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6

기록/생각 2020. 2. 26. 20:52 |

20200226

 

 

술 마신 다음날은 슬픈 심상입니다. 이미 하늘 꼭대기에 뜬 태양의 빛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고, 눈을 떠보니 어쩐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상하다, 유난히 고요한 것이, 전날 마신 알코올이 고막을 파먹었나. 그러나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분명 영혼이 움츠러들어 있는 것일 터입니다. 기름 먹인 종이에 물방울이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소리가 영혼으로 스며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지간히 일어나기 싫어하는 몸을 발로 걷어차듯이 움직이게 해,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마십니다. 둘러보니 집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 있을 리가 없지요. 세상은 오래전부터 나를 내버려두고도 잘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버려진 나뭇가지처럼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도대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떠들썩했던 어젯밤의 술자리에 대비되는 것인가, 계속 망설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마는 것이지요. 이제 와서는 이 담배라는 물건이 대체 내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코틴이 주는 쾌락은 18살 이후로 느껴본 일이 없고, 이젠 그야말로 숨을 쉬듯이 피우는 것입니다. 딱히 이득을 얻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주머니에 담뱃갑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인가, 아칸소에서 머물 때 친구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날 보며 이런 말을 했었지요. 영어로, 그건 역겨운 습관이지, 나도 영감쟁이가 돼서야 그만둘 수 있었어, 라고요.

 

어쩐지 몸의 끝자락이 따갑고, 따가운 것은 아닌가, 좀 저리는 것도 같다. 숙취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은 늘 그렇지요. 일도 없이 의자에 앉아서 벽지나 쳐다보며, 왜 흰색 벽지로 했었더라,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말입니다. 슬픈 심상이라고 위에서 썼었습니다. 막연히 외로운 것도 같습니다. 그 막연한 외로움에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며 뉴스를 틀어봅니다. 대유행하는 전염병 때문에 모두 긴장하여, 거리에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더욱 외로워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거리에 아무도 없다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겠다. 만일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면, 나는 분명 어떤 표정이 이 도시에 사는 건강한 시민의 표정일지 곤혹스러워하다가 결국 땅을 쳐다보고 말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내내 아무도 맞은편에서 걸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얼굴 없이 산책할 수 있겠지.

 

그러나 결국 외출하는 일은 없습니다. 거의 흡연과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빈 종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요즈음 단편소설을 새로 써보고 있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 오히려 스스로도 대단하지 않게 여길 것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럴듯한 드라마나 기승전결도 필요 없는 단순하게 먹먹한 것을 좀 써보고 싶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자살하고, 대체로 유언장에 의해 진행되는 서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주인공도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요새는 특색 있고 매력적인 인물 같은 것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도 않더군요. 그리고 그런 인물이라면 등장하자마자 느닷없이 자살하진 않겠지요. 아무튼, 이것저것 문장들을 좀 시험해보고 있는데, 결국에는 빈 종이만 계속 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참,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살한 것으로 이미 끝난 게 아닌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밤입니다. 오늘 뭔가 먹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이제 깜깜해졌으니 외출해도 되지 않을까, 밤거리니 누군가와 마주칠 일도 없겠지, 중얼중얼 생각하고. 그리고 슬슬 동생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생과 무슨 시답잖은 대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아주 약간이라도 이 슬픈 심상과 대책 없는 외로움이 가시지 않을까. 스스로도 실소가 나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시지 않는 게 나을 것입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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