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해당되는 글 308건

  1. 2019.05.09 휴머니즘
  2. 2019.05.09 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3. 2019.05.05 악인의 둥지
  4. 2019.02.01 오전 네 시
  5. 2018.12.18 물의 궁전
  6. 2018.11.04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2
  7. 2018.10.17 십자가
  8. 2018.10.10 멀어지는 길
  9. 2018.10.07 가을밤의 기도
  10. 2018.09.24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11. 2018.09.23 영원의 끝
  12. 2018.09.16 걷는 구두
  13. 2018.09.16 탄생의 종말
  14. 2018.08.23 거울을 보네
  15. 2018.08.21 회계원 블루스
  16. 2018.08.21 날것의 영혼
  17. 2018.08.09 전통의 사장
  18. 2018.06.25 프로방스의 흙 1
  19. 2018.06.13 시간의 몽상
  20. 2018.04.23 멈춰진 작품 1
  21. 2018.02.02 너를 위협하는
  22. 2018.01.03 회상
  23. 2017.12.26 도망자
  24. 2017.12.16 무음의 계절
  25. 2017.10.22 그는 그곳에 있었다
  26. 2017.09.14 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1
  27. 2017.09.09 보름날 2
  28. 2017.08.30 우리는 그에게 그 무엇도 물어서는 안 되리라 1
  29. 2017.08.18 듣는 이 있어선 안 될 호소呼訴
  30. 2017.08.10 우화羽化의 꿈

휴머니즘

글/시 2019. 5. 9. 01:33 |

휴머니즘


양장으로 된 시집들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싸구려 시집들만 커버가 멀쩡하다
은박까지 입혀져 거금 구만 원이 들었던 톨스토이는
내 위악을 위하여 불태워버렸다
중고책방에서 이천 원에 구한 헤르만 헷세는
내 책장에서 가장 늙은 책이다

곰팡이 핀 것들을 다시 꽂아놓고
불타고 남은 재는 성당에라도 바쳐야하나?
이미 너무 많은 유령들과 만났고
심지어 그것들은 내 집에 산다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서 피와 살을 앗아간다고
충분히 현명한 이가 말했지만

이제 작별이다! 몇 번을 고해도
그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아마
이미 내가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어느 노인이 급사할 때
가던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나는
1분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죽는지 셈할 수 있었다

책장은 창문과 거울, 심지어는 현관까지 막아버리고
나는 선악을 믿지 못하니
곧 위악을 행하고
고로 악이 되고
그래서 성냥불을 그었던 것이다

돌과 모래밖에 없는 별로 가야해

라고 중얼거리며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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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더는 사람구실 못하게 될 만큼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다가 마침내 사람구실 좀 하고 살자는 마음이 들어 달력을 보니 달력 읽는 법도 이미 잊어버렸고, 아들 너 도대체 언제쯤 취직할래? 니 아부지 이미 영감님 다 됐는데 뭐하자는 거야, 사람구실 하자는 결심은 섰는데 살면서 사람구실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어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괜히 착잡해서 대마나 한 대 빨고 싶은데 대마 살 돈도 없다.

 

마지막으로 원고에 손 대본 게 아마 5주 전이지? 이젠 스스로 작가니 시인이니 하는 것도 구라야 새꺄, 아주 자기정체성에 사기 치는 거라고, 거울 보면서 주절대는데 그 와중에 담배는 피우고 싶어 어슬렁어슬렁 연기 뿜으며 골목으로 나가면 도대체가 이 막다른 도시는 변하는 게 없고, 날이 저물고 부모님 내일 직장 나가려고 잠들면 혼자서 외로움이나 마시러 간다. 세 시간 뒤에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위장이 새벽골목에 토악질 하라고 시킨다.

 

차라리 예전 같으면 산사에서 뒤지게 마시고 취한 채로 불상 끌어안고 펑펑 울었을 텐데, 더 젊었을 때는 새벽 네 시에 동네 비구니 절 쳐들어가 주무시는 스님들 다 깨우면서 부처님 앞에서 울면서 절도 했다. 참회하러 가서 악업만 더 쌓았다. 그런데 이제는 쌓은 악업이 허용량을 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이 좁아터진 욕계에선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고, 나 혼자 법륜에서 튕겨 나와 추락하고 있다는 믿음이 위안이다.

 

같은 중학교 다니던 용훈이는 벌써 몇 년 째 빙상장 얼음 갈고닦아 가족들 먹여 살리고, 문학적 신념 차이라는 지랄보다 못한 이유로 5년 전 서로 두들겨 패다 연락 끊은 영권이는 알아보니 예쁜 마누라 만나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산다고 한다. 그동안 난 뭐 했나 고민해보니 아무래도 난 여기에 있던 게 아니라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랑 암스테르담 들락거리며 알제리에서 살았던 것 같네, , 진눈깨비 맞으면서 아니스 빚느라 손이 다 뭉개졌지. 그거 알아? 암스테르담에선 카페에서 대마를 팔아, 시간 나면 네덜란드 시민들 행복도 설문조사 한 번 해봐.

 

언제부턴가 하늘이 하늘로 안 보여, 그러니까, 하늘을 보면 그게 하늘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데, 저게 도대체 뭣 때문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아니라 콘크리트가 깔려있어도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옘병…….

좀 닥쳐 시발. 나 이력서 쓰는 중이야. 중학교 동창 중에는 유일하게 나 같은 백수인 종인이가 일축했다.

Posted by Lim_
:

악인의 둥지

글/소설 2019. 5. 5. 16:54 |

악인의 둥지


 벽 밖의 냉기가 거실까지 침범하던 날. 옷과 코트를 갖춰 입고, 분명 밖은 하얀 아침햇살로 가득할 날에, 내 다리는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소리 없는 구토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된 현관바닥은 차가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현관문이 100m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살.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한다고 목이 졸린 나이. 청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온 다리로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겁에 질린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힘이 풀린 다리를 밀며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기어간다. 폐부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찢고 싶었다. 울면서 엎드려, 되뇌었다. 내 집은 어디? 내가 누워 잠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지?
 서랍을 뒤져 나온 것은 9알의 파란색 수면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정말로 악몽 같은 꿈이고,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나는 방법은 모른다.

 꿈속의 꿈. 일요일의 할인마트에서 길을 잃은 아이. 다른 꿈. 아버지와 농구경기장에 가서 인파에 겁을 먹은 아이. 약간 시간을 뛰어넘어서, 훔친 술에 취해 도장 파는 칼로 가슴 가죽을 찢고 있는 이상한 아이. 주변엔 낯선 인파뿐.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된 근육과 끓어올라 흘러내리는 뇌수. 훔친 술을 한 모금 더. 끔찍한 맛이지만 정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왜. 왜. 왜. 그러나 대답해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은 절대 올려다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죄악으로 가득한 지상과 연결된 환각적인 그라데이션에 불과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현실이라는 또 다른 꿈. 시야가 부옇다. 얇은 이불 위에 엉망으로 구겨진 몸체. 코트를 입은 채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고,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손끝에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거품이 묻는다. 손가락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붙이는 데 고생을 했다.
 연기를 뻐끔거리며, 흐린 눈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뜯어내서, 끌어안아줘. 담배연기는 좁은 방 안으로 퍼져가고, 냄새가 배고, 이곳을 악몽의 둥지로 만든다. 니코틴과 침이 섞인 액체를 입가로 흘린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답이 나올 리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답을 찾을 생각도 없이 하고 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니지, 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터무니없이 많은 가설들이 있다. 공허로 돌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마치 태어나기 이전에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자살하지 않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야. 어쩌면 내게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나로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위협.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섭다.
 나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위액과 수면제와 침이 섞인 자국 위에 13개비의 구겨진 담배꽁초. 누군가 마구 현관문을 두드렸었다. 성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밖은 낮인가? 지하에 지어진 내 집에는 창문이 없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마구 현관문을 쳐댈 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 네가 찾는 사람은 없어. 이제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그래, 그 추운 아침에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렸을 때, 사실 나는 전부 무너진 것이다. 나라는 형상과 흔적이 전부 무너져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 찾아오지 마. 이젠 인간으로 있는 것도 무리니까. 누운 채로 토했다. 거품 낀 위액이 흘러나오고, 눈물도 강제로 밀려나오고. 이불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위장이 아프다.
 그러나 밥을 먹을 수는 없어. 생존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그만둬야한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 노력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만 굶으면 생명력이 나를 제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때부터는 생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배가 부르고 목이 마르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성이나 인격 같은 것은 듣기에나 아름다운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존재의 주인은 오로지 생존하려고만 하는 처절한 본능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살기위해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외로움에 목을 졸라매는 일도 없게 되겠지.

