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독적 정신

글/시 2014. 9. 15. 23:38 |
매독적 정신


오늘은 지하철 타고 집에 가다가 광고판에
<청춘의 고민은 취업>이라고 쓰인 것을 보았다.

겨울도 아직이건만
왜 이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가슴에 서리가 끼었나
얼마나 추우면 혈액이 얼음과자처럼
살얼음 섞인 채로 혈관 속을 돌기에
벌써부터 청춘의 고민이 취업 밖에 없나.

내가 편두통 달고 사는 머리로
장시간 고뇌한 결과 청춘의 고민이 상대해야할 것은
마땅히 매독이다. 청춘의 고민은 매독이어야만 한다.
모든 세대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청춘들의 고민은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누워있던 이불에서 일어날 때
여전이 술병 앓는 영혼이 조곤거리는
높고 쓰라리고 고독한 죄악감이어야만 한다.

양심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말인즉슨
곧 양심을 뿌리 채 뽑아 버려버릴
악(惡)의 詩를 찬미할 청춘들이
많으리라는 것이니까.
매독을 고뇌하고 매독을 사랑하여서
매독의 사랑을 노래하고 매독의 아픔을 이로 씹고
모차르트처럼 발광하여 죽어갈 이들의 눈빛이
내 눈에 속속히 보인다.

마땅히 죽어야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앞으로! 니체를 읽은 순진한 대학생이
겁 모르는 전사가 되어 죄 없는 적군의 심장을
총칼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찌를 때
니체마저 그림자가 되는 그 순간을 넘어, 앞으로!
우리는 추락할 것이다. 추락하며
만개하고 휘날리는 꽃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추락하며 활짝 필 것이다.

반항이라는 말을 쉬이 입에 담지 말라.
내가 벌였던 피와 폭력의 반항들마저도
이미 오래 전에 썩어 한 권의 책이 된 작가들의
어리숙한 흉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고로 피와 폭력은 반항의 껍질만을 깨는
삶 전체의 시동(始動)이었던 것이다.
정신의 눈동자를 슬며시 열리게 하는
젊은 날의 나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항상
정신의 무게를 현실로 만들어낼
정신의 피와 정신의 폭력을 찾고 있다.
그것은 새벽 중 자주 울리는 영혼의 비명소리와 흡사한 것 같다.

뇌수가 병으로 앓는 일에 전념하여야 한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의 늑골을
치아로 긁어대다가
신문으로 가려놓은 창문에 저주 같은 햇빛이
새어들어 올 때,
모든 것이 또 시작 된다는 세계적 강압에 마주할 때
네 영혼이 비명횡사하려고 할 때
젊은이는 마땅히 매독을
고민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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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일기

글/시 2014. 9. 14. 14:41 |
폐인일기


잠도 못 자는 새벽이라서 나는 시를 써야겠다.
잠을 자려면 못 자는 것도 아니다만은
내 일이라는 것이 새벽에 깨있는 대신
한 달 술값을 받는 일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편두통이 뇌수 옆구리를 펜촉으로다가
푹푹 찔러대는 와중에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를
네 잔 하고도 한 잔을 더 마셨으니
누가 자라고 해도 못 잘 것은 아마도 뻔하다
그것은 죄 내 탓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벌어진 모든 악운들이 다 내 탓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출근하는 날 깨자마자 머리는
누가 망치로 후두려까는 듯이 아프고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나오고 일어서면
어지럽고 누워있으면 연기 섞인 기침이 나오고
그것은 내가 어제
오늘 출근해야하는 줄 알면서도
내가 술 마시자고 전화하면 만사 다 제끼고
찾아오는 앤드류 브레들리…… 시바 걔 성이 뭐더라,
아무튼 풀 네임이 기억 안 나는 알코올 중독 양키 친구랑
둘이서 소주잔 기울이다가
<나 안 취했어 시바야>라는 대사를 영어로 궁구하다가
마침내는 겁나 시끄러운 바에 가서
럼주까지 마셔댄 탓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는 다음 날 아침부터 나갈 일이 있어
새벽 두 시 전에는 잠들어야 하는데
작심하고 글 좀 써보겠다고 편의점에 가서
한 캔에 커피 일곱 잔의 카페인에 필적하는
에너지 음료(이거 두 캔만 마시면 멀쩡하던 사람도 정신분열증 환자가 된다. 퍽도 편리하다.)를 사다가 마시고 카페인의 가호 하에
시 한 편 완성하고 뿌듯해하며 자리에 누웠는데
아침 여섯 시까지 잠을 못 자서, 폐인 꼴로 외출하여
정작 중요한 일로 만난 사람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것도
생각해보면 죄다 내 탓인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병신이다.
병신! 생각해보면 나는 내 친구들을 수도 없이
그들을 병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딱히 부정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것은 그들이 내 동료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병신이며
서로를 병신이라고 불러대는데 가끔 술 들어간 채로
<이 중에 누가 가장 병신인가>를 투표하면
백이면 백 내가 당선된다. 압도적이다.
말하자면 나와 내 친구들이 모이면 모두가 병신인 가운데
나 홀로 병신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고
어른이 되지 못해, 팅커벨이 바닷물에 잠수하다가 익사해서
요정의 가루가 없어 하늘을 날기는커녕
흙탕물에서 빌빌거리는, 한 보름 정도 면도 못 한
피터팬인 와중에 내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간다. 그 놈들은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방법을 몰래몰래 찾아다니고 있고
언제까지고 절름발이로 사는 것은 원하지 않는 듯싶다. 쓰벌.
위에서 언급한 앤드류 뭐시기 같은 경우에는 이미 어른이다
당장이라도 재활센터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상태 후진 놈이
영어 교사하면서 돈은 존나게 잘 번다. 아마 조만간
결혼도 할 듯싶다. 자기 술값뿐만 아니라
애인 술값까지 벌게 되면 드디어 어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인들에게 술을 사주기는커녕
오히려 얻어먹고 삥 뜯고 다녔으니
안치환의 <위하여> 틀어놓고 방구석에서
빌린 돈으로 산 소주 혼자 들이키며
푸른곰팡이를 벗 삼아 취중진담 하고 앉았으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것은
어머니 자궁 박차고 나올 때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안치환 씨.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빌빌댄다.
술값 벌려고 새벽에 잠 안자고 깨어있는 지금도
나는 좆나 빌빌댄다. 사방이 시꺼먼 철로 밑을
담뱃불만 쳐다보고 휘청휘청 걸어 다니는데
들리는 풍문으로는 조만간 담뱃값이 오른다고 한다.
이천 원이나 올려서 한 갑에 사천오백 원으로 만들어
폐암과 병과 죽음과 고독과 절망과 자학과 가난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모가지를 졸라댈
예정이라고 한다. 씨부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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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

글/시 2014. 9. 8. 09:37 |
여기는 서울


오늘은 퇴근도 일찍 했건만
왜 이리 발치에는 울증이
푹푹 쌓이고 아침에 퇴근하는 내 몸은
비몽사몽하여 피곤마저 초월하여
지상을 걷는 것인지 구름 위를 거꾸로
걷는 것인지 어깨 위에서 덜렁거리는 내 머리는
아무리 어깨를 꼿꼿이 펴고 있어도
바닥도 없는 늪에 천천히 잠겨가는 기분이다
사실은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귀와 코와
입으로 태초부터 썩어온
시간이라는 뻘이 기어들어오고 있다.

