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can be seen as the answer.
기록/생각 2010. 8. 30. 13:11 | 내 정신을 조금씩 침잠시키는 약물은 동시에 기억 밑바닥에 말없이 가라앉아있던 수치와 좌절까지 끄집어내버렸다. 나는 내가 추악한 인간인 것을 알고 있다. 참으로 그렇다. 손톱만한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나는 추악하며 또한 죄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추악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의 기준은 바로 내게 있다. 추악한 죄인인 내가 추악한 죄인인 나를 추악한 죄인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내 얼굴을 없애버리리라고 결심했다. 내 이름과 기억도 마치 타인의 것인 양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쌓아올려진 결과물이며,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오한다. 그런데 어째서 살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리 내가 나를 증오한다 한들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증오하는 내가 고통과 수치를 당해도 괴로워하는 것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복수란 도무지 완성될 수가 없다. 자기파멸로 향하는 가장 극단적인 길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배려와 이기가 은밀하게 숨어있는 것이다. 아아, 자살이란. 그것은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도피다. 자신을 위한 일이다. 자애심의 극단이다.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현상 그 자체인 인간의 마지막 긍정적 선택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불행은 중력과도 같아서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오래 살면 살수록 수치는 늘어나고 후회해야할 일도 많아진다. 좌절과 지독하게 왜곡된 분노를 자신의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넣으며 늙어가는 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한 고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것. 그런데 나는 어째서 살아가는가. 병적인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향정신성 약물이 담긴 캡슐들을 집어삼키면서. 끈질기고 수치스럽게. 매일같이 자기파괴와 자기살해의 환상을 보면서. 무엇이 나를 살게 하나. 타성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타성이야말로 죽음 이외의 모든 것에게서 승리한다. 타성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생명의 본능인 것이다. 그것에 순응하면 그 어떤 삶도 못견딜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타성이 싫다. 취향의 문제다. 취향의 문제. 내 개인의 전쟁은 내 살을 도려내고 내 뼈를 깎아내는 것으로 무언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승리하려하는 모순 가득한 정신병적 순환이다. 정신병.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 그러나 건강이란? 우리에게는, 아니, 나에게는 신이 없다. 나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율법조차 없다. 내게 있는 율법이란 당황하고 불신하면서 자신의 피부에 새겨넣은 의문형으로만 가득한 지향점들 뿐이다. 건강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명사다. 무엇이나 그렇다. 한가지 확실한 감정-취향은 내가 나 자신을 추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죽고 싶어하면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하나의 분명한 의견이 없다. 어쩌면 나는 자아조차 없다. 여러 권의 책들을 묶어놓고 그것들에게 하나의 공통된 입을 부여하면 나와 똑같은 모습의 가짜 인격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사죄하고 싶다. 그저 사죄하고 사죄받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사죄할 대상이란 이 세상, 아니 상상속에서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나를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증오당한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삶을 구성해온 모든 것들을 한계없는 감정으로 증오합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 삶을 구성할 모든 것들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증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어쩌면 사실 내 마음 속은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마를 길 없는 호의로 불어 넘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