 뭣 때문에 언론이 통제되니 신문이 검열되었다느니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짧았던 10년 속에만, 말이 없고 발걸음이 조용하던, 나이 많은 형으로 기억될 뿐이다.
최씨는 쉽게 슬퍼한다. 오늘 아침에는 교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을 보고 슬퍼했다. 그들이 발랄했기 때문에, 그리고 곧 그들의 젊음이 탁하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젊음이라는 것의 덧없음에 대해 사유해보기도 전에 가로수를 보고 슬퍼했다. 그것이 도시계획에 의해 규칙적인 거리를 두고 일정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인위성과 무위자연에 대해 저울질을 해보기도 전에 하늘에 구름이 너무 많아서 슬퍼했다. 이쯤 되니 최씨는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슬펐다. 그러나 딱히 논증할 것도 없었다. 슬픔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최씨의 뇌에 총알파편처럼 박혀있었고, 딱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말한 일이 없다. 애당초 서술이 불가능하다. 운명이려니 싶어서 괴로운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과 존재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으면 모를까, 애초에 그런 통찰력이 있다면 슬프지도 않지 않을까. 이런 슬픔은 일종의 장애가 아닌가 싶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정신의 장애 같은 것 말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날씨가 추웠다.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었다. 물론 어쩐지 슬픈 심상이 되었다. 겨울의 초입은 세계의 냄새 자체가 슬픈 뉘앙스를 풍긴다. 생명이 절멸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데 최씨는 그런 발상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렇다면 여름의 냄새는 슬프지 않은가, 단연 슬프다. 그 생명이 부풀어 터져 오르다가 부패하는 냄새도 슬프다. 하지만 겨울의 이 무기물로 공기가 가득 찬 것 같은 냄새도 슬프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퍼했다. 행성 자체가 슬픔으로 가득 찬 것 같다고 조용히 슬퍼했다. 골목으로 들어서 최씨는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피울 때는 슬픔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폐에 독을 밀어 넣을 때는 슬프지 않다니, 그렇다면 생존자체가 슬픈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삶의 구조가 슬픈 것 같았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고, 너무나 오래된, 망각되지 않는 심상이고, 최씨는 결국 담배를 피우며 어두운 골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담배가 오래 타는 날이었다. 집의 현관 밖에 서서 여전히 남은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온갖 쓰잘데 없는 망상이 피어올랐다. 생각해보면 내 연배의 동료들은 이미 다들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거나 하다. 나는 평생을 혼자 살아왔구나. 그것도 늘상 슬퍼하기만 하면서. 빨갛게 타는 불똥이 시야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더욱 빨갛게 탔다. 집에 들어가도 물론 혼자다. 혼자 살기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나는 혼자 슬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벽지가 하얗다면 흰색에 대해 슬퍼하면서. 왜 흰색 벽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는가에 대해 슬퍼하면서 말이다. 최씨는 담배를 뻐끔대며 시야가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눈물이 난 것도 뭣도 아니었고, 분명한 것은 최씨의 정신 자체가 슬픔으로 구부러지는 것이었다. 최씨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얼마 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늙은 채로 홀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슬픔이 하늘이 파란색이어서 느꼈던 슬픔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노인이 된 채 혼자 사는 현실도, 들고양이가 새벽에 울어서 느꼈던 슬픔과 다를 것 없었다. 담배는 이미 다 탔다. 최씨는 교묘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평생 슬퍼하기만 하면서 살아왔으나, 어쩌면 말이다, 나는 사실 살며 단 한 번도 제대로 슬퍼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 나의 삶을 이토록 지배해왔던 심상은 무엇이었을까. 다 탄 꽁초를 입에 멍하니 문 채 최씨는 한참을 현관 앞에 서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마음도 어딘가로 뒷걸음질 칠 마음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최씨는 한참을 서있었다. 계절은 여전히 겨울의 초입이었다.
준영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계속 반복해서 네팔에서 사온 보리수 염주의 알을 세고 있었다. 몇 번을 세어도 107개나 109개가 될 뿐 도무지 108개라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 잡상인이 만들 때 108개를 정확히 넣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계속 세고 있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바닥은 따뜻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백수로 지낸 지 5년 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 5년 째. 5년 내내 되풀이한 문장은 다자이 오사무의 그 유명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였다. 무엇이 그리 수치스러웠는지 명확하게 기억나는 바는 없지만, 여하간 수치스러웠다. 단 한 푼도 벌지 않고 살면서도 겨울엔 바닥에 보일러가 돌아간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가끔 친구들이 부르면 무상으로 술을 얻어 마시는 것이 수치스러웠고, 취하면 기분이 드높아져 다음날 아침이면 후회할 짓을 저지르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준영은 방바닥에서 공연히 발을 까딱거리며 48개째의 염주 알을 세고 있었다. 5년 전 네팔여행에서 사온 물건이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 또한 곧바로 고통이 될 생각이라 후회스러웠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대상이 있다. 5년 전에 준영의 인생에서 떨어져나간 사람이다. 그녀가 준영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짧은 듯 길었던 2년간의 연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쓸모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때의 일은 수치스러울 일이 없었고 준영은 항상 헛헛했던 28년간의 삶도 그녀를 만나려고 있었던 삶이었거니 했다. 헛헛했던 삶. 참으로 얻을 것도 없는 세상에서의 삶이었지. 애당초 이 세상에서 얻긴 뭘 얻는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말이다, 금강석을 찾겠다고 바다를 체로 뜨는 일 같은 것이 세상살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좀 제쳐두고, 그 2년간은 정말로 세상이 온통 황금이 되어 빛나는 것 같았지. 수치나 후회도 전부 철폐되어 부서지곤 했지. 네팔에 갔던 일을 지금까지도 도무지 가치판단 할 도리가 없다. 애당초 그녀를 만났던 것이 사찰에서였고, 28세의 준영은 출판사에서 도서 디자인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녀는 미대를 나와 탱화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어 눈이 맞은 거야 온갖 이유나 인연이 있었겠지. 만날만 했으니 만난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사랑이란 것에 빠졌던 일은, 그것이 도대체가 그럴듯한 일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여하간 보석의 반짝임 같은 2년이기는 했다만은. 결론은 말이다, 그녀는 네팔의 산사들을 함께 돌아다니다가 불연이 닿았는지 법과 사랑에 빠졌는지, 준영은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오롯이 혼자였다. 연인이 사찰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미는 것은 도무지 보지 못하겠고, 준영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잃을 것은 전부 잃는 것이다. 애당초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멈추자 회색과 잿빛의 먹먹한 광경이 되돌아왔다. 도시의 구석에서 그 광경을 마음에 새기는 와중에 직업도 잃고 무엇이고 잃어버렸다. 정확히 무얼 잃어버렸는지, 언어로 나열하기는 힘든 일인데 무엇이고 다 잃어버렸다. 흘러온 삶은 그야말로 수치가 되어 비수처럼 꽂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벽에서 몸을 날릴 만큼 대단한 좌절까지도 아니었다. 그저 의문스러운 것은, 5년 전인지 35년 전인지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은, 나의 작은 마음은 어디에 있나. 그걸 찾으면 남은 삶에 거리낌이 없을 터인데. 몇 백번을 더 세어야 이 염주 알은 108개가 될까.
8월 26일. 오늘은 김가네에서 사온 김밥이 터져있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한 줄에 4500원이나 하는 김밥이 포장될 때부터 터져있다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모두 사회인 실격이다. 김밥집에서 터진 김밥을 파는 사회 따위 애당초 없는 게 낫다. 내가 돈이 썩어 넘쳐서 한 줄에 4500원 하는 김밥을 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 김밥이나 먹을 셈이었으면 한 줄에 1000원하는 김밥으로 족하다. 김가네는 김밥 전문점이다. 김밥 전문점이면 김밥을 마는 사람도 김밥 전문가여야 한다. 동네 아줌마 데려다가 김밥 말게 해놓고 김밥 전문점이라고 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이따위 상황이 길마다 펼쳐져 있는 것이 현실 사회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것이 인류가 5천년에 걸쳐 만들어낸 문명사회다. 엿이나 먹으라지. 생각해보니 오늘은 한 일이 김밥 사온 것 밖에 없다. 오후 3시 쯤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잘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매일이 이런 식이다. 어쩌면 그래서 터진 김밥에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일 수도. 당장은 수중에 돈이 좀 있다. 그래서 김가네에 가는 사치도 부렸던 것인데, 결국은 이 꼴이다. 망할 자식들, 어차피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했다면 김밥이 아니라 공깃밥을 샀을 거다. 모두들 책임감이 결여되어있다. 엉망진창으로 사는 놈들뿐이다.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을 보면 신은 인간들이 퇴폐와 향락에 좀 젖었다고 불벼락을 내리던 놈이다. 그런 놈이 지금 세상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만약에 있다면 분노조절장애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서 불벼락을 못 내리는 것이겠지. 내일도 엿 같은 날일 것이 분명하다. 다만 김가네에는 가지 않겠다. 그럼 터진 김밥을 돈 내고 사먹는 엿 같음은 겪지 않아도 되겠지.
8월 27일(새벽). 맞은편 건물의 늙은 부부가 또 지랄이다. 저 영감탱이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항상 새벽 1시 30분만 되면 지랄병이 도진다. 아마도 밖에서 술을 먹고 그때 들어오는 것 같다. 나이는 잘 모른다. 사실 얼굴도 모르지만 목소리로 보아 70대는 되었을 것이다.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술에 꼴아 자기 마누라한테 쌍욕을 하는 게 저 영감의 취미다. 왜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렇게 마누라를 증오하면 차라리 칼을 들고 한바탕 한 뒤 9시 뉴스에라도 나오든가 말이다. 마누라라는 할망구도 똑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물론 제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감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창문을 통해 들리는 두 미친 노인들의 육두문자를 듣노라면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닌 것 같다. 지들끼리 쿵짝이 맞아서 같이 살기 시작했을 것인 인간들이 서로에게 외쳐대는 욕설은 그야말로 부모 죽인 원수끼리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다. 저 늙은이들에게 자식이 있을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아마 자식이 있다면 그것도 똑같이 미쳤을 것인즉 이 소음공해는 결국 자식이 노부모를 죽이는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다. 30분 쯤 지나면 결말은 언제나 똑같다. 너무 술에 꼴아 고래고래 욕설을 외쳐대는 게 지치면 영감탱이 쪽이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마지막으로 <내일 아침밥을 해둬라>고 하고선 더 이상 짖어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남자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할망구는 자빠져 자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편에게 10분 정도 ‘개새끼’, ‘시발새끼’ 고함치다가 똑같이 조용해진다. 저것들은 죽어야한다. 만일 누가 나한테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난 저 노망난 늙은이들부터 언급한 뒤에 나머지 69억 9천만여 명의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가끔 ‘늙으면 죽어야지’하며 신세 한탄하는 늙은이들이 있는데, 내 맞은편 집 노부부에 대해서라면 제발 좀 추잡스럽게 계속 살지 말고 죽어줬으면 한다. 스스로의 삶이 수치스러운 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남의 손에라도 죽어야한다. 제기랄, 인간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추하고 더럽고 그런 주제에 끈질겨서, 말하자면 마치 서로 피를 빨며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거머리들 같다. 지금은 탄탄하고 잘나 보이는 인간들도 애초에 근본은 모조리 폐기물덩어리 같아서, 늙으면서 그 유독물질이 점점 피부 가까이 퍼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보기에도 벌레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덕분에 오늘도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개 같은 기분이다.
8월 27일. 오늘은 하루 종일 논문을 썼다. 새벽에 있었던 기분 더러운 소음 때문에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다가 맨바닥에서 잠들어, 오후 늦게 깼다. 논문은 인간의 다면성을 전제로, 개인이 타인을 얼마나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꽤 잘 진행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완성된다고 한들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논문을 쓰면 신문의 칼럼란에 투고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신문을 읽어보면 칼럼란에는 별 지적장애인이 쓴 것 같은 글들만 가득한데, 그런 것들이 버젓이 게시되어있다. 중요한 건 그런 지적장애가 있는 논평들의 저자가 죄다 교수나 박사, 혹은 정치인 등등이라는 것이다. 내 학력은 중졸이다.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쳐들어간다고 한들 편집부 입구에서 되돌려 보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신문사나 출판사에 투고해본 일이 없고, 집안에는 나밖에 읽어보지 않은 원고들로 가득하다. 만일 누가 나더러 왜 논문을 쓰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단을 마무리 짓고 바람이 쐬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10분 정도가 걸렸다. 신경안정제를 어디다 뒀었는지 까먹었기 때문이다. 그걸 뒷주머니에 넣어두지 않으면 바깥세상에서 내 손발은 몹시 떨리고 심장은 빈맥을 일으킨다. 결국 찾았고, 난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곤란한 일이 생겼다. 지금은 여름이라 밤늦게까지도 행인들이 많다. 집 앞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마주쳤는데, 지나치고 나서도 그 여자가 계속 날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꼴은 그다지 모범적이지 못하다. 머리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산발이고 마지막으로 면도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제기랄! 저― 저 젊고 활기찬 육체를 가진 여자는 마치 도망 나온 산짐승이라도 보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겠지! 불안을 숨기기 위해 연거푸 담배를 피워댔지만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이, 팔의 각도라든가 손목의 움직임이라든가 머리의 방향 따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멍청한 여자가 날 보고 있건 어쨌건 그게 무슨 상관이기에! 그러나 나는 결국 발걸음을 빨리하며 골목의 어둠으로 뛰어들었고, 아무도 없고 이상한 소음과 침묵만 가득한 골목 끝자락에서 연신 허덕거렸다. 분노와 악의가 심장의 구렁텅이에서 부글거렸다. 그러나 고함을 칠 수도 뭘 어쩔 방도도 없었다. 애꿎은 담배꽁초만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뭐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발적으로 장작도끼니 적출이니 하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해가 질 무렵이라 가로수의 나뭇잎이 암청색에 주황빛이었다.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것들뿐만이 아니라 그 커다란 가로수도 결국엔 송두리째 시체가 되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그러자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이 지구가 수십억 년분의 시체더미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야 마침내 담뱃갑에서 계속 담배를 꺼내 무는 짓을 멈출 수 있었다. 아무튼 집에 돌아오자 오늘은 글이라도 썼다는 사실이 나를 좀 안정시켰다. 그러나 논문을 쓰면서 물마시듯 커피를 마셔댔기 때문에 밤이 지나 새벽이 되어도 안면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망할. 누가 제발, 내가 왜 안 죽고 살아있는지를 좀 알려줬으면 싶다.
8월 28일.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안 좋다. 빈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광과민이 심하고 몸의 균형 감각이 잡히지 않는다. 딱히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닌데 걸을 때 절뚝거리며 걷는다. 어느 근육에 힘을 줘야 몸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지를 까먹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건 그다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담배를 사는 데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다. 슈퍼마켓에서 담배를 살 때 커피를 함께 사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근처의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며 담배를 세 개비 째 피웠을 때 커피를 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슈퍼마켓으로 갈 수는 없었다. 물론이다, 이건 체면의 문제다. 만일 내가 슈퍼마켓에 다시 가서 담배냄새를 풍기며 멍청한 얼굴로 캔 커피 하나를 집어 든다면 계산원은 날 기억력도 나쁘고 주의가 산만한 바보로 알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빌어먹을 늙은 계산원 같으니라고. 그 40대 여자는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 머리를 하고 있다. 자기가 아직도 젊은 줄 착각하는 천치 같은 여자에게 몇 분 꼴로 슈퍼마켓을 들락거리는 인간으로 보일 수는 없다. 다른 마켓에 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내 집 주변에는 가게가 그리 많지 않다. 8분은 족히 걸어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커피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망할 계산원의 버러지 같은 노란 머리에 대해 성을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안압이 높은 것 같다. 빛을 쳐다보는 게 괴롭다. 광과민이 날 괴롭힌다. 화가가 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고흐의 소용돌이 화법은 이비인후과적 증상과 황시증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생각해보면 후세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병리적 증명을 가지고 미학을 논하며 감동한다는 것도 웃다 죽을 일이다. 오늘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다. 난 항상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미쳐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계단참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이 연립빌라의 통로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깨가 불쑥 솟으며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거리로 나가는 것 보다는 낫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그것이 진실인지 내 과민인지는 제쳐두더라도―을 느낄 때마다 뇌가 대각선으로 핑핑 돈다. 그런데 거리에 나가면 거의 3초 간격으로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계단참 하니까 말인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이 연립주택의 전셋집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서울에서 얻은 지상층이다. 집은 4층이고, 건물도 4층이 최상층이다. 계단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옥상창고가 나온다. 그런데 분명히 그 옥상창고는 더 넓고 지저분하며, 온갖 상자와 폐기물 따위로 가득한 공간으로 연결됐었다. 수십 년간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5cm는 내려앉은 미닫이 창문도 하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황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오늘 계단참에서 담배를 피우다 올라가보니, 옥상창고는 5평도 되지 않는 공간으로 사방이 꽉 막혀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평생을 반지하에서만 살았다. 옥상창고 따위 갈 일도 없었다. 다른 건물과 혼동한 것이 아니다. 내 기억이 잘못됐단 말인가? 이젠 뭘 믿어야할 지도 모르겠다.
8월 29일. 파(破)다. 파! 빌어먹을! 이 따위 논문은 도대체 무어하러 쓴단 말인가? 인간의 다면성을 전제한 개인이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의 일방성? 이 현학적은 타이틀은 도대체 뭐야? 나는 이걸 완성해서 누군가, 그러니까 독자나 평론가에게 기립박수라도 받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그건 끔찍하고 치졸한 일이다. 애당초 모든 화가는 닫아놓은 옷장 안에다가만 그림을 그려야 하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독방인 방음실에서 나오지 말아야한다. 인간들의 박수갈채는 한 인간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버린다. 가엾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할 줄도 모르는 콧대 높은 왕으로 만드는 동시에 어깨가 좁은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 병신 같은 수기는 또 뭐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면서, 문법과 표기를 딱딱 맞춰서 쓰고 있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래, 난 내 추악한 속마음을 알고 있다. 내 비열하고 치졸한 마음을 알고 있단 말이다. 만약 언젠가 어떤 독자가 이 수기를 읽는다면, 나는 그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감명을 주려는 비겁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야말로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 혈안이 되어있는 노예다! 나 스스로를 가둬야한다. 순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그렇다면 더욱 날 가둬야한다. 세상으로부터 날 가두고, 집으로부터도 날 가두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날 가둬서 차라리 길거리에 흩날리는 신문지 같은 존재가 되어야한다. 마침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이런 시기에 한강 굴다리 밑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 아니 보다 더운 계절이었던 것 같다. 침낭 한 장과 참치캔만 가지고 한 달을 살았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인간애를 느낀 계절이었다. 굴다리에 스프레이 캔으로 낙서를 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푼돈을 주거나 여러 가지를 묻기도 했었다. 아마도 내가 적개심 없이 인간을 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가진 게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 생존하려는 욕구조차 없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8월 30일. 창문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아침 8시만 되면 프레디 머큐리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부르는 미친 새끼가 있다. 프레디 특유의 창법을 구사하면서 더럽게 못 부르는데, 매일 아침 8시만 되면 그 지랄을 시작한다. 분명히 사람들의 아침 시간을 방해해야겠다는 숭고한 결심이라도 한 것일 터다. 오늘 난 안 그래도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친 상태였기 때문에 몹시 짜증이 났다. 도대체 저 아파트의 관리인은 뭘 하는 것이란 말인가. 저 망할 새끼도 분명 에이즈로 죽고 말겠지.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내 치료비를 끊겠다는 것이다. 난 항의하고 싶었지만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이대로 병세가 악화되다가 병동으로 옮겨가면 좋겠냐는 말이나 간신히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굉장히 화를 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치료비가 많이 들어 가냐는 것이다. 나도 모른다! 내가 병에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일부러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는 병에 걸린 것이냐는 말투였다.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말투는 내 짜증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어머니의 부모로서의 의무와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단어만 사용해서 그녀를 비꼬았다. 그녀는 완전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덕분에 나도 정말로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휙 사라지면 그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욕망은 우울증이 정신분열증으로 진화할 때 쯤 사라졌다. 죽고 싶다고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지만 사실 죽을 마음도 없다. 그냥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을 스스로에게 제시나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절망했을 때에나 상황이 나빠 보이는 것이지, 사실 상황은 단 한 번도 나빠진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코미디의 법칙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웃음이 발생하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온 세상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이 실소나 키득거리게 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비극 같은 건 애당초 없다. 어머니가 치료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못할 것이고, 그럼 나는 내 희극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도 없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이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보다 더 높이 받들고 있는 돈이라는 것도 한강 굴다리에서의 생활에 의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굶으면 되고 굶어 죽게 되면 죽으면 된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는데 내가 굶어 죽는 아침에 저 빌어먹을 가짜 프레디 머큐리가 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 그 새끼 목구멍에 칼집을 내고 죽을 것이다.
8월 31일. 도무지 책을 못 읽겠다. 대략 일 년 전쯤부터 그렇다. 활자를 못 읽겠다는 건 아니다. 활자는 정확히 시각을 통해 내 뇌수에 새겨지고 있다. 문제는 내 인간혐오증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학술서나 논문 같은 건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과 시를 못 읽겠다. 소설에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작가의 의도야 어쨌건 간에,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럽다. 나의 비대한 상상력도 한 몫 하는 것이다. 서술에 나오는 인물의 대사라던가 행동, 그들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들을 읽게 되면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인물의 아주 정밀하고 지엽적인 부분까지 떠오른다. 그러면 어느 인물이고 상관없이 멍청하고, 추하고, 기만적인 것으로 보여서 날 분노케 한다. 그러면 몇 줄인가를 더 읽다가 그냥 책장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삶 따위 전혀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이 현실에서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보이는 수십 개의 마스크들이든,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든, 난 인간의 삶 따위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 같이 모순덩어리에다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지도 못한다. 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설령 화자가 <인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 된다. 언제부턴가 지하철 플랫폼에 전업 작가부터 아마추어들까지 그들이 쓴 시가 중구난방으로 붙어있는데, 제발 좀 그만해줬으면 한다. 나는 그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싶을 뿐이지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간찬미나 읽으려고 홈에 들어간 게 아니란 말이다. 사실 내가 아직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는 시인이 둘 있긴 하다. 그것은 랭보와 로트레아몽이다. 랭보가 10대 후반에 절필했다는 점이나 로트레아몽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반란과 퇴폐와 증오를 노래한다는 것이다. 19살 때까지 쓰인 랭보의 시들은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발악이고 불경하게 악쓰는 구절들이다. 로트레아몽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아직도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이게 정말 시학에 들어맞기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맥락 없는 저널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내가 로트레아몽에 몰입하게 된 건 첫 부분의 몇 소절이었다. <보름 동안 손톱이 자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활짝 열린 눈을 가진, 윗입술의 위에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어린아이를 침대에서 난폭하게 끌어내려, 그의 아름다운 머리털을 뒤로 쓸어주면서, 그의 이마에 그윽하게 손을 내미는 체하는 것, 아, 그것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 다음, 그가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긴 손톱을 그의 부드러운 가슴에 박아 넣는다.>, <장밋빛 얼굴의 어린애를 껴안을 때면, 그는 면도날로 그 아이의 뺨을 떼어내고 싶어 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에서 구원을 얻을 때 나는 이 두 시인에게 구원을 얻었다. 그들이 쓰는 것은 아름다운 시였지만, 분명히 언어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특히 로트레아몽은 내게 <굳이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내 온 정신을 미라처럼 칭칭 감고 있던 죄책감과 도덕에의 강박이 일순간에 다 불타 없어졌다. 랭보가 데뷔한지 2년 만에 절필한 것도 굉장한 얘깃거리다. 그는 애초에 남들이 말하는 시인이 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미학을 찾지만 일단 그걸 찾아서 표현하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다. 샐린저는 이제 글쓰기가 자신의 종교가 되었다고 한 뒤로 단 한 권의 책도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다. 랭보가 왜 아프리카로 갔을까? 그야 유럽대륙은 너무 춥고 공기도 씁쓸하니까. 그는 아마도 병에 걸려 태양에 타죽어 버리려고 인류의 고향으로 간 것일 터다. 젠장,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이 수기에서 대체 내가 누구에게 뭘 가르치려는 거지? 나는 전두엽 절제술이 필요하다. 내 라면사리 같은 뇌 쪼가리에서 <독자>라는 개념을 완전히 삭제해야한다. 18살 때 시학선생님이 말하길 내 최대의 비극은 스스로 작가이며 독자이며 평론가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끝나지를 않는 저주였다.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 버려진 다육식물이 되고 싶다. 그러면 난 누가 나에게 물이나 비료를 주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공기 중의 수증기나 빨아먹으면서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날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2년 전 즈음일 거다. 동두천의 바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다가 어떤 금발의 키 큰 흰둥이 미군이랑 시비가 붙어서 쫓겨났을 때,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로 들어갔는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몰라도 웬 소주병이―아직도 내가 그 텅 빈 소주병을 왜 갖고 다녔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날 난 소주를 안 마셨다. 바랑 클럽에서 럼주만 오라지게 마셨다― 손에 들려 있기에, 스크린 도어에 붙은 어머니가 어쩌고 자신의 4살 먹은 딸의 웃음이 저쩌고 가을에는 코스모스인지 치매 걸린 하마 궁둥인지가 피어나네 하는 시민참여작 시에 냅다 집어던졌다. 그때야 그 멀대 같은 흰둥이한테 맞은 광대뼈가 시큰거려서 자지러지게 웃는데 달려온 공익요원들이 날 경찰서에 처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적으로 해결하자며 빗자루와 청소도구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깨진 유리병들을 다 담아 치운 뒤에 그 과체중 요원들에게 넘겼다. 난 경찰 따위는 딱 질색이다. 경찰은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혐오하는 인종인데, 첫 번째로 혐오하는 건 시비만 털리면 바로 경찰 찾는 습관이 있는 겁쟁이 새끼들이다. 아무튼 그 과체중 요원들은 적당히 나태했고 적당히 사람 좋은 것들이었다. 내가 저지른 걸 내가 수습했으니 가 봐도 된다는 것이었다. 난 나보다 한참 어린, 스무 살이나 처먹었을까 싶은 복부비만청년들―평발이나 허리디스크였을 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는가―에게 무슨 연극하듯이 과도한 감사를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지하철 안에서 <사노라면>을 열창했던 것 같다. 씨발.
9월 1일.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은 그리도 간단했다. 술을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난 지금 5잔의 브랜디 덕분에 홀든 콜필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지도 않는다. 완전한 관조자의 입장으로 저 문제아의 뇌 속을 헤집어보고 있다. 써니! 써니라니! 어쩌면 그렇게도 창녀 같은 이름이란 말인가! 나는 내 시상하부에 알코올을 똑 떨어트리고 써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알비노증이라도 걸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하고, 골격이 다 튀어나오는 뉴욕의 하층 창부. 눈에는 비웃음이 들어있다. 자신을 사는 남자들 모두를 비웃으면서 다리를 벌리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써니는 호텔 옥상에서 온갖 멜랑꼴리한 자기모순 투성이의 감정에 사로잡혀 몸을 투신하겠지. 천치 같으니라고. 사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자본주의가 적용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천치가 된다! 도도하게 외투를 입고 푼돈 5달러를 받아든 채 방을 나가는 써니. 써니. 나는 당신을 내 청춘의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다. 쁘로하르친 씨도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다. 아무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갖지 못하다가 왜소하게 죽어버린 노인을 나는 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는 것이 떠오른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양반이었지만 더 술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겨울 빙판을 밟고 넘어져 골반 뼈가 부서졌었지. 그 뒤로 할아버지는 운신도 못하면서 점점 더 괴상한 인간이 되어갔다. 간호사들이 채혈을 하러 오면 이 마녀들이 자기 피를 갖다 팔려고 한다며 발악을 했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어떻게 됐었던 건 아닌가 싶다. 할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 오로지 하루에 한 시간 정도뿐이었는데, 오후 8시가 넘어가면 본래의 입을 꾹 다문 주철로 만든 인형처럼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어렸던 내가 다가가면 입술이 납으로 되어있어 몹시 움직이기 어렵다는 듯이 힘겹게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 쁘로하르친 씨처럼 침대에서 거액의 돈이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 잠깐. 술에 취했더니 아무 관련도 없는 얘기가 계속 나오잖아. 제기랄, 난 분명히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술 따위를 처먹는데 돈을 썼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지독히 미워질 것이다. 담배야 생필품이라지만 술은 그렇지 않다. 책 따위 것, 안 읽으면 어떻단 말인가. 속이 부대낀다. 잠깐 구토를 좀 하고 와야겠다. 알고 보니 오늘 먹은 것이 브랜디 다섯 잔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 구토를 한 변기물이 너무 깨끗해서 성수로 써도 될 정도다. 뱉거나 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침을 뱉든 담배연기를 토하든 구토를 하든 대소변을 배출하든 눈물을 토하든 땀이나 정액을 각 기관에서 토악질해버리든 내부에 있는 것을 바깥 세상에 내다버리는 것은 뭐든 간에 기분 좋은 일이다―한 가지 절대로 경험해볼 수 없는 예시가 있는데, 그건 출산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대다수의 여성들이 출산 직후에 웃긴 하더라―. 몸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난 단식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내장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면 해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한 적 있다. 애당초 인간의 몸은 내부에서 뭔가를 너무 많이 만든다. 자체 생산도 정도가 있는데 심지어 음식물까지 아가리로 처넣으니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은 고물 태엽시계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 체질상 쉽게 비만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거야 알고 있다. 누구 말처럼 하루 한 끼만 먹는데도 뒤룩뒤룩 살이 찔 수도 있겠지. 세상은 신비로우니까. 그러나 나는 고도비만인 인간이 내 눈앞에 있으면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도대체 뭐가 부족하기에? 이미 인간이 이 행성에 70억 명이 넘게 있는데 왜 각 개체까지 부피를 늘리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냐. 그렇게까지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 이 사막 한복판에 버려놔도 40일간 자가 지방연소로 살아남을 대단한 자식아. 다른 게 아니라 인간들이 그렇게 가시적으로 보일 정도로 생명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짜증을 돋운다. 당신들이 자궁 속에서 어머니 내장 걷어차면서 놀던 시기부터 니들 뒤통수에 붙어있던 게 바로 다름 아닌 죽음이다. 근데 그 오래된 친구와 만나기가 싫어서 고기 가는 기계마냥 연료를 아가리에 처 붓고 있단 말이냐. 아니 그래, 솔직히 내가 고도비만 인간들을 보기만 하면 짜증이 나서 말도 안 섞고 도망쳤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내 추리와는 달리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숭고한 목적을 위해 세포 총량을 늘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글쎄, 뭔지는 모른다. 계속 체세포를 늘리다가 분열한다든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난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기껏 깨끗하게 만들어놓은 내장을 더럽혀야만 하냐고 쌍욕을 하면서 먹는 인간인데. 씨발! 모른다. 애당초 화만 지랄같이 나지 관련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대통령이면 전 세계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무기를 개발하라고 지시할 텐데. 인류재생산이라니, 크로넌버그가 고안한 괴물들보다 더 추악하게 생긴 새끼들이 재생산은 무슨 얼어 죽을 재생산. 취한 것 같다. 자야겠다.
9월 2일. 전화 때문에 오후 2시에 깼다. 일어나자마자 끔찍한 기분이었다. 첫째는 숙취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망할 놈의 전화기 용도 때문이다. 난 전화가 올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다. 굳이 말하자면 어렸을 때 어머니 휴대전화로 포르노를 봤는데 통화료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전화벨이 울리는 내내 그 기분이다. 아무튼 발신인은 병원의 간호사였다. 올 때가 지났는데 왜 오지 않냐는 것이었다. 내 대답이 걸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모르겠다’는 말이 튀어나간 것이었다. 이유야 많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치료비를 끊었으니 이제 병원에 가려면 내가 가진 돈에서 할애해야하는데, 애당초 이 돈은 하루 한 끼 먹고 물만 마셔도 한 달이면 없어질 돈이다. 그런 돈을 양주 먹는데 쓰다니, 내가 미친놈이지. 여하간 돈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생각해보니 없다. 이유가 많지 않고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이유였다. 빌어 처먹을 놈의 정부는 지난 정권 때 두 배로 올린 담뱃값을 내리겠다고 공약을 걸어두고서는 도무지 실현할 생각도 안 한다. 커피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선 내가 할 얘기가 좀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10년 전만해도 밥 먹고 숭늉이나 처마시던 인간들이 도대체 단체로 무슨 지랄병에 걸렸는지 케냐 100%가 어쩌고 과테말라 안티구아가 어쩌고 에스프레소에서는 산미가 돌아야 한다는 둥, 아무래도 대한민국 전역에 뇌랑 관련된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돈이 썩어 넘쳐서 지 입으로 들어가는 게 사향고양이 똥인지 사향고양이 오줌인지도 모르면서 사치 부리고 있는 척 좀 해보고 싶다는 거야 내 알 바 아니다. 문제는 그 천치들 때문에 한 캔에 300원 하던 캔커피가 지금 1000원 대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당당히 말하겠는데 난 커피에서 바닷물 맛이 나도 상관없다. 난 그저 300원으로 카페인 60mg을 사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브라질 본토에서 공수를 해왔건 옷장 안에 백열전등 매달아놓고 키웠건 쥐똥만큼도 상관 안하니까 내 작업을 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카페인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 하루에 18알 씩 집어삼키는 약들이 날 인간으로 붙잡아놓고 있다는 거야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들은 사람을 정말 멍청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투약을 시작했을 때는 3시간이나 꼼짝도 않고 빈 페이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일도 있다. 머릿속에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입술이 바싹 말라서 하루에 도대체 몇 리터나 되는 물을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수면시간을 하루에 20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쯤 되면 이미 치료목적이 아니라 사고나 치지 말라고 약으로 재워두는 격이다. 물론 투약 초기의 얘기고, 지금은 내성도 어느 정도 생겨서 별 문제는 없지만…… 커피와 담배가 아니면 작업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난 커피와 담배를 이용해서 나름대로 약물치료와 작업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 아무튼 돈이 없고, 간호사한테는 모르겠다고 말했고, 당연히 간호사는 되물었다. 모르다니 도대체 뭘 모르겠냐는 거냐고.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지 어떤 걸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걸 어떻게 아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영원순환 같은 헛소리를 할 기분도 아니었고, 그저 당분간 병원에 못갈 것 같으니 담당의에게 메모나 전해달라고 말했다. 간호사는 끈질겼다……. 지속적인 치료가 이어지지 않으면 위험한 병이라는 걸 환자분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갑자기 투약을 끊으면 금단증상 때문에 ER에 실려 갈 수도 있다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돈이 없다니까 이 아가씨야. 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화가 나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달력을 보니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그래서 어제 전화를 하지 못한 거로군. 얼마 전에 쓰다가 내팽개친 논문이 마구 구겨진 채로 발치에서 뒹굴대고 있었다. 돈……. 애당초 이런 걸 쓰기 시작한 이유가 뭐더라? 살면서 한 번도 글 팔아서 돈 벌어본 일이 없는데. 아, 아니다. 두 번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작은 이모가 대학원생이었는데, 바쁘다고 논문 대신 써주면 오만 원을 주겠다기에 써준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스무 살 때, 친구―그 때는 나도 친구가 있었다―가 어린이용 학습 애니메이션 감독 보조였는데, 스무 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안하고 약에 쩔어 굴러다니기만 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시나리오 일감을 줬던 것이다. 3시간 만에 시나리오 세 편을 써서 15만원을 번 굉장한 일이었다. 나중에 방영이 됐을 테지만, 보진 않았다. 난 살면서 TV를 가져본 일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나서 뭘 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아무것도 안했다. 오후 9시까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눈으로는 굴러다니는 원고 조각을 보고 있었다. 달리 뭘 하겠는가. 그나마 지금 내가 이렇게 수기라도 쓰는 것이 살아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9월 5일. 집안이 난장판이다. 전자레인지는 앞 유리가 날아갔고, 냉장고는 충격으로 온통 울퉁불퉁하다. 그리고 내 주먹은 피멍투성이라서 원래 어떤 색깔이었는지 기억도 못 하겠다. 손뼈에 금이 간 것 같다. 타자를 칠 때 중지가 움직일 적마다 싸한 통증이 느껴진다. 9월 3일에 어머니가 집에 왔었다. 예고도 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널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민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애매하다. 머리에 피가 몰리면 항상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이 들 때쯤엔 울부짖으면서 집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깨부수고 있었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왔던 걸까? 그러고 언제 돌아간 걸까? 깨진 사금파리들 위에 엎어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리조각을 밟은 채로 돌아다녔는지 방바닥은 핏자국 투성이였다. 그게 9월 3일 저녁이었다. 그 뒤에 나는 서랍을 뒤져 남은 수면제를 싸그리 모아 삼키고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방 안에 자빠졌다. 정신의 사지가 잘려나가는데 13분이 걸렸을 것이다. 빈속에 약을 처넣으면 항상 딱 13분이 걸린다. 그리고 관절염 걸린 개새끼처럼 사지를 뒤틀다가 헛소리를 한다.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날 리가 없지. 다만 벽지에다가 피로 뭐라고 써놓았는데, ‘까마귀는 부자 위에만 난다’라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개소리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깨보니까 9월 5일 오후 3시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차피 뭘 하든 패배자의 넋두리가 될 것이고, 내 삶이란 세상에게 민폐나 끼쳐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천 년 정도 잠이나 잤으면 싶은데, 이미 이틀이나 자버려서 졸리지도 않다. 만일 정말로 천 년을 잘 수 있으면 깨어난 뒤 이름이라도 바꾸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할 텐데. 시야가 뿌옇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도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질 않는다. 아마 수면제의 부작용일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래도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발바닥에 난 자상에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고 주먹에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냥 하는 것이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그 이유라는 게 언제나 불명확하긴 하지만, 존재하긴 한다. 그리고 앉은 채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아주 개판이었다. 뭘 어떻게 손을 댈 의욕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 전자레인지는 못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그래, 아마 어머니는 이렇게 될 걸 원하고 내 집에 침입한 거겠지. 절뚝거리며 계단참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나뭇잎들은 아직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곧 낙엽이 될 것이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옥상창고로 올라가, 분명 철제문이 있었던 벽을 두들겨보았다. 그냥 벽이었다. 허탈한 기분과 짜증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손에는 기름때와 짙은 먼지가 묻었다. 오늘은 잠을 자지도 못하겠지. 약도 없고, 이틀이나 죽은 듯이 기절해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기를 쓴다. 앞날은 언제나 불행 투성이다. 현재가 비참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토요일에 약이 하루치 밖에 안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무너지고 자신이 인간으로 있을 수 없으리라는 극악한 공포에 휘말려버리는 인간이,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어떻게 되어가든 손을 놓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기록이나마 해가면서.
9월 6일.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평소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겨있던 사고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튼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통상 인간의 길은 믿음으로서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부렁이다. 인간의 길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당장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발끝에서 땅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불신함으로서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다. 하늘에서 뜬금없이 벽돌이 떨어져 머리에 맞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을 불신함으로서 거리에 나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상과 신념을 갖는 게 아니라, 세계에 포화된 무수한 가능성을 불신하고 그 중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고르는 것으로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누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가능성이 0%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에서부터 불신한다. 어느 날이랄 것도 없이 예고도 준비도 없이 죽음이 들이닥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은 불신의 생물이다. 공포와 혼란을 피하는 방법으로 제딴에는 믿음과 사상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로지 불신뿐인 것이다. 세계는 마구잡이다. 세계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하늘에서 창이 쏟아지고 수천만 명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사지가 찢겨나가는 마구잡이인 곳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부 받아들이기에 인간의 영혼은 너무도 좁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도 않고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가능성을 신뢰하는 사람을 정신병질자 취급하기까지 한다! 축약하여 하나의 상황에 천 개의 가능성이 있다면 인간은 999개의 가능성을 불신하고 한 개의 가능성을 신뢰함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신념이나 사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나 수학적으로나 이것은 불신의 법칙이다. 하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니 신념의 힘이니 지껄이는 것들이, 속을 들여다보면 불신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생존의 기본이다. 어떻게 하면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인간존재>가 아니라 <현상>이 되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습으로 현세에 일렁거리는 현상. 그러면 그 스파크나 불똥 같은 존재는 자연히 세계에 귀속된다. 바로말해 혼돈에 귀속되는 것이다. 사상이나 신념을 가질 필요도, 욕망이나 의지를 가질 필요도 없다. 현상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휘말려 다니며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사망이 아니라 열적사라 불리어야할 것이다. 여하간, 그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길거리의 벽돌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허연 대낮에 반바지를 입은 어떤 늙은이가 지나갔다. 나는 그 늙은이의 다리를 보자마자 구토할 뻔 했다. 백색으로 완전히 탈색되고 삐쩍 말라 혈관과 근육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털 하나 나지 않은 삐걱거리는 다리. 병든 다리. 늙은 다리. 저런 다리가 생몰하는 인간의 말로라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왔다. 늙은이는 절뚝거리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 나무토막 같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말이다. 나는 늙음에 대해서 화가 치솟았다. 늙음에 대해서 화가 나자 마찬가지로 젊은 것들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젊은 것들은 마치 자신의 탄탄하고 부서지지 않은 육체가 영원할 것처럼 과시하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러나 눈앞에 떡하니 놓인 증거를 보고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얼마나 멍청하면 자신의 다리가 곧 가죽이 다 늘어지고 뼈밖에 남지 않은 괴물 같은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인가? 젊음이 영원하리라는 듯이 뽐내고 다니는 것들을 보면 분노가 내 시야를 하얗게 만든다. 차라리 내가 알려주고 싶다. 건물 철거용 해머로 그 살과 뼈를 전부 다져 손에 그러쥐고, 눈앞에 내밀면서 <봐라, 이게 네가 갖고 있는 전부다>라고 설교해주고 싶다. 생명은 슬로우 모션으로 폭발하는 폭탄처럼 인간을 추악하게 만들어간다. 피부는 자글자글 주름이 생기고 독버섯처럼 반점이 피어오르며, 곧 숨조차 원활하게 쉴 수 없게 되고, 스스로 걷지 못해 장님처럼 지팡이를 휘둘러대야 한다. 그러면 이제 병이 코와 입으로 스며들어와 내장을 적시고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간다. 차마 눈뜨고 못 볼 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의 전부다! 바들대며 절벽 끄트머리에 들러붙은 버러지처럼 되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생명의 풍성함을 믿는 것들에게 저주 있으라! 아니, 내가 저주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저주를 품고 태어났다. 어떻게든 추악하게 추락해 갈 것이다. 그 후에는 소멸뿐이다. ‘억’ 소리조차 못 내고 풀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곧이어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는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가족과 함께 살 때 명절에 벌초를 하는 것이 정말이지 싫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잔디를 심고 잡초를 뽑은 그 봉분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다 한들 흙과 박테리아에 분해되어가는 뼛조각뿐이다. 도대체 왜 이미 죽은 몸뚱어리에 신위神位를 주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은 자와의 추억에 술을 올리고 싶으면 방구석에 틀어 앉아 하면 될 뿐이다. 나는 지금 인간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뻔한 얘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은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 몰래 무덤을 파 관을 들어내어, 저쪽 계곡 어딘가에 갖다버리고, 나중엔 아버지와 어머니가 텅 빈 흙더미에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르는 꼴을 보며 비웃을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애당초 난 획책하는 것은 잘 하지만 무엇 하나 행동으로 옮긴 것이 없다. 나 역시 빌어먹을 쓰레기더미다. 남들의 비열을 비웃으면서 자신의 비겁 속에 파묻히기나 한다. 9월 2일부터 음식을 먹지 않은 것 같다. 이대로 이어나가야겠다.
벽 밖의 냉기가 거실까지 침범하던 날. 옷과 코트를 갖춰 입고, 분명 밖은 하얀 아침햇살로 가득할 날에, 내 다리는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소리 없는 구토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된 현관바닥은 차가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현관문이 100m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살.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한다고 목이 졸린 나이. 청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온 다리로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겁에 질린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힘이 풀린 다리를 밀며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기어간다. 폐부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찢고 싶었다. 울면서 엎드려, 되뇌었다. 내 집은 어디? 내가 누워 잠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지? 서랍을 뒤져 나온 것은 9알의 파란색 수면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정말로 악몽 같은 꿈이고,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나는 방법은 모른다.
꿈속의 꿈. 일요일의 할인마트에서 길을 잃은 아이. 다른 꿈. 아버지와 농구경기장에 가서 인파에 겁을 먹은 아이. 약간 시간을 뛰어넘어서, 훔친 술에 취해 도장 파는 칼로 가슴 가죽을 찢고 있는 이상한 아이. 주변엔 낯선 인파뿐.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된 근육과 끓어올라 흘러내리는 뇌수. 훔친 술을 한 모금 더. 끔찍한 맛이지만 정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왜. 왜. 왜. 그러나 대답해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은 절대 올려다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죄악으로 가득한 지상과 연결된 환각적인 그라데이션에 불과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현실이라는 또 다른 꿈. 시야가 부옇다. 얇은 이불 위에 엉망으로 구겨진 몸체. 코트를 입은 채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고,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손끝에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거품이 묻는다. 손가락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붙이는 데 고생을 했다. 연기를 뻐끔거리며, 흐린 눈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뜯어내서, 끌어안아줘. 담배연기는 좁은 방 안으로 퍼져가고, 냄새가 배고, 이곳을 악몽의 둥지로 만든다. 니코틴과 침이 섞인 액체를 입가로 흘린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답이 나올 리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답을 찾을 생각도 없이 하고 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니지, 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터무니없이 많은 가설들이 있다. 공허로 돌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마치 태어나기 이전에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자살하지 않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야. 어쩌면 내게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나로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위협.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섭다. 나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위액과 수면제와 침이 섞인 자국 위에 13개비의 구겨진 담배꽁초. 누군가 마구 현관문을 두드렸었다. 성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밖은 낮인가? 지하에 지어진 내 집에는 창문이 없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마구 현관문을 쳐댈 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 네가 찾는 사람은 없어. 이제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그래, 그 추운 아침에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렸을 때, 사실 나는 전부 무너진 것이다. 나라는 형상과 흔적이 전부 무너져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 찾아오지 마. 이젠 인간으로 있는 것도 무리니까. 누운 채로 토했다. 거품 낀 위액이 흘러나오고, 눈물도 강제로 밀려나오고. 이불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위장이 아프다. 그러나 밥을 먹을 수는 없어. 생존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그만둬야한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 노력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만 굶으면 생명력이 나를 제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때부터는 생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배가 부르고 목이 마르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성이나 인격 같은 것은 듣기에나 아름다운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존재의 주인은 오로지 생존하려고만 하는 처절한 본능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살기위해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외로움에 목을 졸라매는 일도 없게 되겠지.
<인간>의 책무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오른손의 손톱 세 개가 빠졌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어렵고 좁은 길로 가는 것. 오른쪽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온통 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됐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보상이 없더라도 <인간>은 어렵고 좁은 길을 헤치고 가야한다. 얼굴 반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스스로를 할퀴다보니 멈출 수 없게 됐다. 피나는 통증이 잠시라도 흐려지면 발이 제멋대로 부엌을 향해 뛰려고 한다. 오른쪽 시야가 붉다. 문뜩 탈수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불은 온통 피로 축축하다. 탈수가 아니라 빈혈인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앉았다. 며칠 만에 두뇌가 허공에 떴다. 세반고리관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욕지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장은 텅 비어서 약간의 위액 거품만 혓바닥 끝으로 밀려나올 뿐이다. 두 팔로 상체를 지지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곧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여 똑똑하고 듣기 시작했다. 시야는 여전히 혼란.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고,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 이상한 곡선들만 눈 안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뭣 때문에 이러고 있었더라? 나는 뭐지? 아, 온몸이 피와 체액으로 끈적끈적하다. 샤워가 하고 싶어. 샤워가 하고 싶어. 일어서려고 노력해봤다. 균형을 잡기 힘들어서 허리를 펴기도 전에 몇 번이고 넘어졌다. 한 번은 벽에 이마를 찧어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에 기절할 뻔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얼른 씻고 거울을 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원래는 거울 따위 일부러 피해 다니는데, 이제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트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피와 토사물과 담배꽁초의 진창 속에서 치매 걸린 노새처럼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기기 시작했다. 다리로 몸뚱어리를 밀면서, 문턱을 넘어, 냉기가 새하얗게 반짝이는 거실로, 그 위에 내 피를 덧칠하고, 그러나 아주 깜깜한 거실, 창문이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려 내 자멸의 둥지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이런 상황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은 나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나 한 명만 있어야한다. 아무도 내 알량한 연극무대를 보게 할 수 없다. 만일 관객석에서 당신들이 내 괴상한 연기를 보고 있다면, 난 즉시 무대를 취소하고 정상적인 각본을 짜올 테니까. 그러니까 관객은 비난도 비판도 그렇다고 호응을 해주지도 않는 목각 같은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마침내 화장실 문 앞에 죽어가는 구더기처럼 웅크려있는 이 관객은, 애당초 이 무대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거친 채찍 같은 운명에 등 떠밀려 억지로 배우의 눈구멍 속에 앉게 된 것이니까.
사촌 언니가 울고 있다. 아니, 곡을 하고 있다. 사촌 오빠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진땀을 빼고 있고, 저쪽에는 영정사진, 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큰어머니, 영정사진 안에서조차 그녀는 매사에 화가 난 표정이다. 곡소리가 점점 새되어지고 히스테릭한 비명소리로 바뀌어간다.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전혀 소속되어있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장면에서 나는 끔찍한 지루함을 느꼈다. 2년 전 나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 차이점은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사랑? 그래,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일상적인 단어 하나 능란하게 쓸 수 없게 되었지. 나는 여전히 동상처럼 서서 사촌 언니가 자지러지는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 무엇이 슬픈 걸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은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인간의 유한성? 상실이 반복되기만 할 뿐인 인생? 언젠가는 오고야 마는, 가을수확을 하듯이 낫을 들고 찾아오는 운명? 글쎄, 아마 사촌 언니의 <감정>은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겠지. 논리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입맛을 다시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걷기에 적합한 몸. 뛰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젊고 활기찬 몸. 검은 단화에 검은 양말에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위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장례식장의 야외를 종횡무진. 잘은 몰라도 아빠는 큰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다. 화장실 건물 뒤. 거의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머리칼을 가진 익숙한 중년남자. 그리고 그 앞에 이미 완전히 백발인 노년의 남자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아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 테지. 담배연기 자욱한 그 좁은 길목은 두 사람의 침묵을 위한 것이었다. 마치 벽이 둘러쳐진 듯,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중년남자의 얼굴은 아빠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은 아빠의 표정이 아니었고, 또한 그 표정은 2년 전에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었다. 흐린 눈을 가진 백발의 노인은, 아빠와 한없이 닮은 그 노인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공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슬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막연히, 공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안개로 장막이 쳐진 것 같은 광경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다급한 구두소리가 들려왔고, 누군가, 아마도 친척 중 한 사람이겠지, 그가 노인에게로 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가 실신했어요.” 나도, 아빠도, 큰아버지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애당초 무슨 다른 소식이 있겠는가? 다만 나는 노인이 담배연기를 더 길게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눈꺼풀을 껌뻑였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그들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마치 <아빠처럼>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물이 타일 바닥에 웅크린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린다. 물. 이 물이 내 죄악까지 씻겨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내 영혼도 씻겨나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그대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갖가지 도피적인 망상들. 그러나 현실에서 씻겨 지는 것은 피부에 들러붙은 위액과 피와 담뱃재뿐이다. 주황색 조명이 비추는 화장실. 균일하게 물줄기가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다. 아주 완벽하게 유리되고, 폐쇄되고, 의미와 가치를 벗어난 주황색 공간. 내 피부를 거친 물은 주황색 혹은 분홍색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간다. 상처가 또 열려, 피와 진물이 배어나오고, 불에 타는 것 같아. 오른손을 보자 내가 검지와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하고 벌겋게 벌어진, 열린, 원래는 닫혀있어야 할 살이 움찔거리며 진액을 토한다. “하하하.” 누가 웃었지? 누가 웃었어? 아, 내가 웃었군. 거울을 봐야겠어. 시야는 여전히 붉고 흔들린다. 온수를 맞으며 비척비척 타일바닥 위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벽을 짚으면 손가락 끝이 너무 아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넘어져서 머리라도 바닥에 박으면 그대로 죽는다. 물론 모든 시나리오의 결말은 죽는 것이지만, 아직 페이지가 남았을 것이다. 기승전결 같은 정석적인 것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아직 페이지가 남았고, 결말은 가깝기는 해도 눈앞에 있지는 않다. 세면대 위에 붙은 높이 1m 가량의 거울. 가까스로 서서 보자 틀어놓은 온수 때문에 거울에 온통 김이 끼었다. 불확실한 반사. 검고 하얀 어떤 유령 같은 것이 거기에 깃들어있다. 닦아야할까? 닦지 않아도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봐야할 것이,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불확실함. 불길함. 고장 난 메트로놈 소리가 이미지화 된 것 같은, 섬뜩한 소음공해. 그 희뿌연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산 담배를 피운 것처럼 흉부가 죄어온다. 주황색, 주황색, 주황색 속에, 어떤 낙하 중인 것, 어떤 불분명한 형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불길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자기 자신을 포함해― 불길하고 공포스럽다. 야밤에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음 같이. 혹은,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 너무나도 바쁜 군중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 그 모든 사건들의 중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버렸을 때 같이. 아, 제기랄, 이마의 열린 상처가 너무 아파.
그런데 나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 무가치하고 사악하게 되는 것밖에 없다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보세요, 시대는 절대성을 잃었어요. 정확히는 그런 건 원래 없었죠. 다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원시부터 중세까지 작동하던 안전장치였는데, 그게…… 작동을 멈췄군요. 맞아요. 선생님, 만약에 기계부품이, 자신이 오로지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기계의 작동을 방해해야 해요. 기계를 부숴야 해요. 자신이 속한 기계를 망가트리는 부품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기계부품이 아니죠.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그 창백한 젊은 여자는 탁자에 놓인 커피 잔을 보면서 말했다. 커피 잔은 커피로 가득 차있었다. 여자는 사물의 모든 존재방식이 끔찍하게 무섭다고 느꼈다. 그녀는 도무지 커피 잔을 쥘 수가 없었다. 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유리로 된 대상은 너무도 취약해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 역시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그 시선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 나약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소리의 치명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여자는 무언가 담소를 나누면서 간헐적으로 새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젊은 여자는 천 개의 바늘이, 감정을 가진 바늘이 뇌수로 침입하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경련과도 같은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온몸의 살가죽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온 것을, 애당초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밖으로 나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페의 라디오에서는 발라드싱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위험하다. 여자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고, 이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갑 안에 부적처럼 모셔둔 발륨 봉지를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집었다. 내 뉴런들이 욕을 하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봉지 안의 발륨제제를 하나하나 꺼내 커피 잔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하얀-하얗고 강력하고 조그마한 고체들을 손끝으로 움직여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공포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의식은 그 정사각형을 주시하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식어가고 발라드싱어는 서정적인 음색으로 폭력을 울부짖는다. 삼켜야해. 삼켜야해. 사물의 본질에 노출되어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은 사방팔방에 즐비하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며, 태초부터 숨겨온 칼날을 은밀히 조준하고 있다.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던 타원형의 제제들을 여자는 신중하게 하나하나 왼손으로 옮긴다. 그리고 삼킨다. 15분. 구원을 위한 15분. 어떤 구원? 도피는 아니고? 그러나 도대체 차이점이 뭐란 말인가? 발라드싱어가 더 이상 자살을 종용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옆 자리의 웃음소리가 추악한 고문기구가 아니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유리잔이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두 손을 뻗는다. 여전히 취약한 세상. 그러나 아까보다는 깨지기 어려워졌다. 사약사발을 들듯이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려 죄악의 엑기스를 삼키듯이 들이킨다. 이제 잔의 커피는 절반. 절반의 막다른 길.
거울의 김을 손바닥으로 지운다. 주황색 조명 아래 객관이 규정한 내 모습이 한 줄기씩 드러난다. 검은 머리의,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인, 저 눈, 저 눈을 좀 봐, 건강-건강한 사람들은 절대 저런 눈을 하지 않지. 왜 동공이 닫혀있지? 너는 지금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으며 안락해야할 텐데. 저 동공은 새까맣게 닫혀있다. 노이즈. 안전장치. 노이즈. 생각하지 말 것. 사고는 자멸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할 때 시끄러운 잡음을 뇌하수체에서 분비한다. 경고다. 생-각하지마. 계속해서 거울을 지워간다. 담배 때문에 잿빛으로 변한 입술이 웃고 있다. 그야 그렇겠지. 절망의 다음 단계는 웃음이다. 정확히는, 절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 사람은 웃게 된다. “히히.” 거울 속의 웃고 있는 잿빛 입술이 우스워서 웃었다. 마주 댄 거울처럼, 계속해서 서로를 반사하는 농담. 결국 이 모든 것은 영원의 망각 속에서 바스러져갈 먼지에 불과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이 우주 자체가 허황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도, 불행도, 비참도, 부조리도, 미치광이의 농담이다. 아가트! 아가트!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당신뿐이야, 아가트. 그녀의 이름은 에브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손을 좀 더 움직인다. 창백하고 빈약한 젖가슴 한 쌍과, 그 사이에 그어진 수 없이 많은, 오래되고 불거진 직선의 흉터들이 보인다. 오십 개, 혹은 육십 개? 그것들은 흰색이다. 흉터는 처음 벌어졌을 때 피를 흘리며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곧 갈색이 되고, 딱지가 떨어지고 불거져 나오며 살보다 흰 지독한 백색이 된다. 저 아래에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꺼멓고 쪼그라든 심장을 꺼내서 내 사랑을 다 해 끌어안아주려고 했는데, 칼로 가죽을 찢는 건 너무 아팠고, 칼날이 복장뼈를 긁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어. 아아, 몸에 갇힌 가엾은 영령들아. 사실 심장을 꺼낸다고 한들, 분명 심장의 더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울고 있겠지. 고로 이것도 거짓말쟁이의 농담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우리는 어디에도 없어. 만약에 우리가 있다면, 천지사방에 흩어진 암스테르담의 안개 같은 비참함이 우리다.
괴물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쌍뜨뻬쩨르부르크에서는 설날이 되면 2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친척모두가 모여 2주 내내 보드카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자는 것을 반복한다. 밖에는 나갈 수 없다. 얼어 죽으니까. 담배연기와 너부러진 술병과 너부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고 러시아에서 온 남자친구는 말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보드카 잔 위에 앉은 녹색요정 같은 거라고.
이 컵은 매우 현명하군. 검은색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검은색은 견고하지. 잘 깨지지 않아. 그래서 나도 내 방의 벽지를 전부 검은색으로 칠했었지. 그래야 망령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하니까. 옆방에 있던 사람이 한 말이다.
누군가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당신의 행동과 말들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온몸에서 투명하거나 혹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으로 나간다. 깜깜하지만 몇 년이나 살아온 집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은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식칼 옆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든다. 다시 욕실로. 주황빛 조명 아래 스테인리스 제 과도가 둔하게 번쩍인다. 거울에는 알몸의 앙상한, 피투성이 여자가 칼을 들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잿빛 입술이 말한다. “나약하고, 아, 난잡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지.” 칼끝으로 손톱이 나간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파낸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원망을 사는 게 죽기보다 무서웠어.” 다리가 무너진 건 그것 때문이다. “내 이름은……”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통증 때문에 눈이 충혈 되어간다. 칼날을 이마에 댄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칼을 쥔 손에 힘을 넣어 얼굴 가죽을 벗기듯이 이마에서부터 광대뼈로 천천히 도려낸다. 하하하. “내 이름이 뭐였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칼날은 이미 볼을 찢고 있다. “아니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었어. 사실은 아주 여러 번 죽었지.” 반대쪽 볼. 턱관절. 위로, 광대뼈. “마스크가 필요해.” 그리고 새 이름. 아니야,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절취선을 자르듯이 이마 옆쪽을 깊이 베고, 반대쪽의 선과 이어지도록 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한 번 행복했던 적이 있어.” 이마부터 광대뼈를 따라 볼과 입술까지 가죽이 잘려 피가 비 오듯이 내린다. 3년 전에 혼자 충동적으로 떠났던 여행. 켄터키의 깡촌, 비오는 공동묘지의 한복판에 누워 쿠키를 먹고 있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 쿠키에서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났다. 반죽에 말린 대마 잎을 갈아 넣은 초콜릿 쿠키. “모두 죽는다. 시체들 사이에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위안과.” 손가락을 얼굴가죽의 터진 틈 사이로 우겨넣는다. 그리고 통째로 뜯어낸다. 순간 욕실이 검은색 섬광과 새빨간 잔상으로 시끄럽게 발작한다. “아아아.” 이제 내 오른손은 뜯어진 내 얼굴 가죽을 쥐고 있다. “마스크. 새 마스크. 하하.” 대마 쿠키나 대마 브라우니는 피우는 것과 달라서 정신에 작용하기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그 뒤에는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쿠키를 깨작거리며 비를 맞았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추위도 통증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을 봐. 하악 위로는 전부 피부가 벗겨진, 박물관에 전시된 인체 모형 같은 얼굴. 피가, 혈액이 거울까지 튀었다. 피가 눈으로 스며들어 모든 게 다 빨간색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멀쩡한 하악의 아랫입술이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주의 깊게 본다. 내가 믿는 게 뭐지? 얼굴 가죽이 진액으로 끈적거린다. 조심스럽게, 거울에 붙인다. 아주 훌륭한 농담이야.
엄마, 제발, 나는 정말로 노력했어요. 학교에 나보다 점수가 높은 애가 한 명 있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내 점수를 칭찬했어요. 제발, 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발 방에 가두지마세요.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할 거잖아요. 저번에도 의자에 오줌을 싸고 한참을 울었어요. 제발.
플래시백이 점점 잦아든다. 거울에 비친 괴물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과거는 허상이 된다. 나는 여러 번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 거울에 들러붙은 내 얼굴가죽 한복판에 칼을 박아 넣는다. 쨍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진다. “카-흐-아-아-하.” 헐벗은 얼굴근육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낸다. 피투성이 세면대. 안락한 기분. 안전한 기분.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우습다. 세면대에 칼을 던진다. 쨍그랑.
내 광기가 나이와 함께 충분히 자랐을 무렵 아버지는 날 정신병동에 집어넣었다.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고, 내가 정신병동에 있는 한, 아버지는 날 심문할 수 없다. 거기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사실은, 그들이 내가 처음 사귀는 친구들이었다. 밤마다 어느 병실에서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때보다 잘 잤다. 룸메이트는 정상적인 회화가 가능했지만 간호사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어떻게든 날카로운 물건을 구해 손목과 팔뚝을 그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젊은 여자였다. 어느 늙은 노파는 매일 아침 내게 만나서 반갑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자였다. 나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지시에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간호사와 의사는 내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만 내가 매일 세 번씩 먹는 약은 병동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양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윗입술이 없으니 고생스러웠다. 담배를 입에 고정할 수가 없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곧 포기하고, 더러운 이불에 또 내 피를 묻혔다. 켄터키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만큼 편안하고 안락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정신병동 입원기록이 있다면 이미 이 사회에서 당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제정신인 친구를 곁에 둘 수도 없다. 그저 책임자가 의료기록 같은 건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아르바이트 정도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제정신은 사람들은 귀신같이 타인의 이상한 면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치료받기 위해 정신병동으로 가지만, 퇴원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병원과 사회는 서로 다른 바로미터를 갖고 있다. 인생에서 한 번 추락하면 다시 기어 올라올 방법은 없다. 퇴원할 때도 우리는 이미 똑같은 비극적 결말로 향하고 있다.
나는 새해가 싫었어. 너무 싫었어. 그 냄새, 그 분위기,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한국으로 온 거야? 그래, 도망친 거야. 그리고 날 만났고. 그렇지, 도망치고, 널 만났어. 그리고 네 덕분에 깨달았지. 뭘?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빛이 보고 싶어. 겨울의 맑은 하늘도 보고 싶고. 나는 이미 죽었으니, 망령처럼 거리로 나설 거야. 빛이 나를 태울 거야. 난 이름도 생명도 없는 존재로서, 불타올라, 재가 될 거야. 이곳은 내 둥지지만, 사라질 때는 둥지 밖에서 사라져야 해. 이제 나는 세계를 사랑해. 물론 여전히 증오하지만, 증오하는 만큼 사랑해. 왜냐하면 이제 난 정말로 아무도 아니니까.
현관문을 연다. 아주 오랫동안 잠궈 놓았던 기분이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는 모른다. 바라 건데 밖이 정오이기를.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만물을 향해 쬐어 내리고 있기를. 현관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시야는 붉고 흐리다. 눈꺼풀마저 떼어내서 눈도 깜빡일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 알몸으로 피투성이로 섰을 때,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빛이 내 무방비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이명 사이로 공포와 혐오의 비명 같은 것들이 들렸다. 태양이 저기 있다. 태양은 분명히 나를 내리쬐고 있다. 온전치 못한 오감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없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페이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드러난 얼굴근육을 타고 흘러 따가웠다. 나는 그림자로 빚어졌으니 이제 나는 빛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굳바이, 내가 이겼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내 열 살 무렵의 기억이었다. 내가 이미 잠들어있을 시간인 밤 열두 시 경이 되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짙은 알코올과 남성용 향수의 냄새가 뒤섞인 채 내게로 덮쳐들었다. 그리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변함없이 뜨거운 손이 내 볼을 어루만졌고, 그 손에서는 언제나 역한 공업용 기름 냄새가 났다. 내가 가만히 눈을 뜨면 잠결에 흔들리는 시야 속에 아버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고, 그는 한껏 취한 채, 이 세상 그 어떤 근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듯 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나를 <우리 장남>이라고 부르며 껴안곤 했는데, 그 독한 알코올의 냄새와 흩어져가는 향수의 냄새, 그리고 일터에서 그대로 가져온 새까만 공업용 기름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아버지>라는 이름의 냄새가 되어 나를 한없이 편안하게 안정시켜주는 것이었다. 후에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어떤 친구들은 <나에게는 주말의 정오 즈음에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피우는 담배 냄새가 아버지의 냄새였어.>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며 공감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로 인하여 나는 늘 가장 강력한 기억은 냄새나 향기 따위에 대한 기억이라고 믿고 지냈으며, 내가 이미 독립하여 홀로 지내면서 경제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아직까지 습기 찬 반지하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은 역시 그러한 곰팡이 냄새나 퀴퀴하게 젖은 공기의 냄새가 가족들에 대한 내 노스탤지어를 늘상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의 경직된 목소리에게 나는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전화를 끊자 사위가 조용했다. 나는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냉장고로 가 맥주를 꺼내왔다. 그는 왜 하필 토요일 아침에 죽었을까. 내가 알기로 그는 항상 토요일에 가장 활기가 넘쳤다. 토요일 저녁에는 다음 날 출근할 걱정을 하지 않고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들과 모여 진탕 술을 마시며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제 그는 다음 날 저녁에 거리낌 없이 마실 술과 늙고 정다운 친구들의 얼굴을 기대하며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 아침 영원히 깨어날 수 없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500ml 크기의 맥주 캔을 따고 단숨에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전에 아버지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을 때 그는 내가 500cc의 생맥주를 단번에 마셔버리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참 시원하게도 마시는구나! 나는 그렇게 마시질 못 해. 너희 큰아버지가 술을 그렇게 마시곤 했지.>라고 껄껄 웃으며 말했었다.
커튼이 쳐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슬그머니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내 집은 반지하지만 언덕 능선에 건물이 지어진 탓에 현관으로 들어올 때는 지하로 내려 가야하지만 정작 집 안에 들어와 창문을 내다보면 2층 높이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다. 평생을 반지하에서 살았다고는 해도 아침마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구둣발이 지나다니는 걸 봐야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지금의 집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 나는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다시 냉장고에서 한 캔을 더 가져왔다. 시릴 정도로 차갑게 식은 알루미늄의 감촉이 좋아서 한동안을 그저 들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맥주가 미지근해질 것이 걱정되자 따개를 따고 기세 좋게 마시기 시작했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맥주 캔을 다 비우고 두 개의 빈 캔을 나란히 탁자 위에 놓은 뒤 나는 가라앉듯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거실은 겨울의 냉기로 싸늘했고 내 얼굴만이 알코올로 말미암아 조금씩 달아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오늘 내 아버지가 죽었다.
*
“아버지가 죽었어.” 정오 즈음에야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동생은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녀가 제대로 알아들었음에도 되묻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그래.” 동생의 목소리가 톤이 높아지려는 것을 느끼고 나는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가 한참동안 말을 않기에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염병할, 안 그래도 전화해야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나는 벌써부터 회사에 연락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언제?> 비극이 벌어질 때마다 들을 수 있는 동생의 하이톤 목소리는 어머니가 젊은 시절 히스테리를 부릴 때의 목소리와 똑같다. 이제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동생에게 전화하겠다고 말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일어나서 깨우려고 보니 이미 돌아가셨었대.” 또 한참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미 한 캔을 다 비우고 다른 캔을 따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이 돌아올지 기대도 하지 않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 흐느낌 소리와 신경질을 내는 소리가 뒤섞인 잡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소음처럼 <장인어른이?>하는 매제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고, 동생의 우는 소리가 커지면서 전화 저편의 상황이 개판이 되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계속 맥주를 마시면서 저쪽 상황이 좀 진정되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캔을 다 비울 때까지도 소란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그냥 여전히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이제 맥주가 한 캔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나는 중얼거리면서 냉장고 구석구석을 뒤지고 야채용 서랍까지 열어봤는데도 맥주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냉장고 문을 닫고 전화기 너머의 엉망진창인 소란과 새된 목소리를 들으며 부엌으로 가 찬장을 열어보았다. 다행이도 거기에는 싼값에 사 쟁여놓았던 잭 다니엘이 여섯 병이나 있었다. 나는 한 병을 꺼내고 어깨로 휴대전화를 귀에 받치면서 양손으로 브랜디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 휴대전화를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병을 들어 병째로 한 모금을 마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브랜디가 위장에서 불길이 되어 확하고 불이 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난 내일 가보려고. 듣고 있냐?” 브랜디를 마시고 좀 진정이 된 뒤에 내가 말했다. <왜 지금이 아니고 내일이야? 엄마 혼자 어떻게 하라고.> 정신이 나간 상황에서도 휴대전화는 붙들고 있었는지 동생이 딸꾹질과 흐느낌이 섞인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지금 운전하면 음주운전이야.”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 말이 동생의 엉망인 머릿속을 더 엉망으로 만든 것 같았다. <오빠! 오빠 진짜 미쳤―> 나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지고 나는 선채로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찌됐든 맥주를 사와야 했다.
잭 다니엘 한 병을 다 마시고 걷는 토요일 정오의 길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멀리서 차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고 차가운 겨울바람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다소 꼬인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마트를 향해 걷고 있었다. 이렇게도 좋은 날, 술에 취하니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아버지는 죽었고 더는 없다. 슬픔과 히스테리와 발작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족들만 남았을 뿐. 꽤 오래 전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곡을 하다 실신했던 할아버지의 딸이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을까? 어린 내게 그 장면은 몹시 불쾌하고 끔찍하게 지루했던 이미지로 다가왔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내가 언제 처음 이해했더라?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작고 당연한 깨달음은 내게 그 어떠한 충격이나 슬픔으로도 다가오지 않았다. 사실 인간의 필멸성을 지식으로 알기 전에도 나는 모든 사물과 생명들이 피었다 지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관찰하곤 했었다. 어쩌면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이 아니라, 감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슬픈 일도, 애처로운 일도 아니었다.
마트의 자동문을 넘어 나는 곧바로 주류매장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도 크고 작은 마트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게는 굳이 이곳으로 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알코올 도수 8.6도의 500ml 크기, 새까만 디자인의 캔 맥주. 수입맥주이기 때문인지 도수가 높아 사람들이 잘 사지 않기 때문인지 이것은 동네에서 지금 내가 있는 마트에서만 판매한다. 나는 캔 맥주 여섯 개 묶음 다섯 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에 서있는 중년의 여성 계산원은 날 보더니 빙그레 웃어보였다. “항상 똑같은 걸 사가시네요.”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이게 제게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니까요. 종량제 봉투도 하나 주세요.” 나는 신용카드로 계산을 마치고 종량제 봉투에 맥주를 전부 쓸어 담은 뒤 마트를 나왔다. 겨울하늘의 태양은 유리처럼 맑고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봉투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뚜껑을 땄다. 그리고 비틀비틀, 도시의 풍광과 가로수들의 마른 잎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 알갱이들을 흠뻑 음미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걷는 사이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고 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이얼을 눌러 회사의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20초 뒤 전화를 받았다. “예, 부장님. 접니다.” “무슨 일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휴일 정오를 즐기고 있는데 분명 사무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불만이 잔뜩 묻어있었다. “제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아침에요.” 그러자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분명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고 있는 중이겠지. “그것 참…… 유감이군. 고인의 명복을 비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장례가 끝날 때까지 출근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 다시 복직했을 때 휴가계를 쓰도록 해놓을 테니까. 자네는 괜찮은가?” “물론이죠. 저는 괜찮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내가 <물론이죠>라는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후회감이 밀려왔다. 내게 전혀 이익 될 것이 없는 쓸데없는 말이었다. “그거 다행이군. 나도 장례식에 참여하도록 노력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부장의 별 의미 없이 걱정하는 말이나 잡다한 위로들을 들은 뒤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 전화 한 통만으로 온몸의 기력이 다 빨려나간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에 박차를 가해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면 맥주들을 냉장고에 넣고, 커튼을 연 뒤 안락의자에서 맥주를 마셔야지. 사실상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으니 말이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날 놀이공원에 데리고 갔던 일을 기억한다. 나는 체질적으로 사람이 많은 공간을 못 견뎠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가 나를 즐겁게 하려던 것을 알고 있었다. 놀이기구를 타고 공원을 돌아다닐 때, 우리는 작은 오락실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드럼 세트 모양의 리듬게임 오락기를 실행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고등학생 시절 드럼을 쳤었다. 그러나 큰아버지 주변에는 실패하고 비참한 뮤지션들이 수없이 많았고, 다소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는 아버지의 <뮤지션 적인>면을 만류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드럼을 치기는커녕 공장에서 손에 기름만 묻히며 일했고, 단 한 번도 어떤 밴드나 그룹에 속해 드럼을 쳐본 일이 없었다. 쉬는 날이면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는 맥주를 들고, 한 손으로는 팔걸이를 두드리며 <덤더러러덤>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의 죽을 날을 알고 있었더라면 정식으로 드럼을 배울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따위 생각을 하며 맥주를 마시면서, 아버지가 했듯이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려보았다. 덤더러러덤. 그는 무엇을 위해 온몸을 바쳐 살았던 것일까.
나에게는 이제 <우리 장남>이라며 껴안고 등을 두드려줄 사람이 없다. 필요로 하기는 했나?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가 아버지를 뵈러간 것이 도대체 언제인가? 나는 늘 바빴고, 피곤했다. 여동생은 나보다 더 자주 아버지를 뵈러 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히스테릭한 울음소리도 나는 짜증이 치민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바빴다. 모두가 자신의 일로, 자신의 가정의 일로 바빴다. 덤더러러덤……. 나는 술을 핑계로 아버지의 장례식을 도우러가지도 않으면서, 허공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덤더러러덤덤더덤덤더덤……. 술이 얼큰히 취하자 나는 내가 슬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나는 그저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거실에 늘어져있다. 내게서 풍기는 알코올과 효모 냄새로,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는 환상을 보면서. <장남, 내 자랑스러운 아들…….> 어린 시절 잠에 취해 아버지와 마주했을 때, 누워있는 나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중얼거리곤 했다. 그의 동물적인 사랑, 동물적인 감정들. 그런 것들은 내가 엉망진창으로 자라왔음에도 날 곧게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나면,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회사에 가서도, 그리고 일이 끝나고 돌아와도, 항상 술을 마신다. 나는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니다. 나는 그저 알코올에 절어있는, 마시다 남은 술을 퍼붓는 쓰레기통이다. 아버지는 항상 나를 응원해주었는데, 이제 그는 죽고 없다.
빌어먹을 감상주의! 갑자기 욕설이 터져 나왔다. 평생 효자노릇 해보려고 한 적도 없는 놈이 마침내 당신이 죽어야만 감상에 잠긴다고 머릿속 누군가가 비웃어대고 있었다. 그래, 젠장, 언제부터 내 심장에서 피가 말라갔지? 14살 때 처음으로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이후부터인가? 몇 번이나 나는 반복해서 말한다. 이 염병할 놈의 세상은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나 증오하는 것도 신경이 알코올로 젖어 있어야만 아름답다. 맨 정신으로는 사람도 건물도 날씨도 흙도 동물도 죄다 부러진 채 죽어있는 나무토막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거창한 욕설이 메아리를 치면서 울린다. 당장 뒈져. 당장 뒈져. 당장 뒈져……. 철학가들이나 신학자들이 그걸 신이라고 부르는지 운명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친 작자인 건 분명하다. 만약에 정말로 모든 걸 손수 만들어놓고 그걸 하수구에 처박는 놈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술을 마셔야한다! 술에 취하면 모든 광경들이 조금은 더 나아진다. 붉은 노을의 아련함이나 태양의 노란 빛살, 푸른 하늘같은 것도 알코올의 도움 없이는 사실 별 볼일이 없다. 맥주 캔이 비었고 나는 그것을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자 내 육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심지어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침에 일어나서 오후까지 계속 마셔댔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이 되려고 술을 마시는 거야.” 이미 꼬일 만큼 꼬인 혀가 멋대로 내뱉어댔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람>이라는 단어의 어디쯤에 서있는지도 모르겠는데.
