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킬러
글쓰기는 항상 나의 진통제였다. 타인의 삶을 살아본 일은 없지만,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자라면서 느낀 것은 내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나는 남들보다 더 커다란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고통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삶이란 노을을 보면서 행성의 운행을 저주하고 새벽녘에 자살을 바라는 식으로 반복되었다. 한강 다리의 난간에 붙은 자살방지문구들은 내게 더 없는 분노와 절망을 안겨주었다. 내게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만 가득 찬 악의적인 연극무대였다.
그러니 무언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슨 음식을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숨만 쉬어도 폐부가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삶에,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왜 삶을 지속해야하는 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게 깃든 생명이 내 관리 하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 억지로라도 나의 인생을 지속시키려한다는 사실만은 안다. 어느 끔찍하게 절망스러웠던 15살의 밤에 자리에 누워, 어둠에게 내가 자살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세 시간이나 지껄이던 것이 내 혀가 아니라 생명력의 혀였다는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왜 살아야하는 지는 모른다. 다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니 더욱 진통제는 필요했다. 독서에 미쳐 살던 10대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한 결말을 성취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기계장치에서 내려온 신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고, 인간은 부조리와 비극에 처참하게 압도당한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무작위하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책들이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왜였을까? 아마도 그런 세계관이야말로 이미 나의 세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 따위를 결코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었을 법하다. 아직도 행복한 환경에서 건강한 정서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증오와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내가 아는 세계에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나의 이야기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10년 넘게, 나는 아주 불쾌한 글들을 써왔다. 원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하는 세상의 불행과 비극, 존재의 존재성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 잘못 태어나버린 인간들…… 그런 것들이 주로 나의 소재였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아무도 바라지 않고 배척할 뿐인 괴물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그 생명을 축복받지 못하지만 거의 악의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천부인권이라는 것은 계약조건에 맞는 인간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고 소리 질렀다. 항상 타인에게서 거부당하거나 기괴한 인물로 인식되던 내 경험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진통제로서의 효과가 있었다. 호흡곤란이나 심인성 흉통이 올 때마다 나는 신경안정제보다 먼저 글쓰기를 찾았다. 당장이라도 경동맥을 뜯어내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글을 쓰고 있다 보면 잦아들었다. 그것이 10년 15년, 그러다보니 어쩐지 나는 글을 <잘> 쓰게 되었다. 많은 독서량으로 마구잡이로 쌓아둔 작문 지식들이 십년 넘게 괴팍한 글들을 쓰는 동안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 이젠 다른 문제가 생겼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문제였다. 나 자신의 진통을 위해서 신경계를 마약성 진통제로 융단폭격 하는 것 같은 글은 세련되거나 그럴싸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좋은> 글을 써야한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과 같다. 독자의 정신 상태를 불쾌하게 만드는 글들은 이미 충분히 써버렸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손에 익은 도구는 들었지만 난데없이 사막 한 복판에 버려진 기분이다. 무엇이 좋은 글일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인데, 증오와 절망에서 솟아난 글들은 오로지 증오와 절망을 전달할 뿐이다. 최근 과거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내용에 처절한 결말을 담은 글들이라 해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타당한 인류애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