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화재

글/시 2017. 3. 16. 21:56 |

숲의 화재



나무들이 거대한 기둥을 세운

태초의 사원과 그 깊은 정령들의 냄새에

우리는 불을 놓았노라


늙은 사원은 광기처럼 불타고

정령의 눈, 코, 길쭉한 웃음

따위를 가진 짐승들은

자유롭게 타 죽어갔다


오! 내 옆, 보이지 않는 동행의

싱싱한 어깨를 나는 껴안으며

그의 공포에 기름을 발랐다


사람이여, 부디 내가 누구인지 묻지를 말라

나는 매듭지어진 고리와 같아

언젠가 풀릴 매듭이며, 어쩌면

이미 풀렸을 지도 모르이


불길은 새로 지어지는 사원처럼 드높이 쌓인다

재와 신록의 냄새가 난다! 나는

동행에게 묻는다: 무슨 냄새가 나느냐고

<불꽃>! 윤기가 도는 입술을 그는 떨었다


아하, 나는 웃었다. 정령들의 탄 재가

소용돌이치며 불꽃의 저편―천상으로

거인의 날개를 편다

파아란 노목들 관념이 되어

이제 내 심장에 잎사귀 핀다


동행이여! 불꽃에, 광란의 화재를 끌어안고 큰 숨을 쉬라

콸콸 쏟아지는 성화의 열기와

새하얀 죽음이

영령처럼 네 폐를 채우리라.

Posted by Lim_
:

생활인이라는 개념을 질투하다

 

 

굶어죽으려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이었다

나는 돼지처럼 먹었다

 

길거리를 걸어보았다

혁명의 잔재마저도

온데 간데 없었고

모조리 황금의 배설물이었다

 

붓다도 예수도

마르크스도 레닌도 그 어떤 사상가도

존재의 은거에 들어갔다

나는 한낱 풀이다

 

그림자 밑에 서자

눈물샘에서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세계는 작동하고

활개친다

 

노동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것은 사어死語

누구도 노동할 수 없다

삶의 반대는 정직이다

 

의사는 내게

생각을 멈추는 약을 주었다

그것은 잘 들었다. 너무도.

그러나 해가 뜨면 약효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매달 내 손에 들어오는 지폐에

시뻘겋게 핏자국이 묻었다

보인다. 나는 미쳐가고 있거나

이미 미쳐버렸다

 

내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랜차이즈 기업

말단, 무산계급인 나는 노동력을 팔며

나의 노동력을 사가는 사람들의 손가방을 본다.

 

지금도 누군가가 아사했다…… 혹은

살 수 있었는데도, 내 손으로 병사시켰다

피 묻은 지폐 때문에

내 돼지 같은 탐식 때문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굶어죽으려 했다. 불가능했다.

내 의무는 타인의 의무를 등진다

혹은 이 황금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한다

 

스승께서는

사변하는 자의 정체를 의문하라 하셨다

그는 지혜로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신을 열렬히 증오한다

그는 정신병질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열렬히 연민한다

 

나는 세계를

인생을 인류를 중력을 증오한다

나에게는 분명 커다란 인류애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과만 벗이 된다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비트겐슈타인의 얇은 금언을 기억하며

보다 빛나는 것을 찾아다녔다

잿더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황금에 무고한 자들의 피가 덮여

나는, 그런데 나는

나는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심장은 까맣게 타버렸다

 

철컥, 철컥, 세계는 작동하며 활개치고

사람들은 먹을 음식을 지폐를 내고 사간다

어디에서든…… 모든 사상은 실패했고

사상 자체도 실패였다. 금대今代.

 

눈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자에 발광하여

나는

이뤄지지 않을 이상과 결별하지도 결별하지 못하지도 않은

나는 도대체

나는

 

곧 다시 동이 튼다

저쪽 동쪽, 어쩌면 따뜻해 보이는 저 동쪽에서

영겁의 절망이 뜬다.

 

랭보는 분명히, 자신의 두 손목을 잘랐다고 선언했지

10대의 후미에서.

 

나는 내 뇌수가 불편하다.

Posted by Lim_
:

작별인사마저 부정당하여



암담한 것은

이 밤이 끝나기 때문이다

눈물방울 같은 달이

천문학에 힘입어 가라앉고

동이 트면

사람들은 눈을 뜨기 때문이다


별들이 만들어 둔 깊은 동굴은

증발하고야 만다

꺼져있던 신호등들

지구와 함께 달릴 것이다

Dawn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Done과 닮았다


마음 속 슬픔이 어디로 갔는지

과연 누가 알기나 하련가

나는 꿈을 꾸러 간다

나의 꿈이 아닌

이미 죽은 이들의 꿈을 꾸러간다


촛불 꺼지듯 꺼지는

내 영혼이 가장 충실했던 시간


자로 잴 수 없는 유구한 미래가

나를 압살하고 말리라. 내 육신

그림자로 꽉 차

이미 모노크롬이 되어가네.


멈추지 않는 기침 끝자락 즈음에

타나토스가 바늘처럼 쏟아져 나오네.

Posted by Lim_
:

거울과 견자見者

글/시 2017. 2. 20. 23:04 |

거울과 견자見者



수천 번 원을 그려도 원은 그려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선을 그어도 선은 그어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나는 보이지 아니한다


플라톤은 너무 쉽게 말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욕설을

입안에서 잘근잘근 씹는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그곳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더러는 나

자신이 알 수 없으니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털끝이 거꾸로 선다. 하얀 벽지가 발려 병실의 소독약

냄새가 당장이라도 스며들 듯한 방에서

이미 형체가 불분명해져 망령처럼 되어버린 나의

하얀 손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수천 번 물어뜯어도

나의 손일 리가 없음이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은 한 줄의 선이다

그러나 그런 선이 존재할 도리가 없다

벼랑 끝에서 발밑을 조심하기는커녕 하늘이 천구天球라는 것에

어리둥절하여 머리 꼭대기를 수천 번 쳐다보는

아무리 영혼의 커튼을 걷어도 존재할 리가 없는 눈알이다.


물컹거리면서 딱딱한, 차갑지만 뜨거운 피를 흘리는

그러나 그 현실감 없는 윤곽에 나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몸뚱이 수천 번 난자해도 비명 지르는 건 내

가 아니라 수천 번 보았던 거울 속의 타인, 혹은 망령

아니면 수천 번 그려졌던 아무것도 아닌 것


직방형의 하얀 공간에서 내 물컹거리는 말초신경으로 우연히 발견한 물컹거리는 어떤 나비의 혹은 나방의 유충을 눌러서 죽이면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비현실적인 내장들과 체액 그것들은 비현실적이라는 단어조차 무용할만큼 비현실적이어서 동시에 그 체액이 묻은 내 물컹거리는 <손가락>이라는 이해될 수 없는 어떤 단말은 분명히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터진 애벌레와 구별되지 않고 그러한 일련의 광경들을 쳐다보는 나의 창窓도……, 그 창을 내다보는 누군가가 누군가인지를 알기위해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기에 수천 번 거울을 보았지만 거울은 사실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모호성을 더욱 확장시켜놓기만 하는 공포의 도구였다


수천 번 눈을 뜨자 나는 108개로 분산되어 마치 미지근한 설탕물을 타놓은 압생트처럼 희뿌옇게……


아아, 그렇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Posted by Lim_
:

파충류의 수기

글/시 2017. 1. 4. 10:11 |

파충류의 수기



어느 날 내 눈을 장막처럼 가리고 있던 안대가 풀렸을 때, 나는 나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끈적거리는 윤기와 함께 빛나고 있었으며,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심지어 나는 내 뇌수조차 도마뱀의 그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해가 질 때를 노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의 작은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며칠간을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술 취한 사람처럼 벽에 몸을 부딪치고 다녔다. 자결하려고 했지만 편지봉투를 뜯을 때나 쓰는 작은 나이프로는 내 비늘을 자를 수 없었다. 절망의 새벽이 몇 번이나 지나간 뒤 나는 더 이상 고함지르지 않고, 방바닥에 웅크린 채 내 차가운 심장에서 증오와 공포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냉혈동물이 되어버리자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아, 보일러조차 들어오지 않는 싸늘한 다락방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방바닥을 하염없이 긁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마그마 같은 증오에 사로잡혀 다락방을 마구 뒤지다가 나의 작은 노트와 펜을 찾아냈다. 세 시간이나 걸려 물갈퀴가 있는 손으로 펜을 놀리는 데에 익숙해졌다. 나는 노트에 아무 말이나 갈겨대면서 내가 이젠 분노와 공포밖에 남지 않은 쭉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안대를 벗기 전에도 파충류였다는 광적인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적들은 항상 내 도처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파충류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로써 그들은 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드디어 그들 모두를 마귀처럼 불꽃처럼 증오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산산조각 내 피가 흠뻑 젖은 살점들을 씹어 삼키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 좁은 다락을 나간다면,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인간들이-그러니까 나의 적들이 나의 심장에 창을 꽂을 것이다. 나는 살해당할 수 없었다.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다. 고로 내가 그들을 살해하거나 무한히 증오해야만 했다. 나는 사태를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한참을 다락 안에서 돌아다녔다. 나는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권총도 그럴싸한 나이프 한 자루도 없었다. 만일 무기를 조달할 필요성이 있다면 나는 인간의 거죽을 구해 뒤집어쓰고 인간의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흉내를 내려면 우선 그들을 연구해야했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명철한 직관과 지성이 있었다. 나는 불 꺼진 다락에서 파충류의 눈동자로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기록해야한다는 강한 소명을 느꼈다. 나의 이 무구한 증오를 축복으로 여기면서 공포라는 잉크로 지금 몇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는 곧 나의 본성대로, <그들>이 나를 만든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누구의 것이든, 길바닥에 쓰러지게 될 시체를, 혹은 시체들을 위하여: 파충류 만세.

증오 만세.

살인 만세.

Posted by Lim_
:

검은 입상立像

글/시 2016. 12. 24. 05:53 |

검은 입상立像



밤 같지도 않은 밤이 밤이라고 속삭거린다.


