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명

글/시 2016. 10. 20. 02:16 |

나의 한 명



너는 그곳에 서있어. 흰색의 램프를 들고, 밤새 도시의 어두운 길목에서. 밤의 도시만큼 빛의 대비가 뚜렷한 곳은 달리 없지. 그러니 넌 그곳에 서있어. 나의 미친 발은 시각소자를 가진 기계처럼 마구잡이로 훨훨 날지. 나는 가장 눈부신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까지 몇 번이고 걸음을 반복해. 그 램프의 기름도 도시의 금화로 산 거야. 그러나 너는 부디 아무것도 느끼지 말아줘. 그저 그곳에서, 가장 어두운 길목에서 신성을 잃은 우상처럼 서 있어줘. 깊은 새벽에도 사람들은 가끔 칠흑의 골목 속으로 사라져. 너는 그들을 비춰줘. 그들이 어둠 속에서 머뭇거릴 때, 그들이 담뱃불이나마 제대로 붙일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줘. 그들이 자본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개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낡은 거죽 걸친 빈민이건, 유망한 경제가건. 누구든 호주머니의 담뱃갑을 제대로 꺼낼 빛 정도는 필요하니까. 나는 저쪽으로 갈게. 지친 야생마처럼 목적 잃은 걸음으로 사방을 쏘다닐게. 밤의 도시에서 밝은 곳은 너무 추워. 네온사인에서 흘러나오는 욕망들은 얼음처럼 나를 쪼아.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 안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눈빛은 까마귀가 되어 내 살을 쪼아. 소위 야간생활자들이라는 족속들은 밤에도 모자를 눌러쓰고, 내 손가락을 관찰해. 그 손가락의 형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들은 알아야만 해. 그러나 너는 아무 걱정도 말고 그곳에 서 있어줘, 동이 트고 램프의 기름이 다 떨어질 때까지, 타고 남은 담배필터로 하얀 반점이 점점이 찍힌 검은 도로를 밝게 비춰. 내 살은 이미 다 파먹혀 백골이 드러났지만, 내 인생에서도 이 넓은 욕계에서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램프를 들고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가끔씩이라도 보도록 해. 무어 굳이 감상을 묻지는 않을게. 그저 그 낯과 낯들을 봐주었으면 해. 조금 뒤면 나는 <사람>들이 떨어트린 금화를 주우러 갈 거야. 운이 좋다면 내일도, 그 금화로 네 텅 비어있을 램프에 기름을 채울 수 있겠지.

안녕. 새벽이 끝나면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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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죽음

글/시 2016. 10. 18. 03:48 |

어느 여인의 죽음



내가, 랭보를 다시 읽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을 때, 그녀는 다시금 죽었다. 그였던가 그녀였던가. 사실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여름인데도 공기가 차가울 정도로 공원은 고요했다. 아, 그 당장이라도 산산조각이 나 유리파편처럼 쏟아질 것 같던 고요! 이걸 들고 있으렴. 아버지가 건네준 것은 내 상반신만한 액자였다. 난 어리둥절해 액자를 들고 있었고 유령 같은 검은 발걸음들이 나를 인도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완수되자 나는 액자를 놓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무언가를 물어봐야했건만 도무지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니 나는 순간 사람들이 어떻게 비극을 계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는요? 엄마가 보이지 않아요. 네 엄마는 차 안에 있어.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자애롭지 않았다. 나는 입안에서 이상한 맛을 느꼈다. 나는 내일이면 아버지의 얼굴이 원래의 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가기나 하는 것인가 불안하였다. 어디선가 검은 소매 끝에 달린 친숙한 손이 내게로 뻗어져 내 손을 잡았다.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것 같은 따끔따끔한 땅이 날 춥게 만들었다. 그때 대기에 금이 가듯 새된 소리가 어디선가 찢어지듯이 울렸다. 척수에 전기라도 통한 듯 나는 몸서리쳤고, 나의 어린 호기심으로 그 소리를 찾아 뛰었다.


너무 많은 문. 모든 문들이 유리로 되어있었다. 이 공원은 이상한 공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런데 그 새된 소리는 땅 밑에서 지진처럼 솟아났다.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새까만 유령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한 유령이 여인의 입에 종이봉투를 가져다댔다. 종이봉투는 여인의 숨으로 히스테릭하게 부풀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여인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장면은 나를 순식간에 지루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는 우리 학교의 문제아들이 하듯 그 장면에게 혀를 내밀고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박타박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 태양은 너무 하얬고 너무 사납고 고요해서 그 공원의 모든 것을 일렁이는 환각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환각이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와 닮은 어느 늙은 남자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태양 아래 소금기둥처럼 우두커니 서서, 내가 이 공원과, 이 공원의 검은 유령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있다는 이상한 감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오늘 변덕스럽게 랭보를 펴보니, 순간 어떤 여인이 다시금 죽었다. 분명 나는 늙어있었다. 나는 이제 랭보를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전혀 늙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집시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 여름날의 지글거리고 눈을 멀게 만드는 태양은 여름이 오면 다시 떠오른다. 똑같은 지루함과 악의와, 어리둥절한 꼬마는 아직도 그 공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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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목각인형처럼

글/시 2016. 10. 18. 02:51 |

기괴한 목각인형처럼



과거는 여전히 내 뒤통수에서 쿵쿵거리며 화를 낸다

금속성으로 빛나는 철길 위에서

나는 몇 번이나 마지막 담배꽁초를 떨어뜨렸고

몇 번이나 처음으로 금연을 결심했다.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역의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앉아

나는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고의로 장애물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활기찬 다리를 가진 이들을

노려다보며 증오를 당했다.

어느 날 한쪽 다리를 잃은 비둘기가

깽깽이걸음을 하며 내게로 다가왔을 때, 아하

그래서 새들이 날지 않았구나. 그들은 박애주의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헤맨다

그들에게는 세상 천지에 방패처럼 세워놓은 집이 있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나는 의식을 재울

이불조차 없었다. 어젯밤에도 분명 누군가 죽었다

소문은 퍼지지 않는다. 사망 기사조차도.

나는 눈도 감지 않고 플랫폼 계단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이 지나면 이 행성은 또 사나워질 거야

그러니 딱딱한 알약들을 삼키고 내가 수천 번 반복하여

죽는 것을 바라보자. 내 생존은 비겁이다.

또 나는 증오를 당하러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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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我相)

글/시 2016. 10. 12. 16:31 |

아상(我相)



어떻게 했어야 좋았던 것인가

나의 축제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아직도 초원에서는 장작불이 불타고

모여앉아 향쑥을 씹고 독주를 마시는 그들을

나는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래 나는 신들과만 만났다.

사람들은 내 오만과 어리석음의 거울인가 싶어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아시는가, 신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버렸다.


마침 추수 때였다. 가을은 기별도 없이 다가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기막히게 웃음을 터트리며 울었다

목 잘린 신들의 머리끄덩이를 부여잡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한복판에서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을걷이란 그 정도였음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한복판>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지독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 욕망은 나약함이었다.

그러나 용서할 것도 없었고 용서받을 것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는다.

도무지 구원을 바랄 수도 없기에 그렇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의 존재도

근거가 없기에.

이유도 없기에.


슬퍼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기뻐하지도

말아야할 것이다. 혈관에 피 대신 오일이 돌아도

천상도 천하도 한낱 백일몽이어

사실 나란 것이 발목이 잘린 채 둥둥 떠 있는 풍선이라 해도

내 생명에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해도

영속하지 않는 영혼을 나는 믿는다.


사멸하는 영혼

필멸하는 감각의 근원에는 필멸하는 영혼이 있다.

새벽마다 달을 세며 골목을 걷는 것도

꿈꾸다 일어나 가슴을 절개하는 것도

더러운 굴속으로 도망쳐

기절하듯이 잠들 수 있는 것도,

내가 죽기에 허락된 일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기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워진 모든 이들에게 굳바이

굳바이, 나보다 먼저 죽어버릴 이들에게

굳바이, 나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는 나에게

굳바이, 내가 죽여 버린 자연의 제신들에게


언젠가 이 고독한 골방생활이

마침내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든다면

그때는 술을 마시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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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는 걸까

글/시 2016. 10. 6. 01:28 |

나는 왜 사는 걸까



답을 알고 있음에도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 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라고

예수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실상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답

실상 나는 알고 있다

어두운 계단에 앉아 공허의 도시를 내려다볼 때

내가 묻는 질문에 나는 스스로 대답

할 수 있음에도

나는 계속 묻는다


의문은 답이 있다한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의문은 영속하기에 의문인 것이다

우리 비참한 영혼의 물음들은

대답이 있음에도

물음을 계속한다.


밧줄과 은화 30전만으로 속죄를 완료할 수 있다면

삶이란 그리도 쉽겠지 그러나

인간이 짊어진 죄는 원죄도 뭣도 아니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는 책임이다

책임


안녕, 비참 속의 영혼들

우리는 문어처럼 서로의 촉수를 맞잡은 채

납득할 수 없는 대답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의무 속에서


강제된 삶 속의 찰나의 기쁨으로

부디 당신의 악 문 이가

찰나의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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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한 방울

글/시 2016. 9. 30. 03:42 |

눈물 한 방울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내 인간성의 안쪽

무언가가 고장 난 채 방치되어있다.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다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의 몇 배의 슬픔이다.

피가 끓는 것을 느낄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은

내 무참하게 강간당한 얼의 탓이다.


얼간이. 나는 인간으로서의, 아니

생물로서의 구성물이 결핍되어있다.

모든 비극은

그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기만 할뿐.


내 심장은

고통과 슬픔과 비참함만을 담은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온기도 잃은

납덩어리처럼.


애당초 내가 심장이 있기나 해? 중얼거리면

너도 심장이 있기 마련이지, 다만

넌 네 가슴을 절개하여 그 펌프기를 뜯어내고 싶다는 욕망에

차례차례 이가 빠지듯 차례차례 잃어버린 거야.


