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폐기작)

글/시 2021. 1. 14. 22:13 |

안개(폐기작)

 

 

그의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그 신비한 안개는 길이나 풍경을 가리는 일 없이

오로지 살아있는 것에게만 들러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했다 덕분에

길을 잃거나 하천에 던져지는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대로를 걸어도 종말이 내린 마을인 양 인기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안개의 덩어리들이

곳곳에서 움찔움찔 돌아다닐 뿐이었으니까

 

안개들이 그에게 말을 걸거나 반대의 경우도 많았으나

모든 목소리는 수증기가 얼굴 피부에 스쳐 지나가는

그런 일에 지나지 않았고 너무 오래 습기 어린 호흡이 반복되면

폐와 내장까지 안개로 가득 차 실체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몇십 번의 겨울이 하천을 얼렸고

어느 계절 안개는 캅셀처럼 녹아버렸다

그는 어지간히 당황했으리라, 친구들과

이 이상기후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으나

금세 더 심각한 문제를 알아차렸다

안개의 덩어리 속에 있던 것들은 그저 그의 말을

엿듣고 있는 수상쩍은 그림자들이었으며

그의 친구나 지인이라는 것은 실제 안개였던 것이다

 

안개가 걷히자 그는 마을에서

단 한 명의 낯익은 누군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주민들의 얼굴이 안개에 막히지 않으면

죽이고 겁탈하는 날붙이들임을 알았다

그들은 안개 뒤에서 모략을 짜며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가진 모든 애정과 욕망은 안개와의 것이었으리라

 

어느새 마을에는 빌딩 몇 개가 더 박혔으나

여전히 안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외투 위에 외투를, 모자 위에 모자를 쓴다

매일 집에 견고한 나이를 쌓는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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