새벽거리 북풍에 휘날리며 신문지들

인간들 마구 뒹굴고 날아간다 네온이 발하는 광선은

신문지의 윤곽, 불 꺼진 아스팔트의 검은 윤곽,

술 취한 대학생들 이상한 색깔의 머리칼 윤곽을 만든다.

나는 어두운 지하철역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가짜 프롤레타리아,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빈궁한……」 나는 네온사인의 바깥에 있다.

바람은 엉망진창으로 분다. 이 도시에서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바람은 이쪽에서도 불었다가 저쪽에서도 불며

이 찬 바람에 나는 지금이 겨울밤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이상한 보라색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참을 서있었다.

혀가 바싹 마르는 것이 지독하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취객들이 지나가는 거리의 변방에서

내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술을 마셔버리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나의 영혼은 알코올이 주사되면 집을 잃어버린다

집? 아니, 내가 돌아갈 수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언제 발걸음을 떼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순간 나는 하늘이 칠흑 같지 않다는 것에 화가 났고 또한

별들이 내려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차들은 소음을 뿌리고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검은 포도를 달렸다

「너는 이미 서명을……그러니까, 네 피로 사인을 했어

언제였는가 하면, 탯줄이 끊어지던 순간에.」 피로 된 무산계급

무산계급의 피

나는 돌연했고 이질적이었고 전혀 계측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모두와 같은 것이었고 다소 녹이 슬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번개도 치지 않는 겨울의 새벽은 더럽게 춥다

밤 같지도 않은 더럽고 대기에 쩍쩍 금이 가는 것 같은 새벽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가 없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 없다.

Posted by Lim_
:

비인간非人間의 신화神話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헛된 삶에

오로지 이것만이 헛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비극이다. 그 가정이 말하는 바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려는 노력에서만

빛깔 없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강단의 강사처럼 집게손가락을 들며, 예를 들어,

로마 황제가 그노시즘 교리를 이단으로 잘라낸 뒤 이천년

행성의 절반을 뒤덮은 십자가는

정통 교리로 인정받은 적그리스도들의 표식이 되었다.


저 춥고 딱딱한 독방에서 쇠구슬이 달린 말꼬리 채찍으로

자기 등을 내려치는 가톨릭 수도자들은

감히 입을 벌리지도 못하면서 직관하고 있다: 신성神性은

반인성反人性이야

붓다가 매에게 자기 팔뚝 살을 잘라줄 때나

모하메드가 아무리 봐도 광증으로 보이는 가브리엘에게서

도망치는 짓을 멈추었을 때나……

잘들 보시오. 타의로 살해당하거나 사형당하는 이들은

모두 세인트-상트-샌-산타-산이 되어버리지,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그러니 내가 살아온 시린 삶에

유일하게 의미가 있었다면


나의 이 길고 비참한 비명은 처음부터 파멸이 설계되어있었다.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을 언어화시키려는

펜Pen으로서의 자해

마지막 살점을 도려내면 이제 이 해골은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우수수 무너져버리겠지.

그러나 나는 인간이었던 활자가 되는 것이다.

천상으로도 지하로도 가지 않는

잉크로 만들어진 영혼


곧 이 추운 방에서 나는 의자위에 웅크리고 앉아

수라 같은 머릿속으로 동사凍死를 상상하고 있다

부서지는 언어들의 조각조각 사이에서

내가 찾을 마지막 방점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 아니야 여러분

내 생각엔 아직 다 안 끝났어.


헤.

Posted by Lim_
:

태양신앙

글/시 2016. 12. 6. 04:01 |

태양신앙



남쪽 섬에서 심야의 바다를 볼 때 나는 딱히

내 고향의 해변을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던 항구도시는 이제 더 이상 배를 띄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갔었을 때 들렸던 것은

파도소리가 아닌 구름 너머의 수도 없는 제트엔진 소리뿐이었다.


내륙지방의 사막에서는 온 사방이 석유냄새 뿐이어서

거기서는 선인장에 꽃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는 마르고 갈라졌었다

나는 내 동료의 어깨를 잡고 울었다

침조차 말라버린 목 안에서 쇳소리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느 땅에서든, 어느 해변에서든

심지어는 대양의 한복판에도……

언젠가는 태양이 내려오겠지

내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해님>이라고도 부르지만

아니야, 그 항구성의 불꽃에는 분명히 인격도 신격도 없다.

그 흰색 불의 구球는 생명과 멸망을 동시에 담고

언젠가 이 행성을 통째로 불태워 구원하러 내려오리라.


그 전까지는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라도 가자

진눈깨비와 미로 같은 운하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안개와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백야白夜에…… 내 영혼을

적시고 찢어발기고 고문하는, 비생명非生命의 대명사 같은

그런 땅으로 가자.


그만, 나는 더 이상 당신들에게 거짓만을 말하며 살고 싶지 않아

나의 양심이 있어야 할 장소에 버티고 서있는

그 동공洞空의 축축한 허공에는 온통 흉터가 새겨졌다.

「이미 모조리 죽었지만, 차라리 목신牧神들이 여호와보다 오래 살았어.」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 이제 곧 태양이 내려오겠지.

난 분명히 본 적이 있어. 빽빽한 침엽수의 밀림에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서있는 그림자 같은 짐승을 본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내 의식이 산산이 해체되기 전의 일이었지, 이런 망할…….


나는 부서져가고 있다. 내가 나를 부숴가고 있다.

내 방 바닥에는 온통 나의 부품들이 떨어져있다.

나사와 못들이 굴러다니고 땜질된 납판들이 여기저기

쌓인 채 새벽부터 다음 새벽까지 찰그랑찰그랑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방을 나가면

나는 잠은커녕 눈을 감을 수도 없어

찰그랑찰그랑……. 난 저주 받았다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저 기다려야지, 태양이 내려올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지, 전후의 황야에 고도는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표정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쇳빛 입술로 먹먹히 기다리고 있지만, 태양은

태양은 내려올 것이다.

모든 저주의 끈들과 절망의 대양을 불태워버리러

태양은 필히 내려와야만 한다.

Posted by Lim_
:

마침내 혐오하게 된

글/시 2016. 12. 2. 04:38 |

마침내 혐오하게 된



어느 날 저녁에 내가 해질녘의 노을빛으로 꽉 찬

붉은색의 광장에서 하릴없이 앉아만 있을 때

내 인생이 저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맴돌았다

그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불렀는데, 그녀는

눈동자가 한쪽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양 뺨을 때리고 꽉 쥔 주먹으로

그녀의 여린 턱을 후려쳤는데

그녀는 튀어나온 이빨을 주워 모으며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저리 꺼지지 못해, 이 갈보 년아!>라고 외치며

그녀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피와 멍으로 뭉개진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몸서리치며 붉은 광장에서 도망쳤다.

내 입안에서는 계속해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고

그녀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구석진 골목으로만

밤이 대지에 어둠을 깔 때까지 도망쳐 다녔는데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반골의 방랑이 끝나고

시리고 외로운 내 방으로 돌아가면 그곳에 그녀가

있을 것임을,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당연한 듯이 방구석에

목각처럼 서있을 것임을 이미 알았다.


염병할, 나는 밤거리에서 천공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고

별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내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눈물이 되어주었다.


어디로 가야 이 더러워 버리고 싶은 세상과 인생의 반대길 인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었으니…… 술이

영혼의 독이 되는 비겁한 계절에 나는 추위에 온몸을 끌어안고

눈물샘에서 별들을, 별들을 흘렸다. 그러나

분명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추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슬픔이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말한다,

내가 광란의 고독하고 고단한 야밤을 보냈노라고.

Posted by Lim_
:

슬픔의 내륙

글/시 2016. 11. 30. 23:19 |

슬픔의 내륙



나는 슬픔을 마신다.

아침-아침임에도 어두운 방 한구석

에서 눈을 뜰 때 나는 방안에 연기처럼 퍼져있는

슬픔을 마신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슬픔에 너무 바빠

다른 일에는 눈길도 주지 못한다.


점심 때, 사람들이 실컷 일을 하고 식사를 하러 갈 때에

나는 여전히 내 방 안, 그곳에서

이불에 둘러싸여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마른 슬픔에 뒤척거린다

아, 난 게으르지 않아. 이건 그저

내가 게으르지 않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게으름의 방편일 뿐이야. 나는 내 살을 물어뜯고


저녁이 되어 네온사인들에 불이 들어오고

술집들이 문을 열 때, 나는 가벼운 지갑을 움켜쥐고

해가 진 거리의 처량한 냄새를 맡으러 나간다.

「여봐, 삶을 직시하고 살아. 제발…….」 이런 젠장……

난 이미 삶을 직시하고 있어, 그 꼴이 이렇다고.

「그렇다면 남들처럼이라도 살아봐, 네 손을 펴고.」

오래 전에 손도끼와 실톱으로 잘라낸 내 손 말이야?


자본주의가 책정한 술값을 꼬나쥐고, 그 지폐들을

꼬깃꼬깃 오른손에 쥐고, 그 종이들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꽉 쥐고…… 나는 계단을 올라

저기 길가에는 이미 술에 취한 노인네들이―그러나 충분히 젊은 노인네들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뭔가를 숙덕거리고 있다. 그들의

마스크에서 번질거리는 미광은 내게

도시적 비극의 비밀을 넌지시 전한다. 그러나, 엿 먹어, 난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분수에 맞지 않는 눈물을 마시고 내 피를 마시고

이미 알코올의 냄새로 독하게 삭아버린 내 피를, 피를,

한 발자국만 더,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이 슬픔도 전부 지워지겠지

그러나 망할,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실 돈이 없어

어설프게 취한 내 슬픔에는 중력가속도가 붙어

그러나 여전히 눈물은 나올 기색도 없고, 염병, 나는 신음을

사망의 기괴한 골짜기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신음을

신성모독적으로 으르렁거리며…… 그래, 이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지

머리를 흔들고 눈동자를 흔들고 그러나 충분치는 않고

오늘은 달이 안 떴어. 요 며칠간 달을 못 봤어.