그야 이것은 고통밖에 주지 않으니까

인간도 괴물도 아닌 채로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는 건

너무 자괴적인 비참이야

그럼에도 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물샘이 마르면 통증도 말라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눈물도 흘리지 못하면서 울부짖는

끔찍한 혼란의 덩어리가 되었다.


누군가 제발, 그 손의 온기를 내게 보여줘.


비극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비극에 젖은

분열된 마음, 분열된 정신, 분열된 영혼

<자아>라는, 학술을 위해 임시로 지정된 개념은

실상 인간의 그 무엇도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드id라는 것도 불가해한 것을 지칭하기 위한

언어화를 위한 불안정한 껍데기에 불과하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수천 년도 전부터

절대 언어화 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고

시각화 될 수 없는 것을 시각화하고

추상화 될 수 없는 것을 화성학에 무리하게 끼워 넣고

그것이 우리가 계속 추구해왔던 실패였다.


우린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어떤 방식으로든

완벽한 필치로 서술하기를 갈망하다가

실패하고 죽어갔다. 마침내는 광기와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리에게는 천 개의 얼굴이 있고

그 모든 얼굴은 우리 자신이 아니며

동시에 그 모든 얼굴이 우리 자신이여

눈 뜬 자에게 광증이란 언제나 예정된 것이었다.


아, 모든 위대한 실패에 영광 있으라.

실패는 실패만으로 위대하리라.

승리도 패배도 득도 실도 없는 광란하는 삶에

적어도 한 줄기 눈빛만이라도 비쳐라.


내 모든 혼돈을 담아

눈물 한 방울, 단 한 방울만이라도

떨어트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오늘도 방구석에서 내 영혼은 시취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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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의 여행

글/시 2016. 9. 22. 10:03 |

사생아의 여행



1.

 내가 무얼 하고 있었더라. 아, 그렇지, 삶을 살고 있었지. 질리지도 않는 자기발견의 영원순환. 그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이었지. 이걸 봐, 네 유년기에서 조르바가 웃고 있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어. 난 삶을 써내고 있었지. 난 인간가죽으로 표지를 입힌 일종의 서적이 되었고, 지식과 서술과 연구가 내 영혼을 대체했어. 몇 해 전인가 스승께서는, 그런 것들은 근대에 멸종해버렸다고 하셨지. 그러나 아니었어. 나를 봐, 이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생생한 종이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나는 실감나는 환영이야. 현대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돌연한 근대의 사생아야. 많은 젊음들이 나와 첫 악수를 나누고 항상 하는 말은: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자유롭습니까?> 아하! 세상에 아무런 진리도 없다지만 난 한 가지 진실을 알지. 세상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란 살아있는 것만으로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야. 만일 자유의 진실 된 얼굴을 그들이 본다면 그 누구도 자유로운 영혼이나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을 걸.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2.

몇 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내 손이 일을 멈추자마자 난 도망자처럼 급히 외투를 걸치고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내가 수면제의 환각에 몽롱해 할 때 내 몸은

어느새 하루를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단지 몇 주를 위하여 내가 나의 두 손목을 잘라냈다는

그러한 생각에 미쳐 기뻐 날뛰었다

지구의 반대편은 사방이 넓고 평평한

인간의 목숨 따위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스러지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위험 덕분에 나는 기름으로 칠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친구가 길을 알려주었다

더 깊은 대륙의 한 복판으로 가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바라마지않던 태양과 모래가

거기에 있을 거야.


과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석유의 냄새를 흠뻑 맡으며

오로지 흰색뿐인 태양 아래서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서있었던가

곱디고운 하얀 모래는 내 맨발을 묻고 발목까지 올라 찼다

그런데 내가 울었던가?


아니야! 사막에서는 일체의 수분이 모두 금지된다.

그래서 감상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은 사막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습기 차고 울적한 도시의 지하실에서

그들은 술잔이나 부딪히며 허망한 인생에 건배를 외친다

마치 내가 도시에 있을 때 매일 그렇게 하듯이.


눈물은 휴가가 끝났을 때에나 뒤늦게 굴러 나왔다.

잘라냈던 손목은 나도 모르게 다시 붙어 있었고

내 다리는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나는 인생을 증오해.」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나는 변명했다.


그래, 여행은 어땠나?

글쎄요. 벌써부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일>을 쉬었었다는 것은 알아요.

이 땅으로 돌아오니 나의 손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전투태세에 든 군인처럼 손목에 붙어있더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이곳에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어,

이 게으르고 궁핍한 무정부주의자야.

아니, 나는 분명히 <일>을 했습니다. 차라리

<일>에 미쳐 살았습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들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 손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당신 같은

왜소하고 등이 굽은, 탐욕스러운 사상가들은 말입니다.


터벅터벅, 무거운 구두를 이끌고 나는 돌아간다.

처음부터 텅 비어있던 트렁크를 끌며

나의 다락방, 나의 <일터>로 돌아간다.


어느새 이 땅은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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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니로 덮인 눈동자



온몸에서 이빨이 돋는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길을 걷다 네온의 석양 속에서 웃는 이를 보면

온몸의 이빨이 떨린다.

차와 버스들이 소음을 뿌리며 달리고 머리 위에선 전철바퀴가 진동한다.


어제 내린 비로 포도(鋪道)는 더럽게 젖었다.

어제 내린 비로 도시민들의 영혼의 바지자락도 더럽게 젖었다.

하늘도 아직 젖어있다. 먹구름 없이도 하늘은 캄캄하다.


얼마 전 꿈에서 안경을 밟았다.

깨어보니 안경은 짓뭉개져있었다.

이불 주변엔 빈 약통들이 굴러다녔다.

손으로 그것들을 씹어 먹어 흔적을 감췄다.


안녕하십니까, 의사선생님. 무려 한 달 만이군요.

그런데 오늘도 저는 정직하지 못할 예정입니다.

선생님의 눈에는 아직도 내 손목에 돋은 이빨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어요. 차라리

내 입을 가져가버리시지요.


암소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방금 잘라와 피가 뚝뚝 흐르는

<구하기 힘든>.

노자가 말했던 것이 옳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노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말입니다…… 안타까운 감정이라면

나치스들과 혹은 니체에게나 주도록 하세요.


이 이빨들이 전부 자라고 나면

위험한 줄타기도 웃음소리로 말미암아 끝날 것이다.

아니요, 프로이트는 죽었어요.

하여 내 정신은 중력가속도에 영향을 받는다.

처음 손가락 끝에 이빨이 돋는 것을 볼 때는 무서웠지

물론 지금도 무서워.

그러나 갈증은 더욱 크고

웃음소리는 그보다 더욱 커다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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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의 방

글/시 2016. 9. 1. 01:36 |

수마의 방



나는 누구냐.

눈을 뜨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단지 내 감옥의 이름만을 나는 안다.

감옥 문을 열기 위한 열쇠의 이름도

나는 내려 받았다.


나의 소굴은 내륙의 검은 공기와 닫힌 공기로

수 년 전 도시의 호흡을 전부 빨아들인 채

안팎으로 철저하게 잠기었다.

권태의 무게 속에서 나는 계속 잠에 빠져

나의 세계에서 태양을 지운다.


송장의 냄새가 난다

송장이 남긴 발자국의 내음도.

일견 아무것도 없는 내 방

실은 거하는 것만으로 영혼의 숨을 헐떡이게 하는

철학가들의 시취로 가득하다.


향수(鄕愁).

나의 고향이 아닌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

내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났던 고요와 진공의

처절하게도 풍요로운 상실의 땅에 대한.

아, 누군가가 늑골 속에서

죽어간다.


나는 누구냐.

몇 개의 시공에서는 몇 개의 대답이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나는 나를 부정하는 유물론 속에서

인간이 아닌 유기적 기계가 되고

관절들에 녹이 슬고 어둠 아래 눕는다.


금산철벽에 졸린 눈으로 마주 앉아

다리를 잃은 나는 턱을 괴고

몸에서 땅으로 뿌리가 내리려는 것을 걱정하며

권태 속에서 기다린다.


나는 기다린다. 어쩌면 문이 열리려는

징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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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지은 도시

글/시 2016. 8. 25. 06:55 |

절망이 지은 도시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은

평범한 비극이 아닌

멍청한 비극이다.


산사에서 도시로 내려온 지 삼 일만에

나는 산에서 얻었던 모든 덕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내가 이해했던 삶의 순환고리는

이곳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도시 설계사들의 사명은 아마도 인간을 망가트리는 것

이곳에는 일견 모든 것이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이 도회지에서 행해지는 모든 바쁜 몸짓들은

아무것도 아닌 권태와 영혼의 둔화

즉 멍청함만을 길어 올릴 뿐

사방에서 오물처럼 피와 죽음만이

유령처럼 활보하는 존재의 껍질들에서 뚝뚝 흘러내린다.


도시가 가장 조용해야할 시간에

나는 일부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술도 담배도 없이

내 귀를 틀어막던 절규도 없이 나는 거의 나신의 영혼으로 거리로 나섰으나

이곳엔 침묵조차 없었다.


거듭거듭 겹쳐지는 멍청한 비극들만 있을 뿐.


가슴을 죄이는 아침

나는 나도 모르게 더러운 거리의 한복판에서

죽고 싶다며 되뇌었다…… 옳아,

신념도 철학도 가장 값싼 좌절이 되는 땅.


눈을 뜨기 무서운 땅. 인간을 빨아들이는 분쇄기 같은 마천루들의 숲.

누군가에게든 나는 절실하게 말하고 싶다, 도망치라고

그러나 시멘트로 포장된 이 거리를 걷는 이들은 모두가

이미 도시의 부속품처럼 보인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아아, 그들은 유령이다. 이미 죽은 흔적이다…….


나는 이제껏 나의 자기파괴에의 욕망이

나의 본성이리라고 짐작해왔건만, 아니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그것이 답이었다.

