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