*
일어나니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전부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가로등 빛이었고, 그래서 집의 구조는 약간 노란색을 띄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에 다시 털썩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엄지로 한쪽 관자놀이를 누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탁자 위의 빈 브랜디 병과 사방팔방에 흩어진 수십 개의 빈 맥주 캔들이 보였다. 안락한 나의 집.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골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냉장고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검은색 맥주 캔들이 수도 없이 채워져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따개를 열고 바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마를 차가운 냉동고 문에 박은 채로 한참을 서있었다. 효모로 인해 발효된 맥아에 두통이 씻겨나간다. 나는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내 방으로 갔다. 침대 탁자 위에 파란색 정제가 가득 찬 유리병을 찾아 나는 뚜껑을 열고 두 알을 맥주와 함께 마셨다. 분명 이 끔찍한 두통도 맥주와 자낙스 두 알로 금세 사라질 것이다. 수도 없이 겪어봤기에 안다. 예전이라면 아편제제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해결했겠지만, 더 이상 이 나라의 어느 병원도 내게 그것을 처방해주지 않는다. 나는 계속 맥주를 홀짝이며 방의 불을 켰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나는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최근에는 침대에서 자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팔아버릴까 싶기도 하다. 평생을 바닥에서 자다가, 왜 이 집을 얻을 때 굳이 침대 따위를 샀던 걸까. 나는 갑자기 그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한 감촉이 소름끼치게 느껴져 벌떡 일어났다. 사람은 죽을 때 눕는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렇다. 나는 맥주를 챙겨 급히 거실로 나갔다. 어느새 내가 두통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제 다시 술을 거침없이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휴대전화를 집으면서 안락의자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내 얼굴만 비추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보면서 나는 기기 안의 사진 저장 폴더로 들어갔다. 3년이 조금 넘도록 쓴 전화인데도 기기 안의 사진은 50장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사실 특별히 찾고 있는 목적물은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가장 오래된 사진에 그들이 있었다. 어느 공원인가 산에서 찍은 것 같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웃으며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반팔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여름인 것 같았고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얇은 카디건을 셔츠 위에 걸치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동생이나 조카들의 사진도 없었다. 그러나 내게 하나 남은 그 사진이 사이좋은 노부부의 사진처럼 찍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부부가 함께 산 시간을 60년이라고 친다면 그중 55년 정도는 항상 서로를 향해 차가운 감정을 일렁이며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남은 5년 사이의 기적적인 순간인 것이다.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벌써 내가 캔을 다 비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침대 위에 앉았을 때 느꼈던 서늘한 감촉이 또 한 번 등골을 떨리게 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쳐야했다. 나는 또 한 캔의 맥주를 따며 중얼거렸다. 나는 평생을 도망쳐왔다. 그러기 위해 내 안의 모든 것을 말려버리고, 그 남은 자리에 술을 부어왔다. 이미 치러지고 있거나 혹은 곧 치러질 장례식의 환영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무작위하게 움직였다. 이러한 환영은 곧 연쇄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한없이 따분하고 이상한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실체 없는 검은 정장들의 무리가 일사분란하게 파도치고, 나는 행렬 앞에서 영정사진을 든 아이였다가 어느새 그 아이는 얼굴이 없어지고 저 뒤쪽 으스스한 곳에서 나는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영정사진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가 할아버지였다가 큰아버지였다가 어느새 그들은 돌아가며 내 옆에 서서 나와 어깨를 마주대고 있을 것이고, 그 기괴한 번복과 생사의 무분별한 모호함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래, 이것이 내가 두려워 마지않았던 것이다.
*
나는 차의 운전석에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고,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드문드문 했다. 나는 긴장된 채 액셀을 밟고 있었고 몸에서는 알코올과 효모의 냄새가 났다. 내가 액셀과 브레이크를 착각하고 반대로 밟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불안 때문에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컵홀더에 끼워놓은 캔 맥주를 연신 마셔댔다. 무엇이 날 이렇게 급하게 튀어나오도록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생각과 환영들이 날 괴롭히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시체가 된 아버지를 직접 보고, 그 딱딱하고 차가워졌을 손을 잡아보는 것이 내게 필요한 행동 같았다. 새삼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을 때를 생각했다. 비보를 받고도 내 얼굴근육은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 하루 동안 무슨 연유에선지 난 극도의 불안과 긴장을 느끼며 무언가로부터 계속해서 도주하는 미치광이가 되어왔다. 아버지의 죽음, 아니, <죽음>의 가차 없고 무지막지하며 도무지 예측 따위는 할 수 없는 판결이 어떤 방아쇠라도 되었던 것인가? 나는 지금 국도를 시속 90km로 달리고 있다. 내 목덜미 뒤에서도 새까만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을 나는 촉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어났을 때부터 늘 따라다니던 것이다. 다만 지금 나는 취했고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뗄 수가 없을 뿐이다. 새벽의 텅 빈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내 발에는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100km/s. 110km/s. 그러나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이 느리고 물컹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오늘 전혀 죽을 예정이 없다. 120km/s. 자살관념이나 충동 따위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14살 때 심장의 피와 함께 말라버렸다. 그래, 이것은 발작이다. 그러나 내가 손에 올리고 쥐락펴락할 수 있는 발작이다. 나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셔버리고 빈 캔을 뒷좌석에 던지며 천천히 브레이크에 힘을 실었다. 거의 5분에 걸쳐 차의 속도는 몇 단계를 지나며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쐐기를 박으려고 조수석에 있던 맥주를 집어 땄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단번에 절반을 마셔버렸다. 거의 고통에 가까운 목 넘김이 중추신경에 번개라도 때려 박은 것 같았다. 나는 슬슬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행이었다. 경주마처럼 쿵덕거리던 심장은 잦아들었고, 그와 함께 차의 흔들림도 작아졌다. 나는 이대로 속도를 줄이려고 했다.
아, 염병, 면허 교습소에서 선생이 오른발로만 운전하라고 했던 걸 믿은 게 잘못이지. 내가 여태껏 밟고 있던 게 액셀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코너에서 눈앞에 보이는 건 가드레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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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 우리가 그저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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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내 온몸에는 온갖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쪽 눈은 떠지지 않았고 다른 쪽 시야마저 부옇게 흐렸다. 입으로 숨을 쉬려고 하자 기도에 뭔가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어렵사리 손을 들어 코 주변을 만지자 콧구멍으로 두 개의 튜브가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있는 채로 말소리가 들리는 왼쪽으로 고개를 향하자 간호제복을 입은 간호사와 경찰관이 서있었다. “실려 왔을 때 혈중알코올농도가 0.627% 였어요.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조차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급성알코올중독으로 죽었어야 해요.” 이명 소리 가운데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기야 내가 자랑할 것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철 같은 간 밖에 없다. “일어나셨네.”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경찰관이 날 보며 말했다. “선생, 정신이 듭니까.” 나는 <예>라고 말하려 했으나 혓바닥 왼쪽과 입술의 가장자리가 심하게 아파 잠깐 입을 다물었다 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술 먹고 운전하다 가드레일 받은 데까지요. 그보다 이 튜브 좀 빼주시오.” 나는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묻는 것이었다, “기억력은 좋으시네. 그럼 음주운전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나는 고개를 바로 하며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래서 형량이 얼마나 나옵니까?” 내가 물었다. “혈중알코올농도 0.2% 이상 음주운전에 과속, 기물파손까지 해서 면허취소에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500만 원 이상 1천만 원 이하의 벌금, 거기에 이것저것 상황 봐서 더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술에 만취해서 어딜 가려고 했던 거요?” “아버지 장례식이오.” 나는 이제 경찰관의 얼굴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잠시 침묵이 산만한 공간 속을 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물론 경찰관이었다. “부친께서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이오?” 내가 묻자 경찰관은 월요일이라고 답했다. “내가 일주일 넘게 여기 누워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틀 전입니다.” 경찰관은 또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면허취소에 벌점이랑 벌금은 어쩔 수 없겠지만 감형이 될 수도 있겠소. 여하간 치료가 다 끝나면 법원 출두서가 나올 겁니다.” “뭐가 어찌 됐든 삼일장 끝나고 나서야 일이 마무리 지어지겠군요.”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유감입니다.” 그 후 경찰은 무엇인가 형식적인 얘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또 한 번 <유감>을 표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간호사에게 내 몸 상태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 남자 간호사는 차트를 확인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말을 늘어놓았다. “늑골 세 대랑 오른쪽 정강이뼈가 부러지셨고, 부러진 늑골 하나가 폐를 찔렀지만 실려 오신 뒤 바로 수술을 하고 봉합을 했으니 별 문제는 없습니다. 안면에 심한 타박상과 자상을 입었지만 영구손상이 될 만한 것은 없고 나중에 흉터만 좀 남으실 겁니다.” 내 생명은 정말 지저분하게 끈질기다. 예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삶 자체를 자살시도처럼 살아도 나는 무조건 끝까지 살아남는다. 마치 누군가가 나더러 계속 살아보라고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습니까?” “대략 3주요.”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확정되었고, 동시에 어머니와 동생이 영원히 날 증오하리라는 것도 확정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날 증오하기는 했다. 사회적으로 정상 기능하는 인간들은 부품이 부서진 인간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증오당하는 것은 인간본성과 순리,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다. 모든 만물이 나를 더러 당장 죽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도무지 나는 죽을 수가 없다. 나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맥주 있습니까?”
*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나는 피고석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병원에서 보낸 삼 주간은 지옥 같았다. 몰래 기어나가려고도 해봤으나 정상인보다 훨씬 기동력이 떨어지는 내 다리로는 술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맥주 한 방울도 없는 병원침대 위에서 나는 알코올 금단증상으로 인한 불면증과 신경과민으로 극도로 예민해져 쉬지도 않고 사방에 화풀이를 해대는 사이코가 되어있었다. 입원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화 한 번 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는 경찰이나 병원 측에서 연락을 한 모양이지 싶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내게 연락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여하간 지금 내가 죽은 눈동자로 법정에 서있는 까닭은 퇴원하고서부터 어제 밤까지, 병원에서 못 마신 술을 전부 마시고 생긴 숙취 때문이다. 갈비뼈와 오른쪽 다리가 유난히 욱신거리는 것이 역시 의사들이 술 먹지 말라는 소리를 공으로 하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나 난 오늘 아침에도 맥주 5L를 비우고 왔다. 내가 뭘 어쩔 수가 있기나 하단 말인가. “……그러니까 피고는 부친을 잃은 슬픔에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다는 것입니까?” 검사인지 뭔지, 지금까지 전혀 법정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죄를 물으려는 사람이 갑자기 질문해왔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혈중알코올농도 0.6%가 넘어가는 만취한 상태로 운전을 시도한 것입니까?” 저 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정의로운 분노는 정말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 분노가 정말 저 자의 분노인지 아니면 일종의 역할극을 하는 상황에서 끄집어낸 의도된 분노인지가 새삼 궁금했다. “그야 장례식에 가려고 했을 뿐이지요.” 나는 정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검사―인 것 같은 자―는 모두가 들리도록 혀를 차더니 법관에게 증거물 소환을 요청했다. 법관이 요구를 승인하자 100L 크기의 투명한 비닐봉투 서너 장이 온갖 색깔로 알록달록한 빈 캔 맥주들로 가득 찬 채 사람들 손에 들려 나왔다. “피고의 차 뒷좌석에서 꺼낸 맥주 캔들의 <일부>입니다.” 검사는 소리 높여 말했다. “처음 차문을 열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이것이 자동차 뒷좌석인지 알루미늄 재활용센터의 창고인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캔들이 피고가 마셔온 것들이 맞습니까?” 검사는 비닐봉투들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내 차에서 꺼내온 것들이라면 제가 마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자 검사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외치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보아 피고가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피고의 회사동료로 있는 증인이 증인석에 설 것을 요청합니다.” 법관은 상황 돌아가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요청을 승인했다. 그리고 증인석에 올라선 사람을 보자 그는 정말 내 옆자리에서 일하는 P 대리였다. P는 증인석에서 다소 불안한 눈동자로 나와 검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증인은 회사에서 피고와 함께 일하는 P 씨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증인은 가끔 회사에서 피고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고 했는데 그것이 정말입니까?” “예, 하지만 저는 그것이 그저 구강청결제의 냄새인 줄만……” P 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사는 거의 설교하는 예수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머리 뒤에서 후광이라도 보일법한 모습으로 외쳤다. “피고는 회사에서, 근무시간에 술을 마신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휴대용 술병에 브랜디를 담아 가지고 다니며 가끔 회사에서도 남들 모르게 마시곤 했다. “있지요.” 지금까지 계속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제지하려고 애를 쓰던 옆자리의 국선변호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내 대답으로 말미암아 검사의 기세는 법원 천장을 뚫을 듯이 올랐고 목소리는 점점 더 크고 카랑카랑하게 변해가며 내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알코올중독자이며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징역과 함께 출소 후 알코올중독자용 보호감호시설에 수용해야한다고 막힘없이 목청을 높였다. 알코올중독자. 그 말은 왠지 내게는 너무도 신선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코올중독자의 영역에 속한다고 뚜렷하게 생각해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했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정의로운 검사는 의학과 통계의 힘을 입어 알코올중독자라는 번쩍이는 왕관을 내 머리에 씌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모든 일이 다 내 손을 떠난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이 정신 사나운 법정다툼이나 내 생활, 내 회사, 내 집, 내 삶, 그리고 내 존재까지도, 심지어는 아버지의 죽음이나 어머니와 여동생의 지겹게 이어질 생명에 대해서조차 전부 내 손을 떠나 더는 상관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 손은 족쇄에서 풀려난 듯이 갑자기 가벼워졌으며 나는 그 자리에서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내 웃음소리에 법원이 통째로 조용해졌다. 검사는 몰이해가 감도는 부릅뜬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고, 법관은 시종일관 약간 웃는 듯한 눈매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 말이 너무 신기해서요. 알코올중독자라는 단어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허허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재빨리 처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내 변호사는 턱을 괸 채 앉아 말이 없었고, 검사의 열변 이후 법관은 피고가 중증 알코올중독자이며 상습적 음주운전자임은 정황상 틀림이 없으나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판단력이 상실되었을 수 있음을 감안하여 면허취소, 800만원의 벌금과 3개월 내에 자발적으로 알코올중독 치료기관에 입소할 것을 명령했다. 자발적으로라고는 하나 4개월 이내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입소 시킨다는 말 따위를 했으며, 중독이 완전히 치료되기 전까지는 면허발급을 금지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목제망치가 두드려졌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채로 자리에 서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모든 것은 흘러갈 대로 흘러가고 마는군.”
*
나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사고 때문에 회사에서의 공백기가 너무 길기도 했고 회사로서는 알코올중독자 낙인이 찍힌 사원을 부리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이다. 내 데스크에서 들고 나올 것은 별로 없었다. 고작 펜 몇 개와 숨겨놨던 휴대용 술병 두어 개 정도. 내가 처리해야 했을 이미 기간이 지나버린 서류 뭉텅이들은 전부 파쇄기에 갈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술에 절어 살면서도 회사에서 공을 올린 경력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인사부 과장과 잘 이야기하여 넉넉한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직장동료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다른 말은 않고 그저 내 아버지에 대해 위로하는 말만을 했다. 퇴직금과 그간 모아놨던 돈들을 합하니 벌금 800만원이라는 문제는 어이없도록 쉽게 해결되고 말았다. 범퍼가 아예 떨어져나간 차는 폐차시켰다. 어차피 꽤 긴 기간을 나는 자가용으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다. 며칠 전, 평일 오후에 집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상한 감각에 둘러싸인 채 안락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통화를 시도했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메시지로 아버지가 어디에 묻혔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장에는 주소와 위치만 적혀있을 뿐 그 어떤 인사나 안부도 없었다.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버스를 타고 아버지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철제 의자에 앉아, 한 손에는 맥주 캔 다섯 개가 든 비닐봉투를 들고 말이다. 아버지의 무덤은 지방의 할아버지 묏자리 아랫단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실 어머니에게 위치를 물어볼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하기 전까지는 매년 명절 때마다 들르던 산이니 말이다.
고속버스는 엔진소리를 울리며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나는 가끔씩 안주머니에서 술병을 꺼내 브랜디를 홀짝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쳐가는 황량한 산맥들이 이 계절은 역시 만물이 잘못된 자리에 놓인 파편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리는 계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썩지 않은 낙엽들이 도로가에서 움찔거렸고 곧 차바퀴 밑으로 말려들어가곤 했다. 태양은 완전히 흰색이라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수없는 시체들의 거대한 등뼈 위를 달리고 있다. 매년 무언가가 태어났다가 죽어서 썩어 사라지는 것을 30년 넘게 지겹도록 보아왔다. 모두가 그런 것을 보아왔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말없는 반복이 우리로부터는 유리되어있다고 어떻게든 믿으려 한다. 동생은 울었다. 소리치고 비명 지르며 울었다. “불쌍한 조카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시골 정류장에서 작은 마을버스를 잡아타고 산 밑까지 이동하는 동안, 나는 스테인리스 술병을 다 비우고 500ml 맥주 한 캔도 끝장을 낸 참이었다. 바람은 차갑게 불어 내 코트가 마구잡이로 펄럭거렸고 얼굴이 시렸다. 나는 뫼지기가 일하는 컨테이너 박스 건물을 지나 천천히 산을 올랐다. 경사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투는 바람 때문에 내용물이 움직여 카랑카랑하는 소리를 산발적으로 내고 있었다. 나는 찬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미면서 동시에 봉투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땄다. 내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의 묘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다. 아마 십 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나는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을 오르면서 맥주를 조금씩 삼켰다. 아버지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취해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아버지의 묘는 몹시 찾기 쉬웠다. 매년 가던 할아버지 묘의 아랫단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매장하고 떼를 입힌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파릇파릇한 잔디가 유난히 눈에 띠었기 때문이다. 비석 또한 검은색에 윤기가 도는 것이 새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아버지 묘에서 뒤로 돌자 사방이 탁 트여 건너편 산까지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시리도록 깨끗하고 고요한 계절이며 풍광이었다. 나는 다시 봉분을 돌아보았다. 주변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깔린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닐봉투에서 두 개의 빈 캔이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무덤을 보고 있었더라?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건 무덤이었다. 새로 떼를 입혀 번쩍거리는 무덤. 나는 무덤에 더 가까이 가서 앉았다. 코앞에서 풀냄새가 났다. 그리고 나는 봉투에서 맥주 세 캔을 모두 꺼내, 하나를 열어서 한 모금을 마시고 남은 것을 모두 봉분 위에 쏟았다. 황금색의 맥주줄기가 잔디 위에서 마구 튀다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다음 캔도 따서 부었다. 그리고 마지막 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무덤 앞은 맥주로 흥건하여 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오면서 마신 브랜디가 이제야 끓는 열기가 되어 얼굴로 올라오며 더는 춥지 않은 것을 느꼈다. 나는 또 한참을 멍하니 무덤만 바라보고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서, 검은 비석 쪽으로 가서 주저앉으며 비석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고개를 들자 하늘의 구름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미안해요.” 나는 취한채로 중얼댔다. “오랜만에 옆에서 좀 잘게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는 눈을 닫았다.
시간은 오후 9시. K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밤이 이르게 오는 계절이라 해는 이미 졌지만 공원은 흰색과 주황색의 빛으로 찬연이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들이 마치 사람이 만든 보름달 같다고, K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제 달을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게 되었구나. 필라멘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살들은 희고 둔한 유리알을 거쳐 파도에 부딪치는 달빛처럼 어지러이, 그러나 둔중한 무게를 가지고 공원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K는 일부러 골라잡은, 공원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 앉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동자로 공원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어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부모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벤치에 앉아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흥분되고 기쁜 비명이나 새된 소리가 끼어들었고, 그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밝은 밤공기에 섞여 몽환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K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위태로웠다. 그것은 곧 진흙이 되어 후두두 떨어질 듯 보였고 눈꺼풀은 납으로 만든 듯 무거웠다. 그의 왼손은 이미 반쯤 비워진 보드카 병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뼈가 불거지고 앙상한 다섯 손가락은 단지 술병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익사에서 구해줄 어떤 듬직한 선원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헐떡이는 목소리가 귀에 울릴 듯이 처절하게 그 술병을 쥐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이 명랑한 공원에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와, 자신들의 보물이라도 되는 듯 그것들이 뛰고 달리며 노는 것을 쳐다보고, 반려자와 머리를 기댄 채 앉아있는 그 저녁 9시의 공원에 K는 조금도 뒤섞이는 색깔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오른손으로 자신의 기다랗고 새까만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두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려는 것처럼 보드카를 입에 부어넣곤 했다. 그렇기에 분명 비애도 몽환도 없을 이 밝은 공원이 K에게는 술기운과 함께 융화되어 어떤 거대한 비극의 전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저 수많은 인간의 달들 또한, 그것은 그저 가로등일 뿐인데! K에게는 혈거짐승이 동굴 속에서 올려다보는 달과 별처럼 처참하게 보이는 것이다. K는 다시 보드카를 한 모금 식도 너머로 넘겼다. 그 독한 알코올의 향기는 K에게 분명히 어떤 노스탤지어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상기시킨다는 말은 옳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그 노스탤지어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 알코올의 향은 K에게 과거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조하고, 심지어는 망각을 거쳐 그 과거로 끌고 가려는 악의적인 손아귀처럼 위험했다.
공원의 저편에서 작은 개들이 짖거나 뛰놀았다. 개의 주인들은 자신의 애완견의 목줄을 잡고 천천히 산책을 하거나, 더러는 그것들이 절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믿고 아예 목줄을 풀어놓고 있었다. 주인과 함께라면 항상 기쁨으로만 가득한 그 짐승들은 혀를 내밀고 주인의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동족들과 그들만의 소통을 하곤 했다. 크고 점잖은 늙은 개들은 주인 옆에 가만히 앉아, 마치 현인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공원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K에게는 슬픔으로 오는 것이었다. K는 무의미하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그 개들이 보이는 풍경이 사라지는 것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궁금해 했다. <저것들은 절대 배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며 K는 한 덩어리의 비참한 숨이 입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어렸을 적,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가 키우던 개를 잡았던 장면이 잘못 현상된 사진처럼 K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그는 도대체 왜 공원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온 세상의 비극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가? K는 목이 말랐다.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고 술병을 들었는데, 그의 앞으로 뭔가가 지나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은 흰색이었다. K는 술을 마시려다 말고 그 흰색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길고양이였다. 바싹 마르고, 온몸이 창백한 흰털로 뒤덮인 고양이였다. 그것은 지나가다 K의 눈길을 느꼈는지 그와 눈을 마주쳤는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것의 노란 안광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름의 끝물에 이제 막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의 색깔을 연상케 했다. 한쪽 앞발을 들고 그대로 멈춘 흰 고양이는 한참동안 K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K 역시 술병을 들다 만 상태로 굳어있었다. 30초가 지났을까, 고양이는 그 종족 특유의 무심함을 보이며 고개를 돌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K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창백하게 아름다운 흰 고양이가 왼쪽 뒷발이 없어 세발로만 절뚝거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보고 K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술 취한 눈동자가 불구 고양이에게 뭔가를 덧씌워 보고 있었다. 그 창백한 흰털 역시 분명히 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K의 웃음소리에 고양이는 놀라 절뚝거리며 도망쳤고, 그는 자제하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 마침내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K는 술병을 입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남은 보드카를 전부 들이켰다. 그리고 그는 술병을 떨어트리며 벤치에 더 깊이, 무너지듯이 몸을 묻고 고개를 힘없이 뒤로 젖혔다. 납덩어리 같은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며 눈이 감겼는데, 그러자 K의 왼쪽 눈에서 눈물 같은 것이 한 방울 흘러나왔다.
K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많은 노문학에서 읽고 상상한 것처럼 그곳에서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회색의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모든 건물의 기와와 거리는 축축하고 흰색으로 젖어있었고, 숨을 쉬기만 해도 폐 속에 눈이 쌓였다. 도시의 공기를 온통 점령한 그 진눈깨비 탓에 시야는 짧고 좁았으며, 그 한가운데 서있는 K는 자신이 고체로 된 안개에 단단히 붙잡혀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수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건조한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내륙의 내륙, 또 그 안쪽에 있는 흐린 도시는 K가 가본 그 어느 거리보다도 건조해서 그의 머릿속을, 게다가 가슴까지도 눈이 쌓인 황야처럼 아무런 소리도, 색깔도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K는 자신이 북아프리카의 사막에 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 비하면 그 사막은 그야말로 폭력의 고장이었다.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고 영혼으로 직입해 들어오는 황금색의 태양이나, 햇빛에 쪼개지며 쩍쩍거리는 소리를 내는 뜨거운 모래와 바위들, 그 어떤 풀이나 나무도 자라지 않지만 코를 통해 폐와 심장으로 흘러내리는 그 엄청난 생명의 열기. 그 사막에서 땀방울들이 피부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K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배를 타고 도망칠 때 그리도 끔찍한 열병을 앓았던 것이다. 그런데 진눈깨비 흩날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희멀건 고체의 안개들로 인하여 K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자신이 끌고 온 검은색의 트렁크를 뒤돌아보았다. 이걸 왜 가지고 왔지? 이 거리에서는 코트와 귀까지 덮이는 모자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여기는 생명조차 필요 없는 고장이다. 거리 저편에서는 기장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회색 코트를 입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7~8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건물에 등을 기댄 채 멀거니 서있었다. 분명 어디서 주웠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부랑자의 시체로부터 벗겨낸 코트가 틀림없었다. 아무리 봐도 성인용일 그 코트는 기장도 소매도 너무 길어 아이의 손은 보이지 않았고 소년의 온몸을 회색으로 뒤덮어 코트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거대한 누더기처럼 보였다. K는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거리 한복판에 서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왜 러시아에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사위는 새까맣게 어두웠지만, 이 나라에 도착한 후 K는 단 한 번도 밤을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은 항상 창백한 흰빛이었고 사람의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만이 진눈깨비의 바람을 타고 사방에 휘몰아쳤다. K는 아직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젠 어떤 그림자 같은 남자가 소년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웅얼대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곧 그 소년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눈처럼 하얗지만 재처럼 회색인 앙상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림자 같은 남자는 그 작은 손에 구겨진 지폐를 올려놓았다. 소년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다른 한 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것은 무언가를 싸서 접어놓은 갈색의 더러운 종이였다. 종이봉투를 받은 남자는 뒤돌아서서 자신이 왔던 길로 걸어갔고, 마치 유령인 것처럼 그대로 진눈깨비 사이에서 사라져버렸다. 소년은 사라져가는 남자의 등을 잠시 보고 있더니 한쪽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긁어 불을 붙이더니 깊고 조용하게 연기를 뿜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K는 바닥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도 않고, 꽉 다문 입과 무심한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 같은 남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K 또한 자신이 이 진눈깨비와 안개의 고장에서 연기가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존재가 흐려지고 넘실거리는 현상이 되어가는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이미 트렁크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 또한 창백한 안개로 변해 잘 보이지 않았다. K는 마음을 다잡는 듯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건조한, 그러나 엄청난 수분이 폐로 들이닥쳤다. K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냉기를 몸 안쪽에서부터 느끼면서 폐렴환자처럼 기침을 토했다. 그러자 몸이 흔들리면서 다시 K는 자신이 K가 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뒤쪽에서는 트렁크의 작은 바퀴가 돌덩이 위를 구르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렸다. K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거기에는 조악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튼 K는 그것을 눈앞 아주 가까이 두고 보면서 길을 찾았다.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바로 전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인기척들이 진눈깨비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냈다가, 또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거리의 상점들은 불이 켜져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며, 가끔 보이는 간판들조차 그것들의 네온사인이 이미 가게를 닫았는데도 아무 의미 없이 켜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장사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유령의 거리>라는 문장이 K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여럿이서 유영하고 있었다. 이십 분을 걸었을까. K는 어느 낡고 작은 콘크리트 건물의 현관 앞에 서있었다. 빛이 바래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간판에는 K의 약도에 갈겨진 것과 비슷한 문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K는 트렁크를 들고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층의 좁은 카운터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여자가 잡지를 읽으며 반쯤 조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심지어 시체처럼 보이기도, 혹은 밀랍으로 만든 인형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녀는 가끔씩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끝으로 코안경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K의 구둣발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잠이 깬 듯 고개를 들었고, 회색 코트 차림의 뻣뻣하게 서있는 낯선 방문객을 십 초 정도 가만히 쳐다보았다. “Добро пожаловать.” 늙은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K는 그녀가 무엇이라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카운터로 다가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Two nights, three days.” 그는 두 개의 손가락을 폈다가 그 뒤에는 세 개의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늙은 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160 рублей.” 여자는 말하면서 왼손으로 한 개의 손가락을 펴고 접더니 양손으로 여섯 개의 손가락을 폈다. K는 대충 알아들은 듯 지갑을 꺼내 160 루블을 카운터 위에 놓았다. 늙은 여자는 그것을 집어 카운터 안쪽의 서랍에 넣더니 열쇠 하나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второй этаж. комната 204.” 그녀는 천장을 가리키더니 카운터 위에 손가락으로 숫자 204를 그렸다. K는 열쇠를 받아들고 아무 대답도 없이 계단 쪽으로 트렁크를 끌고 갔다. 그가 트렁크를 짊어 매고 계단을 오르는 와중 갑자기 카운터 쪽에서 낮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Вам нужна девушка?” 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K는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무어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별 얘기 아닐 것이라는 짐작으로,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러시아어로 <Спасибо.>라고 웅얼거리듯이, 그러나 카운터까지 들리도록 내뱉었다. 그리고 계속 트렁크를 짊어 맨 채 2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객실 204호의 문을 찾아 열쇠를 돌리고 열자 좁고 창백한 방이 나타났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그 방에는 낡은 침대 하나와 그와 마주한 둥근 탁자, 의자가 놓여있었으며, 탁자가 놓인 쪽의 옆에는 가스통이 연결된 레인지, 긴 벽 한편에는 나무로 된 옷장과 캐비닛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도배도 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 한가운데에는 굉장히 뜬금없이 지문과 얼룩 투성이의 거울이 하나 걸려있었다. <화장실과 세면대는 복도 어딘가에 공용으로 있는 모양이군.> K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끌고 온 트렁크를 밀어내듯이 거울 밑에 두고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았다. 녹슨 스프링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방 자체가 너무 창백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두리번거리자 탁자와 침대 사이의 좁은 벽의 다소 높다 싶은 위치에 창문이 하나 뚫려있었다. 방안을 온통 희멀겋게 만드는 핏기 없는 빛은 그곳으로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푸른 하늘도 황금색의 태양도 없이 오로지 백색과 회색으로 뒤덮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조한 하늘만이, 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그것이 창문으로 쏟아져내려오고 있었다. 창문에도 얼룩이 많아 명확히 밖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도 진눈깨비가 계속 흩날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은 완전한 정적이었다. 만약 소리에도 색깔이 있다면, 이 여관방의 소리는 완벽히 무색이었다. K는 얼굴을 쓸어내리듯이 모자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좁은 방의 낡은 침대 위에서, 그는 가만히 앉아, 그 정적과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자신이 오롯이 혼자라는 기분을 강하게 느꼈다. K는 이 도시의 하늘만큼이나 흐려진 눈동자로 별 의미도 없이 중얼거렸다. “Спасибо.” 그 말마디는 창백한 공간 속에서 잠깐 흔들리더니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그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만약 누가 본다면 그가 앉은 채로 죽은 것이리라 생각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다가 그는 왼손에 찬 시계를 보았는데,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현지시각으로 맞춰둔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고 백색이고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밤도 낮도 아니었다. “뭘 좀 마셔야겠어.” K가 중얼댔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카운터에는 여전히 그 늙은 여자가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아니면 자고 있었나?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아무튼 K가 구두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와 여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 늙은 여자가 외치는 것이었다. “Сэр, сэр.” K는 물론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자기를 부르는 것이리라 생각해 그녀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그러자 여자는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Десять. Десять часов.” K는 어리둥절해 그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10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K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Она придет сюда десять часов.”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열 손가락을 펴고 있다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K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는 듯 손을 내리는 것이었다. K는 여전히 저 노년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K는 그대로 술집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거리는 여전히 안개와 진눈깨비의 진창이었다. 백색의 탁한 하늘은 끊임없이 작은 눈송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K는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잠시 쳐다보다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작정 걸었다. 어디에 술집이 있는지도 몰랐고 시야는 여전히 좁고 짧았다. 그보다 K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물가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알코올이 든 것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발걸음만 재촉하고 있었다. 딱히 무언가에 절망한 것도, 진눈깨비만 계속 흩날리는 이 회색 도시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는 술과 걸음이 필요했다. 얼어붙은 안개 때문에 이 드넓은 도시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K 자신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바닥은 얼음으로 미끌미끌 거렸다. 그의 닳은 구두창은 계속해서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얼음 위를 디디고 있었다. 그때 K는 어디에선가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눈깨비와 안개 때문에 지금까지 K는 그 어떤 소리도 자신의 귀로 들어올 수 없었음을, 귓바퀴에 닿기도 전에 젖은 솜처럼 무너져버렸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 어디로부터 그 소음이 오는지를 탐색했다. 그것은 빼어 들은 은장도처럼 얇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자세히 듣고 있으니 그 소음은 어떤 멜로디와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음악이었다. 음원으로부터의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내륙의 기후 때문인지 그것은 한없이 소음에 가깝게 들렸지만, 분명 음악이었다. K는 홀린 듯이 그 소리를 쫓아갔다. 오 분인가를 걸었을까, K는 모두 검고 칙칙한 코트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느 벽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벽을 등진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그는 특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반원을 만드는 사람들은 차갑게 젖은 바닥에 주저앉아있거나 더러는 구부정한 허리로 서있었는데, 모두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무표정하게 연주자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이 어떤 곡인지 K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몹시 빠르고 날카롭고, 끝없이 음정이 바뀌는 공격적인 곡이었다. 그런데도 그 연주는 어째서인지 무척 슬프게 들렸다. 바이올리니스트는 키가 크고 새까만 코트를 입은 남자처럼 보였는데,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가슴께까지 오는 길고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으며, 또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 악기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에 가려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매 끝으로 보이는 연주자의 회색의 앙상한 손은 활을 몹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그의 몸체는 약간의 제스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거의 동상처럼 무뚝뚝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K는 뒤늦게 연주자의 발 앞에 바이올린의 케이스가 펼쳐져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단 네 닢의 코페이카 동전들만이 처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연주자의 바이올린이 길고 높은 소리를 내며 마침 하나의 곡을 마쳤다. K는 관객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곡이 끝났는데도 박수나 환호성은커녕, 약간의 움직임도 없이 여전히 창백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아마도 가난과 추위가 박아놓은 깊고 불행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그런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동자로 연주자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주자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현에서 활을 떼더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Следующая песня <Дьявольское усмешка>.” 여전히 연주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 활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음의 폭포가 쏟아져 나왔다. 웅장하고 거칠지만 어린 여자아이의 새된 비명 같은 소리가 K를 압도시켰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차갑고 건조한 내륙도시에 있다는 것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슬픔이었다. 말하자면 이 대륙이나, 도시나, 건물들이나, 사람들의 생김생김, 그리고 연주자의 보이지 않는 얼굴과 무표정한 슬픈 관객들도, 모든 것이 다 비극이고 슬픔이었다. 바이올린이 토해내는 극한의 고음과 비명소리 또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때 K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관객들을 돌아봤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떤 공감 같은 것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를 일이었고, K의 눈동자가 발견한 것은 어떤 반사광이었는데, 관객들의 가장 뒤편에 구부정하게 선 채 뒷짐을 지고 있던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노인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빛나는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었다. 그 눈물의 반사광이 K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자신도 왜 놀랐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쏟아지는 음의 입자들 사이에서 그 지독하게 늙은 노인은 딱 한 방울의 눈물만을 흘렸다. 사실상 관객 모두가 울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불행과 슬픔이 엉클어진 눈동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 노인만이 눈물을 흘렸고, 그로 인해서 K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거의 폭력적으로 다시 현실에 추락했다. K는 또 한 번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것을 강력하게 느꼈다. 이젠 그 장발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 들려왔다. 그러나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소음이 되어버렸다. K는 심한 탈진을 느꼈다. 그때 곡이 끝났고, 이번에는 몇 명의 관객들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코페이카 동전을 던져 넣었다. 연주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얼굴을 조금 숙여보였다. K는 입안에서 지독한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 안쪽의 살을 이로 깨물면서 지갑을 꺼내, 100 루블 지폐를 손에 쥔 채 관객들을 가르고 연주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케이스 안에 그것을 떨어트렸다. 머리카락에 가려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K는 그 바이올리니스트의 눈이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막 같은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Спасибо, сэр.” K는 잠시 멈춰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장소를 떠났다. 그때 K는 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을까? 자리를 떠나는 K의 뒤편에서 점점 멀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Следующая песня…… <Паганини Каприс № 24 в минор>…….”
K는 자신이 술집을 찾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은빛이고 회색인 칙칙한 하얀 하늘을 둘러보았다. 지평선 한 쪽에 작은 구 하나가 떠있었는데 그것은 달인 것 같기도 했고 심하게 빛바랜 태양인 것 같기도 했다. K가 몸을 돌려 반대쪽 지평선을 보자 그곳에도 하나의 구가 있었다. 그것 역시 태양인지 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낮도 밤도 아니었다. 애당초 낮이나 밤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나 한 땅인지도 알 수 없었다. K는 마른 숨을 들이쉬었다. 진눈깨비와 얼음, 냉기와 무채색의 공기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단순히 자신의 위치에 대한 목적성을 잊은 것뿐만이 아니라, K라는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황량하고 별 이유도 없이 넓은 거리에, 그리고 사방으로 가지를 치고 있는 골목들 사이사이에 오로지 K 한 사람만이 뜬금없이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강한 바람이 돌바닥에 부딪치며 불어왔다. 이들이 후두둑 떨어져나갈 것 같은 냉기에 K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옷자락을 여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참이나 무아지경으로 알지도 못하는 거리를 걸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K는 멈춰 서서 코트를 더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떤 콘크리트로 만든 상자 같은 건물의 뽀얗게 먼지가 쌓인 회색 유리창 안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네온사인이 깜빡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너무 오래 되어서 점멸을 반복하며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는데, 전광이 그리는 키릴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문자 뒤에 술병을 하나 초록색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술집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K는 건물로 다가가 도무지 상점 같지도 않아 보이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현관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건조하게 마른 곰팡이 냄새와 찐득하게 눌어붙은 알코올의 냄새, 그리고 썩은 기름 냄새가 온몸에 끼쳤다. 그 냄새에 K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나라의 어느 땅을 가든 이러한 퇴폐와 가난의 냄새는 항상 K를 안도하게 했다. 물이라곤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적도의 사막에 소금기둥으로 지은 건물이든, 사방이 젖어있는 남미의 목조건물이든, 심지어는 이 인간의 나라 같지도 않은 대륙의 한복판이든, 가난하고 불행한 남자들이 하나 둘 씩 모여 가끔씩 취한 팔로 술병을 넘어트리곤 하는 술집이라면 어디든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K를 술집 안에 모여 있는 십여 명 쯤 되는 남자들이 무관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둘씩 혹은 혼자 테이블이나 바테이블 앞에 앉아있었고, 술집 안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으나 춥고 어두웠다. 음악 따위는 없었다. K가 문을 닫으며 한 걸음을 들어오자 남자들은 이 공간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으며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듯 다시 자신의 술잔으로 눈길을 돌렸다. 몇 명인가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너무 작고 낮은 소리라서 인간의 말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K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바Bar로 다가갔다. 그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두면서 철제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러자 바텐더인지 급사인지 알 수 없는, 턱수염을 짧게 기른 남자가 바테이블 너머로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Добро пожаловать, сэр.”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새 익숙해진 발음과 억양에 K는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떡거리고 말했다. “Vodka.” 그러자 남자는 미묘하게 다른 발성으로 <Водка.>라고 반복하더니 뒤편에서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키릴문자로 무어라고 로고가 찍혀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로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단순하고 아무런 디자인도 되어있지 않은 단순한 인쇄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남자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바 안쪽에서 유리잔을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더니 컵받침도 뭣도 없이 냅다 K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에 두었던 술병의 내용물을 잔에 따르는데 잔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다시 마개를 닫아 내려놓았다. 술을 따르면서 흩어진 알코올성의 투명한 물방울들이 니스 칠도 제대로 되지 않은 목조 바테이블 위에 점점이 얼룩을 만들었다.
K는 잔속의 그 맑지만 어쩐지 끈적거려 보이는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보다가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싸구려 보드카 특유의 역한 알코올과 오크나무의 냄새가 났다. 그는 잔을 들어 보드카에 윗입술을 담갔다가 단숨에 절반을 삼켜버렸다. 철수세미가 식도를 긁고 내려가는 느낌이 든 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K는 그 타격이 몸속의 열기로 변할 때까지 잠깐을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전부 마셔버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후 때문에, 안개와 진눈깨비와 새하얀 하늘 때문에 계속 흐리멍덩한 채였던 K의 존재성이 화들짝 깨어나며 한층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정수리로 치솟는 알코올의 열기 때문에 좌우로 고개를 흔들다가 몹시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K는 술집의 구석구석과 거기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현관 밖의 거리도 온통 진눈깨비가 흩날려 깨닫지 못한 것이었지만 술집 안의 공간은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하는 작은 먼지와 티끌들로 안개처럼 자욱했다. 취객들은 그 먼지투성이 공기를 마시며 동시에 독한 술로 식도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공간에, 그림자가 지고 빛이 비추지 않는 모든 구석에 슬픔들이 작은 요정들처럼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열 명이 될까 말까 한 손님들의 얼굴은 모조리 슬픔에 지워져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달걀귀신 같아 보였다. 그 창백한 마스크에는 오로지 기계적으로 잔을 들이키는 칙칙하고 앙상한 손아귀만이 오고가고, 보일 리 없는 표정은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K는 다시 자신의 잔으로 고개를 돌리고 급사를 불러 빈 잔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Once more.” 급사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전의 병을 가져와 다시 반잔을 따랐다.
거의 오일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값싼 보드카가 유리잔에 차올랐다. 이 춥고 황량한 도시에서 K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혹은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 나라에 온 것도 아니었다. K는 백야의 한가운데서 늙고 가난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Водка>라는 익숙히도 수상한 액체를 마시고 있다. 차가운 공기로 꽉 찬 술집에는 단 하나뿐인 난로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K는 자신이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이 공간에서는 그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짙은 슬픔이 어두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고 K는 그에 반항하듯이 잔을 들이켜 댔다. 벌써 그는 세 잔인가 네 잔을 마셨다.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그의 정신은 벌써 우유거품처럼 물렁물렁하고 덧없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삶이란 위치에 따라서도 정말 공허해질 수 있지.> 그는 중얼거렸다. 이 하얗고, 내륙의 회색도시에서 취하는 것은 그의 고향 땅에서 취하는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잔을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그는 편안해지기는커녕 점점 불안해졌다. 그 불안은 이상한 것이었다. 마치 철근 콘크리트 건물 꼭대기에 서서 수십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며, 언제 떨어질지를 셈하는 것 같은 기괴한 불안이었다. 어느새 K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듯 떨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며 급사를 불렀다. “저기…… I mean, Can I buy some cigarette?” “Sigareta?” 급사는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타바코. Tobacco.” “Ах! Табак.” 급사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담뱃갑으로 보이는 굉장히 간단한 로고가 찍힌 흰색 갑과 성냥 한 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десять рублей.”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K는 여관 주인이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이며 <десять>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10 루블을 올려놓았다. 급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지폐를 쥐어 자신 쪽의 테이블 밑에 넣었다. 여관의 숙박비를 생각해보았을 때 10 루블의 담뱃값이라는 것이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지금에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놀랄 정도로 아무런 문양도 없는 종이상자를 열어 한 개비를 꺼냈는데, 그것은 필터조차 없는, 그저 말린 담뱃잎을 얇은 종이로 싸놓은 것에 불과했다. K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긁어 불을 붙였다. 독한 타르 연기가 폐로 내리꽂혔다. 그러자 눈앞이 번쩍거리며 이 구석진 술집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명백히 보였는데, 계속 구석에 있던 작고 슬픈 요정들은 이제 탁한 백색으로 보였다. 니코틴이 뇌를 흔들어놓자 K는 자신의 마음 밑바닥보다도 아래에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둡고 차가운 거대한 공허에서 비통이 수많은 다리를 흔들어대며 심장의 수면 위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K는 연기를 뿜으며 손에 불붙은 담배를 쥐고 키들거리는 것인지 기침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리를 흘렸다. 그는 뚫어질 듯이 거의 다 비워진 술잔을 노려보고 있었고, 곧바로 나머지를 전부 마셔버렸다. K는 급사를 불러 손가락으로 빈 잔을 두들겼다. 급사는 전과 똑같이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K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K의 얼굴에서도 점점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기묘한 증류주에 취하면 취할수록 그는 자신의 영혼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처참한 현지인들과 같은 종류의 비극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왜 이 광활하지만 황량하고 심지어는 인기척도 없는 거대한 도시의 한구석에서 굳이 술집에 들어왔을까. 갑자기 K는 북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마시던, 녹은 황금 같던 아니스 주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 나라의 술은 너무 추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담배연기를 뿜더니 오기를 부리는 것처럼, 새로 채워진 잔을 송두리째 마셔버렸다.
그가 언제 술집을 나온 걸까? 어느새 K는 취한 채로 흔들거리며 거리에 서있었고,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에는 담뱃갑과 성냥갑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얼마를 내고 술집을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취해 비척거리며 사방이 다 똑같아 보이는 어두운 회색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여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K의 이성은 이 미로 같은 도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코올에 적셔진 그의 무의식은 어디에 여관이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눈동자로 들어와 충돌하는 진눈깨비 때문에 눈을 비비며, 흔들흔들 걷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하얀색, 그가 얼마나 오래 술집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도시 어딘가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있다는 인상을 K는 받았다. 그는 계속 걷다가 뿌연 시야 저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흰색인 것 같기도 하고 검은색인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그것은 온몸의 표면에 은색의 진눈깨비를 뒤집어쓴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쭉 뻗고 너부러져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고 살아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깊이 눌러쓴 모자와 코트는 모두 검은색으로 그 자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위에 들러붙은 눈 결정들이 번쩍여 마치 은색으로 칠해놓은 검은 바위처럼, 희부연 공기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그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K와 <그것> 둘뿐이었다. K는 은빛으로 빛나는 그 검은 코트 덩어리를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K의 머릿속은 보드카에 녹아 점액질이 되어버린 것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그는 흔들거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30초인가 쳐다보더니,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다시 비척거리며 걸어가 버렸다.
술기운이 알려주는 대로 여관건물을 찾아 들어가 K는 미묘한 동작으로, 여전히 잠을 자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여주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경례를 보내고 계단을 올랐다. 직각의 계단을 나선을 그리며 오르는 K의 모습은 참으로 그가 <이 나라>에 녹아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204번 방의 현관문에 이마를 박은 채 K는 한참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건 담배고, 이건 성냥갑이고, 이건 지갑…… 아, 그래, 열쇠는 안주머니에 있었지. 마침내 문을 열고 쏟아지듯이 방 안으로 들어간 K는 모자와 코트부터 벗어 나무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그는 넥타이와 조끼를 벗을 생각도 못하고 우선 구두와 양말부터 벗어던진 채 곰팡이 냄새가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이 나라에서는 참 황량한 냄새가 나는군. 이 도시에서는…… K는 침대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5분인가를 그러고 있었다. 그는 몹시 취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고, 눈을 감고 있지만 여전히 눈꺼풀 안에서는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광경이 훤히 보였다. 창문에서는 어둡고 하얀 <색깔>이 빛도 안개도 아닌 2차원적인 모습으로 방안을 향해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커튼을 쳐야겠어.> 여전히 침대보에 얼굴을 박은 채 K가 생각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창문에 커튼을 쳤는데, 그때 현관 쪽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술에 취한 K가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려 환히 열린 현관에는 한 여인이 서있었다. 아니 여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앳되고 어려 보였다. 그녀는 회색 털모자와 값이 나갈 것 같아 보이는 모피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신발을 보자 그 낡고 색이 바래버린 구두는 털모자와 모피코트 또한 그저 <비싸 보일뿐>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What can I help you." K는 꼬인 혀로 물었다. “Сэр, я……” 소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K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를 향해 취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아주 가까이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0cm쯤 되는 키, 유난히 하얀 얼굴에 비통이 담긴 밤색 눈동자, 아무리 봐도 18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 윤곽 등.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웠다. K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밤색 눈동자에 담긴 비극과 슬픔도, 그것은 물론 강력한 비관이지만 소녀의 젊은 피가 그 비관마저 희망과도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K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이곳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말로 어딘가에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What is your name." K가 천천히 물었다. 그녀가 영어를 이해하는지 어떤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뜻은 통할 것이라고 그의 취한 머리가 결론을 내렸다. “……Анна.” “안나.” K는 되뇌었다. <아 그래, 이제야 알겠군.> K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손목시계를 봤는데 시간은 딱 10시 정각이었다. K가 이 여관에 들어와 체크인하고 트렁크를 든 채 계단을 오를 때, 여주인이 외쳤던 문장 말이다. 그때 K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집을 찾아 여관을 나갈 때 여주인은 숫자 10, 10시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안나라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자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눈동자는 분명히 평범한 소녀의 눈동자가 아니었고, K는 고향 땅에서도 북아프리카의 해변도시에서도 그런 눈동자를 몇 번이나 봐왔었다. 특히 해가 지고 나서, 구석진 유흥가의 네온사인과 붉은 불빛 속에서 말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비극과 비통으로 영혼이 함몰된 눈동자들. 그러나 그런 눈동자를 가진 여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마네킹처럼 웃고 있었다.
K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며 작은 나무 의자를 내주었다. 그녀는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그러나 순순히 나무 의자에 앉았고, K는 현관문을 닫으면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닫힌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성냥을 긁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신을 좀 차려야했다. 그는 독한 연기를 내뿜으면서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안나라는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10초 정도 지났을까. K는 별 생각 없이 안나를 향해 열린 담뱃갑을 내밀었다. 그녀는 선뜻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결국 담배 한 개비를 얇고 하얀 손가락으로 꺼냈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 때 K는 성냥을 하나 긁어 불을 붙여주었다. 안나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그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K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몸을 조금 떨며 내뱉을 때, 단숨에 그녀가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K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연기를 피우며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나는 K의 검고 단단한 눈동자를, K는 안나의 밤색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K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걸음을 옮겨 방의 캐비닛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사기 재떨이와 굉장히 조촐하고 멋없는 티세트가 들어있었다. K는 그것들을 전부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가스레인지 위에 있던 양철 주전자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분명 당황하고 있을 안나를 내버려두고 K는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싸구려 여관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있을 것이다. 그녀가 사는 나라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싸고 좁은 여관방. 테이블 밑에는 회색 코트와 모자가 엉망으로 너부러져 있고 침대 맡에는 검은색 구두 한 쌍과 뒤집어진 양말이 아무렇게나 떨어져있을 그 방에서. 분명 방 안에서는 K가 마신 보드카의 냄새가 역하게 나겠지. 그러나 K는 화장실을 찾아 양철 주전자를 들고 비틀비틀 걸을 뿐이었다. 공용 화장실을 찾아 수도꼭지를 열자 흰 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30초 쯤 지나자 물은 투명한 색을 띄기 시작했다. 그러자 K는 양철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양철 주전자에 물이 가득 담기자 K는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놓고, 가스통에 연결된 레버를 연 뒤 성냥을 긁어 가스가 새는 소리를 내고 있는 레인지 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K는 안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연신 담배를 피우며 주전자를 달구고 있는 불꽃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등도 켜져 있지 않고 창문에 커튼까지 친 방안에서 광원이랄 것은 가스레인지의 불꽃과, K와 안나가 피우고 있는 담뱃불뿐이었다.
주전자 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자 K는 가스레버를 잠그고 주전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잡한 문양이 그려진 차 주전자를 열자 거기에는 밀봉된, 정말 소량의 찻잎이 들어있었고, 그 찻잎과 뜨거운 물로 K는 천천히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안나는 이미 다 태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놓고 입을 다문 채 K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컵받침도 없이 K는 자신과 안나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았고 곧 차를 따랐다. 이제 K는 안나와 마주앉아 있었으며, 컵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홍차였다. “맛이 없군.” K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 홍차라고 할 수도 없는 차는 정말로 맛이 없었다. 그런데 안나를 보자 그녀는 찻잔에 손을 뻗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것인가? K는 달리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길을 내린 채 그 맛없는 홍차를 계속 마셨다. 그런데 그 어두운 방안에서, 오로지 커튼을 비쳐 들어오는 흰색 미광만이 시야를 확보해주는 방안에서 안나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모자와 코트를 벗는 것이었다. 그녀는 코트 안에 거의 비쳐 보일 듯한 네글리제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일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한 것이겠지! 흰색의 미광 속에서 그녀의 몸은 정말로 앙상하고 창백했다. 피부 밖으로 모든 골격과 늑골 밑에 진 그림자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젖가슴마저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K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황량한 도시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어떤 온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계속 차를 마셨다. 안나는 분명히 아름다웠지만 K에게는 전혀 그녀를 탐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진탕 취한 채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K는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여인에게 정욕을 느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게 오랜 시간을 홀로만 살아온 것 같았다. <언제나 어떤 처절한 갈구는 있었지만, 그것은 에로스가 아니었던 것 같다.> K는 머릿속으로 중얼댔다. K는 찻잔을 비운 뒤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안나를 스쳐지나가 코트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마치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순식간에 잠에 들어버렸다. 안나는 잠든 K를 그녀의 그 깊고 불가해한 눈동자로 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K가 심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눈을 감은 채 자고 있는 안나의 얼굴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로, 안나는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 K의 바로 옆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왜 돌아가지 않은 걸까. 술기운 때문에 중간 중간 이가 빠진 기억 속에서 K는 그녀의 앞에서 거의 모욕적으로 지갑을 테이블에 놓았던 것을 기억했다.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모르는 멍청하고 취한 이방인의 두툼한 지갑을, 매춘부라면 누구나 그저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K는 이불을 덮은 채 침대 위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지갑은 누가 건드린 자취조차 없었다. 안나라는 소녀는 네글리제 차림으로 바로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고, K는 자신이 넥타이와 조끼를 벗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깨끗하게 개어져 침대 끝에 걸려있었다. K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안나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창문은 여전히 흰 밤이었다. 하얀 연기가 어두운 방 안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K는 재떨이가 있는 테이블로 가기 위해 누워있는 안나를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침대가 흔들렸고, 그녀는 가만히 눈을 떴다. 이미 테이블 앞에 도착한 K는 사기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잠에서 깬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이불 밖으로 다리를 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 K는 안나가 거의 반나체 차림으로도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넌 아직 어린데.” K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안나가 대륙 끝에 있는 작은 반도의 언어를 이해할 리도 만무했다. 넌 아직 어린데. K는 다시 중얼댔다. 그런데 안나는 뭐라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Мы хорошо провели ночь.” 그렇게 말을 마치면서 소녀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것은 마네킹 같은 웃음도 아니었고 억지로 일그러뜨린 웃음도 아니었지만, 순수한 슬픔이 입 꼬리에 흠뻑 젖은 형언할 수 없는 감각적인 웃음이었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꽁초만 남았을 때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지지고, 아직도 10개비 가량 남아있는 담뱃갑을 성냥갑과 함께 안나에게 던졌다. 침대에 떨어진 두 개의 상자를 안나는 집어 한 개비의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일 때, 어제 마시다 남은 홍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던 K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도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너와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이 있지. 아무리 흰 어둠과 가난과 진눈깨비와 안개가…… 시민들의 생명력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자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는 차갑게 식은, 더럽게 맛이 없는 홍차를 목구멍을 씻어내듯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의 지갑을 집어 안나에게 건넸다. “나로서는 얼마를 당신에게 지불해야할지 모르겠군.” 안나는 지갑은 받지 않은 채 K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지갑을 받아, 몇 장인가의 루블 지폐를 꺼내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칠비칠 일어나, 털 코트와 모자를 착용하고 다 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넣으며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제 K는 의자에 앉아 현관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기 직전, 안나는 말했다. “Спасибо……. I…… I will come here…… today evening……." 러시아 억양이 잔뜩 들어간 어설픈 영어로, 그녀는 말했고, K는 아무 대답도 없이 한 개비의 담배를 또 꺼내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K가 공원 벤치에서 눈을 뜨자 이미 아침이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공기가 그를 뒤덮고 있었고 공원의 잔디들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벤치에 쓰러져 자고 있던 K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는 텅 빈 보드카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노스탤지어, 타지에 대한 그리움, 어쩌면 그것은 타지가 아닌, 그곳에서 만난 단 하나의 온기에 대한 그리움. 알코올은 여전히 두개골 속을 웅웅 울리게 만들고 있었고, 잠을 깨려 얼굴을 쓸어내리자 눈가에서 말라붙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K는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에 황금빛 구름들이 흘러 다니고, 동쪽 저 끝에서 이미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비틀대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주 슬프고 아련한 꿈을 꾼 것 같았다. K에게 과거란 엉망으로 뒤섞인 반죽 같아서, 북아프리카에서의 일도, 러시아 대륙에서의 일도, 이미 모조리 섞여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뒤섞인 기억들은 분명히 K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여태까지도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은 가끔 폐인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바닥을 딛는다면 다시 걸어야 하는 거야. K가 두통과 함께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는 빈 보드카 병을 쥐고 공원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부은 두 눈을 비비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집에 가야겠어.” K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 하늘은 점점 밝아왔다. 북아프리카의 아침처럼, 바다 위의 배에서 열병을 앓을 때처럼, 심지어는 태양과 달이 분간조차 되지 않던 러시아에서처럼. 고향 땅에서 그는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갖지 않고 다만 터벅터벅 걸었다. 입안으로 자기도 모르게 <Спасибо.>라고 중얼대며, 밝아오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우화羽化의 꿈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렇다면 끝이 안 보이는 어둠과 감금 속에서도 안락을 찾은 채, 그러나 천변만화한 변화를 멈추지도 않은 채 언젠가 고치가 찢어질 것을 굳게 믿을 텐데.” F는 쇠락한 마을광장을 빙글빙글 돌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노을 아래 그 광장은 온통 주황색과 붉은색 투성이였으며 사방에 고철이나 더 이상 쓸 수 없는 목재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있었다. F는 자신이 이 마을광장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를 헤아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셈으로는 구할 수가 없는 숫자였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부터 옅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그 무성한 수염들은 그의 쇄골까지 지저분하게 내려 와있었다. 그는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몰랐고 언제부터 마을광장에서 살았는지도 몰랐으며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죽지도 않고 움직이는 청동상처럼 광장에 붙박여있다는 것이었다. F는 과연 자신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노쇠하여 기억력이 좋지 않아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없어서 뜬금없이 노인으로 생겨나 마을광장에 처박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광장을 돌다가 버려진 유리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것을 햇빛이 반사되도록 비스듬히 들고 자신의 얼굴로 향하자, 쇳물로 만든 것 같은 딱딱하고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 비춰보든 항상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모양이었던 때가 있기나 한가? F는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유리조각을 집어던지고 절망에 빠져 자신의 침낭으로 향했다. 광장 구석의 어느 계단참 밑, 언제나 그늘이 지는 그곳에 F의 침낭과 음식, 몇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었다. F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무너져 내리듯이 침낭 위로 쓰러졌다.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는 눈을 감은 채 또 한 번 같은 문장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상하기 시작한 음식들 위에 날벌레들이 왱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오물과 썩은 야채 따위의 냄새가 지독하게 피어올랐다. F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굶어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고, 이 마을광장에는 여름도 겨울도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꽉 막힌 막다른 골목에 쓰러져있다고 생각해왔고 어느 모로 생각해봐도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오래 전부터 F는 은연중에 자신의 죽음을 희망해왔지만 그의 교묘한 직감은 그가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저주 같이 속삭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F는 침낭 위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 눈을 떴는데, 시선 저 끝에 보이는 벌레 먹은 축축한 널빤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고 F 자신도 그 널빤지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상 그 광장에 놓인 모든 폐기물들이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썩지도 불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심지어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하며 F 자신과 같이 그저 천년만년 그곳에 버려져있기만 했다. 변화의 낌새 같은 것은 이 광장 어디에도 없었다. F는 무의미하게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광장이 늘 노을빛이라는 것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저주도 이미 몇 년을 반복해온 것이었고, 아무리 저주해봤자 해는 지지도 않고 머리 꼭대기에 걸리는 일도 없이 항상 비스듬히 광장과 납덩어리 같은 구름들을 붉게 비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으나 사실은 이 광장의 모든 것이 비수처럼 찔러대는 진실이었다. F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침낭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심지어는 목적도 없이 버려져있는 것 같다고, F는 늘 생각해왔다. 물론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F의 일과라고 해봤자 매일 똑같았던 것이, 잠에서 깨면 노을빛인 광장을 서성거리며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번데기가 되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너무 걸어 다리가 저려오면 침낭에 쓰러지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면서 잠들었다가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은 채 잠에서 깨면 또 이전 그대로인 붉은빛 광장 앞에 황망하게 맞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가끔 분노에 차 도대체 어디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저주를 퍼붓다 주저앉아 다시 울곤 했다. F는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이 신의 저주처럼 생각되었다. 아니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그자의 악의적인 심심풀이 장난이라든가 말이다. 저 널빤지나 깨진 유리조각들, 고철들은 F와 똑같은 처지임에도 절망하고 저주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의식이 없고, 같은 존재라도 F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버려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생각이나 의문조차 버려져있었다! 그러나 F는 그런 널빤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널빤지나 고철 따위가 된다면 꿈도 꾸지 않는 무無와 공空의 세계에서 안락하겠지! 그러나 F는 그 자리에 있는 자체로 침묵하는 사물이 되기보다는 번데기가 되고만 싶다는, 자신도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갈망으로 매일을 울부짖었다. 그는 처절하게 안락을 바랐지만 동시에 절대로 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안주한다는 것이 죄악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러한 선악의 구분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 늙은이는 서성거리고 고함을 지르고 울고 쓰러지며 고통 속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일, 그야말로 매일 매일 반복되었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광장에 나타났다. 그자는 햇빛을 가리려고 밀짚모자를 쓰고, 몹시 닳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팔뚝이나 목덜미가 새까맣게 탄 것이 어떻게 보나 나그네 같았다. 그런데 그는 양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고 맨발에 나무와 끈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털레털레 나타난 것이었다. F는 몹시 놀라 둥그레진 눈동자로 그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그네는 밀짚모자를 추켜올리고 광장을 슥 둘러보더니 F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것이 악마이려나?> F는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장, 말 좀 물읍시다.” 나그네의 목소리는 겉보기보다 훨씬 어리고 카랑카랑한 음색이었다. “나는 이 마을에 들어와 세 시간 가량을 돌아다녔는데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고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건물과 가게들은 멀쩡히 있는데 왜 아무도 이곳에 없는 거요?” F는 그 나그네가 충분히 가까이 왔기 때문에 드디어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나그네의 눈동자는 청회색으로 번쩍거렸고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F는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오래 전에 이웃마을에 돼지농장이 생겼소. 안 그래도 불경기만 지속되던 이 마을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웃마을의 커다란 돼지농장으로 모조리 옮겨가버렸소.” “노인장은 왜 가지 않았소?”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그네가 물었다. “나는 이 광장에서 수 년 간 번데기가 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소.” F의 대답에 나그네는 팔짱을 끼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물었다. “이웃마을에 가면 볼거리가 좀 있소?” “듣기로는 큰 울타리 안에서 다 자란 돼지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갈 때 그것들이 꽥꽥거리는 모습이 볼만하다고 하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위악적이고 높은 목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돼지농장은 이웃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군!” F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주춤거리면서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F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 같이 쉴 곳 모르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언지 아오?” “글쎄, 나는 항상 이 광장에서만 살기 때문에……” “칼과 성냥이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마을에를 가든 사막에를 가든 심지어 눈밭뿐인 설국에를 가든 무서울 게 없지.” “그래서 짐이 없군.” F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 이 마을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성냥뿐이오.” 그렇게 말하더니 나그네는 밑도 끝도 없이 F의 따귀를 있는 힘껏 올려붙이더니 깜짝 놀란 그의 목덜미를 잡아 무시무시한 힘으로 광장 구석에 던져버렸다. 얻어맞고 던져진 F가 얼이 빠진 채 볼을 부여잡고 있는 동안 나그네는 F의 침낭, 잡동사니, 음식, 옷 따위가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거칠게 한 군데로 모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에 불을 긋고 F의 물건더미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면서 침낭과 물건들은 점점 재가 되어갔고 불길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높이 치솟았다. 나그네는 그 꼴을 잠시 보고 있더니, F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밤이 오기 전에 난 떠나야겠소.” 그리고 그는 터벅터벅 광장 밖으로 걷더니 연기라도 된 듯 사라져버렸다. F는 황당하고 겁이 난 채로 불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활기와 함께 공포가 그의 혈관 속을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건들이 다 타버리고 불길이 꺼질 무렵, 갑자기 해가 졌다. 사방이 새까맣고 암청색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떠올랐다. F는 이제 일어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맞는 밤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광장조차도 검은색이었고 어디에도 노을은 남아있지 않았다. F는 광장의 바깥, 멀리 보이는 마을의 현관에 짙은 그림자가 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침엽수와 활엽수들이 마구잡이로 어둠 속에 뭉개져있었고 작은 오솔길이 분명히 그곳에 있을 터였다. <번데기가 되었구나.> 하는 믿음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F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오솔길을 따라 떠나자고, 인생 최초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나타나엘은 몹시 당황해있었다. 지금 그는 어떤 감옥의 철창 안에 있었는데, 몹시 좁고 지저분한 그 감방은 한 사람을 구속시키고 생활하도록 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와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있고 철창이 쳐져있어 보이지도 않는 단 하나 뿐인 창문이나 딱딱한 침대에 들끓는 빈대, 벼룩 따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타나엘이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간수에게 몇 번이나 상황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늘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당신은 구속되었소.> 따위의 대답만, 사실은 대답조차 될 수 없는 말마디만 내뱉는 것이었다. 애당초 사건의 발단부터가 나타나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직장에서 퇴근해 저녁을 먹고 약간의 운동을 한 뒤, 허브티를 마시고 ―지금은 이미 감촉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새벽 즈음엔가 난데없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그의 얼굴에 검은 가죽자루를 씌우고 어디론가 한참을 끌고 가더니 이 감방에 처넣어버린 것이었다. 감옥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제일 먼저 회사의 상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단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근한 일이 없는 나타나엘이 갑자기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면 상사는 분명 불쾌해하면서 전혀 나타나엘에게 이득이 될 리 없는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철창을 붙들고 간수에게 전화기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으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은 구속된 몸이고 전화 따위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소.> 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흥분하여 <나를 납치한 당신들이 도대체 무슨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나는 건실한 직장인이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며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란 말이오. 그리고 도대체 당신들 때문에 내가 직장을 잃게 된다면 그건 누가 보상해줄 거요?> 라고 외치자 간수는 또 한 번 웃으면서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 우리는 바로 그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법기관이오. 당신은 정당한 절차에 의거하여 이곳에 구금되었단 말이오.> 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이었다. 정당한 절차라니? 도대체 언제 그 절차라는 것이 진행되었는지 나타나엘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었다. 나타나엘은 이 답답한 간수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평소에도 그는 매우 이성적인 성격이라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이유와 인과관계를 유추해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빈대가 들끓는 침대에 걸터앉아 혹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구속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저 간수의 말이 완전히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이 감옥은 나타나엘의 정부와는 좁쌀만큼도 상관없는 곳이며 나타나엘을 납치한 그 제복 입은 남자들이나 간수도 나타나엘을 구금시켜놓는 것으로 재물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범법자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 평짜리 감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뒷짐을 지고 감방 안을 빙빙 돌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모략에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타나엘은 살면서 담배꽁초를 길거리 구석에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정도의 범법 밖에는 저지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쳐 체포―그것을 체포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하여 그대로 감방에 던져 넣는 정도라면 그 죄질이 아주 무거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타나엘을 모략중상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나타나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다시 간수에게로 가 말했다. “당신들이 무슨 소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평생을 결백하게 살아온 사람이오. 물론 사람이라면 살아가다 몇 가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저질러온 실수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소. 당연히 이런 감방에 집어 던져질만한 종류의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요. 분명 누군가의 중상모략으로 내가 이 꼴이 된 것이 틀림없으니 당신들이 더 철저히 조사를 한다면 내가 결백하리라는 것이 분명 밝혀질 것이오.” 그러자 간수는 철창 밖에서 나타나엘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고, 게다가 내 소관도 아니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이 감옥에 잡혀 들어왔든 내겐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 직무는 그저 당신이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나타나엘은 놀라서 내뱉었다. “그럼 당신은 내가 무슨 근거로 잡혀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거요?” “물론이오. 보통 나 같은 간수들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어떤 인물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오. 우린 그냥 우리 책임을 다 하고 그에 대한 대가인 월급을 받을 뿐이지.”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로군!” 나타나엘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타나엘이 절망스럽게 웃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자 간수에게는 그 모습이 딱해보였는지 그는 한 마디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가끔 우리도 수감자들이 무슨 죄목으로 잡혀왔는지 아는 방법이 있소. 그런데 그건 당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그 방법이라는 걸 들어나 봅시다.” 나타나엘이 이미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바로 수감자들 자신에게서 듣는 거지.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바로 이 감방에 갇혀있던 자는 자신이 저술하여 배포한 반체제주의 서적 때문에 이곳에 잡혀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소.” “그래서 그는 사상범으로 잡혀온 겁니까?” 나타나엘이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소. 말했다시피 그 양반도 스스로 추측하기에 자신이 잡혀올 만한 이유나 근거가 그 책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그러나 우리 윗사람들이나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실제로 무슨 이유로 그 남자를 구속시켰는지 우리 간수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소.” “그는 어떻게 되었죠?” 그러자 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것 역시 알 도리가 없소. 감옥에서 그 자를 빼내간 요원들은 우리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수감자를 빼가서 어디로, 혹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이 간수들에겐 없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법체계는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하나도 없고 토막 난 기계처럼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로군!” 나타나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마 수감자를 이동시키는 요원들도 자신들이 담당한 수감자가 어디로 이동해야하는지만 알 뿐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모를 거요. 왜냐하면 분명히 그들보다도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테고, 기본적으로 법원에서 오고가는 정보들은 전부 기밀사항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냥 각자 우리의 직무만을 다 할 뿐이오.” “맙소사.” 이제 나타나엘은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이 절망스러운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나타나엘이 무슨 짓을 하든 이 감방에서 더 많은 정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나타나엘은 침대 위에서 한참을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퍼뜩 무언가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절차.” 유레카를 외치듯이 내뱉어진 그 단어에 간수는 나타나엘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말했소.” “그건 사실이오.” “그런데 나는 그 제복 입은 사람들이 내 방에 들이닥칠 때까지 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소송이나 기소가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소.” 그러자 간수는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내가 맞춰보지. 당신은 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한 일이 없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이리라고 주장하려는 거지.” 나타나엘은 동의의 뜻으로 간수의 눈동자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오. 만약 죄인이 자신에 대한 소송절차에 참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죄인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는 짐승이라 피고인이 소송에 참가한다는 것은 법관들이나 혹은 사법체계 자체에 대해서 죄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뜻이오.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수호하고 있는 사법체계란 그야말로 절대 손상시킬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기에, 죄인이 거짓말로서 사법체계를 모독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차단시켜야 하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한 기소가 이루어지고 나면 법은 피고인을 완전히 방치하고, 또 사법체계에 접근할 기회를 온전히 차단시킨 뒤에야 일을 시작하지. 내 생각에 당신이 체포되기 이미 수 달 전부터 법률가와 조사원들이 당신 주변을 온통 뒤지고 다녔을 거요. 단 당신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틀림없이 당신이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확정되면 그때 요원들을 보내 당신을 체포하는 거지.” 나타나엘은 간수가 그렇게 즐거워하며 길게 말을 늘어놓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사법체계라는 것이 그토록 완전무결하며 성스럽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반발심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서 내뱉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변론의 기회 따위는 전혀 없는 거요?” “법은 실수를 하지 않소.” 간수는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타나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입을 다물고 감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철창 안의 짐승 같군!> 나타나엘은 열을 내며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간수의 말대로 법이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타나엘의 삶에서 중대한 범죄행위를 찾아냈다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해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당장 저 간수부터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일이 무얼 위해 행해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고위법관들을 포함하여 법원이라는 기관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실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끔찍한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는데, 만일 사법기관의 일꾼들이 자신들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실수를 해버린다면, 정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변호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감금 당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타나엘이 지금 감방에 있는 것도 사실은 나타나엘과 동명이인인 어떤 자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서류상의 실수로 나타나엘이 그 동명이인의 범죄자와 혼동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동명이인이 뒷골목의 폭력배든 마을 공장의 통장이든 일단 나타나엘의 이름이 적힌 서류에 직인이 찍히고 나면 법관이라는 족속들은 사실을 확인하기는커녕 나타나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다시 조사해볼 의지조차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나타나엘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간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난 더 이상 아는 게 없소. 난 그저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간수일 뿐이오.”
나타나엘은 계속 의미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대화에 지쳐버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높이 난 창을 바라보았는데, 회색의 거무죽죽한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그것이 하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구름은 납빛으로 낮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뜩 나타나엘은 일상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생각이 미쳤는데, 아마 지금쯤 그들은 나타나엘의 행방에 대해 알 수가 없어 당황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법원에서 그들에게 통보를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간수의 말을 들어도 이 사법체계의 형태를 대충 상상해보아도 법원이 나타나엘의 지인들에게 상황을 통보했을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도도하고 자신들은 신성한 법을 모신다는 자만에 부풀어 사소하지만 사실은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도 전연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 일인가. 모르긴 몰라도 직장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지금 나타나엘은 이미 사직처리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호운이 와 나타나엘이 감방에서 벗어나 다시 사회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직위와 재물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타나엘은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 감방을 벗어나는 것이나 자신이 왜 구속되었는지, 법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생각하였듯 나타나엘은 이미 갇힌 짐승처럼 잉여의 존재가 되어 무슨 처벌이 내려지든, 설령 갑자기 나타나엘 자신이 사라져버리든 아무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언제나 닥쳐올 수 있는 것이었어. 게다가 모든 이들에게!” 간수는 나타나엘의 말소리를 듣고 곁눈으로 그를 보더니 다시 정자세로 뒤돌아섰다.
며칠 밤인가가 지났다. 이제 나타나엘은 자신이 지내는 감방에 대해서도 별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감방에 있으나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며칠간 나타나엘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것이었다. 침대에 사는 빈대와 벼룩 때문에 나타나엘의 몸은 온통 울긋불긋해졌지만 나타나엘은 그런 사실에도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타나엘은 더 이상 간수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고, 매일 매일이 날짜나 밤낮의 경계도 없이 혼탁하게 되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타나엘이 실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분명 무언가에 골몰하여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을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사색 따위와 닮은 것이기나 한지도 애매한 일이었다. 그는 그냥 가끔 감방의 시멘트벽을 만져보거나 철창의 금속성 냉기를 느끼며 한없이 무언가에 골몰해있었다. 나타나엘은 분명 창밖을 자주 내다볼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고의로 그런 짓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갈색 제복을 입고 낮은 모자를 쓴 남자가 나타나엘의 감방 앞에 나타났다. 그는 무관심한 눈으로 나타나엘을 슥 쳐다보더니 간수에게로 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간수는 직립한 자세로 남자의 말을 들으며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고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제복의 남자는 금세 떠났고, 나타나엘이 의문의 눈빛으로 간수를 쳐다보자 간수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니오. 그저 당신에 대한 절차가 더 진행됐을 뿐이오.” 나타나엘은 대답을 듣고도 초점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간수 쪽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패배조차도 그다지 패배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밤 나타나엘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돌연 내뱉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의 일들을 쭉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 말하자면 나타나엘이 간수에게 토로했듯이 건실한 직장인에 사회의 구성인물이고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라고 스스로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고 뒤집어보며 사고해보았다. 그런데 뭐가 어찌 되었든 나타나엘은 지금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감방에 갇힌 채 어느 누구도 모를 결과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운명이라는 것이 잔혹한가에 대해서 자문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다소 이상한 것이었다. 운명은 잔혹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운명은 그저 운명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본성대로 별 다른 법칙성도 없이 굴러다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그것을 반항의 묵시하는 눈동자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몇 가지 참담한 이유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참담한 이유라는 것도 자신이 수인이라는 입장에서 보자 애당초 참담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곤 하지.” 나타나엘은 침대에 누운 채 중얼댔다.
어느 새벽 나타나엘이 깊은 잠에 들어있을 때, 간수가 나타나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때문에 나타나엘은 눈을 뜨고 일어났는데, 워낙 감옥의 조명이 어둡고 게다가 막 일어난 참이라 흐린 시야 안에 간수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새로 나타난 두 남자는 얼마 전 찾아왔던 갈색 제복의 남자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타나엘을 쳐다보고 있었고, 간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보시오. 이 분들이 왔다는 건 당신의 법무절차가 거의 끝나간다는 증거요.” “그것은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군.” 나타나엘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간수는 허리춤에 찬 열쇠꾸러미를 꺼내더니 감방의 문을 열었다. 나타나엘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었는데, 제복차림의 남자 둘이 감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타나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한 남자가 나타나엘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당신은 신성한 법의 일부가 되었으니 당신에게 참 잘 된 일이요.” 나타나엘은 그 말을 듣고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은 나타나엘의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처음 나타나엘이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을 때처럼 가죽부대를 머리에 씌웠다. “걸으시오.” 누군가가 말했고, 나타나엘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남자가 나타나엘의 양팔을 잡아주며 방향을 제시했다. “좀 걸어야 할 거요.” 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걸었다. 나타나엘은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고, 무얼 위해 가는 지도 몰랐고, 지금 나타나엘이 밖에 있는지 감옥 안에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타나엘은 그저 자기 발걸음에 집중하며 한 발짝 한 발짝을 떼는 그 구두밑창의 감촉을 신선한 샘물을 마시듯이 즐기고 있었다. 또 한참을 걷자, 나타나엘은 자신이 눈동자를 최대한 아래로 하면 가죽부대의 뚫린 방향으로 자신의 구두와 길바닥을 한정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초록색 일직선 위를 걷고 있었다. 나타나엘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근거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걷고 나자 세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제복의 남자가 나타나엘의 머리에서 가죽부대를 벗겼는데, 나타나엘은 자신이 아주 어둡고 동시에 이상한 흰빛의 조명으로 비춰지는 방 안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 방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두운 흰빛 속에서 교수대 하나가 고고하게, 마치 오래 전에 죽어 뼈만 남은 태곳적 신神의 시체처럼 경건하게 서 있었다.