백석 시인은 가난하여도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를 기다리면 나타샤가 안 올 리 없었다는데
가난한 나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날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것은 일체
기대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소주잔에 눈물 빠트리고
술 퍼먹다가 우는 것이 쪽팔려서 소주를 얼굴에 부어대고
그리하여 만취한 내가 거리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려니 지갑에는 천 원 짜리 한 장 없고
사실 천 원이 아니라 만 원이 있어도 내 가난뱅이 근성으로는
절대 저 주황색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백석 시인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 타고 갈 때
나는 흔들리는 지하철을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잡아타고
뻔히 아는 사실로는 지하철은 절대 응앙응앙 우는 법이 없다.

오늘은 퇴근도 일찍 했건만
아침 댓바람부터 혜화동 구석진 곳에 문 열고 있는 술집
Bar 우드스탁의 존 레논 닮은 사장님한테 맡겨둔 글랜피딕 십오 년짜리만
자꾸 생각나고 지금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눈앞이 부예 만물이 다 두어 개 씩으로 나뉘어 보이고
줄담배로 썩어가는 내 허파는 야 인마 힘을 내라
조금만 더 피우면 이제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다, 하고
미필적 고의로 내 폐암을 앙망하는 것이다
지랄, 폐암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한다만
암이 영어로 캔설이라는 것은 알고
한자로 내 이름이 폐인이라는 것은 안다.
고로 나는 잠 때문에 만취한 상태로
휘청휘청 담배 피우고서 자러 갈 것이다. 이 아침 댓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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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사 중(壞死 中)

글/시 2014. 9. 6. 01:42 |
괴사 중(壞死 中)


세존께서 오시려면 수십만 년도 더 남았단다.
나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썩은 몸뚱이로는
도무지 그분을 맞이할 수가 없는 탓이다.
앙굴리말라는 차라리 미치기라도 하였지, 미친다는 것은
죄의식도 자문도 버리고 광란한다는 것으로
오히려 수행길 들려면 어떻게든 미쳐야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신병원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온갖 병자들의 온갖 병증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그리하여 진료실 문 열고 들어갈 때쯤이면
어엿한 미치광이가 될 수 있는 편리한 시대다.

아흔아홉 개의 손가락만 모으면 세존께서
내 앞에 오시지 않을까 싶어 밤새 술 마시며
칼인지 펜인지를 숫돌에 존나게 갈았다.
이빨 사이에 욕지거리 물고 갈았다.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수십 번이나 피맛을 보았다.
내 좁디좁은 가슴에서 심장이 발악하며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마다 나는 출구나마 만들어보려고
복장뼈를 부수고 늑골을 여는 방법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칼날인지 펜촉인지는 주로 살점만을 뚝뚝 열어제끼고
핏줄기 묻은 채로 방치되었다. 그래서 시방 내가 갈고 있는
이 칼인지 펜인지도 남의 손가락을 절단하기는커녕
아, 쓰바, 석가세존 만나도 할 말이 없으니
불문학으로 꽉꽉 들어찬 책장에 끼워 넣고
나는 잠이나 잘 듯 싶다.
한여름에 동면이나 할 듯싶다.

한여름인데도 내 난도질당한 영혼은 간질 환자처럼 발광이다.
춥고 시려서 돌아가시겠으니 당장이라도 악업 쌓고
지옥 유황불꽃에 따뜻해지자고 발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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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집에서

글/시 2014. 9. 3. 16:59 |
구부러진 집에서


내가 사는 집은 구부러진 집이다
정신이 멀쩡할 때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눈동자가 돌아버렸을 때에만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집이 가진 경계선과 면적들이 멀쩡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릴 때에도
남들이 하듯이 똑바로 찔러넣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위치에 꽂아야만 문이 열린다.

이 집은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소시민들이 쓰는 보통 가구로는 채워 넣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밖으로 나가
다 썩어가는 나무 등걸과
한번 쓰였다가 버려진 못들을 주워 모아
텁텁한 냄새가 나는, 이미 만들어질 때부터 망가진
그런 가구들을 만들어 집에 채워 넣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햇빛은
구부러진 창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거울에 비치는 달빛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절대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아침이라는 것은
죽은 태양의 허묘(墟墓)다.
이곳에서는 그림자 진 사물들만이 진실이 된다.
망가진 책장에 꽂힌 책들은 펼쳐보면
문자가 아니라 죽은 시인들의 발광이 소리가 되어
내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서 독서는 늘 광란이다.

나는 아직도 방문을 나설 때마다
어깨나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친다 사방이 변색된 핏자국이다
언젠가 내 몸속의 피가 전부 이 구부러진 집에 바쳐질 때
나는 이 집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다른 집에서는 살 수가 없는 탓이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는 왜 여기에 사나요.
나는 창문을 열고 말한다. 너희 어머니가 이 집 주변에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맞아요. 이 집에는 구부러진 인간이 산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마을 목사님께서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라고 했어요.
내가 묻는다. 마귀가 뭔데?
사람을 나쁜 길로 홀리는 괴물이요.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 아니야. 만약 마귀가 보고 싶다면
마을 중앙에 계신 판사님을 찾아가 보거라.
아이들이 말한다. 거기엔 저번 주에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걸려있어서
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한다. 누가 교수 당했다고?
몇 명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이었어요. 그들은 죄를 지었대요.
그들도 구부러진 집에서 살았다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구나. 그리고 난 창문을
닫았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야!>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리가 두 개 밖에 없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눈이 붉은 쥐들이 내 음식을 모두 가져가버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

그런데 도대체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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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깝고 먼 여인

글/시 2014. 9. 2. 12:12 |
가장 가깝고 먼 여인


그녀는 내게 번역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녀는 늘 내게 술을 마실 때는 안주도 함께 먹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제발 진통제를 몰아서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담배를 그만 끊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하루에 두 끼 이상은 식사를 하라고 애원하였다
그녀는 내게 약은 정시에 정량을 맞춰 먹으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내게 신문에 칼럼이라도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게 새벽에 정처 없이 몇 시간이고 혼자 걷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언제까지 아파할 것이냐고 다그쳤다
그녀는 내게 토할 때까지 술 마시는 것은 그만두라고 외쳤다
그녀는 내게 시인 같은 것은 그만 둘 수 없느냐고 물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지요? 나는
그녀가 더 이상 그녀가 아니게 된 뒤에도
곰팡이 핀 나의 소굴에 홀로 웅크리고 있을 때면 여전히
그녀의 잔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눈물도 기억한다
그 원망이 방울져 흐르는 모습을
빠르고 날카로운 눈물이 그녀의 볼을 베는 모습을
내가 욕설과 함께 던진 유리잔이 사금파리가 되어
그녀 발바닥에 박혀 송골송골 피가 맺히는 장면을

아픔을 그만 두는 방법은 뭘까? 그런 것은 모른다
그녀가 울 때마다 내 심장에도 쩍쩍 금이 갔다 그러나
내 심장은 그녀의 눈물샘과 달라서 피는커녕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 심장에 그어진 금에서는
그저 가솔린 냄새만 풍겨댔다 에틴알코올이 섞인

이맘때면 나는 대체로 나의 곰팡이 핀 소굴에서
옆으로 누워 태양이 떨어지는 시기만 셈해보고 있다 그리고
거리에 미광 흐르는 어둠이 깔리면 나는 밖으로 나간다
오늘도 나는 마신 술을 나무 둥치에 죄다 토해놓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녀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데 오로지 그
잔소리하던 서글픈 목소리만 기억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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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시인의 노래

글/시 2014. 9. 1. 01:18 |
삼류 시인의 노래


1.
내 연애 이야기를 듣는다면 당신은 웃을 것이오.
요즘엔 삼류 드라마 작가들도 그런 이야기는 쓰지 않소.
즉 내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강렬했다고
보석보다 아름다웠다고 시원찮은 말을 흘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삼류도 못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소.
바텐더는 내가 사랑 때문에 울었다고 할 테지만
나는 내가 술 때문에 울었다고 해야 할 것 같소.
사랑 때문에 우는 것은 삼류요.
사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조차도 삼류요.
고로 내가 그 호박빛 럼주의
빨간 라벨을 보고 울었다고 해야
시인으로서의 위신이 서는 것 아니겠소.
바야흐로 인간의 감성이라는 것이
송두리째 싸구려가 되어버린 시대요.
보들레르도 이제는 숨을 쉴 수가 없소.
니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들에게
멍석말이를 당할 듯싶소.
그러나 기왕 삼류도 못 되는 연애를 했으니
적어도 삼류는 되는 이야기를 좀 해야겠소.

