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림

글/에세이 2021. 1. 21. 22:07 |

미림


 사람은 살다 보면 어떤 불특정한, 어리석거나 미치광이 같은 충동에 빠질 때가 있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잡아당기는 심연과 같은 것이라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심연은 대단한 것일 때도, 겉보기에 그야말로 바보 같은 것일 때도 있다.
 처음 큰댁에 맡겨졌던 14살 때, 내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었다. 굉장히 애매한 설명이지만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유감이거나 불쾌한 일은 찾고자 하면 끝도 없이 나온다. 그렇기에 모든 생활은 부정적 의도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다. 지금부터 설명할 사건도 이제 생각해보면 처량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지만 당시에는 정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때는 분명 가을이었을 것이다. 다락방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더위와 습기 때문에 산송장이 되어있지도 않았고, 추워서 모자를 뒤집어쓰고 침낭 안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봄이었으면 계절 때문에 몸에서 수액처럼 도는 활력으로 도둑질이라도 저질렀을 테니 봄도 아니다. 그날 큰댁은 아주 조용하고 사람은 나밖에 없는 대낮이었다.
 어쩐지 나는 뜬금없이 단것이 먹고 싶었다. 원래 나는 어릴 때부터 단 음식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맥락 없는 식욕, 차라리 충동 같은 그것은 몇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다. 비슷한 일로는 18살 때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던 포도 주스가 먹고 싶어 새벽에 옆 동네 편의점까지 간 일이 있다.
 아무튼, 나는 정말로 단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던 큰아버지는 원체 먹는 일에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반찬거리를 사느니 소주를 한 병 사오는 사람으로, 사실 친가 남자들이 전부 이런 식이다. 식사하실 때도 밥상에 밥과 김치, 그리고 통째로 올라온 옥수수 통조림밖에 없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그건 너무 오래된 과거라 전혀 기억이 없다.
 나는 뭐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먼저 큰아버지가 쓰시는 찬장을 뒤졌으나 웬 정체불명의 한약재와 라면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당수(唐手)와 관련된 책이 몇 권 나왔지만 내가 찾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그래서 사촌 형이 쓰는 테이블로 향했다. 분명 같이 살았으나 도저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던 사촌 형은 한술 더 뜨는 성격이었다. IT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취직을 준비하던 형의 테이블엔 음식은커녕 식사 보조제와 영양제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사촌 형이란 인간은 지금도 그렇다. 밥 대신 벽돌만 먹어도 영양섭취가 만족 된다면 정말로 벽돌만 씹어먹을 사람이다. 물론 캐나다산 브랜디니 하는 것을 책장에 벽돌과 함께 서너 개 세워두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왜 그렇게 단 음식에 미쳐있었을까? 당시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금단증상이 온 마약중독자의 행태나 다름없다. 예전에 돈 떨어지고 담배 떨어졌을 때 비슷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 적이 있다. 어떻게든 담뱃값 2천 원을 마련하겠다고 장롱 밑을 30cm 자로 훑고 서랍을 뒤져 쓸모도 없는 달러 지폐를 찾아내고…….
 여하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냉장고가 있는 부엌이었다. 냉동고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얼음조차 없었다. 도대체 몇 년 전부터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린 건어물 몇 개가 있었을 뿐이다. 냉장고에는 케첩이니 마요네즈니 하는 것을 제외하면 역시 반찬들, 즉 배추김치와 열무김치, 그리고 빌어먹을 놈의 옥수수 통조림밖에 없었다. 망할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 통조림.
 이쯤 되어 내 머릿속은 발광 비슷한 상태가 되어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것을 먹어야겠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겐 나가서 초콜릿 하나 사 올 돈도 없다. 애당초 그런 돈을 부탁할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다. 나는 점점 거칠어지는 손길로 부엌의 찬장, 조미료 선반 따위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 집구석엔 심지어 설탕조차 없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미림이었다. 아무도 요리를 하지 않는 집에 미림이나 간장이 왜 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내 정신은 모조리 미림에 빨려 들어갔다. 미림. 맛술. 요리용으로 만들기 위해 당분을 거의 발효시키지 않고 빚은 술. 다음 순간 나는 그것을 병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그걸로 만족했나 보다. 나는 병의 절반 정도를 해치우고 금단증상이 멎은 뽕쟁이마냥 미약한 절정 같은 것을 느끼며 비척비척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깔린 이불 위에 앉아 책상 대신 쓰던 종이상자에서 책을 좀 읽었다. 어쩐지 몸 안에서 은근한 열기와 안정감이 돌았다. 아마 2%도 안 되는 알코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이불 위에 엎어졌다. 무슨 책이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해보면 모옴의 『달과 6펜스』 아니면 헷세의 『지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지난여름 습기 때문에 노란색이 된 상자와 똑같은 색깔을 가진 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읽던 책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한 얘기가 아니고, 나는 그대로 잠들었다. 그 뒤로 누구도 미림이 절반이나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요리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것이 먹고 싶어서 발작을 일으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림으로 충분했던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처량하기가 한없어서 스스로 한심스럽다. 왜 그렇게 단 음식이 먹고 싶어서 난리를 피웠던 것일까. 그러나 그런 일도 있는 법이라고 납득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지금은 돈이 있어도 단 것을 사 먹는 일이 없지만, 그때는 정말로 그것이 필요했던 것뿐이리라.
 그렇다.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리라. 아버지와는 연락할 수 없고 어머니와는 같이 살지 않았던 내 존재가 광기처럼 열망했던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왜 하필 ‘단 음식’이라는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것으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심리학이나 정신역동학 어쩌고 하는 학문은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에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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