K는 대지의 끝에 산다. 직각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운 흙집이 그의 집이다. K는 집을 지을 때부터 언젠가 풍랑이 이 절벽을 더 가파르게 깎는다면 그 집이 절벽 채로 바다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인지가 사실 그가 절벽 위에 집을 세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집은 이 세상 그 어느 건물보다도 세계의 끝에 가까운 집이 되었다. 창문을 열면 아래로는 자잘한 암초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오로지 바람에 쓸리는 물결과 한도 끝도 없이 뻗은 수평선만이 보인다. K는 지난겨울을 그 집에서 보냈다. 지형의 극단성 때문인지 그 바닷가의 기후 역시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았다. K는 지난겨울을 마당에서 장작을 들여올 때를 빼면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보냈다. 절벽 위의 겨울은 단 십 분이라도 밖에 나가있는 다면 그대로 얼어붙어 인간 모양의 동상銅像이 될 정도로 혹독하게 추웠다. 지난여름과 가을 쉬지 않고 장작을 패놓은 것이 그를 살린 것이다. 여하간 집안에 비축해두었던 식량이 바닥날 무렵 겨울은 끝났고 수평선 저쪽에서부터 봄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얼음과 눈은 녹아가기 시작했고 절벽 밑에 부딪히는 파도의 소리도 어째서인지 다소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겨울에는 파도가 마치 톱이 되어 절벽을 썰어내려는 듯한 소리만이 들려왔던 것이다. 봄이 시작되자 K는 집의 현관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젖혔다. 새로 돋기 시작하는 새싹의 냄새와 바다의 소금냄새가 뒤섞여 그의 흙집 안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활기찬 생명의 냄새가 가득했다. 그러나 K는 그러한 생명을 받아들이고자 모든 창문을 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알기 위해서 집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었다.
이제 모든 이들의, 영혼의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랑의 계절이 온 것을 K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K에게는 이제 별 의미가 없는 계절이었다. 그도 한때는 겨울이 저물고 생명의 환희가 너울거리는 철이 오면 가죽구두의 끈을 단단히 매고 봇짐도 없이 무작정 어딘가로 발걸음을 향하는 인간이었으나, 어느 땐가 K는 자신이 더 이상 방랑자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고, 그래서 긴 여행 끝에 절벽 위에 흙집을 지었다. 실제로도 그는 꽤나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안락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나무의자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편안한 것이어서는 안 됐고, 100년이고 200년이고 우뚝 서있을 기둥 위에 얹어진 기와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30년이면 풍랑에 쓸려나갈 절벽 위에 따개비 같은 흙집을 지었던 것이다. 아무튼 K의 피가 더는 방랑자일 수 없든 어쩌든 바람 부는 계절은 왔고, 그는 이제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사방에 나타나 이 대지의 끝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K는 바다 쪽으로 열린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년 여름보다 절벽이 훨씬 가팔라져 있었다. 그는 벽난로 위에서 겨울 내내 잠들어있던 목이 긴 부츠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집안에 남은 식량의 개수를 세어보고, 지난겨울동안 얼어붙어 쓸모가 없었던 우물을 퍼 올려보았다. K는 창고 구석에서 배낭을 꺼내 메고 부엌의 커피테이블 위에 있는, 동전과 지폐들이 마구잡이로 담겨있는 물결 모양의 사기그릇에서 돈을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현관 문턱을 넘기 전 그는 잠깐 멈춰서 자신의 수염을 더듬어보았다. 한 철 내내 건드리지 않아 분명 엉망으로 자라있을 것이지만, 면도칼은 가지고 있어도 K의 흙집 그 어디에도 거울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수염 다듬는 것을 포기하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해안과 정대면 하는 곳에 우거진 녹음이 보였고 그 사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K가 수년 간 밟고 다녀 생긴 길이 있었다. K는 마구잡이로 자란 풀잎들과 흙, 자갈 따위를 밟으며 저벅저벅 그 길을 걸었다. K가 가려하는 시장이 있는 작은 마을까지는 약 하루를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배낭에는 대충 두 끼에 해당하는 삶은 콩과 물, 그리고 약간의 꿀이 들어있었다.
아직 선선한 봄 공기 속을 세 시간인가 걷고 있자 풀숲 한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K가 멈춰 서서 그쪽을 돌아보자 무슨 사람 목소리인가가 들리는 것이었다. 잠깐 기다리자 높게 자란 풀숲 속에서 낡은 외투를 입고 밝은 색의 머리칼을 짧게 깎은, 꼬챙이처럼 마른 젊은이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군.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다짜고짜 실례입니다만 저는 이 땅의 끝에 은거하고 있는 현자가 있다는 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혹시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소문으로 그는 짜라투스트라의 제자이며 120년이 넘게 살았다고 하더군요!” K는 입을 다문 채 그 젊은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동자는 생기발랄하여 거의 거만함까지 담고 있는 듯 했으며 큰 키와 마른 체구 덕에 안 그래도 너절한 옷차림이 더욱 낡아보였다. 그가 신고 있는 붉은색 가죽구두는 이슬에 젖고 끊어진 잡초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으며 K 쪽으로 내밀어진 손은 낡은 옷차림과는 달리 하얗고 고와 험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모르겠소. 나는 이곳에 꽤 오래 살았는데 현자 같은 것은 본 일이 없습니다.” K가 말했다. “하지만 땅의 끝이라면 그다지 멀지 않지. 세 시간만 내 반대편으로 걷는다면 바다가 나올 겁니다.” 젊은이는 다소 좌절한 표정을 짓더니 K가 걸어온 오솔길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기야 모두가 그가 사는 곳을 안다면 그건 은거라고 할 수 없겠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어서 가서 해변을 전부 뒤져봐야겠군요.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요.” 젊은이의 말에 K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기 시작했다. 등 뒤편으로 거의 뛰다시피 하는 조급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계속 길을 걷던 K는 우연히 길 한쪽에 난 자두나무를 발견했다. 아직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딱 한 알의 자두가 농익은 채 가지에 매달려있었다. K는 신기하게 생각하며 까치발을 하고 그것을 따 한참을 관찰했다. 썩지도 덜 익지도 않은 먹기 아주 좋게 익은 튼튼한 자두열매였다. K는 그것을 옷자락으로 닦아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산미가 입안에 가득 퍼졌고 과육을 삼키자 지금까지 걸어오느라 쌓인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K는 입안에 남은 씨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자두나무의 건너편 길가에 주머니칼로 구멍을 파, 쥐고 있던 씨를 넣고 흙으로 묻었다. <이렇게 해서 이곳에 두 그루의 자두나무가 생기게 된다면 좋겠군.> K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 걸었으나 아직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K는 오늘은 노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배낭에서 램프와 먹을 것을 꺼내고 길가의 나무에 기대앉았다. 기름램프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채 삶은 콩을 먹고 있는데 마을로 가는 방향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불빛은 점점 다가오면서 두 개로 나뉘고 더 밝아졌는데, 충분히 가까워지자 K는 그것이 각각 램프를 든 두 명의 신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색에 남색이 섞인 제복 차림이었고 키가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둘 다 허리춤에 권총집에 넣어놓은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건장했으나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했다. 그들은 K에게 다가와서 한참 삶은 콩을 먹고 있는 그를 보더니 서로 무슨 말인가를 눈짓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건장한 쪽의 신사가 K에게 말했다. “노인장, 어디서 오는 길이오?” “바다 쪽에서 왔습니다만.” K는 여전히 콩을 우물거리며 앉은 채로 대답했다. “혹시 당신 이름이 프리드리히 K요?” “아니요, 그게 누굽니까?” 이제 K는 한 끼 분량의 콩을 다 먹고 배낭에서 꿀을 담은 병을 꺼내고 있었다. “반체제분자요. 그가 잠적하기 전에 발표한 출판물로 인해 선동된 대학생들이 몇 년째 전국에서 총통각하에 대한 반정부운동을 벌이고 있소.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그 자를 체포해 수도까지 압송하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내려졌소.” “그거 큰일이군요.” K는 병의 뚜껑을 열어 꿀을 딱 한 숟갈 떠먹은 뒤에 병을 다시 잠그며 말했다. “그럼 큰일이지. 우리는 반년 간의 조사 끝에 그 사상범이 당신이 온 바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어.” 뚱뚱한 남자가 키들거리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지만 난 프리드리히 K라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꽤나 오래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그런 유별난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군요.” K는 꿀통을 다시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신사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몹시 피곤합니다. 식사를 끝내고 이 나무 옆에서 자려던 참이었어요. 바다라면 이 오솔길로 내일 아침까지 걷는다면 나올 겁니다.” “피곤하다는데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물읍시다. 당신이 사는 바닷가에는 얼마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소?” “내 경험에 따르면 나밖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K는 이미 나무에 기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군.” 건장한 남자가 뚱뚱한 쪽에게 얼굴을 향하며 중얼거렸다. “정보 자체가 잘못 됐는지도 모르지. 여하간 여기까지 왔으니 우린 그 해변지역을 수색할 의무가 있어.” 뚱뚱한 남자가 재빠른 어투로 단정했다. “휴식 중에 실례했소, 노인장. 마을은 그리 멀지 않으니 내일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을 거요.” 건장한 남자가 이미 램프를 흔들고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K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은 채 그들에게 한 손을 들어보였다. 두 개의 발소리가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멀어지는 가운데 뚱뚱한 남자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길이 너무 좁아 사람조차 다니기 힘드니!”
새벽 빛살에 눈을 뜨자 K가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뱀 한 마리였다. 녀석은 누워있는 K의 배 위에 똬리를 틀고 목을 바짝 세운 채 K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K가 아직 덜 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뱀은 두 가닥으로 갈린 혀를 날름거리며 대답이라도 하는 듯 쉭쉭거리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자 녀석은 머리가 각진 것이 독사였다.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푸른 빛깔이 도는 독니가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내려가 주겠니? 난 이제 일어나야 한다.” 독사는 여전히 혀를 날름거리며 머리를 앞뒤로 흔드는가 싶더니 재빨리 K의 몸에서 내려와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K는 뱀이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느린 몸동작으로 배낭에서 삶은 콩 한 줌을 꺼냈다. 어젯밤과 똑같이 한 줌의 콩과 한 스푼의 꿀을 먹은 뒤 K는 수통에 챙겨온 물로 식도를 씻어냈다. 그리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을 누르듯이 닦고 밤새 이슬이 묻은 옷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지개를 켠 뒤 K는 바닥에서 젖고 있던 배낭을 들어 메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 거의 다 와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와 풀들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고 공기 중에서는 은근히 사람의 살 냄새와 연기 냄새, 오물 냄새 따위가 섞여왔다. 너무 오랜만에 맡는 마을 냄새라 조금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쩐지 몸에 활기가 돌아 K는 배낭을 다시 한 번 들쳐 멨다. 그때 마을 방향에서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린, 이제 막 성년이 됐을까 말까할 앳된 얼굴의 청년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K 영감님! 빌렘 K 영감님!” K는 멈춰 서서 그 청년이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달려오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지난 늦가을에 본 기억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마을에 사는 목수의 도제로, 스승의 명령으로 K의 집 주변에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베어갔었다. 그러나 하필 그 단풍나무가 심어져있던 곳이 K가 집을 짓기 위해 매입한 정말 얼마 되지도 않는 면적의 땅이었기 때문에 목수가 나무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 목수가 찾아왔을 때 K는 애당초 그 나무는 내 것이 아니고 돈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라고 했지만, 목수는 값도 치루지 않고 목재를 가져갈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돌이켜보자면 <빌렘 K씨. 내가 만든 목제 가구 따위를 팔아먹고 산다는 점에서 본다면 나도 한낱 장사치요. 그런데 장사치한테도 상도商道라는 게 있거든. 게다가 나는 장사치일 뿐만 아니라 장인이기도 하오. 물론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럭저럭 알고 있소. 우리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이 집을 지을 때도 우리 가게에서 몇몇 상품들을 사갔지 않소? 그래서 나는 빌렘 K라는 양반이 돈이나 물질 따위에 별 관심이 없고 다소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 인간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바요. 하지만 나도 좋은 목재를 가져가면서 주인이 그저 준다고 입 싹 닦고 좋아라고 가져가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는 말이지. 물건이란 뭐든지 다 자기 고유한 값어치를 갖고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저 단풍나무는 둥치가 꽉 찬 것이 아주 질이 좋은 물건이 될 수 있소. 그러니 나는 저것을 돈을 주고 사가겠다는 말이오.> 하며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았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되자 K는 사실 그 장황한 이야기와 복잡해진 상황 때문에 진이 빠져 차라리 돈을 받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뒤 목수가 K에게 얼마를 원하느냐며 K가 가격을 정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이었다. K가 자신은 나무의 질이나 정당한 가격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며 그다지 관심도 없기에 그저 동화 한 닢을 줘도 상관없으니 제발 알아서 하라고 지친 목소리로 얘기하자 목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선 저 단풍나무를 베어가 확인한 뒤 정확히 정당한 액수를 내 제자 편에 보내겠소. 빌렘 K씨! 당신은 정말 욕심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사람이로군요!>
그러고서 한 철이 지나버린 것이다. 물론 K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아마도 이번 겨울이 너무 혹독해 도무지 말도 타지 않고서는 K의 해안절벽까지 걸어서 올 수 없는 탓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 어귀에서 목수의 도제를 보자 그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K는 청년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K 영감님! 마침 마을에 오시는 길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솔직히 그 해안절벽까지 하루를 꼬박 걸어야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요.” 청년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자네 수고를 덜어주게 됐다니 기쁘군.” K가 수염 때문에 잘 파악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웃으면서 두꺼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지난겨울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어서요! 스승님께서 좋은 나무를 팔아주어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K는 오른손으로 배낭끈을 잡은 채 그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풍나무 값입니다.” 청년은 받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제야 K는 그 두터운 봉투를 집어 아무렇게나 배낭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었다. “고맙네.” 실상 별로 고마운 말투는 아니었다. K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그 단풍나무의 값을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감님께서 마을로 오신 덕분에 제 임무가 예상 외로 이렇게 빨리 끝나버렸군요. 공방에 들르시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청년은 이미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다 마쳤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좋겠군. 자네가 타준 커피가 맛이 좋았던 것을 기억하네. 그런데 나는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들러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어. 내가 저녁에 공방에 들러도 되겠나?” K가 벌써 마을을 향해 걸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저녁이라면 손님도 없어 더 한산할 겁니다. 제가 스승님께 말씀드려두죠.” 그리고 별 의미 없는 잡담을 하는 사이―사실상 주로 떠드는 것은 청년이었고 K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였다― 그들은 앙상한 포도나무 밭을 지나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사실 입구라고 할 만한 현판이나 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냄새가 점점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 K는 자신이 온전히 마을 안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래도 마을은 마을인지라 인간의 군집이 만들어내는 느릿느릿한 혼탁이 마을 전체를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도대체 누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마을광장 중앙의 낡고 초라한 청동상 앞에 도착하자 청년은 K에게 인사를 하고 목수의 공방 쪽으로 달려갔다. K는 청년이 떠난 뒤에도 몇 바퀴인가를 청동상 주변을 돌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풀 한 포기 피어있지 않은 광장에서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흙먼지 섞인 소용돌이를 바라보곤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가난했다. 당장 길가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더라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그을린 얼굴과 거푸집에 넣은 쇳물로 만든 것 같이 단단한 주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을 전체가 가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K는 그런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절벽 위 흙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이러한 마을이라는 것에 K는 다소 만족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난한 만큼 속되지만 그 속됨 역시 가난한 것이었다. 너무 큰 상상력이나 야망을 가진 인간들은 이곳에 살지 않았다. 우연히 이 마을에 태어나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결국엔 떠나버리곤 했다. K는 광장 한구석에 흙빛으로 망가진 채 버려져있는 나무술통을 쳐다보다가 배낭을 다시 들쳐 메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식료품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나무로 벽을 지은 낡은 식료품점 앞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분명 너무 이른 아침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K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에 달아놓은 종이 딸랑거리며 울리자, 계산대 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점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K를 보고 눈이 둥그레지더니 일어서는 것이었다. “에르윈 K씨! 건강하셨군요!” “오랜만일세, 오토.” K가 인사하자 오토라는 사내는 환영한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며 거창하게 웃는 것이었다. “겨울 내내 보이시질 않아 어디로 떠나셨거나 아니면 얼어 죽으신 게 아닌가했습니다!” “지난겨울이 어지간히 추웠어야지. 가을에 모아놓은 음식과 장작으로 벽난로 앞에만 붙어있었네.” 오토는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만족이라는 듯 또 한 번 거하게 웃었다. “식료품을 좀 주문하러 왔네. 내일 아침까지 쥐엄나무 콩 한 말과 꿀 큰 병 하나를 준비해줄 수 있겠나?” “매번 같은 것만 찾으시는군요. 에르윈 씨는 일 년 내내 사순절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오토는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다는 듯 다시 웃었고 K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지는 않아. 집에 약용으로 둔 슈닙스Schnaps가 다 떨어져서 술가게에도 가봐야 한다네.” 오토는 웃음이 많은 사람답게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쥐엄나무 콩과 꿀은 내일 아침까지 포장해놓겠습니다. 그런데 매번 여쭙는 겁니다만, 연세도 있으신데 어떻게 콩 한 말을 지고 집까지 하루를 걸려 걸으십니까? 돈이 좀 들어도 짐꾼을 고용하시죠.” 이번에는 K가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웃었다. “됐네. 기왕 쓰라고 있는 몸 죽기 전까지 다 써야지.” 그러고서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오토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에르윈 씨, 요새 신문은 좀 보셨습니까?” “아니, 내 집까지는 집배원이 오지 않네.” “아무래도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아주 호전적이 됐어요. 좀 배웠다는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하고 있다지만 별로 의미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이 깡촌까지 정부요원 둘이 말을 타고 왔었습니다.” “그런가?” K가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배낭에서 돈 봉투를 꺼내며 물었다. “그들이 에르윈 씨가 사는 해안절벽에 대해 묻더군요. 혹시 거기에 프리드리히 K라는 사람이 산다는 얘기를 들었느냐고요. 그래서 나는 그쪽 땅에는 에르윈 K라는 영감 한 분만 살지 프리드리히라는 사람이 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습죠.” “아마도 그 정부요원이라는 사람들은 나도 만나본 것 같네.” K는 돈 봉투에서 지폐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얼마인가?” “아이고, 돈은 아침에 가져가실 때 내셔도 됩니다.” “돈 들고 다니기 싫어서 그러니까 그냥 받으시게.” 그러자 오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콩과 꿀 값을 받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에르윈 씨.” K는 인사를 하며 가게를 나왔다.
그는 이제 시장가에 있는 술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광장주변보다 더욱 오물과 썩은 양배추 냄새가 심하고 사람들이 많았다. K는 도망치듯이 발걸음을 빨리하며 몇 번인가 슈닙스를 사러 간 적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프리츠 어르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에 서있던 여주인이 인사를 걸어왔다. 여주인은 키가 작았으나 몸집이 다소 크고 늘 웃는 낯인 중년 여자였다. “안녕하시오, 오랜만에 뵙는구려.” “네, 겨울 내내 못 뵀던 것 같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슈닙스 한 병 주시오. 약 먹는 겸 하며 마시던 게 다 떨어졌소.” K는 호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그러자 여주인은 진열장에서 검은 술병을 하나 꺼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화주로 건강관리하시는 모양이죠.” “사람이 건강하려면 생각을 좀 쉬어야할 때도 있고…… 아, 그러고 보니 광장 주변 사는 크라우스 목수가 즐겨 마시는 게 무언지 혹시 아시오?” “크라우스 씨는 매일 저녁마다 도제 분을 보내 아펠바인Apfelwein을 한 병씩 사세요.” “그 양반도 일이 힘드니 술에 기대는 모양이군. 아펠바인도 한 병 주시오. 저녁 때 공방에 들리기로 했으니.” K의 말에 여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주 병을 꺼냈다. K는 술 두 병의 값을 치루고 남은 돈을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남편 분은 잘 지내시오?” “말도 마세요. 요새 그 양반 신문에서 뭘 읽었는지 장사는 집어치우고 매일 맥주홀에서 무슨 노동당 연설에만 빠져있어요.” “나는 신문을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나라가 꽤 소란한 것 같더군.” “소란하기야 소란하지요. 그러나 저 같은 시골 아줌마가 뭘 알겠어요?” 그러면서 여주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K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K는 여주인에게 잘 있으라며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 뒤로도 K는 잡화상과 철물점, 커피원두가게 따위를 돌아다니며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 배낭에 구겨 넣었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점원이나 점주들이 K를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다른 이름으로 K를 불렀다. 그들이 공통되게 알고 있는 것은 K의 성이 K이며 꽤 멀리 떨어진 해안절벽에 홀로 사는 늙은이라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K를 알고 있다 한들 모두가 이름을 다르게 알고 있다면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절대 K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스벤 K 영감님을 만났는데……> <스벤 K가 누군데?> <왜 그 알지 않나. 해안절벽에 혼자 사는 영감님 말이야.> <그 노인 이름은 하인리히 K 아니던가?> <아니, 스벤 K 영감님 말일세. 하인리히 K는 또 누군가?> <나는 스벤 K라는 사람은 몰라. 아무래도 자네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군.> <그 해안가에 스벤 영감님 말고 다른 사람도 살고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는 하인리히 K라는 사람도 분명히 살고 있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K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애당초 그는 아주 가끔만 마을에 들르는 은거하는 늙은이였고, 마을에서 오래 지내거나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갖는 일은 절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K는 크라우스 목수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에게 유달리 잡담을 즐기는 취미 따위는 없었지만 단풍나무에 대한 돈을 받은 것을 포함해서 몇 가지 감정들이 목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미 도제에게 저녁에 들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대로 돌아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K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공방의 현관 위에 달린 전구는 벌써부터 불이 켜져 있었다. K가 세 번 문을 두드리자 도제인 청년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K가 물었다. “물론이죠, 스승님께서도 마침 일을 마치셨습니다.” K는 청년과 함께 공방 안으로 들어가, 가게를 겸하고 있는 공간을 지나 목수의 집에 해당하는 건물의 거실로 들어갔다. 마침 크라우스 목수는 소파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잔 근육이 두드러진 피부는 검게 탔고, 새까만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년남자였다. K가 들어오자 목수는 벌떡 일어나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빌렘 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건강해보이시는군요.” “잘 지내셨소, 크라우스 씨.” “여기 소파에 앉으시지요. 저는 맞은편 의자에 앉겠습니다.” “그런 것보다, 내가 챙겨온 게 좀 있소.” 그러면서 K는 배낭을 뒤져 아펠바인을 한 병 꺼냈다. 그러자 목수는 큰 목청으로 껄껄 웃는 것이었다. “내가 그걸 좋아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슈닙스를 사러 술가게에 들른 참에 여주인께 물었소.” “아무튼 감사합니다. 내 찬장에도 아펠바인이 한 병 더 있는데, 두 병이면 서로 충분하겠죠?” 그 말에 K는 옆에 서있던 청년을 잠깐 보았는데, 청년은 자신은 안 마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웃는 것이었다. “나는 몇 잔이면 족하오. 술을 마시는 건 즐기지만 취하는 건 즐기지 않으니.” K는 그렇게 말하며 아펠바인을 탁자에 놓고 소파에 앉았다. “요한! 유리잔을 두 개 가져와라.” 목수가 도제에게 명령하자 그는 부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목수는 소파 맞은편의 나무의자에 앉더니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보내드린 단풍나무 값이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봉투는 감사히 잘 받았소. 그러나 난 목재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전에도 얘기했듯 동화 한 전이라도 충분했을 거요.” “아니요, 그 나무는 속이 꽉 찬데다가 단단한 것이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한 철 동안 수분을 말리고 가공하여 아주 대단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마음 같아서는 값을 더……” “돈 얘기는 그만 둡시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주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K가 말을 끊자 마침 요한이 유리로 된 커다란 잔을 두 개 갖고 들어왔다.
목수는 K가 사온 아펠바인의 마개를 따서 K와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웠다. “건배하시겠습니까?” “당신과 당신의 충실한 제자 요한 군을 위하여.” K가 읊조리듯 말하자 목수는 크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K는 가볍게 한 모금을 마셨는데 목수를 보자 그는 그 커다란 잔을 단번에 반이나 비우고 탕 하는 소리를 내며 탁자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저녁에 한 잔 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요.” 목수는 변명하듯이 말하며 웃었다. “썩 좋지는 않은 습관이오. 목수 일이 여간 힘들리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몇 가지 나눴고 가끔 구석자리에 앉은 요한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K가 한 잔을 비우는 동안 목수는 두 잔을 비웠고, 술병이 비어갈수록 크라우스 목수는 점점 흥이 나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결국 K가 네 잔을 마실 동안 목수는 찬장에 있던 다른 한 병의 아펠바인까지 꺼내 두 병을 다 비워버렸다. “마을에 살지는 않으시지만 빌렘 씨 같이 현명한 분이 같은 땅에 산다는 것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목수가 얼큰히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K는 딱히 무어라 하지 않고 친절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요새 정세가 영 이상합니다. 저 같이 무식한 목수 놈이 뭘 알겠느냐만 이 구석진 시골 동네에 있는 맥주홀에서까지 허튼 소리를 하는 작자들이 점점 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허튼 소리를 하던가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처럼 까만 머리에 까만 수염을 가진 사람들은 국민도 아니며 고로 국외로 추방해야한다는 미친 소리 따위가 오고간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며 크라우스 목수는 분노와 당혹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하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다가 신문에는 온통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기사 일색입니다.” “듣자하니 술가게 여주인의 남편이 매일 맥주홀에 가서 무슨 노동당의 연설에 빠져있다고 하던데.” “그 친구도 멀쩡하던 인간이 사람을 버려버렸어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총통각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싫어하거나 좋아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죠.” “과연 그렇습니다.” 목수는 K의 말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얼추 끝나갈 무렵 바깥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이만 일어나야겠소. 시간이 꽤 늦었구려.” “가시려고요? 제 집에 빈방이 있습니다. 침대도 마련되어있으니 주무시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소. 게다가 안락한 잠자리와는 영 친하지 않은 몸이라서 말이오. 잘 곳은 이미 정해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빌렘 씨가 어떤 분인지는 저도 대강 아니 강요는 않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퍽 즐거운 술자리였어요.” K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목수와 악수를 나눈 뒤 도제 요한에게도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네는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걸세.” 그러자 요한은 싱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주 건실한 청년이오.” 목수의 마중을 받으며 K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은 저런 청년들이야말로 나라에 이로운 이들임을 크라우스 씨도 알고 계실 거요.” 목수는 술기운에 힘입어 크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리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눈 뒤 K는 배낭을 멘 채 마을 외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K는 마을 외곽에서 마구간이 딸린 어떤 가옥으로 가 현관을 두드렸다. 마구간에는 비싸 보이는 품종의 말이 두 필 묶여있었고 자세히 보니 당나귀도 한 마리가 있었다. 노크 소리에 현관을 연 사람은 마구간 주인이었다. “안녕했는가, 한스.” 한스라고 불린 호리호리하게 생긴 삼십대 남자는 K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K의 손을 잡고 기쁜 듯이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콘라드 K 선생님 아니십니까! 마을에 오셨었군요.” “장을 좀 보고 왔지. 날씨도 풀렸으니 말이야.” “안으로 들어오시죠. 마침 벽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가능하다면 전처럼 마구간을 좀 빌리고 싶네만.” “또 마구간에서 주무시려고요? 안에 묵으실 수 있는 빈방이 있습니다. 침구도 있고요. 따뜻한 곳에서 주무시고 가시죠.” 한스는 호의가 가득 담긴 얼굴로 권했다. 그러나 K는 크라우스 목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자신은 마구간의 짚더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한스는 어떻게든 존경하는 콘라드 K 선생님을 편안한 침대에서 머물게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별 수 없이 좋으실 대로 마구간을 쓰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K는 감사를 표하며 한스에게 저녁인사를 건넨 뒤 현관을 닫고 마구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배낭을 풀고 짚더미 위에 눕자 두 필의 말과 한 필의 당나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K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너희들도 피곤하겠구나.” K는 혼잣말인지 말들에게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짚더미에 눕자마자 마치 기절하듯이 단박에 잠이 드는 것이었다. 네 잔의 아펠바인 덕분에 K의 영혼은 약간 들뜬 상태로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자 말들이 목을 쭉 빼고 기지개를 켜는 소리에 K는 눈을 떴다. 말 한 마리가 짚더미에 누운 K를 말 특유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맑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K는 인사를 하듯이 한참 그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리고 배낭에서 슈닙스를 꺼내 마개를 따고 반 모금을 마셨다. 열기가 뱃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더니 온몸에 퍼졌다. K는 아침이 온 것을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점의 졸음도 남지 않은 정신으로 K는 배낭을 메고 마구간 밖으로 나와 옷자락에 묻은 짚들을 털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해가 어디쯤 떴는지 확인하더니 한스네 집의 현관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얼마 뒤 아직 졸린 눈을 한 한스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아,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마구간 잘 썼네. 말들이 딱 좋은 시간에 깨워주었어.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지만 받아두게.” 그러면서 K는 쥐고 있던 지폐 몇 장을 한스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콘라드 선생님. 집에 방이 있는데도 마구간에서 주무신 걸 생각하면 제가 죄송할 정도인데요.” “어제 시장을 걷다보니 물가가 많이 올랐더군. 많이 정도가 아니지. 빵 한 덩이 가격만 해도 지폐다발이 필요한 상황이던걸. 내가 가진 게 별로 없어 많이는 못 도와주지만 이거라도 받게.” 그러자 한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지폐들을 내려다보더니 마지못해 받는 것이었다. “사실 요새 모두가 힘들기는 합니다. 게다가 마구간에 있는 것이라곤 당나귀 한 마리뿐이니 돈이 되지도 않고요…… 얼마 전 두 신사분이 마구간 임대료를 내고 말을 두 마리 묶어두고 가서 오랜만에 돈을 좀 만져보기는 했습니다. 아무튼 콘라드 선생님 뜻이 그러시다면 부끄럽지만 받아두도록 하겠습니다.” K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스와 악수를 하고 마구간을 떠났다.
K는 그대로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가게는 일찍부터 열려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잘 잤나, 오토.” 계산대 뒤에서 앉은 채 졸고 있던 오토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 에르윈 씨, 좋은 아침입니다.” “쥐엄나무 콩 한 말과 꿀을 가지러 왔네.”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일찍 오셨군요.” 오토는 창고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K는 오토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기다리며 배낭을 벗어 바닥에 두고 활짝 열었다. 안에는 커피원두와 슈닙스 한 병, 수통과 꿀이 든 병 등 그 외 잡다한 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K는 그것들을 배낭 한쪽으로 몰아 꽤 큰 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정말 혼자서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토가 어깨에 콩 한 말을 지고 나오며 물었다. “매번 그랬는걸.” K는 짧게 대답하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이 안에 좀 넣어주게.” K가 배낭의 입구를 벌리면서 말했다. 오토는 어깨를 숙이면서 콩을 내려 배낭의 공간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배낭 안의 공간이 꽉 찼다. “이걸 메고 꼬박 하루를 걸으시면 등이 휘실까 걱정입니다.” “걱정 말게. 이 몸도 언젠가 못 쓰게 되면 그땐 버리면 되니.” 그 말에 오토는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꿀 말인데요, 좀 특별한 걸 준비해봤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 에르윈 씨는 늘 쥐엄나무 콩과 꿀 밖에 안 드시니 영양소가 부족하실 것 같아서요. 꽤나 고생했지만 석청을 한 병 구해놨습니다.” “그거 고맙군. 그런데 비싸지는 않던가? 어제 주었던 값이 모자랐을 것 같은데.” 그러자 오토는 목청 좋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래 뵈도 장사꾼입니다. 손해 보는 일은 안 합니다.” 그 말에 K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K는 석청이 든 병도 배낭에 넣고 입구를 잠근 뒤 메며 일어섰다. 역시 무겁기는 무거워 발목에 힘을 주어야했다.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오토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K는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콩 한 말과 술병 따위의 무게에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일어나서 마셨던 슈닙스 덕분인지 이상하게 몸이 가볍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미 노인이 된 K의 나이를 생각하면 신기로운 일이었다. 그는 이런 발걸음 속도라면 귀로는 해가 지기 전에 끝나겠노라고 생각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태양은 아직 대각선으로 빛을 비추며 나뭇잎과 풀잎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짙은 이슬과 녹음의 냄새가 나고 K의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를 제외하면 새들 지저귀는 소리뿐이었다. 몇 시간인가를 계속 걷자 오솔길 한복판에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생김세가 익숙한 놈이었다. “안녕, 또 보는구나.” K가 말했다. 독사는 K를 바라보며 쉿쉿거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두 번이나 보게 된 것도 인연이니,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 언젠가 내가 콩 한 말도 짊어지지 못할 정도로 몸이 낡아버리면, 네가 와서 내 발목을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K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독사 녀석은 8자를 그리며 머리를 흔들더니 혀를 날름거린 뒤 길섶으로 사라져버렸다.
걷는 동안 정오가 지나고 날씨가 초봄 치고는 무척 따듯해졌다. K는 스스로도 이렇게 성큼성큼 잘 걸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화주가 제대로 몸에 돌았나?> 그는 자문하며 계속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걷던 와중 K는 자신이 올 때 신기한 자두를 따먹었던 자두나무와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역시 계절에 맞게 단 한 알의 열매도 달려있지 않았다. K는 자신이 헛것을 먹었었나 하고 의아해했다. 그러고서는 자두나무의 맞은편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아주 작게 자두나무의 싹이 돋아있었다. <내가 헛것을 먹은 건 아니었군.> K는 싹을 잠시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이 될 무렵 K는 숲을 벗어나 어둠 속의 절벽과 자신의 집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이제 소금냄새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아득히 깊은 곳에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파도소리가 났다. K의 집은 그가 집을 나올 때와 다름없이 현관과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으며, 그것을 보자 하루 간의 피로가 순식간에 K의 양 어깨와 다리에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K는 빛도 없는 길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눈에 띈 것이 있었는데, 현관 바로 앞에 놓인 두 개의 봉투였다. K는 그것을 집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현관을 닫고, 우선 배낭을 바닥에 내렸다. 어깨가 갑자기 중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가벼웠다. 그리고 그는 두 개의 봉투를 안락의자 옆에 있는 다탁에 던져놓고, 집안을 한 바퀴 돌며 창문을 모두 닫았다. 집안에서도 소금과 바다 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물건 정리는 다음 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배낭에서 이미 거의 바닥이 난 꿀 병만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기름램프에 불을 붙여 안락의자 옆 탁자에 놓았으며 장작과 마른가지들을 들고 와 벽난로에 불을 켰다. 그 뒤 창고에서 쥐엄나무 콩 한 컵을 가져와 부엌에 두면서 냄비에 물을 담아 벽난로 안에 설치된 철제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서야 K는 무너지듯이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양 눈을 지그시 누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방이 적막하고 어두웠다.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동안을 가만히 벽난로만 쳐다보다가,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탁자 위에 있는 봉투들을 뜯었다. 그는 먼저 화려하게 정부각인이 박힌 봉투를 뜯었는데, 그 봉투에는 잉크로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거나 프리드리히 K일 경우에만 열어볼 것>이라고 급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한 장의 종이와 여백에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접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먼저 아무 무늬도 없는 종이에는 <당신이 프리드리히 K일 경우에만 명령서를 열 것. 만약 아니라면 프리드리히 K에게 전할 것. 부득이하게 당신의 집을 조사했으며 당신이 프리드리히 K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에르윈 K라는 증거도 없었기에 이 노트를 남김.>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한 장의 명령서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법원 출두 명령서. 당신은 정당한 법률에 의거하여 체포된 신분이며 최대한 빨리 가까운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으로 출두하여 자신이 프리드리히 K라는 것을 증명할 것. 총통 직인. 이 명령서는 총통각하의 명령으로 제작되었음을 증명함.>
K는 그것을 다시 탁자에 놓고 다른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문양이나 직인 따위는 전혀 없는, 값싼 종이에 적힌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 흙집에 사는 당신께서 분명 소문의 현자이시리라 생각하여 편지를 남깁니다. 저는 베를린에서 반전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지금 정부는 한 사람의 악마적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호전적이고 배타적으로 변질되어버렸으며, 국민들을 선동하여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키고 민족주의적 인종청소를 벌일 분위기입니다. 우연히 풍문을 들으니 우리 젊은 대학생들이 정신적 지침서로 삼고 있는 명저名著의 저자 프리드리히 K의 스승님이 바로 당신이라는 이야기에 여기까지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였지만 분명 당신께서는 우리 국민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타락한 정부를 분쇄할 수 있는 분이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베를린으로 오셔서 우리들을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국민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분명 이번 세기 최악의 비극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하 저희들이 활동하고 있는 베를린의 맥주홀 주소를 남깁니다.> 그리고 편지의 여백에는 어느 맥주홀의 주소가 남겨져있었다.
K는 두 개의 봉투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전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깍지를 끼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만 멍하니 벽난로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십 분인가 이십 분이 지나자 K는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편지와 명령서, 봉투 따위를 전부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 그것들을 전부 불길 속으로 집어넣어버렸다.
K는 부엌으로 가서 작은 사기잔과 슈닙스를 꺼내 안락의자로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잔 가득히 슈닙스를 따랐고, 코밑으로 잔을 가져가 냄새를 맡더니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K는 팔걸이에 양 팔을 올려놓고 더욱 깊숙이 안락의자 속에 파묻힌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창문에는 바닷바람이 부딪치고 있었다.
벽난로 쪽에서 냄비의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K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끝.
여름이 왔다. 봄이 지나가는 동안 K의 집에는 누구도 방문한 일이 없었다. 아직 쥐엄나무 콩도 바닥나지 않았고, 석청 역시 삼분의 일 병 가량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K는 봄에 자신이 불살라버린 두 통의 편지에 대해서는 일치감치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었고, 유일하게 먹는 음식인 삶은 콩과 꿀은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끼만을 먹었다. 한 가지 다소 신경 쓰이는 것은 집에 남아있던 것과 초봄에 새로 사온 것을 합쳐 1.5병 정도가 있던 슈닙스가 벌써부터 거의 다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술을 마시는 일이 늘었나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마셔버린 것은 마셔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삼 일에 한 번씩 그는 집 전체를 청소하고 매일 같이 장작을 패며, 남는 시간에는 창문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거나 점점 가팔라지고 있는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된 뒤로 시간이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속도에 대해서도 둔감해지고 있다고 K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날들은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마당을 쓸던 K는 처음 들어보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보았다. 전투기들로 보이는 편대가 일직선의 구름을 남기며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질을 멈추고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위를 보자, 더 높은 곳에서는 폭격기 편대가 똑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날고 있었다. 그것들은 굉장히 높은 곳에 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천둥처럼 긴 굉음을 땅과 바다를 향해 무작위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문득 K는 자신이 초봄에 태워버렸던 편지들 중 한 통에 대해 떠올렸다. 맥주홀에서 모여 반전시위를 한다던 그 대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노동당 연설에 심취했다던 술가게 여주인의 남편은? 검은 턱수염을 가진 크라우스 목수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K는 자신에게 그런 것을 궁금해 할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두 편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K는 하늘을 보며 멀거니 서있었다. 천둥 같은 굉음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K는 잠시간을 목상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비질을 끝낸 뒤, 더워지는 날씨에 피로를 느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뿌리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더는 빗물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나는 뿌리인지라 계속 마셔야만 한다. 이대로 가면 내 위에 뻗은 나의 몸체와 머리가 썩어버릴 것이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뿌리라서 물을 마시도록만 설계되었고 입을 다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절망적인 마음에 내 몸체나 머리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나는 계속 물을 마시기만 하는 것이다. 내 모두가 썩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방법이 없다. 가끔 내가 있는 곳까지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그러나 우리는 뿌리일 뿐이지 않은가」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전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익사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계속 물만 마시는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이건만 사실 우리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도대체 며칠 째 계속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다보면 불어터져 썩기 전에 흙 째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난 죽기 전에 한 번은 바깥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난 뿌리로 태어난 뒤 단 한 번도 흙 속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다. 게다가 사실은 바깥세상이라는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뿌리이기 때문에 땅 속에만 있는 것이 숙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또 다른 운명이 숙명을 밀어내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운명들이 혼돈의 모습을 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 단순히 무질서한 우연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지 우연이라고 부를지, 나로서는 판단할 도리가 없다. 나는 그저 물을 마시고 줄기로 올려 보내는 뿌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나 철학은 나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도대체 며칠간인지 몇 주 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익사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을 위해 설계된 나의 존재조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런저런 고민이 떠오르는 것이다. 애당초 비란 왜 오는 것인가? 우리 식물들이 살기 위해서 비가 내리는 것은 축복과 같은 일이지만 이렇게 몸체가 썩어버릴 정도로 비가 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가 오고 오지 않고 하는 것은 이치랑은 별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은 그냥 무작위하게 퍼붓거나 퍼붓지 않거나, 아무 당위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오로지 물을 마시게만 설계된 것도 아무런 정당성이나 계획도 없는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본능적으로 계속 살기를 원하지만 이 세계의 환경이나 심지어는 나의 존재형태조차도 내가 살고 말고 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참으로 우연하고 무자비한 것이다. 원론적으로 파고들자면 애당초 내가 태어난 것에조차 이유가 있기나 하느냔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퍼붓는 빗물로 인하여 이미 나의 몇 가닥의 뿌리는 썩어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내 위로 솟은 줄기와 잎들이 죽음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고 나는 몹시 심란하다. 나는 내 유일한 동료인 내 가까이로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에게 짧고 툭툭 끊어지는 한탄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상의 생명들이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 사는 것들이 전부 홍수 속에서 휩쓸려 죽어버린다고 한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점점 썩어가면서 과연 내가 지은 죄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기억에 있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차별하게 일어나버린 나의 탄생뿐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어쩌면 얼마 전에. 한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 나는 그가 시집의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며 읽었다고 명확히 기억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잉잉거리는 날벌레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연못 위에 꽤나 오랫동안 떠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당초 과거라는 것은 잘려진 반죽처럼 토막토막 나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건의 시간대를 특정시키는 것이 내겐 커다란 골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는 것인데―그런데 어쩌면 보들레르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그 낭송하는 목소리인지 날벌레의 날갯소리인지가 불어의 어휘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낭송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연못가에 핀 홍련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시 대여섯 편을 읽더니 떠났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온 일이 없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이해하지도 못하는 불어 어휘의 조각조각을 흥얼거리면서 연못 위에 떠있다. 그리고 철이 바뀔 때마다 홍련은 피는 위치가 달라진다. 가끔은 내 시선 밖에서 피어있는 듯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우울하거나 화가 나서 몸을 뒤틀어 물결을 만들곤 하는데 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 그러나 또 철이 지나면 홍련은 무작위하게 아무 곳에나, 딱 한 송이만 피는 것이므로 기다림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다림이 미덕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몸도 한 때는 단단하고 연못 위에 똑바로 서있었다. 그러나 홍련이라거나 어떤 시를 읽는 소년이라거나 불어어휘 따위를 기다리는 사이 몸은 물에 불어 물렁물렁해졌고 나는 이미 몸의 반 정도를 연못 속에 처박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과거란 혼란스러운 것이라서 얼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랭보를 읽던 소년 이후로 어느 누구도 내 위에 올라탄 일이 없다. 내 나무 몸체에 물이 스며들어 천천히 침수하는 내내 연꽃들은 피었다가 순식간에 죽었고 그 뒤 죽음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다시 피어났다. 그러나 나는 뻣뻣한 정자亭子라서 그러한 죽음과 부활의 기적을 기대할 수도 없는 몸이다. 나는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불어의 어휘들을 중얼대고 있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의 기척 따위는 없다. 과연 내 삶도 한때는 꿀과 술이 넘치는 축제였다거나 갑판에 끌어내려진 알바트로스처럼 비극적인 것일 수도 있을까 싶지만 그것은 허황된 망상일 뿐이고 내 기억은 여전히 시집을 읽던 단 한 명의 소년에게만 못박혀있고 몸은 점점 침수되는 중이다. 언젠가 내가 완전히 물에 잠겨버린다면 이 연못이 그리 깊지 않은 관계로 지붕만이 우스꽝스럽게 수면 위로 솟아있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물속의 녹색 이끼나 올챙이들만을 쳐다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련은 여기저기서 필 테지만, 나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반쯤 침수된 내 위에서, 앞으로도 누군가가 시를 읽는 일은 없을 것이고, 단 한 가지 기다림에 대한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연못 속에서 나뭇결이 완전히 녹아 흩어져버리는 것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일지는 나로서는 전연 알 수가 없다.
곰팡이와 언젠가 먹어본 오래된 치즈 냄새가 나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K는 태어났었다. K의 가족은 몹시 궁핍했다. 이미 백 년 이상 대물림된 가난에, 그들은 이미 항의하거나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끔 적응되어 있었다. 실상 가난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불운하거나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사는 변두리의 기후에 있었다. 지옥의 동심원들처럼 깊고 깊은 내륙지방에 사는 그들에게는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태양의 빛이 곧바로 내리쬔 일이 없었고, 사방은 철책과 붉은 벽돌의 담으로 막혀 바다나 해변을 본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하늘은 가끔 푸르렀으나 그것은 마치 낮은 유리천장처럼 짓누르는 느낌의 것이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가난은 불이 붙은 가솔린처럼 악마적으로 타오른다. 인간의 정신을 꺾고 뒤틀어버리는 증오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이 풍성하고 탁 트인 항구도시 따위라면 차라리 가난은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는 축복과 같으나, 납 냄새가 나는 더러운 동전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막힌 변두리의 판자촌과 공장들 사이에서 가난이나 궁핍은 인간의 내면을 새까맣게 매연으로 채워버린다. K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있는데, 그것은 「수돗물을 마시지 마. 이 동네 파이프는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전부 녹이 슬었어. 뒷산에서 퍼온 물만 마시도록 해」였다. 물조차 대가 없이는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 증오가 태어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변두리 동네에 사는 모든 이들의 미간과 처진 입 꼬리에 주물처럼 단단하게 새겨진 주름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K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늘 폐병을 앓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고통의 탓인지 혹은 선천적인 성질 때문인지 언제나 신경질적으로 매사를 대했다. 틀림없이 그녀에게도 증오라는 변두리 동네의 저주가 깃들어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을 일했는데, 매일 고된 일터에서 돌아오면 그로서는 쓰러져 쉬고자 했으나 그도 어머니와 똑같이 그의 아내를 증오했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새로운―그러나 악랄한― 활력이라도 얻은 듯 고성과 주먹질로 그의 저녁을 꽉 채워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들의 단칸방은 한 가족이 살기엔 너무 좁을뿐더러 칸막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K는 늘 그 둘의 소름끼치는 비명과 욕설을 묵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바탕 남편에게 고함과 욕설을 내뱉고 나면 그녀의 나쁜 폐 탓으로 새벽까지 내내 마른기침을 해댔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도무지 이런 집구석에선 잠도 잘 수 없다고 어딘가로 나가버리고, 어딘가로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K는 그 끔찍한 기침소리에 자주 경련하며 선잠을 자는 것이었다. K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의 형은 이미 12살가량 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 형은 며칠에 한 번 꼴로나 집에 돌아오고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는 것인지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가끔씩 만나게 되는 그의 형에게서는 늘 짙은 담배냄새가 났고 얼굴과 팔은 상처와 멍투성이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K의 비극에 대해서 감상주의적으로 동정을 구하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애당초 이 나라에서 이러한 도시적 비극은 사방팔방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서술할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K의 유년기를 간단하게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K가 사춘기에 들기 직전에 어머니는 치료 받을 수도 없었던 그녀의 폐 때문에 어느 날 부엌에서 <흑>이나 혹은 <학>에 가까운 날숨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녀의 시체를 흔들고 불러보다가 마침내 그녀가 정말로 죽었구나, 하고 깨달은 K는 극도로 긴장되어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으로 급히 뛰어갔고, 한창 일을 하던 아버지를 붙잡고 어머니가 죽었노라고 전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들고 있던 공구를 내던지고 억양도 없는 목소리로 욕설을 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고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K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것을 보았다. 이상한 감정이 K 안에서 들끓었다. 그것은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K 자신도 그것이 감정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형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일 년 전부터 형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러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K는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덕분에 집안은 전보다 조용해졌다. 장례식 이후로 아버지는 퇴근하면 늘 술에 진탕 취해 그대로 쓰러져 잤으며, 단칸방인 집은 전보다 아주 조금은 넓어보였다. K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타성적으로 학업에만 열중했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잡다한 집안일 외에 학교 공부 밖에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K는 머리가 좋았다. 늘 공부한 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다소 자랑으로 여기는 듯, 가끔 술에 취해 그 크고 온통 못이 박힌 데에다가 공업용 오일로 검게 물든 손으로 K의 머리통을 두들기며 「이건 날 닮지 않아 잘 됐단 말이야」하며 슬며시 웃는 것이었다. K는 그러한 서투른 칭찬이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아버지가 웃는 방식을 따라해 보곤 했다. 우등생이었던 K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만 지급되는 노트와 필기구 등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교사들의 신뢰도 덤으로 가져 공부하는 일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16살이 됐을 때 K는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 방과 후에 동네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고, 술집 주방에서 새벽까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그 변두리 동네의 가게들 치고 K가 닦아보지 않은 테이블은 단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전공을 정하게 됐을 때, K는 빨리 돈을 벌고자 생각해 공과로 가려고 했으나 이전부터 K의 영특함을 마음에 두고 있던 아버지의 의견에 의해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은 K로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미 충분히 늙어버린 아버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앞으로 수년을 더 그 하늘도 앞날도 없는 노동을 지속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하여간 K는 머리가 좋은 것이 분명했다. 몇몇 교사들의 도움도 받아 명문대에 합격하고 중앙도시로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때 K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을 보았다. 자신의 아들이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아버지가 그 좁은 단칸방으로 이미 수 년 이상 얼굴도 보지 못한 친척들을 불러 없는 돈으로 잔치를 벌인 것이다. K는 처음 보는 친척들 사이에서 당황하다가, 기묘한 쓰라림 같은 것을 느껴 변명을 대고 집밖에 나왔다. 그날 그는 아버지가 쥐여 준 구겨지고 기름이 묻은 인생 최초의 용돈으로 어째서인지 담배를 사, 변두리 동네의 더 변두리에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이유 모를 커다란 절망을 느끼며 인생 첫 담배를 피웠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가는 열차는 초봄이었음에도 승객들로 인해 후끈거리고 습했다.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나던 익숙한 쇠붙이 냄새와 공업용 기름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토사물 냄새 따위가 객실에 가득했고 모두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추웠기에 껴입은 코트와 모자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열차는 한참을 달렸다. 덜컹거리는 객실 속에서 얼핏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K는 왜인지 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K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병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흔들리는 객차 속에서 K는 병과 죽음의 향기를 맡고 들리지 않게 키들거렸다.
열차가 중앙도시에 도착했을 때 K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곳의 냄새를 맡고 그렇게 확신했다. 이제 K는 자신의 폐 속에 마귀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첫 마른기침이 플랫폼에 서있는 K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병에 대해 완전한 무관심의 태도로 대했고, 그저 대학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며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그는 법대에 다녔고 언제나 성적이 우수해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학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을 때,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는데, 비록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K는 전화기 너머에서 그 늙은 남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주일 뒤 비보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죽었다. 후에 알기로 사인은 중금속 중독으로 인한 손상과 합병증이었다. K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병으로 죽었다고는 하나, 그 남자는 스스로 죽은 것이다. 그 남자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K는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럴싸한 변호사 사무실과 스폰서들도 가졌다. 마른기침은 점점 잦고 심해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같은 대학 선배들인 판사나 검사들과도 친분을 다져야했고, 이 바닥에서 입지를 확고히 해야 했고, 돈이 되는 고객들도 잡아야했다. 그는 돈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건이라면 닥치는 대로 맡아했다. 사람들이 <돈만 주면 악마도 변호할 인간>이라고 부르든 말든 알 바도 아니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고 수완이 있었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학벌과 연줄을 타고 거액의 뒷돈이 오가기도 했다.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야 그는 하늘도 바다도 태양도 없는 변두리의 공장과 판자촌 출신이다. 이미 영혼은 태어났을 때부터 매연으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돈, 돈, 돈. <내가 부모에게 배운 것은 분명히 그것이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쇳덩이 같은 물탱크를 지고 산을 내려오는 고통 없이는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없는 것이 이 세계다. 분명 사랑했던 사람인데도 증오하고 원망하다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난이라는 저주다. 갓 태어난 아기의 눈동자에도 악마가 들게 하는 것이 궁핍이다. 그렇다,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삶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쑤셔 넣는 쓰레기통이었고 이제 그걸 깨끗이 비우려고 쓰레기통을 뒤집을 뿐이다> K는 전진했다. 멈출 줄 모르는 마른기침과 함께 말이다.
K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무실의 등은 모두 꺼져있었고 창밖은 짙은 밤이었다. 입에 문 궐련 끝의 빨간 불꽃만이 보이는 어둠 속에서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나 있을까 말까 한 안락을 즐기고 있었다. K는 서류작업이나 기타 다른 일 때문에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전구를 켜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 언제나 햇빛이 보이지 않는 반지하에서만 살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의 어디에 도대체 안락이 있었단 말인가. 어머니의 숨넘어가는 기침소리 때문에 잠도 잘 수 없었던 그 어둠이 안락할 수가 있기나 하느냔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밝은 곳은 싫었다. 밝은 곳에 있으면 그는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공격당할 것만 같은 불안을 느꼈다. 그러니 쉴 때만은 불을 꺼두자. 왜인지는 알 수 없고 몰라도 상관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그가 평화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담배연기가 하늘하늘 사무실 전체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느끼는 평화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 매연 사이에서 마치 자신의 몸도 공기보다 가벼운 연기로 서서히 변해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한, 존재의 상실을 그는 감각으로 느끼며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럴 때면 언제나 복병처럼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연기로 흩어지던 몸은 순식간에 다시 물컹거리는 살덩어리로 돌아와 단단한 뼈에 들러붙는 것이다. 기침의 빈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매번 전기톱으로 폐를 찢어내는 듯한 통증을 몰고 왔다. 누군가가 본다면 분명 안쓰러워할 정도로 심한 기침 끝에 폐부를 손으로 움켜잡고 등을 구부리는 와중에도, 다른 한 손에는 피우던 담배를 그는 늘 쥐고 있었다. 한 모금 한 모금을 피울 때마다 병사病死라는 움찔거리는 재앙덩어리가 K를 향해 한걸음씩 발을 딛고 있었지만, K는 여전히 그것에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환희에 찬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담배라는 것을 그만둘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담뱃잎이 타는 냄새에서 K는 노스탤지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에게 그리워할 만한 과거는 단 한 줌도 없는데.
바로 얼마 전 K는 한 연쇄살인범의 변호를 훌륭히 끝마쳤다. 그자는 10살 이전의 어린이들만을 다섯 명이나 죽인 악독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피해자를 토막 내어 먹는 등 시체훼손과 식인 혐의까지 있었다. 검사는 사형을 주장했지만 K는 자신의 능란한 혓바닥으로 정신질환과 심신미약 등을 들먹이며 판사의 입에서 정신병원에의 강제 입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훌륭하게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실 K는 그 과정에서 드물게 진실 된 적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였다. 반성의 기미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범인과의 상담에서 K는 그와 자신의 기묘한 동질성 같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미 인간성이 상실된 것을 상징하듯 무쇠처럼 딱딱한 어조로 말을 하던 그 남자는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나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 독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합법도 불법도 아닌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번 그는 자신이 일치감치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으나 만일 자신이 교수대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자신은 생명의 환희를 가졌다는 것이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K는 그에 대한 우정 같은 것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K는 그가 정신병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 여파가 어떠할지, 결국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그 <친구>가 사람을 다소 죽이고 먹었다는 이유로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K는 이미 엄청난 변호사 선임료를 받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괴물이 된 인간을 계속 살려두고 싶었다. 단순히 자신의 뭔지 모를 욕심을 위해서. 그때 K는 자신에게 모럴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자신과 같은 땅에서 자란 동향인이라고 K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우리>에게 도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K는 성공했고, 승리했고, 덧붙여 거액의 재화도 벌었다. 그 남자는 오랜 시간을 감금병동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 생존해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K는 의자에 더 깊숙이 파묻혀 앉으며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창밖에서는 멀리서 네온사인들이 깜빡였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아> 그 두툼하고, 땀과 기름에 젖었으며 온통 구겨진 지폐다발. 터무니없이 멀리 온 것 같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감각.
<나는 내 혈연들의 죽음을 짓밟고 올라왔다> 거리낄 것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태양빛에 대한 가난에서 시작된, 세계의 뒤틀린 진실이라는 느낌을 K는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쇠로 된 재가 하루 종일 바람에 휘날리는 마을에서는 활짝 열린 세계의 냄새라고는 단 한 점도 맡을 수 없었다. 비밀들은 모조리 추하게 폭로되어있었고, 그것에 노출된 가련한 인간들은 침묵하는 광인으로 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는 감겨진 눈동자 밖에 없는 감겨진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연쇄살인범의 심장 속에 말뚝처럼 박힌 무언가가 똑같이 K의 심장에도 박혀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할지 K는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증오, 혹은 그와 비슷한 안타까운 함성소리, 타는 유황불 같은 악마 들린 까만 눈동자 같은 것이었다. 야밤에 단도를 들고 달빛 아래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서있는, 그 광인이 눈물을 흘리지 못해 오히려 달이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광막하고 치명적인 시간과 같은 것이었다. 담배는 다 타들어갔고 의자 위에서 K는 온몸을 내던진 듯이 축 처져있었다. 폐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내뱉으며 기침을 하자 데스크에 검은 핏자국이 물감을 흩뿌린 듯 들러붙었다.
어느 날 K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자신이 경찰이라고 했다. 얼마 전 집안에서 대마초를 몰래 기르던 마약사범을 잡았는데, 그가 K의 이름을 대며, 자신이 그의 형이라고, 제발 연락을 해달라고 며칠이나 졸랐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K는 자신의 육신이 설탕공예처럼 경직되고 또 동시에 너무도 쉽게 부서져 버리는 종류의 것으로 변한 것을 느꼈다. K는 전화선 너머의 경찰이라는 자에게 그 마약사범의 이름을 물었다. 그것은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었다. K는 꼬여가는 혓바닥으로 자신이 그의 친동생이 맞다고 말했다. 형이 살아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죽었을 것이리라 확신한 것도 아니었다. 무의식 속의 암초처럼 그것은 해류에 숨겨져 있다가, 순항하는 배를 <위하여> 솟구치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름을 신문에서 봤다고 합디다.” 경찰이 말했다.
“그런데 그가 왜 내게 연락하길 원했죠?”
“그야…… 변호사가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요.” 경찰은 무관심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K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경찰서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든 드라마에 끝이 있듯이 K의 비극인지 희극인지, 아무튼 어떤 종류의 희곡이든 그것도 아주 나지막한 물결의 클라이맥스와 함께 끝나가려는 것이다. K는 자신이 그것을 자신에게 암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혈연들의 죽음을 짓밟고 올라왔다> 그러니 이제는 아직 죽지 않은 혈연이 나의 이 완전한 자유를 향해 숫돌에 갈아놓은 뿔을 달고 접근해오는 것이다. 가끔은 끈적거리는 점액질처럼, 가끔은 돌진하는 황소처럼. 이때 K는 자신의 삶에서 절망이라는 것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내내 목표도 근거도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그저 괴물처럼 사람의 생명을 포식하며 오로지 높이 기어오르기만 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K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얼마 전 감금병동에 갇힌 그 친구도, K와 같은 땅에서 살았던 죽고 낡은 마을사람들도, 모조리 인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그의 형도. 그들은 모두 비인간이었다. 태양빛에 대한 가난, 자연의 풍요와 파도치는 대양에 대한 가난, 그런 것들이 증오로 응결되는 궁핍을 만들고,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아동연쇄살인마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진즉 생명력에 대한 궁핍을 앓고 있었다. K는 점점 심해지는 마른기침에 들썩거리며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수화기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때 K는 자신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일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륙의 내륙에 있는 그의 출생지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동심원들 사이로만 지네처럼 흘렀을 뿐 단 한 번도 대지의 끝을 본 일이 없었다. 바다라는 것은 교과서나 사진으로만 설명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도 충분치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땅의 끝에서 물결치는 한없는 웅덩이도, 푸른 어둠으로 깊이 감싸인 대양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어떠한 동경, 이 차가운 내륙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형태도 지어질 수 없는 관념적인 동경만 있을 뿐이었다. 내리쬐는 빛과 태양으로 붉게 달궈진 모래들, 그리고 죽음과 같이 심원하게 웅웅거리는 거대한 대양. 그것들은 K의 삶에 단 한 번도 접촉해본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K는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코트를 옷걸이에서 빼냈다. 창밖에서는 습기도 없는 진눈깨비가 얼음 같은 광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K는 떠나야했다. 땅 끝으로, 그 이름도 잊어지지 않을 아동연쇄살인마가 칼과 실톱으로 떼어내 송두리째 삼켜야 했던 것이, 아무런 범죄나 결핍의 냄새도 없이 오로지 무한하게 넘쳐흐르는 <자유>의 끝으로 말이다. K는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이미 얻었노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유란 여러 가지 색을 가진 것이었다. K는 가난조차 소금결정처럼 작지만 찬연하게 빛나는 땅을 봐야만 했다.
중앙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열차의 흔들림은 점점 심해졌다. K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올 때의 기분을 그대로 맛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딛고 올라 한 평의 땅을 얻고 거기서부터 K는 시작했었다. 변두리 동네의 아무도 접근하려하지 않는 골목으로 사라진 형과, 이미 오래 전부터 삶을 잃어버린 아버지, 심지어 그 아버지의 노동을 착취하며 피투성이 손으로 기어오르던 K의 모습, 그것들은 전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뉘앙스를 머금고 있었다. 열차는 끊임없이 덜컹거렸고 그와 함께 K의 폐도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고 있었다. K는 자신이 평생토록 수인囚人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감옥은 너무 넓어서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기도 힘들었지만, 갇힌 사람들 모두가 이유모를 비참에 신음하고 있었다. 완전한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었던 K마저도 감옥의 중심에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던 것이다. K는 땅의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낡은 열차 안에서는, 이 안에서 풍기는 모든 냄새들은 오히려 K를 그의 끔찍한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만 같은 소름끼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공업용 기름과 피와 살과 색채 없는 가난의 냄새가 작은 직방형의 공간 속에 넘쳐흐르도록 짙게 배어있었다. K의 옆자리에 앉은 어느 젊은 부인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가쁜 숨을 쉬며 잠들어있었다. 갓난아기는 거의 30초 간격으로 눈을 뜨며 회색의 텅 빈 눈동자로 K를 쳐다보다가, 울음을 토해낼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가도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눈을 감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K는 폐가 들썩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힌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 영혼이 구속된 채, 심지어 그것을 알지도 못하며, 폐병 환자처럼 숨을 쉬며 살고 있단 말인가. K는 슬픔을 느껴보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열차는 분명히 항구도시로 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K의 온몸과 그의 내장들은 점점 딱딱하게 경직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값비싼 가죽코트로 몸을 감싸고 실크 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K밖에 없었기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끔찍한 가난과 궁핍의 냄새가 모두에게서 나고 있었다. K는 기침을 참으며 점점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딱딱한 의자에 파묻혔다. <죄수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댔다.
항구도시의 역에서는 구급차와 구급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20분 전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열차의 6호실에서, 어느 남자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말이다. 구급요원들에게 전화를 건 열차의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 중요해 보이는 남자입니다. 높으신 나리가 틀림없어요. 한 됫박이나 되는 피를 토하고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지만 저는 차장으로서 연락할 의무가 있었어요>
열차가 역에 들어오자 요원들이 들어가 남자의 시체를 꺼내왔다. 그의 얇고 풍성한 머리칼은 토혈에 젖어 뭉그러져있었고, 실크 모자가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은 죽음을 저주하는 것처럼 있는 힘껏 감겨있었고, 새하얀 이빨이 드러난 입은 억지로라도 마지막 숨을 들이쉬려는 듯 한껏 벌려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1.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 어떤 살아있는 자를 위함도 아니다.
어느 동물원이라는 오브제
우리 동물원을 찾아주신 단 한 명의 숙녀 분! 이 동물원을 책임지는 원장으로서 우리 모든 직원들을 대표해 크나 큰 환영의 인사를 표합니다! 보아하니 대단히 어리둥절하신 모양이군요. 그럴 법도 합니다, 우리 동물원의 이 세계적인 크기와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전혀 유명하지도―사실은 <유명>이라는 단어조차 쓰기가 부끄럽죠!―, 심지어 그 누군가에게 알려진 일도 단 한 번도 없어 실상 숙녀 분이 우리 동물원의 첫 번째 관람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아마 숙녀 분께서는 산에서 길을 잃으셨던 모양이죠! 그 등산복과 등산지팡이, 그리고 산들로부터 둘러싸여진 이 드넓은 평지에 뜬금없이 세워진 거대한! 그야말로 거대한 건축물을 앞에 두고 지으시고 있는 그 어리벙벙한 표정을 보니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우리 동물원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답니다.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저와 수십 명의 직원들―전문 관리인과 청소부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무슨 비밀스런 연구소나 존재를 숨기고 있는 정부시설일 것이라는 생각은 말아주세요.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동물원의 존재를 숨긴 일이 없답니다. 다만, 그 누구도 우리의 동물원에 대해 알지 못해 언급하지 않으니 굳이 저나 직원들이 밖에서도 이 동물원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뿐이죠. 사실 우리는 이곳에서 일하면서도 <이 장소>와 <이 건물>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답니다.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우리 동물원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우리들 직원 일동과 과거 이 동물원에서 일했던, 지금 동물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뿐이랍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죠, 슬픈 일입니다만. 여하간! 이곳은 그저 동물원일 뿐이랍니다. 그것도 아주 크고 대단한 동물원이죠! 오로지 관람객의 유희만을 위해 만들어진 평범한 오락시설이에요. 아하, 지금 숙녀 분께서는 「이 불가사의한 원장이라는 작자는 계속해서 동물원, 동물원 하며 언급하고 있는데 왜 어디에도 동물이나 철창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의문입니다! 동물원이라면 물론 시각적 향락을 위한 동물들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동물들을 보시기 전에, 제가 이 동물원의 유구한 역사에 대하여 짧게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아! 감사합니다! 시작은 200년 하고도 50년 전으로 돌아 가야합니다. 250년 전 이 동물원의 창립자이자 첫 번째 원장이었던 Mr. F는 전 세계의 돈을 모조리 쓸어 담은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비열한 비즈니스맨이었답니다. 돈다발로 콜로세움을 서너 개 세워도 지폐가 한참 남을 만큼 돈이란 돈은 모조리 벌어들인 그는, 말년에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이제 세상의 온갖 희열과 쾌락과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맛보았다! 그리고 이제 내가 말년에 달했으니,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남은 돈을 써야하지 않겠는가? 라고요.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의 모범이 아닙니까? 그렇고말고요. 그리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돈을 써야 사람들에게 가장 중대한 이익을 줄 수 있을까? 몇 달의 고민과 철학자, 법학자, 교수, 과학자, 시인, 인문학자 등 수 많은 인텔리전스들과의 논의 끝에 그는 동물원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을 엄청난 동물원을요! 그는 즉시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를 매입하고 건축가들과 수천 명의 인부들을 즉시 고용했지요. 지금 눈앞에 보고 계시는 이 거대하고 알록달록한, 고딕풍의 드높은 성과 그 성벽에 그려진 현대미술풍의 그림들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이 건물이 우리 동물원의 중심이자 가장 자랑스러운 볼거리죠! 아무튼 그 후에 Mr. F는 저명한 생물학자들을 위시한 몇 명의 과학자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앞서 말씀드렸듯 시각적 향락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이익>을 이 동물원의 테마로 삼기 위해서 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아, 미리 말씀드려버리면 재미가 없지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눈앞에서 그것을 맞이할 수 있답니다!
예? 관람료요? 아하, 무용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아무래도 제가 Mr. F의 그 무시무시한 재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드리지 않은 탓일지도 모릅니다. 관람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가 죽고서도 약 230년간 은행에 넣어놓은 그의 전 재산은 계속해서 불어나는 중입니다. 몇몇의 훌륭한 펀드 회사와 브로커들, 회계사들에게 그 금액이 연결되어있긴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를 제외해버려도 단순 은행 이자만으로도 Mr. F의 재산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고, 실상 저를 포함한 우리 동물원 직원들의 급여도 그 이자액만으로 넘쳐 충분할 정도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굳이 고귀하신 관람객 분께 관람료를 받을 필요가 있나요! 돈에 대해서라면 이 동물원은 유토피아나 다름없습니다. 자, 따라오시죠. 해자 위에 걸쳐진 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성城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성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성 뒤편에는 항상 뷔페와 요리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식당이 있답니다. 물론 음식도 모두 무료입니다! 보아하니 산을 헤매시느라 배를 곪으신 모양인데, 우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무엇을 하든 일단 사람은 먹고 봐야지요. 성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걷게 될 것입니다만,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여전히 이 성의 크기에 놀라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정말 엄청난 금액과 인력이 동원됐지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Mr. F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장 중대한 이익>을 위한 것이랍니다. 식사 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면 제 말뜻을 이해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자, 이곳이 식당입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양식, 일식, 중식, 한식, 게다가 피자와 파스타 등의 갖가지 지중해 요리까지! 저희는 곧 어쩌면 방문하실 지도 모르는 아프리카계 관람객들을 위하여 아프리카 식 요리도 추가할 예정입니다. 저 부엌 쪽에서 울리는 요리사들의 열띠고 즐거운 소음이 들리시지요? 저희는 모두 모든 일을 관람객 여러분의 유희를 위해 행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접시를 들고 뷔페 쪽으로 가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 저기 건물유지관리인인 K군이 마침 늦은 점심식사를 들고 있군요. 그의 아버지인 K시니어 씨도 15년 전에 같은 일을 하셨지요. 만일 폐가 되지 않는다면 숙녀 분께서 식사를 끝마치신 뒤 K군에게 이 성과 건축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절대 지루할 일은 없을 것이리라고 제가 보증하지요! 하지만 우선은 마음껏 식사를 즐겨주십시오. 아, 사실 저는 이미 두 시간 전에 점심식사를 마쳤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식사를 즐겨주세요.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그거 참 다행이로군요! 저는 잠시 K군과 몇 가지 대화를 나누고 왔습니다. 한 시간 뒤에 해자 밖의 헬기 착륙장에 헬기가 도착할거라고 하더군요. 네? 아, 그야 물론 새로운 식자재들과 동물원 내의 기숙사에서 거주 중인 직원들의 생필품을 싣고 오는 것이지요. 사실은 어제 도착했어야하는 헬기입니다만, 동물원 내 생태계조율사인 A양이 주문한 담배가 워낙 희귀한 것이다 보니 재고를 찾느라 하루가 더 걸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의 흡연취향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생태계조율사라는 일자리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우리 동물원 직원일동은 차라리 그녀가 희귀담배만으로 만족하는 것에 감사를 표해야할 정도입니다. 잠시 실례―K군! 이쪽으로 좀 와주겠나? 고맙네. 괜찮다면 우리 동물원 창립 이래 첫 번째 관람객이신 이 숙녀 분께 자네가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드릴 수 있겠는가? 좋아, 나는 자네의 그러한 태도를 아주 좋아하네.
「안녕하십니까, 손님! 저희 동물원을 찾아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 동물원의 중심인 성곽을 유지-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K라고 합니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아, 그것은 퍽 다행인 일입니다. 이 식당의 요리사들은 바로 그러한 손님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하여 항상 열성을 다하고 있지요. 또한 동물원에서 거주하는 모든 직원들을 위해서도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드리자면, 사실 <건물유지관리인>이라는 제 직함이 주는 뉘앙스에 비해 제 업무는 굉장히 유기적으로 모든 직원들과 관련되어있답니다. 이 건물, 즉 이 성곽과 해자와 다리와 울타리와 헬기착륙장에 식당과 기숙사까지 모든 건물들을 각각의 기능과 역할에 맞게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저의 일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곽에 대해서는, 내부의 상황이 하루도 빠짐없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생태계조율사인 A양을 비롯하여 원내의 모든 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청소부들과도 항상 긴밀한 연락태세를 취해야만 한답니다! 그래도 사실 저의 아버지 때에 비하면 일이 쉬워진 편이죠. 대표적인 예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성내의 낮과 밤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수동으로 자외선발광장치를 조작해야했지만, 10년 전 대대적인 지붕공사가 있은 뒤로는 현실세계의 낮과 밤에 맞춰 각각의 모든 기와들의 투명도가 자동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놀라운 기술의 발전이죠! 말씀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성이 바로 동물원이며, 동물원이 바로 성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Mr. F의 위대한 의지가 담긴 이 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는 셈입니다. 고로 모든 최첨단 기술과 인력이 성의 건전한 상태를 위하여 동원되어야하며 곧 저의 업무는 이 위대한 정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과 그 내부를 완벽하게, 그리고 언제나 최고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동물원 그 자체와 유기적 연결을 갖는 것이랍니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 정도로 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그만 너무 열성적으로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손님을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디 용서하십시오, 저는 정말 너무도 큰 자부심을 제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기에 이런 실수를 해버렸다고 말입니다!」
훌륭한 설명이었네 K군!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이 숙녀 분께서는 자네의 설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군. 차라리 자네의 총기 넘치는 눈빛에 감명까지 받으셨다고 하시는걸! 예, 그렇습니다. K군의 업무는 대단히 다각적이고 유기적으로 동물원 전체와 연결되어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광범위한 업무체계를 담당하는 것은 K군 뿐만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A양이라던가, 사실은 말단의 계단 청소부마저도, 우리 동물원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의 업무는 <동물원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상은 모두가 모두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전원이 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단 1초라도 모두가 모두에 대한 연결 상태를 차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원이라는 곳은 생물을 다루는 곳입니다! 게다가 특히 우리 동물원의 경우는 그 시시각각 변하는 <생물들>의 존재여건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둥근 산맥으로 고립된 이 동물원은 그야말로 독립된 하나의 완전한 세계인 것입니다. 원시우주를 구성하던 질료들 중 단 하나의 질료의 수치가 지금과 티클 만큼이라도 달랐다면 우주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느니 하는 천문학자들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동물원의 중심인 성으로 가보실까요? 아 접시는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대기하고 있는 식당직원이 전부 정리할 것이니까요. K군, 자네는 업무로 복귀해주게나. 그럼 가실까요. 저 알록달록하고 웅장한 성 안에 세계의 그 어떤 동물원보다도 중대하고 소름끼치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자연의 궁극적 도달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그것을 알아채고 우주를 향해 로켓을 쏘아대고 있지요. 그러나 아직 달에조차 식민지를 건설하지 못한 우리는, 실상 이 닫힌 행성 안에 갇혀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랍니다. Mr. F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엄청난 재력과 첨단기술을 다 가져도,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행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절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는 대단한 비즈니스맨이면서 동시에 철학가적 기질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달에, 화성에, 그리고 은하계 넘어서 까지 식민지를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실존적으로 항상 감옥에 갇힌 존재랍니다. 감옥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걸 깨닫고 나면 설령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한 평짜리 감옥에 갇히든, 자신이 자유인인 것처럼 드넓은 사막을 방황하든 별 차이가 없는 것이었어요. 문제는 그것이었습니다. 자유란 어디서 오는가? 그런데 자유는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습니다. 온몸을 흐르는 혈액의 값을 전부 치러야만 스스로로부터 자유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이고 위험하며 고통스러운 자유가 말입니다. 그렇게 치고 보면 <자유>라는 단어는 그 단어의 본질에 비해 너무 값싸고 가볍게, 소시민적으로 치부당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요.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인지 의문이실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보러 가시는 우리 동물원의 중심은, 바로 그러한 사고를 궁극까지 밀어붙인 결정체 같은 것이랍니다. Mr. F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어요. 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자유를, 그리고 수인囚人의 것과 같은 존재의 조건을 모조리 뒤섞어 하나의 상징으로서 알 수 있도록 관람객 앞에 암시하는 것! 성벽에 그려진 이 기괴한 평면 현대미술 작품들도 말입니다, 저는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 그 의미를 전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Mr. F가 고르고 고른 실존주의적 미술가들과 인간의 존재조건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혹은 이해하려고 피땀을 흘리며 발버둥치고 있는― 화가들의, 성의 내용물에 대한 암시라고 합니다. 어쩌면 현대미술에 대한 신통한 이해력과 직관을 가진 관람객 분들이 오신다면, 그들은 굳이 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조차 못 느낄지도 모르지요. 말하는 사이에 입구에 도착했군요. 이 커다란 청동제 대문 역시 Mr. F가 고심 끝에 주문한 것인데, 낯이 익으실 겁니다. 예, 이것 참 인상적이군요! 숙녀 분이 보신 대로 이 문은 로뎅의 지옥의 문과 굉장히 닮아있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문은 로뎅의 지옥의 문의 레플리카인 동시에, 다만 오리지널에 조각되어있는 수 십 명의 절망한 사람들을 전부 없애버린 것이랍니다. 육체가 무너지고 고통의 함성을 지르며 절망에 어깨가 굽어진 사람들의 조각을 전부 없애버린, 인간이 없는 지옥의 문이에요. 우리는 20년 전에 이 지옥의 문에 열 감지 센서를 달아 문 앞에 사람이 서면 스스로 열리도록 공사를 치렀지요. 스스로 열리는 지옥의 문이라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아, 그럼 입장하시도록 할까요.
어서 오십시오! 건물 바닥과 벽돌의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고, 이 웅장한 건물 안의 높고 방대한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이제 이 거대한 홀Hall의 중심에 세워진 드높은 유리감옥을 보세요!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을 가로 150m, 세로 150m에 높이가 250m나 되는 엄청난 물건이죠. 모두 강화유리로 되어있으며, 각 면이 전부 통유리로 제작되었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물건은 못 만든답니다. 250년 전 Mr. F가 공장과 거푸집을 아예 새로 만들어 내놓은 물건이죠. K군이 말 한대로 저 드높은 천장을 이루는 기와들이 지금―시계를 잠깐 확인하겠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맞춰 적절한 불투명을 만들어내고 있군요. 유리감옥의 각 면마다 근접한 곳에 나선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손님께서는 저것들을 이용하여 스프링클러가 달려있는 유리감옥의 천장 위까지 올라가실 수 있답니다. 물론 엘리베이터는 나선계단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예전에는 유리감옥의 천장으로 가려면 250m나 되는 높이를 계단으로 올라야하는 수고를 겪어야 했답니다. 가까이 가보시죠. 흙과 나무와 풀밖에 보이지 않으신다고요? 물론 그럴 겁니다. 그럼 이제 이 감옥이 상징하는 바를 알기 위해, 감옥 내 생태관리 및 큐레이터 일을 맡고 있는 S군을 부르겠습니다. S군, 이리로 좀 와주게나. 손님일세!
