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글/시 2024. 4. 4. 17:27 |

서로,


 이게 시냐?
 이게 시냐고
 시라고 할만한 형태가
 남아있는 게 없잖아.

 그리고
 니가 인간이긴 하냐?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게
 생긴 꼬라지 밖에 없잖아.

 이놈 이거 계속 사람 신경 긁어대네

 이 거울
 내 것도 아니라서
 깨트리면 물어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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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땐 그랬지라는 말 하지 맙시다


 그곳이 네 번째 술집이었을 것이다
 정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고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났고
 손님은 죄다 흑인이었다
 대충 열 명 정도

 더 있었을 수도 있고.

 바테이블에 앉아 럼주를 시켰다
 바텐더도 흑인이었다
 직후 흑인 남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고
 술을 시켰다

 바텐더는 남녀에게 술을 가져다주었는데
 내 술은 없었다

 이봐요
 내 술은?
 아, 금방
 가져올게요

 곧
 옆자리 남녀에게 두 번째 잔이 서빙되었다
 여전히 내 술은
 없고.

 미쳤던 게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야 이 애미랑 씹질할 깜둥이 새끼들아
 라고
 그네들 말로 외쳤다

 뭔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나는 가게 뒤쪽 쓰레기장에 누워있었고
 어디가 아프지는 않았다

 달도 별도 없는 밤하늘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술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다
 술기운 떨어진다고 몸에서 싸이렌 울리더라.

 좁아터진 골목 거리
 네온싸인 켜있고 술집이면 그냥
 그냥 직입
 직입 했는데

 들어오지 마세요
 예?
 술 안 팝니다
 예?
 출입금지라고 저번 주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술 안 팔아요?
 들어오면 경찰 부를 테니 빨리 나가세요
 그럼 뭐
 별 수 없지
 말 잘 듣는 모범 시민은 야간버스 타고 집에나 가야지

 아침도 지나고, 정오
 하여간에 만사에
 도움이 안 되는 고깃덩어리, 온몸이 더럽게
 빌어먹게 아프고
 얼굴은 왜 이래
 강판에다 간 것 마냥

 히,
 희,
 희희,

 집안은 썰렁하고
 부엌에는 아침이 차려져 있고
 밥 집어먹다 창문을 보면
 어제처럼, 엊그제처럼, 늘상 그랬던
 것처럼
 구두들은 결연히 전진한다

 몸은 변기를 붙잡고 뭔지도 잘 모를
 어떤
 중요한, 부수적인, 무거운, 한없이 가벼운
 것을……

 에이씨
 몰라 숙취 때문에 오바이트 했다.

 이게 아마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백 년 전인가
 억겁 전인가
 내 기억이 맞기는 한가

 어쨌거나
 그 동네 아직도 딸랑딸랑
 현관 종소리 딸랑딸랑
 끝이 없다던데

 출입금지자 목록에 내 모습 올려놓은
 그 절박하던 사장들은
 어쩌면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절박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거기다 둥지를 틀겠어
 하기사 거기
 끝 간 데 없이 헤매다 보면
 뭐 반짝거리는 게 많기는 하다

 그래,
 빛나는 건 아니고
 반짝거리는 거

 두들겨 맞을 때 안구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 같은
 대충 그런 거

 그 술집도 이젠
 없다, 없을 것이다
 없겠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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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균값

글/시 2024. 3. 29. 00:15 |

평균값


수요일,
지정석이 생길 만큼
뻔질나게 드나든
싸구려 호프집

친구와 나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다른 하나는
말리려다
더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지켜보던 한 놈은
참다못해
미친놈 마냥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우리는
숨이 끊어지도록 웃었다

빈말이 아니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네 명
셋은
머리 꼭대기까지 취했는데
나는
술이라고는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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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탄식한다, 고 탄식하는 놈이 세상천지에 있기나 하냐


잿더미가 된 세상
이라는 말이

이렇게
지겹고
아름답고
향수를
자극하고
기쁘고 애달픈지

아마 거기서 꽤 오래 살았는가보다
어떤 때는 이렇게
재투성이 마을을 둘러보고
그거 헤집고 있노라면
이거 죄다
진금(眞金)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금싸라기 잔뜩 덮인 골목에
발 푹푹 빠트리면서
휘황찬란 소주병

곱사등이
인간들아,
인간?