도시의 거리를 가로질러 흙탕물을 튀기며 걷는다.

빈 방에 도착하면 나는 바싹 마른 내 얼굴을 부여잡고

우는 사람의 흉내를 내며―그러나 울지는 못하며

적당하지 못한 알코올 때문에 한숨을 쉬며 나는 생각을 하겠지

생각, 생각, 그 빌어먹을……인간의 권능.

거리에는 시베리아에서 온 북풍의 냄새 속에

슬픔으로 빚은 보드카 냄새가 나.


오늘도 슬픔을 마시느라 너무도 바빴다.

이불로 도망쳐

수마(睡魔)와 껴안고 눈에서 흰 연기를 뿜을 시간이다.

안녕, 안녕, 굳바이, 나의

나의 어떠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열정의 시대여.

Posted by Lim_
:

내 안에는 타인이 아무도 없다



내가 괴로운 건 수마(睡魔)의 탓이 아니야

내가 게으른 건 약학(藥學)에서 시작된 게 아니야

내 한쪽 눈이 떠지지 않는 건

뜨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야

이제 난 원망할 사람도 없는데


모두가 잠든 새벽마다 식은땀을 쏟아내며

거친 숨과 벌떡 일어나는 건

엄마, 그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죠

엄마, 누구에게도 죄는 없었어요.

그래, 그러니 난 도시의 시궁창에 흐르는 하숫물을

전부 긁어모아 내 늑골 속에 담아두고 살겠어


왜냐하면, 엄마, 누구에게도 죄는 없었으니까요.

자기 손으로 장난감을 내던진 아이가

망가진 장난감을 붙들고 울어도 되는 권리는

아이가 아이일 때만 있지. 가슴의 서랍을 열 때마다

맡을 수 있는 원망의 냄새, 증오의 냄새, 불완전한,

결함품의, 그러니 난 서랍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버릴 거야


이건 박애주의가 아니야

이건 박음질한 상자 속의 사람들 이야기도 아니야

아무도 증오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내 육신에 백팔 개의 대못을 박고

나머지 한쪽 눈도 감겨줘

이런, 증오할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전 세계가 다 내 적이고 증오스럽네……


지옥에서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누더기가 된

내 영혼을 보고 당신이 고결한 동정의 마음으로

칼질과 채찍질에도 굴하지 않고 내 손을 잡으러 온다면

사랑스러운 당신의 손을 잡아서

무간지옥의 밑바닥에, 피연못의 밑바닥에

무한히 처넣어줄게. 이제 내가 죄악의 상자로 쓰는 건

내 마음 뿐이니까.


내 영혼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



Posted by Lim_
:

사망가

글/시 2016. 11. 23. 18:20 |

사망가死亡歌



해바라기가 죽었다.

연꽃들도 모두 죽었다.

죽어 쓰러진 갈잎들

발밑에서 부석거린다.


겨울이 온다, 아니 더러는

언제나 와 있었다.

온돌에 불 때지 마라.

모든 것이 숨죽이는 추운 계절에는

방패도 흙벽도 지붕도

없어야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북쪽 고원의 냄새가

청록빛 햇살 받으며 소용돌이 그린다.

나는 구두끈 단단히 매고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매년 한 번씩 얼어 죽으러 간다.


그러니 이번 겨울에는

소주 한 잔도 입에 대지 말아야지.

눈빛 하늘 밑에서, 그저 아름다운

얼음 한 조각 되어 산산이 조각나야지.



Posted by Lim_
:

괴물의 노래

글/시 2016. 11. 19. 01:53 |

괴물의 노래



방금 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세 살배기 아들도 함께 죽었다는군

철창 밖으로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네온의 불빛들을 보니

그 어떤 고통도 내게 닿지 못하리라.


소등시간이 지난 지가 오래임에도

나는 잠들지 않았어, 누구처럼 무시무시한 고함을

천공에 쳐대지도, 가슴이 찢어짐에 입을 틀어막고

조각조각난 피부 사이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

난 차가운 벽에 기대앉아 어둠을 보았네.


실상 그것이 나의 거울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초를 서는 간수는 알기나 할까.

내가 이 좁은 감방으로 들어오기를 마음먹은

그날부터 이미 내 몸과 마음

허공의 어둠을 담는 빈 껍데기였지.


나는 재해가 되었었어…… 사람들은

내게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추측조차 두려워했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걸까? 글쎄,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하는군.


나의 아내였던 여자는 결혼 전

고결한 마음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처녀였었지

그녀는 벌집처럼 구멍이 난 내 마음을

채워주겠노라고 내 손을 잡았지, 하! 하!

그때도 나는 이렇게 웃었던 것 같아.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 붉은 원숭이 같은

핏덩이의 생명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어

지나치게 울어대는 바람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아내가 보고 있었기에 난 그녀에게 웃음을 지었지

난 무엇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날 하니 죽은 부모의 얼굴도 그리게 되는군

그런데 도무지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아

달걀귀신 같은 한 쌍의 노인 둘만

유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도는군. 그들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아하, 도끼를 휘둘렀을 때를 떠올렸어. 그때의

그들의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지.


간수의 말로는 과적차량이 아내의 경차를

코끼리가 짓밟은 것마냥 무참히 뭉개버렸다더군

무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 특히 인간들이

바퀴에 엔진을 달고 나서부터는 말이야.

죽음을 저울질하려는 사람의 본성이

내게는 기괴하게만 느껴져.


오늘도 분명 어딘가에서 내 가족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불합리하게 죽었겠지, 생각해보면

모든 죽음이 불합리하다면 불합리한 죽음 따위도 없는 거야

나는 감방 한 쪽에 붙은 철제 변기를 쳐다보며

나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셈해보고 있네.


나는 목적 없는 재앙이었다네. 왜 그랬냐고?

천둥이 왜 치고, 태풍이 왜 마을을 휩쓸겠어?

아들의 돌잔치 때 녀석을 안고

그 녀석이 나를 보며 웃고, 내 얼굴에 손을 댈 때

이미 모든 실험이 끝났었던 거야.


난 첫애에게 아빠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모든 무의미를 끝낼 작정을 하고 있었지.

젠장, 어머니와 아버지가 썰어놓은 고기가 됐을 때 말이야

그때 난 정말로 홀가분해, 쾌재를 불렀지…….

미안해요. 내가 미안함을 못 느낀다는 것에 대해서―미안해요.


철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로 까맣고 멀어서

사람들이 날 쳐다보던 그 눈동자 같군

속죄할 것이 없어서 죄스러운 느낌이야, 그러니까

모조리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농담이지.

참으로 이상한 세계에 이상한 삶이었어.


이러나저러나 난 곧 초록색 길을 걷게 되겠지

그러나 여러분, 부디 들어주시길,

사실은 우리 모두 그 길을 걷고 있다오…….

Posted by Lim_
:

폭력의 의견

글/에세이 2016. 11. 17. 02:22 |

폭력의 의견



 폭력의 역사는 생물의 역사다. 폭력, 전쟁, 투쟁, 다툼, 그리고 비교적 근대적 개념인 테러리즘까지, 인간언어는 상황과 그 사이즈에 따라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냈지만, 이 논고에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또한 그 행위의 중추에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이 논고 전체를 통과할 하나의 메타포를 우선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에 인간A와 인간B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A와 개인B, 혹은 개체A와 개체B라고 할 수 있다. A에게는 한 정의 단단하고 묵직한 금속성의 총기가 있다. 그 멋들어진 무기에는 한 발의 총탄이 장전되어있다. B의 무장상태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 본 메타포에서 B가 무장을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A는 B의 머리를 향해 한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 이 상황에서, A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 분노, 증오, 체념, 연민과 광기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발사된 한 발의 총탄이다. 이 총탄은 완벽한 직선궤도를 그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B의 두개골을 파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폭력에 대한 정의를 재수립하고자 할 때, 그 발사된 총알은 단순한 살인무기나 살인방편이 아닌, A의 의견Opinion의 상징Symbol이다. 애초에 A가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A의 행위는 일종의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언어화 될 수 있는, 즉 사회적으로 분석되고 파악될 수 있는 소통행위의 단면이다. A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나는 당신이 죽어야한다는 의견을 이 금속성 수단을 통해 피력한다.> 발사된 총탄은 살해의 심벌이 아니라 의견피력의 수단이다. 그것이 실체와 질량을 가졌고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다는 일차원적인 껍질을 깨고 보면, 사실상 그것은 <언어>의 일종이다. 총탄이 언어의 일종이라는 것은 곧바로 그 총탄이 정보의 덩어리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그것은 질량을 가진 정보다. 그 정보들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사실 모든 의견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이 경우 욕망은 B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당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부디 죽어주시겠습니까? 아, 물음표는 제외하도록 하자. 일방통행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질문이 내재된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그 이후에는 외부로부터 질문이 파생되기는 하겠지만, 우리들이 폭력이라고 이름 지은 언어에는 질문이 내재되기가 쉽지 않다. 애당초 폭력이라는 의견피력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의문을 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A의 <의견피력>은 B에게 강제적 동일성을 심어놓는다. 간단히 하자면 A가 B에 대한 존재말소의 의견을 피력하며 금속성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에 B 또한 결과적으로 A의 의견과 동질화 되는 <존재말소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나는 폭력이라는 것을 상대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과 동질화시키는 가장 능동적 행위라고 구두점을 찍는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폭력을 단순히 인간행위의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언어와 의견으로서 이해하는 것. 행위 자체가 가지는 정보를 보다 원론적으로 파헤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재정의가 지금 필요한 이유는, 폭력이 단순히 폭력이기만 한 인식구조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에선 이미 모든 개념들의 정의가 요동치고 있다. 어쩌면 50년 쯤 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전들을 전부 소각하고 완전히 새로운 언어지침을 창조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집중하자.