나의 고향은 비좁고 장마철이면 물이 차는 회색조의 지하실

가난도 빛이 바래버리는 내륙지방의 빈방.


정말이지 누군가를 만나 토로하고 싶건만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개미굴 같은 이 도시엔

아무도 없다

가장 비참하고 저차원적인 고독이

모든 이들의 간격을 응결시켜버린다.


스승이시여, 그러나 저는 또 익숙해져버리겠지요

이 고독에 절망에 좌절에 비참에 천박함에…….

그렇게 되면 나는 필시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무거운 공포를 안고 자리에 눕는다.


내 가슴에선

다시 광적인 증오가 일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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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8



Posted by Lim_
:

텍스트뿐인 영혼이 되려고, 내 살과 피를 버렸다



만약

이 세상에 행복한 이가 있다면

정말이지 행복뿐인

내 존재의 근거를 뒤흔드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렇게 가정했다

반드시 찾아내 그 이의 뇌수에

남근을 쑤셔 넣고 강간이라는 폭력으로

영원히 앓게 해주리라고


이봐, 그러나 그런 상상 조차도

너 자신만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네가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그저 분노로 대치하려는

어리석고도 서글픈 폭력이라는 것을

자네는 정말 모른단 말인가.


아! 알고말고. 나는 말이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네

내가 행하는 모든 모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이율배반도

나는 논리의 힘으로 전부 지배했다네

그럼에도 나는 폭력과 퇴폐를 사랑해

복수만을 깎아왔다네.


애당초 행복이란 무엇인가?

오, 그것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음에도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나는 내가 미치광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네.

논리의 주박에서 벗어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네. 나는 참으로

더러울 만큼 더럽혀진 행운아였어.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가?

도파민, 세로토닌, 아드레날린.

그것들의 과다분비가 끝나는 시간. 삼 개월.

친구여, 생물학에, 뇌과학에 빠지지 말게나.

부디 인간으로 있어주게나. 호르몬은

널 정의하지 않아. 오로지 너의

뒤틀린 논리만을 실증주의로 과시하는 것뿐이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지

무엇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어떤 지식을 먹어치웠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기도 하고 유기체이기도 하고

성령이기도 하고 아미노산의 후손이기도 하다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보았어

모든 지식들이, 하나의 혼돈이 되어가는

카오스적인 에이도스의 실체를.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텐가? 나의 동료는 말하고

아무것도, 그저 영겁을.

너무도 일찍 끝나버리는 영겁 속의 순간을.

그렇다면 자네는 잃어버리겠군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거야.

아! 물론이지. 난 그저

내리막길 밑에서 기다리겠네,

내 존재를 뿌리박고, 식물이 되어 기다리겠네.


동료는 울었다. 고함치며 울었고 미치광이처럼

사방을 뛰어다니며

이 역사조차 사멸하지 않는가?

인간이 우주의 눈을 가진다면

그 무엇을 과연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넓어진 시야는

자네 자신을 붕괴시킬 거야.


나는 서투른 손으로 기타를 튕기지

음악은 단말마, 문학은 불타오르는 양피지들의 기록

천재의 미술조차도 언젠가는 먼지가 되는 것을

그러나 무어 유감일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이어서 만족하고,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네.


허무주의를 멀리 하게나. 난 계속 중얼거린다.

허무주의를 멀리 해. 그렇지 않다면

자네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더라도

스스로 구겨져 소멸해버릴 거야.

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너무

잔혹하지. 인간에게, 그래 인간에게!

오로지 잔혹하기만 하지.


도대체 누가 진실을 말했는가?

도대체 누가 영겁을 말했는가?

닫힌 문, 불이 붙을 정도로 독한 리큐어.

약쑥에서 뽑아낸 환각제, 미쳐 휘청거리는 취객들.

봐, 오로지 감각이야. 오로지

감각뿐이야.

이성도 양심도 영혼도 믿지 말게

우리는 그저 피어올랐다 꺼지는 불꽃일 뿐.


이보게, 시인이라는 명예에

인간이 되는 것조차 포기한 당신.

그래도 자네에게는 아직 인류애가 있음을

인류애가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음을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네, 나의 친구여.


옳아, 그것은 사실이야. 여름의 열풍이 불고 간 자리에도

감상주의자의 눈물은 이슬처럼 풀잎을

타고 흘러내리지.

난 심장을 절개했어, 왼쪽과 오른쪽을

절개해 떨어트려놓았어. 간질 환자들이 뇌를 자르듯이.

친구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겐가?


그것은 간단해, 나는 한때 인간의 맛을 보았고

인간임의 맛을 보았고

나의 영혼의 척수에 에틸알코올이 가득 찬 주사를 놓았고

나는 진리를 보았다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세상이 뒤엎어질 진실을.

진실? 네가?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내 팔을 뻗겠네, 이 벌레 먹은 사다리를

움켜쥐고 늪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숨을 쉬겠네.


아, 미학에 미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반란이지. 나는 그저 얼굴을 감싸고

자네가 소금과 모래의 재가 되어가는 것을

상상만 하겠네. 자네의 최후를 바라보지 않겠네.

인간 껍질을 뒤집어쓰고 인간을 포기하는 작자를

도대체 누가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답도록 하게나

혼란과 혼돈 뿐인 세계에서

다만 아름답도록 하게나, 영겁이 주고 간

천둥소리 밑에서, 스쳐지나가는 빛처럼

0.1초의 절규는

우주보다 나이가 많다네.


남자는 미루나무 아래에 누웠고

구름은 오팔 빛으로 번쩍이고

곧 밤이 올 것이다.

부디 얼음 같은 빛으로 내 존재를 지워주게

부디 얼음 같은 열파로 내 의식을 녹여주게

세상은 아직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하늘엔 미친 듯이 천둥소리가 나지만

번개를 쥔 신은 그 위에 있지 않다

천둥소리에 움찔거리는

인간 모양의 인형만

사고하는 고기인형만

상념에 부풀어 마침내는 폭발한다.


잘 가게, 친구여

그대는 모든 것에 대한 반역자였네.

그리고 필시 고독해질 테지.

지옥불 속의 영혼처럼

그대는 필시 고독해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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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반달 밑에서

글/시 2016. 6. 28. 04:35 |

주홍빛 반달 밑에서



새벽 막차 지독히 취한 내게

승객 하나 말을 건넨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제 원래 얼굴 색깔입니다.

이제 보니 승객은 중년의 남자고

선해 보이는 얼굴에 쓴웃음이 뜬다.


많이 드셨나보군요. 젊으신 분이.

홧술입니다. 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하는군요.

물이라도 좀 드시죠, 남자는 가방을 뒤적인다.

선생께서는,

나이가 많으시니, 저보다도 발이 무겁겠군요.

물병을 건네받으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내 혀는

멋대로 꼬부라진다. 달을 말입니다,

달을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달을.

반달이요?

달빛만으로 취해서 공중으로

내딛는 순간 세상이 날 바닥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세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글쎄요, 중력이란 단어는 무서운 것입니다.


손끝마저 알코올에 절어 나는 물병을 열 수가 없고

남자의 얼굴은 친절한 몰이해의 표정이다.

늙은이들도 언젠가는 젊었다는 것이

그러니까 그 미치광이 같은 혈액이 말입니다,

그것에 이끌려 공중을 날았었다는 것이

그것이 과거형이라는 것이,

소주가 폐로 들어갔나, 내 숨은 탁하게 젖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쓴물이 입안에 고인다.


새벽의 난폭한 어둠 속에서

막차는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둠도 밤도 바람도

계절 탓에 비에 젖은 개처럼 퀴퀴하고

어린 시절 장마가 지나고 빗물이 쓸고 지나간 내 방에서

주워 올린 몇 권의 책처럼 부풀어있다.


이 내륙에서 여름이란 것은

도무지 사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기다려보시죠, 언제고 간에 해가 뜹니다.

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본다

이 중년의 남자는

몇 시간 뒤 뜰 해가 태양임이 아님을 모르는 나이다.


막차는 밤 속을 달리고 나는 지독히 취했고

계절에선 어두운 골목 썩어가는 시취가 풍기고

내 발목

온갖 손아귀에 붙들려 무거워져만 가네.

십여 년 전

공포도 모르고 달로 걸어간 내

반쪽 영혼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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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여름

글/시 2016. 6. 19. 06:41 |

어느 늦여름



날벌레들 소리 없이 사라진다

철 늦은 모기 내 피를 빤다.

저 암컷 모기 내 떨리는 살 위에서 피를 빤다

뱃속의 알이 되고 자식이 될 것들을 위하여.

그 흡혈이 사랑이라고 나는 되뇌어본다.

이 우주에서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본질이라고


새벽 내내 종잇장을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던 나는 돌연 소음을 품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한 쌍의 연인들 시소를 탄다

내 반개한 눈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실례합니다만,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합니까?

젊은 연인이란 무엇을 노래하기나 한단 말입니까.

알다시피 깊은 산사보다도 정적뿐인 이 도시에서……


그러나 나 이미 소음을 품고 왔고

내 귀 절규와 굶주림의 노래로 꽉 막혔다

새벽 다섯 시란 시간도 이 계절

에는 이미 파랗게 물드는군요. 장님이 아닌 나는

행운아입니다. 흰 구름 부서진다.

문득 옛 사랑을 떠올리고, 그러나 나는 아무 감상도 없어

각각의 의지는 사랑하거나 더러는

다 읽은 신문처럼 곱게 접혀 버려지는 법,

실제로 나는 영혼의 울림을 읽었을 뿐인 것을.


담배를 끊었다. 그 옛날 담뱃진

으로 하얀 벽지 노랗게 물들었던 할아버지 댁,

내가 철들었을 무렵 당신께서는 이미 자리에만 누워

정신없이 잠만 주무셨다. 나는 그의 얕은 숨이 두려워

아버지, 얼마만큼 숨을 쉬면 죽음이 그것을 걷어가나요?