 <인간>의 책무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오른손의 손톱 세 개가 빠졌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어렵고 좁은 길로 가는 것. 오른쪽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온통 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됐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보상이 없더라도 <인간>은 어렵고 좁은 길을 헤치고 가야한다. 얼굴 반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스스로를 할퀴다보니 멈출 수 없게 됐다. 피나는 통증이 잠시라도 흐려지면 발이 제멋대로 부엌을 향해 뛰려고 한다. 오른쪽 시야가 붉다. 문뜩 탈수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불은 온통 피로 축축하다. 탈수가 아니라 빈혈인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앉았다. 며칠 만에 두뇌가 허공에 떴다. 세반고리관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욕지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장은 텅 비어서 약간의 위액 거품만 혓바닥 끝으로 밀려나올 뿐이다. 두 팔로 상체를 지지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곧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여 똑똑하고 듣기 시작했다. 시야는 여전히 혼란.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고,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 이상한 곡선들만 눈 안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뭣 때문에 이러고 있었더라? 나는 뭐지? 아, 온몸이 피와 체액으로 끈적끈적하다. 샤워가 하고 싶어.
 샤워가 하고 싶어. 일어서려고 노력해봤다. 균형을 잡기 힘들어서 허리를 펴기도 전에 몇 번이고 넘어졌다. 한 번은 벽에 이마를 찧어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에 기절할 뻔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얼른 씻고 거울을 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원래는 거울 따위 일부러 피해 다니는데, 이제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트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피와 토사물과 담배꽁초의 진창 속에서 치매 걸린 노새처럼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기기 시작했다. 다리로 몸뚱어리를 밀면서, 문턱을 넘어, 냉기가 새하얗게 반짝이는 거실로, 그 위에 내 피를 덧칠하고, 그러나 아주 깜깜한 거실, 창문이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려 내 자멸의 둥지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이런 상황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은 나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나 한 명만 있어야한다. 아무도 내 알량한 연극무대를 보게 할 수 없다. 만일 관객석에서 당신들이 내 괴상한 연기를 보고 있다면, 난 즉시 무대를 취소하고 정상적인 각본을 짜올 테니까. 그러니까 관객은 비난도 비판도 그렇다고 호응을 해주지도 않는 목각 같은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마침내 화장실 문 앞에 죽어가는 구더기처럼 웅크려있는 이 관객은, 애당초 이 무대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거친 채찍 같은 운명에 등 떠밀려 억지로 배우의 눈구멍 속에 앉게 된 것이니까.

 사촌 언니가 울고 있다. 아니, 곡을 하고 있다. 사촌 오빠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진땀을 빼고 있고, 저쪽에는 영정사진, 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큰어머니, 영정사진 안에서조차 그녀는 매사에 화가 난 표정이다. 곡소리가 점점 새되어지고 히스테릭한 비명소리로 바뀌어간다.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전혀 소속되어있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장면에서 나는 끔찍한 지루함을 느꼈다. 2년 전 나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 차이점은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사랑? 그래,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일상적인 단어 하나 능란하게 쓸 수 없게 되었지. 나는 여전히 동상처럼 서서 사촌 언니가 자지러지는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 무엇이 슬픈 걸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은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인간의 유한성? 상실이 반복되기만 할 뿐인 인생? 언젠가는 오고야 마는, 가을수확을 하듯이 낫을 들고 찾아오는 운명? 글쎄, 아마 사촌 언니의 <감정>은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겠지. 논리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입맛을 다시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걷기에 적합한 몸. 뛰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젊고 활기찬 몸. 검은 단화에 검은 양말에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위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장례식장의 야외를 종횡무진. 잘은 몰라도 아빠는 큰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다.
 화장실 건물 뒤. 거의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머리칼을 가진 익숙한 중년남자. 그리고 그 앞에 이미 완전히 백발인 노년의 남자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아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 테지. 담배연기 자욱한 그 좁은 길목은 두 사람의 침묵을 위한 것이었다. 마치 벽이 둘러쳐진 듯,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중년남자의 얼굴은 아빠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은 아빠의 표정이 아니었고, 또한 그 표정은 2년 전에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었다. 흐린 눈을 가진 백발의 노인은, 아빠와 한없이 닮은 그 노인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공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슬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막연히, 공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안개로 장막이 쳐진 것 같은 광경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다급한 구두소리가 들려왔고, 누군가, 아마도 친척 중 한 사람이겠지, 그가 노인에게로 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가 실신했어요.” 나도, 아빠도, 큰아버지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애당초 무슨 다른 소식이 있겠는가? 다만 나는 노인이 담배연기를 더 길게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눈꺼풀을 껌뻑였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그들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마치 <아빠처럼>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물이 타일 바닥에 웅크린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린다. 물. 이 물이 내 죄악까지 씻겨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내 영혼도 씻겨나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그대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갖가지 도피적인 망상들. 그러나 현실에서 씻겨 지는 것은 피부에 들러붙은 위액과 피와 담뱃재뿐이다. 주황색 조명이 비추는 화장실. 균일하게 물줄기가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다. 아주 완벽하게 유리되고, 폐쇄되고, 의미와 가치를 벗어난 주황색 공간. 내 피부를 거친 물은 주황색 혹은 분홍색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간다. 상처가 또 열려, 피와 진물이 배어나오고, 불에 타는 것 같아. 오른손을 보자 내가 검지와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하고 벌겋게 벌어진, 열린, 원래는 닫혀있어야 할 살이 움찔거리며 진액을 토한다. “하하하.” 누가 웃었지? 누가 웃었어? 아, 내가 웃었군. 거울을 봐야겠어.
 시야는 여전히 붉고 흔들린다. 온수를 맞으며 비척비척 타일바닥 위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벽을 짚으면 손가락 끝이 너무 아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넘어져서 머리라도 바닥에 박으면 그대로 죽는다. 물론 모든 시나리오의 결말은 죽는 것이지만, 아직 페이지가 남았을 것이다. 기승전결 같은 정석적인 것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아직 페이지가 남았고, 결말은 가깝기는 해도 눈앞에 있지는 않다.
 세면대 위에 붙은 높이 1m 가량의 거울. 가까스로 서서 보자 틀어놓은 온수 때문에 거울에 온통 김이 끼었다. 불확실한 반사. 검고 하얀 어떤 유령 같은 것이 거기에 깃들어있다. 닦아야할까? 닦지 않아도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봐야할 것이,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불확실함. 불길함. 고장 난 메트로놈 소리가 이미지화 된 것 같은, 섬뜩한 소음공해. 그 희뿌연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산 담배를 피운 것처럼 흉부가 죄어온다. 주황색, 주황색, 주황색 속에, 어떤 낙하 중인 것, 어떤 불분명한 형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불길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자기 자신을 포함해― 불길하고 공포스럽다. 야밤에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음 같이. 혹은,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 너무나도 바쁜 군중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 그 모든 사건들의 중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버렸을 때 같이.
 아, 제기랄, 이마의 열린 상처가 너무 아파.