인간이고 진인(眞人)이고 사실
잘 모르겠고, 동지라고 불러주랴?

그런데 그들도 다 안다
우리 눈 마주치는 순간
용암 같은 동지애가 끓고 솟구쳐서
쌍욕 튀어나오려는 거 서로 안간힘으로 참고 있는거
다 알고
그 순간 세상은 다시
잿더미 되는 거
안다니까

그렇게 나는 또 향수를 자극하다, 와
노스텔지어, 둘 뿐인 갈래길에 무릎꿇고 뇌수랑
심장 비슷한 거 쥐어 뜯으면서

쥐어 뜯으면서……
방금 뭘 봤더라


재투성이 마음은
잿가루 휘날리는 잿더미 뿐인 동네를
몹시도 열렬히 사랑하고 사모하고

숨쉬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못해처먹겠고
해야하고
바쁘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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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들은 제자리에 있을 줄을 몰라서


지붕에 엮어놓은
나무들이
썩어서
날이면 날마다
턱턱 떨어져서


떨어져내리는구나
그게
뭐든 간에.

누군가 다가와서는
이거겨울에얼어가지고떨어지는거누구정수리에맞기라도하면보통일이아닌데언제날잡아서싹다갈아야겠는데응?안그래요?내가이런일해봐서아는데이게

나는
가던 길 계속 갔다
떠드는 누군가는
계속 떠들고.

일 없수다
떨어지는 게
나무뿐인가……

그가 뱉는 말들
내 신발 밑창에서
발자욱에 들러붙다
뚝뚝 떨어지고

이상할 만치
싸늘한 봄이 오고
있고

나무야 뭐
이제 얼지는 않겠지
계속
떨어지기는
하겠다만은.

Posted by Lim_
:

아세트아미노펜이

글/시 2024. 3. 22. 21:17 |

아세트아미노펜이


그러니까
펜잘이나 타이레놀
뭐 그런 거

그런 게 마음의 아픔도
공포나 불안 같은 거
뭔지 알지 그런 거

달래
준다고
과학자들이 그랬더라고
친구가 말했다

마침 번민하던 차에
그래서, 그거
번민에도 듣냐
물어봤더니만

그런 것 같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그런 것 같댄다

염병
약 먹고 행복해질 것 같았으면
내가 인마,
진즉,
아,
됐다 인마......

고개 들자
비구름이 짓누르는
얕은 산능선

조명더럽게밝은
골프장

잔디 한 번
잘도 깎아놨네

불 밝다
밤이다
자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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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등바등 악에 받쳐가지고


날짜 확인하려고 테이블을 보니
약이
삼 일치 남았다.

사서보관해놓고삼키고마침내남은
삼 일

삼일?

달력이고 일수가 무슨 대수라고
만세부르고 다닐 것도 아니고
머리 꼭대기에 해뜨면 일수가방 들고
설치는 놈들이나

은행 달력 나눠주며 이 날이
원금 이자에 생명 갚을 날이라고
지껄이는
놈들이나

더러는
남의 돈으로 일 개월 사러
병원 가는
미친놈이나……

아아.
아아아아.

삼 일이라기보다
삼생(三生) 같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발.

그래도
아니,
그런데,
이 꼬락서니들 왜이리
증오스러울만치 아름다운지
당최,

그러니까, 그래서, 아무튼, 때문에,
아니, 모르겠고, 일단은,
오늘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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섧고 추하고 고독하고

글/시 2024. 2. 27. 11:20 |

섧고 추하고 고독하고


빌라 옆 동 사는 아저씨가 새벽부터 지랄이다
새벽부터
60분 주기로 옥상에 올라서서는
야 이 씨발년들아
받들어! 총!
씨발년들아!
받들어! 날
받들어!