육신이 숨 쉬는 것은 체념인가요? 왜 나는

이리도 일찍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배워버렸나요?


아무도 모른단다. 심지어는 죽어가는 사람들조차도

병에 걸려 죽음과 손을 마주잡은 이들 조차도, 라며

겁먹은 내 손 꽉 붙잡은 아버지.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손에 넣지 않을래요

대답 없는 아버지, 나는 나 자신에게만 중얼

거렸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그는

드물게도 깨어있었다. 당신께서는 아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어린 눈동자를 향해

깊은 주름 가득히 웃었다. 뒷걸음질

치는 내 어깨를 아버지의 손이 붙들었다.


흰 구름 부서진다. 파란 아침 하늘

너무 오랜만에 보았다. 나 공원 벤치에 앉아

깨어나는 도시인들 사이에서

내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어, 중얼댄다.

바람결에 목숨들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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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이상한 탄생



매끈하게 압착된 질 좋은 종이를 나는 몇 번이나 쓰다듬는다. 책상 위에는 잉크가 거의 다 닳은 볼펜, 그리고 그 뒤에는 수정액이 필요가 없는 오피스 문서 프로그램이 스크린에 떠있다. 왜 볼펜을 쥐고 종잇장을 난도질 할 때는 나의 영혼이 하얗게 터질까. 푸른곰팡이가 핀 타자기를 두드릴 때 나는 공허한 망상에 빠진다. 빗소리 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축축한 여름밤, 새까만 창문은 사고의 방벽이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 방 가득히 찬 분열과 모순의 사고들을 흙으로 만든 방패처럼 지키고 있다. 나의 필기는 폭력이다. 잉크로 그어놓은 나의 문장들을 보면, 그것들은 당장이라도 종이로부터 뛰쳐나갈 듯 들썩거리며 고통이 담긴 조소로 입술을 찢는다. 내 방에는 공간이 없다. 죽은 이들의 시체와 그에 대한 존경으로, 내 방은 빽빽이 들어차 고대의 피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듯하다. 단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는다면 좋을 것을. 창밖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약에 몹시 취해 나의 손가락은 취객처럼 비틀거린다. 이것 봐, 자네 자신조차도 자네의 미학을 개념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술집에서 배갈인줄로만 알고 빙초산을 한 병 들이마셨다. 고통스럽고 취해있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는 업고 달렸다. 아버지, 매일 같이 당신을 찾으러 대폿집을 돌아다니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아버지, 당신이 영혼의 자유에 목을 매고 미소와 함께 무너져버리는 것을, 나는 먼 미래에서 보았습니다. 더러는 그것이 영혼의 자유가 아닌 영혼의 부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낯선 사내는 닫힌 방문 안에서 타자기를 두들기고 눈물을 삼키다가 흉터처럼 깊은 선을 잉크로 종이에 새긴다. 시간은 기억에 맡겨졌다. 그리고 기억은 사생아의 출신에 의해 꿈틀거리는 진흙탕이 되었다. 광기의 문! 모든 애매모호한 과거들이 그 뒤에 갇혔다.


내가 태어난 혈액은 짐승과 소시민의 피였다. 그러나 나는 돌연변이였다.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돌연히 태어나고 말았다. 나는 도덕과 윤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 통념과 법률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내게 빠져버린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각이었으리라. 어머니, 당신의 손을 잡아도 될 까요. 너무나 약하고 작아져버린 당신은 이제 두렵지도 않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내가 증오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을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그러나 밖은 바람도 불지 않는다. 나는 줄곧 사생아의 기분을 느끼며 살았고 줄곧 사생아였다. 삶을 앞에 두고도 웃는 사람들 사이에 낯선 사내는 아름다움이 무엇이었냐며 자문한다. 허나 사내는 펜을 쥐거나 타자기를 두드리기만 할 뿐, 별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 되었다. 사방 가득하던 밤 벚꽃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가 버려, 벚나무는 까맣고 깡마른 노파의 손처럼, 그저 그림자를 움켜쥐고 정적 속에 침묵한다. 안녕, 삶들이여. 안녕, 떨어져버린 꽃잎들이여. 안녕, 너무 빠르게 늙어버린 내 영혼이여. 안녕. 그래도 나는 휴머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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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위의 정신

글/시 2016. 6. 11. 03:21 |

학살 위의 정신



하늘은 잿빛

그 많던 비둘기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새벽의 거리엔 습기가 서리고

하늘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

남자는 추억한다

집 잃은 흰색 개들도

이젠 어딘가에 뼈 밖에 남지 않았으리


오래 전 어린아이가 하나 죽었다.

혹은 최근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아이를 껴안고 눈물 흘리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작고 더럽혀진 손이라도 잡아줘야 했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공포에 질린 채

소름끼치게 뜨고 있던 눈이라도 감겨줘야 했을 것을


장례식은 그 누구의

발도 닿지 않은 대학로의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천천히,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새까만 그림자에 모자를 푹 눌러 쓴

검은색 조문객들은 모두 진탕 취해있었다

이봐, 그 아이에게 가족이 있었던가?

나이 많은 형이 하나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보이질 않는군, 하며 그들은 수군거렸다


동이 트자 조문객들은 사라져버렸다

연기처럼, 혹은 안개처럼 그러나

죽은 아이가 담긴 관은 아스팔트

위에 방치되어 있다가, 어느 친절한 행인에 의해

우표가 붙어 남자에게로 배송되었다


새벽 거리 남자는 줄담배를 태운다

폐가 미치도록 아파…… 그러면서 남자는 웃는다.

어린아이가 죽지 않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커다란 비극이고

하늘은 잿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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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모든 절망을 당신께



그는 담배꽁초를 보지도 않고 내다버린다

저 그림자 뒤의 세월들도 그렇게 내다버려졌으리라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검은

나무 그림자에 묻히는 쓰레기처럼

시간이 흐르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의 세월도 담배 필터도 물에 불어 그늘

밑에서 비밀스럽게 비대해지리라.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 남자는 골목 사이로

천천히 사라진다. 내 눈은 그를 좇다가

결국 눈물처럼 내가 쥔 오래된 시집의 한쪽 한쪽마다

책갈피가 되어 꽂힌다. 나는 중얼거린다,

여보게, 너는 도대체 언제부터 감명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하기 위해서

차가운 몸뚱어리가 된 작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나?

그 차가운 계절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책갈피들이 무수히 책장 사이에 꽂혔는지


아직 태양이 떨어지기 전에, 남자가 섰던 자리에

나는 서서 내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그 치명적인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러는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금성이 떠오를 무렵에야 길거리에 선 채

기억해냈다. 한 때는 깃발과 창을 높이 쳐들고

세계에게 분노의 목소리로 강론을 하는 것이 필연

이었고 의무였던 때가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모든 잎들이 지고

고엽이 굴러다닐 뿐인 정적의 차도―그 재물들의 사상 위에

정신은 버려지고 혁명은 물론이거니와

반란도 유물이 되었다


내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면 병동의 문이 잠길 것이고

나는 불행하다.

Posted by Lim_
:

누구도 명령하지 않은 세계



누구도 나에게 비참하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고통 받으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절망 속에 살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고독하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싸우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내 갈비뼈를 깎아 단도를 만들라고

눈동자 속에 공허와 혐오를 담으라고

피 흘리는 만큼 피 묻으라고

하얀 피부들 위에 잉크를 새기라고

누구도 나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내 유년기의 거대한 찢어진 흉터도

내 소년기의 추위와 배고픔도

내 청소년기의 방랑과 발작도

내 청년기의 증오와 분노도

오로지 나에 의한 나만의 것이다.


전부 내 것이다. 전부

괴악망측하게 뒤틀린 내 영혼의 끄트머리의 한 조각조차도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몽하지 않는다 나는 설파하지 않는다

나는 공유하지 않는다 나는 교육하지 않는다


누구도 명령하지 않은 내 고독으로

고로 나는 더욱 철저하게 고독해졌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내 고통으로

고로 나는 내 일생의 모든 순간에 가장 끔찍하게 고통 받는다.

그리하여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한 거대한 성을 지었다.


내가 나의 복수를 위하여 나의 앙갚음을 하려 들면

당신들은 드디어 내 망할 얼굴가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당신들은 내 웃는 얼굴에 박힌 이빨들과

정신병동에 갇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름다운 이들을 한 없이 증오하는

그들의 목을 졸라 머리를 뜯어낼 내 길고 붉은 혓바닥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대답하길 바란다. 누구도 너에게 미치라고 하지 않았다고.

옳아, 내가 미칠 리가 없지. 광인이 광기를 선택하여 광인이 되었다는 건

명백한 논리모순이다.


그래, 수많은 정신병원 의사들이 내 손을 잡았었지

그들은 말했다. 장기적으로! 긍정적으로! 어려울 것이지만,

더 낫게! 더는 고통스럽지 않게! 마음을! 사람의 감정을!

영혼의 균형을! 채찍질은 그만! 손을 잡아요! 스스로 구제를!

어린아이의 눈물을! 성인이 되는 법을! 사상의 조율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자면 이제 경찰과 검사들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정신병원 진료기록을 체크할 것이다 그리고 유전형질에서부터 스스로 고통스럽다 못해 증오를 품게 될 이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개방병동에서 격리병동으로 격리병동에서 독방으로 독방에서 형무소로 형무소에서 교수대로 교수대에서 이 세상 밖으로 그들을 이동시켜 마침내 완전무결한 사회를 만들었노라고 청결한 가위로 테이프를 끊고 서로 악수하며 웃고 카메라 앞에 설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 뒤 우리는? 내가 품고 있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철저하게. 철저하게 미래지향적인 감정이다.


