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가해한 세상이다. 아니, 세상까지도 아니다. 나 자신도 불가해한 것이다. 불가해한 내가 세상을 관측하니 세상도 물론 불가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가해를 불가해하게 만드는 중심에는 자아인지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안경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보도록 만드는 안경.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다섯 잔째에 나온 발상이다. 카페인이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니 무엇이든 간에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바보 같은 경향성이 생긴다. 정리를 좀 해보자. 내가 세상을 난해하게 이해하든 아예 관심을 갖지 않든, 별 관계도 없이 이 겨울날에도 광화문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라를 만들자’, ‘저렇게 정책을 바꾸자’하며 숭고한 의지로 플랜카드를 들고 서로를 패죽이고 있다.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난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패망했고 자본주의는 한계점이고,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미로 한복판이다. 그 깃발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생각은 가지각색이어 깃발보다 먼저 돌진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곡괭이로 미로 벽을 부수고 있다. 아예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마냥 죽음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예인데, 나의 빈약한 통찰로는 이 미묘한 그룹 하나조차 다 어우르지 못한다. 애당초 어우르려고 하는 사고 자체가 하나의 편집증이다. 내가 그들을 각개 이해하여 마치 커다란 카오스이론 같이 된 것을 파악한다 한들 뭘 하겠느냔 말이다. 나의 생활은 그 광화문 거리 근처에 있지도 않다. 그저 오후 한 시쯤 느릿느릿 일어나서 커피를 다섯 잔이나 들이붓다가, 나의 묵직한 책장 앞에서 넋이 나가있는 것이 나의 생활이다. 그러다가 발광하는 뇌세포가 갈 곳을 잃으면 참으로 쓰잘데기 없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피츠제럴드 중 누가 더 삶 같은 삶을 살았나 결론도 없는 문제를 망상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생각하고 판별하려고 하는 것인가 말이다.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다. 진심으로 생각하자면 매사에 관심이 없는 내가, 무슨 습관이나 된 것처럼 이것저것 괜히 사고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문기사를 보면서 거기서 나를 중상모략하려는 어느 종교단체의 암호를 알아내려는 노력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아까 자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自我라는 한자구성이 무색할 정도로 이놈은 내게 연결된 주제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악하고 요동치는 성질이 있다. 무언가를 파악하고 규정지으려는 성격이 있는 이놈은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내게 별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자고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고요하고 파도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만 살아온 바, 고통이란 즉 마음이 별의별 문제에 좌충우돌하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자아란 것이 아무래도 뇌에 있는 것 같으니,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뇌를 통과한 것들은 무엇이건 불가해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개념이란 것은 회의하고 회의하다보면 도대체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분명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는데, 말했다시피 자아가 난제를 새겨 넣는다. 그리하여 그 어지러움에 분노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복잡한 사람들이 복잡한 단체를 만들어 복잡한 행위를 하고 복잡한 결과를 내는 것을 보고 있는 복잡한 나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젠장, 사실 나만 복잡하지 않으면 전부 소멸하는 일들이다.
쓰레기통을 보면서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이것이 태초부터 쓰레기통이라고 규정지어져 있던 것은 아니니까 정말로 쓰레기통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하는 쓰레기통보다 잘날 것도 없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