2.
나는 배낭 가득 책 짊어지고
얼어붙은 잎사귀들 굴러다니는 거리 위에서 헤맨다
헤매었다고 한다. 하늘은 보랏빛으로 두근거리고
내 심장에는 피가 아닌 이상한 것이 펌프질 당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안과 고독과 유황지옥 같은 불길과
내가 죽어가는 소리의 하모니다. 그것은 새까만 석유처럼
휘발성의 지독한 냄새가 난다.

그까짓 책들 다 불질러버리라는 스님 말씀도 무시하고
나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걸었다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겨울
아래서. 그 겨울 하늘 아래서
결국 내 어깨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발은 썩어가고 있었다 동상과
극심한 화상 때문에.
나는 글 쓰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너무 오래된 기대 때문에.

가장 무거운 것은 키에르 케고르였다. 그 다음은
사드였다. 그 다음은 니체였다. 그 다음은 프레이저였다.
누군가가 얼른 책들을 버리고 불을 붙이라고 외쳐댔다
그 누군가는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책 속에서 만난 인물인지라 나는 실소했다.
나는 얼어붙은 땅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의 상체는 간신히 무릎에 의지하여
북쪽을 향한 채 일어서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려야했다.
무언가를 기다려야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라고 부를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부르는
그런 색깔의 것이었다.

나는 근처의 절로 기어들어갔다. 왜냐하면 절에는
문지기가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가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육체는 이미 모두가 혐오하는
죄악으로 물들고 방탕에 썩어가는 것 같은
그런 꼴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마당에서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법당에서 스님 한 분이 나오셨다. 나는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담배 있으십니까?」
스님은 내게 담배 한 개비를 주셨다. 나는 라이터도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라이터도 주셨다. 나는 배낭을 매고 바닥에 늘어진 채
도대체 몇 백 년 만인지 모를 담배를 달게 피웠다.
나는 니코틴과 일산화탄소 때문에 눈동자가 돌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여래께서 오실까요?」
스님께서는 내 어리석음 때문에 웃으셨다.

3.
별은 호수에서 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내 눈앞에 호수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때 하늘엔 밤이 찾아왔기에 밤인데도 불구하고 내 가슴은 빛을 품고 사방을 경계하며 울려댔기에 나는 그 밤을 기억한다 어둠 속에 뜬 연꽃잎과 건조한 나무 냄새와 내일이면 다시 태양이 뜨리라는 것을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쁘게 발음했던 것 따위를 기억한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나는 한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랬다 한참 오래전에 그는 나에게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었다 나는 그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 따위는 모조리 증오한다고 대답했었다 그는 그 대답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까만 눈빛이 그것은 결여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느꼈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기에는 너무 뜨거운 날씨였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에게 드디어 찾아냈노라고 말했다 나는 풀숲을 뛰어다녔고 산속을 활보했다 태양이 뒤집어진 것 같았다 달이 거꾸로 뜬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시베리아에서 오는 모든 차갑고 시린 것들을 사랑하리라고 공중에 외치고 외쳤다 자꾸만 외쳤다 그때가 여름이었던가? 아니면 겨울이었던가? 그렇다 계절마저 엉망진창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뿐이었다 남은 것은 감각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희극은 비극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희극도 비극도 아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극으로 혹은 절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블랙코미디로 돌아간다 아하 지금 내 머릿속에는 웃음만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광소만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할 수 없는 그리고 기억하려고 하기는커녕 절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단골술집에서 보았던 바카디151의 빨간 라벨 때문에 그 빨간 라벨에 울었던 것 때문에 울면서 웃었고 웃으면서 울었고 어떻게 해도 내 감정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아 뱃속에 럼주만 끝없이 채워 넣었던 그 새까만 기억 때문에 나는 만개하는 꽃이었다가 시들어가는 봉오리였다.
Posted by Lim_
:

진담

글/시 2014. 8. 27. 19:00 |
진담


좆나게 취한다고 해서 친구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술집 닫을 새벽 무렵 비틀거리며 어둔 밤거리를 걸을 때 내 심장은 어찌나 발광을 하였는지 발광하여 혈액 대신 알코올이 도는 혈관에는 어찌나 쓰라린 고독이 돌았는지 눈물로 된 나뭇잎을 하늘거리는 나무 밑에서 나는 나무뿌리에 몇 번이고 새빨간 토사물을 뱉었습니다 럼주는 분명히 사탕수수로 만든다는데 왜 이렇게 지독하여 마치 독액과 같은지 의문하면서도 나는 밑 빠진 독처럼 그 독액을 위장에 쏟아 넣고 쏟아 넣고 쏟아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술기운에 달아오른 고독이 온갖 가시와 칼들로 무장한 채 몸속에서 일어나 난도질하는 때에 나는 왜 내 옆에 친구 하나 없는지 이미 말도 듣지 않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통화버튼을 눌렀으나 이 어두운 밤에 해가 뜨기 직전의 새까만, 하늘에 장막을 친 것 같은 밤에 깨어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목소리, 목소리 부디 내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알려줄 목소리 한 줌만 주시오 나는 중얼거리면서 내 온몸의 땀구멍에서 알코올의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헛구역질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네 어머니도 널 낳기 전에는 술꾼이었어 아하, 그렇다면 내가 어머니의 자궁을 차고 나올 때 어머니의 술에 대한 갈망도 전부 가지고 나온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제 맥주 한 잔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버리는 것에 반하여 나는 일주일에 한번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내 인생 전부를 분쇄기로 철저히 갈아 음식물쓰레기수거함에 처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껏 술에 취한 뒤에는 내 인생 대신 나 자신을 분쇄기에 집어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소주가 좋지요 그리고 시인이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돈 만지는 법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 일터에서 쫓겨날 때가 되지 않았기에 가끔은 럼주 같은 사치도 부리고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호프집에서 2차로다가 맥주를 마시며 혼자 앉아 마시며 누군가의 시집을 읽는 것입니다 모두가 커피숍에 가서 멋 부리며 다리 꼬고 에스프레소 잔 옆에 시집을 덮어놓을 때 나는 맥주병 주둥이와 담배를 번갈아 입으로 가져가며 점점 흐려지는 눈으로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 정신을 잃고 시를 썼던 누군가의 시집을 읽는 것입니다.
내가 단골로 있는 바의 사장님은 내 지저분한 장발도 좋아하고 핏기 올라 번쩍이는 내 눈동자도 좋아하며 더러는 내 시를 좋아하기도 하기에 술에 취하면 나도 그에게 시 한 장 써서 건네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란색 포스트잇에 자신의 심장을 꺼내먹어 심장과 위장이 가까워지게 해야만 한다고 써갈겨서 건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손님이요 그는 사장인 가운데 내가 술푸며 슬픈 얘기를 조롱하듯이 하면 그는 또 웃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퍽도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양주 서너 병을 한큐에 삼키고 급성알코올중독으로 쓰러졌던 신해철이처럼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신해철이는 죽지 않았지요 그는 머리를 깎고 일어섰지요― 하지만 내 지랄 같은 봉급으로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면 거리는 한산합니다 어둡고 한산하여 고적할 뿐입니다 나는 또 비틀비틀 비틀거리며 순경이 순찰하기도 포기한 더러운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가고 집으로 가는 길만은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아무리 취해도 아무리 정신이 나가도 내 둥지만은 기억합니다 아무리 돌아가고 싶지 않아도 그대로 달에게로 날아가 달을 배고 눕고 싶어도 내 슬픈 몸은 집에 가는 길만은 기억합니다 그러나 걷는 길이 너무도 고적하고 내 영혼은 또 달아올라 오밤중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내 휴대전화에는 절대로 전화 한 통 걸려오는 법이 없고 나는 울면서 전봇대 둥치를 끌어안고 오바이트를 쏟고 쏟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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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글/시 2014. 8. 26. 20:38 |
손님