떨어지는 목들, 뭉개진 눈알, 크게 찢은 복부에 삽입되는 남근,

손톱 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잘게 썰린 고기와 뼈들, 정소를 절개해 꺼낸 정액들,

난소를 절개해 꺼낸 난자, 슬럿지 해머로 다져진 날고기, 혀가 제거된 남자들,

유방이 제거된 여자들, 창으로 벽에 꽂아놓은 고기인형들,

나이프로 벗겨 무두질도 하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 놓은 가죽 컬렉션들,

뇌수가 있던 자리에 맴도는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와 부화되는 알들,

자본주의가 들어찬 옆구리 살을 불에 굽는 냄새, 사회주의가 들어찬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었던 가죽주머니들이

좍좍 찢어져 안에 담고 있던 잡고기와 내장들을 쏟아내는 소리, 그 냄새,

드디어 나는 생살을 씹을 것이다. 내 치아들은 웃을 것이다.

마침내 나는 아침에도 웃을 것이다. 낮에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술에 취해 울지도 않고 담배도 끊을 것이다.

더는 어머니를 미워하지도 아버지를 애닳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날 이해하고 창고에 여기저기 흩어져있겠지.

내 유일한 피붙이 동생도, 내게 친절했던 사촌도, 내가 사랑했던 친가 가족들도,

내가 혐오했던 외가 가족들도, 내 몇 안 되는 사랑스런 친구들도,

매일 저녁 출근할 때마다 나에게 웃으며 인사했던 버스기사님도,

매일 술을 사러 가면 먼저 인사를 걸어왔던 마트 점장님도,

길가에서 스쳐지나갔던 모던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도,

멋지게 몸을 키워 자신만만하게 걷던 청년들도, 구청의 공무원들도,

길거리에 누운 노숙자와 거렁뱅이들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던 아주머니들도,

내게 한 없이 자상했던 스님들도, 어렸을 때 만났던 신부님들도,

예수님도,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도, 무함마드도, 성경도, 불경도, 쿠란도,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도, 죽음이 눈앞에 놓인 노인들도,

잘 생긴 이들도, 못 생긴 이들도, 젊은이들도, 중늙은이들도,

성자도 탕아도 부자도 빈민도 호모섹슈얼도 헤테로섹슈얼도 권력자도 피지배층도

전부 철저하게 분해되어 나의 세계에 피와 면도날을 증명할 것이다.

나는 손을 뻗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다 나는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처럼, 손가락이 나이프로 되어있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죄라고 말할 사람들은 널려있지만, 곧 그렇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스피린을 한통씩 삼키지도 않을 것이다. 쿠에티아핀푸마르, 바이코딘, 바르비투르산, 발리움, 디펜히드라민, 알프라졸람, 클로미프라민, 그 외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 많은 이름의 약들. 그것들을 나는 내다버리고도 멀쩡할 것이다.


아! 사악한 자여. 내가 아는 한, 세계는 나의 것이고

나의 세계는 아름다워질 준비를 하고 있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펼치는

이름 없는 어느 나비처럼.

Posted by Lim_
:

야누스의 노래

글/시 2016. 5. 20. 06:21 |

야누스의 노래



1.

나는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들로 가면을 만들어 뒤집어썼다.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고,

술에 취한 남자들은 소름끼치게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무 오랫동안 그 가면을 벗지 않아

나는 나의 원래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오, 자아라는 것의 신비스러움이란! 도대체 누가

자신의 원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외로움을 찬송했다.

저주 같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면

나는 야간생활자의 그림자를 품고 햇살 비추는 거리를 걸었다.

그것은 지독하게도 괴로운 것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건실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만일 내가 그들과 눈을 마주친다면

그들은 나의 파리하고 쑥 들어간 눈동자를 보게 될 것이며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들은 날 증오할 것이다.


오 불행이여, 나의 친절한 친구여.

그는 내가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술병과 연거푸 악수를 나누며

건물의 위태로운 옥상에서 나의 재들을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하하! 그러면 나는 웃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경범죄는

나의 입술을 말려 올라가게 하며, 그것은 동시에 위대한 준비였다.


태양이 군림할 때에 나는 늘 잠을 잤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거북이처럼, 나의 단단한 등딱지 속으로 들어가,

전혀 평온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잠을 잤다.

악몽이라 불리는 것들이 나의 무의식에서 빠져나와

나의 인격에 못과 망치로 조각을 새겨 넣었다.

나는 축제를 맞이하듯이 불경한 시들을 세계에 외쳤다.


나에게는 매일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발현한다.

기억이 날아갈 만큼 술을 마시고 부엌바닥을 길 때,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시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나는 펜을 쥘 수만 있으면 인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미(美)를 모르는 자들은 고통 받지 않는다!

너무도 오만하고 진부한 얘기지만

나는 정직하다.

나는 나의 광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었고 오물을 피하듯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충동적으로

경찰서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다.

체포하시오. 부디 나를 체포하시오! 당신들은

어떤 인간을 괴물로 정의하고 목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나라의 녹을 먹지!

그러니 나의 목뼈를 부수고 영광스러운 카메라 앞에 죄인의 시체를 전시하시오.

그러나 그것도 유치한 꿈일 뿐!



2.

나는 나의 낡은 구두를 신고 갈대밭을 항해했다.

갈댓잎들이 나의 팔에 상처를 새겼고

나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핥으며 내 생명을 노래했다.

오-랄라!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기회로다.


나는 품에서 술병을 꺼내 황금빛 싸구려 럼으로 목을 축인다.


나의 구두는 나 없이도 모든 곳을 돌아다녔지

사막도 황야도 초원도 숲도 해변도

나의 낡은 구두의 밑창은 모두 밟아보았다.

나는 강가의 썩은 통나무 위에 앉아 역사의 신선한 피를 마시니


나는 과연 행운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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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誤譯)을 위하여

글/시 2016. 5. 18. 04:35 |

오역(誤譯)을 위하여



1.

나 아직도 꿈을 꾸매

나태에 꿀을 뿌려 벌레들이 갉아먹게 하고

새벽이 가장 짙은 시간에 잃어버린 것들이 몇인가

셈을 하네.


내가 사죄해야할 것이 있으니,

나 신(神)과의 약속을 저버렸네.

아직도 내 목 잘라가지 않는 것에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나 자신이니.


너무 많은 영혼들이 내 추래한 육신에

비좁게 들어차있네.

고로 그것은 자꾸만 나를 가볍게 만들어

나는 전봇대에 묶인 헬륨풍선과 같네.


판사도 검사도 없는 세상은

오히려 정의라는 망치로 사람들의 두부를 깨부수던

그때보다도 숨이 턱턱 막혀

나의 작은 아나키, 내 심장을 파먹는 역병과 같네.


욕망이 없다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비극적인 인간상이라는 걸 깨닫고

나 삶 아니면 죽음에라도 탐닉하려 했건만

이미 모든 게 늦어, 나 모든 이들의 눈에 보이는

환영처럼 되어버렸네.


봄의 창문에 기대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길가의 아지랑이로 추측하며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어.

아지랑이만이 진실임을.


울려라, 태양으로 만든 징아

나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세계의

진짜 소리를 듣고 싶으니, 울려라.

공허 속에 뛰노는 환영인 나를 열파로 태워버려라.


리볼버에서 터져 나온 화약 냄새를 맡았을 때

잠깐이지만 나는 희열을 느꼈어

내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착각에

나는 고함치고 싶을 정도로 희열을 느꼈어.


묵직한 총신의 금속성 반동이 내 손에 닿을 때

나는 내가 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아무것도 조준하지 않고 초원을 향해 여섯 발을 발사했을 때

상상과는 너무 달랐던 그 화약 냄새에

나는 새삼 깨달았어.


오로지 전쟁만이 날 존재자로 만드는

수단이자 목적이라고.



2.

나는 폭력과 피가 근절된 모던한 도시로 돌아왔지.

사람들은 탄피 대신 금화를 떨어뜨리고

화약 냄새 대신 네온과 메탄가스의 냄새가 나고

탄환 대신 성애를 분출해.


죽은 코요테의 뼈를 내려다보며 석양을 기다리던 곳에서

서류를 전산망에 입력하는 밤의 사무실로 돌아오자

지독한 혼란이 내 뇌를 짓이겼어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를 모시지.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말하고 백년. 하고도 16년.


모든 것이 애매하고 중첩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입을 꿰매버리는 수밖에 없었지.

지금도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또 한 명의 히틀러, 또 한 명의 스탈린을 바라.


아! 그래, 의식적으로 도덕을 믿지 말도록 하자.

수단은 누가 되든 상관이 없어, 오로지

인간들의 영혼이 전쟁상태에 돌입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부활할 거야.

진정한 의미의 부활.


신이 아직도 내 목에 낫을 가져다대지 않았으니

나는 이것을 계시로 알고 계시로 삼겠다.

더 고통 받으라고, 더 비참하라고, 더 울부짖으라고,

더 나 자신의 무력한 정신을 저주하며 무엇이든 써내려가라고.


이 시대정신에 필요한 것은 파괴고

붕괴이며

타락과

퇴폐와

소각이다.


루브르 미술관이 불태워질 때

우리의 영혼은 부활할 거야.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가장 추한 것이 되고

가장 추한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때

우리의 영혼은 부활할 거야.

역설적이게도, 미래를 위하여.



3.

이 이야기의 논점은

사실 우리는 이미 죽어있다는 것.

이 이야기의 교훈은

사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


무정부상태라는 것도 사실은 정책의 하나에 불과하고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텍스트로 기술 가능한 모든 것들은 실상 허구이매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를 초월하는 것을 텍스트로 만들려 했다.


인류가 언어를 발명했던 시점부터

전 인류의 정신분열증은 이미 발병하기 시작했었다.

뇌내의 강렬한 환각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명소리를 냈다.

손톱이 만들어놓은 작은 입에서 핏방울이 흐르면

칼리굴라처럼 슬퍼했다.


내가 과연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는

너무나도 날고기가 먹고 싶었다.

이윽고 감정의 수원지에 연결된 파이프가 터진 것을 보고

뼈가 아프도록 술을 마셨다.