담배 태우러 나갔더니
동네 사람들 웅성웅성
집단을 군중을
대중을 뭐 그런 걸 이루고
웅성웅성
누구는 112에 전화를 하네

당신들 이 동네 몇 년 살았습니까?
다들 수십 번씩
드러낼 거
다 드러내 놓고서는……

그렇게 모여있으니
담배도 못 피우겠잖아

시간은 얼추 오후 두 시
아저씨 다시 한 번 옥상에 나타나고
오우, 쓋
오 마이 갇
오케이, 쏘리

낄낄낄

나는 담배에 불 붙이고

아저씨
받들어줄 사람도 없이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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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에서

글/시 2024. 2. 7. 22:12 |

호프집에서


그러니까 내 말은
작년 유월 구 일에 술을 끊었고 그러나 친구가 이미 수년 전부터
나와 마실 봉삼주를
담가놓고
있었고
그냥 음료수인 줄 알았던
개복숭아청은
알코올이
들어
있었고
논-알코올이라고
새빨갛게 써갈겨놓은
칭따오
캔맥주에도
알코올이
들어
있었다고

그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가 뭔데
친구가 짜증을 부린다

겨울이라 낮이 짧아, 나는
태양이라는 놈이 가라앉은 후에만
담배를 피운다
춥고 어둡고
외롭고
행인이 없고
친구는 가게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고
튀겨버린 닭이 있다

아무튼 쓸쓸하고 음침한 구석만 골라가며
담배를 피우는데
망할 놈의 인간
인간이
아니 행인이

담배는 순식간에 타들어가
시뻘건 나체가 길게 드러나 있다 나는

뛰듯이 그것들의 현실에서 도주한다
지 몸속에 맥주를 퍼붓는 친구 앞에 앉는다
시발, 너
담배 냄새 진짜

시끄러워
접시 위 남의 뼈다귀나 헤집는다
이 미친놈은 친구를 앞에 앉혀 놓고
다른 세상 공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그런데 닭이 뼈만 남고
저 미친놈이 빈 잔만 쥐게 되면
나는 또
저 밖 어느 구석으로


친구가 나를 바라보고
너 더 마셔
친구가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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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읽는 법

글/시 2024. 1. 2. 11:00 |

지도를 읽는 법


그들이 말했다
이 길이다,
이 밖의 모든 길
저열한 자멸의 걸음걸이뿐이니
손과 구두에 흙을 묻히지 말고
백로여, 너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말라,


그래서 그들이 말했다
이 길이다,
밑으로 가자, 모든 무덤과
썩은 기름과 비탄 아래로
창부의 눈물과 살인자의 손아귀 안
용암 같은 원초는
틀림없이 이쪽이리라,


무진장의 그들이
이 길이다, 이 길이다,
이 밖에는 길이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했다
말했고,
고함쳤고 웃었고 울었고
살았고 죽었고 춤을 추었고

그렇게수없이난길인지길아닌지알수도없는땅을구르고구르고또구르다지쳐
쓰러지고서

그들이 말했다, 고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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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글/시 2023. 9. 8. 11:59 |

시인의 마을


시인의 마을에
여러분이 꿈꾸는 평화는 없다.
시인의 마을에는
운율도 지혜도 법칙도 없다
정적조차도
이곳은 오로지 인간의 땅
백주대낮 소주병을 들고 걷는
곱사등이 노인, 담배 연기를 숨쉬는
유모차 안의 아기들
모두를 의심하며
곁눈질로 게걸음을
걷는
공포에 질린 사람
사람들
진실이 없는 댓가로
사실만이 과포화된 골목.

태평양 너머에서 온 친구는
내가 사랑했던 나의 마을을
창동 어사일럼이라 부르고
경쾌하게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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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뜨리다

글/시 2023. 3. 29. 20:33 |

어지러뜨리다


한낮은 밤을 기대하는 마음만으로 흘러간다
사내는 낮 동안 과연 어떤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세어보고
결국에는 열 손가락 전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서운 불안이 텅 빈 페이지 위에
약속처럼 사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는 날조된 기억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중얼거리고, 까닭도 근거도 없이
악독한 슬픔이 벼락처럼 혈관을 돈다
침침해진 눈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는
그를 보고, 사내의 동생은
저녁을 먹겠느냐고 간단히 묻는다
뜻밖에도 날씨는 선선하고
나무들이 새잎을 창문에 부딪혀대고 또
바로 어제 형광등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