 그런데 나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 무가치하고 사악하게 되는 것밖에 없다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보세요, 시대는 절대성을 잃었어요. 정확히는 그런 건 원래 없었죠. 다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원시부터 중세까지 작동하던 안전장치였는데, 그게……
 작동을 멈췄군요.
 맞아요. 선생님, 만약에 기계부품이, 자신이 오로지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기계의 작동을 방해해야 해요. 기계를 부숴야 해요. 자신이 속한 기계를 망가트리는 부품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기계부품이 아니죠.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그 창백한 젊은 여자는 탁자에 놓인 커피 잔을 보면서 말했다. 커피 잔은 커피로 가득 차있었다. 여자는 사물의 모든 존재방식이 끔찍하게 무섭다고 느꼈다. 그녀는 도무지 커피 잔을 쥘 수가 없었다. 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유리로 된 대상은 너무도 취약해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 역시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그 시선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 나약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소리의 치명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여자는 무언가 담소를 나누면서 간헐적으로 새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젊은 여자는 천 개의 바늘이, 감정을 가진 바늘이 뇌수로 침입하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경련과도 같은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온몸의 살가죽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온 것을, 애당초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밖으로 나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페의 라디오에서는 발라드싱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위험하다. 여자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고, 이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갑 안에 부적처럼 모셔둔 발륨 봉지를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집었다. 내 뉴런들이 욕을 하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봉지 안의 발륨제제를 하나하나 꺼내 커피 잔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하얀-하얗고 강력하고 조그마한 고체들을 손끝으로 움직여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공포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의식은 그 정사각형을 주시하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식어가고 발라드싱어는 서정적인 음색으로 폭력을 울부짖는다. 삼켜야해. 삼켜야해. 사물의 본질에 노출되어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은 사방팔방에 즐비하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며, 태초부터 숨겨온 칼날을 은밀히 조준하고 있다.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던 타원형의 제제들을 여자는 신중하게 하나하나 왼손으로 옮긴다. 그리고 삼킨다.
 15분. 구원을 위한 15분. 어떤 구원? 도피는 아니고? 그러나 도대체 차이점이 뭐란 말인가? 발라드싱어가 더 이상 자살을 종용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옆 자리의 웃음소리가 추악한 고문기구가 아니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유리잔이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두 손을 뻗는다. 여전히 취약한 세상. 그러나 아까보다는 깨지기 어려워졌다. 사약사발을 들듯이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려 죄악의 엑기스를 삼키듯이 들이킨다.
 이제 잔의 커피는 절반.
 절반의 막다른 길.

 거울의 김을 손바닥으로 지운다. 주황색 조명 아래 객관이 규정한 내 모습이 한 줄기씩 드러난다. 검은 머리의,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인, 저 눈, 저 눈을 좀 봐, 건강-건강한 사람들은 절대 저런 눈을 하지 않지. 왜 동공이 닫혀있지? 너는 지금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으며 안락해야할 텐데. 저 동공은 새까맣게 닫혀있다. 노이즈. 안전장치. 노이즈. 생각하지 말 것. 사고는 자멸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할 때 시끄러운 잡음을 뇌하수체에서 분비한다. 경고다. 생-각하지마. 계속해서 거울을 지워간다. 담배 때문에 잿빛으로 변한 입술이 웃고 있다. 그야 그렇겠지. 절망의 다음 단계는 웃음이다. 정확히는, 절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 사람은 웃게 된다. “히히.” 거울 속의 웃고 있는 잿빛 입술이 우스워서 웃었다. 마주 댄 거울처럼, 계속해서 서로를 반사하는 농담. 결국 이 모든 것은 영원의 망각 속에서 바스러져갈 먼지에 불과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이 우주 자체가 허황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도, 불행도, 비참도, 부조리도, 미치광이의 농담이다. 아가트! 아가트!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당신뿐이야, 아가트. 그녀의 이름은 에브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손을 좀 더 움직인다. 창백하고 빈약한 젖가슴 한 쌍과, 그 사이에 그어진 수 없이 많은, 오래되고 불거진 직선의 흉터들이 보인다. 오십 개, 혹은 육십 개? 그것들은 흰색이다. 흉터는 처음 벌어졌을 때 피를 흘리며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곧 갈색이 되고, 딱지가 떨어지고 불거져 나오며 살보다 흰 지독한 백색이 된다. 저 아래에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꺼멓고 쪼그라든 심장을 꺼내서 내 사랑을 다 해 끌어안아주려고 했는데, 칼로 가죽을 찢는 건 너무 아팠고, 칼날이 복장뼈를 긁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어. 아아, 몸에 갇힌 가엾은 영령들아. 사실 심장을 꺼낸다고 한들, 분명 심장의 더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울고 있겠지. 고로 이것도 거짓말쟁이의 농담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우리는 어디에도 없어. 만약에 우리가 있다면, 천지사방에 흩어진 암스테르담의 안개 같은 비참함이 우리다.

 괴물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쌍뜨뻬쩨르부르크에서는 설날이 되면 2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친척모두가 모여 2주 내내 보드카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자는 것을 반복한다. 밖에는 나갈 수 없다. 얼어 죽으니까. 담배연기와 너부러진 술병과 너부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고 러시아에서 온 남자친구는 말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보드카 잔 위에 앉은 녹색요정 같은 거라고.

 이 컵은 매우 현명하군. 검은색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검은색은 견고하지. 잘 깨지지 않아. 그래서 나도 내 방의 벽지를 전부 검은색으로 칠했었지. 그래야 망령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하니까.
 옆방에 있던 사람이 한 말이다.