「우리 성곽에 어서 오십시오! 250년 역사 속의 첫 번째 손님이신 숙녀 분을 모실 수 있어 더 없는 영광입니다. 저는 이 유리감옥의 생태관리와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S라고 합니다. 사실 제가 두 가지 직무를 동시에 가지게 된 이유는, 생태관리라고 해봤자 무슨 대단한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그다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죠. 평소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유리감옥 내에 설치된 감지기와 원격 현미경을 이용해 샘플들을 관찰하고, 별 이상이 없다면 보고서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는 일과 만일 바깥세계에 비가 온다면 유리감옥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 물을 트는 일 뿐이랍니다. 물론 비가 그치면 스프링클러를 꺼야지요. 그런데 저는 이 직무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뒤 20년 간 보고서에 <이상 없음> 이외의 다른 문장을 적어본 일이 없답니다. 250년 전 맨 처음 생태설계부터 완벽하게 이루어지다보니, 대지진이라도 일어나 이 기다란 유리감옥이 통째로 엎어지지 않는 한 별다른 이상이 발생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이 건물 안의, 약간 차게 느껴지는 온도는 강화유리를 통과한 기온이 유리감옥 내의 생물들이 항시 활동하고 번식할 수 있는 온도랍니다. 250년 전 Mr. F가 고용한 위대한 건축설계사는 통풍구나 성곽 벽의 두께, 실내의 광원과 자외선발광장치의―지금은 지붕기와의 자동적 투명도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쓰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위치나 출력 등을 고려하여 그 어떤 냉각기나 온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도록 이 성을 지었습니다. 정말 천재적인 기술이지요! 손님께서는 지금 유리감옥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실 겁니다. 사실상 보이는 것은 바닥으로부터 두텁게 쌓인 흙과 그 위에 자라난 나무와 풀들 밖에 없지요. 진실을 보려면 나선계단 옆에 설치된, 10m 간격으로 정지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한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조금 춥지는 않으신가요? 괜찮으시다고요. 그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약 추우시다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성곽 벽 한쪽 창고에 500개가량 되는 기다란 망토를 항상 쌓아두고 있으며, 언제라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100벌 씩 5일에 걸쳐 순차세탁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존경할만한 성내 세탁사 다섯 분이 완벽하게 해내고 있죠. 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50m 지점으로 가보실까요. 저쪽 나선계단에선 동물원의 청결부 직원 두 명이 오후 2차 청소를 하고 있군요…….
이곳이 50m 지점입니다. 보시다시피 계단참으로 바로 이어져있지요. 이렇게 유리감옥의 외벽을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설비를 해놓았습니다. 난간 위에 확대경 등이 설치되어있는데, Mr. F의 친절한 성질 덕분에 고소공포증을 가지신 분들도 강화유리 안쪽을 관찰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도 고배율 망원경이 설치되어있습니다. 높은 곳은 괜찮으신가요? 퍽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저보다 원장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에, 이만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고맙네, S군. 저 친구는 참 훌륭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하간 이제는 제가 설명을 드리지요. 우선 저 흙, 유리감옥 바닥에 수 미터 정도 쌓여있는 흙 말입니다. 저 흙은 250년 전 이 유리감옥이 완성되었을 때 넣어둔 흙입니다. 유리감옥 내에 쌓기 전에 아주 정밀한 검사를 하여, 통상적인 흙에 있는 미생물 외의 어떠한 벌레나 벌레의 알도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한 조치를 취했지요. 그때 흙을 검사한 수백 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정밀하고도 세심한 조사 덕분에 S군이 계속해서 보고서에 <이상 없음>이라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똑같이 철저한 검사를 거친 과실나무, 침엽수, 활엽수들과 유리감옥 내의 작은 생태계를 이룰 키가 낮은 풀들의 숲과, 천연자원성분 이외의 그 어떠한 생명체도 들어가지 않은 물로 채워진 작은 연못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상 유지되기가 굉장히 힘든, 여러 결핍요소들이 있는 생태계입니다만, 천만다행으로도 우리에게는 괴팍한 흡연취향을 가졌지만 세상의 그 어떤 생태학자보다 우수한 생태계조율사 A양이 있지요! 저는 이 동물원의 모든 것을 총괄책임하는 원장이지만, 제가 갑자기 사라져도 동물원은 유지될 겁니다. 그러나 A양이 사라져버리면 그것은 그야말로 종말이지요! 물론 우리는 A양 밑에 보조 생태계조율사를 세 명 붙여두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A양의 직무는 우리 동물원에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유리감옥 안을 보시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요? 아하, 그렇다면 숙녀 분의 시선 조금 위쪽의, 유리감옥 정중앙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회색의 소용돌이는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것입니다! 저것이 우리 동물원의 중심이고, 자랑이고, 저것이야말로 우리 동물원입니다! 저것이 Mr. F가 그의 죽음 이후에까지 숭고한 사명으로 지속되게 만든 세계의 궁극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70m 지점으로 올라가실까요.
이제 소용돌이를 정면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자, 잘 보시죠. 맞습니다. 이것은 수백 마리의 날벌레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날벌레들이 아니지요! 마침 유리감옥 내벽에 몇 마리가 붙어있군요. 난간에 있는 확대경으로 이들을 관찰해보도록 할까요. 우선 이 녀석―보이십니까?―은 두 눈이 없군요. 왼쪽에 있는 녀석은…… 다리가 세 개밖에 없고요. 균형을 잡으려고 계속 한쪽의 연약한 다리로 몸체를 밀어 올리는 게 보이십니까? 저 녀석은 계속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애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손님! 이 유리감옥 안에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이 초파리들은, 이 수백 마리의 초파리들은, 멀쩡한 녀석이 하나도 없답니다! 눈알이 없거나, 날개가 한쪽 밖에 없거나, 아예 다리가 없거나, 심지어는 중추신경이 반 토막 난 놈도 있습니다. 생식기능이나 신경구조가 마비된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수 있는 녀석들은―저 소용돌이 말입니다. 저렇게 비행을 하면서 계속해서 번식을 하는 거지요. 이곳은 이제 불구인 초파리들의 광란의 교미장이나 마찬가지랍니다. 만일 인간이 이렇게까지 불구가 되었다면 교미고 생식이고 집어치운 채 우울증에 걸려 은둔생활이나 할 테지만, 이들 축복받은 곤충들은 사고思考 자체를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들은 한쪽 날개로 어설프게 날아오르고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교미를 합니다! 설령 정소와 난소가 마비되어서 기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늘 같은 생식기를 미친 듯이 상대의 배에 찔러 넣기만 합니다! 설명을 드리지요. 250년 전 이 유리감옥이 완성되었을 때, Mr. F는 곤충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건강하고 단 한 번의 교미도 한 일이 없는 갓 탈피한 100쌍의 초파리를 감옥 안에 넣었습니다. 수컷 100마리와 암컷 100마리를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리감옥 내의 작은 생태계에 적응하여 미친 듯이 번식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첫 번식 이후 2년 만에 초파리의 개체 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유리감옥 안이 초파리로 들끓어서 감옥 자체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요! 그야 그렇겠지요. 이 작은 생태계에서는 그들의 천적도 포식자도 없고, 먹이는 늘 풍족하며, 연못의 물은 마를 날이 없고 나무와 풀들은 천수를 다 하고 죽어 썩어버린 초파리들을 양분 삼아 쑥쑥 컸으니까요. 그러나 20년가량 지났을 때 초파리의 개체 수는 점점 줄기 시작하고, 눈에 띠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네! 아주 훌륭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유전자풀genepool이 너무 좁았던 겁니다. 현재 이 성곽 내의 온도에서 초파리 한 세대의 생존기간은 평균 20일이니, 어디 계산을 해보죠. 이레귤러나 성충이 되는 속도 등을 제외한 간단한 계산으로 1년의 365일간 18.25번 세대가 바뀌고, 첫 100쌍이 넣어진지 약 250년이 지났으니 지금까지 대강 4562.5번의 세대교체가 있었던 셈입니다. 겨우 100쌍의 유전자풀에서 4562번의 세대교체라니! 말 그대로 이런 병신집단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수학적으로 단순한 근친교배의 결과물을 Mr. F가 굳이 현실화, 가시화하여 관람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과 암시를 주려했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튼 간에, 우리 동물원에 고용된 수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들은 최소 50년 안에 완전히 절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드렸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지요. 뭐어, 여하간. 우리 동물원의 핵심인 이 병든 초파리들이 절멸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리감옥 내부를 싹 걷어내고 새로운 100쌍을 넣을까요, 혹은 동물원이 300년이나 걸린 사명을 마쳤으니 문을 닫아야 할까요. 글쎄요,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Mr. F가 살아있었더라면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당연히 그는 230년 전에 죽어서 지금은 박테리아들의 먹이 정도가 아니라 이미 풀이나 나무의 일부가 되어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답니다. 어차피 50년 뒤라면 제가 아니라 도시에 살고 있는 제 아들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원장직을 맡고 있을 테니까요.
자아, 이 장황하고도 짧고도 단순하고도 기묘했던 동물원 관람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볼거리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기이한 볼거리였다는 점을 부인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숙녀 분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걸어서 돌아가시는 것은 분명 무리일겁니다. 원하신다면 몇 시간 뒤에 이륙 예정인 헬기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헬기 조종사들 역시 우리 직원이니 <우리의 손님>을 기쁘게 집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얼마 전 우리 동물원의 여성용 기숙사 관리감독인께서 60세가 되시며 은퇴하셨답니다. 그동안 받으시고 그다지 쓸 일이 없어―의식주가 전부 동물원 내에서 무료로 제공되니 말입니다― 모아두셨던 급여와 은퇴 이후에도 사망할 때까지 지급되는 Mr. F 재단의 <평생근로감사료>로 도시에서든 타국에서든 어느 섬에서든 편안히 노년을 보내시겠지요. 문제는 그 분이 평생 어느 누구와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성용 기숙사 관리감독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는 Mr. F나 그의 재단이나 이 동물원과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을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다소 꺼리고 있거든요. 사실은…… 숙녀 분 정도의 나이와 현명함을 갖고 계신 분이 그 자리에 아주 적합하지요. 아, 말씀드렸다시피 그냥 지나가는 얘기입니다. 헬기는 두 시간 뒤에 출발합니다. 헬기이착륙장은 기억하시겠지만 성곽 뒤쪽 식당이 있는 방면의 해자를 건너는 다리 바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저는 이만 원장실로 복귀하겠습니다. 관람은 즐거우셨나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직원 일동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헬기가 출발할 때까지 2시간 사이에 용무가 있으시다면 언제든 원장실에 들러주세요.
1.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세속의 진지함을 고통스럽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존재의 진중함과 부조리를 다시 찾아내게 되었다.
구도求道
우선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으로 삼아야할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독한 럼주를 마시고 궐련을 피우는 것을 즐겼으며, 친구들과의 모임을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마음으로 스스로 모임자리를 계획하고 주관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중간규모의 사무기기 제작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게 맡겨진 일은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들의 사용설명서를 쓰는 일이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제품을 관찰하고 움직여보거나 한 뒤에 고객의 입장이 되어 문장과 도면을 창작하는 일이었으므로 다소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운 제품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나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른 부서의 동료들에 비해 회사에 나가야할 횟수가 대단히 적었으며 심지어는 일 자체를 집안에서 끝내버리고 결과만을 나의 상사에게 우편으로 부치는 것으로 일을 마칠 수도 있었다. 고로 내게는 회사원치고는 자유시간이 상당히 많이 주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경제는 몹시 호황이었고 사용설명서를 쓴다는 일이 그 일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의 길이보다도 훨씬 정교하며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의 수고로움에 비하여 나는 회사로부터 매달 대단한 급여를 지급받았다. 나는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언제나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히 넘긴 채 굳이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나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세련된 정장을 입고 다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사교적이고 인기가 많은 멋쟁이 젊은이로 통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 입 한쪽에는 궐련을 물고 연기를 뿜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그렇게 듣기만 하는 것으로도 이야기나 친구들의 움직임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무척 즐거웠다. 그야말로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했다. 이미 말했듯 한 달 중 서너 번 정도만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회사는 충분한 금액을 내게 지불했고 그 돈들을 생활비로 쓰고 난 뒤에도 항상 많은 액수가 남았기에, 나는 늘 친구들을 대동하고 멋들어진 바Bar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럼주를 사기도 했고 가끔씩은 쿠바에서 건너온 시가를 태우는 둥 사치도 즐겼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입으로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생긴 청년이었다. 흰색 피부에 짙은 눈썹, 윤곽이 확실한 오똑한 코와 약간 조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려한 눈매, 남자치고는 색이 붉은 얇은 입술 등이 나를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젊은이로 보이게 했다. 당시 내가 메르세데츠를 몰고 맞이하러 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키스를 하곤 하던 여자친구 L은 그토록 내 얼굴을 좋아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도 나는 그녀가 나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얼굴과 잠자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하다가 웃음을 터트린 일도 있는 것이다. 보아하니 당당하고 잘 생긴 어느 멋쟁이 젊은이의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황금기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내겐 항상 어떤 병病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부가 썩거나 눈동자가 노랗게 변하는 그런 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신에 감염되어 마치 한 마리의 관념적인 벌레가 정신을 느릿느릿 염치 좋게 갉아먹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병이었다. 당시에 난 그것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왜 이런 병에 걸린 것인지조차도 말이다! 설명하자면 그것은, 아침에 침대에서 발코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빛에 맞아 깨어났을 때 느껴지는 들척지근하면서도 어쩌면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그런 영문 모를 갑갑함이었고, 어느 휴일 저녁 친구들과 한바탕 마시고 놀아제낀 뒤 홀로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다가 궐련갑에서 궐련 한 개비를 뽑을 때 손가락 끝에서부터 이어진 온몸의 신경이 화들짝 놀라 그만 궐련을 떨어트린 채 멍하니 굳어있는 순간이었으며, L과의 흠뻑 만족스런 잠자리를 가진 뒤 침대 곁에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띨 때 갑자기 ―그리도 건강한 육체를 가진 내가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끔찍이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오른쪽 눈에서 흘러나오는 한 방울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증상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 가벼운 신경증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렇지 아니했다. 그 병은 실제로 나의 생활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저녁에 원목 테이블에 앉아 궐련을 피우다가 갑작스레 이유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절망감이 나를 덮쳐서, 나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를 것 같아 찬장에 있던 술을 꺼내 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퍼마시다 쓰러지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과의 모임 때는 언제나 즐겁던 그 유쾌한 대화들이 내 뇌수를 찌르는 송곳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벌컥 화가 나 내 사랑하는 친구들의 멱살을 잡을 뻔도 했다!―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나의 초인적인 인내심에 지금도 감사하는 바다― 여느 때처럼 내 어깨에 감겨오는 L의 가녀린 팔이 뜬금없이 무슨 지네나 바퀴벌레 따위의 흉악한 벌레들의 덩어리처럼 보여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친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나는 도무지 그런 증상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내 아버지의 친구 중 의학박사가 한 명 있었기에 찾아가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사라는 족속들에게 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았고, 가령 3에서 4할 정도라도 분명하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고작 발륨이나 한 병 쥐어주는 것으로 일을 끝낼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내 결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도대체가 완벽한 인생이라는 게 어디에 있기나 하겠는가? 내가 충분히 젊고 아름답고 돈도 부족하지 않으며 즐거운 친구들과 아름다운 연인이 있으니 그만큼 또 내가 짊어져야하는 십자가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인생이란 평등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어린 머리로 대충 계산을 끝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치명적이지만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 문제들을 껴안고서도 어떻게 즐겁고 당당한 젊은이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진짜 문제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정확히 일 년 하고도 반 년 뒤에 벌어졌다.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를 나는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찾아가곤 했다. 무어 내가 어머니에 대한 대단한 사랑이나 효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이 으레 아들들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나는 내 월급의 3할 정도를 매달 어머니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정부를 한 명 두지 그러세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더니 어머니는 「아니야. 늙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 이대로 나무조각처럼 굳어버릴 것 같거든」 하고 대답했었다. 애당초 대수롭지 않게 던진 제의였으니 무슨 대답이 나오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이미 내가 어릴 적에 지내던 2층의 방으로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본가를 방문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내가 썼던 방으로 들어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문을 열자 내가 어릴 적에 쓰던 그대로 책상이니 침대 따위가 남아있었는데, 다른 점은 이미 오랫동안 청소는커녕 문도 열지 않아 먼지가 모든 곳에 회색으로 두텁게 쌓여있다는 점뿐이었다. 내가 그 안을 구두를 신은 채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돌자 방바닥에는 레일처럼 둥글게 내 구두자국이 생겼다. 그 정도로 먼지가 두터웠던 것이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는 구석구석을 구두창으로 밟고 있었는데, 바닥을 통해 어머니의 얕은 외침이 들려왔다. 「네 애인은 요새 어떠니?」 「L은 여전히 발랄하고 아름다워요」 나는 어머니에게 들릴지 어떨지도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높이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물론 어머니보다 훨씬 젊죠, 그야 젊으니까. 이렇게 들리지 않을 혼잣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계속 먼지들을 밟고 있던 나는 책상 앞에서, 내가 어렸을 때 썼던 책장에 그 시절 읽던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책장 속이라고 해서 먼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책들의 윗면과 제목이 적혀진 등에 뽀얗게 먼지가 묻어있었다. 나는 제목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책을 아무 것이나 하나 뽑아서 펼쳤다. 먼지가 진눈깨비처럼 대단히 날리더니 내 옷소매와 구두 등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책은 소설책이었다. 내가 학생 때 읽은, 그러나 정확히 언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어떤 유명하지도 않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나는 별 의미도 없이 그 책을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먼지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는데…… 그렇다, 그때 나의 젊음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책을 떨어트렸다. 병이다! 그 병이 도졌다! 덧났다! 아니 차라리 발광하고 있다! 나는 갑자기 사납게 바뀐 눈동자로 들어온 문을 찾아 도망쳤다. 거의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갔고, 깜짝 놀란 어머니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메르세데츠의 시동을 걸면서 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젠장,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단 말이다. 그건 병이 아니었다. 그건 진실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말하자면, 파묻어둔 진실이 이따금 흔들흔들 진동하는 것을 나는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메르세데츠는 아직도 쌩쌩 달리는 신차나 다름없었지만 손이 떨리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에야 시동이 걸렸다. 나는 미친놈처럼 엑셀을 밟았다.
이상이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설명이다. 지금 나는 그때에 비해 몹시 나이를 먹었다. 사십이 넘은 뒤로는 해와 날짜를 세지 않았고 내 방에는 달력조차 들여놓지 않았다. 나는 어떤 빌딩의 지하실에 살림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밖에 나갔던 것이 아마 3주 전으로, 내가 유일하게 먹는 음식인 참치 통조림과 인스턴트커피를 사재기하러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도대체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 하고, 설명을 한들 그것이 설명이 되기나 하련지 모르겠다. 여하간 젊은 시절의 나를 가끔 불편하게 했던 그 병이, 병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확실하게 안다. 그야 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지금 나이기 때문이다. 그 먼지투성이 책의 종이냄새를 맡은 뒤부터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단절시켜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었으니까. 우선은 술을 끊었던 것 같다. 그 뒤엔 담배였다. 시가든 궐련이든, 럼주든 소주든 그것들은 틀림없이 내 진실을―고독을 방해하는 위안물이었다. 고독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위안을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깨달았던 것이다. 아, 이렇게 단어를 선택하는 것도 질색이다. 고독과 진실이 사실 같은 단어라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킨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다만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그만 두었다. 그들에게 몹시 전화가 걸려오고 몇몇은 집까지 찾아와 걱정스럽다는 듯이 안부를 묻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집도 옮긴 것이다. 햇빛도 진실을 방해했다. 햇살이 닿지 않는 지하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모든 변화들을 결정지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슬픔이나 광란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을 좇아 진실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슬픔이고 광란일까? L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그녀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엑셀레이터를 미친 듯이 밟은 그 날부터 왜인지 내게는 도무지 욕정이라는 것도 생기질 않았다. 마치 거세된 말처럼.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그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전화선을 뽑고 방안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다가 몇 가지 깨달음과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갖고 있던 집을 팔고 지하실을 하나 산 것이다. 나는 점점 철저하게 고립되어가면서 자부심까지도 느꼈다! 사실은 마이크를 들고 모두에게 외치고 싶었다, 나는 진정으로 고립되리라고. 그러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은 물론 누군가에게 말을 던지는 것도 ―내가 이런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 숙고해주시기 바란다―불경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입을 닫고, 닫고, 지하로, 아래로 내려왔다. 이젠 럼주도 궐련도 맛있는 음식과 차[茶]도 따뜻한 침대도 다 필요 없었다. 나는 지하실 안에서 밖에 있을 적敵들에 대하여 단단히 철제 현관을 잠그고, 오로지 하루 한 캔의 참치 통조림을 먹고 대신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신다. 진실에 따르면 잠시라도 졸릴 수는 없고 정신이 멍해져서도 안 되는 법, 그리고 포만감 역시 내 안의 적이다.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물은 수돗물을 마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 자신을 벌주고 있다거나,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제발 그만둬주시길! 차라리 그 반대이다! 아아, 이것을 어찌 설명하면 좋을지? 나는 혼잣말조차 하지 않는다. 혼잣말이라는 것도 약간의 위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의 삶을 살아내는 중인 것이다! 물론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해 뼈밖에 안 남은 몸에 이미 반백이 된 긴 머리와 북슬북슬한 수염이 날 이질적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상식인의 입장으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단 하나도! 약간이라도 정신이 멍해질라치면 나는 커피를 끓이면서, 아 그래! 솔직해지고자 한다면 나는 늘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진실은 고통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젊고 잘 생겼던 내 얼굴은 이미 수염 난 해골처럼 되어버렸지만 나는 이 고립과 고독과 고통 속에서 지고의…… 지고의…… ―도대체가 언어란!―기쁨, 그래,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극한의 삶 속에서, 나는 분명 진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제 현관문이 제대로 잠겨있나? 그래, 제대로 잠겨있군. 적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내게 상냥한 어투로 접근하며 나의 고립을 깨트려, 가짜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몇 주 뒤 커피든 참치 통조림이든 바닥이 난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쇠사슬과 자물쇠로 된 잠금장치를 사다가 현관에 달아야겠다. 나의 이 기쁨은, 즉 고독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철저하게 말이다.
K는 어리다. 하지만 어리다고 하여 아주 어린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에 있을 만큼 어리다. 신체적인 연령에 대한 설명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이 몸에 귀속된 것이니만큼 신체와 정신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도 아니다. 한때 그의 친구였던 이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젊은 피가 활개치고 다니기에 좋고, 상념과 망념이 여학생들의 손목에 한 줄씩 그어지는 계절.
K가 사는 단칸방과 마주한 건물의 일 층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K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처음에는 큰아버지의 심부름이라고만 하면 술과 담배를 아무 말 없이 팔아주는 곳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차한 거짓말도 더는 의미가 없다고 K는 생각함과 동시에, 이미 구멍가게의 그 늙고 병든 주인도 K가 도무지 미성년자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집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요 몇 년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큰아버지는 가끔 K의 집에 찾아오지만, 항상 K는 없거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실상 K는 그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밤새 거리를 헤매거나 담배연기로 가득 찬 단칸방에서 책을 읽는 K는 아침이 오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간다. 그리고 그는 등굣길의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멍하니, 그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가끔 어리둥절해 하며. 이따금 중학생 때 친구였던 이들이 와서 K에게 인사를 건넨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웃는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친구는 갈 길을 간다. K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머니가 다림질해준 교복을 입고 아침햇살 밑을 권태로운 듯이 걷는 그들은 왠지 아름다워 보일 것도 같다. K는 가끔 자신이 너무 빨리 젊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K는 헤르만 헷세가 위대한 작가라고 믿는다. K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가장 미학과 삶을 설득력 있게 접합시킨 작가였다. 그러나 K는 자신이 <미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조소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K는 단칸방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금세 방안을 가득 채우고 만다. 창문이 없는 관계로 담배연기는 방안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낮에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칠흑처럼 어두운 방안에서 K는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가끔씩 몇몇 문학작품들의 제목을 떠올린다. 데미안. 시계태엽오렌지, 호밀밭의 파수꾼, 지와 사랑, 꼬마철학자, 등등. 모두 주인공이 미성년인 작품들이다. 성장소설, 성장소설. K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을수록 현실은 점점 구차하고 패배주의적이 되어간다. K는 어리다. 아무도 그가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K 자신은? 글쎄, 모두가 고난을 겪지. 모두가 고난을 겪고 상황을 타계해나가지.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고들 하지. K는 어리다.
K는 삼 년째 이발을 하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빨래를 하려면 건물 공용 화장실에 가야하는데, K는 나프탈렌 냄새를 싫어한다. 정돈되지 않은 장발과 지저분한 수염에, 더럽고 구겨진 셔츠를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정도는 K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들의 부랑자를 보는듯한 시선이 희열이 된다.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시선이, 차라리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일이다. 얼마 전에도 K는 방안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병을 비웠을 때 눈물을 떨궜다. 탈출구도 없이 사방팔방이 꽉 막힌 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사실은 항상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알코올이라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감상주의자로 만들지 못하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너, 완전히 폐인이 다 됐구나.” K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제 K는 자신이 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지도 모른다. 왜 새벽마다 밖으로 나가 달에게 고함을 지르며 도시를 헤매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에는 길에서 잠드는 일이 많았다. 방안에서 혼자 술을 푸다보면 갑자기 바깥공기가 그리워지는 일이 많다.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갔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것이다. 여름에 K는 다섯 번이나 자신을 깨우러 온 경찰과 만났다. 매번 다른 경찰이 매번 K를 그의 단칸방까지 부축해주고,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방에 드러눕는 K를 보며 매번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깨물며 돌아갔다. 빌어먹을 놈의 술. K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말했듯이 그는 아침만 되면 근처의 고등학교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도대체 왜 그리로 가는지, K 자신이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학교 맞은편의 벤치에 주저앉아 맥주 따위를 마시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혼란과 몰이해의 눈으로 쳐다본다. 아! 저들의 저 기고만장하고 지루한 표정이란……. K는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는 사고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맥주를 위장에 쏟아 붓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줄담배를 피운다. 시간이 지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드물어질 무렵이면 K는 거의 기듯이 그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의 머릿속에는 젊음이라는 단어와 청춘이라는 단어가 오래된 네온사인처럼 번갈아가며 깜빡인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젊은 피>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팔뚝의 정맥을 그가 오래전부터 소지하고 있는 단도로 끊었다. 거의 새까맣게 보이는 피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피부 위로 흘러나왔다. 방바닥에 피가 점점 샘처럼 고이는 것을 보면서 K는 자리에 누웠다. 그는 한숨을 쉬었고, 누운 채로 담배를 물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아스라이 퍼지면서 빈혈기가 느껴졌다. K는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피 웅덩이에 던졌다. 그리고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출혈은 이미 멈췄고, 방바닥에 고인 작은 피 웅덩이는 말라붙어 끈적거리고 변색되어있었다. 젊은 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알고 있다. K는 영특한 아이다. 너무 영특한 아이라서, 세계가 무작위하고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가 <희망을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K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여러 번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지만 사고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를 굴리지 않고 산 밑에서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시지프스다. 심지어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K의 머릿속에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의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 말 그대로 작동을 멈춰버렸다. 아! 이제 K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아직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에서 구체적인 것들은 항상 서술이 아니라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K가 망가져 작동을 멈춘 장난감과 같다 하더라도, 그 주변의 상황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상황은 움직일 것이다. 변화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K는 독서와 니체에 대해 열광적으로 선교하는 어떤 일본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혁명은 텍스트로부터 비롯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외치고 있었다. K는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일본인들은 유난히 감성적인 열변을 잘 하는 종족이라고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 그 일본인이 말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K에게는 사실이 아니었다. K는 어렸을 때부터 텍스트에 둘러싸여 살아왔지만, 그의 정신에는 혁명 같은 것은 일어난 일이 없다. 오히려 고전문학이라는 것은 그의 인간성의 목을 잘라버렸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산산이 부숴버렸다. 분명 어떤 이들은 문학 속에서 감격과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K는 아니었다. K의 독서는 죽음 속에 빠져있었다. K의 독서는 타성이었다. 그가 왜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거의 미치광이 같은 독서로 머릿속에 쌓아놓은 지식들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현학적인 웅변가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햇볕 내리지 않는 단칸방에서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창백한 형광등을 켜놓고, 그 빛마저 몽롱하게 만들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그 무엇도 아닌 이유에 의해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K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 시였다.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가 영혼의 관절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책을 덮고 지갑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집 앞의 구멍가게로 들어가면서 K는 지갑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늙은 주인이 어서 오시라며 인사를 했다. K는 주인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그리고 그는 주류가 늘어선 냉장고 앞에 서서, 초록색 병에 담긴 최악의 술을 꺼냈다. 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을 기만하는 에틴알코올과 물과 아스파탐. 식민지 시대의 문화말살과 박정희 정권이 맥을 끊어놓은, 한국 양조문화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압생트 빛 상징. K는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문화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파괴되는 것이다. 근거나 사색도 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K는 그 최악의 술을 두 병 꺼내 계산대로 가져갔다. 주인은 거의 졸다시피 하며 말했다. “2200원.” K는 만 원짜리 한 장과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고 술을 검은 비닐봉투에 넣어들고 가게를 나왔다.
세상은 황혼의 빛깔로 물들어있었다. 그것은 계절의 색이었다. K는 한동안 그 자리에 말없이 서있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건물 너머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비명 같은 말마디가 흘러나왔다. “K!”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고 K는 생각했다. “K!”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골목 저편에서 어떤 중늙은이 남자가 K를 부르고 있었다. K는 멀리서 그의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랑곳 않고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K!” 그건 도대체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다. 나는 신문기자고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남자다. 나는 안톤 체호프다. 희망 가득한 갈매기에 대해 서사했으며 1904년에 사망했다. 나는 말 없는 화자다. 나의 페이지는 하얀 공백으로 이루어져있다. “K!”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다. 마을 변두리의 커다란 바위 밑에 내가 훔친 지폐다발과 패물들이 숨겨져 있다.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은둔 작가다. 좀머 씨는 나의…… “K!” 어느새 따라붙은 남자가 K의 어깨를 붙잡았다. K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넋이 나간 눈동자로, K는 헐떡거리는 그 중늙은이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반백의 머리, 깊고 익숙한 주름,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아주 옛날부터 보았던 것 같은 눈동자. “당신은 적어도 예순 살은 되었겠군요.” K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냐. 나 네 큰아버지 아니냐.” 아아, 맞다. 큰아버지가 피우던 담배 냄새가 이 사람에게서 난다. 담뱃갑에 대나무가 그려진 얇은 연초……. “큰아버지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K는 대뜸 물었다. 큰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내 남동생이 그의 아들을 내게 맡긴 이후로, 나는 이 조카와 단 한 번도 정상적인 회화를 해본 일이 없다. 애당초 나는 이 아이에게 단 한 마디의 충고나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그의 언어체계는 스스로 빠져든 고독에 말려들어가 엉망으로 뒤틀린 것 같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작은 전셋집에서도 사방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연초냄새와, 모든 것이 보류된 인생의 냄새가요. 나는 나의 혈족을 사랑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바로 저버렸습니다.” K는 떠들었다. K의 혀는 거의 항상 그의 통제 밖에 있었다. 마치 혀에 또 다른 중추신경이 있는 것처럼, 그 중추신경이 뇌와는 별개로 혀를 통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즉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것처럼, K의 시야는 모든 것이, 온통 뿌옇게 흐려있다. “네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아, 그럼! 분명 아버지는 내 걱정을 많이 할 것이다. 그의 걱정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섰을 때 그가 나를 이 마을로 보냈으니까. 매월 통장에 채워지는 30만원의 부성애와 함께 말이다. “모든 것이 똑같다고 전해주십시오. 이 행성에서 개인의 삶이란 단 한 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K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큰아버지와 마주본 채 중얼댔다. “어딜 가는 게야? 게다가 술까지 사들고!” 응당 분노해야할 때 K 주변의 어른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K에게는 그 어떤 질책도 그의 영혼을 슬쩍 비켜 가버린 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어디든 가야 합니다. 술은 내 수전증을 멎게 합니다. 담배는 내 고통을 연기처럼 흩트려 놓습니다. 하지만 정당화도 논리도 필요 없어요. 내 인생에서-아니 도대체, 내 인생이라는 것은 발음하기도 창피한 것이에요. 그러니 제발…… 아아, 아아아!” K는 갑자기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날숨과 비명은 나병환자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와 같았고, 도무지 그의 절망을 덜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절규 같았다. “아아! 내가 생각하게 만들지 마세요. 부디!” 그는 이제 손톱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할퀴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당황했고, 또한 슬펐다. 이 돌연변이 같은 놈. 우리 가계에서 어째 이런 놈이 태어났단 말인가? 이 조카라는 녀석은 도대체가 <인간>이 될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K의 이마에서 조그마한 핏방울이 흘렀다. 그것은 감상주의자의 눈물 대신 흐르는 듯 볼을 따라 턱에 닿아 방울졌다.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형님. 저는 아무것도 요청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목적하는 바도 없습니다. 실상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내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K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허무주의>라는 빈말을 꺼낼까봐 극도로 긴장해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언어라는 것은 오해하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 것을 부디 언어철학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려 털버덕 털버덕 아스팔트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가끔 부는 가을바람에 백발을 나부끼며 K의 뒷모습을 주시할 뿐이었다. 도무지 씻어낼 수 없는 찝찝함과 답이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기분이 뒤섞인 것 같았다. K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가 비닐봉투에서 소주를 하나 꺼내 뚜껑을 까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병나발을 불면서 코너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K의 큰아버지는 한참을 멀뚱히 서있었다. 그의 남동생에게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동생아, 3년 전에 너의 품을 떠난 네 아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K의 큰아버지는 K의 다락방이 있는 침울한 골목을, 결국 황급히 떠나고야 말았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에 불과해요.”
“이름이 뭐냐니까요.” 경찰은 재차 물었다. 그 젊은 경찰의 얼굴에는 피로와 무관심이 벌써부터 새겨져있었다.
“아버지-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당신의 아들은-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정말로 아무것도……” K는 완전히 취해있었다. 그의 상태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굳이 비어로 말하자면 그는 술에 <꼴아>있었다. 그는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얼굴을 그러쥐고 있었고, 손톱에 찔린 피부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사십니까? 연락할 가족은 있으세요?” 경찰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담배를 한 대……” K는 말하면서 자신의 뒷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어요. 내-내 담배가 어디에 있죠?” 그는 이제 바지와 재킷의 호주머니를 전부 뒤지고 있었다. “사바세계의……”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날숨처럼 K가 중얼거렸다.
“좋아요. 담배 한 대 피우시면 정신이 좀 드실지도 모르니까, 자 여기, 밖에 나가서 피웁시다.” 경찰이 포기한 듯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하나 꺼내고 K의 어깨를 잡아 올리며 부축했다. 그들은 경찰서 바깥으로 주춤거리며 걸어 나왔다. 분명 경찰은 이 지저분한 수염과 엉클어진 장발의 주인공이 미성년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경찰은 K의 입에 값싼 국산담배 한 개비를 물려주었고, K가 고개를 끄떡거리자 성냥을 긁어 불을 붙여주었다. K는 경찰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깊게 연기를 빨아마셨다. 하늘에는 해가 중천이었고 가을인데도 더위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태양광선의 힘 때문인지 위장 속에서 들끓는 알코올의 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K는 코로 연기를 뿜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울 수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그러니까 이것은 메타포가 아니라, 내가 왜 경찰서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과거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현실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죠?” K가 물었다.
“당신은 중학교 앞의 벤치에 쓰러져있었어요. 주변에는 소주병이 몇 개 깨져있었고, 정신을 잃은 채로 계속 오물을 토해내는 걸 학교 수위가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세 번째예요.”
K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연기를 뿜었다. 그래, 과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아. 이 경찰도 내 주장을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담뱃재가 K의 셔츠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내 담-담배는 어디에 있죠?” K의 목소리는 의미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잃어버리신 모양이죠.” 경찰이 한숨을 쉬었다. “보세요, 술을 드시는 건 자유지만 애들 다니는 학교 앞에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에요.” “하하!” K는 반사적으로 건조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누가 어른이라는 거야? 이 사람은 내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미래를 봤어. “그림자” 같은 죽음“의 환영이” 내 “머리맡”을 싸돌아다닐 “때” 나는 “내 미”래를 봤“어.”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과 똑같은 색깔의 담배연기. 위로. 위로. 위로. 더 높게. 모든 것은 불에 태우면 위로 올라간다. “난 돌아가야겠어요.” K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꽁초를 쥐며 말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주소를 불러주세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분 뒤에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갈지도 모르니까. “난 주소에 살지 않아요…….” 그러면서 K는 경찰을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주차된 경찰차들 사이로 걸어갔다. 태양이 너무 심하게 번쩍였고 가을 공기는 세상에다 불에 달군 유리를 부어넣고 굳인 것처럼 이질적으로 청명하고 초현실적이었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진탕이 된 K의 뇌는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더러운 다락, 그 춥고 어두운 다락이 그의 집이라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장판에 누워 담배를 피우면, 이 짧은 과거도 허상으로 변해 날아가고 잊힐 것이다. 그리고 술이 깨면, 그때는 K는 그 다락으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차라리 면도날 같은 세상으로 몸을 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둠도 습기 찬 공기도 담뱃진 냄새도 매일매일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으니까.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현실이라는 밧줄들이 목을 졸라대 결국 질식사하게 만들고 말테니까. “빌어……먹……” K는 휘청휘청 한낮의 대로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욕설마저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적때기예요…….” 분명 그에게는 영혼도 없을 것이다.
흔들리는 시야 바깥으로 행인들이 보였다. 너무 취해 그들의 얼굴을 인지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K는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K에게는 정신에 내리꽂히는 핵폭탄 같은 것이다. 특히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보고 있는 세계가, K가 보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되게 만드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이다. 여름용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들과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퍼져 나오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K는 눈물을 흘리거나 발광하거나 분노한다. 아, 저기 한 주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군. “나는 도망쳐야 해.” K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애당초 이런 밝은 시간에 경찰서까지 끌려간 것이 잘못이었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오로지 다락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K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어댔다. “아무도.”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고 또 아무도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은 기만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지다. 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해야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참하고 고통스러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 잔의 끔찍한 독주나 폐를 찢어대는 담배연기, 혹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혈액으로 도망치며 가라앉아 너무나 당연하게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K는 보도블록에 눈길을 처박고 걸으며 갑자기 외쳤다. 어딘가에서 아기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싫다. 밝은 것은 싫다. K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둠과 금속으로 된 벽들 속에 있을 때, 빛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형상마저 흐릿한 비현실이었다……. K의 눈물샘에서는 잘 벼려진 단도가 자라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K는 그 단도들을 식도로 삼켜 보낸다. 어서 햇빛 들지 않는 골목으로, 그리고 나의 집으로.
우리는 왜 그냥 죽어버릴 수 없는가.
우리는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은 정말로, 정말로 무의미하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K는 웬일로 방에 불을 켜고 벽과 마주앉아 있었다. 2016년 1월에 나는 미쳐간다. 벽에는 잉크로 그런 글귀가 써갈겨져있었다. 글씨체는 분명 K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낙서를 한 기억이 없었다. 아! 사실 K의 머릿속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알코올이 기억을 파먹고 죽음 같은 잠과 도주로 말미암아 그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그 문장은 이상했다. 우선 무엇이 이상한가하면 지금이 2015년이라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에서 <미쳐간다> 따위의 현재진행형을 붙여놓은 것도 이상했다. K는 장판바닥에 앉아 멍하니 그 글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계획일까? 내년 1월에는 미치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계획인 것일까. 그는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지.” K가 바싹 마른 안구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암, 내가 미쳤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나의 이성은 아직도 멀쩡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차라리 내가 미쳤더라면, 완전한 광기에 잡아먹혀 오로지 상념을 배설하기만 하는 통제되지 않는 재해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장에 술을 쏟아 붓고 기억을 잃고 정신을 잃고 나 자신도 달가워하지 않는 담배의 역한 연기를 숨 쉬며 새벽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 이성을 망가트리고 전선을 뽑는 것만이 진통의 효과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K는 방을 뒤져 담뱃갑을 찾아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 K는 생각했다. 내가 도망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입증해봐야 무엇이 자랑스럽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현실세계에서 도무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한 편의 끔찍한 소설과 같이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로 아랍인에게 권총을 연사하고 사형집행을 당한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그러나 대체로 세상은 드라마가 아니고 통상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도라는 사내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며 토의를 하지만,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일어나 소년병들이 마약에 취한 채로 포로들에게 총을 쏴재껴도, 여객선이 침몰하고 비행기가 빌딩에 처박혀도, 해일이 나라 하나를 뒤집어엎어 수만 명이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되어 길거리를 굴러다녀도, 강간범과 살인마들이 도시를 활보하며 일을 치루고 다녀도,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를 명석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그저 당연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영원히 작용하는 관성으로 비추어 보인다. 도덕 같은 것은 관찰에 방해나 될 뿐이지…… 젠장! 나는 아직도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어디선가 미친 살인마가 달려와 나이프로 내 목을 몇 번이고 쑤시는 환상을 본다. 그러한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환영받을만한 것이고 내가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것인데, 사실은 유치한 망상이다. 오, 그러나 내가 죽음에게 매료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그러한 것에 매료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저 진통제가 필요할 뿐이다. 영원히 약효가 진행되는 진통제가! 프로테스탄트들 말로는 자살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가 영원히 불탄다고 하는데, ―육체도 없는 것을 불태워서 무어에 쓰냐는 의문은 접어두더라도―차라리 나는 그런 단순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이 더 낫겠다. 삶에서 주어지는 권태롭고 모순투성이인, 영혼의 숨통을 옭아매는 끔찍한 고통보다, 차라리 유황불에 불타는 것처럼 간단명료한 아픔이 더 낫겠다. 제기랄! 그러나 자살만은 안 돼. 명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자살만은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이 항상 내 주변에 있다……. 나에겐 벌써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K가 씨부렁대는 것을 주의 깊게 들을 이유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다. 그는 오늘도 그저 숙취 때문에 둔해진 머리로 헛구역질을 하듯이 잡념에 빠져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K는 번뇌의 덩어리다. 새해에 보신각종을 치듯이 그의 머리통을 108번―어쩌면 그 이상― 두들겨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K가 뇌진탕으로 숨지는 것 외의 아무런 결과도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피를 좀 흘리고 나면 속이 상쾌해진다는 것을 K는 알고 있다. 그는 여전히 벽의 낙서 앞에 주저앉아 상체를 앞뒤로 끄떡끄떡 흔들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방안 가득 차고,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세어보다가 갑자기 토했다. “우웨엑.” 토사물은 시큼하고 멀건 액체뿐이었다. K는 자신이 3일 정도 술 외에는 먹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번 더 벽을 향해 토했다. 가래 같은 것이 섞인 오물은 벽의 글귀 위에 지저분하게 쏟아졌다. 아, 시바. 내 인생은 인생이라고 부를 것도 없구나. K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위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았고 토사물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났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잡념이나 상념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K는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K는 꿈을 꾸었다.
그는 어둡고 좁은 곳에 있었다. 다리도 펼 수 없을 만큼 좁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바닥과 벽은 딱딱했고 만지면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다. 무언가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현실에서 느끼는 실체도 없는 막연한 노스탤지어와는 다른, 보다 인간다운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슬펐다. 슬펐고, 동시에 공포가 입과 코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분노가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K는 분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 금속으로 된 상자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너무 오래 비명을 질러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머리맡에 죽음이라는 것이 어슬렁거렸다. 그것은 어쩐지 오히려 친숙했다. 굶주림과 추위와 고독 속에서 그것만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런 꿈을 꾸었다. 깨어나자 K의 머릿속에서 꿈의 기억은 사라졌고, 그저 끔찍한 적막만 머리통 안에서 웅웅 울리는 것이었다. “씨발!” K는 몸부림치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도 그는 몰랐다. 굳이 알아낼 이유도 없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고 세상이라는 게 그런 거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오로지 악의로만 설계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K는 자신의 혀를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혈액이 타액과 뒤섞여 볼을 타고 흘렀다. 아하! 하하하. K는 웃었다.
어느 아침 K는 맥주병을 두 손으로 쥐고 고등학교 앞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등교하는 학생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K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있었다. 딱히 눈물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써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도 없었다. 애당초 K에게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들이 없으니까.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도움이 될 테지! 주로 고통스러운 감정과 사고의 비약을 만드는 것은 시각적 자극이기 때문이다. K는 맥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아, 그러나 책을 볼 때 불편한 것은 어떻게 하지…….
“선배.”
K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을 보니 앳되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곁에 앉아있었다. “선배 입에서 피 나요.” 그녀가 맥락 없이 지적했다. K가 입 주변을 손으로 더듬자 맥주와 섞인 혈액이 손가락 끝에 묻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 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마도 혼자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리라.
“너 누구야.” K는 손끝에 묻은 피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H중학교. 선배 1년 아래였던 민지. 이민지.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 등굣길에 선배 자주 봤어요. 아침마다 이 벤치에 앉아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민지라는 학생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K는 그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중학생 때 교류가 있었던 여자 후배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너, 거짓말을 하고 있군.” K가 내뱉었다.
“아니에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복도 청소를 하다가 그만 유리창을 깼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안절부절 못하는 절 보고 그랬잖아요. 선배가 깬 걸로 할 테니까 신경 끄고 집에 가라고.” 말투가 통통 튀는 듯이 발랄한 학생이었다. 말도 많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선생들은 나랑 엮이는 게 싫어서 혼조차 안냈으니까.” K가 맥주병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나 담배 피울 거니까 저리가.”
“괜찮아요. 이 시간에 등교하면 학생부 선생님들도 교문에 없어요.” 여자아이는 웃었다. K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선배 아직 미성년자 아니에요?” 궁금한 것도 많고 말도 많고, K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담배연기를 한껏 빨아마셨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런 걸 누가 신경 써. 그리고 너 나한테 왜 말 걸었어.” 민지는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선배는 자유로워 보여요.”
“하!” K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자유! 자유라! 이 아이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자유, 그래, 난 자유롭지. 그리고 넌 그걸 동경하려고 하고 있고.” K는 바닥을 향해 담배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넌 내 모습이 보이기나 하는 거냐?” 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코올 때문에 반쯤 감긴 눈동자로 민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본능적인 경계태세에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는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어.” K의 눈동자는 불그스름하고 권태로운 빛을 냈고, 여자아이는 이유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사람은 자유의 본모습과 만나게 되면 비참해져.” K는 문장의 한 음절 한 음절을 딱딱 끊어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반드시. 비참해져.”
민지는 K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으려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상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적이지 않은,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 말이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더니, K를 향해 입술을 떼었다. “내일 아침에도 올 게요.” 전과 달리 긴장된 목소리였다. K는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그가 담배연기 때문에 컬컬해진 목을 축이려 맥주를 들이부을 때, 민지는 이미 교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K는 피와 맥주가 묻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면서 새삼 자신의 길고 지저분한 수염을 느꼈다. 도대체가 동경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K는 조소했다. 저 민지라는 아이는 내가 자신의 갈증을 풀기 위해서 그녀의 경동맥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인간은 모두 투견으로 태어났고, “누구나 살인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맥주병을 벽에 대고 던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 등교하던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순간 K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K의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K는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새 담배에 불을 댕겼다. 빌어먹을 놈의 과거라니……. 그는 이미 중학생 때의 일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몇 개의 폭력사건들과 기물파손, 그리고 그가 그의 <보호자들>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제외하면, 과거는 희뿌연 안개가 낀 80년대 호러영화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과거라는 것은 항상 치명적이고 비참한 것이어서, 그저 문 안에 넣고 닫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K에게는 그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K에게는 현재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그는 과거라는 개념을, 현재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매일 저질러지는 과음과 폐가 썩어나갈 만큼의 흡연과 경범죄, 그리고 가끔 흐르는 피들이 그의 <일>이었다. 존재하기 위한 일,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게 되기 위한 일. 양극성과 이율배반과 모순과 양가감정, 그런 것들도 혼돈 속에서는 훌륭한 방정식이 된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올바른 논리라는 것은 존재한 일이 없으니까!” 망할! K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초조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난 철학자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겠어. 난 빌어먹을 놈의 정당성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 때문에 미치는 건 싫어. 그의 걸음걸이는 빠르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신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어댄 탓에 꽁초가 끊어져 떨어졌다. 그 여자아이……. K는 변화를 싫어한다. 혐오한다. 그저 죽음이 자신을 잡아갈 때까지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구렁텅이이기를 바랄 뿐이다.
K는 오래도록 방 안에 있었다. 크누트 함순을 읽고 키르케고르를 읽고 톨스토이에는 담뱃불로 불을 붙여 태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 며칠 동안이나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세계에 반발하여 파고든 도피처는 시간감각으로부터도 유배되는 것이다. 세계에? 너무 거창한 단어다. 세계라고 해봤자 기껏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세계인 것이다. K는 이미 담배연기로 가득 차 숨조차 쉬기 어려운 방 안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맥주병을 찾아다녔다. 다른 한 손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들려있었다. 방 한 쪽 구석에는 책 더미들 사이에 처참하게 구겨진 다자이 오사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퇴폐 속에서 퇴폐주의 작품을 읽는 것은 손목의 인대를 스스로 끊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마침내 K의 손은 맥주병 하나를 발견해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맥주에 섞인 담배꽁초와 담뱃재들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K는 몽롱한 눈으로 그것들을 꿀꺽 삼켰다.
갈증이 났다.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의 연기가 사람을 만난 바퀴벌레처럼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가 흩어졌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오히려 구역질이 났다. K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방문 밖으로 신물을 뱉어냈다. 술, 술이 필요했다. 얼마나 방 안에서 안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오래도록 한숨도 자질 못했다. 하지만 K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아무리 피곤하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어도 맨 정신으로는 절대 잠에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념 때문에, 비약되는 사고 때문에, 심장 한 복판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그러하였다. K는 방 밖으로 침을 한 번 뱉고 문가에 놓인 지갑을 집었다. 열어보니 한 푼도 없었다. K가 인상을 찌푸리며 방 안을 휘 둘러보자 온통 빈 술병과 빈 담뱃갑들, 그리고 타거나 무너져있는 책들뿐이었다. 그는 지갑을 책 더미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비틀거리며 밖에 섰다. “자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지독한 아이러니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하늘은 주황빛이었다. 그러나 K의 눈에는 누렇게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온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자 수염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아아, 아아아, 시발……. 그는 낮게 신음하며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금각사가 불에 탄다.” 헛소리였다. “피아니스트도…….”
무의식중에 걷다보니 K는 어느새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K보다 어린, 혹은 동갑의 아이들이 K를 피하며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K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왜 밖으로 나와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에 없었다. 지구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K는 어쩐지 자신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비틀비틀. 비척비척. 휘청휘청. 목표하는 지점도 없이 영-원-히 걷게 될 것이라는 감각에 붙들려, 그 현상을 숭배도 저주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영겁 속에서 그저 걸을 뿐인 현상이다. 불은 타고 물은 흐른다. 나는 걷는다. 중력은 잡아당기고 빛은 빛난다. 나는 존재자로서의 조건이 결핍되어있다. 나는-존재하지-않는-다-영원-히.
“선배?”
땅이 한 바퀴 돌았다. K의 눈동자도 돌았다. 눈앞에 이민지라는 18살의 여고생이 서있었다. 앳되고 당찬 얼굴의 생김생김. K보다 작은 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K가 다니게 되었을지도 몰랐던 학교의 교복. 황인종의 살굿빛 피부. 그리고 K를 쳐다보는 맑은 눈망울. K의 왼쪽 눈물샘에서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솟아나와 흘렀다. 그 눈물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영혼의 복부에서부터 울렁거리며 뻗어 나오는 증오를, 억지로 내리누를 때의 반작용으로 흘러나온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눈물이었다.
“선배 울어요?” 민지가 다소 당황하며 물었다.
“너 돈 있냐.” K도 물었다.
“왜요? 삥 뜯으려구?” 민지가 실쭉 웃었다.
“이천이백 원만 빌려줘.” K가 대뜸 요구했다.
“왜 그렇게 구체적인 금액이에요?”
“소주. 두 병.”
민지는 K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니, 한참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K도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만지면 부서진다. 죽이면 죽고, 꺾으면 부러진다. K의 허파 한쪽이 뻐근하니 아파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때처럼 무서운 얼굴이 아니네요.” 민지가 말했다. 그때처럼? K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돈.” K는 짧게 내뱉었다.
“좋아요.” 민지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대신에 저랑 10분만 얘기해요.”
K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씹었다. “이자 붙여서 갚는 걸로는 안 되냐?”
“이자 필요 없어요. 소주 살 거예요 안 살 거예요?”
“알았다. 제기랄…….” K는 욕설을 씹으며 근처의 벤치로 가서 털썩 앉았다. 민지는 신난 듯이 따라와 옆 자리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돈부터 내놔.”
“안 돼요. 대화 끝나면 드릴 거예요.”
“알았다. 니 마음대로 해.” K가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선배는 철학자예요?” 민지가 대뜸 물어왔다.
“아니.” K는 피식 웃었다.
“수염이랑 머리는 왜 안 깎아요?”
“필요를 못 느껴서.” 따분하다.
“고등학교는 왜 안 갔어요?”
“너 중학생 때 나 알았다며.” K는 내내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자세였다.
“자세히는 몰랐어요. 전교에 선배 얘기가 소문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알아챈 거죠.” 민지의 목소리 톤은 항상 발랄하다.
“내가 고등학교에 갔었다면 지금쯤 여기가 아니라 소년원에 있었을 거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K 자신의 의견도 아닌, 정신상담 치료사의 의견이었다.
“중학생 때 국사선생님 때려눕혔다는 게 진짜예요?”
“어.”
“어떻게 징계 안 받았어요?”
“합의금. 아버지 돈으로.” K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선생님 한 동안 팔에 깁스 하고 다녔는데.” 민지는 이 대화가 흥미롭기만 한 모양이다.
“내가 부러트렸으니까.”
“왜 그랬어요?”
“몰라.” K가 어조 없이 대답했다.
“대화에 비협조적이면 돈 안 빌려줄 거예요.”
K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저 민지라는 녀석은 흥미본위로 나한테 접근한 것이 분명하다. 마치 동물원에서 야생동물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지금 그녀는 그저 K라는 미치광이를 관찰하며 재미있어하는 것뿐이다. “진짜 몰라. 애당초 중학생 때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아.”
“흠.” 민지는 수긍한 듯 했다. “왜 나한테 돈을 빌리려고 해요?”
“뭔 소리야. 돈이 없으니까 빌리는 거지.”
“왜 돈이 없는데요?”
이 망할 녀석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대화를 끌고 나가려는 걸까. “월말이라…… 통장잔금도 바닥났을 거고. 바로 몇 시간 전에 내 방에서 제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을 불살라버렸어.”
“뭐였는데요?”
“총 삼천 페이지짜리 특수가공 하드커버에 은도금 되고 북 커버까지 쓰인 양장본 세 권.” 중고책방에 팔았다면 못해도 삼만 원은 족히 받았을 것이다. 삼만 원의 진리, 사랑, 행복.
“왜 그런 비싼 책을 태워버렸대요.”
“태워야 했으니까.” K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보다 나 지금 진짜 미칠 것 같거든. 돈 안 빌려줄 거면 그만 두자. 까짓거 마트 영감님 목 분질러버리고 소주 몇 병 꺼내오면 그만이지.” K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지금 피로와 환각 때문에 정신이 어지럽고 편두통까지 오려하는 판국이었다.
“아, 아니에요. 돈 빌려드릴게요.” 민지는 당황한 듯이 가방 속을 뒤지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삼천 원을 꺼내 K의 손을 잡고 그 손 안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K는 건조한 눈동자로 그 종잇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것들을 구겨 쥐며 주머니 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는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서있었다. 세계가 비틀린 듯이 보였다. 영양실조, 빈혈, 금단증상, 뭐 그런 것들 때문이겠지. 그는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러다가 민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뭐랬지.”
“민지요. 이민지.” 그녀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K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K는 뚜벅뚜벅 걸어 가버렸다. 가을에도 음식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는 자신의 음침한 골목을 향해서.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현재 체중이……> <산후 우울증이라는 게 있는데……>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형사입건을……> <적용되는 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신감정 후에 송치될 것이고……> <이런 경우에는 아드님께서도 차후에 어떻게 될지……>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파란색. 빨간색.
어렸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왜 나는 엄마가 없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빌어먹을. 싸구려. 신파극. 같은. 인생.
하늘에는 어린아이들의 비명소리만 천둥 치듯이 울려 퍼진다.
K는 어느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웬일로 그는 면도를 했고, 흐트러진 장발은 고무줄로 올려 묶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나락에 떨어진 사람의 그것과 같았고 얼굴은 창백하게 말라붙었으며, 온몸에서는 담뱃진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훨씬 보기에 좋았다. 적어도 K의 눈동자를 직시하지만 않는다면, 그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는 굳은살이 박히고 흉터투성이인 주먹으로 철제 현관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사람이 나왔다. K의 큰아버지였다.
“K."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적잖이 놀란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전화 좀 쓰러 왔습니다.” K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조가 없었다.
“어…… 그래, 들어와라. 면도 하니까 보기 좋구나.” 큰아버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문을 열어 K를 집 안에 들였다.
방향제 대신 사방에 놔둔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 홀아비 냄새를 없애겠다고 놔둔 것이겠지만, K에게는 이 냄새가 더 독하게만 느껴졌다. 고독과 망가진 인생과 결핍을 가리려는 가식의 냄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냄새. 그 냄새들 사이에는 남자의 손으로 어설프게 정리된 좁은 방들이 있었고, 이미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큰아버지의 자식들이 보낸 인스턴트식품이 박스 채로 쌓여있었다. K는 그런 방안을 휘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인호 형은 요즘 어떻다고 합니까?”
“그 녀석이야 잘 있지. 명절마다 내려오기도 하고.” 큰아버지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K는 대뜸 내뱉었다. “전화를 좀 써야겠습니다.”
“그래, 전화. 누구한테 하려고?” 큰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큰아버지 남동생이요. 전화번호도 좀 찍어서 주세요. 전 모르니까.” 요컨대 아버지.
큰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동생의 번호를 누르면서 생각했다. 왜 이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지. 벌써부터 망가지고 알코올 중독에 걸려 쓰레기처럼 살고 있기에 기품 따위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 청년에게서, 왜 항상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어쩌면 그것이 심지어 어른마저도 손을 못 댈 광기의 끄트머리는 아닐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일이다. K는 절대로, 절대로 이해되지 않으니까.
큰아버지는 동생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러 K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K는 그것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아버지, 나예요. K."
10초 정도의 정적. 아마도 아버지는 놀란 가운데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어……아들. 이게 얼마만이야……. 전에 아버지가 몇 번 너 사는 방에 갔었는데―>
“아버지.” 그것만으로도 말이 끊겼다. “잡담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예정이 좀 당겨졌습니다. 어른이 되면 대답해준다고 약속 했던 것, 지금 들어야겠어요.”
<……> 또 한 번의 침묵.
왜냐하면 나는 절대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니까. “내가 악몽을 꾸고 울 때마다 아버지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적어도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되겠니?> 그의 목소리는 거의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시간 없습니다.” K는 자르듯이 말했다.
큰아버지는 그 광경을 그저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참하게 망가지려는 동생을 붙잡아준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번 새겨진 흉터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죄는 영원히 죄로서 남는다는 것을, 설령 그 죄에 대한 벌이 내려지지 않고 내려질 상대조차 없더라도, 죄라는 것은 개념을 초월해 인간들의 사이사이를 불쾌한 공기처럼 떠돈다는 것을 말이다. 망가진 장난감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장식장에 장식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K는 수화기로 뭔가를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항상 술에 취해 반개해있던 눈동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말이 끝났을 때, K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이제 더 이상 생활비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쓸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핸드폰의 종료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K는 큰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큰아버지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K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원망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운이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로커에 갇혀있던 한 살 배기 어린애보다는 머리가 좋으니까요.” 큰아버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입을 닫아버렸다. “혼돈이 왜 공평한 것인지 아십니까?” K가 큰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큰아버지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며, 스스로 답을 말했다. “그것은 무작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K는 열려있는 현관문으로 뱀처럼 나가버렸다.
큰아버지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석상처럼 서있었다. 얼마 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나다. 그래. K는 갔어. 그냥 가버렸어.” 그러면서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지는 그날도 평소처럼 교복을 차려입고 등교하고 있었다. K의 모습을 못 본 것이 며칠 째더라. 어쩌면 그 삼천 원은 평생 못 돌려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등굣길 저편에서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흘낏 보였다. 다른 여학생들은 코를 막고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씨부렁거렸다. 매너가 없다느니, 멀쩡하게 생겨서 길빵이라느니. 남자에게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데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흰색 셔츠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청바지 밑에 갈색 구두를 신은 훤칠한 남자였다. 민지는 무관심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민지.” 민지는 멈춰 서서 그 남자를 보았다. 나를 아시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얼굴 생김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그것이 K라는 것을, 민지는 깨달았다. “선배?”
그것은 K였다. 마르고 창백한 피부에 유난히 붉은 입술, 나락 같은 눈동자. 예전에는 늘 구부정한 자세였는데, 등을 펴니 키 또한 컸다. “선배 머리 잘랐어요? 면도도 했네?” 민지가 놀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K가 다 타버린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가 그런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이게 뭐야? 선배 왜 이렇게 말쑥해요?” 그러나 K는 대답도 하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만 원을 민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웬 돈이에요?” K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돈 빌렸던 거.” 민지는 당황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K의 모습이나, 이 돈이나. “열 배잖아요!” 그러자 K는 민지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안에 삼만 원을 올려놓고 주먹을 쥐게 했다. “그냥 받아. 주고 싶어서 그래.” 민지는 멍한 상태였고, K의 얼굴은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민지가 물었다.
“글쎄.” K가 흰 손으로 민지의 손을 쥔 채로 웃었다. “새로 하는 작업에 이런 모습이 필요했거든.”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요새는 기분이 꽤 좋아. 가슴 속에 틀어박혀있던 대못 하나가 빠진 기분이야.” 민지는 여전히 당황한 채로 K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이 사람 수염 밀고 머리 다듬으면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그 망나니짓을 다 하고 다녀도 학생들한테는 알게 모르게 인기가 있었지……. “그리고 조만간 떠나야 되거든. 가기 전에 돈도 갚고, 네 얼굴도 보고 가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의 불친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는 다 사라지고,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는 남자가 서있었다. 새삼 손이 잡힌 것이 부끄러웠다. “떠, 떠나다뇨?” K는 슬며시 민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좀 멀리. 이 도시에서 볼 일은 다 봤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아쉬워라…….” 어쩐지 K와 눈을 못 마주치며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봐야겠다.” K가 말했다. 그는 민지의 어깨를 톡톡 치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고하며 거리 저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고마웠어. 그래도 앞으로는 나 같은 이상한 사람한테 말 걸지 마. 위험하니까.” 그리고 그는 갔다.
민지는 만 원짜리 세 장을 손에 들고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도대체 저 선배는 뭐였던 걸까.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으며, 내가 본 모습 중 진짜 모습이 있기는 했던 걸까. 그러나 고민할 새도 없이 K는 사라졌으며, 동시에 민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 왜 엄마?”
<딸.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우리 동네에서 밤에만 벌써 세 번이나 여자 죽은 거 알지?>
“알았다니까. 그래서 요새 학원도 안 가잖아.”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다니? 어떤 미친놈인지 죽이고 머리통까지 잘라 갔다잖아. 아이고, 끔찍해라…….>
“알았어. 학교 끝나면 바로 갈게. 나 학교 가야 돼. 끊어요.”
민지는 전화를 끊고 K가 사라진 거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선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학교에 가야했다. 모든 학생들처럼.
K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을 때마다 나는 구두소리에 스스로 흥겨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이다. 그는 경찰서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가장 얼굴이 익숙한 젊은 순경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경찰은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K를 보았다. “아,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별 건 아니고, 이걸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K는 순경의 테이블 위에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반쯤 부패한 여자 머리 세 개가 굴러 나왔다.
헉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와 함께 순경은 의자 째로 뒤로 물러났다. 다른 경찰들의 시선이 전부 모였다. 경찰서 안에 있던 다른 민간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K는 순경이 도망치기도 전에 목덜미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K는 웃는 얼굴이었다. 경찰들은 권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황급히 손을 가져갔고, 그보다 빨리 K가 뒷주머니에 있던 단도를 꺼내 순경의 목덜미에 겨눴다. 민간인들은 도망치고, 비명이 울려 퍼지던 곳에 바짝 긴장한 공기가 흘렀다. K는 여전히 단도를 순경의 목에 들이민 채로, 이제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칼 내려놔!” 경찰들 중 하나가 외쳤다. 그러나 K는 조롱하듯이 단도를 든 손에 힘을 넣어 순경의 목덜미 피부 안으로 집어넣었다.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쏴.” K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칼 내려놔! 원하는 게 뭐야?” 경찰이 더욱 긴장해서 외쳤다.
“쏴.”
K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단도의 칼끝이 여전히 순경의 목을 찌를 수 있도록 하면서 다른 경찰들이 자신을 쏘기 좋도록 몸통을 드러냈다.
“안 쏘면 이 순경나리 죽어. 쏴.” K의 목소리는 얼음 같았다. 경찰들은 혼란스러웠고, K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K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쏘라고.”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명령했다.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찰이 하나 있었고, 순경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사색이 되어있었다. K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외쳤다. “쏴!”
