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9
그런데 호의를 바라고 있는가? 가족들에겐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선택여부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호의를 가지도록 설계되어있었다. 세상에게 배신당하고 지치길 반복하다 결국 도망치듯이 그들에게로 돌아가면,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날 받아주었다. 그들에겐 분명 불안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결국 상처와 외로움만 짊어지고 돌아오는 내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과연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불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미래를 생각해보는 능력을 잃었다. 밤새 몸이 차갑게 식은 채 이불에서 일어나, 어쩐지 이상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더듬어보다가,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호흡곤란에 괴로워하는 아침이 반복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능력을 잃는다.
그런데 유대를 바라고 있는가? 어쩌면 36.5도짜리 발열기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인 것은 아닌가? 아아, 모르겠다. 의사는 내 발작적인 고독에 로라제팜을 증량 처방했다. 15년간 나는 약으로 살아왔다. 약으로 살아왔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병원에 가서 내 인간조건을 사왔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적합하다. 외로움을 명목으로 길 가는 누군가의 심장을 꺼내 먹거나, 스스로의 얼굴 가죽을 실리콘 마스크처럼 벗겨내지 않기 위해, 나는 15년간 신경정신과 대기실의 공기에 너무도 익숙해져왔다. 손목에 붕대를 한 여고생들이 휘적휘적 걸어 다니고, 웅크린 채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현실에서 떨어져나간 공간.
방금 약 봉투에서 약을 꺼내다 커다랗게 슬퍼했다. 기름종이로 밀봉해놓은 봉투를 뜯고 한줌의 약을 꺼내는데, 뜯겨나간 기름종이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이 안 나오는 슬픔에 중력을 저주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공중에서 춤을 추며 추락하는 그 종이 쪼가리를 보고 나는 무엇을 연상했나? 내가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알 도리가 없다. 그저 그 현상이 너무 슬펐고, 절망해서, 중력에 악의를 느끼며, 각막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무어 기대할 일도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집밖에 나가면 자주 보이는 고양이가 있다. 흰색과 검은색 얼룩무늬 고양이인데, 어쩐지 걷는 자세가 이상하다. 우연찮게 가까운 곳에 있기에 관찰해보았다. 왼쪽 앞다리 관절이 완전히 접혀서 발등으로 걷고 있다. 아마 곧 죽겠지. 마침 옆에 있던 동생은 안타까워했다.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다른 고양이들보다 고통스럽게 살다 죽겠지. 불구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사실은 뭔가를 해줄 의욕도 없다.
막다른 골목.
결국에는 잠을 자러 가는 것이다. 수면은 중요한 도구다. 자는 동안에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까먹게 되니까 말이다. 모든 고통과 불행이 다 존재에서 나온다. 그것을 까먹는다는 것은 안심되는 일이다. 그러나 깨고 보면 나의 뇌하수체에서 분비하는 것들이 바로 지옥의 설계도다. 다시 잠들고 싶어 몸부림치고, 그러나 다시 존재를 시작해야한다.
일생을 가을모기처럼 살았는데
겨울이 온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