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강간범과 피해자.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리라.
기록/생각 2010. 7. 27. 23:50 | 끊임없이 잠이 온다. 나는 거의 세시간 간격으로 잠이 들며 꿈을 꾸고 꿈을 꾸고 또 꿈을 꾼다. 괴상한 꿈들이다. 꿈 속에서 나는 지고한 존재로 변신하기도 하고 삶을 긍정하며 느긋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존재에 대한 충실감으로 가득한 채 행복의 표피 안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순간을 영원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꾸어본 적 없는 꿈들이며 내 유아적인 욕망이 허위없이 여실히 드러나는 꿈들이다. 항상 해왔던 말들이지만 나는 가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마침내 끝에 가서는 먼지처럼 아스러져 손에 쥐었던 것도 집어삼켰던 것도 전부 사라지게 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치를 갈망한다. 살아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혹은 가치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구분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은 복합적인 사실일 것이다. 그것도 결국에는 인간의식인만큼 모순되고 왜곡되었으며 동시에 그 모순과 왜곡으로 논리를 보완하고 있는 하나의 지저분하고 동물적인 사이클일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고 정신병자의 논리체계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하는 동물의 전부이자 본질인 것이다. 애당초 의식과 동물은 손을 잡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꿈. 꿈에 대해서 마저 이야기해야한다. 꿈은 의식과 추상만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동물의 냄새는 남을지언정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지는 않는다. 게다가 나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를 죽이려드는 음모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나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를 죽이려드는 음모임에 틀림이 없다. 계속해서 꿈을 꾸니 이제는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사물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한여름밤의 밀폐된 공기 안에 갇혀 울고 있다. 원망하는 눈길을 받으며. 원망하는 눈길을 받으며. 꿈 속에서 나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막을 헤맬 필요가 없다. 내 정신은 낙타의 혹처럼 기름지고 갈증을 내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몇 번이고 자살을 상상한다. 울면서 잠들어 울면서 깬다. 절망과 불안은 그런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욕망덩어리 세계를 거쳐 가차 없이 무겁고 치명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냥 내버려둬도 얼마든지 화려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의도들이 있다.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몸부림치며 경계조차 불분명한 현상 위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하나? 내 인생마저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의 어림짐작으로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추한 눈을 기억하라. 친절과 기대는 즉 나를 모델화하려는 추잡한 욕망의 증명이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엉망진창으로 터트려버리고 싶다. 속에 있는 내용물이 거짓 없이 전부 흘러나오도록. 병증과 병원과 약물과 치료와 상담과 불신과 관계와 정신. 정신병리학적이지 않은 정상적인 관계들. 정상적인 관계야말로 가장 비정상적이고 불안하다. 차갑고 축축하며 여지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정상적인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관계는 말그대로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절망스럽고 혼란하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이미 모든 것의 결말까지 추측하고 나태하게 늘어져있는, 좌절한 정신이 있다. 그것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좌절해있다. 그리고 믿을 것이라고는 그 지독히도 현실적인 회의밖에 없다. 꿈. 꿈! 욕망의 발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인가? 내가 병든 정신이라는 것이 도대체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폐쇄를 바란다. 어떤 논리나 관념이나 실재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정신병자의 믿음이, 아니다. 모른다. 무엇을 욕망해야하는지도 모른다. 보다 살고 싶지만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