 누군가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당신의 행동과 말들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온몸에서 투명하거나 혹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으로 나간다. 깜깜하지만 몇 년이나 살아온 집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은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식칼 옆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든다. 다시 욕실로. 주황빛 조명 아래 스테인리스 제 과도가 둔하게 번쩍인다. 거울에는 알몸의 앙상한, 피투성이 여자가 칼을 들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잿빛 입술이 말한다. “나약하고, 아, 난잡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지.” 칼끝으로 손톱이 나간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파낸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원망을 사는 게 죽기보다 무서웠어.” 다리가 무너진 건 그것 때문이다. “내 이름은……”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통증 때문에 눈이 충혈 되어간다. 칼날을 이마에 댄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칼을 쥔 손에 힘을 넣어 얼굴 가죽을 벗기듯이 이마에서부터 광대뼈로 천천히 도려낸다. 하하하. “내 이름이 뭐였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칼날은 이미 볼을 찢고 있다. “아니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었어. 사실은 아주 여러 번 죽었지.” 반대쪽 볼. 턱관절. 위로, 광대뼈. “마스크가 필요해.” 그리고 새 이름. 아니야,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절취선을 자르듯이 이마 옆쪽을 깊이 베고, 반대쪽의 선과 이어지도록 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한 번 행복했던 적이 있어.” 이마부터 광대뼈를 따라 볼과 입술까지 가죽이 잘려 피가 비 오듯이 내린다. 3년 전에 혼자 충동적으로 떠났던 여행. 켄터키의 깡촌, 비오는 공동묘지의 한복판에 누워 쿠키를 먹고 있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 쿠키에서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났다. 반죽에 말린 대마 잎을 갈아 넣은 초콜릿 쿠키. “모두 죽는다. 시체들 사이에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위안과.” 손가락을 얼굴가죽의 터진 틈 사이로 우겨넣는다. 그리고 통째로 뜯어낸다. 순간 욕실이 검은색 섬광과 새빨간 잔상으로 시끄럽게 발작한다. “아아아.” 이제 내 오른손은 뜯어진 내 얼굴 가죽을 쥐고 있다. “마스크. 새 마스크. 하하.” 대마 쿠키나 대마 브라우니는 피우는 것과 달라서 정신에 작용하기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그 뒤에는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쿠키를 깨작거리며 비를 맞았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추위도 통증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을 봐. 하악 위로는 전부 피부가 벗겨진, 박물관에 전시된 인체 모형 같은 얼굴. 피가, 혈액이 거울까지 튀었다. 피가 눈으로 스며들어 모든 게 다 빨간색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멀쩡한 하악의 아랫입술이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주의 깊게 본다.
 내가 믿는 게 뭐지?
 얼굴 가죽이 진액으로 끈적거린다. 조심스럽게, 거울에 붙인다.
 아주 훌륭한 농담이야.

 엄마, 제발, 나는 정말로 노력했어요. 학교에 나보다 점수가 높은 애가 한 명 있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내 점수를 칭찬했어요. 제발, 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발 방에 가두지마세요.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할 거잖아요. 저번에도 의자에 오줌을 싸고 한참을 울었어요. 제발.

 플래시백이 점점 잦아든다. 거울에 비친 괴물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과거는 허상이 된다. 나는 여러 번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 거울에 들러붙은 내 얼굴가죽 한복판에 칼을 박아 넣는다. 쨍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진다. “카-흐-아-아-하.” 헐벗은 얼굴근육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낸다. 피투성이 세면대. 안락한 기분. 안전한 기분.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우습다. 세면대에 칼을 던진다. 쨍그랑.

 내 광기가 나이와 함께 충분히 자랐을 무렵 아버지는 날 정신병동에 집어넣었다.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고, 내가 정신병동에 있는 한, 아버지는 날 심문할 수 없다. 거기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사실은, 그들이 내가 처음 사귀는 친구들이었다. 밤마다 어느 병실에서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때보다 잘 잤다. 룸메이트는 정상적인 회화가 가능했지만 간호사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어떻게든 날카로운 물건을 구해 손목과 팔뚝을 그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젊은 여자였다. 어느 늙은 노파는 매일 아침 내게 만나서 반갑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자였다. 나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지시에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간호사와 의사는 내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만 내가 매일 세 번씩 먹는 약은 병동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양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윗입술이 없으니 고생스러웠다. 담배를 입에 고정할 수가 없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곧 포기하고, 더러운 이불에 또 내 피를 묻혔다. 켄터키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만큼 편안하고 안락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정신병동 입원기록이 있다면 이미 이 사회에서 당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제정신인 친구를 곁에 둘 수도 없다. 그저 책임자가 의료기록 같은 건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아르바이트 정도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제정신은 사람들은 귀신같이 타인의 이상한 면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치료받기 위해 정신병동으로 가지만, 퇴원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병원과 사회는 서로 다른 바로미터를 갖고 있다. 인생에서 한 번 추락하면 다시 기어 올라올 방법은 없다. 퇴원할 때도 우리는 이미 똑같은 비극적 결말로 향하고 있다.

 나는 새해가 싫었어. 너무 싫었어. 그 냄새, 그 분위기,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한국으로 온 거야?
 그래, 도망친 거야.
 그리고 날 만났고.
 그렇지, 도망치고, 널 만났어. 그리고 네 덕분에 깨달았지.
 뭘?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빛이 보고 싶어. 겨울의 맑은 하늘도 보고 싶고. 나는 이미 죽었으니, 망령처럼 거리로 나설 거야. 빛이 나를 태울 거야. 난 이름도 생명도 없는 존재로서, 불타올라, 재가 될 거야. 이곳은 내 둥지지만, 사라질 때는 둥지 밖에서 사라져야 해. 이제 나는 세계를 사랑해. 물론 여전히 증오하지만, 증오하는 만큼 사랑해. 왜냐하면 이제 난 정말로 아무도 아니니까.

 현관문을 연다. 아주 오랫동안 잠궈 놓았던 기분이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는 모른다. 바라 건데 밖이 정오이기를.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만물을 향해 쬐어 내리고 있기를. 현관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시야는 붉고 흐리다. 눈꺼풀마저 떼어내서 눈도 깜빡일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 알몸으로 피투성이로 섰을 때,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빛이 내 무방비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이명 사이로 공포와 혐오의 비명 같은 것들이 들렸다. 태양이 저기 있다. 태양은 분명히 나를 내리쬐고 있다. 온전치 못한 오감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없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페이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드러난 얼굴근육을 타고 흘러 따가웠다.
 나는 그림자로 빚어졌으니
 이제 나는 빛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굳바이,
 내가 이겼어.


끝.

Posted by Lim_
:

오전 네 시

글/시 2019. 2. 1. 04:39 |

오전 네 시



정적이 차갑게 얼어붙어

밤이 몰아칠 때

나는 갈 곳이 없다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세상도 겨울이라는 꿈이니

그러나 호르몬과 화학물질들 사이에서 허우적

거리다 깨어나도 나는 나라는 꿈을 꾸고 있다

갈 곳 잃은 발은

잠에도 들지 못한다

술을 마셔보아도

꿈의 허술한 틈들이 더 잘 보일뿐

이 거품덩어리 속에서는 눕기는커녕

서있을 일도 없다


허구로, 만약 내가 진실로 향하지 않는다면……

더 짙은 안개

더 열리기 힘든 눈


그런데 시원의 혼돈이 법이었다면

피의 따뜻함, 군화소리의 분명함, 공포의 비명들:

회귀하려는 힘, 골수의 목소리

내가 찾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나를 찾고 있다


겨울에

공허가 더 맑아질 때, 꿈에는 교훈이 없고

나는 헤매고, 헤맬 수밖에, 털이 난 거품 같은 현실

활자는 증발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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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궁전

글/시 2018. 12. 18. 05:06 |

물의 궁전



은빛으로 빛나는 얇디얇은 호수 위에 정령 하나가 걷고 있다

발끝으로 파문을 만드는 그 발목의 움직임은 물빛이다

밤에 취한 사원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지붕들

정령은 생명이 없기에 죽음을 몰라라

오, 수면에는 무너진 나룻배! 나는 관조한다.


이곳이 시체들의 묘지라는 것은 모두가 잊었고

정령이 그것을 잊게 한다, 정령은

밤에서 나왔고, 호수에서 나왔고, 달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망각 속에서 농축된 시취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기나긴 날숨……

시간은 쓰러져야만 했다.


흰 나락, 정령은 내려다보고

높이와 깊이가 뒤엉겨버린 호수는 종말의 표정

그것은 아름다운 웃음이다. 관조하던 나는 즉사하고

즉사해야만 했고

대리석의 균열 사이에 핀 암청색 풀잎이

다음 생애를 가리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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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왜인지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내겐 딱히 갈 곳이 없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내 시간은 내일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미래를 믿지 마시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고 누가 말했지?