 내가 폭력행위를 정보와 일방통행의 의견피력으로 생각한 이후, 나는 곧바로 <테러리즘>이라는 기묘한 단어에게 접근했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 그러나 내 입장에서 이러한 정의는 이미 페인트칠이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한 오두막과 같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테러리즘이 가지는 포괄적 스펙트럼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만들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렇게 정의를 수립하고 나면 테러리즘과 일반 폭력 사이의 차이점은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상황적 사이즈Size의 차이. 테러리즘이 사회구성원들의 일부 혹은 다수에 대한 사고의 병렬화를 꾀한다는 점. 국립국어원의 기존의 정의에서 보여 지는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는 역시 위에서 서술한 A의 B에 대한 의견피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사로운 것이든, 폭력을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는 공격적 <언어>의 일종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이미 시사한 바 있다. 그런데 나의 논고 안에서 개인의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을 구별 짓는 것은 테러리즘의 그 목적이라는 것이, <행위 이후에 올 파급력에 대한 기대=그 폭력행위로 인하여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의 사고가 병렬화 될 것이라는 기대>라는 점이다. 이러한 파급력은 피해자 집단이나 가해자 집단 중 한 곳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 다른 성질의 의지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의식<들>에 동일인자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집단들이 각각 다른 형태의 집단의식을 소유, 말하자면 집단구성원들의 (소규모나 혹은 대규모의)동일화를 유발시키고, 즉 사고의 병렬화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주는> 행위를 실행했을 때, 실상 테러리스트로 명명될 수 있는 실행자들조차 그 특정행위와 관련된 인간그룹에 어떠한 사고 병렬화가 발생할지 거의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특정 영향력을 기대한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행동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위에서 기술한 바 있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라는 조건을 말이다. 이와 같은 조건은 국제사회와 인간 집단의식의 움직임을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지나치게 다각화된 내부인자들과 외부인자들로 인하여 인간의식의 움직임은 집단의식과 더불어 해석이 불가능한 완전한 아노미Anomie 상태에 가깝다.

 쉬운 예로 현재 이 행성에서 어느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속한 테러리스트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국 대사관에 자폭테러를 시행한다고 상정했을 때, 분명 그 테러리스트의 심리는 너무도 단순해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는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유발하고, 그 피해로써 자본주의 국제사회의 중추국가인 미국을 위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자들이 갖게 될 불안과 공포를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자폭테러에 대한 정보를 접한 사람들의 의식은 테러범의 기대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선 자신들의 대사관이 파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의 미국국민들은 테러를 자행한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공유할 것이다. 게다가 이 증오는 명백히 적敵이 지정된 증오다. 단순한 분노의 공유를 넘어서서, 구체화 가능한 적이 명시된 증오는 그 분노를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당시 관련자들에게 주었던 영향력을 살펴보면, 하나의 적을 목표로 한 집단은 마치 집단 자체가 의지가 있는 것처럼, 다수의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행동한다. 구시대에도 이러한 개인의 집단화가 빈번했던 것에 더해, 현대처럼 온갖 출처가 분명하거나 혹은 분명하지 않은 정보들이 사방에 떨어져있는 상황에서 집단 내의 세포Cell처럼 움직이는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가 동시에 정보수집과 정보에 대한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필터링 되거나 생물 그대로인 정보들은 가능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편에 의해 집단 자체로 융화되고, 즉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의 사고가 병렬화되어 결과적으로 서버Server가 부재하는 허브Hub들만이 상호연결 된 하나의 의지Will가 출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집단의식의 출현은 피해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를 저지른 조직 내에서는 자폭테러 실행범에 대한 우상화나 영웅화가 발생하기 충분한 조건이 이미 갖춰져 있을 것이고, 곧이어 실행범은 테러조직의 집단의식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투쟁의 순교자라는 데이터로서 각인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은 미국국민이 증오하게 된 <적>과 거의 동일한 정보작용을 한다. 테러조직의 영웅은 그 테러조직 내에서 자동적으로 정보가 가감되거나 수정되어, 조직의 각 인자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직시해야할 것은 그 구심점이라는 것이, 실체나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정보덩어리인데다가 그 <정보덩어리>의 오리지널인 자폭테러 실행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정보적-가상적 초상肖像>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폭테러범의 존재는 행위를 실행하는 순간부터 그 어느 개인의 의도와도 관계없이 집단사상을 위해 날조된다. 딱히 어떤 집단적 카리스마나 사상가에 의해 이 날조가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가 자켓 안에 플라스틱 폭탄을 차고 대사관으로 침입하기 이전부터 그와, 그의 조직과, 그의 조직원들과, 그 모든 개별인자를 통괄하는 <집단>이라는 존재방식에는 실행범의 사망과 동시에 이미 오리지널이 없어진 인격의 잔재Data를 집단의 통치지침을 위하여 날조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도 그 죽은 실행범에 대한 정보조작을 가하지 않지만 정보조작은 이미 집단에 내재되어있던 조건에 의하여 조직통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시행된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테러조직을 구성하는 모든 조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동일인자다.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될 때 뿌리를 박은 사상적 동일성은 그들 모두를 기초적인 차원에서 연결시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고의 병렬화>라는 유별난 개념이 사용될 필요성은 없지만, 그것은 잠재적 연결회로로서 항상 은밀히 작동한다. 포텐셜을 실체화시킬 이벤트만 발생한다면 그것은 집단 전체에 대하여 대규모로 활성화된다. 영웅의 등장-죽음. 그렇다, 이러한 집단에서 영웅이라는 개념은 영웅화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다. 그가 죽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고 그의 사망 자체(오리지널의 말소)가 영웅화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즉 집단의 영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로서 비실재하는 우상-즉 영웅이 집단의 구심점으로서 현상화되고 모든 집단구성원들은 강제로 그 영웅이라는 능동적 정보에 접속된다. 이때 벌어지는 일이, 위에서 서술한 미국국민들의 상황과 동일한 <사고의 병렬화>이고, 집단 자체의 의지가 발현하며 조직구성원들은 그 의지Will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집단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반 하드웨어 혹은 그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로 인하여 이런 형식의 집단의식의 구체화, 집단 내 구성원들의 사고 병렬화는 이미 정보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미국 대사관의 피습이라는 정치적 단어들의 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정보의 전달이 평등화된 현대사회에서 각기 의지적 집단을 형성하고 개인들의 <상위 소프트웨어>라고 할 만한 것의 부속품화가 가속화된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유족들대로 증오와 슬픔을 공유할 것이고 도덕가들은 국제적 통치체계를 재구성할 윤리관에 대한 논설을 공유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격한 정치적 집단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행동력에 경계를 공유할 것이고 아나키스트들이나 도덕의 비실재를 주장하는 일종의 니체이스트들은 그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던 세계관에 사회적 샘플을 하나 더 올려놓음으로서 서로간의 물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전보다 더 강하게 동일화될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파급력에 대한 추측이 내가 현시대에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이 재정의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주장의 골자다. 실상 내가 위에서 늘어놓은 몇 개의 예들은 정말로 <몇 개의 예> 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행동들이 모든 허브Hub들에게 동시에 정보로서 <발사>된다는 것이다. 이 행성 자체가 이미 네트워크의 끈으로 각각 모든 개인Individual들이 연결되어있는, 보이지 않는 리좀Rhyzome 구조의 망으로 덮여있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모든 예를 말할 수는 없다. 애당초 하나의 행위에서 파급되는 모든 집단의식의 변화를 전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의 예 뒤에 나는 처음에 말했던 테러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다시 가져올 수 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미 여러분의 사고 속에서는 하나의 유령 같은 개념이 생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위와 같은 식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사회에서 이미 Individual이라는 것은 더 이상 구시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이미 모든 개체성을 잃었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는다. 말하고자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모든 정치, 사상, 정보, 행위의 과도기에 우리 인간사회는―<인간>들의 사회와 <인간사회>라는 개체적 뜻을 동시에 가진다― 모든 개인들이 개체성을 잃기 위한 조건을 자동적으로 수집하며 정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논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연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을 굳이 분리시켜 놓아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최초의 메타포인 A의 B에 대한 살해행위도 규모가 소규모일 뿐이지 의견을 강제하여 특정된 상황에 속한 이들(최소 2명 이상의)의 사고현상Think Phenomenon을 동일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기존의 테러리즘을 정의하던 <정치적 목적>, <사상>, <주의> 따위의 단어들도 원론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이것은 실상 인간의 사고능력에 기반하여 개인이 가지는 신념이나 사고방식 따위를 광역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특정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에서도 몇 번이고 말한 <현대사회의 정보적, 국제적 과도기>라는 조건 때문이다. 인류역사의 시초에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들이 더 큰 집단인 사회를 이루고, 계속 집단들의 집단화가 가속되어 국가, 연방, 국가사상의 공유, 세계 따위의 개념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반개인이라는 것이 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워졌을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하나의 꽉 쥔 주먹이 누군가의 턱을 치는 것과 완전히 사고가 병렬화된 국가집단이 새로운 종류의 의지, 혹은 생물처럼 활동하며 중추신경이 없는 능동성을 가지는, 말하자면 정보-의식생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논고는 최초에 가장 극단적인 의견피력 수단인 폭력에서 시작하여 인간이라는 생물이 본성적으로 소속된 집단 내에서 사고를 공유하도록 설계되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개인의 Individualism까지 위협하는 사고 병렬화와 그의 산물인 <새로운 의지New Will 혹은 새로운 생물New Organism>의 탄생까지 유도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는 점점 가속화하여 발전한다. 그리고 내가 이 논고에서 논한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자면, 언젠가 세계는 <세계>라는 Organism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그 Organism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정보가 정보에 의하여 가감되고 수정되며, 각각의 Cell은 정보 수집과 상위 소프트웨어를 보조하는 역할밖에 못하게 될 때, <인류>라는 개념은 인간집단을 포괄하여 말하는 종류의 개념이 아닌, <인류> 자체가 하나의 Individual로서 인지되게 될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사고 병렬화>는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진화의 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집단이 되고, 집단이 국가가 되고, 국가가 세계가 되고, 마침내 세계 자체가 하나의 개별성을 얻게 되는, 그리하여 인간의식이란 것이 집단의식이라는 새로운 생물로서 승화되는 그러한 종류의 진화 말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독재자도 파시스트도 없지만 인간육신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뇌와 중추신경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의지>에 의한 독재가 이 정보생명 안에서 발생하리라는 것을 나는 추측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추측을 디스토피아적이라고 말해야할지 아닐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인간의 집단화, 병렬화, 개인의 세포화는 이미 인간본성의 뿌리에 조건을 형성해두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더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될지, 다른 시대도 아닌 이 <모든 것의 과도기>에 우리는 사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관망해보자. 지금 현재에, 이 전 인류가 통괄되어있는 네트워크가 어떤 양상으로 행동하는지, 우리는 사색적으로 관망할 필요도 있다.



