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의 죽음

글/시 2016. 10. 18. 03:48 |

어느 여인의 죽음



내가, 랭보를 다시 읽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을 때, 그녀는 다시금 죽었다. 그였던가 그녀였던가. 사실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여름인데도 공기가 차가울 정도로 공원은 고요했다. 아, 그 당장이라도 산산조각이 나 유리파편처럼 쏟아질 것 같던 고요! 이걸 들고 있으렴. 아버지가 건네준 것은 내 상반신만한 액자였다. 난 어리둥절해 액자를 들고 있었고 유령 같은 검은 발걸음들이 나를 인도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완수되자 나는 액자를 놓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무언가를 물어봐야했건만 도무지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니 나는 순간 사람들이 어떻게 비극을 계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는요? 엄마가 보이지 않아요. 네 엄마는 차 안에 있어.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자애롭지 않았다. 나는 입안에서 이상한 맛을 느꼈다. 나는 내일이면 아버지의 얼굴이 원래의 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가기나 하는 것인가 불안하였다. 어디선가 검은 소매 끝에 달린 친숙한 손이 내게로 뻗어져 내 손을 잡았다.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것 같은 따끔따끔한 땅이 날 춥게 만들었다. 그때 대기에 금이 가듯 새된 소리가 어디선가 찢어지듯이 울렸다. 척수에 전기라도 통한 듯 나는 몸서리쳤고, 나의 어린 호기심으로 그 소리를 찾아 뛰었다.


너무 많은 문. 모든 문들이 유리로 되어있었다. 이 공원은 이상한 공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런데 그 새된 소리는 땅 밑에서 지진처럼 솟아났다.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새까만 유령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한 유령이 여인의 입에 종이봉투를 가져다댔다. 종이봉투는 여인의 숨으로 히스테릭하게 부풀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여인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장면은 나를 순식간에 지루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는 우리 학교의 문제아들이 하듯 그 장면에게 혀를 내밀고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박타박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 태양은 너무 하얬고 너무 사납고 고요해서 그 공원의 모든 것을 일렁이는 환각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환각이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와 닮은 어느 늙은 남자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태양 아래 소금기둥처럼 우두커니 서서, 내가 이 공원과, 이 공원의 검은 유령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있다는 이상한 감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오늘 변덕스럽게 랭보를 펴보니, 순간 어떤 여인이 다시금 죽었다. 분명 나는 늙어있었다. 나는 이제 랭보를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전혀 늙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 여름날의 지글거리고 눈을 멀게 만드는 태양은 여름이 오면 다시 떠오른다. 똑같은 지루함과 악의와, 어리둥절한 꼬마는 아직도 그 공원에 서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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