흔치 않게, 아직 살아있는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읽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어쩐지 그 시집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미리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불쾌한 손님이 찾아왔다.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찾아온 그 손님은
내 손에 들려있는 시집을 먹어 치워버렸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새까맣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내 심장에서 상당량의 혈액을 빨아마셨다.
그의 입이 내 심장에 닿을 때
살아있는 것에 진력이 났다 그래서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었다 세상을 버리고
버리고 죄다 버리고 그저
영원히 새벽인 거리에서 그저 걷고
그저 어둠을 향해 혼잣말을 지껄이던
말하건대 내가 혼자뿐인 나라의
이단의 왕이라도 된 듯 도취하여
지독히 도취하여 달에게
히틀러의 <R> 발음을 도용하여 연설하던
그 때처럼 버리고 떠나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불쾌한 손님의 눈동자는
새까매서 내 달마저 먹어치우겠다고
폭언하는 듯하였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분노 비슷한 것이 맴돌았다 내 핏발 선 눈동자 속에서
나는 달빛 비추는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나는 불쾌한 손님의 여린 목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사방이 피였다.
닭고기가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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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의 이름

글/시 2014. 8. 17. 23:44 |

난민의 이름


내가 얼마 되지 않는 내 봉급에도 마음 주는 일 없이
깜깜한 창밖만 내다보며
종이를 앞에 두고 게으름에 뒹구는데도
형광등은 오로지 낮이라고 빛난다 그것은
버러지의 시체들로 그림자놀이를 하며
창백하게 내 눈동자를 깨우며 흔드는 것이다

오히려 내 눈동자는 피로해 눈앞이 벌겋고
다음 달에도 봉급은 많을 일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 소관도 아니며 나는 그저 버리고
가끔 전철에 몸을 싣을 때 보면 반드시 눈 보이지 않고
다리 성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렁질 바가지 들고 있을 때
나는 주머니를 뒤지며
내 봉급을 꺼내는 것이다 그저 그 짤그랑 소리 들으려고

날씨는 미쳐 벌써 긴팔을 입지 않으면
차라리 소주를 마셔 혈관을 데워야 하고
전철에 탔을 때 내 옆에 앉은 동무는
하모니카 불며 구걸하는 저 장님이 돈푼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누구에 대한 것인지 모를 노기 섞인 목소리로
그러는 것이다 돈푼 받을 자격이느냐고

모른다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오히려 이유가 있노라면 돈 많고 부자인
그런 사람들을 내가 만날 일이 없는 까닭이고
나는 소주 한 병과 담배만 있으면
밥이 없고 옷이 없어도 서글퍼본 적이 없는 까닭이고
가난이라는 것이 이미 내 심장에 쐐기를 박아
가난이 싫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하모니카 불었던 것을 기억하고
또 늙으신 할아버지는 딱 저 절름발이 걸음으로 걸었던 것을 기억하고
목을 못 가눠서 슬픈 저 바보는 우리 어머니 동생과
똑 닮은 눈을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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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였다


어둠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면서 네온불빛 위에 쌓이는 밤 시간에 나는 시상이 내 영혼 위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러우면서도 익숙한 일이라서 나는 혈기도 없는 형광등 불빛 밑에서 담배를 피웠다. 바깥에서는 황달에 걸린 것 같은 가로등 빛이 깜빡거렸다.
그러나 나는 시를 쓰지 아니하였다. 차라리 나는 시상이 무슨 색깔을 하고 있는지에 골몰하였다. 매일 내가 삼키는 십 수 개의 알약들을 오늘 아침 나는 잊어버린 것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광증이 내 뇌수 속에서 분열의 소리를 외치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알아차렸다는 표현은 정당하지 아니하다. 약물이 늘 내 광증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곧 나는 현대의학으로 규정지어진 나의 광증에게 네가 시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붓다의 어떤 가르침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광증에게 질문할 수는 있어도 광증이 답을 주지는 아니하리라고 말이다. 그래서 광증인지 시상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말하기를: 나는 그저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죽도록 그리웠다.
사락사락 쌓이는 어둠 속에 도시의 눈물인 듯 습기의 냄새가 났다. 나는 담배를 태우고 또 담배를 태우면서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자살을 하느냐고 자문했다. 도시에 사는 영혼들은 네 심장박동을 따라 유감이 핏줄 속을 돌아다닐 때 어떤 면도칼 사이에서 세상을 버리는 방법을 찾아내느냐고.
광증아, 내 광증아 너는 언젠가 내가 타고 갈 비루한 황소 한 마리를 데려오리라. 그러면 나는 양발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황소 위에 올라탈 것이다. 그러면 그 비루한 황소는 위로하는 듯 조롱하는 듯 울면서 계곡을 건너고 강을 건널 것이다. 나는 안녕이라고도 하지 않고, 천천히 썩어가는 세상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나는 시베리아의 여인을 처절하게 사랑했었고 계절은 겨울에서 정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산골을 떠나서 내 광증을 낳은 어머니의 피폐한 젖가슴 속으로 돌아왔다. 벽을 보고 걸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이 깨달음처럼 내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하여 나는 이 벽이 미로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또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내 폐를 가득 채우고 내 가슴을 껴안았다. 불빛은 불행하여 아름다웠다. 비극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밤하늘에서 서로 부딪히며 떠돌았다. 나는 길 가는 행인들의 정수리를 쪼았고 그들은 핏방울마저도 체념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러 가리라고 다짐하였다. 나는 소주병을 나팔처럼 들고 노래하리라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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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골목에서

글/시 2014. 6. 28. 23:39 |
서울의 골목에서


주황색 긴 그림자
가끔 한없이 슬픈 실루엣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심해에 사는 어류의
눈동자 없는 얼굴을 본다면
필경 그러한 느낌이리라.

병든 마스크들, 그러나 거기에는 발악도
순응도 아닌 포기의 발자국이
검은 빛을 받아 선명히 보인다.

오, 인간이라는 서글픈 아이러니여!
아마도 당신은 찬미하지 않을
그 마지막 순간은
소리 없는 물결처럼 묵직하게
당신의 안으로 스며들어올 것이다.

당신의 흉터를 가려줄 안개조차 없는
이 기괴한 내륙에서
우리들은 분명 삭아 들어가고 있으리라
존재의 마지막 편린에 대해
사고의 귀퉁이로도 잡아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최후에 맞이하게 될 그 어머니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보아야만 하리라. 아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녀는
우리의 심장을 힘껏 움켜잡고 있다.
그러나 당신, 점점 퇴색되어가는
텅 빈 표정을 가진 당신……

원망의 아우성들을 듣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다만, 잠자는 괴물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 골목에서
우리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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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자들의 무덤을 밟아야만 한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산은
더욱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침묵한다.
나무와 풀잎들 사이사이로 어둠을 머금고
가끔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밤 짐승처럼
배를 깔고 누워 포식성의
고요를
마치 위협인양
취약한 인간의 영혼 앞에 펼쳐 보인다.