끝.

Posted by Lim_
:

죽음희망

글/시 2016. 11. 11. 00:38 |

죽음희망



누군가 나에게 말해 달라.

너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

다고, 덜덜 떠는 신경쇠약에 걸린 너의 손은 아직도 흰

종이 위에 펜을 쥐고 날고 싶지만, 그렇지만 너의

동기도 근거도 의무도 이제는 없다고.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몇 번을 외쳐도 혼잣말이다

저 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하고 사람들의 입

에서 터져 나오는 경멸의 어투도 내 안에서 나의 혼잣

말이 되어버린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붙잡고 있던 내 논문에는

악필로 갈긴 수정사항이 본문보다 많아졌다. 그 뒤

내 온전치 않은 정신이 멈췄다.


작가들이 도대체 어떻게 절필을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 절필이란 대체 뭐지? 그것은 자살과 동의어다! 아아

기자회견을 열어놓고 수

십 개의 카메라 앞에서 목을 매다는 이상스러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아사하겠어, 나의 <체면> 때문에!

전부 지독한 농담이다. 스스로 살을 파먹는 농담.


그러니 제발 누군가 말해줬으면. 신성이 담긴 강력한 목소리로

너는 더 이상 없다, 라고! 부디 내 목에 도끼를

단 한 번의 힘찬 휘두름으로 내리쳐달라고. 그러나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실상은

아무도 그러한 권한도 의지도 갖지 않는다.

절필도 자살도 공상적 낭만주의의 배설물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살라는 말이야? 치욕과 수치와 절망을 그러쥐고, 더는 두뇌가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이미 바닥난 재능에 좌절하면서, 그러면서도 계속 허망한 펜을 놀리고, 노트 위에 진실성 없는 말들을 뿌리고, 자조하며, 혐오하며, 눈물 흘리고 소리치면서 몸부림치라고? 더는 위대함도 무엇도 없음에도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내 목을 그을 때까지?>

그렇다. 애당초 넌 행복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 넌 고통 받고 점점 무의미해지기 위해서 존재를 인정받았다.

<염병할……. 그래도 언젠가 내 머리가 당나귀대가리가 된다면, 그때는 나도 죽겠지.>

그 정도는 바라도 좋아.


그런데 어떠한 희망이 있다. 점점 굽어가는 나의 어깨의 윤곽에서,

이것은 단순히 조금 오래 가는 슬럼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곧 돋을 듯한

날개가 중얼중얼. 거짓말인지 기만인지 혹은 정말로 그러

한지 내가 알 게 뭐람. 결국에는 자살도 꿈인 것을, 끝이라는 것도

결코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차가운 바람이 불면

길바닥에서 급사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글을 쓰면서 희열하다가

글을 쓰면서 고통 받고, 글을 못 써 광란하다가

글을 못 써 울부짖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가난이 내게

걸쳐준 거적때기를 걸치고, 그것을 방패삼아, 삶이라는 저주에 침을 뱉고

악마가 내게 오면 나는 담배 한 까치에 전 세계를 팔아버리겠지.


그러나 어찌 되건 나는 죽지 못할 것이다

계속 성냥을 긁으며

불타는 세상의 환각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습기 찬 지하실에서

혼란스러운 머리로 눈을 뜬다.

Posted by Lim_
:

인간 K의 초상

글/시 2016. 10. 27. 15:13 |

인간 K의 초상



테이블 뒤에 석상처럼 앉아있던 K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일주일동안 잠을 못 잤어. 일주일동안 말이야.

아니 정확히는, 잠을 안 잔거지. 커피와 카페인 알약

으로 일주일동안 나를 깨워놓았어

나는 잠을 잘 자격이 없어. 휴식은 내게 너무 큰 사치야

K는 듣는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

계속 그저 중얼거렸다. <나라고 심리학에

완전한 문외한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게 그는 중얼댔다.

중요한 건 말이야, 거의 강박적인 동작으로, 검지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그가 말했다. 결백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책감만 커진다는 거야. 말하자면

모든 것에 대한 죄책감이 말이야. 나는 곧

물 말고는 그 어떤 음식도 위장에 넣지 않게 될 거야

내 의지랑은 상관없는 <내 의지>가 날 그렇게 만들 거야 결국

난 실패한 금욕주의자로 자살하게 되겠지, 아니 자살은……

K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는 언어철학의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어디로 가든 그는 실패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나왔다. K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희열로 색이 칠해진 고통을 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밝았다. 바람은 따뜻했고

하늘에는 아무것도 날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는 건 조금 미뤄두자

K를 위해서. 어찌 됐든 그는 곧 무너지고 말테니.


그리고 K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Posted by Lim_
:

나의 한 명

글/시 2016. 10. 20. 02:16 |

나의 한 명



너는 그곳에 서있어. 흰색의 램프를 들고, 밤새 도시의 어두운 길목에서. 밤의 도시만큼 빛의 대비가 뚜렷한 곳은 달리 없지. 그러니 넌 그곳에 서있어. 나의 미친 발은 시각소자를 가진 기계처럼 마구잡이로 훨훨 날지. 나는 가장 눈부신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까지 몇 번이고 걸음을 반복해. 그 램프의 기름도 도시의 금화로 산 거야. 그러나 너는 부디 아무것도 느끼지 말아줘. 그저 그곳에서, 가장 어두운 길목에서 신성을 잃은 우상처럼 서 있어줘. 깊은 새벽에도 사람들은 가끔 칠흑의 골목 속으로 사라져. 너는 그들을 비춰줘. 그들이 어둠 속에서 머뭇거릴 때, 그들이 담뱃불이나마 제대로 붙일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줘. 그들이 자본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개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낡은 거죽 걸친 빈민이건, 유망한 경제가건. 누구든 호주머니의 담뱃갑을 제대로 꺼낼 빛 정도는 필요하니까. 나는 저쪽으로 갈게. 지친 야생마처럼 목적 잃은 걸음으로 사방을 쏘다닐게. 밤의 도시에서 밝은 곳은 너무 추워. 네온사인에서 흘러나오는 욕망들은 얼음처럼 나를 쪼아.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 안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눈빛은 까마귀가 되어 내 살을 쪼아. 소위 야간생활자들이라는 족속들은 밤에도 모자를 눌러쓰고, 내 손가락을 관찰해. 그 손가락의 형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들은 알아야만 해. 그러나 너는 아무 걱정도 말고 그곳에 서 있어줘, 동이 트고 램프의 기름이 다 떨어질 때까지, 타고 남은 담배필터로 하얀 반점이 점점이 찍힌 검은 도로를 밝게 비춰. 내 살은 이미 다 파먹혀 백골이 드러났지만, 내 인생에서도 이 넓은 욕계에서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램프를 들고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가끔씩이라도 보도록 해. 무어 굳이 감상을 묻지는 않을게. 그저 그 낯과 낯들을 봐주었으면 해. 조금 뒤면 나는 <사람>들이 떨어트린 금화를 주우러 갈 거야. 운이 좋다면 내일도, 그 금화로 네 텅 비어있을 램프에 기름을 채울 수 있겠지.

안녕. 새벽이 끝나면 데리러 올게.

Posted by Lim_
:

어느 여인의 죽음

글/시 2016. 10. 18. 03:48 |

어느 여인의 죽음



내가, 랭보를 다시 읽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을 때, 그녀는 다시금 죽었다. 그였던가 그녀였던가. 사실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여름인데도 공기가 차가울 정도로 공원은 고요했다. 아, 그 당장이라도 산산조각이 나 유리파편처럼 쏟아질 것 같던 고요! 이걸 들고 있으렴. 아버지가 건네준 것은 내 상반신만한 액자였다. 난 어리둥절해 액자를 들고 있었고 유령 같은 검은 발걸음들이 나를 인도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완수되자 나는 액자를 놓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무언가를 물어봐야했건만 도무지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니 나는 순간 사람들이 어떻게 비극을 계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는요? 엄마가 보이지 않아요. 네 엄마는 차 안에 있어.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자애롭지 않았다. 나는 입안에서 이상한 맛을 느꼈다. 나는 내일이면 아버지의 얼굴이 원래의 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가기나 하는 것인가 불안하였다. 어디선가 검은 소매 끝에 달린 친숙한 손이 내게로 뻗어져 내 손을 잡았다.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것 같은 따끔따끔한 땅이 날 춥게 만들었다. 그때 대기에 금이 가듯 새된 소리가 어디선가 찢어지듯이 울렸다. 척수에 전기라도 통한 듯 나는 몸서리쳤고, 나의 어린 호기심으로 그 소리를 찾아 뛰었다.


