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기에 없고 여기에도 없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지만 그곳이 어딘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모른다


내가 걸어 돌아온 모퉁이에는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마른 바람이
낙엽마저 지우고
그곳은 빈 웅덩이.

우두커니 선 나의 그림자는
억새처럼 길게 드리운
나무의 그림자를
무뚝뚝이 강간하고 있다.

새까만 쟁반에 얼음 같이 뜬
달만이
동공도 없는 눈동자로
나의 범행을 지켜보고 있을 뿐.

나는 거세당한 강간범
나는 바짝 말랐고
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나는 발자국도 없는
눈 뜬 유령.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어디로도
계속 여기서
홀로 그림자를
사랑한다

가끔 거울이 나타나고 나는 그 거울에서
이상한 표정을 본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길은 나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너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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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쪽과 저쪽 사이

글/시 2012. 10. 4. 23:25 |
이쪽과 저쪽 사이


벌써 한기가 이슬처럼 내리는 계절이 왔다
밤의 골목 구석에서는
어둠이 깡통을 차며 혼자 놀고
캄캄한 거리 곳곳에는
달이 수도 없이 피었다.

머리 위 희고 둥근 달이 하나
넷.

닭이 운다. 저편에서.
내게 보이지 않는 땅에서
태양이 이제 눈동자를 열려는 기색에 눈치채고
새벽에 노래한다.

나무들은 잠을 자는 중
암록색 꿈을 꾸는 중.

나는 만신창이, 거리를 걷네.
내 피부에는 피와 진물이 뜨겁게 흐르고
나는 취한 사람, 세계가 무리지어
배고픈 늑대들처럼 조용하고 음산하게
저 멀리 있는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흐른다.
흐른다. 물 소리도 없이.

또 밤이 오면 나는 술을 마시러 가야지.
Posted by Lim_
:
새장 속의 올빼미처럼


사람이 띄운 별이 여기저기서
밝게 빛을 발한다.
그 어떤 별보다도 지상 가까운 곳에서
말 없이 빛나는 별들아
나랑 술 한 잔만 함께 마시자
사람을 품고 빛나는 별들아
너희도 그 높은 곳에서
땅을 굽어보고만 있으려면
외롭지 않느냐.

무거운 공기가 밤을 싣고 내 위로 가라앉는다
바람 따라 흐르는
거대한 적갈색 구름들
신음소리 내는 나뭇잎들.
시(詩)가 다 무엇이며 영혼이 다 무엇인가?
인간도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신음하는 나뭇잎 한 장과 다르지 않은 것을.

나는 누워서 새까만 하늘과
그 속에서 가끔 터져나오는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조용한 외침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노라
잠시 쉬었다 갈 내륙의 존재조차 모르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바닷새처럼
가끔 동족을 찾아 헛된 노래를 부르고
소금 냄새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싶었노라.
저 깊은 바닷속은 평화로우냐
슬프냐
아름다우냐.

비가 올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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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린 뒤

글/시 2012. 7. 23. 05:56 |
비가 내린 뒤


여름이 오기 전
해는 빛나지 않는다 하늘엔
푸르고 하얀 반점들 뿐
땅에는 까만 돌들과
물기를 한껏 머금고 얼굴을 내민
초록빛 잎사귀들이
아침을 반가워하며 숨을 뿜고 있다.

밤은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고
자신이 갈 길로 가버렸다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내 사랑, 내 영혼이 품은
내 반신.
내가 빛나는 감옥에 갇혀
눈 위를 스치는 영상들에 홀려
곰팡이와 마주앉아
소리도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철마처럼 무뚝뚝하게
달려가 버렸다.

내 가슴속 뿌연 연기들
나의 피부에서 나는 시큼한 체취들
그대는 어디로 갔나 나는 바보처럼 웅크리고
알코올의 냄새가 나는 눈물을 짓는다.