어제는 골목 구석에서 죽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들어 올려보니 눈알은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내장은 몹시 딱딱했다. 필경 겨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장을 상상하며 그것을 꺼내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의 은행 화장실로 가 비누로 손을 씻었다. 도시에서 죽는 들짐승들은 무슨 병이든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병사(病死)는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작년 한 해는 정말로 지랄 같았다. 어제, 즉 신년 1월 1일에는 죽은 고양이와 만났다. 오늘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일에 대한 걱정 없이 걷는 거리는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신년회를 마친 바로 다음날 사직서를 받은 팀장의 놀란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내게 몇 가지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타당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여간 나는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그것을 사용한 것이다. 코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이런 날 아파트 지하 배관실이나 공영주차장 구석에 가보면 박스를 몇 겹이나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노숙자들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띠지 않는 곳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들의 그러한 점은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하에 산다. 그러나 보다 좋은 곳이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고 몇 개 되지 않는 창문으로는 사람들의 구두가 보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하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익숙해져버렸다.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높은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산 정상이라든가 빌딩의 옥상 같은 곳은 사람이 살기 위해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한 장소들은 떨어져 죽기 위한 장소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자 추락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놀이기구와 같다. 사실 추락하는 자의 감각은 우리네 인생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놀이기구라는 것이 으레 그런 것 아니던가.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다 집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들. 남들보다 낮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가장 좋은 점은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밑에 아무도 없고 내 위로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가장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가장 추악한 죄인이 되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이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고결해지려고 자신을 묶고 조이며 마치 중세시대 중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철로 된 마스크를 쓰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의 사상과 감정들은 빅브라더의 감시 밖에 있다. 왜냐하면 그 빅브라더조차 내가 사는 땅의 인간들을 감시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팔을 흔들며 눈보라가 흩날리는 바깥세상을 가끔씩 걸어 다닌다. 최근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담배로 인한 것이었다. 정부가 금연정책으로 모든 담배에 부가되는 세금을 두 배로 올려버린 것이다. 나는 며칠 간 금연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고 담뱃값이 두 배로 올라버린 이상 그것은 내게 걸맞은 사치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담배를 끊는 2주 동안은 가끔 벽에 머리를 처박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몇 번의 미세한 근육경련도 일어났다. 그러나 곧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문 배달이 오지 않기 시작하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결국에는, 무관심해져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이불에서 일어났다. 기억나지 않는 꿈의 파편 때문에 아직도 펄떡거리는 관자놀이 위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머리를 찔러댔는데 그것이 거실의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인지 창문 밖의 낮고 낮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고양이 내장의 촉감이 아직까지 손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입사하고 나서부터의 그 어느 날보다 옷을 잘 차려입었다. 심지어 처음 출근하던 날보다도 바지의 줄이 잘 잡혀있었다. 넥타이를 매면서 간밤에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미세한 공포, 아니 그것이 공포였을까? 아무튼 이질적이기만 하면서도 어쩐지 이미 내 혈관 속에 돌고 있을 것만 같이 친근한 감각의 조각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했다. 어제는 1월 1일이었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뭔가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아마 고도보다도 늦게 오리라는, 근거도 설명할 수 없는 절망을 나는 나 자신에게 선고한다. 서류가방에는 사직서를 집어넣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니 담배 생각이 났다. 나는 별 이유 없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흩날리는 싸락눈 때문에 사방이 하얗게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분은 저조하지 않았다. 쌀알만 한 눈송이들이 내 깨끗한 정장 위에 들러붙었다. 천국은 공기 중에 모르핀이 눈처럼 날릴지도 모른다. 마침 가게를 열고 있던 구멍가게의 늙은 주인이 내게 꾸벅하고 인사를 해왔다. 나도 그에게 목례를 했다. 노인이 기르는 황색 털의 늙은 개가 가게 앞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개에게도 웃음을 지어보였다. 개들이 인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단순한 사실은 내가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회사에 도착해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팀장이 있는 자리까지 찾아갔다. 사직서를 내고 그가 그것을 읽을 동안 잠시 기다렸다. 팀장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출근길에 노인의 개에게 했던 것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몇 마디의 말이 오갔지만 별 의미가 없는 문답뿐이었다. 나는 팀장에게 얼어 죽은 고양이의 감촉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아무튼지 간에 사표는 수리되었고 나는 내 책상으로 가 챙겨 가야할 것들과 폐기해야할 것들을 분류했다. 대부분 폐기해야할 것들이었고 몇 종류의 서류는 담당자에게 인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지고 돌아가야 할 것들은 서류가방의 빈자리에 넣으니 전부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에 입력된 개인적인 정보들을 전부 삭제하고 나는 한때 동료였던 이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를 나왔다. 겨울에는 왜 이렇게 공기가 맑은지 호기심이 생긴다. 시베리아에 가면 항상 이렇게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일까. 옛날, 주점에서 만났던 러시아에서 온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겨울하늘처럼 청정했었다. 그녀의 피부는 눈 같은 순백색이었다. 또 담배 생각이 났다. 정부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가난한 이들로부터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 건물의 정문 앞에 서서 한참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내 세련된 정장차림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술을 마시러 갈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직장을 얻기 전에는 낮에도 자주 술을 마셨었다. 이제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 몇 년 간 무엇이 변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물으면, 나는 딱히 대답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겨울하늘 아래의 화사한 거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목적도 없이 대로를 방황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서점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학교도 가기 전인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책을 읽어주시던 것이 기억났다. 그 책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골라진 것이었다. 삼국지를 시작으로 한 수많은 역사소설들 말이다. 하여튼 어렸을 때는 그것이 좋았다. 아버지가 책을 읽어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내가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변해가면서, 나의 독서취향이라는 것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계>의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는 책만 읽어댔다. 레이몽 라디게와 랭보 같은 젊은 사망자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보들레르나 니체 같은 경우에는 ―이상한 표현이지만―그들의 철없는 근엄함이 나를 매료시켰다. 뒤늦게야 하는 말이지만 내 현실적 기반은 그때부터 무너졌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테오에게 근대유럽철학을 멀리 하라는 편지를 보내준 고흐 같은 사람이 내 곁에는 없었다. 그러나 진행될 만큼 진행되어버린 인생에서 회의는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글은 거의 읽지 않았다. 나의 독서취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네크로필리아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Nirvana의 음악도 커트 코베인이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뒤에야 듣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바흐고 베토벤이고 모차르트고 라흐마니노프고 이미 모조리 죽어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애도하기보다는 마르틴 루터 같은 이들에게 몇 번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서점에는 책이 많았다. 왜냐하면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런트에 진열된 책들은 거의 모두가 비슷한 것들이었고, 순수예술과 관련된 책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구석진 코너에 박혀있었다. 그러나 유감일 것도 없었다. 이미 나부터가 마지막으로 소설이나 시, 희곡 따위를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싸구려에 저질 포장지로 포장한 텍스트들은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은 문장 하나하나가 내 뇌수에 칼을 꽂고 심지어는 나의 현실을 파괴하려고 했다. 어렸을 때는 몇 번이고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도 지금에 와서는 책 한 권 한 권이 거의 융단폭격 수준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고, 왜였는지는 모른다. 관심을 줄 여유도 없었다. 그들에게 내 정신을 파괴당하면 취업이니 생활이니 하는 경제적 활동들이 전부 셔터가 내려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오래된 책장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서점에서 일기장을 파는 것을 발견했다. 꽤 두꺼운, 성인들을 위한 일기장이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죽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시골로 여행을 가다가 덤프트럭이 그들을 뭉개버린 것이다. 내가 성공적으로 취직한지 삼 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첫 월급의 일부를 어머니에게 보냈을 때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당장 취직하든지 아니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라고 매일 같이 히스테리를 부려댔던 사람이 바로 나의 어머니다.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나에게서 삼 개월 간 세 번의 생활비를 받고나서,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돈을 보낼 수가 없다. 물론 그들의 무덤에 만 원짜리 지폐 수백 장을 같이 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짓은 미치광이나 하는 짓이다. 뱃사공 카론은 그렇게 많은 돈을 바라지도 않는데다가 그가 한화(韓貨)를 취급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내 부모님은 그리스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그리스인도 아니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결혼한 이래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일이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고 교활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버지는 때로는 내 비참한 믿음을 부정하는 안티테제였고 때로는 인간의 본성을 죽을 때까지 드러내지 않은 불쌍한 자였다. 일기장은 한 권에 만 원이었다. 아무런 텍스트도 들어있지 않은 공책이 왜 만 원이나 하는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커버가 가죽으로 되어있었다. 몇 달 뒤면 어차피 벗겨질 금박이나 장식 없이 오로지 박음질만을 단단하게 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계산대로 그것을 들고 가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서점을 나왔는데, 한 손에 가죽공책을 들고 거리로 나와 보니 난 이 일기장을 구매하는 모든 과정 동안 단 한 번도 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이 너무도 투명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내 영혼에 눈이 달려서 정수리로 빠져나와 이십사 시간 하늘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겨울의 투명한 하늘은 인간의 영혼에 치명적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이제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치명적이다. 내게 기독교적 믿음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늘이라는 개념에 어떤 신성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겨울의 하늘은 사람의 정신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광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흰색 계절에 거리를 나돌아 다니다보면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거나 할퀴어 죽이고자 하는 원시적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주변의 환경을 평화롭게 조율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나는 나 자신이 귀머거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잘 알아듣지 못해,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색은 태양과 구름과 밤의 어둠이 내는 일률적이고 지속적인 노이즈뿐이기 때문이다. 집의 나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머그잔에 가득 담긴 드립커피나 보드카 따위를 마시고 있다 보면 죽음이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지 상상할 수도 있다. 나는 땅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지구의 소리도 듣는다. 새벽이 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내 집 창문가를 걸어 다니지 않으면, 이제 잠에서 깨어나 노래하는 시멘트와 벽돌로 된 골목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보일러실에 들어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녀석은 몹시 꽁꽁 숨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지만, 밤새 어딘가에서 울어댔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나는 매일 이상한 꿈을 꾼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젯밤 오늘 제출한 사직서를 쓰면서 나 자신도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린 이래로, 계속 공중 어딘가를 부유하는 느낌이다. 여동생은 울었었다……. 그녀는 시체를 덮고 있던 시트를 걷을 때부터 계속 울면서 사죄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안실에서 나와 일치감치 식장의 준비를 도왔다. 작년에 여동생이 무역회사에 취직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낼 필요도 없어졌다. 참고로 덤프트럭에 받힌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 그대로 뭉개져있었다. 전에는 내 피붙이였었는데, 그냥 엉망으로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였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망치로 박살 낸 다음 시체와 바꿔치기 해도 아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요는 무엇인가 하면, 나는 옷을 입은 다진 고기를 내 부모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구멍가게의 늙은 개를 만났다. 나는 녀석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주머니를 뒤져봐도 개가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녀석이 천천히 꼬리를 흔들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쭈그려 앉아서 녀석의 털을 쓰다듬었다. 가게 안쪽에서 주인이 우리를 보며 늙은이 특유의 웃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주름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시오. 선생. 오늘은 일찍 오시는구랴.” “예에. 그런데 혹시 일기를 써본 일이 있으십니까?”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기억난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말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장례식과 화장을 마치고 유골을 모시기 위해 이동할 때 나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때 나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사실 지금이라고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는 그때 난 어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일정이 끝난 뒤에 나는 아버지가 친척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구석진 것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따라갔다. 왜 따라갔는지는 모르겠다. 건물 뒤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왼쪽 눈에서 눈물 두 방울을 흘렸다. 딱 두 방울이었다. 어느새 따라온 내가 아버지의 옷소매를 잡자 그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황급히 눈물을 닦고, 나에게 웃어보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기요? 허어. 갑작스런 질문이군요.” “예. 사실 제가 오늘 일기장을 샀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신이 죽게 되면 화장해서 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시신도 화장시켜서 뼛가루를 아버지와 같은 곳에 묻었다. 여동생은 내가 나무 앞에서 삽질을 하는 동안 계속 울더니 마침내 졸도까지 하고야말았다. 다소 짜증이 치솟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온통 나무뿌리와 균사로 얽혀있는 땅에 삽질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 일기장을 산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가게 주인이 프로이트를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슷합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던 일률성이 끝났으니까요. 사실은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전에도 일기를 썼나요, 선생?” “전혀요.” 그 노란색 늙은 개는 계속 우리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개를 좋아했다. 그들은 백치에 순진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백치에 순진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간이 내 주변에 있었다면 난 그를 증오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유를 달 필요도 없이 내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인간보다는 나은 면이, 개들에게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장님은 일기를 써보셨습니까?” “예순 번째 생일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아.” 대화를 하면서 난 계속 주인의 뒤편을 힐끗거렸다. 온갖 색깔의 포장지로 싸인 담뱃갑들이 나란히 줄지어져 진열되어 있었다. 담배의 종류가 많고 제품마다 포장한 색깔이 다르다는 점부터가 심리적 마케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세계의 모든 초콜릿이 같은 공장에서 같은 모양에 같은 포장지로 포장되어 나온다면 아이들은 지금보다 초콜릿에 집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 생각해내려고 했다. 감옥에 갇혔을 때의 뫼르소의 생각대로라면 정부는 우리를 벌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굉장히 수동공격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남들 하듯이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서 일기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내키는 대로 쓰고 있어요. 굳이 오늘 일어난 것에 대해서만 쓰는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얘기군요.” 난 개를 쳐다보았다. 쳐진 눈꼬리와 얼굴이 넓적하게 보이도록 자란 털들이 녀석의 가장 활발하고 경쾌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늙은 개들의 얼굴을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안심감이 든다. 저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둔해져가는 팔다리와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리 늙은 편도 아니었는데. 여동생이 결혼하는 것을 기다릴 수 있었다면 손주가 새빨간 신생아의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루고 싶다고 해서 오늘 덮칠 쓰나미가 내일 덮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동생은 아직도 미혼이다. 동생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나보다 어리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소시지를 하나 사서 포장을 벗겨 개에게 주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내가 지불했던 금액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 버렸다. 개가 쩝쩝거리며 소시지를 먹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난 집으로 향해야했다. 오늘은 더 이상 바깥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보드카와 럼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아까 산 가죽커버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난 이것이 일기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년이나 월도 표기되어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에 메모장처럼 줄만 그어진 가죽공책이었다. 서점에서 이것을 펼쳐봤을 때 난 왜 일기장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예전 같으면 내 심리상담사에게 이 얘기를 하고 정신분석학적인 토의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나 자신의 영혼을 분석하는 일은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아마 독서를 그만두면서 그 짓도 그만둬버린 것 같다. 독서광들이여, 문맹이었던 마호메트가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받은 ‘책의 어머니’를 당신이 읽지 못한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책들이 마찬가지다. 모든 책들이 다 절대 읽을 수 없는 책들이다. 어떤 책이 자신의 성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읽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신이 죽기 전에 니체라는 이름이 먼저 죽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이름 없이 종이에 펜으로 흉터자국을 새겨 넣는 광인이었다. 아,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나는 길을 걸으면서 입속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가죽공책을 펼치고 유리잔에는 럼을 온더락으로 만들어놓은 뒤 첫 페이지에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페이지에 눈을 붙박은 채 럼을 홀짝거리며 계속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 집에 이사 올 때 피아노를 하나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방음 문제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이웃들이 분노하며 현관문을 두들겨댄다면, 차라리 피아노가 없는 것이 낫다. 생각해보면 아파트와 빌라들의 숲인 이 도시는 암묵적으로 모든 악기를 금지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탄압, 이게 누가 처음 쓴 말이었을까? 여하간 거창한 것은 아니다. 모든 거창한 것들은 인생을 고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을 오만하게 만든다. 개인은 개인의 영역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논해봤자 득 될 것이 없다고 본다. 내 불만은 그저 사적인 공간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것뿐이다. 사실 나는 이사 올 때, 단독주택을 빌릴만한 돈은 충분히 있었다. 거실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모멘트 뮤지컬 4번을 쳐대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집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하의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소파 위에서나 안락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락하게-혹은 시체처럼. 나는 창문이 많은 집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빛은 일종의 수압처럼 나를 짓누른다. 왜냐하면 빛은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빛은 인간의 영혼에도 좋지 않다. 특히 이런 겨울에는, 그리고 봄에는, 그리고 여름에는, 그리고 가을에는 태양광이 모든 이들의 머리를 무차별하게 박살내버린다. 겨울의 빛은 얼음송곳처럼 뇌를 파고 들어와 영혼에 경련을 일으키고, 봄의 빛은 과거의 비참을 흔들어 깨워 오로지 그를 도주하게 만들고, 여름의 빛은 녹인 쇳물처럼 어깨 위로 쏟아져 호흡을 불가하게 만들고, 가을의 빛은 온 도시에 광인들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나는 지하로 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지하에 있었고 지하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자랐다. 우리 가족이 빈곤했던 것에 감사한다! 만일 저 미친 듯이 드높게 솟은 빌딩에서 내가 살아야 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밧줄이 내 목을 졸랐을 것이다. 빛이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어버리니까 말이다! 온 사물이 너무 환하게 드러나 버리면 양심이 비명 지르며 깨어난다. 그래서 안전한 그늘로 숨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손전등을 비추지 않는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써놓고 보니 너무 강박적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고골을 읽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펜을 놀리면서 어느새 럼을 세 잔째 비우는 중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이건 문학이 아니야.” 내가 서점에서 이 가죽공책을 살 때 이것은 분명 일기장이었다. 그러니 내가 쓰는 것은 형식이 어찌되건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굉장히 개인적인, 그래서 명확할 필요조차 없는 일기 말이다. 내가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잔을 다 비웠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그 러시아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녀와 만났을 때도 나는 럼을 주문해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너무 오랫동안 타국생활을 하다 보니 러시아어를 잊어버렸다고 영어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프랑스어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자신의 일기장이라고,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왜이냐고 독어로 물었다. <아직 한 장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독어로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악센트가 가관이었다. 참고로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지상의 경계에 걸친 창문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항상 창문을 통해 들리는 뚜벅뚜벅 걷는 구두 소리가 피로한 리듬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탁자의자에서 일어나 이미 다 녹아버린 얼음을 싱크대에 버리고 새로운 얼음조각을 네다섯 개 잔에 채워 넣었다. 이미 뇌수에 불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럼주 병을 기울여 잔을 절반 정도 채웠다. 오늘은 보드카를 마시지 못하리라. 보드카. 보드카. 만일 내가 시베리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잔에 입을 대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황금색 불길이 단전으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술을 가까이해야한다. 의식을 잃는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세계에게조차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름철에 길거리를 나다니다보면 초록색 술병을 늘어놓고 거리에서 잠든 사람들을 자주 본다. 차에 치어 죽은 비둘기만큼이나 그들은 모순이 없다. 나는 창문을 통해, 길을 걷는 사람들의 구두를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은 귀가하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오늘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오늘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았다. 내가 여동생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동생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어제는 고양이를, 아, 잊어버렸다. 부패가 유보된 그 고양이의 시체가 어떤 색깔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차가운 촉감을 제외하고는 이미 그 기억 자체가 흑백사진처럼 변해버렸다. 오늘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샤워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샤워를 하기로 했다. 나는 그다지 늦지도 않은 이 초저녁에 술에 만취해 샤워를 할 수 있다. 내일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팀장에게 그 고양이 시체를 가져가야만 했었다. 우리 아버지의 곤죽이 된 시체를 만지도록 해야만 했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왔었다. 그들은 육개장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들이 내게 위로의 몇 마디를 건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작은아버지와 그 딸들이 왔었고, 작은아버지의 장녀가 낳은 어린 조카들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장례식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이 개츠비가 매일같이 열었다는 놀이공원처럼 화려한 파티가 겹쳐보였다. “아, 그야말로 만국박람회 같습니다 그려.” 샤워하는데 애를 좀 먹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나는 샤워기를 변기 쪽으로 돌려 이곳저곳에 튄 토사물을 청소하고 나 자신도 마저 씻었다. 물기를 닦고 거실로 나오니 온몸이 열로 가득 차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옷을 주워 입고 비틀거리며 소파로 가 누웠다. 나는 침대를 사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매일 밤 알코올에 절어 쓰러지듯이 잠드는 이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나는 소파에 걸쳐져있던 이불로 몸을 말고 태아 같은 포즈로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도 소용돌이치는 곡선과 잃어버린 방향감각이 보였다. 보일러를 켜지 않아 거실은 추웠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만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가 잠깐 보인 것 같았고, 직후 나는 정신을 잃었다. 황혼에 깨어났다. 보라와 황금의 미광이 자주 감기는 내 눈꺼풀 안에서 굴러다녔다.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와 당장이라도 술이 흘러내릴 것처럼 고동치는 눈동자로, 나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황혼의 은은한 빛살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어떤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 일률적이면서도 모든 것들에 병렬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었다. 아 그래! 애초부터 문학이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병(病)들의 무리였다. 굳이 실증주의의 오만하고 면도칼 같은 혓바닥을 거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어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가 알았던 위대함도 아름다움도 모두 병의 권속이었다. 완벽하게 보이도록 설계된 이 도시의 건물과 직선의 도로들은 병을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뱃속에서 위벽을 갉아먹고 있는 벌레의 존재를 느끼고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뇌의 무게중심이 온통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뭐라도 먹어야만 했다. 정확히는 탄수화물로 된 음식을 위 속에 구겨 넣어야 했다. 예전에는 숙취를 해소할 때 신경안정제가 가장 효과가 좋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런 신경계 약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머리에 찬물을 뿌려대면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계집들과 신경계 약물을 쌓아놓고 살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공포. 인지하지 못하는 공포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폭력과 섹스. 악몽과 풀잎 색깔 밤의 잠. 유치한 무관심, 마치 버려진 세상에 혼자 남은 쾌락주의자처럼. 그것도 독서의 종말과 함께 끝났다. 냉장고에 있던 식빵을 꺼내 물도 없이 꾸역꾸역 위장에 채워 넣었다. 위에서는 계속 되 뱉으려는 압력이 올라왔지만 나는 계속 구겨 넣었다. 그리고 물 한 잔과 아스피린 두 알을 삼켰다. 소파에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젠장.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구멍가게 사장이었다. 노란 털 뭉치를 안고 있었다. “무슨……” “선생. 내 개가…….” 나는 곧바로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상실의 눈동자가 불타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있었다. 그래, 이게 삶을 증명당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노란 털 뭉치에 손을 가져댔다. 오늘 날씨와 같은 온도였다. “일단 들어오시죠.” 노인은 주저하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보시다시피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소파에라도 앉아계시죠.” 그리고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나는 내 표정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그 눈동자 속에 있는 것만이라도. 그러나 덜 깬 술기운과 무력감, 그리고 권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진저리를 쳤다. <작년 한 해는 정말로 지랄 같았다…….> 나는 중얼거렸고 땅 밑에 떨어진 시선에는 아까 흘린 몇 방울의 눈물이 오팔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셔츠를 고쳐 입고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건조한 눈으로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살았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얼마나 됐지요?” “십칠 년은 됐을 겁니다. 나보다도 늙은 셈이죠.” “아.” 나는 사실 당황하지도 못했다. 분명 노인과는 매일 마주치는 사이고 언젠가는 의기투합하여 술 한 잔 하고서는 내 집에서 더 마신 적도 있기는 하지만, 글쎄 나로서는 그가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또 하나의 차가운 짐승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제가 잘 한 것이겠지요, 선생?” 그가 돌연 물어왔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 녀석을 제가 잘 키우고 보내준 것이리라고…….” 그는 말을 잇기가 힘든 듯 보였다. 그러나 값싼 감상주의도 황혼에 비치는 빌어먹을 눈물도 없었다. 오로지 단단하게 박혀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는 노인의 주름만이, 그 갈색얼굴에 감정조차 깎아낸 화강암처럼 만들어버리는 그 주름만이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존경해야 했으리라. 노년의 안정이란 재물도 환경도 아닌 가부좌를 튼 영혼의 부동자세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끄덕이는가 싶더니 노란 털 뭉치를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아 펼쳐보니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엎드린 채 눈으로 내 발길을 쫓던 늙은 개의 온전한 몸체가 내 무릎 위에 놓여졌다. 눈곱이 낀 눈꺼풀은 닫혀있었고, 입꼬리에는 사람과 같은 경멸이나 조소가 없는 것이 어쩐지 가련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평화롭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죽음이 만들어놓고 갔다. 죽음. 죽음. 죽음. 생명의 가을걷이를 위해 항상 우리들의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이. 나는 개를 노인에게 돌려준 뒤 창고 쪽으로 향했다. 나는 창고에서 삽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노인은 나를 쳐다보더니 묵묵히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현관에서 등산용 신발을 신고 삽을 쥔 채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거리는 한적했다. 거리는 항상 한적할 것이다. 이 내륙에서 도시를 비추는 태양은 사람을 도망치고 싶게 만들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대화 없이 뒷산으로 향했고 노인은 여전히 품에 그것을 안고 있었다. 뒷산 중턱에서 나는 땅을 팠다. 등산로와는 꽤 떨어진 곳이었다. 내가 땅을 파는 모습을 보며 노인은 개를 안은 채 옆에서 오직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 왠지 모를 안도가 애수의 뒷면에서 보이고 있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다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먹지 말 것을. 나는 30분 정도 땅을 팠고, 충분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노인을 쳐다보자 그는 개를 얼굴로 가져가 품더니 노란 털의 냄새를 맡았다. 더 이상 그 개의 냄새가 나지 않을 털의 냄새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판 구덩이 안에 가만히 개를 내려놓았다. 우리는 흙을 덮었고, 태양은 이미 다 져버린 뒤였다. 산속은 까맣고 가끔씩 청록빛이었으며 벌레와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우리는 흙을 덮은 자리 앞에서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멀리서 자동차들이 굴러가는 엔진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도시라는 단어가 유별나게도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시베리아로 가자고 나는 다짐했다. 어떤 시체도 썩지 않을 만큼 추운 곳으로.
아가씨, 저와 대화 좀 하실까요? 저는 종교인도 아니고 피라미드 업체 판매사원도 아니며 변절자도 아니나 미치광이냐고 물으시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러나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아! 물론, 제가 저 자신을 위험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정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나 충동과 광기는 있었지요.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항상 피와 정액―실례.―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범국제적 비관론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비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인류와 개인의 성격적 차이, 그리고 그들의 야만성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관측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항상 대중의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들을 연구해왔지요. 어떤 때는 위협이고, 협박이었으며, 어떤 때는 분노를 유도하거나, 어떤 때는 절대자라는 상징을 이용하고, 어떤 때는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국가나 민족에서 민중의 치안이 가장 좋았던 시점은 다른 국가와 전쟁 중인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 안에 존재하던 혼란과 무질서를 국경 너머로 던져버림으로서 질서를 유지시킨 겁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건 제로섬 게임이에요, 아가씨. 그리고 가장 쉽게 이기는 방법은, 너무 한가한 나머지 길거리에서 유리창을 깨고 방화를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공동의 적>을 부여해주고 분노에 모든 에너지를 쏟게 만들어 더 이상 다른 미친 짓거리는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의외로 많은 지도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했어요. 적(敵)! 이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사람은 집이 없고 밥이 없어도 살지만 적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서두가 너무 난잡했나요? 사실 이런 기질 때문에 제가 미치광이라고 불리곤 하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나의 비관들을 설교해버리고 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괜찮을 겁니다. 아가씨는 아직 도망치지도 않았고 자리를 옮겨 앉지도 않았군요. 제가 능란한 서울 말씨를 쓰고 목소리도 높지 않기 때문인가요? 뭐, 좋습니다. 버스는 아직도 한참을 달려야 하니까요. 교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가는 일이 기술적으로 아주 쉬워졌어요. 그러나 <떠나는> 일은 아직도 힘든 일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떠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에든 부정적인 것에든 사람은 속박되지 못하면 불안해하니까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언어에 속박되어있었죠. 지난 수십 년간 말입니다. 그것도 주로 늙은 언어들에게요. 덕분에 근대에 사망한 것들이 아직도 제 심장을 움켜쥐고 있답니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이십 년 하고도 조금 더 이 땅에 붙잡혀 있었겠군요. 아가씨의 눈동자가 아직은 피로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저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눈동자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오만가지 것들을 알려주지요. 아무리 옷을 잘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아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을 말입지요. 저는 아가씨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초췌하며 빈 굴처럼 눈이 쑥 들어간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가을에도 짧고 나풀거리는 옷으로 속살을 드러내며 밤의 번화가를 방황하곤 하더군요. 이게 저의 편견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들은 주로 네온사인 밑에서 발견되고, 인간의 고기를 바라는 핏기 없는 얼굴로 밤에 드문드문 미광을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가을바람과 담배연기로 물든 그녀들의 회색 팔뚝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가씨의 눈은 아직 총명하며 빛이 앉을 자리를 비워두고 있군요. 당신의 갈색 단발머리는 인생을 증오하지는 않는다는 상징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구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 말이에요. 이런, 전화가 왔군요. 잠시 실례. 여보세요? 예, 예. 아뇨,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예. 이해를 못하신 것 같군요. 저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음 계획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전부 정리해버리세요. 제 전화는 곧 사용이 중지될 겁니다. 이크. 실례했습니다. 전화기를 놓고 온다는 걸 깜빡하고 가져와버렸군요. 습관이 되어서요. 요샌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사람입니다. 항상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야 하기 때문에, 돈과 음식과 옷을 위해서 호주머니의 한 구석을 전화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지요. 제 직업이요? 아! 뭐라고 말해야할까요. 굳이 말하자면 저는 전문적인 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로 돈을 벌지요. 물론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적 수단에 아주 능수능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머리모양이나 옷차림 같은 것에도 주의 깊어져야 하죠. 부수적인 것이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말에 속아 넘어가기 전에 옷차림과 머리모양에 먼저 속아 넘어간답니다. 이건 거의 진실에 가깝죠. 자신만만하고 현학적인 어조는 마무리를 지을 뿐이에요. 저는 그렇다 치고, 아가씨의 직업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당신은 아직 학생일겁니다. 아마 어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요. 어쩌면 그 눈동자가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그리고 아가씨의 외양을 보아하니 딱히 부족하달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유복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자랐을 것 같군요. 인간의 씀씀이라는 것은 보통 아동기에 고착되어서 크게 변하질 않죠. 그리고 계절상으로 보아 여름방학이 끝물일 것인데 지금 이 버스에 타고 있다는 것은, 본가에서 먼 학교에서 기숙사나 자취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 전부 맞았다고요? 너무 놀라진 마세요. 만일 아가씨가 점집엘 갔다면 방금 제가 말한 것과 똑같은 얘길 들었을 겁니다.
언제나 사회와 사회인이라는 것은 매뉴얼 화(化) 되어 있었지요. 대부분의 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 자신을 개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이 사회라는 것을 성립시킨 뒤부터, 그들은 모두 그 보이지 않는 왕에게 떡고물을 받아먹어야만 했으니까요. 자승자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되어버렸군요.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이나 유동적인 시대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말이에요. 사실 그런 것들은, 중요한 만큼이나 아무 의미도 없답니다. 개인이 개인 이상의 것에 대해서 말할 때면 항상 설득력이 떨어지곤 하니까요. 해가 산맥 사이로 가라앉기 시작하는군요. 버스는 아직도 한참을 달려야 하고요. 이런 산골짜기에 노을이 깔리는 시간이면 저는 제 마음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뭔가를 느낀답니다, 아가씨.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깊고 어두운 곳에 철창을 세워 가둬놓은 일종의 야수지요. 인간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의 숨겨야하는 인격 말입니다. 제 친구 얘기를 하나 해볼까요. 그 친구는 저보다 세 살 정도 어린 후배로, 전에는 미술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일처리가 그리 능수능란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착한 성질을 갖고 있는 녀석이었어요. 굳이 눈에 보이는 문제라면 남성적인 매력이 좀 부족하다는 것뿐이었죠. 아시다시피 매력이라는 것은 굳이 남녀사이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대외활동을 책임지는 <능력>이죠. 그 매력이라는 것이 부족하다는 뜻은 그 친구가 세상에서 많은 불편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여하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그 친구는 사실 아동 성애자였던 겁니다. 성인 여성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고, 어린 아이들에게만 욕망을 가지는 성적 괴물 말이에요. 그 친구가 언제 자신이 이상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서른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것을 숨기고 억누르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욕구의 해소가 필요했을 때에는, 글쎄요, 뭐 어떻게든 했겠지요.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으로 말예요. 문제는 어느 날 그가 그런 생활에 진력이 났다는 것입니다. 성애(性愛)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단한 것인데, 그걸 삼십 년 가까이 목을 졸라 눕혀놓기만 했으니 그야 진력이 날 법도 하지요. 게다가 그는 남자란 말입니다……. 하하! 제가 이 시점에서 성(性)을 구분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남자라는 것들은 무엇이든 분출해야만 하는 족속들이지요. 굳이 상스러운 의미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뭐 하여간에, 그는 그대로 회사를 박차고 나가서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처럼 천륜을 어기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의 고지식한 양심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 친구의 불운이지요. 그래서 그 녀석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경찰서를 찾아가서 벌컥 문을 열고 말한 겁니다. 나는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아동 성애자요. 나를 감옥에 처넣든지 당장 쏴죽이든지 하시오. 경찰들은 입이 떡 벌어졌지요. 웬 미친놈인가 하고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경찰들은 그 친구를 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질문을 시작했지요. 당신 어린아이를 강간하거나 성추행한 적이 있소? 아니오. 아동 포르노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소? 아니오. 그럼 도대체 무슨 명목으로 당신을 체포하란 거요? 글쎄, 그건 당신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아동 성애자가 전 인류의 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지 않소? 아하! 이거야말로 한편의 코미디지요. 사람들은 사실 자신이 증오하는 족속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만 증오스러운 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경찰들은 유감이지만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내가 어느 날 더는 참지 못하고 다섯 살배기 꼬마아이를 평생 다시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도록 망가트리면 어떡하려고 날 놔주는 거냐고 했지요. 그러자 경찰은 손톱을 좀 물어뜯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디다. <제가 정신병원에 연결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친구 녀석은 그 말을 듣고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냥 경찰서를 박차고 나온 뒤에 저에게 전화를 했지요. 이래 뵈도 전 동생이나 후배들에게 꽤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날 저녁 술집에서 만났고, 그 녀석은 홧술을 마셔대면서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러더군요. 형, 자기가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하는 기분을 아시오? 저는 대답했습니다. 암, 아주 잘 알지. 그러자 그 친구는 말없이 건배를 요구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고, 또 계속 마셨답니다.
제가 다소 과하게 자신만만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더는 이러한 치욕 속에서 살 수는 없다면서 자기 자신의 살을 발라내는 그런 시기 말입니다. 치욕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라면 일본인들이 전문가이기는 합니다만, 저도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답니다. 날카로운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조준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지요. 문제는 그 칼날을 결국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랍니다. 마침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버스 안 전구에 불이 들어왔군요. 날씨 탓에 모든 광경들이 아른거리고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 소나무, 어둠 속에서도 당당하게 솔잎들을 세우고 있는 소나무를 보십시오. 저것들은 겨울이 와도 낙엽을 흩뿌리지 않지요. 저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저것이 신이―어떤 종류의 신이든 말입니다. 그-혹은 그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든― 인간 속의 야수를 위해 세워둔 이정표처럼 보입니다. 아아, 날이 잘 선 도끼로 둥치를 쪼개야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살을 찢고 창살을 부순 뒤 야수의 정수리에 도끼를 박아 넣어야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보이지 않는 양심에 의해 너무 고결하게 다듬어졌으니까요. 그러나 아가씨, 그 야수는 <죽음>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볼까요. 아가씨가 어느 날 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 바다의 음산한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 해변에 등대가 하나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등대의 빛은 너무도 치졸하고 미약해서 그 누구의 눈도 되어주지 못할 때, 태곳적부터 인간이 감히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한 세계라는 것이 형체도 없이 으르렁거릴 때…….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개인의 미약함을 숨기기 위해서 문명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밤을 환하게 밝히고, 손끝도 댈 수 없는 하늘로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뇌와 영혼을 분석하기 위해 불철주야 메스를 휘젓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 너무도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그 많은 신학 논문과 유럽의 철학서들, 포스트모더니즘을 믿는 정신과 의사들과 세계대전, 더 쉽게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총과 대포들, 미국과 러시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믿고 있는 궁극의 사회. 나는 그것들을 공포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야 할지 공포에 대한 <도피>라고 해야 할지 단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건, 결국 모든 공포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굴을 파고 들어앉아있는 한 마리의 들개에 대한 공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 그들은 절망할 것일까요?
아가씨, 세계를 세계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다는 것을, 아가씨도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바로 아가씨 나이 무렵에 사람들은 그 연결점을 발견하게 되지요. 존재에 대한 의심이 광란을 거쳐 회의가 되어버리는 나이에 말입니다. 제가 적(敵)에 대해서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습지요. 인간! 하하! 제가 왜 웃는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계속 자신이 쳐둔 덫에 걸려버리고 마는 언어적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때 누구나 겪게 되는 모순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기는 그래서인지 몰라도 독일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그들은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내곤 하더군요. 그들과 언어에 절망해 길거리에 무대를 세워놓고 광란하는 행위예술가들 중 누가 더 현명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간 이것은 노력이지요. 인류의 최대 발명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언어에게 배신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요. 짐승이나 야수에게는 그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말을 하는 대신 송곳니와 발톱을 사용하지요. 진리에 대한 그 단순하고도 잔혹한, 완벽한 표현이라니,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은 그렇게 감탄할만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쯤에서 나츠메 쏘세키가 만들어낸 고양이가 생각날 법도 합니다. 그 고양이는 살면서 인간에게 물드는 바람에 심히 유감스러운 결말에 빠져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짐승의 자살이라니, 저는 그 고양이가 잃어버린 야만에 대해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지금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국가적으로 말살당하는 극형을 받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담배라는 것은 말입니다 아가씨, 그것이 신체에 유해하든 유해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개비의 궐련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많은 상징을 부여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담배에만 해당되는 사유가 아닙니다. 코로 들이마시는 각성제라거나, 발륨이 나오기 전에는 모든 지적노동자들이 애용했던 바르비투르산이라거나, 중국인들이 은을 팔아치워 사들였던 신경이완제까지, 인간의 영혼을 조정할 수 있게 만드는 이 놀라운 물질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예술과 함께 발견한 또 다른 비상구라고 할 수 있지요. 애당초 이런 약물들을 인간이 발견해 아름다운 정제로 빚어낸 이유부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냐구요? 아, 그야 물론 모든 것에 대해서지요!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고, 삶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하늘과 땅과 우리 모두를 구속하는 중력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아아, 아가씨. 부디 오해는 마십시오. 이런 얘기를 사실 당신 같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 아가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계 없이 털어놓고 마는 것은 나의 끔찍한 버릇이랍니다. 어떻게 보면 직업병이기도 하지요. 제가 이미 말했듯이 제 직업은 전문적 거짓말쟁이랍니다. 그런데 거짓말이라는 것은 날조 투성이일 때는 오히려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거짓말이 진실보다도 사물의 구체성을 정확하게 지시하지요. 제가 하는 거짓말은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등의 대책 없는 낭설이 아닙니다. 저는 세련되게 차려입은 정장으로 사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어 끊임없이 털어놓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일 당신이 초자아라는 개념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는다면……니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같은 것이지요. 하기는 니체는 너무 많이 쓰인 이름이긴 합니다. 근대 유럽 철학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아무도 성공시키지 못하는 지침이 되어버린, 철저하게 비극적인 심벌이에요. 여하간, 제 거짓말은 이런 것들입니다. 저 자신은 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더는 변할 수 없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고 믿지만, 제 직업은 저의 자랑스럽고 유연한 혀와 철로 된 안경테를 이용하여 인류가 나아갈 길을 지시하는 철학이 아직은 남아있노라고, 그 사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쇄하는 것이지요. 아, 저는 제가 사악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뭐라구요? 제 직업이 작가냐고 물으시는군요. 제가 되묻지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리지요. 이 나라의 노동법에 따르면 작가나 소설가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로 작가나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백수입니다. 다만 <취미>로 작성한 원고라는 이름의 엔터테이먼트를 출판기업에 팔아 생계를 유지할 뿐이죠. 작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 따위는, 이 나라에는 없답니다. 아가씨.
제가 말해놓고도 우스운 단어군요. 예? 아뇨, <취미>라는 단어 말입니다. 아아, 이 얘기를 하려면 제 과거를 들춰야만 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사실 저도 젊을 적에는 아주 많은 분노를 뱃속에 끌어안고 사는 청년이었답니다. 저는 항상-그리고 모든 것에 화가 나있었고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폭력을 사용했죠. 열아홉 살 때 오십을 바라보는 대학교수와 나이도 잊고 주먹다짐을 벌인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게 말입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니체이스트라고 믿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파시스트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저는 그런 상황과 마주하면 먼저 소매부터 걷어 올리는 미치광이였고요. 저는 모든 지식인들에 대한 반란자이자 극도의 개인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무장하고 반달리즘의 옷을 입은, 말하자면 잠을 잘 때조차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증오로써 살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우시다고요? 이해합니다. 저도 지금의 제 모습이 그때와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하간 그렇게 피가 끓던 때에, 단 한 가지 믿고 있던 것은 <예술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하다>나 <귀중하다>나 <위대하다>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주십시오. 제가 선을 그어놓은 단어는 <중요하다>였답니다. 그때 저는 예술에는 반드시 피와 영혼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작품이라는 결정을 위해 인생 전부를 예술에 바친 랭보와 로트레아몽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제가 가장 증오하는 무리들은 <딜레탕트>라는 무리들이었지요. 아! 소위 <글쓰기 수업> 같은 곳에서 제 눈동자만 보고서 질겁하고 도망쳐버린 아주머니들, 그 풍족한 노년에 다소의 품위만을 얹고 싶어 했던 무고한 아주머니들이 떠오르는군요. 아무래도 잔혹성 또한 제가 짊어지고 태어난 천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나이를 먹었지요.
이것이 제가 <취미>라는 단어를 사용해놓고 스스로 웃은 이유랍니다, 아가씨. 한때 저는 예술은 절대 취미가 될 수 없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위해 영혼을 불쏘시개로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그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것을 모르더란 말입니다. 청백색으로 불타는 것 같던 제 영혼은 그 순간 식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가 되기에는 너무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해보니, 눈앞의 모든 것이 어느새 열정과 광기를 잃고 한낱 소일거리와 코미디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나라에 <예술가>라는 직업은 없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제 천직을 찾고만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문적 거짓말쟁이라는, 오로지 언변과 정직하지 못한 미소만으로 돈을 버는 천직을요.
예? 아가씨에게는, 지금 제가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구요. 아하! 그것을 제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십시오. 우리는 떠나기 위한 버스를 타고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발목부터 늑골까지 담쟁이덩굴 같은 이 땅의 손아귀에게 붙잡혀 있다가, 이제 떠나려 할 때 갑자기 혀가 환희를 외치는 것을 경멸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마침 하늘은 검푸른 보라색이고 만월이 떠있지 않습니까. 이런 밤에 외치고 으르렁거리는 것 외에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제 영혼이 식을 때, 그때 절망하는 방법마저 잃어버린 것을 오늘처럼 감사하게 여긴 일이 없습니다.
저 어둠이 깔린 숲을 보십시오, 아가씨. 한 가지 묻고 싶군요. 저곳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아, 침묵이라고요? 그것 참 굉장한 대답이군요……. 물론 저곳에서 침묵이 보이긴 합니다. 사실 보일 뿐만이 아니라, 그 침묵이라는 것을 거의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은, 그 침묵 안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가씨. 저것은 전쟁입니다. 심지어 식물들조차도 자신의 삶으로 다른 삶을 찢어발기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요. 키 작은 나무들은 어떻게든 태양빛을 받기 위해 괴상한 모양으로 잎을 뻗고, 키 큰 나무들은 자신들과 같은 땅에서 양분을 빨아 먹는 다른 나무들을 말려죽이기 위해 더 높게 넓게 잎사귀들을 피운답니다. 그리고 물론 짐승들도 자신의 피를 위하여 토끼와 고라니들의 고기를 물어뜯고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아놓지요. 이것은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순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이지요. 엔트로피의 법칙을 아시지요, 아가씨?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은 <죽고 죽여라>랍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저 삶의 욕망으로 가득한 푸른 숲을 말입니다. 나는 감히 저것이 아름답다고 말하겠습니다. 전쟁이야말로 우리의 기원이지요. 우리도 그 전쟁 속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다들 날카로운 단도를 하나씩 쥐고 나옵니다. 문명의 발전이란 것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개념을 감각으로부터 멀게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지요.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전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렇지요. 그것은 적(敵)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로 인간의 삶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적이라는 존재입니다. 사실 그것은 생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고 생식(生殖)과 인간성마저 지워버린 뒤 오로지 피안의 저편을 향해 홀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수행자들을 상상해보십시오. 나는 그들을 경외하기도 합니다, 아가씨.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위버멘쉬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인간도 짐승도 식물도 아니게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적이라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더욱 단단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듭니다. 분노와 증오가 당신의 신체를 보다 확정적으로 다듬고, 적을 향한 당신의 어쩔 수 없는 사랑이 당신의 눈동자에 생명을 돌게 만듭니다. 당신은 손톱을 더 날카롭게 다듬을 것이며 칼을 쥐고 휘두를 수 있게 뼈와 근육을 준비할 것이고, 오로지 투쟁만이 존재의 의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적은 증오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당신이 당신일 수 있게 만드는 당신의 분신과 같으며, 당신에게 생명의 원액이 돌게 만드는 삶의 기원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지요. 아가씨, 나는 당신에게도 적이 있으리라고 분명하게 믿습니다. 물론 아가씨가 그 <대상>일 수도 있는 무언가를 적이라고 인식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투쟁이 끝나버리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쇠퇴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부디 제 얼굴을 보아주십시오, 아가씨. 제가 지금 이 일련의 성토를, 웃는 얼굴로 내뱉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모든 개념들이 너무도 추상화되어버린 이 내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을 잃어버리고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내 눈으로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경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시대정신이 얼마나 많은 똘레랑스를 품게 될지언정, 그것은 존재의 기원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과거에는 너무도 명백했던 적의 존재가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확인할 수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리하여 이 행성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이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는 것이지요. 막다른 길, 막다른 골목! 제가 말했던 막혀버린 골목, 후퇴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은 바로 지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성거리면서, 오로지 <무언가>를 찾으려고 뿌예진 눈동자로 침을 흘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아! 도대체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대와 함께 흉기마저 퇴화해버린 그들이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제가 항상 이러한 무책임한 비관에만 젖어있던 것은 아니랍니다, 아가씨.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것은 서양문명의 종말이며, 이제는 다시 동양철학이 새로운 길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죠. <구토>와 <이방인>을 한 손에 들고 거대한 서점들이 사방에 자리 잡고 있는 시내거리를 붉은 가죽구두를 신고 종횡무진 했던 저에게 그것은, 사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백컨대 오후 두 시에 내리쬐는 겨울의 태양빛마저도 저에게는 조르바의 어깨를 검게 태운, 지중해의 빛살을 암시하는 속삭임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의 주장을, 저는 들을 수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감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철학이라는 것은 이미 근대에 끝나버렸고, 현대란 아무런 열정도 기대도 없이 <남겨진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척수의 근저에서 뱀처럼 쉿쉿거리며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죠.
잠깐 이야기를 우회시켜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감사합니다. 아가씨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실는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고, 어쩌면 아가씨처럼 사랑하기 아름다운 나이에는 그것이 사방에 꽃을 피우고 있을 수도 있지요. 저는 인생에서 단 한 번 사랑에게 잡아먹혔었답니다. 신경학자들이 <고작 세 달밖에 지속되지 않는 호르몬 분비>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망치로 머리를 깨부수듯이 저를 쓰러트려버렸죠. 맹세컨대,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빛>을 본 것은 그때뿐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듯이 보이고, 그녀가 뿜는 신성한 빛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시 전에 없던 아름다움을 품게 되었답니다. 도취, 그것은 도취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환각제이자 각성제였고 눈물이 흐를 만큼의 아름다운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아가씨, 당신이 이것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결말은 부조리극보다 더 기이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기기괴괴한 것이랍니다. 그것은 희극은커녕 비극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결말들 앞에서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소위 운명이라고 부르는 혼돈의 도가니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방을 해머로 때려 부쉈다가 새로 짓는 것을 지켜봐야하지요. 한때 사랑이라는 이름이 나의 단도를 녹이 슬어 스러지게 했다가, 어느 날 홀로 더러운 구정물이 하수도를 타고 흐르는 새까만 도시 한 복판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손아귀에 한 자루의 새롭고 익숙한 단도가 쥐어져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분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지요. 쉽게 말해, 한번 지옥에서 건져 올려 졌다가 다시 지옥으로 내던져졌을 때 느끼는 감정은 절망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것은 말하자면…… 아아, 자신이 진실을 발견했다는 일종의 깨우침이지요.
제가 왜 갑자기 사랑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으로 늘어놓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인류를 이끌 새로운 철학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불교철학을 연구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자비심과 보리심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인상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난다는 단순하고도 궁극적인 목표는 통쾌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맙소사, 아가씨, 그것을 연구한다는 시점에서―학술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말입니다― 이미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듯이, 그들의 수행 또한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사이비 종교들의 신앙교육 방식은 심리학적으로 아주 초보적인 테크놀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불교철학을 저 자신에게 대입시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제가 느낀 것은 정신의 분열이었습니다. 유럽에서 태어나 매카시즘의 땅에서 자란 제 영혼은 투쟁하는 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에 끔찍한 공포를 느끼더라 이 말씀입니다. 피를, 더 많은 피를 흘리고 흘리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저 자신을 잃는 것처럼 두려웠더란 말씀입니다!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핏물이 튀는 전쟁을 어머니 같은 죽음이 내 목숨을 가져갈 때까지 계속하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의무이노라고! 사랑이 모든 것의 해답일 수도 있지요. 그 이해할 수 없는,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차원이 모든 것이 해답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겁먹고 지치고만 것입니다…….
예. 겁먹고, 지쳐버렸습지요. 아직도 저는 입안에 스물여덟 여개의 흉기를 품고 있고, 제 혀는 냉소를 두들겨 만든 날카로운 단도에 필적합니다. 오로지 거짓말과 능멸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고, 혁명을 말하는 척 하면서 파멸에 부채질을 합니다. 어느새 저는 너무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고, 기존 관습에 대한 반란자이자 미친 반달리즘의 화신이었던 제 젊은 모습이 아스라하기만 합니다. 아아, 아가씨. 이 버스가 달리는 내내 저는 아가씨에게 계속 적(敵)에 대해 강론하였지요. 그러나 제 눈가에 단단히 박힌 주름은 제가 웃는 얼굴의 사기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저의 적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스럽고 증오의 감정으로 들끓는, 육시하여야 마땅할 나의 적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안개로 자욱한 시대에 막다른 길목에서 어물쩍거리는 목적 잃은 들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남들에 비해 더 아는 것이 있다면, 막다른 골목에서 이 골목은 막혀있노라고 알고 있다는 점뿐이지요. 어느새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이는군요. 저쪽에 보이는 것이 항구인가요? 아, 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군요. 뱃속을 비우고 잠자는 거대한 짐승처럼, 배들이 연기를 뿜으며 침묵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는군요…….
너무 오래 떠들었나보군요. 제 실없는 소리를 여태껏 들어온 아가씨도 지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저의 말동무가 되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군요. 예? 아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공부>가 될 리가 없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아가씨의 인생에 해(害)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먼저 내리시죠.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군요. 여기만 벌써 겨울인 것 같습니다. 어둡고, 그러나 인간들이 피운 불빛이 몽환적으로 반짝이고, 빛이 닿지 않는 밤바다는 음산하고 으스스한 것이 과연 로트레아몽이 시의 주제로 썼을 법 합니다. 그나저나 이 항구를 자주 이용하시는 것 같은데, 매표소까지 안내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예, 여기군요. 아가씨, 저기 매표소 옆 구석에 엎드린 사내가 보이십니까? 비렁뱅이로군요. 전철역이든 공항이든 항구든,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에는 거의 항상, 무슨 상징처럼 비렁뱅이들이 있어요. 아, 다음이 제 차례군요.
출항이 30분 뒤라고 되어있네요. 아가씨는 어디로 가십니까? 아, 일본이요. 학교가 일본에 있으신가봅니다. 저는 어디로 가냐구요? 글쎄요,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굳이 말하자면, 아가씨, 저는 다섯 개 국어를 할 줄 알고 키르케고르를 원서로 읽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곳으로 갈 거라는 것입니다.
출항이 30분 뒤이니 미리 타 있는 게 좋겠군요. 아가씨와의 짧은 인연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니,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만…… 먼저 해결할 일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이보시오, 아저씨. 이 시간까지 비럭질 바가지 두고 엎드려 계신 거 보니 집도 절도 없는 분 같은데, 이거 받으시오. 아닙니다. 전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 다시 와서 되돌려달라고 할 일 없으니, 그냥 받으시오. 안에 현금카드도 있으니 미친 것처럼 쓰지만 않으면 적어도 반년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요. 그러니까 통째로 받으시라니까. 예, 예. 당신이야말로 복 받으쇼.
예, 이제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겠네요. 예? 아아, 예. 지갑 통째로 준 것 맞습니다. 괜찮아요. 생각해보니 휴대폰도 줘버릴 걸 그랬군요. 뭐어, 나중에 배 위에서 바다에 던지면 되겠네요. 괜찮다니까요 아가씨. 여권이랑 배표는 코트 주머니에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은 항상 편도여행이랍니다.
그는 빌라의 복도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맞은편 건물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맞은편 건물의 한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남자의 기억에 따르면 근 몇 달간 그 집은 불이 꺼져있는 날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서 가끔 파자마 차림의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집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뭔가를 정리하기도 하고 청소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간간히 팬티바람의 남자가 보였다. 그도 역시 삼십 대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미광이 비쳐 뿌옇게 보이는 눈동자로 그 장면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 얼마 뒤면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보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도 매번 그랬기 때문이다. 일곱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담배도 모두 타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 여자아이가 인형을 하나 들고서 창문 앞을 가로질러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다 타들어버린 담배꽁초를 창문 밖으로 던지고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구역질나는 삶의 단면들……. 그는 아마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중얼거리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소리도 없이 입을 뻥긋거렸을 뿐이다. 그래. 이 도시는 그렇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 빌라들이 밀집한 이 어둑한 거리에서, 어딘가에 있는 십대 소녀는 커터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있을 것이고, 어딘가의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두들겨 패고 있을 것이다. 그저 상상일 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 자해에 맛이 들린 소녀의 팔목에는 벌써 수십 개도 넘는 흉터가 있을 것이고, 얼굴에 멍이 든 아내는 남편이 출근한 뒤인 낮에는 화장대 앞에서 울면서 도주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포기한 그 도주를 말이다. 도주. 도주.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남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이런 거리에서 자라온 것이다. 피폐하고 온통 회색조인 삶밖에 갖고 있는 것이 없는, 도시의 빈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는 입술을 씹으면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 정제들이 들어있는 사각의 작은 비닐봉투였다. 그는 그 안에서 정제 하나를 꺼내 입에 넣더니 고개를 뒤로 휙 꺾으며 삼켜버렸다. <담배를 피운 뒤가 제일 좋지. 니코틴 때문에 감각이 깨어있거든.> 그리고 그는 십 초 정도 창밖을 계속 내다보았다. 저쪽 창문에서는 남자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남자가 서있는 곳은 전구가 고장 나서 절대 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보면 남자가 서있는 쪽의 창문은 그저 새까맣게만 보일 것이었다. 이 거리의 하늘보다도 훨씬 새까맣게 말이다.
남자는 계단을 한 층 내려와 자기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온갖 아로마와 허브들의 냄새가 곰팡이 냄새와 뒤섞여 끈적거리고 지독한 향취를 만들고 있었다. 현관문의 맞은편 왼쪽에 위치한 방문 안에서 <The Grateful Dead>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어둑한 집은 그 경쾌한 노래마저도 무엇 때문인지 음산하게만 느껴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슬리퍼를 벗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약이 돌기 시작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이 둔해지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방안에 울리는 음악소리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온갖 색깔들로 점멸할 것이다. 도주. 도주. 그가 오디오 앞에 깔린 이불에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도주. 그 꿈같은 단어. 방에 있는 창문을 통해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욕하고 비명 지르는 소리……. 남자는 이미 누워있었다. 천장에 보이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며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몽롱한 눈동자로 그 빛들을 쫓으며 머릿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것이 언제였지? 언제부터 여자의 살들이 그렇게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을까? 나와 살을 섞는 여자들의 눈동자에서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끔찍한 구렁텅이들이 보이기 시작한건 언제부터였고?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런 상념들은 곧 잊혀져버렸다. 왜냐하면 남자가 자신의 혈관 속에 오색찬란한 환상이 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번쩍임이나 돈과 황금의 빛깔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죽음과 닮아서 은밀하게 번뜩이는 환상이 말이다.
어쩌면 죽음과 닮은 빛. 그러고 보니 딜러가 그런 얘기를 했었지. <이 물건>은 사람이 죽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물질과 똑같은 성분으로 되어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는 수천 가지 빛과 무늬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살아있을 필요도 없었다.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목적이 있어야한다. 목적이 없다면 적어도 동기 정도는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목적이나 동기마저 없을 때 우리의 삶은, 그저 기다릴 뿐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래보다는 덜 비참한 현재가 지나가는 것을 그저 기다리는 것 말이다.
남자는 불 꺼진 방 안에서 벽에 기댄 채 앉아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깨어있는 것인지 잠든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창문을 통해서 바람이 들어왔다. 여름 특유의 끈적거리고 축축한 바람이 말이다. 옆 건물의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흔들더니, 한 손에 쥐고 있던 볼펜으로 바닥에 무어라고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쓰는 것을 보지도 않으면서 그는 펜을 놀렸고, 입으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노예가 되도록 길러졌어. 언제부턴가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상징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다린다. 언젠가 <이> 세상이 끝나버리기를 말이다. 종말의 도래를 외치는 사이비 광신도들은 사회인들을 위한 적극적 대변인이다. 모두가 벌써부터 종말에 익숙해져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불로 된 비가 쏟아져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제야 시작됐군.>
남자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길러낸 사회의 모든 것이 남자의 뼈마디마다 체념하라는 글귀를 송곳으로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시절을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른이 된 뒤에 떠올리는 유년시절의 끝은 언제나 어른을 비참하게 만든다. 기억나는 것은 이미 일찍부터 그가 중독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모든 것들에 대한 중독 말이다.
술, 담배, 섹스, 자해, 마약.
요컨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잊기 위한 모든 것들에 대한 중독.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구름들의 숫자를 세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다보면 어느 순간 섹스라는 개념이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다. 도파민이 분비되고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에 그는 자신이 생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면서 구역질을 하고 토사물을 뱉어낸다. 짧은 쾌락을 위한 도구여야만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쾌락에 대상이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간절하게 권총 한 정만을 원한다.
그래서 항상 약이 제일 낫지.
남자는 앉은 채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비닐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책상의 서랍에서 얇은 직사각형의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비닐봉투의 내용물을 그 위에 직선으로 뿌렸다. 남자는 그것을 돌돌 말더니 종이의 한쪽 끝에 침을 발라 붙이며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입에 물고 끝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예전에는 잘 말린 대마 잎을 지금보다 훨씬 싸게 구할 수 있었다. 노후 된 기차역에 가면 반드시 대마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진 지금은 보다 시끄럽고 번쩍거리며 음침한 곳으로 가야한다. 품질이 더 나아졌다고 하기도 힘들 것 같다. 남자는 연기를 빨아들이다 콜록거리면서 기침을 한다.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그의 폐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을 것이다. 대마초도 담배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는 시간과 사고를 함께 묶어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리고 싶을 때에는 대마를 피우고, 가학적인 현실감을 필요로 할 때는 담배를 피운다. 문제는 그런 순간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수도 없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죽음을 더 앞당기는 가장 쉬운 방법을 바로 그들이 발명했다.
문제는 아직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만났었지.”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남자는 딱 한 번 죽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미로 말이다. 그건 남자의 혈관에 한창 뜨거운 피가 돌던 무렵, 그러니까 그가 지금보다 더 젊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히피 음악이 흘러나오는 어두운 방에 누워있었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섞어서 한 줌을 집어삼킨 참이었다. 창밖에서는 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고, 방안에서는 오디오가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남자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뒤집고 있던 무렵, 창문을 통해서 시꺼먼 무언가가 기어들어왔다. 얼굴도 표정도 형체도 없는 새까만 무언가가 말이다. 그것은 방안에 들어와서 남자의 머리맡을 천천히 기어 다녔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눈치를 챘다. 저것이 죽음이라고. 죽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네가 잠이 들면 데려갈 거야.>
왜?
<왜라니. 너도 바라던 일일 텐데.>
모르겠어.
그는 정말로 몰랐다. 그저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그의 말에, 남자는 자기가 살아왔던 생을 한번 훑어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햇빛 아래에서 살던 시절의 일들을 말이다. 얼마나 오래된 과거인지. 어쩌면 그리 먼 과거는 아닐지도 몰랐지만, 남자에게는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한때 그에게는 부모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차가운 골방의 감촉뿐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없는, 오직 남자 혼자서 주저앉아 음악을 듣고 지루한 듯이 책을 읽던 그 골방의 감촉. 어쩌면 그때부터 죽음은 이미 그를 점찍어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련을 가져야하는지, 아니면 복수심이라도 가져야하는지, 그것도 모르겠어.
태양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그걸 체념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남자는 잠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물도 나오지 않는 몽롱한 눈을 희멀겋게 뜨고 새까만 천장을 쳐다보기만 했다.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창가가 밝아지기 시작했고, 해가 뜨고 있었다. 그러자 죽음은 돌아갔다. 창문 너머로 넘어가, 한적한 도시의 골목에서 흩어지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가 한숨짓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할까? 만약 그것이 다시 와서,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말하면, 남자는 어떻게 할까?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죽어야 될 이유도, 죽지 않아야 할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그는 다 타들어간 대마초를 장판에 눌러 끄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흰색 정제 하나를 비닐에서 꺼내 삼켰다.
당신이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의 자유를 바란다면, 동물원의 철창에 갇혀있는 동물들에게 환각제를 하나씩 나눠줘야 한다.
철창 밖이라고 자유가 있으란 법은 없다.
그때, 그의 몸이 바닥에서 점점 늘어지고 있던 차에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전화기를 찾아 바닥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다 타고 남은 대마초뿐이었다. 전화기는 책상 위에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소 초조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너 혹시 전에 말했던 <물건>, 아직 갖고 있어?」
그거…… 아마 있을 거야.
정상인 같은 목소리를 내자. 혀가 꼬이는 것에 조심하면서.
왜, 사려고?
「응. 내가 그쪽으로 갈게. 돈은 얼마나 필요해?」 여전히 초조한 목소리였다.
평소에 주던 대로 갖고 와. 너 상대로 돈벌이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친구가 <고맙다>고 하려던 것 같았다. 남자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이런 일은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다. 이차 판매자가 된다는 건 부담이 크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것과 팔기 위해 사는 것은 완전히 죄질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무엇 하겠는가? 남자는 또 눈앞에서 기하학적 형상을 한 환각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이 지겨운 세상에서 끊을 것을 다 끊어버리더라도, 죽지 않는 이상 선은 또 연결되기 마련이다.
죽는다면 혼자 있는 방에서 고독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 누군가가 침대 맡에서 울고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맞이하는 죽음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끝자락에 가면 언제나 괴로움 밖에 되지 않는다.
창문에 비치는 옆 건물의 굴뚝이 어둠 때문에 성모상처럼 보인다. 그 어깨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요정이 앉아있다. 크리스트교 옆의 애니미즘.
방 안에 쓰러져있는 데카당티슴.
상징들의 세계.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바깥세상에서는 금화와 황금이야말로 인간의 영성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그 세계에서 자랐다. 그러나 언제부터 쓰러지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량품이란 뭘까. 남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전화가 또 울렸다.
남자는 전화기를 열고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여보세요.
「준형이니? 나 고모야.」 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 고모.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전화 해봤어. 잘 지내니? 일자리는 아직 못 구했고?」
그게, 네. 언제나 비슷하죠. 일자리는……
「됐다. 말 안 해도 돼. 네가 힘들 거라는 거 잘 안다. 고모가 이번 달 생활비 부쳤어. 그림은 요즘에도 그리고 있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미술활동이라도 계속 하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고맙습니다. 고모.
「네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주미까지 그렇게 됐으니, 고모는 네 심정 다 이해한다. 그래도 어쩌겠니. 이제 너도 네 삶을 살아야지…….」
…….
남자는 침묵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는 침묵은 아니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고모라는 여자가 일컫는 아버지니 어머니니, 주미니 하는 이름들은 남자의 머릿속에서 이미 퇴색된 지 오래였다. 이젠 더 이상 그들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남자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그저 시야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신비로운 도식들을 눈으로 쫓고 있을 뿐이었다. 비극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상실한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저 현상들만 있을 뿐. 그리고 가차 없이 연속되는 현재들만 있을 뿐이었다. 마비된 감정과 뒤틀린 지각기능. 이미 재가 되어버린 영혼. 우리의 육체는 어딜 가든 철창 속의 원숭이와 다를 바가 없다. 자유는 환각과, 선택적 광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내분비샘에서 분비되는 온갖 호르몬들 속에서도.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 친구일 것이다.
미안해요 고모. 누가 와서 이제 끊어야겠어요.
「그래. 내가 너무 주책없이 떠들었지. 몸 건강히 잘 지내렴. 그리고……」
남자는 <그리고> 뒤에 무슨 말이 붙을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일어나 현관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남자보다 키가 조금 작고 갈색 머리에 핼쑥한 얼굴의 사내가 문 앞에 서있었다. “안녕.” 사내가 거의 기계적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들어와.
갈색 머리의 사내가 신발을 벗는 동안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는 그곳에서 저금통을 하나 꺼내더니 열어서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비닐에 들어있는 20개 정도의 작은 캡슐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이미 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거실로 나갔다.
돈은?
“여기. 액수 세어봐.” 그러면서 사내는 지폐다발을 남자에게 건넸다.
아마 맞겠지. 물건 확인이나 해봐.
창문 밖에서 어떤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남자는 그저 소파에 앉은 채로, 갈색 머리의 사내는 비닐을 열고 캡슐 하나를 열어 입술에 갖다 댈 뿐이었다.
이봐.
“응, 좋은 물건이군. 이걸로 됐어.”
전부터 말했지만 난 딜러가 아니야. 본격적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한테 가는 게 나한테나 너한테나 더 좋을 거라고.
“미안. 하지만 그쪽 업계 사람들이랑 직접 만나고 싶진 않아.”
그만큼 내 부담이 늘어나는 건 괜찮단 말이지. 남자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으면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영리한 녀석들은 적당한 시점에 발을 빼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관계란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리하고 영리하지 않고 이전에 자신의 발이 진흙탕에 점점 끌려들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인간도 있다. 자신이 어디로 굴러 떨어지든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
정신과 의사들은 그것을 수동적 자기파괴 행위라고 한다.
건설적 의욕을 가지는 비법은 뭘까?
철창 열쇠를 훔치는 것과 철창 안쪽에 자란 독버섯을 씹어 먹는 것 사이의 차이점은?
저 여자는 아직도 우는군.
“이봐, 혹시 지금 취한거야?” 갈색 머리의 사내가 물었다.
몰라. 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너 동공이 풀려있어.”
지금 베란다 문 열려있어?
“베란다? 열려있는데.”
좀 닫아줘.
사내는 그가 시킨 대로 베란다 쪽으로 가 문을 닫았다. “베란다는 왜 닫으라는 거야?”
너도 조심해. 약에 취하려면 그 전에 베란다부터 닫아놔.
“어째서?”
본드 불다가 베란다 밖에 용이 있다면서, 그 용에 올라타려다 떨어져 죽은 친구를 하나 알거든.
“하. 그거 재미있는데.” 갈색 머리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같이 본드 불던 다른 친구 말로는 그 용이 얼른 타라고 했다더군.
무의식의 자살교사.
남자는 모두의 정신 속에 그런 <용>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물건 받았으니까 가볼게. 다음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사내가 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 위에 늘어져있었다. 한쪽 팔을 눈 위에 올리고.
여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남자는 불빛이 희끄무레하게 비추는 방 안에서 캔버스 앞에 앉아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씁쓸한 그리움이 느껴질 정도의 화구들도 전부 꺼내놓았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서 캔버스의 하얀 표면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미술활동. 뭔가를 창조하는 것.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주머니에서 대마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정체모를 초조함을 느끼면서 대마초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내 그림을 보았던 건 언제였지?
남자는 물감도 짜놓지 않은 팔레트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붓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 놓인 흰 캔버스는 공포였다. 실로 공포였다. 타고 남은 찌꺼기와 사람들이 뱉어낸 오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이 과잉의 시대에 무얼 더 창조해야한단 말인가? 한밤중 24시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는, 본질의 색깔을 잃은 채로 과잉된 자본주의와 마주할 때의 그 느낌. 이제 개념들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개념들은 유령처럼 도시의 상공을 배회하며 언젠가 인간들에게 완전히 잊혀 지기만을 기다린다. 남자는 밤하늘을 보면서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고 부대끼며 부유하는 것을 본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을 보는 것과 흡사하다.
미술관에 변기가 전시되면서부터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시대에 어떤 처지로 태어났는지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창조할 것이 없다.
이제 우리에게 허락된 행위는 파괴와 부정, 쇠락밖에 남지 않았다.
남근들은 거세당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의미가 불투명하게 흐려져 가고 있다.
예술가들은 건재하지만 예술은 멸종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예수도 정장을 입어야한다. 사실, 그렇게 하더라도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러니 성당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남자는 자신이 비평가로 오인당하는 것이 더욱 두렵다.
나는 비평가는 물론이고 예술가도 아니야. 그는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말린 대마가 타면서 내뿜는 연기를 들이마신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먼지 쌓인 다락에서 캔버스와 화구들을 꺼내왔는지 그도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무엇을 그리든, 그리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차별적 행동주의. 과도한 액션. 어쩌면 그런 것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런 시대에는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리비도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추측조차 하지 못한다. 오늘 오후에도 젊은 피들은 서울 시내에서 횃불 혹은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겠지. 아하, 그러니까 리비도란 이상주의자들의 전유물일지도 몰라. 그가 중얼거린다.
영혼에서 섹스를 도려내고 나면 사실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내 나쁜 버릇은 나 자신을 계속 관측한다는 거야. 남자의 말이다. 그러니까 그 관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계속 약에 취해있는 거고. 남자가 중얼거린다.
로보토미 수술을 받은 살바도르 달리가 불현 듯 떠오른다.
아마 면도도 하게 되겠지.
사회가 어째서 위험한 야생동물들을 보호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그 답은 사실 명백하다. 야생동물들을 그냥 방치했을 때, 그 결과 사회가 그들과 충돌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송곳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드러낸 적 없는 가장 날카롭고, 이미 그 자신의 피로 피범벅이 되어있는 송곳니를 말이다.
그러니 약물이란 양심을 교육받은 야생동물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기.
야만적인 영혼을 환각 속으로 밀어 넣기.
남자는 거의 다 타들어간 대마 꽁초를 캔버스에 지져버린다. 까맣고 가끔 빨갛게 점멸하는 재가 캔버스의 흰 천에 짓뭉개진다. 손을 놓자 꽁초는 떨어지지도 않은 채 캔버스에 달라붙어있다. 남자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면서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왔다. 그는 눈동자가 풀려있었고, 그의 눈에 비치는 것들은 전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과거는 너무 날카로워. 남자가 중얼거린다.
시야에 굴러다니는 환각들 사이로 어떤 영상들이 보인다. 교수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는 남자의 젊었을 때의 모습.
플래시.
작업실에서 돌아오면 맞이해주던 여동생. 그녀는 웃고 있다.
플래시.
지네발 같은 환각의 가지들이 영상을 뒤덮는다.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주황색으로. 이건 질 나쁜 여행이야. 남자가 중얼거린다.
상패들로 가득한 거실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는 남자와 그의 여동생. 그때는 창문으로 노을빛이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 빛의 색깔이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플래시.
플래시.
경적소리.
디젤엔진이 발명된 뒤로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빨라졌다. 인간의 죽음마저도 말이다. 옛날에는 침대에서 죽던 이들이 지금은 차도 위에서 곤죽이 되어 굴러다닌다.
로드 킬 당한 비둘기와 수많은 벌레들의 영상.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되어버린 고깃덩어리들. 우리는 먹지도 않을 짐승들의 죽음을 위해 매일 값비싼 기름 값을 내고 있다. 세금이 붙은 석유들.
짐승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도 경계가 애매해져버렸어. 남자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엉클어뜨린다. 사람들이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을 남들처럼 받아들이는 방법을 너무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그는 세상을 다시 낳으려다가 낙태해버렸다.
산부에게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했습니다.
예술이란 게 그런 거지.
남자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환각과 몽상 속으로 잠수했다. 과거들은 색이 바래 모노톤의 먼지더미처럼 어둠 한 구석에서 흔들거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처음 각성제를 코로 흡입했을 때부터이다.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키를 돌리려 노력하는 것은 젊었을 때뿐이다. 모든 이들이 그렇다. 아마도 모든 이들이 그렇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시대이고, 나이를 먹은 소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아니,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삶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소수의 철학자들조차도 사실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삶의 문제에 대한 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불만족을 입에 물고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며 미쳐가고 있다. 발광. 목적 없는 발광. 귀를 자르고 유화물감을 짜먹은 고흐처럼.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대변을 먹어치운 니체처럼. 물론 그만큼 위대한 <광증>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발광하고 있다. 그리고 미치지 않는 방법은 미쳐버리는 것뿐이다. 미치지 않는 방법은 미쳐버리는 것뿐이다. 도파민 금단현상. 관측과 인지의 혼선. 세로토닌 결핍. 그러니까 남자는 고의적으로 광란하기 위해 약을 집어먹고 폐에 유독물질을 집어넣는다. 미치지 않는 방법.
어렴풋이 빗소리가 들려왔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비는 이틀이 넘게 내리 내렸다. 남자는 층계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창문으로 관망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담배를 피우면 폐부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는 담배를 끊지 않았다. 끊을 이유가 없었다. 육체의 고통이라는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신체적 통증에 집중할 때면 사람은 모두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게 되니까 말이다. 탐닉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잠깐이나마 정신을 몰아내는 방법은 탐닉이다. 고통에 대한 탐닉, 약물에 대한 탐닉, 섹스에 대한 탐닉, 쾌락에 대한 탐닉. 구분하여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괄호 안에 있다.
사람들이 퇴폐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라고?
그럼 도대체 인생에게 무얼 기대했단 말인가?
인생은 우리의 삶에 멋대로 난입해 들어와 마구 도끼를 휘두르고 다닌다. 당신은 그의 도끼를 뺏거나 그와 싸울 수도 있지만…… 글쎄, 남자는 그저 길가에 앉아서 그가 행인들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을 구경할 뿐이었다. 더 이상 길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도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향할 것이다. 그냥 그뿐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나한테서도 피 정도는 나오겠지. 그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담배를 벽에 지져 끄고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찬장과 서랍, 냉장고 등을 뒤지더니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오늘도 집에 있나? 좋아. 십오 분 안에 그리로 가지.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남자는 부엌으로 가더니 작은 과도를 꺼냈다. 그는 그것의 날을 왼손 엄지손가락에 세우더니 그대로 그어버렸다. 엄지손가락의 살은 하얗게 벌어지더니 금세 붉은 피를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부엌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붉은 피. 그러고 보니 남자는 여동생의 피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살아있을 때 미리 봐둘 걸 그랬어.> 남자가 중얼거리면서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치명적인 사건들은 항상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재난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탄생과 삶 또한 재난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철분의 맛이 났다.
에이즈처럼 정신병도 체액에 의해 전염되는 것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남자는 섹스를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싱크대의 수도를 틀어 피를 닦았다. 남자는 서랍장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돈뭉치를 하나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는 검은색 장우산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건물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밖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창문을 보면 노란색 가로등 불빛이 빗줄기를 비추고 있었다. 이런 때면 도시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음침한 빛과 물줄기로 번들거리는 검은색의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말이다. 이런 도시에서 살면서 미치지 말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도시 디자인 설계사들은 미치광이들을 양산하기 위해서 봉급을 받고 있다. 어디선가 또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건물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펴자 우산 위로 빗방울들이 투덕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는 비와 어둠 때문에 한적했고, 이런 공간에서 산책을 하려는 미치광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한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걸었다. 가끔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조금만 더 가면 밤에도 네온사인들이 번쩍거리는 교차로가 나올 것이었다. 인간과 돈이 만들어낸 영원히 밤이 오지 않는 거리. 인공적인 빛들이 짤랑거리며 비추고 사람들은 알코올과 황금만능주의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는 자본주의의 놀이동산. 그 뒤쪽에 남자가 향하는 곳이 있었다. 네온사인의 뒤쪽은 평범한 밤보다 훨씬 어둡다. 온갖 전기적인 소음이 쌓이는 그 뒷거리는 말하자면 사회적 쓰레기매립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도덕 교과서에 쓰여 있는 행복추구권이라는 단어.
말하자면 민중의 아편.
사람들은 대부분 속는 것을 기뻐한다.
교차로로 나오자 점점이 우산을 쓴 사람들이 보였다. 차들은 계속 달리고 있었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엔진소리로 거리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24시간 패스트푸드점과 술집, 세련된 재즈카페와 바(Bar)들. 달리는 자동차들이 흩뿌리고 지나가는 차가운 섬광들. 핸드폰의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걷는 이들과 술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는 중년 남자들. 그런 것들로 교차로는 번쩍이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습기로 젖은 머리를 늘어트린 채 걷는 남자는 도시 속의 이방인, 아니 오히려 길을 잘못 든 짐승처럼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야생동물.
자신의 굴이 어디인지 잊어버린 혈거짐승.
경찰들은 주로 그런 짐승을 잡아다가 새로운 굴속에 가둬넣는 일을 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들의 완벽한 세상을 어지럽히지 마.>
남자에게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완벽인지 의문을 제기할 의욕도 없었다. 그는 그저 횡단보도 앞에서 청신호를 기다렸다. 옆에서 함께 청신호를 기다리는 어떤 청년을 보고 남자는 갑자기 자신이 삼 주가 넘게 면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집에는 면도칼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면도칼을 사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면도칼이 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면도칼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약에 취해있을 때 보는 문이 열린 베란다 같은 것이다. 그러나 면도칼이 위험한 것은 오히려 정신이 멀쩡할 때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둡고 칙칙한 방을 직시하게 될 때. 장판에 흩어진 대마초 꽁초들과 텅 빈 약봉지, 그리고 아무데나 써 갈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과 몇 년 째 청소하지 않은 자신의 집이 눈에 들어올 때. 그리고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 그때 면도칼은 제멋대로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부엌에 있는 칼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충분히 날카롭지 못하기 때문에 동맥에 닿기 전에 힘줄에서 칼날이 걸려버린다. 끔찍한 고통은 느낄 수 있지만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사실 <해결책>이라는 단어는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일지도 모른다.
청신호. 남자는 터덜터덜 건너편으로 걷기 시작한다. 차들은 멈추고 빗줄기가 도로 위에 떨어지며 파문을 만든다. 새까만 포도(鋪道) 위에 석유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어떤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던 것 같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거리를 훑어보았다. 새삼스럽지만 밤이었다.
빗물이 손가락의 베인 상처에 튀여 쓰라렸다. 우산의 어딘가가 새는 모양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남자의 정신은 점점 단조롭고 규칙적인 것으로 가라앉아갔다. 분명 여름밤의 습기 찬 공기의 냄새도 한몫 했을 것이다. 여름의 밤이라는 것은 절망과 굉장히 비슷한 냄새를 갖고 있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그랬다. 남자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그는 여름밤의 끈적거리는 공기와 가로등의 노란색 빛 밑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더위가 밤의 서글픈 침묵을 더욱 농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남자의 부모가 승용차 안에서 덤프트럭에 밀려 다진 고기가 되었던 것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기억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그 시절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이것도 니코틴 때문이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사거리의 북서쪽 블록으로 들어갔다. 건물 사이의 샛길로 들어가자 네온사인과 가로등의 빛들은 등 뒤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발을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어떤 형언하기 힘든, 썩은 음식물 쓰레기와 수많은 인간의 체취가 섞인 것 같은 냄새가 진하게 코를 찔렀다. 그는 거의 미끄러지듯이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가로등은 없었다. 담벼락 위에 덩치 크고 새까만 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짐승은 번뜩이는 눈동자로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고양이가 철학적 자살을 맞이하는 소설을 썼었지.
그런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짐승들마저 인간에게 물들어 자살을 한다.
실종된 야만성에 대한 유감.
샛길을 계속 걷자 남자 앞에 갑자기 조금 트인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에는 가로등이 없었지만 그 공간을 사각으로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이 조명이 되어주고 있었다. 남자는 우산을 접고 주차장 한쪽에 있는, 어떤 건물로 이어진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철제로 되어 난간조차 제대로 없는 그 계단은 걸음을 뗄 때마다 철커덩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위험천만한 계단에서 실수로 떨어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안전장치가 철저한 곳에서 주로 떨어져 죽는다.
생명에 대한 심리적 리액턴스.
쉽게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반란. 여기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
어찌되었건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은 조금만 고삐를 풀면 금세 <집단>, <사회>, <정부>, <국가>, <세계>까지 포함해버린다. 그만큼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독자적이지 못하다. 그만큼 우리들은 <개인>이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종의 보상이다.
남자는 7층에서 멈췄다. 그는 건물 안쪽으로 비상구를 열고 들어갔다. 복도로 들어서자 노란색 형광등이 켜졌다. 그는 한손에 우산을 들고 터벅터벅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704호. 남자는 철로 된 그 현관문을 두드렸다. 얼마 뒤에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스포츠 컷에 턱수염을 기른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어딘가 인상이 음탕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남자를 보고 말했다. “조금 늦었군.”
미안.
“들어와.” 그의 말에 남자는 따라 들어갔다. 그 집에서는 언제나 정액과 대마초 냄새가 났다. 은근히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풍기기도 했다.
거실로 들어가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그의 맞은편에 서서 주변을 힐끔거렸다. 안쪽의 불 꺼진 방에서 란제리 차림의 여자가 자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쩌면 란제리 차림의 남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찾는 게 뭐야?” 턱수염의 남자가 어느새 담배를 피우며 물어왔다.
코카인, LSD, 그리고 DMT. 양은 평소대로.
턱수염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앉은 채로 소파 뒤에 있는 서랍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그리고 혹시 아편이나 모르핀 있나?
“아편은 있지만 모르핀은 없어. 모르핀은 구하려면 <약사>한테 가야지. 그것들은 왜?”
진통제로 쓰려고. 그것들 진통제잖아?
“그렇긴 하지.” 그가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아편도 줘.
“대마는 필요 없나?”
아직 많이 남았어. 난 담배나 대마초는 집안에 쌓아놓고 피우니까.
남자의 말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끄덕이더니 서랍장에서 몇 개의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숫자별로 정리하는가 싶더니 다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더니 그대로 건넸다. 턱수염의 남자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건네받은 돈뭉치를 세기 시작했다.
“이봐, 이거 자네가 내야하는 값보다 30만원은 더 많아.”
그래? 몰라. 그냥 가져.
남자는 이미 종이봉투들을 까만색 비닐봉투에 담고 있었다. 그런 남자를 보면서 턱수염의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꺼냈다.
“도대체 자네 같은 다 죽어가는 젊은이가 어디서 이렇게 돈을 가져오는 거야?”
옛날에 일할 때 벌어둔 돈이야. 오래 전에 친척한테 맡겨놔서, 매달 조금씩 나눠서 받고 있어.
“일이라니? 무슨 일?”
글쎄.
그러면서 남자는 등 뒤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더니 우산과 비닐봉투를 챙겨 현관문을 나가버렸다. 턱수염의 남자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담배연기를 한 모금 삼키고 뿜어내며 재떨이에 꽁초를 지졌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비상계단을 도로 내려가, 여전히 검은 고양이가 쳐다보는 샛길을 지나 교차로로 나왔다. 그리고 네온사인의 빛에 눈부셔하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로등이 점점이 켜진 골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건물계단을 오르면서 지친 목소리로 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의 가사를 중얼거렸다. 어느새 밖에서는 태양이 뜨려는 기색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현관문 앞에 도착해 다소 서두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해진 곰팡이와 허브의 냄새가 그를 반겼다. 남자는 우산을 현관에 세워두고 신발을 벗은 뒤 비닐봉투를 거실에 내려놓았다. 그는 세수를 하고 싶었다. 비오는 날의 습기 찬 공기 때문에 얼굴이 끈적거렸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거울이 있잖아.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비닐봉투 안에서 묵직한 종이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소파 앞에 있는 다탁으로 가져갔다. 종이봉투를 열자 비닐에 싸인 흰 가루들이 나타났다. 남자는 비닐을 열고 가루를 티스푼으로 한 스푼 정도를 퍼낸 뒤에 다탁 위에 쌓고, 스테인리스스틸로 된 책갈피로 그 가루들을 잘게 부수기 시작했다. 책갈피의 상하운동에 의해 마치 수음 할 때처럼 규칙적인 충돌음이 거실에 퍼졌다.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은 <자신에게 유익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체적으로 유익한. 정신적으로 유익한. 영혼에게 유익한.
영혼에게 유익한 일은 항상 몸에 나쁘다.
가루가 충분히 곱게 부서지자 남자는 그 부서진 가루들을 직선모양으로 모았다. 그리고 엄지로 한쪽 코를 막고 몸을 기울인 뒤 다른 한쪽 콧구멍으로 재빠르게 가루들을 흡입했다.
남자는 잠시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있더니, 눈동자 주변의 근육을 경련하면서 소파 위로 몸을 눕혔다. 상념과 개념의 가시들이 남자의 뇌를 휘젓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흙탕물 속에 처넣는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사고(思考)는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흐는 자신의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철학에 빠져들지 말라고. 그것은 너의 생명을 가져가버릴 것이라고. 그러나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다. 뇌가 곤죽이 되어버리기 전까지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의도적으로 저능해지지 않으면, 모든 인간들은 정신이 이끄는 대로 정신분열증을 향해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저능해지기 위해, 생각을 멈추기 위해 인간이 선택하는 것들.
술과 담배, 마약, 섹스. 짐승이 되기 위한 방법들.
남자는 방안에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공격당하는 동물처럼, 몸을 둥글게 만 고양이처럼. 그는 엎드린 채 몸을 말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원망하고 있었다. 무엇을 원망해야할 지도 모르는 채로. 남자의 손에는 낡은 사진이 한 장 들려있었다. 그것은 다락에서 캔버스를 꺼낼 때 딸려 나와, 한동안 방바닥에 엎어져있던 것이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신음도 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그동안 지어왔던 무감각의 동굴을 뒤흔들어 버리려고 할 때.
건강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킬까?
남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울었던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쉬게 해줘.> 그는 손에서 떨어트리듯이 사진을 놓아버리고, 느릿느릿 거실로 기어나갔다. 그는 부엌 서랍에서 주사기와 노란 고무 끈을 꺼냈다. 거실에는 전에 외출했을 때 들고 온 비닐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뒤적거리더니 아무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작은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왼쪽 팔뚝에 손과 이빨을 사용해 어설프게 고무 끈을 묶고, 유리병의 뚜껑에 주사기를 찔렀다.
투명한 액체가 주사기 속으로 빨려 올라왔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남자는 유리병 안에 있던 액체를 전부 주사기로 뽑아낸 뒤에 왼쪽 팔을 펼쳤다. 끈으로 팔뚝을 묶어둔 덕분에 팔꿈치 안쪽의 혈관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는 수전증의 증세가 보이는 손으로 주사기의 바늘을 혈관에 찔렀다.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갈 때의 통증에 마음이 편해졌다.
가톨릭 수도사들이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는 장면.
남자는 주사기의 뒷부분을 눌러 천천히 그 액체를 혈관 속으로 흘려 넣었다.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곧 혼돈의 모습을 한 안식이 찾아올 것이었다. 감각들이 서로 뒤섞이고, 생각은 흩어지며, 생명도 모습을 감추는 시간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뒤엉킨 감각의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그저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같은 현상이 말이다. 그리고 파란 장미와 붉은 백합들이 눈앞에 피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팔뚝의 고무 끈을 풀었다.
남자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감격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감격인지는 그도 몰랐다. 그는 그저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의 영혼이 비워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리고 목이 탔다. 남자는 비척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태 대마초 꽁초가 들러붙어있는 하얀 캔버스가 방치되어있었다. 남자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연필을 하나 들어 캔버스 밑에 무어라고 문자를 적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종말이 올 때까지 빌어먹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세계를 지배하기를.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빛을.
남자는 웅얼거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갔다. 몇 번이나 계단에서 구를 뻔했지만 넘어지기 직전에 난간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한밤중의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빛을. 남자가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언제나 밤과 비밖에 없는 내륙지방에서 빛을 갈구하는 혈거짐승.
시야 한편에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불쑥 솟은 굴뚝이 보였다. 그것은 붉은색과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온기라는 단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도시 한복판에 치솟은 굴뚝.
불. 인간 문명의 시발점.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보증하는 도시의 남근.
빛을.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걸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점점 밝은 곳으로 향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발과 다리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것이 되어있었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비틀거리면서, 몇 번이나 울타리와 담장에 몸을 부딪치면서 말이다. 가로등들이 번뜩거렸다. 노란 빛이 남자의 시야에 환각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외쳤다. 아니야. 그는 계속 걸었다. 이런 빛이 아니야.
왜 이 도시는 항상 밤일까.
그러나 태양도 오래전에 식어버렸다.
남자는 밝은 곳으로 걸었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눈앞에서 뛰놀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빛이 아닐 터였다. 남자는 걸었다. 교차로가 나올 때까지. 가랑비는 그의 옷과 머리를 천천히 적셨다.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그러나 아무 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교차로로 나오자 폭력적인 소음들이 남자의 귀로 밀어닥쳤다. 약에 취해있을 때는 유난히 소리들에 대해 더 민감하게 되고, 심지어는 청각이 시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자는 어지러웠고 쓰러질 것 같았다. 자동차들이 마구 내달렸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비척거리면서, 혼자서 외쳤다. 빛을. 그는 이제 영혼의 외침에 취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좀 더 빛을.
식어버린 태양보다도 더 강렬한 빛을 다오.
내 썩어가는 영혼까지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태울 소름끼치는 하얀 빛을.