이 땅에는 해가 뜨지 않는 밤도 있다, 내가 걷는 이 밤도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그런데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정신차려보면 황혼이다, 해나 달을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어딘가 골목구석에 앉아 벽돌색의 세상에 대해 노래

부르고 싶지만 밤이 오기 전에 어서 걸어야한다

밤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리기 전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는데

구름은 항상 나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저편으로 간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공간들은 내게 텅 비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망각은 심연보다 어둡고 괴물적인 아가리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수증기 가득한 숲에서 나무들은 생명을 잃고

내가 밟는 것들은 수억 살 먹은 시체들의 유골, 나는 비문 하나 없는 묘지를

서걱서걱 밟으며 걸어가 버린다


안녕, 금화들의 도시여, 나는 미래를 믿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믿는다. 내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향하는 것은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더 가쁘게 한다, 멈추는 방법은

태어난 이래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이 행성은 왜 자전을 멈추지 못하지? 별들에게 시를 읊을 시간이 그에겐 없다

어떤 것은 끝나야만 한다, 혹은 모든 것은 끝나야만 한다, 하늘은 얼어붙고

눈이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고, 나는 걷는 얼음, 흙, 진창

또 밤, 밤 뒤엔 다시 밤


행성과 같은 속도로 걷는 눈동자에게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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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글/시 2018. 10. 17. 23:56 |

십자가



페이지 위에 빼곡히 찬 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일상

내가 서있는 곳은 긴장과 분노로 다져진 정상

뛰노는 아이들은 순진하고 생활은 행복으로 충만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 지르지 ‘그만’

그게 내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 마

행복은 너희끼리 나눠가지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마

나는 이 정상까지 십자가를 짊어 매고 올라왔어

너희는 그 일상에서 기도하는 손으로 연민 했어


바람은 차가워지는데 등줄기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

그래도 난 폭풍을 쥐고 정상의 정상으로 내쳐 가

아무도 나한테 멈추라고 하지 마, 땅의 끝이 있다고 믿게 하지 마

마지막 내 발자국이 데드마스크가 될 때

난 쓰러지며 웃을 거야, 죽으면서 외칠 거야 ‘어때’


등에 맨 십자가는 온 관절을 짓누르지만, 난 그걸 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어

손에 권총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쏘겠지만, 헛된 상상 속에서도 난 앞으로 걸어

내 맨가슴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여? 이것들이 전부 내 방패야

살면 살수록 몸은 흉터로 덮여, 아무튼 난 그걸 감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삶은 집어치워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

내 옆에서 사라져, 난 행복할 수 없어

그저 내 십자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해


그러니까 날 추하다고 말해

어쨌든 너희를 위해 아름다워지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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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길

글/시 2018. 10. 10. 00:49 |

멀어지는 길



한밤에 집으로 가네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난 어깨에 맨 가방을 들쳐 매고

가로등 밑을 조용히 지나

나 집으로 돌아가네

그러나 발자국은 점점

느려져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거짓말 같지

난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나서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생시인지 아직 꿈을 꾸는 건지


그때 창 밖에서 요란하게

동전소리가 났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

내 턱에서는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을 향해 웃어보였다네


옷을 갖춰 입고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은

누가 지적할 일도 없어 보였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소리는

날 가면 쓴 광대로 만들고


너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너무 짧은 밤이 오면

나 한 몸 뉘일 집을 찾아 가네

그런데 왜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내 집에 더 가까워지면 내 발은

고철처럼 무거워지며 점점 더뎌지는데

해는 지평선 밑을 흐르고 있다네


나 또 잠이 들면 거짓 속의 죽음을 찾겠지

결국 깨버릴 짧은 모든 망각의 늪을

그리고 해는 날 두들겨 깨워 눈을 뜨고 말테고

그러면 나 또 거울을 보며 웃는다네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 아무 것도 없는 내일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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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의 기도

글/시 2018. 10. 7. 01:41 |

가을밤의 기도



나는 습기 찬 밤거리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내 눈은 밤으로 가득찼다

희망은 없었고, 거부했다, 보이는 것은 죄와 오물

신의 아이들이 흘리고 간 후회 가득한 시간의 흔적들

혼돈의 구렁텅이에 잠겨 은하수처럼 천천히 회전하는

어둡고 소음 가득한 도시에 내가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면서도 나는 그를 믿지 않고

다만 한 번 물었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 있었느냐고

딱히 그에게 내기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나는 사람의 자식이니

그저 나는 계속, 당신이 현현할 리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육지가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심정으로 처참히 살아갈 터이니

어쩌면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어쩌면 당신이 구원할 수도 있었느냐고


어느 날 세계가 빛에 감싸여 거짓과 절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신성모독적인 신음을 뱉으며 다친 개처럼

기어 다닐 것이다

이마에 낙인찍힌 분노를 가릴 생각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질병과 고통으로 삶을 있는 힘껏 칠할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아니게 될 그 날까지

당신 없이 마지막 한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단 한 번도 웃음 짓는 일 없이 기도했다

하늘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도 되니

평안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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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글/시 2018. 9. 24. 01:45 |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어렸을 적엔 걷고 싶으면 강으로 갔다


맥주를 따르는 소리

잔에 소주가 차오르는 소리

지금 나는 내륙의 한복판

강까지 걷기에 내 몸은

이미 회색으로 썩어 무너졌다


상체만으로 술을 기울이고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달은 침묵한다

물이 가진 근육의 결들

덮쳐지며 겹쳐지는 투명한 운동들

칼을 집어삼키는 기분


어느 샌가 나는 밤에만 비명을 지른다

해가 뜬 시간에는 두 번째 눈꺼풀이

눈동자의 모양으로 활짝 열려, 인사한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록색 지폐를 받으며 심장은 극약을 토한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는 어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세계는 어디

늑골을 하나하나 떼어, 심장을 꺼내들고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고

텅 빈 폐 속에 또 한 번 독약을 삼키며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네가 가진 잠깐의 시간, 종이와 펜, 잉크

위하여, 웃어라, 희생은 아니야, 이것은 희생이 아니야

값을 내라, 자기 자신을 사라, 칼을 삼켜

안녕, 내 이빨은 여전히 미소 짓는다


독에 젖어 이슬에 젖어 젖은 거리를 헤매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나는 바닥을 긴다

집으로, 그런데 집이라니? 이빨은 또 한 번 웃는다

달빛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는 불꽃이 꺼지는 순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라핀은 녹는다, 심지는 탄다

눈동자만이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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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

글/시 2018. 9. 23. 01:05 |

영원의 끝



알코올에 젖어서 본 한밤의 나뭇잎은

대낮에 본 그것보다 선명한 푸른빛이었고

밤의 이슬을 머금어 알코올을

뚝뚝 듣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은 제 본모습을 빤히

내보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눈은

소주에 젖어 명백히 흰 달빛을

천사를 만나듯 영접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모래들 쓸리는 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 스르륵 스르륵

내게 영원한 안식을 암시하며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차들의 엔진 소리는

<이제 곧 끝날 거야>라고 읊조리며

한껏 엑셀을 밟은 채 멸망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밤의 거리에서 벌어온 흰색의 금화들은