피곤하게 뻗은 팔다리
장막 속에서 혼자 꿈을 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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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단한 대지의 납덩어리 같은 어둠을 밟고


연기 사이로 불빛이 출렁인다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
저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밝혀진 것이다
인적 없는, 어둡고 가라앉은
들개의 시체 위를 넘나들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빨간 불꽃을 품에 안고
그것들의 뼈를 밟고
흘러나온 피와 내장을 슬픈 듯이 핥는다
너는 지금 그 위대한 해골에게 무어라고 짖고 있을까?
계속 짖어라. 나도 함께 울부짖어 주리라
나의 형제여
내가 최초의 혼돈이 되리라
바람조차 불지 않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 원시의 밤이.

아, 마지막 외마디 비명소리!
빨간 불꽃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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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우는 새

글/시 2012. 7. 13. 10:53 |
밤에 우는 새


밤에 새들이 울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아침에 노래한다
대기가 근질거리고
하늘이 푸른 먹빛으로 진동하기 시작하는,
어느새 새까만 장막이
서서히 밝게 물들어가는
그 시간에.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아침에 뜨는 태양에게 자신들의 노랫소리를
바쳐왔을 것이지만 나는
그들의 노랫소리가 빛과 어울린다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까만 연기로 물들어
온몸의 근육을 찌르는 통증과 싸우면서
공수병 걸린 짐승처럼 캄캄한 길을 기어 다닐 때
나는 몇 번이나 내 안의 신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새들이 울게 해달라고!

노래하는 새들이여, 그대들은 알아야한다
자신의 노랫소리가 시꺼먼 눈동자와
침묵하는 하늘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공포에 질린 인간정신과 얼마나 어울리며
또 조화될 수 있는 지를.

더 이상 광명을 위해 노래하지 말라.
그대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에게, 그리고
루시페르의 오른편 권좌에 앉아
술 한 잔 마실 수 있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더 없이 아름답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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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야

글/시 2012. 6. 30. 10:52 |
백야


한 발자국만 떼면 호수다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을하늘처럼 깊고 시커먼 호수다
수면에는 유령들의 연회처럼 공기에 뒤엉긴 안개가
죽은 구더기들 배 뒤집고 둥둥 뜬 시쳇물처럼
깔려있다

가끔 검은 잉어나
흰 비단뱀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휙휙 지나간다
등 뒤는 소란. 사람들의 빛, 목소리 깔깔대는 얼굴들
인간아, 너 한 발자국을 딛어라!

저기 보이느냐? 죽은 신들이 눈 감고 누운
무한한 늪이. 불꽃의 정상처럼
춤추는 물결이

가끔 호수 주변에 뿌리박고 선
나무들의 나뭇잎 사락거리는 노래가
어머니의 거대한 비명이 무너져가는 소리처럼
영혼을 웃음 짓게 한다. 인간아!
너 한 발자국만 딛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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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을 가진 유령

글/시 2012. 6. 30. 10:52 |
육신을 가진 유령


해가 하얗게 내리쬐는 날
보도블록 위에 서있는 내 발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가죽을 덧씌운 것 같은
그런 얼굴들이
강가를 내려다보면
풀잎 사이로 잠든 짐승의 심근처럼
흐르는 물살이
모두 파랗게 진동하는(너무나 밝아서 오히려)
유리잔의 목 같이 얇은 다리를 지닌 초식동물인 나를
멀리서 노려보는 굶주린 늑대의 눈동자처럼
나를 꿰뚫는다 나를
시체를 갉아먹는 구더기처럼 스멀스멀
좀먹는다

나는 태양 아래서 내 피가
타르처럼 검고 걸쭉하게 변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죽은 쥐가 썩고 부패하여
팽창된 눈알이 두개골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마치 그 썩은 눈알처럼
나의 심장도 부패하여 흔들거리다가 식도를 타고 넘어와
내 입에서 쏟아진다 왜냐하면
만물을 자라게 하는 태양이 빛나는 날에도
늙은이들이 지팡이를 짚고 경쾌하게 걷는 거리에서도
내 두 발은 오래된 폐허의 비석처럼
부서지고 무너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잘린 잠자리처럼