빈 페이지는 굼뜨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간다 또한 우습게도
처음 그 변색을 발견한 것은
사내가 더는
스스로의 직업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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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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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에게

글/시 2023. 3. 12. 19:37 |

사상가들에게


장고하지 말라,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다
먹을 것만을 찾아, 팔십억 인간들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 다닌다
그 대단한 숫자보다, 턱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 발밑에 아무 역사 없이 쌓여있다
땅이 교훈을 주리라 믿지 말라, 의미란
비바람에 무너진 묘비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운율에 맞추어 글 쓰는 일일랑 그만두고
우연히 나타난 생애나 듬뿍 들이켜 취해버려라
우리는 회한할 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리라, 그러니
닥쳐오는 모든 것에 장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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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1.
너희들이 털가죽 없는 살덩이로 태어날 때
세상은 벌써 날고기를 먹는 놈들로 가득했다
너희들이 추운 새벽에 힘겹게 깨어날 때
태양은 너희들을 위해 눈떠주지 않았다.

2.
내가 만난 너희들은 모두 종점 출신이었다
너희들의 생이란 그 삶을 쪼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란 몹시 체계적이며 균등하다고 강론했다.

3.
그러나 땅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밑에 묻힌 자들은
혀도 입술도 썩어 흙이 되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기에
너희들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4.
너희들은 3월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끌고
누구도 비웃을 수 없도록 길고 어렵사리 달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느 닫혀가는 순간에
과연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5.
나는 미로 한복판에 수십 년째 퍼질러 앉아
이제는 사망기사란도 사라진 신문 따위를 생각한다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터트릴 웃음에 관해 생각한다.

6.
오만한 나는 아직 젊어,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나 또한 너희들처럼 종점 출신으로
종점이 될 정거장에서 벗어난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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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밑 어둠

글/시 2023. 3. 5. 16:29 |

책상 밑 어둠


그곳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늘진 눈앞에 벽돌처럼
두꺼운, 책 하나 펼쳐놓고서
읽을 수도 없는 수많은 단어
군인들처럼 줄지어 섰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눈은 가만히, 페이지에 떨어트리고
불 밝은 거실에는 소란한 잡음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나는 모조리 듣고 새긴다
밤은 모두가 저주하는 시간
말하지 않고 눈에 담지 않고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그렇게 나는
잠드는 법을 영영 잃어버렸다

지저분해진 책상 한구석
흰색 졸피뎀 푸른 트리아졸람
누군가의, 잠들어 꿈꾸는 밤.

Posted by Lim_
:

여명

글/시 2023. 2. 28. 09:05 |

여명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창문의 방풍재를 뜯어내며
꺼림칙한 냄새가 난다, 고
사내가 중얼거린다
매일이 겨울인 북쪽 나라에선
하늘도 꽝꽝 얼어, 이런
생선 비린내 따위는 나지도 않겠지

팔은 창틀에 걸치고, 오늘도
기어코 살아있을 예정
적색 태양 붉은 구름
물고기 같은 사내의 눈에
황동빛으로 둔탁하게 비친다

동트는 새벽하늘은
금붕어의 주황빛 비늘 색

그러고 보면, 아주 예전
수조에 키우던 금붕어
함께 살던 남생이에게, 몸통
반절을 뜯어먹히고
헤엄치고 있었지

반토막으로, 지저분하고 아둔하게
헤엄치고 있었지,
라고
사내는 생각하고
이내 내다보던 창밖은
새빨갛던 구름 하늘 덧없이 푸르러만 가고.

Posted by Lim_
:

초상

글/시 2023. 2. 26. 14:11 |

초상


1.
 언덕 중턱에는 성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지하실부터 시작해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는 어렸고 뛰어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새엔가 성당 앞마당에는 하얀 성모상이 세워졌다. 가끔 젊은 신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숭고함 따위를, 우리는 언덕을 오르며 가슴 속에 썼다 지우곤 했다.