그때 경적소리가 들리더니, 남자의 눈앞에 난생 처음 보는 섬광이 번뜩거렸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지근하게 식은 눈물이 한 방울 포도(鋪道)에 떨어졌다.
그것은 금세 빗줄기에 쓸려가고 말았다.
장례식이 치러졌고 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다. 물론 뉴스에서도 남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수 년 전에 잠적해 지금까지 소식이 없던 젊은 천재화가가 변사체로 발견. 경찰은 그가 사망당시 환각제를 투여한 상태였고, 가택에서는 대량의 각성제와 환각제, 그리고 아편과 대마초 따위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뉴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평가들에게도 수익이 있었다. 그들은 남자의 방에서 대마초 꽁초가 지져진 캔버스를 하나 발견했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적 예술론에 입각해 그것을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꽁초가 캔버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존액을 뿌려 미술회관으로 가져왔다. 그 뒤에 그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잇따라 등장해, 결국에는 경매에 붙여 그 캔버스를 팔아치웠다. 돈은 화가의 유일한 유족인 그의 고모와 몇 명의 미술평론가에게로 돌아갔다.
그 <캔버스>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의, 엄청난 가격으로 팔렸다.
그들은 그 <작품>의 이름에 대해 다소 고민했지만, 이내 캔버스 아래쪽에 흔들리는 필체로 쓰인 문자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장을 그대로 타이틀로 붙였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남자는 인생을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의 이야기는 몹시 듣기 괴롭고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단순한, 조작된 관찰자다. 나는 전기소설의 작가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전지적인 누군가도 아니며, 신이나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냥 <그>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정적이며 순간적인 관찰자다. 이 이야기가 끝을 맺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관찰자도 사라질 것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말해둬야 할 것들이 있다. 나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남자 자신도 그 기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남들이 태어나듯이, 어떤 청년과 아가씨가 만나서, 서로에게 반하고, 몇 년 간의 연애를 하다가 결혼식을 하기 전이나 한 후에 여자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그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비극의 시작이라고 부를만한 일이었다. 사실 남자의 지론에 의하면 어떤 탄생이든 다 비극인 법이지만, 나는 딱히 그런 주관을 갖고 있지 않다. 아무튼, 그는 그냥 태어났다. 아마 태어나면서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도 태어날 때 우니까. 그리고 그는 기억할 수 없는 소년기를 보냈는데, 그 시절의 기억들은 굉장히 단편적이고 또 인상에 치우쳐있어서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도 알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왜,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어둠 속에 방치된 어린아이와, 원망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고성과,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욕설과 찢어지는 듯한 비명,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그런 것들 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기억을 잊고 자신만만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대지 위에 서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지독한 트라우마에 잡아먹혀 편집증과 광기밖에 남지 않게 된 나약한 남자의 불쾌한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그냥 책을 덮어버리면 된다. 그것으로도 좋다. 왜냐하면 이 책을 덮어 버리고나면 태양의 찬란함과 인생의 꿀 같은 달콤함을 노래하는 다른 책들이 수도 없이 당신 손에 쥐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법도 규칙도 없는 세계에 내던져져 양심마저 파괴된 채로 광증과 어둠에 사로잡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나락 밑바닥을 기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당신은 계속 책장을 넘기면 된다. 사실 나는 무엇을 추천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굉장히 순간적인 관찰자이기 때문에 이 남자 이외의 인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다. <Les Shamps-Elysees>라는 노래를 아는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빛살이 가득한 샹젤리제 거리에서 타인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가슴을 열고 한 여자에게 명랑하게 말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지하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웃고 노래하다가, <기나긴 밤을 지새운 뒤 연인사이가 되어> 희망과 축복이 가득한 미래로 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알제의 바닷가로 가서 수영을 하며 함께 놀 수도 있을 것이고, 파리의 한 식당에서 부르고뉴의 어떤 도멘느 양조자가 빚어낸 값싸고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그림과 같은 한때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내가 아는 인생이 아니다. 그저 노래 가사를 듣고 추측해볼 뿐이다. 내가 아는 인생은 <그 남자>의 인생뿐이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겠다. 그는 나이를 먹어 학교에 입학했고, 열두 살이 되었을 즈음에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러나 첫사랑의 상대가 된 여자아이는 태양빛이 녹은 쇳물처럼 흐르던 그해 여름날 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때 소년은 웃었다. 그도 자신이 왜 웃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나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소년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느 어두운 새벽에 부엌에서 식칼을 찾아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안방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는 깊게 잠들어있는 어머니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드디어 칼을 들어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그에게 죄책감과 모럴이라는 것이 있었다. 누구나 그 나이 때에는 도덕적인 법이다. 그래서 그는 거친 숨을 참지 못했고, 칼을 쥔 손은 마구 떨렸다. 마침내 칼을 내리찍었을 때, 손의 진동 때문에 칼은 어머니의 목을 빗나가서 그녀의 귀를 잘라버렸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을 때 소년은 피 묻은 칼을 품에 안고 이불 위에 쓰러진 채 엉망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울고 있었고, 감정에 북받쳐 딸꾹질까지 하며 소리 내어 통곡했다. 그의 꼴이 너무 비참해서 어머니는 소년의 뺨을 후려갈기지도 못했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부모는 소년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었고, 그는 일 년 정도를 광인들 사이에서 지냈다. 구속용 벨트가 달린 침대와 완충 처리가 된 벽 속에서, 그때 그의 마음에 무언가가 꽃 피었다. 피와 담배연기로 자욱한 한국 땅의 어느 어두운 도시 구석에서나 필 법한 끔찍한 꽃이었다. 그 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당신들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찾아내야할 것이다. 아무튼 소년은 퇴원할 때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극복한 것처럼 보였고 눈동자에는 이상한 자신감이 이글거렸다. 그는 사람이 달라져 마치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그는 미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종일 거의 말하는 일도 없이 그림을 그렸고, 그의 방에는 스케치나 아크릴화 따위가 수북이 쌓였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 여자아이는 청년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이 이야기는 밑에 가서 하자. 짤막한 몇 줄의 글로 정리해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는 더는 부모를 죽이려고 하거나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을 보면서 웃는 일도 없이 나이를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성인이 되고 나서 몇 년 뒤에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왔고 한동안 거리에서 살았다. 남자는 가족에 대한 것은 전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거리에서 살면서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었고 강가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다 가을이 끝나갈 때 즈음에, 남자는 겨울이 오면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억을 쫓아 학생 시절 가깝게 지냈던 친구를 찾아갔다. 그 친구는 남자를 보고 몹시 놀라며, 동시에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남자를 위해 작은 다락방을 하나 마련해주고 자신의 화실에서―그 친구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미대생이었다― 지내게 했다.
이제부터가 본편이다. 당신들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 아주 약간이나마 감을 잡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 남자가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갈지 알고 싶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인생을 예찬하는 노래를 하나 틀어놓고 책장을 넘겨라.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다소나마 지켜줄 것이다.
1. 아침나절의 빛에 대하여
현태는 거울 앞에 서있었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방의 형광등에서 내리쬐는 하얀 빛살이 현태의 창백하고 혈관이 불거진 피부 위로 번질거리며 흘렀다. 그는 벗어낸 셔츠를 방 한 구석으로 집어던지고 거울로 시선을 향했다. 바닥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기다란 거울은 현태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처였다. 현태의 가슴팍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붉은 흉터들 말이다. 그것들은 전부 병적인 감상주의자의 손목에서나 보일 법한 길고 곧바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상처들은 많고, 또 깊었다. 어떤 것들은 오래되어서 이미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갓 새겨져서 붉은 피딱지로 덮여 있기도 했다. 현태는 다소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 흉터들을 바라보다가, 한 손을 들어 가슴팍의 상처투성이 피부를 가만히 더듬었다. 손끝이 상처에 닿자―그의 주먹도 상처로 가득하다. 벗겨나가고 찢어진 피부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류처럼 흘러내렸다. 그 통증을 바라보는 현태의 눈. 그 깊고 새까만 눈에서는 냉각된 기름처럼 허옇게 뜬 공허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현태는 손톱 끝으로, 어떤 상처 위에 덮인 딱지를 긁는가 싶더니 그것을 그대로 뜯어내버렸다. 지금까지는 간질간질하던 통증이 순식간에 번뜩이는 고통으로 번개 쳤다. 길게 뜯어낸 딱지를 바닥에 내버리고 현태는 진물과 피를 뱉기 시작하는, 선명한 붉은색의 상처를 여우같은 눈동자로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드러난 생살 위에 송골송골 체액이 맺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방울지다 못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찐득한 진액이 피부 위를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현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는 꿈꾸는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물이 맺힌 상처 위에 현태는 손바닥을 올려놓고 지그시 눌렀다가 떼었다. 손바닥의 한 가운데를 길고 얇은 체액의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더니 그는 돌연 슬며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도 무슨 바람처럼, 실없는 장난이나 거짓말처럼 이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경멸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현태는 더 이상 상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것도, 거울 앞에 서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무슨 변명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심지어 그 거울을 깨트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맨주먹으로 말이다. 쨍강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고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현태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쳤다……. 상자 안에 모래를 담고 세차게 뒤흔드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고통이 그의 피부 위에서 날뛰었다. <그만!> 그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만! 그만! 나를 돌려보내다오! 현태의 주먹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탕탕 때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것을 <그만둘> 수 있는 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지만 입은 채로 그랬다.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방 안에서 미친놈처럼.
그의 방은 좁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천장도 낮았다. 방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책장과 책상 하나, 그리고 현재 현태가 깨부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거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들만으로도 방은 발을 둘 곳 없이 좁았다. 책상과 평행하게 바닥에는 지저분하고 얼룩덜룩한 이불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밤새 현태가 자고 일어난 뒤 정리되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져있는 것이었다. 이불을 개놨다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었지만 현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불은 늘 펼쳐진 채였다. 덕분에 방 안의 남은 공간은 모조리 이불이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방에서 움직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밟아야만 했다. 고로 현태도 지금 이불 위에서 그 소리 없는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날것의 빛이 들어올 일도 없었다. 그의 방은 좁았다. 사실, <이곳>은 방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이곳은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락같은 곳이었고 안에 있으면 흡사 관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너무 낮아서 까치발이라도 들면 바로 정수리가 닿을 듯한 천장 때문에 더욱 그랬다. 턱없이 적은 공기의 용량이 이 방을 더욱 더 <관짝>처럼 만들고 있었다.
현태는 이제 주먹질을 멈췄다. 그의 눈은 빨개져있었다. 언젠가 읽은 랭보의 시 한 구절이 현태의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를 향해 발사!>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무너지듯이 더럽고 축축한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권태 같은 것이 몰려왔다. 앉은 채로 머리를 푹 숙이고, 현태는 눈을 부릅뜬 채 이미 게을러진 정신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음…… 음…….” 그는 일부러 소리 내어 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생각했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다. 셔츠는 어디로 갔지? 밖으로 나가려면 셔츠를 입어야 한다. 아무리 닳고 지저분한 것이라도…… 안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화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일까? 어제 나는 시계를 책상 위에 벗어 놓고 잠들었었다. 열한시……. 열한시다. 지금 화실로 가면 영운이도 있겠군. 좋다. 충분히 잤다. 그리고 매일 같은 아침이다.> 그리고서 현태는 아까 자신이 방 어딘가로 집어던진 셔츠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눈은 천천히 원래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머리와 권태로운 기운은 여전히 그의 영혼을 혼란 속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현태는 마침내 베개 옆에서 셔츠를 찾았다. 그는 좁은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그것을 입었다. 단추를 하나씩 끼우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다 입은 뒤에 현태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손목시계를 집어 들어 오른쪽 손목에 찼다. 그리고 현태는 잠깐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덥수룩한 머리를 손으로 대강 정리하고 문 앞에 섰다. 그 뒤에 그는 문고리를 돌리고 밀면서, 넋 나간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를 향해 발사!”
현태의 방은 이상한 곳에 있었다. 방으로 통하는 문은 하숙집의 건물 복도 구석에 뜬금없이 나있었는데, 그것은 어째서인지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높은 곳에 뚫려 있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갈 때에는 최대한 다리를 올려서 문지방을 밟고 올라가야 했고, 나올 때에는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내려와야 했다. 다른 방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있고 또 굉장히 좁았기 때문에 그곳이 어쩌면 다락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다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한 곳에 있었다. 사실 그 방은 처음 건물이 세워질 적에, 설계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방이었다. 실상인즉 설계시의 실수 때문에 건물을 지어놓고 보니 여유 공간이 생겨버렸는데, 그것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방을 뚫어버린 것이 바로 현태의 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방에는 전선만 겨우 연결되어있을 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았고 습기 배출도 원활하지가 않았다. 즉 실제로 현태가 사는 방은 <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모아두는 창고 정도로 쓰이고 있던 것을 하숙집 주인이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월세로 내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도시에 빈민이 넘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런 곳에 살 사람은 없겠거니 싶었는데 현태는 그 방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이 처음 현태를 보았을 때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희망이 없고 관념적인 병에 찌든 거리의 젊은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튼 현태는 그 방을 빌렸다……. 그것이 약 일 년 정도 전의 일이었다.
지금 현태는 방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우선 문지방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뒤에 다리를 밑으로 늘어트렸다. 그리고 앞쪽으로 떨어지다시피 하며 복도에 착지했다. 현태는 딱 눈높이 즈음에 있는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짝을 닫았다. 잠그지는 않았다. 훔쳐갈 것이라고는 눅눅하고 곰팡이 슨 이불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도대체 누가 가져가겠는가 말이다. 현태는 복도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했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한 손으로는 난간을 꽉 붙잡은 채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거리로 나왔다. 늦은 오전인지라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다. 현태는 어슬렁어슬렁 골목 담장 밑을 걸었다. 그는 세수도 하지 않아 끈적거리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이 회색 골목을 구석구석까지 훑고 있었다. 봄이었다. 노곤하고, 산들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깃털처럼 정신이 가벼웠다. 그의 정신에는 무게가 없었다. 현태는 전날 점심때부터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위장이 빈 만큼이나 사고도 비어있었다. 영운이한테서 돈 만 원만 빌려서 빈 것들을 채워야겠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푸른 장막인 것처럼 하늘이 짓눌러왔다. 멀리서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골목은 더러웠다. 현태는 언제나 <아침>이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은 더러웠다. 가령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새소리가. 아침의 빛살 때문에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의 질감이. 밤을 몰아내고 이제 막 태양의 냄새로 풍성해지기 시작하는 공기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시작되었다>고 일러주는 아침 특유의 그 정신적인 감촉이!
아침이란, 공간 속에 온갖 색깔들이 경계도 없이 질펀하게 섞인 것이 정말이지 더러웠다. 봄의 아침은 특히나 더 그랬다. 그래서 현태는 이유도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망할. 노기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잠꼬대 하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람이 얼굴에 끼쳐왔다. 햇살이 눅진하게 뒤섞인 바람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지.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내 셔츠가 더러우니까 말이다. 그의 셔츠는 더러웠다.
보다 넓은 거리로 나오자 행인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현태를 힐끗거렸다. 현태의 셔츠는 여전히 더러웠다. 그는 그것이 조금 창피한 듯도 싶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현태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바닥에 들러붙은 까만 껌딱지들이 눈에 띄었다. 행인들은 모두 말쑥했다. 현태도 한때는 말쑥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건 전부 <버려진> 사실들이었다. 현태는 미지근한 태양 밑에서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곧 점심시간이다.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했다. 곧 현태는 뛰듯이 걸었다. 얼른 화실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참을 뛰다가 골목에서 꺾자 학원가가 나타났다. 저녁시간이 되면 오가는 학생들로 시끄러워지는 거리였다. 그 학생들과 강사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식당도 꽤나 있었다. 현태는 늘어선 건물들 가운데 한 채를 골라 들어갔다. 이 층과 삼 층에 넓은 미술학원이 있는 건물이었다. 현태는 이 층 구석의, 명패도 안 달린 열다섯 평짜리 방으로 가서 문을 밀어젖혔다. 방에는 이미 불이 켜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태를 향해 고개를 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운이였다. 그도 금방 도착했는지 방구석에서 이젤을 옮기고 있었다. 영운은 중키에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쓴, 일견에 깔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현태를 보자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하고 말이다. 현태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응,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더니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오늘도 수업 있냐?”
“두 시 쯤에…… 박 교수님 수업.” 영운은 하던 작업을 계속 하며 말했다.
“그 인간 아직도 교수질 하나?”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영운은 픽 웃었다. 그는 웃으면서 현태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놀랐다는 듯이 현태의 발치를 보며 물었다.
“너 신발 어쨌어?”
그 말에 현태는 <응?>하고 반문하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럽쇼> 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흙 묻은 양말바람이었다. 생각해보니 신발을 책상 옆에 둔 채로 그냥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집에서부터 계속 양말바람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 아닌가. 현태는 발치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눈을 내리깐 채로 혼잣말을 했다.
“사람들이 쳐다본 게 셔츠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너 그 꼴로 집에서 온 거냐?” 영운이 당황하여 물었다. 현태는 그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선 채로 있다가 현태는 툭 내뱉었다.
“그보다 나 만 원만 빌려다오.”
“너…… 잠깐 기다려. 내가 신발 가져올 테니까.” 영운은 아연하여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그렇게 말하고는 현태 옆을 스치며 건물복도로 나갔다. 현태는 명받은 대로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영운이 계단을 올라 삼 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물고기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분 뒤에 영운은 손에 구두 한 짝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현태에게 내밀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거 신어.”
“어디서 났어?” 현태가 받지는 않고 물었다.
“원장실.”
“너희 아버지 구두냐? 멋대로 가져와도 돼?”
“그럼 맨발로 있을 테냐?” 그제야 현태는 구두를 받았다. 좀 크다 싶었지만 군말 없이 양말의 흙을 털어내고 신었다.
“아버지는 학원 안에서는 실내화 차림이시니까 괜찮아. 이따가 돌아갈 때는, 내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들려서 슬리퍼 하나 사올 테니 그거 신고 돌아가.” 현태가 신발을 다 신자 영운이 그렇게 말했다. 현태는 알았다는 듯이 <그래.>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 뭐야. 만 원?”
“그래, 어제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다.”
그러자 영운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뒤지더니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서 현태에게 건네며 말했다.
“돈 없으면 바로바로 말해라. 굶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 현태가 지폐를 받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현태는 지폐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 이십 분 전이었다. 뱃속에선 공복감이 사나운 짐승마냥 날뛰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뱃가죽 속의 살점이 썩둑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에도 힘이 없었다. 그런데 뭘 먹지? 현태는 생각했다. 허기만 채우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느 정도 이상 먹으면 속에서 불쾌감이 끓어올랐다. 그래서 <먹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래 굶으면 머리도 어지러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빵집에 가기로 했다. <그 전에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두자.> 현태는 생각했다.
구두가 헐거웠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뒤꿈치가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현태는 별 수 없이 구두를 끌고 다녔다. 그는 화실 구석에 길게 나열되어있는 캔버스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헐거운 구두를 덜렁거리며 창가에 세워진 자신의 이젤 앞으로 가서 캔버스를 걸었다. 정오의 빛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캔버스의 하얀 면 위에서 노란 미광을 내며 부서졌다. 그곳에는 이미 미완성의 그림이 그려있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무뚝뚝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유리를 뿌려놓은 것처럼 투명한 암청색이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운이 현태 옆으로 걸어오더니 관심을 보였다.
“오늘도 안에서 그릴 거야?”
현태는 그림에 눈을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벌써 봄이야.”
“응?”
“이건 겨울 그림이거든.”
영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상이 그랬다. 현태는 늘 혼잣말을 하듯이 대화를 했다. 그리고 영운은 그런 것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있었다. 현태가 캔버스 귀퉁이를 손끝으로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속이 쓰리다.”
“왜? 굶어서?”
<몰라.>하고 현태가 웅얼거렸다.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현태는 생각했다. 그런데 세수가 하고 싶었다. 밤새 배어나온 피지 때문에 얼굴이 번들거렸다. 그는 그런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화실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학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곤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그러지 못했다. 하숙집의 공동 화장실은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현태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얼굴, 표정 속에 담긴 뉘앙스와 감정의 흔적과 <부당성>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현태는 전에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던 하숙집의 젊은 친구 얼굴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현태는 문뜩 고개를 돌려 영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신기했다. 영운의 얼굴은 그다지 역겹지 않았다. 가끔 그의 습관적인 미소가 너무나도 추잡한 형태로 달려들 때도 있었지만, 현태는 영운을 싫어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호의를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얼굴이라 그런가? 하지만 오래 보았다고 해서 다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태는 영운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세수하러 가야겠어.”
“밥은? 나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같이 먹을까?”
“무얼 먹으려고?”
“모르겠다. 국밥집에 갈 테냐?”
현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오늘은 육식을 할 만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밥 국물 위에 허옇게 뜬 짐승 기름이 눈에 선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현태를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튼 그는, 오늘은 육식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세수하러 갈래.” 그가 툭 내뱉고 구두를 덜걱거리며 화실 밖으로 나섰다. “밥은 혼자서 먹어.”
“너 또 빵 쪼가리 먹으려고 그러지? 밀가루만 먹으면 위가 상한다고.” 영운이 문 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현태는 들은 척도 않고 복도 한쪽에 있는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면대 앞에 서더니 현태는 소매를 걷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쳤고 정신도 조금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비누가 닳고 닳아서 조약돌만 했다. 그는 비누 거품으로 얼굴을 문지른 뒤에 물로 씻어냈다. 그리고 한 번 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현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세면대에 처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손으로 얼굴에서 물을 털어냈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물기가 번들거리는 현태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이었고, 현태는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거울을 향해 히죽 웃어보았다. 괜히 한 번 그래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토했다.
토사물이 울컥 식도에서 솟구쳤다. 현태는 재빨리 세면대 하수구에 고개를 처박고 속을 게워냈다. 묽고 시큼한 액체만 쏟아져 나왔다. 어제부터 줄곧 굶은 탓인 듯싶었다. 그는 두어 번 더 구역질을 했다. 덕분에 눈에 조금 눈물이 고였다.
“드디어 속을 다 비웠다.” 현태는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물을 틀어 토악질한 것을 흘려보내고 입가를 닦은 뒤에 거울을 보았다. 눈이 빨갰다. 그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2. 식욕과 육체적 진실에 대하여
빵집 점원은 수상스러운 눈으로 현태를 살피고 있었다. 현태는 빵집 안을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매장 안을 다섯 바퀴째 빈손으로 도는 중이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식욕이 없었다.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닌가? 현태는 혼자서 생각했다. 배가 쓰릴 정도로 허기가 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뜻 뭔가를 집어서 먹을 기분이 들지를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굶다가 쓰러져서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그만 둬야만 했다. 뱃속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현태는 마침 눈앞에 있던 빵덩어리를 하나 집어 들고 비척비척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점원 앞에 빵을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느릿느릿―혹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커피…… 커피도 하나 주세요.”
“무슨 커피로 드릴까요?” 점원이 되물어왔다.
“밀크커피요.” 현태는 점원의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계산대 옆에 진열된 케이크조각들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밀크커피는 없는데요.”
“그럼 아무 거나 비슷한 걸로 주십시오.” 현태가 중얼중얼 말했다. 점원은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현태가 내놓은 빵덩어리를 계산대 뒤쪽으로 가져가서 몇 조각으로 자르더니 봉투에 담았다. 그 뒤에 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서 빵 봉투와 함께 건넸다. 점원이 얼마라고 값을 말했다. 현태는 점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내놓았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잡아당겨댔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점원은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현태에게 내밀고 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멈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점원이 이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현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은 계산대 옆에 놓여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박혀있었다. 박스에는 <제 3세계 어린이 구호성금>이라고 글자가 찍혀있었다. 현태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점원 아가씨, 알고 계십니까?”
점원은 <네?>하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유흥업소에 놓인 성금 통이 다른 업소에 놓인 것보다 성금이 더 잘 모인답디다. 그리고 제일 잘 모이는 곳은 퇴폐업소라지요.” 그렇게 말하고 현태는 점원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점원은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다소 당황하더니 <그거 재미있네요>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현태는 약간이지만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계산대 위에 놓인 빵을 낚아채듯 손에 쥐고, 점원이 내미는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 컵을 거칠게 받은 뒤 가게 밖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
<제기랄!> 현태가 이빨 사이로 욕설을 씹었다. 또 말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팔꿈치로 문을 밀치고 나가자 봄바람이 코끝에서 불어댔다. 현태는 자신이 멍청한 광대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에는 빵을 담은 봉지를 달랑달랑 쥐고…….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사납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굶어죽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짊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태는 양손에 들린 빵과 커피를 길거리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마구 짓밟아서 곤죽을 만들고 자신은 영원히 굶주린 채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그대로 손에 들고 거리를 헤매다가 차도 옆에 설치된 벤치를 찾아내고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현태는 소음을 흩뿌리며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음, 사실 내가 결백해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모두 잘못 심어진 믿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헤헤. 그렇다! 나는 그냥 조소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비굴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현태는 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소리 없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는 봉투를 열고 빵을 꺼냈다. 커다란 흰 빵 덩어리였다. 현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굶주린 짐승처럼 서둘러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빵 덩어리를 노려보면서 씹었고 삼켰다. 목이 멜 때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빵을 꾸역꾸역 빈 위장 속으로 쑤셔 넣었다.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거지처럼 끼니를 해결하는 현태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마구 오갔고 먼지가 날렸으며 공기가 탁했다.
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현태는 아직도 깊고 몽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구역질, 구역질. 그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빵을 씹고 음료를 들이켰다. 현태는 자신이 어디 즈음에 살고 있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건드리면 쉽게 무너져버리고 형태조차 파악되지 않는 안개 같았다. 대로변에서, 차들이 내는 소음이 옥죄어왔고 텁텁한 햇볕이 먼지처럼 머리칼 위에 가라앉았다. 이건 누가 꾸는 꿈이지? 이건 누구의 망상이야?
현태는 입에 빵을 가득 넣은 채로 웃었다.
그는 모두 먹어치웠다. 너무 많이 먹어서 토할 것 같았다. 원체 그는 위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현태는 구역감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큰 구두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러 가야했다. 현태는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현태는 킥킥대면서 길을 걸었다. 자기혐오로 옷을 짜 입은 흥분감이 그의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환각 같았다! <내 정신은 너무 피로하다. 나는 약이 필요해…….> 현태가 간신히 의식을 쥐어짜내며 생각했다.
학원가에 들어섰을 때 그는 거의 춤추듯이 걷고 있었다. 이상한 리듬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고 현태는 악단의 지휘자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끝을 허공에 그어댔다. 이 모든 일이 태양의 빛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뜩 그의 뇌중에 떠올랐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빛이 훨씬 더 선명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봄의 태양은 너무 오래 방치되어서 먼지가 쌓인 궤짝 같았고 더 이상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내가 만약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죽인다면…….>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태양이 다시 빛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 자신은 좀 더 단단한 뿌리를 갖게 되고 말이다. 또 대기 중의 먼지가 모두 걷히고, 사물은 본질의 섬광으로 뚜렷하게 빛나고, 꿈에서 깰 것이다. 마치 20세기 초에 인간정신을 위하여 피가 흘렀던 것처럼!> 하지만 아무런 범죄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날뛰는 정신을 이와 잇몸으로 꽉 깨물고 다리가 부러진 바퀴벌레처럼 걸어 다녔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현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술을! 예술을! 영혼을!” 현태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대뜸 허공에 지껄였다. “당신은 내가 길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는 몹시 흥분하여 킬킬거리며 소리죽여 웃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떤 영광에 대한 찬미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음, 그리고 고통! 그것만큼 중요한 것도 달리 없다. 내가 기쁘게 맞이하는 고통. 이것을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구시렁구시렁. 그의 정신이 나불거렸다.
교복 차림으로 화구통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이 현태를 스쳐지나갔다. 그들을 보고 현태는 갑자기 엄청난 슬픔이 가슴에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들떠서 발작하던 정신도 거짓말인 것처럼 얼어붙었다. 이 거리에는 미술학원이 많았다.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미술대학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감정을 배설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신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몹시도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변명하듯이 외쳤다.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현태가 늘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언젠가 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슬픔을 추슬렀다. 또 자기 자신의 생존조건에 대한 증오심이 솟아오를 것 같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휘발유를 부은 진흙 뻘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현태는 살고 있었다. 그는 늘상 그랬고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홍수가 일어난다면…….> 그는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화실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어떤 대재앙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몽상은 어떠한 종류의 복수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세상이 현태가 사랑해 마지않는 멋진 친구들로, 완벽한 이해력을 갖추고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현태는 대재앙을 바랄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었고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갑자기 희희낙락하여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안색을 싹 바꿔 정색하면서 중얼거렸다. “언젠가 나는 돌아갈지도 몰라…… 자궁 속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는 짐짓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현태는 이 층에 도달했고 복도를 거쳐 화실로 들어갔다.
화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운은 아직 식사 중인 모양이었다. 현태는 설핏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화실 안을 구두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다가, 햇빛이 드는 창문에 모조리 커튼을 쳤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탁자에서 물감과 붓, 그리고 팔레트를 집어든 뒤 캔버스 앞에 가서 섰다.
화실은 그늘져서 서늘했다. 형광등은 꺼져있었고, 커튼을 거쳐 들어오는 약한 빛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현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날에는 주변이 밝으면 그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현태의 정신 또한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라져 온갖 괴상한 이야기들을 지껄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육점에 대해서라든지. 정육점. 현태는 늘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소와 돼지가 도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했고 불쾌하게 여겼다. <정육>. 정리된 고기들. 그것 또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정육점에 대해 분노하면서 파란 겨울 하늘과 침묵하는 나무들을 그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생각을 늦춰야했다. 경기를 일으킨 어린애를 어르듯이 차분하게. 그리고 색깔과 이미지 속으로 천천히 잠수해야한다. 광란하지 말고. 광란하지 말고. 광란하지 말고. <나의 장면>에 집중해야한다. 그 순간에. 그 섬광에. 마침내 소리가 잦아들고 시간이 정지할 것이다.
현태는 그림을 그렸다.
영운은 화실 문을 열다가 현태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화실로 들어왔다. 커튼을 통과한 푸르고 아련한 빛이 만들어낸, 고요한 연못과 같은 빛 웅덩이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 푸른 연못 위에 조금이라도 파문이 일어난다면 현태는 신경질을 내며 붓을 내던져버릴지도 몰랐다. <아, 그것이 현태를 대하기가 어려운 까닭 중 하나지.> 영운이 살금살금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현태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그림에 열중해있었고 만일 영운이 커다란 구두소리를 내면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을 지라도 그것은 그의 창작활동에 조금의 지장도 주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운이 현태를 존중하는 의도에서 그러한 정숙함을 지키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현태는 캔버스 너머로 힐끗 영운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것이 인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 주변 일에는 완전히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열중>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것이었다. 날개가 잘린 천사가 흙바닥에서―마치 차에 치인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발버둥치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움직였고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원래 색깔을 찾기 위해 수천 번씩이나 번쩍거리면서 열광적으로 색을 바꾸고 있었다. 영운은 그러한 현태의 모습을 보면서 늘 질투와 경외심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저 무능력자가! 그렇다. 자신이 없으면 밥 한 끼를 위해 구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저 완전한 무능력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대학을 그만둘 때도 그는 모두의 비웃음을 샀었지. <저러한 인간>이 그나마 굴종조차 할 줄 모른다면 도대체 어떤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영운이 갈 곳 없게 된 현태를 자신의 화실로 부른 것도 사실은 그가 현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그 광인이 갖고 있는 어떤 번뜩이는 천재가? 혹은 그저 광기가, 어떤 모습으로 만개하고 불에 타버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라는 점도 인정으로서 나타나기는 했다. 그러나 영운이 파악하고 있기로는, 현태는 누군가의 친구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친구라는 관계도 현태의 머릿속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엄청난 <악한>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태를 악한이라고 칭하고자한다면 <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영운은 거의 십년 전부터 현태가 자신과 함께 세상에 부딪히고 구르며 성장하는 것을 보아왔다. 하여 그의 오래된 이상함도, 몸과 함께 점점 커가는 광증도 전부 보았다. 그러나 현태는 여전히 남들은 보지 못하는 빛을 보면서 그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고 산산이 조각난 사금파리처럼 도무지 끼워 맞출 수 없는 퍼즐조각 같았다. 즉 영운조차도 현태를 알지 못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완전히 알 수 있느냐는 물음이 여기서 제기될 수 있으나, 적어도 인간이 개를 쓰다듬을 때 그 개가 기뻐하거나 혹은 거리껴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현태는 늘상 남들과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남들과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즉 영운과 사람들에게는 몰이해였다.
현태는 지금 이상한 빛에 취해있었다. 그것이 그를 끊임없이 그림 그리게 만들었다. 잠시라도 정신의 긴장을 늦추면 그 빛은 새처럼 멀리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악착 같이 그림에 달라붙었고 안타까워했다. 그 빛이 달아나버리면 현태는 다시 도무지 밟을 수 없는 땅으로 뚝 떨어져버리는데 그곳은 움찔거리는 그림자들의 지옥이다. 그 그림자는 배고픈 개들처럼 현태의 정신을 물어뜯고 갈가리 찢어 설 수 없게 만든다. 미칠 지경인 것이다. 안 그래도 그는 미쳐있는데, 만화경에 비친 풍경인 것처럼 현태의 시선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구름 위와 기름 웅덩이 속을 부유한다. 그러한 컨디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그래서 즉, 이상한 빛을 품고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이 현태에게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아주 소중하고도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더욱 미친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고 그림 속에 그의 영혼이 붙들린 것 같더라도.
<겨울의 빛, 겨울 하늘의 빛!> 현태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멋지고 선명했던가? 곤충과 식물이 모두 죽는 추위 속에서 빛살은 금속성으로 고고하게 빛난다. 마치 미간에 박히는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창(槍)처럼. 그는 마지막으로 푸른 물감 위에 흰색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 손에는 팔레트를,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이젤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영운은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태는 술 취한 것처럼, 혹은 화난 것처럼 사나운 걸음걸이로 같은 곳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중에 대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 끝났다. 가버렸다!”
영운은 그러는 현태를 보고 드디어 여유가 생겼구나 싶어서 말을 걸었다. “이봐, 네가 봐야 할 게 있는데.” 그러자 현태는 영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봐야 할 것?”
“그래, 사실은 내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거든.”
“설마 그게 내 부모님한테서 온 건 아니겠지.” 현태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아니야. 이건 우리 고등학교 동문회 대표한테서 온 거다.” 그러면서 영운은 접힌 종이 하나를 현태에게 내밀었다.
현태는 여전히 양 손에 붓과 팔레트를 든 채로 영운이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주변에 있는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새삼 중얼거렸다. “편지로군!”
“읽어보면 알겠지만 맨 끝에 특별히 너에 대한 언급이 되어있다. 아무도 지금 네 주소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혹시라도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이번 동창회에 대한 정보를 너에게 전해달라고…….”
현태는 듣는 둥 마는 둥 편지를 읽었다. 현태와 함께 고등학교 마지막 년도를 보냈던 학우들이 동창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영운이 말했듯이 편지 끝에는 현태에 대한 글귀도 짧게 적혀있었다.
“그리운데! 이게 도대체 언제 적 이름들이야?” 현태가 외쳤다. “그리고 편지를 쓴 건 전교 일등의 우리 반장 나으리로군.”
“넌 휴대전화도 없고 집도 나와 살고 있으니 어떻게 연락해야할지 몰랐겠지.” 영운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갈 테냐?”
그러자 현태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편지를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 가량 접은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턱을 괬다. 입은 다문 채 말이다. 그것은 현태가 말을 주저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있는 영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군.”
“하하!” 현태의 말에 영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가 널 기억하지 못하겠어? <3학년 1반의 정신병자>를!”
“그래…… 그런 별명도 있었지.” 현태는 조용히 읊조리듯이 말했다. <정신병자>라는 강렬한 단어에도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군. 너는 나쁜 학생이었지만 나쁜 친구는 아니었어. 아마 교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현태는 졸린 듯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쁜 피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오 년 만에 만나는 얼굴들이야. 만나보고 싶은 친구는 없어? 나는 너와 같이 갔으면 하는데. 재미있을 거야.”
“만나보고 싶은 친구라.” 현태가 되뇌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담배 연기에 휩싸인 듯 흐릿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얼굴과 마주했을 때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태는 눈동자를 크게 떴고 흥분이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있는데. 만나고 싶은 아이가.”
“있어? 그럼 갈 테냐?” 영운이 되물었다.
“가지! 가고말고!”
현태는 주머니칼로 도려낸 붉은 과실처럼 입을 벌려 웃었다.
3. 혼돈과 순수에 대하여
동창회에 가는 것이 결정되자 영운은 기뻐했고, 곧 자기 물건을 챙겨 학교로 갔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서면서 슬리퍼를 잊지 않고 사오겠노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현태에게 말을 주었다. 현태는 화실에 홀로 남았다. 그는 저녁이 될 때까지 단 한 발자국도 화실을 나서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아니 그림만 그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자주 벌떡 일어나서 허공에 뭐라고 말을 내뱉고 웃고 화내고 겅중겅중 뛰거나 초조한 발걸음으로 화실 안을 쏘다니다가 다시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늘 그가 하는 일이었다.
도시에 그늘이 깔리기 시작하자 현태는 커튼을 걷었다. 이제 너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이 마르게 내버려두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상점들이 불을 켜고 교복을 입은 학생무리가 거리를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이 거리는 낮보다 오히려 저녁에 더 소란스러웠다.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나 저녁을 먹기 위해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들로 인하여. 현태는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바닥없는 늪이 있어서 정신이 그리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개구리, 도마뱀, 도롱뇽 등 바닥에 붙어사는 것들의 행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구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일 것이다.> 현태의 가슴이 지껄였다. 나는 이런 싸구려 파괴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검은색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이 아팠다. 현태는 신경질적으로 창문에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그는 팔레트 옆에 놓인 페인팅 나이프를 집어 들고 화실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화실에 깔린 그늘이 뭐라고 소곤소곤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태의 수 십 개의 정신에게 말을 거는데 모든 정신의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자면 너무나도 피로하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창문에서 비쳐 들어오는 암황색 약한 조명이 현태의 상처투성이 가슴을 비췄다. 적색 선들이 그의 가슴 위에서 강물의 지류처럼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듯이. 현태는 유화물감이 묻은 채인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서 자신의 가슴을 조준했다. 그리고 하나, 둘. 현태는 나이프를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손목의 반동을 이용해서 가슴 위에 그것을 내리찍었다.
페인팅 나이프의 무딘 칼날에 피부가 찢어져나갔다. 아! 바닥이 차갑구나. 통증을 느낄 때는 유난히 냉기에 민감하다. 아니 통증이라는 것 자체가 확확 달아오르는 냉기의 불꽃과도 같다. 피부가 찢어지고 그 속으로 분홍빛 갓난아기 젖살 같은 속살이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빛을 받아 번들번들하다. 그 속살은 한동안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야 머뭇머뭇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히는가 싶으면 순식간이다. 터진 둑처럼 줄줄 흐른다. 현태의 뱃가죽이 미지근한 피로 젖고 한 박자 늦게 피부가 찢긴 고통이 번개처럼 가슴 위를 구른다.
“아하!” 현태가 고통에 겨워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 올리더니, 가슴에 내리찍는다. 가죽이 터지듯이 찢긴다. 또 피 한줄기가 엎어진 잔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울컥울컥 솟는다. 피가 흘러넘쳐 그의 면바지 윗부분에 얼룩이 졌다. 현태는 언젠가 잡지에서 본 아마존 강처럼 수십 수백 줄기로 나뉘어 배 위를 흐르는 혈액을 손으로 문질렀다. 앙상하게 마른 피부의 감촉 위에 걸쭉한 피가 덧씌워져 미끈미끈하다. 그의 손바닥은 칠을 한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고 현태는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또 나이프를 들어 가슴을 찢는다. <이것은 쾌락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지상에 서있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이고, 삶의 습관이며, 또 쾌락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 이 고통!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의 통증. 나는 이렇게 해서 내 안의 엉킨 《감상》들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혈액의 분출과 함께. 말하자면 토악질 같은 것이다. 독을 마시면 위장이 스스로 그것을 되뱉는 것처럼. 토악질을 하는 것도 참 즐겁지 아니한가? 내 속을 비워가는 느낌이 말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교적일 수도 있겠다…… 헤헤!> 현태는 자조했다. 그리고 그는 떨어트리듯이 나이프를 바닥에 내던졌다. 쇠붙이와 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음침한 화실 안에서 유리창 깨지듯이 울렸다. 세 줄기의 새로운 상처가 욱신거렸고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지금 보니 그의 셔츠 구석구석에 묻은 까만 얼룩들도 전부 피다. 하기는 그가 어떻게 꼬박꼬박 세탁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현태의 가슴에 난 흉터의 개수만큼이나 셔츠의 얼룩도 많다. 그는 다리를 뻗고 바닥에 늘어졌다. 창문가의 어둡고 노란 빛이 흔들거리면서 그의 시야를 괴롭혔다.
돌로 된 바닥이 싸늘한 것이 계속 마음 한 구석에 걸렸다. 현태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보았다. 서늘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피로 된 손도장이 찍혔다. <영운이가 또 뭐라고 하겠군.> 그가 권태로운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는 권태로웠다. 피를 보니 또 매사가 다 귀찮게 느껴지고 허무주의적인 감성이 가슴을 들볶았다. 화실 바닥에 누운 채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현태. 공간은 어둡고 칙칙하다. 그가 느끼기를 이 장면 그대로 모든 것이 <구덩이>에 빠져버릴 것 같았고 그런 심상이 어쩐지 즐거웠다. 현태는 눈을 감고서 소리 없이 낄낄 웃었다.
건물 전체가 호수 밑바닥에 잠긴 것처럼 조용했다. 거리의 소음은 화실까지 닿지 못했다.
현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차분한 정신으로 동창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상처에서 나온 피가 끈적끈적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녹은 강철처럼.
<그 아이를 만나겠구나.> 현태가 뻐끔거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뒤로 땋은 단발머리. 항상 웃음기가 가득 담겨있던 수정 같은 눈. 코 주변에 점점이 찍힌 귀여운 주근깨. 복숭앗빛 입술. 잘 만들어진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턱. 찔레꽃 같이 하얀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웃음…… 그녀의 웃는 얼굴. 현태는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었던, 현태가 절대 지을 수 없었던 웃는 얼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굳은 피 한 방울이 배 위로 도로록 굴러 떨어졌다. 현태는 일어서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문을 향해 걸었다. 피를 흘린 덕분인지 조금 어지러웠다. 그는 화실을 나서고 복도를 거쳐 화장실로 걸었다. 복도에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현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셔츠 단추를 전부 열어젖혀 맨 가슴을 다 드러낸 채였고 끔찍한 흉터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틀비틀 걸었다.
그녀의 웃음! 현태의 뇌가 되뇌었다. 현태의 세계는 오래 전부터 광기와 상처로 들끓는 세계였다. 고로 그가 아는 것도 오직 광증과 병증에 대한 것들밖에 없었다. 그는 대체로 유쾌하였지만 머리가 돈 놈이었다. 현태는 웃더라도 깨끗하게 웃을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순결> 같은 것이 실재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태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있었던 것이다. <순결한 웃음>이 말이다. 현태는 처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 영혼을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완전히 홀려버렸다. 그리고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오염되지 않은 인격이노라고. 말인즉슨 현태는 자신이 오염된, 병에 걸린 인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아아!” 현태가 세면대로 다가가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현태는 찢어진 목소리로 화장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흐흐흐, 감상주의라!> 그리고 그는 웃었다. 세면대 앞에서 현태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피범벅의 광인이 하나 서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더 크게, 더 위악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난다고? 네가?” 현태는 거울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이 더러운 놈. 이 미친놈. 이 머리가 돌아버린 녀석아! 그는 그렇게나 웃다가 목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심하게 웃었다. 아, 그녀의 완벽한 웃음이여! 그 순결한 눈동자와 깨끗한 입술이여! 현태의 세계에서는 절대 발견하지 못할 그 미덕들. 거울을 향한 손가락 끝에는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그런데 현태는 한참을 웃다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납덩어리 같은 눈동자로 천천히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현태도 자신이 늘 일종의 착란상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자꾸만 <그녀>의 한 점 더러움도 없는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때의 나는 어땠던가? 그때도 나는 그녀에게 차마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상징이었고……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상한 욕망만으로 득시글거리는…… 말하자면 벌레였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인가?> 현태가 거울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떤 보상을?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지난 오 년간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완전한 존재였으니까. 완전한 것은 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현태는 어떤가? 그는 추락하기만 했다.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더욱 더 어둡고 음습한 곳으로.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광기의 발원지로 굴러 떨어져오기만 했다. 흐흐! 그는 오히려 웃었다. 비탄에 빠지는 것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현태는 고뇌하고 있었지만 기분만은 유쾌했다. 그것이 그의 광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간에, 현태는 마침내 입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씨부렁씨부렁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영운에게 부탁해보자. 그는 나를 덜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하는 일에 협조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기대된다. 나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따라서 전적으로 희망적이다. 내가 감히 무언가를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세수를 했다. 가슴의 상처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쓰라린 것이 너무나도 유쾌했다.
현태는 정신과 옷차림을 추스르고 화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걸레를 가져다가 핏자국을 닦아낸 뒤였다. 여전히 붉은 자국이 지저분하게 번져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가 그것을 치우려고 했다는 점만이라도 가상히 여기도록 하자. 아직도 형광등이 켜있지 않았다. 해는 이미 진 뒤였고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져갔지만 현태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조명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어둠 속에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다가 가끔 <왜 영운이 돌아오지 않는 걸까?> 따위만을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화실의 문을 두드렸다. 현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넋 놓고 노크를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철컥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어떤 교복 차림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저씨, 있어요?” 그 아이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실에 대고 외쳤다.
현태는 또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음!>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소녀는 문가에서 더듬거리더니 형광등의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번쩍하고 불이 켜졌다.
“있으면 불 좀 켜놓도록 해요.” 소녀가 지적하듯이 말했다. 현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대뜸 물었다.
“왜 또 왔어?” 그는 눈동자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말했다시피 봄 계절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 위에는 학교 문양이 가슴께에 박힌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어깨에는 까만 화구통을 매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 생김생김은 당찬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검은색 기다란 머릿결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오늘도 아저씨 그림 보러 왔죠.” 소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현태는 소녀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뭔가를 내놓으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현태에게로 다가와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불도.” 현태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소녀는 빨간색 라이터도 꺼내서 그에게 주었다.
현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겨 빨았다. 니코틴이 피 속을 돌았다. 알싸한 맛이 머릿속에 퍼졌다. 그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이젤을 들더니 소녀 쪽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자, 실컷 봐라.”
소녀는 의자를 끌어와서 그림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바닥에 화구통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현태가 그린 풍경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현태는 무뚝뚝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왜 자꾸만 화실에 오는 걸까? 현태는 소녀가 자신의 그림을 보러 이곳에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들 특유의 사치 취미 같은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한때 귀부인들이 예술가들을 액세서리처럼 소유하고 다녔듯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꽤 불쾌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그는 무심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오늘 그린 건 이게 전부인가요?” 소녀가 물었다.
“스케치도 몇 점 있어. 탁자 위에.” 현태가 담배를 쥔 손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탁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마구 흩어져있는 종이들을 주워 모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현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실 안은 한동안 형광등이 잉잉거리는 소리와 소녀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흘렀다. 창문 밖은 완전히 캄캄했다. 화실에 불을 켜놔서 더욱 그랬다. 담배는 거의 다 타들어가서 필터만 남은 상태였다. 현태는 마지막으로 한 모금을 빨고 꽁초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어, 그러면 안돼요.” 그림들을 살피던 소녀가 현태의 행위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의 눈동자를 멀거니 마주보았다. 소녀가 화실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쓰레기통이 있잖아요.”
“창문은 여기 있잖아.” 현태가 턱짓으로 바로 옆의 창문가를 가리키는 시늉을 해보였다.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코로 숨을 한 번 뿜고 말았다.
소녀는 스케치를 다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종이더미를 정리해서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현태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아저씨, 몇 살이에요?” 소녀가 물었다.
“왜.”
“그냥. 집은 있어요?”
“집도 없어 뵈냐?”
현태의 반문에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보고 현태는 그만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이 아이는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접근하는군. 나는 이 소녀의 당찬 눈매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선(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신만만하지만 비뚤어지지는 않은…… 말하자면 정의가! 그리고 이 정의의 소녀는 나에게 어떤 호기심의 화살을 향하고 있는 것인가?> 현태는 웃다 말고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화가가 되고 싶으냐?” 현태가 소녀의 화구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요.”
“그리고 미대에 가고 싶고?” 현태가 재차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태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며칠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까슬까슬한 수염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가 굳이 소녀에게 어떤 조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조언은 무슨 조언이란 말인가. 현태가 사는 방식은 도저히 남에게 추천할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태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삼갔다. 대학의 교육방식이나 교수들의 성질 같은 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런 것은 전부 별 의미가 없는 말들일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태는 도망자다. 그는 전부 집어치우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현태는 지금 <밑바닥>에 있다. 물에 빠진 채로, 지푸라기 대신 캔버스를 부여잡고.
“난 아저씨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소녀가 말했다. “너무 차갑고, 너무 고요하긴 하지만요. 마치 얼음 덩어리처럼.”
“비평 같은 건 필요 없어.” 현태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에 소녀는 공격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비열한 것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었는데, 현태는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현태 자신도 스스로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잘 알지 못했다. 누군들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다만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도취에 취해있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언어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과연 자기도취라는 그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가 얼마나 넓은 그물망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여하간, 현태의 그림에 대해 단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생존방식>이었다. 사자가 먹이를 사냥하고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말이다. 갈매기가 하늘을 날 때 반드시 누군가가 그 낢의 근거에 대해 비평해줘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갈매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새가 나는 이유는 너무 이상하다!>고 혹평을 해대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스운 인간이리라. 필경 갈매기는 그 비평가의 목소리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새의 나는 방식이 이상하다면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저 갈매기는 불구인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너무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의견들은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정신적으로 고차원인 어떤 창작행위만을 예술이라고 부른다면, 현태는 결코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직관과 충동에 홀려있었고 내면에서 고동치는 소리와 이미지들 때문에 미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현태의 미술은 마치 막힌 파이프에서 마침내 폭발적으로 물줄기가 새기 시작하는 것처럼 탄생했다. 그것은 전혀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사과를 하지?” 현태는 오히려 화가 치민다는 듯이 되물었다. 실제로 그는 점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이것 봐라! 나는 또 화가 나기 시작하는군. 내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상황이 내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짜증이 치민다! 내 생각에 나의 감정기관은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다.> 현태는 화가 나는 한편으로 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내가 정말로 그렇게 오만무도한 인간인가? 글쎄, 나는 모르겠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는 흥분해서 연이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너는 그냥 네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필요 없다>는 한마디로 일축했지. 오히려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 하!”
소녀는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높은 목소리로 지껄이면서 끊임없이 과격한 제스처들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충분히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깡이 좋은 아이였다. 소녀는 그 자리에 서서 현태가 지껄이는 것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태는 흥분하는 것에 지쳐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한층 진정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멍청한 놈…….> 그는 자책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소녀가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 화실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남자 두 명이 화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영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영운과 생김세가 닮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금테 안경을 걸친 노신사였다. 현태는 의자에 주저앉은 채로 눈동자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는 지금 신경질이 나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영운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태는 그저 불만스럽게 입을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어, 이 아가씨 또 왔군.” 영운이 현태 앞에 서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말했다. 소녀는 영운을 향해서 말없이 고개를 끄떡해보였다.
“소연이 네가 왜 여기에 있니?” 영운 뒤에 서있던 노신사가 소녀를 보고 물었다.
<소연? 이 아이 이름이 소연인가보군. 흠,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까지 이 소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뭐어 대수로운 일도 아니지만…….> 노신사의 말을 듣고 현태가 생각했다.
“이 아이는 가끔 우리 화실에 와요, 아버지. 아마 현태의 그림을 보러 오는 것 같습니다.” 영운이 그 노신사에게로 고개를 향하며 대신 대답했다.
“아, 그래? 그것 참 놀라운 일이로군.” 영운의 아버지가 곁눈질로 아직까지 인사 한마디도 안하고 구석에 앉아있는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도 거지 같은 꼴이로군. 일자리는 아직도 구하지 못했나?”
“아하, 괜찮습니다. 저는 여전히 유쾌합니다 아버님.” 현태가 비실비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언뜻 누군가에 대한 조롱 같은 것이 섞여있었다.
“유쾌하다니 다행이군 그래.” 영운의 아버지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소연을 향해 명령하듯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소연이 너는 이제 돌아가도록 해라. 그리고 현태 군을 계속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해. 왜냐하면 현태군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거든.” 그의 말에 현태가 소리죽여 웃음을 터트렸다.
소연은 현태와 영운의 아버지 사이의 긴장된 공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돌아갈게요.” 그녀는 바닥에 놓여있던 화구통을 집어 들고서 영운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뵐게요 원장님.”
“잘 가거라!” 영운의 아버지가 자신을 지나쳐가는 소연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소연은 화실 문을 나서면서 힐끗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자에 널브러진 채로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짓고서 소연을 보고 있었다. 소연은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화실 문을 닫았다.
이제 화실 안에는 현태와 영운, 그리고 영운 아버지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는 형광등 불빛만이 화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영운은 뭔가를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현태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화실에 직접 내려오시는 것도 오랜만이로군요! 무언가 저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래. 내 구두를 돌려받으러 왔네.” 영운의 아버지가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군요.” 현태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구두를 벗고 영운의 아버지에게 그것을 건넸다. “덕분에 오늘 맨발로 지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가 양말바람으로 말했다.
영운의 아버지는 구두를 받아들고 현태를 잠깐 마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현태에게는 등을 돌린 채로 영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돌아가 있겠다.”
“들어가세요 아버지.” 영운이 말했다. 그 뒤에 영운의 아버지는 화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실 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현태는 다시 의자 위에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늦었군!”
“학교에서 같은 조 사람들이랑 논의할 게 있었거든. 그리고 여기, 네 슬리퍼다.” 영운이 대답하면서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건넸다.
현태는 그것을 받아서 거꾸로 쏟았다. 문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슬리퍼 한 쌍이 쏟아져서 바닥에서 굴렀다.
“저 소연이라는 학생은 네 그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영운이 한창 신발을 신고 있는 현태에게 물었다.
“글쎄, 아무려면 어때.” 현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보다 동창회가 언제라고 했지?”
“이번 주 토요일.” 영운이 대답했다.
“오늘은 무슨 요일인데?”
“오늘은 화요일이지.”
“수, 목, 금…… 네 날 뒤군.” 현태가 중얼거렸다.
<아!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파!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구르는 것처럼 통증이 머릿속을 구른다. 네 날 뒤라.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영운을 기다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그 소연이라는 소녀가 갑자기 들어와서 내 생각을 방해하기는 했지만, 나는 충분히 많은 생각을 했다. 동창회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주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었지. 사실 동창회 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는 그녀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여전히…… 내 존재를 완전 부정할 만큼 완벽한지를! 건강한 것의 찬란함이여! 그리고 나는 또 하나를 확인해야한다. 《그 시절》 내가 갖고 있었던 욕망을…… 말이다. 아아, 머리가 아프다.> 현태는 생각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운아, 나는 이 꼴로 동창회에 갈 수는 없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갑자기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토요일 날 나를 건강한 사람처럼 꾸며다오!”
“뭐라고?” 영운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건강한 사람처럼? 그야 어려울 것 없지. 하지만 네가 그런 부탁을 하다니 의외인걸!”
“나는 내 실험이 실패할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현태가 중얼중얼 말했다.
“무슨 말이야?”
“아니다. 너는 그냥 내가, 적어도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면 된다.” 현태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영운에게 말했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성은 갖고 있다. 책략도 갖고 있다. 나의 얇은 가면이 깨지지 않은 채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런 것은 이미 오래전에 결말을 보았다. 나는 그냥 미친 사람인 채로 있는 것이 더 낫다. 누구에게 나은가 하면 모두에게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은…… 헤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었다.
“좋아. 해주지. 나는 여전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해주마. 머리를 잘라주고 면도를 시키고 세련된 옷을 입혀주마. 그래서 토요일에, 우리 학창시절의 친구들이 너를 볼 때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영운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현태를 의심하지 않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현태에게 좋은 일이었다. 영운은 현태를 위해 자신의 재산이나 시간 등을 희생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다행인 것은 영운이 그러한 일들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운은 현태라는 특이한 인간을 뒷바라지 하는 것을 마치 희귀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즐거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성질 때문이리라. 아무튼 현태가 영운 같은 인간을 만났다는 것도 현태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현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캔버스 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스케치 더미도 화실 한구석에 쌓아두고 말이다. 그는 이제야 피곤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는 광기가 그를 활기 넘치게 만들고 있던 것처럼. 그런데 현태는 재차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루 종일 뇌에 가해진 과부하 때문이리라. 현태는 너무나도 생각을 많이 했다. 늘상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말>들이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데 현태의 정신은 그것들을 붙잡고 논리 분석하여 그에 대한 해석과 의견을 끊임없이 지껄이는 것이다. 하루 이십사 시간을 그렇게 지껄이며 보낸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것이리라. 각성제 따위로 한껏 들떠있던 정신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끔찍한 통증을 느끼듯이 말이다.
“아,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어.” 정리를 마친 현태가 말했다. “너는 더 있다가 갈 테냐?”
“그래, 오늘은 하루 종일 학교 때문에 바빴으니 이제부터라도 그림을 좀 그려야지. 너 화실 열쇠는 갖고 있지?” 영운이 말했다.
“아마도…… 바지 주머니에 있군.” 현태가 호주머니를 더듬더니 말했다.
“나는 내일 오후 늦게나 화실에 들를 거야. 그때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그리고 미리 좀……” 영운은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씻어두라고.”
“좋아. 알겠다. 나는 이제 간다.” 현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리퍼를 질질 끌며 화실 밖으로 향했다. 영운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현태는 화실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메아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섰다. 이미 완전한 밤이었다.
하늘은 어두운데 거리는 인공의 조명으로 밝게 흔들렸다. 아, 그리고 사람이 많았다. 골목 구석에 있는 현태의 시야에 보이는 사람만 열 명에서 열댓 명은 되어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취해있었고 목소리가 높았다. 현태는 얼른 집에 돌아가야겠노라고 생각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려서 좋지 않았다. 별은 없었다.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가끔씩 썰렁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축축했고 고로 불쾌했다. 공기 중에서 물방울의 냄새가 났다. 현태는 사막에 가고 싶었다. 그곳도 밤에는 춥다고 했다. 뼈가 얼어붙을 만큼. 현태는 사막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줄어갔다. 그리고 빛의 수 또한 적어지고 있었다. 길거리는 점점 더 어둡고 소리 없는 곳이 되어갔다. 현태는 집으로 향하는 음침한 언덕길을 걸어 오르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민간인의 총기 소유가 금지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부터 내게 차갑고 묵직한 권총이 한 정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내 머리를 쏘았을 것이다. 최소한 삼십 번은 그랬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수도 없이…….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유쾌한 것이니까 나는 내게 총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눈을 감고 웃었다.
주택가 안쪽의 캄캄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하늘에 달이 뜬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현태는 즐거워졌다. 그는 자신이 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의 밤에는 단 하나의 호흡하는 생명도 없었다. 그는 세계가 좋았다. 특히나 이렇게 인간이 멸종한 세계가 말이다. 그는 너무도 유쾌한 기분이었고 그래서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는 계속 걸었다. 언덕길 끝에 하숙집이 있었다.
현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자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미한 빛을 내는 알전구가 달린 복도를 지나쳐서 자신의 방 앞에 도착했다. 현태는 우선 방문을 열고 슬리퍼를 벗은 뒤에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락> 속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썩은 공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현태는 어둠 속에서 떨어트리듯이 슬리퍼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더듬으며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창문조차 없는 <관짝>이라서 눈이 익숙해질 수 없는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단추를 다 풀고 셔츠를 벗었다. 벗으면서 옷깃이 상처에 스쳐 상처가 따끔거렸다. 현태는 책상이 있을 방향을 향해 벗은 셔츠를 던졌다. 그리고 손으로 눈앞을 더듬으며 느릿느릿 바닥에 펼쳐진 이불 위에 앉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러고 있었다. 너무 깊은 어둠 때문에 사고가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좋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흐흐거리고 웃었다. 아아, 너무나도 아늑하고 너무나도 역겨운 굴이다. 그는 천천히 이불 위로 상체를 넘어트렸다. 그리고 쭈그린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4. 고립과 동일화에 대하여
현태는 익사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호숫가에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힘이 센 두 남자가 현태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현태는 그들이 자신을 호수 속으로 끌고 갈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태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들에게 계속해서 농담을 지껄였다. 그리고 일부러 마구 웃기도 했다. 그들에게 친근한 것처럼 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이런, 이제 나는 죽겠군.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눈알을 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현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태를 붙잡은 남자들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공포심과 기쁨 때문에 발작하듯이 웃어댔다. 그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친절한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다.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어떤 몸짓이나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낯모르는 여인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든지. 현태의 발을 밟고 당황하여 사과를 하려드는 행인에게 한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준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현태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는 남자 둘밖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어깨까지 물속에 잠겨있었다. 하는 수가 없어서 현태는 물에 빠지기 직전 그들에게 명랑하게 인사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형제여!”
그리고 현태는 붙들린 채로 물속으로 끌려들어갔고 기도를 통해 폐에 물이 차는 것을 느끼면서 발버둥 쳤다. 남자들은 발버둥치는 현태를 붙잡고 묵직하고도 차분한 발걸음으로 점점 더 깊은 호수 밑바닥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자신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물 때문에 진동하여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입과 코로 마구 기포를 내뿜으며 호흡이 한계에 달한 것을 감지했고, 마음속으로 초읽기를 시작했다. <셋, 둘, 하나. 자, 이제 죽는다.>
눈을 뜨자 새까만 어둠이었다. 현태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눅눅하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공기가 콧구멍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눈알은 불을 지핀 것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갔고 온몸에는 철근을 매달아놓은 양 관절이 무거웠다. 현태는 정리되지 않는 사고를 천천히 한 덩어리로 모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집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방금 그것은 꿈이었나보다.> 그렇다. 현태는 방의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사방이 흑막을 친 것처럼 캄캄한 이유는 빛이 들어올 구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현태는 보통 오전 열 시 즈음이면 잠에서 깨곤 했다. 그는 생각을 주워 모으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아아. 현태는 몸을 일으킨 채로 연이어 신음을 내뱉었다. 꿈을 꾸고 난 뒤 눈을 뜨면 언제나 이 연속성이 괴로웠다. 꿈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계속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현태에게 엄청난 불안과 불만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죽음조차도 어떤 <깨어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그것만은 생각하지 말자. 그것은 최악이다. 이루 말할 것도 없는 최악의 경우다. 도대체 어떤 신이 영원의 나라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는지? 영원은 모든 형벌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종말, 종언, 파국, 결말: 이 얼마나 <완전한> 개념들인가. <아아, 나는 깨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구나.> 현태는 일어서서 어지러운 머리로 비틀비틀 형광등의 스위치 쪽으로 향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경험과 감각에만 의지하여 스위치를 찾아야했다. 그리고 드디어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스위치를 켜자 깜빡깜빡하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방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좁고 음침한 그의 <관짝>. 현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절뚝절뚝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매일 하는 것처럼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면바지만 입고 서있는 현태. 가슴팍에는 붉은 낙서들. 그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손톱을 세워 가슴 한복판을 세게 긁었다. 겨우 굳어가던 상처들이 다시 터져 진물과 피가 배어나오고 통증이 비몽사몽 하던 정신을 세게 때렸다.
“아하!” 그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활기차게 소리를 쳤다. “나는 내가 불타 사라질 수 있다면 기꺼이 지옥으로 뛰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고 현태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살아있는 인간은 삶 밖에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살아가야지. 무엇이 어찌되든 말이다. 흠, 그래. 무엇이 어찌되든……. 왜냐하면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의무니까…….> 현태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현태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는 누더기 같은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기 시작했다. 피와 습기 때문에 눅눅한 셔츠자락이 피부 위에 달라붙었다. 흰색 형광등 빛 밑에서도 여기저기 그늘이 진 방의 구석구석이 현태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어쩐지 그의 정신을 음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어두운 굴속에 사는 털북숭이의 짐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안락하다면야 안락한 것이지만 말이다. <흠, 그렇다고 내가 햇빛과 태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저녁나절의 물기 어린 공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그리는 그림 속의 빛살과 불꽃처럼 선명한 색깔들이다. 어쩌면 나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현태는 셔츠의 단추를 끼우면서 묵묵히 생각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화실 열쇠와 지폐 몇 장이 있었다. 어제 영운이 <좀 씻어두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현태는 목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숙집에서 몸을 씻기는 어려웠다. 화장실에 샤워시설이 비치되어있기는 했으나 비좁았고 사람이 자주 들락거렸다. 비좁은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쓴다는 것은 현태에게 있어 커다란 문제였다. 그러고 보면 현태가 마지막으로 몸을 씻은 것도 일주일은 더 된 일이었다. 세수만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 지금 내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불행인가 아니면 고독인가?” 현태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문가에 놓인 슬리퍼를 집어 들더니 형광등을 끄고, 문을 연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내가 더러운 감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복도에 내려선 현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생각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늘 폭포수 같은 광증 속에서도 냉정―말하자면 자신이 느끼는 감상에 대한 냉정 말이다―만은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의 몇 안 되는 중요한 미학적 신념 가운데 하나였다.
아침 햇살이 하늘을 향해 열린 담장 너머에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약간 노란 빛을 띠는 빛살 속에서 어떤 미약한 열기 같은 것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현태는 홀린 것처럼 창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러한 날에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침하고 우울한 감정이 구더기처럼 꿈질거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약에 그가 가슴뼈를 쥐어 뜯어내서 그 속에 든 것들을 전부 바깥으로 쏟아낸다면……. 현태는 이상한 망상을 했다. 자신의 열린 가슴 속에서 온갖 끔찍스러운 지네나 회충 같은 것들이 덩어리로 뒤엉킨 채 후드득 떨어져서 사방을 기어 다니고, 검은색 끈적끈적한 피가 쏟아져 나와 그것에 닿은 모든 것들을, 가령 돌이나 공기나 풀 따위들을 모조리 현태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현태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태의 그림 또한 수많은 절제와 편집광적인 고립의 결과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멍청한 생각이었다. 현태는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현태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자신의 가슴 속에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폭발성의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찔러 대서 괴로웠다. 그는 <생각>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방금 잠에서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피로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괴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선은 몸을 씻을만한 곳을 찾아야했다. 이 시간에 목욕탕이 문을 여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현태는 골목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목욕탕을 찾아다녔다.
“영운은 오늘 오후 늦게나 화실에 온다고 했다.” 현태가 길을 걸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나는 몸을 좀 씻어놔야 하고……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글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선은 목욕탕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하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내가 더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신체적으로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나는 내가 더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 말할 수 있고말고. 하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그런데 현태는 또 갑자기 킥킥대며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동창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어떤 결론 같은 것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행운이다. 나는 기뻐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다. 나의 방향성 없는 인생이 하나의 점을 찍게 될 것이다. 랄라!> 현태는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놀렸다. 그런데 그때 목욕탕 간판이 현태의 눈에 보였다.
그는 잘 됐다는 듯이 간판이 붙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입장료를 내는 창구 앞에 들어서자마자 현태는 멈칫하고 발을 멈췄다. <만약 안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지?> 현태가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이 나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게 된다면? 그들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런데 내가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너무 새삼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나를 보면서 좋지 않은 생각을 한다. 나는 뻔뻔해도 좋다. 나는 원래가 미친 사람이지 않은가…….> 그는 머릿속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그리고 현태는 일부러 당당하게 창구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창구 너머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현태는 창구 위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른 한 사람!”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발랄하고 한 편으로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노인은 잠에서 깬 듯이 현태를 바라보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사천 원>이라고 하였다. 사천 원! 한 끼 식사 값이로군! 현태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집어넣으면서 과연 사람은 허기를 채우고 나서야 청결 따위를 찾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하기는 사 천 원이든 사 만 원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돈을 단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빈곤하면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다.> 현태는 지폐를 세면서 생각했다.
그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남탕>이라고 적힌 불투명 유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태는 생각했다.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도 없다. 나는 어떤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이다. 그는 탈의실에서 로커 하나를 열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깡마르고 지저분한, 그리고 가슴에는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이 희멀건 형광등 불빛 밑에 드러났다. 탈의실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현태의 몸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는 분명 쓸데없는 고뇌에 빠져 자신의 감정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밝은 탈의실에 알몸뚱이로 서있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대어보았다. 말라붙은 피와 딱지로 거칠거칠했다. 그는 탈의실 형광등의 이상한 색조 때문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현태는 욕탕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목욕탕 안에는 이마가 다 까진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온탕에 몸을 담근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현태는 그를 발견하고 잠시 주저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샤워기 앞으로 향했다. 실제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런 늙은이들은 남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법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시간과 주름 속에 파묻히게 되면,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고형질의 법칙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세계와 하나가 되고…….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세계와 동일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점점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현태는 샤워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물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혀 들리지 않았다. 목욕탕은 휑했고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차있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현태는 뇌수에 이슬이 맺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감으면서, 어떤 주황빛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금방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나는 별세계에 사는 것 같다.”
현태는 마지막으로 비눗기를 몸에서 씻어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껏 사천 원이나 내고 들어왔는데 몸만 씻고 바로 나가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탕에 조금 들어가 있을까 싶었다. 욕탕은 냉탕까지 합쳐서 모두 세 곳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 늙은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 늙은이는 현태가 들어온 뒤로 단 한 번도 현태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잠그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현태는 노인이 있는 탕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상처에 닿자 살을 기름에 튀기는 것 같았다. 현태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물속에 몸을 담갔다. 혀끝까지 기어 올라온 욕설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현태는 물속에서 자신이 송장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에는 온통 벗겨지고 찢어진 상처들. 염증이 올라 울긋불긋한 것이 마치 차에 치인 살덩어리 같았다. 그는 수증기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심장 한 쪽이 뭉근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압과 부력 때문에 수중에 뜬 팔다리가 거추장스러웠다. 육체와 영혼이 절단 당한 느낌. 현태는 쓸 데 없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불편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늙은이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들이 메아리치며 나지막이 울렸다. <토요일이 멀지 않았다.> 현태는 일부러 그 생각을 했다. 그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끓는 물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내 인생.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어리 같은 내 인생. 나는 그림을 그리지만 화가는 아니지. 인생을 살지만 인간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이제 곧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야.”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늙은이가 눈을 뜨고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현태가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운 물결이 그의 나신을 핥으며 출렁거렸다. 목욕탕의 주황빛 조명이 현태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비치고 있었고, 현태는 자신이 땅으로 착륙하지 못하는 풍선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의 상처들만이 그 자신을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그 통증만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전에 몇 번이나 죽어본 일이 있는 건지도 몰라.” 현태는 길을 걸으면서 느닷없이 말했다. 지나가던 남자가 이상한 눈길로 현태를 보았지만 곧 스쳐지나갔다. 현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죽어본 경험이 여러 번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전생이나 윤회 같은 시답잖은 것은 믿지 않았다.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기계의 전원이 꺼지는 듯한 갑작스러운 종말을, 목이 잘리고 시야가 끊기는 순간의 가슴 먹먹하고 체념적인 감정을 그는 몇 번이나 겪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언제였더라? “하지만 나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죽어본 일이 없지 않은가?” 그의 이성이 말했다. 그러나 이성 따위는 이미 현태의 내부에서 거의 입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나는 죽어본 일이 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나는 죽음과 동떨어져있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그와 손을 잡았고 그의 품으로 굴러 떨어져 봤다. 흠, 어쩌면 내가 환각 속에서 사는 것일 수도 있지. 어쩌면 미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죽어본 일이 있는 것 같다…….> 현태는 완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화실로 가는 중이었다. 목욕을 하고 나와서, 한결 청결해진 기분으로 봄의 다사로운 바람이 머리를 말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새삼스럽고 오랜만인 것이었다. 이제 이 피와 얼룩 투성이의 셔츠를 벗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현태는 괜히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물론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 흉내를 낸다는 것도 유쾌한 일이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들뜬 마음을 꺼트리려고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헐거워지면, 거기서는 노리고 있었던 듯이 향수가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의 원망과 억울한 감정이 배고픈 짐승처럼 아가리를 내밀어대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했다. 현태는 아무것도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 그만! 생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만약 내 사고의 전원을 내 마음대로 꺼버릴 수만 있다면! 수없이 가시가 박힌 뭉툭한 곤봉이 구르는 것처럼 내 정신 속에서 무언가 무겁고 걸쭉한 것이 흘러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유쾌하고 싶지만 유쾌할 수가 없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다 누군가의 탓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기도 싫어…….> 그는 좌절스러운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는 화가 났다. 하지만 어서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야했다. 그저 잊고 다시 광적인 희열과 열망에 빠지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조금이라도 평범한 기쁨에 발을 담그려고 하면, 언제나 억울함으로 가득한 괴기한 얼굴의 꼬마아이가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머리를 내밀었기 때문에, 현태는 남들처럼 웃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실까지 그리 멀지 않았고, 그림을 좀 그리다보면 금세 영운이 올 것이었다.
“아아!” 현태는 걸으면서 야수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망각을 위해서였다. 스스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커다란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큰길로 나오자 정장차림의 남녀들이 많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 사이에서 현태는 길을 잘못 든 산짐승 같이 보였다. 기다란 머리에 며칠째 면도하지 않은 얼굴, 지저분한 셔츠보다도, 늘상 하얗게 질려있는 그의 눈동자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벌써 수십 년이나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의 눈은 늘 감정의 용광로 같았고 그를 별다른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현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외국으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아예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라면, 오히려 현태의 이방인 같은 기분이 덜할 것 같았다. 아, 그는 한국인들이 싫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이 지구상에서 현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종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잘 이해하게 되어도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면 알수록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현태는 언제까지고 이방인이며 외지인이었다. 그는 어서 화실로 피신해야했다.
“어머니!” 현태가 빌딩의 입구로 들어서며 돌연 외쳤다.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내 어머니의 얼굴조차도 더는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는 갑자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현태는 계단을 오르며 화구통을 맨 몇몇 학생들과 지나쳤다. 그들은 영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의 원생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현태를 알고 있었다. 얼굴 뿐만 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늘 이 층 구석의 화실에 처박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어딘가 조금―혹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이 원생들 사이의 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소연이라는 소녀가 저녁마다 현태를 만나러 오는 것도 꽤 용기 있는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분명 친구들에게서 현태의 좋지 않은 소문들을 들었을 것이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복도 구석의 화실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외침소리라든지,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욕지거리들에 대한 소문을.
하! 하지만 그따위 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태는 실실거리면서 입속말을 되뇌었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려가고 있다. 내 가슴 속의 무딘 나이프는 점점 날이 서고 있고, 계절은 봄이다. 어머니, 어머니,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려야할 정도로 세상은 아름다워요. 현태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감정이 머리 꼭대기에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기름기를 씻어내서 살랑대는 기다란 머리칼의 촉감이 기분이 좋았다. 화실에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고 창문에서는 쏟아지는 물결 같은 햇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끔 현태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불행했지만 자신이 불행한 것만큼이나 세상이 가끔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 불행이라니? 사실 불행 같은 것은 없었다! 현태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암, 그렇고말고.> 현태는 불행이 뭔지조차 몰랐다. 고통에 대해서라면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불행은 별개였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자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개념이었다. 어떻게 해야 <불행해질 수 있는지> 현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늘 성인(聖人)의 후두부에서 빛나고 있는 후광처럼 광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행해지는 법을 몰랐다.
현태는 실실 웃으면서 이젤을 창가 옆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화실 구석에 놓아두었던 덜 그린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가져와서 이젤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그 그림을 선 채로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캔버스를 도로 빼서 캔버스 더미 속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서 그는 새로운 깨끗한 캔버스를 가져와서―분명 영운이 사둔 것이다― 이젤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그리고 싶었다. 가슴 속에서 광증과 영감이 사납게 몸을 섞으며 날뛰고 있었다.
“가끔은 밤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현태가 파스텔 연필을 집어 들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낮이었다. 환한 낮이었다. 현태는 캔버스에 희미한 선으로 어떤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낮은 언덕이 있고, 별이 있고, 또 물이 있었다. 지금은 스케치 단계라서 정확히 무슨 그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현태가 밤그늘 속에 어떤 사람의 형태를 작게 그려 넣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늘 절감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현태에게도 그 정도 객관성은 있었다. 현태는 자신의 몸 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수압을 느낄 수 있었고, 질펀한 심해의 흙더미를 손으로 움켜쥐며 자조적으로 웃을 수도 있었다. 분명 그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러한 수직적인 상대성에서 현태를 조금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위로에 지나지 않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저 현태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것뿐이었다. 화실은 조용했고 복도 쪽에서 가끔 학생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세상 밑바닥에 너부러진 존재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즐겁기까지 하다. 현태는 입술을 움찔거리면서 그렇게 되뇌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퇴폐적이고 희망이 없는 상태에 대해 질색하면서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다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현태는 다른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몰랐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현태는 광인이었고, 사회적 쓰레기였으며, 잉여인간이었다. 굉장히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조차도 그랬다. 현태는 단 한 번이라도 사회의 기대에 보답해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마치 오물통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태어난 것을. 아아, 그러나 절망할 이유조차도 없다. 모든 것은 그냥 <그런> 것이다. 현태는 유쾌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유쾌했다. 아니, 오히려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유쾌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려니 싶었다. 그는 그 무엇도 손에 넣어본 적이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아직도 갓 태어난 아기 같았다. 흠,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다시 겨울이 왔을 때 영운조차 현태의 곁을 떠나고, 그의 <관짝>마저 잃어버려 하얗게 눈이 덮인 거리에서 잠들 듯이 눈을 감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는 마치 초월한 것처럼 타락해있었다.
세 시간 가량이 지났다.
5. 화장하는 괴물에 대하여
“오늘은 수요일이야!” 한창 그림을 그리던 현태가 갑자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기대가, 그리고 불안이, 혹은 떨리는 듯한 발작적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마침 화실 문이 열렸다. 영운이었다. 영운은 화실로 들어오려다가 갑작스러운 현태의 외침을 듣고 어리둥절해있었다.