나의 동족들아, 같은 피를 마시고 자란
비대하고 결핍된 영혼의 조각들을 가진
같은 어머니 죽음의 치맛자락을 기억하는
동족들아, 너는 분명히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저 새까만 침묵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너의 마음 한편에는 이상한 분노가
말하자면 오히려 억울함 같은 것이 외친다.
「늙은 자연이여, 이 행성 위에서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향해 적개심 아닌 적개심을,
차라리 공포스러운 장엄함으로 우리의 영혼에
망치질을 하고야 마는가?」

그는 침묵한다! 우리는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우리가 그와 마주할 때마다 그는
어떤 때는 구부러진 손으로 어둠을 쥐고
어떤 때는 우리의 시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태고부터 변한 것이 없는 심원한 암흑을
파도소리에 섞어 보낼 뿐이다.

차가운 내륙지방에서 서리만을 먹으면서 자란 인간에게
새까만 밤바다에서 등대 하나에만 의지하여 <길>을 찾으라 한다면
그는 분명히, 차라리 단도를 하나 들어 자신의 목을
찌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치졸한 에고가
구름 낀 밤중의 산과
은밀하게 그르렁거리는 밤바다를 마주할 때
인간은 자신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진실에 영혼이 말라
더 이상 지혜 있는 동물로서의 손과 발도 잃어버리고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동족이여,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지평선과 하늘마저 뒤섞인
이 황무지 위에서 너희들은 왜 말라버리지 않는가?
공포로 떨리는 비명을 하루 종일 질러대면서
왜 아직도 낮에는 태양을 삼킬 듯이 천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밤에는 달빛에 맞아 칼자국이 나면서
모래를 그러쥐며 기느냔 말이다.

「우리의 공포는 정당하다.」 그런 말을 하는 너의 얼굴을 내가 보았는데
너에게는 이미 눈동자가 없었다. 푹 파인 구렁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영원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네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네 아버지가 불타서 모래가 된 것을 기억하라.」
그랬더니 너는 웃는 것처럼 울고, 우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내 관이 비어있어도 나는 괜찮다.」

그런데 이 모든 촌극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쪽에 솟은 모래로 된 산이었다. 그 산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미쳐버리게 하는
그 눈동자로 우리들의 추태를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성을 잃어버릴 뻔 했도다! 내가 말하기를
많은 초월적인 것들은 우리 눈에 거의 절대성으로 비쳐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우리의 초라한 존재성 때문에
우리들은 견딜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집을 잃고 햇볕 아래 놓인 달팽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눈동자 없는 나의 동족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서 모래와 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칼을 빼앗아서
나의 한쪽 눈알을 도려낸 뒤 그 눈알을 내 동족의 오른쪽 눈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나는 피 흘리면서
나의 동족은 내 도려내진 눈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먹으면서
그 모래로 된 거대한 산을 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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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진 높이에 대한 노래

 어느 날 남자가 방에서, 그러니까 철학자들의 논문과 몽상가들의 일기가 즐비하게 널려있는 그의 방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의 천장에는 지금까지처럼 벽지와 벌레의 시체가 쌓여있는 형광등이 아닌, 구형의 우주가 불경하고 혼란스러운 혼잣말을 외면서 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단도가 박힌 것처럼 찬탄했다. 그의 방에 쌓인 서적들만큼이나 수가 많은 그의 가면들이 일제히 입을 닫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양을 헤엄치는 한 마리의 위대한 고래처럼 묵직한 진실이―그것을 진리라고 불러도 오만한 일이 아니다!― 그의 영혼 속에서 근엄하고 단조로운 노래 가락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렇듯이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아 졸도했다가 더러운 진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받은 계시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감각이었다. <보라! 이 세상은 거대한 구렁일지어다. 구렁 밑바닥에서 보는 밤하늘에는 신의 핏방울 같은 별들이 수학을 만들고 그들의 완전한 질서를 초월적인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칼을 쥐고 태어난 형제들이어라. 말하건대 초인(Übermensch)은 이 전쟁에서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는 운명에 승리한 자일지어다. 그는 날 적부터 갖고 있던 뾰족한 단도로 독생자의 심장을 찔러버렸다! 모든 우상이 죽어버렸다. 모든 신들의 목은 낫에 베여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버렸다. 그런데 저 불경한 우주 한복판에서 끔찍스러운 웃음소리로 숨넘어갈 듯 웃고 있는 저 의지는 무엇인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천장에서 회전하고 있는 구형의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경외하는 눈동자로 외쳤다: 권태의 왕이여! 그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독이 묻은 손가락으로 내 영혼의 머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 독은 살점을 파먹는 나병균처럼 순식간에 나의 영혼을 점령해버렸다. 그리하여 내 혈관 속에는 그대의 신적인 독액이 돌았다. 덕분에 내 정신은 빼내어진 토끼의 눈알처럼 맑고 투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대의 무시무시한 이름을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책상으로 뛰어가더니 노트를 펼치고 그곳에 비밀스럽게 방금 알아낸 <권태의 왕의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해두자!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이 노트를 보여주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자의 이름이 이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무서운 사실이라서 만일 순한 양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그 양들의 뇌는 수천 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트를 덮고 책상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방금 천사를 죽인 인간의 것처럼 초조함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천사의 피는 이상한 색깔이었다! 그는 갑자기 화가 나서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집어던지더니, 자신의 육체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오, 이 기적이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호르몬의 화학작용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육신이여! 그대는 기적적이도다! 그리고 그대는 저주일지어다. 모든 인간들이 열 개의 손가락과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진실은 인간존재의 진보를 속박해버렸다. 내가 방금 이루어낸 발견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나 또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 나도 열 개의 손가락과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는 필멸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에 독을 묻힌 순간 수천 개의 머리를 갖고 만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메두사처럼 되어버렸다. 보라, 지금 몇 개의 목들이 답답한 육신을 견디지 못하고 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제 내 육신과 영혼은 도무지 짝이 맞지 않는다. 내가 토한 토사물에서는 괴물들이 태어나 기어 다니며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심지어 이제 나는 그러한 사실에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 천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굴러 떨어진 그는 광포한 비명을 지르면서 자신의 방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방문을 닫을 때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회전하는 구체의 우주는 방 안에 갇혀버렸다. 진리를 본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조악한 농담과 같다! 손가락 끝으로 개미를 눌러죽이며 노는 어린아이의 작은 마당처럼, 이 마당은 개미들에게 결코 행운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여, 그대의 다섯 손가락으로 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불경스러운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는 천상을 그대는 그저 경외하고 존경하며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밖에! 그리고 저 권태의 왕에게 어떠한 종류의 믿음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그대는 절대로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더럽고 좁은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하늘은 밤이었다. 그는 쫓겨 다니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는 공을 가지고 노는 한 귀여운 어린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지독한 생각이 남자의 머리를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가고 그는 주먹을 쥐며 웃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도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털을 정리하더니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얘야, 즐거우냐?
 예.
 그렇다면 너에게는 분명히 훌륭한 부모님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니?
 맞아요.
 그리고 네 부모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너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인간이 어떻게 생명을 보존해가는 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네 아동기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가고 언젠가는 일종의 흉터로 네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은총을 받았어요.
 너는 마치 신부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가 너의 갈색 눈동자를 보니, 네가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빤히 보인다. 그리하여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너의 살은 아직 부드럽고 약하며 근육은 실낱같다. 그리고 너의 영혼은 무구하지만 아직 악(惡)에 익숙하지 않아 앞으로 수많은 칼과 창들이 네 영혼에 박힐 것이다.
 그것은 무서워요.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축복을 내리는 기분으로 말해주겠다. 너는 신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너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를 낳은 왕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굉장한 비밀이지만, 너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그 이름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아이의 귀에 대고 그 이름을 속삭였다. 그랬더니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하고 딸꾹질을 하는가 싶더니 그는 들고 있던 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갈색 눈동자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을 막고, 길 저편으로 도망쳐버렸다. 도망쳐버렸다! 자, 달려라, 도망쳐라. 너는 이제 사흘 밤을 앓다가 일어서서 너의 부모에게, 친구에게 가서 그 이름을 말할 것이다. 너의 손톱은 갈퀴가 될 것이고 송곳니는 나이프처럼 날카로워질 것이다. 자, 달려라, 도망쳐라. 나는 이 더러운 골목거리에 서서 네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있다. 나의 목구멍에서는 사악한 웃음이 솟아나오고 눈에서는 내가 이종(異種)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는 웃고 울면서 골목거리에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더니 자신의 혀를 끊어버렸다. 그때 달빛이 찬란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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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