나는 아직도 이상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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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어쩌면 나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릴 때 가슴에 칼을 긋는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지.

80만 원짜리 러닝머신 위에서 뛰거나

어느 밤 옥상 위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충분할 만큼 눈물이 나올 수가 없기에.


자신의 피부 위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그것을 눈물의 또 다른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은

연인을 껴안아도 가슴 속에 공허한 바람이 불고

가족의 손을 잡아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도 영혼의 아픔이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지.


대낮에 소주에 흠뻑 취해

축축한 장판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것은

그 순간만이 아프지 않기 때문이지.

사실은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현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이야.

어쩌면 그럴 때 나는 세상의 비극 속에서 가장 아름답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나의 눈물샘에서

에틸알코올 한 방울이 덧없이 떨어지는데

어쩌면 그 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울지도 모르지.

숙취 때문에 쪼개질 것 같은 머리로

한 새벽에 신경안정제와 발리움을 찾아 서랍을 뒤지는

그 장면보다 더욱 더.


아주 오랫동안 이성에 의존해 입을 열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이 가슴에 공허와 광기를 키웠지.

너무 지쳤었기에.


기껏 꿰매놓은 가슴의 흉터를 다시 찢는 것은

아무래도 그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야.

어쩌면 그 붉은 피는 나의 피가 아니라

내 늑골 속에 사는 짐승의 눈물이 아닐까?

꿈틀대는 거대한 기생충의 체액이 아닐까?

동굴 안에 혈거짐승이 살고 있는 것처럼

내 공허 속에 무언가가 살고 있어.


오, 아버지. 어찌 저를 버리지 않으시나이까.

자의적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발목이 부러진 채,

나를 못 박을 십자가를 누군가가 가져와주기만을 바라는

나를.


안녕, 여러분. 나는 직장동료를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지.

최근 별 일 없지? 안부를 묻고

그러나 나는 바위에게도 웃으며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

그리고 백일몽 같은 낮이 지나가고

내 영혼이 고요히 우는 새벽 밤이 되면

나는 얼굴 없는 고무인형이 되어

펜을 쥔 채 죽음을 기다리지.


만일 당신이 새벽 세 시에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당신은 망가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 같은 이상한 물체를 보게 될 거야……

그것은 코도 없고 입도 없는데

섬뜩하게 눈을 뜨고 축 늘어져있겠지.


놀라지 마. 그것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의 잔해인

소위 「인간」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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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노바크와 모든 문명에게 바침



1.

나는 말레이 여자 마라를 상상한다.

적도에 세워져 무너진 도시를 상상한다.

해안에 따개비 무리처럼 낮고 빼곡하게

흙으로 지어진 마을들은 아주 조용히 먼지가 되었다.

무너지는 것은 높은 것들이다.


창촉 같은 태양빛이 무작위하게 내려쬐어

높은 건물들은 갈라지고 추락했다.


말레이 여자 마라는

무너져 인동덩굴과 온갖 이끼류로 뒤덮인

거대한 건물들의 폐허 밑에서

표범 토오와 함께 잠들어있다.


2.

문득 나는 일본에서 보았던

아주 촘촘하게 숲을 이룬 침엽수림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 나는 데이비드 소로우가 감자를 심던

작은 텃밭과 오두막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최저한의 문명도

내게는 아직 달갑지 않다.


3.

나는 너를 상상한다.

청계천 주변 무너진 은행가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직접 만든 올가미 그물로 잡고

땅 밑에 파묻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본점에서 끄집어낸

책들로 불을 피워 노루고기를 익히는 너를.


광화문에 있는 녹슨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햇빛을 잘 받으라고 내장이 제거된 생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여름이 끝나기 직전 멧돼지 가죽을 입은 여자들이

충무공을 타고 올라 말린 생선을 모아올 것이다.


어느 순간 적도의 숲에서는 불이 난다.

내가 사랑했던 시에서 말한 것처럼

불길은 광기처럼 타오른다.

나무들이 죄 재가 되고 나면 그것은 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무와 풀들을 키울 것이다.

너는 마라와 함께 그것을 본다.


너는 대나무로 깎은 창을 쥐고

갈색으로 변한 의정부 시내의 이성계 동상 옆에서

앉은 채로 낮잠을 잔다.

가끔 야생마들이 갈라진 국도 위를 뛰어가고

성형외과와 아로마테라피 샾의 광고간판으로 번쩍이던

드높은 빌딩들은 허리가 꺾여 영장류들의 집이 되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너는 가을 전에 준비를 한다.

말린 고기들을 돌로 만든 바늘로 꿰어

허리에 감고

고라니 가죽을 덧댄 웃옷으로 바닷바람에 대비한다.

이젠 아무도 없는 주한미군 캠프에서

어렵사리 잭나이프 하나를 찾아내

칼날을 무두질한 돼지가죽으로 감싸고 서쪽으로 걷는다.


네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밤하늘의 별이다.

너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을 알고 있다.


네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가 아마도 인천일 거야.」

해안가의 도시들은 이미 쓸려나가

곱고 빛나는 모래가 되어 네 발밑에서 굴러다닌다.

작은 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구멍이 송송 난 해변에서

수평선을 보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가라앉은 유조선이

새까만 석유에 둘러싸여 선체 앞부분만을 수면 위로 내놓고 있다.


여긴 아직도 가솔린 냄새가 나고

깃털에 석유가 들러붙은 채 말라죽은 새들의 시체가

해변 곳곳에 널려있는 것을 너는 본다.

너는 매년 한 번씩 이곳에 온다. 그것은 너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너는 매년 한 번씩 여의도로 가

풀썩 주저앉은, 한때는 황금색이었지만

지금은 암녹색과 녹슨 철근의 색으로 변한 마천루를 본다.


넌 갈대줄기로 화살을 만들고

어린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강북구에서 창을 던져 사향노루를 잡고

간석기로 늑대 가죽을 무두질해 옷을 해 입는다.

너에게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도 있었지만

그걸 입으면 토오가 앞발을 휘두르며 위협하기에

흙속에 묻으라는 마라의 조언을 따랐다.


밤이면 너는 서점에서 발굴한 책들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고

나이프를 쥔 채 그 옆에서 잠든다.

사위는 새까맣고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고

올빼미와 소쩍새 우는 소리가 난다.


그런 너를

나는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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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노스탤지어

글/시 2016. 4. 22. 05:03 |

이상한 노스탤지어



과거에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

대양이 아름답다면 그건 한 인간에 의해 아름다웠고

삶이 위대하다면 그것도 한 인간에 의해 위대했어.

내가 언제쯤 실패하게 될지 기대되는군.


그러나 태양이 수천 번 떠올랐다 저물었고

나는 일종의 유물이 되었네.

먼지가 뒤덮은 갈색 낡은 마을과

붉은 벽돌을 타오르는 인동덩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내 마음도 광재가 묻은 뿌연 유리창이 되었네.


이 도시의 밑바닥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심지어 밤에조차 세상은 세피아 색이네.

아이러니한 일이지. 사실 모든 것이 더

폭력처럼 선명하고 비극처럼 짙게 되었는데.

빛바랜 것은 나의 눈일까?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그것을 부정하는 용기 있는 자가 있을 때만

사실이 되지.

온 세상이 꿈의 거품이라는 사실은

태양에 달궈져 지글대는 땅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을 때만 사실이 되지.

거꾸로 말해도 그르지 않은 진실.


어제는 서재에서 오래된 책을 찾아냈네.

파란 표지로 된, 플라톤이 제자와 대화하는 내용의

아주 오래된 책이었는데, 종이가 누렇게 변해버린 것을 보고

가슴이 쓰렸어.

오, 그래. 나에겐 이상한 노스탤지어가 있어.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살아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노스탤지어.


시간이 나에게만 교묘한 요술을 쓴 것일까?

나는 모든 시대를 살았었어.

그리고 모든 시대의 유물이 되었지.

그러나 이것도 그저 나의 광증의 일부일까?

아직 살아있는 나의 아버지를 볼 때마다

나는 안도하게 되거든.


세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살았었지.

그리고 나는 참으로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

내가 언제쯤 실패하게 될지

정말로 기대되는군.


그 시간이 덮쳐들고야 만다면

나는 만족한 듯이 철제 의자에서 일어나

곡괭이 한 자루를 들고 털레털레 가리라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갈탄 광산마을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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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병질과 증오를 여기에 선포하네



오,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젊음의 사람들이여

오, 단 한 번도 태양빛에 타들어간 적 없는

귀족 같은 손의 주인들이여

오, 양잿물로 감아 윤기가 도는

담흑색의 머리칼을 빗는 이들이여.


설마 내 혀가 그대들을 찬송하리.

아름다움과 목탄으로 치장한

그대들의 갈색 눈동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나는 알고 있다.


설마 내 혀가 그대들을 찬송하리!

모멸과 하잘 것 없는 도도함과

멸시로 세상을 내려다보는―그 좁디좁은 세상만을!

고결한 모욕이 걸린 입 꼬리로 조소하는

그대들을 말이다.


내 묻건대, 단 한 번이라도 사막의 모래를 쥐어

그것이 쏟아져 내리며 태양과 소금의 성을 짓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대양의 끝에서

이끼를 뒤집어 쓴 암초와 고고한 빙하 앞에

인간의 왜소함에 몸을 떨며 공포로 세계를 찬탄하는 것을

그대들의 닫힌 눈이 본 적이나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종족이지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우리가 왜 사랑스럽다고 하는지

그것을 고뇌해봐야 한다.

얼굴에 박힌 주름도

쌓여온 고통으로 쑥 들어간 눈도

고된 삶에 온통 못이 박혀버린 손도

없는 순진한 멍청이들을 왜 사랑스럽다 하는지!


세상 끝에 가본 일도 없이

화려한 옷을 입고 빛나는 구두를 신고

젊음을 자랑하며 대로의 한복판을 걷는 이들아.