뚝뚝 떨어지며 빗방울 소리를 냈고

내 팔뚝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웃는 채로 새겨졌다


언젠가 편히 쉬시길, 나는 웃으며 외쳤고

밤은 무게도 없이 가라앉아 오고

알코올이 떨어지는 푸른빛의 나뭇잎들은

궤변가처럼 생명의 영속을 말한다


검은 구름, 달은 보이지 않고, 해는 얼어붙었고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나는 취해 몸부림치고

까만 시멘트 바닥에서 뒹굴며 묻는다

<내 꿈들은 어디로 갔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한 달에 한 번, 자본주의에게 얻어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안녕, 내 은화로 살 수 있는 위안들아

슬픈 사람들은 내 혀를 찾아 지친 발을 더듬거리고

당신은 마땅해요, 반복되는 거짓말들, 숨겨진 조소


섬에서 봤던 야밤의 파도를 기억한다

지구의 생살을 송두리째 기억하는 몸짓들아

꺼진 등대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취한 배여, 뭍은 어디에도 없어라


흔들흔들, 나는 눈 밑에 눈물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

떠난 사람들을 추억하려 했지만 눈물샘은 망가졌다

비척비척, 내 머리는 줄곧 한숨을 토한다

가야할 곳을 잃은 다리는 길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누구에게 빚을 졌지? 모두가 묻는 질문

아니야, 갚아야 될 것은, 숨 쉬면서, 울면서 청산했다

멈출 줄 모르는 발 앞에 펼쳐진 사막, 어디에도 없는 문

애초에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이여! 아니면 자연이여! 혹은 운명이여!

언젠가 내가 쓰러져 태양의 빛살에 녹아

백골만 남았을 때 바람으로 그것도 녹여주오

나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하지 않으니


걷는 존재, 걷는 현상, 나는 꺼지는 불꽃

빛이 있으니 밤은 오고, 나는 평생 하얀 밤을 본 적이 없으나

사무치게 그것이 보고 싶었다, 환희하는 죽음

나 꺼질 때, 사그라들 때, 저 끝에


공허가 어떤 색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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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구두

글/시 2018. 9. 16. 22:06 |

걷는 구두



나는 걷는 구두

밑창은 해지고 코는 닳았다네

갈대들이 내 목을 간질이고

뚫린 코에 들어오는 진한 돌, 흙 내음

나는 걷는 구두라네


하늘은 가끔 비를 내리기도 하고 해를 띄우기도 하지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그것을 보네

내 가죽은 젖었다가 마르고, 더욱 뻣뻣해지고

그러나 오랜 걸음은 또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무와 풀들은 말이 없어


사막도 걸었고 해변도 걸었지

내 코엔 온 세상의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고

심지어 태양의 냄새까지 나는 맡아보았다

어둠의 냄새도, 달의 냄새도 날 짓눌렀다 가고

바람은 나의 온 가죽을 부드럽게 애무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네, 아니, 기억하지는 않아 사실은

바로 바람에 흘려보내버렸지, 내 뒷굽 너머로

태양에 달궈진 돌들은 뜨거워

밤의 얼어붙은 모래는 송곳 같아

나뭇잎 사이로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나의 작은 그림자를 오래도록 따라오는 죽음

나는 걷는 구두

보고, 맡고, 듣고, 담았다가

내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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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종말

글/시 2018. 9. 16. 02:18 |

탄생의 종말



이 도시에서 보는 하늘은 밤에도 회색이다


완전한 어둠과 별빛의 청량함을 기억하는 건

산중턱의 밭두렁에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던 기억이 있다

촛불의 일렁임에 정신이 팔려 찻물을 발에 쏟은 기억이 있다

가을 달의 청명함에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던 기억이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산

새들은 죽고 나무들은 말이 없다

새벽 세 시가 되면 저 높은 곳에서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까지는 만물이 자는 산


술에 취한 새벽 두 시

도시를 거닐면 사방이 찬란하고 적색이고 회색이다

내 폐는

문명을 통과한 타르와 니코틴

매연가스에 거멓게 쿨럭이며 음악을 갈구한다

그러나 절대 노래 부르지 못 한다


온전한 달빛을 본 지 얼마나 되었지?

밤의 구름은 이미 구름이 아니다

저 옛날, 그러나 너무 옛날은 아닌

산 속에서 죽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입을 다물고 기다릴 때

나는 묶인 입으로 달을 노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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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네

글/시 2018. 8. 23. 21:28 |
거울을 보네


거울을 보네, 내 삼촌이 보여
그는 오랫동안 직업이 없었지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모습이 보여
난 도망치려고 일을 배웠지

아무도 수염이 무성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어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사람답게 살아야 해, 어머니가 말했어
나는 이제 밤거리에서 일을 하지

거울을 보네, 아버지가 보여
평생 빚을 갚느라 일을 했지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슬픔으로 보여
수십 년간 그는 단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지

내가 아플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어
그래도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난 세치 혀로 밤에 금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어
동생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건 왜지

거울을 보네, 너무 깊어서 보이지 않네
언제가 되서야 땅 밑에 누워 쉬게 될 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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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원 블루스

글/시 2018. 8. 21. 23:20 |
회계원 블루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그의 머리가 댐에서 발견됐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
그저 술이나 몇 번 같이 마셨을 뿐이니

옆집 김씨가 이렇게 말했었지
젊었을땐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네
김씨는 작은 회사의 회계사였지
나는 술을 한 잔 더 따라줬다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경찰이 그의 몸을 찾지 못했다고
나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장 있었지
생각했어, 볼품없지만 솔직하다고

나는 럼 한병을 가져와 마시다가
김씨의 작품들에 그것을 부었다가
그 위에 담뱃불을 던졌다네
나는 말했네, 이제 회계일은 안 해도 되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마침내 그가 죽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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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영혼

글/시 2018. 8. 21. 00:19 |

날것의 영혼



우리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고 싶다

밤거리의 낙엽은 환상을 피워낸다

불 꺼진 아파트들은 영원히 꺼져있고 싶다

겨울만 있는 행성에는 음악이 없을 것이라고


준비,

면도를 하고

알약을 삼키고

머리칼을 자르고

손톱을 다듬고

옷을 갖춰 입어야해

널 사랑하도록 해야 해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필요 없고 싶다


칠십억 인구가 매일 밤 지하실에서 사제폭탄을 만드는 꿈을 꾼다

생명도 그림자도 사라진 고속도로 한복판을 걷는 꿈을 꾼다

<내가 태아일 때 원했던 것은, 분명 태양은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밤이 없는 행성. 악은 분명히 존재한다, 인류와는 상관없이


거꾸로 도는 피, 분명 어딘가에는

장면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우리가 살고 있어

사막에는 눈이 내리고, 잡초도 없는

거기에서 우리는 만나는 일도 없이 살지도 않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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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사장

글/시 2018. 8. 9. 20:59 |
전통의 사장


검은 아스팔트에 샴페인을 터트렸네
꿈에는 오랜 독재자들이 나왔지
나는 사기꾼, 혀로 술과 약을 만드는 사람
아버지는 정직한 가톨릭 노동자였지만
난 물려받은 전통이 없어

시궁창에 황금빛 샴페인을 터트렸네
내 손에는 구멍이 났고
나는 떠돌아다니는 사기꾼
도시의 불켜진 빌딩들 뒷골목을
짐도 없이 굴러다닌다네
가격표가 없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
나는 가질 것이 없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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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의 흙

글/시 2018. 6. 25. 17:59 |

프로방스의 흙

 