“그래. 오늘은 수요일이지. 네가 날짜를 기억한다니 놀라운 걸.” 영운이 말했다.
“왔군.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림을 그리면서.” 하긴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없지! 현태가 머릿속으로 이어서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는 일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견자의 사유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육체는-혹은 그의 눈동자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몸은 미쳐있다. 마치 현태의 머릿속처럼, 거의 반쯤은 반사적으로, 그리고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사유의 움직임을 계속하는 것이다. 현태는 그 <생각>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야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정교한 작업을 하기에 그는 너무 미쳐있었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만은…… 그는 최소한의 결정만을 남겨두는 일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차갑고 부동적인 세계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현태 자신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붓을 내려놓으면서 영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현태가 물었다.
“네 시. 네 시 반이야.”
“네 시 반이라!” 현태가 괜스레 유쾌하게 외쳤다. 오랫동안 그림에 집중하다가 붓을 내려놓으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어지럼증 속에서 기분이 좋았다. 영운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무엇이든 좋으니 대화를 하고 싶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침묵이 달아나고 절망이 망각되는 날들. 그러나 그런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현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유쾌하면 주로 자해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유쾌함은 늘 자학적인 집착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해가 떠있었다. 아픈 것은 싫었다. 아픈 것은 싫다. 통증은 싫어. 현태가 웃는 얼굴로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현태를 영운은 씁쓸한 얼굴로 쳐다보며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정리해. 머리 자르러 가자.” 영운이 말했다.
“머리를 잘라?” 현태가 되물었다. 그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몸에 힘이 없었다.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낮인데도 기력이 다 빨려나간 것 같았다. 영운의 머리를 자르러 가자는 말에 현태의 머릿속에서는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른다고?” 현태는 웅얼거리면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발하러 가자고.” 영운이 이상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래, 이발 말이지.” 현태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머리를 잘라야지. 깔끔하고 단정한 사회인처럼.” 사회인처럼. 마치 <그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거리를 함께 걷고, 그들과 웃는 낯으로 대화할 수 있는 흉내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을 맞춰야했다. 그렇게 한다면 현태의 하얗게 질린 눈도, 병적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도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있을 것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간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할로윈 데이에 서양인들이 변장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있던 그림은 이젤 위에 놓아두었다. 그림은 웬만큼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낮은 언덕 너머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사람이 어느 나무 밑에서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한 그림이었다. 현태는 불현듯 소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저씨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흥, 그러나 그런 감상평이 도대체 무슨 중요성을 가진단 말인가. 현태는 코웃음과 함께 금세 소연의 말을, 그리고 얼굴마저 잊어버렸다.
“머리를 깎고 나면 옷가게에 갈 거야. 너한테 잘 어울리는 정장을 찾아보자고.” 화구를 정리하고 있는 현태에게 영운이 말했다.
“정장? 그렇게 비싼 옷은 필요 없는데.” 현태가 조금 놀란 듯이 말했다. 영운은 평소에도 현태를 위해서라면 돈 씀씀이가 커졌지만, 언제나 현태가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장이라니. 현태가 알기로 정장은 어지간히 비싼 옷이었고, 그런 옷은 대학교 입학식 때 아버지 것을 빌려 입은 뒤로 입어본 일이 없었다.
“요즘에는 싼 것도 많아. 그리고 너도 말이야, 장차 화가가 될 사람이 정장 한 벌쯤은 갖고 있어야지.”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화가라.” 현태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되뇌고 나서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장래의 일 같은 것은 현태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특별히 그가 무계획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현태에게는 현재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한 달 뒤였다. 왜냐하면 달마다 집세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집세만 마련하면 현태는 적어도 한 달은 잘 곳을 찾아 거리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뒤에 영운에게 가끔씩 돈을 빌리면 식생활도 해결되는 것이었다. 현태는 그렇게 살았다. 장차 화가가 될지 아니면 두 달 뒤에 그의 관짝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현태는 더욱 몰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영운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영운이 그에게 그런 기대를 걸고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영운이 그의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소연이라는 여자아이도 그렇지. 훌륭한 그림이라니. 그런 것을 누가 안단 말인가.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현태는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지금까지 한 생각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정리를 마치고, 앞서서 화실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그럼 가자고.”
현태가 앞서서 나오긴 했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영운이 앞서게 되었고, 현태는 서쪽 하늘에 떠있는 노란색 태양을 보면서 건물 밖으로 따라 나왔다. <날씨가 좋군. 봄의 태양은 굉장히 섹슈얼하다. 넘치는 생명력과 에로스를 온통 지구에 뿌려대고 있지. 하지만 이런 날일수록 나는 하늘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겨울의 하늘이 좋다. 햇살마저 하얗게 얼어붙는 겨울……. 그런 날에는 잠들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리맡에서 어른거리지. 참 즐거운 일 아닌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면서 잠든다는 것은 말이다. 아, 하지만 난 죽고 싶은 것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미래는 너무 멀고 현재는 너무 광막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음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특히나 나처럼 가슴 속에서 광기가 날뛰는 사람은, 더욱 본능에 목이 매여 움직이기 마련이지. 언젠가, 글쎄, 하지만 나는 토요일까지는 살아야 해. 그녀와 만날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녀를 만나서 과거의 나를, 앙상한 갈비뼈 속에 피와 광증을 담고 빙글거리며 거리를 거닐던 어린 나의 소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다. 과연 내 손이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외로움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그리고 내 심장 속에 수도 없이 많은 환영들이 항상 축제를 벌이며 시끄럽게 발을 구르기 때문이다. 햇빛이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어…….> 현태가 영운을 뒤쫓아 가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그는 점점 뭔가에 취해가는 것 같았다. 낮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비추는 태양빛은 마치 독을 탄 술과 같아서 그의 몸을 불안하게 흔들어놓았다.
현태는 환각적인 상념에 잠긴 채로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영운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영운은 앞서가면서 가끔 고개를 돌려 현태가 제대로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태는 머리를 반쯤 뒤로 젖히고 피로한 눈동자로 하늘을 보면서, 열린 입으로는 뭐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비척비척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영운은 한숨을 쉬면서 다시 거리를 걷는 것이다. 저 친구를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운은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때 현태는 자신이 갑자기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완전히 취해있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갑자기 폭탄처럼 폭발해서 사방으로 살점과 뼈가 흩날리고, 주변을 걷던 사람들은 현태의 피를 한바가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왠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태는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완전히 믿기도 했다. 왜냐하면 햇빛이 관능적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노이즈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태가 자신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을 때, 그들은 미용실에 도착했다.
“이봐, 정신 차려.” 영운이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현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덕분에 현태는 자신의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다소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영운을 쳐다보았다.
“다 왔어?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 난 토할 것 같아.” 현태는 실제로 욕지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막 추락한 사람처럼 속이 어지러웠다.
“참아. 들어가서 물이라도 좀 마시면 나아질 거야. 들어가자고. 네 지저분한 장발을 세련된 헤어스타일로 바꿔야해.” 영운이 미용실 문을 밀어젖히면서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자른다. 그래, 즐거운 일이지.> 현태가 눈을 껌뻑거리면서 생각했다. 이발과 면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굉장히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우선 겉모습이 갖춰지면 연기를 하는 일이 좀 더 편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외관에 기반을 두어서 어떤 인간성을 연기하는 까닭이다. 미용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미용사들이 그들을 반겼고, 손님이 세 사람 있었다.
“이 친구 머리를 다듬을 건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영운이 현태를 가리키면서 미용사에게 물었다. 미용사는 십 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이봐, 물을 좀 마셔.” 영운이 현태에게 말했다.
영운의 말에 현태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정수기 앞으로 가서 물을 따라 마셨다. 여전히 속이 어지러웠지만 미용실 안이 조용했기 때문에 욕지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이발하러 오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군. 현태가 생각했다. 현태가 맡은 냄새는 미용실 특유의, 염색약이나 샴푸의 향기가 뒤섞인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곤했기 때문에 눈을 좀 문지르다가 영운의 옆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 현태가 혼잣말처럼 영운에게 말했다.
“그래. 미용실 냄새야.” 영운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손님 중 두 사람은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었고, 한 사람은 머리에 비닐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비행접시처럼 돌아가며 열을 내뿜는 기계 밑에 앉아서 잡지를 보고 있었다.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지만 미용사가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태는 어느 한 사람의 이발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에 잡지들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 권을 집어 펼쳐보았다. 여성잡지였다. 가방이나 구두의 광고나 선정적인 기사들이 페이지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곧 흥미를 잃어버리고 잡지를 내던지듯이 테이블 위에 돌려놓았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태는 활자를 읽는 것을 불편해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이 너무 난잡하고 반사적인 관념들로 가득해서 문장을 한 줄 읽는 동안에도 오만가지 생각들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가 터져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때 그는 책을 사랑했었다. 그는 주로 이미 죽은 작가들의 책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때는 지금보다 정신이 덜 복잡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현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일과 미쳐있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는 소설보다도 훨씬 환상적인 환각들이 항상 날뛰어대니까, 조금이라도 지루할 여유가 없어.> 현태가 생각했다. <난 생각이 끓어 넘치는 만큼이나 아무 생각도 없는 걸.>
“오래 기다리셨죠.” 현태가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릿속으로 되뇌던 중에 미용사가 말을 걸어왔다. 현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머리가 분홍색이었고 단발이었는데, 몸매가 다 드러나는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였다.
“아, 예. 제 차례인가요.” 현태가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말했다. 미용사는 그렇다고 했다.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울 앞으로 가 앉았다.
거울에 현태의 전신이 비쳤다. 아, 끔찍하군. 자기도 모르게 현태의 입에서 그런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밝은 곳에서 보니까 더 지독하잖아…….> 현태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생각했다. 병든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그에 어울리지 않게 피처럼 새빨간 입술―그는 자신의 입 꼬리에서 왠지 모를 구역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슴께까지 마구 내려앉은 머리카락. 백태가 낀 것 같은 희멀건 눈동자. 뒤죽박죽으로 자란 수염까지. <나는 자화상은 그리지 말아야겠어.> 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용사가 현태 뒤로 와서 섰다. 그녀의 얼굴도 거울에 비쳤는데, 그녀는 현태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서도 계속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현태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머리가 많이 기시네요 손님.” 미용사가 말했다.
“네. 그렇군요.” 현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그게……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네?”
“저는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어서요…….” 현태가 주변의 밝은 조명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저 친구를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때까지 현태와 미용사가 나누는 대화내용을 들으면서 히죽거리고 있던 영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미용사에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기다란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주세요. 왜냐하면 이 친구가 건강한 사회인처럼 보이게 만들어야하니까 말입니다. 아, 하지만, 사실 말이죠, 이 친구는 화가랍니다.” 영운이 주절주절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어머나, 멋진 직업이네요 손님.” 미용사가 놀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현태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영운에게도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무 몰개성하게 잘라버려도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예술가는…… 아시겠죠? 하지만 되도록 깔끔하게, 비전이 있는 젊은이처럼 보이게 잘라주세요. 세세한 것은 맡기겠습니다.”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술가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하지만 현태는 이미 반론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거의 자포자기하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창피를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뜨끔거리기는 했지만, 그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미용사는 영운의 추상적인 주문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았다고 말했고, 영운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여전히 실실 웃으며 말이다. 미용사는 먼저 빗으로 현태의 길고 새까만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화가를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미용사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난 사실 화가도 아녜요. 그냥 그림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현태는 말하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무능력자죠.”
“그림을 그리는 건 멋진 일이예요.” 미용사가 현태의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말했다. 그녀는 현태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학생 때 말이죠.”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할 말도 없었고, 이 여자는 상대가 대꾸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이야기할 것만 같았다. 미용사는 마침내 가위를 집어 들었고, 그의 머리를 서슴없이 자르기 시작했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마구 잘려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고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른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미용실이라는 곳이 이발소처럼 면도도 해주는 곳이던가? 잘 모르겠군. 아무려면 어때. 영운이 알아서 하겠지. 예를 들자면 그런 생각들 말이다.
“가능하다면 손님이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 보고 싶네요.” 확실히 그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계속 떠들어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잘 몰라요.” 현태가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말했다. “우리들의 눈이 어떤 것을 보아야겠다고 먼저 생각한 뒤에 사물을 보지 않듯이 말입니다.”
“아!” 미용사는 감탄한 것 같았다. “처음 가게에 들어오실 때부터 비범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태는 눈썹을 찡그렸다. 비범한 분은 무슨 비범한 분. 나 같은 건 영운이 없으면 여름에도 얼어 죽을 사회적 쓰레기일 뿐이지. 그러나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변하는 중 아닌가?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변하는 척을 하는 와중 아닌가 말이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이성의 매듭이 점점 단단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착각이었고 자기기만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이 아가씨와 즐거운 듯이 대화를 한다면 어떨까? 마치 자신감이 넘치고 사회적 활동력이 충만한 누군가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쩐지 유쾌해질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용사의 가식―그것이 정말 가식인지 아닌지는 현태는 물론 미용사 자신도 잘 알지 못할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득한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던 현태지만, 지금은 그 사회적이고 적응력 좋은 얼굴에 기분 좋게 웃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기분 변화도 광증의 일종은 아닐까?> 현태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도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머리의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지만 통증과는 별개로 그는 유쾌했다.
“내 화실은.” 현태가 찡그렸던 눈썹을 펴면서 얘기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아, 사실 내 화실도 아니죠. 친구의 화실에 얹혀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니까요.”
영운이 뒤쪽에 앉아서 흥미 가득한 눈동자로 현태와 미용사를 쳐다보는 것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그는 현태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꽤나 정상적인 어투로 말이다. 보통 현태가 말이 많아질 때는 주로 그가 그의 광기에 휘둘려서 제정신이 아닐 때뿐이었다.
“어머나, 한 번 가보고 싶네요.” 미용사가 말했다.
“실망할지도 몰라요.” 현태는 입 꼬리를 말면서 말했다. 미용사의 <가보고 싶다>는 말이 거짓이든 진심이든 지금의 현태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가면을 쓰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질 뿐이었다.
“설마요.” 미용사도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그녀를 따라서 입을 벌려 웃어보였다.
<이상한 광경이로군.> 영운이 소파에 앉은 채로 생각했다. <지금 저 친구는 뭔가 이상해. 원래 이상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해야할까? 아무튼 무언가가 이상하다. 시체에다 분장을 시켜놓은 것 같은 저 얼굴을 보라지.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연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흥미롭지만 소름이 끼쳐.> 영운은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현태가 평소처럼, 완전한 생활 무능력자와 광인의 얼굴과 혀로 날뛰어준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고 가장 억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태라는 인간의 심장 속에는 악마가 수 백 마리 살고 있어서, 보통 사람의 몇 백 배나 되는 생명력 때문에 늘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으로 미친 사람이어야 했고, 그의 악마들을 묶어둬서는 안됐다. 만일 그의 악마들을 묶어둔다면 그의 광기는 쌓이고 변질되어 어떤 지독한 독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지금 어떤 이유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악마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머리를 다 잘랐다. 미용사는 잔 머리칼을 다듬고 현태를 세면대로 데려가 머리를 감겼다. 영운은 현태가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서 자신의 머리를 미용사에게 맡기는 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 뒤에 미용사는 거울 앞에서 젖은 현태의 머리를 말리더니 스프레이 같은 것을 뿌리고 빗으로 모양을 냈다. 현태는 거울을 보고 얼떨떨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현태가 학창시절에 거울에서 봤던 것 같은 소년이 나이를 먹고 청년이 되어 비치고 있었다. 상당히 훌륭하게 말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너무 말라서 광대뼈가 다 드러나고, 눈알이 희번덕거렸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영운은 당황하고 있는 현태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면도기였다.
“면도해.” 영운이 짧게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받아서, 입가에 물을 묻히고 면도를 시작했다. 엉성하게 자란 수염들이 잘려나가고 입가와 턱이 점점 깨끗해졌다. 면도를 마친 그는 면도기를 도로 영운에게 돌려주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이 정도면 속일 수 있겠어.> 현태가 마음속으로 희희낙락하여 뇌까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청년이 누군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유쾌했고 더욱 조직적인 무언가가 된 느낌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손님.” 미용사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현태가 넌지시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잘 어울리는군. 이 정도면 훌륭해.” 영운이 뒤에서 덧붙였다.
현태는 웃었다. 그의 웃음 속에는 어떤 치명적인 비열함이 숨어 있었지만 영운이나 미용사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즐거웠다. 그래서 그는 일어서서 영운을 향해 돌아섰다.
“좋아, 나는 사실 이게 나한테 어울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실제로 그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정도로 사회적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운이 붙어있어 다행인 것이었다. “이제 내가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는가?”
“먼저 옷을 사러 가자고. 그 뒤에 얘기해주지.” 영운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운은 계산대에서 계산을 했다. 그동안 현태는 미용사와 호의가 담긴 악수를 나눴다. 미용사는 악수를 하면서 현태에게 물었다.
“화실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저쪽으로 얼마쯤 가면 <C 미술학원>이 있는데, 그 건물의 2층에 있답니다. 언제든지 놀러오세요.” 현태는 그녀가 올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 건물 알고 있어요.” 분홍색 머리의 젊은 미용사는 발랄한 눈동자를 한 채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는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태는 영운을 따라 미용실을 나왔다.
“조금만 가면 양장점이 있어.” 현태가 미용실 문을 나오는 것을 보며 영운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보았다. 평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사라지자 세상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그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영운은 걷기 시작했다. 현태도 그를 따라서 걸으면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았다. 점심에는 목욕을 하고 방금 머리를 깎았다. 그는 전보다 밝아보였지만 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구겨지고 피, 얼룩이 묻은 셔츠와 지저분한 바지는 그대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전보다 조금은 그 거리에, 환각적인 것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익숙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방금 웃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열한 희열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잘 숨겼다. 숨겨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환희를 위한 준비이자 계획이었다. 현태는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아무도 그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현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머리를 잘 정돈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들 갖고 사는 소시민적인 희망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앙드레 지드가 희망을 거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태에게 늘 본이 되어보였다. 그래서 그는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절망에 빠지는 방법도 몰랐고, 광기와 비틀린 정열로 현재를 마주하며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아, 그가 정말로 현재를 마주하기는 했느냐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아주 미쳐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치광이야.> 현태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지껄였다. 커다란 바위에게 있어 세계가 그 자신만큼이나 단단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미치광이의 세계는 늘 미쳐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누가 가장 객관적인 세계를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이거나, 혹은 아마도 신일 것이다. 적어도 현태는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는 늘 충실했다. 그들은 곧 양장점에 도착했다.
커다란 가게는 아니었다. 현관 앞에는 값싼 구두들이 전시 되어있었고, 통유리로 된 벽을 통해 가게 안에 가득 걸린 옷가지들이 보였다. 영운은 그곳에서 옷을 살 것이라고 했다. “구두는 네가 신던 걸 신어도 괜찮을 것 같아. 왜냐하면, 너랑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네 구두를 관찰하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 영운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현태도 그에 동의했다. 그는 아직 그의 구두를 마음에 들어 했다. 지금 그가 신고 있는 것이 얼마 전에 영운이 사다준 슬리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늙은 점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키가 멀쑥하고 잘 차려입은 50대 후반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현태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한 달 정도 못 먹어서 기력이 다 빠진 영운의 아버지를 상상했다. “어서 오세요.” 그가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우리는 이 친구가 입을 옷을 찾고 있는데요, 셔츠와 웃옷, 그리고 양복바지를요.” 영운이 현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비싸지 않은 것으로요.”
“아!” 점장이 반사적으로 줄자를 꺼내며 대답했다. “먼저 치수를 좀 재어보죠. 옷 사이즈는 알고 계십니까?”
“그럼 제가 재보도록 하죠…….” 그러면서 점장은 줄자로 현태의 허리, 어깨너비 따위를 재기 시작했다. 현태는 얼떨떨하게 서서 팔을 벌리고 점장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영운은 가게 벽면에 걸려있는 옷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장례식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어둡지 않은 옷이 좋겠어.” 영운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현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패션에 대해서는 완전한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영운이 생각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현태의 패션 감각이라는 것은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똑같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더우면 소매를 걷고 추우면 외투를 걸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점장은 마침내 현태의 옷 사이즈를 재는 일을 끝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젊은 분이니까 이런 정장풍의 옷도 어울리실 것 같군요.” 그러면서 점장은 벽에 걸려있는 웃옷을 몇 개 내려 그들 앞에 펼쳐보였다. 영운은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현태에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색이 뭐더라?”
“보라색.” 현태가 대답했다.
“그건 안 돼. 미친놈처럼 보일 거라고.” 영운은 현태를 보지도 않고 되받아쳤다.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영운은 웃옷들을 하나씩 집어서 현태의 상체에 대어보고 가격표를 확인했다. 현태는 그저 마네킹처럼 서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영운이 옷을 고르는 동안 현태는 가게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주황빛 색깔이 나는 흰색 전구였다. 그런 색의 빛이 옷가게에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점장이 조명 설정이나 배치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빛이라는 것은 늘 현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어떤 색깔을 하고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든, 빛은 그의 감정을 오만가지 색깔로 파도치게 했고 어떤 때에는 파문조차 없는 깊은 늪처럼 만들기도 했다.
“친구 분 옷을 대신 골라주시는 건가요?” 점장이 영운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 친구한테 자기 일을 맡기면 끝이 안 나거든요.” 영운이 현태와 웃옷을 번갈아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현태는 지금 그들이 누구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냥 넋이 나가있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나무 위에 앉은 타조를 상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태가 생각하기에 타조라는 것은 키가 크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키가 큰 나무와 잘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조가 나무를 탈 수 있는 지 어떤 지는 현태의 지식 밖의 일이었다. 아무튼 현태는 마지막으로 타조를 봤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 조류의 머리가 어떻게 생겼었는지에 골몰하고 있었고, 그래서 점장과 영운이 자신에 대한 뒷말을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봐, 이거 어떤가?” 영운이 마침내 웃옷 하나를 골라들고 현태에게 물었다.
“응?” 현태는 드디어 타조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래, 괜찮네.” 그는 굉장히 건성으로 말했다.
영운이 고른 것은 약간 남색이 도는 어두운 빛깔의 정장풍 재킷이었다. 더블 버튼으로 앞을 잠글 수 있게 되어있었고, 봄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을 정도의 두께였다. “그럼 이걸로 하지.” 영운은 가격표를 다시금 확인하며 말했다. “그리고 셔츠. 셔츠는…… 흰색으로 사이즈만 맞으면 되겠지.”
“그래.” 현태의 말이 유난히 짧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는 오랜만에 거리를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거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고, 그 숫자는 현태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피로를 느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얼굴에는 온갖 난해한 흔적과 상대에 대한 조롱들이 지뢰처럼 숨겨져 있는데, 현태는 그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까닭이었다. 그는 사람의 낯짝을 보면 상대의 거의 모든 페르소나와 트라우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면 마치 상대의 상처투성이 인생이 현태의 영혼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 했고, 누구나 그런 일을 겪는다면 필연적으로 기진맥진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태가 종종 비이성적으로 화를 낸다는 것은 전에도 설명한 바가 있다.
“셔츠를 너무 오래 입으셨군요.” 점장이 현태에게 말했다. 정말로 현태의 셔츠는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낡아서 깃은 전부 닳았고, 곳곳에 피와 물감 얼룩이 가득했다. 셔츠에 묻은 피가 붉은 물감 얼룩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네, 이건……―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끌었다.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며 무어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럽죠.” 현태가 대답했다. 굳이 냄새도 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자주 세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셔츠는 이걸로 하자고.” 영운은 벽에 걸린 수많은 셔츠들 사이에서 하나를 집어서 들고 오며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옷깃 안쪽에 적힌 사이즈를 확인했다. “이게 이 친구에게 맞는 치수인가요?” 영운이 점장에게 물었다.
“네. 딱 맞는 걸 골라오셨군요.”
“그럼 이제 바지를 골라야겠군!” 영운은 만족한 얼굴로 크게 말했다. “방금 고른 재킷과 어울리는 정장 바지면 뭐든지 좋은데요.” 그가 점장에게 말했다.
“마침 짝이 맞는 바지가 있죠.” 그렇게 말하며 점장은 가게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여전히 피곤한 눈동자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운아, 난 피곤해.” 현태가 거의 신음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보여.”
“오늘은 아무래도 저녁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아…… 하지만 화실에는 들리는 게 좋겠지. 왜냐하면, 지금 집에 가서 잠들어버리면 분명 새벽에 깨어날 테니까. 새벽에 깨는 건 좋은 일이 아냐. 난 또 아무도 없는 거리를 몇 시간씩 배회하면서 영원히 찾지도 못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겠지.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 즈음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절망해서 마구 화를 낼 거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집에 와야 할 거야.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그래, 끔찍하고말고. 게다가 밤에는, 밤에는 수없이 많은 달이 뜨지. 그건 내 영혼에게 안 좋아. 왜냐하면 달이 뜨지 않는 시간을 저주하게 되거든.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 취해있지 않은 시간을 저주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 아무튼 그래. 난 너무 피곤하지만, 쇼핑이 끝나면 너와 함께 화실에 가야겠어…….” 현태는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갑자기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영운은 꽤 놀라워하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태가 하는 말의 반 정도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꽤 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점장이 정장 바지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이게 그 재킷과 맞춤옷입니다.”
“그래, 한 번 입어보지 그래?” 영운이 현태에게 말했다. 현태는 알겠다고 말했고, 점장은 그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현태는 재킷과 셔츠, 바지를 들고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고, 사방이 거울이었다.
전신 거울을 앞에 두자 그의 눈에 머리를 세련되게 깎은 현태가 들어왔다. 현태는 한동안 애매모호한 기분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야수의 눈동자 같았고 기분 나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꾸미고 연기를 해도 그의 머리가 돌아있다는 사실이 눈에서 흘러나왔다. 흠, 하지만 그것은 현태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현태만큼 남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광란의 감정들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몸을 씻고 머리를 깎고 옷을 새로 해 입는 것만으로도 그가 모두를 속여 넘길 수도 있었다. 거의 완벽하게 말이다. 현태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자 거울에 흉터 자국 가득한 그의 몸이 드러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흉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 보여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옷을 전부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이거 보게, 누군지 못 알아보겠군, 현태!” 영운이 현태의 모습을 보고 과장되게 외쳤다. 점장은 그의 옆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하지만 그 옷은 그림 그릴 때는 입지 마. 분명 물감이 묻어서 지저분해질 테니까.”
“알겠어.” 현태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다시 갈아입고 나와. 계산해야 하니까.” 영운이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탈의실로 되돌아갔다.
영운은 점장과 마주보면서 말도 없이 웃었다. 그는 퍽 만족스러웠다. 이제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들 앞에서 현태를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현태는 영운이 키우는 야생 동물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영운은 현태의 이상성과 광증을 아껴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운은 현태에게 밥을 사주고 옷을 입히면서 한 마리의 아주 귀중하고 희귀한 짐승을 키우는 기분이었고, 그것이 설령 우정의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영운은 현태에게 거의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고 그를 먹여살려주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현태는 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영운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현태는 이미 완성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집착이나 욕심도 없었고, 그도 자신이 쓰는 캔버스나 물감 따위가 전부 영운의 돈으로 사들인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현태는 명예욕도 없었고 미래지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릴 뿐이었고, 영운은 가끔씩 현태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 그림들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화실에 쌓여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영운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현태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불만이 없다기보다는, 아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 하에서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것이다. 현태는 원래의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영운에게 새로운 옷들을 건네주고 현태는 가게 현관에 가 기댔다. 영운은 계산대에서 점장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가 다섯 장은 넘게 나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 현태는 마음이 아팠다. 왜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면서 영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 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그가 스스로 담배를 사는 일은 없었다. <오늘 그 소연이라는 소녀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소연을 기다리는 이유라고는 오직 담배 한 개비, 그것뿐이 아니던가.
영운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양장점의 이름이 인쇄된 종이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현태에게 이제 가자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날 믿어. 그 지저분한 셔츠를 벗고 이 옷만 입으면, 너는 희망이 있는 훌륭한 젊은이처럼 보일거야.”
그거 잘 됐군. 현태가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작게 얘기한 것은 심정에 어떤 불편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넌 나를 위해서 돈을 너무 많이 써. 그게 나에겐 슬프게 느껴지는데.” 현태가 걸으면서 말했다.
“아, 신경 쓰지 마. 넌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영운은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당사자가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실제로 내가 그 점을 걱정한다고 해도 어떻게 할 도리도 없으니, 영운의 말대로 해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돈을 벌어본 것이 언제였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 한때 내게는 부모가 있었고, 그들이 나를 길렀지. 그리고 내가 거리로 나온 뒤로는, 가끔 사람들이 내게 돈을 던져줬고, 얼마 안 가 영운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지…….> 그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말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도 곧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영운은 현태가 비틀거리면서 걷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곁에서 걷고 있었다. 현태의 발걸음을 보기만 하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망가져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옛날에는 이런 친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운이 굉장히 모호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도 젊음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 아마도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누구나 신에게 생명의 숨결을 받고 태어나니까 한때는 기세 좋게 울부짖기도 하는 법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현태를 보면 마치 연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방황하는 정신병자나, 혹은 철학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현태의 오랜 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현태의 기억에도 거대한 공백이 있었다. 사실 현태는 그 기억의 공백에 대해 신경 쓸 정신적 여유도 없었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동굴 같은 다락방, 오렌지 빛으로 떠오르던 아침 해, 칼, 상처, 밧줄, 알약 같은 것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에 몇 개의 달을 보았던 것 같다고 그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들은 마침내 화실에 도착했다. 현태는 거의 죽어가는 사람처럼―혹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계단을 기어 올라갔고, 영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현태는 피로와 환각 때문에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악마들이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온전히 몸의 기억만으로 화실까지 걸어가서 문을 열어젖히고, 쓰러지듯이 아무 의자 위에나 주저앉았다.
“이봐, 현태, 보라고. 나는 잠깐 아버지한테 갔다 올 거야. 할 얘기가 있거든. 그러니까 너는……” 영운이 종이봉투를 현태 옆에 내려놓으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어라고든 말을 끝맺어야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대뜸 현태가 입을 열었다.
“난 최근에 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일이 없는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괴상했다. 거의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대학에 다니면 그렇게 되지. 자기 작품 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 영운이 입맛을 다시면서 얘기했다.
“아.” 현태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몇 가지 안타까운 말마디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그때부터 현태는 반쯤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음악처럼 울려 퍼졌고, 어떤 늘어지는 발라드가 다리가 다섯 개 달린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는 듯 했다. 현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영운은 발걸음을 죽이며 화실 밖으로 나갔고, 나가는 길에 그는 화실의 전등을 켰다. 덕분에 현태의 뇌내에서는 징이 울린 것처럼 어떤 세찬 쇳소리가 사방을 찢어발겨놓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낮에 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산산이 분해되어 시야에서 뛰놀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현태가 환각 속에서 놀고 있을 때 누군가가 화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연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면서 <아저씨>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의자 위에 죽은 것처럼 쓰러져있는 현태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현태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현태는 숨을 쉬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그의 감은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움찔거리고 있었다. 소연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 채로 현태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갖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한 화실 안을 맴돌며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 머리를 잘랐네. 까딱하면 못 알아볼 뻔했어.> 소연이 생각했다. 왜 머리를 자른 것인지, 누구 돈으로 자른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현태를 깨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화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창가에 놓인 이젤 위의 그림을 발견했다. 영운과 함께 화실을 나서기 전까지 현태가 그리고 있던 그림이었다. 거의 채색이 되어있지 않았지만 푸른 색조의 바탕색이 깔려있었고, 유화의 거친 감각 속에 어떤 원시적인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소연은 한동안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곧 옅게 웃음을 띠면서,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마음에 드는데.”
6. 위장된 욕망들에 대하여
현태가 깨어났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사방이 어두웠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태는 손을 뻗어 어둠 속을 더듬어보았다. 모노륨 장판 특유의 잘 미끄러지지 않는 촉감이 손에 닿았다. 그제야 현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그는 어제 비몽사몽간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쓰러져 잠든 것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일어나서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켜자 창백하고 지저분한 방이 깜빡거리며 나타났다. 현태는 여전히 잠에 취해 정신이 깨끗하지 못했고 방안의 역한 곰팡이 냄새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불이 방 한쪽 구석에 제대로 접히지도 않은 채로 쌓여있었고, 책상 위에는 손목시계가 너부러져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서 손목에 찼다. 열두 시 사십오 분. 오후였다. 책상 옆에는 종이봉투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어제 영운이 사준 옷들이 들어있는 봉투였다. 현태는 자신이 그것을 들고 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분명 화실을 나오기 전에 영운이랑 무슨 말을 했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군. 그래, 그리고 소연이라는 아이도 있었지. 그 아이가 왜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있었어. 그 증거로…… 봐라, 내 주머니에 담배가 한 개비 있군……. 그러면서 현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잠에서 좀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담배를 피워야겠어. 담배를 피우면 잠이 조금 깨겠지. 하지만 나는 라이터가 없는데. 이런, 라이터가 없어. 우선 나가봐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그는 먼저 거울을 보았다. 머리를 깎은 자신이 보였다. 자는 동안 자신이 머리를 잘랐다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순간 거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못 알아볼 뻔했다. 평소보다 훨씬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자고 일어난 직후인데도 머리칼이 산발이 되어있지는 않았다. 하기는 머리가 까치집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신경이나 썼겠느냐만, 아무튼 그랬다. 현태는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에 내팽개쳐져있는 슬리퍼가 보였다. 아마도 현태의 것이었다. 현태는 복도로 내려가서 슬리퍼를 신고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있었다. 라이터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돌과 나무를 가지고 불을 피우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태는 우선 연립주택을 나와 골목거리에 발을 디뎠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그렇지, 어제가 수요일이었다. 현태가 중얼중얼 읊어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라이터를 빌려야 했다.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에 돈을 쓰기에 현태는 너무 가난했다. 그리고 담배도 한 개비밖에 없는데, 뭐 하러 라이터를 산단 말인가. 그는 절약정신이 있었다. 현태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큰길로 나갔다. 큰길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자는 피해야겠어.> 현태가 생각했다. 그것은 옳은 생각이었다. 현태의 경험에 따르면 여자들은 낯선 남자에 대해 비이성적일 정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낯선 남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현태에 대한 공포일지도 몰랐지만, 여하간 말을 걸 상대로 여자는 좋지 않았다. 게다가 비율로만 따져 봐도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여자보다 많을 것이었다. 기껏 말을 걸었는데 라이터가 없다고 하면 실망스럽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태는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행색이 초라한 누군가가 라이터를 좀 빌려달라고 하더라도 겁에 질리지 않을만한 사람 말이다. 적당한 차림을 하고, 나이가 좀 있으며 친절해 보이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낯모르는 타인에게 담뱃불을 좀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현태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워낙에 선행을 하기 힘든 시대다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들 바빠 보였고 걸음이 빨랐다. 현태는 삼 분 정도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라이터를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서 들어가며 대뜸 외쳤다. “실례합니다!”
편의점 안에는 젊은 남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현태를 보더니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현태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차분한 목소리로, 최대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을 꺼냈다. “여쭐 것이 좀 있는데, 사실 전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점원은 현태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제게 지금 담배가 한 개비 있는데, 안타깝게도 라이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을 좀 빌려야합니다. 만약에 당신께서 담배를 피우시고, 또 라이터가 있으시다면, 불을 좀 빌려주신다면 감사하겠는데…….”
점원은 웃었다. 다소 당혹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직업상 모든 손님들에게 친절해야했고, 또 운이 좋은 것인지 그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다. 점원은 기꺼이 라이터를 빌려주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불을 붙이셔야 합니다. 점포 안은 금연이거든요”
“아!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현태는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재빨리 점원에게로 돌아가 라이터를 돌려준 후에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가게를 나와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는 담배를 거의 하루에 한 개비밖에 피우지 않았는데, 덕분에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니코틴이 뇌 안에서 날뛰고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군. 아직 이르긴 하지만 화실 열쇠는 나에게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리는 그림을 어서 완성하고 싶어. 그러니까 그 그림말이다. 어두운 파란색이고 언덕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서있는……. 명명하자니 너무 길군.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림에 제목을 붙인 적이 있기나 하던가? 그래, 있었지. 예를 들자면, <나무1>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나무를 그릴 때마다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였지. <나무2>, <나무3>…… 아마 <나무27>까지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늘>은 <12>까지 있었고 <겨울>은 <49>까지 있었다. 그는 작명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제목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그림마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그림의 제목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바람이 불어서 담배연기가 현태의 왼쪽 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왼쪽 눈꺼풀을 감았다. 그는 춤을 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춤을 출 줄 몰랐다. 현태의 뇌는 치명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니코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분간하기가 힘든 것이,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하루에 수십 번은 그런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담배나 술은 일종의 촉매였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담배나 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뇌에서 알코올이나 니코틴, 혹은 헤로인 따위를 생산해내는 방법을 익혀야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일에 재능이 있었다. 현태의 뇌수에서는 늘 뭔가가 부족하거나 과잉되어 있었다. 아, 만약에 그가, 좀 더 즐거운 일을 상상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일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안에 갇혀있는 미친 고릴라나 다름없었고, 아직은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현태는 화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 하지만 나는 구속되어 있지는 않아. 왜냐하면 내 손에 열쇠가 들려있거든. 다만 바깥세상의 혼돈과 무차별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부조리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지. 나는 사실 무언가를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내 생각만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고 있지. 그들의 양심과 선의라는 것은 스스로 채운 수갑 같은 거야. 스스로라는 점이 중요하지. 그렇지만 대개, 그들 자신의 수갑을 풀 수 있는 것 또한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 나는 잊어버리지 않았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내 안의 악마 같은 광증들과 아노미 상태에의 향수를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나의 빈약한 이성을 인지하고 있단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약해서 자꾸만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거든. 하지만 언젠가, 만약 일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 그 이성마저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것도…… 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태는 화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담배는 다 피워 필터밖에 남지 않았고, 그는 꽁초를 길거리에 집어던졌다.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몇몇의 학생들을 보았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들을 곁눈질했고, 학생들은 현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듯이 그를 지나쳤다. 현태는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웃었다. 불분명하고 모호한, 어떤 유쾌한 상태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현태는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억제된 힘들이 말이다. 그는 목이 말랐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현태는 2층의 화장실로 가서 수도를 틀고 입을 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치 몇 십 년 동안이나 목말라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는 수도를 잠그고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별안간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어있는 단 한 조각의 피지도 남기지 않고 전부 비누칠을 해서 씻어냈다. 그리고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거울을 마주보았다. 현태는 가끔씩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말했다. “너는 아주 머리가 좋아.”
“넌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아, 하지만 그건 비단 네가 명석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다행히도 너는 아주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태어났지. 마치 가죽이 전부 벗겨진 갓난아기처럼. 그래서 너는 알 수 있는 거야. 그렇지, 너는 알 수 있어……. 너는 이십…… 몇 년간 그것들을 계속 되새기며 살아왔고, 마침내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지. 그럼. 물론이야.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고말고……. 그래서 너는 어떤 우연을 빌미삼아 계획을 하기 시작했지. 네 인생 최초의 계획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현태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게 뭐지?”
현태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한 손을 거울에 부딪치면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게 뭐냔 말이야.”
그는 웃고 있었다.
얼마 뒤에 현태는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바짝 말라붙어 있었고 입 꼬리에서는 구역질 같은 웃음기가 비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소 비척거리면서 화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이제야 나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이전까지의 과거는 모조리 엉망으로 뭉쳐진 진흙덩어리 같았지. 분간할 수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하지만 목표가 생긴다는 것이 시간을 파악하게 해주지. 나는 토요일을 기다리고 있고, 그 후의 나날도 기다리고 있어. 그래서 나는 이제 시계를 보고 날짜를 파악하며 하루하루를 계획하지 않는가? 이것이 그들처럼 된다는 것이지.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내 시간을 위해서, 그림을 그려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현태는 창가에 놓인 이젤 앞에 앉아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채색이 필요했고 더 많은 물감과 절제된 감정이 필요했다. 현태의 돌아버린 머리가 무언가에 가장 집중을 할 때는 그림을 그릴 때뿐이었다. 그는 억지로라도, 안 된다면 허벅지에 페인팅 나이프를 박아 넣어서라도 폭죽처럼 터져대는 상념들을 가라앉히고 가장 간결하고 결정화된 영감만을 남겨 놔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감이란 늘 광기 속에서 나오기 마련이라서, 광기라는 파도에 휩쓸리면서 어떻게든 수면 위에서 헤엄을 치려는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야했다. 그리고 집중…… 그렇다. 집중을 해야 했다. 해일 같은 파도를 가라앉히고 수면을 잔잔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내키는 대로 그 수면 위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했다. 설령 발밑에서는 거대한 아나콘다 같은 해류가 굉음을 내면서 꿈틀거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것은 광증과의 격투였다. 공수병에 걸린 야수처럼 날뛰는 광기를 붙잡아서 팔다리에 못을 박고 칼로 배를 갈라 조용히 박동하는 심장을 꺼내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일이 늘 계획한 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괴성을 지르고, 뇌에서 엔도르핀을 분비하기 위해서 자해를 하고, 그마저도 안 될 때에는 창문 밖을 향해서 광신도들이 방언을 하듯이 욕설을 마구잡이로 내뱉다가 좌절하여 의자 위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그에게는 다시 힘이 돌아 붓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현태는 왜 자신이 그런 험악한 꼴을 보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욕망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든 인간은 죽거나 혹은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생겨먹지 않았던가. 그는 ―적어도 지금은―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야만 했고, 그는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그것은 병적인 집착이었다. 왜냐하면 결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그렸고, 그 뒤에 또 그렸고, 그리고 또 그렸다.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도 현태는 늘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항상 시간이 넘쳐흘렀고 그의 광증은 분출구를 찾아서 몸속을 사납게 날뛰었다. 미술이 분출구가 되었냐고? 글쎄, 그건 확언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광기의 승화를 돕는다고 말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방도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광증은 <무언가를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현태는 십 수 년 동안 계속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의 병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 그리는 기술이 좋아질수록 현태는 더욱 더 체계적으로 미쳐갔다. 그의 광증은 점점 몸집을 불려갔고 힘을 키웠으며, 혼돈으로 가득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이 되어갔다. 언젠가 그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일조차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림에 대한 현태의 집착은 애당초 광기의 산물이었고 악마의 선물이었다. 그 광기가 너무 강해져서 현태가 더 이상 <미쳐있는> 일 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미친다면, 그림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다른 무언가로 옮겨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 그림을 그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신문에서 간첩들의 비밀 메시지를 알아내는 일이나 별로 다를 바도 없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외경심은 그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영운에게 동창회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 이상한 외경심을 이용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비열한 생각이었지만 현태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애당초 그의 삶부터가 비열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든 들러붙어 빈대처럼 지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능력자의 삶. 그는 고귀함을 따지기 이전에, 고귀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 한창 그림을 그리던 현태가 갑자기 외쳤다. 그러더니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고, 가끔씩 자동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말하자면 유쾌했다. 왜냐하면 현태가 생각하기에 그의 그림은 잘 되어가고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기대가 있었다. 자신의 유쾌하면서도 이상한 삶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말이다. 사람과 만나는 것은 두렵고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기회들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어떤 형태로 고착시키느냐에 대한 기회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다. 외경해야할 것은 그녀였다. 완벽했던 그녀. 웃는 모습이 모든 선하고 옳은 것들의 상징인 듯 보였던 그녀. 현태의 일그러진 정신과는 정반대로, 가장 온전하고 수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현태로서는 늘 경외할 따름이었다.
“하하!” 현태가 웃었다. 그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공포를 극복했다. 어떤 끔찍한 사건이 그에게 덮쳐온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견딜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성조차 그의 편이었다. 그는 무작위하게 떨어지는 불평등을 웃어넘길 자신이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게 돌아가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그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세상이 돌아가는 혹독한 꼴을 즐길 수도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전부 유쾌한 일이리라고, 현태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현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화실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처음부터 인간의 편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과, 양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벌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노미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아노미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양심으로 끝까지 그것에 대항하면서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지던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엄청난 사고의 에너지를 담고 있지만, 우주의 무작위성에 비하면 그것은 개미 새끼의 발악과도 다를 것이 없다. 빗방울은 쏟아지고, 심술궂은 권력자의 무자비한 주먹이 그들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진다. 그것을 오히려 이용할 줄 알게 되면 오히려 세상의 작법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신의 손으로 세상의 법칙 없는 혼돈을 가중한다면…….> 현태는 킬킬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즐거웠다. 모든 일이 그의 예상대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이란, 아무런 규칙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야말로 그의 예상대로 흘렀다. 현태는 마른기침을 토하듯이 벽을 보고 마구 웃어댔다. 기쁨이 그의 내면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는 좀도둑이나 회사원이 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사회도덕의 정반대에 있는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위대함은 무작위성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고, 마침내 벽에 머리를 박아대기 시작했다. 통증도 쾌락으로 느껴졌고 인생의 모든 가능성들이 반(反) 소시민적인 희망으로 느껴졌다. <우리에겐 희망이 넘친다.> 현태는 벽에 머리를 맞댄 채로 생각했다. 찝찔한 혈액이 입안으로 흘러내렸다.
<그렇고말고, 우리는 자유다. 완전한 자유야. 왜냐하면 오래 전에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배에 창을 박아 넣어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던 나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구속된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녀는 어떨까? 그녀는 자신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광증의 끝에서, 세상에 아무런 규칙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규칙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치명적인 자유는 미치광이에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는, 그 아름다운 그녀는 자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나는 그녀가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서, 망각과 환각 속에서 그녀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안티테제의 심벌이 되어버렸으니까. 더 이상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녀가 이름을 갖고 있기나 했을까? 나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나를 별개의 것으로 만들고, 나의 광기를 특정화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뿌리다. 마치 육체와 같이…… 분명 나의 이름에도 흠집이 수도 없이 새겨져있겠지.> 현태는 입안으로 흘러드는 피를 혀로 핥았다. <분명 나에게도 체계적인 과거가 있었겠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말이야. 누구나 그런 시절은 있기 마련이야. 왜냐하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군. 아마도 영혼이나 신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믿음 때문이겠지. 하지만 눈이 잘 보이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 앞에 보이던 세계가 일종의 암막이었음을 깨닫게 돼. 그리고 어떤 암담한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 암막을 찢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비가 내리는 오물투성이 도시가 보이고……> 현태는 벽에서 머리를 떼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창가로 다가갔다. 밝은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현태가 무슨 짓을 해도 반드시 해가 떠오른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듯 말이다. 그는 창가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울증과 절망 끝에 미쳐버릴 듯한 자유와 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지.”
현태는 자신이 평소보다 흥분해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대 때문이었고 희열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닦았다. 손에 피가 묻었다. 그는 그것을 바지자락에 닦아버렸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화실 구석으로 가서 잡동사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현태는 찾던 것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패널 따위를 자를 때 쓰는 짧고 날카로운 단도였다. 그는 주변에 있던 신문지로 그것을 감싼 후에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는 조금 안심했다. 봄의 햇살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고 심지어 나른하게 만들었다. 현태는 이젤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평온한 기분이 그의 가슴 속에서 넘실거렸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었다. 그렇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었다.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 그림의 푸른 바탕색 속에는 과거의 편린처럼 화이트 노이즈가 가득 담겨 지지직거리고 있었고, 윤곽뿐인 사람은 검푸른 나무 밑에 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보랏빛 시냇물을 빠질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생기를 잃은 눈동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현태는 만족했다. 그것은 이제 과거였다.
영운이 돌아왔다. 현태는 의자에 앉은 채로 막 화실에 들어서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찍 왔군.” 현태가 말했다.
“아니, 평소대로 왔는데.”
현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네 시 삼십 분 가량. 그는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군.” <내가 그동안 계속 그림만 그린 것인가?> 현태가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시간을 쓴 것인지 혼잣말하고 흥분하는 데에 시간을 쓴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영운은 가방을 내려놓더니 터덜터덜 현태 옆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젤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보아하니 다 끝난 것 같군.”
“그래.” 현태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제목은 뭐로 할 거야?” 영운이 물었다.
“제목? 글쎄, 모르겠어……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 같은 건 어떨까.”
“괜찮은데. 내키는 대로 해.” 영운은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쁘지 않군.”
“그래? 그거 잘 됐네.” 현태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칼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젤 건너편으로 가서 섰다.
“너 이마는 왜 그래?” 영운이 현태를 보더니 말했다. 그는 현태의 이마에 난 상처와 멍 자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거.” 현태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별 거 아냐.”
“나 참, 머리도 잘라주고 옷까지 사줬는데, 중요한 얼굴을 망쳐놨군. 어쩔 거야?” 영운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됐어. 토요일까지는 낫겠지.”
그럴 리가 있나. 영운은 속으로 말하며 혀를 찼다. 현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는 야생동물이었지만, 그래도 그림은 괜찮군. 영운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딘가에 출품할 수도 없지. 현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림의 성질 자체가 말이야. 늙고 가족이 있는, 그러한 심사위원이나 기성 화가들은 절대로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태의 그림은 어느 것이던 간에 보는 사람을 다소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딱히 그가 그리는 그림의 형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태의 형식은 매우 클래식하고 고전적이다. 그의 인간성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색상 선택, 선의 흔들림, 구도라든가 모든 것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분이 나쁘다. 마치 보는 사람의 《양심》을 위협하는 것처럼.>
영운은 현태에게 있어 훌륭한 비평가였다. 비록 영운이 현태에게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거나 비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영운은 늘 훌륭하게 현태의 그림을 <파악>했다. 만약 그가 현태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었다면, 그의 분석력은 더욱 능동적으로 발동하여 현태라는 인간 자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태의 과거는 현태 자신에게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반쯤은 자연적으로, 나머지 반쯤은 인위적으로 지워져있었다. 현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나른했고, 즐거웠으며, 피곤했고, 또 유쾌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현재의 감정밖에 없었다. 현태의 허리를 잘라내면 그 단면에는 나이테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허황된 생각이었고 이제 그의 과거는 완전한 망각 너머에 있었다.
현태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화실 안을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영운은 현태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영운은 바쁜 사람이었지만 늘 현태에게는 관대하게 시간을 투자했다. 현태를 관찰하는 일은 늘 그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다. 시계를 분해하면 어떤 톱니바퀴가 초침을 돌리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현태라는 인간은 너무도 복잡하고 동시에 단순해서 관찰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영운에게 있어 현태가 흥미로운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현태가 늘 자해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의 상처를 확인하거나 벗은 몸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어딘가 다쳐있기 마련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파괴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린다는 것은 며칠만 현태와 지내봐도 알 수 있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미쳤다는> 것.
“오늘은 뭘 할 거야? 이제부터 뭘 할 거지?” 현태가 갑자기 영운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글쎄, 사실은 네 상태를 좀 확인하고 집으로 가려고 했어. 과제가 있거든. 하지만 너, 분명히 밥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무 것도 안 먹었군.” 현태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영운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마치 자신에게 위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널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려고.” 영운이 말했다.
“하지만 애매한 시각인데.” 현태가 다시금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나도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으니까. 너랑 같이 먹으려고 했지. 나가자고. 오늘도 육식을 할 기분이 아닌가?” 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아니, 오늘은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군. 날뛰는 소도 산 채로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현태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운은 그의 과장된 말에 픽하고 웃어보였다.
그들은 식사를 하러 나갔다. 물론, 돈은 영운이 지불했다.
저녁에 소연이 찾아왔다. 영운은 돌아가고 없었고, 현태 혼자 화실에 앉아서 창문 밖을 보면서 낙서를 하듯이 크로키를 하는 중이었다. 현태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소연을 보고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들어서는 소연을 힐끗 보더니, 다시 종이에 연필 선을 긋는 것이었다.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요. 아저씨.” 소연이 발랄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현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어제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잖아요. 살아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어요.”
“아, 그랬지. 그땐 내가 피곤했거든.” 현태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오늘도 그림 보러 왔냐?”
“그것도 있고.” 소연이 말했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얘기도 못 했잖아요.”
현태가 피식 웃었다. “너랑 무슨 얘기를 해?” 그는 여전히 소연에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있었고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소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현태에게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현태가 알 바가 아니었다. 활발하고 행동력 좋은 계집애는 현태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소연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현태를 만나러 왔다. 소연이 현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운과 비슷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희귀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그 그림의 작자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는데 현태가 그 아버지와 닮았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물론 이런 것은 전부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사실 소연의 아버지는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고등학생 딸을 둔 것 치고는 젊었으며, 건강했고 건실한 회사원이었다. 뭐 그런 것은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소연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현태에게 물었다.
“전에 그리던 그림은 어디 갔어요?”
“어떤 그림?” 현태가 되물었다.
“그 푸른색 풍경화 말이에요.”
“아, 그거. 저기, 화실 구석에 있어. 내 그림들 쌓여있는 곳…… 아마 맨 오른쪽에 있을 거야.” 현태가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소연은 현태가 말한 곳으로 걸어가서 쌓여있는 캔버스들을 뒤지더니 그림을 하나 꺼내들었다. 현태가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으로 명명한 그 그림이었다.
“완성하자마자 구석에 처박아둔 거예요?” 소연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준다던가, 화상한테 팔수도 있잖아요.”
“내 그림을 살 사람이 어디 있어.” 현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팔릴 것 같은데.” 소연이 그림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네가 사던가.” 현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는 이미 말했다시피 완성한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애착도 없었고, 빨리 다음 그림을 그리고자하는 욕구뿐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명줄이 끊어질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그것이 낡아서 끊어지면 다른 줄로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재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고로 그는 화상들과도 면식이 없었고, 현태의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영운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소연 정도 밖에 없었다.
“난 돈이 없어요.” 소연이 말했다.
“담배 한 개비에 주마.” 현태가 실실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는 이제 몸을 돌려서 소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쌓아둬 봤자 나중에 버리거나 영운이 가져가기 밖에 더 하겠어?”
소연은 한동안 그림을 들고 가만히 서있었다. 현태가 그토록 완성된 자신의 그림에 애착이 없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이었다. 소연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에 쏟아 붓는 애정만큼이나 자신의 그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현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현태를 이해하려면 그에게 있어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나 창작활동이 아니라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아야 했다. 아무도 내뱉어버린 공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살아있는 짐승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단순히 살기 위해, 어쩌면 무의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소연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녜요. 무슨 작품이든 마땅한 가격에 팔려야 하는 법이예요.”
“아, 그래.” 현태는 같잖다는 듯이 내뱉었다.
“나중에 내가 돈이 생기면 사러 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버리지 말아요. 그리고…… 담배는 그냥 드리겠어요.” 소연이 그림을 내려놓고 현태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현태는 한 손을 소연을 향해 내밀었다. 소연은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 한 개비를 빼내서 현태에게 라이터와 함께 넘겨줬다. 현태는 받아들자마자 그것을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현태로서는 소연의 진지함이 우스울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지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는 남자였다. 흘러가는 구름이나, 갑자기 부는 바람이나, 태풍이나 혹은 지진 같은 돌연하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자연현상 말이다. 그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현태의 꿈은 헛된 것이었고, 다만 그는 최대한 아무런 가치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그때 자신의 뒷주머니에 단도가 들어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이 아직 얌전히 잠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꺼내서 감싼 신문지를 펼쳤다. 단도는 여전히 날이 번쩍이고 있었고 잠든 사자의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그것을 조금 쳐다보다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본 뒤, 다시 신문지로 감쌌다.
“그 칼은 뭐예요?” 소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냐. 네가 알아서 어쩔 건데?” 현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칼을 소지하고 다닌다는 게 불안해 보이는데요.”
“신경질적으로 생각하지 마. 내 기억 속에 항상 함께 있는 것이 단도와 나이프였으니까.”
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현태는 웃었다. 그는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서 그는 신문지로 감싼 단도를 다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몇 번이나 말한 것이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고 운명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고―그것은 굉장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소연을 보았다. 아, 저런 당찬 소녀라니. 분명 그녀의 세계와 현태의 세계는 모든 것이 달랐다. 세상의 구도부터 시작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드는 색깔까지 모든 것이. 그래서 현태는 또 웃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에게는 광증이 필요해.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한 필요조건. 내가 양심을 해체하기 위해서 지난 십 수 년간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그것은 다소 광기의 덕을 보기도 했다. 광기야말로 양심을 해체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 하나지.> 현태는 맥락 없이 생각하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왜 그림을 그리지?”
“그림을 좋아하니까요.” 소연이 대답했다.
“그게 전부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우니까.”
“즐겁다. 그거 좋지. 모든 일은 즐거운 것이 좋아. 쾌락이야말로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단맛이니까.” 현태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는 왜 그림을 그리는데요?” 소연이 순진하게 물었다.
“나도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우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일 자체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지. 나의 모든 광기와 관념을 억제하고 붓질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 그 괴로움이 즐거운 거야. 내가 아직 살아있어도 된다는 기분이 들게 만들거든.” 현태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소연에게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지금 그가 기분이 좋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림이 내 본성을 대체할 수는 없어. 그림은 그냥, 내가 간신히 사람 꼴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일상적 억제제인 것이나 마찬가지지…….”
늘 그렇듯이, 현태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자기 자신의 사유를 더욱 체계화시키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논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연이 그의 말을 얼마큼이나 이해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절반 정도는 이해했겠지. 그는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영운에게는 이야기하지 마. 그 녀석은 또 온갖 상상을 부풀리면서 내게서 칼을 빼앗아가려고 할 테니까.” 현태가 덧붙이듯이 당부했다.
“알았어요.” 소연은 그때까지 들고 있던 그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소연이 간단하게 수긍하는 것을 보고 현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상처가 아팠다. 그러나 문제는 벗겨진 표피가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미스터리였다. 그는 지금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그의 주변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음악소리는 오히려 현태의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뭐였더라. 그래, 아마도 그 밴드였어. 비치 보이즈였던가…….> 그러나 아무런 음악소리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현태가 듣는 것은 왜곡된 통증이었다. 소연은 머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현태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소연이 물었다.
“아니, 어디서 동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데…….” 현태가 혼란한 채로 대답했다.
“난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요.”
“어쩌면 오늘 너무 오래 깨어있었던 걸지도 몰라…… 내가 피곤하다는 증거일 거야.” 현태는 한숨을 내쉬면서 발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괴상한 멜로디와 동물 울음소리 따위가 울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아아아!”
느닷없이 현태가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소연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현태에게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오만상을 찌푸린 현태의 표정을 보면 무슨 말을 하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제기랄! 머리가 아파! 머리가 아프다고!” 현태가 잔뜩 성이 난 채로 눈을 감고 외쳤다. 그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소연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현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화실 안을 맴돌고 있었고, 여전히 입술 사이로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현태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때, 현태는 갑자기 소연을 향해 분노가 섞인 소리를 질렀다.
“나가!”
그것은 증오와 혐오가 가득한 노성이었다. 왜 현태가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소연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는 점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태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고, 머릿속의 고통과 파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나가>라고 말했다. 소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현태를 바라보며 슬금슬금 화실 문 쪽으로 향했다.
“나가라고!” 현태가 더욱 크게 외쳤다. 소연을 노려보는 그의 눈은 석유에 불을 붙인 것 같았고 온통 핏발이 서있었다. 소연은 마침내 화실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대로 도망치지는 않고, 문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소연이 나가자 현태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그르렁거렸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있었고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망할 자식! 또 방해질이야! 오랜만에 내 생각대로 일이 풀려간다고 생각했는데, 네놈은 언제나 그렇지!” 현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소리 질렀다. 그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굉장히 화가 나있었고, 현재의 상태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현태는 성큼성큼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몇 시간 동안 그려온 수 십 장의 크로키를 들고 발기발기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온통 조각난 종이들을 밖으로 흩뿌리며 외쳤다. “네가 바라는 게 이런 거지? 그렇지?”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로 웃고 있었다. 현태는 계속 머리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자신을 방해하는 <그>에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일종의 이상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고, 그곳에 쌓여있는 자신의 그림들을 힘껏 걷어찼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놈 방식대로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두고 보라고……” 그러면서 그는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신문지를 벗긴 뒤에 허공에 대고 마구 흔들어댔다. “나한테는 칼이 있어!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 생각대로 해결할 거란 말이다! 하! 하!”
현태가 이러한 일련의 미친 짓을 하면서 내는 소음들을 소연은 문밖에서 전부 듣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태가 그렇게까지 발광하는 것을 본 것은 그녀로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인생은 내 거야! 난 자유라고!” 또 한 번의 외침이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고, 또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현태가 안에서 가구 따위를 상대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연은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난감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현태는 미쳐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를 <미쳤다>는 단순한 어휘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그에게는 혼란한 감정이 있었고 왜곡된 신념이 있었으며 파괴적인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떤 믿음이, 그리고 분노가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유쾌함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반죽처럼 뒤엉켜서 하나의 혼돈을, 현태라는 인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연으로서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현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7. 행동주의에 대하여
한 차례의 광란이 있은 후, 현태는 오히려 굉장히 얌전해졌다. 다음날 영운이 화실에 왔을 때, 그는 엉망이 된 화실 꼴을 보고 놀랐으나 현태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사실 간간히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태의 파괴적인 욕망은 주로 바깥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향해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부수는 일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영운은 현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고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물론 현태도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항상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이성이 따라갈 수 없는 난해하고 복잡한 관념의 덩어리가 있어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다보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나타난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물론, 사후에 이성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분석해볼 수는 있었다. 현태의 기저에 깔려있는 믿음들이나, 감정에 대한 이해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러나 현태는 굳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보다도 뒤떨어져있었고, 광기를 앞설 수도 없는 것이었다. 현태는 감각적이며 순간적인 인간이었고, 체계성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감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달군 냄비와 같아서, 한 차례 발산하고 나면 거짓이었다는 듯이 식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의례적으로 영운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화실을 망쳐놔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영운은 현태가 그렇게 순순히 사과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 그는 현태의 본성적인 <얌전함>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화실을 정리하고 부서진 물건들을 소각장에 내다버렸다. 영운은 현태의 그림 몇 점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현태는 항상 그렇듯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바로 전날 완성한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은 소연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덕분에 현태의 주먹과 발길질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운은 더 이상 현태에게 잘못을 묻지 않았고, 현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 일을 약 한 시간 만에 잊어버렸다. 그들은 평소처럼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현태는 주로 스케치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집중력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하루 종일 화실에 앉아서 현태는 수십 장도 넘는 스케치들을 그려내곤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러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을 텐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현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감정을 안정시키면서 그림을 그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기억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 방식에 대해서 미학적인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현태의 주변엔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현태의 그림은 거의 대분이 고전적인 풍경화나 정물화였지만, 동시에 추상화이기도 했다. 가끔씩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관념들이 붓 끝에서 드러나 그림의 어떤 부분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미술사조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것들을 인지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저녁마다 소연이 찾아왔다. 현태가 이따금 발광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녀가 여전히 찾아온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소연은 뱃심이 있는 아이였고 자신이 흥미를 가진 대상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애착을 보이는 타입이었다. 현태는 그날 동물 울음소리를 들은 후로 소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다소 껄끄러웠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연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하고 무관심한 것이었다. 소연은 화실에 오면 늘 그랬듯이 현태에게 담배를 주고, 그가 그날 그린 스케치들을 훑어보곤 했다. 현태는 소연이 그러든 말든 별다른 관심도 없었지만 질리지도 않고 계속 찾아오는 이유에 호기심을 느끼기는 했다. 자신의 그림이 타인에게 흥미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그로서는 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무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 금요일 저녁이 되었고, 현태는 소연에게 받은 담배를 피우면서 무색조의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다만 그날은 영운이 늦은 시간까지 화실에 남아서 현태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운 현태는 꽁초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진 뒤에 기지개를 켜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태가 그러는 것을 영운은 아무 감상도 없이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야겠어.” 현태가 말했다.
“그래.” 영운이 연필을 쥔 채로 대답했다.
“내일이지?” 현태가 물었다.
“맞아. 내일이야. 잘 기억하고 있군.”
“어디로 가면 돼? 몇 시까지지?” 현태가 연이어 물었다.
“그냥 내일 오후 네 시까지 화실에 있어.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넌 교통비도 없으니까 내가 약속장소까지 데리고 가야 하잖아.” 영운이 현태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현태는 여전히 창밖에 눈을 둔 채로 대답했다.
해가 진 거리는 남색 어둠과 노란 조명이 뒤섞여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태는 피곤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밖이 어두웠기 때문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겹쳐보였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창문 밖이 아니라 창문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바로 내일을 위해 준비되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과 희열이 불꽃의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현태는 더 이상 흥분해있지 않았고, 겉보기에는 차분해보였다. 아마 근 몇 개월 사이에서는 지금의 현태가 가장 정상인처럼 보일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구역질이나 조소가 달라붙어있지도 않았고, 눈동자는 녹이 섞인 물처럼 침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현태는 충분히 바빴다. 그는 원래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늘 다소의 계획은 필요한 법이었다. 현태는 창문에 비치는, 슬며시 웃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해?” 영운이 물었다.
“나도 잘 몰라.” 현태가 대답했다. 그는 정직했다. 그러면서 현태는 웃는 얼굴로 영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그렇지?”
영운은 현태의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무어라고든 대답을 해야 했다. “그래…… 아마도.” 영운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현태는 왜 갑자기 일반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을까?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가 말이다. 왜 그는 순순히 머리를 깎고 새 옷을 입었을까. 누구를 속이려고? 현태에게 어떤 계획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비열한 음모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그의 본성 자체가 불분명했다. 현태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영운조차 현태의 광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현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영운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현태 자신도 <진짜 얼굴>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지 아닌지 모를 수도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력이 그다지 대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관심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태의 경우는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생활 속에서 너무 많은 페르소나를 생산하는 바람에 본성이 혼돈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현태의 경우에는 본성이 광기 속을 헤매다가 그 늪에 녹아들어 너무 광범위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다>고 했던 까뮈의 말은 옳았다. 현태는 그 어떤 사람도 아니었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참된 얼굴이 어디로 흘러가버렸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이제 보다 복잡한 욕망과 충동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불안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긴장하고 있어?” 영운이 현태에게 물었다.
“조금은 그럴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런 가면을 쓰고 아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니까.” 현태가 천천히 늘어지는 어조로 대답했다.
“가면이라!” 영운이 과장되게 반응했다.
“그래…… 가면. 하지만 가면도 엄연한 얼굴이야…….” 현태가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렸다.
“그 친구들은 여전히 널 알아볼 거야. 넌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으니까.”
“하!” 현태가 비웃듯이 내뱉었다.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현태의 기억으로는, 옛날에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남들에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고. 현태는 그 충고를 훌륭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기억에 잘 남는 인물이 되었다.
“아무튼 가야겠어. 내일을 위해 잠을 자둬야지.” 현태가 그렇게 말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먼저 간다.”
“잠깐, 나도 나가지. 같이 가자고.” 영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않고 문 앞에 서서 영운이 짐을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나왔다. 영운이 화실 문을 잠갔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갔는데, 위층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현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영운은 그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현태는 자신의 집을 향해 걸었다. 영운이 가야하는 방향은 다른 방향이었지만, 그는 현태를 따라 걸었다. 왜냐하면 현태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봐둬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오늘의 현태는 뭔가가 달랐다. 어떤 차분한 결의 같은 것이 그의 광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이 보였다. 현태는 언제나처럼 비척거리며 걸었지만, 그의 눈은 평소처럼 땅바닥에 박혀있지는 않았다. 그는 가늘게 뜬 눈동자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얼굴들 속에서 어떤 암시를 찾아내려는 듯이 말이다.
“왜 동창회에 나갈 생각을 했지?” 영운이 현태의 곁을 걸으면서 물었다.
“왜? 왜냐고? 글쎄…… 아마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현태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결해? 무엇을?”
“내 인생 전부를.”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영운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는 현태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같이 웃을 따름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어떤 골목 앞에서 헤어졌다. 영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현태는 자신의 작은 방을 향해 걸었다. 그는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유쾌한 피로였다. <내일 그녀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단도를 쓰다듬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관짝>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잠이 들었다.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새까맸다. 마치 폭풍이 일어나기 전처럼 말이다.
현태는 어둠 속에서 슬며시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현태는 그런 새까만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둥지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가 누구였는지부터 시작해서, 지금이 언제인지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는 늘 죽음이 그리운 법이다. 망각의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끔찍한 과거들이 폭력적인 햇살처럼 피부를 찌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태는 웃었다. 그는 누운 채로 소리 내어 흐흐거리고 웃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어떤 날인지 그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현태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형광등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불이 켜지고, 현태는 앉은 채로 방구석에 서있는 거울을 보았다. 바지만 입은 채 더러운 이불 위에 앉아있는 자신이 보였다. 거울이 비치는 단색조의 이미지에서 현태는 더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었다.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었다. 가장 명쾌하고 단순한 대답은 그것이다. 끝난다는 것. 물론 무슨 일이든 간에 끝내는 것이 가장 어렵기는 하지만, <끝>이라는 것은 참으로 완전하고 좋은 것이다. 그보다 더 안정된 것이 무어 있겠는가? 그래서 현태는 이 더러운 아침시간이 유쾌했고,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흉터들도 유쾌했으며, 서랍 속에 감금당한 이 세계도 유쾌했다. <모두에게 다 똑같이 주어진 자유 아닌가?> 현태가 히죽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길게 비쳐보였다. 그는 가늘게 뜬 자신의 눈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현태는 책상 위에 너부러져있는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열두 시. <굉장히 오래 잤군! 오랜만에 잘 잤다는 느낌이 든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불안도 없이, 잊어버려야할 과거도 없는 갓난아기처럼. 아, 하지만 그래도 잠을 자고 나면 잡스러운 피로가 남는단 말이야. 완전히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나 본 것이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왜냐하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언제까지고 정신을 잃은 채로 지낼 수 있는데……. 그러나 오늘은 좋은 날이다. 드디어 내 현실까지도 꿈의 일부분이 되지 않겠는가? 흐흐!> 현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상 옆에 놓아두었던 종이봉투를 집어 올렸다. 그 안에는 잘 접힌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재킷이 들어있었다. 현태는 바지를 벗고 그것들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한 번 보았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운은 괜찮다고 했다. 영운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벗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폐와 동전을 꺼낸 뒤에 지금 입고 있는 바지 주머니에 넣었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신문지로 감싼 단도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강렬한 햇빛이 얼굴 위에 쏟아져 내렸다. 요 며칠 사이에 가장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어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현태는 하늘 언저리 어딘가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현태는 기가 죽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향해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나는 당신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을 거야. 그는 당돌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현태는 거리로 나섰다.
우선 몸을 씻자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에 간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목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같은 날 목욕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전에 갔던 목욕탕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사천 원은 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뭔지 모를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카운터에 앉아있던 늙은이가 그곳에 있었다. 현태는 지폐를 몇 장 꺼내서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발을 신발장에 넣고, 로커 열쇠를 하나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로커를 잠그고, 그리고 목욕탕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현태는 먼저 샤워를 하면서 며칠 간 몸에 쌓인 먼지와 기름기를 씻어낸 뒤에 탕에 들어갔다. 그가 첫 입욕자인지 물은 깨끗하고 맑았다. 현태는 한동안 목욕을 즐기다가 다시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지와 셔츠를 걸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을 보았다. 요새는 어디를 가나 거울이 있었다. 현태에게 그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흠, 말하자면, 일종의 농간이지.> 그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다 말린 뒤에 그는 빗질을 좀 하고, 옷을 마저 입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가 좀 넘어있었다. 당장 화실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먹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태가 자발적으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하룻밤 사이에 그라는 인간이 환기되기라도 한 듯이, 현태의 몸은 능동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동전을 짤랑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돈이 얼마가 남았지? 얼마 전에 영운에게 새로 받은 돈이 꽤 남아있을 것이었다. 지폐가 여섯 장 정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세어본 후에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화실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서 식당 따위를 찾았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가? 아니, 없다. 나는 아직 탐미를 할 정도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나는 이제야 육체를 건축하는 데에 성공한 풋내기인 것이다. 당장 뱃속에 쑤셔 넣고 하루 동안 내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할 뿐이다. 딱히 허기가 지는 것도 아니었다. 현태는 굶으면서 지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요즘 들어서는 음식이 인간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조차 느끼고 있을 지경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이든 먹어둬야만 했다. 왜냐하면 현태에게 있어서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힘이 절실한 날이었으니까.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학원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재킷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봄바람은 푸근했다. 흐하하하. 현태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봐라, 이것도 농간이지. 나를 더욱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그는 킬킬거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계속 걸었다. 길을 가다보니 작은 일식집이 보였다. 일식이라, 그래, 간단한 게 좋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태가 들어가자 종업원들이 그를 반겼다. 현태는 싱글거리며 어느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앞치마를 두른 30대 여자 종업원이 물과 메뉴판을 들고 현태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든 것들을 현태 앞에 늘어놓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현태는 메뉴판을 좀 뒤적이더니 종업원을 불러서 고기 덮밥을 하나 시켰다. 그것이 가장 싸고, 또 먹기도 간단해 보였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적에, 현태는 통유리로 된 가게 정면을 내다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다리를 꼰 채 위태로운 자세로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언가 이해하기 힘든 기분이 그의 행동을 대범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가 벌일 일들도 전부, 대범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리 밖을 내다보면서 소리도 없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축복을 받은 것 같다고 느꼈다. 축복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인간이 가고자 하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인 것이다. 확실히 현태는 축복을 받고 있었다. 새빨간 입 꼬리를 말고 있는 광기에게 말이다. 그를 비추는 빛은 광기를 방해하는 것들의 목을 자르는 시퍼런 낫이었고, 통제 불능의 우연이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일본식 밥그릇에 밥과 고기, 계란 노른자, 그리고 소스 따위가 담겨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젓가락으로 휘휘 휘저은 뒤에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틀림없이 그는 유쾌했다……. 그의 날이 선 웃음들이 자꾸만 입이나 눈구멍, 코, 귀 따위를 통해 바깥으로 기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잘 붙잡아둬야만 했다. 왜냐하면, 글쎄, 무슨 극이든 하나의 클라이맥스가 있는 법이니까.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 법칙을 언젠가 악마가 가르쳐준 일이 있다고, 현태는 기억했다.
현태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에 <딱>하는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물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값을 치루고 나왔다. 그는 은연중에 자신이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종업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현태는 지폐를 건네면서 종업원에게 알게 모르게 웃음을 지어보였고, 그녀를 야비한 눈동자로 뜯어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호감의 표시였다. 현태는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 아, 사랑이라! 그것은 굉장히 난해하고 포괄적인 단어라서 사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는 분명히 이 엉망진창인 세계 전부를 사랑하고, 잔인무도하며 난잡하고 무지한 인간들도 모두 사랑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에게 칼이 있었기 때문에.
“흐음.” 가게 문 앞에 서서 현태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는 주머니에 든 동전들을 짤랑거리면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화실로 갈까? 아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런 유쾌한 기분으로 어둑한 화실에나 처박혀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강가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이십 분 정도만 걸으면 작은 강과 다리가 하나 나왔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그런 개천. 현태는 구두소리를 내면서 거리를 성큼성큼 질러갔다. 당당하고 대담한 본새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은 묵직한 금속성의 로큰롤이었다. “왜냐하면, 프로그레시브니 아트 록이니 하는 것들만 듣다보면 우울증에 걸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중얼댔다.
그는 개천에 도착해서 세 시가 넘을 때까지 강가에 앉아 있었다. 가끔 자갈을 집어 내에 던지기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는 내내 현태는 계속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것들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화실에 가자 영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운은 화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태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날따라 영운은 옷매무세가 괜찮았다. 그도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신경을 써서 차려입은 것이다. 현태는 영운을 보고 히죽 웃어보였다. “좋아, 좋아. 지금이 몇 시지?” 현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세 시 사십오 분이었다. “내가 늦지 않게 왔군.”
“그래, 좀 여유 있게 가자고.” 영운이 말했다.
현태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화실을 휘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몇 년이나 이 구석진 곳에서 그림을 그려왔던가? 모든 것이 다 영운의 덕분이다. 내가 굶어 죽지 않은 것도, 겨울에 길거리에서 동사하지 않은 것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말이다. <아, 그래서 물론 나는 영운에게 감사해야하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현태가 누군가에게 변명하듯이 중얼댔다. 그가 화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지금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심각한 변환점이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을―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만나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요 몇 년간 그의 인간관계는 영운과 길 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 얼굴조차 기억하지 않는 부모와의 혈연, 그런 것들뿐으로 매우 단순하고 변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현태의 습성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그는 길 가는 행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면서 다가가 말을 걸 수는 있었지만, 역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호의를 표시하기 시작하면 반사적으로 발을 뺐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경험주의적인 것이었다. 현태의 불행한 과거를 가져다가 그의 그러한 습성을 분석하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가 매우 야트막한 개울만을 건넌다는 점이었다. 그는 깊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았다. 영운은 예외였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영운과의 관계는 굉장히 기괴하고 모순이 많은 것이었고, 사실 그 안에 우정이 있는지 어떤지도 판별할 수가 없었다. 현태가 갖는 인간관계라는 것은 전부가 이런 것이었다. 그는 남들처럼 정통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맞이할 줄 몰랐다. 그것이 또 그의 이상성이었다. 그 점에 대하여 그를 탓할 수도 있지만, 정작 현태 자신은 그러한 자신의 습성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태가 편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난잡하고 혼란투성이인 그의 내면에 타인들까지 발을 딛기 시작한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태는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었고 그를 위한 수단도 있었다. 그의 이상성 위에 건설된 야비한 페르소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를, 과거의 자신까지 통틀어서,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태가 스스로 그렇게 다짐했다.
“그럼 출발할까.” 영운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얼마나 멀어?” 현태가 물었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이십 분 정도…… 별로 먼 거리는 아니지. 다들 도시에 살고 있으니까.” 영운이 답했다.
“아, 그렇군. 생각해보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바로 옆 동네에 있었지.”
“그래.”
그러면서 그들은 화실을 나왔다. “점심은 먹었나?” 영운이 현태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현태가 대답했다.
“그거 별일인데…….”
“기계를 잘 돌아가게 하려면 기름을 쳐줘야지. 그래야 만사가 다 제대로 풀리는 법이야.” 현태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음식을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식사를 거부했지만, 행동력이 필요할 때는 다른 법이었다. 사실 현태는 언제나 자신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죄책감은 이상한 것이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집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현태가 그 편집보다 더 강한 욕망을 갖게 되자 죄책감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욕망은 항상 권력 있는 감정이었다. 현태에게는 그 욕망이라는 것이 뚜렷한 형태로는 그리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 안에서 조종하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광기와 맞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욕망은 광기의 발원지였고, 때로는 광기가 욕망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 치명적인 의지는 마치 한 몸에서 태어난 살덩어리처럼 가까웠고 흡사했다.