애욕의 노예가 되어

언젠가 읽었던 값싼 로맨스 소설로 머리를 채우고,

부서진 우상의 조각들과 적개심 가득한

세계의 눈동자가 당신의 영혼으로

꽂혀 들어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 그대는 그저

자기 자신이 완벽한 원자결합을 지닌 탄소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을 뿐이구나.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삶이요,

고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뼈에 구멍이 뚫려

절뚝거리는 다리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괴리에

표정조차 보이지 않으려 두 손으로 가린 얼굴이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시간에 늙고 썩어버려

한치 앞조차 보지 못하는 흐린 눈이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광산에서의 영원한 곡괭이질에

나무껍질처럼 변해버린 인간의 손이라.


누군가가 그랬지, 너무나도 유명한 누군가가.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아아, 나 차라리 폭풍이 되오리다, 지진이 되오리다, 산사태가 되오리다.

전쟁이 되오리다. 기아가 되오리다. 폭동이 되오리다.

사람들의 머리 위를 목적도 없이 맴도는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증오가, 분노가, 혐오가 되오리다.


그러니 내가 펜을 아니 들 수는 없었노라.

고개만 들면 하늘 위에

현대의 거대한 우상들이 포식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으니

나 심장이 으스러져도 펜을 쥐오리다.

언젠가 그것이 녹슨 도끼 되어

그대들의 목을 쩔꺽 하고 자를 테니

내 님들아, 어서어서 오시어

이 나무 받침대 위에 머리를 뉘이시라.


나 아무런 명분도 목표도 없이 녹슨 도끼 내리칠 터이니

내 더러운 손에 더 많은 피가 묻을 때마다

나 감격하여 마른 눈물샘에 눈물 차오르고

내 증오해 마지않는 내 님들 사랑스럽다 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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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글/시 2016. 4. 6. 03:07 |

아름다운 사람



내 인간으로서의 자격은 반투명한 종이봉투 안에 있다.

밤바다에 생명을 던졌다. 흰색 가운을 입은 이들이 그것을 건져냈다.

유기물과 무기물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거리는 모자들로 가득했다.

거추장스러운 몸뚱어리가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는 욕설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니코틴과 카페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나를 이상한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햇빛이 두려워 도시의 지하로 기어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불분명한 그림자들이 말없이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정적뿐인 축제 속에서 행복했다. 누군가가 경외심을 담아

「에-틸알-코올!」이라고 외쳤다. 나는 조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이해했다. 우리들의 혀는 고장 났다.

노란 인공광이 태양을 대신할 무렵 거리로 나왔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달걀귀신처럼 표정이 없었다. 나는 불이 켜진 카페로 들어갔다.

볶은 커피 원두의 냄새가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나는 쓰러져 울었다.

어깨가 굽은 점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감격적인 형제애에 다시 울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나는 꼬인 혀로 말했고,

나는 테이블의 손님들이 끄덕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사랑합니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세상 전부를 사랑합니다.

내가 말을 마칠 무렵 흰 가운을 입은 이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들조차 사랑했다. 그들은 나를 인간으로 만든다.

비록 인간이 된다는 것이 끔찍이도 비참하지만.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도 동일하게 비참하다.

「당신은 실망과 수치만을 세상에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옳습니다. 그것이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인격이 내 혈관에 주사되었고 나는 행복감에 눈물 흘렸다.

카페 손님들의 박수갈채 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집으로 갑니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마술사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밤에도 깨진 체온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처럼

달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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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글/시 2016. 2. 26. 06:01 |

절망



나는 세계를 바꾸고 싶었지

아둔함과 오만이라는

구정물이 역류하는 이 도시를

하아얀 사막으로 바꾸듯이.


나는 언어에 탐닉했다네

인류의 정신을 체계화하고

더 나아가 기호화하는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아무런 정치적 의도도 없이

단 한 번의 정치적인 멋진 필체로

새겨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아, 그래,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건

정치적인 것이었어. 아무리 내가

캄캄하고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어두운 오지로 달아난다고 하더라도


그래, 어느 나라의 정치인이

연단 위에서 어느 위대한 고전문학을 낭독할 때

내 혀가 불타 사라지고 재가 되는 것을 느꼈어.

내 피는 얼어붙어버렸지.

나는 두려워졌어.


단 한 번도

작가가 절필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작가의 절필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왜냐하면 응당 작가에게 글과 펜대란

그의 초월적으로 무겁고 불안정한 세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것일 텐데!


그런데 모든 텍스트가 불태워지고

말초신경만이 작동하는 끈적거리는 도시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내 심장은 덜컥 내려앉아버렸어.

나는 종말을 보았어. 사실은 그곳에서 살고 있지.

나는 엔트로피 수치가 한계에 다다른 우주에

비겁하게 자리 잡은 문명을 보았어.


근대는 갔어. 르네상스도 갔지. 중세도 갔어.

공산주의도 갔어. 자본주의도 갔어. 신자유주의도 갔어.

왕정도 가고. 공화제도 가고. 사회주의도 가고. 민주주의도 갔어.

이제 가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우리는 문턱에 걸쳐 드러누운 시체처럼

모든 영혼의 끝을 보고 있어.


나는 세계를 바꾸고 싶었지.

그것도 나의 피로.


그 유명한 랭보가 펜을 놓았을 때

그는 한숨도 쉬지 않았겠지.

영속되는 비참은 비참이 아니니까.

아르튀르

랭보

세계에게 절필을 선언하다.

외다리로 죽다.


맙소사, 공포가 통증이 되려고 해……

연단의 그 정치인은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뭐가 됐든, 내 목이 잘리는 것을 나는 느꼈지

사방이 완충제로 만들어진 독방에서

끊임없이 키가 자라는 것 같아.

끊임없이. 3미터. 5미터. 10미터. 벽에 머릴 박아도

박아도 붉은 물은 나오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손톱이

공허를 긁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나는 이 신음소리에

온점을 찍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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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아름다움

글/시 2015. 12. 3. 19:50 |

고통과 아름다움



겨울에, 다리 밑의 얼어버린 강가처럼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유랑자의 심정을 말하기 위해

나는 미학이라는 것을 끌어안았다.

이윽고 그것은 내 영혼의 틈과 갈라진 계곡 사이로

녹인 쇳물처럼 흘러들었고,

나는 언어가 감당하지 못하는 언어를 입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오, 그러나 그것은 광기의 대가였다.

용접한 듯이 굳어버린 영혼의 파편들은

누울 풀섶도, 취해 쓰러질 모래사장도 찾지 못하고

도시의 언저리에서 여전히 방황했다.

그것은 이전보다도 내 뼈를 너무도 아프게 했다.


사람들은 봄에 인간이 정신을 잃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꽝꽝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계절에

사람은 두꺼운 코트 안에 좁은 어깨를 끌어안고

단 한 순간의 열기만을 찾아

술집에서 술집으로 침울하게 이동한다.

마치 게구멍을 찾아 돌아다니는 작은 꽃게처럼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더라.


「뼈가 아파 죽겠어……」 술이 깨면 깜깜한 뒷골목에서

더욱 자신을 끌어안으며 원시의 모습으로 죽으려는 이들.

바람은 송곳처럼

결국 영혼을 깨트리고야 만다.

광기는 녹지 못해 움츠리고

고통은 뇌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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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남자의 노래

글/시 2015. 11. 28. 05:30 |

취한 남자의 노래



누군가 외쳤지. <섹스는 지저분하고 지겨워.>

아하, 참으로 그렇지. 그런데 그는 오직 남자와만 섹스를 해본 남자 이성애자였어.

우리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어. 우리 손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으니까. 나가, 나가. 날고기들이 부르고 있어.

보이지 않는 피가 더 무섭다는 걸

모든 혈흔을 보는 사람은 알고 있지. 그러니까 우리는 멍청하고 순진해.

언제부터 사람들이 움직이는 고기인형으로 보이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아무도 현명해질 수 없어!> 산골짜기에서 사는 염세주의자가 외치네.

그는 자연조차도 사랑하지 않아. 그의 동굴 주변에서는 풀도 자라지 않아.

매년 하나씩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에는

도끼를 쥘 수가 없어. 안녕! 부디 내가 지옥에 가기를 기도해주시오!

왜냐하면 영원한 고통이야말로 진실한 평화니까. 게다가 말이지,

게다가 지옥에서 함께 유황불에 불타며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정말 기분이 유쾌해질 거야. 나는 목젖을 다 드러내고 깔깔거리며 웃겠지.

그래, 나는 그 그리스 수도자가 존경스러워. 그는 자신이 절대로

성욕을 뿌리까지 없애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도끼로 자신의 남근을 끊어버렸거든. 다소 멍청한 짓이었지만,

일단은 최선의 선택이었지. 섹스는 멍청하고 더러워. 그래서 난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에도

구역질이 나. 내 아빠, 엄마는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는 섹스를 했지.

사실 난 차라리 교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그 단어에는

이유 모를 역겨움이 묻어있거든. 나는 잘못 착상되었어.

어린 시절 과학 시간에, 사마귀 암컷은 교미 직후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배우고

많이 울었지. 수컷은 왜 반격조차 안 했을까? 왜 자신의 정자로 들어찬

암컷의 배를 찢어버리지 않았을까?

아, 그냥 신경 꺼! 네 혈관에 헤로인이라도 주사하도록 해.

정말로 눈을 뜨고 세계를 본다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니까,

그냥 네 현금카드로 코카인 가루나 곱게 다지도록 해. 그것도 일종의 수음행위지.

혼돈 속에서 혼자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니까 괴로운 거야. 하늘을 봐, 하늘을 봐,

운명이라는 카오스가 아무렇게나 광기를 던져대고 있어.

<네 뇌를 설득시켜. 세상만사가 켜졌다 꺼지는 불꽃이라는 걸 알고 나면, 비극도 비극으로 보이지 않을 거야. 살인마들은 살인을 하는 게 일이고, 강간마들은 강간을 하는 게 일이고, 지금도 바깥사람들이 울고 외치고 지랄하며 바닥에 뒹구는 이유가, 애들 소꿉장난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점화! 그런데 내 양심은 어딜 간 거야?