너무 많은 문. 모든 문들이 유리로 되어있었다. 이 공원은 이상한 공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런데 그 새된 소리는 땅 밑에서 지진처럼 솟아났다.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새까만 유령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한 유령이 여인의 입에 종이봉투를 가져다댔다. 종이봉투는 여인의 숨으로 히스테릭하게 부풀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여인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장면은 나를 순식간에 지루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는 우리 학교의 문제아들이 하듯 그 장면에게 혀를 내밀고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박타박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 태양은 너무 하얬고 너무 사납고 고요해서 그 공원의 모든 것을 일렁이는 환각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환각이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와 닮은 어느 늙은 남자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태양 아래 소금기둥처럼 우두커니 서서, 내가 이 공원과, 이 공원의 검은 유령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있다는 이상한 감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오늘 변덕스럽게 랭보를 펴보니, 순간 어떤 여인이 다시금 죽었다. 분명 나는 늙어있었다. 나는 이제 랭보를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전혀 늙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 여름날의 지글거리고 눈을 멀게 만드는 태양은 여름이 오면 다시 떠오른다. 똑같은 지루함과 악의와, 어리둥절한 꼬마는 아직도 그 공원에 서있다.

Posted by Lim_
:

기괴한 목각인형처럼

글/시 2016. 10. 18. 02:51 |

기괴한 목각인형처럼



과거는 여전히 내 뒤통수에서 쿵쿵거리며 화를 낸다

금속성으로 빛나는 철길 위에서

나는 몇 번이나 마지막 담배꽁초를 떨어뜨렸고

몇 번이나 처음으로 금연을 결심했다.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역의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앉아

나는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고의로 장애물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활기찬 다리를 가진 이들을

노려다보며 증오를 당했다.

어느 날 한쪽 다리를 잃은 비둘기가

깽깽이걸음을 하며 내게로 다가왔을 때, 아하

그래서 새들이 날지 않았구나. 그들은 박애주의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헤맨다

그들에게는 세상 천지에 방패처럼 세워놓은 집이 있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나는 의식을 재울

이불조차 없었다. 어젯밤에도 분명 누군가 죽었다

소문은 퍼지지 않는다. 사망 기사조차도.

나는 눈도 감지 않고 플랫폼 계단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이 지나면 이 행성은 또 사나워질 거야

그러니 딱딱한 알약들을 삼키고 내가 수천 번 반복하여

죽는 것을 바라보자. 내 생존은 비겁이다.

또 나는 증오를 당하러 나선다.

Posted by Lim_
:

아상(我相)

글/시 2016. 10. 12. 16:31 |

아상(我相)



어떻게 했어야 좋았던 것인가

나의 축제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아직도 초원에서는 장작불이 불타고

모여앉아 향쑥을 씹고 독주를 마시는 그들을

나는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래 나는 신들과만 만났다.

사람들은 내 오만과 어리석음의 거울인가 싶어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아시는가, 신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버렸다.


마침 추수 때였다. 가을은 기별도 없이 다가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기막히게 웃음을 터트리며 울었다

목 잘린 신들의 머리끄덩이를 부여잡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한복판에서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을걷이란 그 정도였음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한복판>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지독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 욕망은 나약함이었다.

그러나 용서할 것도 없었고 용서받을 것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는다.

도무지 구원을 바랄 수도 없기에 그렇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의 존재도

근거가 없기에.

이유도 없기에.


슬퍼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기뻐하지도

말아야할 것이다. 혈관에 피 대신 오일이 돌아도

천상도 천하도 한낱 백일몽이어

사실 나란 것이 발목이 잘린 채 둥둥 떠 있는 풍선이라 해도

내 생명에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해도

영속하지 않는 영혼을 나는 믿는다.


사멸하는 영혼

필멸하는 감각의 근원에는 필멸하는 영혼이 있다.

새벽마다 달을 세며 골목을 걷는 것도

꿈꾸다 일어나 가슴을 절개하는 것도

더러운 굴속으로 도망쳐

기절하듯이 잠들 수 있는 것도,

내가 죽기에 허락된 일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기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워진 모든 이들에게 굳바이

굳바이, 나보다 먼저 죽어버릴 이들에게

굳바이, 나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는 나에게

굳바이, 내가 죽여 버린 자연의 제신들에게


언젠가 이 고독한 골방생활이

마침내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든다면

그때는 술을 마시러 가야겠다.

Posted by Lim_
:

나는 왜 사는 걸까

글/시 2016. 10. 6. 01:28 |

나는 왜 사는 걸까



답을 알고 있음에도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 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라고

예수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실상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답

실상 나는 알고 있다

어두운 계단에 앉아 공허의 도시를 내려다볼 때

내가 묻는 질문에 나는 스스로 대답

할 수 있음에도

나는 계속 묻는다


의문은 답이 있다한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의문은 영속하기에 의문인 것이다

우리 비참한 영혼의 물음들은

대답이 있음에도

물음을 계속한다.


밧줄과 은화 30전만으로 속죄를 완료할 수 있다면

삶이란 그리도 쉽겠지 그러나

인간이 짊어진 죄는 원죄도 뭣도 아니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는 책임이다

책임


안녕, 비참 속의 영혼들

우리는 문어처럼 서로의 촉수를 맞잡은 채

납득할 수 없는 대답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의무 속에서


강제된 삶 속의 찰나의 기쁨으로

부디 당신의 악 문 이가

찰나의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라며.

Posted by Lim_
:

눈물 한 방울

글/시 2016. 9. 30. 03:42 |

눈물 한 방울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내 인간성의 안쪽

무언가가 고장 난 채 방치되어있다.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다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의 몇 배의 슬픔이다.

피가 끓는 것을 느낄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은

내 무참하게 강간당한 얼의 탓이다.


얼간이. 나는 인간으로서의, 아니

생물로서의 구성물이 결핍되어있다.

모든 비극은

그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기만 할뿐.


내 심장은

고통과 슬픔과 비참함만을 담은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온기도 잃은

납덩어리처럼.


애당초 내가 심장이 있기나 해? 중얼거리면

너도 심장이 있기 마련이지, 다만

넌 네 가슴을 절개하여 그 펌프기를 뜯어내고 싶다는 욕망에

차례차례 이가 빠지듯 차례차례 잃어버린 거야.


그야 이것은 고통밖에 주지 않으니까

인간도 괴물도 아닌 채로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는 건

너무 자괴적인 비참이야

그럼에도 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물샘이 마르면 통증도 말라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눈물도 흘리지 못하면서 울부짖는

끔찍한 혼란의 덩어리가 되었다.


누군가 제발, 그 손의 온기를 내게 보여줘.


비극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비극에 젖은

분열된 마음, 분열된 정신, 분열된 영혼

<자아>라는, 학술을 위해 임시로 지정된 개념은

실상 인간의 그 무엇도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드id라는 것도 불가해한 것을 지칭하기 위한

언어화를 위한 불안정한 껍데기에 불과하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수천 년도 전부터

절대 언어화 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고

시각화 될 수 없는 것을 시각화하고

추상화 될 수 없는 것을 화성학에 무리하게 끼워 넣고

그것이 우리가 계속 추구해왔던 실패였다.


우린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어떤 방식으로든

완벽한 필치로 서술하기를 갈망하다가

실패하고 죽어갔다. 마침내는 광기와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리에게는 천 개의 얼굴이 있고

그 모든 얼굴은 우리 자신이 아니며

동시에 그 모든 얼굴이 우리 자신이여

눈 뜬 자에게 광증이란 언제나 예정된 것이었다.


아, 모든 위대한 실패에 영광 있으라.

실패는 실패만으로 위대하리라.

승리도 패배도 득도 실도 없는 광란하는 삶에

적어도 한 줄기 눈빛만이라도 비쳐라.


내 모든 혼돈을 담아

눈물 한 방울, 단 한 방울만이라도

떨어트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오늘도 방구석에서 내 영혼은 시취를 풍긴다.

Posted by Lim_
:

사생아의 여행

글/시 2016. 9. 22. 10:03 |

사생아의 여행



1.

 내가 무얼 하고 있었더라. 아, 그렇지, 삶을 살고 있었지. 질리지도 않는 자기발견의 영원순환. 그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이었지. 이걸 봐, 네 유년기에서 조르바가 웃고 있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어. 난 삶을 써내고 있었지. 난 인간가죽으로 표지를 입힌 일종의 서적이 되었고, 지식과 서술과 연구가 내 영혼을 대체했어. 몇 해 전인가 스승께서는, 그런 것들은 근대에 멸종해버렸다고 하셨지. 그러나 아니었어. 나를 봐, 이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생생한 종이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나는 실감나는 환영이야. 현대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돌연한 근대의 사생아야. 많은 젊음들이 나와 첫 악수를 나누고 항상 하는 말은: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자유롭습니까?> 아하! 세상에 아무런 진리도 없다지만 난 한 가지 진실을 알지. 세상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란 살아있는 것만으로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야. 만일 자유의 진실 된 얼굴을 그들이 본다면 그 누구도 자유로운 영혼이나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을 걸.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2.

몇 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내 손이 일을 멈추자마자 난 도망자처럼 급히 외투를 걸치고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내가 수면제의 환각에 몽롱해 할 때 내 몸은

어느새 하루를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단지 몇 주를 위하여 내가 나의 두 손목을 잘라냈다는

그러한 생각에 미쳐 기뻐 날뛰었다

지구의 반대편은 사방이 넓고 평평한

인간의 목숨 따위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스러지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위험 덕분에 나는 기름으로 칠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친구가 길을 알려주었다

더 깊은 대륙의 한 복판으로 가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바라마지않던 태양과 모래가

거기에 있을 거야.


과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석유의 냄새를 흠뻑 맡으며

오로지 흰색뿐인 태양 아래서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서있었던가

곱디고운 하얀 모래는 내 맨발을 묻고 발목까지 올라 찼다

그런데 내가 울었던가?


아니야! 사막에서는 일체의 수분이 모두 금지된다.

그래서 감상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은 사막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습기 차고 울적한 도시의 지하실에서

그들은 술잔이나 부딪히며 허망한 인생에 건배를 외친다

마치 내가 도시에 있을 때 매일 그렇게 하듯이.


눈물은 휴가가 끝났을 때에나 뒤늦게 굴러 나왔다.

잘라냈던 손목은 나도 모르게 다시 붙어 있었고

내 다리는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나는 인생을 증오해.」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나는 변명했다.


그래, 여행은 어땠나?

글쎄요. 벌써부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일>을 쉬었었다는 것은 알아요.