글/시 2013. 10. 28. 04:52 |
유감


아무도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흰색 정제 속에서 내 영혼이
도시 속의 고목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목사들이 뿌려놓은 그들의 빛나는 가루와
점잖게 차려입은 현대의 신들이
나의 목숨에 망치질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남편에게 얻어맞아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든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취약한 뼈를 가진
불행한 여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에 대해서.

태양빛이 모든 것을 노쇠하게 만든다.
어둠 아래에서 보면 그 어떤 가엾은 늙은이들조차도
뿌옇게 번진 광기와 손잡고 생기발랄하게 웃는데
태양빛은 모든 것을 노쇠하게 만든다.
나는 영원이란 단어를 피와 정액으로 예쁘게 꾸미는 일에
실패했다

나무로 만든 집들. 죽은 나무로 만든 집들.
그 사이 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던 얼굴에 구멍이 난 비명 지르는 괴물들을
이제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녹이 슬었고, 매일 밤 가장 값싼 죽음을 찾아다닌다.
그는 질책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나, 나. 언제나 네 문제는 <나>일뿐이지.」
그래, 나도 내 두 팔이 끊어진 것에 대해서 유감이다.
나는 너무 빨리 늙어버렸다. 내가 순수를 갈구하던 시절에는 내게 증오라도 있었다.
달은 더 이상 여덟 개가 아니고 내 눈물은 알코올로,
내 숨결은 니코틴으로 변했고, 내 송곳니는 이제 거꾸로 자란다.

영광스럽게도 예전에 나는 신을 목졸라 죽였었다.
한동안 그 시체를 나의 기념품으로 삼고 방안에 눕혀두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렸다. 나는 나비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모기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저주받은 생물들은
인간이 진화해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섹스가 언제부터 상대의 뼈다귀를 물어뜯는 것이었지?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내가 영원히 받아들이지 못할.
내게는 욕망이 없다. 내가 악인이 아닌 이유는, 악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한 번 보았다. 별들이 호수에서 떠오를 때.
그녀는 이제 눈 밑에 묻혀있다. 나는 그녀의 시체조각을 단 한 점도 가져오지 않았다.
점점 회색빛으로 변색되어가는 내 피부에 칼집을 한 줄씩 낼 때마다
나는 중얼거린다. 「항상 허상만이 나를 사랑해.」 그러나 그것도 착각이었다.
내 머리는 오래 전에 오염된 산업폐기물과 교환되었다.
나는 껍질을 벗을 것이다.

다들 날더러 미쳤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썩어버린 평화주의자일 뿐이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찬장을 뒤진다.
분명 꿈속에서 그곳에 권총을 숨겨두었었다.
단 한 발의 총알과 함께.
다들 무언가를 찾아서 대낮의 거리를 활보하는데
틀림없이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다.
빙하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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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바람에
맑고 청량한 냄새가
섞여 불어온다.

이 추운 밤
달은 마치 쨍쨍하게 얼어붙은
유리 같아서
당장이라도 금이 갈 것 같다.

내 피 속에는
잠을 청하는 혈거동물의 체액이
돌기 시작하고
나는 전보다 하얗게 질린
몇 개의 무지개를 보았다.

밤은 더욱 깨끗해졌다
마침내 찾아온 시베리아의 바람을
나는 은근한 미소와
영혼의 고요한 환희로
환영하고 있다.

저 북쪽 나라에서
계절의 체취를 먹고 사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아름다움에의 암시를 눈동자에 품은
손님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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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으며 부르는 노래

글/시 2013. 8. 24. 23:51 |
웃으며 부르는 노래


이젠 슬프지 않아요
나는 울지도 않고
내 귓가에는
인생을 찬양하는 노래들만이 머물죠

나는 거리에 나가
일터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웃으며 살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아직도 내 눈앞에 어른거리나요
왜 아직도
당신 생각하면 가슴에 못이 박힌 듯
아픈가요

나는 이제
살아갈 힘이 있어요
나는 인연에 따라
당신을 만났고
희망을 찾은 듯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저 먼 곳으로 갔죠
저 깜깜하고 좁은 어둠 속으로
내가 찾을 수 없는
추운 나라로

가끔씩 내 심장 속의 병균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저 나라로 가자고
저 추운 나라로 가자고

늪 위에 쌓은 탑인 듯
나의 기반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깊은 바닥으로 빠져가고
당신의 환상을 보며
녹슬어 가고

내 가슴엔 위장된 슬픔들만이 남았지만
아직도 난 기억해요
당신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숭배했던
그 밝은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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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글/시 2013. 8. 24. 00:13 |
아름다운 것


담배꽁초 투성이
더러운 흙더미에서도
풀잎은 자란다.

하늘로 눈을 향하면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달은 빛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지옥 속에서도
당신을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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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하늘

글/시 2013. 8. 20. 23:26 |
달 하늘


달을 잊고 살 때
거리에는 부랑자들의 진액과
버려진 오물들
그 사이에서 솟은
가시덩굴의 이파리들이
뱀처럼 내 창문을 휘감아
수 억 년 전부터 사람의 가슴을 비추던
그 빛살과
감동의 줄기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본 달은
원시의 샘처럼 맑고
너무도 가슴 떨려서
어둠 속의 그 고고함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공허의 눈망울 같아서
앞으로 다가올
나의 가차 없는 미래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쏟아져 내리는
불공평의 빗줄기 같은 시간 속에서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을 때 즈음이면
영혼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그때의 서글프고 아름답던 시간들을 외친다.

이제 당신은 달 위에
우주의 이슬을 마시고 자라는 나무로 지은 집을 짓고
별빛 나비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항상 겨울일 그 나라를 생각하며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보름달을 눈에 담고
너무 아름다워서 슬펐던
녹아내리기 직전의 눈송이 같던 당신의 영혼을
울지도 않고서 곱씹고 있다.
Posted by Lim_
:

영혼의 계절

글/시 2013. 6. 7. 22:19 |
영혼의 계절


한여름 밤공기
고적한 냄새를
맡아본 일이
있는가

바람도 불지 않는
자줏빛 밤하늘
그곳에 보이는
자비한 눈동자

그리고 지상엔
슬픔의 색으로
빛나는 가로등
물방울의 냄새

저기 사람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더욱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더러운 도시의
생명력 넘치는
그림자 저편
배 깔고 누운
공수병 걸린 눈빛

나는 추억한다
잿빛 세계가
찬란한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한 차례의 지독한 절망이 지나간 후
그 아름다움 위에
비애가 겹쳐지던
그 순간을.
Posted by Lim_
:

미궁의 안과 밖에서

글/시 2013. 5. 20. 13:27 |
미궁의 안과 밖에서


나는 고통의 숲으로 만들어진
미궁 속에서
어떤 신비로운 웃는 낯을 만났습니다.
하늘은 밤이었습니다
하얀 별들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지상은 은빛으로 빛났습니다.