사람은 흙으로 빚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바람부는 쪽으로
강대한 적인 바람의 칼질을 맞아가며 이 길로 간다
우리는 방패가 필요 없으니, 왜냐하면
이 돌로 된 몸이 이미 목신牧神의 방패이기에
그러나 누구도 영속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진흙구렁에서 몸을 치켜세웠을 때부터
그런 약속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나타났다
태양은 길다랗고 날카로운 손가락을 뻗으며
쪼아오고 우리의 발은 진흙이 묻어
곧 다시 흙이 되려는 충동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야한다
분명 이 싱그러운 나무들과 부서지는 초록빛 햇살과
돌의 손을 활짝 펴고 있을 누군가가
<시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에 의하여, <죽음>이 축복한
모든 것들의 왕국에서
흙과 암석의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이곳>에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오, 나이 없는 물은 짐승의 뱃구렁을 파고
그 거대한 짐승의 신선한
선혈의 냄새가 사방에서 바싹 타올라
엄청난 등뼈와 해골 위를 걷는 우리는
웃음을 멈출 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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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몽상

글/시 2018. 6. 13. 14:30 |

시간의 몽상

 


내 피부가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피는 끓어오르며 가장 원시의 고기를 달라고 굶주림의 외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진흙 속에서 구르며, 벌거벗고, 광적인 태양이 빛의 창들을 무자비하게 대지로 던져대는 것을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땅에 있었다.
간음이 간음이 아니고 퇴폐가 퇴폐가 아니며 나태가 나태가 아닌 시대를 나는 종횡무진했다. 나의 심장은 점점 어려져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으로 돌아갔다.
문뜩 손을 보자 먼 미래 내 가슴에 새겨져있던 수십 개의 흉터는 주먹으로 옮겨졌고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이 배겨 촉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나는 승리했다고 춤을 추었다!
강한 턱과 무자비한 송곳니로 나는 낯선 혈거인간들을 내 식도로 꿀꺽 삼켰다
하늘에는 분명히 신이 없다! 거기에는 저주처럼 타오르는 붉은 구球만이 고고히 있다.

 

아니야! 내 입이 터져버렸다! 이젠 밤이 내리지 않는다!
선혈 대신 독주를 마시고 죽은 인간 대신 구운 고기를 먹으며 천둥번개 대신 음악이 들린다
나는 오히려 태아처럼 웅크렸다, 단 한 번도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높은 수정의 궁들은 날 덮칠 듯이 쏘아본다

내 혈관이 텅 비어버렸다
공포로, 그런데 그 공포도 대지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달라.
언어는 바보이다. 그것에 젓갈처럼 절여진 나는 머저리이다.
「너는 열망을 열망한다.」 커다란 조롱처럼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로 가야 아무 의도 없이 피어나는 장미를 볼 수 있지? 이제는 모든 장미가 씨앗 때부터 <나는 장미가 되고 말 테다>라며 피어난다.

 

쏜살 같은 악덕들…… 나는 몽상가일까?

 

수정궁들은 점점 높아진다. 언젠가 달과 화성에 닿을 때까지.
나는 괴기한 악몽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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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진 작품

글/시 2018. 4. 23. 21:50 |

멈춰진 작품



형태 없는 멈춰진 작품. 그는 지난 2년 간 살아오지 않았다

문짝 없는 집에서 안락한 부랑자처럼 지내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의 이름표도 붙어

있지 않은 서랍들. 무언가는 비었고 무언가는 너무 무겁고

무언가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타자기는 어디에 숨겨놨더라, 아니, 굳이 숨겨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속였지, 드라마를 만들기 싫다는 치기에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버렸다

그래도 드라마는 너의 두개골에 천공을 만들고 뇌수로 스며든다

깨뜨리려면 너의 눈동자를 깨뜨려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멈춰진 작품을 다시 한 번 멈추는 것만큼 허황된 일이다.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시를 쓰지 않으면 물에 부푼 익사체처럼 평화로이 부유한답니다. 그러면 그것은 둥둥 떠다니며 어쩌면 행복이라는 기괴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뭉글뭉글 생각하죠. 그런데도 언젠가 그것은 자신의 비대해진 몸뚱이를 사시미로 도려내고 비계 속에 파묻혀있던 팔과 손가락의 뼈들을 발굴해요.”

뼈다귀들은 달그락거리며 펜이 들어있던 서랍

과 담배가 들어있던 서랍들을 뒤진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는 것처럼 덜커덩

거리다가 그 뼈들은 집안의 술병을 전부 창밖으로 내던진다: 알코올중독자의 자기파괴 과정은 술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멈춰진 작품은 그간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때,

그것은 부피는 변하지 않은 채 질량만 폭발적으로 상승해왔다 그래서

아 그래, 멈춰진 작품이 있었지, 하는 순간, 너는 그 무지막지한 질량으로 얻어맞는 거야,

네 두개골은 박살나고, 눈동자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턱뼈는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지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앓지 않는 동안

나는 문이라는 문은 전부 두드리고 다녔다. 흔들림이 멈추지를 않는 전철을 타고

서울이라는 좁아터진 숲의 빌딩이란 빌딩은 전부 옥상까지 올라가보았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천둥번개를 기다린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익사체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도 사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즉, 너는 너의 운명이니 천분이니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그런데

물에 부푼 시체 같은 모습으로 너는 참 잘 해왔어 물론 몇 십 년에서 더러는 몇 백 년 간 계속 해왔던 퇴폐와 패배의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겠지 그러나 아무튼 너는 시체답게…… 물렁물렁한 시체답게 잘도 두 발로 땅 위에 서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운명이니 천분이니 천명이니, 의사가 준 알록달록한 약물들과 다시 대화를 하지, 그러니까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쪽에서 말이야, 네가 자주 들락거렸던 단출한 조명의 흰색 꿈나라의 관리자들이, 매번 말하는 것이잖아, 영혼 속에 지네가 들끓는 병은 한 번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가 않는다고, 그 지네들은 계속해서 알을 깐다고……

너무 많은 말들이 있기 전에 나는 언어의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뜯어야만 했다.


멈춰진 작품을 다시 펼쳐보자 남한에도 있었고 소련에도 있었고 독일에도 있었던 K씨는 돌연 야수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싶어졌다. 분명 서랍 어딘가에는 나이프가 있고, 노끈도 있고, 심지어는 펜까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옥상에서 사흘 나흘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도 천둥번개는 이쪽으로 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K씨의 덜그럭거리는 팔은 냉장고에서 소주병과 맥주병을 찾아 그것이 확실하게 가득 차있는지 흔들어 본 뒤에 그것으로 길가는 소시민들의 대가리를 깨부술 계획을 짜고 있다.


거울을 깨지 말 걸 그랬지. 너무 어린 치기였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깨버리고 말 걸. 심지어는 눈동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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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협하는

글/시 2018. 2. 2. 20:23 |

너를 위협하는



유리잔을 본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있다

그 물체는 언제나 깨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저기에 서있다


유리잔을 쥔다

수전증은 의학의 이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뼈와 힘줄은 폭력성을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생각

은 비열하다 나는 비열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명이 심장에서 새어나올 것 같다


나는 유리잔을 공포스럽게 내려놓는다

유리잔의 존재로부터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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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글/시 2018. 1. 3. 19:22 |

회상



열다섯의 다락방, 시린 겨울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기뻤다

창문은 하얘

밖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린 나이에 그는 너무 거대한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십 년 뒤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미 죽은 시인들은 널 구해주지 못해

두들기는 문마다 부재중이었다.