이 땅으로 돌아오니 나의 손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전투태세에 든 군인처럼 손목에 붙어있더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이곳에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어,

이 게으르고 궁핍한 무정부주의자야.

아니, 나는 분명히 <일>을 했습니다. 차라리

<일>에 미쳐 살았습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들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 손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당신 같은

왜소하고 등이 굽은, 탐욕스러운 사상가들은 말입니다.


터벅터벅, 무거운 구두를 이끌고 나는 돌아간다.

처음부터 텅 비어있던 트렁크를 끌며

나의 다락방, 나의 <일터>로 돌아간다.


어느새 이 땅은 가을이었다.

Posted by Lim_
:

송곳니로 덮인 눈동자



온몸에서 이빨이 돋는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길을 걷다 네온의 석양 속에서 웃는 이를 보면

온몸의 이빨이 떨린다.

차와 버스들이 소음을 뿌리며 달리고 머리 위에선 전철바퀴가 진동한다.


어제 내린 비로 포도(鋪道)는 더럽게 젖었다.

어제 내린 비로 도시민들의 영혼의 바지자락도 더럽게 젖었다.

하늘도 아직 젖어있다. 먹구름 없이도 하늘은 캄캄하다.


얼마 전 꿈에서 안경을 밟았다.

깨어보니 안경은 짓뭉개져있었다.

이불 주변엔 빈 약통들이 굴러다녔다.

손으로 그것들을 씹어 먹어 흔적을 감췄다.


안녕하십니까, 의사선생님. 무려 한 달 만이군요.

그런데 오늘도 저는 정직하지 못할 예정입니다.

선생님의 눈에는 아직도 내 손목에 돋은 이빨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어요. 차라리

내 입을 가져가버리시지요.


암소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방금 잘라와 피가 뚝뚝 흐르는

<구하기 힘든>.

노자가 말했던 것이 옳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노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말입니다…… 안타까운 감정이라면

나치스들과 혹은 니체에게나 주도록 하세요.


이 이빨들이 전부 자라고 나면

위험한 줄타기도 웃음소리로 말미암아 끝날 것이다.

아니요, 프로이트는 죽었어요.

하여 내 정신은 중력가속도에 영향을 받는다.

처음 손가락 끝에 이빨이 돋는 것을 볼 때는 무서웠지

물론 지금도 무서워.

그러나 갈증은 더욱 크고

웃음소리는 그보다 더욱 커다랗다.

Posted by Lim_
:

수마의 방

글/시 2016. 9. 1. 01:36 |

수마의 방



나는 누구냐.

눈을 뜨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단지 내 감옥의 이름만을 나는 안다.

감옥 문을 열기 위한 열쇠의 이름도

나는 내려 받았다.


나의 소굴은 내륙의 검은 공기와 닫힌 공기로

수 년 전 도시의 호흡을 전부 빨아들인 채

안팎으로 철저하게 잠기었다.

권태의 무게 속에서 나는 계속 잠에 빠져

나의 세계에서 태양을 지운다.


송장의 냄새가 난다

송장이 남긴 발자국의 내음도.

일견 아무것도 없는 내 방

실은 거하는 것만으로 영혼의 숨을 헐떡이게 하는

철학가들의 시취로 가득하다.


향수(鄕愁).

나의 고향이 아닌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

내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났던 고요와 진공의

처절하게도 풍요로운 상실의 땅에 대한.

아, 누군가가 늑골 속에서

죽어간다.


나는 누구냐.

몇 개의 시공에서는 몇 개의 대답이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나는 나를 부정하는 유물론 속에서

인간이 아닌 유기적 기계가 되고

관절들에 녹이 슬고 어둠 아래 눕는다.


금산철벽에 졸린 눈으로 마주 앉아

다리를 잃은 나는 턱을 괴고

몸에서 땅으로 뿌리가 내리려는 것을 걱정하며

권태 속에서 기다린다.


나는 기다린다. 어쩌면 문이 열리려는

징조를.

Posted by Lim_
:

절망이 지은 도시

글/시 2016. 8. 25. 06:55 |

절망이 지은 도시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은

평범한 비극이 아닌

멍청한 비극이다.


산사에서 도시로 내려온 지 삼 일만에

나는 산에서 얻었던 모든 덕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내가 이해했던 삶의 순환고리는

이곳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도시 설계사들의 사명은 아마도 인간을 망가트리는 것

이곳에는 일견 모든 것이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이 도회지에서 행해지는 모든 바쁜 몸짓들은

아무것도 아닌 권태와 영혼의 둔화

즉 멍청함만을 길어 올릴 뿐

사방에서 오물처럼 피와 죽음만이

유령처럼 활보하는 존재의 껍질들에서 뚝뚝 흘러내린다.


도시가 가장 조용해야할 시간에

나는 일부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술도 담배도 없이

내 귀를 틀어막던 절규도 없이 나는 거의 나신의 영혼으로 거리로 나섰으나

이곳엔 침묵조차 없었다.


거듭거듭 겹쳐지는 멍청한 비극들만 있을 뿐.


가슴을 죄이는 아침

나는 나도 모르게 더러운 거리의 한복판에서

죽고 싶다며 되뇌었다…… 옳아,

신념도 철학도 가장 값싼 좌절이 되는 땅.


눈을 뜨기 무서운 땅. 인간을 빨아들이는 분쇄기 같은 마천루들의 숲.

누군가에게든 나는 절실하게 말하고 싶다, 도망치라고

그러나 시멘트로 포장된 이 거리를 걷는 이들은 모두가

이미 도시의 부속품처럼 보인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아아, 그들은 유령이다. 이미 죽은 흔적이다…….


나는 이제껏 나의 자기파괴에의 욕망이

나의 본성이리라고 짐작해왔건만, 아니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그것이 답이었다.

나의 고향은 비좁고 장마철이면 물이 차는 회색조의 지하실

가난도 빛이 바래버리는 내륙지방의 빈방.


정말이지 누군가를 만나 토로하고 싶건만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개미굴 같은 이 도시엔

아무도 없다

가장 비참하고 저차원적인 고독이

모든 이들의 간격을 응결시켜버린다.


스승이시여, 그러나 저는 또 익숙해져버리겠지요

이 고독에 절망에 좌절에 비참에 천박함에…….

그렇게 되면 나는 필시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무거운 공포를 안고 자리에 눕는다.


내 가슴에선

다시 광적인 증오가 일렁거린다.

Posted by Lim_
:

텍스트뿐인 영혼이 되려고, 내 살과 피를 버렸다



만약

이 세상에 행복한 이가 있다면

정말이지 행복뿐인

내 존재의 근거를 뒤흔드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렇게 가정했다

반드시 찾아내 그 이의 뇌수에

남근을 쑤셔 넣고 강간이라는 폭력으로

영원히 앓게 해주리라고


이봐, 그러나 그런 상상 조차도

너 자신만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네가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그저 분노로 대치하려는

어리석고도 서글픈 폭력이라는 것을

자네는 정말 모른단 말인가.


아! 알고말고. 나는 말이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네

내가 행하는 모든 모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이율배반도

나는 논리의 힘으로 전부 지배했다네

그럼에도 나는 폭력과 퇴폐를 사랑해

복수만을 깎아왔다네.


애당초 행복이란 무엇인가?

오, 그것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음에도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나는 내가 미치광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네.

논리의 주박에서 벗어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네. 나는 참으로

더러울 만큼 더럽혀진 행운아였어.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가?

도파민, 세로토닌, 아드레날린.

그것들의 과다분비가 끝나는 시간. 삼 개월.

친구여, 생물학에, 뇌과학에 빠지지 말게나.

부디 인간으로 있어주게나. 호르몬은

널 정의하지 않아. 오로지 너의

뒤틀린 논리만을 실증주의로 과시하는 것뿐이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지

무엇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어떤 지식을 먹어치웠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기도 하고 유기체이기도 하고

성령이기도 하고 아미노산의 후손이기도 하다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보았어

모든 지식들이, 하나의 혼돈이 되어가는

카오스적인 에이도스의 실체를.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텐가? 나의 동료는 말하고

아무것도, 그저 영겁을.

너무도 일찍 끝나버리는 영겁 속의 순간을.

그렇다면 자네는 잃어버리겠군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거야.

아! 물론이지. 난 그저

내리막길 밑에서 기다리겠네,

내 존재를 뿌리박고, 식물이 되어 기다리겠네.


동료는 울었다. 고함치며 울었고 미치광이처럼

사방을 뛰어다니며

이 역사조차 사멸하지 않는가?

인간이 우주의 눈을 가진다면

그 무엇을 과연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넓어진 시야는

자네 자신을 붕괴시킬 거야.


나는 서투른 손으로 기타를 튕기지

음악은 단말마, 문학은 불타오르는 양피지들의 기록

천재의 미술조차도 언젠가는 먼지가 되는 것을

그러나 무어 유감일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이어서 만족하고,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네.


허무주의를 멀리 하게나. 난 계속 중얼거린다.

허무주의를 멀리 해. 그렇지 않다면

자네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더라도

스스로 구겨져 소멸해버릴 거야.

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너무

잔혹하지. 인간에게, 그래 인간에게!

오로지 잔혹하기만 하지.


도대체 누가 진실을 말했는가?

도대체 누가 영겁을 말했는가?

닫힌 문, 불이 붙을 정도로 독한 리큐어.

약쑥에서 뽑아낸 환각제, 미쳐 휘청거리는 취객들.

봐, 오로지 감각이야. 오로지

감각뿐이야.

이성도 양심도 영혼도 믿지 말게

우리는 그저 피어올랐다 꺼지는 불꽃일 뿐.


이보게, 시인이라는 명예에

인간이 되는 것조차 포기한 당신.

그래도 자네에게는 아직 인류애가 있음을

인류애가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음을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네, 나의 친구여.


옳아, 그것은 사실이야. 여름의 열풍이 불고 간 자리에도

감상주의자의 눈물은 이슬처럼 풀잎을

타고 흘러내리지.