2.
 술과 담배와 약 따위로 얼룩진 젊음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없었다. 아침인가 하면 밤이었다. 미래를 믿지 않는 용기로 나는 숨 가쁘게 살아있었다. 변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고 불경을 읽었다. 죽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내 육체로 숨을 쉬었다. 내게서 지독하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났다. 방 곳곳에는 늘어진 술병과 끔찍한 시취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플 때는 죽을 만큼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3.
 그 언덕에 오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톨스토이를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자살한 소설가들이 귓속말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해가 뜨면 행인들을 보러 나섰다. 그들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도망쳐 들어왔다. 내 책은 쓰던 중에 고리타분해졌다. 젊은 신부가 얼마나 늙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성모상이 보고 싶었다. 대리석의 불투명한 흰빛을 다시 스치는 시야에 담았다가 잊어버리고 싶었다.
 밖은 새벽 네 시. 길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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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어제는 몹시도 술잔을 비웠습니다
전날도, 그 전날도
새벽에도 등 밝은 어느 맥주집에서
벌써 2월도 끝나가는데, 그 집 창문에는
성탄절 램프들이 깜박거리며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고
나는 코트의 지퍼를 목덜미까지
바짝 여미고, 황금빛
황금빛 잔을 연달아 입으로 옮겨가고
그러나 누구와 마셨는지
어느 누구와 장대한 허풍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술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을
비싸고 덧없는 안주처럼 주워섬겼는지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게에는 어느새 우리밖에
누군지 모를 우리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마시고, 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자비하게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귀청 떨어질 웃음소리를 내다가……
멍한 채로 나는 아직 동트지 않은
어렴풋이 가로등 빛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태웠습니다
늦겨울 추위에 만취한 몸은 떨리고
나는 연기를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없이, 다만 술은 계속 내어와 지고
또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나는 마시고 있는지, 몰래
눈앞의 표정 몰래 세어보며
알코올에 붉어진 얼굴과 눈동자로
도대체가 낯모를 눈앞의 그 얼굴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바라보는 것입니다
해는 곧 뜰 터이고, 인조가죽 지갑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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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빛

글/시 2023. 2. 6. 16:05 |

아침의 빛


태양은 쏜살같이, 잠든 머리 위를 스쳐 갔다
헐떡이는 폐부를 문지르며 커튼 자락 잡아당기자
창틀에는 이미 겨울밤 피어올라 있었다
검은 창문에 비친 얼굴은 희끄무레하였다

주차된 차들 위로 밤빛 무겁게 비춘다
잠옷 차림으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가로등 주광색이 흰 연기에 물먹듯 스민다
메마른 바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읊조리고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며,
까닭 없이 슬픔은 시작되었다 다시
니코틴 따위가 혈관 곳곳으로 퍼지고
건널목 너머 주택에 켜진 형광 불빛만으로도

나는 그만 장초를 버린 심정이다, 한 모금
한 모금 그 형광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 황금빛 태양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지면
이 뿌리 없는 서러움도 재가 되려는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리퍼 끄는 맨발은 아프게 얼고
겨울은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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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글/시 2023. 1. 18. 17:17 |

연초


흐린 창밖에 싸라기눈 내린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벽시계는 수년째 밤
9시 58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 독서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나는
책들이 단단히 물고 있는 총 아홉 개의
빛바랜 책갈피들을 뽑는다 신중히
책상에 모아 담뱃갑과 라이터로 눌러 놓는다

하늘에서 눈 내리듯
바닥에서 안개 솟는다

아득할 만큼 많은 연기를 마셨다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 안구는
희뿌연 연무로 가득 찼다
그렇게 몇 자의 탈력이며 좌절들을 적어놓고 나는
얼마나 오래 으스러지도록
고독과 껴안고 살았는지
늑대처럼 고고하게 울부짖지도 못하며
움츠러들어 왔는지
시계를 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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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으나 해는 뜨고