망령처럼 스스로를 홀리며 살아온 십 년이 십일 년이 될 때

너무 늙은 소년은 너무 어린 성년이 되고 있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고 바랐고

그러나 어딜 가도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골목, 막다른 길

당장 필요한 것이 한 줌의 지폐인지

또 한 장의 텅 빈 종이, 그러니까 즉

또 한 장의 공포인지

하릴없이 서있자 증오를 받는다.


술과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현실.

너를 마구 할퀴고 쥐어뜯으며 갈기갈기 찢는

아, 너구나. 울증 속에서 너는 너와 마주하고

손에는 술,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내뱉어지지 않는 「굳바이」 한 마디


꿈속에서 열차를 오래 탔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동차건 버스건 열차건

바퀴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질색이었다.

마침내 내려 플랫폼에 토악질을 하고 뿌예진 눈동자를 치켜세웠다.

어딜 가든 낯선 고장이다. 「Home」 이라는 단어는

너무 장황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내 손으로 집필한

길고 장황한, 이해되지 않는

한 문장뿐인 나의 검은 책.


열다섯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혼돈을 해소하려고 쓴 글귀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기 서서, 증오를 받는다.


낫과 망치를 들고 싶었던 앙상한 손에, 술과 자낙스.


“성자聖子가 되는 방법은 분명히 알고 있어. 명상과 수련 속에서 어렵사리 알아냈어.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항상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술집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우리도 괜찮다. 약병이 바닥을 치기 전에는 우리도 바닥을 치지 않는다. 하늘에선 별들이 밤 위를 기어간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것이 십일 년 간 반복됐다. 별들은 흩어지며 형태가 불분명한 여럿의 빛이 되고,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우리 자신을 원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이 살았던 소련은 우리가 알았던 소련과 다른 소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차 타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으로, 듣자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항상 진눈깨비가 하얗게 쏟아지고 거꾸로 치솟는다지만

플랫폼을 여행의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깜깜한 겨울. 봄이 와도 죽을 수 없으므로 여름까지 살고, 그러나 너무 덥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는 죽을 수 없으므로 가을까지 살고, 그러나 낙엽들 사이에 시체 한 구를 더하는 짓도 도무지 못할 짓이고, 또 깜깜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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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글/소설 2017. 12. 26. 16:32 |

2017/12/24 완성.


1. 억지로 쓴 거 같기도 하고

2. 그러나 혈통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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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음의 계절

글/시 2017. 12. 16. 11:37 |

무음의 계절



날던 새들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

농장에는 검은 나무들

파편처럼 서있다

추위에 잠이 든 길고 축축한 짐승들은

깊고 깊은 땅 속으로 도망쳤다.


머리 위에는 천구天球가 아니라

곧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릴

살얼음이 얼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땅

내 발밑에서는

서걱대는 발자국 소리만 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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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에 있었다

글/소설 2017. 10. 22. 22:17 |

2017/10/22 완성.


1. 나는 글을 쓴다.

2. 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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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그간 잡고 있던 유령들의 소매를 놓을 때가 되었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살게 해달라고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내 육신과 영혼이

너무도 당연한 듯 흙더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십여 년간을 매달려왔다.


너무 오래 유령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자

내 손도 반투명한 비물질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러자 그 손으로 잡는 나의 펜 또한

유령처럼 비어가는 것을

나는 뒤늦게 보았다.


슬픔과 비참으로 쌓았던 벽은

살짝 건드리자,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

이제는 내 발밑에 온갖 슬픔과 비참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닌다. 나는 그 땅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아, 그것들을

한때 나의 벽돌이었던 비명들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잡고 있던 것들이 유령이었나? 아니면

오히려 내가 유령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의 육신의 무게를 느끼려고 한 발짝을 뗄 때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자

붉은 피들이 흘렀는데


아아, 그래! 적어도 나의 심장은

아직도 살아서 피를 품고 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피를 긁어모아,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나의 왼쪽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세계를 담고 떨어진다.


안녕, 나의 망령들이여, 안녕.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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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글/시 2017. 9. 9. 10:55 |

보름날



오래된 패배의 습관들이

절망을 부르짖으며 늑골 안에서 헤엄치던 날

나는 너무 지쳐 주머니칼을 꺼낼 기력도 없었고

그리하여 참으로 몇 년 만에

눈물을 흘려보고자 결심했다


노을이 뒤덮은 산등성이에서

담뱃불은 그 노을처럼 새빨갛고

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물샘에서

그 투명하지만 맑지 못할 수액들을

끄집어낼 준비를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리며 살아왔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오는 와중

눈물을 흘리는 방법도 홀연히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 슬퍼하는데

해가 떨어지고 말았다


산속의 밤은 어둡고

담뱃불은 힘없이 꺼졌다

시간은 나를 스쳐지나가기만 하였구나


원망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하늘로 향하자

아, 보름달이다. 어떤 밤보다도 청명한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 맑은 만월이

나를 대신 울어준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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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에게 그 무엇도 물어서는 안 되리라



金은 자신이 언제부터 늪 속에 살았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기억은 너무 오랜 시간 때문에 흐려져 있었고

분명한 것은 아주 오래 전 김에게도 폐가 있어 지상에서 숨을 쉬었지만

이제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것이 너무도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늪 속으로 가라앉아 살게 되었는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金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지느러미와 갈퀴가 생기어

늪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피막이 생겼고

김의 턱 아래에는 두 개의 아가미가 있다, 이제 김의

흉부 안에는 폐라는 기관이 없다 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늪 속의 삶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이 질척거리는 웅덩이 속에도 세속의 모든 고통과 절망이

아주 느린 속도로 유영한다, 그러나 삶이란 어디서든 그런 것 아니던가?


다만 金은 아주 오랫동안 늪 속에서 살았을 뿐이다

개구리나 도롱뇽 따위를 잡아먹으며, 아주 오랫동안 살았을 뿐이다.


그러니 늪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그 막연하고 당혹스러운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金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 늪의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었을 때

영겁의 시간 동안 쓸 일이 없던 두 눈이 태양에 의해 지져졌고

아가미는 숨을 쉬지 못해 金은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워 그야말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김은 입으로 울컥거리며 진흙을 토했고

너무 밝은 암흑 속에서 지느러미가 돋은 팔과 손으로 늪의 수면을 긁었다

질식하여 죽을 것 같은 중에 김은 점액으로 미끈거리는 나신을

전부 늪 위로 끄집어냈다.


이제 金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다, 차라리 죽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싶으면 다시 폐를 가슴 속에 지어야한다 아가미는 닫아야한다

거의 도마뱀의 꼬리처럼 변한 다리도 더 다부지게 만들어야한다

지져진 눈일지언정 다시 눈으로 무언가를 보게 되어야한다

김은 정말이지 다시 늪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그러나 金은 발을 흙에 디디고 천천히, 위태롭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휘청거리며 땅 위에 일어서려 한다,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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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이 있어선 안 될 호소呼訴



달밤에달밤에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로 쓸 수 없는 것을 시로 쓰고자 하니 아프고 아파

울 수도 없으니 약병은 바닥을 쳤다

달밤에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달밤에달밤에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별이 되고프다

왔다 가는 선객先客들의 홀가분함이 불고

아직 울 수 있는 사람들이 떨어트린 눈물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것이니

나는 바람이 별이 되고픈데


아프게 궁금해 했다

펜은 언제 부러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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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의 꿈

글/소설 2017. 8. 10. 20:15 |

2017/08/10 완성.

 

 

1. 나는 창작자로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했는가?

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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