난 심장을 절개했어, 왼쪽과 오른쪽을

절개해 떨어트려놓았어. 간질 환자들이 뇌를 자르듯이.

친구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겐가?


그것은 간단해, 나는 한때 인간의 맛을 보았고

인간임의 맛을 보았고

나의 영혼의 척수에 에틸알코올이 가득 찬 주사를 놓았고

나는 진리를 보았다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세상이 뒤엎어질 진실을.

진실? 네가?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내 팔을 뻗겠네, 이 벌레 먹은 사다리를

움켜쥐고 늪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숨을 쉬겠네.


아, 미학에 미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반란이지. 나는 그저 얼굴을 감싸고

자네가 소금과 모래의 재가 되어가는 것을

상상만 하겠네. 자네의 최후를 바라보지 않겠네.

인간 껍질을 뒤집어쓰고 인간을 포기하는 작자를

도대체 누가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답도록 하게나

혼란과 혼돈 뿐인 세계에서

다만 아름답도록 하게나, 영겁이 주고 간

천둥소리 밑에서, 스쳐지나가는 빛처럼

0.1초의 절규는

우주보다 나이가 많다네.


남자는 미루나무 아래에 누웠고

구름은 오팔 빛으로 번쩍이고

곧 밤이 올 것이다.

부디 얼음 같은 빛으로 내 존재를 지워주게

부디 얼음 같은 열파로 내 의식을 녹여주게

세상은 아직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하늘엔 미친 듯이 천둥소리가 나지만

번개를 쥔 신은 그 위에 있지 않다

천둥소리에 움찔거리는

인간 모양의 인형만

사고하는 고기인형만

상념에 부풀어 마침내는 폭발한다.


잘 가게, 친구여

그대는 모든 것에 대한 반역자였네.

그리고 필시 고독해질 테지.

지옥불 속의 영혼처럼

그대는 필시 고독해질 테지.

Posted by Lim_
:

주홍빛 반달 밑에서

글/시 2016. 6. 28. 04:35 |

주홍빛 반달 밑에서



새벽 막차 지독히 취한 내게

승객 하나 말을 건넨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제 원래 얼굴 색깔입니다.

이제 보니 승객은 중년의 남자고

선해 보이는 얼굴에 쓴웃음이 뜬다.


많이 드셨나보군요. 젊으신 분이.

홧술입니다. 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하는군요.

물이라도 좀 드시죠, 남자는 가방을 뒤적인다.

선생께서는,

나이가 많으시니, 저보다도 발이 무겁겠군요.

물병을 건네받으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내 혀는

멋대로 꼬부라진다. 달을 말입니다,

달을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달을.

반달이요?

달빛만으로 취해서 공중으로

내딛는 순간 세상이 날 바닥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세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글쎄요, 중력이란 단어는 무서운 것입니다.


손끝마저 알코올에 절어 나는 물병을 열 수가 없고

남자의 얼굴은 친절한 몰이해의 표정이다.

늙은이들도 언젠가는 젊었다는 것이

그러니까 그 미치광이 같은 혈액이 말입니다,

그것에 이끌려 공중을 날았었다는 것이

그것이 과거형이라는 것이,

소주가 폐로 들어갔나, 내 숨은 탁하게 젖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쓴물이 입안에 고인다.


새벽의 난폭한 어둠 속에서

막차는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둠도 밤도 바람도

계절 탓에 비에 젖은 개처럼 퀴퀴하고

어린 시절 장마가 지나고 빗물이 쓸고 지나간 내 방에서

주워 올린 몇 권의 책처럼 부풀어있다.


이 내륙에서 여름이란 것은

도무지 사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기다려보시죠, 언제고 간에 해가 뜹니다.

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본다

이 중년의 남자는

몇 시간 뒤 뜰 해가 태양임이 아님을 모르는 나이다.


막차는 밤 속을 달리고 나는 지독히 취했고

계절에선 어두운 골목 썩어가는 시취가 풍기고

내 발목

온갖 손아귀에 붙들려 무거워져만 가네.

십여 년 전

공포도 모르고 달로 걸어간 내

반쪽 영혼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Posted by Lim_
:

어느 늦여름

글/시 2016. 6. 19. 06:41 |

어느 늦여름



날벌레들 소리 없이 사라진다

철 늦은 모기 내 피를 빤다.

저 암컷 모기 내 떨리는 살 위에서 피를 빤다

뱃속의 알이 되고 자식이 될 것들을 위하여.

그 흡혈이 사랑이라고 나는 되뇌어본다.

이 우주에서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본질이라고


새벽 내내 종잇장을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던 나는 돌연 소음을 품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한 쌍의 연인들 시소를 탄다

내 반개한 눈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실례합니다만,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합니까?

젊은 연인이란 무엇을 노래하기나 한단 말입니까.

알다시피 깊은 산사보다도 정적뿐인 이 도시에서……


그러나 나 이미 소음을 품고 왔고

내 귀 절규와 굶주림의 노래로 꽉 막혔다

새벽 다섯 시란 시간도 이 계절

에는 이미 파랗게 물드는군요. 장님이 아닌 나는

행운아입니다. 흰 구름 부서진다.

문득 옛 사랑을 떠올리고, 그러나 나는 아무 감상도 없어

각각의 의지는 사랑하거나 더러는

다 읽은 신문처럼 곱게 접혀 버려지는 법,

실제로 나는 영혼의 울림을 읽었을 뿐인 것을.


담배를 끊었다. 그 옛날 담뱃진

으로 하얀 벽지 노랗게 물들었던 할아버지 댁,

내가 철들었을 무렵 당신께서는 이미 자리에만 누워

정신없이 잠만 주무셨다. 나는 그의 얕은 숨이 두려워

아버지, 얼마만큼 숨을 쉬면 죽음이 그것을 걷어가나요?

육신이 숨 쉬는 것은 체념인가요? 왜 나는

이리도 일찍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배워버렸나요?


아무도 모른단다. 심지어는 죽어가는 사람들조차도

병에 걸려 죽음과 손을 마주잡은 이들 조차도, 라며

겁먹은 내 손 꽉 붙잡은 아버지.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손에 넣지 않을래요

대답 없는 아버지, 나는 나 자신에게만 중얼

거렸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그는

드물게도 깨어있었다. 당신께서는 아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어린 눈동자를 향해

깊은 주름 가득히 웃었다. 뒷걸음질

치는 내 어깨를 아버지의 손이 붙들었다.


흰 구름 부서진다. 파란 아침 하늘

너무 오랜만에 보았다. 나 공원 벤치에 앉아

깨어나는 도시인들 사이에서

내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어, 중얼댄다.

바람결에 목숨들 흩어진다.

Posted by Lim_
:

새벽 두 시, 이상한 탄생



매끈하게 압착된 질 좋은 종이를 나는 몇 번이나 쓰다듬는다. 책상 위에는 잉크가 거의 다 닳은 볼펜, 그리고 그 뒤에는 수정액이 필요가 없는 오피스 문서 프로그램이 스크린에 떠있다. 왜 볼펜을 쥐고 종잇장을 난도질 할 때는 나의 영혼이 하얗게 터질까. 푸른곰팡이가 핀 타자기를 두드릴 때 나는 공허한 망상에 빠진다. 빗소리 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축축한 여름밤, 새까만 창문은 사고의 방벽이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 방 가득히 찬 분열과 모순의 사고들을 흙으로 만든 방패처럼 지키고 있다. 나의 필기는 폭력이다. 잉크로 그어놓은 나의 문장들을 보면, 그것들은 당장이라도 종이로부터 뛰쳐나갈 듯 들썩거리며 고통이 담긴 조소로 입술을 찢는다. 내 방에는 공간이 없다. 죽은 이들의 시체와 그에 대한 존경으로, 내 방은 빽빽이 들어차 고대의 피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듯하다. 단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는다면 좋을 것을. 창밖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약에 몹시 취해 나의 손가락은 취객처럼 비틀거린다. 이것 봐, 자네 자신조차도 자네의 미학을 개념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술집에서 배갈인줄로만 알고 빙초산을 한 병 들이마셨다. 고통스럽고 취해있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는 업고 달렸다. 아버지, 매일 같이 당신을 찾으러 대폿집을 돌아다니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아버지, 당신이 영혼의 자유에 목을 매고 미소와 함께 무너져버리는 것을, 나는 먼 미래에서 보았습니다. 더러는 그것이 영혼의 자유가 아닌 영혼의 부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낯선 사내는 닫힌 방문 안에서 타자기를 두들기고 눈물을 삼키다가 흉터처럼 깊은 선을 잉크로 종이에 새긴다. 시간은 기억에 맡겨졌다. 그리고 기억은 사생아의 출신에 의해 꿈틀거리는 진흙탕이 되었다. 광기의 문! 모든 애매모호한 과거들이 그 뒤에 갇혔다.


내가 태어난 혈액은 짐승과 소시민의 피였다. 그러나 나는 돌연변이였다.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돌연히 태어나고 말았다. 나는 도덕과 윤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 통념과 법률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내게 빠져버린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각이었으리라. 어머니, 당신의 손을 잡아도 될 까요. 너무나 약하고 작아져버린 당신은 이제 두렵지도 않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내가 증오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을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그러나 밖은 바람도 불지 않는다. 나는 줄곧 사생아의 기분을 느끼며 살았고 줄곧 사생아였다. 삶을 앞에 두고도 웃는 사람들 사이에 낯선 사내는 아름다움이 무엇이었냐며 자문한다. 허나 사내는 펜을 쥐거나 타자기를 두드리기만 할 뿐, 별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 되었다. 사방 가득하던 밤 벚꽃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가 버려, 벚나무는 까맣고 깡마른 노파의 손처럼, 그저 그림자를 움켜쥐고 정적 속에 침묵한다. 안녕, 삶들이여. 안녕, 떨어져버린 꽃잎들이여. 안녕, 너무 빠르게 늙어버린 내 영혼이여. 안녕. 그래도 나는 휴머니스트였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