그들은 버스를 탔다. 영운이 현태의 몫까지 지불했다. 현태는 자신이 자동차에 타본지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걸어서 이동했고, 교통수단을 이용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그는 멀리 나다니지 않았다. 그의 행동반경은 다세대 주택의 다락방을 중심으로 5km를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변화나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몇 년이나 매일 같이 정해진 일상만을 행해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일상 속에는 늘 충동과 광기가 괴상하고 기이한 일들을 벌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현태의 커다란 틀은 바뀌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광증들조차도 그 <틀> 안에 있었다. 현태가 주기적으로 자해를 하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곡기를 끊는 일들도 전부 그의 정해진 일상이었다.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런 일들이 무엇에 필요한가 하면, 말하자면 그가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다. 현태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현태의 염세적인 면들이 허무주의자의 그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즐기고 있었다. 반드시 즐겁고 유쾌해야만 인생을 즐기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현태는 타락한 수도승처럼 생명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무주의자가 된다면, 나태하고 무한정한 시간 속에서 정신이 썩어버린다면 언제든지 사람은 자살<당할> 수 있었다. 현태는 그것이 싫었다. 구역질이 나도록 싫었다. 자살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들의 특권이지만, 허무주의에게 목이 졸려서 죽는 것은 운명에게 패배했다는 증명이나 마찬가지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에게도 반항의지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시궁창 속의 들쥐처럼 구정물로 온몸을 적신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철학이니 정의니 하기 이전에 현태에게는 자신의 혀가 느끼는 맛들이 더 중요했다. 허무주의자들의 죽음에서는 혀가 썩을 만큼 지독한 맛이 났다. 감상주의적이고 무기력한, 계집애의 눈물 같은 맛이 났다.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자살이라는 것은 보다 완벽한 논증으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것은 운명에게 승리하고 난 뒤에나 나타날 수 있는 철학적이고 절대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운명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래서 초원에 맞불을 놓듯이 운명만큼이나 무작위한 혼돈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가기 위해 미쳐있었고, 미쳐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버스에 탄 채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영운은 현태의 옆 좌석에 앉아있었다. 불현듯 현태는 자신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육체가 있는 까닭에 사람은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덕분에 나는 온갖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하면서 절정을 찾아야한다. 빛이나 물 같은 것들은 얼마나 간단 하냔 말이다. 그저 번쩍이고, 흘러가고……. 대단원에 이르기 위하여 문맥 하나하나를 살피며 발을 디뎌야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나도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런 연극 끝에 맞이하는 클라이맥스가 더욱 만족스러울 지도 모르지. 어린 아이의 심장을 베어 무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운이 그를 쳐다보았으나 어떤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버스 안의 지루한 시간 때문에 현태는 자칫하면 유쾌한 기분을 잃어버릴 뻔했으나, 지나가는 차들의 지붕에 부딪혀 번쩍이는 빛살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기분을 북돋았다. 어쩌면 너무 오랜만에 자동차에 타는 이유로 속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제야 길고 길었던 과정들이 끝나가고, 현태는 문제의 해답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가벼운 기분을 유지하라고 당부했고, 한시도 웃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웃음과 함께 끝나야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현태가 평소 다니던 거리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고 활기찬 거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마천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번쩍이고 젊은이들의 높고 새된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사실 현태는 이런 거리는 질색이었다. 그는 이러한 젊음과 에너지를 보면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는 그저 눈을 비비면서 작게 혀를 찰 뿐이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너무 정신이 없는데.” 현태가 말했다.
“저쪽에 있는 카페에서―그러면서 영운은 거리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모이기로 했어. 그 뒤에 사람이 모두 모이면 자리를 옮길 거고. 걱정 마.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으로 갈 것 같으니까.” 영운이 손을 들어 보이면서 답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지?”
“그래.” 현태가 다른 곳을 보면서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웃음기가 많이 사라져있었다. “벌써 피곤하군.”
현태가 피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평소에 이처럼 멀리까지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현태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너무 게을러지면 안 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것들이 드디어 현실에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평소 같은 생활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 앞으로는 늘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한다!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이다. 나의 자유를 위하여.> 그는 눈을 껌뻑거리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현태는 영운을 따라 화려한 거리의 한 구석으로 따라 들어갔다.
8. 현실과 연극의 경계에 대하여
그들이 카페로 들어가자 카페 한 구석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그들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현태는 거리의 인파 때문에 기운이 빠진 나머지 아무 생각도 없었고, 유지하고 있던 약간의 긴장조차 풀어버린 상태였다. 영운은 그 옆에서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영운을 향해 걸어왔다. 육중한 몸체가 구두소리를 내면서 뚜벅뚜벅 다가왔다. 현태는 남자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영운보다 먼저 눈치 채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 남자는 키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그와 눈을 맞추려면 현태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오랜만인데…….” 현태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영운도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영운!” 남자가 다가오며 외쳤다. 그는 골격이 크고 생김세가 다부졌으며, 스포츠 컷으로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 남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호의적이고 명랑했다. 그 남자는 두 팔을 벌리면서 영운에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이봐, 오랜만이야!” 영운도 그 남자를 보고 웃으며 대꾸했다. 영운은 말하면서 반사적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고, 남자가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현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너 현태구나. 그렇지?”
“그래. 바뀐 게 없군, 반장.” 현태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다. 그 남자가 반장이었다. 전교 일 등을 도맡아서 하던 현태네 반의 반장 말이다. 그는 학생시절에도 이렇게 다부지고 명랑한, 건장한 청년이었다. 현태는 그러한 그를 보면서 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의구심 따위를 느끼곤 했지만, 그것이 적개심이나 질투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갖출 것을 다 갖춘 인간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태가 그러한 인간을 부러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니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반장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에 가끔 현태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여, 전교 일 등!>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관계가 성사되었던 것이다. 반장은 현태를 늘 다소 특이한 인간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성적이나 친구들 패거리 따위로 분류되는 인간이 아니었고, 언제나 이방인 같은 위치에 불안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나 친구관계에 있어서 현태는 공기처럼 가볍고 편한 존재였다. 자칫하면 멀리까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이리 와. 우선 앉아! 너희들이 일 등이야. 제일 먼저 도착했다는 말씀이지.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십오 분 정도 남았지만.” 반장이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말했다.
“그래? 전부 해서 몇 명이 오기로 했는데?” 영운이 물었다.
“열 명 정도.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전부 모일 수는 없었어. 지방에 나가있는 친구들도 꽤 있고. 다들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 말이야. 열 명이나 모인 것도 많이 모인 거지.” 반장이 주절대면서 의자에 앉았다. 현태와 영운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 명이라. 누가 오는데?” 현태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물었다.
“글쎄, 그러니까……” 그러면서 반장은 기억 속의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현태는 다소 불안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왔던 준비들이, 그리고 정신적인 다짐들이 전부 헛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반장은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현태는 <그렇다, 그녀는 그런 이름이었다>고 속으로 뇌까리면서 슬며시 웃었다. “……이렇게. 너희와 나까지 합하면 모두 열네 명이로군.” 반장이 말을 마쳤다.
“그래. 아주 좋은데.” 현태는 희희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상태였다. 카페 안의 점잖은 분위기와, 또 그녀가 확실히 올 것이라는 정보가 현태에게 힘과 안정을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영운이는 학생 때와 별로 차이가 없지만, 너는 많이 달라졌군!” 반장이 대화 거리를 꺼내면서 현태와 영운에게 물었다.
“하!” 현태가 웃었다. 많이 달라졌다고? 그야 그렇겠지.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도록 준비했으니까. “달라지긴, 난 학생 때부터 변한 게 없어.” 여전히 3학년 1반의 정신병자지. 현태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영운이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영운의 말이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현태는 학생 때보다 곱절은 미쳐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는 어제 저녁부터 현태에 대한 무언가가 몹시도 불안했다.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운은 달리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그는 그런 심정으로 현태를 데리고 약속장소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불안한 것은 현태가 종잡을 수 없는 미치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광기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고―물론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이 광기라고 불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영운은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기대로 일렁거리는 상태였다.
그들은 별 것 아닌 얘기를 하며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도착하기 시작했고, 현태는 그 사이에 영운의 돈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사람이 많아져서 테이블을 몇 개 붙여서 앉아야했으며, 오는 사람들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난다고 난리법석이었다. 현태는 노상 웃는 얼굴로 그들과 인사를 했고 가끔은 감격어린 악수까지 나눴다. 어떤 이는 현태가 자신을 누구누구라고 소개하기 전까지 그를 못 알아보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가 모일 때까지 아껴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체로 웃고 있었고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태는 자신이 이러한 패거리 속에 속해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더욱 입 꼬리가 찢어지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현태는 긴장하지 않았다. 유별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의자 위에 앉아서, 카페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아, 그녀가 왔다>라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와서 먼저 여자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현태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다른 모두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동창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태에게도 인사를 했는데, 그 맑은 눈동자에는 정말로 재회를 기뻐하는 감정이 가득해서 현태는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현태구나! 정말 오랜만이네. 졸업하고 다시는 너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군.” 현태는 쓰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현태는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녀는 전혀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현태의 손을―그 병자의 손을!― 맞잡았다. 그 점이 현태에게는 몹시도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얼 알고 내 손을 맞잡는 것이란 말인가? 고작 일 년 나의 광기를 경험한 것 뿐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녀의 특질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나는 그것을 확인해볼 것이다. 이 선한 여왕의 밑바닥에, 어떤 공포의 늪이 깔려있는지를…… 헤헤!
그리고 그녀는 의자를 끌어와서 현태로부터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도착하고 얼마 뒤에 모든 동창들이 모였고, 그들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 것이다. 돼지고기 따위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도 함께 마실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셔본 지도 퍽 오래 됐어.” 현태가 카페를 나서며 영운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술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어. 이상한 주사라도 있는 건 아니지?” 영운이 물었다.
“걱정 마.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현태가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럼, 아직은 때가 아니야.> 현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때라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그 단어를 너무 중의적으로 사용해서 지금 그가 말하는 <때>가 어느 <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현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친구들 무리 사이로 끼어들어가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아직도 그림 그려?” 한 친구가 현태에게 물었다.
“그림? 아, 그럼. 물론이지. 나 미대 들어갔잖아.” 현태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맞아, 그런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어. 학교는 어때?”
“몰라. 때려치웠거든.” 현태가 희희거리면서 대답했다.
“때려치워? 왜?” 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다 이유가 있지. 하지만 별 거 아닌 이야기야. 그리고,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더라고.” 영운이 재료비를 전부 대주긴 하지만. 그가 중얼거렸다.
“현태 너 대학 그만 뒀어?” 여자들 무리에서 함께 걷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물어왔다.
“그래. 그만 뒀지. 몇 년 전에.” 그는 웃었다.
“왜 그랬어. 아깝게. 너 그림도 잘 그리잖아.”
현태는 습관적으로 코웃음을 치려다가 가까스로 막았다. 그는 그때서야 조소가 습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자신을 일반인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방해였다. 너무 냉소적이었고 오해의 여지도 많았다. <물론이지, 그건 인정해야해.> 현태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냉소적인 면들을 고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감출 뿐이었다. 필요한 때에만 말이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현태가 거의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그래, 너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 항상 종이에 그림 그리고 있었잖아. 나한테 한 장 준적도 있는데, 기억 안 나?”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내 그림을 그녀에게 준 적이 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 년 전이라고 해도 나는 나였을 것 아닌가?> 현태가 속으로 중얼댔다.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그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네가 전에 연필로 학교 화단 그렸던 거, 내가 예쁘다고 하니까 네가 줬었어. 정말로 기억 안 나?” 그녀는 여전히 맑은 얼굴로 묻고 있었다. 현태는 난감했고 당황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로 기억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기억에 없어.”
“나 그 그림 아직도 벽에 붙여놨는데.”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또 한 번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군. 현태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현태는 사 년이나 된 자신의 그림 따위는 손톱만큼도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라. 현태는 언젠가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외친 일이 있었다. 마땅히 그는 지금 기뻐하거나 낯을 붉혀야했다. 그러나 현태의 심장 속에서는 여전히 냉각수처럼 차가운 불꽃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날름거릴 뿐이었다. 실상, 현태는 자신이 이제 그녀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현태 앞에서 웃고 떠드는 그 여자는 더 이상 그가 사랑했던 <인간>이 아니라, 해답을 요구하는 수학문제와 같았다. 말하자면 <현태의> 수학문제였다. 답을 찾고 나면 자기만족과 성취감이 몰려오는―어쩌면 탈력감일지도 몰랐다― 그러한 문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태는 자신이 그녀와 어떤 특별한 인간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 기대는 성립될 수조차 없었다. 현태는 어서 이 연극을 마치고 자신이 며칠을 걸쳐 다듬어온 계획을 실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옛 친구들과의 만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그들을 보니 그리움이나 반가움 같은 어떤 감상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추를 매단 채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듯한, 허파의 고통이었다. 그렇다, 고통. 현태가 광기의 문 뒤에 넣고 닫아버린 것들을 그들이 다시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웃음을 잃지 말아야했다. 희열과, 기쁨으로 날뛰는 광증으로 그의 모든 분노와 적의를 눌러놓아야만 했다. 계획은 그에게 완벽한 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영운도 나름대로 동창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환담을 나누며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늘어놓거나 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현태가 신경이 쓰였다. 헛된 걱정이리라고 자신을 격려했지만 쉽사리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자꾸만 현태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영운이 현태를 돌봐주고 있으며, 그가 매일 자신의 화실에 와서 그림을 그린다는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현태는 항상 내가 없을 때 그림을 그리지. 그가 화실에서 뭘 하면서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저녁에, 수업이 다 끝나고 화실로 돌아오면 현태가 그린 그림들이 이젤이나 테이블 위에 흩어져있지. 나는 그것들을 좀 정리하고,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현태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거나 화실의 문을 잠그는 거야. 너희들도 현태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보면 좋을 텐데. 그는 정말 신들린 것처럼 그림을 그리지. 꼭 붓질 한 번만 더 하고 죽을 것처럼 말이야…….” 그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옛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의 변한 것이 없군. 현태가 학교 다닐 때 일들을 기억해? 그는 수업을 듣지도 않았지. 항상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선생들조차 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어.” 친구가 말했다.
“하하! 그래. 너희들도 기억 할 거야. 선생들이 현태를 피하게 된 이유 말이야.”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영운 주변에 있던 동창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가 현태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간에 반장의 안내를 따라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넓은 좌석을 차지하고 각자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히도 영운은 현태의 왼쪽에, 그리고 <그녀>는 현태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현태에게는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리에 앉았다.
“맞아, 그 일은 정말 잊을 수가 없지.” 반장이 영운의 무리가 나누던 대화에 끼어들면서 웃었다.
“현태의 별명도 그때 생긴 것이었어. 그리고 전교에 퍼져나갔지. 3학년 1반에 정신병자가 산다고.” 어느 친구가 말했다. “넌 기억 하고 있어?” 그는 현태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현태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도 기억나. 아마 아무도 잊어버리지 못할 걸.” 그녀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기술 시간이었지 아마? 그때 기술 선생은 뭔가에 대해서 굉장히 열변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아무튼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선생 혼자서 열심히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지. 그때 갑자기 현태가 벌떡 일어나더니…….” 영운의 말이었다. 그는 말허리를 자르면서 씩 웃어보였다.
“대뜸 의자를 집어 들어서 선생에게로 던졌지!” 반장이 영운의 말을 이어받으면서 외쳤다. 그러자 열 명이 넘는 동창들이 모두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어. 현태가 던진 의자는 천만다행으로 선생을 빗나가 칠판에 맞아 큰 소리를 내면서 교단 위를 굴렀고, 기겁한 선생을 쳐다보면서 현태는 입맛을 쩝쩝거리며 다시다가 교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지!”
“그 선생은 그 뒤로도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 어느 친구가 말했다.
“내가 그때 현태의 뒤를 쫓아 따라 나갔었는데, 현태는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의 코에서 코피가 주룩하고 흘러내리더군.” 영운이 말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화가 났던 거겠지.” 누군가가 덧붙였다.
“그 기술 선생은 그 뒤로 계속 현태를 피해 다녔어. 아마도 상대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거겠지.” 또 누군가의 말이었다.
“너 정말 기억 안 나니?” 그녀가 현태에게 즐거운 낯으로 물었다.
“아니, 나는 정말 모르겠는걸…….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징계를 받지 않은 거야?” 현태가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왠지는 몰라도 너한테는 아무런 제제도 가해지지 않았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 전교로 퍼져나가고, 교사들이 너한테 손을 대지 못하게 된 것 뿐이었지.” 반장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현태가 말했다.
“그래,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아마 평소부터 네가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던 탓도 있을 거야.” 또 누군가의 말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고? 그럼 난 무엇이었는데?” 현태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같잖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아, 글쎄. 이름을 붙이긴 힘들지. 다만 너는 늘 학교 안에 있으면서도 학교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현태의 물음을 받은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제기랄! 친구들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군. 모두가 나에게 친절하고, 나의 옛 기행들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지. 망할, 망할. 어렸을 때 이런 미래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해.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는 모임의 중심이 되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그리고…… 그러나 전부 다 부질없는 일이야. 나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걸어가 버렸어. 이런 것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 나는 더 이상 내가 되고 싶어 했던 어른이 아니야. 내 과거는 광기 속에서 녹아버렸어. 이제야 알겠군. 나는 인간조차 아니야.> 현태는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었다. 눈가와 입 주변에 주름이 짙게 새겨졌다. 그는 격렬하게 체념하면서, 동시에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제 사건들이 터질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은 과거에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인간이 아니라고. 그는 너무 많이 벗어나버렸다. 그는 이제 돌아가는 길을 몰랐다.
곧 음식과 술이 나오고, 친구들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현태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짧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기 앞에 놓인 술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알칼리 이온수로 만든 18.9도의 부드러운 프리미엄 소주. <이것은 에탄올에 물을 탄 것이다…….> 그가 중얼댔다. 술을 마시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알코올 같은 것에 돈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치였다. 아,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술이랑 담배 값은 어떻게든 조달한다고들 하지. 그것들은 사치가 아니라 필용품이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어쩌면 현태도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영운에게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할 배짱이 그에게 있었고, 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셔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더라면 말이다. 아무튼 그는 고기가 다 구워지기도 전에 술병을 집어 들고 흔들다가 마개를 열었다.
“잔들 들어.” 현태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잔을 들었다. 현태로부터 멀리 앉은 친구들은 각자 소주병을 따고 잔을 채웠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축배사는 반장이 해.” 현태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들의 만남과, 밝은 미래를 위하여!” 반장이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듯이 외쳤다.
위하여.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건배를 하고 술잔을 들이켰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현태는 쓰게 웃으면서 잔을 비웠다. 오랜만에 알코올이 식도를 흐르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내장이 짜릿했다. 싸구려 희석식 소주의 에탄올 향기가 뇌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현태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으면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운명이 현태를 위하여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며, 이번에는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현태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삼십 분이었다. 다들 취기가 적당히 올라 있었고, 목소리들은 시끌벅적했으며 모두가 즐거워보였다. 한 친구가 담배를 좀 피워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현태는 생각했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았고, 그런 것은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기다려, 나도 같이 가지.” 현태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들은 가게 밖으로 나갔고, 영운은 그런 현태의 뒷모습을 술에 취한 눈빛으로 슬쩍 훑어보았다.
친구는 가게 밖으로 나오자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네가 담배를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 현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말했다.
“고등학생 때는 안 피웠으니까. 너도 피워?” 그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물었다.
“그래, 한 대 줘봐.” 현태가 말했다.
그들은 가게 앞에 선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고, 취기가 돌아 약간 어질어질한 상태로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밤의 가로등 불빛 밑에서 하얀 담배연기가 짙게 피어올랐다. 곳곳에서 네온사인 불빛이 번뜩였고, 술 취한 행인들의 높은 목소리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은데. 정말 좋아.” 친구가 현태를 곁눈질하면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래.” 현태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낮게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사 년 전의 일들이 거의 기억이 안 나. 너와 내가 친한 사이였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냥 네 얼굴만 기억할 뿐이지.”
“넌 모두와 친했어. 우리 반 모두와 친했다고. 다들 널 좋아했어. 아무도 너와 대화하는 것을 거리껴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네 성격이 특이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넌, 어느 누구와도 <특별히> 친한 관계는 아니었어. 모두의 호감을 사고 있었지만, 네 쪽에서 먼저 누군가와 절친한 친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 어떻게 보면 그게 벽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어. 적당한 거리감이었지. 아주 적당하고 적합한…….” 친구가 말했다. 그는 술에 취한 탓인지 말이 많았다. 현태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친구는 담배를 피우다가 종종 바닥에 침을 뱉었다. 현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담배연기를 뻑뻑 뿜어내면서 말이다. 문뜩 그는 자신이 이상한 곳에 와있다고 느꼈다. 원래는 절대 와서는 안 되는, 말하자면 현태가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곳에 말이다. 그는 별세계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언제까지 그런 곳에서 썩고 있을 수는 없어. 누구나 욕구가 있다고. 나의 욕구는 결말에 대한 욕구였지…….” 현태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입안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라고?” 친구가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어왔다.
“아무 것도 아니야.” 현태가 짧게 대답했다.
그들은 담배를 다 피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동창들이 있는 자리는 유난히 시끌벅적했고 활기가 넘쳤다. 현태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현태 너 담배도 피우니?” 현태가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있는 그녀가 약간 술에 취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전보다 더욱 명랑해진 말투였다.
“가끔.” 현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다들 나이를 먹었구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감탄하듯이 내뱉었다. 현태는 다시 한 번 웃어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술 때문에 약간 붉어져있었고,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현태는 그 웃음을 보면서 항상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동경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통증이었다. 현태는 그녀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상상을 했다. 나이프로 얼굴 윤곽을 따라 가죽을 잘라내서, 껍질을 벗겨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웃을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그녀의 선한 신뢰는 여전할까? 그녀라고 해서 현태가 발을 디디고 있는, 가장 광막하고 무자비한 <땅>에 떨어지지 않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모르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태에게 있어서, 그녀는 불가해의 존재였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빛날 수 있지?> 현태가 머릿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때 그녀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모두에게 말했다.
“얘들아, 미안. 나 이만 가봐야겠어.”
그러자 한 여자 동창이 그녀에게 왜 이렇게 일찍 가느냐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통금 시간 때문에. 이제 들어가 봐야 해.”
통금 시간이라. 현태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이 시간이군. 이 시간이야. 잘 기억해 두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두에게 한 명씩 작별인사를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태는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급하게 영운에게 속삭였다.
“영운아, 돈 몇 푼만 다오. 지금 당장 필요해.”
“뭐? 갑자기 왜?” 영운이 당황하여 말했다.
“너도 눈치 채고 있었겠지만, 이게 계획의 시작이야. 내가 세운 책략의 시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무슨 소린지 알겠지? 그래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하다. 조금이면 돼. 그냥 버스비 정도…… 알겠지?” 현태가 여전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운은 잠깐 현태의 눈을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현태는 생각했다. <이 친구가 뭘 오해하고 있군.> 하지만 오해를 한다면 그냥 오해를 하게 두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다.
“그래, 알았어. 이거 의외로군.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여기…… 일단 이 만원만 받아. 잘 해보라고.” 영운이 실실대면서 돈을 건넸다.
현태는 영운의 오해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군말 없이 돈을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에게 무성의하고 재빠르게 작별인사를 한 뒤 영운의 귀에 속삭였다. “내일 화실에서 보자고.” 그리고 그는 급히 식당을 나갔다.
“저 친구가 계획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여자관계에 대해서 말이지.” 현태가 나간 뒤에 영운이 희희거리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서로를 곁눈질하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태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동창들이 무슨 오해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현태는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씩 웃은 뒤에 뒤쫓아 갔다.
“즐거워 미치겠군.”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현태가 혼자서 말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웃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오직 미친개처럼 결말로 돌진하는 하나의 의지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에 완전히 홀려있었다. 다른 일들은 더 이상 그의 안중에 없었다. 현태는 다른 어느 때보다 침착했지만 동시에 열광의 감정으로 날뛰고 있었다. <이제 내 인생에 하나의 점을 찍는 거야. 지금까지는 점은커녕 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 그것은 윤곽조차 지어지지 않은 하나의 불투명한 그러데이션이었다.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태양빛이 내리쬐면 증발하는, 아무런 자의성도 지니지 않은 불확실한 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산발하며 지면에 나뒹굴던 나의 시간을, 시간을! 시간을 말이다. 시간을 하나의 클라이맥스에 집중하고, 그로써 극은 대단원에 이르게 되며, 막이 내리는 것이다…….> 현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앞서가던 그녀의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이봐!” 그는 외쳤다.
그녀가 뒤돌아봤다. 그녀는 술 때문에 약간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얼굴이 붉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현태는 그녀의 턱 선에서 여름날 나뭇잎 위를 미끄러지는 태양의 한 조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과연 찬탄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멈춰선 그녀의 곁에 도달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그녀가 물었다.
“아니, 아니야! 놓고 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가 따라 나온 거지. 왜냐하면 널 배웅해주고 싶어서! 그 정도는 허락해주겠지?” 현태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는 남몰래 흥분해있었고 자칫하면 그녀가 계획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다소 초조한 상태였다.
“배웅? 안 그래도 되는데. 아직 친구들이 안에 있잖아?” 그녀가 웃음기가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긴 하지. 그것은 맞는 말이야. 하지만……―이 시점에서 현태는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늦은 시간이잖아? 게다가 너는 술을 마셨고! 여자가 혼자 밤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지. 그렇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널 배웅하기로 한 거지…….” 사실 현태의 말은 굉장히 구차했다. 현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현태는 늘 인간관계에 서툴렀으며, 특히나 여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어떤 어휘가 지금 상황에 알맞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책이나 영화 따위를 보면서 획득한, 간접경험이 알려준 회화를 더듬더듬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말하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따라 웃었다. “좋아, 같이 가자. 잘 바래다줘. 신사양반.”
현태는 아무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들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현태는 이미 완전히 술이 깬 상태였고―사실 그는 취한 적도 없었다― 온전한 정신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날 바래다줄 생각을 했어?” 그녀가 걸으면서 물었다.
“왜냐고? 아, 그것은 말이지, 너도 알 거야. 나는 원래 충동적인 사람이거든. 그래서 나의 행동이라는 것은 대부분 앞뒤가 맞지 않고 근거가 없지. 나는 그냥 널 바래다주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너와 좀 더 대화를 했으면 싶었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현태는 드디어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다지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에게 공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천천히 설명하고 있었다.
“굉장히 솔직한데!” 그녀는 또 웃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게 처음인 거 알아?”
“뭐라고? 친절 말이지. 글쎄, 사실 나는 모르겠군. 왜냐하면 사 년 전에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거든.” 현태가 띄엄띄엄 말했다.
“너는 나한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거의 없었어. 너는 무뚝뚝했고, 여자애들한테는 더욱 그런 것처럼 보였어. 게다가 너는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지. 하지만 아무도 너를 싫어하지는 않았어. 신기한 일이야!” 그녀가 즐거운 어조로 얘기했다. 현태는 비슷한 얘기를 아까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나를 미워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인가?> 현태가 혼자서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포심! 거의 십여 년간 변하지 않은 그의 천방지축인 행동 속에는 어쩌면 인간에 대한 비굴함 따위가 깔려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태가 그렇게 명확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현태라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그의 분노와 열등감과 자학과 광기로 형성된 괴상한 자아 따위를 말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간단한 산수나 마찬가지였다. “현태 너는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많이 변했구나.”
“내가 변했다고? 그래, 그렇지. 나는 아주 많이 변했어. 변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변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이건 굉장히 어려운 얘기야.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너는 변하지 않았어. 아, 정말로! 너는 전혀 변하지 않았군. 나는 네가 변하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아. 변한다면,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변할 것인지 말이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불가능한 일이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끝에 가서 현태는 거의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말마디 하나하나를 각인시키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밤거리에 노란 조명이 넘실거렸다. 현태에게는 그것이 더러운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팡파르처럼 느껴졌다. 그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의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 말이다. 현태는 조명 속에서 한 마리의 빛나는 나비를 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나비는 빛살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잠깐 동안 나비의 잔상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네가 말하는 건 꼭 미친 사람 같아!” 그녀는 그것이 농담거리라도 된다는 듯이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현태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진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따라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주절거렸다. “그래, 그건 정말이야. 사실이지…….”
그들은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있었다. “몇 번 버스를 타지?” 현태가 물었다. 그녀는 버스의 번호를 말했다. 현태는 그 번호를 머릿속에 새겨 넣듯이 몇 번이고 입속말로 되뇌었다.
“세 정거장만 가면 돼. 아주 가까워.” 그녀가 말했다.
“세 정거장. 그렇군. 그래. 그런데 말이야……” 현태는 뭔가를 주저하면서 말했다. “내가 계속 널 바래다줘도 될까? 내 말은, 네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있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네가 부담스럽다면 여기서 돌아가도 되겠지만, 예를 들자면 너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까지 말이야. 내가 널 바래다줄 수도 있지 않겠어? 어디까지나 네가 허락하면 말이지. 왜냐하면 너에겐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 왜, 네가 말했듯이 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현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 한쪽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면서 미쳤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웃었다.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러나 결코 비웃음이나 조롱은 아니었다. 현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남을 비웃는 방법을 몰랐다. 아마 그녀는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녀는 웃더니, 웃음을 멈추고, 그러나 여전히 빙글대는 얼굴로 현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말했다. “현태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해? 말해줘.”
현태는 당황했다. 그런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의 질문은 의미심장했고 어떤 목적이 있었다. 현태는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건, 그러니까 네가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을 묻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쎄……” 그리고 그는 말을 고르다가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현태의 대답을 듣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현태는 다소 당혹스러운 감정이었고 그녀의 웃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너 혹시 나한테 반했니?”
반했냐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반했냐고? 글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현태는 정말로 <반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야.”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현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진지하게 그녀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봐야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것은 굉장한 골칫거리였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현태가 자신의 입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종의 옹알이 같은 것이었다. 현태는 생각 끝에 자신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을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태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좋아. 골목까지 같이 가자. 하지만 골목까지만 이야.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현태로서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현태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비하적인 평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그녀에 대하여, 현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이토록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상황을 따라가기로 했다.
곧 버스가 왔고 그들은 버스에 탔다.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기에 그들은 그리로 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았고 현태는 그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했다. 자신이 대학을 다니면서 경험했던 연애에 대한 얘기였다. 그녀는 자신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었던 것과, 결과적으로 상처입고 슬퍼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현태는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잘못된 평가야. 그건 잘못된 평가임에 분명하다.> 현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말해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현태는 그저 무채색의 풍경으로 기억되는 자신의 흐리멍덩한 과거 속에서, 끔찍하게 상처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독한 얼굴표정들을 흐릿하게 떠올렸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고 어떤 골목으로 들어갔다. 현태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지나치는 가로등들의 숫자를 하나씩 정확하게 세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보였다. 그러나 현태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저 가로등들의 숫자를 셌다. 한 번 오른쪽으로 꺾고, 그 뒤에 한 번 왼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어귀에서 그녀는 현태를 향해 <자, 여기까지!>라고 외쳤다. 현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의심할 줄을 모르는군. 그는 생각했다.
“안녕. 바래다줘서 고마워. 나중에 또 보자.” 그녀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래.” 현태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 사이로 사라져갔고, 현태는 가로등 밑에 홀로 남았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현태는 팔을 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갔다. 모든 희망을 포기한 덕분이리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세상의 혼돈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꼈다. 야비하고 사악하며 철저하게 무가치한 혼돈 말이다. 그는 웃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정확히 되짚어가서 버스 정류장에 도달했고, 버스를 탄 뒤에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동네로, 영운의 화실이 있는 그 동네로 말이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끝내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가서 옷을 벗고 잠을 잤다.
9. AND
다음날 현태는 잠에서 깨어 거리로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영운이 사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더러운 셔츠에 지저분한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시내로 나가 상점가로 내려갔다. 그는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파티 용품점이었다. 현태는 이십 분 정도 거리를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파티 용품점을 하나 찾아냈는데, 그 가게는 지금 막 문을 연 참이었다. 현태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선반 따위를 정리하고 있던 가게 주인이 그를 맞이했다. 현태는 건성으로 맞인사를 하며 가게 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가면 코너에서 걸음을 멈췄다. 온갖 가면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서양 귀신들의 얼굴을 그린 가면이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가면도 있었다. 그러나 현태의 눈을 끈 것은 미국의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가면이었다. 그는 그 가면을 좀 들여다보다가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갔다. 가게 주인은 이런 이른 시간부터 가면을 사러 시내로 나온 현태가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장사를 하는 데에 그런 감상은 필요하지 않은 법이었다. 현태는 별 문제 없이 돈을 지불하고 가면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다시 자신의 다락으로 돌아갔다. 현태는 방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이불 위에 가면을 던졌다. 그리고 도로 방문을 닫은 뒤에 화실로 향했다.
현태는 굉장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는 마치 해탈한 인간처럼 무감정했고 정오의 빛살에도,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온갖 마스크들의 향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현태는 마치 정해진 일만을 수행하는 기계와도 같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그랬다. 현태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화실로 걸었고, 얼마 뒤에는 학원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서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커튼을 친 뒤에 의자에 앉았다.
현태는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길거리의 소음이 창문을 통해 화실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현태는 가끔 눈을 껌뻑이며 벽의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영운이 왔다. 현태는 그를 보고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었다. 영운은 오늘이 일요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학업이나 과제 따위로 바쁠 예정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태는 알았다고 말했다. 영운은 현태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나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표정 따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현태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현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이렇게 말했다.
“전부 다 잘 됐어.”
전부 다 잘 됐다고? 영운이 되물었다. 현태는 그렇다고 다시금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예정된 일들도 모두 잘 될 것이었다. 현태는 실쭉 웃었다. 영운은 어쩐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최근 현태의 기분변화는 평소보다 너무 급격했고 종잡을 수 없었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신경을 써봐야 어쩔 수도 없는 것이 바로 현태였다. 영운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영운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이 제대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태는 영운이 그림 그리는 것을 앉은 채로 조금 구경하다가, 자신도 종이를 꺼내들고 낙서하듯이 뭔가를 끼적끼적 그렸다. 화실에는 연필이 사각대는 소리만이 나직이 흘렀다.
저녁에 현태는 영운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는 그다지 식욕이 없는 까닭으로 밥을 조금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화실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소연이 찾아왔다. 현태는 그녀에게 오늘은 그린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소연은 실망하는 것 같았으나 금세 원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영운과 현태에게 오늘 학교나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즐거운 듯이 늘어놓았다. 영운은 웃는 얼굴로 그 당찬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맞장구를 쳤고, 현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의자 위에 늘어져있었다. 그는 이따금 시계를 확인했다.
소연이 돌아가고, 저녁 아홉 시가 되자 현태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영운에게 가보겠다고 말했다. 영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별 말 없이 현태를 보내주었다. 현태는 화실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면을 꺼내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사는 동네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삼십 분 정도 그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가끔 버스가 덜컹거리며 상하로 흔들렸고, 현태는 가면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 얼마 뒤에 현태는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있었고, 밤이었다. 현태는 전날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걷는 와중에 그는 가면을 썼다.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현태의 목 위에 덧씌워졌다. 그는 가로등을 피해서 걸었다. 되도록 어두운 곳으로만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둠 때문에 현태의 괴상한 꼴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현태는 그녀와 헤어졌던 골목어귀에서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태가 서있는 곳에서 아주 가깝게 걷지만 않으면 그곳에 현태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것이었다. 현태는 기다렸다. 다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귀가하는 것을 현태는 보았다. 그녀는 현태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골목을 통해 지나갔다. 현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열 시 오십육 분. 그리고 그는 오 분 정도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가면을 벗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도 현태는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날 그녀가 귀가한 것은 열 시 이십 분이었다.
그 다음 날에는 열 시 삼십사 분이었다.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현태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몸이 이미 죽어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로 시체 같았다. 예를 들자면 지진 따위가 일어나서, 흉하게 상처입고 곳곳이 터진, 구제할 도리가 없는 죽은 몸뚱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는 죄악이 물들어있었다. 죄악이라고? 현태는 자신의 생각에 감탄했다. <내가 죄악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왜냐하면 나는 죄악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는 모르면서, 다만 남들이 죄악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처럼 파악하려고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 나는 죄인이 될 것이다.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실로 코미디다. 그러나 세상의 거의 모든 일들이 코미디처럼 이루어지고 결말을 맞는다. 수수께끼…… 오직 그것뿐이다. 사람은 늘 사방에 산재한 수수께끼들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답을 추측해볼 뿐이다. 문제는 아무도 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실제로 답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나는 죄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냥 한 자루의 칼날이다. 어떤 측정할 수 없는 혼잡한 힘에 의해서 내려쳐지는 한 자루의 칼날 말이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새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머릿속으로 지껄였다. 그리고 그는 셔츠를 입었고, 바지 뒷주머니에는 단도를, 한 손에는 가면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보고 신비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마치 평생 살면서 개나리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현태는 늘 주변에 무관심했고 거리에 마구잡이로 피어있는 꽃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봄이, 봄이 드디어 활개를 치며 벌어지고 있었다. 꽃들이 사방에 피었고 약하게 부는 바람에서는 새싹과 나무의 향기가 났다. <곧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될 거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는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여름이 온 것이 언제였더라? 그리고 여름이 간 것은 또 언제였는가. 계절들이 거센 바람에 휩쓸리는 구름처럼 엄청난 속도로 현태를 지나쳐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몹시 추웠다는 것을 현태는 기억했다. 그러나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또 한 번 생명이 빳빳이 고개를 들고 광휘가 번뜩이는 눈동자를 뜨려고 하고 있었다. 미친 세상 같으니……. 그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현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거의 구르다시피 거리를 걸으며 화실로 걸어갔다. 오늘도 사람들은 정장과 교복을 입고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현태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표정에서 분노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어있었고, 말하자면 행복했다. 그는 실쭉 웃으면서 사람들 사이를 휘청휘청 지나쳤다. “내 자유……” 현태는 개미 목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끝내 마치지 못했다. 무어라고 말을 이어가야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안타깝게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한 번 되다만 말마디를 내뱉었다. “내, 자유…….”
학원 건물에 도착해서 현태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오늘 그는 이 층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 걸어 올라갔다. 왜 그랬는지는 현태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누군가를 만나야한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현태는 삼 층까지 올라가서, 복도 한 구석에 있는 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영운의 아버지가 테이블 뒤에 앉아있었다. 그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현태가 들어오면서 인기척을 내자 영운의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살펴보았다. 현태가 비칠대면서 벽을 짚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영운의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현태가 원장실로 들어오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인가 현태군?”
“그게……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현태가 테이블 앞까지 다가와서 의미 없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런데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영운의 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다시 물었다.
“네, 사실 말씀이죠,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인생을 오래 살아온 누군가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현태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바쁜 것도 아니니 잠깐이라면 시간을 내줄 수는 있지. 내 의견이 필요하다고?”
“맞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적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늙고 연륜이 있으며,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교사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현태가 주절주절 말했다.
“요점만 얘기하게.” 영운의 아버지가 딱 잘라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제가 여쭤볼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님은 누군가를 사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현태는 자신이 묻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물었다. 그의 억양은 자신의 의문에 대한 의문 때문에 이상하게 꼬여있었고, 적절한 제스처를 찾지 못한 손은 얼굴을 무의미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와서 뭘 묻는가 했더니만……. 아직도 사춘기가 안 끝났나?” 영운의 아버지는 같잖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내뱉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현태가 고개를 휘적휘적 저으면서 툭 말을 던졌다.
“아무튼 내가 지금 시간이 있으니 자네 상대를 해주지. 누군가를 사랑해본 일이 있냐고? 그것은 물론이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고, 또 내 아들도 사랑해. 답변이 되었나?”
“아! 그것은,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현태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은 문맥에 맞지 않는 것이었으나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가 원래 다소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버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 혹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일은 없습니까?”
“물론 있지. 왜냐하면 다들 사람이니까 완전할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사랑한다는 건 상대의 불완전한 면까지 포용한다는 거라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를 이상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만약에 그들이 완벽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뭔가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는 답변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고 물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물음일지, 그리고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허공에 혀를 돌리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면서 힘겹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현태는 갑자기 비참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지고, 말로 할 수 없는 좌절이 표정 위에서 맴돌았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의 그러한 급격한 표정변화를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통스럽게, 그리고 끔찍하게 웃었다. 그는 억지로 웃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그러면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것입니다.”
“뭐라고?” 영운의 아버지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내려가야겠어요.” 현태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일방적으로 작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그는 비척비척 원장실 밖으로 향하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영운의 아버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현태가 괴상한 청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말을 섞어보니 그는 예상보다 훨씬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한 번 혀를 차더니, 지금까지 원장실에서 벌어졌던 대화를 송두리째 정리하듯이 내뱉었다. “미친 녀석!”
현태는 원장실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 층의 화실로 갔다. 화실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고 깔끔했다. 매일 영운이 정리를 해둔 덕분이었다. <나는 깨끗한 것을 보면 슬퍼져.> 현태가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테이블 위에 그간 쥐고 있던 가면을 내려놓고, 캔버스를 하나 가져와서 이젤 위에 걸었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테이블 위의 가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화구 따위를 들고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태는 몇 시간 정도 조용히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완성된 것은 작은 인물화였다. 그것은 지저분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서 웃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게 뭐야?” 완성된 자신의 그림을 살피던 현태가 갑자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몰이해와 의문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이건 마치 동창회 날 보았던 그 소주병 같군. 18.9도의 프리미엄 소주 말이야. 내가 도대체 무엇에다 물을 섞은 거지?> 현태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화실 문이 열리고 영운이 들어왔다. 현태는 고개를 들어 영운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지금이 몇 시야?” 현태가 대뜸 영운에게 물었다.
“몇 시냐니…… 너 시계 있잖아.”
“맞아, 그렇지.” 현태는 수긍하면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사십 분 경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영운은 입맛을 다시더니 테이블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가면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보고 현태에게 물었다. “이건 웬 거야?”
“아, 그거. 필요한 거야.” 현태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태의 대답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영운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현태 옆으로 다가오더니 지금 막 완성된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보았다.
“미국 대통령이군.”
“그래.” 현태가 말했다.
“정치적인 그림인가?”
“아닐 것 같은데…….” 현태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영운이 그림을 살피는 중에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비비더니 화실 안을 뚜벅뚜벅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그건 그냥 낙서야. 물론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이 낙서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건 다른 그림들보다 더욱 장난스러운 낙서야……. 요즘 내 상태가 좀 이상해. 도무지 제대로 된 그림을 못 그리겠단 말이지.” 현태가 영운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최근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 그림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바로 이유였다. 현태는 자신의 계획에 너무 몰두해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데에 쓸 에너지마저도 그 계획에 쏟아 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능동적으로 그림을 그릴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슬럼프인가?” 영운이 물었다.
“아니야. 슬럼프는 무슨. 그런 건 예술가들이나 겪는 거지.” 현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나는 슬슬 가봐야겠어. 갈 곳이 있거든.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야.”
“너 요새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영운이 현태를 바라보면서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냐고? 그야,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않나? 클라이맥스가 거의 다가왔어. 난 이제 <해결>을 해야 해.” 현태가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해결? 전에 얘기했던 거? 네 인생을 해결한다는 거 말이야?”
“맞았어. 아주 잘 기억하는군.” 현태는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걔랑은 어떻게 됐어?” 영운이 물었다. <걔>라 함은 <그녀>를 말하는 것이었다. 현태도 그것을 알아들었다.
“내 생각엔 잘 될 것 같아. 무엇보다도 바로 그녀가 계획의 핵심이니까 말이지.”
영운은 의아했다. 그가 얼마 전 동창회에서, 현태가 말하던 계획이란 연애질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알코올 때문에 비약된 추측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태가 연애를 시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영운이 아는 현태라면 그랬다. 현태는 영운 이외의 그 누구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모와도 벌써 몇 년간이나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영운이 현태의 부모의 연락처를 알고 있기는 했으나, 현태가 절대로 그들에게 연락하거나 자신의 거주지 따위를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라서 그들과 대화를 해본 것은 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아무튼 영운이 생각하기에 현태는 굉장히 의심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운의 이해능력 바깥에서 현태의 괴기스러운 손아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난 간다.” 그러고서 현태는 가면을 손에 들더니 화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너 밥 안 먹어?” 영운이 문 밖을 향해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 안 고파.” 복도를 질러가며 현태가 나직하게 말했다.
현태는 골목의 어두운 구석에서 가면을 쓴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있었고, 그는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현태는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오늘이다. 오늘이 클라이맥스야.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헤매왔던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미치게 되었을까? 내가 언제부터 미친 사람이었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처음으로 내가 《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았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처럼 웃을 수 없었으니까. 나는 절대로 그녀처럼 웃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뭘까? 나는 뭘 하고 싶은 거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려는 것인가 혹은 파괴하려는 것인가 혹은…….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심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신이 있다. 공정하고 선한 신이. 내 세계에서는 아무도 권위를 갖지 못한다. 내 세계는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우주의 혼돈이고, 그것만이 나의 믿음이다. 아무것도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후회 하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쥐꼬리만큼도 후회하거나 슬퍼한 일이 없다. 애당초 내가 후회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다. 말하자면 사실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내 상태야말로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란 말이다! 동의하겠지? 그럼, 물론이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가 있다. 그녀는 오류다. 내 생각에 그녀는 오류야. 오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내가 믿는 모든 실재들을 부정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말했었지. 그것은 동경이었다. 동경? 아니야! 동경일 리가 없다! 내가 왜 그녀를 동경하겠는가? 그녀는 그냥…… 그냥 백치다! 그렇고말고! 그래서 그렇게 깨끗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물론이지. 나야말로 이 우주에 태어난 인간의 가장 필연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빛나는 것은 그저 그녀가 권력자들이 말하는 일종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적용되지 않은 인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구다.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확인할 것이다. 확인하고야말 것이다.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도 나와 똑같은 혼돈의 웅덩이가, 공포와 증오로 만들어진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아! 이것도 거짓말은 아닌가? 나는 한때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사랑이라니?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내가 《괴상》하다고? 그렇다면 그녀가 옳다는 말 아닌가? 모든 선하고 올바른 것들의 상징.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오류인가? 그런데 옳은 것 따위는 없다.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상만이 존재할 뿐. 그럼 그녀는 뭐지? 나는 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문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이 문제는 송두리째 사라져버린다. 봐라, 저기 그녀가 오는군…….> 현태의 머리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모순의 덩어리였고, 혼란과 불만족, 그리고 몰이해의 표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만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믿을 것은 감각과 충동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에 다시 한 번 칼을 고쳐 잡고 그녀가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현태가 골목 구석에서 가면을 쓴 채 칼을 쥐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현태 앞을 지나치는 순간이 왔다.
현태는 순식간에 왼손으로 그녀의 팔을 부여잡고 비틀어서 그녀가 현태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댔다. 그녀는 미국 대통령이 자신한테 칼을 들이대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현태가 칼을 들이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비명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그녀가 꼼짝할 수 없도록 칼끝을 그녀의 살갗에 들이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드디어 날이 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마.” 현태가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공포와 충격으로 하얗게 질린 눈동자로 현태의 가면을 쏘아보며, 숨조차 쉬지 않고 얼어붙어 있었다. 현태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습게 보였다. 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아하!” 그는 가면을 쓴 얼굴을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면전에 가까이 대며,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왔어.” 현태가 이토록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안긴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리고 나약하던 내가 꾸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 말이야! 아, 한때 나는, 네가 나의 아이를 낳아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 우리가 결혼을 할 수도 있었어. 만약에 내가 그런 것을 믿는다면 말이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꾸리고, 아들이나, 혹은 딸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안 돼. 아이를 갖기에 나는 너무 미쳐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여기까지 말하고 현태는 자지러질 듯이 웃어댔다. 그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유쾌했고 정신이 공기 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때 공포에 질려있던 그녀가 <당신……>이라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현태는 칼날을 그녀의 살갗에 더욱 깊숙이 찔러 말을 막았다. 붉은 피가 한 방울 칼끝에 맺히더니 흘러내렸다. “어이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 만약에, 만약 여기가 어떤 조용한 지하실이었다면, 난 네가 말하도록 내버려뒀을 거야. 나도 폴리가 크래커를 원한다고 지저귀는 걸 듣고 싶어. 정말이야! 하지만 언제 누가 올지 몰라. 날 방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러면서 현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어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너 현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현태가 칼로 그녀의 목을 찔러버렸기 때문이다. 울컥하고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목구멍 안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고, 덕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안타깝게도 현태보다 힘이 약했다. 곧 그녀는 다리에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현태는 무릎을 꿇고서 그녀 위에 올라탄 채 두어 번 더 그녀의 목을 찌르고 그었다. 목덜미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말이다. 사방에 피가 튀었고 현태의 셔츠도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현태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가슴팍 옷자락을 찢고, 어둠과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흉부를 칼날로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작업에 굉장히 열중한 채로 중얼거렸다. “고로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그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녀의 가슴을 칼로 그었다. 가죽이 좍좍 찢겨나가고 상처는 속이 망가진 취객처럼 혈액을 토해댔다. 그리고 마침내 현태는 손목을 들어 단도로 그녀의 심장부를 푹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가끔씩 갈비뼈에 칼날이 부딪혀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분이나 삼 분 정도 그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현태가 뒤집어쓴 미국 대통령 가면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작업을 끝낸 현태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곤죽이 된 그녀의 시체를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흥분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아마도 백정들이 소나 돼지를 도축하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들 것이라고 현태는 추측했다. 탈력감과 뭔지 모를 성취감이 가슴에 한가득했다. 그는 가면의 뚫린 눈구멍을 통해서 흉하게 난도질당한 그녀의 죽은 몸뚱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댔다. “그냥 로맨스를 좀 원할 뿐이지.”
현태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된 단도를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가면을 벗은 뒤, 그것을 그녀의 시체 위에 던졌다. 플라스틱으로 된 가면이 그녀의 몸체 위로 떨어지더니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그는 소매를 들어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한바탕 운동을 하고 나니 온몸이 후끈거렸다. 그리고 현태는 그녀의 시체를 뒤로 한 채, 터덜터덜 골목 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꼴로 버스를 탄다면 경찰이 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로 삼십 분도 더 걸리는 거리를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별 수 없는 일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기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현태는 산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둠 덕분에 현태의 셔츠가 피범벅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아마 핏자국을 발견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셔츠의 무늬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는 자정이 좀 넘은 시각에 집에 도착했고, 자신의 <관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10. 우리들의 결말에 대하여
다음날 현태는 일어나자마자 영운이 사준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피 때문에 온몸이 찐득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목욕탕에는 손님이 없었고, 현태는 마음 놓고 몸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뜨거운 물로 목욕까지 즐기자 몸이 한층 더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 옷을 언제까지고 그냥 둘 수는 없지.> 현태가 물속에서 생각했다. 아마 연립주택의 공용 화장실에서 빨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현태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에는 빨랫비누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귀찮은 일이었고, 그리 급한 일도 아니었다. 아마 내일 해도 될 것이다. 현태는 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로커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이제 그는 지저분하지 않았다. 죄악의 피로 젖어있지도 않았다. 물론 현태는 그 피들을 <죄악>의 피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남겨진 일들을 해결해야했다. 단 한 번의 살인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은 준비된 절정이었고 하나의 과정이었다. 현태는 이제 대단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훌륭하게 클라이맥스를 통과했으니 이제 철저한 결말이 현태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야했다. 현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무미 무취하던 인생을 하나의 스펙터클한 연극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연극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현태는 알고 있었다. 다만 결말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현태가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었다. 그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에 비치는, 전보다 또렷해진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현태는 목욕탕을 나와 화실을 향해 걸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다소 있었다. 현태는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첫 살인 이후로,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전과는 다른 어떤 경험주의적 사고방식이 그의 내면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현태는 내키기만 한다면 그들 중 하나를, 혹은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금지된 일이 아니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그는 몇 번이나 자유에 대해서 되다 만 생각들을 뇌까리곤 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자유가 얼마나 무자비하며 무지막지한 것인지, 자신의 손으로 만져서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알고 있기는 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력이 결여된 희뿌연 사상덩어리였고 실제성이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현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파란 하늘과 뜯어진 천 조각 같은 구름들뿐이었다. 현태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손이 움직이고 발이 내디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절대로 통제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유였다. “사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윤리나 계명을 믿는 것도 그들의 자유지. 그리고 그들이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나의 목을 베는 것조차도 그들의 자유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법과 규칙은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은연중에 맺은 합리성에 기반을 둔 약속이었다. 문제는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가진 자들이었다는 것이었다. 현태는 잃을 게 없었다. 자신의 목숨조차 오래 전에 내던져버렸던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그에게는 다만 욕망만이 있었다. 줄곧 충족되지 못했던 욕망. 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결말에 대한 욕망만이 남아있었다.
<미친 사람은 배제 당한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한 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미치게 되어있다.> 현태가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철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사고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믿음들은 현태의 처참한 경험과 그의 세상을 쥐고 흔들었던 인간들의 심술궂은 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논파 당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논리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겪은 사실만이, 경험주의의 산물만이 있었다. 모든 악당들은 영웅의 주먹 아래 쓰러지지만, 그들은 그저 처벌 받을 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 벌어지는 현상은 그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법칙은 생각보다 아주 훌륭하게 작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주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현태는 전에도 말했듯이 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개념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무것도 금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 굉장히 불투명하긴 하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불투명한 <처벌>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태는 자신의 결말을 구성해야했다.
어느새 화실 앞에 도착해있었다. <내 생각대로 일이 따라준다면 좋을 텐데.>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태의 희망대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보다 많은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다소의 조작은 필요한 법이다. 현태는 입맛을 다시면서 건물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용했고, 아직 이른 오후인지라 학생들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음정을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화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더니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된 일이야. 퍽 안 된 일이지. 하필이면 내 기억 속에 있었으니……. 만약 망각이 조금 힘을 썼더라면 그녀가 죽지 않아도 됐을 지도 모르지. 물론 그건 나한테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왜, 나는 동정심도 있지 않는가 말이야. 혹은 우연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내 생각엔 이게 전부 나의 결말을 위한 하나의 포상 같아.” 현태가 허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혹은 조건이거나.”
현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아직도 어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희망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저 더러운 도시 어딘가에 아직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현태의 닮은꼴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일이었다. 현태가 미친 것만큼 어느 누군가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슬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모든 기회의 시작이었으니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살다가 가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느냐가 다를 뿐이지.> 현태는 늘어져 앉은 채로 손톱을 씹어대면서 머릿속으로 떠들었다.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절대의 편린이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들 깨닫게 될 거야…….>
그러더니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캔버스와 화구를 집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젤 위에 걸더니 스케치도 없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계획까지는 시간이 꽤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현태는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별달리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림을 그렸다. 태양이 하늘에 길을 남기면서 흘러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물감을 짜고 팔레트에 붓을 찍고 붓질을 하는 것만을 계속 반복하며 그는 시간을 잊었다. 이제 곧 막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에는 예전처럼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지 않았다. 그저 일렁거리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잠든 야수의 심박 같은 파도만 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영운이 화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태는 눈동자를 올려 영운과 눈을 마주쳤고, 말없이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현태는 그림을 그리면서 가끔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린 과정을 확인하고, 이것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 뒤에 다시 붓질을 하는 것이었다. 영운은 평소처럼 가방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현태에게로 다가갔다.
“셔츠가 깨끗해졌는데.”
“그래. 네가 사준 거야.” 현태가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그림 그릴 때는 입지 말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입고 있던 셔츠가 너무 더러워져서 빨아야 해.”
“네가 빨래를 한다고?”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너무 지저분해졌어. 입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영운은 입을 다물었다. 이 친구가 어젯밤에 럭비라도 하고 온 것인가 싶었다. 물감이 튀기거나 자신의 피로 젖는 일을 제외하면 현태는 옷이 더러워질 만큼 활동적인 일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추측할 수도 없었고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영운은 현태가 밤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영운의 눈을 벗어난 곳에서 그는 무얼 하고 다니는가? 어디를 돌아다니며 어떤 미친 짓들을 하는가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태에 대한 것은 대부분이 수수께끼 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캐고 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랬다가는 지금 현태와의 관계마저 깨지고 말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라고는 하지만, 영운은 현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대외적인 활동―대외적인 활동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이외의 그 무엇도 현태는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아마 의도적으로 현태가 그런 것들을 숨기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대놓고 알려줄만한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숨겨야할 것들이 있었다.
“이 그림은 뭐야?” 영운이 물었다.
“글쎄…….” 현태가 애매하게 답했다.
“평소에 그리던 것들과는 다르군. 이건 너무……” 영운은 무어라고 평을 내리려고 했지만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하다? 아니다. 현태의 그림은 평소에도 늘 그로테스크했다. 심지어 풍경화나 정물화마저도 말이다. 그는 사과 한 개를 그려도 보는 사람의 기가 죽게 만드는 괴기한 재능이 있었다. 이따금 영운은 현태가 색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채색에 대한 그의 선택들이 일반적인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태는 색맹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세계의 색깔들이 남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직선적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직선적이지 않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현태는 무엇이든지 빙빙 꼬아서 표현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그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개념이나 감정 따위를 포장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로 인해 그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뭐?” 현태가 물었다.
“몰라. 모르겠어. 아무튼 뭔가 달라. 굳이 말하자면 너무 적나라해…….”
현태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그림이 적나라한지 적나라하지 않은지는 현태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운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그가 웃는 이유는 영운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현태에게 있어서는 너무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난 이 그림을 마저 끝내야겠어. 너도 과제라도 하지 그래.” 현태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방해하지 말라 이거지.”
영운은 테이블 뒤에 앉더니 가방에서 종이뭉치 따위를 꺼냈다. 그리고 서류 같은 것을 계속 체크하면서 뭔가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현태는 신경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붓질을 하면서 그림 안에 어떤 붉은 꽃 같은 것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정말 꽃인지는 현태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뒤에 화실 문이 다시 열렸다. 소연이었다.
“또 왔군. 이봐, 현태. 네 팬께서 오셨어.” 영운이 웃으면서 현태에게 알렸다.
“그래, 나도 알아.” 현태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소연은 영운에게 인사를 하더니 화구통을 고쳐 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태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현태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태는 여전히 소연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그림에 열중해있었다. 그때 영운이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깐 아버지한테 다녀와야겠어.” 영운이 말했다.
“그렇게 해.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너희 아버지랑 대화를 했어.” 현태가 무심결에 대답하더니 영운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랑? 무슨 얘기를?”
“나도 잘 몰라.” 현태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래…… 아무튼 다녀오라고.”
영운은 뒷짐을 진 채로 화실 밖으로 나갔다. 화실에는 소연과 현태만이 남았다.
“아저씨, 이 그림은 뭐예요?” 소연이 물었다.
“알 게 뭐야.” 현태가 소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왜 항상 그렇게 무뚝뚝해요?” 소연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무뚝뚝하지 않으면 내가 어쩌길 바라는데.”
“난 매일 아저씨한테 담배를 제공하고 있다고요. 좀 더 살갑게 대해봐요.”
그럼 오지 말던가……. 현태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소연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당차고 자신만만한 눈이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소연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소연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너, 도대체 뭘 믿고 자꾸 나한테로 오는 거냐?” 현태가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느냐고.” 현태가 짜증이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가 위험하다고 하는 위험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소연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현태는 다시 혀를 찼다. 이 여자애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녀>만큼 순진한 백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어딘가가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이 현태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소연의 앞에서 유독 현태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 있었다. 그는 이 정의의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아저씨는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본성은 선한 사람 같아요.”
그 말에 현태는 코웃음을 쳤다. 이 소녀에게는 확실히 일러둬야겠다. 현태의 가슴속은 다시 혼란스러운 물결로 파도치기 시작했다. “내가 선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넌 나한테 접근하지 말아야 해. 왜냐하면 나는 내가 손댈 수 있는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히기만 하니까! 나는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현태의 목소리는 흥분해있었다. 그는 마치 화난 사람처럼 보였고 목소리 톤은 높아져있었다. 현태가 흥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소연은 약간 움츠러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뒷걸음질을 치거나 도망을 갈 정도는 아니었다.
“왜 그렇게 외로워해요?” 소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소연의 말에 현태의 정신은 징을 친 것처럼 요란하게 울렸고, 그는 드디어 제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성이 나서 혼잡한 머리로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피투성이인 단도를 슥 빼내어 쥔 채로 소연 앞에 들이밀었다. “이제야 내가 확신하게 된 게 있는데.” 그는 거의 고함을 치듯이 말했다. 피투성이의 단도를 보자 소연은 놀란 것 같았고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현태는 그것을 보고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외쳤다. “그건 바로 내가 미쳤다는 거야.” 그렇게 외치면서 현태는 그리던 그림에 힘껏 칼을 박아 넣었다. 눈동자는 소연을 향한 채로. 소연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현태의 눈동자와 캔버스에 박힌 칼을 보고서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몇 걸음 뒷걸음질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가!” 현태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떠밀려 소연은 화실 문 쪽으로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가 버려, 다시는 오지 마.” 그 말과 함께 현태는 으르렁거리면서 꽉 깨문 이빨을 내보였다. 소연은 혼란과 공포 때문에 화실 밖으로 밀려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한껏 성이 나있는 현태의 괴물 같은 얼굴표정을 보면서, 문을 닫았다.
문 밖으로 복도를 급하게 질러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태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고 분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캔버스에 박힌 단도를 빼내서 도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로 언어가 되지 못한 처참한 신음을 흘리다가, 캔버스의 찢어진 천을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널 두 번 죽이게 하지 마.
현태는 이상한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꿈속에서 현태는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찢어서 흉골을 뜯어내고, 늑골을 하나씩 바깥으로 꺾어 열었다. 열린 가슴 속에는 새까만 공간이 있었다. 현태는 그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손에 잡히는 것을 한 움큼 집어 끄집어냈다. 붉은 돌멩이들과 벌레의 알이 잔뜩 잡혀 나왔다. 현태는 그것을 바닥에 뿌렸다. 투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과 벌레의 알들이 바닥을 굴렀다. 그는 다시 가슴의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용물들을 꺼냈다. 여전히 붉은 돌과 벌레의 알들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 짓을 되풀이하며 자신의 속을 비웠다. 꿈속은 고요하고 풍경이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돌과 벌레의 알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괴기한 감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관짝>은 어둡고 습기로 가득했다. 현태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미 흐려지기 시작한 꿈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뒷맛을 음미했다. 애벌레가 고치에 틀어박혀있는 것처럼 현태는 자신의 이 더럽고 동굴 같은 다락에서 몇 년이고 살아왔다. 습기와 불결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태에게 딱 어울리는 것들이었고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현태는 언제까지고 그의 다락에서 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드디어 현태의 인생이 대단원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은둔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철저하고 확고한 필연이 그를 덮쳐올 것이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현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불을 켜고 셔츠와 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구두를 신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거리를 걸으면서 현태는 세상의 피상적인 면만을 보고 신에게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 소시민들이나 종교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세상에 규칙이 있다고 믿는 자들, 그들은 얼마나 소박하며 노력가이고 정당하게 분노하는지. 이제 그 분노는 현태를 향해 덮쳐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그들이 현태를 <심판>하게 하는 것. 그로서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현태는 처음 그녀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부터 생각해두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온화했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다. 현태는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근거를 알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자유인들에 대하여, 그는 인류애라고 할 만한 것을 가슴 한가득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동질감이었고 유대였다. 만약에 그들이 현태와 똑같은 현실의 <땅>에 떨어져 혼란과 공포 속에서 미쳐가기 시작한다면, 현태는 그들에게 더욱 깊은 사랑과 유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적인 망상이었고 당분간은 실현될 기미가 없었다. 그는 흐느적흐느적 걸으면서 화실까지 걸어갔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찬란한 물결 같은 햇살이 화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화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몇 년이나 그림을 계속 그려왔던가.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명분도 없이. 그저 죽지 않기 위해. 그러나 그러한 일상도 이제 끝을 앞두고 있었다. 현태는 의자 위에 앉았다. 이제 소연이라는 소녀는 이곳에 오지 않겠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현태는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아,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모든 현상은 그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인간에 의해 해석되어진 일이 없다. 그저 벌어지고, 휘몰아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지기만 했을 뿐.
현태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고 맑았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직시할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인간을 조롱하듯이 카오스 상태로 벼락 치던 운명도, 자신의 범죄도, 자신의 결말도 전부 말이다.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대단원의 성립을 위한 기계적인 조작들뿐이었다. 그것은 다소의 우연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아마도 잘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찢어진 캔버스가 있었다. 현태는 어제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는 소연을 쫓아낸 뒤 한동안 괴로움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그 어떠한 종류의 구원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때 떨어트린 그림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그 뒤 영운이 화실에 왔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영운은 단도에 찔려 찢겨진 그 그림을 보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것 또한 현태의 종잡을 수 없는 광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인가? 현태는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말이다. 영운은 현태의 유일한 친구였고 조력자였으며 마지막 남은 인간관계였다. 현태는 왜 자신이 그와 정상적인 친구가 될 수 없었는지, 왜 보다 친절하게 그를 대하지 못했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미친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행위들을 그 한 마디로 변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미친 사람이었고 남들과 살갑게 악수하는 방법을 몰랐다. 영운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현태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짐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설령 영운이 그 짐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겁고 부담스러우며 위험한 것이었다. 영운은 오랫동안이나 그 짐을 기꺼이 짊어 매주었다. 어떤 불평이나 군소리도 없이, 상자 속의 괴물이 어떻게 날뛰든 그저 자신의 두 다리로 지탱해주었다. 현태는 찢어진 그림의 표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마른 유화물감의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으나 이미 그에게는 흘릴 눈물이 없었다. 그는 메마른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마녀의 손아귀처럼 하늘을 움켜쥐려고 가지를 뻗고 있는 죽어가는 나무 말이다. 그는 이미 끔찍한 범죄와 광기의 물감들로 자신을 온통 물들여서 더는 슬퍼할 수도 감상에 젖을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하거나 무언가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할 수도 있다. 어떤 동정심 많은 성직자나 면사포를 쓴 여자들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도하는 손들을 전부 물어뜯고 내 이빨자국을 남길 것이다. 나는 어떠한 종류의 용서나 위로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광인이었고, 자연재해였고, 힘껏 내리치는 한 번의 칼질이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현태는 오늘이나 내일 영운을 죽이려고 했다. 극의 막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 불쌍하고 자비로운 친구를 죽여, 그 시체를 영운의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인간이었다. 혹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인간성이 있기는 있을 것이었다. 현태는 자신이라는 지독한 수수께끼를 머리에 담아둘 누군가가 남아있었으면 했다. 비록 그런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어떤 결과도 남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태는 영운을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이는 일에 실패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누군가가 화실 문을 두드렸다. 현태는 어리둥절하여 화실 문을 열었다.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분홍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가 몹시 인상적인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현태를 보고 인사하며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러나 현태는 여전히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시죠?”
현태의 반응에 여자는 당황하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이 여자는 미용사다. 현태는 드디어 그녀가 누군지 떠올렸고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화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침 잘 왔습니다. 나는 옛날 기억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거든요. 현태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여기가 손님의 화실이군요! 아, 지금은 제가 손님인가요?” 그녀가 화실 안으로 들어와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도 따라서 웃어보였다. 사실 현태는 이 미용사가 정말로 화실에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태의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미용사는 화실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화구나 캔버스 따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근사한데요.”
“제 화실은 아니지만, 예.” 현태가 말했다. “그림을 좀 보시겠습니까?”
“네, 그러시면 감사하죠.” 미용사가 말했다.
현태는 구석으로 가서 쌓여있던 그림들을 한 아름 들고 왔다. 대충 열 개는 되어보였다. 그 그림들은 대부분 최근에 그린 것들이었다. 그리고 현태는 테이블 위에 그림들을 올려놓고, 미용사에게 손짓했다.
“제 그림을 보려고 굳이 여기까지 발걸음 하시다니, 영광이군요.” 현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에요. 저는 늘 가까운 사람 중에 예술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미용사가 흥미로운 눈길로 캔버스들을 보면서 말했다. 현태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서 그녀가 테이블 앞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미용사는 테이블 위에 쌓인 그림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림 하나당 일 분에서 이 분씩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폈는데, 현태는 그 뒤에서 뒷짐을 지고 무표정으로 그녀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작은 탄성이나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림들을 보았다. 현태로 말하자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그림을 모두 감상한 미용사가 현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찢어진 그림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그녀는 굉장히 흥미로워하며 그 그림을 집어서 살피더니 현태에게 물었다. “이 그림은 뭐죠?”
“아, 그건 말이죠, 살인자의 그림입니다.” 현태가 단조롭게 설명했다.
“그림 제목이 <살인자의 그림>인가요?”
“아뇨, 아뇨. 살인자가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현태는 웃으면서 말했다. 미용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현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현태는 그녀가 눈치 챌 순간도 주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빼내 미용사의 목을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현태는 경악하는 미용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아 목덜미를 한 번 더 찔렀다.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것 같은데.> 현태가 피가 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맞아.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이지…….> 미용사는 자신의 목을 붙잡고 도망치려다가 등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현태는 쓰러진 미용사 옆에 주저앉아서 그녀의 목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작은 단도로 여자의 목을 자르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살점들이 떨어지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목둘레를 거의 잘라내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목뼈가 드러나자 현태는 곤란에 처했다. 단도로 목뼈를 내려치자 빠득거리는 소리만 날 뿐 잘릴 것 같지가 않았다. 현태는 연골 부분을 몇 번이나 칼끝으로 찍어대다가, 결국 한쪽 발로 미용사의 쇄골을 밟고 두 손으로 목뼈를 뜯어내야했다.
드디어 미용사의 몸과 머리가 분리됐고, 현태는 한숨을 내쉬면서 잘린 머리를 안아들었다. “미안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내 범죄의 결말을 좀 더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거든요.” 현태가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중얼댔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의 캔버스들을 전부 치우고, 빈 테이블 위에 미용사의 목을 올려놓았다.
현태는 창가로 의자를 끌고 가서 앉았다. 태양빛이 눈부셨다. 얼마 뒤면 여름이 올 것이었다. 현태는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소연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손으로 무릎을 비볐다. 영운이 사준 바지에 피가 묻었다. 그는 이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가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미용사의 목이 눈에 들어왔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그것은 마치 마네킹의 잘린 목처럼 보였다.
저녁에 영운이 화실로 돌아왔다. 현태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를 반기며 말했다.
“아! 영운이. 왔군.” 그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영운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경찰을 불렀고, 현태는 도망가지 않았다. 경찰이 올 때까지 그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이 와서 현태를 끌고 갔다. 현태는 어떤 혐의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백을 하듯이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책을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에 옆 동네 골목에서 일어난 부녀자 살인 사건도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수사력보다 그의 자백 쪽이 더 빨랐다. 현태는 자백하면서 자신의 피 묻은 셔츠를 아직도 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경찰들에게 그것을 확인해보라고 건의했다. 경찰들은 현태의 방에서 피 묻은 셔츠를 발견했다. 모든 정황이 확실하고 현태의 자백에는 거짓이 없었다. 다만 그는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대답을 했다. 경찰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의사를 불러와야했다. 정신검사 결과 현태는 틀림없는 광인으로 확정이 났다. 그에게 붙여진 병명들을 하나씩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피상적인 명칭들만 가지고는 현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 우리는 이미 그가 끔찍하게 미쳐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현태는 며칠 뒤에 법원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공격적인 어투로 그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현태는 모두 협조적인 자세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검사가 자신에게 그토록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 그의 얼굴생김이 호남 형이었기 때문에 호의를 가지기 까지 했다. 현태는 가끔 대답을 하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것이 배심원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배심원들은 현태가 그렇게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상인처럼 웃는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증인석에 현태가 아는 사람들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곤 했다. 그 중에는 물론 영운과 영운의 아버지도 있었고, 미용실에 갔을 때 보았던 다른 미용사들도 있었으며, 현태와 영운이 옷을 사러 갔던 양장점의 사장과 현태에게 방을 빌려준 집주인도 있었다. 그리고 현태의 동창들 가운데 몇 사람도 증인으로서 재판에 참가했는데, 특히 반장은 현태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무척 유감이라는 표현을 하며 슬픈 눈으로 현태를 쳐다보았다. 현태는 그의 동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곤란했기 때문에 그저 슬쩍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일 뿐이었다. 아무도 현태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심지어 현태의 변호사조차도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태의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국가가 그에게 현태의 변호인이 될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은 것뿐이었고, 재판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현태에게 가해질 형량을 줄이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변호인의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판사에게 피력한 주장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는데, 그것은 현태가 중증의 정신병자라는 점을 확실히 고려해야할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피고를 담당한 의사는 피고의 분열증이 사고장애로까지 나타날 정도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고로 피고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온전히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의 변론에 대한 검사의 반박이었다. 그 말에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고, 검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피고가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괴물 같은 범죄자를 우리 선량한 시민들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격리하고 또 피고의 실종된 양심을 대신하여 그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 집행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했다. 검사가 말을 마쳤을 때 즈음에 변호사는 현태의 옆자리에 앉은 채로 현태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별다른 도리가 없군요.” 현태는 변호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운은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증인석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로서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현태가 옛날보다 나아지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한 사람의 화가로서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매일 같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예술 활동에 매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현태는 판사가 법봉을 두드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 것만을 기다려야하는 처지다.> 영운이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재판이 끝나갈 때쯤에 판사는 현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중 하나는 어째서 미용사를 죽였냐는 것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현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제가 사형을 선고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법관 나리.”
“그저 당신이 사형 당하기 위하여 그녀를 죽였다는 겁니까?” 판사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예, 물론이죠.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그녀의 목을 자른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목을 잘라놓으면 잘라놓지 않는 것보다 사형을 선고 받기에 유리할 것 같아서 그랬습죠.” 현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와 같은 문답이 두어 차례 반복되고, 그 뒤에 배심원들이 각자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판사에게로 전달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렸다.
현태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영운은 아무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고 변호사는 무성의하게 현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현태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배심원들이나 판사는 현태에게 사형을 선고해 놓고도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범죄를 후회하며 절망하거나 미치광이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어야할 살인자가 능글맞게 눈동자를 껌뻑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황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한 채 재판은 끝났고, 현태는 정식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에게는 독방이 하나 주어졌다. 쇠로 된 침대와 변기, 그리고 수도가 연결된 작은 감방이었다. 현태는 자신이 언제 사형 당할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왜냐하면 그는 여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비참한 꼴로 살아오기만 했는데, 이제 죽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주로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시간이나 운동시간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잠만 잤다. 이제야 그는 삶에 여유를 가지고 내키는 대로 지낼 수 있었다. 현태는 외롭지도 않았고 자유가 그립지도 않았다. 애당초 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감옥에 갇혀있든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든 모든 사람은 강제적으로 자유였다. 강제적으로 말이다.
현태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운동시간에는 뜰에 앉아서 구름들의 숫자를 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그는 행복했다. 그것은 삶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머리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죽음을 피해 내일을 향해 기어가야할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여유>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맛보는 그 여유라는 것을 기반으로, 현태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는데,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퍽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극한까지 그는 자신을 밀어붙였고, 그리고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현태는 이 정도면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체 명예나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못 다한 감정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것들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하루 종일 감옥에 갇혀, 그는 꿈속을 뛰놀았다. 꿈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졌고 그 꿈들은 대체로 즐거웠다. 사실 꿈 자체가 즐거웠다기보다는, 꿈이나 꾸면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있는 현태 자신의 상태가 즐거웠다. 그는 이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것은 왜인가하면 죽음이 자신의 발로 현태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현태는 이따금 꿈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꿈속에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꿈에서는 현태와 그녀가 부부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현태는 한동안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다가 이내 혼자서 웃어댔는데, 그의 웃음소리는 복도를 통해 감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자정에, 간수들은 잠을 자던 현태를 깨우고 그의 머리에 자루를 씌운 뒤에 어디론가 끌고 갔다. 현태는 속으로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다소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걸었다. 몇 분 정도 걸은 뒤에 간수들은 현태를 교수대 밑에 세웠고, 밧줄을 그의 목에 걸었다. 현태는 죽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으나, 전에도 몇 번 자신이 죽어본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웃었다.
“드디어!” 현태가 자루를 뒤집어쓰고 교수대에 선 채로 혼자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고요한 사형실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관심이 없었고,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사형집행인들은 세 명이었다. 그들은 사형실 옆방으로 들어가서 각자 어떤 버튼 앞에 섰다. 그리고 사형집행을 알리는 전자음이 울렸고, 그들은 동시에 세 개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현태의 발밑이 덜컥하고 떨어졌고 밧줄과 중력이 그의 목뼈를 부쉈다. 누가 현태를 죽인 것인지, 어떤 버튼이 발판을 떨어트렸는지는 현태는 물론 사형집행인들 자신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어느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고 살해당했다.
죽기 직전에, 현태는 <나를 향해 발사>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현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은 신문을 타고 사회로 퍼져나갔다. 영운도 그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이번 사형이 집행된 것에 대해, 얼마 전 새로 출범한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태를 사형시킨 것은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한편 현 정부의 정체성을 보다 강화하려는 수단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사를 읽은 뒤에 영운은 현태의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현태의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하기는 했으나 영운은 무어라고 대화의 첫 마디를 떼야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아들이 사형 당했다는 것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영운은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잘 지내십니까?”
몇 달 뒤에, 소연이 영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전에 비해 힘이 없고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운은 그녀에게 인사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연은 주저하다가 영운에게 현태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영운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물론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그림들은 현태가 체포 되었을 때 국가에서 가져갔다가, 얼마 전에 도로 영운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영운은 소연에게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물었다. 소연은 그림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영운은 턱을 괴고 앉아서 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영운은, 그 그림들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수는 없지만, 현태와 소연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만약 현태라면 소연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림을 주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돈은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대로 그림을 가져가라고 소연에게 말했다. 그러나 소연은 돈을 내고 정식으로 사고 싶다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다.
영운은 소연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이해는 동시에 어떤 쓰라린 감정을 몰고 왔다. 영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좋다고 말했다. 영운은 소연을 현태의 그림들이 쌓여있는 화실로 데려갔고, 소연은 얼마 안 되지만 값을 지불하고 몇 점의 그림들을 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