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 반달 밑에서
글/시 2016. 6. 28. 04:35 |주홍빛 반달 밑에서
새벽 막차 지독히 취한 내게
승객 하나 말을 건넨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제 원래 얼굴 색깔입니다.
이제 보니 승객은 중년의 남자고
선해 보이는 얼굴에 쓴웃음이 뜬다.
많이 드셨나보군요. 젊으신 분이.
홧술입니다. 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하는군요.
물이라도 좀 드시죠, 남자는 가방을 뒤적인다.
선생께서는,
나이가 많으시니, 저보다도 발이 무겁겠군요.
물병을 건네받으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내 혀는
멋대로 꼬부라진다. 달을 말입니다,
달을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달을.
반달이요?
달빛만으로 취해서 공중으로
내딛는 순간 세상이 날 바닥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세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글쎄요, 중력이란 단어는 무서운 것입니다.
손끝마저 알코올에 절어 나는 물병을 열 수가 없고
남자의 얼굴은 친절한 몰이해의 표정이다.
늙은이들도 언젠가는 젊었다는 것이
그러니까 그 미치광이 같은 혈액이 말입니다,
그것에 이끌려 공중을 날았었다는 것이
그것이 과거형이라는 것이,
소주가 폐로 들어갔나, 내 숨은 탁하게 젖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쓴물이 입안에 고인다.
새벽의 난폭한 어둠 속에서
막차는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둠도 밤도 바람도
계절 탓에 비에 젖은 개처럼 퀴퀴하고
어린 시절 장마가 지나고 빗물이 쓸고 지나간 내 방에서
주워 올린 몇 권의 책처럼 부풀어있다.
이 내륙에서 여름이란 것은
도무지 사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기다려보시죠, 언제고 간에 해가 뜹니다.
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본다
이 중년의 남자는
몇 시간 뒤 뜰 해가 태양임이 아님을 모르는 나이다.
막차는 밤 속을 달리고 나는 지독히 취했고
계절에선 어두운 골목 썩어가는 시취가 풍기고
내 발목
온갖 손아귀에 붙들려 무거워져만 가네.
십여 년 전
공포도 모르고 달로 걸어간 내
반쪽 영혼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