나는 그 웃는 낯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태초의 인간이여! 원시의 감정이여!」
나의 것이 아닌 행복이 장난치듯이 시야 주변을 뛰놀았습니다.
이 미궁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을 터인데!
그저 적막 밖에, 그저 절망 밖에
그저 혼돈 밖에.

그러나 북쪽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섬광이
나의 끔찍한 미궁에
<인간>을 데려다놓았습니다.

아직도 내게는
깊이 파인 흉터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된
내 영혼의 조각들.

나는 구멍 뚫린 심장 속에서 밖을 내다보았는데
거기에는 빛도 암흑도 아닌
어떤 지고지순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으렵니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for A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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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

글/시 2013. 5. 14. 04:59 |
노스탤지어


불면의 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고
그것들이 눈을 뜨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나는
어딘가로 나가버렸다.
동쪽 하늘 어딘가가 파랗게 변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죽음이여, 왜 나를 두고 가버렸는가?
그대는 왜 이 비참한 아침에 나를 내버려두고
그저 가버렸는가.

그리하여 나는 또 신음을 흘리며 혈액을 펌프질하는
나의 새까맣고 텅 빈 심장을 움켜쥐고서
아침을 저주하면서, 또 내일을 저주하면서
모든 <깨어나는 것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내 머리맡에서 떠나버린
죽음의 이름을 되뇌며
되뇌며
내 영혼의 창을
산산이 부숴버린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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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금지

글/시 2013. 5. 14. 02:21 |
진입금지


가끔 너무 왜소하다
새벽 두 시 경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은근히 비추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골목 구석에서
혹은 술에 취해 계단도 내려가지 못하는
노인의 발걸음을 바라볼 때
더러는 끔찍하도록 새까만 하늘
별빛 하나 없는 암흑 속을
초점도 잃고 바라볼 때
마침내는 아무도 찾지 않는 더러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내 눈물샘에 슬픔 대신 메마른 감정만이
바퀴벌레와 쥐떼가 까맣게 뒤덮은
적막한 절망만이 차오를 때 말이다.

실상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른다.
길 가는 사람들은 실체가 사라져
태양빛을 굴절시키는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말을 걸 수도 없다.

내 이성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울지도 못하면서 지껄였다. 「종말을!」
드높이 치솟은 마천루 위에서 뛰어내리는
날개가 잘린 비둘기의 심정으로.

누가 위대하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버려진 것들만 있을 뿐.
손에 잡힌 금이 간 시멘트 조각이
나의 시대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십자가를 부서트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불태우기도 했다.

나! 나! <나>!
버러지 같은 것! 하등 이름조차 없는 것!
찬미하라! 찬미하라!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과묵한 대지의, 늙은 거북이 같은 움직임을!
나는 죽은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거기서는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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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사람

글/시 2013. 4. 26. 02:47 |
웃는 사람


빛나는 것은 아름답다
건강한 것의 찬란함을
고귀함을
그들은, 예를 들자면
아버지의 손을 잡은 작은 소녀는
친구들과 수다하며 길을 걷는 소년은
늙음에 기대어 천천히 나무가 되어가는
고통과 찬미로 쓴 시가 사랑이 된 노부부는
스스로 빛나는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나도 빛을 보았다. 수없이 보았다
그것은 저편에서 빛나고 있었고
달도 태양도 아닌 신비로운 빛살로
남국의 환상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끔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했다―고립이여!
(한때 나였던 그는)이따금 외쳤다. 살려달라고!
「어머니, 어머니. 내 안의 괴물이 나를 잡아먹으려 해요.」 그는 소리 질렀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은 없었다.

너는 누구를 탓하려고 하느냐? 이것은 필연.
내가 빛을 본 것은 내가 캄캄한 밤에만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게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로, 세계는
자신의 광증을 남김없이 나에게 들이부었다
나는 술독에 빠진 것처럼 허파까지 끔찍한 술로 가득 찼다.
비명! 그의 눈동자는 내 치아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설명해주시오.」 아직 의구심이 남아있는 그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잔치라고 답했다.

그는 그의 손에 칼과 총을 쥐어주었다. 「돌격!」 위대함이 외쳤다.
나는 흉기를 들고 혼돈 사이로 달려갔다. 내 몸에는 지독한 상처들이 새겨졌지만
나는 환희에 차서 아픔을 몰랐다―그것은 괴물적이었다.
칼부림이 흥청거리는 잔치 속에서 나는 내가 진실을 깨달았노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환희의 뒷면은 미련
고독, 고통, 슬픔, 비탄, 회의.
그러나 환희의 아가리인 광기가 그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라고 단말마가 쏟아져 나왔다.
우둔한 소리! 너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열광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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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글/시 2013. 3. 14. 22:43 |
나의 친구


나는 바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나무와 풀들에게 내 마음을 준 채
태양이 빛나는 날에도 나는
두려움 없이 사물들의 원초적인 노래를 들으며
아무도 볼 수 없는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길가에 서있는 환영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래하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나 나의 마음을 기쁘게 만듭니까
그는 빛의 목소리처럼 투명한 말로
내 말에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 밑바닥
모든 감정이 빨려 들어가는 깊은 늪에서 태어났고
이제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이 꿈꿔왔던 것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세요
그들은 모두 표정이 없고
얼굴의 윤곽조차 사라져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합니다
나는 내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말없는 사람들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세상은 빛살이 들어오는 새장처럼
잠금 쇠가 걸린 채로 자유를 품고 있었고
가끔 나무들이 속삭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들은 찌푸릴 눈썹도 없고
조소하며 찌그러트릴 입술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오네트처럼 하늘에 걸린 실에 따라 움직이며
손짓으로 우리에게 인사해보입니다
나는 나의 환영과 함께 걸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눈을 뜨지 않아도 되겠군요
더 이상 세상에는 볼 것도 없고
고로 우리가 더는 눈물 흘릴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는 내게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숲으로 가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태양의 찬란함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구름들을 찬미했습니다
나뭇잎은 우리에게 밝은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산들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나는 밤이 되자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걸어
나의 아늑하고 깊숙한 다락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제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내 곁에 환영이 함께 합니다
나는 인생의 달콤함을 입안에 한껏 베어 문 기분이고
이제 내게 누구 못지않은 친구가 생겼으니
언젠가 들었던 인생을 예찬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빛 아래서 내일을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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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글/시 2013. 1. 30. 03:23 |
계절


한여름 해변에 내리쬐는 황금의 땀방울 같은 태양빛을
우리는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어
내겐 아직도 작은 여름이 있지
녹슬고 망가져서 눈이 내리는
작은 여름이 피곤한 눈동자로
책상 위에 누워서 봄을 기다리고 있지

겨울은 거의 다 갔지만
난 괜찮을 거야
한동안 나는 겨울을 추억하며 살 거야
얼어붙은 바람이 내 안의 환영들을 침묵시키던 계절을
나는 흔들거리는 의자 위에서 몇 번이고 떠올릴 거야

봄이 오면 우리에게는 생명의 수액이 돌아
사랑을 예찬하며 교미의 노래를 부르겠지
왜냐하면 나의 뇌수는 싱싱한 풀과 같아서
하늘에 뿌리를 박고 비를 마시며 살거든

그러나 언젠가 여름이 올 거야
어쩌면 거센 폭풍과 비바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리는 더위를 먹어 제정신이 아닌 대기 속에서
알몸으로 비를 맞고 사나운 야수의 울음소리로 짖을 거야
왜냐하면 짐승들은 그래야하는 법이라고
우리의 어머니가 말했었으니까