표정들이 나다닌다 단단한 갑각을 가진
게처럼 재빠른 발동작으로 옆으로 옆으로 걷는다
그런데 나는 거울로 만든 감옥에 웅크리고 앉아서
거울 속의 그들이 나를 노려본다고
그들이 내 뱃가죽에 칼을 꽂으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중 굴속에 숨어있는 야만인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가끔 바깥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돌과 나무와 흙으로 만든 모형 도시 속에서
덜그럭거리며 걸어 다니는 마리오네트들의 공포극 밖에는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둥절하여 겁을 집어먹고 문을 잠그려고 한다 하지만
열쇠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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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도시의 한 구석에서 외침


꽃잎 냄새 나는 계절 주황빛 가로등 비추는 골목길에서
나는 배 깔고 누운 짐승처럼 공기를 들이마셨지
새벽에 태어나 이제 막 죽어가는 냄새 속에서
가끔 검푸른 물방울들이 시야에서 흔들거리고 나는
입이 없고, 오직 눈동자만 뚫린 털북숭이 짐승과 친근하게 손을 맞잡았다.

밤은 깊다네. 아홉 개의 어두운 구덩이 따위보다도 훨씬 더.
왜냐하면 음영조차 없는 휑뎅그렁한 얼굴은 바로 그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지.

이미 몇 시간 전, 가을걷이하는 낫에 모든 표정 있는 것들은 목이 잘렸고
잘린 목들은 침묵한다. 당신, 나는 유쾌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존재 없이도 내 가슴은 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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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태(變態)

글/시 2012. 6. 21. 23:40 |
변태(變態)


내 골반 뼈 속에는 벌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것은 지네처럼 기다랗고 무수히 많은 다리가 달렸으며
단단한 갑각은 내 체액과 피로 반들반들하다.
내가 음식을 씹어 삼켜 그것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뱃속으로 떨어지면 녀석은 그것을 훔쳐 먹고 몸을 키운다.
충분히 많은 힘을 축적하면 녀석은 마침내 자신의 턱으로
내 골반 뼈를 부수고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다.
내 배에 구멍이 날 때 녀석의 꼬리에는 나의 내장들이 걸려
밖으로 끌려나오리.

내 눈에는 모든 광경들이 생생하게 보인다. 그 장엄한 벌레의
번쩍거리는 검은 눈알과 붉은빛으로 빛나는 껍질이.
내 골반 속에서 기어 나와 전갈의 독침 같은 꼬리에 나의 창자를
신혼부부의 자동차에 달린 깡통들처럼 요란하게 매달고!
녀석은 나의 모든 것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며
사방을 핏자국으로 칠하다가 가죽만 남은 나를 내버려두고
곰팡이가 피고 습기 찬 어두운 천장 틈새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안다. 내 골반 뼈 속에 나의 영혼과 똑같이 생긴 벌레가
한 마리 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 뼈를 부수고 나올 때에 처음으로 나는 녀석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보는 일이 없으리. 왜냐하면 녀석에게는 흉측스럽고도
자유로운 다리가 수도 없이 달려있는 데에 비하여
나는 독에 중독되어 곧 무너져버릴 것 같은 나약한 두 다리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나는 참으로 기대된다. 내 골반 뼈가 부서지고 뱃가죽에 구멍이 나는
그 날이. 왜냐하면 나의 살점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며 자란
나의 벌레는 그때 최초로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습성에 따라 가장 어둡고 기이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똬리를 틀고 지나가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거나 가끔은 천장에서 덮치듯이 떨어져 잠자는 시민들의 목에
자신의 단단한 턱을 박아 넣을 것이다.