그러니까 전날 소주를 마시고
또 뭔가를 마시고
이유도 없이 흥겨워 그는
또 무척 슬퍼했다

세상의 표면에는 밤빛 산란하는
무지갯빛 유리벽, 당장
깨질 듯이 얇게 덧씌워지고
겨울바람 더는 날카롭지 않았다

아침 한숨은 프레스기의 허덕임처럼
연달아, 주기적으로 솟아 나온다
지퍼가 터진 가방에는 또 한 병의 술
술, 차갑게 식어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중얼거리는
마음을 병 안에 접어 넣고
한 칸 한 칸, 그는 다시
비좁은 방에 유리벽을 세운다

언제고 깨져버릴 휘황찬란한 벽들 안에
황제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죽어있고
오로지 나는 살아있어, 소독약 냄새 나는
조소를 뱉는다 그는 벽들 뒤로 흐려져 간다

태양은 또 제멋대로 떴으나
밤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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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백형

글/시 2022. 12. 22. 10:42 |

예술가, 백형


눈 깔린 길 걷자 태양 떠오른다
하얗게 서리진 풍광 날카롭게 비추는데
나는 망월사역에 술 얻어먹으러 간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야, 백형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니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술 마시러 간다
칼국수집에서 우리는 맥주를 잔뜩 마셨고
점심 먹는 손님들 가끔 흘낏하고
이쪽을 보곤 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붉게 붉게 달아올라
겨울 추위도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싶었다
인문학의 쓰레기통 같은 백형의 집
우리는 더 마시고 더 소리 높여 미래
미래를 떠들어대고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백형은
점점 취기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는 잘 될 거야, 그럼, 잘 될 거야
나는 맥주를 더욱더 위장에 내 안에 쏟아붓고
다른 수가 있겠어, 농담하듯 잔을 부딪치고
또 마시고, 턴테이블에 재즈 음반을 걸고 또
물론 잘 되는 수밖에 없다고 웃어넘기고

잠든 백형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얼음송곳처럼 찔러왔다
전철 승객들은 오후 3시 만취한 남자를 어떻게 보았더라, 내 기억엔 아무도 없다
물론 잘 되고야 말겠지, 중얼중얼 술 냄새 지독한 한숨을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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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평화로

글/시 2022. 11. 10. 17:09 |

의정부시 평화로


그는 자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한다
하얀 석영처럼 해가 빛나고
거리에 비애가 자라나기에는
아직 이른 오후 다섯 시
그는 어디서 술에 취했을까
멀리 기름종이 같은 하늘 올려다보며
내쉬는 한숨에 에탄올 냄새 섞여있다
따개비 무리 같은 재개발 지구를 지나
왁자한 대학생들의 희멀건 윤곽을 피해가며
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왔다
이건 고독을 비껴가는 방법이야, 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탁한 명정
늦가을 바람이 일고 눈꺼풀이 감기고
앞으로 며칠간 그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가는구나
골목 울타리에 기대 손안에서
애먼 담뱃갑만 돌릴 때, 바닥없는
밤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늠름히 걸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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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글/시 2022. 10. 27. 18:00 |

시월의 어느


자꾸만 구역질이 난다
아 하고 성대를 울려본다 나는
어제부터 말한 기억이 없다

거리 위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우듬지 주변엔 창백한 가을 하늘
멀고 낯설고 까마득히 흔들리는데
곧 눈은 시리고 벌겋게 차오른다

흐려진 눈동자와 안경 너머로
찡그리고 바라보아도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그저 종일 앉아있던 방안이 어둑하고
너무 오래 하늘과 마주 보지 못했고
익숙지 않은 미제 담배가 독하고 맵고
찬 바람에 온몸이 팽팽히 굳은 탓이다

방으로 돌아와 전등을 켜니
눈동자는 다시 붉게 떨려오는데
여기 어디에도 슬플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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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글/시 2022. 4. 14. 23:22 |

