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충류의 수기

글/시 2017. 1. 4. 10:11 |

파충류의 수기



어느 날 내 눈을 장막처럼 가리고 있던 안대가 풀렸을 때, 나는 나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끈적거리는 윤기와 함께 빛나고 있었으며,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심지어 나는 내 뇌수조차 도마뱀의 그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해가 질 때를 노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의 작은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며칠간을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술 취한 사람처럼 벽에 몸을 부딪치고 다녔다. 자결하려고 했지만 편지봉투를 뜯을 때나 쓰는 작은 나이프로는 내 비늘을 자를 수 없었다. 절망의 새벽이 몇 번이나 지나간 뒤 나는 더 이상 고함지르지 않고, 방바닥에 웅크린 채 내 차가운 심장에서 증오와 공포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냉혈동물이 되어버리자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아, 보일러조차 들어오지 않는 싸늘한 다락방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방바닥을 하염없이 긁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마그마 같은 증오에 사로잡혀 다락방을 마구 뒤지다가 나의 작은 노트와 펜을 찾아냈다. 세 시간이나 걸려 물갈퀴가 있는 손으로 펜을 놀리는 데에 익숙해졌다. 나는 노트에 아무 말이나 갈겨대면서 내가 이젠 분노와 공포밖에 남지 않은 쭉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안대를 벗기 전에도 파충류였다는 광적인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적들은 항상 내 도처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파충류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로써 그들은 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드디어 그들 모두를 마귀처럼 불꽃처럼 증오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산산조각 내 피가 흠뻑 젖은 살점들을 씹어 삼키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 좁은 다락을 나간다면,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인간들이-그러니까 나의 적들이 나의 심장에 창을 꽂을 것이다. 나는 살해당할 수 없었다.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다. 고로 내가 그들을 살해하거나 무한히 증오해야만 했다. 나는 사태를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한참을 다락 안에서 돌아다녔다. 나는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권총도 그럴싸한 나이프 한 자루도 없었다. 만일 무기를 조달할 필요성이 있다면 나는 인간의 거죽을 구해 뒤집어쓰고 인간의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흉내를 내려면 우선 그들을 연구해야했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명철한 직관과 지성이 있었다. 나는 불 꺼진 다락에서 파충류의 눈동자로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기록해야한다는 강한 소명을 느꼈다. 나의 이 무구한 증오를 축복으로 여기면서 공포라는 잉크로 지금 몇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는 곧 나의 본성대로, <그들>이 나를 만든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누구의 것이든, 길바닥에 쓰러지게 될 시체를, 혹은 시체들을 위하여: 파충류 만세.

증오 만세.

살인 만세.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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