가죽만 남은 나의 시체는 썩어서 또 어떤 작은 벌레들의 먹이가 되리라.
그러면 그 작은 벌레들도 나의 살을 먹고 몸집을 키우겠지.
어쩌면 사람들은 그 작은 벌레들을 자신의 뱃속에 키우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오,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대가 된다. 이 모든 변태(變態)와 포식의 결말이.
Posted by Lim_
:
자유, 고독, 멸망 등 모든 폭발적 기쁨의 단면


새벽에는 아직도 춥다
반팔을 입으면 썰렁하고
물에 적신 천 같은 어둠이
팔께에 엉긴다
나는 회색 골목
주황빛 가로등
그늘진 밤하늘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까만 언덕
길목

발소리는 없다 단 하나도
없다
그늘이 내린 나무들
잎사귀 나부끼는 소리조차 없다
그리고 거대한 등뼈 위에 비죽비죽 솟은
돌로 된 빈 껍질들
안개도 없는 광활한
숨결 속
캄캄한 소리
흐른다

나는 땅 끝까지 펼쳐진
반쯤 뜬 눈동자의 광막한 표면
나는 터질 것 같은 대기(大氣)
땅 속에서 썩는 매미 유충
멈춘 심장이
웃음

바스락
갑자기 들 고양이 한 마리가 눈앞을 가로지른다
아하, 나는 산산조각 난다.
Posted by Lim_
:

개새끼에 대한 노래

글/시 2012. 6. 11. 00:22 |
개새끼에 대한 노래


충성스런 개여 너는 아름답다
깊은 바다의 색깔처럼
네 충성심은 변하는 법이 없다
주인의 매타작에도
공포가 파도처럼 울렁이는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한 점 변함없는 충성이
손바닥에 때려 넣은 정(釘)처럼
깊숙이 박혀있도다
너 개야, 인간을 아느냐?
그 변화무쌍한 심성과 무한에 대한
본성적인 배반을!
그들은 마침내 너를 솥에 넣고 삶을 것이다
그래도 네 까만 눈동자의 영원 같은 충성은
빛바래지 않겠지
돈 칠천 원을 내고 네 고기를 씹는
내 탐식이
나를 또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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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술친구

글/시 2012. 6. 9. 21:59 |
슬픈 술친구


전날 내가 그렇게
사막에 사는 개처럼 술을 마신 건
아직은 나랑 같이 술 마셔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뻐서 그랬겠지
물론 그것이 기뻐서 그렇게
술 깨면 죽을 놈처럼 그렇게
악착같이 마셨겠지 그런데
언젠가 나는 그들을 모르게 되겠지
떨어지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틀림없는 필연으로 인하여.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술을 잘 마셔야겠다.
Posted by Lim_
:

도시의 미

글/시 2012. 6. 2. 19:04 |
도시의 미


강물이 진흙과 노란 봄빛을 품고
콸콸콸 흐른다. 살아있는 거인의 힘줄처럼.
하늘은 구름의 폐허.
모래톱에는 풀 한 포기 없는데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다리 위에만
보랏빛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뱀의 혓바닥처럼 새빨갛고
대리석 위에 떨어진 검은 핏방울처럼
우리를 취하게 하는 그것은 자신의 꿀이
넘쳐흐르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오, 더럽구나! 더럽구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들처럼 음탕한 얼굴로
들끓는 회충마냥 드글드글 모여
게으름과 위선의 토양 위에서 사람의 손으로
피어난 그것들.

나는 찡그린 채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나의 가슴에는
분노가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확확 숨을 뿜었다.
태양은 실종 되었고
다 닳은 천처럼 무딘 바람은 내 가슴도
식혀주지 못했다.

만개한 꽃보다는 시들어가는 꽃이 더
아름답고
그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활짝 피었을 때 벌레 먹힌
꽃이다.
Posted by Lim_
:
우리 모두의 형제들에 대한 시


