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사와 순경과 경찰과 공무원과 그리고 사람과


 순사.
 주변에 순사도 없으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큰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에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면서 “순사!”하고 외쳤고, 큰아버지의 팔을 감고 같이 걸었다. 큰아버지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걸었다. 그는 어린 동생에게 하듯 껄껄 웃었다. 둘 모두 취했고, 머리가 하얗게 센 영감님들이었다. 나는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억에 따르면 작년 추석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도무지 순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오늘 느닷없이 떠올랐다. 책장을 뒤져보니 그것은 <이방인>의 뫼르소가 한 말이었다.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불쾌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는 경찰이며 구청 단속반 따위가 생각났다. 내 기억으로, 나는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잘못을 저지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게, 입은 열지 않지만 줄기차게 거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기분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아 도대체 무슨 악감정이냐고 캐묻고 싶지만, 공권력을 뒷배로 둔 놈들과 문제를 일으켜봤자 하등 도움 될 일이 없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어느 친구가 ‘그것들은 조금이라도 비일상적인 사람을 찾아 주시하라고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진압봉 따위도 들고 다니니…….
 그래, 누구든 먹고는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주치기 싫은 인종들이다.
 아마 오 년이나 육 년 전에, 나는 친구와 거나하게 마시고 캄캄한 새벽 골목을 걷고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 더 마실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는 골목 안쪽 가장 어두운 구석에, 사람 하나가 쓰러진 듯 주저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만취한 것 같은 중년 사내였고,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서글퍼 보였다.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다가가 아저씨하고 부르며 상태를 확인했고, 조금 뒤에 친구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남자는 깨어나더니 입을 열었는데,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음에도 계속 울고 있었다. 20분이 넘도록, 습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맥락 없는 하소연을 힘겹게 늘어놓았다.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그가 슬픔과 좌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무책임한 위로를 했다.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울며,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경찰차는 2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경찰 둘이 내렸다. 하나는 젊었고 하나는 50대 초반 즈음으로 보였다. 젊은 경찰이 취객을 일으키는 사이 나는 중늙은이 쪽에 말을 걸었다.
 저분이 많이 슬퍼 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저희가 할 일이 아니고, 우린 맡은 일만 하는 겁니다.
 순간 나는 그 자식 혀뿌리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품에 뭐라도 있었으면 저 귀찮고 성가시다는 얼굴 한복판에 박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태울 사람 태우고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그따위 것들에게 사람 하나를 넘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와 죄악감이 용암처럼 혈관을 돌았다. 그러나 차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민중의 지팡이.
 그 외에도 경찰 내지는 짭새라 불리는 인간들과의 불쾌한 경험은 하나하나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군인이나 치안유지·사회정의 명목으로 움직이며 월급 타는 것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아봤자 별 의미도 없다.
 그런데 재작년 즈음에 나는 동갑내기 친구 한 명을 사귀었다. 그의 인상은 순박하고 선했으며, 내가 진행했던 작품이나 업무에도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도 나에게 친구로서 호의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웠으며, 조금 과장하자면 적지에 서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좋은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경험을 숨기거나 에둘러 말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간 겪어온 경찰에 대한 좋지 못한 경험이나 내가 경찰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거의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자기도 ‘경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자신의 아버지도 경찰이었는데, ‘경찰이란 것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말씀하셨노라고 말이다.
 나는 소리 내 웃었다. 그도 웃었다. 웃는데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순사가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 누구의 세상살이도 변한 것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웃고 다닌다. 순사들과 같은 길에는 여전히 서지 않는다. 그들이 등불 비추지 않는 어두운 길에선 지금도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결말이 맹탕이야.

Posted by Lim_
:

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말이야


1.
 그때는
 요기처럼 몸을 뒤튼 채
 장판 바닥에서 책을 읽어도
 관절이며 근육, 뼈가
 고함치는 건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알았다니까

 자판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구부정하게 의자 위 앉아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지칠 줄도 모르고

 아무리 담배 연기를
 허파에 우겨 넣어도
 기침 한 번 하는 일 없이
 독무 속에서만 숨을 쉬어도
 불편마저 없었고

 밤길에 검은 고양이를 만나면
 생명이 아니라
 포우가 보이는
 그런

 덧붙여,
 술집에서 시비 붙어 흠씬
 두들겨 맞아도
 고장 난 장난감처럼 깔깔깔깔
 깔깔
 웃기만 하는
 그런 거
 였는데.

 전에는
 안 그랬다니까


2.
 순간마다 뼈연골근육심장뇌수가
 비명 지르며 의식의 멱살을 잡아
 모조리
 멈추고

 이백만 원짜리 의자 성능
 떠드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고, 그래도 옛적처럼
 지갑은 비었고,

 요샌 숨소리에서도
 잡음이 나, 목소리가 둘로
 갈라지기도 하고

 오늘은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새까만
 새끼 너구리를 봤어
 그놈이
 잘 살았으면 싶더만

 술은,
 무서우니
 이제 됐고.

 누군가는 내가 온화해졌다 하는데 사실은
 바닥없이 지쳤어.
 너무 가속해
 쇠했어.


3.
 더는 만날 일도 없는 바텐더들
 저게 누구냐고 하겠네, 저
 인형 같이 미소지으며
 논알콜 맥주 시켜놓은
 저 손님 말이야

 사실,
 나도 이게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누군들 알겠어……

 그래도 창밖의 밤은 또 들여다보네
 어제처럼
 엊그제처럼
 십오 년 전처럼.

 뭐, 이러나, 저러나, 아직도, 자발적으로, 입에
 담배 따위 물고 있으니
 여러모로 실망은 안 시킬 거야

 당신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쇠락한 몸과 더불어
 사실은 여기
 그대로라서,

 이 동네는 대낮에 태양에게 떠드는 놈들과
 새벽 세 시에 불 켜진 창문들도
 무진장이라.

 물살 흐르는대로 털퍼덕
 거리며 몸을 굴려, 이렇게까지
 왔어도

 장마 오는 계절
 언덕에서 쏟아지는 빗물 헤치며
 침수된 지하실로 귀가하는
 꼬맹이도,
 반갑게도,
 여기 그대로라서.

예전엔
이러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Posted by Lim_
:

20250516

기록/생각 2025. 5. 16. 03:36 |

전혀 변하지 않은 점은 습관처럼 나락 너머로 걸어가는 발걸음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빛이든 어둠이든 삶이 찬란하게 빛나기도 한다는 것

여러가지 일들이 피륙처럼 얽혀 짜여져나가는 중에도

변화는 얼떨떨하게 습에 제동을 걸며

그럼에도 관성처럼 끌려나가는 저 끝에서의 파열과 불길함을 나는 이미 보고 있다.

가장 신기한 부분은

끝이 좋든 좋지 않든 그다지 개의치도 않고

전진하는 원동력이 무책임인지 믿음인지 알 것도 없이 내딛는 나 자신이다.

 

기왕 얽어나가는 현재

어디까지 가는지는 딛어봐야지.

종말이 보이든 재탄생이 보이든

클라이막스와 종언을 봐두긴 해야지.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