활기가 도는 환영들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서
춤추고 땅 위를 빙글빙글 돌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헛갈리게 만들 거야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탱고를 추거나
혹은 그들의 목을 하나씩 분질러
내가 아직 완전히 돌아버리지는 않았다고 으름장을 놓을 테지

우리는 계절의 싹을 먹으며 살아
가끔은 시들고 얼어버린 싹을
왜냐하면 우리의 피는 달의 인력에 닿아 출렁거리고
우리의 영혼은 죽은 자들이 밟고 다니는 대기를 숨 쉬거든

가을의 지평선 끝자락에는 늘 그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지
그는 우리에게 차고 마르는 생명을 주었고
짐승들과 함께 놀라고 가르쳤어

다시 겨울이 올 거야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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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꺼져 들어가는 촛불처럼 삶을 방관한다


내 혀 위에서는 붉은색 지네와 낮게 나는 날벌레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다
나는 의자 위에 앉아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내 얼굴을 보여줬던 것이
언제인지 되짚어보며
경동맥에 관을 꽂고 천천히 혈액을 뽑아내고 있다
내가 그들과 같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사고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내 몸에 난 흉터들을 하나씩 더듬어본다
내 방 서랍에는 날이 선 단도가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다
그것은 가끔씩 피와 살맛을 본다. 그러면 나는 벌처럼 노래를 부른다
5월의 햇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정도 늘 겨울이었다
랄라! 나 자신에게 유쾌하다고 주문을 건다
왜냐하면 나는 유쾌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랬다
나는 단 한 번도 절망한 적이 없다. 절망은 착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사실 기쁨이다. 기쁨의 얼굴을 조금만 화장시키면 절망의 표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정들의 화장을 지우는 일에 요 몇 년간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내게 잠을 잘 공간을 마련해주고
그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가 없었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랄라.
나는 주로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듯이 내 기억들을 본다
하지만 그리 즐거운 작업은 아니다. 나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망각으로 내 기억을 덧칠하는 일로 작업의 내용을 바꾼다
내게 가족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혈육은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소모적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유쾌한 사람이기 때문에 슬픈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자리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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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사랑할 수 없다


늘어진 내 그림자는 목이 잘렸다
빛은 언제나 반대편에서 비추고
나는 아직도 세계의 윤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술에 취했을 때만이 살아있는 시간이다
흔들리는 세계가 내게서 생명의 통각을 앗아가고
추운 밤거리 골목 구석에서 나는
얼음 위에 주저앉아 지나가는 불빛들의 개수를 센다
자주 이해할 수 없다
눈이 빛나는 집짐승들의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흐르는 초록색 파도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깊은 늪은 눈꺼풀을 반쯤 감고
거대한 구름에 뒤덮인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며
해가 뜨는 시간을 셈해본다

그리고 나는 고통과 욕지기 속에서
다시는 꿈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고
내 안의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태아의 이름으로 되뇌어본다
그러나 약자여, 나는 너의 가련함에서
우주의 어둠과도 같은 공허를 본다
나의 아킬레스건에는 깊은 상처가 있다
내 발목은 닭의 벼슬처럼 건들거리며
근육을 잃었다
절망은 유쾌한 것이라고 설득하곤 한다
나는 태양이 어느 산자락에서 뜰지 알지 못한다
빛은 아름답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은 여전히 춥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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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환자의 꿈

글/시 2013. 1. 1. 06:32 |
거식증 환자의 꿈


몇 년 전, 내가 혈거생활 끝에 어느 날 밤
무거운 중유와도 같은 마음으로 기어 나왔을 때에도
거리는 은빛 가루에 가볍게 쌓여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피와 화약 냄새가 나는
머리에 구멍이 난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새카만 하늘 아래
꿈과 현실 사이에 흩뿌려진 조각들을 찾으며
술에 취한 행복한 폐인의 걸음걸이로 거리를 걸었다
얼마 쯤 지나자 달들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총 여덟 개의 달을 발견했고
그 빛나는 은반들은 서너 개의 무지개에 둘러싸여
내 정신 깊은 곳에 고고한 기쁨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뜬 눈으로
비록 약물과 질병에 가려진 눈일지라도
거울 속에서 연하게 빛나던 나의 갈색 눈동자로
내일도 무지개를 볼 수 있으리라고
또 맑은 달들을, 날 선 칼날과도 같은 추위 속에서
슬플 정도로 깨끗하게 빛나는 달들을 볼 수 있으리라고
총 여덟 개의 내 정신의 거울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내 마음을 타이르며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입술로 웃어보았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행복한 폐인은 이제 단 하나의 달 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그 날 밤하늘에서 침묵하며 내려다보던
여덟 개의 흰색 눈동자를 몇 번이고 그리고 있다
어떤 소시민들의 집에서는 가엾은 외침소리가 들려와
그의 가슴에 새겨진 깊은 상처들을 다시금 자극하고
그 통각으로 말미암아 그가 한때 울었던 일을
그의 눈물이 흘렀던 눈물자국들을 흔들어 깨우려고 하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자유였다, 천공 위의 위대한 손이
그의 영혼의 목을 비틀어버린 이후부터
그는 한없이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그분은 말이 없으니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가끔 꿈을 꾸며
나 자신과 몸을 섞고 소금의 맛이 나는 입가로 슬며시 웃을 뿐.
눈이 쌓인 바다가 보고 싶다.
하얀 불길로 불타오르는 산맥이 보고 싶다.
영원히 저물지 않는 달에게 손을 뻗어본다.
나는 여전히 혈거동물이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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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의 노래

글/시 2012. 12. 25. 01:48 |
지하에서의 노래


나는 눈 오는 날의 개처럼 방 안에서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작은 동굴 속을 뒹구네
내 손에는 작은 그녀가 쥐여있지
어제 내가 잘라낸 그녀의 음부가
나는 기뻐하며 그 살점에게 말을 거네
당신의 이해자는 나뿐이요
사랑하는 이도 나 뿐이요

내가 걸어온 발자국마다 작은 움집이 생겼네
그곳에는 오래된 원시인들이
하얀 불꽃을 켜고 몰토 아다지오의 박자로
춤을 추고 내 이름을 노래하네
그대들은 피그말리온의 비극을 기억하는가?
나는 생명 있는 것으로부터 생명을 앗아오는 방법을
요 몇 년 사이에 고독 속에서 깨달았다

아주 캄캄한 천장 구석에 내 얼굴이 웃고 있네
나도 마주보며 즐거워서 웃고 있다네
오늘은 기쁜 날이요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북치고 노래하며 새까만 눈물을 흘려라
그 눈물 속에는 한 때 어리고 앙상했던
내 몸이
내 갈비뼈의 흔적들이 남김없이 들어있으니

내게는 도려낸 살점이 있소 그것은 나의
나만의 벗이며 나만의 반려자요
내내 혼자였지, 눈 내리는 무지개 속에서
수십 개의 무지개 속에서 나는 꿈만 꾸었지
피안의 저편에는 누군가가 있을까
거기에는 잡아줄 손도 있고 입 맞출 입술도 있을까
하지만 나는 혼자 서지 못했는걸
나는 끝내 그대를 강간하지도 못했는걸
다만 내게는 그녀의 음부가 있네
내 손에 쥐여진 신선한 고기가 있네

눈을 향하는 곳마다 성스런 빛이 비추고 수 없이 많은 무지개가
내 눈동자 속에 깃들어 신의 꿈을 꾸게 하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필요 없다오, 내게는 이것이 있으니
내게는 고기가 있고 피와 근육이 있으니
자비가 있다면 가죽 하나만 덮어주오
자비가 없다면 그것으로도 좋소.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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