―처음부터 없었어. 바보 같으니!

아! 노래를 하니 기분이 좀 낫군. 음악이라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오물투성이가 되었지.

빌어먹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우리는 모두 혼자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어.

만일 네가 누군가와 연결된다면, 그건 네가 누군가에게 침입하거나, 혹은 침입 당했다는 얘기야. 무슨 소린고 하니, 즉 죽음에 이른다는 말이지.

세계는 그냥 세계야. 아무 의미도 없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단어는 세 가지 뿐이야.

무작위.

무자비.

무의미.

그거 세 가지면 너도 세계를 만들 수 있어. 개미굴에 물을 붓듯이.

저 소리가 들려? 대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소리야. 이천 년 전부터 계속 말야. 웃어! 웃어!

이 세계에선 모든 게 다 싸구려 농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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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자살을 꿈꾸나



폐가 타는 듯이 담배를 갈망할 때는 담배를 피우는 수밖에 없다.

밤거리의 미광이 눈에 비쳐 들어올 때라든가

누군가가 아련한 목소리로 밥 딜런을 부르는 골목이라든가

수많은 모자와 머리카락들의 행렬을

좁디좁은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내 가슴은 독을 원한다.


강박증은 모든 것을 개념화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젊은 여자의 입술만 보아도

나는 그 퇴폐에 구역질을 하며 눈물 흘린다.

그리고 나는 보도블록에 엎드려 중얼거리는 것이다―「나는

다시는 여자의 몸에 손을 얹지 않을 거야. 다시는.」

젊음에게 저주를.


왜 항상 사고의 끝은 파괴에서 멈출까?

바위로 된 해변에서

밤을 맞아 새까맣게 된 대양을 볼 때마다

나는 어서 그것이 오기를 바란다.

운명론자들이 날 조롱하고

휴머니스트들은 날 혐오하고

나는 칼로 찢은 것처럼 새빨간 입술로 웃는다.

「변화라는 건 없어.」 그 말이 심장 한 구석에 늘 도사리고 있다.


한때, 내가 사람의 살을 먹어치우는 짐승이었을 때,

나는 젊은 인간이라면 가리지 않고 뜯어먹었다.

나의 남근은 나의 송곳니였고 나는 그 송곳니를 사람의 피부에

푹 찔러 넣었다.

그것이 사람이었는지 피가 찬 가죽부대였는지 사실 잘 모른다.

나는 항상 다 토해냈다. 언제부터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움찔거리는 가죽부대였고, 추한 것은 혐오스럽다.

추한 것은 혐오스럽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종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교회로 가는 일요일에, 나는 하얀 담배를

멀리 보이는 교회 지붕과 겹쳐보았다.

내 갈비뼈 안에 무언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늘 굶주리고 목이 죽도록 마르며

몸부림치면서 사방에 몸을 부딪혀대는

벌레 같은 무언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벌레 같은 것에게 매캐한 독 연기를 뿌리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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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의 너머는 다시 지평선

 

 

 나는 공공연한 마약밀매상과 같았다. 나와 조금이라도 손끝이 닿았던 이들은 모두 내게서 값도 치루지 않고 비참을 사갔다. 그러나 나는 잃을 것이 없었노라. 그들이 사간 비참은 모두 나의 커다란 광기와 비참이 교미하여 만들어낸 복제품들이었으니. 내가 뱃속에서 키우는 벌레들이 남의 입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비참은 나의 길고 음탕한 혀를 타고 돌아다녔다.

 꿈과 현실이 겹쳐 보이고 밤마다 내 눈앞에 목이 잘린 나체의 여자가 나타날 때부터, 나는 나의 선조들에 대해 추측해보았다. 그들도 밤에 활개치고 다니는 끔찍한 환각을 보았을까? 아, 나는 일그러지고 무너진다. 도시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온 도시가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과 같다. 짤랑이는 죄악의 은화들과 온 거리를 핥고 다니는 네온의 빛들, 나는 저주한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저주한다. 그러나 저주한다고 해서 무얼? 나는 결국 걸쭉한 액체로 변해 하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정말로 어머니가 갖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였지? 아 그래,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숲의 마녀였어. 아직도 애니미즘의 입김으로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늙은 숲의 마녀. 내 지네 같은 혈액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데 나의 선조들은 모두 두개골 속에 딱딱한 벌레들을 키우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내가 고뇌에 빠지게 놔둬라! 내 삶은 이미 고뇌로 인해 구겨진 쓰레기 뭉치와 같다. 내 오만을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를!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나는 끝에서 끝으로 끊임없이 오고 갔다. 물론 깨달은 것도 있었다. 이성이 사람의 목을 벤다는 것을 비롯한 독약 같은 진실들을. 나는 아무것도 그러쥐지 않았다-나는 내 손을 부정했다. 비대한 정신은 사회에게 부정당했다. 백석 시인은 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리. 그냥 내버려 두어라! 내가 스스로 만든 고통에 왜곡되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미치광이가 되어, 익사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나는 결단코 구원을 바라지 않으리라. 차라리 고통이 내게 편안한 것을. 세상에 산재하는 적들은 내가 나의 손으로 만든 적들보다 훨씬 약하며 머릿수도 적다. 그런데 왜 나의 부정당한 손은 바깥으로 뻗고야 마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동정으로 나의 손을 움켜쥐었다가 재가 되어 내 아가리 안으로 떨어지고야 마는지?

 날붙이들이 내 귀 안으로 쑤시고 들어올 때 나는 식인종이 되었다. 그것은 증오 없이도 사람을 잡아먹는다. 분노 같은 것은 내 몸과 함께 늙어버렸고, 나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의 살을 주워 먹었다. 이제 나는 그대들을 증오하고 싶어도 증오하지 못한다. 반복컨대,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분노의 함성과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는 거리를 보아도 내 눈동자는 피로의 핏발이 선 채로 공허만을 본다. 아아! 나는 당신들을 용서한 것도 아닌데……. 사회라는 이상한 개념은 내 속에서 범주를 잃어버렸다. 소리치지 말라!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아니, 아직이라니? 절대로 아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물지 않은 것들밖에는 없다.

 나, 나, 나! 제발 그만! 부디 철두철미한 정신을!

 그렇다. 내가 경외한 것들은 그런 강철 같은 우상들이 아니었던가? 우습지도 않은 일! 나는 피가 줄줄 쏟아지는 가죽부대가 되고 말았다. 전염병이 되고 말았다. 독벌레가 되고 말았다. 대양의 무게에 무너져가는 심해어가 되고 말았다. 자기연민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은 더욱 연민스러운 꼴을 보인다! 젠장, 아무도 없는 전방을 향하여 건배! 건배! 또 한 잔의 술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독주를!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나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고, 저주 받은 몸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머로 내 머리를 갈겨도 나는 또렷하게 사고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왜곡과 분열에 대한 사고를, 그 끔찍한, 답이 없는 수식을 나는 이성으로 풀고 있을 것이다. 어라, 그렇다면 나는 미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의 광기는 왜 이리도 명증한가? 모든 것에 그림자가 질 때 사물의 본질은 더욱 분명해진다. 내 시선은 분명하다. 나는 나의 광기 속에서 필사적인 이성으로 광기를 계산한다. 내 육신에는 이미 경계가 없다.

 

-

 

 매일 아침 차가워진 바람이 내 옷깃을 스칠 때마다 나는 경련한다. 나는 갈대밭에 쓰러지는 환각을 느낀다. 태양을 품어 냉랭한 갈댓잎들은 내 손과 얼굴에 온화한 상처를 새긴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 뜨고, 손을 짚어 일어나보면 시멘트와 콘크리트, 도시 사람들이 털어낸 담뱃재뿐. 나는 너무도 저주하다보니 이제 명확히 무엇을 저주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죽은 나무 옆에 앉아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싶을 뿐인데, 이곳에서는 풀 냄새는커녕 피 냄새도 나지 않는다. 분명 이 도시 사람들은 벽돌과 철을 먹으며 살겠지.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단 한 번도 이해해본 역사가 없다. 나는 눈의 자유를 뺏겼다. 태양이 보고 싶어 죽겠다. 이 땅의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기계장치로 된 발광패널이다. 나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왜 더 이상 교미할 수 없는가에 대한 훌륭한 근거이다. 리비도는 인간에게나 있는 것이다.

 에로스를 잃으면 죽음의 환영이 펼쳐진다. 피부 위로 드러난 뼈, 연기 색깔 가죽, 벌린 입 속의 잘린 혀…… 기타 등등.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없다. 나에겐 아침조차 없다. 쾌락은 색깔을 잃어버리고 퇴폐 속에 침잠한다. 모든 것이 흑백사진으로 보이는 방 안에서 나는 춤을 출 기력도 잃었다. 내 혈관 속에 진짜 피가 돌았던 시절을 기억하는데, 그 기억에도 희뿌옇게 안개가 끼고 말았다. 젊음이여. 젊음이여. 젊음이여. 나의 시간은 압축되었다.

 여인들을 볼 때 내 손에는 항상 나이프가 쥐여있다. 나는 약리학의 법칙에 따라 가죽과 고기로 된 남근을 잃어버리고 강철 날붙이와 가죽이 둘러진 손잡이로 된 남근을 쥐고 있다.

 진리는 병자들에게 있다!

 오, 나는 진리를 이야기했다. 혼돈! 무목적의 아나키즘, 분열된 사고, 왜곡된 감각, 무슨 수를 써도 부정할 수 없는 궤변, ism을 철저히 짓밟아 죽이는 Anti-ism! 세계는 전진한다! 앞으로 갓! 아무런 근거도 없이-앞으로, 갓! 모든 모럴은 절멸하리라.

 

 그래, 증오의 시계가 한 바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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