 범죄자의 영혼을 품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법이 탄생하기도 전부터 그들은 범죄자였다. 그런 숙명을 지고 났다. 그들은 나의 형제들이다. 심판관이 의사봉을 두드리기도 전부터 철창에 갇혀버린 그들. 길거리에서 웃고 떠드는 절망에 등 돌린 여자들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오르며 웃음 짓는 그들. 어리고 약한 소년 소녀들을 위해 울며 또 그 어린 것들의 심장을 도려내 먹어치워야만 살 수 있는 그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형제였고 그들은 또 나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아 그러나, 나는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는지? 나는 오랜 타락과 방탕으로 뼈가 삭아버렸고 덕분에 제대로 서지 못한다. 나는 무너진 다리로 주저앉아 계속해서 지독한 독을 꿀꺽꿀꺽 삼킨다. 그런데 그 범죄자의 영혼들이(형제여!) 나의 퇴폐를, 나의 저주받은 정신에 손을 내민다. 위안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과 내가 <체온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들 감옥과 병원에 갇힌 이들. 아 그러나, 나는 우리들만을 위한 위로를 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감은 눈꺼풀들 사이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눈동자를, 악수하는 흰 장갑들 사이에서 날카롭고 예리한 주머니칼을, 진보하는 인류 사이에서 세계 밑바닥으로 추락하며 다리를 저는 늑대처럼 울부짖는 어떤 광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절개하여 열어보면 나를 꼭 닮은 얼굴이 히죽거리고 있다. 그것은 매우도 유쾌하다. 그리고 범죄적이다. 나는 희희낙락하여 지나가는 어떤 집쥐에게 물었다. 「너는 왜 썩고 오래된 것만을 먹고 사느냐?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막 잘라낸 개나 돼지의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그러자 그 쥐가 말하길 「우리는 충분히 오래된 것만을 먹어야한다. 그래야 탈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가 굳어서 더 이상 비린내가 나지 않을 때야 그것을 핥고 고기가 썩어서 더 이상 핏기로 번들거리지 않을 때야 그것을 씹는다. 왜냐하면 우리 집쥐들은 야만을 죄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코웃음 치면서 또한 내 갈비뼈를 모조리 맨손으로 뜯어낼 정도로 슬퍼했다. 어리고 약하고 우둔한 것들의 피 맛은 참으로 달다. 그리고 그것들이 고통에 겨워 외치는 울음소리는 우리들 영혼의 빈 부분을 만족스럽게 긁어주지 않았던가? 나는 그 개와 돼지들을 사랑하며, 또 멱을 딴다. 그러면 내 눈에 눈물이 고이지만 나는 그 혼돈의 짠맛을 기뻐했다. 이것이 우리 형제들의 공통된 심리이자 욕망이다. 다리를 절면서 남의 아킬레스건에 손톱과 이빨을 박아 넣는 불구자를 보았는가. 그 불구자는 우리 모두와 똑같은 검은 눈을 갖고 있었다.
 아 그래! 범죄자의 영혼을 품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형제들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하얀 쇠창살로 된 감옥 속에 갇혀서 호시탐탐 감옥 문이 열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들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가 흐른다. 우리들의 뼈에 달린 살은 탄탄하며 신선하다. 그리고 보라, 모두들 흥분에 겨워 웃고 있다.
Posted by Lim_
:

비누

글/시 2012. 5. 31. 23:36 |
비누


오늘 친구 집 비누가 나를 울렸다.
친구와는 술 마시고 기타치고
노래 부르면서
서로 웃는 낯으로 떠들썩거리다가
맥주와 기름에 번들거리는 얼굴 닦아내려
화장실 백열등 밑 세면대에서
세수하려고 비누를 문지르는데
그 냄새가 슬펐다.
그래서 나를 울게 했다.

비누든 향수든 심지어는
담배 냄새마저도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슬프다, 더럽게
슬프다.

언젠가 미래에
지금 쓰는 비누 냄새를 슬퍼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슬퍼지고
또 눈물이 쏟아져서
얼굴에 비누거품 잔뜩 묻힌 채로
우는 소리 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
수돗물 흐르는 소리 요란하게 해놓고
아무도 몰래
울었다.
Posted by Lim_
:

적도의 여인

글/시 2012. 5. 24. 22:54 |
적도의 여인


해와 달이 서로 닮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을 적에
봄의 악마가
내 눈꺼풀 사이에
한 장의 그림을 심어두고 갔다