사월


삼거리에 벚꽃잎 마구잡이로 흩날린다 친구는
군시절 생각난다고 욕설을 뱉는다
그제야 나는 가게 앞 비질하던 돼지갈비집
사장님을 생각한다 보도블록 위에 짓밟혀
갈색이 된 목련을 생각한다 매일
건물 앞에 쌓이는, 명함 같은 찌라시들을
생각한다 가을마다 바빠지는
환경미화원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월의 둘째 주
친구 모두 정장하고 걷던 청명한 식장 앞
꽃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과 연인들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날만은
진 꽃잎이 썩어 짓무르리라는 생각 따윈 하지 말자고
아무도 몰래 다짐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벚꽃도 낙엽도 치울 일 없이 살아오던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무엇이던
끝에는 하수도로 쓸려가리라고
음울한 상념만 중얼거리던
내 굴곡 없는 손마디가 보이고
벚나무 심어진 부대에서 봄을 보낸 친구에게
할 말 없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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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자취

글/시 2022. 3. 24. 23:10 |

봄의 자취


봄이 당신을 데리고 갔다
그곳은 아주 먼 데에 있다
당신과 함께 가버린 봄에는
시간에 새겨지는 풍경 소리
적송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편 하늘에 스러지는 노을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당신과 손을 겹친
안경을 쓴 젊은 청년이 있다

당신이 간 머나먼 곳에
어떤 풀벌레가 방울처럼 우는지
어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지
어떤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는지
나는 알래야 알지 못한다
그곳은 삼천대계가 당신의 회색 눈동자고
새벽처럼 미소 짓던 당신의 침묵이리라고
외투를 여미며 쓸쓸히 공상해볼 뿐이다

당신이 봄과 함께 멀리 가버리고
이 땅에는 십 년 동안 마른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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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인간

글/시 2022. 3. 3. 22:50 |

낙타 인간


암석과 모래 위로 한 남자가 걸어간다
야윈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드러난 정강이는 비척비척 걸어간다
아무도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모른다
머리 위로 녹은 황금이 쏟아져 내리고
발자국마다 암염조각이 바스러진다
모래바람은 속눈썹만을 더욱 자라게 한다
아무도 그의 눈동자를 본 적 없다
모래 위에 자국도 남지 않도록
발바닥은 굳은살로 넓고 평평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 나섰으나
모래바람은 흔적도 이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주황색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가
용광로인 듯 끓는 태양에게서 몸을 피한다
까뮈의 배교자처럼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스스로 다가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 그는 다시 떠나야 한다
이제 땀도 흘리지 않는 피부 밑
끈끈한 피는 바깥세상의 폭염처럼 고함친다
무언가 분명한 것, 아마 사막의 끝에
틀림없이 거기 있을 무엇을 울부짖는다
점점 그는 걷는 현상이 되어가고
눈물로 허비할 수분은 허락되지 않고
아무도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막과 하나 될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그 남자 역시
자신이 울고 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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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늬

글/시 2022. 2. 27. 00:05 |

바람의 무늬


바람이 강의 표면에 새겨진다
난간 높은 마포대교
청년은 수면에 그려지는 언어를 읽는다
갈기 휘날리며 날뛰는 겨울바람
너무 오래 사납기만 했다
저 밑에 오리들 헤엄친다
그것들은 늠름하다
바람을 타고 날 뿐만 아니라
물결 위에 자신의 무늬를 덧씌울 만큼
그러나 청년은 계절마다 바람에 쓸리고
투명한 상처에 어리둥절했고
영혼에는 풍이 들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려는지
날씨는 조금 따듯하고
내일부터 청년은 일정이 없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난간에 손을 뻗어본다

검은 머리카락
읽을 수 없는 무늬로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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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유감

글/시 2022. 2. 19. 21:38 |

학력 유감


아버지가 대학에 다닌다
곧 우리 가족은 대졸자가 둘이다
방통대 학생회장 출마
플래카드 펄럭이는 캠퍼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까마득한 후배다

아버지도 어느새 내 학력을 추월하고
나는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은
십오 년째 작가 지망생
글 쓴다고 저녁마다 술이 고픈
나는 술값 좀 벌어보자고
몇 번이나 아버지 과제 대필했다.

무슨 돈으로 내가 막걸리 마시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거리에서
푸른 담배 연기 뿜어 올리는지
어머니는 모른다

대학영어 낙제한 아버지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일어나던 나는
꼬여버린 우리 집안 학번에
문득 웃었다가
대필값 돌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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