나는 미지근한 독액 웅덩이 속에 죄수의 몸을 담그고
쥐약을 먹은 들개처럼
비몽사몽 하여
그림에 온 정신을 빠트리고 있었다

아, 나는 적도의 여인을 보았네!
나는 곱디고운 모래를 온통 적신 그녀의
붉은 피도 보았고
꿈같은 태양의 조각이 땀으로 방울져 흐르는
그녀의 갈색 피부도 보았네

그리고 강철 같은 빛이 번뜩였다

적도의 여인이여, 그대 악마의 벌건 혓바닥이자
소금과 돌로 깎아낸 성(城)이자
내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죽여 버리는
황홀한 비수(匕首)여

나는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그녀를 증오했다
그러나 나의 하얗고 덩어리진 몸은
사랑해마지않는 적도의 여인에게
살해당하고 싶어
개처럼 헐떡이고
생쥐처럼 울었다

징을세게후려친것처럼농밀하고멀리퍼지는어떤소리가사방을가득메웠다

내 눈동자는 소리를 질렀지
꿈 없는 잠이 하늘을 뒤덮고
안식 없는 죽음이 내 가슴을 물들였지
나는 잘린 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끓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내게서 그림을 빼앗아간 뒤였다.
Posted by Lim_
:

찬가(讚歌)

글/시 2012. 4. 24. 22:24 |
찬가(讚歌)


나는 숲을 보았다.
그것은 물방울과, 찬 공기와
취한 눈동자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숲은 낮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밤이 되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흐릿하고
연기로 만들어진 나뭇잎들 때문에
하늘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뻐서 웃었고
내 가슴은 꿀이 넘쳐흐르는
지옥 같았다.

가끔 오한이 일었다.
선원을 잃은 선박처럼
내 발은 숲속을 마구 거닐었다.
대기가 내 눈에 술을 들이부었고
미광(微光)이 길을 잃고 산산조각 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 어스름한 시간에
마귀들이 기쁨을 전파했고
모든 것이 그림자 뒤에
숨어있었다!
Posted by Lim_
:

다락 생활

글/시 2012. 4. 15. 07:58 |
다락 생활


예전에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고
내게는 위장이 없었다. 나는 먹은 것을 전부
입으로 토했는데 그것은 바로 잉크와 흑연이었다.

나는 구역질을 하면서 옆으로, 뒤로 걸었고
겨울에만 나는 과실의 즙이
내 눈물샘에서 흘렀다. 그러면 나는
곰팡이들의 안락한 집락colony 속으로 기어들어가
세 겹의 눈꺼풀을 감고 잤다.

가끔, 환상이 사라지면 나는 굴러 떨어져,
썩을 정도로 익은 주홍색 빛 속에서
보석조각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것은 없었다.
대신 나는 투명한 웃음과, 암적색 파도와,
그리고 광기로 조각된 얼굴을 만났다.

다시 돌아오면 나는 멍해져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떨었다. 이따금 죽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는 생살의 맛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체의 살점만을 먹고 사는
심해어처럼.

썰물시간이 되면 환한 천둥이 쳤다.
그러면 나는 머리를 감싸고 도망쳤다.
갑각류들, 노래하는 쥐들, 구분하기 힘든 색깔들 속으로.
나는 곰팡이였다. 증식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실종. ……그랬노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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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굶주림과 봄빛

글/시 2012. 4. 11. 21:58 |
나의 굶주림과 봄빛


봄의 어느 조용한 정오에,
나는 한 손에 시집을 들고 거리를 거니네.
내 붉은 구두는 전날 내린 비에 얼룩졌고,
차분한 햇볕이 내 피부를 쓰다듬는다.

그런데 나의 빈 한 손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네.
오, 정신의 육체성이여!
호주머니에는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닢.
그래도 나는 봄날 태양 밑에서 계속 걷네.
드문드문 흥얼거리며.

한때 나는 겨울만을 사랑했었지.
그러나 빛이란 얼마나도 심원한가?
내 가슴속 호수는 굶주림도 집어삼키고
황금빛으로 번들거린다.
고요한 낮.

나는 몽상을 밟고 다녔지,
풀숲의 잔디밭인양.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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